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윤선 주석, 고린도전서 07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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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전 7:1

  너희의 쓴 말에 대하여는 남자가 여자를 가까이 아니함이 좋으나.  -  "너희의  쓴
말"이란 것을 보니, 고린도 교회의 교인들이 서신들을 통하여 여러 가지 난제들을  물
어 본 것이 명백하다. "남자가 여자를 가까이 아니함이 좋다"고 바울이 말한 것은, 하
나님께서 제정하신 부부의 제도를 반대함이 아니다. 바울의 이 말씀은 고린도  교회의
특수 사정에 비추어 표현된 것이다(28, 35, 38, 40). 특별한 사정하(事情下)에서 독신
생활이 필요하게 된 고린도 교인들에게 대하여 바울이 독신 생활을 장려하나,  그것을
교리화(敎理化)하지는 않았다.
   기독교는 혼인을 하나님의 제정으로 믿는다.
   (1) 그것은 하나님 중심한 것임. 창 2:18,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사람의 독처
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이 말씀을
보면, 부부를 이루어 주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혼인은 하나님 중심한 것이
다. 그것이 그 존재(存在)에서부터 하나님의 은혜로 되었으니 부부(夫婦)를 이루는 자
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기만 위주하여야 된다. 그러므로 바울은 말 하기를 "아내
있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 하라"고 하였다(고전 7:29). 유대인들은 결혼할 때에  신랑
신부가 마신 잔을 깨뜨려 그들이 얼마 후엔 죽음으로 인하여 서로 갈리게 될 것을  기
억시킨다고한다. 부부는 가정을 이루어 사는 동안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살아야 된다.
   (2) 그리스도 중심한 것임. 사도 바울은, 엡 5:22-33에 부부가 지킬 도덕을 말하였
다. 곧, 남편된 자는 아내된 자를 사랑하여야 될 것과, 아내된 자는 남편에게  순종하
여야 될 것을 가르쳤다. 그 뒤에 그는 말하기를 "이 비빌이 크도다  내가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고 하였다(엡 5:32). 부부 생활은 그리스도를 중심한 교회 생
활을 비유하는 것이다. 부부 생활을 하는 자들은, 주님께서 몸 버려 피흘려 주신 사랑
을 기억하여야 된다. 그리고 속죄(贖罪)의 결과로 나타난 성결을 기억하야야 된다.(엡
5:25-27). 가정은 저렇게 머리된 남편의 사랑과 지체된 아내의 복종(服從)으로 성립된
다. 기독자의 가저어에서 매일 기억할 것은, 그리스도의 사랑과 티나 주름 잡힐  것이
없는 교회의 성결이다.
   (3) 혼인은 이렇게 신성하기 때문에 성경 말씀은 이를 귀히 여기라고  하였음.  히
13:4에 말하기를 "모든 사람은 혼인을 귀히 여기라"고 하였다.  신  24:5에  말하기를
"사람이 새로이 아내를 취하였거든 그를 군대로 내어 보내지 말 것이요"라고 하였다.

 

 고전 7:2

  음행의 연고로 남자마다 자기 아내를 두고 여자마다 자기 남편을 두라. -  "음행의
연고로" 부부(夫婦)의 생활을 가지라 함은, 부부의 목적이 음행방지(淫行防止)를 위함
에만 있다는 의미는 아니다. 이것은, 고린도 교회의 어떤 신자들이 특수  사정(特秀事
情) 아래서 독신 생활을 하는데 관하여 나온 말씀이다. 그들이 독신 생활을 하는 것이
좋으나 그 일로 인하여 도리어 음행이 생긴다면 좋지 못하다. 음행이 생길 우려가  있
는 한(限)엔 차라리 부부생활이 장려되어야 한다. "남자마다 자기 아내를 둔"다 함음,
헬라식 자유주의 방탕과 불신 유대인들의 다처주의(多妻主義)를  반대하는  말씀이다.
일부일처(一夫一妻)의 제도는 하나님이 정하신 것이다. 말 2:15에 말하기를 "여호와는
영이 유여하실지라도 오직 하나를 짓지 아니하셨느냐 어찌하여 하나만 지으셨느냐  이
는 경건한 자손을 얻고자 하심이니라"고 하였다.

 

 고전 7:3

  남편은 그 아내에게 대한 의무를 다하고 아내도 그 남편에게 그렇게 할지라. -  이
말씀은 부부(夫婦)사이에 모든 책임들을 전적으로 관설함이  아니다.  칼빈(Calvin)과
기타 학자들은, 이것이 양자간에 성적 책임(性的責任)의 균등이행(均等履行)을 의미한
다고 한다.

 

 고전 7:4

  아내가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그 남편이 하며 남편도 이와 같이 자기 몸
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그 아내가 하나니. - 이 말씀이 역시  일부일처(一夫一妻)의
필연성을 내포(內包)한다. 일남일녀(一男一女)가 일단 결혼한 다음엔 각기 자기  몸이
아니고 그 상대자인 타성(他性)에 속하고 만다. 그러므로 그들은, 각기 제 몸을 제 마
음대로 할 수 없이 된 줄 알아야 한다. 이제부터는 그들이 각기 제 몸을 제  마음대로
할 수 없이 된 줄 알아야 한다. 이제부터는 그들이 각기 제 마음대로 할 몸은 다시 없
다(但 성적인 문제에 있어서).

 

 고전 7:5

  서로 분방하지 말라 다만 기도할 틈을 얻기 위하여 합의상 얼마 동안은 하되  다시
합하라 이는 너희의 절제 못함을 인하여 사단으로 너희를 시험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
라. - 전심기도(專心祈禱)함에 대하여 모든 다른 일들을 방해건이 된다.  그것은,  그
일들 자체의 악함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니다. 바울은 부부 생활을 악시(惡視)하
지 않았다. 부부생활을 하던자가 별거(別居)하다가 성욕(性慾)을 이기지 못할 때에 삳
다의 유혹을 받으면 음란에 빠지기 쉽다는 의미로 바울은 말한다. 그는 별거하는 자로
하여금 그것을 경계(警戒)하라고 한다.

 

 고전 7:6

  그러나 내가 이 말을 함은 권도요 명령은 아니다. - 여기 "이 말"이란 것은 앞절의
"다시 합하라"는 말을 가리켰다고 한다. 그러나 "다시 합함"은 반드시 하여야 될 것이
니 명령건(命令件)에 속하고 권도에 속하지 않는다. 하지(Hodge)는 이것이 다음 절 말
씀 "나와 같기를 원한다"는 것을 가리킨다고 한다. 그것은 사람마다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니(8-9), 명령건이 못되고 "권도"에 속한다. "권도"란 말은 헬라 원어로 슁노메(*
)니, 양허(讓許) 혹은 양보를 의미한다.


 고전 7:8

  내가 혼인하지 아니한 자들과 및 과부들에게 이르노니 나와 같이 그냥 지내는 것이
좋으니라. - 이것은 물론 명령이 아니다(6절). 고린도 교회에 어떤 교인들이 특수사정
(特秀事情) 아래 있었으니(7:26, 28, 29), 그들은 가정이 없는 채로 그냥 지내는 것이
좋다는 것 뿐이다. 고린도 교회 어떤 교인들의 특수 사정은, 그들이 그리스도를  믿음
으로 인하여 받을 핍박을 의미하였을 것이다(Lenski). 하지(Hodge)는 생각하기를,  바
울이 고린도 교회와 관련하여 가리킨 "환난"은 재림의 전주곡(前奏曲)으로 있을  환난
을 염두에두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문제는, 사도가 재림이 어느 시기에 될는지  모르
고 저렇게 벌써 자기 생전에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말하였을까 함이다. 그것은 문
제될것 없다. 재림의 일시(日時)는 인자도 모른다고 하시지 않았는가? 그러므로  바울
이 자기 당대에 주님이 재림하실지도 모른다는 신념을 가졌던 것이 잘못은 아니다.

 

 고전 7:9

   만일 절제할 수 없거든 혼인하라 정욕이 불같이 타는 것보다 혼인하는 것이 나으니
라. - 바울이 윗절에 독신 생활을 권장한 것은, 독신 생활자체가  윤리적(倫理的)으로
결혼 생활보다 우수하다는 의미에서 그리한 것은 아니다. 다만 주님을 따르는 데 있어
서 단순성(單純性)을 지닐 수 있는 점에서 좋다는 것 뿐이었다. 그러니만큼 이제 어떤
사람이 독신 생활에서 저러제할 수 없는 경우라면 도리어 종교  윤리적(宗敎倫理的)으
로 손해를 볼 뿐이니 독신 생활을 지속(持續)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고전 7:10

  혼인한 자들에게 내가 명하노니(명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주시라) 여자는 남편에게
서 갈리지 말고. - 사도 바울이 여기서는 권도로 말하지 않고 주님의  말씀으로  말한
다. 그 말씀 내용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땅위에  계실  때에  가르쳐  주신  것이다(마
5:32). "여자는 남편에게서 갈리지 말라"는 것은 남편이 칠계(七誡)를 범한 일이 없이
또는 억지로 이혼을 주장하는 일이 없이는 갈리지 말 것을 가르친다.  사람들이  종종
부부간의 성격상 부조화(性格上不調和)나 어느 한편의 잔인성이나 질병이나 범죄나 또
그와 같은 것들로 인하여 이혼을 성립시키는 법률을 가지는 수가 있다. 그러나 이것은
천륜상(天倫上)으로 혼인 계약을 깨뜨림이다. 그런 방식으로 깨뜨린다면 그것은 그 깨
뜨리는 자 측에서 범죄한 것이다.

 

 고전 7:11

  (만일 갈릴지라도 그냥 지내든지 다시 그 남편과 화합하든지 하라) 남편도  아내를
버리지 말라. - 이 말씀은 여자 측에서 정당하게 갈릴 이유 없이  부득이하여  갈려져
있는 경우에는 다른 데 재혼하지 말고 그냥 지내든지 혹은 남편과 다시 화합하든지 하
라는 말씀이다. 부부의 제도에 대하여 바울이 이렇게 엄격하게 가르치는 것은  숟다한
신본주의(神本主義) 입장에서 하나님의 제정하신 법리(法理)를 존중시하는 것  뿐이다
(말 2:14-16). "남편도 아내를 버리지 말라." 남편된 자 측에서도 아내에게서  갈리지
말아야 된다는 것이니, 여기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10, 11절 상반절까지에 대한  해석
과 같다.

 

 고전 7:12

  그 남은 사람들에게 내가 말하노니(이는 주의 명령이 아니라) 만일 어떤  형제에게
믿지 아니하는 아내가 있어 남편과 함께 살기를 좋아 하거든 저를 버리지 말며. -  여
기 부탁하는 말이 "주의 명령이 아니라"고 한 것은 그 부탁이 하나님 말씀 권위를  가
지지 못하였다는 것은 아니다. 바울은 자기의 사도적 교훈(使徒的校訓)이 역시 하나님
말씀인 것을 인식하고 있었다(7:40). 여기 기록된 부탁을 보면, 이미 이루어진 부부가
종교 신앙의 불일치(不一致)로 인하여 갈려질 이유는 없다는 진리를 보여 준다.  부부
의 제도는 인륜에 속하고 종교가 아닌 것 만큼 종교 문제로 인하여 부부관계에까지 근
본적인 변동을 받을 필요는 없다. 물론 애초부터 결혼의 대상을 찾는 기독자가 기독신
자를 택하여야 할 것은 하나님 말씀이 명하는 것이다(고전 7:39). 그러나 본래 그리스
도를 믿지 않는 자들끼리 이루어진 부부 중에 그 어느 한 편이 후에 개종하였으면  본
절(12)의 말씀에 해당하는 결정이 필요하게 될 것이다.

 

 고전 7:13

  어떤 여자에게 믿지 아니하는 남편이 있어 아내와 함께 살기를 좋아하거든 그 남편
을 버리지 말라. - 본절의 내용은 역시 윗절에 교시(敎示)된 원리에 의하여 교훈된다.

 

 고전 7:14

  믿지 아니하는 남편이 아내로 인하여 거룩하게 되고 믿지 아니하는 아내가  남편으
로 인하여 거룩하게 되나니 그렇지 아니하면 너희 자녀도 깨끗지 못하니라 그러나  이
제 거룩하니라. - 이 말씀은 위에 기록된 말씀에 대한 이유를 보여준다. 믿지 않는 남
편이 믿는 아내에게서 갈리기를 원치 않는 경우에 아내된 자가 그 남편을 버리지 말아
야 할 이유는 이렇다. 곧, 그 남편이 그 아내의 종교에 순응(順應)하려는 동기에서 함
께 살기를 원한다는 것이다. 그의 순응은 적어도 외부적(外部的)인 순응을 의미한  것
이니 그 가정이 그만큼 거룩한 분위기를 지니고 있을 것이다.
   그러면 기독자는 가정 생활에 있어서 그렇게 세상의 향락이나  만족을  목적함보다
한 사람에게라도 주님을 알게 하는 것을 더욱 요긴하게 생각하는 것이 이 말씀에 나타
난다.
   "그렇지 아니하면 너희 자녀도 깨끗지 못하니라." 곧, 믿는 환경을 보존할 수 있는
가정에서는 그 자녀들도 적어도 외부적으로 거룩한 하나님의 종교에 순응하게  되겠지
만, 그런 환경이 아니면 자녀들이 그렇게 되지 못할 것이란 의미이다. 여기 이른바 깨
끗하다든지 거룩하다는 것은, 마치 유대인들이 신정 국가(神政國家)에 있어서  외부적
종교의식(外部的宗敎儀式)에 순응하여 거룩한 백성이 된 것과 마찬가지이다.

 

 고전 7:15

  혹 믿지 아니하는 자가 갈리거든 갈리게 하라 형제나 자매나 이런  일에  구속받을
것이 없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은 화평 중에서 너희를 부르셨느니라. - 믿지 않는  아내
나 남편이 갈리는 경우에는 근본 약속을 깨뜨리는 것인만큼, 그대로 갈리도록  하여도
무방하다. 그 갈리는 의도(意圖)가 복음신앙을 배척(排斥)하는 데 있을 수도  있으니,
그런 때에는 더욱 그로 하여금 갈리는 자유를 사용하게 두는 것이 합리(合理)로운  일
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화평 중에서 너희를 부르셨느니라." 이 말씀은, 부부가 서로  갈
리게 되는 것은 그 비록 합리로운 원칙(原則)에 있어서도 최대한도(最大限度)의  화합
(和合)을 힘써야 될 일에 대하여 가르침이다.

 

 고전 7:16,17

  아내 된 자여 네가 남편을 구원할는지 어찌 알 수 있으며 남편 된 자여 네가 네 아
내를 구원 할는지 어찌 알 수 있으리요 오직 주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주신 대로  하나
님이 각 사람을 부르신 그대로 행하라 내가 모든 교회에서 이와 같이 명하노라. -  이
말씀(16)에서 우리는 기독교의 가정원리(家庭原理)를 볼 수 있다. 그것은 구원 중심의
것이고 쾌락중심(快樂中心)이 아니다. 그리고 이 점에 있어서 또 한가지 중요한  원리
가 나타났으니, 곧, 복음을 가진 자가 그 처한 환경이 어떠한  것임에  불구하고(죄악
그것이 아니라면) 거기서빛을 나타내고 소슴의 직분을 하라는 것이다(17). 다시  말하
면, 신자는 누구든지 그 불리운 처지에서 신앙만 굳게 지킬 따름이고 반드시 그  직분
이나 처지를 고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고전 7:18,19

  할례자로 부르심을 받은 자가 있느냐 무 할례자가 되지 말며 무할례자로  부르심을
받은 자가 있느냐 할례를 받지 말라 할례 받는 것도 아무것도 아니요 할례 받지  아니
하는 것도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따름이니라. - 이  부분에서
는, 할례에 대하여 언급한다. 이렇게 말한 이유는, 바울 당시에 복음 전하는 곳곳마다
유대인들로 말미암아 할례 문제가 일어났기 때문이다. 그들은 말하기를 "예수를  믿어
도 할례를 받아야 구원 받는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바울은 여기서 말하기를 "할례 바
가는 것도 아무것도 아니요"라고 하였다. 여기 이른바 "아무것도 아니요"라는 것은 구
약의  마례제도(割禮制度)의 하나님 말씀 권위(權威)를 무시함이 아니다. 이것은, 다
만 할례가, 구원을 받게 하는 데 있어선 아무런 힘을 주지 못한다는 뜻이다.
   구약의 할례 제도는 신약 시대의 중생을 예표(豫票)하는 말씀 제도이니 그것이  신
약 시대에 성취(成就)되었다. 그러나 신약적 성취라는 것은, 할례와 같은 의식제도(儀
式制度)가 오늘날 신자에게 하나님 말씀 권위로 임(臨)함을 무시하지 않는다. 신약 시
대에 성취를 본 구약의 예표들은, 그 성취를 체험한 신약 시대의 하나님 백성에게  믿
음을 준다. 그러므로 그것들이 그냥 하나님 말씀 권위를 가진다(요  13:19,  16:4  참
조).
   "오직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따름이니라." 이 말씀은 얼핏 보면 구원 문제에  있어
서 계명을 지키는 것이 유일(唯一)한 방침(方針)이 되는 듯이 보인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 깊이 생각할 것이 있다. 신약이 일률적으로 가르치는 것은, 구원은 사람의  행위
에 달려있지 않다는 것이다. 롬 4:5에 말하기를,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라 하였고, "일
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행복"이라고 하였다(롬  4:6).  또
갈 2:16에 말하기를,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줄 아는고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
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고 하였다. 갈 3:10-14 참조.
   그러면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따름이니라"는 말씀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계명을
지키어야 구원을 받는다는 말, 곧 행위로 구원 받는다는 말을 바울의  구원론(救援論)
에서 할 수 있는가? 그것은 말 할 수 없는 말이다. 그러나 신자가 계명을 지켜야 된다
는 마가은 할 수 있다. 이 말은, 신자가 그 행위의 공로로야 구원을 가져온다는  의미
가 아니고 그 행위(선한 행위)로 신자된 증표(證票)를 보여주어야  된다는  것이다(롬
2:26-29). 행위는 믿음이 내어주는 열매이니, 선한 행위가 없으면 죽은 믿음이라고 할
수 밖에 없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야고보의 신앙 사상이었다(약 2:21-26 참조). 이
렇게 해석될 때에 바울과 야고보는 일치(一致)한다. 바울도 역시 행위가 없는  믿음은
쓸데없다는 사상을 발표 하였다(고전 13:2 참조).
   우리가 믿음으로만 의롭다 함을 받는다고 할 때에, 믿음 그것이 구원의 공로가  된
다는 의미도 아니다. 인간편에서 가져지는 믿음은, 하나님의 의(義),  곧  그리스도를
받는 태도 뿐이다.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구원을 성립(成立)시키는 지혜와  의와거룩함
과 구속함이 되신다(고전 1:30 참조). 그러므로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  함은,  곧,
"발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에게만  달려
있는 것이다.

 

 고전 7:20

  각 사람이 부르심을 받은 그 부르심 그대로 지내라. - 이것은 윗절에서 이미  말한
대로 누구든지 복음을 듣고 믿던 당시의 외부적 처지를 그대로 가지고 지냄이  잘못된
것 없음을 이름이다. 신자는 이 세상에서 무슨 처지든지 하나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바
로만 가지면 그것으로써 주님의 빛을 드러낼 수 있는 것이다. 기독 신자는, 복음 신앙
에 들어서자부터 그의처하여 있던 환경을 변동(變動)시킬 필요는 없다. 그 이유는, 그
는 오히려 그런 환경에서 소금과 빛이 되려는 까닭이다.

 

 고전 7:21

  네가 종으로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았느냐 염려하지 말라 그러나 자유할 수 있거든
차라리 사용하라. - 여기 이른바 "종"이란 말은 당시 사회의 역사적 실정을 보여준다.
당시 헬라 로마 세계에 있어서 노주(奴主)의 관계는 특색 있는 것이었다.  이런  것은
현대에 있어서는 보기 어렵다. 그때에 종이라고 하면 집 주인의 도구(道具)하 같이 자
유가 없었던 것이다. 이 점에 있어서 바울의 말대로 "그냥 지내라 혹은  염려하지  말
라"고 한 것은 우리의 주의(注意)를 끈다. 그것은 이렇다. 기독 신자가  된  이후에도
그런 부자유(不自由)스러운 환경 속에서 그냥 지내도 무방한 것을 가르쳤으니, 그  때
에 바울이 생각하였던 복음적 신생명(福音的新生命)의 행복이 어떻게 컸다는 것을  짐
작할 수 있다. 그 행복이 너무나도 현저하고 컸으니만큼 그것을 누리고  있는  신자의
외부적 환경(外部的環境)따위는 하등의 문제도 되지 않았다. 여기 바울이  말한  대로
"자유할 수 있거든"이란 것은, 우리 성경에 잇는 변주(變奏)의말과 같이  "자유할  수
있어도"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 "거든" 혹은 "어도"란 것은 헬라 원어 에이카이(*  
      )에서 번역될 수 있는 말이다. 설혹 우리 변주에 있는 번역을 채택하는  경우에
는 짜유할 기회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종으로 지내라는 것이니 그것이 이 문맥에  맞을
까? 그것은 우리 문맥(文脈)에 부합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13절이하에 나타난 바울의
논조(論調)가 이러하기 때문이다. 곧, 기독자는 그 처하여진 환경에  그대로  의종(依
從)하는 것이 좋다는 것이다. 자유할 수 있는 환경이 왔음에도 불구하고 그냥  종으로
지내기를 지속(持續)하라는 것은 이 부분에 나타난 바울의 논조에 부합하지 않는다.

 

 고전 7:22

  주 안에서 부르심을 받은 자는 종이라도 주께 속한 자유자요 또 이와 같이  자유자
로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은 자는 그리스도의 종이니라. - 여기 이른바 "주께 속한 자
유자"란 뜻은, 바울에게 두 가지 의미가 있었다. 첫째, 그 개종(改宗)한 노예가, 이제
와서는 영적 의미에서 자유인(自由人)이 되었다는 것이다. 둘째, 그가 자유인이면서도
주께 속한자, 곧 종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하반절에 자유자가 개종한 경우에도  역시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하였다. 바울은 이 말로써, 사회적 지위(社會的地位)로 보아  자
유하는 역시 종의 심리를 가져야 할 것을 가르친다. 이렇게 바울은 인간 사회의  차이
점(差異點)들을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 시킨다. 그는 노예제도의 폐지론(廢止論)을  말
한 적이 없다. 그는 주장자(主張者)가 있어야 될 것과  피지도자(被指導者)가  있어야
될 것을 하나님의 경륜 안에서 보았던 것이다. 옳지 않은 노예 제도란 것은, 이와  같
은 하나님의 경륜을 바로 가지지 못한 점에서만 발생 되었으니, 바울은 여기서 그것을
바로 가지도록만 가르친 셈이다. 종된 자도 그리스도 안에서 올바르게 그 책임을 감당
하고 상전(자유하는 자)도 주 안에서 자기 신분을 바로 가질 때에, 지배자와 피지배자
(被支配者)의 관계가 바로 서게 되어 불의한 노예제도 따위는 필연적(必然的)으로  교
정(校正)될 것이다.

 

 고전 7:23

  너희는 값으로 사신 것이니 사람들의 종이 되지 말라. - 값으로 샀다함은 그리스도
의 보혈로 구속된 것을 의미한다. 곧, 죄악과 멸망의 노예되었던 처지에서, 그들은 그
리스도의 속죄하여 주시는 보혈을 믿음으로 놓여났고 또한 그의 다시 삶으로 그의  소
유가 되어진 것이다. 그러므로 기독자들은, 사회적 지위에 있어서 종이든지  자유자든
지 다 함께 그리스도의 종인고로 그들은 서로끼리 형제이다. 여기에서 노주간(奴主間)
에 모든 문제성(問題性) 있는 일들은 다 해결된다.

 

 고전 7:24

  형제들아 각각 부르심을 받은 그대로 하나님과 함께 거하라. - 이 말씀은, 위의 17
절 23절 까지의 있는 말씀에 대하여 결론한 것이다. 기독자가 개종  당시(改宗當時)에
외부적 형편이 어떠하든지 죄가 아닌 한(限)에 있어서 변동을 기필(期必)할 필요는 없
고, 다만 하나님으로써 만족할 뿐이다. 여기 "하나님과 함께"라는 말씀은, 하나님  곁
에라는 뜻이니 이는 기독자가 다만 하나님으로 만족하여 있음을 이름이다.

 

 고전 7:25

  처녀에 대하여는 내가 주께 받은 계명이 없으되 주의 자비하심을 받아서 충성된 자
가 되어 의견을 고하노니. - 여기 "내가 주께 받은 계명"이란 것은, 예수님께서  땅위
에 계실 때에 가르치신 계명을 이름이다. 바울이 처녀에 대하여 이런 계명(26절)을 받
은 일이 없다고 한다. 그는 여기서, 다만 사도의 처지에서 의견을 전하여 준다.  그러
나, 그 의견은 역시 바울 자신의 자율적(自律的)인 것이 아니다. 그 의견이 역시  "주
의 자비하심을 받아서 충성된 자"로 전하여 준 것이다. 여기서 그는,  자기가  충성된
자가 된 것이 하나님의 자비로 말미암아 되었다고 하였으니, 이것은 물론 자기가 참되
어 진 것이 하나님으로 말미암았다는 진실한 고백이다. 그러나 이것은 겸하여 그의 영
권(靈權)에 대하여 솔직히 고백한 것이다. 그가 자기를 가리켜 충성된  자라고  함은,
보통으로 할 수 있는 말이 아니다. 그것은 그의 받은 뚜렷한  타율적(他律的)인  직은
(職恩)을 자타(自他)가 공인(公認)하는 가운데서 할 수 있는 말이다.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그의 직은은, 객관적(客觀的)으로도 명확하여 자기로서도 그것에 대하여 임의(任
意)로 낮추어 취급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 가운데서, 그는
처녀에 대하여 이 아래 26절과 같은 내용으로 의견을 발표하였으니, 그 의견은 하나님
뜻에 합당한 것이다.

 

 고전 7:26

   내 생각에는 이것이 좋으니 곧 임박한 환난을 인하여 사람이 그냥 지내는 것이  좋
으니라. - 여기 "임박한 환난"이란 말은, 어떤 사람들이 생각하는 바와  같이  핍박을
의미 한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주님의 재림을 앞두고 일어나는 환난일 것이다. 재림
을 이와 같이 가까운 것으로 생각하는 사상은, 역적(靈的)인 사상이고 역사적  시간거
리(歷史的時間距離)를 중점으로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영(靈)은  역사(歷史)가  아니
다. 영적 견해와 역사적 견해는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는다. 영적 견해는 종종  역사를
초월하고 하나님의 열심으로 생각하는 것인 만큼 현재에도 미래를 실감(實感)한다. 이
와 같은 대망심(大望心)이 재림에 대하여 반드시 가져질 심리라고 생각된다.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나라에 대하여 하나님이 생각하시는 그 방식으로 생각 하여야 할  것이
당연하다. 그러므로 재림은, 언제든지 가까운 것으로 생각됨에  있어서  고금(古今)이
일반이다. 사도 바울이 설혹 자기 당대(當代)에 주님이 재림하실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였다 할지라도 그것은 착각(錯覺)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기준하는 올바
른 사색이다.

 

 고전 7:27,28

  네가 아내에게 매였느냐 놓이기를 구하지 말며 아내에게서 놓였느냐 아내를 구하지
말라 그러나 장가 가도 죄 짓는 것이 아니요 처녀가 시집가도 죄 짓는 것이  아니로되
이런 이들은 육신에 고난이 있으리니 나는 너희를 아끼노라. - 여기서는 바울이  신자
들의 결혼 생활에 대하여 가르친다. 그는, 사람이 그것을 가짐보다 안 가지는 것이 오
히려 육신 생활에 단순성을 가져오는 편리가 있다고 본다. 그러면, 여기서의문되는 것
은, 바울이 말한 대로 그냥 지내는 것이 좋다고 할 때에 단지 육신 생활의 편리를  도
모하기위해서만 그렇게 말하였을까? 그것은 아니다. 여기 이른바 육신의 고난이란  것
은, 다만 환난 때에 주님을 위하여야 되느냐 가족을 돌아봐야 되느냐 하는 고민의  기
로(岐路)에 있을 고난을 특별히 염두에 두고 한 말씀이다. 이 밖에 일반적으로 당하여
지는 가정 생활상 곤난 때문에 결혼을 금하는 데까지 이르는 교훈은,  바울의  사상과
및 성경의 일반적 교훈에서 찾아볼 수 없다.

 

 고전 7:29-31

   형제들아 내가 이 말을 하노니 때가 단축하여진고로 이 후부터 아내  있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 하며 우는 자들은 울지 않는 자 같이 하며 기쁜 자들은 기쁘지 않은  자
같이 하며 매매하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 하며 세상 물건을 쓰는 자들은 다 쓰지 못하
는 자 같이 하라 이 세상의 형적은 지나감이니라. - 바울은 진리를  가르침에  있어서
어디까지든지 추상적(抽象的)이 아니고 구체적(具體的)이다. 그는 어떤 철학적 사색으
로 막연하게 말하지 않고 현실 관계에서 가질 수 있는 생활을 들어 말한다. 이렇게 하
여 그는 기독교가 생활화(生活化) 되어야만 정규적으로 그 목적을 달성하게  될  것을
보여준다. 재림을  내어다보는 기독자로서 이 세상 현실에서 생활상 특이(特異)한  점
이 있어야 할 것은 기대된다. 여기에 "같이"란 말이 다섯 번 나온다.  렌스키(Lenski)
의 해석에 의하면, 바울이 여기서 이렇게 다섯가지만 들어서 말한 것은, 불완전한  개
수(다섯 번)을 말하고 끝이므로 이 밖에 얼마든지 더 있다는  것을  암시(暗示)한다고
한다. 곧, 여기 다섯가지 이외에 또 많은 생활면에 있어서 저렇게 하여야 될 것을  암
시 한다고 하니 일고(一考)를 요한다. 불트만(Bultmann)은 바울의 이 부분 말씀을  보
고, 신약 종교(新約宗敎)가 노스틱 주의(Gnosticism)에서 가지는  이원론(二元論)(곧,
이 세상 생활 그 자체가 죄요 하나님께서 그것을 관할하여 주시지 않고 영원히 버린다
는 사상)을 가진다고 하였다. 그러나, 불트만의 이 말은 신약종교를 바로  알지  못한
데서 나온 것이다. 신약 종교는, 구약 사상과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이 세상 그 자체
를 죄시(罪視)하지 않고 그것을 귀정(歸正)시키시는 구원 운동만 하시는 것으로  말한
다. 바울이 이 세상 생활 그 자체를 죄시한 적이 없고, 도리어 이 세상 생활을 감사함
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다는 의미로만 말하였다. 그 이유는, 이 세상 생활도 하나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지기 때문이다(딤전 4:3-5). 바울이 여기 고전  7:29-31까지에
가르친 것은, 재림을 내어다보는 기독자로서 주님을 마가이하기 위하여 준비를 열중히
할 것이고 이 세상 생활에 집중(集中)하지 말것을 의미한 것 뿐이다. "아내 있는 자들
은 없는 자 같이 하며." 이것은, 가정의 책임을 포기한다든가 멸시하라는 의미는 아니
다. 이것은 다만 가정 생활을 가지는 자도 재림 대망(再臨待望)을 중심으로 하여 육신
생활에 집중하지는 말 것을 가르친다.
   "우는 자들은 울지 않는 자 같이 하며." 여기 운다는 것은, 이 세상 일로 또는  육
신의 어떠한 손해로 슬퍼할 경우에 울게 됨을 의미한다. 기독자는 그것들에  열중하지
않는 것인 만큼, 이런 슬픔을 조절하여 제지(制止)하지 않으면 안된다. 세상 일에  있
어서 손해를 보고 슬픔을 제지하지 않는 자는, 결국 신앙상 손해를 보고 하나님을  영
화롭게 하지 못한다. 다윗이 어린 자식의 위급한 병을 위하여 애달프게  기도  하였으
나, 그 자식이 세상 뜬 후에는 슬픔을 제지하였다. 이런 것이 다 하나님 중심한  생활
이다(삼하 12:15-23).
   "기쁜 자들은 기쁘지 않은 자 같이 하며." 여기 이른바 기쁨은 역시 이 세상  생활
에 있자서 가져질 수 있는 기쁨이다. 그것이 죄악은 아니지만, 기독자는 그 중심이 그
리스도의 재림에 있는 것인만큼 이 세상 기쁜을 위주하지 않는다. 누구든지 이 세상을
즐기다가는 도리어 신령한 기쁨을 잃어 버릴 수 있다.
   "매매 하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 하며." 여기 "매매하는 자"라고 번역된 것은 다만
"사는 자"라고 번역된 것은 다만 "사는 자"라고만 함이 헬라 원어(*                
    )에 합당하다. 이것은 물건을 구입(購入)하는 자들을 이름이니, 물론 물건을 많이
소유한 자들이다. 이런 자들은 그 소유를 믿지 말고, 다만 주님의 재림을  바라봄으로
소유가 없는 자처럼 처신(處身) 하라는 뜻이다. "세상 물건을 쓰는 자들은 다 스지 못
하는 자 같이 하라." 이것은 이 세상 물질을 사용하는 자들로서 과도히 쓰지  말  것,
곧, 물질의 향락을 누리지 말라는 말씀이다.
   "이 세상 형적은 지나감이니라." "형적"이란 말마은 헬라 원어로 스케마(*       
  )라고 하는데, 외형(外形) 혹은 유행(流行)을 의미한다. 이 세상 것은 그  무엇이든
지 끊임없이 변동되는 것이기 때문에, 사람이 거기서 안정을 얻을 수 없다.  그러므로
그가 그것으로 만족을 얻으려고 하면 바람을 잡는 것과 같이 언제나 실패할  것  뿐이
다.

 

 고전 7:32-34

  너희가 염려 없기를 원하노라 장가가지 않은 자는 주의 일을 염려하여  어찌하여야
주를 기쁘시게 할꼬 하되 장가 간 자는 세상일을 염려하여 어찌하여야 아내를  기쁘게
할꼬 하여 마음이 나누이며 시집가지 않은 자와 처녀는 주의 일을 염려하여 몸과 영을
다 거룩하게 하려 하되 시집간 자는 세상 일을 염려하여 어찌하여야 남편을 기쁘게 할
꼬 하느니라. - "너희가 염려없기를 원하노라." 세상 염려는 신앙에 해롭다. 그  이유
는 세상 염려는 공연한 일에 마음을 힘껏 쓰기 때문이다. 어찌 하여 자기의 힘으로 할
수 없는 일을 주님께 부탁하지 않고, 자기 스스로 해결할 듯이 고심할  것인가?  그런
염려는 하나님을 무시하는 죄악이다.
   그뿐 아니라, 그런 염려를 가지는 자는, 하나님께 드려야 할 마음의 힘을 헛된  일
에 소모하고 만다. 성경을 보면, 우리가 하나님을 섬김에 있어서 "마음과 뜻과 성품을
다하여 여호와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하였으니(마 22:37), 하나님을 섬김에 있어서 마
음의 힘이 얼마나 요긴 한 것을 알 수 있다. 마음이 나누이면,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있어서 참되지 못하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한
다"고 하셨다(마 6:24). 성경이 가르치는 대로 신앙생활은 마음의 단순성을 생명시 한
다. 시 27:4에 말하기를, "내가 여호와께 청하였던 한 가지 일, 곧 그것을 구하리니곧
나로 내생전에 여호와의 집에 거하여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앙망하며 그 전에서 사모하
게 하실 것이라"고 하였다. 다윗은 이와 같이 한가지만 사모하였으며 기구(祈求) 하였
다. 곧, 그는 여호와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사모하여 보고자 한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도 신앙 생활의 단순성을 고조하여 자기의 청빈(淸貧) 생활을 표본으로 보여  주셨다.
곧, 그를 따르려는 자에게 말씀하시기를,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라고 하셨다. 또 다른 때에 "다른 사람에게 나를  좇으라
하시니 그가 가로되 나로 먼저 가서 내 부친을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가라사대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  하시
고, 또 다른 사람이 가로되 주여 내가 주를 좇겠나이다마는 나로 먼저 내 가족을 작별
케 허락하소소 예수께서 이르시되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
라에 합당치 아니 하니라"고 하셨다(눅 9:58-62). 예수님은 이 교훈을 통하여 신앙 생
활에 단순성이 필요함을 가르치셨다.
   "어찌하여야 주를 기쁘시게 할꼬 하되." 갈 1:10; 롬 12:2 참조.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은 마음을 옹글게 하여 주님을 위하여 섬기는 데 있다. 하나님은 마음이  나누
인 봉사를 기뻐하시지 않는다(38절 하반절). 그러면, 여기 33절에 가르친 대로 장가간
자가 아내에게 대하여 전연 책임을 지지않는 것이 옳다는 의미인가? 물론  그런  것은
아니다. 이 말씀 뜻은 장가간 자는 주님을 잊어 버리고 아내를 기쁘게 할 방향으로 너
무 치우치게 되는 과오를 범하기 쉽다는 것 뿐이다.
   "주의 일을 염려하여 몸과 영을 다 거룩하게." 여기 이른바 염려란 말은, 세상  일
때문에 고심하는 나쁜 염려가 아니고 주님께만 마음을 바친다는 의미이다. 염려란  것
은 마음을 심각하게 사용함인데, 주님의 일을 위하여 이렇게 전심(專心)할 때에  경건
한 생활이 이루어질 수 밖에 없다. 마음을 쓰는데 있어서 그 강약(强弱)에 따라  실행
력(實行力)이 비례(比例)된다. 그러므로 주님의 일을 위하여 염려하는 것은  실행력을
가져올 수 있는 심각한 마음이다. 시집가지 않은 자는 그 생활이 단순하기 때문에  주
님의 일에 대하여 전심할 수 있게 된다. 그는 몸과 영을 다 바쳐 주님을 위하는데  있
어서 용이하게 되어진다.
   그렇다고 하여 결혼생활을 하는 자들은 "몸과 영을 다 거룩하게" 주님께 바치게 될
수가 없는가? 물론 그런 것은 아니다. 그의 생활이 복잡하여 졌을지라도 그가  자신을
쳐 복종시켜서 주님 중심한 생활에 열중하게 된다면 그의 복잡한 환경도 모두 다 그에
게 있어서는 주님을 섬기는 일거리가 되어진다. 그런 경우에 있어서, 그 복잡한  환경
이, 하필 신앙 생활에 방해된다고 할 것은 없다. 불은 작은 것이로되 진정한 의미에서
불이라면, 크게 복잡스러운 산림(山林)을 태울 수 있다.
   여기 이른바 "거룩하게" 한다는 것은, 곧, 주님에게 바친다는 뜻이다.

 

 고전 7:35

  내가 이것을 말함은 너희의 유익을 위함이요 너희에게 옮부를 놓으려 함이  아니니
오직 너희로 하여금 이치에 합하게 하여 분요함이 없이 주를 섬기게 하려  함이라.  -
"올무를 놓으려 함이 아니니"라는 것은, 바울이 이 점에 있어서 그 교훈을 받는  자들의 자유를 구속하려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바울은, 사도의 권위를  가지고  명령식(命令式)으로 말하여 그 명령에 순종하지 않고 다만 그의 충고적  의견(忠告的意見)을 준다는 것 뿐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이런 충고적 의견에 포함되어 있는  말씀이 신령한 감동으로 말하는 사도적 권위에서 이탈(離脫)한 것이라는 의미는 아니다. 충고의 의견도 역시 선한 것인만큼 하나님 말씀의 성격을 가지기에 부족한 것은 없다. "이치에 합하게"란 말은, 외부적 사정(外部的事情)이 기독자의 헌신윤리(獻身倫理)에  합당하게 됨을 가리키고 "분요함이 없이"란 말은 생활의 방향이나 능력이 나누임이 없이 단순성 있게 전진함을 의미할 것이다. 이 점에 있어서 우리는 마르다와  마리아  양인(兩人)의 경건에서 두 가지  형태를  대조(對照)시키므로  뜻을  밝힐  수  있다.  눅 10:38-42을 보면, 마르다는 주님을 영접하노라고 각양 외부적 활동(外部的活動)에  분망하였다. 따라서 그의 심령은 단순성을 잃어버리고 복잡한 데로 떨어져 염려와  원망으로 흘러갔다. 이것은 바울이 본 절에 말한 "분요"한 심령 태도이다. 그와 반면에 마리아는 주님의 발아래 앉아 그의 말씀을 듣는데 열중하고 다른 일들은(비록 필요한 것일지라도) 포기하였다. 이것은 마치 주님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천국 복음을 전파하라"는 말씀에 맞는 행동  원리이다. 어너제든지 신앙 생활에 있어서 단순성은 정결을 보존하며 또한 목표를 향하여 힘차게 나가게 되는 비결을 가진다. 그와 반면에 분요한 생활 방법은 정결을 보존하기 어렵고 주님을 향하여 전진하는 힘도 잃어 버리게 한다(눅 10:38-42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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