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러니한 변수관계
마지막 사울 대 다윗의 관계를 그린 사무엘상 27-31장을 다룸에 있어서
내부적 갈등과 함께 구조적인 문제가 심각하게 나타난다. 이러한 복합적인
문제들이 사울과 다윗 사이에 그려진 장면의 관계들을 의심케 한다. 이로
인해 신문학적 문제까지 흔들리는 경향이 있다. 내적인 문제를 다루기 전에
본문비평적 관점에서 문제삼는 몇가지 점을 대강 다루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본문에서 사울 대 다윗을 그린 장면들이 부드럽게 연결되지 않고 각
장마다 환경이 다르게 나타난다.
둘째 블레셋이 진치고 있는 곳이 28장과 29장에서 각각 상이하다. 한곳은
수넴이요 다른 장에서는 아벡으로 기록되어 있다.
셋째 사울의 죽음과 관련된 블레셋 소년의 동기적 역할이 사무엘하
1장에서와 다르게 나타난다.
이러한 점에서 본문을 이해하기가 몹시 어렵게 된다. 여러 학자들간의
견해가 엇갈리기도 하나 사무엘상 저자의 입장에서 본문을 신문학적으로
살펴봄으로써 새로운 해결방법을 모색할 수 있다.
다음구조는 사울과 다윗 관계의 마지막 장면들이다. 문예적인 형식에
나타나는 신학적 의미가 사울 대 다윗의 종말을 강조하고 있다. 교차대구
구도 안에서 다윗과 사울의 대비관계가 이색적으로 나타난다.
A 27장-다윗의 자기포기
B 28장-사울이 신접한 여인에게 간청(사알)
X 29장-다윗이 배신당함
B' 30장-다윗이 여호와께 간구(사알)
A' 31장-사울의 자기포기
위의 장면들에서 사울과 다윗의 관계가 각각으로 심각한 대조를 이룬다.
이러한 대비관계는 사무엘상 저자의 역사 선택의 기술적인 면을 포함하고
있다. 본문에 나타난 구속사의 의미를 효과적으로 나타내 보이기 위한
지혜로운 방법이다.
A,A'에서 다윗과 사울이 각각 환경에서 자신들의 특별한 입장을 나타내
보인다. A장면에서는 다윗이 사울의 손에서 벗어나기 위해 적지로 투항한다.
인간적인 안락을 누리기 위해 고난받는 것을 두려워하는 신앙적 포기인
것같이 보이나 내면에는 보다 깊은 뜻이 숨겨져 있다. A'에서는 사울 왕의
최후가 그려져 있다. 사울이 전쟁중에 닻린 것이 너무 괴로워서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B,B'에서는 다윗이 어려움 중에 하나님께 기도해서 문제를 해결하려는
의지가 보이나 사울은 신들린 여인에게 문제를 해결하려는 극단을 나타내
보인다. 특이한 것은 사알이라는 히브리 동사의 활용이다.
X에서는 하나님이 다윗을 유다로 되돌려 보내는 주권적 산역사가 나타난다.
물론 다윗이 블레셋 방백들에게 버림을 받지만 이것은 그들의 의지라기
보다는 하나님의 불가항력적 힘의 결과이다.
이러한 구조적 의미를 통해서 사무엘상 저자는 사울과 다윗의 삶의
특수성을 살렸다. 두 사람의 관계를 블레셋과 아말렉을 수단으로 해서
아이러니하게 펼쳐 나간다. 이러한 이중선택적인 묘사들 속에서 신학적인
중요성이 강조되고 있다. 사울과 다윗과의 관계는 마치 깊은 가뭄에 말라
비틀어져가고 있는 갈라진 밭과 같은 상태였다. 사울 왕에 대한 다윗의
반복된 이해와 용서가 단비가 되어 사울의 강퍅한 마음을 촉촉히 적셔
새로운 변화를 기대했었는데 전혀 예측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
블레셋 땅으로 피하는 다윗
27장에서 다윗은 과거에 했던 잘못된 생각을 되새기고 있는 듯하다. 갑자기
사울 왕에게 자신이 죽임을 당할 것이라 여겨졌고 이에 블레셋으로 도망하려
한다.
삼상27:01 다윗이 그 마음에 생각하기를 내가 후일에는 사울의 손에
망하리니 블레셋 사람의 땅으로 피하여 들어가는 것이 상책이로다
이러한 생각은 다윗에게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앞서 26장에서 다윗이
사울에게 가장 고만운 일을 행했고 이에 사울이 다윗의 고마움에
눈물지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어찌 다윗이 사울을 어느때보다 더 두려워하며
그의 손에 망한다고 겁을 먹고 있을까? 24장에서 행한 사울에 대한 다윗의
용서가 크게 속았기 때문에 다시 속지 않으려고 그러한 어리석은 생각을
하고 있을까?
물론 다윗의 환경이조금 바뀐 것은 사실이다. 갑자기 아리따운 부인이
두명이나 생겨서 모험보다는 안정이 필요했을 수 있다. 사울과의 괜한
관계때문에 그녀들을 희생시키기에는 너무 야박하다고 생각한 나머지 이러한
부정적 생각을 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문제는 블레셋으로 피해야겠다는 그의
결단이다. 사울과 계속 싸우면서 심신이 피곤해진 생활 때문에 이러한
연약한 생각을 할 수 있다고 하지만 하필이면 왜 블레셋 나라로 피한단
말인가? 다윗은 전에 사울의 핍박이 두려워서 블레셋 진영으로 도망갔던
적이 있었다(21:10-15). 가드왕 아기스에게 도움을 요청하려다 왕의
신하들의 고발때문에 겁이 나서 미친 사람처럼 행동해 겨우 목숨만 유지하고
그곳을 빠져나온 경험이 있는데 이번에 또 블레셋으로 도망간다는 것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대부분의 보수학자들 사이에는 다윗이 사울의 눈을 피해서 블레셋 진영으로
투항한 것을 크나큰 잘못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다윗이 스스로 자신의
신앙적 입장을 포기하고 있다고 믿고 있다. 그러나 보다 정확하게 저자의
구조적 의미 속에서 보면 새로운 면을 발견할 수 있다. 본장에 나타나는
다윗의 삶은 사울 자신이 자기 생명을 포기하는 모습과 비교하기 위한
저자의 특별한 방법임을 주목하면서 관찰해야 한다.
다윗이 가드로 다시 도망한 것은 사울과의 관계를 분명하게 밝히기
위해서였다. 다윗은 어떤 적수라도 그의 노력으로 좋은 관계를 가질 수
있지만 사울과는 속수무책이라는 점을 분명히 표명하려고 했다.사울이
근본적으로 문제가 있음을 안 것이다. 다윗은 사울과 좋은 관계를 맺기
위해서 모든 방법을 다 써 보았지만 사울의 병적인 정신상태를 도저히
고칠수가 없었다. 사울이 정상적인 상태가 아니라는 것을 다윗은 알아차린
것이다. 그는 수년동안 도망다니면서 울기도 많이 울었고 슬픔이 신앙으로
변하여 수많은 시를 통해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돈독히 해나갔다. 그러면서
사울을 위해 기도와 동정으로 이해하려고 수천번 수만번이나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충실한 신하로서 사위로서 기름부음을 받은 자로서 사울왕을
진정으로 사랑하며 그와 정상적인 관계를 위해 최선을 다해왔었다.
그러나 전장의 사건(24-26장)속에서 다윗은 크게 실망하였다. 사울의
회개는 진정한 깨달음이 없었음을 확인하게 되었다. 결국 다윗은 사울과의
계속되는 긴장상태에 신물이난 것이다. 사울이 당나귀를 찾다가 졸지에
이스라엘 왕이 된 이후 지금까지 자신이 저지른 수많은 잘못 가운데서
사무엘과 다윗에게 두번씩 반복하며 잘못을 저지른 수많은 잘못 가운데서
사무엘과 다윗에게 두번씩 반복하며 잘못을 회개했지만 진정으로 회개하지는
않았다. 이러한 이율배반적인 사울의 마음이 다윗을 결국 블레셋으로 향하게
한 것이다. 이러한 다윗의 결정은 26:10에 기록된 "여호와께서 사시거니와
여호와께서 그를 치시리니 혹 죽을 날이 이르거나 혹 전장에 들어가서
망하리라"는 다윗의 말이 이루어져 가는 아이러니한 변수로 보아야 할
것이다.
사실상 "사울이 이스라엘 온 경내에서 나를 수색하다가 절망하리니 내가 그
손에서 벗어나리라"(1하)는 다윗의 독백의 뜻을 바로 찾아내기는 그리 쉽지
않다. 이는 사무엘상 저자가 다윗의 생각이 사실로 나타나기까지 생각하는
것과 이야기하는 것 사이를 분명하게 구분해 놓지 않았기 때문이다. 생각은
말과 행동으로 옮겨지기 전까지는 정확한 뜻을 알 수 없다. 말 속에서
생각이 반복되면서 강조되는 것은 저자의 분명한 의도를 찾아 낼 수 있는
방법이다.
다윗의 결단에 그를 따르는 사람들도 모두 동의했다. 생각다 못해 다윗은
이러한 어려운 문제를 자기를 따르는 사람들과 의논한 뒤 결정했을 것이다.
그러한 후에 모두가 다윗의 결정을 따르기로 하고 다윗고 함께 아무
불평반대도 없이 적군의 나라 블레셋으로 망명하게 되었던 것이다. 다윗을
따르던 6백명과 그의 가족들 그리고 다윗의 두 아내도 포함되어 있었다.
모두 가즈 왕 아기스에게로 나아갔고 그와 함께 기숙했다. 특히 다윗의
지혜로운 아내 아비가일은 누구보다도 몹시 불안했을 것이다. 혹시나
골리앗을 죽인 것을 앙갚음해 다윗을 해하지나 않을까하는 염려 속에서 밤을
뜬 눈으로 지새우곤 했지만 다윗의 장래가 달려 있는 터라 서로의 관계에
보다 많은 지혜를 짜냈을 것이다.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모두 블레셋 땅 가드로 도망갔다는 소식을 사울이
들었다. 이에 사울은 그가 없어져서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다시는 다윗을
잡으려 하지 않았다(4). 이러한 다윗의 결정이 곧 자신의 삶에 종지부를
찍게 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될 것을 사울은 꿈에도 모르고 있다. 사울은
평안보다는 괴로움의 나날을 보낼 것이 뻔하다. 혹시나 블레셋이 다윗과
연합하여 쳐들어 오지는 않을까하는 염려 속에서 불안이 하늘까지 쌓였을
것이다.
불신앙이 아니라 관계의 포기
이상하게 다윗이 가드 왕 아기스와 사이가 좋아진다(5). 아기스는 가만히
앉아서 횡재를 만난 것이다. 많은 사람과 함께 자기에게 피해온 다윗을
아기스 왕은 놓칠리가 없었다. 이스라엘의 영웅 다윗이 많은 부하들을
데리고 망명하였고 이들과 함께 숙적 이스라엘을 얼마든지 쳐서 이길 수
있기 때문이다. 전에 다윗이 갑자기 블레셋으로 도망올 일이 없는데 왜
도망왔다가 미친 척하고 침을 흘리며 문짝을 긁었는지 조금씩 이해가 갔다.
다윗의 직접적인 고백은 없었지만 눈치로 사울 왕과 다윗의 관게를
알아차리기에 충분했다.
반면에 다윗은 아기스왕과 비록 정치적인 면에서이지만 친해지면 질수록
사울과의 상태가 얼마나 끔찍했었는지 절실히 깨달아 가고 있다. 그가
구제불능의 사람이 아니기를 바라고 있다. 사무엘 선지자가 살아있을 때
사울때문에 그가 얼마나 괴로워했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사울의 눈이
무서워 이세의 집에 기름부으러 가기를 주저한 비밀스러운 모습도 충분히
상상할 시간이 있게 되었다.
다윗은 블레셋 땅에 가서 결혼이나 우상숭배는 꿈도 꾸지 않았고
시글락에서 그의 아내와 부하들과 이스라엘의 신앙적 삶을 계속 추구하기
위해서 아기스 왕과 함께 거하지 않았다. 이러한 다윗의 돈독한 신앙 사수는
"시글락이 오늘까지 유다 왕에게 속하니라"(6하)라는 설명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아직 다윗이 블레셋에서 나오지 않은 상태에서 저자가 미리 7절에서
다윗이 1년 4개월동안 블레셋 땅에 머물렀다고 전제한 것도 다윗이 얼마나
그 험악한 땅에서 신앙을 잘 지켰는지는지를 강조하려는 의도일 수 있다.
다윗은 아기스 왕이 자신에 대해서 관심이 많은 것에 더욱 조심하면서 그를
대했다. 예의바른 행동으로 조금도 그에게 의심의 기회를 주지 않았다.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것은 다윗이 전에 아기스 왕 앞에서 자신이 미치광이
노릇을 하여 위기를 모면한 것이다. 다윗은 행여나 아기스가 그때 일을
떠올려 함께 있는 동안에 자신의 잔꾀를 부리지 않나 하고 염려할까봐 미리
매사에 조심하면서 아기스의 마음을 사로잡아 나갔다.
하루는 다윗이 자기 부하들을 이끌고 유다 남방에 있는 그술,기르스,그리고
아말렉을 쳐 죽이고 소,양,나귀,약대와 의복 등 아기스가 필요한 것을
탈취해 가져와서 그에게 주었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숙적 아말렉을
쳐부수려는 점도 있지만 아말렉을 이용하여 아기스의 마음을 사기
위해서였다.
삼상27:11 다윗이 그 남녀를 살려 가드로 데려가지 아니한 것은 그의 생각에
그들이 우리에게 대하여 이르기를 다윗의 행사가 이러하여 블레셋 사람의
지방에 거하는 동안에 이같이 행하는 습관이 있다 할까 두려워함이었더라
다윗이 신앙이 없어서 블레셋 진영으로 가서 아기스의 비위를 맞추기위해
아말렉을 쳤던 것은 결코 아니다. 다윗과 아말렉과의 관계는 사울과
아말렉과의 관계에 대한 반영이다. 사울이 왕이 된 후 아말렉과 싸우게
되었을 때 하나님의 명령을 준행하지 못했다. 자신의 잘못을 깨닫기 전에
다른 사람들에게 책임을 떠 맡겼다. 하나님은 사무엘을 통해서 사울을
저주하셨고 후회하셨다. 그 사건을 계기로 다윗이 기름부음을 받게 된다.
이러한 과거의 사실과 더불어 본장에서 다윗이 아말렉을 치는 사건을 보이며
사울의 종말을 예고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다윗의 투항을 불신앙으로 볼
것이 아니라 사울과의 관계에 대한 포기로 보아야 한다.
물론 21장에서 다윗이 사울을 두려워하여 블레셋 가드 왕 아기스에게로
도망간 것은 사실이다. 이런 전과 때문에 다윗이 가드로 재차 도망간 것을
너무 인간적인 생각으로 밀어붙여서는 안된다. 지혜로운 아내 아비가일도
망명에 대해서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았고 정의의 제사장인 아비아달도
다윗을 책망하지 않았다. 사울이 다윗이 블레셋으로 도망갔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는 수색하지 않았던 것도 그 자신이 다윗과 끝났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사무엘의 예언적 입장에서 사울과 다윗과의 관계가 끝이 날때가 사울의
종말이라는 점을 사울은 모른 채 안심하고 있을지라도 다윗은 분명히 알고
사울에 대해서 어느때보다 더욱 염려가 되었을 것이다.
하나님이 침묵하며 지켜보신다. 사무엘 저자가 다윗이 아말렉을 치는 사건을
왜 선택했는지를 보다 중요하게 다루어 보아야 한다. 사울이 15장에서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게 된 동기는 바로 아말렉을 진멸치 않았기
때문이다. 사무엘이 사울에게 아말렉을 완전히 진멸하라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부탁했는데 사울은 아말렉의 남녀는 모두 진멸했으나 아각 왕은
불쌍히 여겨 살려주었다. 연약한 이스라엘 백성 중 지쳐서 뒤에 처진
노약자를 살해한 죄로 하나님은 아말렉을 땅에서 진멸하라고 명령하신 것을
사무엘이 사울에게 명령했다. 그런데 사울이 정에 사로잡혀 제일 먼저
처단해야 할 아각 왕을 살려줘서 불순종의 대명사로 찍히게 된 것이다.
그러나 다윗은 아말렉을 치면서 남녀를 모조리 진멸했다. 사무엘 같은
선지자의 부탁이나 명령도 없이 스스로 그렇게 했다는 점에서 그가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바로 이해하고 있었다고 볼수 있다. 이러한 역사관 속에서 두
사람을 비교하는 것이 그들의 마지막 관계를 바로 정립하는 기회가 될
것이다.
첫째, 사울은 아말렉의 씨를 완전히 진멸하고 가축까지도 모조리
살상하라고 사무엘에게 명령받았으나 다윗은 어느 누구에게도 아말렉을
진멸하라고 명령받지 않았고 또한 가축을 살상하는 것은 그의 마음에 달려
있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않은 것이 동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둘째, 다윗은 단지 아말렉만 진멸하려고 하지 않았다. 다른 사막 족속들도
쳐부수었다고 저자는 강조하고 있다.
또한 다윗이 빼앗은 전리품은 사울같이 눈에 좋은 것만 골라서 자기의 배를
채우려는 심보로 하지 않고 오직 아기스 왕에게 보이기 위한 증거물로 쓰기
위함이었다.
30장에서 아말렉이 다윗의 가족과 사람들을 모조리 잡아간 사건은 결코
다윗의 불신앙의 결과가 아님을 이러한 비교를 통해 분명히 알수 있게 된다.
이러한 일로 아기스는 다윗을 믿게 되었다. 다윗이 유다 남방을 친 연고로
이스라엘은 다윗을 배반자로 여길 것이라고 생각한 나머지 아기스는 다윗의
약점을 이용해 자기 수중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하였다.
삼상27:12 아기스가 다윗을 믿고 말하기를 다윗이 자기 백성 이스라엘에게
심히 미움을 받게 하였으니 그는 영영히 내 사역자가 되리라 하니라
다윗이 블레셋 땅에 오랫동안 머물러 사는 것이 사울과의 긴장상태보다는
훨씬 나은 생활임을 알게 되었지만 그곳도 그렇게 마음은 편치 못했다.
사울에게 당하는 어려움보다 아는 적이 났다고 생각했기에 참고 지낼
뿐이다. 사울에게는 블레셋이 가장 무서운 적수이지만 다윗에게는 만만한
상대였다. 블레셋과 백전백승할 수 있는 지략과 능력을 소유하고 있었다.
언제 어떻게 해서라도 이들을 쳐부술 수 있다고 다윗은 믿고 있었을 것이다.
이전에 갓 선지자가 다윗보고 유다 땅으롱 들어가라고 명령한 적이
있었다(22:5). 그러나 그때는 현재 다윗의 상황과 전혀 다르다. 그 당시는
다윗이 블레셋에 있을 때가 아니라 모압지방에 있을 때였다. 그가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고 방황하고 있을 때 이같은 지시를 받았던 것이다. 현재
분명한 목적이 있고 배후에서 중대한 하나님의 섭리가 작용하고 있는
다윗에게는 유다 땅에만 머물러야 할 어떠한 이유도 없다. 이는 다윗 자신이
기름부음을 받은 자로서 이세의 뿌리를 통해 반드시 새로운 통치자가 될
것을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27장에서 하나님이라는 말이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고 해서 다윗의 결단이 잘못된 것으로 보아서는 안된다. 비록
하나님이라는 말이 없다고 해서 하나님이 전혀 역사하고 계시지 않는 것은
아니다. 배후에서 뭔가 침묵하시며 지켜보고 계신다. 이런 점에서 보다
중요한 뜻이 내포된 장면으로 이해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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