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윤선 주석, 에베소서 03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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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엡 3:1
 이러하므로. - 이말은 앞장에서 가르친 교회론을 받아서 결론하는 것이다. 이방인도 유대인과 함께 교회를 이로어가니만큼(2:13-19) 바울은 자기가 이방인의 사도로 사역함을 영광으로 생각한다. 그리스도 예수의 일로 갇힌 자. 이 말(*  )을 직역하면, "그리스도 예수의 수인(囚人)"이다. 다른 귀절에서는 이 말을 "주 안에서 갇힌 자"라고 하였다.(4:1). 6:20; 빌 1:11-13 참조. 이 말의 뜻은 우리 한역과 같이 바울이 그리스도의 일 때문에 갇힌 바 되었다는 것이다. 그는 그의 옥고(獄苦)가 그리스도에게 필요한 것임을 알았으니만큼 위안을 받았을 것이다. 본절은 3장의 제목처럼 나와 있다. 그것은 이방 전도를 위한 하나님으리 경륜이라고 할 수 있다.

 엡 3:3,4
 바울이 깨닫은 바 "비밀"은, (1) 거짓 선지자들의 교훈처럼 헛된 꿈이나 혹은 자기의 생각으로 알려진 것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의 계시로 알려진 것이며, (2)신비 철학자들의 이른바 오묘한 지혜처럼 일반인은 모르는 것이 아니고, 명백한 기록하여 전해진 것이며,읽으면 알 수 있는 것이다.
 계시로 내게 비밀을 알게 하신 것 - "계시"는 하나님이 알게 해 주심을 가리키고, "비밀"은 2절의 "은혜의 경륜"을 말한다. 이 "경륜"은 6절에 밝혀진 대로 이방인들이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 받게 되는 것을 말한다.
 내가 이미 대강 기록함과 같으니 - 이 말은 바울이 계시로 알게 된 비밀을 이미 기록된 것을 가리킨다고 하나 우리가 받을 수 없는 해석이다.

 엡 3:5
 위에서 말한 대로 복음의 비밀은 신약의 사도들에게 밝히 계시되었으나 그 전에는 그렇게 밤히 알려지지 않았다. 이 비밀은 다른 것이 아니고 이방인들이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 받게 되는 복음이다
 이제 그의 거룩한 사도들과 선지자들 - 여기 말한 "거룩한"이란 형용사는 사도직의 특수성으 가리킨다. 사도직은 계승직이 아니고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전하기 위해(유 1:3) 그리스도께서 친히 세우신 성직이었다. 여기에 언급된 "선지자"는 구약시대의 선지자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고 신약시대의 선지자를 가리킨다. 이 직분은 실상 사도들이 겸임하였던 것이다.
 성령으로 나타나신 것 같이 다른 세대에서는...알게 하지 아니하셨으니 - 이 문구에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같이"(* )이다. 구약시대에도 이방인의 구원 받을 일에 대하여 하나님의 계시가 전혀 없었던 것도 아니다(창 12:3; 시 72:8, 11;사 19:18;미 4:1).그러나 신약의 사도들에게서처럼 명백하게 계시되지는 않았던 것이다.
 함께 후사가 되고 함께 지체가 되고 함께 약속에 참예하는 자가 됨이라 - 이 문구에는 "함께"란 접두어(* )가 세 번이나 나오는데 누가 누구로 더불어 함께 한다는 것인가? 그것은 '이방인이 유대인과 함께'라는 의미이다. "함께 후사"란 말은 '함께 천국에 들어가는 기업을 누릴 자'를 가리키고, "함께 지체"란 말도 '함께 몸이 됨'을 의미한다. 이것은 이방인도 유대인과 함께 그리스도 신앙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교회의 지체(肢體)가 됨을 가리킨다.그리고 "함께 약속에 참예하는 자"란 말은 이방인들도 이방인들도 믿음으로써 아브라함에게 주신 하나님의 구원 언약(메시야 약속)에 참예하게 됨을 의미한다.

 엡 3:7
 바울이 복음의 사역자가 된 것은, (1) 자기의 인격 소질로 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되었다. 곧, 그리스도를 핍박하던 그가 하나님의 은혜로 사도가 되었다. 그 은혜로 사도가 되었다. 그 은혜는 하나님의 능력의 역사로 나타나서 그의 인격을 변화시키신 것이다.

 엡 3:8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에게 - 여기 "나에게"란 말(*  )이 첫머리에 나와서 역설(力說)되어 있다. 그것이 이렇게 역설체로 표현된 목적은 바울이 자기 자신의 부족과 무가치를 강조하려는 것이다. 그의 이와 같은 겸손은 일시적이 아니고 영구한 자의식(自意識)이 되어 있었다. 그는 평생 겸손하도록 하나님께서 그에게 "사단의 가시"를 주셨다(고후 12:7). 바울이 여기서도 자기를 가리켜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다"고 한 것은 그가 일찌기 그리스도 신자들을 핍박한 그의 쓰라린 경험을 회상하면서 말하였을 것이다. 고전 15:9; 딤전 1:15 참조. 가장 큰 성도는 이렇게 자기를 가장 작은 자로 생각하는 마음의 소유자이다. 물이 가장 낮은 곳을 향하여
흐름과 같이, 하늘의 은사는 겸손한 자에게 임한다.
 나에게 이 은혜를 주신 것은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을 이방인에게 전하게 하시고 - 이 말씀의 뜻은 다음과 같다. 곧, 그가 사도직의 은혜를 받은 목적은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풍성한 구원의 은혜(2:7)를 이방인에게 전해주기 위한 것이라는 말이다.

 엡 3:9
 이 귀절은 앞절 끝의 말씀에 대한 해설이다 - "그리스도의 풍성을 전함"(8절 하반)은 다른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비밀의 경륜(이방인들이 복음으로 구원 받는 구원 운동)을 드러내어 알게 함이다.
 영원부터 - 이 말은 "영원 전부터"란 말과 같다. 롬 16:25 참조. 사도 바울이 모든 사람에게 전하는 복음, 곧 "비밀의 경륜"은 여원 전부터 있었던 것이니 근거 깊고 오래도록 참된 것이다.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속에 감취었던 비밀의 경륜이 어떠한 것을 드러내게 하심이라 -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이 감추신 진리는 알 사람이 없을 것이다. 그 이유는, 그가 그 지극히 큰 창조의 권세와 능력을 가지시고 그것을 감추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드러내실 때에는 또한 그것을 가리울 자도 없다.(마 10:26). 사도는 이 만큼 위대한 직분이다.

 엡 3:10
 이 귀절은 위(8-9)에서 말한 사도직으로 말미암은 복음 사역의 목적을 가리킨다. 그것은 사도가 세운 교회 운동에 나타난 하나님의 지혜를 천사들에게도 비로소 알게 한다는 것이다.
 정사와 권세들. 이것은 천사들 중 그 다스리는 자들의 지위를 따라서 부른 명칭이다. 그들은 천사들의 우두머리로 역사하는 자들이다. 그들은 선한 천사들이다(Calvin, Bavinck, Grosheide, Hodge).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구속(球束)의 사랑에 그들은 참예하지 못한는 것이니만큼 그 사랑은 그들에게 알려지지 않았다. 구속의 사랑은 용서 받은 죄인들만이 맛보는 것이다.
 하나님의 각종 지혜 - 이것은 은혜로 죄인들을 죄인들을 구원하는 복음 운동의 다양성(多樣性)있는 역사를 가리킨다. 곧, 죽음으로 생명으로, 욕된것을 영광으로, 죄인을 의인으로, 저주를 축복으로, 연약을 능력으로 바꾸는 지혜이다(T.K. Abbott, International Critical Commentary, Ephesians, 1905, p.89).

 엡 3:11
 이 귀절은 윗절에 말한 교회를 통한 구원 운동이 하나님의 예정으로 된 일이고 근거 박약한 운동이 아니라는 것을 밝히 지적한다.
 영원부터. - 이것은 '영원 전부터'란 의미이다.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예정하신 뜻. 구원은 예수 밖에서는 언제나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것을 예정하신 때에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계획하셨다.

 엡 3:12
 담대함과 하나님께 당당히 나아감을 얻느니라. - 이것은 이방인들이 구원 얻는 믿음의 어떠함을 나타낸 말이다. "담대함"은 속죄를 받은 신자의 양심이 죄벌(罪罰)에 대한 공포의 위협을 받지 않고, 하나님의 엄위로우신 보좌 앞에 기탄없이 나아갈 수 있게된 경건한 담력을 가리킨다.그리고 "당당히"라는 말은 '확신 있게'란 의미이니, 주님께서 그 이름으로 구하는 바를 물리치지 않으실 것을 아는 신념이다. "나아감" )은 신자가 심령적으로 하나님 앞에 가까이 나아감을 의미한다. 악인들은 하나님을 멀리함으로, 또는 잊어버림으로 평안을 얻고자 한다. 그러나 진실한 신자는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감으로 안식을 얻는다.
 본문이 말하는 "담대함", "당당히 나아감"은 신자가 소유한 주관적인 어떤 의로움  때문이 아니고 어디까지나 객관적인 그리스도의 완전한 속죄 때문이다. 그 안에서란 말이 이 해석을 정당화시킨다. 곧, "그 안에서"란 말은 '그리스도 안에서'란 의미로서 그리스도의 완성하신 속죄 때문에 당당히 하나님 앞에 나아간다는 것이다.

 엡 3:13
 그러므로 너희에게 구하노니 너희를 위한 나의 여러 환난에 대하여 낙심치 말라 이는 너희의 영광이니라. 이귀절은 위의 모든 말씀의 결론이다. 바울은 복음을 위하여 옥에 갇힌 자가 되었다. 그러나 에베소 교인들은 그것을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다. 바울이 복음을 전하려다가 옥에 갇히기까지 하였다면 그 복음은 말할 수 없이 위대한 것으로 알려진다. 그것은, (1) 바울이 하나님의 계시(啓示)에 의하여 깨달은 것이며(3절), (2) 그 전 시대의 사람들이 충분히 알지 못하였던 것이며(5절), (3) 이방인들도 그 영화로운 참된 기업에 참된 것도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로 된 것이며(7절), (5) 복음은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은총을 전하는 것이며(9절), (7) 그것은 천사들도 신약 교회의 운동에 따라 처음 깨닫게 된 것이며(10절), (8) 그것은 영원부터 그리스도 안에서 예정된 것이다(11절) 위의 모든 사실로 보아서 이 복음을 위한 바울의 고난은 영광스러운 일이다. 그러므로 그는 에베소 교인들에게 그의 수난 때문에 그의 수난 때문에 낙심하지 말라고 부탁한다.

 엡 3:14,15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이름을 주신 아버지. - 이것은 하늘 위에와 땅 위의 모든 족속들이 한 분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그 이름을 받았다는 말이다. 이름을 받는다 함은 그 특질들을 받았다고 함과 같다. 그 이유는 이름은 특질의 표호(標號)이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이 에베소 신자들을 위하여 기도할 때에 하나님을 가리켜 모든 족속에게 특질을 나누어 주신 "아버지"라고 한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1) 모든 것에게 각양 은사로 채우시는 자, 곧 가지가지의 은혜를 무궁무궁하게 베푸시는 하나님이심을 생각케 하려는 까닭이며(1:23,3:19,4:10), (2) 족속이나 교회가 하나님 아버지 안에서 통일되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4:3-6 참조.

 엡 3:16-19
 그 영광의 풍성을 따라. - 이것은 하나님의 긍휼이나 능력으로만 나타난 구원 역사를 가리키지 않고 하나님의 완전성의 표현을 가리킨다. "속 사람"이란 말은 영혼의 거듭난 생명을 가리키는 데 겉 사람 곧, 육체의 생명과 대조된다.(고후 4:16).
 강건하게 하옵시며. 6:10; 딤후 2:1 참조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 - 믿는 자 속에 그리스도께서 계셔주신다. 이렇게 되도록 하는 마음 믿음은 멀리서 그리스도께서 계셔주신다. 이렇게 되도록 하는 믿음은 멀리서 그리스도를 관망하는 정도의 것이 아니고 뜨거운 마음으로 그를 영접하는 믿음이다(Calvin).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신장에게 내재하여 주신 결과이다 곧, 하나님과 사람에게 대한 그들의 사랑이 견고하여 동요하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그 견고함 깊이 뿌리 박힌 나무와 같고, 또 굳은 터 위에 세운 집과 같다는 것이다. 이렇게 건전한 사랑을 소유한 신자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깨닫는 지식에 있어서도 성숙해진다. 그 지식은 그 사랑의 넓이, 길이, 높이, 깊이의 네 가지 방면으로 깨닫게 된다.
어거스턴(Augustine)은 여기 "넓이"란 것은 사라을 , "길이"란 것은 인내를, "높이"란 것은 소망을, "깊이"란 것은 겸손을 가리킨다고 하였다. 그러나 벵겔(Bengel)은 말하기를 "넓이"는 그리스도의 사랑이 모든 민족들에게 미치는 충만을 가리키고, "길리"는 그 사랑이 모든 시대에 미침을 가리키고, "깊이"는 모든 피조물들이 측량할 수 없는 사랑이 모든 시대에 미침을 가리키고, "깊이"는 모든 피조물들이 측량할 수 없는 사랑을 의미하고,"높이"는 원수가 해할 수 없는 사랑을 가리킨다고 하였다(Gnomon, ,trans. Bryce, p.86) 위의 해석과 같이 사랑의 확립을 얻은 상태는 다시 그리스도의 큰 사랑(18-19)을 더욱 이해함에 이른다. 사랑이 없는 자는 사랑을 깨닫지 못한다. 그리스도의 지극히 큰 사랑을 알려는 자는 친히 사랑을 실천함으로 알게 된다. 요일 4:7-8참조. 어떤 학설에 의하면, 17절의 "사랑"이란 말이 역시 그리스도의 사랑을 의미한다고 한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속죄(贖罪)의 사랑에 깊이 뿌리 박고 사는 성도가 그(그리스도)의
사랑을 깨닫는 다는 뜻이겠다.

 엡 3:20,21
 이 부분 말씀은 사도가 하나님께 드린 감사와 송영이다
  온갖 구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 - 이 말씀으 다감사와 송영의 이유이다. 하나님께서 성령님의 역사를 통하여 성도들에게 은혜를 주시되, 그들이 생각하는 이상 넘치게 주신다. 그것을 생각할 때에 우리는 그에게 감사할 수밖에 없다.
 교회 안에서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 이런 문투는 에베소서의 신학(神學)에 맞는다. 교회와 그리스도는 머리와 몸의 관계가 있는 것이니 만큼(1:23, 4:15) 이 둘은 함께 송영의 출저가 될 만하다. 다만 우리가 명심할 것은 언제나 교회는 그리스도 안에서만 송영의 자격과 능력을 가진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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