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의 두 번째의 자기 변명(1)(사도행전 23:1-5)
바울이 그가 종종 경험하였듯이 이방인 재판관과 재판정 앞에 섰을 때 그의 문제는 기각되어질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그 사건에 관하여 그들은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천부장이 만약 바울을 예루살렘의 산헤드린 회의 앞에 데려 가면 그들이 그 일을 정당하고 바르게 처리하리라고 생각하였던 것 같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은 것을 우리는 발견하게 된다. 여기서 우리는 다음의 것을 볼 수 있다.
Ⅰ. 바울의 자기 결백에 대한 주장. 대제사장이 그에게 무슨 질문을 했는지 또 천부장이 법정에서 그 사건에 관하여 어떤 설명을 했는지는 본문이 전해 주고 있지 않지만 다음과 같은 바울의 모습을 우리에게 전해 주고 있다.
1. 그는 담대하였다. 바울을 이 위험이 풍기는 공회에 데려와서 그 앞에 섰을 때도 그는 침착성을 잃지 아니하였다. 바울은 젊은 날 자기가 이 명예로운 직책을 덜어야겠다는 꿈을 꾸었었다. 그들은 다메섹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기 위해 그에게 공문을 주어 보낸 이후 그는 이번에 처음으로 그들과 상면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는 만약 있을지도 모르는 그들의 그의 임무를 태만히 한 것에 대한 추궁도 그는 두려워하지 않았다. "바울은 공회를 주목하였다." 스데반이 그들에게 끌려 왔을 때 그들은 스데반을 위압해 버리고저 했었다. 그러나 스데반의 거룩한 믿음은 그를 당당히 설 수 있게 했었다. 스데반의 시선을 압도하고자 "공회 중에 앉은 사람들이 다 스데반을 주목하여 보았으나 스데반의 얼굴은 천사의 얼굴과 같이 동요가 없었다"(6:15). 이제 바울이 그들 앞에 섰을 때 바울은 그들을 위압해 버리고자 마음 먹었다. 그러나 바울의 사도는 실패하였다. 그러기에는 그들이 너무나도 완악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약속하신 바가 바울에게서 성취되었다(에 3:8, 9). 즉 "그들의 얼굴을 대하도록 네 얼굴을 굳게 하였으니 그들을 두려워 말며 그 얼굴을 무서워 말라"고 하신 약속이 성취된 것이다.2. 바울은 떳떳하였다. 그러기에 그는 담대히 설 수 있었다. 그러므로 Hic murus aheneus esto Nil conscire sibi - 즉 결백한 양심은 최대의 철방패이다. 그러니 결백한 양심을 지니도록 하라는 격언이 있는 것이다.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여러분 형제들아 오늘날까지 내가 범사에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노라. 비록 내가 치욕을 당하더라도 나는 나의 양심에 부끄러움이 없으며 나는 이 사실을 떳떳이 말할 수 있노라"고 하였다.
(1) 그는 항상 신앙대로 살고자 하는 인물이었다. 그는 결코 멋대로 살아 온 적이 없으며 선과 악을 분별하여 선을 택하여 사는 사람이었다. 비록 회심하기 전에도 바울은 율법의 의(義)에 비추어 볼 때 흠잡을 점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는 생각없는 사람이 아니었다. 또한 자기가 한 일에 대하여 심사숙고할 줄 아는 사람이었고 자기가 한 일에 대하여 책임질 줄 모르는 인간은 결코 아니었다. 바울은 다만 자기의 생의 목적에 입각하여 생활하였고 그 한계를 벗어나지 아니하였다.
(2) 바울이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했을 때도 그는 그것이 꼭 필요한 일이며 그 일이 하나님께 대한 봉사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비록 그의 양심이 잘못 깨닫기는 하였지만 그는 자기 양심의 명령에 따라 행동하였던 것이다. 26장 9절을 참조하라.
(3) 바울은 자기의 회심 이후부터 즉 그가 대제사장을 섬기던 일을 버림으로 그들의 미움을 사게 된 이후부터 본문에서 이야기 하려고 한 것으로 보여진다. 그는 나의 처음 사회에 발을 들여 놓았을 때부터 지금까지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다만 "너희들이 나를 변절자로 여기고 너희가 섬기는 교회의 적이며 배신자로 여기던 때부터 내내 오늘까지도 나는 하나님 앞에서 양심에 거리낌 없이 살아왔노라. 너희들이 나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든지 나는 하나님께 무슨 일에도 부끄러움이 없이 떳떳이 설 수 있으며 또 정직하게 살아 왔노라"(히 3:18)고 하였다. 바울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여 그의 의무를 다하는 것 이외에는 아무 것에도 목적을 두지 않았다. 그런데 그것이 그들로 하여금 바울에 대해 그렇게 화나게 한 이유가 되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나라를 건설하기 위한 그의 모든 수고를 함에 있어서 특히 그 나라를 이방인 가운데 세우기 위하여 행한 모든 수고를 함에 있어서 양심에 따라 행동하였다. 정직한 사람의 특징을 다음에서 살펴 보자.
[1] 그는 자기 앞에 하나님을 앞세우는 사람이어야 한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살며 그의 감찰 아래서 산다. 그리고 하나님을 바라보며 산다. 그러므로 이르기를 "나의 앞에서 행하라. 그러면 너희가 의로우리라"고 한다.
[2] 그는 자기가 말하고 행한 것에 대해 양심에 거리낌이 없는 사람이어야 한다. 때로 그가 어떤 실수를 저질렀을 때도 있다. 그럼에도 그는 자기의 지식을 총동원하여 악한 것을 삼가고 선한 것을 굳게 지키는 것이다.
[3] 그는 누가 볼 때도 양심적인 사람이어야 한다. 그렇지 못한 사람은 전혀 진짜 양심적인 사람이라 할 수 없다. 또한 그는 "모든 생활을 영위함에 있어서도" 양심적이어야 한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즉 "나는 나의 선한 양심에 따라 살아왔다. 나는 내 모든 생활을 양심의 지시와 지배에 따라 영위해 왔다"고 할 수 있어야 한다.
[4] 그는 위와 같은 생활을 계속해야 하며 그럴 양심을 보존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그는 "내가 오늘날까지 그렇게 살아 왔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어떤 변화가 그에게 닥치든지 그는 한결같아야 하고 엄격히 양심을 지켜야 한다. 이와 같이 하나님 앞에서 좋은 양심을 지니고 살아 온 사람은 본문의 바울처럼 "주저없이 얼굴을 둘 수 있는 것이다." 만약 그들의 양심이 그들을 비난하지 않는다면 욥이 자신의 흠없음을 지켰을 때 취하였던 태도처럼 바울 자신이 자기 양심에 대하여 증언할 수가 있었던 것처럼(그는 이 사실을 그의 기쁨으로 삼았다) 하나님과 사람 앞에 담대히 설 수 있는 것이다.
Ⅱ. 대제사장 아나니아의 난폭한 행위. 아나니아는 바울 곁에 서 있는 사람에게 즉 법정을 관리하는 하속에게 "그의 입을 치라"고 명령하였다(2절). 즉 손이나 또는 막대기를 가지고 그의 입을 치라고 하였다. 우리 주 예수께서도 예언된 것과 같이(막 5:1) 이와 같이 이 법정에서 대제사장의 종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욕을 당하셨다. 미가서에서 "그들이 이스라엘 재판자의 뺨을 치리로다"고 예언되었던 것이다. 본문에 보면 법정에서 그러한 명을 내렸던 것이고 또 그것은 명령대로 시행된 것으로 보여진다.
1. 대제사장은 바울에게 매우 분개하였다. 어떤 사람은 바울이 법정에서 그렇게 대담하고 진실했기 때문에 즉 그가 그들을 무시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가 분개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또 다른 사람들은 바울이 대제사장에게 특별한 존칭이나 경어를 붙여 그를 높이지 않고 그들 모두를 일괄적으로 형제들이라고 친근한 어투로 자유로이 말하였기 때문에 그가 격분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바울의 자기의 결백에 대한 주장은 그를 파멸시키고 또 가증한 인물로 취급하려는 자들을 자극하고도 남을 만한 것이었다. 바울이 자기의 무죄를 주장하자 대제사장은 바울이 자신의 무죄를 주장한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죄가 된다고 생각하였다.2. 대제사장은 화가 나서 바울을 모욕하기 위해 그를 치라고 명령하였다. 또한 그가 그의 입술로 범죄하였다는 듯이 또는 입을 닥치라는 뜻으로 입을 치라고 명령하였다. 대제사장은 "바울이 지혜롭게 말하는 것을 답변할 수 없게 되자" 이 야만적이고 짐승적인 방법을 취하였던 것이다. 이같이 시드기야는 미가를 때렸고(왕상 22:24), 바수훌은 예레미야를 때렸다(렘 20:2). 즉 그들은 선지자들이 여호와의 이름으로 말할 때 그렇게 하였다. 그러므로 만약 우리가 선한 사람에게 이러한 모욕이 주어지는 것을 보았을 때 또한 우리가 선을 행하고 선한 말을 하였다고 해서 이러한 모욕이 우리에게 주어지거든 그것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그리스도는 당신을 입을 구타당하는 사람들에게 "입맞춤"으로 보답하실 것이다(아 1:2). 솔로몬은 말하였듯이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바른 답변을 하는 사람들의 편을 더욱 지지해 주리라고 여길 수 있다(전 24:26). 그러나 그 반대의 경우도 흔히 있을 수 있는 것을 알아야 한다.
Ⅲ. 대제사장에게 있을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바울의 경고. 그것은 그가 "재판석에서 악을 행하였기 때문이다"(전 3:16). 위의 인용문은 뒤이어 나오는 17절의 말씀과 조화를 이룬다. 즉 17절은 내가 심중에 이르기를 의인과 악인을 하나님이 심판하시리라고 되어 있다. 즉 솔로몬은 비록 재판석에서 악이 행해진다고 해도 이들이 결국 공의의 하나님에 의해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스스로 위로를 삼는다. 바울도 그러한 심정으로 본문에서 "회칠한 담이여, 하나님이 너를 치시리로다"(3절)고 말하였다. 바울은 죄된 분을 발하여 이 말을 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대제사장인 자기의 권리를 남용한 것을 경고하고자 하는 거룩한 열심에서 그렇게 하였던 것이다. 또한 보복 정신으로가 아니라 선지자적 정신으로 그렇게 말하였다.
1. 바울은 대제사장의 본성을 바르게 지적한다. 그는 대제사장을 "회칠한 담"이라고 하였다. 즉 "너는 위선자다. 너의 속에는 쓰레기와 온갖 더러운 것이 들어 있으나 겉으로는 석회를 칠하거나 또는 희게 단장하여 좋게 보이는 흙담이다"라고 한다. 이 비유는 그리스도께서 회칠한 무덤과 바리새인을 비교하셔서 말씀하신 것과 같은 성격의 비유이다(마 23:27). 잘 반죽되지 않은 회를 칠하고 다니는 자들은 칠을 잘하여 자신을 깨끗하고 산뜻하게 보이게 하는 일에 결코 실패하지 않는다.2. 바울은 그의 파멸을 예고한다. 곧 "하나님께서 너를 치시리라. 하나님께서 너에게 쓰라린 심판을 내리실 것이다. 특별히 영적인 심판을 내리실 것이다"라고 예고한다. 그로티우스는 대제사장이 그의 집무실을 떠난 후 곧 이 저주가 이루어졌다고 생각한다. 그는 그후 곧 죽었거나 관직을 박탈당했으리라고 간주한다. 이 사건이 있은 후 얼마 안 있어 다른 사람이 그의 자리에 대신 앉은 것을 볼 때 그에게 무슨 일이 있은 것이라고 그로티우스는 생각한다. 아마도 그는 신의 진노를 입어 삽시간에 생명이 떠났으리라고 여겨진다. 여로보암도 선지자를 대하여 손을 뻗었을 때 그의 손이 말라 비틀어졌었다.
3. 바울은 그의 파멸의 이유를 제시한다. "네가 교회의 최고법정의 우두머리로서 앉아서 네가 율법에 따라 나를 재판하고 또 율법에 의해 나를 저주하며 유죄 판결을 내리는 것처럼 하려느냐. 너는 내 죄도 밝혀지기도 전에 나를 치라고 명령하였다. 그것은 율법에 위배되는 짓이다"라고 그는 말하였다. "태형을 받을 만한" 잘못이 없는 한 누구도 태형을 당할 수 없다(신 25:2)는 것을 율법은 규정하고 있다. 피고에게 자기를 방어할 기회를 주지 않거나 그의 말도 들어봄이 없이 피고를 정죄하는 것은 인간의 법이나 하나님의 법이나, 자연법이나, 실정법에나, 다 같이 위배된다. 바울이 폭도들에 의해 폭행를 당했다면 그는 "아버지여 저들을 용서하소서. 저들은 저가 하는 일을 알지 못하나이다"라고 말했을 것이다. 그러나 율법에 따라 재판하도록 임명된 대제사장이 그렇게 하였다는 것은 용서될 수 없는 일이었다.
Ⅳ. 바울의 담대한 말에 대한 저희의 정죄(4절). 바울의 말에 대하여 "곁에 선 사람들이 하나님의 대제사장을 네가 욕하느냐?"고 힐난하였다. 바울이 말한 것 때문에 그를 비난한 사람들은 믿는 유대인들이었으리라고 봄이 틀림 없겠다. 그들은 율법에 대하여 열심이었으며, 동시에 대제사장의 영예에 대해서도 열심이었다. 그러므로 바울이 대제사장을 그렇게 칭하는 것을 불쾌히 여겨 바울의 말을 저지하려 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다음과 같은 사실을 고찰하여 보자.
1. 위대한 정황에서 바울이 취한 대담한 행동. 그는 그의 적들이 그를 힐난하고, 그의 친구들은 그의 곁에 있으면서 그를 도와줄 수 없는 정황에 처해 있었다. 그리고 바울의 적들은 어떻게든지 바울의 행동에서 흠을 잡으려고 하고 있었다.2. 그리스도의 제자들이라고 할지라도 외면적인 화려함이나 권세를 지나치게 과대 평가하기 쉽다는 사실이다. 예루살렘전이 하나님의 성전이고 아름다운 구조로 지어졌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 중에도 성전이 파괴되리라는 경고를 결코 용납하지 않으려는 사람들이 있었다. 마찬가지로 본문의 믿는 유대인들도 대제사장이 하나님의 대제사장이며 유명한 인물이었기 때문에 비록 그가 기독교에 대한 가장 악독한 적수였지만 그가 마땅히 당할 것을 바울이 말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던 것이다.
Ⅴ. 바울의 자기가 말한 것에 대한 변명. 왜냐하면 그의 말이 믿음이 약한 형제들에게 걸림돌이 될 것을 염려하였기 때문이고 또한 믿음이 약한 자들이 다른 일에 대하여서도 자기에게 대적하여 편견을 가질 수 있겠기 때문이었다. 이들 유대적인 그리스도인들도 비록 약하기는 하였지만 그럼에도 그의 형제였다. 그래서 바울은 그들을 형제라고 불렀다. 우리는 이 사실에서 "누가 실족하게 되면 내가 애타지 아니하더냐"라는 바울의 말을 상기하게 된다(고후 11:29). 그의 확고한 결심은 약한 형제에게 상처를 주기보다 자기가 그리스도인으로서 갖는 자유를 사용하는데 있어서 자신이 절제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는 "만일 식물이 내 형제를 실족케 하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리라"고 한 것이다(고전 8:13). 그래서 바울은 자유로이 대제사장에게 자기의 견해를 피력하였지만 그의 말이 형제를 실족케 한 것을 알았을 때 그는 Peccavi - 즉 내가 실수하였더라고 말하였다. 바울은 그의 말이 믿음이 약한 형제를 실족케 하지 않기를 원했다. 그는 대제사장에게 그의 말에 대해 용서를 구하거나 사과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는 그의 말에 실족한 사람들에게 용서를 구하였다. 왜냐하면 바울은 현재는 그들에게 더 좋은 말씀을 전하기에 적절한 시기가 아니고 자기의 정당성을 말할 때가 아니라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1. 바울은 다음과 같은 말로 그들에게 사과한다. 즉 그는 말하면서 자기가 누구에게 말하고 있는가를 전혀 생각지 못하였노라고 하였다(5절). 그러므로 본문에서 ouvk h'dein - 즉 형제들아 나는 그가 대제사장인 줄 알지 못하였노라고 하였다. 즉 다음과 같은 말이다. "당시 나는 그의 위치의 존엄성을 생각지 못하였다. 그렇지 않았으면 그에게 정중하게 말하였을 것이다." 나는 바울이 그가 대제사장인 줄 몰랐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절기에 성전에서 7일을 거하였고 그 동안 그가 대제사장을 못 보았을 리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바울이 대제사장에게 "네가 나를 율법대로 판단한다고 앉아 있으면서……"라고 말한 것을 보아도 이미 그가 누구인가를 알고 있음이 나타난다. 그러기에 바울은 "내가 그 사실을 미쳐 생각지 못하였다"고 만했다(역주:한글 개역과 다소 틀림). 휘트비(Whitby) 박사는 이 구절을 이렇게 해석한다. 선지자적 영감이 그에게 임하였으므로 그가 감동되어 그렇게 말하였고 또 성령께서 그가 율법이 두려워서 그러한 영감을 자제하지 못하도록 대제사장을 알아 보지 못하게 한 것이라고 본다. 유대인들도 선지자들은 이사야 1장 10절과 23절의 내용과 같이 다른 사람들은 할 수 없는 말을 그들의 통치자에게 말할 수 있는 특권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었다. 또는(휘트비 박사가 그로티우스나 랑트푸트의 말을 인용한 내용처럼) 바울이 자기가 한 말을 한 마디라도 취소하려 한 것이 아니라 자기의 말을 정당화하려 했다고도 볼 수 있다. 즉 바울의 말을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즉 "나도 하나님의 대제사장을 비난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나는 아나니아를 대제사장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그는 찬탈자이다. 그는 뇌물을 주고 불법으로 대제사장이 되었다. 한 랍비가 이르기를 그와 같은 방법으로 대제사장이 된 사람은 심판관이 될 수도 없고 존경받을 자격도 없다고 하지 않았느냐"라고 바울이 말한 것으로 본다.2.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자기가 말한 것이 율법의 의무를 조금치라도 약화시키는 것으로 사람들이 생각하지 않도록 유의한다. 그러므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율법에 씌여 있기를 즉 최대의 권위가 있는 율법에 씌여 있기를 너의 백성의 관원을 비방치 말라 하였느니라"고 한다. 통치자의 영예를 존중해 주며 또한 권력을 위임받은 사람들의 잘못된 통치를 묵과하지 않는 것이 공익을 위하는 길이다. 그러므로 통치자나 재판관에게 말할 때는 반드시 예의를 지켜야 하는 것이다. 욥의 시대에도 "왕에게 당신은 비루하다고 하거나 귀인들에게 당신은 악하다"라고 말하는 것은 합당한 일이 아니라고 여겨졌던 것이다(욥 34:18) (역주:한글 개역과 다소 틀림). 설사 우리가 선을 행하고도 그것으로 인하여 고통당할지라도 우리는 인내로 견뎌야만 한다(벧전 2:20). 고관들은 자기의 잘못에 대한 충고를 듣지 않으려고 해서도 안 되며 또 양심있는 사람들에 의해 세상 물정을 개탄하는 소리가 나오도록 되어서도 안 된다. 여하간 권력을 집행하는 자들에게는 다른 사람들보다는 세심한 배려에 의해 영예나 존경을 보내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율법은 우리들에게 통치자들을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특별히 존경할 것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어떤 식으로든지 "권세를 업신여기고 영광을 훼방하는 자"들은 위험스러운 결과를 면치 못할 것이다(유 1:8). 그러므로 "심중에라도 왕을 저주하지 말라"(전 10:20)고 한 것이다.
바울의 두 번째의 자기 변명(2)(사도행전 23:6-11)
"의롭게 사는 데는 많은 고통이 따른다." 그러나 "주께서는" 이런 저런 방법을 통하여 "의인들을 모든 고통에서 건져 주신다." 바울은 이방인들 가운데서 그가 겪었던 박해 가운데서 이 진리를 경험하였다. "주께서 이 모든 것 가운데서 나를 건지셨느니라"(딤후 3:1)고 고백하였다. 이제 바울은 자기를 구해 주신 주께서 지금도 그를 구해 주시고 앞으로도 구해 주실 것을 확신한다. 본문에서는 군중들의 소란 가운데서 바울을 건져내셨던 그 분이 이제 바울을 장로들 가운데서 구하여 주신다.
Ⅰ. 바울의 사려 기고 현명한 처사가 그를 유리한 입장에 설 수 있게 하였고 또 그의 피신에 큰 기여를 하게 되었다. 바울이 가장 명예롭게 생각하고 또 가장 가치를 둔 것은 바로 그가 그리스도인이며 그리스도의 사도라는 점이었다. 다른 세상의 모든 영예를 그는 멸시하였고 그리스도인으로서 그가 누리는 영예에 비교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는 것으로 여겼다. 그는 "그리스도를 얻는 것 이외에는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필요할 때는 때때로 자기가 소유한 다른 영예들을 활용하였고 그것으로 도움을 받기도 했다. 전 장에서는 그의 로마 시민이라는 사실이 천부장에게 난동자로 간주되어 채찍을 맞게 된 지경에서 그를 구해냈다. 그리고 본문에서는 그가 바리새인이라는 사실이 산헤드린에 의하여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예배에 대한 배반자라고 정죄당할 지경에서 그를 구해 주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기꺼이 고난을 당하는 것이 옳은 일이나 또한 모든 합법적인 방법과 수단을 동원하여 그 고난을 제거하고 거기서 빠져나오는 것도 또한 잘못된 일은 아니다. 바울이 본문에서 자신의 안전을 위하여 취한 훌륭한 계책은 그의 재판자들의 분열을 조장하여 자신에 대하여 저희 사이에 의견 대립이 있게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어느 한편의 부류의 무리들로 그를 더욱 증오하게 하므로 그 반대 부류는 오히려 그를 위하도록 그는 분위기를 조성하였다.
1. 대법정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바울은 이 사실을 인지하였다. 바울은 오랜 동안 그들 가운데서 살았던 관계로 그들 대부분의 특징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그들 가운데서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섞여 있음을 알았다(6절). 그러므로 본문에 그가 "한 부분은 사두개인들이고, 다른 한 부분은 바리새인인 줄 알았다"고 되어 있다. 그리고 이 두 파는 서로 대등한 숫자였던 것으로 보여진다. 평소에 그들은 서로 많은 차이가 있었다. 그럼에도 그들은 재판 문제를 다루는 데 있어서는 비교적 조화를 이루어 업무를 처리했었다.(1) 바리새인들은 고집쟁이였으며 의식을 지키는데 매우 열심이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정해 주신 율법 뿐 아니라 장로들의 유전을 지키는 데도 열심이었다. 또한 그들은 교회의 권위를 지키는데 대단히 열심이었고 교회의 명령에 복종하는 것을 대단히 강조하였다. 이것 때문에 그들과 주 예수 그리스도 사이에 때때로 많은 논쟁이 있었다. 그러나 동시에 그들은 영계(靈界)와 죽은 자의 부활과 내세의 생에 대한 유대 교회의 신앙을 고수하는 정통파였었다.
(2) 사두개인은 자연신론자들이었다. 그들은 성경과 신의 계시를 무시하였다. 그들은 모세의 율법은 훌륭한 역사서나 율법서 정도로 인정하였으나 다른 구약의 책들은 거의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다. 마태복음 22장 23절을 참조하라. 이들 사두개인들에 대해서 본문에 다음과 같은 설명이 주어지고 있다.
[1] 그들은 "부활을 부정하였다." 그들은 몸이 다시 사는 것 뿐 아니라 미래의 보상과 심판도 부정하였다. 영원한 행복에 대한 희망도, 영원한 형벌에 대한 공포도 그리고 죽음 저편에서의 어떤 것도 기대하지 않았다. 그들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헛되며" 교만한 자를 행복한 자로 여기는 것을 그들의 신조로 삼았다(말 3:4, 15).
[2] 그들은 천사나 영혼의 존재를 부정하였고 물질 이외의 어떤 존재도 인정하지 않았다. 그들은 하나님 자신도 육체를 지니셨고 우리가 가지고 있는 신체의 각 기관을 지니셨다고 생각했다. 그들이 구약의 천사에 관한 구절에 대하여 읽으면서 그들은 천사들을 하나님이 필요하실 때마다 만들어 보내시는 심부름꾼으로 생각하였고 그렇지 않으면 천사들이란 환상 속에서만 존재하고 실재로 존재하지는 않는다고 생각했다. 즉 그들은 천사들을 전통적으로 생각해 오던 것과는 다른 그 어떤 것이라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사두개인들은 인간의 영혼에 대해서 그것은 단지 육체의 기질이거나 생기 정도에 불과한 것이라고 여겼다. 그리고 그들은 육체에서 분리된 상태에서 영혼이 존재하는 것을 부정하고 인간의 영혼과 짐승의 영혼과 차이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들은 자유 사상가들로 자처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생각은 야비하고 불합리하고 비굴한 정도에 불과하였다. 이처럼 부패하고 사악한 이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공직을 가지고 또 산헤드린 회원이 될 수 있었느냐는 것은 이상스러운 일이었다. 그러나 사두개인들 중 많은 사람들이 재능과 부를 지니고 있었고 당국에 야합하여 공직을 얻고 또 그것을 유지하였다. 그렇지만 사두개인들은 이단자로서 낙인이 찍혀 있었다. 그들은 에피큐리안들과 동질에 속하는 무리들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영생에서 제외된 무리들이었고 사람들은 그들에 대하여 영벌을 받으라는 저주의 기도를 하였다. 윗시우스(Witsius)는 그리스도인에 대해 현대 유태인들이 하는 저주의 기도를 가말리엘에 의해 유래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이 가말리엘이 사두개인들에 대하여 그럴 주주의 기도문을 작성했었기 때문이었다. 유대인들은 평소에 사두개인들에게 "악한 자들이여 저주를 받을지어다"라고 저주하였다. 여하간에 사두개인들과 같이 신성모독적인 사람들이 유대 교회의 지도자들로 있었으니 당시 유대 교회가 얼마나 타락하고 비참한 상태에 있었는가를 알 수 있게 된다.
2.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사이의 의견 차이에 대하여 바울은 자신은 사두개인들의 편을 거부하고 바리새인 편에 서겠다고 공개적으로 선언했다(6절). 그는 모든 사람들이 들을 수 있도록 "나는 바리새인이요 또 바리새인으로 양육을 받았노라. 나는 날 때부터 바리새인이다. 즉 나는 바리새인의 아들이요 또 나의 아버지도 바리새인이기에 태어났노라. 이같이 나는 바리새인이기에 죽은 자의 부활을 소망하며 또 솔직히 말하건데 문제가 발단된 전후 사정을 살펴 보면 내가 부활을 믿는 것 때문에 심문을 받는다는 거이 발견될 것이다"라고 외쳤다. 그리스도께서 지상에 계실 때 바리새인들은 그리스도를 가장 적대하였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바리새인들의 전통과 그들의 율법을 실제로는 지키지 않으며 겉치레만 하는 타락한 태도를 공격하셨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신 후에는 사두개인들이 그리스도의 사도들을 가장 적대하였다. 왜냐하면 사도들이 "예수로 말미암은 죽은 자의 부활을 설교했기 때문이었다"(4:1, 2). 그러므로 "사두개인들이 사도들을 향하여 분이 가득하였다"고 말씀된 것이다(5:17). 그때도 사도들이 복음에 의해 주어지는 영생 불사를 설교했기 때문에 사두개인들이 분을 냈던 것이었다.
(1) 바울은 자신이 바리새인임을 자처하였다. 그러나 그 말은 그가 바리새인들의 모든 행위를 인정한다는 말이 아니라 사두개인들 보다는 그들이 낫다는 뜻에서였다. 바리새주의가 기독교와는 대치되므로 바울은 바리새주의의 반대편에 섰고 또 하나님의 율법을 대신하여 세워진 그들의 전승(이 전승은 또한 그리스도의 복음과 상충되는 것이었다)을 배격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 바리새주의와 사두개주의가 대립하게 되자 그는 바리새파를 택하였다. 우리는 하나님의 진리 속에 나쁜 것도 있다고 여겨서는 안 된다. 그리고 하나님의 진리를 인정하는 것을 부끄러워해서도 안 된다. 바울은 바리새인들이 죽은 자의 부활을 소망한 사실에 대해 그들과 보조를 같이 했고 또 그들 중의 한 사람으로 자처하였다.
(2) 바울은 자기가 그리스도인으로서 박해받는 진정한 이유는 그가 부활에 대한 소망을 전하기 때문이라고 말하였다. 바울은 사두개인들이 대중들에 대해 바리새인들과 같이 관심을 갖지는 않았지만 그들이 그를 대적하도록 폭도들을 은밀히 선동하였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들이 군중을 선동한 구실은 바울이 이 안에 대해서 설교한다는 것이었으나 사실은 그가 부활의 소망에 대해 설교했기 때문이었다. 사실 그리스도인이라는 이유로 소환을 받아 심문을 받게 되었기 때문에 후에 그가 주장하였던 대로(24:15; 26:6, 7) 죽은 자의 부활이 그들에게 문제가 되었다고 그가 말한 것은 정당한 것이었다. 바울은 장로들의 전승을 공격하였고(그의 주님 또한 그러셨었다) 또 그것을 지키는 바리새인들을 반박하였지만 그럼에도 그는 죽은 자의 부활과 내세에 대하여 복음을 전하는데 더 중점을 두었고 바로 이점에서 바울은 바리새인들과 일치하고 있었다.
3. 죽는 자의 부활에 대한 바울의 말은 법정 안에서 분쟁을 일으켰다. 아마도 대제사장은(그가 5장 17절에서 취하였던 것처럼) 사두개인 편에 섰던 것 같다(이 사실은 2절에서 그가 바울에게 노여워한 사실을 통해서도 나타난다). 이러한 대제사장의 태도는 바리새인들로 더욱 경계하게 하였다. 그 결과(7절)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사이에 다툼이 생겼다." 왜냐하면 바울의 말은 사두개인들로 더욱 격렬히 그를 기소하게 하였고 한편 바리새인들은 그를 기소히려는 태도가 더욱 누그러졌기 때문이다. 이를 계기로 "군중들 또한 두 파로 갈라져 버렸다." 그들 사이에는 다툼과 분쟁이 일어났다. 그들의 자파(自派)에 대한 열심히 바울은 제쳐 놓고 서로 상대방을 공격하게 하였다. 그들끼리 의견이 일치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은 계속 바울을 적대하는 행위를 할 수 없었다. 또한 그들의 정신적인 불일치는 그들로 일치한 행동을 취할 수 없게 하였다. 조금 전까지 그들은 바울을 향하여 외쳤었지만 이제는 서로를 대적하여 큰 소리를 지르게 되었다(9절). 그곳에 참석한 여러 계층의 유대인들 모두 무섭게 흥분하였기 때문에 장내는 삽시간에 수라장이 되고 말았다. 그들은 이같이 소란스러운 방법에 의하여 그들이 믿는 원칙을 고수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그들에게 조그마한 유익도 되지 않는 것이었고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진노를 자초하기 위한 것이었다." 정연한 의론에 의해 논적을 설득시킬 수는 있으나 감정이 격한 말로는 상대를 설득시킬 수는 없는 것이다.
4. 바리새인은 이 때문에 바울의 편을 들었다(누가 이렇게 되리라고 생각이나 했겠는가? 9절). 그들은 "다투어 - diema,conto - 말하기를 우리가 이 사람을 보매 악한 것이 없다"고 하였다. 바울은 성전에서 정중하고 경건한 태도로 행동했었고 성전 예배에도 참석하였다. 물론 그가 성전에 참석하는 경우는 드물었지만 그의 그러한 태도는 그가 항간에서 얘기되는 것처럼 성전에 대한 적대자는 아니라는 인상을 그들에게 주었다. 바울은 자신에 대하여 훌륭한 변명을 했고 또 자신이 규모있게 양심적으로 생활할 뿐 아니라 신앙의 주된 원리에 있어서도 정통적임을 선언하였다. 따라서 그들은 바울에게서 "그를 죽이거나 구속할 이유를"발견치 못하였다. 오히려 그들은 바울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혹 영이나 천사가 저더러 예수에 관하여 말하라고 하였고 또 그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한 것이면 우리가 그를 완전 신임할 수 있으리 만큼 만족한 증거는 그에 대하여 얻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그를 놓아야 할 것이 아닌가? 이러다가 공연히 우리가 하나님과 대적하는 우를 범하는 것이 아닌가"라고 하였다. 전에 그 자신이 바리새인이었던 가말리엘도 이와 같이 주장하였었다(5:39).
(1) 이제 여기서 복음의 영광이 적대자들에게도 밝히 들어나게 된 것을 알 수가 있다. 복음의 순수함과 뛰어난 점을 고백하도록 진리의 전능은 복음을 박해하는 자에게도 강하게 미치는 것을 알 수가 있다. 빌라도는 그리스도를 죽게 내 주어 버렸지만 그리스도에게서 아무 잘못도 찾아 내지 못했고 베스도는 바울을 감옥에 잡아 두었지만 바울에게서 어떠한 죄도 찾아내지 못하였다. 본문의 바리새인들은 바울이 지금 그가 하는 일을 하도록 천사로부터 하늘의 위임을 받을 수도 있다고 가정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에 그들은 장로의 입장에서 대제사장과 합세하여 바울을 기소하였다(24:1). 그들은 자기들도 가지고 있고 또 때로는 인정하기도 하는 진실에 대하여 범죄하였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그들에 대하여 "저희가 나와 및 내 아버지를 보았고 또 미워하였도다"라고 말하신 것이다(요 15:24).
(2) 그럼에도 불구하여 우리는 바리새인 중에 몇몇은 바울이 자신의 양심적인 생활을 영위하는 것과 그도 저 세상에 대하여 믿음을 가지고 있다는 만족할 만한 설명을 하였으므로 적어도 전보다는 바울에 대하여 보다 나은 견해를 갖게 되었으리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장로들의 전승에 대한 그들의 열심(바울은 이것과는 결별하였다)이 바울로 인하여 보다 크고 본질적인 신앙의 문제에 대한 열심히 비약하게 되었다는 것(바리새인들의 이 근본 신앙 원리는 바울도 아직 지키고 있었다)은 그들에게는 더없이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그들은 만약 바울이 진심으로 사두개인들을 적대하는 자기들의 입장에 동조하고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한 소망을 지닌다면 설사 바울이 제의법을 버렸다고 해도 그를 용서 못할 것까지는 없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다만 바울이 하나님께서 천사나 영을 통하여 그에게 주신 빛을 따라 생활하면 되는 것이라고 관대하게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바울을 박해하기는커녕 그를 변호하고 보호하려고 하였다. 하지만 로마 교회 내에 있는 박해에 혈안이 된 바리새인들은(로마 교회의 교황청을 말하는 것임) 유대교의 바리새인들 보다 한결 극악하다고 할 수 있겠다. 왜냐하면 그들은 어떤 사람이 다른 기독교 신앙의 모든 조항에 대해서는 신실하고 열심이라 하더라도 만일 그가 로마 교회의 권위 아래 복종하지 않는다면 그것만으로 그를 정죄하여 그가 죽기까지 박해를 하기 때문이다.
Ⅱ. 천부장의 염려와 조치는 바울을 좀더 유리한 입장에 서게 하였다. 왜냐하면 그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 사이에 불화의 불씨를 던지자(이 불씨는 그들로 싸우게 하는 계기가 되었고 이로써 천부장은 바리새인들로부터 바울에 대한 정당한 증언을 들을 수 있게 되었다) 이제 바울은 고래 싸움에 새우등 터지는 식의 위험에 처하고 말았다. 즉 바리새인들은 그를 자유롭게 하려 하고 한편 사두개인들은 다니엘을 사자울에 던져 넣었듯이 바울을 백성들의 손에 넘겨 죽이거나 자신들 손으로 죽이고자 하였다. 그것을 본 천부장은 그가 전에 하였듯이(21:32; 22:24) 자기 군사들에게 명령하여 바울을 구해 내었다.
1. 이제 본문에서 바울이 처한 위험을 살펴 보자. 바울은 자기의 적대자들과 옹호자들 사이에서 두 쪽이 나고 말듯한 형국에 처하게 되었다. 한 쪽은 그를 죽음에서 끌어내려 했고 다른 한 쪽은 그를 죽음에 몰아 넣으려 하였다. 이러한 격렬한 사태는 바울과 같이 뛰어나고 널리 알려진 사람들이 자칫하면 겪게 되기 쉬운 것이다. 뛰어나고 널리 알려진 사람들은 어떤 부류의 사람들에게는 지나친 사랑을 받는 동시 다른 부류에게는 무서울 정도로 증오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2. 바울의 구원. "천부장은 군사를 명하여 상층에서 내려가 무리 가운데서 빼앗아 가지고" 그가 회의를 소집한 장소인 성전 회의소를 벗어나 "영문" 또는 안토니아 탐으로 "데리고 가라"고 하였다. 왜냐하면 천부장 자신이 바울의 변명의 정당성을 그들에게 이해시킬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Ⅲ. 그러나 그를 구출하는데 무엇보다 크게 기여한 것은 신의 보호였다. 천부장은 바울을 악인들의 손에서 구해 내였다. 그러나 아직도 천부장은 그를 가두어 두고 있었고 아직 바울을 어떻게 처리할까 결단을 내리지 않고 있었다. 진실로 그 성은 바울을 위험으로부터 보호하여 주었으나 동시에 그를 가두는 장소이기도 하였던 것이다. 그 성은 바울을 죽음으로부터 보호하여 주었으나 동시에 바울로 하여금 더욱 더 큰 일을 하지 못하도록 막는 것이기도 했다. 우리는 사도들이나 선지자들 중 어느 누가 예루살렘으로부터 바울에게 왔다는 구절을 발견할 수 없다. 아마도 그들이 용기가 없었거나 또는 허가를 얻을 수 없기 때문이었거나 하는 이유 때문이었을 것이다. 아마도 그날 밤 바울은 자기가 어떻게 된 것인가 하는 문제와 또한 자신에게 처한 역경을 어떻게 변화시켜 보다 유익한 일에 쓸 수 있을까 하는 걱정과 근심으로 잠을 못이루었을 것이다. 바울이 염려하고 있는 때 주 예수께서 바울을 방문하셨다. 그 일은 한밤중에 일어났지만 그것은 매우 필요했던 방문이었던 것이다(11절). "주께서 바울 곁으로 오셨다." 주께서는 바울이 누운 침상이 초라한 침상이었지만 그의 침상 곁으로 오셔서 그가 지금 이 밤에 바울에게 나타나 보이셨던 것과 다름없이 낮 동안에도 종일 그와 함께 하셨음을 보여 주셨다. 우리에게 대적하는 자가 누구이던지 주께서 함께 하실 때 우리는 결코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기억하자. 주께서 우리를 보호하신다면 우리를 파멸시키려고 노리는 자들을 우리가 담대히 맞을 수 있는 것이다. "여호와께서 우리의 영혼을 지켜 주시면" 아무 것도 우리를 해칠 수 없는 것이다.
1. 그리스도께서는 바울에게 담대하라고 명령하신다. 그는 "바울아 담대하라. 낙심하지 말라. 어떤 일이 일어나도 슬퍼하지 말며 놀라지 말라"고 말씀하신다. 신실한 그의 종들이 언제나 용기백배하기를 바라시는 것이 그리스도의 뜻이라는 것을 기억하자. 아마도 바울은 전날 법정에서 자기가 말한 것을 돌이켜 보며 과연 자기가 말을 잘 한 것인지 근심하였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께서 바울의 행위를 인정하신다고 말씀하시는 것으로 바울을 안심시키신다. 또는 아마도 바울은 자기의 동료들이 찾아 오지 않아서 마음이 괴로웠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그의 동료들을 대신하여 바울에게 "바울아 담대하라"고 말씀해 주셨던 것이다.2. 그리스도는 특이한 말씀으로 바울을 격려하신다. 그는 바울에게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거한 것같이 로마에서도 증거하여야 하리라"고 격려의 말씀을 하셨다. 사람들은 누구나 이 말이 무슨 위로의 말이 될 수 있는가라고 생각할 것이다. 이 말씀은 "네가 나로 인하여 많은 고초를 겪었으나 이제 더욱 많은 고초를 겪어야 하리라"는 뜻의 말씀이 아니냐고 누구나 생각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말씀은 그를 격려하고자 하는 목적에서 하신 말씀인 것이다. 그 말씀이 격려가 되는 이유는,
(1) 그리스도께서는 이 말씀을 통하여 바울이 지금까지 행한 일이 그리스도를 위한 증인으로서 그리스도를 섬겼다는 사실을 바울에게 이해시키고자 하셨기 때문이다. 바울이 시련을 당한 것은 그의 잘못 때문은 아니었다. 또한 그가 전에 교회를 박해하였기 때문에(비록 지금까지 그가 그 잘못을 속죄하는 뜻에서 자기를 돌보지 않고 수고를 했다 할지라도) 그 잘못 때문에 그가 고난을 당하는 것도 아니었다. 다만 그는 주의 일을 계속 하고자 고난을 당해 온 것임을 그리스도께서는 그에게 알리셨다.
(2) 그리스도께서는 이 말씀을 통해 바울이 그의 증언을 다 마치지 못하였다는 것과 또 그가 갇히여 있다고 해도 아주 쓸모 없는 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의 일을 위한 준비 과정이라는 것을 이해시키고자 하셨기 때문이다. 바울에게 있어서는 그리스도를 섬기는 일과 사람의 영혼들에게 도움을 주는 일을 못하게 된다는 것이 가장 낙심되는 일이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아직 너의 일을 마치지 아니하였다"고 하신 것이다.
(3) 바울은 로마에 가서 거기서 복음을 전해야겠다는 특별한 꿈을 지녔던 것처럼 보인다. 로마에는 이미 복음이 전해져 있었고 교회가 세워져 있었지만 그럼에도 그는 로마 시민이었으므로 로마의 여행을 원하였으며 로마로 갈 것을 계획하였다. 그러므로 그는 "내가 예루살렘에 갔다가 후에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고 말했던 것이다(19:21). 그러기에 또한 바울은 얼마 전에 로마 사람들에게 "자기가 곧 그들을 만나러 갈 것이라"고 편지했던 것이다(롬 1:11). 그러나 이제 바울이 감독에 갇히게 됨으로써 자기 계획이 어긋나 버렸으며 그러므로 로마를 다시는 볼 수 없게 되었노라고 그는 체념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그가 로마로 가게 될 것을 말씀하시므로 그를 만족하게 하시었다. 그것은 바울이 로마에 가려한 것이 그리스도를 존귀롭게 하고 선을 행하기 위해서였기 때문이었다.
바울을 없이 하려는 음모(사도행전 23:12-35)
우리는 본문에서 바울의 생명을 해하려는 음모의 전말에 대한 내용을 대하게 된다. 즉 어떻게 그 음모가 이루어졌고, 그것이 발각되었고 또 어떻게 그들의 음모가 분쇄되었는가가 기록되고 있다.
Ⅰ. 이 음모의 동기. 유대인들은 소란을 일으키거나 법적 절차를 통해서는 아무 소득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암살이라는 야만적인 수단을 쓰기로 결정하였다. 유대인들은 기회만 허용되면 바울을 갑자기 덮쳐서 찔러 죽이려고 하였다. 이 선한 사람을 대적하려는 그들의 극악함은 상당하였으므로 하나의 시도가 실패하자 또 다른 수단을 동원하였다. 다음 사실을 고찰하여 보자.
1. 바울의 암살 음모를 꾸민 자들. 그들은 바울이 이방인의 사도라는 것 때문에 그에게 극심한 분노를 품고 있었던 "어떤 유대인들"이었다(12절). 이 음모에 참가한 자들은 "사십 명이 넘었다"(13절). 그러므로 시편 기자는 "주여 나를 해치려는 자들이 어찌도 이리 많은지요"라고 탄식했던 것이다.2. 그 암살 계획이 이루어진 시기. 그것은 "동이 트자마자" 곧 이루어졌다. "사탄이 그들의 마음에 가득 차" 그들은 밤중에 그럴 생각들을 하였고 날이 새자마자 그 일을 추진하고자 하였다. 저들의 행동은 선지가 미가가 "침상에서 악을 꾀하며 날이 밝으면 그것을 행하며" 함정을 판다고 예언한 것과 일치하는 행동이었다(미 2:11). 밤중에는 그리스도께서 바울에게 나타나사 그를 보호하여 주셨다. 그러나 날이 밝으니 바울을 죽이고자 맹세한 사십 명의 무리가 모여 들었다. 그러나 그들은 결코 그리스도를 앞설 수 없었다. 그러므로 이르기를 "새벽에 하나님이 도우시리로다(시 46:5)"고 하신 것이다.
3. 음모의 내용. 이 사람들은 "당을 지었다." 아마도 그들은 음모의 모임을 "거룩한" 동맹이라고 불렀을 것이다. 그들은 서로 힘을 규합해 바울을 죽이는 일을 실현시키려고 하였다. 인도적인 정신과 체면을 완전히 내동댕이치고 피의 음모에 참가하는 일에 쉽사리 그렇게 많은 사람이 동원되었다는 것과 더군다나 예루살렘에서 그 일이 이루어졌다는 것은 기이한 일이다. 그러므로 한 선지가가 예루살렘에 대하여 공평이 기거하더니 지금은 살인자들 뿐이도다"(사 1:21)라고 한탄한 말씀이 이 일로 이루어진 것이다. 그들이 바울을 해하려는 이러한 끔찍스러운 음모를 세우기까지 이르렀다면 그들이 얼마나 바울을 나쁘게 생각했는가 하는 것이 확실히 밝혀진다. 그들은 바울이 하나님과 자기들의 종교에 대해 가장 악한 사람이고 그 시대에 화를 불러오는 염병과 같은 자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바울의 성격은 그들이 생각하던 것과는 전혀 반대였던 것이다. 죄의 주장과 사악함이 아무리 세더라도 전리와 정의의 법도는 더욱 강하고 거룩하기 때문에 이 법은 결코 무너질 수 없는 것이다.
4. 그들의 결의의 확고부동함. 그들은 이번에야 말로 그 누구도 자기들의 손아귀를 빠져나갈 수는 없다고 생각하였다. 그들은 또한 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물도 안 마시고 먹지도 않겠다고 맹세하였다." 이러한 저희의 맹세는 사실 저희들 자신과 그들의 영혼, 또 가족에 대해 스스로 행한 가장 무서운 저주였다. 저희의 사악함이 어떠했는가를 능히 엿볼 수 있다. 그들이 자기들에게 아무런 일도 하지 않았고 가능한 한 그들에게 선을 베풀려고 했던 순수하고 유익한 훌륭한 인물을 죽이려고 시도했다는 것은 가인의 길을 따르는 행위요 자신들이 "태초부터 살인자였던 그들의 조상 악마의 자식들임"을 스스로 입증하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그들은 자기들이 행하려는 일이 사소한 일인 것처럼 과감히 다음과 같이 행동하였다.
(1) 그들은 이 일을 실행하고 말겠다고 맹세했다. 악한 일을 하려는 성향을 지니거나 또는 그것을 행하려는 마음을 먹는 것은 죄된 일이다. 그러나 악한 것을 실행할 것을 서원하는 것은 더욱 나쁘다. 이것은 악마와 계약을 하는 것이다. 또한 어둠의 왕자에게 충성할 것을 서원하는 것이다. 이러한 서원은 회개할 여지를 허용하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이러한 행위는 회개에 대한 하나의 도전의 행위인 것이다.
(2) 그들은 이 일을 위해 당을 지었다. 그리고 그들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행하고자 하였다. 그들은 자기들의 영혼에 대한 저주를 확보해 놓았을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까지 자기들의 일에 끌어들이므로 그들의 영혼까지 저주받게 하였다.
(3) 그 무리들은 하나님의 섭리를 모독하였다. 그리고 이 일을 단시간 내에 수행해 내기 위해 이 일이 이루어지기 전에는 음식을 안 먹기로 결심하였다. 이러한 행위는 하나님의 섭리를 무시하는 무례한 행위였다. 적어도 그들은 절대적인 하나님의 섭리의 손길이 역사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겨 놓아야 했던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하고자 하는 일이 아무리 합법적인 선한 일이라고 하더라도 우리가 그 일을 한다는 말을 할 때 "내일 무슨 일이 있을지 알 수 없으므로" 우리는 "주께서 허락하신다면"이라는 말을 반드시 붙여야만 한다.
(4) 그들은 스스로 자신들의 영혼과 육체를 멸시하였다. 그들은 이 필사적인 계획을 추진하지 못한다면 자신들에게 저주가 내려질 것이라고 말하므로 자기들의 영혼을 경멸하였다(이 얼마나 저주스러운 올무에 그들은 자신을 얽매이었는가! 만일 그들이 이 일을 자행했다면 틀림 없이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저주를 내리셨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들이 그 일을 행하지 않더라도 하나님이 자기들을 저주해 주실 것을 소망했다). 또한 그들은 결코 합법적인 것도 아니요 또 결국은 이루워지지도 못할 일을 계획하고서 그 일이 성취되기까지는 생명을 지속하는데 필요한 음식을 먹지 않겠다고 스스로 얽어매므로 자신의 몸까지 경멸하였다(간악한 죄인들은 자기의 영과 육을 동시에 파멸시킨다.). 그들이 만일 이러이러하게 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이 자기들을 저주하시고 악마가 자기를 잡아갈 것이라고 한 말은 악마들의 언어인 것이다. "그들이 저주를 좋아하였으므로 그 저주가 그들에게 임할 것은" 자명한 일이다. 어떤 이들이 이 저주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만일 그들이 바울을 죽였다면 아간의 죄가 전 민족에게 시련을 주었듯이 전 민족적인 자주로 나타날 것이고 만일 그들이 그를 죽이지 못한다면 바울에 대한 저주가 그들 본인에게 돌아갈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5) 그들은 이 일을 어떻게 해서든지 관철시키려고 대단히 열심이었다. 또한 그 일을 이루어지기까지는 도저히 견딜 수 없음을 드러냈다. 그들은 마치 "다윗을 향해 미친 듯이 날뛰며 그를 해하기로 서원한" 그의 적들과 같았고(시 102:8) 뿐만 아니라 "우리가 너의 살을 먹는다 해도 만족함이 없으리라"(욥 31:31)(역주:한글 개역과 틀림)고 욥의 적에게 말한 욥의 하인들과도 같았다. 박해자들에 대하여는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을 떡먹듯이 먹어 치운다"는 말씀이 전해지고 있다. 그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백성은 굶주린 자에게 있어서 고기와 다름없는 것이다(시 14:4).
5. 유대인들이 바울을 죽이기 위해 시도한 방법. 그들은 바울이 영문 안에 있었으므로 그에게 접근할 수가 없었다. 바울은 그 성에서 로마 정부의 특별한 보호 가운데 있었다. 그들은 그를 다른 사람들의 경우처럼 나쁜 짓을 저지르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수감한 것이 아니라 그가 남들에게 해를 받지 않게 하기 위하여 그를 수감하였다. 그러므로 그들은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을 시켜 총독에게 바울을 한 번 더 심문하려고 하니 그를 공회소로 인도하라고 요구하도록 계책을 세웠다(즉 그들이 그에게 몇 가지 질문할 것과 말할 것이 있으니 그를 보내 달라고 하였다). 그런 다음 그들은 바울이 성에서 공회로 가는 길목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그를 죽여 버림으로써 모든 논쟁을 끝내려고 하였다. 바로 이것이 음모의 내막이었다(14, 15절). 이런 계획을 세우려고 저희는 온종일을 소비하고 저녁 무렵에 그들은 산헤드린 회의의 간부들에게 찾아 갔다. 그들은 자기들의 계획을 숨기고 다른 구실을 대서 대제사장들로 바울을 데려 오게 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의 이 악한 계획이 허락될 것이 확실하다고 여겼으므로 "그들이 당을 지어 맹세하여 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아무 것도 먹지 않기로 굳게 맹세하였음"을 부끄러움이나 두려움없이 말하였다. 그들은 이렇게 서약하는 것이 과연 합법적인지조차 제사장에게 묻지도 아니하고 그렇게 하였다. 그들은 바울의 피를 흘린 다음날 아침이 되면 아침 식사를 들 계획이었다. 그들은 대제사장들이 바울을 죽이려는 그들의 계획에 찬성할 뿐만 아니라 도움을 줄 것이고 바울을 죽이는 기회를 만들어 주는 도구가 되어 줄 것이라는 사실을 믿어 의심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대제사장들이 천부장에게 가서 "바울에 관해서 좀 더 확실히 알고 싶은 것이 있다"(사실 그들의 의도는 전혀 다른 데 있었는데)라고 거짓을 말해 줄 것도 의심하지 않았다. 그들이 대제사장에게 이와 같은 일을 요청할 수 있었다니 그들이 대제사장을 얼마나 우습게 여기고 또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는가 알 수 있다. 그리고 그들에게 제시된 그 계획이 악한 일임에도 불구하고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을 첫말로 그 계획을 수락했다. 그들은 조그만치도 놀라지 않고 그들의 말대로 할 것을 약속하였다. 그들은 무리들의 악한 음모에 대하여 그들을 꾸짖는 대신에(그들이 무리들을 꾸짖는 것은 당연히 해야 할 일이었다) 그들이 원하는 대로 그들의 제안을 지지해 주었다. 왜냐하면 그 암살 음모는 자기들이 미워하는 바울을 죽이려는 계획이었기 때문이었다. 이같이 하여 대제사장과 장로들은 마치 암살 음모에 선봉이나 되는 듯이 그 죄를 저지르는 데 참여하였다.
Ⅱ. 이 음모가 발각된 경위. 우리는 이 음모자들이 이 음모를 기필코 성사시키겠다는 서약은 했지만 비밀을 지키겠다는 서약을 했다는 말씀은 어느 곳에서도 찾아 볼 수가 없다. 어쩌면 그 유대인들은 비밀의 서약을 할 필요가 없다고 여겼거나(그들은 모든 사람이 그 회의 내용을 지킬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또는 그 음모가 폭로되거나 알려진다고 해도자기들의 그 음모를 성사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계획이 밝히 드러나 결국 실패로 돌아가도록 섭리하고 계셨다.
1. 그 계획이 바울에게까지 알려지게 된 경위(16절). 그 사실을 바울에게 전달해 준 사람은 바울의 "생질"이었다. 아마 그의 어머니는 예루살렘에서 살았던 것 같다. 그 유대인들이 서로 말하는 것을 엿들었는지 그 당에 있던 어떤 이로부터 정보를 입수한 것인지는 본문에 전해 주고 있지 않지만 하여튼 바울의 생질은 그 유대인들이 "매복하여 기다린다"는 말을 들었다. "바울의 생질은 성내의 영문으로 들어가 자기가 들은 것을 얘기하였다." 아마 그는 그의 삼촌을 도웁고 그의 필요한 것을 공급하기 위하여 바울에게 자유로이 출입하도록 당국의 허용을 받는 것같이 여겨진다. 하나님은 "어두움의 은밀한 일을 밝히 드러내시는" 여러 가지 방법을 가지고 계시다는 것을 기억하자. 비록 어둠의 일을 만들어낸 자들이 주께로부터 그 일을 깊이 묻어 감추려 할지라도(전 10:20). "공중의 새로 그 소리를 전하게 하시든지" 음모자 자신의 입으로 그 일을 누설케 하시든지 하여 그 일을 밝혀 내신다.2. 바울에게 말한 그 청년이 천부장에게 이 사실을 알린 경위. 이 부분은 특별하게 매우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아마도 이 일을 기록한 사람이 이 서간이 신중하고도 성공적으로 처리된 것을 목격한 목격자요 또 이 일을 기록하는 것이 그에게 기쁨이 되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1) 바울은 신중하고 평온하게 행동하였으므로 그가 갇힌 영내에서 평판이 좋았다. 그러므로 비록 백부장은 권력을 지니고 있었고 수하에 군사가 있었으며 남에게 이래라 저래라 부림을 당하는 것이 아니라 남을 부릴 수 있는 입장에 있었지만 그도 바울의 청은 들어 주었다(17절). 바울은 이제 백부장을 청하여 이 젊은이를 천부장에게 소개해 주어 그로 하여금 천부장에게 당국의 명예에 관계되는 정보를 제공하도록 하게 하라고 부탁하였다.
(2) 백부장은 그의 청을 쾌히 승낙하였다(18절). 그는 다른 군사를 시켜서 데려가게 하지 않고 자신이 직접 그를 천부장에게 데리고 가서 천부장에게 이 젊은이가 그에게 볼 일이 있노라고 말해 주었다. 그는 이같이 하여 바울에 대한 존경을 표명하였다. 그는 천부장에게 "죄수 바울이(이것이 당시 바울에게 붙여진 명칭이었다) 나를 불러 이 청년이 당신께 할 말이 있다 하여 데리고 가기를 청하더이다. 무슨 일 때문인지 나는 알 수 없으니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모양이라"고 말하였다. 가련한 죄수들의 청을 들어 주는 것은 그들에게 물질을 주는 것만큼이나 자선적인 행위가 된다는 것을 기억하자. "나는 병들었고 감옥에 있으나 당신은 나를 위해서 심부름을 해 주었다"라는 말은 "나는 병들고 감옥에 있으나 그대가 내게 와서 나를 방문해 주고 나를 위로해 주었오"라는 말과 상통하는 것이다. 누구든지 친숙하며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고통당하고 있을 때 그들을 도울 수 있어야 한다. 이 백부장은 작은 성의를 베풀므로 바울의 생명을 구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던 것이다. 이 사실은 우리에게도 우리가 이런 경우를 당할 때 그렇게 할 것을 교훈한다. 그러므로 이르기를 "너는 벙어리를 위하여 입을 열지니라"(잠 31:8)고 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업을 위하여 죄인이 된 사람에게 좋은 선물을 줄 수 없는 자들은 그를 선한 말로나마 위로해야 할 것이다.
(3) 천부장은 겸손하고 부드러운 태도로 그 정보를 들었다(19절). 천부장은 마치 형제나 아버지에게 하는 것처럼 바울의 조카의 손을 잡았다. 그가 그의 손을 잡은 것은 이 청년으로 당황하지 않게 하려는 뜻에서였고 또 자신이 그의 말을 잘 경청하리라는 뜻에서였다. 본문에 천부장이 청년의 손을 잡은 사실이 언급된 것은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비천한 사람이 혹 그들에게 유익을 주기 위한 용건으로 왔을 때 이를 비천한 사람이 부담을 느끼지 않도록 배려하라는 뜻에서인 것이다. 즉 그들에게 "신분이 낮은 자들에게도 겸손히 대하라"는 교훈으로 기록한 것이다. 로마의 천부장이 바울의 조카에게 베푼 이 친절은 천부장의 덕을 더욱 높혀 준다. 사실 겸손과 자비를 베푼다고 해서 자신의 인격이 손상을 입는 것은 아니다. 천부장은 그의 말을 아무도 들을 수 없도록 바울의 조카에게 다가가서 조용히 말하였다. "내게 할 말이 무엇이냐? 어떻게 하면 내가 바울을 도울 수 있는지 말해 보라"고 물었다. 천부장은 이번 사건에 대하여 많은 책임을 느낀 것 같다. 왜냐하면 천부장은 바울이 로마 시민의 특권을 지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결박했기 때문이었다. 이 일에 대해 그는 자기가 분에 넘치는 것을 하였다는 것을 의식하고 있었고 그러기에 그는 자기 실수를 기꺼이 보상하려고 하였다.
(4) 바울의 조카는 천부장에게 자기가 맡았던 심부름을 다음과 같이 신속하고 멋지게 전했다(20, 21). "유대인들이(그는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을 교사한 유대인들이 누구누구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그의 적들을 고소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삼촌의 생명을 구하는 것이었다) 내일 바울을 데리고 공회로 내려 오기를 당신께 청하고자 하였으니 저희 청함을 좇지 마옵소서. 이는 영문에서 공회까지 멀지 않으므로 당신이 호위없이 삼촌을 보낼 것이라는 계산 하에 그렇게 한 것입니다. 우리는 당신이 진실을 알면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왜냐하면 저희 중에서 바울을 죽이기로 서원한 자 사십 여명이 그를 죽이려고 숨어서 지금 다 준비하고 당신의 허락만 기다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다행히 내가 그들의 음모를 알게 되었습니다"라고 한다.
(5) 천부장은 비밀을 지키라는 당부를 하여 젊은이를 보냈다. "이 일을 내게 고하였다고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2절). 높은 지위에 있는 자들이 자기에게 은혜를 베풀었다고 해서 다 자랑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서로 의논한 일에 대하여 책임지지 못하는 자들은 사업에 고용하기에는 적당치 못한 자들이다. 만약 천부장이 바울의 생질에게서 그 음모에 관하여 이미 들어 알고 있다는 것이 유대인들에게 알려진다면 아마도 그들은 또 다른 방법으로 바울을 죽이려고 할 것이다. 그러므로 천부장은 "비밀을 지키라"고 하였다.
Ⅲ. 그 음모가 분쇄된 경위. 천부장은 유태인들이 바울을 해하려는 사악한 음모가 얼마나 깊고 무자비한 것인가를 깨닫고 또한 바울에게 해를 가하려는 계획에 얼마나 전전긍긍하고 있으며 또한 천부장 자신이 이 일에 휘말려들어 동조자가 될 위험에 처한 것을 깨닫고 그들의 손이 미치기 전에 신속히 바울을 보내고자 결심하였다. 천부장은 그 정보를 듣고 이들 유대인들의 비열함과 잔인함에 경악과 분노를 금치 못하였다. 그리고 그는 그들의 원한이 이 정도라면 아무리 든든히 감시를 하더라도 바울을 영문 안에 거하게 하는 것이 결국 유대인들에게 그를 해하게 하는 기회를 주는 것이 되는 것이 아닌가를 염려하게 되었다. 즉 그들은 다른 어떤 방법을 동원해서 그들의 목적을 달성시킬지 모를 일이었다. 예를 들어 그들이 보초를 때려 눕히든가 성에 불을 질러 그를 빼내려 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러나 천부장은 어떤 상황 아래에서도 가능하면 바울을 보호하려고 했다. 왜냐하면 그는 바울에게서 암살되어야 할 만한 죄를 찾지 못하였기 때문이었다. 유대의 대제사장들은 바울의 암살 음모에 관해서 들었을 때 그 일을 지지하고 협조하였다. 이 얼마나 슬픈 사실인가. 그러나 로마의 천부장이 암살 음모를 들었을 때 그는 단지 정의와 인간애를 수호하려는 순수한 마음으로 그 음모를 저지하고 그 일을 막고자 하였다.
1. 천부장은 자기 휘하의 로마 군인들을 상당수 동원하여 바울을 가이사랴에 있는 벨릭스 총독에게 급속히 호송하라고 명령하였다. 그가 그렇게 한 것은 총독이 예루살렘의 산헤드린 회의보다는 바울을 공정하게 다룰 것을 기대했기 때문이었다.2. 나는 천부장이 바울을 석방하여 바울 자신이 자기 안전을 도모하도록 자시한다고 해서 그것이 그가 그의 직무를 태만히 한 것이라고 간주되지는 않을 것이라고 본다. 왜냐하면 바울을 죄인으로서 다룰 법적인 조건이 아무 것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천부장 자신도 "그를 결박할 사건이 없음"을 인정하였다(29절). 또한 천부장은 바울의 생명의 안전을 지킬 뿐 아니라 그의 자유를 보장해 줄 의무도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천부장은 그 일을 행하므로 바울을 미워하고 있는 유대인들이 몹시 격노할 것을 두려워하였다. 또 다른 이유로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아마도 그가 바울이 특별한 인물이라는 사실을 알고 나서 그를 죄수로 하여 자기의 보호 아래 둔다는 사실에 대해 몹시 자랑스럽게 생각했고 또한 그가 바울을 호송하는데 많은 군사를 동원하여 화려한 시위를 한 것도 이러한 자만 때문이었던 것 같다. 이 호송에는 두 명의 백부장과 수백 명의 군사가 동원되었다(23, 24절). 이 백부장들은 아마도 자신들이 거느리고 있는 군인이었으리라 짐작되는 군사 이백 명을 거느리고 가이사랴까지 가기 위해 준비하였다. 이외에 "말 칠십 마리와 이백 명의 창군도 함께 하였다. 어떤 이는 이들 병사가 천부장의 호위병들이었으리라고 생각한다. 이 군사들이 기병이었는지 보병이었는지는 확실치 않지만 아마도 대부분이 보병들로서 그들은 말을 지키기 위한 창병이었던 것 같다. 이 모든 사실을 생각할 때 유대 민족을 로마의 치하에 두신 하나님의 처사가 얼마나 정당하셨는가를 깨닫게 된다. 본문에서도 유대인들이 악한 일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 이들 로마 군사 일부가 필요하였던 것이다. 하지만 바울의 동료들이 바울을 구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추진했다면 모든 군사가 동원된다고 해도 바울을 구출해 가는 것을 막을 수 없었을 것이다. 또한 천사가 바울을 구출하려 했다면 현재보다 10배의 병력이 그를 지키려 해도 지킬 수 있었을 것이다. 만일 하나님께서 전에도 종종 하셨듯이 그러한 방법으로 바울을 놓으시기를 원하셨다면 그 누구도 그 일을 저지할 수 없었을 것이다.
(1) 천부장은 이 무지막지한 유대인들에게는 일상적인 친절함과 의무로 그들을 다스릴 것이 아니라 이럴 권위를 과시함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두려움을 느끼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이 엄중한 행렬을 계획했다. 바울을 죽이고자 하는 음모에 많은 사람이 참가했는가를 들은 천부장은 그들의 계획을 분쇄시키려면 많은 군사가 동원되어야 한다고 생각던 것이다.
(2) 이로써(즉 많은 병력으로 그를 호위시키심으로) 하나님께서 바울을 격려하고자 하셨다.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많은 호우를 수행시키심으로 바울을 그의 적들의 손으로부터 보호하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에스라가 하였던 것 이상으로 이러한 호위를 바라지 않았다(스 8:22).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충족하게 해 주실 것을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호위가 수행된 것은 오직 천부장의 배려에 의한 것이었다. 그러나 한편 이러한 굉장한 행열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매인 바 된 사실"을 널리 선포하는 결과를 초래함으로(빌 1:13) 바울이 더욱 널리 알려지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또한 그의 매임은 전에 그의 매일 것을 예언한 그 예언자들에게 영예가 되어졌다. 또한 "주를 믿는 형제들이 그의 매임으로 더욱 담대하여졌으므로" 이를 믿는 형제들에게도 그의 매임은 유익이 되었다. 그들은 바울이 로마 병사들에게 끌려가는 것을 보고 그가 유대 조국에 대한 반역자로서가 아니라 애국자로서 고난을 당하는 것이라 생각하게 되었고 또 위대한 전도자는 죄수의 신분에 있으면서도 조금도 비굴해지지 않는다는 것을 보고 용기를 얻었다. 그의 적들은 그를 증오하고 또 그의 동료들은 그에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있을 때 로마의 천부장이 바울을 보호하고 돌보아 주었던 것이다.
[1] 천부장은 호송되는 바울의 편의를 제공하였다. 그는 "말을 준비하여 바울을 태우라"고 명하였다. 만약 유대의 박해자들이 바울을 가이사랴로 호송하라는 지시를 내리게 되었다면 그들은 바울을 걷게 하거나 마차나 수레로 바울을 끌고 가든지 한 사람의 기병 뒤에 태워 호송하라고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바울이 비록 그의 죄수로 있었지만 천부장은 바울을 신사로 대접하여 그가 도망가리라는 것은 조금도 염려하지 않고 바울에게 타고 갈 좋은 말을 제공하라고 지시하였다. 그러나 본문에서 그가 부하들에게 바울이 타고 갈 말 한 필을 준비하라고 하지 않고 여러 마리의 말을 준비하라고 한 것으로 보아(역주:한글 개역에는 복수로 표시되지 않았음) 어쩌면 지위높은 사람이 행차할 때 그가 탄 말 앞에 또 한 마리의 말이 길을 인도하듯이 그러한 대우를 바울에게 하였거나 아니면 바울로 그가 탄 말이 싫어지면 다른 말을 탈 수 있도록 한 것같이 보인다. 또는(어떤 주석가들이 생각하듯이) 바울의 동료나 친구들이 원하는 대로 그와 함께 여행하며 그를 보살피게 하려고 천부장이 바울에게 말을 여러 필 제공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2] 천부장은 호송 도중의 바울의 안전을 배려하였다. 로마 군인들이 천부장에게서 받은 명령은 "바울을 무사히 총독 벨릭스에게 넘겨 주도롤 하라"는 것이었다. 군사적인 일에 관하여서는 천부장이 최고의 상관이었으나 유대인들에 대한 민사적인 일에 있어서는 벨릭스가 최고의 책임자였다. 이제 이 총독에게 바울은 인도되었다. 로마의 역사가들은 벨릭스에 대하여 많은 사실을 전해 주고 있는데 그들에 의하면 벨릭스는 천민 출신이었으나 자수성가하여 유다의 총독까지 되었다고 한다. 역사가 타키투스는(His Hist. omnen saevitiam aclibidinem jus regium servili ingenio exercuit - 즉 그는 왕권에 아첨하여 권력을 얻었고 권력을 행사함에 있어서 잔혹함과 야만성을 들어내었다. 이제 가련한 바울은 이러한 자의 재판을 받도록 넘겨진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대제사장 아나니아"보다는 한결 좋은 사람이었던 것이다. 이같이 죄수가 법에 따라 재판을 받는 동안 그는 마땅히 군왕처럼 보호되어야 하는 것이다.
3. 천부장은 바울을 더 안전히 호송하게 위하여서 밤이 된 후 세 기에 출발하라고 명령하였다. 어떤 이는 이 구절을 해가 진 후 세 시간 지나서라고 설명한다. 그때는 오순절 축제가 끝난 뒤이므로 (그 때는 삼복 더위의 여름이었다) 천부장은 그들로 서늘한 밤에 행군하게 하기 위해서였으리라고 생각한다. 또 어떤 이는 자정이 넘어 세 시 즉 새벽 세 시 경으로 본문을 이해한다. 이렇게 한 것은 그들이 유대인들보다 전날 앞서 떠나게 하므로 바울의 적들이 훼방을 놓기 전에 예루살렘을 빠져나가게 하므로 바울의 적들이 훼방을 놓기 전에 예루살렘을 빠져나가게 하려 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하므로 군중의 소요를 막고 닭 좇던 개와 같이 헛물을 켜게 하려고 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4. 천부장은 이 지방 총독인 "벨릭스에게 편지를 썼다." 그는 그렇게 함으로써 바울에 대해 더 신경 쓰기를 피하고 모든 것을 총독에게 맡겨 버렸다. 이 편지는 이 구절에 totidem verbis - 즉 요약 되어 삽입되어 있다(25절). 아마도 역사가였던 누가가 바울이 호송될 때 함께 동행하여 가서 벨릭스에게 그 편지의 사본을 얻어낸 것으로 보여진다. 이 서신에서 다음 사실을 찾아 볼 수 있다.
(1) 천부장이 총독에게 보낸 인사말(26절). 그는 벨릭스를 "총독 벨릭스 각하"라고 불렀다. 물론 이 칭호는 벨릭스에 대한 존칭으로 주어진 것이었다. 그 다음 천부장은 그의 안부를 묻고 그의 건강과 번영을 기원하였다.
(2) 천부장이 바울에 대하여 총독에게 한 공정하고 정당한 설명.
[1] 그는 바울이 유대인들이 불쾌히 여기는 사람이었고 기록하였다. 그러므로 그는 "이 사람이 유대인들에게 잡혀 죽게 되었다"고 본문에서 말하였다. 아마도 벨릭스 자신이 유대인의 성질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그들이 그를 미워하였다 해서 그가 바울이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27절).
[2] 그는 바울이 로마 사람이므로 그를 보호했노라고 기록한다. 그는 "유대인들이 그를 죽이려 할 때 내가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그를 구해내었다"고 말한다. 그는 이로써 로마 총독에게 자기가 로마 시민을 위해서 한 행동을 은근히 선전하였다.
[3] 그가 바울을 송사할 만한 점을 발견하지 못하였다는 것과 유대인들이 그를 그렇게 미워하며 악 감정을 품는 이유를 알 수 없었노라고 기록한다. 그는 자신이 이 일을 해결하고자 취한 조치를 설명한다. 즉 그가 이 원인을 알고자 하여 "저희 공회로 그를 데리고 내려 간 것"과(28절) 유대인들의 불평이나 바울의 자백을 통해서 이러한 소동의 원인을 어느 정도 이해하였다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이를 통하여 소동의 원인이 "그들의 율법 문제로(29절) 죽은 자의 부활의 소망에 대한 것임"을 알았노라고 하였다(6절). 천부장은 재치있는 사람이었고 정의감과 인도적 정신을 그의 지침으로 삼고있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천부장은 내세에 대해서 그리고 내세에서 있을 놀라운 일들에 대해서 경시하는 투로 말하였다. 그는 "그것이 문제가 된 것은 틀림 없는 사실이다. 그런데 그 문제에 대해서 사두개인만 반대하고 또 바리새인들과 바울은 입장을 같이 한다. 그런데 이것은 오직 유대인들의 율법 문제인 것 뿐이요"라고 가볍게 말하였다. 그러나 사실 이 문제야말로 전 인류가 관심을 가져야 할 관심사였던 것이다. 또는 천부장의 이 말은 "이 문제는 그들의 교의가 문제가 아니라 의식이 문제였다. 내가 본 바에 의하면 유대인들이 그에게 시비를 하는 것은 그가 그들의 제의법의 명예와 또 그것에 대한 사람들의 의무감을 감소시킨다는 것 때문이었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이런 문제는 언급할 만한 문제도 되지 않는 것이다"라는 뜻이라고 해석한다. 로마인은 자기들이 점령한 민족의 국민이 그들 고유의 종교를 믿는 것을 허락했고 로마의 종교를 결코 강요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공안을 유지하기 위해 그러한 종교적 이유 때문에 그들끼리 서로 분쟁을 일으키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4] 그가 이같이 사건을 조사하여 알고 보니 바울을 죽이거나 결박해야 할 조건이 아무 것도 없으며 나아가서 바울을 논박할 아무 증거도 없다는 것을 알았다고 기록한다. 유대인들은 자기들의 사악함을 통하여 자기들을 세계에서 가장 가증스러운 것으로 만들었다. 또한 자기들의 명예를 스스로 훼손하고 그들의 나라를 모독하였다. 또한 그들은 교회와 율법과 성전을 불명예스럽게 하였다. 또한 자기들의 얼굴에 침을 뱉는 식으로 바울을 향하여 난동을 부렸다. 사실 이러한 유대인들의 죄야말로 "죽이거나 결박할"죄였던 것이다.
(3) 벨릭스에게 바울의 사건을 넘긴 이유에 대한 천부장의 설명(30절).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유대인들이 법적인 절차를 무시하고 바울을 죽이려고 기다린다는 말을 듣고서 나는 이 사람을 당신께 곧 보냅니다. 그 이유는 당신이 송사를 듣고 정당한 판결을 내려 줄 가장 적절한 분이라 여겼기 때문입니다. 이제 공소자들도 곧 바울을 좇아 가서 그들이 그를 대적하는 이유를 말할 것입니다. 내가 군인이면서 재판관 노릇한다는 것은 격에 맞지 않아 당신께 의뢰하니 선처를 바랍니다."
5. 그래서 바울은 가이사랴로 호송되었다. 군인들은 바울을 한밤중에 무사히 빼내서 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먹거나 마시지도 않겠다는 암살자들을 떨쳐 버렸다. 그들은 바울을 치려는 악한 서원을 행한 것으로 인해 이제 난처한 입장에 처하게 되었다. 이제 만일 그 맹세와 실망에 대한 분노 때문에 그들 중 어떤 자가 굶어 죽는다 할지라도 그들은 결코 동정될 수 없을 것이다. 바울은 안디바드리에 이르게 되었다. 그곳은 예루살렘에서 17마일 떨어진 곳으로 가이사랴까지의 중간 지점이었다(31절). 거기서 "이백 명의 보병과 이백 명의 창병은" 예루살렘에 있는 자기들의 성으로 돌아갔다. 왜냐하면 바울이 위험 지대를 벗어났으므로 그렇게 강력한 호위가 필요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마병들은 가이사랴까지 바울을 호송하였다. 또한 마병들이 호위한 것은 신속하게 바울을 호송하게 위해서였다. 그들이 이렇게 한 것은 자신들의 수고를 덜 뿐만 아니라 천부장에 대한 의무를 행하기 위해서였다. 주인의 명에 다라 충실히 복종할 뿐만 아니라 주인에게 최대의 이익이 돌아가도록 현명하게 행동하는 것은 모든 남의 밑에 있는 사람들이 본받을 만한 것이다.
6. 바울은 한 사람의 죄수로서 벨릭스에게 인도되었다(33절). 관리들은 편지와 함께 바울을 벨릭스에게 양도하였다. 이로써 그들은 그들의 의무를 다하였다. 바울은 어느 곳을 가든지 높은 지위에 있는 자들과 사귀고 친해지기를 바라지 않았다. 다만 그는 그곳의 제자들과 친해지기를 사모하였다. 그럼에게 하나님께서는 그를 고통받게 하시므로 높은 지위에 있는 자들 앞에서도 그리스도를 증거할 수 있는 기회를 그에게 마련해 주시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도 그의 제자들에 대하여 "나를 인하여 너희가 관장들과 임금들 앞에 서리니 이는 저희를 쳐서 증거하게 하려 함이라"라고 예언하셨던 것이다(막 13:9). 총독은 죄수에게 그가 어느 지방 출신이냐고 물어 그가 길리기아 사람인 줄을 알았다(34절).
(1) 총독은 바울에게 신속한 재판을 약속한다(35). "너를 송사하는 사람들이 오거든 양쪽의 말을 듣고 판단하리라"고 말한다.
(2) 총독은 바울을 감금하라고 명했다. 즉 그를 헤롯궁의 재판소에 있는 교도소에 수감하라고 명하였다. 이 재판소는 지은 사람의 이름을 따서 헤롯궁이라고 한 궁전의 일부분이었다. 거기서 바울은 총독의 관저에서 근무하는 높은 사람들과 사귈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그리고 바울은 이 사귐의 기회를 통하여 그의 최대의 목적인 복음을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