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하 23:1,2
여기서 다윗은 자기 자신의 권위를 말해준다. (1) 그는 미천한 사람 이새의 아들로
서 하나님께 기름 부음이 되었으며, (2) 그는 시가(詩歌)에 능한 자며, (3) 그가 지금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代言)한다는 것이다. 그가 이렇게 말함은 자기를 자랑하거나 높
이는 교만이 아니고, 그를 미천(微賤)한 자리에서 기적적으로 높여주신 하나님을 찬송
함이다. 그의 일생에 기이하게 된 일들은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보여준다. 무엇보다도
놀라운 일은, 그 현재에 하나님의 영감(靈感)이 그에게 임한 사실이었다.
삼하 23:3
이스라엘의 바위. - 이것은 "이스라엘"의 하나님, 곧 여호와를 가리킨 말인데 그는
변치 않으시고 그의 언약을 지키신다는 의미이다. 그는 그의 언약을 믿는 자에게 그
언약의 내용대로 은혜를 베푸신다.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다스리는 자. - 다윗은 이 말로써 자기 자신을 가리켰고, 더
나아가서는 먼 장래에 오실 메시야(그리스도)를 가리켰다. 다윗은 메시야의 모형으로
시편과 예언서에 많이 간주되어 있다. 시 2:1-2; 겔 34:23-24 참조.
저는 돋는 해 아침 빛 같고(4절 초두). - 이 말씀은 특별히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성
취되었다(눅 1:78-79).
"새 풀"(4절 끝)이란 말도 메시야로 말미암은 구원의 축복을 비유한다. 사 44:3-5,
45:8 참조.
삼하 23:5
내 집이 하나님 앞에 이같지 아니하냐. - 곧, 위의 4절 말씀이 다윗의 집에서(그의
자손 가운데서) 성취된다는 의미이다. 그의 말씀은 삼하 7:12-14 상반의 내용을 염두
에 둔 것이다. 그 귀절들에 대한 주석을 참조하라. 여기 "하나님 앞에"란 말(*
)은 "하나님으로 더불어"라고 개역되어야 한다. 이것은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가
리킨다.
하나님이 나로 더불어 영원한 언약을 세우사 만사에 구비하고 견고케 하셨으니. -
여기 "영원한 언약"이란 말을 보아도 이 부분 말씀이 메시야 예언임을 알려준다. "영
원한 언약"을 세우셨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속죄 사업에 의하여 그 백성에
게 주실 영원한 구원을 약속하셨다는 것이다. "만사에 구비하고 견고케 하셨다"고 함
은, 설혹 신자들이 어느 정도 타락하는 일이 있을지라도 하나님께서 구원의 언약을 변
치 않으시고 궁극적으로는 그들을 구원하시도록 만전을 구비하셨다는 뜻이다.
삼하23:6,7
그러나 사악한 자는 다 내어버리울 가시나무 같으니(6절 상반). - 이 말씀은, "사악
한 자"(* ), 곧 비류들은 마침내 영원한 형벌에 처하게 된다는 뜻이다.
이는 손으로 잡을 수 없음이로다(6절 하반). - 곧, 비류들은 메시야의 감화를 받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들은 멸망의 형벌을 받을 수 밖에 없다. 그들은
"철과 창자루"로써 처리된다는 말씀(7절)이 그 뜻이다.
삼하 23:8-12
이 부분에 기록된 세 용사는 다윗의 용사들 중에서 제1급에 속한다. 이들이 하나님
에게서 받은 것은 체력(體力)과 용맹이었다. 이들의 힘이 그 때에 다윗으로 하여금 하
나님의 언약(창 15:18-21)을 성취하는 데 유용하였다.
"여호와께서 크게 이기게 하셨으므로" - 란 말씀(10절 중간),
"여호와께서 큰 구원을 이루시니라" - 고 한 말씀(12절 끝)을 보면, 특별히 이 용사
들이 지녔던 체력과 무력(武力)은 하나님의 은사(恩賜)였던 것이 알려진다. 그 때에
블레셋으로 말하면, 하나님 백성의 영구한 원수였고, 따라서 하나님의 저주(詛呪)와
심판 아래서 멸망 받아야 될 족속이었다. 다윗의 용사들은 이런 심판성 있는 숙청 운
동에 사용된 하나님의 도구(道具)들이었다. 이들이 단신(單身)으로 많은 블레셋 사람
들을 죽였다는 말씀(8끝, 10상반, 12상반)이 있다. 그 말씀을 읽는 우리는 그 때의 블
레셋 사람들의 죄악이 극도에 이른 사실을 명심해야 된다. 심판 받아야 될 자들이 심
판 받는 것은, 자비로우신 하나님도 당연하게 여기신다.
"요셉밧세벱"(* )이란 용사의 이름(8절)이 대상11:11에는 "야소보암"
(* )으로 나와 있다. 이 사람의 첫째 이름("요셉밧세벱")은, 실상 이름이 아
니고 '밧세벱에 거주하는 자'라는 뜻이다. 그리고 그의 별명이
"아디노"(* )이다. 이스라엘 사람들 중에는 한 사람이 여러 이름을 가지기
도 하였다.
팔백 인을 쳐 죽였더라(8절). - 대상 11:11에는 "300인"을 죽였다고 한다. 그러면
"800"이란 숫자는 여러 번 죽인 총수를 말한 것이라고 생각된다(Delitzsch). 이렇게
많은 수효의 사람을 죽였다는 기록은 인명을 많이 살해한 것을 칭찬함이 아니고 하나
님의 백성이 그 원수들의 침략을 어느 정도 분쇄했는지 말해주는 것이다. 삼하 18:7
참조.
삼하 23:13-15
전장(戰場)에서 다윗이 물을 구할 때에 그의 세 용사가 블레셋 군대를 충돌하고 지
나가서 물을 길러왔다. 이 때에 다윗이 그들의 희생 정신을 높이 평가하여 그 물을 마
시지 않고 하나님께 부어드렸다. 어떻게 생각하면 그 때에 세 용사가 지나친 모험을
하였다고 생각되기도 한다. 임금이 물을 사모하였지만 죽을 지경에 이른 것은 아니었
을 터인데 그만한 것을 위하여 생명을 내걸고 모험한 것이 무엇이었던가? 그러나 그들
의 이와 같은 행동은 하나님의 사람 다윗을 극진히 사랑한데서(21:17 끝) 취해진 것이
었다. 사랑이란 것은 이해타산을 넘어서 그 사랑하는 대상된 자의 적은 위로를 위해서
도 최대 한도의 희생을 아끼지 않는다. 그러므로 사람이 사랑하는 자를 위해서는 다른
사람 보기에 지나친 희생도 하는 법이다. 기독교 윤리에 있어서 하나님을 위하여 사람
이 아무리 충성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과잉 충성이 아니다. 전 7:16에 "지나치게 의인
이 되지 말며"라고 하였는데 사실상 이 말씀도 위에 말한 원리와 위배되는 것은 아니
다. 전도서의 이 말씀은 외식(外飾)으로 크게 의로운 체하는 것을 금한 것이고 진정한
의를 최대한도로 행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다. 세 용사의 이와 같은 충성은 인본주의
(人本主義)에 속한 것이 아니었다. 그들이 다윗을 사랑한 이유는 하나님께서 다윗을
세워 주셨을 뿐 아니라 그를 도와주시기 때문이다(대상 12:18 하반). 그러므로 그들의
전투는 하나님을 순종하기 위한 것이었다(대상 12:22-23).
삼하 23:16,17
다윗은 세 용사가 블레셋 군대와 충돌해 가면서 길어온 물을 마시지 않았다. 그것은
다윗의 의리(義理)라고 할 수 있다. (1) 극기(克己) 생활로 나타난 의리. 그는 심히
목이 갈한 상태에서 물을 보았을 때에 마실 생각이 간절했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는
그 물을 마시기를 거절하였다. (2) 생명은 하나님께만 바쳐야 된다는 의리. 그는 세
용사가 생명을 걸고 길어온 물을 그들의 피와 같이 간주하고 그것을 여호와께 부어드
렸다.
삼하 23:18,19
"첫삼인"(19절 하반)이란 것은 8-12절에 기록된 용사들이라고 생각된다. 이 때에 다
윗이 용사들의 등급을 나눈 것이 알려진다. 현명한 다윗은 이렇게 논공행상(論功行賞)에 있어서 사람들의 재능을 똑바로 평가하였다. 6절 참조.
삼하 23:20
효용한 일. - 이 말(* )은 "많은 위대한 일들"이라고 번역되어야 한
다. "모압 아리엘의 아들 둘" - 이란 문구(* )는, "모압의 사자 같은 두 사람"이라고 번역되어야 한다. "브나야"가 이런 장사들을 죽인 것은 하나님의 능력이로 행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눈 올 때에 함정에 내려가서 한 사자를 죽였으며. - "함정"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는 구덩이를 의미한다. 사람이 구덩이에 들어온 사자와 싸우기는 더 위태하다. 그 이유는 그 사람의 피할 길이 없기 때문이다. 눈이 올 때엔 사자가 굶주렸으므로 인가 가까이까지 왔을 것이다.
삼하 23:21
저가 막대기를 가지고 내려가서 그 애굽 사람의 손에서 창을 빼앗아 그 창으로 죽였더라. - 이와 같은 행적은 물맷돌로 골리앗을 죽였던 다윗의 행적과 유사하다. 삼상 17:40, 49-51 참조. 이런 일은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된 것이다. 삼상 17:37 참조.
삼하 23:24-26
이 부분에 기록된 많은 이름들은 다윗의 용사들의 명단이다. 여기 기록된 이름들보다 대상 11:26-47의 것은 더 많다. 역대기 기자는 후에 추가된 용사들의 이름들까지 합하여 기록한 듯하다.
Previous
Li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