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크마 주석, 창세기 39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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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1절
요셉이...애굽에 내려가매 - 겉으로 보기에는 요셉이 대상들에 이끌려 애굽까지온 것 같으나 사실은 하나님의 섭리에 이끌려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이다(15:12-15). 한편 이 시기는 애굽의 중왕국(B.C.2000-18000) 말기, 즉 12왕조 시대인 B.C.1898년 경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22년 후 야곱이 애굽으로 옮겨간 때도 이 왕조에 해당되는B.C.1876년경으로 추측된다.

====39:2절
여호와께서 - 이후 애굽에서의 요셉의 성공은 족장들에게 약속된 하나님의 언약(15:13-16;26:4;28:14)이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로 성취된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본문에서는 언약의 신을 강조하는 여호와 명칭이 사용되고 있다(Quarry). 형통한 자( ,이쉬마츠리아흐) - '사람'을 뜻하는 '이쉬'와 '번성하다'란 뜻을 지닌 동사 '찰레아흐'의 사역형 분사가 합쳐져 '번영의 사람'이란 의미이다. 이것은 요셉이 하는 일마다 눈에 띄도록 현저하게 나아지는 현상을 말한다. 이러한 현상은 그 주위 사람들에게 분명히 요셉과 함께 하는 어떤 신적 축복과 가호가있다는 사실을 충분히 감지케 했다.

====39:3절
그의 범사에 - 문자적으로 '그가 하는 모든 일에'란 뜻. 이는 요셉이 모든 일에신실하였음과 그 위에 하나님의 특별하신 축복이 따랐음을 보여 준다. 이처럼 성도는 어디서든, 또한 어떤 형편에 처하든 진실된 삶을 통해(골3:22; 23;딤전 6:1)이방인의 빛과 소금이 되어 그들로 그 행실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도록 해야한다(마 5:13-16;롬 14:18;벧전 2:12).

===39:4절
섬기매( ,솨라트) - '섬기다', '봉사하다'란 뜻의 이 말은 (1)중요한 인물,주로 통치자에게 드려지는 개인적인 봉사나,(2)하나님과의 특별한 관계에 있는 사람들,즉 제사장과 같은 사람들의 예배 사역에 사용되었다(출 28:35;대상 6:17). 여기서는전자에 해당되는데 특히 이 동사는 종의 높은 직위 및 모세와 여호수아(출 24:13;수1:1)처럼 혹은 엘리야와 엘리사(왕상 19:21)의 관계처럼 종과 주인과의 특별한 관계를암시하고 있다. 가정 총무 - 집안 전체 일을 관리하는 집사장(執事長)을 말한다. 애굽에서 발굴된계산서, 문서 및 기타 자료 등은 당시 부자집에 그러한 직책이 있었음을 입증해 주고있다. 한편 이 직책은 엘리에셀이 아브라함의 집에서 봉사했던 지위와 같은 것이다(24:2).이로써 하나님은 요셉으로 하여금 일하는 법을 익히게 하여 장차 애굽의 곡물 관리자로서의 역할을 잘 수행할 수 있도록 섭리하신 것이다.

===39:5절
여호와께서 요셉을 위하여 - 마치 야곱으로 인해 라반의 집이 축복받은 것과 같다(30:27). 이것은 일찍이 아브라함과 체결한 언약에(12:3)근거한 축복으로서, 은혜받은자의 영적 영향력은 그가 몸담고 있는 현실의 모든 부분과 모든 사람에게 미친다는 사실을 잘 보여 주고 있다.

===39:6절
자기 식료 외에는 - 특별히 식사 문제를 간섭한 이유는 의식상 애굽인과 히브리인간의 식사 규정이 달랐기 때문이다. 간섭하지 아니하였더라( , 로야다) - 부정사 '로'와 '알다'란 동사가합쳐진 말로 '알지 아니하였다'란 뜻. 즉 보디발이 요셉을 신임하여 자신이 먹는 것을제외하고는 다른 어떤 것에도 관심을 두지 않았을 만큼 요셉을 전적으로 신임하였다는뜻이다. 용모가 준수하고 아담하였더라 - 문자적으로 '몸매가 좋고 얼굴이 미남이었다'는뜻이다. 아마 미모였던 어머니 라헬을 닮았기(29:17)때문인 것으로 이해되는데 원래선조 아브라함의 가문은 아리따운 여인들을 처로 둔 집안이었다.

===39:7절
그 후에 - 요셉이 보디발에게 팔린 지 약 10년후, 즉 그의 나이 27세 되던 때이다(41:1,46). 눈짓하다가( ,티사에트 에네이하) - '들어 올리다'란 뜻을 지닌 동사 '나사'( )의 과거형과 '...를' 의미하는 전치사 '에트'가 2인칭 여성 접미어가 붙은 '눈'인 '아인'과 합쳐져 '그녀가(요셉을 향해) 눈을 들었다'란 뜻이다.이것은 관심의 표명(表明)으로서, 여기에 욕망이 개재될 때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고말았듯(3:6), 다윗이 밧세바를 범하고 말았듯(삼하 11:2) 비참한 결국을 초래하는 안목의 정욕으로 (요일 2:16) 화(化)함을 성경은 경고한다. 따라서 성도는 욥처럼 자신의 눈과 정결의 언약을 세워야 한다(욥31:1). 동침하기를( ,쉬크바) - '눕다'란 뜻을 지닌 '솨카브'의 강의형 명령법으로 집요한 강요를 의미한다. 이는 이 요청이 한 두번에 그친 것이 아니라 계속적으로행하여졌음을 암시한다.

===39:8,9절
요셉은 세 가지 면에서 보디발 아내의 죄를 지적하며 그녀의 양심을 일깨우려 노력했다.(1)상전과 종의 관점에서 주인의 신뢰를 저버리는 것이 얼마나 큰 악행인가를 인식시켜 주었고,(2) 윤리적 관점에서 그녀의 남편의 존재를 인식시켜 주었고 (3)신앙의관점에서 하나님 앞에서의 순결을 역설했다. 여기서 대인(對人)관계와 대신(對神)관계가 뚜렷이 정립된 요셉의 아름다운 신앙 인격을 엿볼 수 있다. 하나나님께 득죄하리이까 - 요셉이 보디발이나 세상의 안목만을 두려워했다면,그는 오히려 은밀한 가운데 이 죄의 쾌락을 맛보았을 것이다(삼하 11:4-5).그러나 그는모든 은밀한 것까지도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기억하며(시 90:8;렘 23:24;롬2:16). 이제안을 단호히 물리쳤다.

===39:10절
날마다( ,욤 욤) - '날'을 뜻하는 '욤'을 연이어 두번이나 쓴 것은 반복성을 더욱 강조하려는 의도에서다. 보디발의 처는 안주인이라는 특권을 악용하여 유혹과 협박으로 계속 요셉을 괴롭힌 것 같다. 함께 있지도 아니하니라 - 죄의 유혹을 이길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그것으로부터멀리 달아나는 것이다. 즉 시험을 받을 때 그것을 이기는 것도 큰 신앙이지만 처음부터 유혹의 장소및 대상을 멀리하는 것도 신앙의 훌륭한 지혜이다(시 1:1)====39:11절
시무하러 그 집에 들어갔더니 - 어느정도 신분이 보장된 요셉은 보디발의 집과 떨어진 곳에 따로 거처를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따라서 요셉은 공식적인 직무를 위해서만 그 집에 출입하였을 것이다.

===39:12절
그 옷을 잡고 - 이는 결사적인 유혹으로서 마치 순결한 성도의 영혼을 사냥하기위해 우는 사자처럼 달려드는 사단의 필사적인 공격 수법과 흡사하다(벧전 5:8). 도망하여 나가매 - 안주인에게도 복종할 의무가 있는 요셉의 처지에서 유혹에 대항할 수 있는 유일한 방도는 그녀로부터의 도망이 최선의 방법이었다. 이처럼 성도에게는 유혹 앞에서 도망할 때와 싸워야할 때를 분별하는 지혜가 절실히 요청된다(전 3:7,8;엡 6:13;약 4:7). 그러나 우선 원리를 정한다면 일단 죄의 유혹 앞에서 저항하고그리고나서 다른 방도를 찾아도 늦지않다(벧전 5:9).

===39:13절
자기 손에 - '나의 장중(掌中)에'란 말로 마치 요셉의 운명이 그녀의 손아귀(inmy power)에 쥐어져 있는 것처럼 암시한 말이다. 나감을 보고 - 성적 열망으로 불타오르던 보디발 아내의 사랑은 자신의 과감한 유혹이 실패로 끝나게 되자 여자로서 느꼈던 치욕적인 부끄러움이 쉽게 증오심으로 변하여 요셉을 모함하기 시작한다. 이러한 죄악된 사랑의 예(例)는 다말을 향한 암논의 사랑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삼하 13:15-19). 악의 속성상 죄악된 정욕은 그 욕심을 채우면 계속적인 쾌락의 광기가 되지만, 억제되어 이루지 못하면 무서운 증오의 광기로돌변한다. 따라서 진실되고 순결한 사랑만이 오래도록 그 사랑의 본질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이다(고전 13:4-7).

===39:14절
주인이...데려다가( ,헤비) - '가져오다'란 동사 '보'( )의 사역형(Hi-phil)3인칭 남성 단수로서 '그가 데려왔다'란 뜻이다. 즉 보디발의 아내는 자기남편을 약간 경멸적인 어투인 '그'라고 호칭함으로써 은연중 자기의 위치를 과시하며 책임의 일부분을 남편에게 물리려는 수작으로 보여 주고 있다. 히브리( ,이브리) - '낯선 자들', 혹은 '저쪽으로부터 온 자들'이란 뜻으로 구약에서 비이스라엘인들에 의해 다소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되었다(43:32;46:34).그런데 여기서 보디발의 아내가 요셉의 민족을 들먹인 이유는 아마 (1) 문제의 핵심을다른 곳으로 돌려 자신의 혐의를 피하고 (2)히브리인에게 좋지않은 인상을 가지고 있던 애굽인들에게 극도의 반감을 불러일으킴과 동시에 (3)평소 요셉의 신속한 출세에시기심을 품고 있던 여타(餘他)의 종들에게 동조감을 형성하고자 했기 때문일 것이다.여기에 음부(淫婦)의 간악성이 잘 나타나 있다. 우리를 희롱하게 하도다 - 희롱받는 대상에 '우리'란 복수를 사용하여 그 집안의모든 여인을 포함시킴으로써 저들로 일의 정황(情況)을 살필 수 있는 생각할 여유를주지않고, 모두를 심정적 피해자로 만들려는 간악한 간부의 교묘한 술책을 보여 준다.

====39:16절
그 옷을 곁에 두고 - 이로써 요셉의 옷은 두번씩이나 거짓 증거물로 이용당하였다(37:31,32).

===39:17절
이 말로...고하여 - 집안 사람들에게(14,15절) 하였던 똑 같은 말에 약간의 변형을주어 전혀 자연스럽지 않게 고자질하고 있는 모습이다.

===39:18,19절
애굽 19왕조(B.C.1500년경) 시대에 속한 것으로 추측되는 한 파피루스에서는상형 문자로 본문에 나타난 보디발 아내의 유혹 및 무고(誣告)사건과 비슷한 사건, 즉두 형제와 음탕한 형수의 유혹 및 모함 사건이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당시 애굽인들의 전반적인 방탕한 생활과 부도덕한 사회성을 비춰 주는 자료이다.

===39:20절
왕의 죄수를 가두는 곳 - 정치범들과 같은 중대한 죄를 지은 자나 신분이 높은 죄수들만이 갇히는 곳이다. 고대에는 범죄 발생시 그 자리에서 즉형에 처하거나 상해(상해) 배상을 물리는 것이 관례로서 옥에 가두어 두는 자유형은 거의 실시되지 않았다.따라서 보디발은 요셉을 미결수처럼 대우하려 했던 것이 틀림없다. 즉 보디발은 평소요셉의 성실한 품행과 가정에 끼친 공로를 기억하고서 평소 품행이 단정치 않은 아내의 말을 곧이 곧대로 믿지 않았음에 분명하다(Havernick)===39:21절
여호와께서...인자를 더하사 - 요셉의 감옥 안에서 자신의 무죄함과 억울함을 항변치 않고, 하나님의 선하신 뜻(롬 8:28)을 믿고 인내로써 기다리며 주어진 고난을 감수하였음을 나타낸다. 전옥 - 시위대장 보디발의 휘하에서 감옥을 주관하고 간수들을 감독하는 관리이다.

===39:22절
다 요셉의 손에 맡기므로 - 점진적인 과정을 거쳐서 되어진 일로서 처음에는 간수에게 좋은 인상을 심어 주고 이것이 점차 계속됨에 따라 완전한 신임을 받기에 이르렀을 것이다. 이처럼 어떠한 처지에서든 낙심치 않고 신실한 청지기로서 최선의 삶을 사는 자에게 하나님께서는 그 곳이 비록 감옥이라 할지라도 그의 통치 영역을 확장시켜주신다(시 106:46;빌 1:12,13).

===39:23절
전옥은...돌아보지 아니하였으니 - 하나님의 신뢰를 받는 자가 사람의 신뢰와 인정을 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여호와께서...범사에 형통케 하셨더라 - 성도가 당하는 고통과 괴로움이 크면 클수록 하나님의 보호 역시 더 깊고 세밀한 곳까지 임하신다. 따라서 성도에게 임하는 모든 일은 합력하여 결국 선을 이룬다(롬 8:29).

 

 

 가나안에서의 유다의 행적에 관한 기사는 전장으로 끝나고, 이제 본장에서부터는 다시금 요셉에 대하여 초점이 맞춰지고 있다. 즉 본장은 애굽으로 팔려 간 요셉이 그곳에서 어떻게 생활하고 있는지 또한 하나님이 어떻게 그를 도우시고 계시는지를 보여주고 있는 장면이다. 이는 '야곱 가족의 애굽 이주'라는 하나님의 계획이 과연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는지 여부를 간접적으로 보여 주는 것이기도 한데, 크게 3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1-6절은 보디발의 집에 종으로 팔린 요셉이 그곳에서도 하나님께서 함께 해주시므로 가정 총무가 되기까지 크게 형통하였다는 기사이다. 그리고 7-18절은 호사 다마격(好事多魔)격으로 뜻하지 아니하게 요셉에게 닥친 보디발 아내의 유혹과 모함이다. 이는 곧 요셉의 순정성과 신앙을 테스트 해보기위한 하나님의 연단의 시험이었는데 요셉은 이를 굳건히 이겨내었다. 마지막으로 19-23절은 그 결과 요셉이 인간적으로는 옥에 갇히는 몸이 되었지만 여전히 그곳에서도 하나님의 은총을 입게 되었다는 기사이다.
 이상과 같은 본문은 우리들에게 어떠한 상황, 어떠한 장소에 처할지라도 우리가 믿음을 저버리지 아니하고 굳게 행동할 것 같으면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해주신다'는 임마누엘(Immanuel)의 진리를 증거해 준다. 즉 비록 유형과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인생 여정을 지나다보면 모든 인간은 요셉과 같이 뜻하지 아니한 시험과 환란을 종종겪게 되는데, 그때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기만 하면 그분께서는 우리에게 능히 시험을 이길 힘을 주시고 나아가 시련을 형통과 축복으로 바꿔 주시는 것이다(고전 10:31).

  1. 요셉과 함께 하신 하나님(39:1-6)
 형들의 미움을 사 애굽으로 팔린 후(37:18-36)하루 아침에 종의 신세로 전락하고서도 낙담치 아니하는 요셉의 모습과 그러한 요셉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기록된 부분이다. 그중 1절은 요셉이 애굽에서 바로의 시위대장인 보디발의 집에 팔리웠다는 기사이다. 그리고 2,3절은 요셉이 그곳에서도 하나님을 경외하므로 범사에 형통케 되었다는 내용이며, 마지막으로 4-6절은 그 결과 보디발이 요셉을 크게 신임하여 가정 총무로 가았다는 기사이다.
 한편 대부분의 경우 주변 상황이 호전될 때에는 별문제이나 갑자기 상황이 악화될 때에는 많은 사람들이 쉽게 좌절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 까닭은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더 좋아지고 더 높아져야 한다는 일반적인 기대 심리가 한 순간에 역전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본문은 요셉이 일순간에 모든 기득권을 잃어버리고, 그것도 모자라서 가장 비참한 노예신분으로 전락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주어진 삶에 충실하므로 역경을 극복하고 있음을 잘 보여 준다.
 이는 분명 요셉 개인의 성품에도 근거하지만 근본적으로 그가 하나님을 의뢰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이에는 하나님의 강권적인 섭리도 역사하신 탓이다. 즉 하나님께서는 장차 요셉을 야곱 가족 구원자로 삼으시기 위하여 그를 바로의 측근 집으로 팔리게 하시고, 옥에 갇히게 하시며, 그 결과 바로를 대면하고, 애굽 총리가 되게 하신 것이다(45:1-15).
 아뭏든 인생의 여정은 순탄한 것만이 아니어서 갑작스런 돌발 사고를 당할 때가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참된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때일수록 더 밝은 빛을 드러내어야 한다. 세속적 가치 기준에 매달려 허덕이는 세상 사람들이 실망하고 낙담할 때, 그리스도인들은 빛과 소금의 역활을 충실히 감당하며(마 5:13-16) 그 어려운 상황을 극복해 나가야 한다. 요셉에게 임한 하나님의 도우심이 요셉 주변 인물에게 큰 영향을 끼쳤듯이, 그리스도인 한 사람 한 사람은 어떠한 상황 하에서도 올바른 처신을 함으로써 그 사회가 자연히 개혁(改革)의 도상(途上)에 서게 되는데 이바지 하여야 한다.

 * 요셉이 형통케 된 배경. 현대인들은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의 기쁨을 잊어 버리고, 감각적이고 즉흥적인 유희(遊戱)로서의 기쁨만이 진정한 행복인 것처럼 오해하고 있다. 물질적 부(富)와 권세만이 행복을 가져다 주는 가치 척도로 인식하고 있는 물질 만능주의 사상은 성실하게 일하는 인간 자세를 권하기보다는 도박에 가까운 행운이나, 일확천금을 노리는 한탕주의를 만연하게 만들었다. 결국 물질주의적 가치관에 물든 인간은 요셉에게 임한 축복을 '운좋은 일'로 매도할 뿐, 그 이면(裏面)에 깃든 요셉의 신앙과 성실한 자세, 하나님의 섭리를 전혀 안중(眼中)에 두지 않는다. 사실 자본주의 폐단이 있다면 돈이 돈을 벌게하는, 즉 가진 자의 돕까에 가까운 '투자'(投資)를 땀흘려 가며 쏟아 붓는 '노동'(勞動)과 동일한 가치 선상에 두려는 태도에 있다는 점이다.
 그런데 믿음은 투자가 아니다. 즉 내세에 받을 복을 위해 믿음을 거는 것과 같은 도박이나 유희가 결코 아니다. 믿음은 노동이다. 손과 발로서 열심히 실천하고 성실히 땀 흘리는 신선한 노동이다.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을 믿는 행위는 진정 그리스도의 피와 땀으로 이루어진 가치를 인식하는 데에서 그 시작이 가능하다.하나님께 축복의 선물을 받기까지 요셉의 삶 속에 펼쳐진 진정한 믿음을 보지 못하고서는 결코 그의 형통함을 현대의 가치 체계만으로 온전히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2. 요셉에게 임한 시험(39:7-18)
 '재앙은 평안의 때를 시기한다'는 말을 연상시켜 주는 단락으로 보디발의 집에서 형통한 나날을 보내고 있는 요셉에게 뜻하지 아니한 시련이 닥쳤음을 보여 준다. 그중 7-10절은 요세의 용모에 반한 보디발의 아내가 날마다 그를 성적으로 유혹하는 장면이다. 그리고 11-13절은 보디발의 아내가 결정적으로 요셉을 유혹하려 하였지만 요셉이 이를 물리치는 장면이다. 마지막으로 14-18절은 이 일로 인하여 요셉이 엉뚱하게도 보디발의 아내로부터 모함을 사는 장면이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주목하여야 할 점은 한창 정욕이 불타 오를 청년의 때(약27세)에, 더군다나 부모 형제의 사랑도 받을 수 없는 이역 만리 타국에서 일개 종으로 지내고 있는 요셉이 주인 아내의 은밀한 성적 유혹을 물리쳤다는 사실이다. 사사리 누구든 그같은 상황에서라면 쉽게 넘어갈 뿐 아니라, 이를 자신의 출세 기반으로 삼고자하는 어리석은 욕심을 품어 봄직하다. 그런데 요셉은 이를 단호히 이겨내었다. 그것은 단지 주인에 대한 예의에서 만이 아니었다. 만일 그가 이 때문에 자신을 지켰다면 그것은 전형적인 노예의 우직성(愚直性)에 불과했을 것이다. 그러나 요셉의 승리의 원천은 하나님을 향한 신앙에 있었다. 즉 그는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득죄하리이까"(9절)라는 신앙 고백으로써 자신의 전생애가 좌우될 위기의 순간을 능히 극복해 낸 것이다.
 그러나 그 결과는 보디발의 아내로부터 받는 모함이었다. 그리고 주인의 노여움을 사 왕의 죄수를 가두는 감옥에 갇히는 일이었다(19,20). 일견 보기에 이는 선을 행하려다 최악의 상태에 빠진 기막힌 형국일 수 있다. 하지만 이 일로 말미암아 요셉이 감옥에서 왕의 고위 신하를 접할 수 있었던 것은, 분명 이 일이 요셉을 연단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시험이자 그를 애굽의 바로에게 한층 더 가까이 보내려 한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였음을 생생히 증거해 준다(40:4-23).

 * 요셉에게 임한 시험의 성격. 요셉이 보디발 아내에게 받았던 시험은 성적인 욕구만을 대상으로 하지 않았다. 좀 더 편한것, 좀 더 좋은 것만을 추구하는 나태함을 일으킬 만도 했고,노예의 자리에서 집사장(執事長)의 자리에로 상승한 후, 이어 좀더 높은 지위의 향상 욕구를 부추겼을 것이다. 더욱이 집주인의 정부(情夫)라는 자리는 출세와 직결되는 자리요, 청년의 혈기를 집요하게 끌어당기는 유혹으로서 이 시험은 한번 거절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틈나는 대로 시시각각으로 다가오는 것이었다. 한마디로 자기를 버리지 않고는 해결할 수 없는 시험이었던 것이다.
 오늘날 그리스도인에게 닥치는 시험도 이처럼 복합적이며, 일회적인 것이 아닐 때가 많다. 따라서 시험이란 대개 그 근본 원인을 치유하지 않고는 해결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옷을 버리고 도망한 요셉처럼(39:12) 유혹의 자리를 떨치고 나오는 결단이 필요하다. 시험의 원천(源泉)을 막는 일, 그것은 곳 자신을 버려서 까지 욕심과 정욕, 죄 따위와 타협하지 씸 일이다. 그러기에 예수도 십자가에 자신을 버림으로써 세사의 모든 유혹을 끊고 승리 하셨다. 패배한것 같지만 구원을 얻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는 것이 바로 십자가의 도(道)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버리신 일이야말로 모든 시험 당하는 자가 따라야 할 길이며, 또한 그것이야말로 모든 시험을 단번에 부술 수 있는 힘이 되고도 남음이 있다(히 4:15).

 * 애매히 받는 고난. 본문에 의거해 볼 때, "어찌하여 궤휼한 자들을 방관하시며, 악인이 자기보다 의로운 사람을 삼키되 잠잠하시나이까?"(합 1:13)라고 부르짖는 선지자 하박국의 고뇌가 새삼 깊은 의미를 담고 찾아 온다. 고통 속에 살아간 하등의 개인
적 잘못이 없음에도 요셉의 실생활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사실, 사단은 그리스도인들이 세상 속에서 안락한 삶을 누리도록 그냥 내버려 두지 않는다. 언제나 유혹하고, 싯각각으로 주위 환경을 변화시켜 신자의 마음을 억누를 뿐 만 아니라 믿음을 포기하도록 유도한다.
 요셉에게 죄를 뒤집어 씌운 보디발 아내의 모함은 하나님 안에서 신앙을 지키려는 신자를 '악의 평준화 단계'로 끌어 내리려는 사단의 핍박을 의미한다. 하나님과 올바른 교제를 나누며, 주님안에서 행복을 누린다는 것은 꼭 현세에서 받는 안락함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만일 세상 속에서 안락하고 편안해지는 것이 그리스도를 따르는 길이라면, 이렇게 쉽고 간단히 낙원에 이르는 길을 마다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길은 고난의 길을 필요로 하지도 않으며 예수께서 십자가에 매달린 이유도 설명하지 못한다. 현세에서 영광을 추구하는 자일수록 하나님 나라에서 받을 상급은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미 세상에서 상급을 받았기 때문이다(마 6:2). 문이 크고 그 길이 넓어 누구나 쉽게 들어갈 수 있는 곳이라면 그곳에는 필연적으로 영적 죽음이 존재하기 마련이다.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그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은 법이다(마 7:13,14).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부르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귈및리스도가 걸으신 고난의 발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심이요(벧전 2:21),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이었다(빌 1:29). 그러므로 신자들이 애매히 받는 고난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고난에 동참하는 것임을 깊이 명심해야 한다(골 1:24).
 
 * 시기와 모함으로 변한 사랑. 죄와 정욕으로 채워진 보디발의 아내의 사랑은 자신의 과감한 유혹이 실패로 끝나게 되자, 쉽게 증오심으로 변하고 말았다. 이러한 죄악된 사랑의 예(例)는 다말을 향한 암논의 사랑에서도 찾아볼수 있다(삼하 13:15-19). 이처럼 쉽게 변하는 사랑은 이미 사랑이 아닌 욕정에 불과하다. 또한 사랑을 받지 못한 까닭에 그 사랑 자체를 증오하게 된다. 이는 이솝 우화 가운데서 탐스런 포도를 구하였으나 그할 수 없게 되자 그것을 신 포도라고 매도했던 여우의 탐욕과 같다. 성경은 "오래 참고, 온유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시기하지 않으며, 언제까지든지 떨어지지 아니하는"(고전 13:3-8) 위대한 사랑의 진리를 가르치고 있다. 이 사랑의 진리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인간 관계의 모든 영역에 적용되는 항구적인 것이다.

  3. 요셉의 옥중 생활(39:19-23)
 요셉의 보디발 아내의 모함으로 인해 이제 종의 신분에 더하여 죄수라는 오명(汚名)까지 얻어 쓰고 옥에 갇히는 장면이다. 그중 19,20절은 아내의 말을 듣고서 노한 보디발이 요셉을 왕의 죄수를 가두는 옥에 투옥시키는 장면이다. 그리고 21-23절은 그러나 그곳에서도 요셉이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 전옥의 총애를 받았다는 기록이다. 그런데 당시 애굽법에 의하면 노예가 주인의 아내를 범하였을 경우 즉결 처형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실정법에도 불구하고 보디발이 요셉을 옥에 가두기만 한 일에 대하여선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첫째, 하나님께서 요셉에게서 만족할 만한 시험의 결과를 보았음을 의미한다. 즉 일개 종의 신분 에서 가정 총무라는 비약적인 지위에로 상승하였음에도 불구하고(4절), 여전히 요셉은 세상적인 것에 눈을 돌리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경외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를 머리털 하나도 상하지 않게끔 보호하신 것이다. 둘째, 하나님께서 요셉에게 중차대한 임무를 맏기실 때가 점차 가까와졌음을 의미한다. 즉 굳이 하나님께서 요셉을 왕의 죄수들이 갇히는 옥으로 인도하신 까닭은 바로 앞에 나아갈 수 있는 길을 열어 주며(41:9-14) 장차 권좌에 오를 때 억울한 자들의 사정을 잘 신원(伸寃)할 수 있게끔 미리 준비시키기 위함이었던 것이다. 자식을 잃은 데 대한 슬픔이 극에 달하였기 때문으로 이해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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