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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

여호야김 왕 앞에서 설교하는 예레미야(예레미야 22:1-9)

Ⅰ. 예레미야는 왕 앞에 가서 설교하라는 명령을 받는다. 전 장에서 우리는 시드기야가 사자들을 선지자에게 보냈다는 말씀을 읽었다. 그러나 여기에는 왕의 집에 몸소 가서 왕 중 왕의 말씀에 대한 주의를 환기시키라는 명령이 선지자에게 주어지고 있다. "유다 왕이여!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니라." 신하들은 왕이 말이 있는 곳에 자기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있다고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되지만 왕들은 여호와의 말씀이 계신 곳에 자기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있다고 인정해야 한다. 유다 왕은 여기서 다윗의 위에 앉은 자로 호칭되고 있다.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을 추구하는 자였다. 유다 왕은 여기서 다윗과 맺은 언약을 따라 다윗의 권위와 권세를 가진 자로 간주되는 셈이다. 그러므로 유다 왕은 하나님이 다윗에게 하신 약속의 혜택을 입으려면 다윗이 보여 준 선례를 따라야 할 것이다. 왕과 함께 그 신하들(원의:종들)도 말씀의 대상이 되고 있는데 이는 선정이 선한 군주 뿐만 아니라 선한 대신들에게도 좌우되기 때문이다.

Ⅱ. 예레미야는 무엇을 설교해야 하는지 가르침을 받는다.

1. 그는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요구하시는 의무가 무엇이며 선이 무엇인지 그들에게 말해 주어야만 하였다(3절). 그들이 살펴 행해야 할 것은 다음 두 가지이다.

(1) 그들은 자기들이 갖고 있는 권세로 행할 수 있는 선이면 무엇이든지 행해야 했다. 그들은 피해를 입고 있는 자들을 수호하기 위해 정의를 행하고 탈취당한 자를 압박하는 자의 손에서 건져야 했다. 이것은 바로 그들의 지위에서 행해야 할 의무였다(시 82:3). 이점에서 그들은 선을 행하기 위한 하나님의 사역자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

(2) 그들은 권세를 가지고 해를 끼치거나 압제하거나 학대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했다. 법과 정의를 빙자하여 압제하고 학대한다는 것은 최대의 압제요 최대의 학대이다. 더군다나 그들의 본분은 부당한 것을 처벌하고 피압제자와 피학대자를 보호하는 일이 아닌가! 그들은 이방인과 고아와 과부를 압제해서는 안 되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이들을 각별히 돌아보시며 이들을 자기 책임 하에 두고 계신 때문이다(출 22:21, 22).

2. 그는 의무를 충실히 이행하면 나라의 발전이 보장되고 번영를 구가할 수 있다는 것을 그들에게 확신시켜야 했다(4절). 그렇게 하면 다윗계의 왕들이 중단되지 않고 왕위를 계속 이어갈 것이며 그들은 완전한 평온을 누리고 위세를 떨치며 살아가게 될 것이다(17:25). 정부의 위엄을 가장 효과적으로 보존하는 길은 정부가 자기 의무를 이행하는 것이다.

3. 그는 동시에 그들이 아무리 왕족이라 하더라도 불의를 계속 고집하면 그 일족이 멸문지화를 입게 될 것이라는 것을 그들에게 수긍시켜야 했다(5절). "너희가 이 말을 듣고 순종하지 아니하면 이 집이 황무하게 될 것이니 유다 왕의 궁궐도 예루살렘의 딴 여염집과 마찬가지로 신세가 될 것이다. 아무리 으리으리하고 아무리 견고한 궁성이라도 죄를 별미로 파멸되는 했가 적지 않다. 이 선고는 맹세로 다짐되고 있다. "내가 나로 맹세하노니(하나님은 자신보다 더 큰 것으로 맹세하실 수가 없다. 히 6:13) 이 집은 폐허가 되리라." 죄는 비천한 시정잡배의 집 뿐만 아니라 당당한 고관대작의 저택도 파멸시킨다는데 주목하자.

4. 그는 그들의 악이 그들 자신을 말할 것도 없고 나라와 특히 왕성인 예루살렘에 대해서 얼마나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오는지 설명해 주어야만 하였다(6-9절).

(1) 유다와 예루살렘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매우 귀중하였고 그 자체로도 상당하였다는 것이 인정되고 있다. "너는 내게 길르앗같고 레바논의 꼭대기 같다." 그들은 길르앗처럼 비옥하고 즐거운 곳을 분깃으로 얻었다. 시온은 레바논만큼 장엄한 성채였다. 그들은 이것을 안전한 곳으로 의지하였다.

(2) 그러나 이것은 그들을 보호하지 못할 것이다. 이제는 길르앗 같이 비옥한 나라가 광야로 될 것이다. 이제는 레바논같이 강한 성들이 거민이 없는 성으로 될 것이다. 나라가 황폐하게 될 때 도시의 주민이 없어지는 것은 당연하다. 하나님이 심판은 한 국가를 극히 용이하게 파멸시키실 수 없으며 죄는 이 일을 틀림없이 행하고야 만다는 것을 명심하자.

[1] 이 황폐화 작업이 개시될 때는 이 일을 효과적으로 행할 자가 마련되어 있을 것이다(7절). "내가 너 파멸할 자를 준비하리라." 준비한다는 말의 의미는 "성별한다. 거룩하게 만든다" 이다. 따라서 본문은 이런 뜻이 된다. "내가 그들을 이 직분에 임명해서 사용하리라." 파멸이 계획될 때는 파멸자가 준비되어 있거나 준비중에 있다는 것을 명심하자. 하나님께서 멸망을 계획하실 때는 제반사태가 계획된 멸망을 향해 작동하고 있거나 아니면 벌써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다는 데 유의하자. 그런데 누가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파멸자와 다툴 수 있으랴! 그들은 나무꾼이 숲속에 나무를 쉽사리 쓰러뜨리는 것처럼 성들을 파괴할 것이다. "그들이 네 아름다운 백향목을 찍을 것이라." 그리고 그들이 망할 때는 가시나 찔레만큼도 존중받지 못할 것이다. 파멸자들은 그들의 아름다운 백향목이 썩어서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것이기 때문에 불에 던질 것이다.

[2] 이렇게 행하시는 하나님의 합법성을 기꺼이 인정하는 자들도 있을 것이다(8,9절). 여러 나라 사람들이 곧 그들이다. 그들은 여행하다가 이 성의 폐허 곁을 지나게 될 때 이렇게 말할 것이다. "여호와가 이 큰 성에 이같이 행함은 어찜인고? 그토록 강성하던 성이 어떻게 하여 공략되었는가? 그토록 부요하던 성이 어떻게 하여 깡그리 씻은듯이 가난한 성이 되었는가? 그토록 인구가 많던 성이 어찌하여 개미 새끼 한 마리 찾아볼 수 없는 곳으로 화했는가? 그토록 거룩하던 성이 어찌하여 모독을 당했는가? 그리고 하나님께 그토록 소중히 염기을 받던 성이 어떻게 하여 그에게 버림을 받았는가?" 그 이유는 너무나 명명백백하여 누구든지 이구동성으로 즉시 대답할 수 있을 것이다. "길가는 자에게 물어보라(욥 21:29). 너희가 곧 바로 만나는 사람한테 물어보라. 그러면 그는 그들이 자기 신을 바꾸었다는 것이 그 이유라고 너희에게 말해 줄 것이다." 다른 민족들은 이런 일을 행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들은 자기 하나님을 외면하여 반역하였다. 그들은 다른 신들에게 절하고 그들을 섬겼으니 이는 자기 하나님 여호와를 멸시한 연고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들을 포기하사 이런 파멸을 당하도록 하셨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먼저 그를 버리기까지는 아무도 버리지 않으신다는 것에 주목하자. 하나님께서는 "가서 왕가에 이 일을 선포하라" 고 선지자에게 말씀하신다.

 

22:2 없음.

 

22:3 없음.

 

22:4 없음.

 

22:5 없음.

 

22:6 없음.

 

22:7 없음.

 

22:8 없음.

 

22:9 없음.

 

22:10

살롬과 여호야김의 운명(예레미야 22:10-19)

우리에게는 권세자들이 신과 같은 존재이지만 하나님께서는 역시 한갖 인간에 지나지 않아서 그들도 범인 같이 죽을 것이다(시 82:7). 본문단에 나타나는 내용은 바로 그런 것을 말해 준다. 여기에는 연이어 예루살렘을 통치한 두 왕에 대한 사형 선고가 내려지고 있다. 이 두 왕은 형제지간이었고 매우 경건한 한 아버지의 자식들이면서 둘다 패덕한 자였다.

Ⅰ. 먼저 살룸의 운명이 나오는데 이자는 두 말할 나위도 없이 여호아하스와 동일 인물이다. 왜냐하면 그는 유다와 요시야의 아들 곧 그 아비 요시야를 이어 왕이 된 자이기 때문이다(11절). 여호아하스는 장자가 아니었지만 백성들에 추대로 왕이 된 자이다(왕하 23:30; 대하 36:1). 요시야의 아들중에는 살룸이란 자가 있었는데(대상 3:15) 이는 여호아하스와 다른 인물이다. 아마 백성들이 여호아하스를 그의 형보다 더 좋아한 것은 그가 보다 민첩하고 담대한 청년이어서 통치자로서는 그의 형보다 적격이라고 생각되었던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얼마되지 아니하여 그들에게 그런 불공평한 처사의 어리석음을 보여 주시고 그 일이 형통할 수 없음을 알려 주셨다. 왜냐하면 삼개월이 지나자 애굽 왕이 그에게 올라와서 그를 폐위시키고 그를 포박하여 애굽으로 데리고 갔기 때문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이미 경고하신 일이었다(신 28:68). 이 기사는 열왕기와 역대기에도 나온다(대하 23:34; 36:4). 백성이 그와 함께 포로로 잡혀간 것 같지는 않다. 이제 다음 사실을 살펴보자.

1. 백성들은 그 아비 요시야보다 그를 위해 애도하라는 말을 듣는다. 죽은 자를 위하여 울지 말며 요시야를 위하여 더 이상 애통하지 말라. 예레미야 자신으로 말할 것 같으면 그 누구보다 참으로 요시야 왕의 죽음을 애도하였고 백성에게 그를 위해 애곡하라고 촉구하던 인물이었다(대하 35:25).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는 요시야가 죽은지 석달밖에 되지 않았는데 요시야에게 대한 애도를 끝내고 다른 일로 눈물을 흘리라고 그들에게 권한다. 그들은 오로지 애굽으로 가 여호아하스를 위해 애곡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여호아하스의 나포로 일반 대중에게 커다란 손실이 있기 때문에 하는 말씀이 아니다. 그의 부왕 요시야의 경우라면 그럴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이 말씀은 여호아하스이 처지가 훨씬 더 비탄스러울 것임을 의미한다. 요시야는 평안과 존귀 가운데서 세상을 떠났고 이 세상에서는 장차 올 재알을 보지 않도록 조치받았고 저 다른 세상으로 옮기워서 복락을 누리도록 되어있었다. 그러므로 그를 위하여 울지 말고 그의 불행한 아들을 위해 울라는 말씀이다. 즉 그는 수치와 불행 속에서 살다가 죽을 것이었다. 그는 비참한 포로로 여생을 마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죽어가는 성도가 선망의 적(적)이 될 수도 있다는 데 주목해야 마땅하다. 그리고 오늘날 시대적 전망은 너무나 음울하여 요시야나 예수님 같은 사람을위한 눈물을 억제해 두지 않으면 안 된다. 이는 우리 자신이나 자녀를 위해 눈물을 흘릴 수 있도록 예비해 두기 위해서이다(눅 23:28).

2. 여기에 제시된 이유는 그가 자신이나 백성의 기대와는 달리 다시는 포로 생활에서 돌아 오지 못할 것이며 거기서 죽으리라는 것 때문이다. 그들은 이 예고를 믿으려 들지 않았으므로 "그가 다시 돌아오지 못하리라" (10절)는 말씀이 거듭 반복되고 있다. 그는 결코 자기 고국을 보지 못할 것이다. 그는 고국의 모습을 보는 기쁨으로 다시는 맛보지 못하고 고국이 황폐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끊임없이 슬퍼하게 될 것이다. 그는 "이곳에서" 나가서 다시는 돌아오지 솜할 것이다(11절). 그는 잡혀간 곳에서 죽게 될 것이다(12절). 이 일은 그가 자기 아버지의 선한 모범을 따르지 않고 자기 형의 궈리를 빼앗은 데 대한 결과였다. 이스라엘의 방백들을 슬퍼하여 지어 부른 에스겔 선지의 애가(겔 19:5 이하)에서 이 여호아하스는 한 마리의 새끼 사자로 묘사되고 있다. 즉 여호아하스는 식물 움키기를 곧 배웠으나 붙잡혀서 애굽으로 끌려간 사자 새끼였다. 그는 사슬에 묶여 애굽으로 끌려갔고 거기서 환국하기를 학수고대했지만 그의 기대는 허사였다.

Ⅱ. 여기에는 여호아하스를 계승한 여호야김의 운명이 예고된다. 우리는 그가 왕관을 쓸 자격이 살룸보다 나은 자였는지 아닌지 알지 못한다. 그는 자기 앞 임금 즉 살룸보다 형이었지만 요시야의 아들 중에는 그보다 나이 많은 자 곧 요하난이란 이름의 형이 있었던 것 같다(대상 3:15). 그러나 우리는 이 여호야김의 통치 역시 별반 나을 것이 없었으며 그 마지막 운명도 불행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 선지자는 여호야김의 죄를 신실하게 책망한다. 어느 개인이 왕에게 "그대는 악하다" 고 말한다는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을 일이다.

그러나 선지자는 하나님께로부터 메시지를 받는 자이니만치 만일 메시지를 전하지 않는다면 그 일이 아무리 달갑쟎은 일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은 자기 소임을 배반하는 셈이다. 여호야김이 여기서 책망을 듣게 되는 성은 우상 숭배 때문이 아니다. 그리고 아마 이때까지는 그가 아직 우리야 선지를 죽이지 않았을 것이다(26:22, 23 에는 그가 우리야를 살해했다는 기사가 나온다). 만일 그가 우리야를 이미 살해했더라면 여기서 그 일을 힐문하지 않을 리가 없는 것이다. 그가 책망받는 죄는 다음과 같은 것이다.



[1] 교만심 및 사치와 화려한 것을 좋아하는 마음. 그는 크게 보이는 것이 왕이 하는 일의 전부이기라도 한양 선행에는 눈꼽만치도 관심이 없었다. 그는 으리으리한 궁궐 즉 광대한 집과 광활한 다락방을 직접 건축했음에 틀림없다(14절). 그는 요즘 우리가 내리닫이 창을 달듯 극히 새로운 유행을 따라 창을 만들었을 것이다. 그의 집은 성전처럼 좋은 지붕으로 덮여 있고 벽도 같은 널판지로 입혔을 것에 틀림없다(왕상 6:15, 16). 그렇지 않으면 그는 흡족하게 여기지 않았을 것이다. 아니, 그이 집은 성전보다 빼어났음에 틀림없다. 왜냐하면 그의 집은 연단(鉛丹) 또는 진사(辰砂)로 도색되었던 때문이다. 이들은 붉은 염료이다. 또 흑자는 그의 집이 청람으로 칠해졌다고도 읽는데 청람은 푸른 물감이다. 방백이나 권세자들이 자기 지위에 어울리는 집을짓고 단장시키며 가장집물을 갖추는 것은 합법적인 일이었다. 그러나 인간이 마음을 아는 사람이라면 여호야김이 교만심에서 이렇게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원래는 합법적인 일이 교만심 때문에 심히 죄스러운 일로 되는 것이다. 호화롭게 만드는 자들은 그 일을 하는 자기의 마음 상태를 예의 주시할 필요가 있으며 허영심의 작용을 애써 징계해야 한다. 그러나 여호야김의 경우에 있어서 특별히 잘못된 것나왔그가 하나님이 말씀이나 섭리를 통해 심판이 자기에게 임박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을 때 이런 일을 벌였다는 점이다. 그는 처음 삼년간을 애굽 왕의 허락과 용인하에 왕노릇했고 나머지 기간은 바벨론 왕의 용인아래 통치하였다. 그럼에도 유대 지방의 태수라도 해도 좋을 그가 건축 역사와 기구 설치로 극히 강대한 군주들과 경쟁하려고 혈안이 되어 있다는 것은 합당치 못한 일이었다. 그의 결심이 얼마나 단호한 것인지 살펴보자. "내가 나를 위하여 광대한 집을 지으리라. 누가 반대하든지간에 나는 짓겠노라." 겉치레만 과시하려고 탐내는 것은 그 처지가 몰락해가는 자들에게 공통된 어리석음이라는 것은 그 처지가 몰락해가는 자들에게 공통된 어리석음이라는 것을 명심하자. 겸손을 요구하는섭리 가운데서도 자기 마음을 낮추지 않는 자는 부지기수이며 하나님이 몰락시키시려 할 때 극히 거만하게 보이는 자들도 많다. 이런 행동은 우리를 지으신 이와 다투는 짓임을 명심하자.

(2) 세상적 안보 사상과 자기 재산에 대한 신뢰. 그는 마치 자기 산이 견고하여 결코 요동하지 않기라도 하는듯이 자기 번영이 계속되리라고 믿었고 거기에 의존하였다. 그는 자신이 백향목에 둘러 쌓여 있다고 해서 방해나 중단이 없는 통치하게 되는 것으로 믿었다(15절). 그는 백향목이 너무나 훌륭하기 때문에 공격을 받지 않고 너무나 강하여 꺾어지지 않을 것처럼 생각했으며 하나님께서는 긍휼히 여기셔서 그토록 장엄한 저책을 불타게 내버려 두시지 않으실 것이라고 믿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께서 성전의 파괴에 대해 말씀하셨을 때 그의 제자들은 그 건물에 얼마나 장엄한지를 나타내 보이려고 그에게로 나아왔던 것이다(마 23:38; 24:1). 백향목에 둘러 쌓여 있기 때문에 자신의 현재적 번영이 지속적인 안전보장이라고 믿으며 집권의 꿈을 계속 갖는 자들은 자신을 기만하는 불행한 자들이다. 부자의 재물이 그이 견고한 성이란(잠 10:15) 것은 그의 공상에 불과하다.

(3) 흑자는 그가 자신의 집을 미화시키고 단장시키기 위해 하나님의 전을 약탈했기 때문에 여기서 독신 죄의 책망을 받는다고 생각한다. 흑자는 그가 "자신을 위하여 내 창을 짤랐다" (이렇게 되어 있는 사본도 있다)고 해석한다. 그래서 흑자는 마치 그가 성전의 창문을 떼어다가 자신의 궁전에 달로 그 위에 붉은 빛으로 칠하여 그 사실이 발각되지 않게 하며 그 창이 자기 건물의 일부로 보이게 하려 했다고 해석한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집에서 도둑질하여 부유해지려고 생각하는 자들은 스스로를 속이는 자들이며 그들은 결국 자멸한다는 것을 명심하자. 그들이 아무리 그 사실을 은폐시킨다고 하더라도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발견하신다.

(4) 그는 착취와 압제와 학대와 불의에 대해 책망받는다. 그는 "불의로 그 집을 세웠다." 그는 부당하게 취득한 돈과 정직하게 입도원을 획득한 것처럼 부당하게 취득한 대지 위에 자기 집을 건립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자기 분수에 맞지 무리한 건축을 했으므로 인부들의 임금을 편취했을 것이다. 이것은 만군의 주의 귀에 울리는 죄 중 하나이다(약 5:4). 하나님께서는 극히 강대한 자들이 그들의 불쌍한 종들과 일군들에게 저지르는 만행을 눈여겨 보시고 그들에게 그대로 갚아 주실 것이다. 자기들이 부리는 자들에게 그대로 갚지 않으며 그 이웃을 고용하고 그 고가를 주지 않는 자들은 하나님께 그대로 되갚음을 당하게 될 것이다. 아무리 강대한 자라도 극히 미천한 자를 자기 이웃으로 간주해야 하며 따라서 그에게 공정하게 대우해야 하고 그를 자기 몸과 같이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명심하자. 여호야김은 자기 궁궐에 건축 뿐만 아니라 그의 통치에 있어서도 포학무도하였다. 그는 정의를 행하지 않았고 자기의 야심과 탐욕과 복수를 위해서는 무죄한 자의 피도 서슴치 않고 흘렸다. 그는 오로지 압박과 강포를 행하려 하였다. 그는 이런일을 자행하겠다고 협박만 한 것이 아니라 그 일을 행하려 들었다. 그는 기어코 그 일을 그 일을 관철하려 했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의 밑바닥에는 탐욕이 깔려 있었다. 일만 악의 뿌리가 되는, 돈에 대한 사랑(딤전 6:10)이 그런 행위의 동기였다. "네 눈과 마음은 탐남을 행하려 할 뿐이라." 그의 눈과 마음은 오로지 탐욕만 향하고 있었다. 탐욕에 있어서는 마음이 눈을 따라 행하므로 견물생심(견물생심)이란 것을 주목하자. 그러기에 그것은 안목의 정욕이란 별칭도 얻는다(요 2:16; 욥 31:7). 그것은 허무한(존재하지 않는) 것에 주목하는 것이다(잠 23:5). 목적과 애착이 전적으로 이 세상 재물에만 쏠려 있을 때는 눈과 마음이 탐욕을 향하고 있으며 이럴 대 그 유혹은 살인과 압제를 온갖 종류의 폭력과 악행을 유발할 만큼 강하다.

(5) 그의 모든 죄를 가중시킨 것은 그가 선한 아비의 자식이었다는 점이다. 그의 아버지 요시야는 그에게 훌륭한 모범을 보였다. 만일 그가 자기 아버지의 본을 따라가려고만 했던들 그는 좋은 본을 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15,16절). "네 아비가 먹으며 마시지 아니하였느냐?" 여호야김이 자기 궁궐을 넓히고 휘황찬란하게 밝혔을 때 그는 자기 부친이 그토록 초라하고 불편하고 절대적인 군주의 위임에 미흡한 거소를 만족해 여겼다 하여 경멸하는 말투로 얘기했을 법도 하다. 그는 아마 자기 부친을 꿈이 없고 호방하지 못한 자라고 조소했을 것이다. 그는 자기 부친이 유행을 좋아하지 않고 유행을 좇아 투자할 생각이 없다고 하여 얕보았을 것이다. 여호야김은 자기 부친이 만족하던 것으로는 만족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를 통하여 그의 부친이 비록 건축할 마음은 없었다고 하더라도 훌륭한 마음의 소유자였으며 그보다 더 선한 자였고 그 자신과 자기 가족을 위해 보다 선한 일을 했다고 그에게 말씀하신다. 자기 부모의 구식을 경멸하는 자녀들은 흔히 참으로 훌륭한 점은 결여되어 있다. 예레미야가 그에게 말하는 내용을 살펴보자.

[1] 여호야김은 자기 부친의 행위에서 자기의 의무 이행에 대한 교시를 받았다. "그는 공평과 의리를 행치 아니하였느냐?" 요시야는 어느 백성에게도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고 그들을 압제하지도 않았으며 그들을 궁지로 몰아 놓지도 않았다. 그는 그들의 정당한 권리와 재산을 보호하는 데 주력하였다. 아니, 그는 권력을 남용하여 그릇된 것을 응효하지 않았으며 옳은 것을 유지하기 위해 권력을 사용했다. "그는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를 신원하였다." 그는 극히 보잘 것 없는 백성의 사연이라도 기꺼이 귀를 기울이려 했으며 그들에게 즐겨 공평한 태도를 취하려 했다. 행정관들은 자기 위엄을 유지하거나 안일을 추구하는데 관심을 두어서는 안 된다. 위정자들은 선을 행하는데 심해야 한다. 그들은 가난한 자들을 학대하지 말아야 할 뿐만 아니라 학대받고 있는 자들을 응호해 주기도 해야 한다.

[2] 여호야김은 부친의 형통을 보고 용기를 얻어 자기 의무를 이행했어야 했다.

첫째, 하나님은 요시야를 열납하셨다. "이것이 나를 앎이 아니냐? 여호와의 말이니라." 그는 이로써 자기 하나님을 올바로 알고 공경했으며 결과적으로 하나님께 올바로 인식되고 인정받은 것이다. 하나님을 올바로 안다는 것은 우리의 이무 이행, 특히 세상 저위와 신분상의 의무가 되는 일을 이행하는 데 있다는 점을 명심하자.

둘째, 요시야는 그 위안을 누렸다. "네 아비가 근실하고 즐겁게 먹으며 마시지 않았느냐?" 그는 취하려 함이 아니라 기력을 보하려고 마땅한 때에 먹으며(전 10:17) 자기 업무에 알맞을 만큼 마셨다. 그는 먹고 마시면서 공평을 행하였다. 그는 (여호야김과 그의 대신들 같지 않게) 술을 마시다가 법을 잊어버리고 모든 간곤한 자에게 공의를 굽게 하진 않았다(잠 31:5). 그는 먹고 마셨다. 즉 하나님께서는 크게 풍요로운 것으로 그를 축복하셨고 그는 안락하게 그 즐거움을 누렸으며 자기 친구들에게도 즐거운 연회를 베풀었다. 여호야김은 자랑이었으나 요시야가 선한 집을 간직했다는 것은 그의 진정한 천미였다.

사치와 허세를 극히 사랑하는 자들이 관대한 마음을 추호도 갖지 않는 경우는 비일비재이다. 왜냐하면 그 엄청난 비용을 부담하자니 관대한 마음은 자연히 위축되게 마련이며 가난한 자에게 대한 후한 마음과 정의감까지도 꼬리를 감추게 되는 까닭이다. 여호야김처럼 빚을 갗지 않고 으리으리한 집에 사느니보다 요시야처럼 구식가옥에 살 망정 선한 일을 하는 것이 더 낫다. 요시야는 공평과 의리를 행하였고 그러자 그는 형통하였다(15절). 이 말은 16절에도 반복되고 있다. 요시야는 매우 안락하게 살았다. 그의 객성과 모든 이웃은 그를 존경했고 그가 손대는 일이면 무엇이든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우리가 잘 행하고 있는 동안에는 우리 일이 형통할 것으로 기대해도 좋다. 여호야김은 이것을 알았다. 그는 자기 부친을 통하여 의무의 길이 곧 안락의 길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럼에도 여호야김은 자기 부친의 선례를 따르려 하지 않았다. 우리의 경건한 부모들이 독실한 신앙을 계속 간직한 결과 그 혜택을 경험하고 우리에게 신앙을 권면할 때 우리는 그런 신앙을 보유해야 한다는데 유의하자. 그들은 자기들이 발견한 경건 생활의 약속을 우리에게 말해 주었다. 즉 경건한 생활을 그들에게 유익한 삶을 약속했고 신앙과 경건은 외면적 번영과 상반되지 않는다는 것을 부모는 우리에게 말해 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이 선한 길에서 돌이키고 외면한다면 번영할 여지가 없게 될 것이다.

2. 우리는 여기서 여호야김의 운명을 읽게 된다(18,19). 우리는 예레미야가 목숨울걸고 여호야김의 수치스런 죽음을 예언했으리라고 상상할 수 있다. 여호와께서는 여호야김에게 대하여 이같이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예레미야도 이같이 말하는 것이다.

(1) 그는 죽어도 애통함을 얻지 못할 것이다. 그는 압제와 포학으로 너무나 증오의 대상이 되어 그 주위의 있는 자가 다 그와 이별하는 것을 즐거워할 것이며 그를 위해 한 방울의 눈물도 흘리는 자가 없을 것이다. 이에 반해 공평과 의리를 행했던 그의 부친은 만인에게 애도를 받았다. 시드기야는 평안히 죽을것과 사람들에게 애도를 받으리라는 약속을 받는다(34:5). 이는 그가 여호야김보다는 낫게 행동한 때문이다. 그의 친척들도 그를 슬프다하며 통곡하지 않을 것이다. 아무리 미천한 자의 장례식이라도 "슬프다. 내 형제여, 슬프다! 내 자매여" 하는 부르짖음을 들을 수 있다. 그러나 여호야김은 장례식에서는 그런 흔한 애도의 표현조차 들을 수 없을 것이다. 그의 백성들이나 신하들도 그를 위해 애곡하지 않을 것이다. 죽어도 이별을 아쉬워하며 가슴 아파할 자가 없도록 살아간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2) 그는 매장을 당하지 못할 것이다. 이것은 애통하는 자가 없는 것보다 더 나쁘다. 망자의 영결식을 눈물로 장식해 주지 않는 자들이라 해도 자기들 눈에 보이지 않도록 파묻어 주는 일은 기꺼이 행하려 할 것이다. 그러나 여호야김은 나귀같이 매장함을 당하게 될 것이다. 즉 그는 전혀 매장함을 얻지 못할 것이며 그의 시체는 하수구나 쓰레기 더미에 버려질 것이다. 그의 시체는 치욕적으로 질질 끌려서 예루살렘 문 밖에 던지울 것이다. 여호야김에 대한 기사는 느부갓네살이 그를 쇠사슬로 결박하여 바벨론으로 잡아갔으며(대하 36:6) 그가 항쇄족쇄에 채여 바벨론 왕에게 이르렀다(겔 19:9)고 말해준다. 그러나 그는 포로로 끌려가다가 바벨론에 이르기 전에 죽은 듯하다. 아마 그는 슬픔과 근심 때문에 죽었거나 아니면 교만심 때문에 자신의 명을 재촉했을 것이다. 그런 이유로 그는 정중한 매장을 당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는 우리가 자살자들에게 행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교회사가 요세퍼스는 느부갓네살이 여호야김을 주살하여 예루살렘 성문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어딘가에 내버렸다고 한다. 그리고 열왕기에는 그가 자기 열조와 함께 잤다고 되어있다(왕하 24:6). 그가 장엄한 저택을 축조했을 때 자신의 능묘 또한 어마어마하게 조성하려고 계획했을 것은 불문가지이다. 그러나 그의 생각이 얼마나 빗나간 것인지 살펴보자. 큰 교만심을 갖고 의기양양해 하는 자들에게는 살아서든 죽어서든 커다란 수치가 예비되어 있다는 사실을 주목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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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다의 황폐와 여고냐의 운명(예레미야 22:20-30)

이 예언은 고니야 또는 여호야긴의 불명예스러운 비정(秕政)을 지목하는 것처럼 보인다. 고니야는 여호야김의 아들로서 부왕을 계승하여 통치하였다. 그러나 그는 재위 삼개월만에 바벨론으로 끌려가 그곳에서 다년간 살았다(52:31). 우리는 여기 다음과 같은 내용의 예언과 접하게 된다.

Ⅰ. 왕국의 황폐에 대하여(20-23절). 왕국의 멸망이 급속도로 닥아오고 있었다. 본문이 언급하는 것은 예루살렘과 유다이며 유다국을 하나의 개인으로 말하고 있다. 우리는 여기서 유다국의 세 가지 특성을 발견하게 된다.

1. 평화와 안전의 시기에는 몹시 거만하였음(21절). "네가 평안할 때에 내가 네게 말하였고 내 종들과 선지자들을 통하여 책망과 훈계와 계책을 말하였으나 네 말을 나는 듣지 아니하리라. 나는 주의하지 아니하리가 하였으니 너는 내 목소리를 청종치 않았으며 또 청종치 않기로 결심하였고 뻔뻔스럽게도 내게 그렇게 말하였느니라." 편안히 사는 자들은 다반사로 하나님의 말씀을 경멸하며 살아간다. 여수룬은 살찌자 발로 찼다(신 32:15). 설상가상으로 그들은 천성이 그러하였다." 그들은 모태에서부터 패역한 자라는 칭함을 입었다(사 48:8).

2. 환난의 경보가 울리며 매우 겁이 많음(20절). "네가 너를 사랑하는 자가 다 멸망하는 것을 보며 네 우상들이 너를 도울 수 없음을 깨달으며 네 외국 동맹들이 너를 실망시킨다는 것을 깨달을 때 너는 레바논으로 올라가 파멸당해 모든 것을 포기한 자처럼 외치게 될 것이며 아주 비통하게 울부짖을 것이다. 너는 '도우소서. 도우시지 않으면 우리는 망하나이다'하고 외칠 것이다. 너는 두 높은 산 레바논과 바산 위에서 네 소리를 높이며 놀란 비명 소리를 높일 것이다. 너는 높은 지형을 이용하여 네 목소리를 들리게 하려고 이와 같이 행할 것이다. 너는 모압 지경의 유명한 산 아바림에서 외치게 될 것이다. 너는 통로(通路)에서 외치게 될 것이니 이는 길에서 곤경을 당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너는 굉장히 놀라는 사람들이 하듯 네 주위에 있는 모든 자에게 외칠 것이나 그것은 헛될 것이다. 왜냐하면 네 목자들이나 치리자는 다 바람에 삼키울 것이기 때문이다. 꽃봉오리가 황랑한 한풍에 지듯 너를 보호하고 인도하고 네 안전을 도모해야할 자들이 풍비박산하며 영락하고 초개처럼 되어버릴 것이다. 열매가 바람에 낙과하듯 그들은 갑자기 삼키울 것이다. 너를 사랑하는 자들은 사로잡혀 가리라. 네가 의지하고 애착하던 자들은 너를 구원하기는 커녕 자기 자신도 구할 능력이 없으리라."

3. 무겁고 지속적인 환란의 압력으로 유순해짐(22절). "네 동맹들로부터 아무런 원군도 나타나지 않고 네 제사장들이 망연자실할 사람들이 막다른 궁지에 몰리기까지는 자기 죄를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주의하자. 우리가 곤경을 통해 자신의 죄를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주의하자. 우리가 곤경을 통해 자신의 죄를 부끄러워하게 된다면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본문은 유다국을 레바논에 거하는 자라고 명명하는데 이는 유명한 레바논 삼림이 그들의 지경내에 있었고(23절) 레바논의 천연적 부강처럼 그들의 전국토가 비옥하고 수비하기 좋았다는 점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너무 거만하고 오만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백향목에 깃들이는 자라는 말을 듣는다. 그들은 어떤 위험도 자기들에게 미치지 못할 것으로 생각했으며 주위의 모든 자를 업신여겼다. "그러나 고통이 네게 임할 때 너의 가련함은 얼마나 심하랴! 그때 너는 하나님 앞에서 겸비할 것이며 개과천선을 약속하게 될 것이다. 네가 돌짝밭에서 엎어질 때는 형통시 청종하지 않으려던 이 말들을 기꺼이 들으려고 할 것이다(시 141:6). 그 때에는 네가 이전에 경시하던 하나님께 열납되려고 노력하게 될 것이다." 진정한 경건심을 지니고 있지 않는 자들은 고통이 지나간 뒤에야 경건의 고통을 느끼게 된다는데 주목하자. 또 달리 해석하는 자도 있다. 가타커(Gataker) 선생은 "네 모든 사치와 허세와 부귀가 네게 무슨 소용이 되느냐? 네가 이런 환란에 처할 때는 그 모든 것이 어떻게 될 것이며 너는 무슨 위로를 얻을 것인가? 이는 여인의 해산하는 고통과 같다. 해산하는 동안에는 여인이 고통과 두려움에 가득 차서 자기의 장식물로부터 아무런 위안을 받지 못한다" 고 해석한다. 여러 가지 세상적인 이점을 지니고 있다고 자랑하는 자들도 고통이 엄습하면 자기들의 모든 아름다움을 상실하게 되며 그때는 자신의 모습이 어떻게 보일런지 한 번쯤 생각해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Ⅱ. 여기에는 왕의 수치에 대한 예언이 나온다. 그의 이름은 여고냐였다. 그러나 그는 여기서 다시 한 번 고니야라고 호칭된다. 선지자는 그의 이름을 줄이거나 약칭하여 별명으로 삼고 있다. 이것은 아마 그의 폐위를 암시하며 그의 통치가 단축되고 그의 달 수가 도중에 단절될 것을 의미할 것이다. 그에게 임할 두 가지 수모가 기록되고 있다.

1. 그는 포로로 끌려가서 평생을 속박 가운데서 끝내게 될 것이다. 그는 왕자로 태어나 왕관을 썼지만 그 왕관을 속히 그 머리 위에서 떨어질 것이며 그는 왕관을 쇠사슬과 맞바꾸어야 할 것이란 말이다. 이 심판의 여러 단계를 살펴보자.

(1) 하나님께서는 그를 버리실 것이다(24절). 진실무방하신 하나님께서 이것을 말씀하시고 맹세로 다짐하신다. "너 고니야가 내 오른 손 의인장반지라 할지라도 내가 빼리라." 그의 전임자들은 하나님이 인장반지였었고 그도 잘만 처신했더라면 그랬을 터이나 그는 타락했으므로 하나님께 버림받았던 것이다. 유다의 경건한 왕들은 그들을 자랑으로 여기셨으며 군주가 인장반지나 친필을 이용하듯 그들을 자신의 통치 도구로 삼으셨다. 그러나 고니야는 스스로를 그런 존귀와 명외에 부적합한자로 만들어버렸다. 그러므로 출생시에 받은 특권도 그에게는 아무런 보장이 되지 못할 것이다. 그는 팽개침을 당할 것이다. 여고냐에 대한 이 경고와 화답이라도 하듯 학개에서는 스룹바벨에게 대한 하나님의 약속이 나온다. 유대 민족이 포로 생활로부터 귀환할 때 하나님께서는 스룹바벨을 자기 백성의 인도자로 삼으셨던 것이다. "내 종 스룹바벨아! 내가 너를 취하고 인(印)을 삼으리라" (학 2:23). 자신을 하나님이 오른 손의 인장반지라고 생각하는 자들은 안심해서는 안 된다. 그들은 뽑혀서 버림을 당할까봐 두려워해야 한다.

(2)바벨론 왕이 그를 나포할 것이다. 하나님의 보호로부터 스스로 뛰쳐나가는 자들은 자기들이 어떤 대적과 재앙을 당하게 될지 모르고 있다(25절). 갈데아 인들은 고니야에게 원한을 품고 있는 자들로 묘사되고 있다. 그들은 그의 생명을 찾았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그의 생명을 찾음으로써 자기들의 분노를 달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그가 두려워하던 자들이었고 이로 인해 그들의 수중에 떨어진다는 것은 그에게 한층 더 두려운 일이 되었다. 특히 하나님께서 친히 그를 그들의 손에 내어 주시므로 더욱 그랬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를 그들에게 건네 주신다면 누가 능히 그를 건져낼 수 있을 것인가?

(3) 그와 그의 가족은 바벨론으로 끌려갈 것이다. 그들은 비참한 포로 생활로 지루한 세월을 보내게 될 것이다. 그와 그의 어미(26절) 그와 그의 자손(28절) 즉 그와 모든 왕족(그가 포로되어 갈 때 그 자신의 소생은 없었으므로) 또는 그와 그 허리의 자손들은 모두 다른 나라로 추방될 것이다. 그들은 낯선 나라, 이방 나라, 그들이 태어나지 않은 다른 지방으로 쫓겨갈 것이다. 그곳은 그들이 알지 못하는 땅이며 그곳에는 그들이 친분을 나눌 자도, 친절을 기대할 자도 없을 것이다. 그들은 구권을 행사하던 땅에서 복종을 강요당하는 곳으로 끌려갈 것이다. 그렇지만 고국을 다시 볼 희망은 있을 것이 아닌가? 아니다. "너희는 너희 마음에 돌아오기를 사모하는 땅에 돌아오지 못하리라" (27절). 그들은 자기 땅에 있으면서 그릇되이 행동하였다. 그러므로 그들은 이상 더 그 땅을 보지 못하게 될 것이다. 여호아하스는 남방 땅인 애굽으로 끌려갔고 여고냐는 북방 땅인 바벨론으로 끌려갔다. 이 두 곳은 아주 멀리 있었고 정반대쪽에 있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다시 만나기를 기약할 수 없었고 어느 한 사람도 고국의 공기를 다시 들이마실 수가 없었다. 남들에게 대한 지배권을 남용하는 자들은 이와 같이 남들이 지배하에 들어가 마땅하다. 압베와 사치와 잔학으로 자기들의 죄스러운 욕망을 충족시키며 거기에 탐닉하는 자들은 자기들의 고국 산천을 다시 보고 싶어하는 순진한 욕구초자 충족받지 못해 싸다. 우리는 이 경고 가운데서 매우 힘이 실린 부분을 주목하게 된다. "너희가 나지 아니한 다른 지방에서 죽으리라."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듯이 날 장소와 죽을 장소도 있다. 우리는 자신이 태어난 곳을 안다. 그러나 어디서 죽을지는 알지 못한다. 그러나 우리가 죽을 곳은 우리 하나님이 아시는 것으로 족하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죽는 것에만 관심을 갖자. 그리스도 안에서 죽는다면 우리가 어디서 죽든지 상관 없다. 우리가 죽는 곳이 아무리 먼 나라라도 하더라도 괜찮을 것이다.

(4) 그는 이 일로 모든 이웃 사람들의 눈에 아주 보잘것없고 경멸할 만한 존재로 될 것이다. 그들은 거침없이 이렇게 말할 것이다(28절). "이 사람 고니야는 경멸받는 부서진 우상이냐? 그렇고 말고, 그는 이전보다 훨씬 천하게 되어 있다."

[1] 그때는 고니야가 위엄을 떨치고 있던 때였다. 아니, 그는 거의 신격화되고 있기까지 했다. 얼마 전 그의 부왕이 폐위되는 것을 목격한 백성들은 그가 등극하자 즉시 그를 숭상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는 "경멸받는 부서진 우상" (흠정역 성서에는 그러게 되어있다. 역주)이다. 우상이 성할 때는 경배를 받으나 부패하고 깨어질 때는 버려져서 천대를 받으며 아무도 거들떠보지도 않고 그것이 우상이었다는 것을 기억해 주는 이도 없다. 우상화되는 것은 조만간에 천대받고 깨뜨려지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명심하자. 부당하게 공경받는 것은 정당하게 멸시받을 것이며 하나님의 경쟁자가 되는 것은 인간의 조롱거리가 될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우상화시키는 것이 무엇이든지 거기에 실망하게 될 것이며 결국 그것을 천시하게 될 것이다.

[2] 그 때는 그가 기뻐하고 있던 때였다. 그러나 그는 이제 좋아하지 아니하는 그릇이 되어있다. 그는 그 안에 즐거움이 없는 그릇이다. 그는 유행이 지나거나 금이 가거나 더럽기 때문에 쓸모가 없어져서 아무도 원하지 않는 그릇이다. 하나님께서 좋아하시지 않는 자들은 이제나 저제나 사람들도 좋아하지 않을 정도로 굴욕을 당하게 될 것이다.

2. 그는 자기 명예를 물려 줄 후손도 남기지 못할 것이다. 이 예언은 엄숙한 머릿말로 시작되고 있다(29절). "땅이여, 땅이여, 땅이여, 여호와의 말을 들을지니라." 세상의 모든 거민은 하나님께 그토록 친근하던 민족과 집에 대한 이 심판을 주목하고 하나님은 정의의 행사에 공평무사한 분이시라는 것을 미루어 헤아리라는 말씀이다. 또는 이 말씀은 "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귀를 기울이라" (사 1:2)는 말씀처럼 땅에 거하는 자들이 너무나 귀머거리이고 부주의하기 때문에 그들이 딛고 있는 땅 자체에게 호소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의 말씀은 아무리 등한히 하더라도 들릴 것이다. 땅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이 불탈 때에는(벧후 3:10) 땅도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복종하게 될 것이다. 아니면 이것은 땅의 것만 생각하고 세속적인 것에 삼킨 바 되며 터무니없이 땅의 것을 추구하는 자들에게 대한 외침일 것이다. 그런 자들은 재삼재사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고 촉구받을 필요가 있다. 또는 이것은 인간에게 대한 부름일 수도 있다. 인간은 땅에서 나서 재빨리 그곳으로 돌아가는 숙명적 존재로 간주된다. 우리 모두가 다 그런 존재들이다. 우리는 흙이고 티끌이다. 이점을 감안하면 우리는 주 여호와의 말씀을 듣고 존중하는 데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그렇게 해야만 우리는 흙이면서도 그 이름이 하늘에 기록되는 자들 중에 들게 된다. 이제 여기서 주목할 것은 여고냐가 무자한 자로 기록된다는 점이다(30절). 즉 그 다음에 나오는 대로 "그 자손 중 형통하여 다윗의 위에 앉을 자가 다시는 없으리라" 는 말씀은 우리의 주목을 끈다. 다윗 가계는 여고냐에게서 왕손을 내지 못하고 끝나 버렸다. 흑자는 그의 자손이 쫓겨 날 것이라고 언급되므로(28절) 그가 바벨론에서 자녀를 낳았으나 그보다 먼저 죽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역대기의 족보 기사(대상 3:17)에서 여고냐 아시르(Jeconiah Assir, 즉 사로 잡혀간 자, 여고냐)의 일곱 아들에 대해서 읽게 되는데 그 중 첫째는 스알디엘이다. 혹자는 이들이 양자에 지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마태복음에서 "여고냐는 스알디엘을 낳고" (1:12) 할 때도 스알디엘은 나단 가에 속한 네리의 아들로 호칭되고 있기 때문에(눅 3:27, 31) 이것은 여고냐가 통치에 관한 권리 주장을 스알디엘에게 물려 준 것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가 자녀를 낳았거나 양자만 두고 있었거나 관계없이 그의 자손은 아무도 유다에서 왕노릇하지 못하였다. 그는 유다 왕국의 아우구스툴루스(Jugustulus)였다. 그의 나라는 그에게서 종결된 셈이다. 자녀가 없는 사람이 누구든지간에 무자할 자라고 기록하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그리고 선행에 애쓰지 않는 자는 평생 형통하기를 기대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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