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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잠 26:1

   미련한 자에게는 영예가 적당하지 아니하니 마치 여름에 눈오는 것과 추수 때에 비
오는 것 같으니라 - 여기 "미련한 자"(*       )란 말은 죄로 강퍅하여져서  회개하지
않는 자를 말함이다. 이 세상에 완전한 사람은 하나도 없도 모두 다 허물이 있는 자들
뿐이다. 그러나 자기의 허물과 죄를 반성하며 회개할 줄 아는 자들은 고상한 직분("영
예")을 맡을 수 있다. 그 이유는, 그들은 잘못된 것을 고치기 잘 하므로 마침내  일을
바르게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강퍅한 자, 곧 회개하지 않는 자는 고상한 일을 맡으므
로 그 자신이 더 교만하여지고 어두워져서 그 일을 언제나 잘못되게  한다.  그러므로
그런 자에게는 고상한 직위(영예)가 합당치 않음이, 마치 여름에 눈이 오는 것과,  추
수 때에 비 오는 것이 농사에 해로움과 마찬가지이다. 교회의 직분(영예)도 자격 없는
사람들이 맡을 때에 교회를 해롭게 한다. 특별히 하나님께서 세우지 아니하신  자들이
생활 문제를 위하여 영예로운 목사직을 가질 때에 그들은 평생 교회를  해롭게  한다.
그들이 성직자로서의 합당치 않은 증표는, 그들의 마음이 강퍅하여 자신의 허물을  고
치지 않는 것으로 드러난다.

 

  잠 26:2

  까닭 없는 저주는 참새의 떠도는 것과 제비의 날아가는 것 같이 이르지 아니하느니
라 - 이 말씀은, "까닭없는 저주", 곧 공의롭지 않은 저주는 그대로 성취되지  않는다
는 뜻이다. 성경에 기록된대로 의인들이 애매하게 원수의 저주를 받은 일이 있다.  그
러나 그것은 모두 다 헛된 것으로 드러났다. 예를 들면, 골리앗이 블레셋  신(神)들의
이름으로  다윗을  저주하였으나(삼상  17:43-44),  다윗은  도리어  승리하였다(삼상
17:48-50). 그리고 선지자 예레미야도 그 원수들에게서 까닭 없이 저주의 대상이 되었
던 것이다(렘 15:10 하반). 그러나 그 원수들의 저주는 하나님의  사람  예레미야에게
그대로 미치지 않았다. 성경이 말한대로 하나님의 권위로 발설된 종교 윤리적인  저주
만이 그대로 상대방에게 성취되었다. 예를 들면, 타락한 종교 윤리적인 저주만이 그대
로 상대방에게 성취되었다. 예를 들면, 타락한 아이들이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를 조롱
한 죄로  그의  저주를  받아  그들중  사십  이명이  암콤에게  찢기어  죽었다(왕하
2:23-24). 이 점에 있어서 우리가 한 가지 더 명심할 것은, 하나님께서 죄악이 관영한
여리고성을 멸하시고, 또 그것을 영원히 없앤다는 의미에서 여호수아를 통하여 말씀하
시기를, 여리고 성을 다시 쌓는 자는 저주를 받을 터인데 그 기초를 쌓을 때에 맏아들
이 죽고, 그 문을 세울 때에 마지막 아들이 죽으리라고 하셨다(수 6:26). 그런데,  여
러 백년 후에(아합 시대에) 히엘이라는 사람이 여리고성을 다시 건축하기  위하여  그
터를 쌓을 때에, 과연 여호와의 저주하신 바와 마찬가지로 그의 맏아들이 죽었고,  문
을 세울 때에 그의 말째 아들이 죽었다(왕상 16:34). 이렇게 하나님의 권위(權威)로써
종교 윤리적 동기로 선언된 저주는 언제든지 그대로 실현되는 반면에, 까닭 없는 저주
는 언제든지 헛된 것이다. 이것을 보면, 저주는 신중한 것이며, 어디까지나 죄악이 관
영한 자에게 하나님의 권위로만 임하는 것이다. 그것은 종교 윤리적(宗敎倫理的) 성격
을 띤 것이지, 마술적인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이교(異敎)에서 사용하는 저주는 마술적인 것이고 또 헛된 것이다.  그것이
야말로 까닭 없는 저주이다. 예를 들면 불교의 저주가 그런 것이다. 이 아래에 그것을
간단히 소개하고 비판하려 한다. 곧, 석가여래가 선포한 427 마디로 된  주문(呪文)이
있는데, 누구든지 그것을 써서 집 안에 간직해 두기만 해도, 한평생에 모든  독(毒)의
해(害)를 받지 않으며, 재앙이 소멸되며, 소위 전생(前生)에서부터 지은 모든  죄악들
은 끓는 물에 녹듯이 없어진다고 한다(首楞巖經, 釋耘虛譯, 1970, PP. 269-275). 이런
주문은 윤리적 성격을 전연 가지지 않았고, 다만 마술적 성격을 띤 것이다. 그것의 능
력 발휘가 그것을 가진 자의 선악과 아무런 관련도 가지지 않는다. 이것은 허망한  미
신 사상에 속한다.

 

  잠 26:3

  말에게는 채찍이요 나귀에게는 자갈이요 미련한 자의 등에는 막대기니라 -  "말"과
"나귀"는, 견제(牽制)하므로 부릴 수 있는 짐승들인데, 이것들로써 "미련한자"(거만하
고 강퍅한 자)를 비유한다(시 32:9).
   "미련한 자의 등에는 막대기"란 말은, 하나님께서 거만하고 강퍅한 자("미련한 자"
의 신분)를 벌과 재앙으로 다스리신다는 뜻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공의를 보여주면서
도 그의 자비를 나타내기도 한다. 우리가 이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이  세
상에서 죄인들마다 벌하시지 않고 그 가운데서 가장 큰 죄인, 곧 강퍅한  죄인(미련한
자)을 벌하시기 때문이다. 벌을 이와 같이 시행하심은, 일벌  백계주의(一罰百戒主義)
이다. 이 원리는 잠 19:25에도 분명히 나타났으니, 거기 말하기를, "거만한 자를 때리
라 그리하면 어리석은 자도 경성하리라"고 하였다. 여기 "어리석은 자"란 말(*      )
은, 우리 본문(잠 26:3)의 "미련한 자"란 말(*       =강퍅하고 교만한 자)과 달라서,
좌우를 분별하지 못하는 자를 말함이다.
   하나님께서는 자비하셔서 이렇게 일벌 백계주의로 이 세상을 다스리신다. 그러므로
사람들이(성령을 받은 자들 외에는) 하나님의 내리시는 벌을 잘 식별하지 못한다.  롬
2:4-5 참조.

 

  잠 26:4,5

  미련한 자의 어리석은 것을 따라 대답하지 말라 두렵건대 네가 그와 같을까 하노라
미련한 자의 어리석은 것을 따라 그에게 대답하라 두렵건대 그가 스스로 지혜롭게  여
길까 하노라 - 여기 두 개의 서로 반대되는 듯한 명령은 사실상 모순이 아니다.  이것
은 미련한 자를 상대하는 두 가지 지혜로운 태도를 보여주었으니, 곧, 미련한  자에게
대하여 침묵할 경우도 있고 말할 경우도 있다는 것이다.
   (1) 미련한 자에게 대하여 침묵을 지킴이 지혜가 될 수 있음(4절). "미련한  자"는
교만하고 강퍅한 자인데, 그는 진리와 사실을 진지하게 알려고 하지 않고 그저 호기심
으로 취급한다. 그것은 일종 장난거리로 취급함이다. 지혜로운 사람은 그런 말에 대답
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그가 말하는 경우에는 그 자신도 상대방의 옳지 않음에 동참
하게 되는 까닭이다. 예수님은, 호기심으로 묻는 헤롯의 질문에 대하여 답변하지 않으
시고 침묵을 지키셨다(눅 23:8-10). 스킬더(K. Schilder) 박사는 예수님의 침묵을  세
가지로 해석하였다. 곧, 첫째로 왕적 침묵(王的沈默)이라고 함. 그는  만왕의  왕이시
니, 그의 승리는 결코 한개의 거짓 증거에 대하여 통쾌한 답변을 하심에 있는 것이 아
니었다. 그가 그 원수들의 용렬하고 번쇠한 말에 대답하지 아니하심으로 오히려  우주
보다 크신 그의 위엄을 보여주셨다. 높이 날아다니는 학(鶴)은 참새의 양식인  조(조)
를 먹지 않는다. 둘째로는 희생이 되셨다. 그는 죽이기로 작정된 양과  같으셨다(벧전
2:22-23). 희생자는 말 없이 고난만 당하는 법이다.  세째로는  선지자적  침묵이라고
함. 선지자의 예언들 중에는 밝히 드러나는 것도 있지만 가리워진 것도 있어서,  때가
이르기 전에는 그것이 하나의 수수께끼와 같다. 이것이 하나님의 깊으신 사실을  사람
들로 느끼게 한다. 예수님께서 헤롯의 질문에 대하여 전연 대답하시지 않은 것이 선지
자적 침묵이다(눅 23:9).
   동양 옛글에도 말하기를, "악인이 선인을 꾸짖어대거든 선인은 도무지 응답하지 말
일이다. 응대하지 않음에 마음이 맑고 조용한데 비하여 꾸짖는 이는 입이 끓어지는 것
과 같다(惡人罵善人善人總不對不對心淸閑罵者口熱彿正如 人唾天還從己身墜)라고  하였
고(明心寶鑑, 戒性篇, 7), 또 말하기를, "내가 만약 남에게 욕설을  듣더라도  귀먹은
체 하고 말대꾸를 하지 말 일이다. 비유컨대 불이 허공에서 타다가 끄지 않아도  저절
로 살아짐과 같다. 내 마음은 허공과 같으니 도무지 그의 입술과 혀만 뒤움직일  뿐이
다"(我若被人罵佯聲不分說譬如火燒空不救自然滅我心等虛空總爾飜唇舌)라고  하였다(같
은 책, 戒性篇, 8). 명심보감의 이와 같은 말이 영감(靈感)된 것은 아니지만,  인류의
경험과 하나님의 주신 일반 은총에 의한 깨달음이라고 할 수 있다.
   (2) 미련한 자의 말에 답변할 만한 경우, 미련한 자가 무식의 원인으로 무지한  말
을 할 때도 있다. 그런 경우에는 우리가 그의 영혼 구원을 위하여 대답하며  가르쳐야
된다. 그가 자기의 무지한 말을 스스로 옳은 줄로 생걱하면(5절 하반),  그의  영혼은
더욱 어두워질 것이다. 예수님도 무지한 사람들에게 진리를 알리시기 위하여 답변하신
일도 있다(요 18:19-24, 33-37, 19:11). 딤전 6:13 참조.

 

  잠 26:6-10

  미련한 자 편에 기별하는 것은 자기의 발을 베어 버림이라 해를 받느니라 저는  자
의 다리는 힘없이 달렸나니 미련한 자의 입의 잠언도 그러하니라 미련한 자에게  영예
를 주는 것은 돌을 물매에 매는 것과 같으니라 미련한 자의 입의 잠언은 술 취한 자의
손에 든 가시나무 같으니라 장인이 온갖 것을 만들지라도 미련한 자를 고용하는  것은
지나가는 자를 고용함과 같으니라 - 이 부분의 말씀은, 사람이(혹 교회가) 자기  대리
(代理)로 미련한 자를 세움이 좋지 않다는 것이다. 이 귀절에 대한 자세한 해석은  이
아래 설교로 대신한다.

 

  잠 26:11

  개가 그 토한 것을 도로 먹는 것 같이 미련한 자는 그 미련한 것을 거듭  행하느니
라 - 여기서 미련한 자를 개와 같은 자로 보았으니 그 이유는 이렇다. 곧, (1)  "미련
한 자"란 말의 히브리어(*       )는 보통으로 어리석은 자(유치한 자)와 달라서 죄를
업(業)으로 삼는 자이다. 다시 말하면, 그는 죄를 짓는데 있어서 양심에 가책을  전연
느끼지 않는다. 그가 불결한 것을 문제시하지 않으니, 그 점에 있어서 그는  개와  같
다. 예수님께서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라"고 하셨는데(마 7:7),  그것은,  개는
거룩한 것을 몰라본다는 의미도 가지고 있다. (2) 미련한 자는 강퍅하여 죄를  떠나지
않고 계속하여 그것을 범한다. 다시 말하면, 그는 회개하지 않는 자이다. 그는 바로와
같은 자이다. 바로가 열 가지 재앙을 만나는 때에 간간이 회개하는 것과 같은  태도를
취하기는 하였다(출 9:27, 10:16). 그러나 그는 다시 강퍅하여지곤  하였다(출  8:19,
32, 9:9, 34, 10:20). 그것이, 개가 그 토한 것을 도로 먹는 것과 같은 행동이다.
   그런데 이런 자도 참으로 회개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에 대하여, 우리는 절망할 필
요는 없다. 그 이유는, 다음 귀절(12절)에 어느 정도 소망있는 말씀이 있기 때문이다.
그 주석을 참조하여라. 이런 자도 하나님의 택한 자녀면 적당한 시기에 이르러서 회개
할 소망이 있으니, 진리의 증인들은 낙심하지 말고 끝까지 그를 권면해야 된다.  하나
님의 선택(選擇)만이 인간의 노력의 소망 동기이다. 어떤 사람들의 말대로, "그가  하
나니의 택한 자녀이면 마침내 회개할 터이니 내버려 두라."고 하는 것은, 정당한 논법
이 아니다. 그것은, 선택의 도리를 심판의 재료로 오용(誤用)하는  잘못이다.  우리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곧, "예택(豫擇)된 자는 회개할 소망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힘써
복음을 증거해야 된다."라고.

 

  잠 26:12

  네가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는 자를 보느냐 그보다 미련한 자에게 오히려 바랄 것이
있느니라 - 이 귀절의 히브리어를 개역하면 다음과 같다. 곧, "자기 자신을 자기 눈으
로 지혜롭게 여기는 자를 네가 보느냐 그이보다 미련한 자에게  오히려  소망을  가지
라." 여기서는 스스로 자기 자신이 의롭다고 생각하는 자의 절망 상태를 지적한다. 그
런 자가 외모로는 점잖고 행실에 있어서도 "미련한 자"(*       =행위가 험악하고  강
퍅한 자)보다 좋아 보인다. 그들 중에는 지도자들, 선생들, 교수들, 과학자들이 많다.
그러나 그들이 스스로 자기를 의롭게 생각하여 구원 받기를 원치 않으며,  하나님께로
나오지도 않는다. 그들은 실상 자기 자신을 모르며 또 하나님을  반역하는  자들이다.
하나님은 그들을 미련한 죄인들보다 악한 자로 보신다.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들이
그런 자들이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
노니 세리들과 창기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고  하셨다(마
21:31). 자기가 종교의식이나 사회 도덕을 어느 정도 지킨 것이 늘 자기 눈 앞에 있어
서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한 제사장은, 강도 맞은 사람쯤은 도와주지 않아도 될줄 알았
다(눅 10:31). 그런 사고 방식은 그의 착각이고 하나님 앞에 모시는 것이 참된 의(義)
인 줄 모른 것이다. 따라서 그는 주리고 목 마름 같이 의를 사모하지  않았다(마5:6).
하나님은 이런 자에게 은혜와 의를 베풀어 주시지 않으신다. 눅 18:9-14 참조.

 

  잠 26:13-16

   게으른 자는 길에 사자가 있다 거리에 사자가 있다 하느니라 문짝이 돌쩌귀를 따라
서 도는 것 같이 게으른 자는 침상에서 구으느니라 게으른 자는 그 손을 그릇에  넣고
도 입으로 올리기를 괴로와 하느니라 게으른 자는 선히 대답하는 사람 일곱보다  자기
를 지혜롭게 여기느니라 - 잠언 저자는 게으름을 경계하는 말씀을 여러 차례 거듭한다
(6:6-9, 10:26, 13:4, 19:15, 20:4). 이것은 역설(力說)과 강조를 위한  중복(重複)이
다. 사실상 인류는 게으름 때문에 모든 의를 이루지 못한다.


  잠 26:17

 길로 지나다가 자기에게 상관 없는 다툼을 간섭하는 자는 개 귀를 잡는 자와  같으
니라 - 여기서 우리가 깨닫는 것은, (1) 남의 일에 간섭하지 말라는 것. 갈 6:5에  말
하기를, "각각 자기의 짐을 질 것임이니라"고 하였다. 남의 일에 간섭하는 것은  남을
무시하는 죄악이다. (2) 남들의 다툼에 가담하지 말라는 것. 남들이 싸울 때에 그들로
하여금 서로 화목하도록 함은 하나님께 속한 일이지만(마 5:9; 3:18), 그 싸움을 장려
함은 마귀에게 속한 일이다(약 3:14-16). (3) 남의 일에 간섭하거나 남들의 다툼에 가
담하는 자는 그 자신이 손해를 본다는 것. 개의 귀를 잡는자는 그 개에게 물릴 것  밖
에 없다.
   남의 일에 간섭하는 것은 그 자체가 벌써 싸움의 행동이다. 그 이유는, 그것이  벌
써 남을 침해하는 행동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남과 나 사이에 있는 존엄한  경계선도
알지 못하는 유치한 행동이다. 이런 행동이 많이 있는 사회에서는 사람들이 서로 단합
하지 못하는 병폐가 있다. 거기서는 사람들이 공연히 남의 말을 하며  남을  폄론하게
된다. 이런 사람들의 사는 사회는 잘 될 수 없다.

 

  잠 26:18,19

  횃불을 던지며 살을 쏘아서 사람을 죽이는 미친 사람이 있나니 자기 이웃을 속이고
말하기를 내가 희롱하였노라 하는 자도 그러하니라 - 여기서 지적하는 것은, 남을  기
탄 없이 속이는 것이 미친 행동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위험한 물건들을 마구 던져 사
람을 죽이는 것과 같은 미친 사람의 행동과 같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여기서 지적한
대로 남을 속이는 자는 무자비한 마음으로 속이기 것이기 때문이다. 남을 속이고도 그
것을 후회하거나 한탄하지는 않고 도리어 즐거워하니("희롱하였노라"고  함),  그것이
잔인한 태도가 아니고 무엇인가? 이런 태도로 남을 속이는 것은 두말 할 것 없이 미친
사람의 행동이다. 그 이유는, 그가 자기의 말 때문이다. 그것은 마귀의 심리이다.  마
귀는 사람들을 속여 넘어뜨리는 것을 자기 직업으로 삼는다. 사람으로서 마귀와 꼭 같
은 행동을 한다면 그는 마귀 들린 자이다.

 

  잠 26:20-22

  나무가 다하면 불이 꺼지고 말장이가 없어지면 다툼이 쉬느니라 숯불 위에 숯을 더
하는 것과 타는 불에 나무를 더하는 것 같이 다툼을 좋아하는 자는 시비를 일으키느니
라 남의 말 하기를 좋아하는 자의 말은 별식과 같아서 뱃속 깊은 데로 내려가느니라 -
말장이는 두루 돌아다니며 남의 말을 하여서 사람들 사이에 이간을 붙이며(딤전 5:13
), 분쟁을 일으킨다. 그러니만큼 말장이의  말은  타는  불에  연료(燃料)와  같다(약
3:6).그 뿐 아니라 말장이의 말은 사람들이 주의 깊이 듣는 경향이  있으니만큼  매우
위험하다.

   하나님은 말장이의 말을 심히 미워하신다. 시 52:1-5에 말하기를, "강포한 자여 네
가 어찌하여 악한 계획을 스스로 자랑하는고 하나님의 인자하심은 항상 있도다 네  혀
가 심한 악을 꾀하여 날카로운 삭도 같이 간사를 행하는도다 네가 선보다 악을 사랑하
며 의를 말함보다 거짓을 사랑하는도다 (셀라) 간사한 혀여 네가 잡아 먹는 모든 말을
좋아하는도다 그런즉 하나님이 영영히 너를 멸하심이여 너를 취하여 네 장막에서 뽑아
내며 생존하는 땅에서 네 뿌리를 빼시리로다 (셀라)"라고 하였다. 시 12:2-4 참조.

 

  잠 26:23-27

  온유한 입술에 악한 마음은 낮은 은을 입힌 토기니라 감정 있는 자는 입술로는  꾸
미고 속에는 궤휼을 품나니 그 말이 좋을지라도 믿지 말 것은 그 마음에 일곱 가지 가
증한 것이 있음이라 궤휼로 그 감정을 감출지라도 그 악이 회중 앞에 드러나느리라 함
정을 파는 자는 그것에 빠질 것이요 돌을 굴리는 자는 도리어 그것에 치이리라 거짓말
하는 자는 자기의 해한 자를 미워하고 아첨하는 입은 패망을 일으키느니라 - 여기서는
의식하는(혹은 아첨하는) 사람에 대하여 말한다.
   (1) 그는 비열(卑劣)한 자임(23절). 우리 본문은 비유하기를 "낮은 은을  입힌  토
기"와 같다고 하였다. 여기 이른바 "낮은 은"이란 말은 은의 찌꺼기를 가리킨다. 그의
외모는 고상한 것 같으나 실상은 가짜요(은의 찌꺼기), 사실상 비천한 토기와  같아서
가치 없는 사람이다. 우리 본문의 "온유한"이란 말(*         )은  "불타는"(burning)
이란 뜻이다. 이것은, 그 외식자(아첨하는 자)가 마음에 없는 말을  하면서도  뜨거운
친절미(親切味) 있게 표현함을 가리킨다. 동양 격언에도 "입에는  청밀이요  뱃속에는
검이로다"(口蜜腹劒)란 말이 있다. 외식하는 자(아첨하는 자)는 그  상대방을  사실상
사랑하는 것이 아니고 자기의 이익을 위하여 거짓말로 아부하는 자이다.
   (2) 외식하는 자(아첨하는 자)의 말을 믿지 말 것(24-25). 우리 본문에  잇는  "감
정"이란 말(24, 26)의 히브리어(*       )는 미워함을 의미한다. 외식하는  자(아첨하
는 자)가 말할 때에는 듣기 좋게 하지만 실상은 상대방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고  미워
한다. 설혹 그가 심리적으로 상대방을 미워하는 내막이 없다 할지라도 그가  상대방을
아끼지 않는 것만은 사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가 상대방에게 해로운 거짓말을 한다.
그러므로 결과적으로 보아도 그가 상대방을 미워한 것과 마찬가지이다(28절).  그렇기
때문에 잠언의 저자는 여기서 이런 외식자의 말을 믿지 말라고 경고한다. 그런데도 불
구하고 과거의 많은 집권자(執權者)들이 자기 앞에서 아첨하는 자들의 말만 듣고 일을
하다가 나라를 망쳤고 자기 자신도 망쳤다. 모든 사람들은 자기 귀에  거스리는  말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것이 그들의 어리석음이다. 왜 자기 자신에게 유익한  옳은  말을
배척하는가?
   (3) 외식하는 자(아첨하는 자) 자신도 하나님의 벌을 받아 마침내 망함(26-28). 그가 그 미움("감정"이란 말은 미움으로 개역되어야 함)을 감추고 외식으로 친절을 나타낸다 할지라도 그의 죄악이 공적(公的)으로 드러날 날이 온다. 우리 본문에 "그  악이 회중 앞에 드러나리라"고 한 말씀이 그 뜻이다. 그는 남을 망케 하는 행동을 하였으나 그 행동 때문에 마침내 자기 자신도 망한다. "함정을 파는 자는 그것에 빠질  것이요"란 말씀(27절 상반)이 그 뜻이다. 그리고 "돌을 굴리는 자는 도리어 그것에 치이리라"(27절 하반)고 한 말씀도 그렇다. 곧, 돌을 굴려 내리는 것이 아니고 돌을 굴려  올리다가 사고가 생겨서 그 굴리던 자의 머리가 상하게 됨을 가리킨다(Delitzsch:  It  is natural to think of the roling as a roling upwards; cf. Sir. . 25,*   ,i. e. throws it on his own hea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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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1 아가 박윤선 주석, 아가 08장
510 이사야 박윤선 주석, 이사야 01장
509 이사야 박윤선 주석, 이사야 02장
508 이사야 박윤선 주석, 이사야 03장
507 이사야 박윤선 주석, 이사야 04장
506 이사야 박윤선 주석, 이사야 05장
505 이사야 박윤선 주석, 이사야 06장
504 이사야 박윤선 주석, 이사야 07장
503 이사야 박윤선 주석, 이사야 08장
502 이사야 박윤선 주석, 이사야 09장
501 이사야 박윤선 주석, 이사야 10장
500 이사야 박윤선 주석, 이사야 11장
499 이사야 박윤선 주석, 이사야 12장
498 이사야 박윤선 주석, 이사야 13장
497 이사야 박윤선 주석, 이사야 14장
496 이사야 박윤선 주석, 이사야 15장
495 이사야 박윤선 주석, 이사야 16장
494 이사야 박윤선 주석, 이사야 17장
493 이사야 박윤선 주석, 이사야 18장
492 이사야 박윤선 주석, 이사야 19장
491 이사야 박윤선 주석, 이사야 20장
490 이사야 박윤선 주석, 이사야 21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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