롬 5:1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 4:3, 25 해석 참조. 하나님으로 더불어 - 이 말은
헬라 원어로 프로스톤 데온이니 "하나님으로 더불어"라고 함보다 차라리 "하나님
을 향하여", 혹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라고 함이 좀 더 글 뜻을 나타낸다.
화평 - 크레다너스(Greijdanus)는 말하기를, 이것은 심령의 상태보다는 차라리 하
나님과 신자와의 관계의 화평을 가리켜 말한다고 하였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음으
로 말미아마 칭의(稱義)된 후에는, 하나님의 진노는 우리를 향하여 더 있지 않는 것이
다. 전에는 하나님의 원수였던 우리가 이제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니, 이것이 곧,
하나님과 우리와의 화평스러운 관계이다. 엡 2:13-19 참조. 이와 같은 관계를 지니
고 있는 자는, 심령도 화평스러워야 된다. 그러나 신자들 중에도, 공연한 염려와 걱
정으로 한평생을 보내는 자가 적지 않다. 어떤 여자가 염려를 많이 했는데, 그후에
하나하나 적어 놓고 생각해 보니, 그대로 된 것은 하나도 없었다고 한다. 염려와 걱
정은 생명을 죽이는 독약이다. 결국 그 염려건들의 대부분은 일평생 닥치지 않는다.
누리자 - 이 말의 헬라 원어는 에코-멘(* )인데, 이 말에 대하여 사
구(寫句)상 논쟁이 있다. 에코-멘(* )은 많은 중요한 사본들
(A,B,C,D,E,K,L)이 지지하나, 다른 사구 에코멘(* )도 있으니, 그것은
"코"음이 짧은 것인데 몇 사본(* , B)들의 교정자(校正者)들이 지지한다. 리츠만
(Lietzmann)은 장음(코-)을 바울의 대서자 더디오(16:22)의 오서(誤書)로 돌리고 단음
에코멘(* )을 지지하여, 이것이 바울의 이상에 맞는 뜻을 보인다고 했
다. 그러나 데오도레 즈안(Theodore Zahn), 홀츠만(Holtzmann), 벧드휘젠
(Veldhuizen)등은 장음(長音)의 에코-멘(* )을 지지하였다. 장음 에코
-멘을 취하는 경우에 있어서 그 번역은 우리 한글역과 같이 "누리자"라고도 할 수 있
고, "가지자"(Lasst uns haben-Zahn)라고 할 수도 있다. 만일 단음(短音)을 취한다
면, 그것의 번역은, "우리가 가지느니라"(현재도 가지고 있음을 뜻함)라고 할 것이다.
마이어(Meyer)는 말하기를, "바울이 아직 '누리자' 혹은 '가지자' 하는 권면에 이르지
않고 교리 문제에 관하여 설명하고 있다. 그러므로 여기서 장음의 에코-멘(권면적 어
투)을 취함은 적합하지 않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이유가 약하다.
롬 5:2
이 귀절은 앞절에 있는 "화평"의 유래를 말한다.
서 있는 이 은혜 - 여기 "서 있는"이란 말은 현재 완료 시상(現在完了時相)에 속하
는 동사(* )인데, 벌써 이 은혜에 참여했고, 또 현재 그 은혜의
자리에 있음을 가리킨다. 그런데 "이 은혜"란 것은 위에 말한 하나님과의 화평을 얻
는 그 자리이다(5:1).
들어감 - 이 말의 헬라 원어 프로스아고-겐(* )은, "인도
받아 들어가 대면함"이라고 번역함이 더 낫다. 이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중보적 인
도를 받아서 하나님과 화목하는 은혜에 입참함을 의미하는 말인데, 엡 2:18, 3:12에도
사용되었다. 이 말은, 유력한 소개자의 인도를 받아 엄위(嚴威)한 왕에게 대면함에
대하여 사용하는 말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없는 추하고 천한 자들이
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적 인도를 받아 하나님의 존전에 나아가 참여하게 되었다.
하나님의 영광 - 3:23의 같은 어귀 해석 참조. 이것은, 하나님의 임재하신 곳에
나타나는 영화로운 빛이다(출 24:16, 16:10, 40:34; 대하 5:14; 시 80:1; 롬 9:4).
그런데 여기서는 이것이 상징적으로 하나님의 완전성, 하나님의 복성(福性), 하나님의
계시(啓示), 하나님의 권능 등을 가리키는 바(요 2:11; 골 1:11에 대한 라이트푸트의
해석 참고. 엡 1:6-12, 17, 3:1, 6).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 세상에서는 부분적으
로, 내세에서는 충만한 분량으로 신자들에게 임한다(고후 3:18, 4:6; 롬 8:30; 딤후
2:1). 특히 이 귀절에서는 내세의 그것을 가리켜 말한다고 생각된다.
롬 5:3
이 귀절은, 위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한다"는 말씀에 대한 보충적 설명을 더한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내세적 영광을 바라보는 기쁨이 있는 반면에 이 세상에서는
환란을 당하게 된다. 그것이, 그의 내세적 영광을 인한 즐거움을 질식시켜 버릴수 있
는가? 아니다. 그것은, 도리어 우리의 내세적 영광을 인한 기쁨을 더하게 한다. 그
이유는, 그것으로 말미암아 내세적 영광에 대한 소망심이 더욱 성숙해가고 더욱 명료
해 가기 때문이다(이 귀절 끝 해석 참고).
다만 이뿐 아니라 - 신자는,내세적 영광의 소망으로 즐거워할 뿐만 아니라, 환란
가운데서도 즐거워한다.
우리가 환란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 하나님과의 화평에 들어간 사람들은, 환란에서
오히려 취미를 가진다. 새가 날아가는데 필요한 것이 공기인 것처럼, 그리스도인의
생활에 있어서 필요한 것은 환란이다. 왓슨(Watson)은 말하기를, "우리에게 임한 환
란은, 집에 비가 새는 것과 같다. 비가 와서 그 집에 새어 들어 오기 전에는, 그 지
붕의 어디에 구멍이 있는지 알 수 없다. 그와 같이 우리는 환란을 받아 보아야 자신
의 약점들을 발견하고 고칠 수 있다"고 하였다. "즐거워하나니." 이 말의 헬라 원어
(* )는 자랑한다는 뜻이다(마 5:10-12).
이는 - 이말이 헬라 원어에는 없으나 보역(補譯)된 것으로서, 환란 중에 즐거워해
야 할 이유를 보여준다.
환란은 인내를...이루는 줄 앎이로다 - "환란"이란 말은 헬라 원어로 들립시스
(* )인데, 들리보(* )란 동사(누른다는 뜻)에서 왔다. 이
것은 사람에게 압박을 주는 그 무엇이든지 다 가리키는 명사이다. 이것은 인내력을
배양해 주는 것이므로 귀하다. 인내(휘포모네=* )는, 견디어 나갈
뿐 아니라 적극적으로 모든 장애물을 헤치고 나가는 분투를 의미한다. 인내력 없는
사람은 아무데도 쓸데 없다. 인내는 인간을 아름답게 만드는 귀한 힘이고, 환란은 인
내를 생산하는 고마운 어미이다. 환란이 우리에게 보배로운 인내를 낳아 준다면 환란
은 우리의 생활에 있어서 승리에 이르게 하는 돌다리이다. 우리의 파괴를 위협하는
듯이 찾아온 환란은, 어느덧 우리에게 건설의 열쇠가 된다. 파괴자라는 누명을 썼던
그것은, 문득 건설자로 드러난다.
롬 5:4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 "연단"이란 말의 헬라 원어(* )는,
특히 환란과 핍박을 잘 통과한 경력(經歷)을 의미한다. 이 세상 일에 있어서도 좋은
경력이 귀하다면, 하늘 나라에 관계된 경력이야 말할 것이 무엇이랴? 신앙 생활에 있
어서 인내가 없으면 이 귀한 경력을 얻을 수 없다. 인내가 없는 자는 어떤 어려운 일
을 당해 보다가 끝을 내지 못하고 말게 되나니, 하나님의 권능과 내세의 소망을 경험
하지 못한다. 그러나 인내로 연단을 얻은 신자는, (1) 그 고난을 겪으면서 그 심령의
오점(汚點)도 떨어 버렸기 때문에 하늘 소망을 내다봄에 있어서 확실해진다. (2) 그
뿐 아니라, 그가 하나님의 은혜로 환란을 통과한 경력 때문에 앞으로 당할 환란도 어
떤 모양으로든지 하나님의 은혜와 권능으로 선히 통과할 수 있는 줄 알고 안심하며 소
망을 가진다.
앎이로다 - 헬라 원어로 에이도테스(* )니, 여기서는 인간적으로
배워 얻은 지식을 가리키지 않고 성령님의 교시(敎示)에 의하여 아는 것을 의미한다.
이와 같은 힘 있는 지식이 있으므로 신자는 그 당하는 환란 중에서 오히려 기쁨을 가
진다
롬 5:5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 - 이 말씀은, 신자가 소유한 "소망"의 성격이 어떠함을
보여 주었으니, 곧, 당당히 또는 부끄럽지 않게 가질 수 있는 소망이라는 것이다. 혹
이 말하기를, 여기 "부끄럽게 아니함"이란 말은 그 소망한대로 끝날에 어김 없이 성취
되므로 그 때에 실망치 않게 되리라는 의미라고 한다. 그러나 "부끄럽게 아니함"이란
어귀(* )가 현재 시상(現在時相)이고 미래가 아님을 보
니, 그것은 내세 소망이 현세에도 확고 부동함을 가리킨 것이다.
인간은 역경을 당할 때에 그만 그가 가졌던 소망도 내버리는 약점을 가지고 있다.
그 이유는, 그 가진 소망의 지지자인 인내가 인력(人力)을 밑천으로 하였기 때문이다.
보통 그들은, 많은 역경을 견디고 나온 뒤에도 마침내 실망한다. 그러나 신자의 소망
은 이와 달라서 순신앙(純信仰)의 것이니, 인간의 자력(自力)으로 더불어 운명을 함께
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의 근거는 인간의 능력에 있지 않고 하나님의 능력에 있다.
우리 자신의 힘이 떨어진 뒤에도 하나님의 능력은 계속 역사할 수 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 이 문구는, 그
위에 있는 "소망이 부끄럽지 아니"하게 되는 원인을 보여준다. 이 어귀의 뜻은, 성령
님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알려지는 하나님의 사랑(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
은 물붓듯이 풍성한 큰 사랑이라는 것이다. 일설에, 여기 "하나님의 사랑"이란 말은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랑을 의미한다고 하는데(Augustine), 적당한 해석이 아니
다. "부은 바 됨"은 헬라 원어로 엑케퀴타이(* )인데, (1) 물붓
듯이 구원의 은혜를 풍족히 주심을 가리키며(욜 2:28), (2) 마른 땅에 물을 부어 곡식
을 소생시키듯이, 하나님께서 죄로 인하여 해골과 같이 된 인간들에게 구원의 은혜를
부어 주시어 그들을 다시 살리시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다(사 44:3).
롬 5:6
이 귀절은 헬라 원어 가르(* )로 시작하였으니, 그것은, 위의 말씀에 대한
설명 혹은 이유를 소개하는 접속사(接續詞)이다. 하나님의 사랑이 어떻게 크다는 것
이 이 귀절 이하에 설명된다.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 이것은, 벌써 복음을 믿어 성령을 받은 처지에서 한 말
이다. "연약"이란 말은, 여기서 인간이 그리스도를 믿기 전에 가지는 육체적 행습(肉
體的行習)을 가리킨다. 이 어귀의 뜻은 다음과 같다. 곧, 우리가 지금은 신자로서
육에 속한 자(연약한 자)가 아니지만, 복음을 믿기 전에는 그리 하였다는 것이다. 그
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신때는, 우리가 연약하던 그 때 곧, 육신에 속하였던
그 때니, 이는 하나님과 원수되었던 그 때이다.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
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8:7)고 하였다.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원수였던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으니 하나님의
사랑이 크신 것을 우리가 알 수 있다(요 3:16). 이 사랑은 절대적인 사랑이니, 곧,
무조건적인 사랑이다. 이 세상의 사랑은 모두 다 조건적인 사랑이니 예컨대 친자 관
계(親子關係)의 사랑, 이성 관계(異性關係)의 사랑, 우의 관계(友誼關係)의 사랑이다.
친자 관계의 사랑은 혈통적 조건에 본능적으로 끌린 것이고, 우의 관계의 사랑은 이해
관계에 끌린 사랑이다. 이런 조건적 사랑도 진리의 절제 아래서 진실한 것이면 선하
다. 그러나 무조건적(無條件的) 사랑은, 하나님의 아들의 강림으로 나타났으니, 그것
은 말할 수 없이 선하고 위대한 것이다. 그것이 신자들에게 참되고 확실한 평화와 기
쁨을 채우는 것이다. 시 27:10에 말하기를, "내 부모는 나를 버렸으나 여호와는 나를
영접하시리이다"라고 하였고, 사 49:15에는 말하기를, "여인이 어찌 그 젖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고 하였다.
기약대로, 이 말의 헬라 원어(* )를 직역하면, "때를 맞추
어"이다. 이 점에 대하여 칼빈(Calvin)은, 이것이 "우리가 연약할 때"를 맞춘다는 의
미라 하고, 리츠만(Lietzmann)도 그와 같은 견해를 취하였다. 그러나 이 해석은 부자
연스럽다. 하나님의 사랑이 지극히 크심을 알려주는 이 장면에 있어서, "때를 맞추
어"라는 말 뜻은 이렇다. 곧, 하나님의 사랑이 우연적이 아니며 임시 처변(臨時處變)
의 것이 아니고, 영원 전에 예정하신대로 나타날 시기에 나타난 것을 가리킨다(갈
4:4).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 여기 "경건치 않은자"란 말
도, "연약한 자" 곧 불신자(육에 속한 자)를 가리킨다. 예수님의 모든 교훈이나 행적
은, 그의 속죄(贖罪)의 죽으심에로 집중되어 움직인 것이다. 그의 죽으심은, 그 모든
교훈과 행적들의 의의(意義)를 성립시킨다.
롬 5:7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 "의인"이란 말은 헬라 원어로 디카이오스(* )이고, "선인"이란 말
은 아가도스(* )인데, 이 둘의 구별은 이렇다. 곧, "의인"은 율법의
규정을 준수하는 자로서 다른 사람에게서 존경을 받고, "선인"은 사랑으로 행하는 자
로서 다른 사람에게서 사랑을 받는다. 다른 사람을 위하여 자진하여 감심으로 죽는
일은, 존경심보다 애정의 움직임에서 생길 수 있는 일이다. 그러므로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는 쉽지 않아도 선인을 위하여 죽는 자는 혹시 있을 수 있다. 일설에, 여기
"의인"으로 번역된 디카이오스(* )는 그저 "의"라는 말로 번역되고,
"선인"으로 번역된 아가도스(* )는 그저 "선"이라고 번역함이 옳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 견해는 옳은 것 같지 않다.
롬 5:8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 5:6의 상반문 해석 참조.
자기의 사랑 - 이 말의 헬라 원어를 직역하면 "그 자신의 사랑"이다. "그 자신의
사랑"이라고 함은, 두 가지 뜻이 있다. 곧,
(1) 위의 인간적 사랑(7절)에서 분별된 그 자신의 사랑(하나님의 사랑)이라는 뜻과,
(2) 하나님의 자발적인 능동적(能動的) 사랑이라는 뜻이다.
확증하셨느니라 - "확증"한다 함은 현재사(現在詞)이다.
여기 현재사가 사용된 목적은, "증거의 강력함을 보여 주기 위한 것이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현재에도 그 사랑을 뚜렷하게 보여 주고 있다"(H. N. Ridderbos). 인간은
의인이나 선인을 위하여도 죽는 예가 적은데,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죄
인들을 위하여 죽으셨다. 그것은 신적(神的)사랑, 곧 무조건적 사랑이다(요일
4:9-10).
롬 5:9
사도 바울은 6-8절에서 우리의 소망의 부끄럽지 않음을 성립시키는 요소로서 하나
님의 사랑을 들어 말하였다. 그리고 이 귀절 이하에는 그것의 결론을 지었으니, 큰
것에서 작은 데 이르는 논법으로 된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큰 것을 하셨
으니, 작은 것은 물론 하실 수 있다는 논법이다.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 이 말씀은, 칭의(稱義)의 은혜가 우리
자신들의 그 무엇에도 달리지 않고, 전적으로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으심에 달렸다는
사실을 밝혀 준다(엡 2:13; 히 9:12). 여기 "그 피를 인하여"란 어귀의 "피"란 말은,
단순히 예수님의 죽으심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고, 그의 부활과 연쇄 관계를 가진 보
혈을 말함이다. 이것이 이렇게 생각되는 이유는, 4:25에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
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고 한 말씀을 보
아서 우리의 칭의는 예수님의 부활로야 완전히 성립됨을 알 수 있다.
더욱 - 이것은 헬라 원어로 폴로-말론(* )이니, "더 풍
부히"란 의미가 아니고 "더 확실히"란 뜻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그 독생자
를 희생하셨으니 그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이렇게 큰 사랑을 기울여 우리를 칭의하
셨으니, 앞으로는 그런 희생 없이 성취될 구속 사업을 더 확실히 하실 만한 일이겠다.
이 장(5장)에 "더욱이"란 말이 네 번 나오는데, 두 번은 우리의 구원의 안전성을 역설
함에 사용되었고(9-11), 다시 두 번은 구원하는 은혜의 풍성함을 역설하는데 사용되었
다(15-17).
그로 말미암아 - "그"란 말은, 부활 승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켜 말한다.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 - 여기 "진노하심"은, 세상 끝날에 나타날 하나
님의 종말적 진노(終末的震怒)를 뜻한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얻은 것은, 우리가 의로운고로 그렇게 된 것이 아니고 우리가 의롭지 못하였음
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된 것이다. 따라서 이전에 교만하였던 우리가 이제 지옥에까지
낮아지는 겸비로 떨어져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지옥을 결론으로 하는 겸비가 아니
다. 그 겸비한 마음은,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칭의 받은 사실을 생각하고 하늘위
에까지 이르는 감사와 기쁨을 가진다. 지옥에까지 내려가는 겸비와 하늘위에까지 올
라 넘치는 감사(기쁨)는, 그리스도인의 현세 행보(現世行步)의 두 다리를 이룬다. 이
두 가지가 성도의 세마포 옷(계 19:8)의 날과 씨이다.
롬 5:10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 - 인간은 범죄한 후 하나님과 원수되었다. 그것
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미워하시어 소망을 아주 끊으셨다는 말이 아니다. 인간이 하
나님의 원수였지만, 하나님께서는 원수된 인간을 사랑하사 독생자를 보내시어 구원하
게 하신 것이다.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그와 하나님과의 화목이 이루어졌고, 또 그
화목은 영원히 깨어지지 않는다. 참 신자가 혹시 죄를 범한다 해도, 이 화목에는 변
동이 없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우리는 방종한 생각으로 범죄하려고 할 수는 없
다. 그 이유는, 신자는 홀로 생활하는 것이 아니고 성령님과 함께 생활하기 때문이다
(8:14). 성령님의 감화 아래 있는 우리가 어찌 성령님을 거스리는 생각을 가지며, 또
가질 수 있으랴. 그 뿐 아니라, 참 신자가 범죄하면 이 세상에서 받는 벌이 크다.
다윗은 범죄한 결과로 그의 집안에 뼈아픈 환란이 있었다.
화목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 - 신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인하여, 그 죄 값을 하나님의 공의(公義) 앞에서 청산 받았다.
그러나 그에게는, 적극적 구원이 필요하게 되었던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이 요구를 채워 주시려고 다시 사셨다. 그가 다시 사셨으므로 그의 의(義)는 우리의
의가 되고, 그의 영광은 우리의 분깃이 되었다. 크레다너스(Greijdanus)는 말하기를,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시기까지 하셨는데, 이제 그가 다시 살아나서 우리
를 멸망에 버려두시랴?"고 하였다.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시므로 우리를 죽은 가운데서
살리실 수 있는 모든 권세와 능력을 받으셨다(마 28:18; 엡 1:22; 계 1:18; 히 2:10,
7:25; 고전 15:25).
롬 5:11
화목을 얻게 하신 - 이 말씀이, 윗절에도 두 번 나왔는데도 불구하고 여기 또 나온
다. 바울이 이 말씀을 이렇게 여러 번 거듭하여 역설(力說)한 이유는, 신인 화목(神
人和睦)의 은혜가 모든 다른 은혜의 기본이며 열쇠인 까닭이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 여기 "말미암아"란 말은, 방편(方便)으로서의 경유(經由)를
말하는 것이다. 그 방편은, 우리를 위한 그리스도의 중보(仲保)이다.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 - 우리에게는 미래의 구원을 받는 광명한 장래
가 있을 뿐 아니라 현세의 기쁨도 있다. 그것은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기쁨이다. 하
나님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서 우리 신자들의 소유가 되셨다(Calvin). 고전 1:31; 고
후 10:17 참조.
롬 5:12
이 귀절 이하는, 이때까지 말해 오던 믿음으로 의를 얻는다는 진리를 근원으로 올
라가 해명한다. 그러므로 크리소스톰(Chrysostom)은 말하기를, "좋은 의사가 병을 취
급함에 있어서 그것의 근원 탐색에 전력함과 같이, 바울은 죄악 문제와 및 구원 문제
를 논함에 있어서 역시 그리한다"고 하였다. 로드(Rothe)는, 본장을 칭의론(稱義論
혹은 義認論)의 계속으로 보지 않고 성화론(聖化論)의 출발로 보았다. 그러나 이 학
설은 성립될 수 없다.
이러므로 - 이 결론적 언사는, 무엇과 관련을 가지는가? 이것이, 위말에 관련되어
사용된 것만은 의심 없다. 바울은, 한 사람 한 사람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
에게 미친 구원의 은헤를 생각하다가, 멸망도 한 사람 아담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들
에게 미친 사실을 회고하게 되었다. 거기서 다시 그는 구원론을 뿌리 깊이 말하게 된
다.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 아담이 범죄하기 전에 자녀를 생산
하지 않았으니 만큼, 그의 후손은 모두 다 범죄한 조상에게 속한 것이다. 다시 말하
면, 오직 한 사람인 죄인이 인류의 조상이었고, 의인인 딴 조상이 없었다. 이렇게 타
락한 조상 아담을 대표자로 가진 인류(人類)는 다 죄인이다. 그러나 페라기안
(Pelagians)학파에서는 말하기를, "사람은 생래적(生來的)으로 죄인이 아니다"라고 하
였다. 그러나 이 학설은 이 성경의 뜻을 위반하는 말이다.
사망이 왔나니 - 사망은, 죄를 벌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죄를 범한 아담에게는
그의 피조성과 연약성을 보여주는 것이 필요하였다. 그 때에 하나님께서 그에게 "너
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라" 하시고(창 3:19), 그를 자기에게서 분리시킨 것이다. 따
라서 그는 흙의 성격을 그냥 나타내게 되는 날이 왔으니 그것이 육신이 죽는 날이었
다. 몸으로 죽는 것도 그와 하나님과의 분리로 말미암은 것이지만, 그것보다도 더 무
서운 분리는 영적(靈的)의 것인데, 그의 영혼이 하나님에게서 떠나서 지옥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 아담이 죄를 범한 결과로 모든 인류가 죽음의 법칙에 매이게 되었다는
뜻이다.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 이 어귀는 헬라 원어로 엡 호 - 판테스 헤말톤
인데, 번역자들의 의견이 일치하지 않다.
(1) "모든 사람이 죄를 아담 안에서 지은지라"고 함. 이 번역은 엡 호-(* )
를 "그의 안에서"라고 보았다. (2) 우리 한역(韓譯)과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
으므로"(Theodoret, Sanday)라고도 함. 어느 번역을 취하든지, 조상 아담 안에서 모
든 인류가 범죄하게 된 것을 가리킨다. 여기 "모든 사람" 이란 말은 어린 아기도 포
함한다.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 여기 "이르렀다"는 헬라 원어 분배적
(分配的)으로 각 사람에게 두루 미치게 된 사실을 가리킨다. 사망은 죄값이니, 죄 있
는 자마다 사망을 당한다. "나는 하나님 앞에서 무죄하다"라고 할 사람은 없다(3:10).
롬 5:13,14
율법 있기 전 - 이 시대는 바로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의 기간을 가리켜 말한다.
이 시대에도 죄는 계속 활동하고 있었다. 사람이 있는 동안 죄는 있다.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 위에도 사망이 왕노릇 하였나니 - 곧,
13절에 말한 것 같이, 율법 있기 전(아담으로부터 모세 때까지)에도 사람들에게 죄가
있었기 때문에 그들도 죽었다는 뜻이다. "사망이 왕노릇"하였다는 것은,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유루(遺漏)없이 임하였다는 뜻이다.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 - 곧, 한 사람이 많은 사람들을 대신하는 원리에 있어서,
아담은 벌써 그리스도의 표상(表象)이라는 뜻이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 벌써 오
래 전에 첫 사람 아담에게서 그리스도의 속죄 원칙을 예표하셨다. 그러므로 대표 원
리는 우연한 것이 아니고 구원사적(救援史的)인 진리이다. 따라서 절대로 믿을 만하
다. "표상"이란 말(* )은 "예표"란 의미로 해석되기도 하나(Lietzmann),
"비유"란 뜻으로 생각되기도 한다(Calvin).
롬 5:15
은사 - 헬라 원어로 카리스마인데, 이 귀절 하반의 "은혜"란 말과 다르다. "은사"
는 은혜롭게 행하여진 행위니, 예컨대 그리스도께서 죽으셨던 일을 가리키고, "은혜"는
모든 은혜로운 행위의 원천을 가리킨다. 요컨대 이 두 가지 말씀은, 여기서 서로
결과와 원천의 관계를 가진다.
범죄 - 이 말의 헬라 원어는 파랍토-마인데, 여기서 인류의 조상 아담의 타락을 가
리켜 말한다. 이 귀절은, 인류의 대표자로서의 아담의 일과 및 그리스도의 일과의 차
이점들 중 하나를 지적하였다. 곧,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은사가, 아담으로 말미암은
죄악보다 질(質)과 양(量)에 있어서 우세(優勢)를 가진다는 것이다.
더욱 - 이 말의 헬라 원어는, "하물며"라고 변역할 수도 있다. 일개 인생(아담)의
행한 일을 유일한 근원으로 하는 죄악도 모든 사람들에게 고루고루 미쳤거든, 하물며
이중 원동력(二重原動力), 곧 하나님의 은혜와 예수 그리스도의 선물(은혜로 주신 선물)
로 말미암은 의(義)의 세력은 얼마나 강하랴! 율리케르(Julicher)도 생각한 바와 같이,
여기서는 모든 논리적 언변이 끊어질 만큼 강하다. 이와 같은 구원의 은혜로 신자들은
범죄 전 사람(아담)의 복된 상태보다 훨씬 탁월한 자리에 이르게 된다. 그리스도 신자
들은, 아담이 처음에는 소유하지 못하였었던 중보자 그리스도와 영원한 영광의 기업을
함께 누리게 된다.
롬 5:16
심판은 한 사람을 인하여 정죄에 이르렀으나 - 여기 "심판"이란 말의 헬라 원어
(* )는 심판하는 행위를 말함이 아니고 심판의 결과를 가리킨다(Theodore
Zahn). "한 사람"이란 말은, 헬라 원어로 헤노스(* )인데, "한 사람"이라
고 변역할 수도 있으나 그것을 "하나"라고 번역할 수 있다. 라이트푸트(Lightfoot)나
크레다너스(Greijdanus)는, 둘째 번역을 취한다. 그렇다면 이 "하나"란 것은, 한 범
죄 곧 아담의 범죄를 가리킨 것이다. 그리고 "인하여"란 말의 헬라 원어(* )
는, "에서"라고 함이 적당한 번역이다. 그러면, 이 귀절이 지적하는 아담과 그리스도
와의 둘째 차이점은 이렇다. 곧, 아담으로 말미암은 심판은 아담의 범죄 하나를 상대
로 한 것이지만,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은사는 많은 사람들의 많은 범죄들을 상대하고
주신 것이다. 비유컨대 심판은, 큰 삼림(森林)에 화재를 일으킨 최초의 한 나무에 불
붙임이고, 은사는, 그 불붙는 많은 나무들의 많은 불꽃들을 넉넉히 끄는 소화기(消火
器)이다. 그러면 심판은 하나에서 퍼진 것이고 구원은 많은 사람들의 많은 죄악들을
상대하여 개별적(個別的)으로 속죄하여 주신 것이다. 만일 구원을 주시는 방법이, 개
인개인 상대가 아니고 단체상대(團體相對)의 것이라면, 그것은 사랑과 성의(誠意)를
가지지 못한 것이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구원의 방법은, 개인개인 상대의 것이다.
한 나무에 붙은 불이 온 삼림(森林)에 순순히 번지는 것 같이, 인류의 조상된 아담 한
사람이 받은 벌은 순순히 그 모든 후손들에게 미쳤다. 그러나 은사는 삼림의 모든 나
무에 붙은 불을 일일이 끄는 것 같이, 많은 사람들의 많은 범죄를 일일이 구속하는 힘
드는 일이다. 아담의 범죄와 그 받은 심판은, 무거운 돌을 산꼭대기에서 굴려 버림과
같다고 하겠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속죄는, 그 굴러내린 무거운 돌을 들고서 산 꼭대
기에 올라감과 같다. 그렇게 어려운 일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완성되었다. 그것을
완성하려고 기울인 하나님의 사랑의 힘은, 범죄와 심판의 세력에 비하여 천양지차(天
壤之差)로 크다. 우리는, 죄의 세력으로 나타난 현세(現世)의 모든 역경과 곤란과 질
병을 보고 낙망할 것 없다. 구원의 세력은 그것에 비교할 수도 없이 크다.
많은 범죄를 인하여 - 이 어귀의 헬라 원어는 "많은 범죄에서"라고 함이 적당
한 번역이다.
롬 5:17
이 귀절은 이유 접속사 가르(* )로 시작했으니, 앞절 하반에 있는 "많은
죄에서 의롭다 하심에 이름이로다"란 말씀을 확실하게 설명한다.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사망이 그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왕노릇 하였은즉 - 아담
한 사람의 한 죄를 통로(通路)로 하여 사망이 온 인류를 사망으로 주장하였다면, 풍성
한 은혜의 지지를 받는 신자들은 더욱 생명으로 왕노릇할 것이 확실하다.
생명 안에서 왕노릇 하리로다 - 사망은 인간을 주장할 때에 그들의 의사(意思)를
묻지 않고 지배하였다. 그러나 생명의 통치는 그렇지 아니하여 신자들 자신을 왕으로
세운다. 다시 말하면, 그것은 인간을 사망에서 해방하고, 살리고, 또 영광을 부여(賦
與)하여, 생명으로 왕노릇 하게 한다. 그것은, 신자들이 마침내 그리스도의 영광에
동참함을 가리킨다. 신자가 땅위에서 이 영광을 알고 살 때에, 승리의 생활을 할 수
있는 것이다.
롬 5:18,19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 의의 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많
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
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 이
두 귀절은, 위의 12-14절에 돌아가서 결론을 말해 준다(15-17절의 해석 참조). 이 귀
절들의 말씀은, 정죄나 구원에 있어서 꼭 같이 한 사람을 대표자로 세운 대표 원리(代
表原理)가 실시되고 있음을 지적한다. 여기 사용된 대표 원리에서 몇 가지 진리를 지
적할 수 있다.
(1) 사랑의 성격. 인간이 구조상 아담에게 대표되어 벌써 정죄된 것은, 얼른 보면
너무 무자비하게 취급된 듯하다. 그러나 실상은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준다.
아담은, 범죄하기 전에 인류의 대표자로 세움이 되었었다. 그러므로 그는 부패하기
전이었으므로 시험을 이길 만하였다. 그뿐 아니라, 아담의 자손들이 대표 원리에 의
하여 정죄 받은 것만큼, 이제 그들 중에서 신자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대표 원리에 의
하여 속죄를 받는다.
(2) 합리로운 성격. 아담은, 인류에게 대하여 자연적 근원(自然的根源)이며 머리
인 반면에, 그리스도는 영적(靈的)인 근원이시며 머리이시다. 죄는 아담에게서 왔으
며, 유전적으로 유출적(流出的)으로 아담의 자손들은 죄인됨을 면치 못한다. 그것은
합리롭다. 그것은 자연 법칙적이다. 그러나 죄인을 죽음에서 살리는 둘째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영적이고 초자연적(超自然的)인 머리이신 것이 합리롭다. 그 이유
는, 그는 죽은 자를 살리는 머리이시기 때문이다. 죽은 자를 살리는 일은, 자연적인
방법으로는 될 수 없다. 그리스도는 자연 법칙에 따라서 인류에게 임하시는 이가 아
니고, 영적 초월성(靈的超越性)에 의하여 인류에게 임하신다. 그러나 그도 우리와 인
연을 맺으시기 위하여 우리와 같이 되시기도 하셨다. 롬 8:2-3에 말하기를, "이는 그
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
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라고 하였다.
(3) 한 사람의 큰 힘. 아담 한 사람으로 인하여 많은 사람이 정죄 받은것 같이,
그리스도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구원을 받는다. 여기서 "하나"는 무력한
것이 아니다. 그 역량(力量)이 크고 많기 때문에 하나로 족한 것이다. 그리스도에게
있어서, 이것이 더욱 참되다. 그리스도께서 한 분 뿐이라는 사실 그것이 무언 중에
그의 무한대(無限大)를 의미한다. 그리스도에게 대하여 우리가 수학적(數學的)으로
말하자면, 그는 무한대이다. 딤전 2:5에 말하기를,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
과 사랑 사이에 중보(仲保)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고 하였다.
롬 5:20
율법이 가입한 것은 - 여기 "가입"이란 말은 헬라 원어로 파레이셀데
이니, 이미 있는 것보다 후에 측림(側臨)한 것을 가리킨
다. 곧, 모세의 율법이, 재래(在來)의 아브라함 계약(은혜 계약)을 돕기 위하여 후에
측림하였다는 것이다. 이 사실에 대하여는 갈 3:15-29의 말씀이 자세히 설명한다.
그 말씀을 주의 깊이 읽으라. 위의 해석은 크레다너스(Greijdanus)와 산데이(Sanday)
가 지지한다. 일설에는 "율법의 가입"이란 말이, 율법이 죄보다 후에 온 것을 가리킨
다고 하나(Luther, Calvin), 옳지 않은 해석이다. 그것(율법)이 측림하였다고 할 때
에는, 그것이 영구한 제도로서 임재(臨在)함이 아닌 것을 암시한다. 크리소스톰
(Chrysostom)은, 율법의 가입 이유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곧, "그것은 일
시적이고 비절대적(非絶對的)인 필요성을 띤다"라고 하였다.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 - 이것은, (1) 율법이 우리에게 죄 있음을 알게 하므로 죄
감(罪感)이 더해진다는 것과(Calvin), (2) 또한 우리가 악하여 율법의 명령에 반동(反
動)하는 경향이 있음을 말함이다(Augustine). 그러나 율법이 악하여 그런 결과를 내
는 것이 아니다. 율법은 거룩하고 선한 것이로되, 인간의 성품이 너무 악하여 선한
것을 통하여서 도리어 악화(惡化)한다(7:11-13).
루터(Luther)는, 여기 "범죄를 더하게" 한다는 점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예화로 해
설하였다. 곧, "의사가 병자를 고쳐주지 못한 경우에 그 병자는 말하기를, '당신은
나에게 위안을 주려 온 것이 아니고 실망을 증가시키려고 왔다'고 함과 같다"는 것이다(Vorlesung uber den romerbrief, p. 206).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 인간은 자신만만하여 하나님을 찾을 필요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율법이 그에게 임할 때에 그는 자기의 죄 많음을 깨닫고 그리스도에게로 돌아오게 된다. 그것이 넘치는 은혜이다.
롬 5:21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노릇 하여 - 여기 "의"는, 인간의 주관적인 의(義)가
아니고 그리스도의 무궁한 의를 말함이다. 이 무궁한 의를 믿음으로 소유한 신자는, 은혜의 주관(왕권)아래 있어서 영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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