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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잠 29:1

  자주 책망을 받으면서도 목이 곧은 사람은 갑자기 패망을 당하고 피하지  못하리라
- "목이 곧은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교만하고 불순종하는 사람을 말한다. 그가  자기
의 패망을 미리 막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다음과  같은  사실  때문이다.
곧, 목이 곧은 사람(교만하고 또 순종치 않는 자)은 하나님의 말씀을  중심으로  받지
않기 때문에 잘못하면서도 그것이 잘못임을 깨닫지 못한다. 그는  자주  책망(재앙)을
받으면서도 자기의 허물을 발견하지 못한다. 따라서 그는 자기의 최후적 멸망에  대하
여 예감(豫感)하지도 못한다. 그러므로 그에게 멸망이 올 때에 그것은 그에게  있어서
돌연한 것이다. 단 5:5-6; 살전 5:2-3 참조.

 

  잠 29:2

  의인이 많아지면 백성이 즐거워하고 악인이 권세를 잡으면 백성이 탄식하느니라  -
빌데부얼(D.G. Wildeboer)은, 이 귀절에 경건한 자와 불경한 자에 대한  민중의  태도
(Das  Volk   gegen ber   Frommen   und   Gottlosen)가   나타났다고   한다(Kurzer
Hand-Commentar Zum Alten Testament, Die Spr che, 1897, s.82).
   "의인이 많아지면." 이 말의 히브리어(*                      )는  "권세를  잡으
면"이라고 의역(意譯)하기도 한다. 이 두 가지 번역은 같은 내용을 보여준다. 그 이유
는, 의인들이 많을 때에는 의인들이 집권하기 때문이다.
   의인들이 나라의 권세를 잡을 때에 민중이 그것을 기뻐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민중
은 언제나 선량한가? 그것을 보장하기는 어렵다. 개인과 마찬가지로  민중도  악화(惡
化)되어 일종의 폭도(暴徒)처럼 움직이는 때도 성립될 수 있다. 그러므로 유교에서 말
한바 민심(民心)이 곧 천심(天心)이라는 말은 성립될 수 없다. 그러면 우리  본문대로
의인들이 집권할 때에 민중이 기뻐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은 다음과 같이  생각된
다. 곧, 의로운 집권자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할 뿐이고 민중에게  아부하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그들은 민중의 좋지 못한 소원을 이루어 주지는 않는다. 그들이  그렇게  할
때에 민중이 한편 싫어하지만 그 양심만은 그것을 배척하지 않는다. 양심 세계를 표준
삼아 다스리는 자들은 언제나 승리를 거둔다. 교역자들이 교회를 다스리는 원리도  이
와 마찬가지이다. 그들이 교중에게 아부할 때에는 그들의 권위가 서지 못한다. 그러나
그들이 하나님만 두려워하며 의리를 지킬 때에 일반 교중의 양심의 지지를 받게 된다.
거기서 그들의 치리(治理)의 권위가 성립된다. 사도 바울의 교역의 원리가 그와  같은
것이다. 고후 5:11에 말하기를, "우리가 주의 두려우심을 알므로 사람을 권하노니  우
리가 하나님 앞에 알리워졌고 또 너희의 양심대로 알리워졌기를 바라노라"고 하였다.
   "악인이 권세를 잡으면 백성이 탄식하느니라." 곧, 악인이 권세를 가지고 사리사복
(私利私腹)을 취하면서 민중을 압제하기 때문에 그들이 탄식하게 된다. 무엇보다도 악
한 집권자는 공의를 무시하는 데 있어서 너무도 현저하므로 민중이 그것을  싫어한다.
이 점에 있어서 공의로 다스릴 사무엘의 정치를 그 대조로 볼 수 있다. 그는 백성  앞
에서 말하기를, "내가 뉘 소를 취하였느냐 뉘 나귀를 취하였느냐 누구를 속였느냐  누
구를 압제하였느냐 내 눈을 흐리게 하는 뇌물을 뉘 손에서 취하였느냐"라고 하였다(삼
상 12:3 하반).

 

  잠 29:3

  지혜를 사모하는 자는 아비를 즐겁게 하여도 창기를 사귀는 자는 재물을 없이 하느
니라 - "지혜"는 다른 귀절들에서 해석한 것과 같이 세속적 지혜를 말함이 아니고  하
나님을 아는 지혜를 가리킨다. 이 지혜가 그것을 소유한 사람들을 지키며 인도하며 축
복하되, 하나님이 친히 하심과 같이 한다. 그것은 그가 그 지혜를 통하여  역사하심으
로 나타난다(Christa Kayatz, Die Weisheit  bewahrt  und  leitet  und  segnet  den
Menschen, Wie Jahwe es selbst tut.-Studien Zu Proverbien 1-9, 1966, s.66).  그러
므로 "지혜를 사모하는 자"는 결국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이다. 그가 하나님을  사모함
이 자기 아버지에게 기쁨이 된다. 그것이 성경적 효도(孝道)이다. 그것은 하나님을 중
심한 것으로써 인간 중심으로 가르친 유교(儒敎)의 효도와 다르다.
   "창기를 사귀는 자"는 몸을 음란한 정욕에 내어주는 미련한 자이다.  그는,  "몸은
음란을 위하지 않고 오직 주를 위하며 주는 몸을 위하시느니라"란 진리(고전  6:13)를
모르는 자이다. 이 진리의 의미는, 우리가 몸을 주님께 바쳐야 되고 주님은 우리의 몸
을 받아 다시 살려 주시기 위하여 계시다는 것이다(고전 6:14). 사도  바울은  이어서
말하기를, "너희 몸이 그리스도의 지체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내가 그리스도의 지체를
가지고 창기의 지체를 만들겠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창기와 합하는 자는 저와 한
몸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일렀으되 둘이 한 육체가 된다 하셨나니 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이니라 음행을 피하라 사람이 범하는 죄마다 몸 밖에 있거니와 음행하는 자는 자
기 몸에게 죄를 범하느니라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
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
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하였다(고전 6:15-20). 여기  이
른바 "음행하는 자는 자기 몸에게 죄를 범하느니라"고 한 말씀의 뜻이 무엇인가? 그것
은, 음행하는 자는 자기 몸을 부활시키실 주님에게 바치지 않고, 그것을 망하게  하는
음란에 내어준다는 뜻이다.
   "재물을 없이함"은, 실질에 있어서 몸을 내버린 결과이다. 창기와 합하는 자는  귀
중한 몸을 내어버리는 처지에 빠졌는데, 재산 같은 것을 버리는 것은  그에게  문제도
안된다.

 

  잠 29:4

  왕은 공의로 나라를 견고케 하나 뇌물을 억지로 하는 자는 나라를  멸망시키느니라
- 가정은 혈연으로 성립되고 국가는 법률로 성립된다. 다시 말하면 국가는,  국민들이
제정하고 또 그대로 다스림을 받기로 약속한 법률에 근거하고 성립된다. 법률이  무너
지면 국가도 무너진다. 그러므로 통치자는 법률대로 통치해야 된다. 그것이 공의이다.
   동양의 주역은 주로 정치 철학을 가르치고 있다. 그 책에서  강조하는 것은 유교에
서 나온 정치이다. 그 중의 한 가지 미제괘(未濟卦)를 예로 들면, 다음과 같이 말하였
다. 곧, "한결같이 바른 도리를 지키니 길하다. 군자의 덕은 태양과 같이 빛난다.  그
참된 마음이 만민의 신임을 받아 길하리라"(貞吉無梅君子元光有孚吉)고 하였다(五陰).
그러나 이것은 살아계신 하나님을 근본으로 하지 않고 인본주의(人本主義) 공의를  가
르치는 것 뿐이니, 그것은 피상적(皮相的)이고 또 무력(無力)한 것이다.
   앞에서 말한 것 같이 국가는 공의로운 정치에 의해서만 견고해진다. 그러나 뇌물은
공의를 무너뜨리는 것이다. 관원들이 뇌물을 받고 불의한 자를 도와주면,  불의(不義)
는 성하게 되고 의리(義理)는 쇠퇴하게 된다. 뇌물이 성행(盛行)되는 나라에서는 사람
들이 불의를 행하고도 그것을 정당화시켜 나갈 수 있으니, 의리를 주장하는 역경을 택
할 자가 없어질 것이다. 그런 나라에서는 의리를 지키는 자가 도리어 곤경에  빠진다.
그렇게 된 나라는 망하게 마련이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런 나라를 마침내  벌하
시기 때문이다.

 

  잠 29:5

   이웃에게 아첨하는 것은 그의 발 앞에 그물을 치는 것이니라 - 여기  "아첨한다"는
말(*         )은 매끄러운 것(smooth thing)을 말한다는 뜻이니, 그것은 상대방의 죄
악 성품에 잘 영합(迎合)하여 듣기 좋게 말함이다. 이 세상에는 언제나 아첨하는 자의
수효가 많은 법이고 곧은 말을 하는 자의 수효는 적은 법이다.  아합왕에게  아첨하는
거짓 선지자는 400명이었고, 그 때에 그에게 곧은 말을 하는 선지자는 한 사람 미가야
뿐이었다(왕상 22:6, 8). 그러므로 사람들은 아첨하는 자의 말을 잘 듣게 된다.  그러
나 아첨하는 말은 의(義)에 속한 것이 아닌만큼 속이는 것이며 죽이는 것이다. 그것은
상대방으로 걸려 넘어지게 하는 그물과 같은 것이다. 아합왕 때에 400명이나 되는  거
짓 선지자들이 왕에게 거짓말로 아첨하여 왕으로 하여금 길르앗 라못으로 올라가 아람
으로 더불어 전쟁케 하였는데, 왕은 거기서 죽임이 되었다(대하  18:1-34).  중국  진
(秦)나라의 폭군 시황제(始皇帝) 앞에도 아첨하는 자들이 있었고, 그의 아들  호해(胡
亥)황제 때에는 조 고(趙高)란 사람이 황제 앞에서 아첨하였다. 호해 황제가 평생  쾌
락으로 지내기를 원할 때에 조 고는 그것을 좋은 생각이라고 하면서 황제의 향락 생활
에 거리낌이 될 만한 신하들을 모두 축출하게 하였다. 이런 것이 진나라의 멸망의  원
인이 되었다.

 

  잠 29:6

  악인의 범죄하는 것은 스스로 올무가 되게 하는 것이나 의인은 노래하고  기뻐하느
니라 - 여기 이른바 "악인"은 보통으로 과오를 범하는 사람이 아니고 악한 일을  직업
과 같이 일삼는 사람이다. 엄격히 따지면 사람은 다 죄인이다.  그러나  여기  이른바
"악인"은 문제의 인물인만큼 특수하게 악을 행하는 자이다. 그는 악을 기탄 없이 행하
고 그것을 후회하거나 회개하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그가 얼마 동안은 무사하고 또 잘
지내는 것 같이 보인다. 그러나 이런 악인이 패망하게 되는 한 때가 반드시 오고야 만
다. 그 때에 그는 자기의 쌓아놓은 죄악이 올무가 되어 거꾸러진다. 옛날에 로마의 네
로 황제가 특수하게 죄를 범하면서도 금으로 집을 짓고 일시 동안 잘 사는 것 같이 보
였다. 그러나 그는 결국 자살하였으니, 그것이 그의 모든 죄악의 총결산이었다. 제2차
세계 대전 때에 유대인을 600만명이나 죽였다는 아이히만은 저렇게 죄악을 쌓는  동안
무사하게 지냈으나 그도 마침내 자기 죄값으로 이스라엘 경찰에게 체포되어  처참하게
사형을 받았다.
   그와 반면에 "의인"은 지금부터 영원까지 기쁨으로 지낸다. 여기서 의인은 왜 기뻐
한다고 하였는가? 이 문제에 대하여 학자들은 몇 가지로 말한다. 곧, (1)  악인이  그
"올무"에 걸려 망하였기 때문에 의인은 이제부터 그 악인의 위협에서 해방되어 기뻐한
다고 함(Z ckler).  (2)  그가  하나님이  주시는  번영으로  인하여  기뻐한다고  함
(Fleischer). (3) 우리 본문은 위의 두 가지 해석을 보장해주지 않는다. 의인이  기뻐
하게 되는 것은, 현세에서 별다른 외부적인 소득(所得) 때문에 그리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하나님을 참으로 신앙하는 것만큼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시기 때문에 그에게  기
쁨이 계속하게 된다. 그는 환란 가운데서도 기뻐할 수 있다(롬 5:3). 다시 말하면, 그
가 하나님을 믿는 것과 의를 행하게 되는 것이 그에게 벌써 상급이고, 또 그 심령  속
에는 하늘의 기쁨이 넘치는 것이다. 시 4:7에 말하기를, "주께서 내 마음에 두신 기쁨
은 저희의 곡식과 새 포도주의 풍성할 때보다 더 하니이다"라고 하였고, 합 3:17-18에
는 말하기를,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
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라고 하
였다.

 

  잠 29:7

  의인은 가난한 자의 사정을 알아주나 악인은 알아줄 지식이 없느니라 - 여기  이른
바 "의인"은 하나님을 알고 또 믿는 사람이기 때문에 모든 일을 하나님 편에서 생각한
다. 가난한 자에 대한 특수한 동정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다(시 82:3-4).  잠  14:31에
말하기를, "가난한 사람을 학대하는 자는 그를 지으신 이를 멸시하는 자요 궁핍한  사
람을 불쌍히 여기는 자는 주를 존경하는 자니라"고 하였다. 또 잠  19:17에는  말하기
를,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이는 것이니 그 선행을 갚아 주시리
라"고 하였고, 잠 21:13에는, "귀를 막아 가난한 자의 부르짖는 소리를 듣지 아니하면
자기의 부르짖을 때에도 들을 자가 없으리라"고 하였고, 잠 28:27에는 말하기를,  "가
난한 자를 구제하는 자는 궁핍하지 아니하려니와 못 본체 하는 자에게는 저주가  많으
리라"고 하였다.
   이 점에 있어서 부릿지스(Charles Bridges)는 두 가지 실례를 들었다. 하나는,  순
교자 리들레(Ridley)가 화형을 받아 순교하면서 영국 여왕에게 청원한 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자기의 교구(敎具) 지역에 살고 있는 빈민들을 거기 계속해서 거주케 해달라는
것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또 하나는, 스콧트(Scott)란 성도가 별세하면서 아들에게 유
언하기를, 해마다 빈민에게 구제하기 위하여 심는 묘목(苗木)을 계속하여 심으라고 하
였다고 한다(A Commentary on Proverbs, The Banner of Truth Trust, 1968, p.563).
   이와 반면에 "악인"은 가난한 사람을 알아줄 지식이 없다. 그 이유는, 그들은 하나
님을 모르기 때문이다.

 

  잠 29:8                  

  모만한 자는 성읍을 요란케 하여도 슬기로운 자는 노를 그치게  하느니라  -  여기
"모만한 자"란 말(*                )은 "조롱하는 사람들"(men of de  rision)이라고
번역되어야 한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조롱하며 진리의 권위를 무시한다.  "성읍"
은 그 지역 사회나 단체를 가리킨다. 그리고 "요란케 한다"는 말(*         )은  빌데
부얼(D.G. Wildeboer)에 의하면, 여자적(如字的)으로는 "불을 타오르게 한다"는  뜻이
라고 한다(w rtlich: sich blaen an, fachen an sc, das Feuer). 이것은 "선동한다"는
뜻이다. 물론 그들이 성읍을 선동한 결과는 하나님의 진노로 오는 불안이다. 어떤  학
자들은 여기 이른바 "노"란 말(*   )이 하나님의 노(怒)를 가리키지 않고 사람의 노를
가리킨다고 한다(Delitzsch, Toy). 그러나 우리 본문에 거론된 선동자들이 종교적으로
조롱하는 사람들인만큼 그들의 행동이 하나님의 진노를 격동시겼다고 생각된다.
   하나님께서 그의 말씀의 권위를 무시하는 무리에게 대하여 진노하신 사건들이 성경
에 많이 기록되었다. 한 가지 예를 들면, 바울을 태운 배의 선장과 선주와 및  백부장
이 하나님의 종 바울의 권고를 무시하고 행선하다가(행 27:9-11) 마침내 그 배에 올랐
던 276명의 단체는 파선의 위기에 빠지게 되었다. 그 때에 바울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담력을 얻어가지고 절망 상태에 있었던 무리를 안돈시켰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
다. 곧,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이제는 안심하라 너희 중 생명에는 아무 손상이  없겠
고 오직 배 뿐이리라 나의 속한 바 곧 나의 섬기는 하나님의 사자가 어제 밤에 내  곁
에 서서 너와 함께 행선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였으니 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안심
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고 하였다(행 27:22-25).


  잠 29:9

  지혜로운 자와 미련한 자가 다투면 지혜로운 자가 노하든지 웃든지 그 다툼이 그침
이 없느니라 - 이 말씀은, 지혜로운 자가 미련한 자로 더불어 논쟁하여도 아무 유익이
없다는 뜻이다. "지혜로운 자가 노하든지 웃든지"란 말(*                 )은  "그가
노하든지 웃든지"라고 번역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 한역에 "지혜로운 자"를  주격
(主格)으로 표시한 것은 잘못이다. 건전한 해석에 의하면 "그가"란 말은 미련한  자를
염두에 두었을 것이다. 실상 지혜로운 자는 논쟁에 있어서 조용하게 지낸다(전 9:17).
"미련한 자"는 감정을 쉽게 표현하며, 그는 강퍅하고 교만하여 진리를 끝까지 받아 들
이지 않은다.
   잠언 저자가 염두에 둔 "미련한 자"에 대하여 바르트(K. Barth)는 다음과 같이  지
적한다. 곧, "잠언에  기록된대로  '미련한  자'는  자기의  마음을  믿는  자이며(잠
28:26), 남에게서 배우려 하지 애는 자이다(잠 12:15). 그래서 그는 잘못된 길로 자기
를 던져 넣는다(잠 14:16). 어리석음은 그에게 즐거움이고(잠 15:21), 그는 그것을 면
류관과 같이 여긴다(잠 14:24). 또한 그는 어리석음을 전파한다(잠 12:23)."라고 하였
다(Er ist der Mann, der sich auf seinen Verstand verl sst (Spr. 28,26), den sein
Weg, ohne dass er auf guten Rat zu h ren n tig h tte, der rechte zu  sein  d nkt
(12, 15). Und so l sst er sich sorglos auf das B se ein (14, 16). Seine  Torheit
macht ihm Freude (12, 21). Er tr gt sie wie einen Kranz (14, 24), Er schreit sie
aus (12, 23).-Die Kirchliche Dogmatik, IV, 2, 1955, s.478).
   그러면, 구체적으로 말해서 잠언 저자가 그 때에 어떤 사람들을 가리켜서  "미련한
자"라고 하였는가? 바르트(K. Barth)는 이 점에 대하여 다시 말하기를, "지혜문의  저
작자들은 어떤 특수한 개인들이나 단체를 염두에 두고 이렇게 말하였을 것인데,  이스
라엘의 말기에 부패한 사회의 특징이 될 만한 인물들을 염두에  두었을  것이다."(Win
meinen die Weisheitsschriften mit dieser Figur? Sicher bliken ihre Spr che  auch
auf  ganz  bestimmte,  ihren  Urhebern   vor   Augen   stehende   Personen   und
Personen-gruppen,  auf  gewisse  Zerfallserscheinungen  der   sp tisraelitischen
Gesellschaft)라고 하였다(같은 책, s.478).
   바르트의 신학 체계는 우리와 다르지만 이 점에 있어서 그의 해석은 어느 정도  바
르다고 생각된다. 잠언 저자가 염두에 두고 말한 "미련한  자"는  배교자(背敎者)들이
다. 배교자는 종교 문제에 있어서 성경의 모든 진리를 다 알아보고 내버린 듯이  언제
나 강퍅하고 교만하여 남에게서 배우지 않는다. 그러므로 진실한 성도가 그들로  더불
어 논쟁을 할 필요는 없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저희가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
할까 염려하라"고 하셨다(마 7:6).

 

  잠 29:10

  피 흘리기를 좋아하는 자는 온전한 자를 미워하고 정직한 자의 생명을 찾느니라  -
이 귀절의 히브리어를 개역하면 다음과 같다. 곧, "피 흘리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순
전한 자를 미워하나 의로운 자들은 그의 생명을 찾느니라." 이 말씀은,  피  흘리기를
좋아하는 자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를 미워하는 반면에, 의인들은 그(하나님을  경외
하는 자)를 보호하기 위하여 찾는다는 의미이다. 유대인들은 바울을 죽이려고  하였으
나, 그 때에 그의 제자들은 바울을 피신시켰다(행 9:23-25). 고후 11:32-33 참조.
   피 흘리기를 좋아하는 자가 순전한 자(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를  미워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은 이렇다. 곧, 그들은 자기 자신을 영화롭게 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 그러니만큼 그 둘 사이에는 날카로운 충돌이 있다.  이
와 같은 충돌에 대하여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진리를 좇는 자는 빛으로 오
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고  하셨다(요
3:20-21).
   피 흘리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순전한 자(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를  미워한다는  것
은, 간단히 말해서 의(義)를 미워함과 마찬가지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마귀의  행동이
다. 예를 들면, 가인이 아벧을 미워한 것(창 4:4-5), 아합과 이세벧이 하나님의  선지
자들을 죽인 것(왕상 19:14), 또한 유대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죽인 것(살전 2:15)과
같은 것이다. 그와 반면에, 의인은 순전한 자의 생명(영혼)을 구원하기  위하여  찾는
다. 잠 11:30에 말하기를, "의인의 열매는 생명나무라 지혜로운 자는  사람을  얻느니
라"고 하였다. 의인은 이렇게 영혼(생명)을 구원하는 것을 자기의 사명으로 안다.  요
나단은 다윗의 생명을 자기 생명과  같이  여겨  보호하였고(삼상  19:1-5,  20:1-17,
35-42; 삼하 1:26), 선지자 오바댜는 아합왕의 핍박 시대에 선지자 100명을  굴  속에
숨겨두고 먹여주며 살려주었고(렘 38:1-13), 브리스가와 아굴라는 바울을 위험한 자리
에서  건지기  위하여는  자기들의  목이라도  내어놓을  각오를  하였던   것이다(롬
16:4)(Charles Bridges, A Commentary on Proverbs,  The  Banner  of  Truth  Trust,
1968, p.566). 이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복음의 사역자들의 하는 일이다. 그것은 어디
까지나 사람들의 영혼을 구원하기 위하여 생명을 바치는 것이다. 바울은 이 일을 위하
여 날마다 죽음을 각오한다고 하였다(고전 15:31).

 

  잠 29:11

   어리석은 자는 그 노를 다 드러내어도 지혜로운 자는 그 노를 억제하느니라  -  이
귀절의 히브리어를 개역하면 다음과 같다. 곧, "미련한 자는 그 온 마음을 드러내어도
지혜로운 자는 그것을 뒤로 진정시키느니라." 빌데부얼(D.G.Wildeboer)은,  여기  "마
음"이란 말(*     )을 "분노"(Zorn)라고 번역하였고(Kurzer Hand-Commentar Zum Alten
Testament, Die Spr che, 1897, s.82), 델리취(Delitzsch)도 그리하였다. 그러나 이것
은 일방적 해석에 의한 번역이다. 히브리 원문에는 "분노"란 말이 없는데 그렇게 번역
할 근거가 무엇인가? 빌데부얼(Wildeboer)은, 잠 16:32 하반의 "마음"(*     )이란 말
이 그 상반절의 "분노"란 말을 받아가지고 나왔다고 하여, 거기 마음이란 말을 분노로
해석하는 모양이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이다. 거기서도 "마음"이란 말(*      )이  그
상반절의 "분노"란 말보다 넓은 함축을 가졌다.
   사람이 그때 그때 자기 마음에 있는 것을 남에게 다 말할 필요는 없다. 그 이유는,
마음은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하여(렘 17:9) 남에게 유익한 생각을  늘  가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남에게 유익이 없는 것을 말할 목적이 무엇인가? 그런 것을 말
하는 것은 사랑함도 아니고 정직함도 아니다. 정직이란 것은, 사람이  남들로  더불어
사무적 관계를 가질 때에 요청되는 것이며, 거기 관련된 사실을 그대로  알려줄  때에
성립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의로운 사람은 말을 많이 하지 않는다. 약 1:19에  말하기
를,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거니와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
디하며 성내기도 더디하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격언에도 말하기를, "말하는 것은  은
이요, 침묵하는 것은 금이다."(Speech is silver; silence is gold.)라고 하였다.  참
으로 아는 사람은 무엇보다도 자기의 부족과 무식을 발견한 자이다. 그러므로 그는 말
이 적다. 그러나 어리석은 사람은 자기가 모든 것을 다 아는 듯이 교만하여 말이 헤프
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말하기를, "주께서 허락하시면 내가 너희에게 속히  나아가
서 교만한 자의 말을 알아볼 것이 아니라 오직 그 능력을 알아보겠노니 하나님의 나라
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고 하였다(고전 4:19-20). 사람은  마땅
히 하지 않아야 할 말은 어디까지나 하지 않아야 된다. 삼손은 마땅히 하지 않아야 될
말을 하였으므로 능력을 잃었다(삿 16:17).

 

  잠 29:12

  관원이 거짓말을 신청하면 그 하인은 다 악하니라 - "관원"이란 말(*     )은 통치
자를 말함이다. 통치자는 국민의 지도자인데 그가 거짓맑을 잘 받아들인다면, (1)  그
의 수종자들 또는 민중은 거짓되어질 수 밖에 없다. 그 이유는, 그 나라에서는 위에서
부터 거짓된 수단으로 일을 해결하기 때문이다. 언제든지 지도자가 바로 서지  않으면
그 아래 사람들은 그의 악영향을 받아서 더욱 부패하여진다. 그 뿐만 아니라, (2)  통
치자가 거짓말을 잘 따라가면 그는 마귀의 종이 된다. 마귀는 거짓말장이요 거짓의 아
비이다(요 8:44). 그런 통치자의 다스리는 곳에는 마귀의 활동이 성하기 때문에  죄악
이 팽창한다. 예를 들면 아합왕은 거짓 선지자들을 사백명이나 거느리고 있었다. 그는
모를 문제가 있으면 이들에게 물었다(왕상 22:6). 이들은 직접 마귀의 손에  사용되고
있었다(왕상 22:19-23). 아합왕은 그때에 한 사람 밖에 없는 참된 선지자 미가야를 핍
박할 정도로(왕상 22:27) 거짓말을 좋아하였다. (3) 사람이 거짓말을 잘 믿게 되는 것
은, 하나님 앞에 버림 받은 증거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싫어하는 자의 받는 벌이
그것이다. 살후 2:9-12에 말하기를, "악한 자의 임함은 사단의 역사를 따라 모든 능력
과 표적과 거짓 기적과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멸망하는 자들에게 임하리니 이는  저희
가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여 구원함을 얻지 못함이니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유혹을
저의 가운데 역사하게 하사 거짓 것을 믿게 하심은 진리를 믿지 않고 불의를 좋아하는
모든 자로 심판을 받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하였다. 오늘날 교회의  지도자들  중에도
하나님의 말씀(성경)을 바로 배우지 못하여 그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인 줄 모르며, 그
말씀의 맛이 역시 하나님의 맛인 줄(벧전 2:2-3) 모르기 때문에 사실상 성경대로 설교
하기를 싫어하는 자들이 많다. 그들은 강단에서 설교하기 위하여 성경을 몇 귀절 읽기
는 한다. 그러나 그들의 설교는 그 본문을 밝히 드러내는 것이 아니고 그들의  인간적
사상을 전하는 것 뿐이다. 인간적 사상은 사람의 영혼을 구원하는 진리가 아니다.  그
들이 끝까지 회개치 않고 성경의 진리를 싫어하면 그들도 하나님의 버림을 당할  것이
다. 이런 지도자들의 지도를 받는 일반 신자들은 병들 수 밖에 없다.

 

  잠 29:13

  가난한 자와 포학한 자가 섞여 살거니와 여호와께서는 그들의 눈에 빛을  주시느니
라 - 여기 이른바 "포학한 자"란 말(*          )은 중한 변리를 받는 자들을  의미한
다.  그렇다면 그들은 불의한 부자라고 할 수 있다. 잠 22:2에도  말하기를,  "빈부가
섞여 살거니와 무릇 그들을 지으신 이는 여호와시니라"고 하였다. 이 말씀과 마찬가지
로 우리 본문은 가난한 자나 부자나 다 같이 하나님의 피조물이며 하나님의 권고를 받
고 있다고 한다.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신다(마 5:45). 그는 모든 사람들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신다(딤전 2:4). 요 1:5에 말하기를,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
이 깨닫지 못하더라"고 하였다.  우리 본문에 "그들의 눈에 빛을 주신다"고 한 말씀(*
                             ), 곧 양자(兩者)와 눈을 다 비취어 주신다는 것이  그
뜻이다. "빛"이란 말은 진리와 생명을 비유한다. 성령께서 진리를 가지시고 우리 심령
의 눈을 밝히시므로 우리의 영혼이 삶을 얻는다. 그러므로 다윗은 기도하기를,  "나의
눈을 밝히소서 두렵건대 내가 사망의 잠을 잘까 하오며"라고 하였다(시 13:3). 하나님
께서는 성령의 역사로 불의한 자들의 심령의 눈도 밝혀주시려고 하시나, 다만  그들이
완고하여 순종하지 않는 것 뿐이다(요 12:35-36). 요3:19-21 참조. 소경은 빛을  모른
다. 그러나 빛은 그의 얼굴에 채아와서 머물고 있다. 그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권고
하시는 역사는 불의한 자들에게도 늘 접촉을 가지고 있다. 누구든지 회개하고  하나님
께로 돌아오기만 하면 영생을 얻는다.

 

  잠 29:14

   왕이 가난한 자를 성실히 신원하면 그 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 - 여기  "신원한다"
는 말(*        )은 판단한다는 뜻이다. 이 세상 사람들은  '정의(正義)가  힘'(Right
is might)이라기보다 '힘이 정의' (Might is right)라고 주장하며 행세하므로  가난한
자들이 억울하게 되는 일이 많다. 그러므로 통치자는 자신이 친히 낮아져서 가난한 자
들의 어려움을 체휼하면서 그들의 사정을 바로 파악하여 그들의 사건을 잘 판단해  주
어야 된다. 통치자가 가난한 자들의 사정을 잘 돌아보면 그것이  공의로운  정치이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함이다. 하나님께서는 그와 같은 정권을 공고하게 하신다.  그러므
로 잠 29:4에 "왕은 공의로 나라를 견고케" 한다고 하였다.
   (1) 언제나 약자를 도와주시는 것이 하나님의 일하시는 원리이기도 하다.     그는
복음적 역사에 있어서 그러하심. 고전 1:18에 말하기를,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
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라고  하였
다.    이 세상 일에 대한 그의 섭리도 그러하심. 삼상 2:6-8에 말하기를,  "여호와는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며 음부에 내리게도 하시고 올리기도 하시는도다  여호
와는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는도다  가난
한 자를 진토에서 일으키시며 빈핍한 자를 거름더미에서 드사 귀족들과 함께 앉게  하
시며 영광의 위를 차지하게 하시도다"라고 하였다.
   (2) 만왕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친히 가난해지시므로 우리 신자들을  부요
하게 하셨다(고후 8:9).  이것을 보면, 이 세상의 통치자들도 그 자신이 영광을  누리
는 자리에만 머물지 말고 친히 낮아지고 희생하며 또 고난을 받으면서 민중을  체휼해
야 그들을 돕는 효과를 낼 것이다. 이 세상 왕들은 참된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
아야 된다. 인류는 죄값으로 고난 중에 빠졌으나 그들을 구원하시는 참된 구주 예수님
은 하늘의 영광을 버리시고 고난의 구주가 되셨다.

 

  잠 29:15

  채찍과 꾸지람이 지혜를 주거늘 임의로 하게 버려두면 그 자식은 어미를 욕되게 하
느니라 - 여기 이른바 "채찍"은 징계를 비유하는 시적(詩的)표현이다. 바울도  말하기
를, "너히가 무엇을 원하느냐 내가 매(채찍)를 가지고 너희에게 나아가랴 사랑과 온유
한 마음으로 나아가랴"라고 하였는데(고전 4:21), 그의 이른바 "매"는 징계를  비유한
다.  징계는 하필 구타(毆打)로 성립되는 것이 아니고 여러가지 다른 방법이 있다. 물
론 그것이 사랑의 권위로 규율 있게 실행되어야 하고, 문란과 악독과 혈기로 하면  역
효과를 가져온다. 그런데, 이 점에 있어서 우리는 신학 체계가 다른  바르트(Barth)의
견해를 참고하여 보자. 그는, 잠언 저자의 말한 채찍을 여자적(如字的)으로 간주하고,
신약 시대에는 그런 처벌을 중요시하지 않아야 될 것처럼 말한다. 그는 말하기를, "예
수님의 초림하신 시대에 자녀들에게 대한 부모의 할 일은 주로 복음 증거여야 하고 율
법적인 것이 아니다."라고 하였다(In der mit  der  ersten  Parousie  Jesu  Christi
anhebenden Endzeit haben die Eltern den Kindern nicht  zuerst  und  entscheidend
das   Gesetz,   sondern   zuerst   und   entscheidend   das    Evangelium     zu
bezeugen.-Kirchliche Dogmatik   /4, 1951, s. 317). 바르트(Barth)의 이 말은, 신약
시대에는 구약 시대에 한 것처럼 자녀들을 율법적으로 엄하게 다스릴  것은  아니라는
의미이다. 이것은 일리가 있는 말이나 우리가 참고할 만하다. 그러나 잠언의 "채찍"이
란 말을 비유적으로 해석할 때에는 그것이 무법한 구타를 의미하지 않는 것인만큼  오
늘날 신약 시대에도 문제될 것은 없다. 잠 19:18에 대한 해석을 참조하여라.
   "버려두면 그 자식은 어미를 욕되게 하느니라." 여기 이른바  "버려둔다"는  것은,
잘못하는 자식을 징계하지 않고 내버려둠을 의미한다. 잘못하는 자식은 시정되어야 한
다. 어떤 사람들은 인간의 자유를 지나치게 신성시(神聖視)하여 자녀들의 잘못을 시정
시키는 것이 옳지 않다고 한다. 이와 같은 주장은 그릇된 것이다. 그 이유는, (1)  인
간의 자유는 절대적이 아니기 때문임, 인간의 존재 자체도 절대적이 아니고 의존적(依
存的)인 것은 너무도 명백하다. 그러므로 그의 자유도 제한되어 있다. (2) 자녀를  바
로 인도하지 않으면 그들이 악에게 사로잡힌다. 그들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
으니만큼(창 1:26),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그대로 사는 것이 그  본연(本然)이
다. 그러니 그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도함이 결코 부자연스러운 억압(抑押)이 아니
다.

 

  잠 29:16

  악인이 많아지면 죄도 많아지나니 의인은 그들의 망함을 보리라 -  이것은  죄악이
관영한 시대를 염두에 두고 한 말씀이다. 호 4:7 참조. 극도로 악한 사회는 멀지 않아
서 망한다. 그러니만큼 그 시대의 의인은 그 사회의 멸망함을 친히  목도하게  된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보통으로는 이 세상에서 악인들의 멸망을 보지 못하고 별세하는  일
이 많다. 아브라함도 가나안 민족들의 멸망함을 보지 못하고 별세하였다. 그러나 어떤
때에는 의인들이 악인들의 멸망을 친히 목도하는 일도 있다. 부릿지스(Ch. Bridges)는
우리 본문의 말씀에 적합한 좋은 실례를 들었으니, 곧, 노아는 그 시대 사람들의 멸망
함을  보았고(창  7:23),  아브라함은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을   목도하였고   (창
19:27-28), 이스라엘 백성은 애굽인들의 패망을 목격하였다고 한다(출 14:30).
   여기 이른바 "의인은 그들의 멸망을 보리라"는 것은 특별히 악인들을 지향한  환란
에서 의인은 구원을 받는다는 것도 가르친다. 극악한 시대에 악인들의 죄에 물들지 않
고 순결을 지킨 성도는 하나님의 특수 간섭에 의하여 기적적으로 해(害)를 면한다. 이
것은 성경이 많은 말씀으로 보장해준다. 한 두 가지 예를 들면, 노아는 홍수로 멸망시
키는 그 재앙에서 구원되었고(창 7:1, 8:16-19), 롯은 소돔성에 내린 유황불 재앙에서
구원받았다(창 19:29). 계 18:20 참조.

 

  잠 29:17

  네 자식을 징계하라 그리하면 그가 너를 평안하게 하겠고 또 네 마음에 기쁨을  주
리라 - 앞에 있는 15절 해석 참조. 17절 말씀은, 부모가 평안과 기쁨을 얻을 목적으로
라도 자식을 징계해야 된다는 것이다. 그 목적은 결코 비루한 것이 아니고  고상하다.
그 이유는, 그 평안과 기쁨은 그 징계의 결과로 얻은 그 자식의 경건과 의(義)로 인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신본주의(神本主義)이고 이기주의가 아니다. 부모만이  자식
에게 경건과 의를 가르칠 만한 권위자이다. 그 이유는, (1) 부모가 가장 그 자식을 사
랑하기 때문에 그 자식에게 권위가 있음, 교육의 참된 권위는 사랑이다.  (2)  부모는
그 자식이 나기 전부터 세상에 있었으니 그 자식보다 지혜롭고 경험이 많음.  그들은,
그들이 나기 전부터 전승되어 온 지식도 그 자식에게 가르칠 수 있다. (3) 부모는  그
자식에게 대하여 하나님의 대리자이기 때문임. 그러므로 부모는 자식에게 하나님의 말
씀을 가르쳐서 그로 하여금 하나님을 순종하도록 증거해야 된다. 부모가 자식을  징계
함도 하나님의 권위와 말씀에 근거하고 실행되어야 한다.
   신학 체계에 있어서 우리와 다른 바르트(K. Barth)도 이 점에 있어서 우리와  같이
말하기를, "하나님만이 참으로 또는 근본적으로 아버지이시다. 육신의 아버지가 그 자
식을 창조한 자가 아니며 죽음에서 구원해 주는 구주도 아니다. 다시 말하면,  육신의
아버지는 그 자식의 육신 생명과 영생의 근원은 아니다. 그러나 육신의 아버지가 피조
물의  규모에서  하늘  아버지를  상징한다."-(초역)라고  하였다(Kein  menschlicher
Vater,  sondern  allein  Gott  ist  eigentlich,  wahrhaftig  und  zuerst  Vater.
Keinmenschlicher Vater ist ja der Sch pfer seines Kindes, Keiner der Herr dessen
Dasein, Keiner sein Befreier S nde, Schuld und Tod, Keiner durch sein  Wort  die
Quelle seines zeitlichen und ewigen Lebens. Eben in diesem eigentlichen,  wahren
und ersten Sinn ist Gott-und er allein-Vater.  Er  ist  es  als  der  Vater  der
Barmherzigkeit, als der Vater seines Sohnes, des Herrn Jesus  Christus.  Es  ist
aber eben dieses Vaters Gnade, dass es, in, Entsprechung zu der  seinigen,  auch
menschliche  Vaterschaft  gibt.  Und  dass  sie  die   Vaterschaft   Gottes   in
menschlich-gesch pflicher Gestalt darstellen darf, das ist es, was auch ihr Sinn
und W rde gibt, was ihr gegen ber zum Respekt aufruft.-Die Kirchliche  Dogmatik,
  /4, 1951, s.275)

 

  잠 29:18

  묵시가 없으면 백성이 방자히 행하거니와 율법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느니라 -  여
기 "묵시"란 말(*       )은 계시(revelation)를 가리키는데, 성령에 의하여 영적으로
보는 것을 말함이다. 이것은, 예언자들이 하나님 앞에서 받는 것이다. 계시에 의한 예
언자의 가르침이 없는 시대는 암흑 시대이다(시 74:9; 호 4:6). 이런  시대에  재래의
율법(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개인들이 있을 수 있다. 이들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다.

 

  잠 29:19

  종은 말로만 하면 고치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가 알고도 청종치 아니함이니라 -  여
기 이른바 "종"은 애굽 사람의 집에서 종노릇한 요셉과 같은 자가 아니다. 요셉은  그 주인의 말을 잘 순종하였을 것이다. 여기 이른바 종은 엄격한 감시 아래서 겨우  직책을 실행할 자이다. 그러나 이 귀절의 말씀은 종을 채찍하여야 된다는 의미는  아니다. 잠언에 자식을 채찍하라는 말씀은 있으나 종을 그렇게 하라는 말은 전연 없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종을 너무 방임해 둘 것이 아니고 감시와 규율의 제재 아래 두어야  된다는 뜻이다. 오늘날에 종의 제도는 없으나 고용(雇傭)의 제도는 있다.  우리  본문의 말씀에 근거하여, 고용주는 고용인을 방임하지 말고 감시함이 정당하다. 그가  그렇게 해야 피차간 이익을 거둔다. 인간은 감시를 받지 않으면 보통으로는 직무에  태만해지기 쉽다.

 

 잠 29:20
  네가 언어에 조급한 사람을 보느냐 그보다 미련한 자에게 오히려 바랄 것이 있느니
라 - 잠 26:12 참조. 사람이 말에 조급하면 늘 일을 저지른다.  그런  사람의  별명은
"일을 저지르는 자"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그는 늘 위험한 자로  판정되어  있다.
차라리 미련한 자가 침묵만 지키면 그보다 낫다. 잠 17:28에는 말하기를, "미련한  자
라도 잠잠하면 지혜로운 자로 여기우고 그 입술을 닫히면 슬기로운  자로  여기우느니
라"고 하였다. 말에 조급한 자는 다른 행동에도 조급한 법인데, 그  실수로  가져오는
불행이 여러가지이다. (1) 욕을 당함(잠 18:13), (2) 궁핍해짐(잠 21:5), (3)  어리석
음을 나타냄(잠 14:29), (4) 범죄함(잠 19:2)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위대한  선지
자 모세는 어려운 일을 당할 때마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먼저 하나님 앞에 나가서 기
도하였다(출 14:14, 32:31-32; 레 24:12). 약 1:19에 말하기를, "내 사랑하는  형제들
아 너희가 알거니와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
라"고 하였다.

 

  잠 29:21

  종을 어렸을 때부터 곱게 양육하면 그가 나중에는 자식인체 하리라 - 이 귀절의 히
브리어를 개역하면 다음과 같다. 곧, "종을 어렸을 때부터 제멋대로 하게  하면  그가
나중에는 완고한 자가 되느니라." 사람이 자기의 어린 자식도 제멋대로 행하도록 버려
두어서는 안되고 잘 다스려야 한다. 그렇다면 어린 종도 그렇게 해야 되지 않을까? 종
은 언제나 그 주인의 제재 아래 있으면서 감심으로 봉사해야 된다.
   계시 시대에 인류가 종의 제도를 체험한 결과로 복음의 사역자를 '하나님의  종'이
라고 한 그 말씀 내용을 깨닫게 되었다. 하나님의 종은 하나님의  뜻대로만  순종해야
될 처지에 있다. 사도 바울은 자기가 하나님의 종인 사실을 강조하였다. 현대  교회의
교역자들 중에는 이 사실을 잊어버리고 제멋대로 자유하고 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보다 자기의 영광을 찾고 있는 자들이 많다.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완고한 자들이
다.

 

  잠 29:22

  노하는 자는 다툼을 일으키고 분하여 하는 자는 범죄함이 많으니라 - 이 귀절의 히
브리어를 개역하면 다음과 같다. 곧, "분노의 사람은 다툼을 일으키고 성내는  뜨거움
의 소유자는 범죄함이 많으니라." "분노의 사람"이란 말(*           )은, 어떤  경우
에 혹시 노하는 사람과 달라서 분노에 속하는 사람인만큼 상습적으로 노를 발하는  사
람을 말함이다. 그리고 "성내는 뜨거움의 소유자"란 말도 상습적으로 성내는 자를  가
리킨다. 분노에 있어서 습성이 생긴 것은 그들의 특징과 같이 되어 있다. 이런 자들은
늘 다툼도 일으키고 또 다른 범죄도 하게 된다. 그들은 다투는 것 외에도  많은  죄를
범하는데 곧, (1) 원수를 맺으며, (2) 시기(猜忌)하며, (3) 당을 지으며, (4)  배반하
며, (5) 교만하며, (6) 훼방하며, (7)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8) 사나우며, (9) 악
독하며, (10) 무정하며, (11) 잔인하며, (12) 저주하며, (13) 미워하며, (14)  원망하
며, (15)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며, (16) 불목(不睦)하며, (17) 살인하며, (18) 흉악함
이다. 롬 1:28-31; 갈 5:19-21; 딤후 3:2-5; 계 21:8 참조.

 

  잠 29:23

   사람이 교만하면 낮아지게 되겠고 마음이 겸손하면 영예를 얻으리라 - 하나님은 교
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약 4:6). 그러나 교만한 자는  낮
아질 수 밖에 없고 겸손한 자는 진정한 의미에서 높아진다. 그러므로 야고보는 말하기
를, "낮은 형제는 자기의 높음을 자랑하고 부한 형제는 자기의 낮아짐을  자랑하라"고
하였다(약 1:9). 곧, 낮은(겸손한) 형제는 하나님의 은혜로 높아질 것을 내다보는  고
로 자랑할 만하고, 부한 형제는 예수 믿은 후부터 낮아짐(겸손해짐)을 자랑할  만하다
는 뜻이다. 이것은 겸손을 보배롭게 여기는 말씀이다. 겸손은 이렇게  귀하기  때문에
성 에브라임(St. Ephraim)은 성직(聖職)을 받지 않으려고 거짓으로 미친 체하였고, 크
리소스톰(Chrysostom)은 성직을 받지 않으려고 도망갔다가 사람들에게 붙잡혀  돌아와
서 할 수 없이 그 성직을 받았다. 앞에 있는 25:6-7의 해석을 참조하여라,  잠  18:12
참조.

 

  잠 29:24

  도적과 짝하는 자는 자기의 영혼을 미워하는 자라 그는 맹세함을 들어도  직고하지
아니하느니라 - 여기 이른바 "도적과 짝하는 자"는 도적과 함께 도적질을 계획하고 그
배후에 앉은 자이다. 나봇의 포도원을 빼앗도록 계획한 아합과 이세벧은 실제로  나봇
을 죽인 자들보다 죄가 더 크다고 할 수 있다(왕상 21:1-6).
   "자기의 영혼을 미워하는 자." 곧 도둑과 짝하여 그 사건의 배후에  숨어  있었고,
또 그 사실을 자복하지 않으니 그 영혼은 망할 수 밖에 없다. 그러므로 결과적으로 보
아서 그는 자기 영혼을 미워하는 자와 같이 된 것이다. 매튜  헨리(Matthew  Henry)는
그런 사람들에 관하여 말하기를, "그들은 모순된다. 죽음보다 무서운 것이 없건만  그
들은 그것을 사랑하고, 영혼보다 더 아끼고 사랑할 것이 없건만 그들은 그들의 영혼을
미워한다."라고 하였다(See the absurdities  sinners  are  guilty  of;  they  love
death, than which nothing is more dreadful, and hate their own souls than  which
nothing is more dear.-Matthew Henry's Commenatry,   , Job To  Song  of  Solomon,
Fleming H. Revell, p.962). 겔 18:31 말하기를, "너희가 어찌하여 죽고자  하느냐"라
고 하였으니, 이 질문이 그들에게도 해당된다.
   "맹세함을" 듣는다는 것은, 이스라엘 나라의 재판장에서 사건을 판결할 즈음에  혐
의자나 증인을 불러서 맹세케 하고, 범죄 사건을 진술하라고 함을 말함이다. 레  5:1;
마 26:63 참조.


  잠 29:25,26

  사람을 두려워하면 올무에 걸리게 되거니와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안전하리라 주
권자에게 은혜를 구하는 자가 많으나 사람의 일의 작정은 여호와께로 말미암느니라  -
우리는 사람(특별히 주권자)을 두려워할 필요 없다. 그 이유는, 우리가 사람을 두려워
함으로 도리어 역경에 빠지기 때문이다. 오직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의지해야만
그의 보호를 받는다(25절). 사람들이 주권자의 도움을 받고자 하여 그를 두려워하기는
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들을 도와주셔야만 그들에게 참된 유익이 있다(26절).  여
기 이른바 "안전하리라"는 말(*        )은 "높임이 됨", 곧, "보호함을 받음"을 의미
한다(Wildeboer, Er wird erh ht d.h. gesch tzt). 빌데부얼(D.G. Wildeboer)은 이 귀
절의 상반절에 대하여 해석하기를, "인간은 사람을 두려워함 때문에 악을 행하게도 되
고, 혹은 선을 행하기를 등한히  한다."라고  하였다(Man  kann  aus  Menschenfurcht
b ese thun, oder gutes zu  thun  unterlassen.-Kurzer  Hand-Commentar  Zum  Alten
Testament, Die Spr che, 1897, s.83). 이 귀절(25-26)들의 뜻을 더욱 분명히 알기 위
하여 아래 있는 설교를 자세히 참고하여라.
   "주권자에게 은혜를 구하는 자가 많으나." 이 말씀은, 윗절에 기록된대로 사람들이
사람을 두려워하는 동기를 밝혀준다. 그들이 두려워함은 특별히 주권자를 상대한 것인데, 그것은 그들이 그에게서 보호를 받으려는 것이다. 그러나 위에 벌써 말한 바와 같이, 참된 보호는 하나님에게서만 받을 수 있다. 일의 작정은  여호와께로  말미암는다(26절 하반).

  잠 29:27
   불의한 자는 의인에게 미움을 받고 정직한 자는 악인에게 미움을 받느니라 - "불의한 자"는 여호와를 믿지 않는 자요, "정직한 자"(*             )는 여호와를  경외하
는 자이다. 양자(兩者)의 대립은 인류 역사의 초기부터 있어온다(창 3:15). 그것은 여인과 마귀의 대립을 근거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도 이와 같은 대립이 영적 배경에 속한 것임을 지적하셨다(요 8:38-44). 이 점에 있어서 신자들이 받을 위로가 있다. 그것은, 예수님이 그들 편에 계시다는 사실이다(요 15:18, 1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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