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튜 헨리 주석, 스가랴 07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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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

금식에 관한 질문 (스가랴 7:1-7)

이 특별한 설교는 앞의 환상 이후 2년이 넘어서 행한 것인데, 그 동안에 그는 그의 환상을 설명했다(1절). 즉 다리오왕 "4년 9월," 그리고 제 1장 1절에 있는 다리오왕 2년 8월을 비교해보면 시간이 그렇게 걸린 것 같다. 스가랴가 그동안 계속 게을렀던 것은 아니나(그와 학개가 다리오왕 제 6년에 성전이 마칠 때까지 계속 예언했다고 명백히 했다), 그동안 그는 이것처럼 기록으로 남았던 어떤 설교를 하지는 않았다. 하나님께서는 글에 의해서 뿐 아니라 입의 말에 의하여도 명예롭게 되시며 그의 역사를 이루시고, 또 자기 유익을 지키신다. 그리고 무엇인가 새로운 것을 진척시킴으로서 뿐만 아니라, 가르쳐진 것을 되풀이하고 역설함으로써도 그리할 수 있다. 이제 여기서 우리가 살필 것은

1. 이 물음을 가져오는 자들이 누구인가? 세레셀과 레겜멜렉이니, 유력한 지위와 외모를 가진 사람들로서, 그들은 "그들의 수하와 함께" 와서 이 심부름에 불려진 것을 자기 멸시로 생각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의 명예로 생각했다. 즉 다음과 같은 영예이다.

(1) 하나님의 집의 수종자들로서이다. 거기서 의무를 다하고 명령을 받는다. 사람에게 가장 큰 일도 예수 그리스도의 규례의 가장 작은 일보다 작다.

(2) 하나님의 백성의 대리자로서이다. 그들의 일들을 협상하는 자들이다. 땅을 소유한 사람들은 사업을 하는 사람들보다 여유가 더 많아서, 그들의 시간을 공중에 대한 봉사에 사용해야 하며, 선을 행함으로써 그들은 참으로 위대하게 된다. "교회들의 사자들은 그리스도의 영광이다" (고후 8:23).

2. 그들은 무슨 심부름으로 왔는가? 그들은 아마 "금과 은" 과 함께(마치 6:10, 11 에 나오는 자들처럼) 파송되지 않았을 것이다. 혹은, 만일 그랬더라도 언급되지 않으며, 오히려 우리 모두를 하나님의 집으로 인도하는 두 가지 위대한 심부름을 위해 파송되었으니,

(1) 하나님과 중재하여 그의 긍휼을 힘입으려고 왔다. 그들은 "여호와 앞에서 구하려고" 또는 혹자의 생각대로(당시의 용법에 따라) "희생 제물을 바치려고" 즉 그것과 함께 그들의 기도를 봉헌하려고 보내어졌다. 포로기간 중에 유다인들은 성전을 향해 기도했다(단 6:10 에 나타나는 바대로). 그러나 이제 그 성전이 재건되는 순탄로에 있었으므로 그들은 성전 안에서 기도할 그들의 대표를 보내었으니, 하나님께서 그의 집이 "만민이 기도하는 집" 이라고 일컬어지리라고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게 되었다(사 56:7). 기도 중에 우리는 자신을 "여호와 앞에" 세우고, 우리 위에 계신 그의 눈을 보며, 우리의 눈을 그에게 들어야 한다.

(2) 하나님께 그의 뜻을 물으려고 왔다. 우리가 하나님께 우리의 요구를 진정할 때, 그것이 그로부터의 교훈을 기꺼이 들으려는 의도와 함께 해야 한다는 점을 명심하자. 왜냐하면, 만일 우리가 그의 율법을 듣는 것을 그만 두고 귀를 돌린다면, 우리는 우리의 기도들이 그에게 용납되기를 기대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일생의 모든 날에 여호와의 집에 거하여, 거기서 주여, "당신은 나를 위해 무엇을 하시렵니까?" 또한, 주여, "당신은 나로 하여금 무엇을 하게 하시렵니까?" 하고 물으면서 "구할 수 있도록" (시 27:4) 소망해야 한다.

3. 그들이 누구와 의논했는가? 그들은 "여호와의 전에 있는 제사장들과 예언자들에게" 말했다. 전자는 보통 경우를 위한 신탁이었고, 후자는 특별한 경우를 위해서였다. 그들은 양자를 함께 받게 되었고, 각자가 이 경우에 있어서 그들과 하나님의 마음을 함께 하도록 애썼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다양한 은사를 허락하시고 모두가 그것을 유익하게 쓰도록 하셨으니, 우리는 기회있는 대로 모든 것을 이용해야 한다. 그들은 그들의 정해진 성직자인 사제들에게 열중하여서 그들에게 주어진 은사들에 의해 교회를 섬길 자격이 갖추어진 것으로 보이는 예언자들을 무시하게 되지는 않았다. 또한 그들은 예언자들에게 크게 매혹되어 제사장들을 멸시하지 않았으니, 그들은 예언자들과 제사장들에게 모두 말했으며, 양자와 의논하여 이스라엘의 하나님과, "만유에서 역사하는" 한 성령에게 영광을 돌렸다. 하나님은 "우림" 이나 "예언자들에게" 의하여 그들에게 말씀하실 수 있으며(삼상 28:6), 따라서 그들은 각각을 경시해서는 안 되었다. 제사장들과 예언자들은 서로 질투하지 않았고, 그들 가운데 어떤 차이를 두지 않았다. 그러므로 백성들은 그들 사이에 차이를 만들지 말고, 그들 양자가 소유한 하나님을 감사할지니라. 예언자들은 참으로 제사장들 가운데서 잘못된 것을 비난했으나, 동시에 백성들에게 "제사장의 입술은 지식을 지켜야 하겠고 사람들이 그 입에서 율법을 구하게 되어야 할 것이니 제사장은 만군의 여호와의 사자가 됨이라" 고(말 2:7) 말했다. 하나님의 마음을 알려는 자들은 하나님의 사역자들에게 문의해야 하며, 의심스러운 경우에는 그의 특별한 일이 바로 "성경을 탐구하는" 일인 자들의 충고를 구해야 한다는 점을 명심하자.

4. 그들이 만족하기를 바랐던 경우는 무엇이었는가?(3절) "내가 여러 해 동안에 행한 대로 5월 간에 울며 재계하리이까?" 다음을 살피라.

(1) 포로기 20년 동안 뿐만 아니라, 그들에게 선포된 해방 이후 20년을 보낸 이 시기까지, 그들의 과거에 행한 실천이 무엇이었나? 그들은 겸비와 기도를 위해 엄격히 정해진 금식을 지켰다. 그들의 밀실, 가정, 혹은 그들이 가졌던 예배 집회에서 기회가 있는 대로 경건하게 지켰다.

여기에 나온 경우는, 오직 하나, 5월의 금식을 말한다. 그러나 8장 19절에 의하면 그들이 네 번의 연례적 금식을 준수한 듯한데, 하나는 제 4 월에(6월 17일) 예루살렘 성벽의 붕괴를 기억하여 지켰고(렘 52:6), 또 하나는 제 5 월에(7월 4일) 성전의 불탐을 기억하여 지켰고(렘 52:12, 13), 또 하나는 제 7 월에(9월 3일) 그들의 분산을 완결지었던 그달리아의 살해를 기억하여 지켰고, 또 하나는 제 10 월에(12월 10일) 예루살렘 포위의 시작을 기억하여 지켰다(왕하 25:1).

그들이 이 같은 금식일을 지키고, 이리하여 그로 인해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울고 애통하라고 부르셨던 회개의 섭리 아래 자신을 겸비케 하며, 또 이리하여 그들의 환난에 적응하며 구원에 대해 스스로를 준비시키는 것은 매우 칭찬할 만한 일이었다.



(2) 그들의 현재의 의문은 무엇이었는가? 그들이 이 금식을 계속해야 하는가 그만둬야 하는가였다. 그런데 그 질문은 일인칭으로 되었다. "내가 울리이까?" 그러나 그것은 많은 사람들에 해당하는 경우이며, 한 사람의 만족은 나머지 사람에게도 만족이 될 것이었다. 혹은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그만두었으나, 그 질문자는 다른 사람들의 실천에 의해 좌우되지 않으려 했다. 만일 하나님께서 그로 하여금 그것을 계속하게 하면, 그는 다른 사람이 무엇을 하든 간에 그것을 할 것이다. 그의 금식은 그의 "울음과 재계함" 이라는 말로 묘사되었다. 종교적 금식은 절제, 곧 여기서 우리 자신을 일상적이며 합법적인 삶의 위안으로부터 분리시키는 것으로 일컬어진 절제에 의해서 뿐만 아니라, 여기서 울음이라고 표현된 죄에 대한 경건한 눈물에 의해 엄숙하게 행해져야 한다. "내가 아직도 여러 해 동안에 행한 대로, 영혼을 괴롭히는 날들을 계속해야 합니까?" 그것은 이전처럼(1:12), 마지막 포로기로부터 계산되어, 10년이 된다고 언급된다(5절). 질문은, 만일 하나님께서 지정하신다면, 비록 그것이 육체에 고행이 되더라도 기꺼이 계속하겠다는 것을 암시한다.

[1] 이 금식의 지속을 위해 어떤 말이 언급되었다. 금식과 기도는 언제든지 선행이 되며, 선을 행하는 것이다. 우리는 항상 스스로 하나님 앞에서 겸비해야 할 충분한 이유와 충분한 필요성을 가지고 있다. 이 금식을 던져 버리는 것은 그들이 너무 안일하다는 증거가 될 것이다. 그들은 아직도 비탄 중에 있었으며, 하나님의 진노의 증거 아래 있었다. 그리고 환자가 스스로의 병의 후유증을 감지하고도 치료의 과정을 포기하는 것은 현명치 못한 일이다. 그러나,

[2] 이 금식을 그만 두게 하는 어떤 말도 언급되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 관한 그의 섭리의 방법을 바꾸셨고, 그들에 대한 긍휼의 길로 돌이키셨다. 그렇다면, 그들은 그들의 의무의 방식을 바꿔야 하지 않겠느냐? 이제 신랑이 돌아 왔으니, 왜 "신랑의 친구들이 금식" 해야 하는가? 모든 것이 알맞은 시절에야 아름답다.

그리고 제 5 월의 금식에 관여하는(그것은 그들이 특별히 질문하는 것인데), 성전의 불탐에 대한 기억 속에 보존되어, 다른 어떤 것보다도 대치되기 쉬웠던 듯하다. 그 까닭은 성전이 이제 아주 잘 재건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랫동안 이 금식을 지켜왔으므로, 그들은 충고없이, 또한 요청과, 그 경우에 있어서의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바 없이는 그것을 그만 두려고 하지 않았다. 종교적 예배의 좋은 방식은, 우리가 우리 자신과 남들에게 유익하다는 것을 발견하는 충분한 이유없이 변경되어서는 안 된다. 따라서 성숙한 사려없이 변경되어서도 안 된다는 점을 명심하자.

Ⅱ. 이 상황에 주어진 응답을 보자. 비록 그 질문이 아주 그럴 듯한 것 같으나, 그것을 제안한 자들은 그 문제에 있어서 양심적이 아니었던 것 같다. 그 까닭은 그들이 그 본질보다는 의식에 관해 더 관심을 가졌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들의 금식을 자랑하며, 그 일로 전능하신 하나님을 비난하기를, 그가 그들에게 긍휼을 가지고 곧 돌아오시지 않았다고 했던 것 같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것을 이 여러 해 동안에 행했기 때문이다." 마치 이사야 58장 3절처럼, "우리가 금식하되 주께서 보지 아니하심은 어찜이니이까?" 하는 식이다.

그리고 혹자는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불신이 그들의 질문의 근저에 놓여 있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만일 그들이 그들에게 당연히 있어야 할 신용을 가지고 있었다면, 이제 그들의 기회가 끝났으므로 금식은 중단해야 마땅하다는 것을 의심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의 질문에 대한 첫 대답은 "그 땅의 백성들" 에게 뿐만 아니라, 이 금식을 규정하였고, 아마 그들 중 일부는 그것을 지킬 것에 찬성하여 그들 자신의 어떤 목적을 달성하려고 했던 "제사장들" 에게 향해진, 위선에 대한 날카로운 비난이다. 그들 모두는, 자기들이 금식함으로써 하나님이 자기들에게 크게 빚진 자가 되었다고 생각했으나, 실은 그들이 매우 오해하고 있었던 것이었음을 알라. 왜냐하면 만일 그들이 더 나은 방식과 더 나은 의도로 금식을 준수하지 않았다면, 그들이 그에게 용납되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1. 그들이 선한 것을 행했으나 올바르게 행해지지 않았다(5절). "너희가 금식하고 애통하였다." 그들은 비록 그 의무가 몸에 괴로운 것이었으나, 그것을 등한시하거나 빼먹지 않았다(그들의 금식은 "항상 내 앞에" 있었다. 시 50:8). 그러나 그들은 그 금식을 바르게 하지 않았다. 각자의 의무를 구하러 오는 자는 그들의 잘못을 책망받으려는 기꺼운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점을 명심하자. 그리고 의무의 형식에 열심하는 자들은 그들의 의무의 내용에도 마땅히 가져야 할 관심을 가지고 있는지 스스로 신실하게 검토해야 한다.

(1) 그들은 금식 중에 하나님을 염두에 두지 않았다. "그 금식이 나를 위하여, 나를 위하여 한 것이냐?" 그는 그들 자신의 양심에 호소하신다. 그들은 그들이 그것에 신실하지 않아 왔다는 것을 자신에 대해 증언할 것이니, 사람의 마음보다 위대하시며 모든 것들을 아시는 하나님께서는 더욱 더 그리하실 것이다. 너희는 "너희가 나를 위해 전혀 금식하지 않았음을" 매우 잘 알고 있다. "그 금식이 나를 위하여 한 것이냐?" 의무의 몸통과 형태는 있었으나 그 생명, 영혼, 힘은 없었다. 그것은 "나를 위하여 나를 위하여 한 것이냐?" (반복은 주요 문제로서, 큰 강조가 놓여 있음을 암시한다) 즉 그것과 다른 거룩한 의식들이 하나님에게, 그에게, 그의 말씀을 우리의 율례로, 그의 영광을 우리의 목표로 주목하여 행해지며, 그것들을 지킴에 있어서, 그를 기쁘시게 하기를 구하고, 그의 은혜를 얻고 그에게 우리 자신을 드러내려고 진지하게 고심하는지? 이것이 결핍되었을 때는 모든 금식이 놀이에 불과했다. 금식은 하지만 하나님을 위해 하지 않는 것은 그를 조롱하며 격노케 하는 것이었으며, 그를 기쁘시게 할 수 없었다. 이세벨의 금식처럼 금식을 죄에 대한 옷으로 삼는 자나, 바리새인처럼 그것에 의해 스스로 사람들의 칭찬을 받는 법정으로 삼는 자, 혹은 아합처럼 그들의 마음은 겸손하지 않으면서 겸손의 외적 표현에 머무르는 자들, 그들은 "하나님을 위하여, 진정 그를 위하여 금식하는 것인가?" "이것이 어찌 내가 기뻐하는 금식이 되겠는가?" (시 58:5) 만일 우리의 금식이 비록 잦고, 길고, 엄격하다고 해도, 그것의 엄숙성이 경건한 애정에 날을 세우고, 기도를 촉구하고, 경건한 애통을 증가시키고, 우리 마음의 기품을 바꾸고 생의 과정을 더 낫게 아니하면, 그것은 전혀 의도에 부응하지 않으며,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그 자신에게 행해진 것으로 받지 않으실 것이다.

(2) 그들은 그들이 먹고 마실 때의 눈으로 그들의 금식 중에 스스로를 주목했다(6절). "다른 날에 너희의 먹으며 마심이(아니 아마 너희의 금식일들, 즉 네가 이유를 발견했을 때도 스스로 지키지 않고 자유롭게 먹고 마실 때), 전혀 자기를 위하여 먹으며 자기를 위하여 마심이 아니냐? 너희는 항상 마음대로 행하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왜 너희는 이제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파 하는 것으로 가장 하는가? 너희의 종교적 축제와 감사제에 있어서 너희는 너희의 금식 때처럼 역시 하나님께 눈을 돌리지 않아 왔다."

혹은, 오히려 이것은 그들의 일상 음식을 지적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들은 먹고 마심에 있어서처럼 그들의 금식과 기도에 있어서도 하나님의 영예를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자연적이든 일반적이든, 또 종교적이든 그들의 모든 행위의 중심은 여전히 저들 자신이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위해 먹고 우리 자신을 위해 마시는 때는 먹고 마시는 목적을 잃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몸이 하나님을 섬김에 있어서 우리의 영혼을 받들기에 합당할 수 있도록 "먹든지 마시든지, 또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해야 한다는 점을 명심하자(고전 10:31).

2. 그들이 행했어야 했을 주된 선행은 행해지지 않은 채 남았다(7절). "여호와가 이전 선지자로 외친 말을 너희가 청종할 것이 아니냐? 그렇다, 너희는 금식일에 행했어야 했다. 금식일에 너희가 놓인 심판에 대한 너희의 슬픔의 증거로 울며 재계하는 것으로 충분치 않았고, 오히려 너희는 예언자들의 성경을 찾아 하나님께서 너희의 선조들과 다투신 이유가 무엇이었는지를 보고, 그들의 불행에 의해 경계를 받아 그들의 허물의 발자취를 밟지 않도록 했어야 했다. 너희는 우리가 금식 중에 행했던 대로 행하리이까하고 묻는다. 아니다, 너희는 너희가 아직 행하지 않은 것을 행해야 한다. 너희는 너희의 죄들을 회개하고 너희의 생활을 개혁해야 한다. 이는 우리가 이제 너를 불러서 하게 하는 것이요, 이전 예언자들이 너희의 선조들을 불러서 하게 했던 것과 동일한 것이다."

죄가 그들에게 부여했던 불행에 더욱 감화를 받게 하고, 그들이 죄를 회개하게 하고, 그들로 하여금 그들 나라의 이전 번성기의 상태를 기억하게 한다. 그때 예루살렘은 "백성이 거하여 형통하였으나," 지금은 황폐하여 애통에 잠겨있다. 지금 폐허가 된 "사면 성읍" 에 당시에는 거민이 있었고 "화평하였다." 그와 같이 나라에는 인구가 매우 많았다. "평원의 남방에 사람이 거하였으니," 전혀 방비되지 않았으나 그들이 안전하게 살았고, 곡식이 많이 산출되어 풍족하게 살았다. 그러나 그때 하나님은 "예언자를 통해 그들에게 외쳤으며," 진지하게, 그들이 성가실 정도로 외쳐 그들의 길과 행위를 고치려 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들의 번영이 곧 끝났을 것이다. 스가랴 예언자는 말한다. "이제, 너희는 알지니, 너희 조상들이 그들에게 내릴 심판을 막으려고 했어야 했던 일이 또다시 심판의 제거를 위해 너희에게 요청된다는 것을 주의하고, 깨닫으라. 그리고, 만일 너희가 그것을 행하지 않는다면, 너희 모든 금식과 애통은 아무 의미도 없는 것이 되리라." 후기 예언자들의 말은 이전 예언자들의 말과 일치한다는 것을 명심하자. 그리고, 백성이 번영에 처해 있든 역경에 처해 있든, 그들은 그들의 죄를 떠나 그들의 의무를 다하도록 부름받아야 한다. 이는 여전히 모든 노래의 후렴이어야 한다.

 

7:2 없음.

 

7:3 없음.

 

7:4 없음.

 

7:5 없음.

 

7:6 없음.

 

7:7 없음.

 

7:8

이스라엘의 고의적 불순종 (스가랴 7:8-14)

7절에서 언급된 내용, 즉 그들은 "이전 예언자들이 외친 말을 청종해야 할 것" 이라는 점이 여기서 부연된다. 이는 그들이 꼬집어서 금식을 계속할 것인가에 대한 가부를 물었을 때도, 그들의 죄를 계속 행하던 이 위선적 질문자들에 대한 경고가 된다. 이 예언자는 이전에 그들로 하여금 예언자들의 부름에 대한 그들의 선조들의 불순종과, 그 결과가 무엇이었는가를 기억나게 했는데(1:4-6), 이제 여기서 다시 반복한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들의 해로움은 우리의 경고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들의 죄로 인하여 옛 이스라엘 위에 임한 하나님의 심판은 우리 기독교인에게 충고가 되기 위하여 기록되었고(고전 10:11), 우리는 우리 자신의 시대의 유사한 섭리를 동일하게 적용해야 한다.

Ⅰ. 여기서 이 예언자는 이전 예언자들이 그들의 선조들에게 했던 설교의 서두를 반복한다(9,10절). 그 까닭은 바로 그 동일한 일이 이제 그들에게도 요구되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제 너희에게 말씀하신다. 너희의 선조들에게도 이렇게 말씀하셨었다. 진실한 재판을 행하라." 여기서 그들에게 요구되는 의무들은, 그들의 선조들의 평안을 연장할 수 있었던 것으로서, 이들의 평안의 회복이었음에 틀림없다. 또 금식을 지키고 희생 제물을 드리는 것이 아니라, "인애의 긍휼을 베풀라." 이것은 비록 어떤 예언자들이 주장해 왔던 것은 아니지만 자연의 빛과 법에 의해 그들이 해야 하며, 공공 복리와 평화를 향한 직접적 경향성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서, 하나님이 아니라 그들 스스로가 그 이익을 보게 되는 그런 의무들이다.

1. 관리들은 공평하게 정의(재판)를 집행하되, 개인적인 정리에 의하지 말고 법과 사건의 시비곡직에 따라서 해야 한다. "진실한 재판을 행하며, 일단 재판한 다음에는 그것을 집행하라."

2. 이웃들은 서로 온유한 관심을 가져야 하며, 서로 악을 행하지 말아야 할 뿐만 아니라, 서로 그들의 힘이 닿는 데까지 모든 선한 직임을 행하기에 부족함이 없어야 한다. 그들은 소송 사건이 요구하는 것처럼, "그의 형제를 대하듯 모든 사람에게 긍휼과 동정을 표시해야" 한다. 다른 사람들의 환난 뿐만 아니라, 그들의 연약함도 동정심있게 살펴져야 한다. Hanc veniam petimusque damusque vicissim - 즉 이 친절을 우리가 구하고 행한다.

3. 그들은 자기들에게 도움이 안 되는 자들, 연약한 자들을 혹심하게 대해서는 안 된다. 그들은 장사로나 법의 핑계로 "과부와 고아, 나그네와 궁핍한 자를" 학대해서는 안 된다(10절). 가장 약한 자들은 그들이 가장 약하다는 이유로, 벽에 던져져서는 안 된다. 권리를 요구하여 그것을 회복할 능력이 있는 자들에게 권리를 부인하지 말아야 하는 것은 사람들 때문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진노 때문이 아니라 양심을 위해서도, 우리로부터 권리를 강제로 빼앗을 힘이 없는 자들에게 그들 자신의 것을 주어야 한다. 또는 이것은, 다른 사람들에게 가혹히 하는 것은 고아들과 과부들에게 가혹한 것임을 암시한다. 아니, 우리가 마땅히 할 바대로 그들을 구해 주고 돕지 않는 것이, 사실상 그들을 박해하고 있는 것이다.

4. 그들은 어떤 사람에게나 악을 행하지 말아야 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바라거나 생각하는 일조차 말아야 한다. "너희는 남을 해하려 하여 심중에 도모하지 말라. 그것을 계획하지 말라. 그것을 원하지 말라. 아니, 그것을 공상함으로써 스스로 즐기지조차 말라."

하나님의 법은 마음에 제한을 주며, 오락을 금하고, 악하고, 심술궂고, 악의에 찬 생각을 받아들이는 것을 금한다. "삼가 너는 마음에 악념을 품지 말라" (신 15:9).

Ⅱ. 그는 그들의 조상들의 강퍅함과 불순종을 서술한다. 그들은 이 권고와 조언이 번번히 하나님의 이름으로 주어졌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종류의 사악함과 부정의를 지속했다. 이러한 취지에 대한 다양한 표현이 여기 산적되어 있는데(11,12절), 이는 "하나님에 대한 증오며, 그의 율법에 대한 불복종이며, 참으로 순종으로 여겨질 수 없는" 저 육체에 따르는 마음의 완고함을 설명하고 있다. 그들은 마음이 굳고 고집불통이었으며, 순전히 율법에 대한 반대의 정신으로부터 계속 율법을 범하였다.

1. 그들은 할 수 있었으나 예언자들의 말을 듣는 범위 내에 들어오려 하지 않았고, 멀리 떨어져 있었다. 혹은 그들은 예언자들의 말을 듣지 않을 수 없었으나 그것에 주의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그들은 청종하기를 싫어하며," 마치 듣지 못한 듯이 다른 쪽을 바라 보았다.

2. 그들은 그들에게 한 말을 들었으며, 짐작되듯이, 처음에는 그것에 응하는 듯하였으나 달아났으며, 멍에에 익숙하지 않은 황소처럼 "어깨를 저었으며," 하나님의 계명의 "쉬운 멍에와 가벼운 짐을" 지려고 하지 않았다. "그들은 굳은 어깨로 향했다" (그 말의 뜻이 그렇다). 그들은 일에 그들의 어깨를 내어 놓았던 것 같은데, 이제 다시 그 어깨를 움츠렸다(렘 34:10, 11 처럼). 그들은 "내가 가겠나이다" 고 말했으나 "가지 않았던" 아들과 같으니, 속이는 인사와 같았다.

3.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편견으로 그들의 마음을 채웠고, 그들이 들었던 모든 선고에 대해 자신을 구축하게 하였던 반박을 이모저모로 가졌다. "그들은 귀를 막고, 들으려 하지 않았으니," 귀머거리 독사 같았고(시 58:4), 들으려 하지 않았다. 그 말대로 "그들 자신의 귀를 무겁게 하는" 자들처럼 심한 귀머거리는 없다.

4. 그들은 이 명령을 강화하려고 그들에게 말해진 어떤 것도 그들에게 영향을 미칠 수 없으리라고 확신했다. "그들은 그 마음을 금강석 같게 했다." 이 돌은 깍여진 돌 중에 가장 단단한 것이며, 혹은 "부싯돌" 같게 했으니, 이 돌은 석공이 다른 돌을 채석장에서 쪼아서 만들 듯이 그 모양을 쪼아낼 수 없는 것이다. 뻔뻔한 죄인의 마음처럼 단단하고, 두드려 늘이기 어렵고, 고집적인 것은 없다. 그리고 그 마음이 굳은 자들은 스스로 굳게 하니, 하나님께서 그들을 비방하는 뜻에서 버려두시어, 그 마음이 강퍅하고 회개하지 않도록 하신 것은 정당한 일이다. 이 완악한 죄인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기록된 말씀에 의해, 곧 "모세의 율법에 의해," 그리고 그들에게 선포된 "예언자들의 말" 에 의해 그들에게 하신 말씀을 청종치 않으려고 고의적으로 그들의 마음을 굳혔다. 그들은 "모세와 예언자들" 을 가졌으나, 그들의 말을 듣지도 않고, 죽은 자로부터 한 사람이 그들에게 보내졌는데도 복종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예언자들의 말" 은 만군의 여호와께서 보내셨고 그들에게 향하게 했으며, 그가 즉시 예언자들 속에 있는 "그의 영에 의해" 그들(말)을 보냈으나, 개의치 않았다. 그리하여 그 말을 무시함으로써 그들은 하나님 자신을 모욕했고 "성령을 거스렸다." 왜 인간이 선하지 않는가 하는 까닭은 그들이 그렇게 되려하지 않는 데 있다는 점을 명심하자. 그들은 고려하지 않으려 하며, 응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만일 네가 비방한다면 너 홀로 그것을 짊어질 것이다."

Ⅲ. 스가랴는 그것이 그들의 선조에게 끼친 치명적 결과를 보여준다. "큰 노가 만군의 여호와께로서 나왔도다." 하나님은 그들을 매우 못마땅하게 여겼으며, 그것은 정당한 일이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합리적이고 유익이 되는 것 외에는 요구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거절했으며, 그것도 역시 가장 무례한 태도로 그리했다. 어떤 주인이 자기 종에게 비난받는 것을 참을 수 있겠는가? 이와 같은 복음에 대한 거역할 수 없는 적대는 율법과 예언자에 대한 것이었는데, 유다 교회의 최후 세대에 "끝까지 임하는 (최고의) 노하심" 을 가져왔다(살전 2:16). 그 권위가 명백한 "만군의 여호와" 께 대한 큰 죄는 그 권세가 저항할 수 없으신 "만군의 여호와로부터의 큰 진노" 를 가져온다. 그리고 그 효과는,

1.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닫았듯이, 하나님께서도 그들의 기도를 듣지 않으신다는 사실이었다(13절). 그들이 번성할 때 그들의 죄로부터 떠나라고 "외쳤으나 그들이 듣지 않고" 계속 범죄했듯이 그들의 환난날에 심판을 치워달라고 "그들이 하나님께 외쳐도," 하나님은 들으려 하시지 않고, 그들의 재난을 더욱 강화하셨다. 스스로 교만의 꼭대기에 올라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도, 고통이 임했을 땐, 그에게 부르짖었다. "여호와여 환난 중에 그들이 당신을 찾았나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시고 지키시는 것이 있으니 곧 "사람이 귀를 돌이키고 율법을 듣지 아니하면 그의 기도는 가증하리라" (잠 28:9; 1:24 등). 마음속에 있는 죄는 확실히 기도의 성공을 방해할 것이다(시 66:18).

2. 그들이 하나님에 대한 의무와 충성으로부터 달아났고, 변덕스럽고 불안한 영혼을 가지고 있었듯이,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흩으시고 회오리바람 앞의 쭉정이처럼 그들을 내동댕이쳤다. "그는 회오리바람으로 그들을 알지 못하던 모든 열국으로 헤쳤다." 따라서 그들은 그 열국으로부터 아무런 친절도 받을 것을 기대할 수 없었다(14절).

3. 그들이 그들의 나라의 모든 법을 어겼듯이, 하나님께서 그 나라의 모든 영광을 빼앗으셨다. "그들의 땅이 그들 이후로 황무하여 왕래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달랴의 살해에서 비롯된 남은 유다인의 흩어짐 이후에 두 지파의 왕국이었던 온 땅에는 전혀 거주민이 없게 되었다. 유다인이 70년 포로기 이후 돌아오기 전까지, 거기에는 남자도 여자도 아이도 없었다. 아니, 그 나라를 가로질러 놓여 있었던 그 도로들이 황폐하게 되었던 것 같은데(아무도 지나가지 않았고 다시 오지 않았다), 이는 그 안에 임할 긍휼의 암시를 가지고 있었다(비록 그들이 그것으로부터 추방되었으나, 그것은 그들의 복귀를 위해 계속 비어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당분간 심판을 더욱 더 비참하게 보이도록 했다. 그처럼 여러 해 동안 아무도 살지 않던 땅은 얼마나 비참한 광야였을까! 그리고 그것은 그들 스스로의 탓이었다. 그들 자신의 악함이 "아름다운 땅을 황무하게 한" 것이다. 그것을 행한 자는 갈대아인들이 아니었다. 아니다, 그들이 스스로 그렇게 행하였다. 땅의 황폐는 그 거주민의 악함에서 기인한다(시 107:34). 또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그들의 완고한 불순종에서 기인했다. 그리고 현 세대는 죄가 그 아름다운 땅을 얼마나 황폐하게 만들었는가를 보았으나, 거기서 경고를 받지 않으려 했다.

 

7:9 없음.

 

7:10 없음.

 

7:11 없음.

 

7:12 없음.

 

7:13 없음.

 

7:14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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