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의 장중한 설교 (예레미야 26:1-6)
본문에서 우리는 예레미야가 행한 설교를 대하게 된다. 이 설교가 계기가 되어 그는 생명을 잃을 위험에 처하였다. 그 내용이 본문에 그대로 기록되고 있다. 예레미야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메시지를 전했다고 죽이는 것은 정당치 않다는 것과 또 그를 박해한 자들은 악하고 분별력 없는 자들임을 판단할 수 있는 사람들이 어느 시대나 있어서 그들에 의하여 그 내용이 전해져 온 것이다.
Ⅰ. 하나님은 예레미야가 이 설교를 어디서, 언제, 또 누구에게 전해야 하는지를 지시하셨다(2절). 이는 예레미야로 하여금 그가 장소와 시기를 산정하는데 있어서 경솔하였다는 비난을 받지 않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또한 그가 메시지를 자기 편한대로 즉 길 모퉁이에 숨어서 그가 믿을 수 있는 친구들에게만 전하였다는 말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 또한 예레미야에 있어서는 그가 좀더 조심스럽게 행동하지 못하였다고 괴로워하지 않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하나님은 그에게 "여호와의 집 뜰에서" 전하라고 명하셨다. 이곳은 예레미야의 숙적인 제사장들의 특별 관할구에 속해 있었다. 그러므로 제사장들이 강열하게 그를 반박하리란 것은 틀림없는 일이었다. 또한 말씀의 내용을 볼 때 3대 명절 중 한 명절에 그가 이 설교를 한 것이 틀림없는 것 같다. 그때가 되면 "유다 모든 성읍에서 여호와의 집에 와서 경배하려고" 사람들이 모여들기 때문이었다. 생각건대 이들 예배자들은 제사장들을 대단히 존경하고 있을 것이요, 그들의 판단에 따라서 사람을 판단하였고 그러다보니 그들이 중상하는 사람이라면 같이 격분하여 그들 편에 서서 예레미야를 대적하므로 제사장들의 힘이 될 것은 뻔한 일이었다. 그러나 어떠한 악조건도 그를 동요시키거나 그의 기세를 꺾지 못하였다. 이 모든 위험을 무릅쓰고 예레미야는 말씀을 전해야했다. 말씀을 백성들에게 설득시키지 않으면 그 말씀이 그들에게 화로서 임할 것이었다. 예언자가 유혹을 받아 문제를 온건하게 전할 수도 있었다. 그리하여 하나님이 자기에게 말씀하신 것보다 듣기 좋게 청중들에게 전하거나 도전적인 표현은 보다 그럴 듯한 표현으로 바꿀 수도 있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한 말씀도 감하지 말고" 사실 전부를 그대로 전하라고 특별히 강조하신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에게 "모든 말" 을 전하라고 명령받았다. 하나님의 사자들은 그들에게 주어진 지시를 꼭 지켜야만 한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인간들을 기쁘게 하기 위하여 또는 자신들에게 해가 돌아오지 않게 하려고 그 지시를 조금이라도 변경해서는 안 된다. 그 교훈은 더하거나 덜할 수 없는 성질의 것이다(신 4:2).
Ⅱ. 하나님은 그에게 무엇을 전해야 할까를 지시하셨다. 그 말씀은 누구도 거역할 수 없으며 또 범하는 사람이 있더라도 계속 전파되어야만 한다고 하신다.
1. 만일 그들이 "죄를 회개하고" 돌이키면 비록 그들이 지금 임박한 파멸의 위험과 심판 아래 있지만 심판과 파멸이 중지되고 하나님께서 그들과 더 이상 쟁변하시지 않으리라고 약속하신다(3절). 이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를 그들에게 보내셨다. 애를 써서 그들이 죄에서 돌이키면 하나님은 그의 노를 돌이키시고 그들을 위협하고 있는 심판을 거두시기를 바라신다. 하나님은 그렇게 하시기를 기뻐하시는 정도가 아니라 열망하시고 계셨다. 그들이 지금 돌이키면 하나님은 그의 공의와 거룩함에 손상받으시지 않고 심판을 거두실 수 있었다. 하나님께서 얼마나 관대하게 기다리시나 생각해 보자. 그는 기다리시되 우리에게 마땅한 자격이 갖추어질 때까지 또 우리가 그의 은혜를 받기에 합당할 때까지 기다리신다. 그리고 기다리시면서 그는 그 동안에 우리를 돌이키시기 위하여 온갖 방법을 다 시도해 보신다.2. 반대로 그들이 계속 하나님의 온갖 부름에 불응하고 불복종을 고집한다면 결국 예루살렘 성과 전이 파멸하는 것으로 끝날 것이라 하신다(4-6절).
(1)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요구하신 것은 그가 그들에게 말씀하신 바를 준행하라는 것이었다. 즉 기록으로 또는 사역자들을 통하여 주어진 말씀을 지키라는 것이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들 앞에 베푼 모든 율법을" 그들이 준수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즉 모세의 율법의 관례와 계명들이다. 또한 그들은 "그의 종 예언자들의 말씀을 들어야했다." 예언자들이 그들에게 강요한 것은 다만 모세의 율법대로 살라는 것이었다. 이 율법은 그것으로 그들의 영혼을 시험할 시금석으로 그들에게 주어진 것이었다. 바로 이 율법에 의하여 그들은 거짓 선지자들과 구분되었다. 이 거짓 선지자들은 율법에서 백성들을 멀어지게 하였고 율법으로 그들을 인도해 주지는 못하였다. 이 율법은 바로 하나님 자신이 그들에게 베푸신 것이었다. 예언자들은 바로 하나님의 종으로 그에 의하여 직접 그들에게 파송된 것이었다. 그리고 그들을 위하여 상당한 관심과 염려를 나타내셨다. 그는 백성들이 너무 늦게 옴으로 마음이 굳어져 고치기 어렵게 될까 하여 부지런히 예언자들을 그들에게 보내셨다. 지금까지 그들은 율법에도 예언자들에게도 순종치 않았다. 그러므로 본문에 "너희가 전에는 듣지 아니하였거니와" 라고 말씀하신다. 그가 바라시는 것이 있다면 그들이 그가 말씀한 것을 경청하고 그것을 그들의 규례로 삼는 것이었다. 이것은 무리가 안 되는 요구였다.
(2) 그들이 말씀에 불순종할 경우 경고가 주어졌는데 그것은 예루살렘 성과 그 성안에 있는 성전에 관한 것이었다. 즉 예루살렘성과 그 전이, 실로와 거기 있던 성막이 하나님의 율법대로 행하기를 거절하고 그가 보낸 예언자들에게 순종치 않으므로 당한 결과를 받게 되리라는 것이다. 그 때의 예언은 사무엘에게서 시작된 것이었다. 재판관의 선고가 공평치 못해서야 되겠는가? 또한 ut parium par sit ratio-즉 똑 같은 사건을 다르게 취급하는 것을 공정한 판단이라 할 수 있겠는가? 예루살렘이 죄를 짓는데 실로와 같았다면 처벌받는데 있어서 실로와 어째서 같지 않을 수 있겠는가? 처벌 이외에 무엇을 바랄 수 있겠는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죄의 결과에 대하여 경고하신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7:12-14 를 참조). 예루살렘의 영광이었던 성전이 파괴되었을 때 그 성은 저주를 받을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성전이야말로 예루살렘 성의 축복의 근원이었던 것이다. 즉 "소금이 맛을 잃으면 아무런 쓸데도 없다" 는 말씀과 같은 경우라 하겠다. 성전의 파괴는 그 도시에 저주가 된다. 예루살렘 멸망은 저주의 전례가 될 것이라 한다. 그래서 누구든지 어느 성을 저주하려면 "하나님이 이곳을 예루살렘처럼 멸하실진저!" 라고 하게 될 것이라 한다. 하나님의 명령에 복종하지 않으려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저주를 자초하게 될 것이란 사실을 기억하자.
예레미야가 전한 말씀 때문에 기소됨 (예레미야 26:7-15)
앞의 단원에서 볼 수 있었던 것 같은 설교 즉 그렇게도 분명하며 실제적이고 또 합리적이면서도 서정적인 그리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선포된 설교는 이 백성에게 일지라도 역사를 일으켜 그들을 회개와 개준의 기회가 안겨지리라고 누구나 기대하였으리라. 특히 그들은 예배드리고자 모여서 이 말씀을 들었으니 더욱 그렇게 기대할 수 있으리라. 그러나 이 말씀이 그들에게 각성을 주기는커녕 그들의 부패를 퍼트려 놓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 이 사실이 설교의 결과를 설명해 주고 있는 본문에서 나타난다.
Ⅰ. 예레미야가 이런 설교를 행한 것은 범죄라고 고소되고 있다. 이 때문에 예레미야가 이 말씀을 전할 때 들은 사람들은 "제사장들과 거짓 선지자들과 모든 백성들" 이었다(7절). 그들은 그의 말을 끝까지 듣기는 하였던 것 같다. 그리고 그가 선포할 때 그들은 그를 방해하지도 않았고 또 "여호와께서 명하신 말씀을 모든 백성에게 고하기를 마칠 때까지" 그의 말을 중단시키지도 않았다(8절). 이러한 면에서 그들은 하나님의 사역자들을 박해한 일부 다른 박해자들이 행한 것보다는 그를 공정하게 대하였다고 하겠다. 그들은 예레미야에게 그가 하고자 하는 말을 다 하게 하였다. 그러나 그들이 이렇게 행한 것은 그를 흠잡고 더 큰 구실을 얻어내려는 나쁜 의도에서였던 것으로 보여진다. 그들은 그 이상의 책을 잡지 못하였으나 지금까지 들은 것만으로도 고소할 근거는 충분히 된다고 생각하였다. 즉 예레미야가 그의 말 가운데 "이 집이 실로같이 되리라" 고 말한 것을 그들은 책잡았다(9절). 그러나 그들은 예레미야의 말을 액면 그대로 표현하지 않고 자기들에게 유리하게 왜곡하여 표현하였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이르기를 "너희가 만일 다시 듣지 아니하면 내가 이 집을 실로같이 되게 하리라" 고 하였었다. 즉 그들이 비탄 속에서도 하나님의 손길을 기억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목소리를 청종하지 않고 자신의 힘을 의지하여 하나님께 도전하면 "그가 이 거룩한 곳을 저주거리가 되게 하리라" 고 하신 것이다. 우리의 주 예수님과 스데반에게도 예레미야에게 저들이 가한 것 같은 범행이 자행되었던 것이다. "이 집이 실로같이 되리라" 고 예레미야가 말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으로 그가 할 말을 다 하였다고 볼 수는 없다. 그가 다윗처럼 "저희가 종일 내 말을 곡해한다" 고(시 55:5) 불평하여도 잘못이라고 할 수 없었다. 본문의 말씀을 볼 때 우리의 언행이 이같이 곡해된다고 해서 우리가 이상스러워 할 것은 없다는 사실을 배우게 된다. 그들은 고소의 근거가 매우 박약하였으므로 부당하게 "이 집이 실로와 같이 되리라" 는 말씀을 근거로 "네가 정녕 죽으리라" 고 선고하였던 것이다. 예레미야가 말한 것은 솔로몬이 봉헌한 성전을 하나님이 열납하시면서 한 말씀과 같은 것이었다(왕상 9:6-8). 그때 하나님은 "만일 너희가 아주 돌이켜 나를 좇지 아니하면 이 전이라도" 포기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이같이 그는 하나님이 전에도 하신 말씀을 한 것에 불과한데도 사형을 언도받게 된 것이다. 그들이 이렇게 격분한 것은 성전의 명예를 지키려는 데서 비롯된 것이 아니었고 오히려 죄와 헤어지지 않으려는 단호한 결심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들은 스스로를 기만하여 말하기를 "여호와의 전" 이 그들을 보호해 줄 것이라 하였다. 그러므로 그들은 예레미야가 잘하였든지 못하였든지 "정녕 죽으리라" 고 말할 수 있었던 것이다. 제사장들과 예언자들의 이러한 외침이 군중들을 자극시키었다. 그리하여 "모든 백성이 예레미야를 대적하여 모여들었다." 즉 소요를 일으켜 그를 쳐죽이려고 그들은 그의 주위로 모여들었다. 그들은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를 외치면서 함께 모였다. 사람들의 수효가 불어날수록 소요도 점점 더하여졌다. 그들 가운데는 단지 무슨 일인가하는 호기심 때문에 모인 무리들도 있었다.
Ⅱ. 예레미야는 최고 법정에서 그들에 의하여 설교 때문에 비난을 받고 기소되었다.
1. 그를 재판한 재판관들은 "유다의 방백들" 이었다. 방백들은 이스라엘의 장로직을 겸직하고 있으면서 다윗 왕가에서 관직을 부여받고 있었다. 그들은 성전에서 소요가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왕궁으로부터 달려왔다. 그들은 상례대로 "여호와의 집" 재판석에 앉아서 이 사건을 조사하고 또 무질서한 가운데 사건이 전개되지 않도록 힘썼다. 그들은 "여호와의 집 새문 어구에 앉고" 본문에서와 같이 고등 형사 재판 위원을 특별히 선임하여 재판을 착수하였다.2. 제사장들과 예언자들이 예레미야의 기소자요 고발자들이었다. 그들은 예레미야를 격렬히 비난하였다. 그들은 "방백들과 모든 백성들" 재판관과 배심원들에게 이 사람을 죽여야 합당하다고 호소하였다(11절). 부패한 제사장들과 거짓 선지자들은 여호와의 선지자들에게는 언제나 최대의 무서운 적이었다. 그들은 자기들이 섬김을 받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예레미야의 설교 같은 것은 그들에게 장애가 된다고 여겼다. 예레미야가 왕궁에서 왕의 가족(22:1 등) 궁전 등이 멸절할 것을 예언하였을 때 왕족들도 마찬가지로 부패하였지만 그 말씀을 참고 들었지, 그렇다고 그들이 그를 박해하는 일은 없었다. 그러나 예레미야가 "여호와의 집" 에 이르러 제사장들의 비위를 지적하고 거짓 선지자들의 거짓말과 아첨을 반박하자 그를 죽이는 것이 당연하다는 재판이 전개된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거짓으로 예언한 예언자들이요 "자기 권력으로 다스리던 제사장들" 이었기 때문이었다(5:31). 제사장들과 선지자들이 예레미야를 고소할 때 강조한 사실은 그가 성에 관하여 말한 내용이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방백들이 그 사실에 관하여 가장 관심이 있을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예레미야가 한 말씀에 관하여 백성들에게 그들이 호소할 때는 "그가 말한 것을 너희가 들었도다. 그것이 곧 증거요" 라고 말하였다.
Ⅲ. 예레미야가 백성들과 방백들 앞에서 자신을 변호함. 예레미야는 그가 한 말을 부정하거나 그 말씀 중 어떤 것도 제하여 버리려고 하지 않았다. 그는 자기가 말한 내용을 비록 생명을 내놓는 일이 있다 하여도 고수하였다. 그는 "이 집과 이 성" 에 대하여 예언하였음을 인정한다. 그러나 그는 다음과 같은 점을 들어 변명한다.
1. 예레미야는 자기가 한 예언이 하나님의 권위에 의한 것으로서 무슨 악의가 있어서나 반감이 있어서 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또한 그의 예언이 자기 조국에 대한 악의에서 비롯된 것도 아니요 교회나 국가 조직에 대한 불만때문도 아니었다. 다만 "여호와께서 나를 보내사" 예언하였노라고 한다. 그는 여호와께서 그를 보내서 예언하였노라는 말로 변명을 시작하여(12절) 그 말로 결론을 맺었다. 이 사실이 바로 그를 끝까지 버티게 하여 준 근거가 되기 때문이었다(15절). 그러므로 그는 "여호와께서 진실로 나를 보내사 이 모든 말을 너희 귀에 이르게 하셨음이니라" 고 하신다. 주의 사역자들은 그들이 하늘에서 받은 교훈을 엄수하고 있는 한 어떠한 반대에 직면한다 할지라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그것이 비록 지옥의 세력이든 지상의 세력이든지 말이다. 예레미야는 자기가 예언자에 불과함을 호소한다. 예언자인 이상 그가 메시지를 충실히 전달하였으면 그에게는 아무런 책임이 없는 것이다. 더구나 그는 여호와가 보낸 사자였다. 그와 마찬가지로 그들도 여호와를 중히 여기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는 그들에게 존경을 받아야 마땅한 것이었다. 그가 말하였다면 다만 하나님이 그에게 말하고자 한 것을 전했을 뿐이었다. 그러므로 그는 하나님의 보호 아래 있는 것이다. 그들이 하나님이 보낸 대사를 대적하는 것은 그를 보낸 왕 중 왕의 진노를 자초하는 길이었다.2. 예레미야는 그가 좋은 의도로 예언하였다는 사실을 그들에게 제시한다. 그리고 그들이 그 예언을 선의로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그들의 결점이라고 하였다. 그의 예언은 최종적인 형의 선고가 아니라 정당한 경고였다. 그러므로 그들이 만일 그 경고를 수납한다면 형의 집행을 막을 수도 있는 것이었다(13절). 그는 이렇게 말한다. "누가 내게 위험을 예고하여 그 위험을 피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하였다면 내가 그 사람을 어떻게 나쁘게 보겠는가? 오히려 그가 내게 베푼 최대의 친절에 대하여 그에게 감사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는 또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내가 이 성을 향하여 불길한 예언을 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너희가 지금까지 걷던 길과 행위를 버리면 경고되었던 파멸도 저지될 수 있는 것이다. 내가 너희를 경고한 목적이 바로 이 때문이었도다" 라고 한다. 교역자들이 화와 저주에 대하여 설교한다고 불평하는 것은 옳지 않다. 그 설교를 하는 것은 그들을 고통의 지옥에 들어가지 않도록 하고 하늘 나라와 구원을 주기 위한 것이다.
3. 그러므로 예레미야는 그들이 그를 계속 대적할 경우에 당할 위험에 대하여 경고한다(14절). "내게 대해서는 무슨 일을 당하여도 큰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보라 나는 너희 손에 있느니라. 너희가 알다시피 내게는 아무런 힘도 없고 너희를 반대할 세력도 없느니라. 또한 구차하게 내가 살려고 애쓰는 것도 아니다. 그러니 너희 소견에 선한 대로하라. 내가 사형장으로 끌려간다 할지라도 양처럼 끌려가겠노라" 고 한다. 하나님의 사역자들을 전하는 일에는 열심이어야 하며 고통을 당할 때는 잠잠해야 하며 그들을 지배하는 권력자들에는 복종하는 태도를 지녀야 한다. 비록 그 권력자들이 그들을 박해할지라도 말이다. 그러나 그들 본인들에 관하여는 그들이 그를 죽이면 그들에게도 위험이 닥칠 것을 말한다. "너희는 정녕히 무죄한 피로 너희에게 돌아가게 하리라" (15절). 그들은 예언자를 죽이는 것이 예언을 피하는 효과를 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들이 결국 비참하게도 현혹되고 있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를 죽이는 일은 그들의 죄만을 가중시키고 그들의 파멸을 재촉할 따름이었다. 만일 예레미야가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 메시지로 전하게 하시려고 보낸 사람이라면 그를 범인으로 취급하는 것이 자기들에게 얼마나 해로운가는 양심이 스스로 입증해 주고 있었다. 하나님의 사역자들을 박해하는 사람들은 오히려 더욱 큰 어려움을 당한다.
예레미야의 석방 (예레미야 26:16-24)
본문에서는 다음과 같은 의미를 찾아 볼 수 있다.
Ⅰ. 예레미야에게 반감을 품은 자들의 고소에서 그가 풀려나옴. 그들이 기소한 대로 예레미야가 말을 한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가 한 말들은 선동적이거나 반역적인 것으로 여겨지지 않았다. 또한 악한 취지가 있었다거나 나쁜 조짐이 있는 것이라고도 여겨지지 않았다. 그러므로 재판원들과 배심원들은 그에게서 아무런 죄도 발견할 수 없다는데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제사장들과 예언자들은 예레미야의 정당한 자기 변호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불리한 심판을 내려 줄 것을 계속 요구했다. 그러나 방백들과 백성들은 "이 사람이 죽음을 당하는 것은 부당하다" (16절)는 사실을 명백히 하였다. 그들은 그 이유를 이렇게 말한다. "이 사람이 스스로의 이름으로 말한 것이 아니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의탁하고 우리에게 말하였기 때문이라" 고 한다. 그들이 정말 예레미야가 그들에게 "여호와의 이름으로" 말하였다는 사실을 인정한 것이며 또 여호와를 그들의 하나님으로 인정한 것이 사실일까? 그의 예언이 하늘로부터라고 그들이 말한다면 마태복음 21장 25절의 말씀대로 "어찌하여 너희가 그를 믿지 아니하느뇨?" 라고 그들에게 묻는 것이 마땅하리라. 복음을 다른 사람들의 악행에서 보호해 주고 또 복음은 하나님에게서 비롯된 사실을 확신하면서도 사람들이 복음의 능력과 영향력에 스스로를 복종시키지 못한다는 사실은 참으로 애석한 일임을 기억하자.
Ⅱ. 예레미야 방면의 정당성을 입증하기 위하여 선례(先例)가 인용되고 있다. "그 땅 장로 중 몇 사람이 일어났다" 고 하였는데 이들은 전에 말한 방백들이거나 백성들 중의 분별력이 뛰어난 사람들이거나 둘 중의 하나일 것이다. 그들은 일어나 회중에게 전례를 상기시켰다. 이는 오늘날의 재판 규례와 상통하는 점이 있다. 언급되고 있는 경우는 미가에 대한 경우였다. 소선지서들 가운데 그의 예언서도 포함되어 있다.
1. 예레미야가 이 성과 전에 대하여 불길하게 예언한 것을 이상히 여길 필요가 있는가라고 그들은 의문을 제기하였다. 개혁자였던 히스기야의 통치 때에 예레미야보다 앞서 예언한 미가도 그리하였던 것이다(18절). 예레미야가 말한 것과 마찬가지 취지로 미가도 공개적으로 다음과 같이 말하였었다. "시온은 밭같이 경작을 당하며 모든 건물은 훼파될 것이라. 이 일은 아무도 막지 못할 것이라. 다만 경작되고 말리라. 예루살렘은 파멸의 무더기가 될 것이며, 그 위에 전이 서 있는 이 전(殿)의 산은 수풀의 놓은 곳들 같이 되리라. 그리하여 찔레와 가시가 그 위에 덮이리라." 이 예언자는 이 사실을 선포하였을 뿐만 아니라 기록으로 남기었다. 이 사실에 대해서는 미가 3장 12절에 기록이 되고 있다. 이 사실을 보더라도 미가와 같이 여호와의 진실한 예언자일지라도 시온과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언할 수 있다는 사실이 증명되어짐을 장로들은 말하였다. 우리가 용서받을 수 없는 죄를 범한 죄인에게 하나님의 성령과 하나님의 나라를 그들로부터 빼앗겠다고 경고할 때나, 퇴조하는 교회에게 촛대를 옮기겠다고 경고할 때 우리는 여러 번 반복되어 전달된 이상의 것을 말하거나 하나님의 말씀에서 우리에게 말하도록 허락된 이상의 것을 말해서는 안 된다(영국 국교의 입장에서 이 내용은 이해가 될 수 있을 것 같다:역주).2. 방백들이 예레미야가 행한 것을 정당하다고 여기는 것이 일시적인 흥분에 의한 결정이라고 보는 게 타당한 생각인가?라고 장로들은 의문을 제기한다. 그들보다 전에 있었던 히스기야도 이와 같은 경우에 그렇게 하였었다. 히스기야와 유다 백성(여기서 이들은 백성의 대표들을 말한다)들이 그러한 결정을 내렸을 때 그들은 예언자 미가에 대하여 불평을 제기하였는가? 그들이 그를 모독한 일이 있었는가? 또한 그의 말을 중단시키거나 그를 죽이려한 적이 있는가라고 장로들은 묻는다. 오히려 그와는 반대로 그들은 미가의 경고를 받아들였던 것이다. 기억할 만한 임금이었던 현군 히스기야는 그의 후계자들을 위하여 좋은 본을 보여 주었던 것이다. 그는 노아처럼 "여호와를 두려워하였고" (19절), "아직 보지도 못한 일에 하나님으로부터 경고하심을 품었다." 히스기야는 미가의 설교를 듣고 그의 무릎을 꿇었다. 그는 여호와에게 경고된 심판을 돌이켜 달라 간구하였고 또 그들을 사하여 줄 것을 간구하였다. 히스기야의 간구는 결코 헛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여호와께서 그의 노를 후회하사" 그들에게 자비를 베푸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천사를 보내사 "시온을 밭과 같이 경작하리라" 고 경고하였던 앗시리아의 군대를 치시게 하셨다. 히스기야가 이같이 설교에 의하여 덕을 보았으니 그가 설교가에게 해를 끼칠 리가 있겠는가라고 장로들은 말한다. 장로들은 이제 다음과 같이 결론을 맺는다. "만일 방백들이 예레미야를 죽이므로 제사장들과 예언자들의 불의를 용납한다면 국가에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 고 한다. "우리가 이같이 하면 우리 생명을 스스로 크게 해하는 일이니라" 고 한다. 죄로 인하여 우리가 자초하게 될 불행을 생각하며 또한 죄가 우리 자신의 영혼에 돌이킬 수 없는 치명상을 입힐 것을 생각하여 죄에서 돌이키는 것은 아름다운 일임을 기억하자.
Ⅲ. 예레미야가 한 것과 같은 예언을 하므로 여호야김에 의해서 죽임을 당한 다른 예언자의 사례가 본문에 나타나 있다(20절 이하). 어떤 이들은 예레미야가 한 것 같은 말을 지껄이는 자들에게는 반역죄가 적용된다는 산 예(例)를 보여 주기 위하여 좋은 본보기로서 기소자들이 여호야김에게 강요하여 일어난 사건으로 보고 있다. 또 다른 이들은 예레미야를 변호하였던 장로들이 이 일을 강력히 주장하였다고 본다. 이렇게 하므로써 장로들은 방백들이 사람을 죽이는 일이 "그들의 영혼에 얼마나 해를 끼치는가" 를 보여 주려고 했다는 것이다. 즉 예레미야를 죽이는 일은 죄를 가중시키는 일임을 백성들에게 알게 하고자 하였다는 것이다. 현재 왕위에 있는 여호야김은 이미 한 명의 예언자를 죽였다. 이제 다시 한 예언자를 죽이므로 분노의 양을 채우지 않기를 장로들은 바랐다. 미가를 보호하였던 히스기야는 축복을 받아 번영을 누렸다. 그러나 우리야를 죽인 여호야김은 번영을 누렸던가? 오히려 그들은 번영과는 정반대의 참극을 목격하였다. 좋은 모본과 그 모본의 좋은 결과는 우리가 선을 행하는데 큰 힘이 된다. 마찬가지로 악한 사람들의 사례와 그들의 악이 초래한 결과는 우리를 악한 것으로부터 떠나게 하여 준다. 그러나 가장 훌륭한 해석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이들 해석가들에 의하면 이 이야기가 예언서를 집필한 역사가 즉 예레미야나 또는 바룩이 방백들에 의한 예레미야의 석방을 보다 극적인 효과를 주기 위하여 같은 시기에 일어난 이 사건을 환기시킨 것이라고 본다. 두 사건 모두 여호야김 통치 때에 일어난 것이지만 이 사건은 "그의 통치 초기에" 일어난 것이었다. 다음 사실을 관찰하여 보자.
1. 우리야의 예언. 그의 예언도 "예레미야의 모든 말과 같이 이 땅과 이 성을 치는" 예언이었다. 여호와의 예언자들은 그들의 증언에서 일치한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여러 증인의 말일지라도 그 말을 존중히 여겨야 한다.2. 예언 때문에 우리야가 기소당함(21절). 여호야김과 그의 모든 신하가 우리야를 대적하여 분을 발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그를 죽이려 하였다." 이 악한 음모 속에 왕이 주동 역할을 하고 있다.
3. 우리야의 도망. 왕이 그를 못마땅히 여겨 그를 죽이려 한다는 소식을 듣고 "그는 두려워 애굽으로 도망하여 갔다." 그가 도망한 것은 우리야의 잘못이었고 이는 그의 믿음이 연약한 결과였다. 따라서 그의 도망은 곧 체포로 끝나고 말았다. 그는 하나님을 불신하였고 하나님이 능력으로 그를 보호하시며 그와 수행하신다는 사실을 믿지 못하였다. 그는 별 것도 아닌 인간의 권세 아래 지나치게 겁을 먹었다. 우리야는 그가 말한 것을 끝내 고수하지 못하였거나 아니면 그가 하나님을 회피한 것처럼 보인다. 특별히 그가 "애굽으로" 달아난 것은 어울리지 않는 일이었다. 그것은 사실상 이스라엘 나라를 포기하는 행위였고 또 자신이 유익하게 활동할 수 있는 자리를 무시하는 행위였다. 은혜는 많이 받았으나 용기는 매우 적은 사람들이 많다. 또한 정직하기는 하나 반면에 소심한 사람도 많다는 것을 기억하자.
4. 우리야의 죽음. 우리야가 추방된 것으로 여호야김이 품은 악의가 충족되었으리라고 사람들은 흔히 생각하리라. 그를 나라에서 내쫓은 것으로 된 것이 아니냐는 식의 생각이다. 그러나 "공의를 싫어하는" 사람들은 "피를 흘리기 좋아하는" 법이다(잠 29:10). 여호야김이 노린 것은 바로 귀중한 생명이었다. 그 외에 아무 것도 그를 충족시킬 수 없었다. 그는 복수심에 불타서 몇 명의 군사를 애굽으로 보냈다. 그는 유혈극을 보아야 만족할 것 같은 심정이었다. 군사들은 우리야를 여호야김 앞에 데려왔다. 그를 보자 "왕은 칼로 그를 죽였다." 내가 알기로는 그가 자기 손으로 직접 죽인 것 같다. 그러나 그를 죽이는 것만으로는 성이 차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는 우리야의 시체에 모욕을 가하였고 저명한 인사들에게 상례적으로 의당 치루어져야 하는 경의를 표시하도록 허락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를 "평민의 묘실" 에 던져 넣었다. 즉 마치 그가 여호와의 선지자가 아닌 것처럼 대우하였다. 우리야의 처지가 마치 "사울이 기름 부음을 받지 않음 같이 그의 방패가 버린바 됨이라" (삼하 1:21)는 말씀과 같은 모습이었다. 이렇게 하므로 여호야김은 우리야의 인가를 말살해 버리려고 하였다. 또한 이로서 백성들이 그의 예언을 추종하지 못하게 할 것과 또 다른 사람들도 그와 같이 예언할 수 없도록 저지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이 모든 수고는 헛된 것이었다. 왜냐하면 예레미야도 같은 예언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겨룰 만한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헤롯은 세례 요한의 머리를 짜르고 득의양양하였다. 그러나 곧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식을 듣게 되자 헤롯은 자신이 오판하였음을 알았다. 그리하여 그는 놀라서 "이 예수란 사람이 바로 세례 요한이라" 고 말했다.
Ⅳ. 예레미야의 석방. 최근에 우리야를 죽이고서도 박해자들은 성도들의 피의 맛을 보자 더욱 피에 갈증을 느꼈다(헤롯이 그러하였다. 행 12:2, 3). 그러나 하나님은 놀라웁 게도 예레미야를 보호하셨다. 예레미야는 우리야처럼 도망가지 않았으나 견고할 수 있었다. 평범한 방법에 의지해야 한다. 그러나 특별한 사명을 받은 사람들은 특별한 기대로 기대해 볼 만한 것이다.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위하여 한 친구를 세우셨다. 이 사람은 예레미야를 보호하고 격려하고 돕는 등 온갖 협조를 아끼지 않았다. 이 사람은 요시야 시대에 국무대신이었던 "사반의 아들 아히감이었다" (왕하 22:12). 어떤 이들은 그달랴가 이 아히감의 아들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방백들 가운데 평이 좋았던 것 같으며 그는 이러한 자기의 입장을 이용하여 예레미야를 도와 제사장들과 예언자들이 예레미야에 대하여 더 이상 음모를 꾸미지 못하도록 제지하였다. 제사장들과 예언자들은 예레미야를 "백성들의 손에" 넘기려 하였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백성은 예레미야에게 무죄를 판단한 백성들이 아니고 거칠고 무례한 폭도들이었다. 제사장들과 예언자들은 이들 폭도들을 유혹하였다. 이들 폭도들은 군중심에 의하여 "십자가에 못박으소서, 십자가에 못박으소서" 라고 외칠 뿐만 아니라 "돌로 사람을 쳐 죽이기도 하는" 무리들이었다. 여호야김이 우리야를 죽이고 양심의 가책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제사장들과 예언자들은 여호야김을 그들의 악행의 도구로 사용치 못하고, 군중들을 이용하려 했던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가 기쁘게 여기시는 것이라면 유력자들을 통하여 착한 사람들을 보호하실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하자. 하나님은 모든 사람들의 마음을 주장하시는 분이기 때문에 우리가 의무를 감당할 때 하나님을 의지할 수 있는 것은 큰 힘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