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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

바울의 가이사랴에로의 항해(사도행전 21:1-7)

본문에서 다음과 같은 사실들을 고찰하여 보자.

Ⅰ. 바울과 에베소 교인들의 작별이 얼마나 애석한 것이었는가 하는 것은 "우리가 저희를 작별하고"라는 이 장 첫마디 속에서 암시되고 있다. 즉 이 말은 그들이 마지 못해 헤어진 것을 뜻하고 있다. 작별이란 불가항력적인 것이었다. 바울은 그들을 떠나기를 싫어하였고, 그들도 바울과 헤어지기를 싫어하였다. 그러나 다른 방도가 없었으므로 그들은 헤어져야만 했다. 선한 사람이 죽음에 의하여 세상을 떠나게 될 때 가능하다고 하면 임종자를 조금이라도 더 살아있게 하려고 많은 노력을 기울인 그의 친구들과도 작별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Ⅱ. 목적지까지의 순조로운 항해. 어떠한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직행하여" 희랍의 유명한 섬인 "고스"에 고착했다. 그 다음날 그들은 콜러서스 즉 아폴로 신의 거상(巨像) 때문에 유명해진 로도에 도착했으며, 그 다음에는 리시아(Lysia)의 수도요 유명한 항구인 "바다라"에 도착했다(1절). 그곳에서 그들은 다행스럽게도 그들이 가려는 곳으로 항해 중인 "베니게로 건너가는 배를 만나서 타고 갔다"(2절). 일이 순조로이 진행될 때 또한 우연한 사건이 우리가 하고자 하는 계획에 기여할 때 우리는 거기서 하나님의 섭리를 볼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의 갈 길을 잘 마치게 해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다"고 말해야 한다. 그들이 탄 배는 베니게(즉 두로)로 향하고 있었으므로 그들은 그 배의 편의를 제공받아 "배를 타고 두로에로 갔다." 이 항해 도중에 그들은 "구부로" 섬을 "바라보았다." 이 섬은 바나바가 태어나고 자라난 곳이었다. 그러기에 바울은 그곳을 방문하지 않고, "왼편에 두고" "수리아로 행선하여 마침내 두로에 상륙했다." 두로는 그 나라의 유명한 상업 중심지였었으나 바울이 상륙했던 당시에는 침체 상태에 있었다. 그러나 아직 약간의 거래가 거기서 이루어지고 있었다. 왜냐하면 "거기서 배가 짐을 풀려 하였다"는 것과 또 짐을 푼 사실을 보아서 그렇다.

Ⅲ. 바울은 두로에 잠시 머물렀다. 바울이 그곳에 상륙하였다는 것은 그가 이스라엘에 거의 다다른 것과 다름이 없었다. 그러므로 바울은 그가 예정했던 기간 안에 그의 나머지 여행을 바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1. "두로에서 바울은 제자들을 찾았다." 그들은 복음을 받아들이고 기독교 신앙을 고백한 사람들이었다. 바울은 어디를 가든지 거기 제자들이 살고 있는가를 물었고, 그들을 찾아 내어 그들과 사귀었다는 사실을 생각하여 보자. 같은 깃털을 가진 새들끼리 서로 모이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리스도가 세상에 계실 때 그가 두로의 해안에 자주 가시기는 하였지만, 그러나 그리스도는 그곳에 가서 복음을 전하시지는 않았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는 두로와 시돈이 고라신과 벳세다가 누린 것과 같은 혜택을 맛보기에는 적당치 않다고 생각하였다. 비록 만일 그들에게 복음이 전해지면 그들이 고라신과 벳세다보다는 더 나아지리라는 것을 알기는 하셨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눅 10:13, 14). 그러나 후에 복음을 전할 사람들이 많아지자 그리스도가 두로에까지 전파되었다. 그곳에도 제자들이 있게 되었다. 어떤 사람은 이 사실에 대하여 예언자들이 두로에 관하여 "그 무역한 것과 이익을 거룩히 여호와께 돌리고 간직하거나 쌓아 두지 아니하리니"라고 예언한 것이 이루어진 것이라고 생각한다(사 23:18).

2. 바울은 "제자들을 찾아 거기서 이레를 머물렀다." 그들은 바울에게 할 수 있는 그리하여 그들과 함께 있어 주기를 간청했다. 바울은 드로아에서 칠 일을 체류하였고(20:6) 이곳 두로에서도 그렇게 많은 날을 머물렀다. 그가 그렇게 한 것은 그들과 함께 "주일"을 지키고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 가운데서 공개적으로 복음을 전할 기회를 갖기 위해서였다. 선한 사람들은 어느 곳을 간다고 하더라도 거기서 유익한 일을 하게 되기를 바란다. 우리가 어느 곳에서 제자들과 만나더라도 우리는 그들에게 유익을 끼치든지 혹은 그들에게 도움을 받든지 하게 되는 것이다.

3. 두로의 제자들은 은사를 받았으므로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당하게 될 고난을 성령에 의하여 예언하였다. "성령이 각 성에서 결박한 환란이 그를 기다린다"고 증거하였다(20:23). 어떤 사건이 발생하려고 하면서 그 사건에 대하여 많은 논란이 되는 것은 하나님이 그 사건 전에 많은 예언을 함이 적합하다고 여기셨기 때문이다. 이렇게 함으로 하나님도 사람들의 신앙을 해치는 대신에 그 신앙을 더욱 굳건히 하고자 하셨다. 그들이 바울의 고난을 예견하고 그러한 은총을 부여받은 것과 동시에 그들은 그에 대한 사랑과 교회, 특별히 이방인 교회를 위한 관심 때문에 바울에게 "예루살렘성에 들어가지 말라"고 간청하였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의 뜻이 변경되게 되기를 희망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만일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간다면, 그곳에서 그가 고난을 당하게 될 것을 알았다. 그들은 다윗에게(만일 네가 그일라 사람들과 거한다면) "그들이 너를 붙이리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듯이 바울에게 어려움이 닥칠 것을 알았다. 그러므로 그들은 "성령의 감동으로 바울더러 예루살렘에 들어가지 말도록 하라"고 말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바울이 계속 자유의 몸으로 있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최선의 길이라는 결론을 내렸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그들이 생각하고 또 그 결론에 따라 바울을 설득시켜 단념하게 하려고 한 것은 그들의 과오(fault)는 전혀 아니었다. 그러나 그것은 그들의 실수(mistake)였다. 왜냐하면 그가 시련을 당하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과 복음의 확장을 위해서 필요한 것이기 때문이었다. 바울은 이러한 사실을 알고 있었다. 어쨌든 바울로 하여금 예루살렘 여행을 위한 집요한 간구가 계속되었고 그것은 결국 바울의 경건과 진정한 영웅적 결단을 더욱 빛내 주는 결과를 낳았다.

4. 두로의 제자들은 비록 그들이 바울의 영향을 받은 개종자들은 아니었지만 많은 존경을 바울에게 표했다. 그 이유는 그가 두로를 따나려 할 때쯤 해서 그들의 교회 안에서의 바울의 유용함에 대하여 많은 얘기를 전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비록 바울을 사귈 수 있는 기회가 일주일밖에 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그들은 바울이 어떤 우대한 사람이기나 한 것처럼 "처자"를 데리고 함께 와서 경건하게 그를 전송하고, 그의 축복을 간청하고, 뱃터까지 따라와서 그를 전송하였다. 다음 사실을 기억하자.

(1) 우리들은 주님 안에서 우리를 치리하고 우리를 경계하는 우리의 사역자들을 존경해야 하고 "사랑으로 그들을 귀히 여길" 뿐 아니라 기회가 주어질 때는 모든 그리스도의 신실한 사역자들에게 우리의 사랑과 존경을 표해야 한다. 그 이유는 그들이 위하여 수고하는 바로 주님 때문에 그리해야 하고 또한 다른 사람들 가운데서 그들의 수고를 인하여 그렇게 해야 하는 것이다.

(2) 우리들은 하나님이 특별히 존귀하게 쓰시는 자들을 특별히 존경해야 한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하나님이 그들이 처한 세대 가운데서 특별히 들어 쓰시는 사람들이 있다.

(3) 훌륭한 인물들과 사역자들을 존경하도록 어린이들을 훈육하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라는 사실이다. 이러한 모습은 두로에서 두드러지게 보여지고 있다. 이러한 태도는 우리가 어디서나 쉽게 볼 수 있는 흔한 것은 아니다. 그들은 그들의 아내와 자녀들을 바울에게 데려다가 그의 말을 듣게 하였고 그에게 존경을 포하고 또 그의 가르침과 기도에 의해 유익을 받게 하고자 하였다. 예언자를 조롱한 벧엘의 우상 숭배자들의 자녀들에게는 분노의 저주가 주어졌었다. 그러나 사도를 존귀히 여긴 두로에 사는 제자들의 자녀들에게는 틀림 없이 축복이 주어졌을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도 어린이들의 호산나 찬양을 기뻐 받으셨다.

(4) 우리들은 우리들에게 주어진 기회를 최대한으로 선용하여 우리를 영혼을 유익하게 하는 기회로 삼아야 한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바울을 멀리까지 따라가서 전송하였다." 그 이유는 그들이 바울과 좀 더 같이 있기 위하여 또한 그의 기도를 받기 위해서였다. 어떤 사람은 시편 45편 12절의 "두로의 딸이 여물을 드리고"라는 구절을 본문의 사실에 대한 예언이라고 간주한다. 아마 우리 친구들이 해외 여행을 할 때 선물을 하듯이 그들도 헤어지면서 바울에게 선을 준 것같이 보인다(28:10).

5. 그들은 바울과 에베소의 장로들이 그랬던 것처럼(20:36) 기도로 헤어졌다. 이로써 바울은 우리들에게 언제나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본을 보여 주었고 또한 기도의 삶을 우리에게 규칙으로 가르쳐 주고 있다. 본문에 보면 "우리가 바닷가에서 무릎을 꿇어 기도하였다"고 하였다. 바울은 자신을 위하여 그리고 그들을 위해서 또한 모든 교회를 위해서 기도했다. 바울은 많이 기도한 동시에 대단히 능력있는 기도를 하였다. 그들은 바닷가에서 기도했다. 그것은 기도로 그들의 마지막 작별을 성별하고 아름답게 하기 위해서였다. 바다로 여행을 하고자 하는 자들이 그들이 해안을 떠날 때 하나님에게 기도로 자신들을 위탁하고 또한 그의 보호 아래 자신들을 맡겨야만 한다. 또한 육지 여행을 떠나게 될 때에도 하나님의 섭리와 약속에 그들의 신앙을 굳건히 세워야 한다. 그들은 바닷가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했다. 아마도 그들이 무릎 꿇고 기도한 곳에 돌이 많고 지저분한 곳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하였다. 바울은 "사람들이 어디서나 기도하기를" 바랐다. 또 자신이 그렇게 하였다. 그리고 그가 기도할 때 그는 무릎을 꿇고 기도했다. 하버트(Mr. George Herbert)씨는 "무릎을 꿇는 것은 결코 비단 양말이 헤어지지 않는다"고 말하였다.

6. 드디어 그들dms 헤어졌다(6절). 본문에 보면 우리가 뜨거운 포옹으로 서로 사랑과 슬픔을 나누면서 "작별한 후에 우리는 배에 오르고, 저희는 집으로 돌아가니라"고 하였다. 그들은 만나면 헤어져야만 한다는 이 세상에 법칙을 진정 안타까와하였다. 즉 본문을 쉽게 표현한다면 다음과 같이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여로를 앞에 두고 있는 우리들은 우리를 운반해 줄 배를 갖게 된 것을 감사하면서 승선하였다. 그리고 배를 탈 필요가 없는 자들은 그들이 돌아갈 집이 있다는 사실을 감사하면서 집으로 돌아갔다." 이 사실은 "스블론은 나다님을 좋게 여기며 잇사갈은 쉴 곳을 보고 좋게 여긴다"(창 49:13-15)는 말씀과 상응됨을 볼 수 있다. 바울은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들을 축복하면서 떠났고 그리고 그곳에 남은 사람들은 떠나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했다.

Ⅳ. 그들의 돌레마이 도착. 그곳은 두로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7절). 본문에 보면 "우리가 돌레마이에 도착했다"고 하였다. 혹자는 그곳이 아셀 지파의 경내로 소개되고 있는 "악고"와 같은 장소라고 생각한다(삿 1:31). 바울은 그곳에 상륙하기를 간청하였다. 이는 그곳에서 "형제들에게 안부를 묻고," 그들의 상황을 알아 보며 그리고 그들을 향한 그의 선의를 보여 주기 위해서였다. 비록 바울은 그들과 오래 머물러 있지 않았으나 그럼에도 그는 그들에게 아무런 존경도 표하지 않고 그곳을 자나갈 것으로 여기지 않았다. 바울은 "그들과 함께 하루를 있었다" 아마 그날이 주일이었을 것이다. 바울은 이같이 비록 잠간 체류하는 것이었지만 그것이 방문을 안하는 것보다 좋다고 여겼다.

 

21:2 없음.

 

21:3 없음.

 

21:4 없음.

 

21:5 없음.

 

21:6 없음.

 

21:7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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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보의 예언(사도행전 21:8-14)

바울과 그의 동료들은 마침내 가이사랴에 도착하였다. 바울이 여기서 며칠 머물기로 작정하였다. 그런데 이곳은 복음이 이방인들에게 맨 처음 전파되었던 장소였고 또한 "성령이 이방인들에게 내린 곳이기도 하였다"(10:1, 44).

Ⅰ. "가이사랴에서" 바울과 그의 동료들을 영접한 사람에 대한 고찰. 바울은 거의 여인숙에서 머무는 일이 없었다. 그가 가는 곳에는 어느 곳에나 그를 맞아 환영하는 친구들이나 또는 그러한 무리들이 있었다. 그들과 함께 항해하였던 사람들은 그 항해가 끝나자 각자의 임무에 따라서 헤어졌다. "화물에 관심이 있던 사람들은 배가 짐을 부리는 곳에 머물러 있었다(3절). 또 어떤 사람들은 돌레마이에서 그들이 임무에 따라 하선하여 각자 흩어졌다. 그러나 바울의 동료들은 그를 따라 가이사랴에 도착하였다." 다음 사실을 생각해 보자. 이 세상에 함께 여행하던 사람들은 죽음으로 서로 작별하게 된다. 그 때에 누가 바울의 동료였는지 아니었는지가 분명히 나타날 것이다. 이제 가이사랴에서 어떠한 일이 있었는가를 살펴 보자.

1. 그들은 전도자 빌립에 의하여 영접을 받았다. 우리는 그가 수년 전에 이디오피아의 내시에게 세례를 베풀고 가이사랴에 이르렀다는 사실까지를 전에 고찰하였었다(8:40). 그리고 이제 이곳에서 다시 그를 발견하게 된다.

(1) 그는 원래 집사로서 구제를 위하여 뽑힌 일곱 중의 한 사람이었다(6:5).

(2) 그는 오랫 동안 복음 전도자로 일해 왔다. 그 때에는 집사였지만 그는 사도들이 하였던 것과 같이 여기 저기를 다니며 교회들을 개척하고 또 물을 주어 가꾸었다. 그리고 사도들과 같이 그 자신이 직접 "말씀을 전하고 기도하는 일"에 전념하였다. "집사의 직분을 잘한 자들은 아름다운 지위를 얻는다"(딤전 3:13) 하였고 "적은 일에 충성한 자에게는 많은 것를 맡기신다"고 하였는데 바로 빌립이 그러한 인물이었다.

(3) 그는 가이사랴에 집을 지니고 있었는데 이 집은 바울과 그의 모든 동료들을 맞이할 수 있을 만한 규모의 집이었다. 그는 바울과 동료들을 자기 집에 영접하였다. 그러므로 본문에 보면 그들이 "전도자 빌립의 집에 들어가서 유하였다"고 하였다. 사람들은 그들의 능력에 따라서 평신도가 되기도 하고 사역자가 되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각자 서로 대접하기를 원망없이 해야 한다"(벧전 4:9).

2. 이 빌립이라는 사람에게는 "예언을 하는 네 딸이 있었다"(9절). 이 사실은 그들도 다른 사람들이 하였던 것과 같이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당할 고난을 예언하였고 또 그에게 그곳에 가지 못하게 말렸으리라는 사실을 암시한다. 그렇지 않으면 아마 그들은 바울 앞에 놓인 어려움을 얘기하면서 그에게 위안과 격려의 말을 예언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어쨌든 이곳에서의 예언의 사실들은 요엘 2장 28절에 기록된 예언 즉 성령이 모든 육체에 부어져서 그들의 "아들과 딸들이 예언을 할 것이라"는 예언이 성취된 것을 보여 준다.

Ⅱ. 저명한 선지자에 의하여 바울의 고난이 명백하고 완벽하게 예언됨(10, 11절).

1. 바울과 그의 동료들은 가이사랴에서 여러 날 체류하였다. 아마 고넬료도 그 때까지 그 곳에 살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빌립이 그들을 유숙시켰지만) 그는 그들에게 많은 친절을 베풀었을 것이며 그들로 하여금 그곳에 머물러 있기를 권하였을 것이다. 우리는 여행 초기에는 그렇게 갈 길을 서둘렀던 그가 여행이 끝날 즈음에 이르러서는 서둘지를 않았고 또 가이사랴에 어째서 그렇게 오래 머무르게 되었는가를 알 도리는 없다. 그러나 우리는 게으름을 피우기 위하여 그가 그곳에서는 혹은 다른 곳에서 체류하고 있지는 않았다는 것을 확실하게 말할 수 있다. 바울은 하루도 허비치 않고 날마다 계획에 의해 생활하였다.

2. "선지자 아가보가 유대로부터 가이사랴로 왔다." 이 사람에 대해서는 우리가 전에도 고찰하였는데 그 때 그는 "예루살렘으로부터 안디옥으로 와서" "전파가 크게 흉년들 것"을 예언한 사람이었다(11:27, 28).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께서 그의 은사를 얼마나 다양하게 베푸시는가를 깨달아야 한다. 하나님은 성령을 통하여 바울에게는 사도로서의 말씀의 지혜와 지식을 주었으며 병고침의 은사를 주셨다. 그리고 아가보와 빌립의 딸들에게는 바울에게 은사를 준 것 같은 성령을 통하여 예언의 은사를 주었다. 그들은 장차의 일을 예언하였고 예언대로 모든 일은 이루어졌다(고전 12:8, 10 참조). 구약 시대에는 가장 뛰어난 성령의 은사였던 미래의 사건을 예언하는 은사가 신약 성서 시대에서는 다른 은사들에 의해서 차선의 은사로 퇴보하였다. 그리고 교회 안에서는 그러한 예언의 능력을 받은 사람들이 그렇게 중요한 인물들로 여겨지지 않았다. 아마도 아가보가 가이사랴에 온 목적은 이러한 예언의 정보를 바울에게 제공하고자 그를 만나러 온 것같이 보인다.

3. 아가보는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속박될 것을 예언하였다.

(1) 그는 구약의 예언자들이 행하였던 것과 같이 상징으로써 예언한다. 이러한 예언은 이사야(20:3)나 예레미야(13:1; 27:2), 에스겔(4:1; 12:3) 그리고 그 외 많은 예언자들이 그러한 상징으로 예언하였다. "아가보는 바울의 띠를 가져갔다." 그는 바울이 풀어 놓았던 것을 가져갔거나 아니면 바울로부터 풀어갔을 것이다. 그리고 그 띠로 먼저 "자신의 손을 묶고 그 다음 그의 발을 묶었다." 아니면 아마도 손과 발을 함께 묶었을 것이다. 이것은 예언을 확증하고 (즉 이미 보여진 것처럼 그 일은 확실히 실현될 것이라는 뜻이다) 또한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 이러한 행위를 통하여 깊은 인상을 주기 위해서 시도된 것이었다. 왜냐하면 듣기만 하는 것보다 우리가 직접 보는 것이 일반적으로 더 깊은 인상을 주기 때문이다.

(2) 그는 그 상징을 설명하는 방법을 통하여 예언한다. "성령이 말씀하시되" 즉 예언의 성령이 말씀하시되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이 이같이 이 띠의 임자를 결박하여" 그들이 바울이 섬기던 주님에게 하였듯이(마 20:18, 19) 또한 다른 곳의 유대인들이 로마의 통치자에게 그를 고소해서 그를 결박하려고 하였듯이 "이방인의 손에 넘겨 주리라"고 말한다. 바울은 그에게 주어진 이 급박한 고난에 대한 경고를 자기로 그 고난에 대비하게 하고 또 그 고난이 닥쳤을 때 그 고난이 그를 놀라게 하거나 떨게 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주어진 것으로 받아들였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많은 시련을 통과해야만 한다"는 일반적으로 우리들에게 주어진 경고를 우리는 바울과 같은 심정으로 받아들어야 하겠다.

Ⅲ.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가는 것을 설득하여 포기하게 하기 위한 친구들의 간절한 만류(12절). 본문은 다음과 같이 이 사실을 전해 준다. "그 곳에 있는 사람들만이 아니라, 이러한 경고가 자주 말해진 것을 듣고 또 그러한 것에도 불구하고 실행하고자 하는 바울의 결심을 알고 있던 바울의 동료들과 나(누가)까지고 바울로 하여금 예루살렘으로 가지 말고 그의 여정을 바꾸도록 눈물로 간청했다."

1. 본문에 바울에 대한 본받을 만한 애정과 교회 안에서의 바울의 커다란 유용성에서 비롯된 그를 존귀히 여기는 태도가 나타나고 있다. 우리는 때로 매우 활동적인 유대한 사람들에게 과로하지 말도록 설복해야 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우리는 때로 용감한 훌륭한 사람들에게 자신들을 너무 위험에 노출시키지 말도록 설득하는 것이 필요할 때도 있다." 주는 우리의 몸을 위하여 오셨다." 그러기에 우리도 우리의 몸을 잘 간수해야 한다.

2. 그러나 이러한 사랑에서 비롯된 만류 가운데는 결함도 섞여 있었다. 특별히 바울의 동료들에게 이러한 결점이 있었다. 그들은 바울이 성령의 지시에 의하여 이 여행을 착수한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바울이 어떠한 결심으로 전에도 이 같은 반대를 극복해 왔는가를 알고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의 그러한 결점이 우리 모두에게서도 흔히 일어날 수 있다고 하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러한 고난이 멀리 있을 때 혹은 단지 그것에 대해 일반적인 경고만을 받았을 때에는 그 고난을 가볍게 볼 수 있다. 그러나 그 고난이 가까이 다가올 때는 몸을 도사리고 후퇴하고 만다. 그러므로 성경에 이르기를 "이제 이 일이 네게 임하매 네가 답답하여 하고 이 일이 네게 당하매 네가 놀라는구나"(욥 4:5)라고 하였다.

Ⅳ. 바울의 거룩한 용기와 두려움 없는 태도. 그는 그러한 태도로 자기의 결심을 고수했다(13절).

1. 바울의 거룩한 용기와 두려움 없는 태도. 그는 그러한 태도로 자기의 결심을 고수했다(13절).

1. 바울은 그를 설복하려는 사람들을 나무란다. 본문에서 우리는 서로의 사랑이 동기가 또한 분쟁을 대하게 된다. 각자의 서로에 대한 매우 진실되고 강한 애정이 본문에서 서로 맞부딪치고 있다. 그들은 바울을 진정으로 사랑했으므로 그러기에 바울의 결심을 반대했다. 바울 또한 그들을 진심으로 사랑하였다. 그러기에 그의 여행을 반대하는 그들을 꾸짖는다. "너희가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그들은 베드로가 그와 같은 경우를 당했을 때 "주님 그리하지 사모서"라는 말로 그리스도를 만류해서 죄를 범하였듯이 바울을 만류하는 죄를 범하였다. 그들의 그에 대한 눈물의 호소는 "바울의 마음을 상하게 했다."

(1) 그것은 바울에게 있어서 유혹이었다. 그들의 호소는 바울을 동요시켰고 그의 결심을 나약하게 하고 이완되게 하기 시작했다. 그들의 호소는 바울로 하여금 그의 방침을 바꿀까 하는 생각을 하게끔 하였다.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고난을 받도록 정해진 것을 알고 있다. 그러기에 너희는 나를 북돋우고 격려해야 하며, 내게 용기를 줄 수 있는 말을 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희는 너희의 눈물로 나의 마음을 상하게 하고 나를 낙망시키고 있구나. 너희가 어찌하여 이렇게 하는가? 우리 주님께서 우리에게 각자의 십자가를 지라고 말하지 않았느냐? 그런데 너희는 나더러 내 십자가를 피하라고 강요하는 것이냐?"라고 말한다.

(2) 그들의 간곡한 만류는 그에게 괴로움을 주었다. 그는 자신의 양심에 거리낌이 없이 그들을 만족하게 할 수 없었다. 바울은 매우 부드러운 성품의 소유자였다. 그 자신이 눈물의 사람이었고 또한 그의 친구들의 눈물에 대해서도 매우 가 아프게 생각하였다. 그 눈물들은 그에게 강한 영향을 끼쳤다. 그 눈물 때문에 바울은 어떠한 일이라도 그들 말대로 따를 심정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이제 그의 눈물로 호소하는 친구들의 요구를 부인해야만 할 입장이었기에 그들의 눈물은 그의 마음을 상하게 하였다. 그것의 친절은 부담스러운 친절이었으며 그들의 동정은 고통을 주는 동정이었다. 그는 그들의 설복 때문에 괴로워하였으며 그들의 설복은 그의 슬픔에 고통까지 더하였다. 우리의 친구들이 고난에로 부름을 받았을 때 우리는 그들을 위하여 슬퍼하는 것보다 그들을 위로함으로써 그들에게 우리의 사랑을 보여 주어야 한다. 그러나 이 가이사랴의 그리스도인들이 이 사건의 세밀한 진행까지 미리 예측할 수 있었다면 그들은 현재 그토록 무거운 마음으로 받아들인 바울의 고난에 대한 윤곽만의 예고 때문에 그토록 슬퍼하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었다. 오히려 그의 예루살렘에서의 결박은 그들을 위해서는 유익하였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체포되자 그는 그가 지금 있는 곳인 가이사랴로 보내졌다(23:33). 그리고 그곳에서 그는 적어도 2년이나 머물러 있게 되었다(24:27). 그는 죄수로서 잡혀 있기는 하였으나 24장 23절에서 나타나는 바대로 그의 친구들에게 자유로이 갈 수 있었고 그의 친구들도 그에게 올 수 있도록 허용되었다. 그러기에 가이사랴 교회는 더욱 바울과 오래 사귈 수 있게 되었고 바울이 자유로왔을 때 그들이 할 수 있는 이상의 도움을 그가 갇혀 있기 때문에 그에게 줄 수 있었다. 어떤 일이 우리에게 불리하게 진행된다고 생각되어서 우리가 반대하는 일도 우리를 위하여 일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 지배당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를 따르고 두려워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2. 바울은 그러한 모든 만류에도 불구하고 여행을 계속하겠다는 그의 결단을 되풀이하여 말한다. "너희가 어찌하여 우느냐? 나는 나에게 어떠한 고난이 준비되어 있든 그 고난을 당할 각오가 되어 있다. 나는 어떠한 일이 닥치더라도 가기로 확고하게 결정을 내렸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것을 반대한다고 하여도 아무 소용이 없다. 나는 기꺼이 고난을 받으련다. 내가 기꺼이 고난을 받으려는데 너희는 왜 내가 고난을 받으려는 것을 원하지 않는 것이냐? 내가 내 자신을 가장 잘 알고, 또 내 자신의 일을 결정하는 데 가장 정확하지 않겠는가? 만일 예고없이 고난이 닥친다면 그 고난은 정말 견디기 어려운 고난이 될 것이다. 그러한 경우에는 너희가 울 만한 이유가 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고난이 예기되고 있지 않는가! 그러기에 나는 그 고난을 기꺼이 환영한다. 따라서 나의 고난을 너희가 두려운 것으로 여기지 말아야 한다. 나로서는 "이미 각오가 되어 있다" - e`toi,mwj e;cw - 이 말은 전쟁에 참전하는 병사와 같이 "나는 이미 준비가 되어 있다"는 말이다. "나는 고난을 예기하고 있다. 그리고 충분히 고려하고 있다. 그러기에 그것은 나에게 놀라운 일이 될 수 없을 것이다. 나는 사도가 되던 때 이미 내가 얼마나 고통을 당해야만 할 것인가에 대하여 계시를 받았노라"(9:16). "나는 떳떳한 양심과 하나님에 대한 굳은 신뢰와 또한 이 세상과 육신에 대한 거룩한 멸시와 그리스도에 대한 생동력 있는 믿음과 영생에 대한 기꺼운 희망에 의해 나는 그러한 고난을 맞을 각오를 하였다. 나는 우리가 음식을 장만하여 기다리던 친구들을 맞이하듯이 고난을 맞이할 뿐 아니라 그 속에서도 즐거워할 수 있다"고 그는 말한다. 이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들을 주시해야 할 것이다.

(1) 그의 결심이 얼마나 굳건했는가를 생각해 보자. "너희는 내가 예루살렘에서는 속박을 받아야만 할 것을 전해 들었다. 그리고 이 고난을 내가 받는 것이 두려워 나로 하여금 그 고난을 피하게 하려고 한다.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건데 만일 하나님의 뜻이 그러하다면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받을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 그의 뜻이라면 나의 자유뿐 아니라 나의 생명도 잃어버릴 각오를 하고 있다"고 그는 말한다. 우리들에게 닥칠지도 모르는 최악의 경우를 생각하고 하나님의 뜻 안에 온전히 설 수 있도록 대비하는 것이 지혜있는 태도이다.

(2) 무엇이 바울로 하여금 고난과 죽음까지 기꺼이 맞이할 수 있게 하였는가를 살펴 보자. 그것은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해서였다." 인간은 자신의 생명을 위해서는 그가 가진 모든 것을 포기하기도 한다. 그러나 바울은 그리스도의 이름을 섬기고 또 그 이름을 영화롭게 하기 위하여 자신의 생명까지 내놓고자 하였다.

Ⅴ. 바울의 결심에 대한 그의 친구들의 복종(14절).

1. 그들은 훌륭한 사람의 지혜에 복종했다. 그들은 그들이 할 수 있는 데까지는 자신들의 의견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저기 권함을 받지 아니하므로 저희는 저희의 집요한 요구를 그쳤다." 바울은 자신의 마음을 가장 잘 알고 있었고, 그가 어떠한 일을 할 것인가도 알고 있었다. 그러기에 저희는 그 일을 바울이 하고자 하는 대로 맡겼다. 그들은 그가 하고자 하는 일을 비난하지 않았고 그가 경솔하다거나 외고집장이이고 괴퍅스럽고 부정적인 성격의 소유자라는 비난하지도 않았다. 사실 여러 부류의 사람들은 그들이 바라는 대로 상대방이 행동하지 않으면 그를 쉽사리 정죄해 버리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그들은 그러지 않았다. 바울이 그렇게 결심한 데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에게 그 일이 필요하다는 것을 확고히 알게 하시었기 때문이었다. 자신의 문제에 있어서 누구에게도 설득당하기를 원치 않는 사람에게 지나치게 강압하지 않는 것이 예의있는 태도이다.

2. 그들은 선한 하나님의 뜻에 복종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 하고 그쳤노라"고 그들은 말하였다. 그들은 바울의 결정을 고집으로 받아들이지 않았고 바울의 고난을 받으려는 자원하는 마음으로 또한 그가 고난을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생각으로 받아들였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이다"라는 말은 우리의 기도와 행동의 규범이 되어야 할 뿐 아니라 또한 우리로 인내하게 하는 좌우명이 되어야 한다. 그들이 그의 결심대로 따랐다는 것은 다음과 같은 뜻을 보여 준다.

(1) 바울의 결심의 확고함을 보여 준다. 그는 요지부동이었으며, 설복당하지 않았다. 이 사실 속에서 그들은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들은 "바울에게 확고한 신념을 주신 분은 주님이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일에 복종해야 한다"고 말한다. 우리의 친구들이나 사역자들의 마음을 이렇게 또는 저렇게 변경케 하고자 하다가(그들이 우리가 원했던 것과는 전혀 다를 길로 갈 때에) 거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역사를 보고 거기에 복종해야 한다.

(2) 바울이 고난에 대한 도전을 우리에게 보여 준다. 그들은 말한다. "만일 아무런 구출의 길이 없다고 할지라도 주 예수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기 위하여 바울은 그 속박 속으로 뛰어들어갈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막기 위하여 우리로서 할 수 있는 일은 다하였다. 이제 우리는 그 일을 하나님에게 맡기자, 또한 이 일을 그리스도에게 맡기자. 아버지께서 모든 심판을 그리스도께 맡기셨듯이 우리도 우리의 뜻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맡기자." 우리가 고난이 다가오는 것을 볼 때 그리고 그 고난이 특별히 우리들의 사역자들을 침묵시키거나 그 고난이 그들을 우리들로부터 빼앗아 갈 때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라고 우리는 말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하나님은 지혜의 하나님이시므로 어떻게 하면 일이 유익하게 될 수 있는가를 알고 계신다. 그러기에 우리는 "그의 거룩한 뜻을 기꺼이 따라야 한다." "주님의 뜻은 틀림 없이 이루어지고 만다. 거기에는 예외가 없다." 말뿐만 아니라 우리는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게 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의 뜻은 그의 지혜에서 나온 것이요 그리고 그는 모든 일들을 그의 경륜에 따라서 행하시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그로 하여금 우리들에게 또 우리와 관련된 모든 것에 대해 그가 보시기에 좋은 대로 행하시게 하자." 고난이 다가올 때, 주의 뜻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생각은 우리들의 비탄을 감소시킬 것이다. 고난이 다가오는 것을 보았을 때, 주님의 뜻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생각은 우리들의 두려움을 멈추게 할 것이다. 또한 우리는 고난에 대하여 "아멘 뜻대로 이루소서"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21:9 없음.

 

21:10 없음.

 

21:11 없음.

 

21:12 없음.

 

21:13 없음.

 

21:14 없음.

 

21:15

바울의 예루살렘 방문(사도행전 21:15-26)

Ⅰ. 바울의 가이사랴로부터 예루살렘으로의 여행과 그를 수행한 동료들.

1. 그들은 "행장을 준비하였다." 그들의 가방과 짐을 챙겼다. 그들은 마치 가난한 여행자나 군인들처럼 자신의 짐을 직접 운반하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그들은 사실 갈아 입을 의복도 거의 없었다. 즉 Omnia mea mecum porto - 즉 나의 재산은 내 몸둥이 하나이다는 말이 그들에게 적용되었다. 어떤 사람들은 그들이 예루살렘에 있는 가난한 성도들을 위하여 마게도냐와 아가야에서 모금한 돈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만일 그들이 바울로 하여금 다른 길로 가도록 설득했다면 그들은 즐거운 마음으로 그와 동행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가고자 한다고 하여 그들은 "그렇다면 당신 혼자서 가시오"하고 말하지 않았다. 그들은 그리스도가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예루살렘에 가시고자 하실 때 도마가 했던 것같이 "우리도 가서 그와 같이 죽기로 하자"(요 11:16)는 각오로 그를 따랐다. 그들이 바울과 동고동락하려는 결심은 잇대가 다윗과 함께 동고동락하려고 각오한 것과 다름 없었다. 잇대는 "진실로 주 왕께서 어느 곳에 계시든지 무론 생사하고 종도 그곳에 있겠나이다"(삼하 15:21)라고 말하였었다. 바울의 담대함이 그들 역시 담대하게 만들었다.

2. 가이사랴의 제자들 몇 사람이 바울 일행과 함께 동행하였다. 그들이 이같이 훌륭한 바울과 몸 더 같이 있고 싶어서 그와 동행하였는지 혹은 그들이 할 수 있다면 바울에게 봉사할 기회를 얻거나 또는 그가 당할 고난을 방지하거나 적어도 고난 속에 처한 그를 보살피려는 목적으로 그와 동행하였는지는 본문에 나타나지 않았다. 그들은 바울에게 허용된 자유의 시간이 단축되고 있음을 알고 그들은 더욱 바울과 대화할 수 있는 모든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고 노력하였다. 엘리사도 엘리야가 승천할 때가 눈 앞에 다가온 것을 알았을 때 더욱 가까이 그를 따라갔던 것이다.

3. 그들은 예루살렘에 자신의 집을 가지고 있는 정직한 노신사 한 사람을 그들과 함께 데리고 갔다. 그 사람은 기꺼이 바울과 그의 일행들을 자기 집에 유숙시키고자 하였다. 그러므로 본문에 "우리가 구부로 사람, 나손을 데리고 가니(16절) 이는 우리가 그의 집에 유하려 함이라"고 기록되고 있다. 그와 같이 많은 무리의 사람들을 유숙시키고 음식을 대접하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었다. 여관은 상류 계층의 사람들에게 제공되었다. 또한 당시에는 자기 집을 소유하고 있는 사람들이 자기 방을 빌려 주는 것을 꺼림직하게 여기었다. 그러나 나손은 바울과 그의 동료들을 그의 유숙자로 맞이했다. 비록 나손은 장차 바울에게 고난이 닥칠 것이라는 것을 들었고, 또 그러한 위대한 사람들에게도 역시 고난이 올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바울을 맞아드렸다. 이 나손은 "오랜 제자" 곧 "처음부터의 제자"라고 불리우고 있다. 어떤 사람은 그가 그리스도의 칠십인의 제자들 중 한 사람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혹은 오순절 성령의 임한 후 처음 개종한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일 것이라고도 하며, 혹은 구브로에 복음이 전파되었를 때 처음 개종한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13:14). 그거야 어떻든 간에 그가 그리스도인이 된 지 오래 되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예수 그리스도의 오랜 제자가 된다는 것은 영예로운 일이라는 사실을 명심하자. 또한 하나님의 은총에 의하여 오랫 동안 꾸준히 그리스도인의 의무를 다랄 수 있었고 굳건히 신앙에 머물러 있을 수 있었으며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점점 신중해지며 많은 경험을 쌓을 수 있다는 것 역시 영예가 된다는 것을 기억하자. 우리는 이러한 오랜 제자들과 사귀기를 즐겨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들의 많은 연륜이 우리에게 지혜를 가르쳐 줄 것이기 때문이었다.

Ⅱ. 예루살렘에서의 바울에 대한 환영.

1뿐 그곳에 있는 많은 형제들이 "바울을 기꺼이 영접했다"(17절). 그들은 바울이 예루살렘에 왔다는 것을 알고 곧 나손의 집인 그의 숙소로 찾아 와서 그의 무사한 도착을 축하하고 또한 그를 만나게 되어서 기쁘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를 그들의 집으로 초대했다. 그들은 이 같은 저명한 그리스도의 종과 사귈 수 있는 것을 영광으로 여겼다. 스트레소(Streso)는 그들이 그를 환영한 사실을 가르켜 "avsm&enwj avpodecein이라고 한 것은 사실 사도의 가르침에 대한 환영의 말"이었다고 보고 있다(2:14). 즉 그들이 "기꺼이 그의 말을 받았다"는 뜻으로 해석한다. 우리는 만일 바울이 우리들 가운데 있다면 우리는 그를 기꺼이 영접할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만약 그의 가르침을 받아들이기를 우리가 원하지 않는다고 할 때 그를 기꺼이 받아들일지는 의문이다.

2. 그들은 집회소를 찾아가서 거기서 야고보와 교회 장로들을 만나 보았다(18절). 본문은 그 사실을 다음과 같이 전해 준다. "그 이튿날 바울은 야고보에게로 들어갔다. 그는 그의 동료인 우리들도 데리고 갔다. 그것은 우리를 예루살렘 교회에 소개하기 위해서였다." 야고보는 당시에 예루살렘에 거주한 유일한 사도였던 것같이 보인다. 나머지 사도들은 다른 곳에 복음을 전도하기 위하여 각각 흩어져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예루살렘에 한 명의 사도를 상주시키고자 계획하였다. 예루살렘에 거하는 사도는 정해진 것은 아니었고 경우에 따라서 교체되었다. 그들이 예루살렘에 사도 한 명을 상주시킨 이유는 예루살렘이 각처에서 사람들이 모여드는 곳이었기 때문이었다. 당시에는 야고보가 그 곳에 있었다. 그리고 여러 상시 교회의 사역자들인 장로들도 말씀을 전하고 교회를 치리하기 위하여 그곳에 모여 있었다. 바울은 그들 모두에게 인사했다. 그리고 그들에게 경의를 표시하고 그들의 안부를 물었으며 그들과 우정의 교제를 나누었다. 바울이 "그들에게 문안했다." 즉 다시 말하면 바울은 그들의 건강과 행복을 기원하고 하나님께 그들을 축복해 주시기를 간구했다. 문안의 의의는 사실 상대방의 구원을 기구하는 데 있다. 상호간의 문안이나 기원은 그리스도인들이 마땅히 갖추어야 하는 예의이다. 이러한 문안은 그들 상호간의 애정과 하나님에 대한 그들의 일치된 사랑을 표시하는 것이다.

Ⅲ. 그들에게 바울은 자신이 이방인들 가운데서 행한 정도 사업에 대하여 설명하였고, 그들은 그것을 만족하게 여겼다.

1. 바울은 그가 갔던 여러 지방에서의 복음의 성공에 대하여 그들에게 이야기했다. 바울은 그들이 그리스도의 왕국이 확장되어가는 것을 듣는 것을 매우 기꺼워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바울은 "하나님이 자기의 봉사로 말미암아 이방 가운데서 하신 일을 낱낱이 고하였다"(19절). 바울이 얼마나 겸손하게 말하였는가를 생각해 보자. 그는 그가 어떠한 일을 하였는가를 말하지 않고(그는 도구에 지나지 않았다). 그의 섬김을 통하여 하나님이 어떠한 일을 하셨는가를 말하였다. 그는 그 일을 한 것은 "내가 아니고, 나와 함께 하였던 하나님의 은총이라"고 말한다. 그는 심고 물을 주었다. 그러나 성장하게 한 것은 하나님이었다. 그는 이 모든 일을 상세하게 그들에게 전했다. 그 이유는 그가 거둔 복음의 성공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가 더욱 분명하게 나타나게 하기 위해서였다. 이같이 다윗도 다른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그의 영혼을 위하여 어떠한 일을 행하셨는가를 말하였다(시 66:16). 바울이 본문에서 그의 손을 통해서 하나님이 어떻게 역사하셨는가를 말하였듯이 말이다. 이 둘은 다같이 그들의 친구들이 이러한 얘기를 듣고 함께 하나님께 감사하게 하기 위해 그러한 말을 하였다.

2. 그들은 그것을 듣고 하나님을 찬양했다(20절). 그러므로 본문에 "너희가 듣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고 하였다. 바울은 이 모든 일을 이룬 것이 하나님이라고 말하였다. 또 그들은 하나님에게 모든 찬양을 돌리었다. 그들은 바울에게 찬사를 돌리지 않았다. 그들은 그의 주님께서 그에게 "잘하였도다. 착하고 신실한 종아"라고 말씀하시도록 주님께 양보하였다. 다만 그들은 그의 은혜가 이방인들에게까지 확신된 데 대하여 하나님의 은혜에 영광을 돌렸다. 죄인들의 회개는 천사들이 그것을 기뻐하고 찬양하듯 우리들의 기쁨과 찬양도 되어야만 한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하나님은 바울을 어느 누구보다 광범위하게 쓰심으로 그를 영예롭게 하셨다. 그럼에도 그들은 바울을 시기하지 않았다. 또한 그 평판이 높아가는 것도 질투하지 않았다. 그와는 정반대로 이로 인하여 이로 인해 그들은 "주를 찬양했다." 그리고 그들은 바울이 성공한 일에 대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 이외에 그가 일을 좀더 즐겁게 계속할 수 있도록 그를 칭찬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찬양을 받는 것이 곧 바울의 기쁨이었기 때문이었다.

Ⅳ. 예루살렘 교회의 야고보와 장로들의 바울에 대한 요청 또는 충고. 그들은 그에게 그가 제의법을 지킨다는 것을 과시하고 또한 성전에게 공개적으로 나타나 희생 재물을 바침으로 믿는 유대인들을 만족시켜 주기를 요구하였다. 제의 자체가 되가 되는 것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제의법은 이방인 개종자들에게는 결코 강요될 수 없는 것이었지만(거짓 교사들은 그것을 강요했고 그렇게 함으로써 복음을 파괴하려고 하였다) 그 법을 준수하는 분위기 가운데서 성장한 사람들에게는 만일 그들이 그것을 통하여 의롭게 되기를 기대하고 있지는 않는다면 그것을 지키는 것이 죄가 될 수는 없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율법은 죽은 것이었으나 아직 매장되지는 않았다. 또한 율법은 죽었으나 남에게 치명적인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그러한 행위가 죄가 되지 않으므로 바울이 그것에 순응하는 것이 신중한 처사라고 생각하였다. 여기서 그들이 바울에게 한 조언은 그에게 권위에 의해 강요된 것이 아니라 그에 대한 사랑에 의해 주어진 것이었다.

1. 그들은 바울이 그곳에 있는 많은 유대 개종자들을 고려해 주기를 바랐다. 이에 대하여 본문은 "형제여 그대도 보는 바에 유대인 중에 믿는 자 수만 명이 있으니"라고 전해 주고 있다. 그들은 바울을 형제라고 불렀다. 그것은 그들이 바울을 복음 사역에 있어서 그들과 함께 위임받은 자로서 간주했기 때문이었다. 비록 그들은 할례를 받은 자들의 사도였고 바울은 이방인 사도였으며, 또한 그들은 율법 준봉자였고 바울은 율법 준봉자가 아니었지만 그들은 서로 형제로 여기고 있었다. 그들은 "당신이 이제 우리 회중과 함께 저러기 지내게 되었으니 그들의 수효가 얼마나 되는지 보아야 한다. 그들은 수만 명이나 된다"고 그에게 말하였다. 본문은 우리에게 유대인이 수천 명이 아니라 수만 명 개종했다고 전해 주고 있다. 복음에 대해 가장 편견이 심했던 유대인들 가운데서도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들이 많이 있었던 것이다. 이 사실은 하나님의 은총이 사탄의 가장 강한 요새까지 파괴시켜 버릴 수 있음을 나타낸다. 초기의 신도의 수는 백 이십 명에 불과했으나 이제는 수만 명에 달라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어느 누구도 작은 출발을 경멸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비록 처음 시작은 조그마하지만 하나님이 마지막에는 엄청나게 크게 증가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이로써 하나님이 그의 백성 유대인들을 완전히 버리지 않았다는 사실이 밝혀진다. 왜냐하면 그들 가운데도 남은 자가 있었고 선택된 자가 있었기 때문이었다(롬 11:1, 5, 7). 그들은 "믿는 자 수만 명이 있다"고 하였다. 바울이 이방인 가운데서 개종자들이 많았음을 그들에게 설명할 때 그들에게 기쁨이 되었듯이 유대인들 가운데서 거둔 복음의 성공에 대한 그들의 설명은 바울에게 기쁨이 되었다. 왜냐하면 바울이 유대인들을 위하여 하나님께 간절히 바라고 기도한 것은 "그들도 구원을 받을 수 있게 하여달라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2. 그들은 믿음을 갖게 된 유대인들이 아직도 지니고 있는 연약함을 바울에게 알렸다. 그들은 그때까지 거기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본문에 보면 그들 모두 "다 율법에 열심있는 자"라고 하였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진정한 메시야로서 믿었다. 또한 그들은 그의 의(義)를 의지하였고 그의 통치에 복종했다. 그러나 그들은 또한 모세의 율법이 하나님에게서 비롯된 것을 알았고 또한 율법의 제도에 청종함으로 주어지는 영적인 유익이 있음도 알았다. 그러므로 그들은 율법과 결별하거나 차츰 율법과 냉각된 관계를 가져야 될 것으로 생각지 아니하였다. 아마도 그들은 그리스도께서도 "율법 아래서 태어 나셨으며" 또 율법을 지키셨다는 것을 그들이 계속 율법을 지켜야 할 이유라고 여긴 것 같다(사실 그리스도가 율법을 지키신 것은 율법에서부터 우리를 놓여나게 하시기 위해서였던 것이다). 사실 본체가 오셨는데도 그림자를 사랑한다는 것과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자유롭게 하셨는데도 구속의 멍에에 그들의 몸을 들이대고 있는 것은 그들의 커다란 약점이었고 실수였다.

(1) 그러나 우리들이 그들을 통하여 배울 것이 있다. 교육과 관습의 힘, 특히 제의법이 지닌 힘이 대단하다는 사실이다.

(2) 교육과 관습이 지닌 힘을 고려하여 그러한 사람들을 관대하게 대해야 한다는 점이다. 즉 이 믿게 된 유대인들을 배척하거나 그리스도인이 아니라고 부인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그들이 율법을 위하고 뿐만 아니라 그것에 열심이긴 하였지만 그것은 그들의 관습일 뿐으로 그들이 그 율법을 다른 사람들에게 강요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의 율법에 대한 열심은 선의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또한 그들이 그것 안에서 성장했고 그것을 지키는 자들 가운데서 살아 왔다는 것을 생각할 때 그것은 납득될 수 있는 것이었다.

3. 그들은 바울에게 율법에 대해 이토록 열심인 유대인들이 그에게 악감정을 품을 수 있다는 것을 이해시켰다(21절). 바울 자신은 그리스도의 어떤 종들보다 충실한 종이었지만 그럼에도 그리스도에게 속한 모든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을 수는 없었다. 그들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들은 당신이 이방인들에게 율법을 준수하지 말라고 가르쳤다는 것과 뿐만 아니라 이방에 있는 유대인들을 가르치되 모세를 배반하고 아들들에게 할례를 하지 말고 또 규모를 지키지 말라고 하였다는 것을 저희가 들었다(그들은 이러한 얘기만을 듣고 당신에 대한 선입견을 지니게 되었다). 사실 그들은 이러한 규례를 성전에서 멀리 떨어진 이방 나라에 있다고 할지라도 그들이 준수해야만 할 것으로 여겨 왔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당신이 교회의 절기나 금식을 준수하지 못하게 하였으며 성귀함(聖句函)도 지니지 못하게 하였고 또 불결한 음식을 금하지 않아도 된다고 가르친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하였다. 이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고찰하여 보자.

(1) 바울이 모세의 율법의 폐기를 설교하였고, 율법에 의하여 의롭게 될 수 없으므로 우리가 더 이상 율법을 준행하는 일에 매어 있을 필요는 없다고 그들에게 가르친 것은 사실이었다.

(2) 그러나 바울이 그들에게 모세를 배반하라고 가르쳤다는 것은 거짓이었다. 왜냐하면 바울이 전한 신앙은 율법을 파괴하려는 것이 아니라 완성시키려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바울은(율법을 지킴으로써) 그리스도와 회개와 신앙을 전했다. 이것들을 위하여 율법은 대단히 유익한 것이라고 그는 말하였다. 그러나 바울에게 가르침을 받은 이방인들 가운데 있던 유대인들은 바울을 진정으로 이해하지 못하였다. 또한 "모세는 그들을 그리스도에게로 이끄는 몽학 선생"이라는 그의 가르침을 진심으로 받아들이려 하지도 않았다. 또한 믿는 유대인들까지도 바울이 모세의 적이라는 관념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아마도 그들은 믿지 않는 유대인들을 대단히 의식하였던 것 같은데 그런 이유들로 그들도 바울에 대하여 매우 격분하고 있었던 것이다. 여기 참석하고 있던 유대인들의 사역자들과 장로들은 그를 사랑하였고 존경하였으며, 그가 행한 일을 인정하고 또한 그를 형제라고 불렀다. 그러나 일반 신도들로 바울에 대하여 쉽사리 호의를 가지게 하기는 매우 힘들었다. 왜냐하면 판단력이 모자란 사람들이 더 비판적이기 마련이며, 머리가 나쁜 사람들이 쉽게 흥분하는 법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바울의 가르침을 그들이 받아들여야 할 것으로 그래서 식별할 수 없었다. 이러한 무지 때문에 그들은 도매로 바울의 가르침를 정죄하였던 것이다.

4. 그러므로 그들은 바울이 어떤 고적인 행동을 통하여 그가 예루살렘에 왔다는 것과 그에 대한 비난이 허위라는 사실을 보여 주고 또 자신이 율법이 행하는 것을 보여 주므로 그가 사람들에게 모세를 버리라고 가르치지도 않았으며, 유대 교회의 관습을 파괴하지도 않았다는 사실을 보여 주기를 바랐다.

(1) 그들은 이러한 종류의 어떤 조치가 취해져야만 한다고 결론지었다. 그들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러면 어찌할꼬? 저희가 필연 그대가 온 것을 들으리니, 무슨 조치를 취할 것인가?" 유명한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그들의 출입(出入)이 선의에서든 악의에서이든 주목되고 또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려야 한다는 것은 불편스러운 일이다. 그들은 계속해서 이렇게 말한다. "그들이 당신이 온 사실을 들으면 틀림 없이 함께 몰려 올 것이다(역주:한글 개역과는 다소 틀림). 그들은 우리들이 그들 모두를 불러다 당신을 형제로서 우리 가운데서 말씀 전하는 것을 그들이 허용해야 할 것인지를 조언 받고자 기대하고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 스스로가 자진해서 함께 모여와 당신의 말을 듣기를 기대하고 있을 것이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이제 바울이 사람들에게 모세를 배신하라고 가르치지 않았다는 것을 그들에게 알리므로 그들을 만족시킬 어떤 조치가 취해져야 했던 것이다. 그곳의 야고보와 또한 장로들은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에 그러한 조치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였다.

[1] 바울 자신을 위해서였다. 즉 그의 오명을 제거하고 그 같이 훌륭한 인물이 어떠한 오해를 받게 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 또한 그렇게 유용한 사람이 그의 유능함에 장애가 되는 그러한 불리한 상황 아래서 수고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다.

[2] 믿는 유대인들을 위해서였다. 즉 그들이 그렇게 훌륭한 사람에 대해 계속 편견을 지니지 않게 하기 위하여 또한 그들의 편견에 의해서 그의 사역을 통해 그들이 얻을 수 있는 이익을 상실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다.

[3] 그들 자신을 위해서였다. 그들은 바울을 보호하는 것이 그들의 의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의 책임 아래 있는 자들이 우를 범하므로 그들 자신이 비난을 듣지 않기 위해서였다.

(2) 그들은 바울이 자신이 결백을 입증할 수 있는 좋은 안을 제출한다. 그들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우리의 말하는 이대로 하라. 이러한 경우에는 우리들의 충고를 들으라. 네 사람이 우리에게 있는데 그들은 믿음을 가지게 된 유대인들로서 우리 교회의 교인이다. 그리고 그들은 서원한 사람 곧 일정 기간 동안 나실인으로 서원을 한 자들이었다. 이제 그들의 서원 기간이 만료가 되었다(23절). 그러기에 그들은 율법에 따라서 제물을 드려야 한다. 그 때에 그들은 그들의 봉헌한 머리를 깎고 번제물로 수양 하나와 속죄 제물로 어린 암양 하나와 화목 제물로 수양 하나와 기타 그들에게 정해진 제물들을 드리게 될 것이다(민 6:13-20). 이러한 예식은 서약의 동시에 만료된 여러 사람들이 함께 행하여 왔다. 이같이 함께 하는 이유는 예식을 신속히 진행시키기 위해서 또는 예식을 보다 위엄있게 하기 위해서인 것이다. 그런데 바울 당신도 최근에까지 율법을 좇아 나실인의 서원을 하였고 또 그 기간이 만료된 것을 나타내기 위하여 성전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거하는 사람들의 관습에 따라 겐그레아에서 머리를 밀지 않았는가(18:18). 그러니 이제 당신이 조금 더 양보하여 이 네 사람이 나실인의 희생 제물을 드리는 데 같이 참석함이 어떻겠는가? 율법에 따라 그들과 함께 정결 예식을 행하라. 그들과 함께 예식에 참여할 뿐만 아니라 이 엄숙한 예식을 위하여 그들이 희생 제물을 사는 비용을 담당하고 함께 희생 제사에 참석하라"고 말한다. 그들은 이 일이 비난자들의 입을 효과적으로 닫게 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또한 모든 사람들이 바울에 관한 보고가 거짓이었음을 확신하게 될 것이고, 바울은 얘기되는 것과는 같지 않은 사람으로 유대인들에게 모세를 반대하라고 가르치지도 않았다는 사실을 확신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뿐만 아니라 바울 자신이 철저한 유대인으로 규모있게 행하며 율법을 지키는 사람이라고 사람들이 확신하게 될 것이고 그러면 모든 일들이 잘 될 것이라고 그들은 생각하였다.

5. 그들은 그가 그렇게 한다고 해서 그것이 이방인 개종자들을 위하여 최근에 만들어진 교령에 결코 위배되지 않으며 또한 그들이 이것을 계기로 이방인들에게 허용된 자유를 조금이라도 훼손하고자 기도하지 않을 것이라고 단언한다(25절). 그러므로 그들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주를 믿는 이방인들에게는 그러한 어떠한 것도 준수하지 말라고 결의하여 편지하였다. 그리고 우리는 그 결의를 굳게 지킬 것이다. 우리는 결코 그들을 제의법에 의하여 얽어 매지 않을 것이며 다만 그들이 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은 것과 운행을 피할 것만을 지켜 주기를 바랄 뿐이다. 그러므로 이 일이 계기가 되어 그들이 유대인의 희생제나 결례에 얽매이지 않을 것이며 또한 그들의 어떠한 예식이나 의식에도 매이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들은 바울이 개종한 이방인들의 자유를 지키기 위하여 얼마나 열성적인가를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특별히 그들의 결의를 지킬 것을 선언한 것이다. 이같이 그들의 제의는 신중을 기해 제출된 것이었다.

Ⅴ. 바울은 그들의 제안에 동조한다. 바울은 기꺼이 이 문제에 따르기로 수긍함으로써 그들을 만족시켰다. 비록 그가 예루살렘으로 가지 말라고 하는 설득에는 굴복하지 않았지만 그가 그곳에 도착하자 그곳에 있는 자들과 같이 행해 달라는 부탁은 수락하였다(26절). 그들이 충고한 대로 "바울은 이 사람들을 데리고 이튿날 저희와 함께 결례를 행하였다." 그리고 그가 자신을 변론하면서 말했듯이 "모임도 없고 소동도 없이"(24:18) "성전에 들어갔다." 그는 제사장들에게 결례의 날이 만료된 것을 알리고 제사장들이 각자에게 희생 제물을 드릴 시간을 정해 주기를 바라서 그곳에 온 열렬한 유대인들과 같이 조용히 성전에 들어갔다. 아인스월드(Ainsworth)는 민수기 6장 18절에 대한 마모니대스(Maimonides. 역주:이 사람은 유대인 철학자로 12세기에 활동한 인물이다)의 글을 인용하고 있는데 그 내용은 본문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만일 어떤 사람이 나에게는 나실인의 의무의 절반만을 이행하게 해달라든가 또는 나실인으로서의 서원이 끝난 후 머리털을 미는 것을 절반만 밀겠다고 하면 그는 나실인이 바칠 제물의 절반만을 가져다가 그 제물을 드릴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제 바울은 나실인의 결례를 행하였다. 그는 그가 서원했던 대로 나실인의 희생물을 봉헌했다. 어떤 사람은 바울이 나실인의 율례를 철저히 이행하여 성전에서 일주일 동안 금식 기도를 한 후 제물을 드리고자 계획하고 있었고 바로 이 사실을 알리기 위해 그가 제사장에게 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제 우리가 생각해 볼 문제는 야고보와 장로들이 바울에게 한 이 충고가 과연 정당한 것인지와 또는 바울이 그것을 받아들인 것이 과연 잘한 것인지를 살펴 보자.

1. 어떤 사람들은 이번의 바울의 처사는 잘못된 것이라고 비난했다. 그가 이같이 함으로 유대인들을 제의법에 더욱 집착하게 만들었고 한편 그들을 자유롭게 한 그리스도의 자유 위에 굳건히 서 있었던 사람들을 실망시켰다고 본다. 이같이 주장하는 사람들은 야고보와 예루살렘 교회의 장로들은 자신들이 유대인 개종자들의 이러한 잘못을 묵인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지 못하여, 그들은 바울을 감언이설로 현혹하여 개종한 유대인들의 잘못된 행위에 동조하게 하였다고 생각한다. 또한 이들은 야고보와 그곳 장로들이 바울에게 믿는 유대인들이 율법에 대하여 얼마나 열성적인가를 말하고 하나님께서 그렇게 놀라운 은사를 부여해 주신 바울에게 이들 믿는 유대인들이 범하는 잘못을 깨우쳐 주고 또한 그들이 그리스도와 결혼함으로 율법에서 자유롭게 되었다는 것을 수고스럽지만 깨우쳐 달라고 간청하는 것이 옳은 처사였다고 생각한다(롬 7:4). 그러나 그들이 바울에게 강요하여 유대인들의 제의를 따르게 해서 오히려 이들 유대인들의 잘못에 타당성을 부여한 것은 하나님은 은혜에서 나온 처사이기 보다 인간의 지혜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여긴다. 확실히 바울은 그들이 그에게 가르쳐 준 것보다 스스로 어떻게 해야할지 더 잘 알고 있었을 것이라고 이들은 생각한다.

2.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그 충고는 신중하고 유익한 것이었으며 바울이 그들의 제안을 수락한 것은 그러한 상황에 있어서는 충분히 정당화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사실 "유대인들에게는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을 얻고자 함이다"(고전 9:20)라는 것이 바울이 공언한 그의 생활 좌우명이었다. 바울은 유대인들을 만족시키기 위하여 디모데에게 할례를 하였다. 비록 바울이 일관되게 제의법을 준수하지는 않았지만 선을 행하기 위한 기회를 얻기 위해서 그리고 또한 그가 융통성이 있는가를 보여 주기 위하여, 바울은 가끔 성전에 가서 희생제에 참석하기도 하였다. 신앙을 훼손시키는 자들은 저지되어야 하지만 믿음이 연약한 사람들에게는 관용을 베풀어야 한다. 바울의 저들에 대한 동조는 그에게 오히려 나쁜 결과를 가져다 주었음은 사실이다. 왜냐하면 바울이 유대인들을 격분시키지 않고 진정시키기를 바라서 행한 행위가 오히려 그들을 격분시키고 그를 고난에 처하게 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어려움을 당했다고 해서 그의 행위를 잘못되었다고 보는 것은 충분한 이유가 못 된다. 바울은 잘 처신하였으나 그럼에도 그 때문에 고난을 받은 것이다. 그러나 지혜의 하나님이 그들로 바울에게 조언하게 하고 또 바울을 그 조언에 따르게 하시므로 인간이 의도한 것보다 더 좋은 목적을 위해 쓰시고자 섭리하신 것으로 여겨진다. 왜냐하면 그들의 율법에 대한 열성으로 믿지 않는 유대인들에게 기독교에 대하여 좋게 보이고자 한 것이, 믿는 유대인들이 보는 앞에서 믿지 않는 유대인들이 바울을 야만스럽게 대하는 것을 보고 제의법으로부터 더 멀어지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같이 직접 보고 느끼는 것이 확실한 변론이나 감동적인 강론보다 더 설득력이 있는 것이었다. 그들은 사람들을 기쁘게 하려는 생각이 얼마나 헛되며 그것은 오직 기독교에 해를 끼치는 것밖에는 아무런 유익도 없음을 보았다. 비열한 동조보다는 고결함과 굳굳함이 우리를 더욱 잘 지켜 줄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야고보와 장로들이 바울에게 당할 고난이 클 것을 생각하여 그에게 조인을 준 것이 오히려 바울을 시련 속으로 몰아 넣은 것을 교훈삼아 우리는 우리의 주변 사람에게 그들의 심정과는 반대되는 어떤 의견을 강요해서는 안 된다는 경고로 삼아야 할 것이다.

 

21:16 없음.

 

21:17 없음.

 

21:18 없음.

 

21:19 없음.

 

21:20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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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26 없음.

 

21:27

예루살렘에서의 폭동(사도행전 21:27-40)

그리고 본서는 그의 체포의 결과를 우리에게 전해 주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체포된 후에 바울은 한 법정에서 다른 법정으로 옮겨지든가 또는 이 감옥, 저 감옥으로 옮겨진 후 거기 방임되어 있던가 하고 최종 재판을 받거나 보석으로 풀려나지 않은 채 본서는 끝나고 말기 때문이다. 고난이 시작되는 것을 처음 접할 때 우리는 그것이 얼마나 오래 계속될 것인가 혹은 어떻게 결말이 날는지 알지 못하는 것이다.

Ⅰ. 바울의 체포와 투옥.

1. 그는 성전 안에서 붙잡혔다. 그 날은 바울의 결례의 날로써 거기서 그는 경건한 결례 예식에 참여하고 있었다(27절). 이전에는 바울은 성전에서 잘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오랫 동안 해외를 여행하였기 때문에 이제는 그곳 사람들에게 낯선 사람이 되었다. 그러기에 "그 이레가 거의 찰 때까지" 바울에 대하여 악감정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 의하여 그는 발각되지 않았었다. 성전은 성역이므로 그는 보호를 받는 거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바울은 성전 안에서 그가 드리는 희생물에다 그의 섞기를 바라는 자들에 의하여 무력으로 체포되었다. 사실 바울은 주님께서 성전을 떠나신 이후 성전을 가장 빛내 주는 사람으로서 환영되어져야만 했던 것이었다. 이들 바울을 증오한 자들은 누구보다 성전에 대하여 열심있는 척하였지만 이같이 그들은 성전에서 바울을 체포하는 짓을 통해 스스로 성전을 더럽히는 일을 자행하였다. 이같이 교회는 다른 사람 아닌 로마 교회의 교권 집행자들에 이하여 교회의 영예와 유익을 위한다는 미명 아래 더럽혀지는 것이다.

2. 바울을 고발한 사람들은 예루살렘의 유대인들이 아니라 아시아에 살고 있는 유대인들이었다. 그들은 흩어진 유대인들로서 바울을 가장 잘 알고 있었고 또 바울을 누구보다 증오하던 자들이었다. 그들은 그들 스스로 예루살렘 성전에서 예배 드리기 위해 예루살렘에 오는 일은 좀처럼 드물었다. 그들은 그들의 사적인 이익을 위하여 고의적으로 예루살렘 성전에서 먼 곳에 살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성전을 위하여는 가장 열심있는 척하였다. 그들은 그들의 성전에 대한 평상시의 태만을 그것으로 보상하려는 것처럼 행동하였다.

3. 그들이 사용한 방법. 그들은 폭도들을 일으켜 그들로 바울에게 대항하도록 선동하였다. 그들은 대제사장에게 고소하지도 않았으며, 도시의 행정관에게도 고소하지 않았다(아마 그들은 그러한 사람들로부터 지지를 받지 못할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들은 다만 "모든 무리를 충동하였다." 이들 무리들은 그 어느 때 보다도 선동되기 쉽고 또한 폭발하여 반드시 난동을 부리기 쉬운 상태에 있었다. 이성이 결핍되어 주로 감정에 의해 지배되는 자들은 그리스도나 기독교에 대항하는 일에 이용되는 데 가장 적합한 자들인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유대인 박해자들을 사악한 자들이라고 기술하였을 뿐 아니라, 어리석고 몰지각한 자들이라고 서술하였다.

4. 이들 선동자들이 바울을 향해 소요를 부리도록 백성들을 선동한 말은 대중의 귀를 솔깃하게 하는 말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말은 매우 거짓되고 부당한 것이었다. 그들은 "이스라엘 사람들아 도우라! 너희가 만일 진정한 이스라엘 백성이라면 순수한 유대인의 혈통으로 태어났다면 그리고 너희 교회와 너희 나라를 위하여 관심을 가지고 있다면 이제야말로 너희의 충정을 과시할 때가 온 것이다. 자 여기 우리 민족과 교회에 공통적으로 해로운 자를 체포하여 여러분의 충정을 나타내라"고 외쳤다. 그들은 마치 "도적을 추격하듯이 그를 향하여 부르짖었고"(욥 30:5), 또는 미친 개처럼 소리쳤다. 기독교의 적들은 그들이 기독교가 나쁜 것임을 입증할 수 없을 때는 옳고 그른 것은 불문에 붙이고 기독교에 오명을 뒤집어 싸우려고 광분하며 또한 격분과 발악을 통하여 그것을 전복시키려고 한다는 것을 기억하라. 사실 그들이 이스라엘 사람들이라면 그들은 마땅히 "그의 민족 이스라엘을 영화롭게 하신 그리스도"를 전하는 바울을 도와야 했었다. 그러나 선동적인 분위기가 그들로 이스라엘 사람답게 행동할 수 있도록 생각할 수 있는 여유를 허락하지 않았다. 오직 그들은 바울을 대적하는 자들의 편만을 도왔다. 그들의 현재의 외침은 "도둑아 멈추어라." 혹은 아달리아의 "배신자야, 배신자야" 하는 부르짖음과 같았다. 정의가 결핍된 곳에서는 소요만이 일어날 뿐이다.

5. 그들은 바울이 해로운 가르침을 전파하고 악한 행실을 자행하였다고 고발하고 그의 가르침과 행위는 모세의 의식을 거스르는 것이라고 고소한다.

(1) 그들은 바울이 나쁜 가르침을 가르쳤다고 말한다. 그들은 바울 자신이 타락한 생각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그들에게 표출하고 공표하였다고 고소한다. 그들은 그가 이곳 예루살렘에서는 그러한 행동을 하지 않았지만 다른 곳에서는 어디서나 이같은 교훈을 모든 사람들에게 전하였다고 고소한다. 그들이 그에게 죄를 씌우는 방법은 교묘하였다. 그들은 바울이 순회 전도자이므로 그의 해로운 가르침도 널리 전파된다고 하였다. 그들은 "그가 있는 힘을 다하여 유대인들과 율법과 성전을 저주하고 그들의 믿는 종교를 이단적인 것이라고 전파하며 다닌다"고 말하였다.

[1] 그들은 바울이 유대인을 저주하였다고 비난한다. 사실 바울은 유대인들이나 이방인들이나 하나님 앞에서는 동등하다는 것과 "할례받는 사람이 할례받지 않은 사람들보다 이로울 것은 없다는 것을" 가르쳤다. 그는 믿지 않는 유대인들에게 대하여는 그들이 벌을 받을 것이라고 가르쳤다. 그런데 그들은 그가 믿지 않는 유대인들에 대하여 한 말을 온 유대 민족을 적대하는 발언으로 해석하였다. 그들의 태도는 마치 믿지 않는 유대인들이 곧 전 유대인을 대변한다는 식이었다. 그러므로 "너희만 참으로 사람이로구나. 너희가 죽으면 지혜도 죽겠구나"(욥 12:2)라고 한 욥의 친구들에 대한 비난은 이들에게도 적용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믿지 않는 자들은 추방해 버리시지만 "그의 백성들을 추방하지 않으시는"분이신 것이다(롬 11:1). 이들 믿지 않는 유대인들은 Lo-ammi - 즉 그의 백성이 아니었다(호 1:9). 그럼에도 그들은 그의 유일한 자손인 체 가장하고 있었다. 일반적으로 교회의 이름을 위하여 가장 열성적인 것처럼 보이는 자들이 사실은 오직 이름만 걸고 있는 교인들일 경우가 허다하다.

[2] 그들은 바울이 율법을 정죄한다고 비난한다. 그들은 바울의 복음은 율법의 목적이요 완성이라는 사람들에 대한 가르침을 율법을 거스르는 것으로 해석하였다. 그러나 오히려 그의 가르침은 율법을 폐하는 것이 아니라 세우는 것이었다(롬 3:31).

[3] 그들은 그가 성전을 저주한다고 비난하였다. 그들은 바울이 사람들에게 어느 곳에서나 기도하라고 가르친 것과 그의 주님이 예언했던 유대 민족과 예루살렘, 그리고 성전의 파멸을 바울이 때때로 언급한 것을 그가 성전에 대하여 적대적인 행동을 한 것으로 해석하였다. 바울 자신이 전에는 이 "거룩한 곳을 적대하는 말을 한다"고 하여 스데반을 박해하고 처형하는 일에 앞장 섰었다. 그러나 이제 꼭 같은 이유로 해서 바울 자신이 고소를 당하게 된 것이다. 당시에는 박해의 도구 노릇을 하던 그가 이제는 유대인들의 분노와 저주의 표적으로 세워진 것이다.

(2) 그들은 바울이 나쁜 행실을 자행하였다고 고발한다. 이 거룩한 장소에 대하여 사람들에게 악평을 하였다는 그들의 고소를 더욱 확고한 것이 되게 하기 위하여 그들은 바울 자신이 성전을 더럽혔다고 그에게 뒤집어 씌웠다. 또한 그들은 그가 공개적인 행동을 통하여 성전에 대한 그의 멸시를 남들에게도 보이고 또 그들로 그의 행동을 따르게 하고자 의도하였다고 고소하였다. 또한 그들은 그가 "성전" 즉 할례를 받지 않은 사람들은 어느 누구도 어떠한 구실에 의해서도 들어 올 수 없는 유대인의 뜰로 "이방인을 데리고 들어갔다"고 비난하였다. 유대인의 끌로 들어가는 문에는 헬라어와 라틴어로 "이방인은 여기 들어올 수 없음. 만약 들어오는 경우는 엄벌에 처함"이라는 경고가 쓰여져 있었다(Jowsph, Antiq, lib, xv Cap. 14). 바울 자신은 유대인이었기에 유대인의 뜰에 들어갈 권리를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그의 봉헌에 함께 수종들고 있는 사람들이 없음을 알았다. 그러므로 그들은 이방인인 에베소 사람 드로비모를 그의 봉헌의 수종자라고 넘겨 짚었다. 사실 그들은 도로비모가 유대인의 뜰에 있는 것을 보지 못하였다. 다만 그들은 성내에서 그가 바울과 함께 있는 것을 보았을 뿐이었다. 그들은 바울이 성내에서 드로비모가 바울과 함께 있는 것만을 보고 바울과 함께 유대인의 뜰까지 들어간 것이라고 믿었다. 그들은 성 안에서 드로비모가 그와 함께 있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그것을 근거로 그들은 바울이 그를 데리고 같이 성전 안에 들어갔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전적으로 거짓이었다. 다음과 같은 사실들을 살펴 보자.

[1] 순진함만으로는 중상 모략과 거짓 비난을 막아 낼 수 없다는 점이다. 정직하게 처신하고, 규칙에 따라서 행동한 사람들에게 그들이 전혀 알지도 못하고 결코 생각해 보지도 않았던 고소가 주어지는 것은 새삼스러운 사실은 아니다.

[2] "악인은 함정을 파고" 그들이 본문에서 그리하여 것과 같이, 그들의 거짓된 고소의 증거물을 찾는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성내에서 한 이방인이 바울과 함께 있는 것을 보고 그가 성전 안에서도 바울과 함께 있었을 것이라고 추론하였다. 그들의 이러한 태도는 불합리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악한 사람들은 부당하고 근거없는 추론에 의하여 "땅 위에서 가장 뛰어난 사람"에게 가장 야만적인 행위를 한 자신들을 정당화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3] 악의에 가득 찬 사람들은 현명하고 선한 사람들이 그들에게 은혜를 베풀며 또 그들을 달래고자 하는 의도에서 행한 일을 오히려 역용하여 선량한 사람들을 해하려 하는 것은 흔히 볼 수 있는 일이다. 바울은 성전에 가는 행위를 통하여 자신을 그들에게 잘 보일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런데 그들은 그것을 조건으로 하여 바울을 고소하였다. 만일 바울이 그들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었다면 그들에 의해 그렇게 피해를 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상대방의 선의를 이같이 악용하는 것이야 말로 그들이 참으로 악한 사람임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윗이 "저희가 미워함으로 나의 사랑을 갚았다"고 노래했던 것이다(시 109:4; 69:10).

Ⅱ. 사경에 처한 바울. 그들은 수고롭게 대제사장이나 산헤드린 앞으로 바울을 데리고 가려 하지 않았다. 그것은 우회하는 길일 뿐이었다. 그들은 기소뿐만 아니라 처형까지 모두 일괄하여 부당한 방법으로 절차를 무시함으로써 진행코자 하였다. 그들은 그의 죄를 증명할 수 없었다. 그러기에 바울을 공정한 재판에 붙이려 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바울의 피에 그렇게 탐욕적으로 고갈되어 있었기에 정당한 법의 진행에 의해(그들이 설령 승소할 것을 확신하고 있다고 해도) 그에 대한 고소가 진행되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인간을 귀하게 여기지 않는 그러한 사람들이 하듯이 그들은 즉시 바울을 쳐 죽이겠다고 결정했다.

1. 모든 도시가 소란하게 되었다(30절). 자신들은 비 거의 거룩한 생활을 하지 않으면서도 이 거룩한 장소에 대하여는 강한 존경심을 가지고 있었던 무리들은 성전에서 소요가 일어나는 소리를 듣고 즉시 무장을 하고(마치 그 무기로 자기들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려기나 하듯) 달려 나왔다. "이스라엘 사람들아 도우라" 하는 성전으로부터의 외침을 듣고는 "온 성이 들끓어 나왔다." 그들은 마치 구약에서의 "하나님이여 열방이 주의 기업에 들어와서 주의 성전을 더럽히고 예루살렘의 돌무더기가 되게 하였나이다"(시 79:1)라는 호소가 다시 그들의 귀에 들리기나 한 것처럼 무서운 기세로 달려 나왔다. 그들은 에베소인들이 바울이 아데미 신전에 대하여 적대 행위를 한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 그에게 하였듯이 하나님의 성전을 위하여 그와 같은 열의를 나타냈다. 그 때(19:29) 에베소에서 일어난 정황에 대해서도 본서는 "온 성이 요란하여졌다"고 전해 주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러한 불의한 방법으로 채색된 열심을 통하여 자신이 영광받은 것으로 여기시지 않는다. 또한 겉으로는 그를 위해 행하는 것처럼 하나 실상은 야만적이고 짐승적으로 행동하는 자들의 행위를 통해서 영광 받으시지 않으신다.

2. 그들은 바울을 성전 밖으로 끌어냈다. 그리고 성전 안 뜰과 바깥 뜰 사이의 문을 닫았다. 혹은 그들은 바깥 뜰의 문을 닫았을 것이다. 그들은 바울을 사납게 성전 밖으로 끌고 나왔다.

(1) 그들은 그를 성전에서 끌어내므로 그에 대한 무서운 혐오감을 나타내었다. 그들은 바울을 성전에서 처벌하기에 적합하지 않은 사람으로, 또한 그를 성전에서 예배할 자격이 없는 자로 취급하였고 뿐만 아니라 그를 유대 민족의 한 사람으로서도 간주하지 않았다. 그들은 같이 바울의 헌물이 추악한 것인 양 취급하였다.

(2) 그들은 성전을 존경하는 척했다. 그들은 마치 선한 여호야다가 백부장들에게 아달랴를 "여호와의 전에서는 죽이지 말라"고 하였듯이 그렇게 행동했다(왕하 11:15). 이 악한 인간들의 어리석음이 어떠한 것이었는가 보자. 그들은 바울이 사람들이 마음을 성전에서 떠나게 한다고 하여 정죄하였었다. 그러나 이제 바울이 성전에서 매우 경건하게 예배를 하고 있으니까 그들은 바울을 끌어내 버린 것이다. 성전 관리인들이 문을 닫아버린 이유는 다음 두 이유 중 하나에서였을 것이다.

[1] 그것은 바울이 뒤로 물러나 제단의 뿔을 잡으므로 성소에 의지해 사람들의 분노로부터 자신을 보호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였다고 볼 수 있다.

[2] 다른 가능성은 군중들이 성전 안으로 밀고 들어와 그들의 분노가 결국 거룩한 장소를 더럽히게 될까 하는 우려때문이었다고 볼 수도 있다. 그들은 올바른 행위를 한 선한 사람을 살해하고자 하는 그러한 악한 일에 대하여는 아무런 양심의 가책도 느끼지 못하였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그러한 일을 거룩한 장소에서 거룩한 시간에 자행한다는 데 대하여서는 두려움을 느꼈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죽인 자들이 "절기를 피하여" 살해를 하려 그리하여 것처럼 "성전에서 행하지 않는다면" 어떤 짓도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3. 그들은 바울을 죽이려고 하였다(31절). 왜냐하면 그들은 바울을 40에 하나를 감한 매로써가 아니라 무수히 때려 죽일 작정으로(32절) 그를 때렸기 때문이다. 유대 학자들은 몇 가지 경우에 있어서는 사적 처벌을 허용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처벌은 "반역자에 대한 처벌"이라고 불렀다. 이제 바울은 사자 우리에 던져진 양같이 되었다. 그리고 그들의 손쉬운 먹이거리가 되게 되었다. 그러나 그때도 그는 의심없이 "나는 결박을 받을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13절) 말한 때와 같은 심정으로 장렬하게 죽을 자세를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Ⅲ. 바울의 위기 모면. 그는 또 하나의 적(로마인)에 이하여 다른 적들(유대인)로부터 구출된다.

1. 소란에 대한소문은 삽시간에 퍼졌다. 그리하여 이 폭동에 대한 소식은 그 성의 통치자인 "군대의 천부장"에게까지 들렸다. 그는 예루살렘에 주둔해 있었던 로마 군대의 지휘관이었다. 그런데 누군가 한 사람이 바울을 위해서가 아니라 공안(公安)을 위하여 이 소요에 관한 정보를 천부장에게 고하였다. 그는 반역적인 유대인들에 대하여 언제나 경계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이 천부장은 바울의 친구들이 바울을 위해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때 바울을 구원하는 도구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2. 호민관 혹은 천부장은 그의 군대를 최대한 빠른 시간에 집결시켜 폭도들을 진압하기 위하여 그들과 함께 현장으로 달려 갔다. 이에 대하여 본문에 "그가 급히 군사들과 백부장들을 거느리고 달려 갔다"고 전해 주고 있다. 다른 절기와 마찬가지로 이번 절기에도 평상시보다 경계가 강화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천부장은 손쉽게 군사들을 소집하여 "군중들에게 급히 달려갔다." 왜냐하면 그러한 시기에 늦장을 부리는 것은 위험하기 때문이었다. 난동은 비대해지기 전인 처음에 저지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3. 바울을 때리고 있던 그들은 로마의 장군이 나타나자 매우 놀랐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기들이 하고 있는 행동이 정당화될 수 없는 행동임을 알았기 때문이며, 서기장이 에베소인들에게 말하였듯이 이 날에 일어난 폭동에 대하여 소환을 당하고 문책될 위험에 처하였음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로마인들에 세력에 의하여 그들의 행위를 중단하였다. 사실 그들은 하나님의 공의와 그의 분노에 대한 두려움에 의하여 그들의 그러한 행동을 억제했어야만 했던 것이다. 하나님은 가끔 땅으로 하여금 여인을 돕게 하기도 하시며(계 12:16) 그리고 그의 백성에 대하여 애정이 없는 사람을 들어 그의 백성들을 보호하시기도 하신다는 것을 기억하자. 사실 로마 군대는 고난당하고 있는 자들에 대해서는 측은히 여기는 정도에 불과했고 주된 관심은 공안을 유지하는 것이었다. 목자들은 그의 양을 지키기 위하여 개들까지도 이용한다. 이 말은 스트레소(streso)가 본문에 대하여 비유로 한 말이다. 우리는 본문에서 이 악한 무리들이 천부장을 보자마자 얼마나 놀랐는가를 볼 수 있다. 이 사실은 "심판의 보좌에 앉아 있는 임금이 형형한 눈으로 모는 악을 흩어버렸다"함과 같다.

4. 통치자는 바울을 보호한다. 그는 바울을 구출했다. 그가 바울을 구출한 것은 그에 대한 관심, 즉 바울이 무죄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이 아니라, 재판없이 사람이 죽음을 당해서는 안 된다는 정의를 위한 관심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는 만일 그러한 폭동의 진행이 적절하게 진압되지 않거나, 그러한 격분한 군중들이 그들 자신의 힘을 의식하고 행동을 하게 된다면, 그러한 결과가 로마인들의 통치에 얼마나 위험스러운가를 알았기 때문에 바울을 구출하였다. 그러므로 천부장은 폭도들의 손에서부터 바울을 끌어내어 법률의 보호 아래 두었다(33절). "그는 바울을 잡아 두 쇠사슬로 결박하라 명하였다." 그것은 그가 바울을 석방하려고 해서가 아니라 그를 심문하기 위해서임을 보여 주어 군중들을 만족시키기 위해서였다. 군중들을 만족시키려는 의도로 그는 또한 바울에 대하여 사장 열성적인 사람들에게 "그가 누구며, 무슨 일을 하였느냐고 물었다." 군중들의 손에서 바울을 강제로 빼앗은 천부장의 행위는 정당한 이유가 있는 것이었지만, 후일에 그들은 천부장을 범법자로 고발하여 이르기를(24:7) "천부장 리시아가 와서 그를 우리 손에서 강제로 빼앗아 갔습니다"라고 하였던 것이다(역주:한글 개역에는 이 구절이 생략되어 있음. 그러므로 공동 번역을 인용하였음. 역자 주). 위의 인용문은 바로 이 사건을 가리킨 말로써 친부장이 벨릭스 총독에게 그 사건을 해명한 내용인 23장 27, 28절과 비교되는 내용이다 .

Ⅳ. 천부장이 바울에게 자신에 대하여 변명할 기회를 제공함. 사람들은 잘하면 노도와 맞부딪쳐 싸울 수 있는 것이다. 바울도 본문에서와 같이 함께 소란을 부리는 폭도들 가운데서 발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1. 천부장은 무리들이 무슨 뜻으로 그러하는지를 알 수 없었다. 왜냐하면 천부장이 바울에 관해서 질문했을 때, 무리들은 아마 전에 그런 이름을 들어 본적도 없었던 것처럼 "어떤 이는 이 말로 어떤 이는 저 말로 부르짖었다." 그러기에 천부장이 그들의 심정을 안다고 하는 것은 불가능하였다. 뿐만 아니라 그들 자신도 상대방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자기가 왜 지금 그러한 행동을 하는지도 몰랐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각자 전체의 의사를 전달하려는 듯이 법석을 떨었다. 소란을 부리는 군중들을 통해 무언가 알아 내려고 하는 자들은 결국 확실한 것은 아무 것도 알아 낼 수 없을 것이다. 마치 바벨탑을 세우던 자들이 그들의 언어가 혼란하게 되자 상대방의 말을 알아 듣지 못한 이상으로 말이다.

2. 천부장은 군중들의 분노와 소동을 진압시킬 수 없었다. 그러므로 천부장은 "그를 영문 안으로 데려가라고 명하였다." 이 영문은 안토니아 탑으로서 로마 군사들의 파견대를 주둔시키고 있는 곳으로 성전 옆에 위치하고 있었다. 무리들의 소동이 극심하였으므로 병사들은 그를 안전하게 성의 소요 밖으로 끌어내오기 위하여 대단한 수로를 하였다(35절). 더욱이 성으로 올라가는 "층대에 이르렀을 때는" 군인들이 강제로 바울을 그들의 손으로 떠받쳐 들고 그를 운반했다(그는 매우 체구가 작은 사람이었고 매우 허약했기 때문에 그 일을 쉽게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들이 이렇게 한 것은 백성들로부터 그를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무리들은 할 수 있다면 바울의 사지를 찢어 죽이려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포악한 손을 뻗쳐 그를 움켜잡을 수 없게 되자 그들은 욕설과 비난을 퍼부으며 그를 뒤따랐다. "그들은 뒤따르며 그를 없이 하자고 외쳤다"(36절). 가장 탁월한 사람과 사건이 군중의 아우성에 이하여 어떻게 가끔 무너져버리는가 생각해 보자. 그리스도 자신도 그런 대우를 받았다. 무리들은 그리스도께서 지은 죄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면서도 "십자가에 못박으소서. 십자가에 못박으소서"라고 외쳤었다. (어떤 교부는 본문의 "그를 없이 하자"는 말을 해석하기를) "그를 산 자들의 땅에서 제거하자. 그를 세상 밖으로 몰아 내자"라고 하였다.

3. 마침내 바울은 천부장에게 말할 수 있도록 허락해 달라고 간청하였다(37절). "바울은 영문으로 인도되고 있을 때에" 침착하고 조용하였고 그 주위에 있는 사람들에게 온유와 존경으로 대하였다. 그러한 마음으로 바울은 천부장더러 "내가 당신에게 말할 수 있느뇨? 나의 박해자들은 내게 달할 수 있는 기회를 주지 아니한다. 그러므로 나는 당신에게 자신에 대하여 변명하고 싶은데 그렇게 한다고 위법이 되거나 잘못이 되지 않겠는가?"라고 물었다. 얼마나 겸손하고 적절한 요청인가! 바울은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말하여야 하는가를 알고 있었으며, 실제적으로 여러 번 그의 상급자들에게 이야기한 적도 있었다. 그럼에도 바울은 그 지휘관에게 말할 수 있게 하여 줄 것을 겸손하게 간청한다. 그리고 그에게 말하도록 허락이 떨어질 때까지는 말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는 "내가 당신에게 말할 수 있느뇨?"라고 요청한 것이다.

4. 천부장이 바울에게 품고 있었던 생각. 그가 바울을 어떻게 생각했는가는 다음의 말에서 나타난다. "네가 헬라 말을 나느냐? 나는 그대가 학식있는 말을 사용하는 것을 듣고 놀랐다. 그렇다면 네가 전에 난을 일으켰던 애굽인이 아니냐"라고 그는 물었다. 유대인들이 폭동을 일으키고 있었으므로 그는 바울이 이 폭동의 계기가 된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아마도 그의 주변에 있던 자 중에 누가 바울이 폭동의 원인이라고 천부장에게 말하였던 것으로 보여진다. 훌륭한 사람들과 사역자들이 그들에 대한 많은 사람의 사실 무근한 오해를 인하여 파멸을 당하고 만다는 사실도 유의하자. 그리고 이러한 오해를 시정하기는 대단히 어렵다는 사실도 유의하자. 최근 그곳 지방에서인가 예언자로 자처하는 애굽인에 의하여 주동이 된 반란이 있었던 것 같다. 요세푸스는 그 반란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다. 즉 "한 애굽인이 반란군을 일으키고 그들에게 올리브 산으로부터 예루살렘의 성벽이 무너지는 것을 보여 줄 것과 그들이 폐허의 성을 입성할 것을 약속하였다"고 하였다. 천부장은 본문에서 바울에게, "네가 난을 일으켜 사천의 자객 곧 불량배요, 산적이며, 강탈자요 목을 자르는 사람을 거느리고 광야로 갔던 사람이 아니냐"고 말한다. 당시의 유대의 혼란은 말이 아니었다. 그곳에는 당시에 공안을 이같이 어지럽힐 수 있는 유(類)의 인물들이 무수하였다. 요세푸스는 이 사건의 결과에 대하여 "로마의 총독 벨릭스가 폭동을 진압하기 위하여 출동하여 그들 중 사백 명을 죽였으며 이백 명을 나포하였고 나머지는 흩어졌다"고 전해 준다(Antid. XX.6. De Belle Jud. ii. 12). 그리고 유세비우스도 그의 책에서 이 사건에 대하여 전해 주고 있다(Hist. ii. 20). 이 사건은 글라우디오 통치 13년 곧 본문의 소요가 일어나기 약 3년 전에 일어났었다. 이 폭동의 지도자는 도망해버린 것같이 보인다. 그러기에 천부장은 지금 대단한 비난을 받고 또 큰 소동까지 야기 시키며 탄핵을 당하고 있는 바울이 바로 그 애굽인이거나 당시의 애굽인 못지 않은 중범일 것이라고 결론을 내린 것이다. 오해에 의하여 훌륭한 사람들이 부당한 처우를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유의하자.

5. 바울은 그가 과거에 어떠한 사람이었던가 하는 것을 말함으로써 그에 관한 천부장의 오해를 시정한다. 그는 자신에 대하여 변명할 줄어들 모르는 애굽인과 같은 불량자나 깡패나 부랑배가 아니었다. "나는 애굽인이 아니라 순전한 유대인이라. 민족으로나 신앙에 있어서나 틀림 없는 유대인이다. 나는 길리기아 다소성의 시민으로 정직한 부모" 아래서 태어나 자유로이 교육을 받았다(다소는 학문의 도시였다). 더군다나 나는 "소읍이 아닌 곳의 시민이다"라고 말한다. 그가 다소의 시민임을 말하고자 한 것인지 로마의 시민임을 말하고자 한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다소나 로마나 다 같은 대 도시들이었다. 그리고 바울은 그 두 도시 모두의 자유시민이었다. 비록 천부장이 바울에 대하여 그가 애굽인이 아니냐는 불쾌한 혐의를 품었지만 바울은 자신의 평온을 잃지 않고 또한 그가 살고 있는 시대에 대하여 또는 그가 관계하고 있는 사람들에 대하여 분노를 촉발시키거나 노를 노로 갚지 않고 온순하게 천부장의 혐의를 부정하고 자신이 어떠한 사람임을 말하였다.

6. 그는 겸손하게 천부장에게 이제는 그의 죄수인 자신이 군중들에게 이야기할 것을 허락하도록 간청했다. 바울은 자기가 그렇게 할 권리를 지녔음에도 당당한 자세로 그러한 청을 하지 않고 그렇게 해 주시면 감사하겠다는 뜻으로 자기를 낮추어 요청했다. 그는 "나에게 백성에게 말할 기회를 허락해 주실 것을 간청합니다"라고 말하였다. 사실 천부장이 그를 구한 것은 다른 의도에서가 아니라 정당한 사유를 알기 위해서였다. 이제 바울은 자신을 변명하기 위하여 심사숙고하여 그럴듯한 말을 꾸며 낼 필요가 없음을 보여 주기 위하여 천부장에게 즉시 자신을 변명할 기회를 달라고 요청하였다. 왜냐하면 바울의 정당성을 입증하기 위해서는 인위적인 것이 아닌 진리의 대도(大道) 아래 그의 실 모습을 비춰 보기만 하면 되었기 때문이다. 바울은 자신의 정당한 입장만을 의지한 것이 아니라 천부장이 공정한 태도와 성실함으로 판결해 주기만을 바랐다.

7. 바울은 자신의 경위를 변론하도록 허락을 받았다. 또한 이 때 하나님 아버지의 영이 그가 말해야 할 것을 지시해 주셨다(마 10:20). 이에 "천부장이 허락하였으므로"(40절) 이제 바울은 은총과 담대함으로 말할 수 있게 되었다. 바울이 말할 수 있는 호의를 받은 것은(나는 바울이 호의를 입었다기 보다 그가 공정한 처우를 받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니 그보다 공정한 취급을 받은 것은 그의 동향인인 유대인들에게서가 아니라 천부장에 의해서였다. 유대인들은 그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천부장은 비록 호기심에서이기는 하였지만 그의 말을 듣고자 하였다. 이러한 허락이 떨어지자,

(1) 무리들이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게 되었다. "바울은 층대 위에 섰다." 그는 삭개오와 같이 작은 키의 인물이었고 이 키 작음이 오히려 그로 하여금 담대히 자신의 생각을 말하게 하는 대 도움이 되었다. 그가 선 강단은 좋은 여건이 아니라 참으로 어려운 입장에서 허용된 것이었지만 반면 복음을 전하는데 이보다 좋은 기회는 없기도 하였다. 비록 그가 선 강단이 에스라 선지자가 섰던 나무단과 같지는 않았지만 복음을 전하는 목적을 이루는 데는 충분한 것이었다. "거기서 그는 백성에게 손짓하여" 그가 그들에게 말할 것이 있으니 잠시 참고 조용하라고 하였다. 그가 천부장의 허락을 받은 유리한 입장에 있었기 때문에 그가 앞에 서자 각 사람들은 옆 사람에게 조용하라고 소리쳤고 결국 조용하게 되었다. 아마 천부장 또한 백성들을 조용하게 하기 위하여 그의 최선을 다하였던 것 같다. 만일 백성들을 귀 기울이도록 종용하게 하지 않는다면 결국 바울에게 말하도록 허용한 것도 아무런 효과가 없는 것이었다.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에 대한 변론이 주어질 때 잠잠할 것이 요청되는 것은 당연하다. 우리는 진지하게 복음에 대한소식에 귀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2) 바울은 자신의 입장을 밝혔다. 그는 그가 회당에서 복음을 전할 때 그러하였듯이 전지하고 또 능력있게 그가 그리스도의 나라를 위하여 일하고 있음을 선언하였다. 그는 "히브리 방언으로" 유대인의 통속어로 말하였다. 히브리어는 바로 그들의 언어였다. 이 언어로 말하므로 바울은 자신이 유대인임은 변개할 수 없는 사실이라는 것을 나타냈고 뿐만 아니라 히브리어에 대한 불변의 경의를 표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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