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 시절의 신앙심에 대한 장려와 죽음 (전도서 12:1-7)
이 문단에서는 다음과 같은 사실이 나온다.
Ⅰ. 청년들에게 젊었을 때에 하나님께 대하여 생각하며 그에게 대한 의무에 유념하도록 하라고 이른다. "네 청년의 때에 네 창조주를 기억하라."
1. 이 말씀은 왕으로서의 전도자가 자기의 설교 속에 세상의 허무성과 이 세계 안에 있는 모든 것의 헛됨을 적용시킨 것이다. "젊은 너희들은 청춘으로부터 기대할 수 있는 모든 일로 우쭐대지만, 이미 그런 것을 경험하고 시험해본 자들의 말을 믿어야 한다. 즉 그것을 영혼에게 확고한 만족을 만들어 주지 못한다는 말을 믿어라." 그러므로 너희가 이 허무한 것에게 기만을 당하지 않고 헛된 것으로 말미암아 교란 당하지 않도록 하려면 "네 창조주를 기억하라." 그리하여 피조물의 허구성(虛構性)으로부터 야기되는 재난에 대해 스스로를 방어하도록 하라.2. 그것은 왕이자 치료자인 솔로몬이 청춘이면 누구나 겪는 질병에 대해 조제하여 주는 특효약이다. 그 병은 곧 환락을 사랑하는 것이며 관능의 즐거움에 탐닉하는 것이고, 소년과 청년이면 누구나 혹하기 쉬운 허영에 빠지는 것이다. 이것을 예방하고 치료하기 위해 "네 창조주를 기억"해야 한다.
(1) 우리에게 강요되는 큰 의무는 하나님을 우리의 "창조주로 기억하라"는 것이다.
"우리가 우리자신을 만든 게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지으셨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즉 하나님은 우리의 창조주이므로 그는 우리의 올바른 주인이시며 진정한 소유자가 되신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그가 우리의 창조자이심을 고려할 때 우리 자신을 그에게 맡기지 않을 수 없으며, 창조주로서의 그에게 마땅히 드려야 할 존귀와 의무를 바치지 않으면 안 된다.
"네 창조주들을 기억하라" 는 귀절은 욥기 35장 10절에서 "나를 지으신 하나님들이 어디 계시냐?"고 한 것과 마찬가지로 복수형인데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가 인간을 만들자"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우리란 성부와 성자와 성신을 말한다.
(2) 이 의무를 행하기에 적당한 시기는 곧 "네 청년의 때, 네 선택의 날들"(어떤 이는 이렇게 해석함), 네가 가려뽑은 날들, 네가 선택하는 날들이다. "네가 네 존재를 얻어 가지게 된 그분을 네 날들의 시초부터 기억하기 시작하고, 그 좋은 시작대로 계속해 나가라, 네가 젊을 때 그를 상기하고 네 청춘의 모든 세월을 통해 그를 기억하라. 이와 같이 청춘의 유혹에서 스스로를 지키며, 청춘의 잇점을 활용하라."
Ⅱ. 이 명령을 꼭 시행해야할 이유. "악한(곤조한)날이 이르기전,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가 가깝기 전에 창조주를 기억해야 한다.
1. 그 일을 빨리 행하라.(1) "질병과 죽음이 이르기 전에 그 일을 속히 행하라. 네가 생존해 있는 동안에 그 일을 행하여야 하며, 죽음이 너를 이 시험과 집행유예의 상태로부터 보상과 응보의 상태로 옮기게 될 때에는 그 일을 행하기에 너무 늦을 것이기 때문이다." 질병과 사망의 날들은 "곤고한 날"이며 자연인에게 두려운 날이고, 자기들의 창조주를 망각한 자들에게는 참으로 "악한 날"이다. 이 "악한 날들"은 조만간 "올" 것이다. 이 날들이 아직까지 이르지 않은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해 오래 참으시며" 우리에게 "회개할 수 있는 여지"를 주시고 있기 때문이다. 생명의 계속은 사망의 자연에 지나지 않는다. 삶이 지속되고 죽음이 지체되고 있는 동안 우리는 안락하게 죽을 수 있도록 준비하고 죽음의 특성을 변경시키는 데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2) 노년이 되기 전에, 그 일을 속히 행하라. 죽음이 막지 않는다면 늙는 것은 꼭 오고야 말 것이고, 노년은 "우리가 아무 낙이 없다고 말할 해"가 될 것이다. 그때에는 우리가 바실래(삼하 19:35)처럼 감각적 즐거움을 맛보지도 못할 것이며, 우리 신체가 허약해져서, 늙고 눈이 보이지 않게 되거나 다리를 절룩이게 될 것이다. 그 때에 우리는 쓸모 없는 무용지물이 되고 말 것이며, 우리의 "힘은 수고와 슬픔이" 될 것이다. 또한 우리는 친척들과 모든 옛 친구들과 이별하게 되거나 그들을 괴로워하게 되고, 그들이 우리를 귀찮아하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그 때에 우리는 우리들 자신이 조금씩 죽어 가는 것을 느끼게 될 것이다. 이러한 "해들이 가까이 오고 있다." 그때에도 "장차 오는 일은 전부가 헛될" 것이며, 남은 달도 전부가 헛된 달이 될 것이다. 즉 땅 위에서의 좋은 생활을 회상하고 천국에서 누릴, 보다 나은 삶을 바라는 것 외에는 "아무 낙도 없을 것이다."
2. 그는 그 다음 본문에서도 이 두 가지 논증을 부연하고 있는데 단지 그 순서만 엇바꾸고 있다.
(1) 노경에 당하는 재난은 너무나 많다.
게다가 우리가 늙도록 산다면 우리의 날들은 "아무 낙도 없는" 그런 날들이 될 것이다. 이것은 왜 우리가 "우리의 청년의 때"에 하나님께로 돌아와야 하며, 그와 화해해야 하고 나이가 많아지도록 미루어서는 안 되는지에 대한 충분한 이유가 된다.
죄악의 쾌락이 우리를 떠나게 되는 때에야 우리도 그들을 버리며 필연적으로 어쩔 수 없게 되어서야 하나님께로 돌아선다고 하는 것은 우리에게 아무런 보답이 없을 것이다.
우리의 날들 중 노른자위가 되고 정화가 되는 부분은 악마에게 내어 주고 밀기울이나 쓰레기나 찌꺼기 같은 부분을 하나님께 드리려고 남겨 둔다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는 최대의 부조리이며 배은망덕이다. 이것은 "찢긴 것과 저는 것과 병든 것을 희생 제물로" 바치는 행위이다. 더구나 지금 꼭 해야 할 일을 쇠약과 병골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노년까지 미룬다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는 최대의 우행이다.
이 일은 우리의 기능이 한창 왕성할 때 나오는 가장 좋은 일을 필요로 하는 때문이다. 특히 어리석은 것은 죄악에 더욱 오래 오래 몸을 담고 양심의 죄를 보물 쌓듯 쌓아 올려서 무거운 나이의 짐에 이 죄의 짐을 추가시킴으로써 한결 무겁게 가중시키는 일이다. 만일 노년의 재난이 여기에 나타나고 있는 것과 같다고 한다면, 우리는 노후에 우리를 유지시켜 주고 위로해 줄 것이 꼭 필요하다. 그러나 우리가 때를 맞춰 우리 창조주를 기억하기 시작했고, 그 이후로는 그에 대한 기억을 배제한 적이 없다고 하는 양심의 증언보다 더 우리를 힘나게 하고 위안시켜 주는 효과를 가진 것은 아무 것도 없을 것이다.
우리가 젊을 때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다면 우리가 늙었을 때 하나님이 우리를 도와주시리라고 어떻게 기대할 수 있으랴?(시 71:17, 18 참조)
[1] 노년의 쇠약과 병약이 여기에서 상징적 표현으로 우아하게 묘사되고 있다. 우리는 솔로몬 당시에 통용되던 일반적 언어와 은유에 익숙하지 못하여, 그 뜻을 파악하기 어려운 점도 있지만 전반적 의도는 명백한 것으로 노년의 때는 대체로 얼마나 안락하지 못한 때인가 하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첫째, 그 때는 "해"와 그 "빛", "달"과 "별"들, 그리고 그들로부터 나오는 빛이 "어둡게 될" 것이다.
이러한 것들은 시력이 감퇴된 노인들에게는 침침하게 보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의 용모는 구름이 끼여서 그 아름다움과 광채는 어둡게 된다. 그들의 영혼에게 있어서는 빛과 같던 지적인 능력과 기능이 약화되어 버리며, 그들의 총명과 기억력은 그들을 실망시킨다. 그들의 이해력도 과거처럼 그렇게 민첩하지 못하며 그들의 상상력도 이전같이 활발하지 못하다. 그들의 환락의 날도 지나가 버렸고(빛은 흔히 기쁨과 번영을 상징한다)그들은 낮에 교제하는 즐거움도, 밤에 휴식하는 즐거움도 누리지 못한다. 왜냐하면 "해"와 "달"도 그들에게는 "어두워"지기 때문이다.
둘째, 그 때는 "비 뒤에 구름이 다시 일어난다." 날씨가 궂으려고 하면 하나의 구름이 지나가자마자 또 다른 구름이 새로 일어나는 것과 마찬가지로 한 가지 고통이나 병에서 놓여나자마자 또 다른 병고에 시달리게 되는 것이 노인의 실태이다. 그래서 그들의 병고는 "매우 비가 많이 오는 날 연속적으로 떨어지는 빗방울과 같다." 이 세상에서 한 가지 고통의 끝이란 또 다른 고통의 시작에 불과하다. 깊음이 깊음을 부르는 것이다.
노인들은 흔히 주룩주룩 내리는 비와 같이 분비되는 눈물, 콧물 따위로 고생한다. 이 폭우 다음에는 더욱 많은 구름이 일어나서 습기를 메꾸어 주는 것처럼 노인도 계속 분비되는 콧물로 괴로움을 겪는 것이며, 그 몸은 결국 계속 녹아 없어지는 셈이 된다.
셋째, 그 때에는 "집을 지키는 자들이 떨 것이다." 모든 위험이 갑자기 접근해 오며 위기가 덮칠 때마다 망대와 같은 역할을 하는 머리가 떨리고 신체를 보존하기 위해 준비된 팔과 손도 떨릴 것이다. 자기 방어를 위해 행사되곤 하던 동물적인 심령의 강인한 힘도 별 수 없게 되며 그 소임을 다 할 수 없게 된다. 따라서 노인들은 쉽사리 의기소침해지고 낙심을 잘하는 것이다.
넷째, 그 때에는 "힘 있는 자들도 구부러질 것이다." 신체를 지탱시켜 주고 체중을 견디던 다리와 대퇴부도 굽으며, 이전처럼 움직여 주지 않고 곧 피곤해 한다. 한창 때에는 "강한 자들"이라고 하던 사람들이 "나이"로 인해 약하게 되며 구부러진다(슥 8:4). "여호와는 사람의 다리를 기뻐하지 않으신다"(시 147:10). 그 이유는 그들의 다리 힘은 곧 약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 여호와께는 영원한 힘이 있다." 그에게는 영원하신 팔이 있다.
다섯째, 그 때에는 "맷돌질하는 자들이 적으므로 그칠 것이다." 우리가 음식물을 저작하고 그것을 혼합시켜 소화를 돕는 데 쓰는 이도 "그 수가 적으므로" 역할을 중단하게 된다. 치아는 썩고 부러지며 아마 통증으로 인해 뽑혀 버리게도 될 것이다. 어떤 노인들은 이가 몽땅 빠지고 없는 경우도 있으며 몇 개만 남아 있는 자들도 있다. 치아가 빠지고 없어 잘 씹지 못하면 음식이 소화가 잘 되지 않으므로 치아의 쇠퇴라는 노약은 한층 무시할 수 없는 것이며, 다른 어떤 노쇠에 못지 않게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여섯째, "창들로 내어다 보는 자가 어두워질 것이다." 이삭의 눈과(창 27:1) 아히야의 눈처럼(왕상 14:4) 시력이 어둡게 된다. 120세가 되어서도 좋은 시력을 지녔던 모세는 매우 드문 예이고, 보통 노인들은 다른 어느 것보다도 눈이 빨리 쇠퇴한다. 안경을 만드는 기술이 나와서 시력을 보조하게 된 것은 노인들에게 있어서는 감지덕지할 일이다.
생명의 빛이 꺼지기 전에 눈의 빛이 먼저 없어지게 되므로 우리는 시력을 갖고 있는 동안에 시력을 잘 활용할 필요가 있다.
일곱째, "길거리의 문들이 닫혀질 것이다." 노인들은 집안에서 두문불출하며, 행락을 위해 나다니기를 좋아하지 않는다. 입의 문이라고 할 수 있는 입술이 음식을 먹을 때에는 닫혀지고 "맷돌질하는 소리가 작아지는데, 이것은 이가 없기 때문이며 그래야 입 안에 든 음식을 맘대로 처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음식물을 소화시킬 수가 없으므로 한 번 빻은 곡식을 또 방앗간에 가지고 가야 한다.
여덟째, 노인은 "새 소리에도 일어날 것이다." 그들은 젊은이들 같이 단잠을 자지 못하고 조그만 소리에도 잠을 깨며, 심지어 새의 지저귐 소리까지도 그들에게는 방해가 된다. 그들은 기침 때문에도 편히 쉴 수가 없다. 그러므로 그들은 어느 누구보다도 일찍이, 새벽 닭우는 때면 기상하게 된다. 그들은 시기하고 소심하고 걱정하기 쉬으므로, 이것이 그들의 잠을 방해하고 그들을 일찍 일어나게 만들기도 한다. 혹은 그들은 미신을 믿기 쉬워서 점쟁이들이 불길하다고 하는 까마귀나 올빼미 따위의 "새 소리에도" 깜짝 놀라 "일어난다."
아홉째, 노인들과 함께 "음악하는 모든 딸들도 다 쇠하여지게 될 것"이다. 노인들은 노래부를 능력도 들을 능력도 없다. 그들은 스스로 노래할 수도 없고, 솔로몬이 젊었을 적에 "노래하는 남녀와 악기"로 즐거움을 누렸던 것처럼(전 2:8) 음악에서 어떤 즐거움을 취하지도 못한다. 노인들은 귀가 먹게 되어 여러 가지 소리와 음성들을 구별할 수 없게 되기가 쉽다.
열째, 그들은 "높은 곳을 두려워할 것이며," 높은 곳의 꼭대기에 올라가기를 두려워할 것이다. 숨이 차서 높이 오를 수 없거나, 머리에 현기증이 일어나거나 다리에 힘이 없어서 높은 곳에는 감히 올라갈 엄두도 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혹은 그들은 "높이 있는 것"이 자기들 위에 떨어질까 봐 두려워한다. "길에서 놀랄 것"이다. 그들은 이전같이 담대하게 말타지도 못하며 걸을 수도 없다. 길에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나 그것들이 자기들을 넘어지게 할까봐 두려워한다.
열한째, "살구나무가 꽃이 필 것이다." 노인의 머리카락은 희어져서 그의 머리는 살구나무 꽃이 만개한 것처럼 보일 것이다. 살구나무는 다른 어떤 꽃보다 일찍 꽃이 핀다. 그러므로 이것은 나아가 사람을 얼마나 속히 좀 먹는가 하는 것을 나타내는데 적절하다. 노년은 사람들의 예상을 뒤엎고 그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빨리 도래한다. 흰 머리카락이 사람들의 머리 여기 저기에 나타나지만 사람들은 그것을 깨닫지 못한다.
열두째, "메뚜기도 짐이 되며 원욕이 그칠 것이다." 노인은 아무것도 질 수 없다. 가장 가벼운 것이라도 그들의 몸과 마음에는 다 무겁게 느껴진다. 그래서 조그만 것이라도 그들을 주저앉게 하며 쓰러뜨린다. "메뚜기"는 아마 매우 소화가 잘 되는 것으로 간주되던 어떤 음식이었을 것이다(세례 요한의 음식도 "메뚜기"였다). 그 메뚜기 음식조차 노인의 위에는 심한 부담이 되며, 따라서 "원욕이 그친다." 그는 음식에 구미가 전혀 당기지 않을 것이며, 다니엘서 11장 37절에 나오는 임금처럼 "여인의 사모도 돌아보지" 않을 것이다.
노인들은 아무 생각도 없어지고 의욕도 없어져서, 감각적 즐거움도 그들에게는 무미건조하고 흥미 없는 일이 된다.
[2] 솔로몬이 이 말씀을 기록한 때는 그 자신이 노년에 접어든 때였던 것 같다. 그러기에 그는 노년이 지니는 여러 가지 취약성에 대해 실감나게 말할 수 있었을 것이며, 그가 관능의 쾌락에 열중하고 방종하였던 까닭에 그는 더욱 이런 것을 확신했을 것이다. 노쇠 현상을 보일 때 딴 노인들보다 더 원기가 좋은 노인들도 있다. 그러나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노년의 날은 "곤고한 날"이고, 또 "곤고한 날"이 될 것이며 즐거운 낙도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노인들에게 존경과 경의를 표하도록 크게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게 함으로써 노인들은 이같은 원통한 일들을 상쇄시켜 줄 만한 일을 가질 수 있으며, 그들의 비탄을 더하지 않게 될 것이다.
이 모든 것을 종합하면 왜 "우리가 청년의 때에 우리 창조주를 기억해야" 하는지에 대한 충분한 이유가 된다. 우리가 이렇게 할 때 그와 같은 "곤고한 날들이 이르더라도" 하나님께서는 은총으로써 우리를 기억해 주시며, 감각적 기쁨이 그와 같이 닳아 없어질 때에도 그의 위로하심은 우리의 영혼을 즐겁게 하실 것이다.
(2) 그는 죽음이 우리를 얼마나 판이하게 변화시킬 것인가를 보여 준다. 죽음은 노년의 참상을 예방하는 것이 되거나 아니면 말년의 비참한 것에 대한 종지부가 될 것이다. 그 외 어떤 것도 늙으막에 당하는 불행을 막거나 치유시킬 수가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너는 청년의 때에 네 창조주를 기억하라." 왜냐하면 죽음이 확실히 네 앞에 있으며 아마 네게 아주 가까이 있을지 모르고, 죽는다는 것은 중대한 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너는 커다란 관심을 가지고 부지런히 죽음에 대비하도록 해야 한다.
[1] 죽음은 우리를 불변의 상태로 고정시킬 것이다.
그 때에는 "사람이 자기의 오랜(영원한) 집으로 돌아갈" 것이며, 노인이 지니는 이 모든 병약과 노쇠는 그 두려운 이 주인 죽음에 대한 예고이자 전조가 된다. "사람은" 죽으면 이 세상과 이 세상의 모든 일과 향락으로부터 떠나게 된다. 그는 현재의 상태에서는 영영 떠나게 된다. 그는 "집으로" 돌아가게 되는 것이다. 이곳에서는 그가 나그네였고 순례자였을 뿐이다. 영혼과 육체가 모두 자기들이 왔던 곳으로 돌아간다(7절). 그는 안식처로 돌아가며 그곳에서 정착한다.
그는 "자기 집으로 돌아가며 자기의 세상 집으로"(이렇게 번역하는 이도 있음) 돌아가는데, 이는 이 세상은 그의 세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는 "자기의 오랜 집으로" 돌아가는데 이는 그가 무덤에 누워 있는 날들은 많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자기의 영원한 집으로" 돌아가는데 이 집은 이 세상에 다시는 돌아올 수 없고 영구히 머물러야 할 집이다. 우리가 죽으면 "집으로 돌아간다"는 이 사실은 우리로 하여금 죽음을 기꺼이 맞아들이게 해 줄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어찌하여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기를 동경하지 않는가? 우리가 죽으면 우리의 "오랜 집"으로 "영원한 처소"로 돌아가지 않을 수 없다는 사실은 우리로 하여금 죽음에 대한 채비를 할 수 있도록 할 것이다.
[2] 죽음은 우리를 사랑한 친구들에게는 슬픔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사람이 자기의 영원한 집으로 돌아가면 조객들이 거리로 왕래하게 된다." 조객에는 진심으로 슬퍼하는 자들이 있다. 우리들은 이러한 진정한 조문 자들을 길거리를 걸어다닐 때 그들의 복장이나 행동거지에 의해 확실히 구별할 수 있다. 한편 의식에서 죽은 자를 위해 곡하도록 고용된 조문자들도 있는데, 이들은 진심으로 애도를 표현하며 진정한 슬픔이 되도록 자극을 시킨다.
우리가 죽으면 우리는 우리 앞에 있는 우울한 집으로 이주하는 동시에 우리 뒤의 우울한 집을 남겨두고 떠난다. 눈물은 죽은 자에게 바쳐지며, 이것은 딴 여러 사례 중에서는 죽는다는 것을 심각한 일로 만든다. 우리가 "초상집에 가서" "조객들이 거리를 왕래하는 것"을 보더라도, 그것이 우리가 빈소에서 진지하고도 경건한 조문객이 되는 데에 아무 도움을 주지 않는다면 그 모든 것은 헛된 일이다.
[3] 죽음은 우리의 생리적인 구조를 분해할 것이며, 이 땅에 있는 장막 집을 헐어버릴 것인데 이것은 6절에서 우아한 필치로 표현되어 있다. 그 때에는 영혼과 육체를 놀라우리 만치 굳게 묶어둔 "은줄이 풀릴 것" 이며 그 신성한 매듭이 풀어질 것이고, 그 오래된 옛 친구들은 서로 작별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그 때에는 "금그릇이 깨어질 것"인데 이 금그릇은 우리를 위해 생명수를 담고 있던 것이다. 또한 우리가 생명을 항구적으로 유지시키며 그 쇠퇴함을 복구시키기 위해 물을 긷는 도구로 사용하던 "항아리가" 바로 샘 곁에서 깨어져 더 이상 물을 긷게 되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바퀴가(영양분을 수집하여 분배하는 데 종사하는 체내의 모든 기관들) "깨어져서" 더 이상 그 직분을 수행하지 못 하게 될 것이다. 몸은 태엽이 끊어지고 모든 바퀴의 운동이 멈춰져서 가지 않고 정지한 시계처럼 될 것이다. 기계는 산산조각이 나버리게 되었다. 즉 심장은 더 이상 맥박을 치지 않으며 혈액은 더 이상 순환하지 않는다.
이것을 인생의 장식물이나 일용도구로 해석하는 이들도 있다. 부자들도 죽으면 저희의 화려한 의상과 "은"과 "금"으로 된 가구들을 남겨두지 않으면 안 되며, 가난한 사람들은 그들의 질 "항아리"를 두고 가야하고 물 두레박은 그 "바퀴가 깨어질 것"이다.
[4] 죽음은 우리를 우리의 제일 원리로 환원시킬 것이다(7절).
인간은 신비한 종류의 피조물이어서 그 안에는 하늘의 한 줄기 광선이 땅의 한 덩이 흙과 결합되어 있다. 그러다가 죽으면 이 둘은 분리되어 각각 그것이 왔던 곳으로 되돌아간다.
첫째, 진흙 덩어리인 몸은 그것이 원래 속했던 "땅으로 돌아간다." 그것은 "흙으로" 지어졌으니 아담의 몸도 흙에서 나왔고 우리도 마찬가지다.
몸은 진흙으로 된 집이다. 그것은 죽으면 "흙"(땅) 속에 눕혀지며 순식간에 흙으로 환원되어 보통 흙과 조금도 다룰 바가 없이 될 것이니, 이것은 하나님께서 선고하신 대로이다(창 3:19). "너는 티끌(흙)이니 티끌(흙)로 돌아가리라." 그러므로 우리는 육신의 욕심에 빠지거나 몸이 요구하는 것을 포식하지 말며(몸은 곧 구더기의 양식이 될 것이기 때문에), "죄로" 하여금 "우리의 죽을 몸을 다스리지 못하게 하자"(롬 6:12). 왜냐하면 우리 몸은 죽을 운명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둘째, 한줄기 빛인 영혼은 "하나님께로 돌아간다." 하나님이 "지면의 흙으로 인간을 지으셨을" 때, 그는 "사람에게 생기를 불어 넣으셔서" 그가 "산 영혼"이 되게 하셨다(창 2:7). 그리고 하나님은 모든 사람 안에 각 사람의 영을 만들어 주신다. 불이 장작을 태우면 불길은 올라가고, 재는 그 나무가 자라났던 "땅으로 돌아간다." 이와 같이 영혼도 신체와 함께 죽지 않는다. 영혼은 "음부의 권세에서 구제된다"(시 49:15). 그것은 신체 없이도 존재할 수 있으며, 육체에서 분리되면 어두운 등피를 벗겨 냈을 때 촛불이 더욱 밝게 타는 것과 마찬가지로 더욱 빛나게 된다. 그것은 영들의 세계로 이주하여 그 세계에 합류된다. 영혼은 대재판장인의 "하나님께" 가서 자신에 대한 진술을 하고 그 몸이 행한 것을 따라 "감옥에 있는 영들과 함께 기거하게 되거나"(벧전 3:19), 아니면 "낙원에 있는 영들"과 기거하게(눅 23:43)될 것이다. 이러한 사실 때문에 악인들에게는 죽음이 두려운 것이 된다. 그들의 영혼은 복수 자로서의 하나님께 돌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경건한 자들에게는 죽음이 편안한 것이 된다. 그들의 영혼은 아버지 되신 하나님께로 돌아가며, 그들 자신을 그 손에 즐겨 맡길 수 있는 것은 중보자가 계시기 때문이다. 반대로 죄인들은 이 중보자 때문에 "하나님께" 돌아가는 일을 당연히 두렵게 여기는 것이다.
결론(1) (전도서 12:8-12)
여기에서 솔로몬은 대단원에 접근하고 있다. 그는 소기의 목적을 거두고 자기 청중들, 독자들을 설득시키기까지는 못내 고별을 아쉬워하고 있다. 즉 그들이 피조물에게서 발견할 수 없는 만족을 하나님과 하나님께 대한 그들의 의무 안에서만 찾도록 하라는 절규로써 독자들을 압도하고 있다.
Ⅰ. 그는 자기의 주제, 즉 모든 것이 헛되다는 것을 되풀이해서 말한다(8절).
1. 그는 그 타당성을 완전히 증명해 냈다. 그는 이 설교에서 자기가 기획했던 목적을 충분히 수행해 냈다. 그는 본서에서 이 주제를 아주 열심히 고수하였으며, 그의 논리나 적용은 매우 적절한 것이었다.2. 이 주제는 그가 타인들 및 자기 자신에게 몇 번이고 타일러 교훈을 주고자 원했던 주제이다.
이 교훈을 준비하고 있다가 모든 경우에 그것을 활용하라는 것이다. 우리는 그 공리가 매일 매일 그대로 증명되는 것을 목격한다. 그러므로 그것을 날마다 활용하도록 하자.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Ⅱ. 그는 신적 지시와 영감으로 이 주제에 대해 기록하였고, 그것을 우리에게 권장하여 우리가 진지하게 살피도록 해주고 있다. 이 책에 나오는 말씀은 진실하며 우리가 매우 귀중하게 받아 들여야 한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이것은 회심한 자의 말씀이다.참회 자는 비싼 대가를 치르고 이 세상이 헛된 것이라는 사실과 이 세상으로부터 큰 일들을 기대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임을 체험하였고 이 경험에 의해 그는 말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는 자기의 방랑에서 거두어 들여진 자였고 자기가 배반하였던 바로 그 하나님께로 돌아온 코헬렛(coheleth:전도자)이었다.
참회 자는 "헛되며 헛되다"고 말한다. 진정으로 회개하는 모든 사람은 세상의 허무 성을 확신하게 되는데, 그 이유는 이 세상은 자기들이 괴로워서 못 견디겠다고 불평하던 죄의 짐을 조금도 편하게 해 줄 수 없다는 사실을 발견하는 까닭이다.
2. 이것은 지혜로운 자의 말씀이다. 그는 어느 누구보다 지혜로왔고 비상한 양의 지혜를 부여받고 있었으며, 이웃에 명성을 떨치던 자였다. 인근의 모든 사람들은 "그의 지혜를 듣기 위해" 찾아왔었다. 지혜로운 그는 이 문제에 있어서 유능한 재판관이다. 그는 군주로서 지혜로왔을 뿐만 아니라 전도자로서도 지혜로왔다. 전도자들이 영혼을 획득하는 데에는 지혜가 필요한 것이다.3. 그는 선을 행하는 일과 지혜를 올바르게 사용하는 일을 자기 본분으로 삼았다. 그는 그 자신이 "지혜로왔기 때문에" 그 지혜가 혼자만을 위한 것이 아니고 자기 스스로로부터 얻은 것도 아님을 알았다. 따라서 "그는" 지식이 그 자신에게 유용한 것임을 깨닫고 타인들에게도 그 지식이 역시 쓸모있게 되기를 희망하여 "백성에게 여전히 그 지식을 가르쳤다." 백성에게 경건한 신앙을 잘 가르치는 것은 군주에게 이익이 되며, "여호와께 대한 선한 지식"을 그들에게 직접 가르친다고 해서 그것이 임금에게 허물이 되지는 않는다. 오히려 백성을 가르치며 그들에게 위로의 말을 전하는 직분을 맡은 자들에게 용기를 북돋아 주며 격려하는 것이 군주의 의무이다(대하 30:22). 가장 현명한 자나 가장 위대한 자라고 하더라도 훌륭한 지식을 교육받을 만한 가치가 없다거나 배울 능력이 없다는 이유로 백성을, 즉 일반 하층민을 멸시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 잘 교육을 받은 사람들조차 그들의 지식이 성장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계속적으로 "여전히 가르침을 받을" 필요가 있는 것이다.
4. 그는 노심초사하여 선을 행하려고 애썼고 "백성에게 지식을 가르치려고" 하였다.
그는 그들이 열등한 우민들이고 자기는 매우 현명한 자라 하여 자기에게 유리한 일만 하고 백성의 교육을 발굴하려 들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자기가 전도의 대상으로 삼고 설교하였던 뭇 영혼이 얼마나 귀한 가치를 지니고 있으며, 자기가 설교의 주제로 삼고 선포하였던 문제가 얼마나 큰 비중을 가진 것인지 알고 있었다. 따라서 자기가 읽는 것, 타인들에게서 듣는 것에 "충분한 주의를 기울였으니," 이는 그 모든 것을 잘 갈무리해 두었다가 "자기" 지식의 "보고에서 새 것과 옛 것을 아울러 끄집어 낼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자기가 말하는 것에나 기록하는 것에도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서", 하나 하나 엄선하고, 정확을 기하였다. 그가 행하는 모든 것은 정성을 들인 것이었다.
(1) 그는 잠언과 경구를 택함으로써 가장 유익한 설교 방법을 취하였다.
잠언이나 짤막한 격언은 애써서 만든 장문의 미사여구보다 이해가 한층 용이하며 잘 기억되기 때문이다.
(2) 그는 몇 가지 비유나 지혜의 말로 만족하여 했던 말을 몇번이고 반복하지는 않았다.
그는 어떤 경우에든지 자기가 의도하는 것을 나타낼 수 있기 위해 "많은 잠언"이나 매우 다양한 표현들을 사용했다.
(3) 그는 누구나 알 수 있는 명백하고도 흔해 빠진 관찰만 한 게 아니라, 깜짝 놀랄 만한 일과 일상적이 아닌 희귀한 것도 "찾아 내었다."
그는 단지 표면에 노출되어 있는 것을 주은 것이 아니고 지식의 광맥을 따라 파고 들어갔던 것이다.
(4) 그는 자기의 지식과 관찰을 생각나는 대로 전달한 것이 아니라, 조직적으로 배열하였고 그것들이 한층 힘을 발휘하여 광채가 나도록 "순서대로 정돈"하였던 것이다.
5. 그는 자기가 해야할 말들을 윤색(潤色)하였다. 즉 그는 자기 말에다가 매우 즐거우리라 생각되는 아름다운 옷을 입혔다. "그는 힘써 아름다운 말을 구하였으니"(10절), 그 말은 곧 즐거움의 말이었다. 그는 좋은 내용이 나쁜 문체와 시시하고도 조화되지 않은 표현으로 인해 망쳐지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였다. 목사들은 호언장담이나 아름다운 말을 구하려고 하지 말고 "마음에 받아들일 수 있는 말들"(원문의 의미는 그러함)을 찾으려고 연구해야 한다. 즉 사람들을 즐겁게 하며 교화시킬 수 있는 유익한 말씀이 곧 기쁘게 받아들일 수 있는 말씀이다(고전 10:33). 영혼을 사로잡으려 하는 자들은 "적절하게 행해지는 말씀으로" 그 영혼을 끌 수 있는 방법을 궁리하지 않으면 안 된다.
6. 그가 우리를 교훈하기 위해 기록한 것은 말할 필요도 없이 확실성을 가지고 있어서 우리가 믿어도 좋은 것이다. "기록한 것은 정직하며" 필자의 실제 느낌 그대로를 진지하게 반영한 것이고, 사실 그대로를 정확무오하게 표현한 "진리의 말씀"이기도 하다. 이 말씀의 인도대로 따라가는 자들은 절대로 그 길을 잃지 않는다. 만약 이 말씀이 "정직한 진리의 말씀"이 아니라고 한다면 "그 아름다운 말들이" 우리에게 무슨 유익을 주겠는가?
대개의 사람들은 자기들에게 올바른 것을 지시해 주는 것보다도 자기들에게 비위를 맞추며 알랑거리는 것을 더 좋아 한다(사 30:10). 그러나 자기 자신을 이해하며 자기의 이익을 아는 자들에게 "진리의 말씀"이 언제나 "마음에 드는 말씀"이 될 것이다.
7. 그와 딴 거룩한 사람들이 거룩한 것은 우리에게 매우 유용할 것이며 큰 유익을 줄 것이다. 그 기록된 말씀을 우리에게 해설 해 주면서 교훈할 때는 특히 유익할 것이다.(1) 신적인 진리는 적절하게 적용하고 활용만 한다면 우리에게 이익을 배가시켜 줄 것이다. 하나님의 진리는 "진리를 가르치고, 잘못을 책망하고 허물을 고쳐주며, 의로 교육을 일에 유익하다."
[1]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를 자극하여 의무에 충실하도록 하는 데에 유용하다. 그 말씀들은 쟁기를 끄는 황소가 말을 잘 듣지 않을 때 앞으로 나가게 하며, 그 걸음을 빨리 하도록 때리는 채찍과 같다. 하나님의 진리는 "사람들의 마음을 찔러"(행 2:37), 그들이 시간을 낭비하고 태만하게 될 때 그들을 스스로 반성하게 만들며 자기 맡은 일에 더욱 활기있게 정진하도록 해 준다. 사실 선한 일에 대한 우리의 애착심은 그처럼 맥빠지기 쉽고 냉각되기 쉬운 것이므로 우리는 이와 같이 "찌르는 채찍"이 필요하다.
[2] 또한 우리로 하여금 우리 의무를 꾸준히 행하도록 해준다.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은 잘 동요하고 변하기 쉬운 자들에게는 "못과 같아서" 그들을 선한 것에 고정시켜 버린다. 그것은 둔하고 물러 서기 잘하는 자에게는 "찌르는 채찍 같고" 변덕을 잘부리며 엇나가기 잘하는 이들에게는 "못과 같아서," 마음을 확립시키고 선한 결심을 공고하게 다지는 방편이 된다. 이로써 우리는 우리 의무에 무관심하지 않게 되며, 그 의무에서 떠나게 되는 일도 없어진다. 우리 안에 남은 선한 것이 얼마이든 간에 그것은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으로써 "확실한 곳에 잘 박힌 못과 같은" 것이다.
(2) 이와 같은 이익을 위해 신적 진리를 전달하는 방법이 두 가지 등장하고 있다.
[1] 항구적 규준이 되는 성서에 의하여. 성서 말씀은 "지혜자의 말씀"이며 곧 "지혜로운 자들"이 듣고 일컬어지는 예언자들의 말씀이다(마 23:34). 이 말씀들을 우리는 인쇄해 두고 있어서 언제든지 그것에 의지할 수 있으며 "찌르는 채찍과 못"으로서 사용할 수가 있다. 성서에 의해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교육시킬 수 있다. 성서의 말씀들이 매서움과 강한 힘을 가지고 우리 영혼에게 오도록 하고, 그 감명이 깊고 오래 지속하게만 해 보아라. 그러면 "우리는" 성서로 인해 "구원에 이르도록 지혜로와 질 것"이다.
[2] 목회에 의하여. "지혜자의 말씀"이 우리에게 한층 유익하도록 하기 위하여는 "회중의 스승"이 그 말씀을 통해 깊이 감명을 주고 단단히 못박도록 할 것이 규정되고 있다. 경건한 예배를 위해 모이는 엄숙한 회중은 고대부터 내려오는 신적 제도로써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 교회의 훈도를 목적으로 한다. 회중은 이런 목적에 유용할 뿐 아니라 필요하기도 하다.
이런 회중에는 스승이 있어야 하며, 그 스승이야 말로 그리스도의 사역자들인 것이다. 그들은 목자로서 회중을 주재하며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입이 되고 하나님께는 사람들의 입이 된다. 그들의 본업은 "지혜자의 말씀"을 고정시키는 것이며, 정문(頂門)에 일침(一針)을 놓듯 말씀을 "못"으로서 박는 일이다. 이를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은 "망치"와 같은 작용을 하는 것이다(렘 23:29).
8. 기록되어서 우리에게 이처럼 권장하는 것은 신으로부터 기인된 것이다.비록 그것이 여러 손을 거쳐(많은 "지혜자"와 많은 "회중의 스승")우리에게 전달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단 "한 분이 주신 것"이요 동일한 "목자자" 주신 것이다. 그 목자는 "요셉을 양떼같이 인도하시는 이스라엘"의 크신 "목자"이시다(시 80:1). 하나님은 바로 그 목자이시며, 그의 선하신 성령은 성서를 지으셨고 "회중의 스승들"이 성서를 올바르게 할 수 있도록 도와주신다. 이와 같이 "지혜자의 말씀"은 하나님의 참되신 말씀이어서 우리는 우리의 영혼을 이 말씀에 맡길 수 있다. 모든 목회자들은 바로 한 분이신 그 목자로부터 자기들이 전달할 말씀을 받아야 하며, 기록된 말씀의 빛을 따라 말하지 않으면 안 된다.
9. 우리가 만약 영감으로 기록된 성문서들을 사용하기만 한다면 그 성문서들은 우리를 진정한 행복에 이르는 길로 인도할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행복을 추구하며 딴 서적들을 탐구하느라고 피곤해질 필요가 없다(12절). "더 나아가서 이제 남은 것이라곤 네게 여러 책을 만드는(짓는) 데에는 끝이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뿐이다."(1) 많은 책을 "기록하는 것"에는 끝이 없다. "만약 내가 이제까지 기록한 것이 세상의 헛됨과 경건 생활의 필요성을 확신시켜 주는 데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 내가 아무리 많은 책을 저술한다고 해도 너는 확신을 얻지 못할 것이다."
만약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으로 내려 주신 성서를 이용해도 목표가 달성되지 못한다면, 지금 가진 것의 두 배가 있다 한들 우리는 목적을 달성하지 못할 것이다. 아니, 우리가 가진 책이 너무나 많아 온 세상이라도 그것을 다 수용할 수 없다고(요 21:25) 한들 무슨 소용이 있으랴! 많은 책을 일일이 연구하고 많이 공부한다는 것은 우리를 혼동시킬 뿐이며, 영혼을 유익하게 해 주기는커녕 오히려 "몸을 피곤하게 하는 것"이 된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 정도 주면 적당하겠다고 보신만큼만, 우리에게 적당하겠다고 보신 것만, 또 우리가 그것에 적당하겠다고 보신 것만 소유하게 된다. 이런 하나님의 말씀으로 훈계를 받지 않는 자들이 하물며 다른 책들에서 감화를 받을 것이라고 기대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사람들이 인생 처세에 대한 책을 제아무리 많이 저술하며 많은 연구로 지쳐 버릴 때까지 많은 저술을 한다고 하더라도, 그들이 줄 수 있는 교훈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얻는 교훈보다 나을 수 없다.
(2) 많은 책들을 "사는 데"에는 끝이 없다. 여러 책을 사서 완전히 터득하며 많은 연구로써 그 안에 있는 것을 통달해 버리는 데에도 끝이 없다. 학문의 욕구는 여전히 충족되지 않을 것이다. 참으로 학문은 인간에게 이 세상이 줄 수 있는 것 중 가장 훌륭한 낙과 최선의 성공을 안겨다 줄 것이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이 말씀에 의해 세상은 헛된 것이며 딴 여러 일 중에서 인간의 학문 역시 허무한 것이고, 진정한 경건이 없이는 학문도 인간을 행복하게 만들어 주기엔 불충분한 것이라는 사실을 "훈계" 받지 않는다면, 슬프게도 그 학문에는 끝이 없으며 그 배움에 의한 실질 이득도 없을 것이다. 위대한 셀덴(Selden)선생은 자기가 읽었던 모든 책 가운데서는 자기 영혼을 편히 쉬게 할 그런 것이 결코 발견되지 않았으며, 오직 성서 안에서만 특히 디도서 2장 11, 12절에서 자기 영혼의 안식처를 발견할 수 있었노라고 고백하면서 본문의 말씀에 동의를 표시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말씀을 믿고 따라야 하는 것이다.
결론(2) (전도서 12:13,14)
솔로몬은 본서에서 하나의 큰 질문을 제기하고 그 해답을 탐구하려 하였는데, 그것은 "인간이 행하여야 할 선은 무엇인가?" 하는 것이었다(전 2:3). 참다운 행복에 이르는 진정한 길은 무엇이며, 우리의 위대한 목표를 달성하게 하는 확고한 수단은 무엇인가? 그는 무익하게도 거개의 사람들이 열심으로 추구하는 일들 중에서 이것을 찾았었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그는 하나님이 옛날 사람에게 나타내 보이는 것을 발견함으로써(욥 28:28) 마침내 참 행복에 이르는 유일한 길은 진지한 경건이라는 사실을 찾아내었다. "우리는 모든 일의 결론을 듣자"(우리 성경과 조금 차이가 있음) 이 결론은 탐구에 의해 채택된 답신(答申)이요, 이 꾸준한 탐색의 보고서다. 너희는 내가 시도해온 모든 것을 단 두마디로 요약하여 섭취하게 될 것이다. 그는 "너희는 그 결론을 들어라"라고 하지 않고 "우리는 그 결론을 듣자"라고 말한다. 그가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설교자들도 자신이 설교하고 있는 청중 중의 하나가 되어서 하나님께로부터 나오는 말인 자신의 말을 청취해야 하는 까닭이다. 남들을 가르치면서 자신들은 가르치지 않는 선생들은 불완전한 선생이다(롬 2:21).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다 순수하고 귀중하나 어떤 말씀들은 이 말씀처럼 한층 주의를 기울여야 할 만한 가치가 있다. 맛소라 사본은 신명기 6장 4절 말씀처럼 이 말씀을 대문자로 시작하고 있다. 솔로몬 자신도 "우리는 일의 결국을 듣자"란 말씀에 주의를 환기시키면서 그 말씀 앞에 "요 주의"(N.B: Nota bene 주의하라)를 첨부하였다.
여기서 다음 사항을 살펴보자.
Ⅰ. 종교(신앙 생활)의 요목(要目). 미심적은 논란이 따르는 모든 문제는 접어 둔다면, 신앙적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을 경외하며 그의 명령을 지키는 것"이다.
1. 신앙 생활(종교)의 근본은 마음을 지배하시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며, 그의 위엄에 대한 존경이며 그의 권위에 대한 복종이요, 그의 진노하심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경외하라." 즉 하나님을 경배하라. 내적인 것이나 외적인 것을 막론하고 모든 참다운 헌신의 본보기로 하나님의 이름에 합당한 존귀를 그에게 드려라(계 14:7).2. 신앙 생활(종교)의 규칙은 성서에 계시된 하나님의 법이다.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경외는 그의 명령으로 가르침을 받지 않으면 안 된다(사 29:13). 따라서 우리는 그의 계명을 명심하고 준수해야 한다. 하나님께 대한 경외의 감정이 심중에 가득하다면 "그의 모든 명령에 대한 존경의 마음"과 그 명령을 지키고자 하는 주의력도 생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대한 우리 의무를 본분으로 삼지 않는다면,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것도 헛 일이 될 것이다.
Ⅱ. 이 일의 중요성. "이것은 사람의 본분"(전부)이다.
그것은 인간이 해야할 일의 전부이며 사람이 받는 축복의 전부이다. 우리의 전 의무는 이 말씀에 집약되어 있으며, 우리의 전 위로는 이 말씀에 달려 있다. 그것은 개개인의 관심사이며, 또한 인간의 주요하고도 계속적인 일이 되어야 마땅하다. 그것은 모든 사람들의 공동 관심사이며 그들의 모든 시간의 공통 과제이다. 인간이 부자냐 빈자냐, 귀하여 천하냐 하는 것은 인간에게 아무 문제도 되지 않는다. 하나님을 경외하면 그가 명령하는 대로 행동하느냐가 인간에게 있어 가장 귀중한 문제이며 중요한 문제이다.
Ⅲ. 이일에 대한 설득(14절). 우리는 신앙심을 지닌다는 게 얼마나 굉장한 결과가 되는지 알게 될 것이다. 만약 우리가 마지막에 가서 치러야 할 대가를 고려한다면 어느 누구나 할 것 없이 즉시 자기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는 앞에서 육욕에 빠진 부도덕한 생활을 반박했었는데(전 9:9) 여기서는 경건한 삶을 말하고 있다. "하나님은 모든 행위를 심판할 것이다.
1. 심판이 장차 올 터인데 이 심판에서는 모든 사람의 영원한 상태가 최종적으로 결정될 것이다.2. 하나님께서 친히 재판장이 될 것이며, 신인(God-man)이 심판자가 되실 것이다. 그는 심판할 권리를 자졌을 뿐만 아니라, 이 일에 완전하게 합당하신 분이시며 무한히 지혜롭고 공평하시기 때문이다.
3. 그 때에는 "모든 행위가 심판에 회부될" 것이며, 조사를 받을 것이고 다시 소환될 것이다. 그 날은 "육으로 행한 모든 일을 기억하는 날"이 될 것이다.
4. 그 때에는 "모든 행위"가 크게 심판받을 것이다. 그 행위가 선한 것이든 악한 것이든, 하나님의 뜻을 따른 것이든 어긴 것이든지 간에 다 심판받을 것이다.
5. 선악을 막론한 "은밀한 일들"까지도 저 큰 심판날에는 밝히 드러날 것이며 추궁받게 될 것이다(롬 2:16).
감춰졌던 어떤 좋은 일도 그때에는 명백하게 들어날 것이며, 숨겨졌던 어떤 나쁜 일도 모두 환히 들어날 것이다.
6. 장차 올 심판과 그 심판의 엄중함을 생각하면 우리는 하나님을 좀 더 철저하고 신중하게 섬기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이것은 우리가 "희열에 넘쳐 우리 계산서를 내밀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Previous
Li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