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튜 헨리 주석, 말라기 01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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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이스라엘의 배은망덕 (말라기 1:1-5)

이 책의 예언은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경고(짐)" 라는 제목이 붙어있다(1절).

1. 이것은 굉장히 중요하고 무거운 일을 암시한다. 거짓 예언자들이 말한 것은 겨처럼 가벼웠고, 참 예언자의 말은 알곡처럼 무거웠다(렘 23:28).

2. 이것은 노래의 반복부(영어 burden은 짐, 경고, 반복부의 여러 뜻이 있다)처럼, 그들에게 자주 반복되어야 했다. 또 그들에게, 그리고 그들에 의하여 자주 반복되었어야 했다.

3. 그것이 짐이 되고 책망이 되는 자들도 있었다. 그들은 그것에 싫증나 있었으며, 그것 때문에 괴로워 견딜 수 없는 자들이다.

4. 회개하지 않는 한, 그것은 그들에게 실로 무거운 짐이 되고, 그들을 지옥 밑바닥에까지 떨어뜨리는 것이 되리라.

5. 경고를 사랑하고 포용하고 받아들이는 자들에게도, 우리 주님께서 말씀하셨듯이(마 11:30), 비록 그것이 가벼운 짐이라고는 해도, 역시 짐이었다.

" 여호와의 말씀의 경고" 가 보내어졌다.

1. 이스라엘에게로. 기록된 말씀과 마찬가지로 예언의 살아 있는 신탁도 그들에게 관계된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많은 예언자를 이스라엘에 보내셨으나, 이제 그들을 한 번 더 시험하실 참이다.

2. "말라기에 의해서" "말라기 손에 의해서" 보내어졌다. 입에서 나오는 말에 의한 메시지가 아니라, 보다 큰 확신을 위해 그의 손에 의해서 기록되었던 것이다. 본문에서 보면, 저들은 배은망덕의 비난을 받는다. 여기서 그들은 자기들에게로 향한 하나님의 뛰어난 자비를 알게 된다. 이런 비난은 짐(경고)이라고 불리울 수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무거웠기 때문이다.

Ⅰ. 하나님은 백성들에게 자비를 가지셨음을 주장하시며, 또 그것을 종종 표현하셨다(2절). "나는 너희를 사랑하였노라" 고 여호와는 말씀하셨다. 이렇듯 설교는 갑자기 시작된다. 마치 하나님이 저들로 하나님의 사랑과 화해시키고, 저들이 아직 하나님께 대해 좋은 생각을 지니도록 하기 위해 모든 책망이 내려진 것임을 말하려는 듯하다. "나는 사랑하는 만큼, 꾸짖고 경계한다." 이렇게 설교는 친절하게 시작된다. 하나님은 그가 저들을 사랑하는 것에 만족해하며, 자기의 사랑을 언제나 마음에 두실 것이다. 이것은 옛 이스라엘의 처녀 때에 말한 것과 꼭 같은 것으로, 그는 그녀에게 사랑을 약속할 수 있었다(렘 31:3, 4). "나는 그대를 영원한 사랑으로 사랑한다." 백성들을 극진하게 다루시는 하나님의 은혜는 이 한 말로 요약된다. 사랑은 모든 것의 원천이다. 하나님은 "그들을 사랑하셨는데" (신 7:7, 8), 어린 시절에도 그들을 사랑하셨다(호 11:1). 그들에게 그의 기쁨이 있었다(사 62:4). "나는 너희를 사랑하였지만, 너희는 나를 사랑하지 않았고, 나의 사랑에 보답하는 어떠한 일도 하지 아니하였다." 하나님의 백성에겐 가끔 하나님의 사랑을 상기시켜 주는 일이 필요함을 주목하자.

Ⅱ. 저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한다. 그래서 그 사랑의 증거를 감소시키며, 그들에게 그 사실을 말함으로써 그들과 다투는 것처럼 보인다. "아직도 너희는 말하기를, 주께서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였나이까 한다." 하나님이 그들에 대한 모든 은총을 사랑이라는 근원에서 발견한 것처럼, 역시 그는 저들의 모든 죄악은 그의 사랑을 경멸한 데서 흘러나옴을 밝혀낸다. 그의 자비하심을 알고, 거기에 보답해야 할 것을 연구하는 대신에, 그들은 그 자신들이 그에게 은혜를 입는 것을 경멸했고, 물질적인 것으로 그의 증거를 대라고 하나님께 도전했으며, 자기들이 지니고 있는 하나님의 자비의 증거는 소홀히 생각하였다. "우리는 허약해지지도 않았고, 가난해지지도 않았고, 포로로 잡혀가지도 않았지 않은가? 어느 점에서 주께서 우리를 사랑했나이까?" 하나님의 호의를 말할 가치도 없는 듯이 경시하는 자를 하나님이 대단히 나쁘게 여기심은 당연지사이다. 어떤 점에서 그가 우리를 사랑했고, 언제 그러했으며,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의 증거를 어디서 볼 수 있는가고 묻는 것은 우리로서는 대단한 불합리한 짓이다.

Ⅲ. 하나님은 그 일을 모순됨 없이 그가 저들을 사랑하시되 특별한 방식으로 그들을 사랑하셨음을 나타내신다. 이러한 증거로서, 그는 여러 가지 구별을 나타내 보였다. 즉 야곱과 에서, 이스라엘과 에돔 사이를 구별하셨던 것이다.

혹자는 저들의 질문을, "무엇 때문에 당신은 우리를 사랑하였나이까?" 로 이해한다. 마치 그것은 저들이, 하나님이 저들을 사랑하셨음은 인정하고 있었으나, 그와 같은 사랑을 할 만한 이유가 있어서라는 것을 넌지시 암시한다는 것이다. 즉 저들의 조상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사랑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저들을 사랑하셨고,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은 값없는 사랑이 아니라, 빚진 자의 사랑이라는 것이다. 이에 대해 하나님은 이렇게 답하신다. "에서는 너희처럼 아브라함의 가까운 혈족이 아니었던가? 에서도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어떤 권리가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에서를 미워하고 야곱을 사랑하였다" 는 것이다.

1. 하나님이 야곱과 에서 사이에 어떤 구별을 두셨는가를 살펴보자. 에서는 야곱의 형제이며, 그의 쌍둥이 형제이다. "그러나 나는 야곱을 사랑하였고 에서를 미워하였다. 즉, 언약으로 야곱을 취하였고, 그에게 축복을 주었으나, 에서는 거절하고 받아들이지 않았다" 는 것이다. 하나님과 언약을 맺는 자들, 곧 그들에게 내려진 살아 있는 말씀과 은혜의 방편을 가진 자들은 이런 것들을 하나님의 사랑의 증표로 간주해야 할 이유를 가지고 있다는 점을 기억하자. 야곱은 이 같은 일을 해냈기에 사랑을 받았고, 에서는 이 같은 일을 하지 못했기에 미움을 받았다. 바울 사도는 이 말씀을(롬 9:13) 인용했으며, 그것을 리브가와 그의 쌍둥이에 대한 예언과 비교한다(창 25:23). 사랑을 베푸심에 있어서의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를 보여 주기 위하여, "형은 동생을 섬기게 될 것이다" 라고 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그 자신 것을 마음대로 못한단 말인가?" 에서는 마땅히 미움받아야 했으나, 야곱은 값없이 사랑을 받았다. 우리 눈에는 의혹스러울지라도, "아버지의 눈에 선하게 보신 까닭에" 그렇게 된 것이다.

2. 이런 근본적인 차이에 따라서, 하나님께서 지금하고 있는 일과 그가 백성들에게 앞으로 하실 일을 살펴보자.

(1) 에돔인들을 하나님의 정의의 기념비로 만들 것이며, 그는 그들의 완전한 멸망으로부터 영광을 받을 것이다. "나는 에서를 미워했기" 때문이다. "그의 유산" 인 세일산을 내가 "황무케 하였다." 갈대아 군대에 의해 그 일대가 몰락했을 때, 그 이외의 에돔도 황폐하게 되었으며, "광야의 사나운 짐승의 거주지가 되었다." 예언된 것처럼 그 땅은 완전히 황폐하게 되었다(사 34:6, 11). 에돔인은 예루살렘의 전복에서 승리의 노래를 하였다(시 137:7).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저들의 손에 공포의 잔을 놓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에돔의 파멸이 끝났을 지라도, 그 황폐는 끝이 없었다. 여기에서 야곱과 에서 사이에는 차이가 있는 것이며, 의인과 악인 사이에 차이가 있으며, 그밖에 모든 것들은 한결 같았다. 그 사건은 동일한 것으로 보였다. 야곱의 성들은 황폐한 채로 남았지만, 그 성들은 재건되었다. 에돔 성은 황폐된 채로, 재건되지 않았다. 의인이 당하는 고통은 끝이 나고, 좋은 결말이 올 것이다. 그때에는 그들의 모든 슬픔이 보상될 것이며, 저들의 애통함은 기쁨으로 변할 것이다. 그러나 악인의 고통은 에돔의 멸망처럼 끝이 없을 것이며, 위로받을 수 없을 것이다(4절). 여기서 이같은 사실을 주목하자.

[1] 에돔인들은 자기들이 비록 소망을 가질 약속을 받지 않았다 하더라도 이스라엘 사람들처럼 회복될 것이라는 헛된 소망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이렇게 말했다. "참으로 우리는 궁핍함에 처해 있다. 그것은 공통적인 일이며, 구제책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폐허가 된 땅에 돌아가서, 다시 세울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해야 할 일을 결정했다(하나님께서 허락해 주시기를 구하기 보다는). 우리가, 그분이 원하든 않든, 하리라. 아니 우리는 하나님의 저주를 주시하고 일을 해야 하며, 영원세세토록 황폐함이 있으리라고 한 선고를 무시하고 해야 한다" (사 34:10). 히엘이 하나님의 말씀(왕상 16:34)에 정면으로 도전하여 여리고 성을 다시 세웠던 것처럼, 저들은 그 성을 거만스러운 마음으로 건축한다. 그렇기에 그 일은 빨리 진행될 것이다. 설령, 하나님께서 그들이 궁핍하게 되리라고 말씀하셨다 할지라도, 겸손케 하려는 하나님께 대항하여 오만한 마음을 가진 자들은 자기들의 일이 하나님의 뜻에도 불구하고 성취되리라고 생각하는 것이 보통이다. 다시 이전처럼 성을 세우고 씨를 뿌리고 가꾸는 일도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무시한 짓이다.

[2] 그러나 이런 희망을 가지고 앞으로 나아가나 그 희망은 실망으로 변하는 것을 살펴 보기로 하자. 저들은 "우리가 성을 세우리라" 고 말한다. 그러나 "만군의 여호와는 뭐라고 말씀하셨는가?" 우리는 그들의 뜻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이 홀로 세워진 것을 확신한다.

첫째, 저들의 시도는 좌절당하리라고 말씀하신다. "저들이 세울 것이나 나는 헐리라" 고 말씀하셨다. 하나님께 반대하여 길을 가는 자는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하지 않을 것을 알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 대하여" 마음을 완고하게 먹는 자가 누구이며, 언제 흥하였던가? 유대인이 예수와 그의 복음을 배척했을 때, 저들은 에돔 사람들과 마찬가지가 되었고, 이 말씀이 저들에게서 이루어졌던 것이다. 아드리안(Adrian) 황제의 통치 때에 저들이 예루살렘 성을 재건하려 했으나, 하나님은 지진과 불덩이의 폭발로 저들이 세운 것을 뒤덮어 버리셨다. 그리하여 저들은 그 모험적인 일을 그만두지 않을 수 없었다.

둘째, 모든 사람에 의해서 그들은 완전히 멸망한 사람으로 보일 것이다. 그들을 보는 모든 사람들은, 그들을 가리켜서 "악의 지경(地境)," 손댈 수 없을 정도로 죄많은 나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끝없는 진노를 받게 된 백성" 이라고 부를 것이다. 그들의 사악함이 그처럼 고쳐지지 않게 되었기에, 그들의 멸망이 다시는 회복되지 못할 것이다. 이스라엘에 반대하여는 하나님이 "약간 진노하셨으나" (슥 1:15), 에돔에 대해서는 분노하셨으며, 영원히 그러하실 것이다. 왜냐하면 에돔인은 "그의 저주의 백성" 이기 때문이다(사 34:5).



(2) 이스라엘 백성으로는 하나님의 자비의 기념비를 세울 것이다. 그분은 그 백성들을 구원하심으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실 것이다(5절). "에돔인은 하나님을 미워한 백성으로 낙인이 찍힐 것이나, 너희의 눈은, 너희에 대한 그분의 사랑에 대한 의심이 영원히 침묵하게 됨을 보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너희는 말할 수 있는 근거가 있으며, 또 말하리라.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방방곡곡과 모든 변방으로부터 찬양을 받을지어다" 라고. 에돔의 변방은 "악의 지경" 이므로, "여호와가 거기에 대하여 언제나 분노하실 것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변방" 은 "거룩의 지경이며" "성소의 지경" 이다(시 78:54). 그러므로 하나님은 자신이 이스라엘을 위해 준비하신 자비를 주실 것이며(잠시 황폐한 채로 있지만), 그렇기에 찬양을 받으시리라.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 이스라엘에게 당신을 찬양할 근거와 마음을 주실 것이다. 에돔의 변방이 아직 황폐된 채로 남아 있을 때, 이스라엘의 변방은 회복되고 완전해지며, 그때에 하나님께서 야곱을 사랑하셨다는 사실이 드러날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을 명심하자.

[1] 자기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는 자들은 조만간에 그 사랑에 대해 분명하고 부정할 수 없는 확증을 가지게 될 것이다. "네 두 눈이 네가 믿지 않으려는 것을 보게 되리라."

[2] 비록 하나님의 백성이 환난 가운데서 고통을 겪는다고 해도, 환난으로부터의 구원은 그의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선하신 뜻의 확증이라고 여겨야 된다(시 34:19).

[3] 특별한 호의와 사랑은 매우 자상한 것이다. 만일 하나님이 이스라엘 땅은 다시 일으키시고 에돔 땅은 멸망된 채로 남겨 두신다면,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어느 점에서 당신이 우리를 사랑하였나이까?" 란 질문을 못하게 된다.

[4] 이스라엘이 위엄을 갖추는 것은 그의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 되며, 이러저러한 방법으로 하나님은 신앙을 고백하는 백성으로부터 영광을 받을 것이다.

[5] 하나님의 선하심(자비)은 그의 영광이기 때문에, 그가 우리에게 선을 행할 때 우리는 마땅이 그의 위대하심을 선포하여야 한다. 왜냐하면 "그 일이야말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이 되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그의 종들의 잘됨을 기뻐하심은" 그분의 자비의 증거가 된다. 또한 이것으로 해서 구원을 희구하는 자들은 "주는 찬양받으시리라" 고 고백하게 되는 것이다(시 35:27).

 

1:2 없음.

 

1:3 없음.

 

1:4 없음.

 

1:5 없음.

 

1:6

제사장들에 대한 훈계 (말라기 1:6-14)

예언자는 여기에서 특별한 사명을 받고, 비록 제사장들이 백성들을 다루는 재판관으로 뽑혔음에도 불구하고, 제사장들을 추궁하고 있다. 성전을 돌보는 자들로 하여금 그들이 책임을 지고 있는, 그들보다 높으신 분이 있음을 알게 하라. 그래서 "제사장들아, 나 만군의 여호와가 너희에게 이르노라" 고 했다(6절). 하나님께서는 악하고 게으른 종들에게 말씀하실 것이 있다. 그것은 하나님이 그들에게 말씀하신 바를 듣고, 그의 명하시는 말씀을 경청하여, 먼저 그들 스스로를 구원받게 하려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저들이 "자기들의 말을 들은 일반 사람들을 구원하는 데" 도울 수 있겠는가?

여기에서 제사장들에게 내려진 것은 분명한, 의심할 나위없는 정당한, 그리고 준엄한 책망이다. 왜냐하면 제사장들은 저들에게 맡겨진 하나님의 거룩한 일을 모독했기 때문이다. 또한 이것이 만일에 제사장들의 죄였다면, 그런 잘못은 모든 사람들이 저지르지 않게 하고 두려워하게 해야 된다. 그렇기 때문에 "제사장들에게 말한 것은" "우리 모두에게" 말한 것이다. 아니, 그것은 그리스도인이라고 고백하는 "우리들," 즉 하나님의 백성이며 제사장인 우리 자신들에게 하신 말씀이다. 여기서 살피자.

Ⅰ. 하나님이 저들로부터 기대한 것은 무엇인가? 또 그분이 무슨 이유로 기대하셨겠는가를 살펴보자(6절). "자기 아버지이기에, 아들은 아버지를 공경한다." 자연(본성)이 이 법칙을 자녀들의 심중에 새겨두었다. 하나님이 그것을 시내산에서 기록해 주시기 전의 일이다. 아니 종은, 비록 주인에 대한 자기의 의무가 자연스럽지 않고, 강압적인 요청에 의한 것이라고는 해도, 주인을 공경하는 것을 자기 의무로 생각하고 있고, 그의 명령에 따르는 것을 의무로 생각하며, 그의 이해 관계에 충성하려 한다. 자녀와 종들은 부모와 상전에게 존경을 표한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그들은 모든 사람에게 손가락질을 받게 될 것이며, 스스로의 마음속에서도 비난을 받게 될 것이다. 그래서 가족의 질서는 지속되며, 그것이 가족의 미덕이요, 장점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이며 동시에 종이었던 제사장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도 경외하지도 않았다. 제사장들은 백성들의 아버지인 동시에 주인이었으며, 그렇게 불리울 것을 기대하였다(사 18:19; 마 22:7, 10). 그런 만큼 존경받고 순종받기를 원했다. 그러나, 저들은 저들의 하늘에 계신 주인과 아버지를 잊었으며, 하나님께 대한 의무를 저버렸다. 우리도 오늘 제사장들에게 내려졌던 책망을 각자 받아야 할는지 모른다. 이점을 주목하자.

1. 우리는 모두가 하나님을 우리의 아버지이며 주인으로 여기며, 우리 자신은 그의 자녀이며 종이라고 생각해야 함을 명심하자.

2. 우리의 아버지와 주인되시는 하나님께 대한 관계는 그를 경외할 것을 강력히 요청한다. 우리가 육신의 아버지를 공경하거늘, 하물며 우리 영의 아버지이랴?(히 12:9)

3. 하나님이 그를 아버지와 주인으로 생각하는 자들에게서 경외받지 못한다면, 그것이야말로 통탄할 일일 것이다. "그를 공경함이 어디 있는가? 그를 두려워함이 어디 있는가?"

Ⅱ. 제사장들이 하나님께 대해 저질렀던 모욕은 무엇인가?

1. 이것이 일반적으로 저들에게 내려진 책망이다.

(1) 저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멸시했다. 그 이름에 대한 제사장들의 친밀감이 그 이름을 모욕하는 기회가 되었고, 그것을 기회로 자신들과 자신들의 이름만 존경을 얻었고, 하나님 이름은 하찮게 되었다. 하나님의 이름이란, 하나님이 자기를 알리는 데 사용한 모든 것, 곧 그의 말씀과 규례이다. 이것들을 그들은 경시했고, 찬양을 드려야 할 것을 비천하게 만들었다. 또한 "엘리의 아들들처럼 그들이 스스로 그 일을 경멸하게 되자,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것이 경멸받게 되었다는 점은 뻔한 일이다.

(2) 저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했다" (12절). 저들은 그것을 "더럽혔다" (7절). 거룩한 제물은 저들의 안중에도 없었을 뿐 아니라, 그릇되이 사용했으며, 제물을 사악한 목적에 악용했다. 즉 그들 자신의 교만, 탐욕, 사치에 이용하였다. 하나님의 이름을 모욕하는 것보다 하나님을 더 크게 노하게 하는 것은 없다. 왜냐하면, 여호와의 이름은 거룩하고 존경받아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분의 성결은 인간이 더럽힐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흠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이름은 더럽혀질 수 있다. 그 이름을 존경해야 하는 책임을 맡은 제사장들의 실책 이상으로 그의 이름을 더럽히는 것은 없다.

이것이야말로 그들에게 가해진 총괄적인 책망이다. 이에 대하여 그들은 하나님께 저들의 범죄를 증명해보라고 도전했으며, 뻔뻔스러움을 더하게 했던 그 일을 옳다고 하면서 "죄가 없다" 고 하나님께 대들었다. "너희가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이름을 멸시하였나이까?(6절) 우리가 어디서 당신을 더럽혔나이까? 하는도다." 책망받을 적에 자기 자신의 정당성을 내세우는 일이 교만한 죄인들에게는 흔한 일이다. 이 제사장들은 가증스럽게도 제물을 더럽혔음에도, 마치 "간음한 여인" 처럼 그들은 자기가 "악을 행하지 않았다" 고 주장하였다. 저들은 기억도 안하고 그들이 저지른 행위를 반성도 하지 않을 정도로 스스로에 대해 태만했다. 또 자기들이 한 일에는 아무런 해가 없다고 하면서, 저들이 행한 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한 것이 아니라고 말할 정도로 하나님의 율법을 무시했다. 또한 그들은 자기의 죄를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것을 모르실 것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무신론적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저들은 진지하고 정당한 책망을 희롱하고 그것을 웃음거리로 돌려버리는 교만을 보일 정도로 하나님과 예언자들에 대해서 경멸적 태도를 취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또 그들은 그 책망을 경멸하며 비웃었고, 그들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며 비웃었다. 또 그런 책망은 받지 않을 것이며, 마음을 움직이지 않으리라고 결심한 사람처럼, 웃어 넘겨 버렸다. 우리가 그 일을 어떻게 보든, 그들의 변명은 죄악이었으며, 그들 자신을 의롭게 하는 데서 오히려 저들 자신의 혀가 저들을 비난한 것이며, 우리가 "어디서 주의 이름을 더럽게 하였나이까?" 하는 그들의 말은 저들의 사악함과 교만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그들이 자기들의 주장에서 특별히 겸손한 마음을 지니고 그런 물음을 물었다면, 그 물음은 그들의 회개의 표지가 되었을 것이고, 개전의 희망을 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무시와 멸시로 이처럼 물은 것은 "악을 행하는 데에 저들의 마음을 완전히 허비하는 것" 임을 여실히 증명하고 있다. 악인은 스스로의 뉘우침을 좌절시키는 법을 배움으로써 스스로를 멸망케 한다는 것을 살피자. 그러나 저들은 "가시(양심의 가책)를 향해 발길질하는 것이 어렵다는 것" 을 발견할 것이다.

2. 마땅히, 제사장들은 일반적인 책망을 듣고 뉘우치며 자숙하고, 그들의 주장은 쓸데없는 것으로 알아 포기해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저들을 이기실 뿐 아니라, 그가 심판할 때는 그의 의가 분명해지므로, 여호와는 저들이 어느 점에서 여호와의 이름을 모욕했으며, 그에게 내뱉았던 경멸이 무엇이었던가를 매우 자세히 보이신다. 이전에는 하나님이 저들의 우상 숭배를 문제 삼았지만, 이제 하나님은 신성 모독을 문제삼으시어, 저들에게 "골짜기에 있는 너희의 길을 보면 너희 행한 바를 알리라" (렘 2:23)고 하신다.

(1) 저들은 말하는 중에 하나님의 이름을 멸시하였다. 저들은 천박한 생각에서 그들이 지닌 거룩한 제도를 멸시하였다. "너희 제사장들은 심중에, 또는 잔을 받을 때, 주의 상은 경멸히 여길 것이니라고 말한다" (7절). "여호와의 상은 더러워졌다" 고 말한다고 했다(12절). "어떤 다른 식탁만큼도 중히 생각되지 않았다." 성전에 있는 상은 진설병을 둔 곳이었는데, 그것을 멸시했다. 또는 하나님과 제사장과 그의 백성들이 교제 속에서 함께 희생제의 잔치를 하는, 번제단-이것을 "상" 이라 했다-을 대수롭지 않게 여겨 멸시하였다. 이전에 미신을 섬기던 때에는, 번제상은 이교도들의 우상 제단과 비교해 보잘 것 없다고 여겨 따로 구분해 방을 꾸며 놓았었다(왕하 16:14, 15). 그러나 이제는 번제상이 자기들의 식탁과 비교해서 보잘 것 없는 상으로 생각되었다. "그 위에 있는 실과 곧 식물도 경멸히 여길지니라." 제단을 섬기는 자는 제단에서 나오는 것을 먹고 살아야 했다. 그러나 제사장들은 가난하고 비천하게 사는 것을 불평하였으며, 그 제단에 과일과 고기로 제사드리는 일은 참예할 아무런 가치도 없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그 일은 언제나 같은 일을 반복하는 아주 일상적인 일이 되었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맛있는 음식, 또 여러 가지 음식도, 훌륭한 음식도 없었다. 아니, 저들이 하나님께 드린 희생 제물들, 피와 (고기)기름을 저들은 경멸의 눈으로 봄으로써 하나님의 제사에 대한 수많은 법칙을 적용할 필요가 없는 것으로 여겼다. 저들은 "기름을 태우고, 피를 뿌리는 일에 이렇게 많은 법석을 떨 필요가 있는가?" 라고 질문하였다. 제사의 직무를 경시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크게 모독하는 자들에게는, 제사직무가 비록 존경받을 만한 것일지라도 그런 수고는 할 가치가 없는 것처럼 생각하게 되고, 종교의 가치가 상당하더라도 수고할 만한 가치가 없는 것으로 안다는 것을 명심하자. 이런 사람들은 거룩한 의식을 무시하고 소홀히 여기며, 불경스럽게 제물을 드리며, 다시 무관심 속에서 떠나면서도, 실지로는 이렇게 말한다. "주의 상이 더러워졌나이다. 그래서 이런 행위로부터는 아무런 미덕도 가치도 신뢰도 위안도 기대할 수 없나이다."

(2) 저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경멸했는데, 그 경멸은 그들이 한 말로부터 나온 것이었다. 부정한 행동과 생각은 슬픔의 근원이며, 타락한 행동의 신산고초를 가져오는 고통의 근원이다. 저들은 주의 제단과 상을 경멸거리로 여겼다. 그리하여

[1] 저들은 제물로는 어떤 것도 드릴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제사를 드려야 할 때는, 제일 좋은 것이 아니라 아주 비천하여 자기의 식탁에도 쓰지 않을 나쁜 것을 골라서 하나님의 제단에 드렸다. 저들은 모든 희생 제사에서, "기름섞인 좋은 가루" 의 소제물을 가져왔어야 하거늘, "더러운 떡" 을 가져왔다(7절). 형편없는 떡, 하인의 떡, 아마도 마르거나 곰팡이가 난 것이며, 또 밀찌꺼기로 만든 것을 저들은 제단에서 태우기에 족하다고 생각하였다. 왜냐하면 저들은 "무슨 목적으로 낭비하는가?" 고 말하기를 더 좋아했었기 때문이다. 저들은, 율법이 희생제물로 흠없는 것을 드릴 것을 명기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눈먼 것, 절름발이, 병든 짐승을 드렸다(8절). 반복하면(13절), 토색한 물건과 저는 것, 병든 것과 저절로 죽은 것들이었다. 저들은 제물을 불태우는 것 이상을 생각지 않았다. 만약 다른 곳에 쓸 수 있는 좋은 것이라면 태우기에는 아까운 일이라고 변론하였다. 백성들은 저들이 희생 제물로 드려야 한다는 의무를 아직은 알고 있었다. 저들은 감히 제사 의무를 송두리째 빼먹지는 않았으나, 쓸모없는 제물을 가져와 하나님을 비웃고, 가진 것 중에서 가장 나쁜 것을 가져옴으로써 저들 자신을 속였다. 백성들을 보다 잘 가르쳐야 할 제사장들은 가져온 제물을 받아서 제단에 그대로 드렸다. 왜냐하면 제물을 거절할 경우, 다음에는 사람들이 하나도 가져오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었고, 그렇게 되면 저들은 부수입을 잃게 될 것이었다. 그런고로 하나님의 영광보다 자신의 이익을 더 생각하였기 때문에 저들은 받지 않아야 할 줄 알면서도 받았다.

목자는 8절을 제사장이 경멸조로 말한 7절의 계속으로 본다. "너희는" 백성에게, "말하기를 너희가 눈먼 것으로 드릴지라도, 저는 것, 병든 것으로 드리는 것도 악하고 말하지 아니한다."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든 않든지 간에, 눈먼 것, 저는 것, 토색한 것, 병든 것을 하나님께 희생 제물로 드리는 것은 지극히 악하다는 사실을 주목하자. 우리가 만일 하나님을 무지에서 또는 이해없이 예배한다면, 그것은 눈먼 것을 제물로 바치는 것이다. 우리가 만일 주의없이, 생각없이, 둔한 마음으로 주님을 생각한다면, 병든 예물을 주께 드리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육신의 일을 쉰다면 그것은 마음의 일도 하지 않는 것이며, 절름발이의 예물을 가져오는 격이다. 만일 우리가 우리 가운데 쓸데없는 생각과 오락을 생각한다면, 우리는 저는 것, 토색한 것을 가져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일이 악하지 않은가?" 하나님께 대하여 큰 모욕이 아닌가? 또 자기 영혼 자체에 해가 되지 않는가? 우리의 책들이, 아니, 우리의 마음이 "이것은 나쁘다" 고 말하지 않는가? 하나님께 대하여 최선을 다하는가? 최고이신 하나님은 우리가 지닌 것 중 최선의 것을 받으셔야만 한다.



[2] 저들은 자기들이 보수받는 것 이상의 일을 하지 않으려 했다. 제사장은 제단에 바치는 희생 제물은 기꺼이 드리려 했다. 그 중에 그들의 몫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전의 어떤 다른 제사에는 특정한 보수가 따르지 아니했기에, 저들은 그 일에는 한걸음도 움직이지 않았고, 전혀 손을 놀리지 않았다. 이런 행동이 일반적인 저들의 기질이었다(10절). 제사장 가운데는 "성전문을 닫거나, 촛대의 불을 끌 자가 없었다." 만약 제사장이 가장 적은 소규모의 예배를 드려달라는 요청을 받으면, 내가 얼마를 받게 되는가고 되물었을 것이다. 삯을 받지 않고는 저들은 제사를 드리지 않았으며, 그들이 드린 모든 제사는 자기의 수입을 위한 모든 것이었으며, 삯을 받기 위한 것이었다(사 56:11). 비록 하나님이 자기의 종들은 이 세상에서 많은 삯을 받게 된다고 명하였다고는 하나, 돈만을 위해서 일하며 보수가 생기지 않는 일은 결코 하지 않는 그런 자는 용납될 수 없음을 명심하자.

[3] 저들의 일은 저들에게 완전히 지겨운 일이었다(13절). "너희가 말하기를, 보라! 얼마나 번잡스러운가?" 라고 했다. 제사장들과 백성들은 이러한 마음이었으며 저들에게 하나님은 너무 힘든 일을 부과하였다고 생각하였다. 백성들은 희생 제물을 준비하는 비용에 인색하였고, 제사장들은 그 제물을 바치는 수고에 인색했다. 저들은 주의 축제일이 너무나 많아서 너무나 자주 주님의 전에의 참석을 강요한다고 생각하였다. 제사장들은 제단에 나가서 거룩한 제물을 먹을 적에 요구되었던 바, 스스로를 정결케 하라는 명령이 저들에게 과중한 고행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들은 자기의 직무가 힘들고 고된 것이라고 여겼으며, 부당한 처사라고 "코웃음" 치며, 견디기 어려운 짐이라고 생각하였다. 저들은 제사를 드렸으나, 인색한, 내키지 않는 마음으로 드렸다. 하나님은 그 일에 대해서도 자기의 율법이 정당하다고 하셨다. "예물로 인하여 수고롭게 아니하였고, 유향으로 인하여 너를 괴롭게 아니하였다" 고 말씀하신 것이다(사 43:23). "내가 무엇으로 너를 괴롭게 하였느냐?" (미 6:3) 그러나 저들 자신의 사악한 마음은 그 일을 괴로운 것으로 여겼다. 그래서 저들은 도엑처럼 "여호와 앞에 억류되었다." 그들은 오히려 그밖의 다른 어떤 곳에 있고 싶어했다.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와 제사를 지루하게 느끼고 그 일을 비웃는 자들은 자신과 하나님께 대해 똑같이 아주 해로운 것임을 알자.

Ⅲ. 하나님께서 이런 경우 그들을 회개케 하고 겸손케 하기 위해 어떻게 타이르고 설득시키는가를 살펴보자.

1. 저들이 땅의 군주에게도 이 같은 모욕을 할 수 있는가? "너희는 저는 것과 병든 것을 하나님께 드렸는데 이제 그것을 너희 총독에게 드려보아라" (8절). 기뻐 즐겨받겠느냐? 네가 그에게 은혜입기를 간구할 때나, 그로부터 받은 은혜에 감사할 때, "그가 너를 기뻐하겠느냐?" 차라리 그가 모욕이 되는 그 물건을 없애지 않겠느냐? 이같이 제사의 직무에 무관심하고 무책임한 자들은 그들의 통치자에게 드려도 모욕이 되는 것을 하나님께 바친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임을 알아야 한다.

2. 이 같은 제물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다고 상상할 수 있을까? 또 제물의 목적에 부합될 수 있을까? "내가 네 손에서 이것을 받겠느냐?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13절). 너는, 내 자신의 율법의 위반을 내가 묵인하며, 내가 받은 모욕을 분해하지 않거나 무시할거라고 생각하는가? 아니다. "내가 너희를 기뻐하지 않으며 너희 손으로 드리는 것을 받지 아니할 것이다." 만약 사람 가운데 하나님의 기쁨이 같이 하시지 않는다면, 또 사람이 의로와지지 않고 성화되어 있지 아니하다면, 하나님께서는 드리는 제물을 받지 않으실 것이다. 하나님은 먼저 아벨에게 관심을 두시며, 그의 제물에는 나중에 관심을 두셨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제물을 받으시게 하기 위해서는, 선한 것을 행하는 것으로 불충분하며, 올바른 원칙, 바른 방법, 바른 목적에서 해야 한다. "만약 네가 잘하면 너를 받지 아니하겠느냐" 라고 하신 옛 율법이 있다(창 4:7). 만일 우리가 하나님께 받아들여지지 못한다면, 우리는 헛되이 그를 예배하는 것이며, 그 일은 모든 수고의 댓가를 잃어버린다. 아니, 우리가 하나님의 수납에 미치지 못한다면, 전혀 행치 않은 것이 되며, 영원히 행치 않은 것이 된다. 그러므로 종교적 비용을 절약하려는 자들은 자기들에게도 불리한 일을 하는 것이요, 제사의 모든 목적을 잃는 자들이다. 가장 안이하게 일하는 방법을 생각하면, 아무 일도 하지 못한다. "여호와께서 받아 주시는 것" 을 최고의 목표로 삼는 자들은 "토색한 것, 저는 것, 병든 것" 을 감히 가져오지 못할 것이다.

3. 그런 제사장들이 희생 제물을 가지고 하나님께 마주하여 백성들을 위해 중재할 때 그것이 어떻게 하나님을 설복하리라 기대할 수 있을까? 어떤 사람은 9절을 역설적으로 말한 것으로 이해한다. "이제, 너희가 제사장의 의무를 다하고, 너희 가운데 내릴 하나님의 재앙을 제거하기 위해서 그 사이에 서게 된다면, 하나님이여, 우리에게 은혜 베푸소서 라고 내가 너희에게 빌리라." 그리고 "우리 땅에게도 은혜 베풀기를 빌리라" (3:11 참조). "이제 너희가 지닌 은혜의 보좌에서 너희가 바라는 바를 시험해보라. 그 역병을 없애는 데 이용해 보라. 왜냐하면 그렇게 하는 것이 너희의 방법이었으니까. 너희는 재앙이 내리도록 하나님을 분노케 했다. 그러나 너희가 하나님의 거룩한 일들을 모독하는 일을 계속한다면, 그분이 너희 인격이나 너희 기도에 관심을 갖겠는가? 아니, 너희는 그 역병이 떠나도록 하나님을 설득할 수 없을 것이다." 만약 "마음속에 사악한 것을 생각한다면, 하나님은" 우리 자신이나 다른 사람의 기원을 "듣지" 아니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4. 하나님이 저들의 손에서 이런 것을 받아야 했는가? 아니다. 그분은 저들을 위해 위로를 마련하셨으며, 그들에게 그의 일이 즐겁고 잘될 것을 약속하사, 저들에게 즐겁게 일하도록 격려해 주었다. 혹자는 10절을 이렇게 본다. "너희 중에 문을 닫을 자, 또는 타오르는 불을 끌 자가 있는가?" 아니다. "하나님은 너희가 그를 위해 아무것도 봉사하지 않으리라고는 기대하지 않는다. 너희는 그것에 대해 좋은 보답을 받을 것이다. 냉수 한 그릇이라도 하나님을 위해 준 것은 그 상을 잃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은혜를 알고, 순종 가운데 오는 보답을 아는 자가 하나님께 의무를 다하지 아니하면, 그 나태와 인색함은 더욱 가증스런 것이다.

Ⅳ. 하나님은 그의 거룩한 이름을 모독하는 것을 회개하라고 저들을 촉구한다. 그렇기에 우리는 9절을 이렇게 이해할 수 있다. "이제, 내가 간구하노니, 하나님께 우리에게 은혜를 줍시사고 구하라. 죄를 인해서 너희 자신을 낮추라. 힘있게 하나님께 사죄를 부르짖으라. 그리하여 너희 제물의 값과 가치에서 부족했던 것을 기도의 열심과 신앙으로 보상하라. 우리가 당하는 모든 섭리의 견책은 너희의 행위로 왔음이라." 죄로 인해서 불을 지르게 된 사람은 회개, 기도, 개인의 변화로써 그 불을 끄는 데 크게 관심을 높여야 한다.

Ⅴ. 하나님은 그 자신의 이름의 영예의 확보와 그 이름을 모독하는 자에 대한 심판, 그 두 가지의 결심을 선언하신다. 하나님과 종교에 대해 모욕을 퍼붓는 자, 신성한 것을 경멸하는 자들에게 이 사실을 알게 하라.

1. 저들이 목적하는 것을 얻지 못하리라. 하나님은 저들은 하나님의 법을 비천하게 만들고 모독할지라도 하나님 자신은 그것을 확장하시고 영광스럽게 하실 것이다. 왜냐하면 "해뜨는 곳으로부터 해지는 곳까지의 이방 민족 중에서 내 이름이 크게 되리라" 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11절). 그것은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만약 이들은 하나님이 받아들이는 예배자들이 아니라면, 하나님에게는 예배자들이 없으리라." 마치 하나님은 그들이 드리는 예배를 최선을 다해 받지 않으면, 그에게는 예배가 전혀 드리지 않을 것이라는 식이다. 그렇게 되면, "그의 위대한 이름을 위하여 그가 무엇을 할 것인가?" 그러나 그가 홀로 그 이름을 위대케 하도록 버려 두라. 비록 이스라엘이 불충성하고 흩어졌다 해도, 하나님은 "영광스럽게" 되실 것이다. 제사장들이 하나님을 분노케 하사 그로 하여금 의식 율법을 제거하고, "아무 것도 완전하게 만들지 못하는 계명" 을 폐기하도록 했지만, 하나님은 끝내 그들에 의해 손해자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1) 저들이 모욕한 이런 육적인 규례 대신에 영적 의식으로 드리는 예배가 시작되며 이룩될 것이기 때문이다. 소와 양의 기름과 피 대신에, "유향이 하나님의 이름에 드려지게 되리라" (이것은 기도와 찬양을 의미한다. 시 141:2; 계 8:3). 그것은, 제사장들의 행위 속에 있었던 부패로부터만이 아니라, 그 제도 자체 속에 있었던 "육적인 의식" 이 없는 "정결한 예물" 이 되리라. 그런 것은 개혁의 때까지만 있는 "육적인 규례" 라 했다(히 9:10). 아버지께 예배하는 자는 신령과 진정으로 드릴 때가 오는데, 그때에는 "유황" 과 이 "정결한 예물" 이 드려졌던 것이다.

(2) 유대인만이 드리는 예배와 제물을 드리는 대신에, 온 세계에서 사람들이 그를 섬기고 예배할 것이며, "해뜨는 곳에서 해지는 곳까지 모든 장소에서 그의 이름에 찬미를 드릴 것이다." 나라들은 하나님의 놀라운 일(기사)에 대하여 말할 것이며, 배우게 될 것이며, 그들 자신의 언어로 말하게 될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은총의 왕국에서 있을 커다란 혁명의 분명한 예언이다. 그런데 이것은 이방인에 의한 것이며 나그네와 타국인이었던 이방인에 의해서 이루어질 일이다. 이방인이 "하나님의 권속과 성도들과 더불어 동료 시민" 이 되며, 이전에 유대인들이 받았던 것처럼 은혜의 면류관을 받으리라. 이 일은 두 번이나 말해졌다. "내 이름이 이방인 중에서 크게 될 것이다." 지금까지는 "유대에만 알려져 있던 그 이름이 크게 되었도다" (시 76:1). 하나님의 이름이 그들에게 선언될 것이고, 그 선언은 받아들여질 것이며, 믿게 될 것인데, 이방인 중에도 유대인들이 행했던 것이나 제사장들이 섬긴 것보다 더욱 잘 하나님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돋보이게 할 자가 있을 것이다.

2. 저들은 반드시 벌을 받게 될 것이다(14절).

여기에 그런 제사장들을 좋아했던 사람들의 운명이 있다. 왜냐하면 그들에 관한 선고는 그 같은 모든 자들에 관한 말씀이기 때문이다.

살펴 볼 것이 있다.



(1) 경배하는 자에 대한 서술을 살펴보자. 저들이 자기들의 양떼 중에 "수컷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이같이 부패한 것을 주님께 서원과 제물로 드렸다." 저들에게는 충분한 재물이 있어서 하나님을 존귀하게 섬길 훌륭한 재물이 있었지만, 저들은 가장 나쁜 것이 하나님께 드리기에 알맞다고 생각하였다. 이렇게 배은망덕한 행동이 하나님에 대한 저들의 답례이었다. 이것이 백성들의 죄이었다. 그러나 제사장들은 그 일을 묵인하였고, 그 제물로 만족해하였다. 우리는 레위기 22장에서 "서원을 위해서는 열납될 수 없으나" "자원제(낙헌 제물)로는 가한" 예물에 관한 율법을 발견한다(레 22:23). 그러나 제사장들은 하나님이 이전과는 달리 아무 것이나 받는다고 생각하여 그것을 받아들였다.

(2) 이런 예언자가 지닌 성격을 살피자. 저들은 "사기꾼" 이다. 저들은 하나님을 속이고 부정하게 대하였다. 저들은 위선으로 기도하며, 하나님에게 대한 공경을 가장하였다. 그러나 그처럼 제사를 드렸을 때는, "이처럼 서원하는 것보다 서원하지 않는 것" 이 더욱 좋았을 정도로 무례히 행했다. 그러나 스스로를 속이지 못하게 하라. 왜냐하면 하나님은 조롱받을 분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기만하려고 생각하는 사람은 결국에는 그들 자신의 영혼에 대해 저주스런 속임수를 쓰는 것임이 드러날 것이다. 위선자는 사기꾼이며, 또 자기 기만자임이 드러날 것이다. 그러므로 해서 자기 자신이 멸망케 될 것이다.

(3) 그들에게 닥쳐올 운명을 살펴보자. 그들은 축복을 원했으나 저주받았고, 기록된 심판 대로 하나님의 저주를 받을 것이다.

(4) 그 심판의 이유. "나는 큰 임금이라. 만군의 주의 말이니라. 그러므로 나를 그들과 같은 한 인간으로 대하는 자들을 내가 심판하리라. 내 이름이 이방인 중에서도 두려워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나의 백성 중에서 멸시받는 것을 참지 않을 것이다." 이방인들은 비록 우상을 섬겼지만, 유대인들이 유일하고 참되고 살아계신 하나님에게 드린 것보다 더 많은 공경을 그들의 신에게 바쳤다. 하나님의 세계 통치권에 대한 생각과 그 통치에 대한 보편적인 인식은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의 불경스러움을 막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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