호크마 주석, 창세기 50장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ESC닫기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50:1절
요셉이...울며 - 요셉은 자기가 공경하였고 사랑하였던 아버지가 죽는 것을 보고 애통의 눈물을 흘렸다. 그는 애굽의 총리로서 의지적인 면모(47:13-26)를 보이기도 했으나, 근본적으로 풍부한 정서적 인간성을 가지고 있었다. 요셉은 헤어졌던 그의 형제들을 다시 만났을 때에도 방성 대곡하며 운 적이 있다(45:2).

===50:2절
향 재료로 아비의 몸에 넣게 하매 - 의술이 발달하였던 고대 애굽(렘 46:11)에서 귀족이 죽었을 때 행해졌던 관습으로 시신을 미이라로 만드는 것을 가리킨다. 성경에서 미이라로 시체가 보존된 사람은 야곱과 요셉 뿐이다(26절).

====50:3절
사십 일이 걸렸으니...이 날수가 걸림이며 - 고대 애굽에서는 미이라를 만드는 기술이 고도로 발달하였으며 하나의 미이라를 만드는 데는 여러 과정의 세밀한 기술이 요구되었다. 역사가 헤로도투스(Herodotus)는 미이라를 만드는 방법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증언하였다. 먼저 죽은 사람의 콧구멍을 통하여 뇌를 긁어내고 방부제인 몰약과 향을 채운다. 또한 배를 째고 내장을 긁어낸 후 그 빈자리에 향재료를 채운 다음 갈라진 곳을 꿰매고 시신을 천연 탄산 소다로 씻는다. 그 후 온 몸에 고무 진액을 바른 다음 세마포로 싸서 관 속에 넣어서 나일 강가에 버린다. 이것은 이집트인들이 배를 대식(大食)과 무절제한 음주를 하는 범죄의 장소로 취급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모든 절차를 마치는 데는 많은 시간이 소요되었다. 따라서 야곱의 시신을 미이라로 만드는 데 사십일이 걸렸다는 것은 충분히 가능한 일이며, 당시 요셉이 차지한 애굽에서의 비중을 보아서도 자연스런 일이다. 칠십 일 동안 그를 위하여 곡하였더라 - 고대 애굽에서는 방부 기술이 발달하였기 때문에 시체를 오래 보관할 수 있었다.야곱은 요셉의 부친이므로 애굽 사회에서 귀족대우를 받았고 따라서 그의 장례도 4일 동안 매우 성대하게 치루어졌다.

===50:4절
요셉이...가로되 - 요셉이 직접 바로에게 나가서 말하지 않고 다른 사람을 통하여 자신의 입장을 전달하려 한 이유는 상중(喪中)이었으므로 바로 앞에 나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Aalders). 애굽의 관습에 의하면 누구든 왕앞에 나갈 때에는 수염을 깍아야 하는데 요섭은 애곡 기간 중이라서 그렇게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50:5절
우리 아버지가 나로 맹세하게 하여 - 요셉은 야곱이 죽기 전에 개인적으로 자기에게 부탁하여 맹세시킨 사실을 이제 성실히 지키려 하고 있다(47:29). 내가 파서 둔 묘실 - 야곱은 아브라함이 헷 사람 에브론에게서 산 막벧라굴을 언급하면서(23:20)그것을 자기가 팠다고 하였다. 이것은 야곱이 막벧라에 있는 그 굴을 확장하였거나 자기의 묘실을 미리 준비하여 놓았음을 암시하는 표현으로 볼 수 있다. 나로 올라가서 아버지를 장사하게 하소서 - 요셉은 애굽의 총리로서 중요한 직책을 갖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가 자리를 비우기 위해서는 왕의 특별한 승인이 필요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야곱의 장례 행렬은 그 규모가 컸으며 장지가 애굽의 국경 밖이었기 때문에 요셉은 스스로 왕의 인허를 원했다고 볼 수도 있다.

===50:6절
바로가 가로되...장사하라 - 바로는 요셉의 요청을 들어주었을 뿐만 아니라 그의 답변도 매우 정중했다. 이것은 요셉이 바로에게 매우 중요한 인물로서 그의 깊은 존경과 신뢰를 받고 있었음을 보여 주는 상황 증거이다.

===50:7,8,9절
야곱의 장례 규모에 대하여 나와 있다. 장례 의식에는 애굽의 중요 인물들이 대거참여했을 뿐만 아니라 군대까지 동원된 일종의 국장이었다. 이것도 애굽에서 요셉 의지와 그에 대한 왕의 신뢰도가 얼마나 컸는가를 보여준다.

===50:10절
요단강 건너편 아닷 타작 마당 - 정확한 위치를 추정하기 어렵다. 왜냐하면 학자에따라 '요단강 건너편'을 요단강 서쪽으로 보기도 하고(Drusius, Kalisch)요단강 동쪽으로 보기도 하기 때문이다(Keil, Murphy). 만일 전자를 취한다면 야곱의 장례 행렬은 애굽에서 불레셋지역을 거쳐 가나안 땅으로 곧장 행진한 셈이 된다. 그리고 후자를 취한다면 훗날 이스라엘이 출애굽했던 것과 같이 광야길을 따라 요단 동편에 이르는 셈이 된다(신 2:1-3:17). 한편 여기서 '타작 마당'이란 곡식을 떨기 위하여 곡식 밭 안, 또는 바람이 잘 통하는 자리를 정하여 직경 7-12m 정도 넓이로 둥글게 다져놓은 탄탄한 마당을 가리킨다. 팔레스틴의 거민들은 이곳에 곡식단을 무릎에 찰 만큼 펼쳐 놓고 가축이 밟도록 하여 떠는 것이 보통이었다. 칠 동안 애곡하였더니 - 이 애곡은 죽은 자를 장례하기 직전에 갖는 특별한 행사였던 것 갈다. 애굽의 다신교 신앙은 특히 정교한 장례 절차와 밀접하게 연결된다.

====50:11절
아벧미스라임 - '애굽인의 목초지'란 뜻이다. 즉 여기서 '아벧'( )은 '아벧 그라밈'(삿 11:33), '아벧마임'(대하 16:4), '마벧므홀라'(삿 7:22)와 같은 이름에 붙어 사용되었듯이 '평원'이나 '목초지'를 가리킨다. 이는 '슬픔'을 뜻하는 '에벧'( )대신 잘못 붙여진 단어임에 틀림없다.

====50:12,13절
부명(父命)을 좇아 행하여 - 야곱이 죽기 전에 부탁한 일들이 그의 아들들에의하여 실행되어졌음을 가리킨다(47:29,30; 49:29). 그런데 야곱과 그의 가족들을 따랐던 애굽인들이 이 장례식의 마지막 절차에 있어서 동행하지 않은 까닭은 요셉이 가족들만의 시간을 갖고자 특별히 부탁했기 때문일 것이다.

====50:14절
호상군 - 문자적인 뜻은 '장례 행렬을 호위한 군대'라는 뜻이나 여기서는 야곱의 장례 행렬에 참가헹던 야곱 가족 이외의 모든 사람들을 가리킨다.

===50:15절
요셉이 혹시 우리를 미워하여 - 여기서 우리는 죄인의 일반적인 심리를 알 수 있다. 죄의 기억은 사람의 머리를 떠나지 않고 불안하게 만든다. 그러나 여기서 주목할 것은 요셉의 형제들이 부당한 피해를 두려워한 것이 아니라 당연한 보복을 두려워하고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우리는 자기의 죄를 알고 있는 형제들의 바른 행동을 볼 수 있다. 물론 하나님을 믿고 요셉의 자비를 획신하지 못한 것은 잘못이지만 그들이 자신의 잘못을 솔직히 시인하고 있는 점은 높이 살 만하다.

===50:16절
요셉에게 말을 전하여 가로되 - 우려워 고민하던 형제들은 자신들 가운데 한 사람을 요셉에게 보내어 그들의 뜻을 전달케 하였다. 즉 그들은 자신들이 일전에 지은 죄를 인하여 행여 어떠한 보복을 당하지 않을까 염려하여 미리 적극적인 행동을 취한 것이다. 당신의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명하여 이르시기를 - 요셉의 형제들은 아버지 야곱의 유언을 근거로 하여 용서를 빌고 있다. 유언이란 대개 어떠한 상황하에서도 이루어지는 것이 관례였으니 야곱의 유언은 형제들에게 있어서 큰 방패막이가 될 수 있었을 것이다.

===50:17절
요셉에게 말을 전하여 가로되 - 우려워 고민하던 형제들은 자신들 가운데 한 사람을 요셉에게 보내어 그들의 뜻을 전달케 하였다. 즉 그들은 자신들이 일전에 지은 죄를 인하여 행여 어떠한 보복을 당하지 않을까 염려하여 미리 적극적인 행동을 취한 것이다. 당신의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명하여 이르시기를 - 요셉의 형제들은 아버지 야곱의 유언을 근거로 하여 용서를 빌고 있다. 유언이란 대개 어떠한 상황하에서도 이루어지는 것이 관례였으니 야곱의 유언은 형제들에게 있어서 큰 방패막이가 될 수 있었을 것이다.

===50:17절
이제 바라건대 그 허물과 죄를 용서하라 - 성경에는 야곱이 죽기 전에 이러한 말을 하였다는 기록이 없다. 그러나 야곱이 죽기 전에 형제간의 화목을 부탁하였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지금까지 나타난 형들의 태도로 보아(44장) 그들이 거짓말을 하면서까지 요셉에게 죄의 용서를 구하였으리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당신의 아버지의 하나님의 종들의 죄를 이제 용서하소서 - 여기서 '하나님의 종들'이란 말은 요셉의 형들 역시 요셉과 마찬가지로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섬기고 예배하는 자들이라는 뜻으로 그들이 요셉에게 용서를 비는 탄원의 근거이다. 요셉이 그 말을 들을 때에 울었더라 - 요셉은 여러 번 운 적이 있다(42:24;43:30;45:14,15;46:29:50:1). 그는 의지가 강하고 매우 이성적인 사람이었지만, 동시에 진실된 눈물을 흘릴 줄 아는 인간미가 있는 사람이었다. 아마 여기서는 자신이 이미 형제들을 용서하였음에도 불구하고(45 4-8) 자신의 진심이 형들에게 전달되기 못한 점을 안타까이 여겨 슬피 울었을 것이다.

====50:19절
내가 히나님을 대신하리이까 - 라헬이 야곱에게 아들을 낳지 못함을 보고 '나로 자식을 낳게 하라 그렇지 않으면 죽겠노라'했을때 야곱은 '그대로 성태치 못하게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30:2)라고 하면서 이 말을 한 적이 있다. 즉 이 말은 모는 것이 하나님의 주권대로 되어지기 때문에 인간이 이 주권대신 행사할 수 없음을 뜻한다. 공동 번역은 본문을 '내가 하나님 대신 벌이라도 내릴 듯 싶습니까?'라고 번역하였다. 바울이 로마서 12:19에서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고 하였듯이 우리는 우리가 원수를 갚으려고 함으로써 하나님의 주권을 침범하는 잘못을 범해서는 안 된다.

===50:20절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 요셉의 위대한 신앙을 읽을 수 있는 말이다. 바울은 로마서 8:28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도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고 하였다. 오늘과 같이( , 케 욤 헤제) - 원문대로 해석하면 '이 날과 같이'이다. 의역하면 '현재와 같이' 혹은 '오늘날처럼'이라고 할 수 있다.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 7년 동안의 흉년 가운데서도 요셉으로 말미암아 모두 아사(餓死)하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었던 사실을 가리킨다. 이와 동일한 내용의 말이 45:5에도 기록되어 있다.

===50:21절
두려워 마소서 - 19절에서 언급되었던 이 말이 다시 한번 강조되고 있다. 요셉의 형제들이 갖고 있던 심한 두려움과 또 이 두려움을 갖지 않도록 하려는 요셉의강한 노력을 읽을 수 있다. 내가...기르리이다 - 요셉은 형제들의 죄를 용서할 뿐만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들과 그들의 자녀들까지 양육하겠다는 자비를 보여 준다. 이 말은 또한 요셉이 형제들을 애굽에 초청할 때 약속하였던 언약의 반복이기도 하다(45:11,18,19). 간곡한( , 레브) - 본래는 '심장'(렘 10:12)을 가리키나 여기서는 심장,즉 마음 깊이 스며드는 감동 깊고 설득력 있는 말을 의미한다.

===50:22,23절
요셉이...일백 십세를 살며... - 요셉의 장수에 대한 기록으로 그가 생전에 많은 후손을 가짐으로써 야곱의 축복을 성취하였음을 보여 준다(49:22-26). 그러나 이는 일부분이 성취된 것일 뿐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 이삭 그리고 야곱을 거쳐 주어진 자손의 축복(22:17,18; 26:4; 28:14)은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무수한 사람들이 영적 이스라엘의 반열에 들므로 온전히 성취되고 있다(롬 10:11-13). 요셉의 슬하에서 양육되었더라 - 혹자는 이를 손자들이 태어나자 요셉이 일정한 의식을 거쳐 양자로 삼은 것을 가리키는 양 이해하기도 하나 온당치 않다(Kalisch). 어디까지나 이는 요셉이 생후 일정 기간이 지난 손자들을 무릎에 태워 재롱피우는 것을 보며 귀여워한 것을 가리킬 뿐이다(Aalders).

====50:24절
나는 죽으나 하나님이 너희를 권고하시고 - '권고'에 해당하는 '파카드'( )는 '방문하다'라는 뜻이 있다. 즉 요셉은, 자신은 비록 죽어도 하나님은 여전히살아계셔서 마치 자신이 그리하였던 것처럼 일일이 형제들을 찾아보시며 보살펴 주실것임을 확신한 것이다(47:11,12).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 선민(選民)을 대표하여 삼위 일체 되신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이스라엘의 3대 족장들이다.이때로부터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들과 맺은하나님의 언약에 근거하여 긍휼을 호소했으며(출 32:13;신 9:27;왕하 18:36;대상29:18)또한 하나님은 이들과 맺은 언약 때문에 그 백성들을 보호하셨다( 26:42;신9:5;왕하 13:23). 왜냐하면 이들이 맺은 언악의 핵(核)은 '그리스도'였기 때문이다(12:3;22:17).

=====50:25절
여기서 내 해골을 메고 올라가겠다 하라 - 요셉이 야곱처럼(49:29-33) 자신이 죽자 마자 유해를 가나안 땅에 안장하라고 지시하지는 않았지만 훗날 출애굽시 자신의 유골을 가나안 땅으로 이장토록 당부한 것은 그의 깊은 신앙심을 잘 보여 준다(히 11:22). 즉 그는 하나님의 약속대로 훗날 그의 후손들이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돌아가 그곳을 기업으로 차지하게 될 것임을 조금도 의심치 않은 것이다(15:13-21).

===50:26절
몸에 향 재료를 넣고 - 요셉의 시신(屍身)을 미이라로 만든 것을 가리킨다.
입관 하였더라 - 요셉의 장례 행사는 야곱의 장례행사에 관한 기록과는 달리 매우 간단히 언급되어 있다. 그러나 그는 훌륭한 업적을 남긴 애굽의 총리였으므로 성대한 장례 예식이 있었을 것이다. 이렇게 미이라 관에 안치된 유해는 약 400년 후 가나안 땅 세겜에 완전히 묻히게 된다(수 24:32).

 

 

 

 본장은 야곱이 그의 유언대로 장사된데 이어 요셉도 죽으므로 아브라함,이삭,야곱을 거쳐 요셉에게까지 이르른 이스라엘의 족장 시대가 그 막을 고하는 장이다. 이러한 본문은 크게 3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먼저 1-14절은 요셉과 그 형제들이 아비 야곱을 장사지낸 데 대한 기사이다. 그리고 15-21절은 야곱 사후 행여 어떠한 보복을 당하지나 않을까 우려하는 형들을 요셉이 위로하는 장면이다. 마지막으로 22-26절은 요셉이 죽어 애굽에 장사된 데 대한 기사이다.
 이런 점에서 빛과 생명의 잉태라는 희망찬 사건으로 시작된 본서의 역사는 조종(弔鐘)소리만이 울려 퍼지는 슬픈 죽음의 사건으로 끝을 맺고 있다. 그러나 정작 야곱의 죽음은 이스라엘 민족을 탄생시키는 계기가 되었고, 또한 요셉의 죽음은 이스라엘 민족의 출애굽 사건을 태동시킨 발판이 되었다. 따라서 야곱과 요셉의 죽음은 이스라엘 역사에 새로운 구원의 소망을 가져다 주었다는 큰 의의를 지닌다.
 이와 마찬가지로 오늘날 모든 그리스도인의 죽음은 더 나은 생명을 부여받는 일종의 축복이다. 실로 하나님을 떠나 현실 세계에 안주한 자에게는 죽음이 모든 삶의 종말일 수밖에 없지만, 하나님 안에 있는 신앙인에게 있어 죽음이란 더 큰 삶을 위한 시작이요, 새로운 탄생인 것이다(고후 5:1 ;딤후 4:6-8).

   1. 야곱의 장례식(50:1-14)
 본문은 비록 차자로 태어났지만 장자의 명분을 쟁취하기 위하여 험악한 삶을 살다 이방땅 애굽에서 죽은 야곱이 그의 아들들에 의해 본향 가나안으로 운구(運柩)돼 선영에 장사되는 부분이다. 그중 1-3절은 야곱의 죽음을 당하여 요셉이 40일제를 지내는 장면과 애굽 사람들이 70일간을 애곡하는 장면이다. 그리고 4-9절은 바로의 허락을 받은 요셉이 형제들과 함께 야곱의 시신을 메고 가나안 땅을 향해 올라가는 장면이다. 마지막으로 10-14절은 본향에 당도한 요셉과 형제들이 야곱을 막벧라 굴에 장사지낸 후 애굽으로 되돌아오는 장면이다.
 이처럼 야곱이 결국 가나안 땅으로 귀향한 것은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이다(28:15 ;46:4). 또한 이 사건은 400여년 후에 있을 이스라엘 출애굽 사건의 예표이다(출 12:40,41). 그런점에서 비록 야곱은 죽었으나 가나안 땅에 대한 야곱의 신앙은 살아서 길이 이스라엘 민족 공동체에 전수되었다고 볼 수 있다.

 * 숫자로 나타난 야곱 장례식의 완벽성. 인간의 언어는 한계성이 있어서 무엇이 '완벽하다','완전하다','절대적이다'라고 표현하더라도 어디엔가 부족한 면이 있어 보인다. 그렇지만 성경은 여러 상징적 의미들을 숫자로 나타냄에 있어, 특히 7과 10을 '완전수'로 삼았다. 그러므로 7 10은 결국 그르칠 수 없는 완벽함을 뜻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본문은 야곱의 장례 때 애굽인들이 70일간 곡(哭)을 했음을 보여 준다(10절). 또한 야곱의 시신을 미이라(Mirra)로 만드는 데 40일이라는 기간이 걸렸음을 보여 주는데(3절), 40은 노아의 홍수 기간(7:17), 모세가 시내 산에 머물던 기간(출 24:18), 예수의 광야 연단 기간(눅 4:1,2)에서 알 수 있듯이 하나님의 섭리가 충분히 펼쳐지는 기간을 뜻한다. 이처럼 야곱의 장례는 미사 여구(美辭麗句)로는 표현할 수 없는 '완벽함'의 의미를 상징적인 숫자로 전달하고 있다. 이는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적 출발점이기도 한 야곱의 장례식이 히브리 민족의 가슴속에 길이 지워질 수 없는 영상으로 자리잡고 있음을 단적으로 나타내 준다.

   2. 이스라엘 공동체의 결속(50:15-21)
 본문은 야곱을 장사지낸 후 애굽으로 돌아온 요셉의 형들이 과거 도단 사건(37:18-28)으로 인한 요셉의 보복을 두려워하자, 요셉이 그들을 위로하며 다시금 형제간의 우애를 확인하는 부분이다. 그중 15-18절은 형들이 과거의 잘못을 뉘우치며 다시 한번 요셉의 용서를 구하는 장면이다. 그리고 19-21절은 이에 요셉이 간곡한 말로 형들을 위로하며 이스라엘 공동체의 결속을 꾀하는 장면이다.
 아마 부친 야곱의 우산 아래 거하면서, 요셉이라는 월등한 권력자의 힘으로부터 어느정도 보호받고 있다는 느낌을 갖던 요셉의 형제들은 이제 그 방어막이 상실되자, 두려움을 갖기 되었을 것이다. 실로 인간의 모든 두려움은 과거 저지른 죄악에 기인한다. 요셉의 너그러운 용서에도 불구하고(45:5), 아직도 과거 도단에서의 범죄 사실을 기억하고 있는 이들에게 요셉은 여전히 두려운 권력자였음에 틀림없었다. 그러나 형제들은 이 사건을 진심으로 회개하고 있었고, 요셉 역시 과거의 아픈 사실을 염두에 두기는 커녕 도리어 형제들을 위로하고 격려하였으니, 이로써 야곱 사후 형제들간의 이질감은 완전 해결될 수 있었다.
 즉 이제 야곱의 형제들은 '아버지'라는 혈연적 공통점이 없어도 뜨거운 사랑으로 하나가 된 것이다. 따라서 이스라엘 민족 공동체의 원천적인 출발점은 한 아버지에게서 난 아들들이라는 사실도 있지만, 서로를 인정한 이해와 사랑에 더 깊은 근원이 있다. 이같은 사랑의 공동체는 오늘날 영적 이스라엘 공동체인 교회들의 모습이 되어야 할 것이다.

 * 회개와 용서의 아름다움. 가해자(加害者)가 피해자에게 자신의 잘못을 솔직히 인정하는 모습은 인간사에 흔치 않다. 특히 가해자가 강자일 경우엔 더욱 그렇다. 그러나 피해자가 가해자를 용서하는 것은 더더욱 드문 일이다. 그래서 복수와 응징만이 가해자에게 마땅히 돌아가야 할 댓가라고 규정짓는 사회는 피 비린내 나는 보복의 악순환만이 있을 뿐이다.
 하지만 본문은 아비 야곱이 죽은 이후, 혹시 과거 도단 사건(37:18-36)으로 인해 보복을 당하지나 않을까 두려워하는 형들을 요셉이 진정으로 용서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그런데 요셉의 용서에서 보는 바(19,20절) 진정한 용서는 단순히 인간 사이에 이루어지는 일이 아니라, 인간과 하나님 사이의 관계에까지 소급되어야 하는 것이다. 즉, 요셉은 하나님과 자신의 관계를 먼저 규정하고 난 후 자신과 형제들의 관계를 규정했다. 진정 요셉은 모든 문제의 근거로 하나님을 그 중심에 놓은 것이다. 이는 판단의 자격이 자신에게 없음을 겸손히 고백하는 하나님 제일주의의 신앙 자세인 것이다.
 이처럼 요셉 이야기의 말미에는,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하는 형들의 참회 모습과 이 참회를 자신의 주관대로 용서하는 오만이 아니라, 하나님께 맡기는 요셉의 겸손이 감동적으로 어우러져 있다. 이는 모든 인간 관계의 종국(終局)이 회개와 용서라는 과정을 통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어야 할 것을 보여 준다. 이런 점에서 주기도문(마 6:9-13 ;눅 11:2-4)은 형제 용서가 또한 자신이 하나님께 용서를 구할 수 있는 근거가 됨을 보여 주고 있다.

   3. 요셉의 죽음(50:22-26)
 본문은 야곱 사후 애굽에서 반세기 이상을 더 살은 요셉이 마침내 그 아비의 뒤를 이어 유명을 달리하는 부분이다. 그중 22,23절은 요셉의 간략한 연력이다. 그리고 24,25절은 요셉의 유언이며, 마지막 26절은 요셉이 죽어 장사된 데 대한 기록이다. 이로써 이스라엘의 족장사는 모두 끝이 나는데, 야곱 가문의 구원자로서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으로서<37:18-28 강해, 요셉의 생애를 통해 본 그리스도의 생애>, 하나님 앞에 부끄럼 없는 삶을 살다 간 요셉의 일생은 실로 오늘날 모든 성도들이 본받아야 할 아름답고 고귀한 삶이 아닐 수 없다.
 한편 요셉은 야곱과 달리 가나안에 장사되지 않고 애굽에 묻혔긴 하나, 그가 후손들에게 장차 출애굽시 자신의 해골을 가나안으로 이장토록 유언한 점은(25절), 그 역시 약속의 땅 가나안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을 조금도 의심치 않고 굳게 믿었음을 잘 나타내 준다. 이처럼 야곱과 요셉은 애굽에서의 영광에 집착치 아니하고, 하나님의 약속의 상급인 가나안 땅을 열렬히 소망하였는데, 이를 본받아 오늘날 성도들도 땅의 것에 연연해 하지 말고 위의 것을 사모해야 할 것이다(마 6:33 ;골 3:1 ;히 11:16).

 * 가나안을 향한 신앙. 인간은 누구나 자신의 유해(遺骸)나마 그리운 고향, 혹은 자신의 삶과 밀접했던 곳에 묻혔으면 하고 바란다. 이스라엘 백성은 이러한 인지상정(人之常情)에서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 가나안에 가야 한다는 확신을 갖고 있었으므로, 요셉의 유언대로(25절) 그의 유해를 가나안으로 옮겨갈 수 있었다(출 13:19). 실로 이스라엘 백성은 애굽에서 400년간을 지냈으면서도, 결코 '가나안 언약'(12:1-6 ;13:14-18)을 잊지 않았으며, 나아가 자신들의 민족 정신으로 승화하여 마침내 출애굽이라는 역사를 일궈냈다.
 이처럼 신앙인들에게는 '가나안'이라는 소망의 영역이 반드시 자리잡고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 애굽과 같은 이 세상에 동화되지 않고 어떠한 상황 하에서도 끝까지 참고 인내하며 믿음을 지켜 나갈 수 있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선조의 언약을 자기 것으로 삼고 소망을 잃지 않은 것처럼, 신약의 성도들 역시 그리스도 안에서 제시된 하나님의 언약을 믿고 하늘 가나안을 늘 소망하면서 현재의 고난을 극복하는 삶의 자세를 지녀야 한다.
 할렐루야!


Articles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