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 6:1
이 귀절에서 가르치는 주요한 말씀은, 율법 실행의 방법론에 대한 총괄적 머리말
이다. 곧, 그 내용은 사람의 안목에 맞추어 보려고 하지 않고 깊이 하나님의 마음에만
들기 위한 생활 곧, 은밀한 생활을 가지라는 것이다.
너희 아버지께 상을 얻지 못하느니라.- 이 문구에 대하여 우리가 생각해 볼 문제가
두 가지 있으니 첫째로 이 말씀이 율법을 행하므로 구원 얻는다는 교리를 가르치는 가
하는 것이고, 둘째로는 하나님의 상급을 얻기 위하여 선을 행함이 옳은가 하는 문제이
다.
(1) 이 문구는 율법을 행하므로 구원 얻는다는 교리를 가르치지 않고 다만 선을 행하
므로 상을 얻는 원칙을 가르친다. 여기서는 구원 문제를 직접으로 논하지 아니한다.
우리가 구원을 받는것은 아무 공로도 없이 하나님의 특수 은총에 의하여 받는것이지만
, 천국에서 받을 상급을 우리의 행위 여하에 상관을 가진다. 우리가 이 점에 있어서
또 한가지 기억해야할 것은 하나님께서는 선을 행한 자에게 영광을 주시되 역시 은혜
의 법칙대로 하시어 인간의 공적보다 휠씬 넘치게 큰 영광을 주신다는 것이다.
(2) 천국의 상급을 얻기 위하여 선을 행함은 비열한 도덕이 아니다. 그 이유는 인간
은 자율자가 아니고 하나님에게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내세의 상급
제도를 두시고 우리로 하여금 의를 행하도록 장려하신다. (고전9:24-27)
마 6:2
나팔을 불지 말라.- 이 말은 제 자랑으로 구제 사업하는 것을 금지하는 은유이다.
구제 사업 하면서 실제로 나팔을 분 풍속은 허다하다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 그들이 명예를 위하여 구제사업을 하였은데 이제 사
람의 박수와 칭찬을 받았으니 자기 상급을 받은 것이다. 그러나 참으로 지혜있는 사람
은 그러한 좋은 일을 하면서도 이 세상에 속한 썩어질 상급을 받지 않으려고 가급적
자기 이름을 숨긴다. 그 이유는 그는 내세의 썩지 않는 것으로 갚음을 얻고자 하는 까
닭이다. (눅16:8,9 14:12-14).
마 6:3
오른손의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 이것은 구제할때에 (1)그만큼 열심 있
게 신속히 하여 주저하지말것과 (2)마음에 기억하여 갚음 받을 생각을 가지지 말며 교
만해지지 말것과 (3) 남을 내 몸과 같이 생각하여 남의요구에 응할 때에 내가 나에게
하는 것처럼 하여 장한 것을 한다는 생각조차 없는 애인여기의 정신에 사무쳐서 할것
과 (4) 스스로 생각하기를 "남을 구제하노라"하는 자신 앞에서의 의식을 멀리 해야 할
것을 가르친다.
외식은 남들 앞에서만 아니라 자신 앞에도 있으니 그것은 ,자기가 자기 앞에서 칭찬
을 받으려고 행함이다. 그것은 죄악이다.
마 6:4
네 구제함이 은밀하게 하라.- 이 은밀은 남들에게 대해서만 아니고 그 구제하는
자 자신에게까지의 은밀이다. 윗절에 이른 바 "오른 손의 하는 것을 왼 손이 모르게
하라"고 하였으니 과연 그렇게 함이 자신에게도 은밀한 행위가 된다. 선을 행하면서
생각하기를 "내가 선을 행한다.나는 귀한 사람이다."라고 하면 그것도 역시 그의 행한
선의 가치를 잃어버리게 하는 의식이다. 남에게도 자랑하지 않고 나 자신 앞에도 자긍
함이 없이 선을 행하는 자를 하나님께서 귀히 여기시며 찾으신다.
마 6:5
외식. - 이것은 진정한 종교의 적성 요소이다. 타락한 종교가들은 종교를 외식하므
로 효과 없이 가질 뿐만 아니라 도리어 하나님을 노엽게 하는 방식으로 가진다. 기도
를 외식으로 하는 것은, 효과가 없을 뿐아니라 도리어 하나님앞에 범죄 행위가 된다.
그렇게 기도하는 자들은 사람들앞에서 종교가라는 칭찬은 받을 수 있으나 그들은 하나
님의 원수이다. 그 이유는 그들이 거룩한 기도를 가지고 사람앞에서 연극하기 때문이
다.
마 6:7
중언부언. - 헬라원어로 바탈로게세테(* )라고 하는데
그것은 (1) 사람이 신앙 없이 기도하면서 같은 말을 중복함이다. 같은 말에라도 하나
님이 그것을 들으실 줄 믿으며서 간절한 생각으로 중복함은 가하다. 예수님께서도 겟
세마네에서 세 번이나 같은 기도를 중복하신 것이다(마26:36-46) (2)같은 말의 중복은
아니로되 마음이 간절성 없는 길고 많은 말 뿐의 기도도 있으니 그것도 역시 중언부언
이다. 칼빈은 말하기를 "이런 그릇된 기도는 길고 많은 말로서 하나님을 설득할 듯이
흐른다. 그러나 그것은 성경의 간절한 기도와 다르다. 성경이 가르치는 그것은 말보다
마음에서 쏟아지는 간절한 기도이다. 경건한 마음은 그 간절함을 가지고 화살 같이 하
늘을 찌른다. "과 하였다.(마26:36-43).
마 6:8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 - 이것
은 기도에 있어서 중언부언할 필요가 없다는이유를 준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요구들을 잘 아시고 계시는데 왜 그것을 모르는 헛된 것에서 기도하듯 중언부언하랴?
그렇다면 한가지 문제가 여기에 관련되어 일어난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요구가
무엇이지 우리의 기도전에 벌써 아신다면 우리가 기도할 필요는 무엇인가 하는 문제
이다. 그것은 다음과 같이 답변된다. (1)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있어야 할 것을 잘
아신다. 그러나 그가 우리더러 기도하라고 부탁하신 것이다. 그는 우리가 간절히 기도
하여야 들어 주시겠다고 하셨다.(눅18:1-8) (2)그는 우리를 인격으로 취급하시고 기계
로 취급하시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는 우리가 그에게 기구전을 가지고 나아가서 말하
며 교섭하는 것을 기다려서 우리의 구하는 것을 주신다. (겔36:37)
마 6:9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하늘에 계시다 함은 모든 피조물들과 다르시고 절대
적이시고 그 권능이 무한하시고 또 지극히 높은 주재가 되시고 지극히 성결하시다는
내용을 가진다. 이런 하나님에게 기도하지 아니하면 우리의 기도가 헛되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함음 중요한 뜻이 있다. 비록 "하늘 "의 주재이시지만 그와 우리와의 관
계가 사랑의 것이 아니면 우리는 그에게 기도하기 어렵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가 되신 사실에서 우리의 기도문은 열릴것이다.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주기도문의 본질은 예수님이 가르치신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함"(마6:33)으로 본질을 삼는다. 곧 이 기도의 내용은
하나님의 다스리신 나라와 및 그를 중심한 생활 곧, 하나님 보시기에 의를 구함이다.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하는 기구건과 및 그 아래 두가지 기구건은 직접
하나님의 나라와 관계된 것을 구함이고 그 나머지는 하나님의 의를 구함이다. 클로스
텔만은 여기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는 문구가 현세 관계의 사항이 아니
고 내세 관계의 것을 구함이라고 한다. 곧, 하나님께서 그 끝날의 심판으로 우주의 죄
악을 일소하여 인생들로 하여금 그의 성결을 깨닫게 함을 구함이라고 한다. 그러나 칼
빈은 이 기구를 현제 관계의 것으로 본 것이다. 그는 이 기구가 인간들이 하나님께 경
배하게 해 주시기를 구함이라고 하였으니 합당한 해석이다. 여기 "거룩히 여김"은 제
사행사에 속하는 것이다. 인간은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고 무신론의 오만한 생활을 하
기 쉽다. 신자들이라도 그 시련기에 있어서 참아 견디지 못하고 하나님을 원망하고 의
심하면서 경외심을 상실하기 쉽다. 그러므로 하나님에게 대한 경외는 땅 위에 극히 요
구 된다.
마 6:10
나라이 임하옵시며. - 클로스텔만은 이 조목에 와서는 더 확신 있게 이 기구의 목
표가 내세에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 기구의 목표를 내세에만 국한시켜 생
각할 필요는 없다. 눅17:21에 "하나님의 나라는 볼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
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고 하였으니 그
것은 현세에서 부터 천국이 벌써 영적으로 실현되고 있음을 중요시 하신 말씀이다. 그
렇다면 여기 이 기구전에서도 그런 의미를 가진 것이다. 하나님의 영적 임제와 통치가
우리의 생활에 이르게 됨을 구함이 이 문구이 기구건이다. 나는 나 자신을 통솔하기
어려우며 내 죄악을 이길 수 없으니 하나님깨서 영적으로 나를 다스리시며 내 죄를 정
복하실 그 때에 나의 행복은 가장 큰 것이다.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하늘이 무엇인가.? 우리느 이
점에 있어서 하늘의 속성을 전부 생각하여 말하지 않으려 한다. 다만 그것이 장소성에
대하여 여기에 한 마디만 하려 한다.
(1)성경이 하늘 나라의 생활을 진술함에 있어서 그 생활이 개인적인 것이 아니고 집
단적인 것으로 되었으니 그것은 간접적으로 장소성을 가리킨다.
(2) 요 14장을 보면 예수님은 그가 가실 곳에 있을 곳이 많다고 하셨으니 그 말씀은
명백히 하늘 나라의 장소성을 가진 것에 대하여 말씀하신다. "뜻이 하늘에서 이룬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고한 말씀의 뜻은 무엇인가? 하늘에서는 천사들이 선
히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여 이루고 있지만, 땅의 인간들은 죄악이 많아서 하나님의 뜻
을 순종치 않는다. 그러므로 기독 신자들은 이 기도를 올려야 한다.
마 6:12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 이
귀절 끝의 사죄는 근본 사죄 곧, 믿은 이후에 늘 범하는 허무에 대한 용서를 이름이
다. (요일1:8,9). 그러면 이 일반적 사죄에 대하여 기억할 것이있으니 그것은 내가 먼
저 남의 죄를 용서하여야 하나님도 내 죄를 용서하신다는 것이다. 여기 이 기구의 목
적은, 그 기도자가 하나님 앞에서 사죄 받는 일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그것을 말
씀하심에 있어서 그것에 이르게 하는 열쇠 곧, 남의 사하여 주는 일을 조건부로 말씀
하셨다. 근본 사죄의 은혜는 무조건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 주시는 것이
다. 그러나 일반적 사죄의 은혜는 위에 말한 것과 같이 조건부로 주신다.
마 6:13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 하나님께서 우리를 악한 시험중에 빠뜨리시
는 일이 있는 고로 그가 이렇게 말씀하신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악으로 시험
하시는 일이 없다.(약1:13). 이 말씀은 우리가 시험을 당할 때에 거기에 빠지지 않도
록 도와 주시기를 구함이다. 우리가 이 세상에 있을 때 시험을 당하지 않을 수 없다.
다만 그 시험에 빠져 떨어지지 아니하면 그만이다. 시험을 당하지도 않게 되기를 기도
할 수는 없으나 시험에 빠지지않게 하시기를 기도함은 지혜롭다.(마26:41)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이것은 그 윗 말씀에 대한 중보문구이니 시험에 빠지지
않도록 도와 주실 뿐아니라 적극적으로 거기서 붙잡아 이끌어 안전한 자리에로 인도하
여주시기를 원하는 기구이다. 시험에 겨우 빠지지나 않게 도와 주심도 좋지만 그보다
그 시험에서 멀리 떠나 안전한 자리에 서게 하심은 더욱 요구된다. 우리가 시험을 만
날때에 겨우 거기에 빠지지 않고 있음도 놓으나 장기적으로 그런 소극적 방면의 전투
중에만 있게 되면 영적 생명이 너무 시달려 나중에는 그 시험에 넘어질까 두렵다.. 시
험을 당했다가 이기고 거기서 떠나는 즐거움은 우리의 신앙과 영적 생명을 몇배 더하
여 주는 것이다.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이 문구는 권위가 작은
소서 사본에 있을 뿐이고 시내산 사본, 바티칸 사본, 베사 사본에는 없다. 그러므로
학자들 중에 이것을 사도 원본의 부분으로 보지 않는 자들도 있다. 클로스텔만은 이것
을 후대에 가입된 공기도의 예식적 송영사로 보았다. 그러나 크로솨이테는 이것이 원
본의 일부였을 수도 있다고 하였다.(Indien de doxlogie een gewon slot ws ann te ge
bed dat ook diir Jezus is gebruikt)
마 6:14,15
내가 남이 허물을 용서함은 곧, 나 자신의 허물을 용서 받음과 같다.
마 6:16,17
이 부분에서 예수님이 잘못된 금식의 페풍을 금하신것은 , 그 때의 바리새인들이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슬픈 기색으로 금식하였기 대문이다. 금식은 사람의 칭찬을 받으
려고 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며 고요히 기도하는데 있다 그러므로 금
식하는 자는 사람앞에서는 금식하지 않던 때와 같이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어야 한다. 이것은 금식하는 것을 감추는 행위라기보다는 그저 평소의 자연스러운
태도를 취하라는 뜻이다. 사58:3-9참조
마 6:18
아버지께 보이게 하려 함이라. - 이것은 금식할 때에 그것이 하나님 앞에 무슨 공
로로 보여지기를 원하여서 하라는 의미가 아니다. "아버지께 보이게"하라 함은 다른
의미가 아니다. 누구든지 금식하려면 하나님이 보시기에 합당한 태도로 하라는 말씀이
다. 금식이 무슨 큰 공로가 되는 듯이 슬픈 기색을 나타내면 도리어 하나님앞에 가증
스럽다 금식하려면 그저 여전히 자연슬운 태도로 머리에 기름도 바르고 얼굴도 씻고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어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하면, 심령적 통회를 위주하고 경건
의 외모 표시를 일삼지 말것이다.
마 6:20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눅12:33; 막10;21참조. 하늘에 보물을 쌓는 방법은 땅
에서 나의 모든 좋은 것들을 주님을 위하여 희생함이다.
마 6:21
네 보물있는 그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이 귀절은 헬라 원문에서 이유 접속사
가르란 말로 시작하여 윗 말씀이 이유를 보인다. 보물을 왜 하늘에 쌓아두어냐 하는
가? 그 이유는 그리하여야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께만 가 있게 되기 때문이다. 하나님
께서는 무엇보다 우리의 마음을 원하신다. 우리들의 마음이 하나님에게 애착하게 되는
방법은, 하나님을 위하여 나의 모든 좋은 것을 기울여 희생하여서 바침으로 되어지는
것이다 . 우리들 가운데 누가 마음에 경건이 없는가? 신앙이 없는가? 신앙 생활이 파
선되어 가는 배처럼 기진맥진한 자리에 있는가? 그것은 주님을 위하여 좋은 것으로 희
생하지 않고 오직 죄악의 암초에 걸린 까닭이다. 신자가 보물을 하늘에 쌓아주면 내세
에 들어가 썩지 않는 보물을 받으니 복되고 , 보물보다 귀한 마음이 세상의 종이 되지
않고 하나님께 가서 있으니 더욱 복되다.
마 6:22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 육신의 눈이
밝고 어두운 관계가 온 몸에 중대한 영향을 줌과 같자 영안이 밝고 어두운 관계는 영
혼에게 대하여 더욱 그러하다. 그런데 영안이 밝으려 하면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않
아야 된다.
마 6:23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두움이 얼마나 하겠느냐.- 곧, 위의 마록 같이 "네게 있는 빛
"이 어두워지면 그 얼마나 어둡겠는가? 다시 말하면, 그 영적 광명이 땅에 쌓아 둔 보물에 대한
사랑으로 인하여 어두워져서 하나님을 알지 못하게 되어질 것이란 말씀이다.
마 6:24
이 귀절은 윗절의 결론이다. 인간은 한 주인 곧, 하나님만 섬기도록 창조된 것이
다. 그가 다른 것을 주인으로 섬기면 멸망한다.
마 6:25
염려하지 말라.- 이 말씀은 장래에 대한 경영이나 설계같은 것을 금지하심이 아니
고, 하나님을 믿지 않고 순 자력으로 문제 해결을 해보려고 고심하는 것을 금지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신앙하고서 장래의 설계를 하나님의 뜻대로 정하고 그날 그날의 책
임에 힘을 다해야 될것을 이 말씀이 가르친다.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이 문구의 의
미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음식보다 귀한 목숨을 , 의복보다 귀한 몸을 주셨은즉 음식
과 의복을 주실 것은 확실하다는 것이다. 큰 사랑을 베푸신 이가 어찌 작은 싸랑자르
베푸시지 아니하시랴?
마 6:26
공중의 새...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 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천
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느냐.- 이 귀절의 말씀은 강이유
논법이다. 하나님께서 농사할 줄 모르는 천한 새도 먹이시는데, 하물며 그 무슨 생업
이든지 할줄 알고 하나니을 아버지로 아는 귀한 신자야 말할 것이 무엇이랴?
마 6:27
그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 - 여기 키란 말은 헬라원어로 헬리키아(*
)라고 하는 데 생명의 길이를 의미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문
맥상으로 보아서 키가 아니고 생명의 길이를 의미한다고 한다.
마 6:28-30
이 귀절들은 백합화의 실례를 들어서 역시 강이유 논법으로 말씀하신 것이다.
마 6:32
이방인. - 그 때에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을 가리킨다.
마 6:33
그의 나라 - 이는 하나님의 통치 혹은 천국이다. 그의 의.- 이것은 하나님이 주시
는 의 곧, 칭의의 의를 근본으로 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생활을 이름이다.
이 모든 것.- 이 말은 물질적인 것들을 의미한다.
마 6:34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날에 족하니라.- 내일은 나의날이라고 확고할 수 없으니 내일의염려를 미리 잡아 당겨서 할 필요는 없다. 그날 그날의 일을 충성되이 하기 위하여 수고하는 것이 우리의 책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