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 11:1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 - 이 귀절은
생각컨대 10장의 계속인 듯하다. 바울이 자기를 본받으라는 말은, 사도로서의 권위를
가지고 한 말이다. 사도 이외의 사람들은 이런 말을 하기 어렵다. 바울이 그 교회 사
람들더러 자기를 본받으란 것은 무조건적 모방(無條件的 模倣)을 의미한 것은 아니다.
무조건적 모방이라고 하면, 바울에게 있는 고유(固有)한 성질까지 모방하는 것을 의미
할 것이니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에게 이런 모방을 장려하지 않을 것은 확실하다. 무조
건적 모방은 실상 무의미한 것이고 그런 것은 사람이 자기 아닌 자가 되어지는 일종의
외식이다. 그런 모방은 연극적(演劇的)이고 외식적이 될 수 있다. 그뿐 아니라 그런
모방은 역시 반사적 모방(反射的模倣)이다. 심리학상으로 반사적 모방이란 것이 외식
은 아니나 그 모방할만 한 인물을 존경하는 심리에서 기계적으로 나타나지는 현상이
다. 예컨대 어린 아이가 그 부모의 모습과 행동을 반사적으로 자기에게로 연출시킨 것
과 같다. 또 혹은 어떤 부흥사에게 감화를 많이 받은 이가 그 부흥사의 모든 모습을
자기도 모르게 재 연출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런 모방은 그 동기에 있어서 순수하
나 그 결과에 있어서 하나님이 주신 자기 자신의 특징을 잃어 버리고 기계적으로 남을
모방한 것인 만큼 생명이 없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각 사람에게 각기 특성을 주셨
다. 그 특성은 그리스도의 보혈로 거룩하게 될 때 천지 만물 중에 단 하나의 중요한
선(善)을 이룰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각 개인은 자기의 개성(個性)을 상실하여서
까지 남을 모방할 것은 아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결단코 소위 자존심(自尊心)을
인정하거나 배양(培養)해야 된다는 것은 아니다. 자존심은 불신 세계에서 사용하는 말
이고 인정하는 심리일 것이다. 그런 심리는 비 성경적(非聖經的)이다. 다만 자존심(自
尊心)이란 것은 위에 말한 것과 다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나로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시려는 목적을 인식하며 기억하는 심리이다. 그러면 자존심(自尊心)을 가지는 자는
하나님이 개인 개인을 지으실 때에 각각 다르게 하셨다는 것과 거기에 따라 나 자신도
하나님의 명하신 특이(特異)한 처지를 받아 가지고 났다는 것을 겸손히 기억하고 그것
을 하나님의 진리에 따라 성화(聖化)시키며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책임을 기억함이다.
나는 남의 장점을 모본할 것이나 반사적(反射的)으로 혹은 기계적(機械的)으로 할 것
이 아니고 나의 처지에서 그의 잘하는 것을 배울 것 뿐이다.
고전 11:2
너희가 모든 일에 나를 기억하고 또 내가 너희에게 전하여 준대로 그 유전을 너희
가 지키므로 너희를 칭찬하노라. - 이 말씀도 역시 사도 바울의 사도적 권위와 또는
그 출중(出衆)한 사도의 목회적 권위(牧會的權威)에서 교인들을 대하는 말씀이다.
"전하여 준대로 그 유전". 여기 유전(遺傳)이란 것은, 알반적 의미에서 인간적 방
법으로 전하여진 교훈을 의미하지 않고, 그 때에 기록되지 않은 불성문 계시(不成文啓
示)를 이름이다. 그 때에 예수님의 말씀도 아직 기록되지 않은 것들이 있어서, 구전
(口傳)에 의하여 교회에 전달되는 형편이 없지 않았다. 바울은 여기서 그런 것을 유전
이라 하였다. 그러므로 이 말은 실상 사람의 교훈이 아니고 하나님이 주신 교훈을 사
도된 바울로서 전하여 주었다는 뜻이다.
고전 11:3
그러나 나는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니 각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요 여자의 머리는
남자요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시라. - 이것은 인권(人權)에 의하여 생각된 원리
가 아니고 다만 천직(天職)에 의한 남녀의 위치를 논함이다. 직분으로 말하면, 여자는
남자의 인도 하에 있다. 그러나 인권 문제에 있어서 양자(兩者)가 동일하다(고전 7:4,
11:11, 12). 또한 직역(直譯)에 있어서 남자가 여자의 머리지만, 그렇다고 하여 그는
여자에 대하여 자행자지(自行自止)할 바 되지 못한다. 그의 위에 계신 이도 있다. 곧,
그의 위에는 그리스도께서 주재하신다. 그러므로 그 자신의 역시 영적으로 그리스도의
통치하에 있으니 만큼, 그리스도의 법(사랑; 갈 6:2)에 의해서만 여자에게 인도자 노
릇을 해야 된다.
남자가 여자의 머리 됨이 직분상으로만 그렇다고 생각되는 이유는, 본절에 나타난
바울의 사상이 직분상 관계를 염두에 두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
시라"는 말씀도 직분상으로 생각된 것이다.
하나님과 그리스도는 신성(神性)에 있어서 동등이시다. 다만 직분상으로는 그리스
도께서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성취하시기 위하여 이 세상에 오셨던 것이다.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란 말씀도 직분상으로 생각된 것이다. 그리스도는 직분상
으로 남자의 위에 있어서 그를 중보하시며 하나님 앞에 서도록 하여 주신다. 물론 존
재론적(存在論的)으로도 그리스도는 인생의 머리이시다. 그 이유는 그가 "창조의 근
본"이시기 때문이다(계 3:14; 골 1:15, 17). 그러나 바울의 염두에서는 그리스도께서
특별히 중보자 직으로 남자의 머리되신 사실을 생각한 것이다.
고전 11:4
무릇 남자로서 머리에 무엇을 쓰고 기도나 예언을 하는 자는 그 머리를 욕되게 하
는 것이요. - 이것은 바울이 헬라인의 풍속을 그대로 채용하는 의미에서 말한 것이다.
헬라인의 풍속에 의하면 자유인(自由人)의 특색은 머리에 무엇을 쓰지 않음이고, 종이
나 여자는 두건(頭巾)을 썼던 것이다. 이와 반면에 유대인은 남자가 예배 공석(禮拜公
席)에서 머리에 무엇을 썼다. 이런 일들은 풍속에 관계된 것 뿐이고 근본적인 진리에
속한 일들을 아니다. 그러므로 어떤 풍속이든지 그것이 죄악을 범하는 것이 아닌 한
(限) 신자는 그 풍속을 따름이 어떤 의미에선 양심적이다.
바울은, 헬라의 풍속대로 남자가 공식 예배를 주장할 때에 무엇을 쓰지 않음이 하
나님의 창조이법(創造理法)에 맞는다는 의미로 말한다.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 이지
만(3절) 그는 "하나님의 형상과 영광"인 만큼(7절) 권세 아래 있는 표(수건)를 쓰지
않아야 된다고 바울은 가르친다. 만일 남자로서 머리에 무엇을 쓰면, 그것은 그가 여
자의 지위를 취함과 같으니 자기자신의 머리에 부끄러움을 자취함이다.
"기도나 예언을" 함은, 공식 예배 석상에서 순서에 참예함이다.
고전 11:5
무릇 여자로서 머리에 쓴 것을 벗고 기도나 예언을 하는 자는 그 머리를 욕 되게
하는 것이니 이는 머리 민 것과 다름이 없음이니라. - 바울이 여자의 공석 교훈을 금
하였다(14:34-36; 딤전 2:11). 그러나 그들이 특수한 대상자들에게 공적(公的)으로 가
르칠 수도 있음을 아주 금한 것은 아니다(딛 2:4). "기도나 예언"을 한다 함은, 공적
으로기도하거나 교훈함을 이름이다. 이런 일을 할 때에 여자가 머리에 쓸 것을 써야
된다는 것은 헬라의 풍속이었다. 바울은 그것이 미풍(美風)되는 근거를 하나님의 창조
이법(創造理法)에 붙여 말한다(3절, 7절하반절). 그러나 바울이 이 점에 있어서 절대
적(絶對的)인 규칙을 제정하는 것은 아니다(Lenski). 이것은, 다만 어떤 나라의 풍속
이 자연이법(自然理法)에 부합할 때에, 혹은 그것이 죄가 아닌 한(限) 기독자로서는
그 풍속을 좇음이 어떤 의미에선 양심적이고 순리적(順理的)임을 가르친다.
"이는 머리 민 것과 다름이 없음이니라" 여자로서 머리를 빤빤히 밀면, 이는, 여자
로서 지킬 자연 이법을 어김이니 합당치 않다. 그 자신이 부끄러움을 느껴야 한다.
고전 11:6
이 귀절의 말씀은 하나의 풍자(諷刺)이다. 이것은 윗절의 내용을 강력(强力)히 세
우기 위한 역설체(力說體)이다.
고전 11:7
남자는 하나님의 형상과 영광이니 그 머리에 마땅히 쓰지 않거니와 여자는 남자의
영광이니라. - 남자가 하나님을 섬기는 공적 사역(公的使役)에 있어서 머리에 쓰지 않
는 것이 원칙이다. 그 이유는, 그는 하나님의 형상이며 영광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형상이며 영광"이란 말씀은, 그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을뿐 아니고 특별히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땅에서 만물을 정복할 직분을 받았다는 의미이다(창 1:27, 28).
이런 의미에서 그는 인간계(人間界)에선 자기 위에 있을 자(在上者)를 가지지 않는다.
그는 종속(從屬)의 표가 되는 두건(頭巾)을 쓸 필요는 없다.
"여자는 남자의 영광"이란 말은, 여자는 남자를 영화롭게 할 자란 뜻이다. 그러니
만큼, 여자는 권세 아래 있다는 표로 머리에 수건(手巾)을 써야 된다.
고전 11:8,9
이 귀절들은 직분에 있어서는 여자가 남자에게 종속(從屬)해야 될 창조이법(創造理
法)을 지적한다. 벤드란드(W.D. Wendland)도 바울의 이 말씀이 인간 창조에 대한 모세
의 기록에 비추어 이해되어야 한다고 하였다(Dies Gedenken des Paulus sind nur aus
der mosaischen Schopfungsgeschichte zu verstehen. Das Weib ist aus dem manne und
um seinetwillen geschaffen vgl. 1 Mose 2:18, 22-23, 1 Tim. 2:13.-Die Briefe an
die korinther, p.82).
고전 11:10
이러므로여자는 천사들을 인하여 권세 아래 있는 표를 그 머리 위에 둘지니라. -
"천사들을 인하여" 이 말씀에 대한 해석이 학자들에 따라서 서로 다르다. (1) 천사들
이 여인 창조의 때에 참관(參觀)했으니만큼 여자의 지위를 잘 안다. 그들이 교회의 예
배석에도 나타나는 것인 만큼 여자들이 거기서 권세 아래 있는 표(머리에 쓸 것을 씀)
를 나타내어 본래의 창조 이법에 순응해야 된다. (2) 어떤 이들은, 여기 "천사들"이란
말(* )이 그 교회의 교역자들을 의미한다고 하였다. 곧, 여자들은 기도
나 예언을 할 경우엔 남자들의 권세 아래 있는 표를 교역자들 앞에도 나타내기 위하
여, 머리에 쓸 것을 써야 된다는 것이다. (3) 또 어떤 학자들은, 여기 "천사들"이란
말이, 그때에 불신 사회에서 교회에 참관하게 된 사람들을 의미한다고 한다. 곧, 그들
이 교회의 합당치 않은 풍기를 보고 좋지 못한 소문을 불신 사회에 퍼칠터이니, 그런
일을 막기 위하여는 여자들이 일반 풍속대로 예배 석상에서 머리에 쓸 것을 써야 된다
는 것이다.
위의 세 가지 해석 중에 첫째가 옳은 것이다.
고전 11:11,12
여기서는 바울이 인권상(人權上)으로는 남녀가 동등임을 지적한다. (1) 여자도 남
자와 마찬가지로 생명의 은혜를 유업으로 받나니(벧전 3:7) 이것은 "주 안에서" 성립
된다(11절). (2) 여자나 남자나 꼭 같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창조되었으니, 이렇게
생각될 때엔 창조질서(創造秩序)에 있어서도 양자는 동등하다(12절). 위의 두 가지는
남녀가 인권(人權)에 있어선 동등임을 지적한다. 바울이 이 말씀을 여기서 하게 된 목
적은 위에서 "여자의 머리는 남자"라는 그의 강력한 이론으로 인하여 남녀의 인권상
동등(人權上同等)까지도 독자들로 말미암아 무시되지 않게 하려는 데 있다.
고전 11:14,15
이 귀절들은 두발(頭髮)의 장단문제(長短問題)에 대한 자연적 이법(창조이법 혹은
본성)의 가르침을 존중시 할 것을 권면한다. 남자는 두발을 길게 가지지 않아야 되는
반면에, 여자는 그것을 길게 보존해야 될 것이다.
"본성"이란 말은 헬;라 원어로 퓌시스(* )니 인간의 도덕적 본성을 가리킨
다(M.M. Findlay). 이것은 하나님의 창조 질서에 합당하게 반응(反應)하는 성품이다.
렌스키(R.C.H.Lenski)는 하나님의 창조 질서와 풍속과의 관계에 대하여 요지(要旨) 다
음과 같이 말하였다.
(1) 하나님의 창조의 사실들은 언제나 변하지 않는다. 인간이 그것들을 그대로 수
납(受納)하지 않는 것은 언제나 오착(誤錯)이다. 특별히 남녀의 차이점(差異點)에 있
어서 여자는 머리에 가리움(* )이 있어야 되는 것이 하나님의 창
조 질서이다.
(2) 이 세상에는, 창조 질서에 그리 깊은 근거 없이 변천하는 풍속들이 많이 일어
난다. 성경은 그런 것들에 대하여 무관(無關)한다. 다만 그것들중에 혹 좋아 보이는
것들이 있기도 하고 좋아 보이지 않는 것들이 있기도 하다. 기독자들은 전자(前者)를
택하고 후자(後者)를 멀리 해야 된다. 그러나 이런 선택을 반드시 종교적 이유에 근거
할 수는 없다.
(3) 어떤 풍속은 창조 질서에 비교적 깊이 근거하고 있다. 이런 것은 합당한 것이
다. 그러나 모든 나라가 지키도록 절대 요구될 것은 아니다. 그 이유는 이와 꼭 같지
않은 것도 (어느 정도 창조 질서에 관계 있으면서) 죄악이 아닌 한(限)에 있어선 정죄
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4) 어떤 풍속은 창조 질서에 아주 반대 된다. 그런 것은 바울이 여기서 반대한 것
처럼 우리도 반대하여야 한다(Interpretatino of I and II Corinthians, pp.
450-451).
고전 11:16
변론하려는 태도를 가진 자가 있을지라도 우리에게나 하나님의 모든 교회에는 이런
규례가 없느니라. - 여자가 머리에 쓰지 않고 공석에서 기도하거나 예언함을, 사도의
지령(指令)으로 금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어떤 사람들이 반대를 일으킨다면 그에게 대
답할 말은 이렇다. 곧, 사도들이나 교회가 그런 규례(여자가 머리에 쓰지 않고 기도나
예언하게 하는 규례)를 정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것은, 논쟁을 사도들의 권위에 호
소하여 끝내는 엄격한 말씀이다.
고전 11:17
내가 면하는 이 일에 너희를 칭찬하지 아니하나니 이는 저희의 모임이 유익이 못되
고 도리어 해로움이라. - 여기 "이 일"이란 말은, 이 아래 나오는 고린도 교회의 분쟁
에 관한 바울의 경계를 가리킨 듯하다. 그러면 그 분쟁은 어떤 것인가? 그것은 이렇
다. 곧, 그들이 교회에 모일 때에 성찬이 참되이 거행(擧行)하지 않고 사교적(社交的)
인 애연(愛宴)을 가졌다. 그것도 그들이 온 교회가 서로 사랑하는 중에서 가지지 않
고, 부요한 자들은 자기들끼리 먼저 먹고 가난한 자들은 제외(除外)되는 형식으로 취
하였따. 그러니만큼 거기 두 파가 서로 알력(軋轢)하였다.
고전 11:18
첫째는 너희가 교회에 모일 때에 너희 중에 분쟁이 있다 함을 듣고 대강 믿노니. -
여기 "첫째"란 말은 꼭 차서적 순번(次序的順番)을 가리킨 것이 아니고, 중요한 것을
따져 말하는 것 뿐이다. "분쟁"이란 말은 헬라 원어로 스키스마타(* )
니 분열(分裂) 혹은 당파를 의미한다. 분명히 그 교회에 부유층(富裕層)과 빈궁층(貧
窮層)의 양파가 있은 듯 하다(Hodge). 한 교회 안에 의견 차이가 있어도 서로 겸손히
사랑으로 포용하는 정도라면, 그냥 교회 질서(敎會秩序)가 계속적으로 유지될 수있다.
그러나 그들 사이에 의견대립(意見對立) 때문에 분열이 생길 정도라면 수습이 곤란하
다. 그런 경우엔 옳지 않은 자들 측이 급히 귀정(歸正)되어야 한다.
"대강 믿노니" 이 말씀은, 풍문(風聞)에 대한 바울의 신중한 태도를 보여 준다. 그
는 들리는 말을 다 믿지는 않으려고 노력하였다.
고전 11:19
너희 중에 편당이 있어야 너희 중에 옳다 인정함을 받은 자들이 나타나게 되리라.-
본 절 초두에 (헬라원어에 의하여), "왜 그런고 하면"(* )이란 말이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본 절은 윗절 말씀의 이유를 보여준다. 바울이 고린도에서 들려 오는 말을
대강만 믿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이렇다. 곧, 하나님께서 어떤 때엔 교회 안에
신자들 사이에 의견 대립을 허락하신다. 또한 그렇게 되어야만 필경 옳은 측의 의견이
드러나게 된다. 그러니만큼 고린도 교회에도 신자들 사이에 그런 대립이 있다고 할 때
에, 바울은 그 사실이 있을 수도 있다고 대강 믿었다.
그러나 바울은 그 교회 안에 편당이 오래 가지 않고 속히 옳지 않은 것이 드러나고
귀정(歸正)되기를 원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이 아래(20-22절)에 옳지 않은 측에 비판
을 가한다.
고전 11:20
그런즉 너희가 함께 모여서 주의 만찬을 먹을 수 없으니. - 고린도 교회에 분쟁이
있는 고로 (18절), 그들은 "주의 만찬"을 먹기에 불가능하다. 이 분쟁은 바로 성찬 거
행의 장소에서 되어지곤 하였으니 어떻게 진정한 성찬 거행이 성립될 수 있을까? 이
분쟁의 내막은 이 아래 21, 22절이 밝혀준다.
고전 11:21
이는 먹을 때에 각각 자기의 만찬을 먼저 갖다 먹으므로 어떤 이는 시장하고 어떤
이는 취함이라. - 그 때에 "애연"(愛宴)이란 것이 있었는데 여기서 그것이 관설된다.
그때 교회의 신자들이 애연에 참예할 때에 각각 자기 먹을 것을 집으로 가지고 와서먹
으며, 또 그 식사 중에와 식사 후에 성찬 떡과 포도주를 돌린 것이다. 이와 같은 애연
과 함께 성찬을 거행함이 폐단을 가져왔으므로, 후에 칼타고(Carthago) 공의회는 애연
의 풍습을 아주 폐지시켰다(augustine's Antipuities of the Christian Church, 1,
p.229). "어떤 이는 시장하고 어떤 이는 취함이라." 즉, 가난한 자는 집에서 가져올
것이 없으므로 시장하고, 부자는 과식(過食)하여 불공정한 결과를 연출하였다는 말씀
이다. 이와 같은 형편에서는 당파가 갈릴 것 뿐이다. 그렇다면 그런 좌석에서 어떻게
성찬이 거룩되이 거행할 수 있을까?
고전 11:22
고린도 교인들은 애연도 애연답게 가지지 않을 뿐더러, 그것과 성찬을 섞어서 거행
하였으니(21절 주석 참조), 그것은 (1) 하나님의 교회를 업신 여김이고 (2) 빈궁한 신
자들을 부끄럽게 만든 잘못이다. 바울은 이 죄악을 꾸짖는다.
고전 11:23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이니 곧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떡을 가
지사. - 헬라 원문엔 본절 초두에도 "왜 그런고 하면"(* )이란 말이 있으니 본절
부터 앞절의 이유가 밝혀진 것이 분명하다. 앞절에서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을 칭찬 할
수 없다고 하였다. 그 이유로서 그가 본절부터 말씀한 것은, 주님이 명하신 성찬의 거
룩된 성격에 비추어 볼 때에 고린도 교인들은 범과(犯過)하였다는 것이다.
"주께 받은 것" 이것은, 그가 주님의 성찬 교훈을 간접적으로 다른 사도들을 경유
하여서 받았다는 뜻이 아니고 직접 주에게서 받은 것을 의미한다(Hodge). 이것은 물론
그가 계시(啓示)에 의하여 성찬에 대한 주의 교훈을 받은 것을 가리킨다. 행 18:9,
22:18, 23:11, 27:23-25; 갈 1:12, 2:2; 고후 12:7을 보면, 바울은 계시에 의하여 주
님의 말씀을 받은 적이 많다.
고전 11:24-26
바울은 여기서 성찬에 대하여 예수님의 말씀하신 바를 소개하여 준다. 그리하여 그
는 성찬 거행에 신중을 기해야 될 것을 지적한다.
성찬의 의미에 대하여 학자들의 의견이 불일치(不一致)한 점이 있다.
달만(Dalman)은, "내 몸"이란 말이 본래 아람 말이었다면, 그것이 "나 자신"이란
뜻으로도 번역될 수 있다고 하면서, 이것은, 성찬거행에 따라서 자신이 임석(臨席)하
실 것을 의미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성찬의 속죄적 의미(贖罪的意味)를 약화
(弱化)하는 해석이다. 또 다른 학자는 성찬이 유월절만 관계한 것이고, 예수님은 유월
절 양만 비유하였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만찬 석상에서 양을 지적하여 말
씀하신 일이 없다. 성찬은 유월절에 관계한 것이지만 동시에 구약의 모든 희생 속죄
(예컨대 특히 시내산에서 드린 속죄제)를 자기의 속죄(贖罪)로 성취하신다는 것을 생
각하게 한다. 이 의미에서 이 성찬은 구원사적(救援史的) 의의(意義)를 가지고 있다.
또 다시 다른 학자는 말하기를, 예수님께서 성만찬을 잡수실 때에(이렇게 성찬 예식을
세우실 때에) 자기가 십자가 위에서 죽으실 것을 그 예식(禮式)으로 실행하신 것이라
고 한다. 이것은 그릇된 학설이다. 성찬은 예수님께서 죽으심으로 이루어진 사죄(赦
罪), 축복, 평안, 희락, 구원을 이제부터 그의 백성에게 주신다는 것 뿐이고, 십자가
죽으심에 대한 모형적 실행이 아니다. 즉, 성찬은 죽으심의 실행이 아니고 죽으신 결
과로 그의 백성이 받을 축복을 나누어 주는 일이다. 떡을 떼심은, 그의 몸이 상처를
입은 광경을 표시(表示)함이 아니고 그 상하신 몸의 영적 혜택(靈的惠澤)을 그 백성에
게 나누어 주심이다.
상징(象徵)과 물질(物質)과의 연결 문제를 생각함에 있어서, 떡과 포도주가 실제로
예수 그리스도의 육체적 요소로 화한다는 화체설(化體設)이나 공재설(共在設)은 그릇
된 학설이다. "이것은 내 몸이라"는 말씀은 비유 뿐이다. 그것은 마치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는 어투(語套)와 같은 표현이다.
성찬에 대한 참된 해석은 다음과 같다. (1) 성찬은 주님 자신(自身)이 죽으시는 광
경을 보여 주는 것이라기 보다 그 속죄의 죽음의 결과를 나누어 주는 일이다. (2) 성
찬의 효과는 그 사용되는 물질의 사정과 관계된 것이 아니다. 곧 물질이 변하여 살이
되거나, 혹은 그것이 어떤 모양으로든지 그리스도와 관계되는 데서 성찬의 효과가 발
생되는 것은 아니다. 성찬의 효과는 오직 그리스도의 약속하신 말씀에 달려있다. 약속
(約束)하신 이도 그리스도요 축복하실 이도 그리스도이시다. (3) 성찬이 주는 효과는
다만 복음을 듣는 것 만큼의 효과를 가진다. 그것의 권위는, 산상 보훈(山上寶訓)이나
기타 복음 전도(福音傳道)의 권위와 같은 것이다.
고전 11:27
그러므로 누구든지 주의 떡이나 잔을 합당치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의 몸과 피
를 범하는 죄가 있느니라. - 이것은 성찬 거행에 있어서 고린도 교회의 잘못된 것을
지적한 말씀이다. 그 교회의 교인들이 모여서 애연(愛宴)을 지내면서 빈부(貧富)의 차
별을 지었으므로피차 간 재미 없이 되었다(21-23). 그런 방식의 성찬 거행은 합당치
않다.
"주의 몸과 피를 범하는 죄"는, 주님의 몸과 피에 대하여 잘못 취급하는 죄란 뜻으
로서 큰 죄란 말이다.
고전 11:28
사람이 자기를 살피고 그 후에야 이 떡을 먹고 이 잔을 마실지니. - "자기를 살핀
다"함은, 자기로서 예수님의 죽으심이 속죄의 공효 있는 것임을 아는지 살피는 것이며
또한 자기의 죄를 살펴 회개함을 이름이다.
고전 11:29
주의 몸을 분변치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는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니라. -
주의 몸을 분변치 못함은 성찬을 보통 음식과 같이 취급하여 먹음을 이름이다. 그리고
"죄를 먹고 마신다"는 말은 헬라 원어로는 심판(* )을 먹고 마신다는 뜻이다.
고전 11:30
우리가 우리를 살폈으면 판단을 받지 아니하려니와. - "약한 자"란 말은, 몸이 약
해진 자라는 뜻이고, "잠 자는 자"는 별세한 자라는 뜻이다. 그들마이 그렇게 된 원인
은, 성찬을 보통 음식과 같이 취급한 죄악이 있었다.
고전 11:31
우리가 우리를 살폈으면 판단을 받지 아니하려니와. - 여기 "살폈다"는 말은 회개
를 의미한다. 그때에 고린도 교회의 신자들이 회개하는 신분으로 성찬을 받았더라면
정죄를 면할 번 하였다.
고전 11:32
우리로 세상과 함께 죄 정함을 받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 하나님께서 이렇게 성
찬에 대하여 범죄한 자들을 징계하신 목적은, 그들이 그런 벌을 받고 회개케 하려는
데 있었다. 육신상으로는 죄인들이 죽는데까지 이르는 징계를 받게 하여서라도, 그들
의 영혼은 구원 받도록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이다(고전 5:5).
고전 11:33
그런즉 내 형제들아 먹으러 모일 때에 서로 기다리라. - 즉, 일부 회원(一部會員)
들이 음식을 가지고 교회에 와서 먼저 먹으므로, 성도들 전체의 교제를 의미할 성찬의
의미를 상실(喪失)한다. 그들은 성찬을 애연(愛宴)과 혼동(混同)시켜서 하나의 사회적
성격(社會的性格) 있는 연회로 만들었고 그것마저 질서 없이 거행하여 타락시켰다. 바
울은 여기서 그것을 교정시킨다.
고전 11:34
만일 누구든지 시장하거든 집에서 먹을마지니 이는 너희의 판단 받는 모임이 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그 남은 것은 내가 언제든지 갈때에 귀정하리라. - "시장하거든 집에서 먹을지니" 그때에 고린도 교인들이 성찬을 참되이 거행하기 위함 보다 연회의목적으로 모여 보통으로 음식을 나누어 먹었다. 그러므로 바울은 이런 폐풍을 금지시켰따. 그들이 그렇게 성찬을 잘못되이 취급하는 때엔 하나님의 "판단"(심판)을 받을 수 밖에 없었다(30절). "그 남은 것"이란 말은, 위에 말한 성찬 관계의 문제 밖에 다른 문제들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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