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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지배자의 학대 (전도서 4:1-3)

솔로몬은 도량이 넓은 임금이었는데(왕상 4:29) 그것은 다른 일들 중에서도 나타나지만 그가 불쌍한 계층의 인간에 대해 매우 자상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고난당하는 자의 고난을 인식하고 있었다는 점에서도 잘 나타난다. 그는 지배자들을 공박하였었고(전 3:16, 17), 그들의 오만불손함을 억제하기 위하여 그들에게 장차 올 심판에 대해 상기시켜 주었다. 그가 이 일을 행하였던 것은 말할 것도 없이 왕으로서 그들에게 정의를 행하며 "그들의 대적에게 원수를 갚아주고자" 행하였던 것이었으니, 이는 그가 "하나님을 경외"하면서도 "인간도 또한 존중"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전도자로서 그 일을 행하며 다음과 같은 사실을 보여 준다.

Ⅰ. 학대받는 자들이 당하는 괴로움을 이야기하고 있다(1절). 그는 이들에 대하여 매우 감동적이며 동정적으로 말하고 있다. 그를 슬프게 한 것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1. 정의를 압도해 버리는 힘과 "해 아래서 자행되는" 많은 "억압"과 종들과 노동자들과 가난한 인부들이 그 주인들에게서 당하는 압제를 보는 일이었다. 고용주들은 자기들의 유리한 조건을 부과하기 위해 사용인들의 최저 생계비까지도 착취하였으며, 잔혹한 채권자들은 채무자들을 억압하였고, 사깃군 빚장이는 빌려주는 자들을 울렸다. 소작인들은 가혹한 지주들에게 수탈을 당하였고, 의지할 데 없는 고아들은 표리부동한 보호인들에게 학대를 당하였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제일 악한 것은 전제 군주와 불공정한 재판관들이 백성들을 압제하는 일이었다. 그러한 "학대들이 해 아래서 행해지고 있다." 반면에 해 위에서는 의(義)가 영원히 지배한다. 지혜있는 이들은 이러한 학대들을 "유심히 살펴보고" 억압당하는 자들을 구제하기 위하여 무엇인가 해보려고 궁리할 것이다. "가난한 자들을 살펴보는 자는 복이 있다."

2. 학대당한 자들이 자기들이 당한 학대를 얼마나 뼈저리게 명심하는지를 목도하였다. 그는 "그렇게 학대받는 자들의 눈물을 보았고", 아마 그들과 함께 울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 세상에는 슬퍼하는 사람이 많다. 어느 쪽을 둘러 보더라도 우울한 장면이 전개되며, 이런 저런 고통으로 "학대" 받는 자의 "눈물"이 있다. 그들은 불평해봐야 소용없고 호소해봐야 헛된 것인 줄을 알기에 은밀히 슬퍼한다(욥 16:20; 30:28). 그러나 "슬퍼하는 이들은 복이 있다."

3. 그들이 자기 자신들을 돕기에 얼마나 무능한가를 보았다. "그들을 압제하는 자들 편에는 권력이 있었다." 학대자들은 그릇된 일을 행하였더라도 그들의 손에는 그 잘못된 일을 견지하고 자기들이 행한 것을 끝까지 밀고 나갈 만한 권세가 있었기 때문에, 가난한 자들은 그러한 완력있는 손으로 억눌림을 당하였고 구제를 얻을 길이 없었다. 권력이 오용되어 선을 행하도록 하기 위해 주어진 것이 거꾸로 악을 행하는 일에 뒷받침이 되는 것은 슬픈 일이다.

4. 피학대자들과 그들의 재난이 그 주위에 있는 모든 자들에게 얼마나 가볍게 여겨지고 있는가 하는 것을 보았다. 그들은 눈물을 흘렸고 위로를 필요로 하였으나 아무도 그러한 친구의 도리를 행하는 자는 없었다. "그들에게는 위로자가 없었다." 그들의 학대자들은 강력하였고 위협적이었다. 따라서 "그들은 위로할 자를 얻지 못하였다." 마땅히 그를 위로했어야만 할 자들을 학대하는 이들의 비위를 거슬릴까봐 두렵고, 그들의 위로자가 되겠다고 나서다가 그들과 같은 꼴이 되는 것이 무서워서 감히 그 일을 행하지 못하였다. 인간들 사이에서 휴머니티(humanity)를 거의 찾아 볼 수 없음은 슬픈 일이다.

Ⅱ. 그들이 당한 처지가 주는 유혹이 있다. 이처럼 가혹한 취급을 당하게 되자 그들은 생명을 증오하고 멸시하려는 유혹을 받고, 죽은 자들을 부러워하는 마음이 생기며 차라리 세상에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좋을 뻔했다는 소원을 갖게 된다(2, 3). 그래서 솔로몬도 그들과 쾌히 의견을 같이 하는데, 이는 "모든 것이 헛되며 괴로움이라"는 것을 증명하는데 그런 의견이 도움이 되는 까닭에서이다. 실제로 생은 그 자체가 헛된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만일 하나님의 은총과 열매 맺음에 비교하여 생을 중히 여기지 않는다면 그것은 우리의 칭찬이 되나(사도 바울과 같이, 행 20:24; 빌 1:33), 만약 (여기에서처럼) 삶에 수반하는 여러 불행 때문에 생을 혐오한다면 그것은 우리의 나약함이 된다. 욥이나 엘리야가 그랬던 것처럼 육을 따라 판단한 것이 된다.

1. 그는 여기에서, 이 불행한 삶을 끝내고 자기 배역을 해 낸 뒤 무대를 떠나간 자들을 행복하다고 생각한다. "나는 이미 죽은자를 칭송하였노라. 나는 곧장 죽었거나 아니면 이 세상을 신속히 통과한 자, 인생이란 바다를 지름길로 건너간 자, 잘 살아 보기 전에 이미 죽은 자를 칭송하였다. 나는 그들의 운명을 부러워하였고 만약 그것이 그들 자신의 선택에 의한 것이었다면 세상을 들여다보기만 하고 그것을 좋아하지도 않은 채 은퇴해 버린 그들의 지혜를 칭찬했을 것이었다. 나는 생이란 길고 무거운 쇠사슬을 질질 끌며 그 지리한 분초(分秒)를 소모시키면서 아직도 살아 있는 산 자보다 그들이 더 낫다고 결론을 내렸다." 이 말씀은 욥기 3장 20, 21절 말씀보다는 계시록 14장 13절과 비교할 만하다. 거기에서는 박해의 때에(솔로몬이 여기에서 묘사하는 것도 그런 것이다) 당한 죽음은 인간의 수난이 아니고 하나님의 성령이 당하는 수난이어서 "지금부터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죽어서 허나님께로 가 안식하고 있는 성도들의 형편은, 아직도 자기들의 일과 전투를 계속하면서 살아 있는 성도들의 처지보다 많은 이유에서 더욱 낫고 더 바람직하다.

2. 그는 이 비참한 삶을 전혀 시작하지도 않은 자들을 행복하다고 생각한다. 더구나 그들은 모든 자들 중 가장 복된 자라고 생각하고 있다. "출생하지 않은 자가 이 둘보다 더 행복하다." 태어나서 "해 아래서 행해지는 악한 일을 보고" 그 많은 사악이 자행되는 것을 보는 것보다는 태어나지 않는 편이 더 낫다. 그토록 많은 그릇됨이 저질러지는 것을 보고도 그 문제를 개선할 능력이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잘 행하는 데도 불구하고 학대를 받느니 보다는 결코 태어나지 않는 것이 더 나은 것이다.

선한 사람은 그가 이 세상에서 아무리 비참한 형편에 처해 있더라도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좋았겠다고 소원할 이유가 없다. 그는 타는 불 속에서 조차 주를 영화롭게 하여, 마지막에 가서는 행복할 것이고 영원히 행복할 것이기 때문이다. 어느 누구라도 살아있는 동안 그런 것을 바라지 말아야 하며, 이는 생명이 있는 동안에는 희망도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그가 지옥에 있지 않는 한 결코 파멸하는 법이 없다.

 

4:2 없음.

 

4:3 없음.

 

4:4

인간이 추구하는 것의 헛됨 (전도서 4:4-6)

여기에서 솔로몬은 이 세상 사업에 부수되는 허무성과 마음의 성가심에 대해서 그가 전에 말했던 것을 다시 관찰하고 숙고하고 있다(2:11).

Ⅰ. 만약에 사람이 영민하고 재간이 있어서 그 사업이 성공적이면 "자기 이웃"의 시기를 받는다(4절). 비록 그가 수 많은 고충을 겪고, "모든 수고"를 경험하며, 자기 재산을 수월하게 얻은 게 아니고 굉장히 고된 노동을 지불하며, 부정직하게 취득하지 않더라도 그는 이웃의 시기를 받는다. 또한 어느 누구에게도 잘못하지 않고 속이지도 않으며, "모든 정당한 일"로 그 자신의 고유한 사업에 열중하고 모든 공평의 법칙과 공정 거래에 따라 행한다고 하더라도 "그는 이 일로 인하여 자기 이웃에게 시기를 받으며" 자기의 정직함 때문에 얻은 평판으로 해서 더욱 시기를 받는다. 이 일이 나타내 주는 것은 다음과 같다.

1. 대개의 사람들은 얼마나 비양심적인가! 대부분의 인간들은 단지 자기 이웃이 자기보다 재간이 더 있고 더 부지런하며 하늘의 축복을 더 받는다는 이유만으로 그에게 원한을 품으며 악담을 내뱉고 불친절한 행동을 한다. 카인은 아벨을 시기하였고 에서는 야곱을, 사울은 다윗을 시기하였으니, 이 모두가 그들의 의로움을 시기한 것이다. 이것은 악마적인 행위와 같다.

2. 지혜롭고도 유용한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기대할 위로는 얼마나 하찮은 것인가! 그들이 아무리 신중하게 처신하여도 시기를 피할 수가 없다. 그리고 "시기 앞에 설 수 있는 자가 누가 있겠는가?"(잠 27:4) 덕이 뛰어난 자들은 악이 과대한 자들에게 항상 눈에 가시같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는 옳은 일을 하는데 용기를 잃어서는 안 되며, 오히려 그로 인해 자극을 받아 칭찬 듣기를 기대하여야 한다. 사람으로부터가 아닌 하나님께로부터 칭찬을 기대하고, 피조물 안에서 만족과 행복을 얻으려고 기대를 걸지 말아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만약에 "올바른 일"이 "헛되고 고통스러운 일로 판명된다면" "해 아래서" 행하는 그 어떤 일도 헛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은 "모든 옳은 일"로 인해서 하나님께 용납될 것이며, 그렇게 된다면 비록 "자기 이웃에게 시기"를 받더라도 그것을 염두에 두지 않고 다만 세상에 덜 집착하게 될 것이다.

Ⅱ. 만약 사람이 어리석고 우둔하여 자기 사업에 실수를 하면 그는 자기 자신에게 해를끼치는 셈이다(5절). 마치 "자기 손들이" 둔하고 "거두어져" 있는 것 같이 자기 일을 하고 매사를 서투르게 행하는 "우매자"와, 자기 안일을 사랑하고 자기 손들을 따뜻하게 지니기 위해 수고하기를 거절하고 "자기 손들을 함께 포개는 게으름뱅이"는 (왜냐하면 나태한 자는 우매자이기 때문에) "자기 자신의 살을 먹으며" 자기 자신에게 대한 식인종이 된다. 그는 자신을 너무나 가난한 처지로 몰고 가서 자기 자신의 살 외에는 먹을 것이 없게 되고, 너무나 절망적 상태에 빠지게 되어 괴로움으로 인해 자신의 살을 먹고 싶을 지경이 된다. 그는 개의 삶을 가지고 있으니 그것은 곧 굶주림과 편안함이다. 그는 이 세상에서 번영하는 활동적인 사람들이 시기받음을 보았기 때문에 딴 극단으로 달려간다. 그는 올바른 사업으로 인해 시기를 받을까 두려워 온갖 그릇된 일만 하고 연민을 받을 가치가 없는 인간이 된다.

게으름은 그 자체가 벌이 되는 죄이다. "한 손에만 가득한 평온한 것이 수고와 심령의 애씀(바람을 잡으려는 것)으로 가득한 두 손보다 낫다"는 다음 말씀(6절)은 두 가지로 받아 들일 수 있다.

1. 자신의 게으름을 변명하기 위한 나태자의 주장으로 볼 수 있다. 그는 "자기의 손들을 함께 거두고" 자기 합리화를 위해 훌륭한 진리를 남용하여 그릇되게 적용한다. 즉 마치 풍부한 것을 가지고 다투는 것보다 "조금 가져도 안온한 것이 낫기" 때문에 정직하게 수고하여 풍부한 것보다 게을러서 조금 가지는 것이 더 나은 것처럼 변명하고 있다. 이와 같이 그는 자기 기만적으로 "자기 생각에는 지혜롭다"(잠 26:16).

2. 그러나 나는 오히려 이 말씀을 솔로몬의 충고로 받아들이고 싶다. 즉 그가 하는 충고란 "사람을 시기" 받게 만든 수고와 "자기 자신의 살을 먹게" 만드는 게으름 사이에서 중용을 취하라는 것이다. 우리가 필요한 것이 부족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정직함과 근면으로써 한 손 가득한 것을 붙들도록 하자. 그러나 양손 가득히 잡지는 말자. 이것은 심령의 애씀만을 야기시킬 뿐이기 때문이다. 적당한 수고와 적당한 획득이 가장 좋은 것이다. 사람은 세상것을 한 줌 가지고도 그것을 즐기며 자기 스스로 평온하게 할 수도 있으니, 곧 마음의 만족, 양심의 평화, 자기 이웃의 사랑과 호의 따위를 얻을 수 있다. 반면에 자기 양손을 그득하게 채운 많은 사람들은 마음이 바라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소유하는 자들이어서 그로 인해 많은 수고와 고통을 당하게 된다. 적은 것으로 살 수 없다는 이들은 설사 그들이 아무리 많은 것을 소유하게 되더라도 마땅히 살아가야 할 자세대로 살 수 없는 자들일 것이다.

 

4:5 없음.

 

4:6 없음.

 

4:7

인간 유대에 유의함 (전도서 4:7-12)

여기에서 솔로몬은 이 세상의 허무한 것 중 또 다른 것을 응시하게 되는데 그것은 흔히 사람들이 가지는 게 많으면 많을수록 더욱 가지기를 소원한다는 점이다. 그들은 이것에 너무 열중하여 자기들이 소유하는 것에서는 아무런 즐거움을 누리지 못한다. 이제 솔로몬은 여기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제시한다.

Ⅰ. 이 악의 원인은 이기심이다(7, 8). "단 한 사람이 홀로 있는데" 그는 자기 자신 외에는 아무도 상관하지 않고, 누구도 좋아하지 않으며, 할 수만 있다면 지구 한 복판에 자기 혼자만 있기를 원한다. "거기에는 둘째도 없으며" 또 그는 둘째가 있기를 원하지도 않는다. 그는 한 집에 한 입만 있으면 족하다고 생각하며 자기 곁에 오는 것은 무엇이든지 싫어한다. 이 탐욕스런 돈벌게가 여기에서 어떻게 묘사되는지 보자.

1. 그는 자신을 단지 자기 사업의 노예로 삼는다. "그는" 책임맡은 사람도 없고 "자녀나 형제도 없으며" 자기 자신 외에는 돌볼 사람도 한 사람 가지고 있지 않다. 그에게는 매달리거나 빼앗아 가는 자도 없으며 가난한 친척도 없다. 그는 가족의 지출비가 겁이나 결혼도 하려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수고에는 끝이 없다." 그는 밤이고 낮이고, 새벽부터 밤 늦게까지 일에 매달려서 자신에게 필요한 휴식조차 허락하는 일이 거의 없이 자신을 혹사한다. 그는 그 자신이 소명받은 직업의 테두리에 국한되지 아니하고 자기가 벌 수 있는 일이면 무엇에나 손을 내민다(시 127:2 참조).

2. 그는 결코 자기가 충분히 가졌다고 생각지 않는다. "그의 눈은 부를 족하게 여기지 않는다." 탐욕은 "눈의 정욕"이라고 칭하는데(요일 2:16). "그것을 자기 눈으로 보는 것은" 속물들이 탐욕스러워하는 모든 것이기 때문이다(전 5:11). 그는 자기 등을 따뜻하게 하는데나(레이놀즈 감독이 관찰하는 대로), 자기 배를 불리는 일에나, 자기 직업과 가족, 이 세상에서 근사하게 사는 일에는 모자람을 느끼지 않았으나 자기 눈을 위하여는 충분한 것을 갖지 못하였다. 그는 단지 그 부를 볼 수 있고 자기 돈을 헤아릴 수 있었으며 그것을 사용할 마음조차 갖지 않았지만, 자기 눈을 기쁘게 할 만큼 더 많은 것을 가질 수 없었기 때문에 그는 편안하지 아니하다.

3. 그는 자기가 소유하고 있는 것이 주는 위로를 거부한다. "그는 자기 심령에게서 낙을빼앗는다." 만일 우리 영혼이 낙을 잃는다면 그것을 뺏는 것은 우리들 자신이다. 타인들은 우리에게서 우리의 외부적 낙을 뺏을 수 있으나 우리의 은혜, 위로 그리고 우리의 영적인 낙을 뺏을 수는 없다. 만약 우리가 스스로 즐기지 않는다면 그것은 우리 자신의 과오이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은 이 세상에 집착하고 그것을 추구하다 보니 "자기들의 영혼"에게서 이 곳에서 뿐만 아니라 영구히 "좋은 낙"을 빼앗아 버리며 신앙과 양심의 난파를 당하게 하기도 한다. 그래서 스스로 하나님의 은총과 영원한 생명을 스스로 탈취할 뿐만 아니라 이 세상과 현재의 삶의 즐거움까지도 빼앗아 버린다. 스스로 지혜로운 체하는 세상 사람들을 사실은 자기 자신의 원수가 되는 것이다.

4. 그는 이런 일을 행하면서도 그에 대한 변명도 갖지 못한다. "그는 아들도 없으며 형제도 없다." 그는 평생 살면서 자기가 만족할 정도로 소유하게 된 것을 소비할 수 있는 연고자도 없고 위하여 친절을 베풀 자도 없다. 그가 만족할 만큼 저축해 줄 대상도 없으며 자기가 죽은 뒤 그것을 남겨 줄 자도 없고, 그에게는 불쌍한 자도 사랑스런 자도 없었다.

5. 그는 이런 어리석음을 자기에게 보여줄 만큼 충분한 사고력도 없다. 그는 스스로 이런 질문도 결코 던지지 않는다. "누굴 위해 내가 이토록 수고를 하는가?" 내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당연해 해야 할 수고를 하는가? 도움을 필요로 하는 자들에게 줄 수 있기 위해 수고를 하는가? 나는 이렇게 수고하고 있는 것이 단지 죽을 몸을 위해서라는 것을 고려하는가? 이 수고는 남을 위한 것이다. 나는 그 남이 누군지도 모른다. 아마 내가 그 재산을 모을 때에 못지 않게 빨리 그것을 날려 버릴 어떤 바보를 위한 것이거나, 내가 기억하기로 내게 은혜를 베풀어 주지 않았던 원수를 위한 수고일지도 모른다."

자기들의 모든 수고가 누구를 위한 것인가. 그리고 모르는 자에게 주기 위해 온갖 낙을 잊고 수고하는 것이 정말 가치 있는 일인지 아닌지를 심사숙고하고 난 뒤 이 세상에서 수고하는 자들은 지혜롭다. 만약 사람들이 이 점을 생각지 않는다면 그것은 "헛된 일이며, 뼈 아픈 노고"이다. 그들이 수치를 당하며 스스로 고생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

Ⅱ. 이 악에 대한 치료는 친목이다. 인간들은 자기 자신을 위해 모든 것이 있는 줄 착각하기 때문에 이처럼 옹졸해진다. 솔로몬은 여기에서 여러 가지 사례로 "사람이 혼자 있는 것은 좋지 않다"(창 2:18)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그는 우리에게 결혼과 우정이라는 것을 권장하려고 하는데, 이 두 가지는 탐욕스런 수전노라면 그 비용과 책임 때문에 거절할 일들이다. 그러나 만약 사려깊게 인연을 맺기만 한다면, 결혼과 우정은 위로와 유익함을 주며 그 값에 대해 아주 큰 보답을 할 것이다. 낙원에서는 인간이 만약 그 짝이 없었다면 행복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지음을 받자마자, 배우자를 얻었던 것이다.

1. 솔로몬은 "둘이 하나 보다 낫다"는 것을 하나의 진리로 기록해 두고 있다. 즉 그들 중 어느 하나라도 따로 분리되어 있는 것보다 둘이 결합해 있는 게 더 행복하고, 혼자만 있는 것보다 둘이 같이 있으며 서로가 더 즐거우며 상호간의 복리에 도움이 되고, 힘을 합치면 남에게 선을 행하기가 더욱 쉽다. "그들은 수고함으로 좋은 상을 얻는다." 그들이 무슨 봉사를 하든 간에 그것은 다른 모습으로 다시 그들에게 돌아간다. 자기만 섬기는 자에게는 자기 자신만이 회계주임이 된다. 그러한 자들은 흔히 자기를 위해 회계 주임이 되어주는 그의 친구보다도 자기자신에게 불공평하고 후하지 못할 것이다. "끝없이 수고하고서도 그 심령으로 낙을 누리지 못하는" 자를 살펴보라. 그는 "수고함으로 상"을 얻지 못한다. 그러나 타인들에게 친절한 자는 "좋은 보상"을 얻는다. 성스런 사랑의 즐거움과 이익은 "사랑"의 모든 "일과 수고"에 대해 풍부한 보상이 되어 줄 것이다. 여기에서 솔로몬은 고독의 해독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홀로 있는 자에게 화가 있다." 그는 많은 유혹에 노출되어 있으나 그러한 유혹은 좋은 동반자와 친구가 있다면 막아 주고 그로부터 수호해 줄 수 있는 것이다. 그는 쇠가 쇠에 의해 날카롭게 되듯 자기 친구의 애고(愛顧)로 얻을 수 있는 유익함이 결여되어 있다. 그렇다면 은둔 생활은 결코 완전한 상태를 기하지 못하며, 자기 마음속에서 딴 어떤 사람도 사랑하지 못하는 자들은 하나님께서 가장 사랑하시는 자들이라고 간주될 수도 없다.

2. 그는 우정과 좋은 교재의 이익에 대한 여러 사례로 그것을 증명한다.

(1) 때때로 당하는 위급 상태에서의 구조자. 두 사람이 함께 여행을 하면 좋다. 왜냐하면 "혹시" 한 사람이 "넘어지게" 되어 혼자 일어날 수가 없게 된 경우에는 다른 한 사람이 즉시 "그를 붙들어 일으킬" 것이기 때문이다(궁할 때의 친구야 말로 참 친구이다). 그 반면에 만약 한 사람이 혼자 여행하다가 넘어진다면 그는 조그만 도움이 없음으로 하여 실종되어 버릴 수도 있다. 사람이 만약 "죄에 빠지게" 된다면 그의 친구가 "온유한 마음으로 그를 회복시키고자" 도와 줄 것이다. 또한 곤경에 빠지게 되면 친구가 위로하고 슬픔을 진정시키도록 도와 줄 것이다.

(2) 상호간의 온정(溫情). 길동무가 유용하듯 (Amuics pro Vehiculo─즉 친구는 수레에 대한 좋은 대용품이다) 잠자리의 친구도 필요하다. "두 사람이 함께 누우면 따뜻하다." 선한 사교는 아주 유덕하고 은혜로운 애정을 불러 일으키며 크리스챤들은 서로를 "분발하여 사랑과 선한 일을 하게 함으로써" 서로를 따뜻하게 한다.

(3) 연합된 힘. 만일 원수가 홀로 있는 사람을 발견한다면 그 원수는 "그를 이기기가" 쉽다. 혼자의 힘으로는 자신의 역할을 잘해내기 어려우나 만약 그에게 후원자가 있다면 그는 충분히 그 적을 감당할 수가 있다. "둘이면 그를 당할 것이다." 요압과 아비새는 내 원수를 대적하는 일에 나를 도와 주고 나는 네 원수를 칠 때에 너를 도와 주겠다"고 협약하였으며 이에 의해서 그 둘은 모두 승리자가 되었다(삼하 10:11). 반면에 따로 따로 행동했더라면 둘 다 정복되고 말았을 것이다. 로마인들이 영국을 침입했을 때의 고대브리턴 민족에 대해 다음과 같은 말이 전해지고 있다. Dun singuli pugnant, universi vincuntur ─즉 그들이 분산된 부대로 싸우는 동안 그들은 대세를 희생시킨다. 우리의 영적 사업에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영적인 전투에 있어서도 우리는 서로 서로 도움이 될 수 있다. 하나님과의 교제가 주는 위로 다음가는 것은 성도와의 교제가 주는 위로이다.

그는 이런 잠언(격언)으로 결론을 맺는다. "세겹 줄"은 한 다발의 화살과 마찬가지로 "쉽게 끊어지지" 않지만 한 겹 줄과 화살 한 개는 쉽사리 끊어지고 부러진다. 그는 두 사람이 함께 있는 것을 "세겹 줄"에 비유하고 있다. 왜냐하면 거룩한 사랑과 우정 안에 밀접하게 결합되어 있는 두 사람에게는 그리스도께서 그의 성령에 의하여 오셔서 세 번째 분이 되어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엠마오로 가고 있는 두 제자에게 그리스도가 합류하셨던 같이 결코 "끊어지지" 않는 "세 겹 줄"이 거기에 있게 되는 것이다. "사랑 안에 거하는 자들은 하나님 안에 거하며, 또한 하나님은 그들 안에 거하신다."

 

4:8 없음.

 

4:9 없음.

 

4:10 없음.

 

4:11 없음.

 

4:12 없음.

 

4:13

왕위의 허무 (전도서 4:13-16)

솔로몬은 자신이 왕이었으므로 그는 임금의 신분과 권위의 허무성에 대해 어느 누구보다도 더 자유스럽게 말할 수 있었다. 그는 여기에서 그 제왕의 신분와 권위를 불확실한 일로 나타내고 있다. 그는 전에도 이와 같은 말을 한 적이 있으며 ("면류관이 어찌 대대로 계속되겠느냐? 잠 27:24 ") 그의 아들은 그것이 사실임을 경험하였다. 만약 지혜와 민중의 사랑이 없다면 최고로 존귀한 자리보다 더 불안정한 것은 없는 것이다.

Ⅰ. 왕이라도 지혜가 없으면 행복하지 않다(13, 14). 세상에서 "가난"하고 너무 젊다는 두 가지 이유 때문에 멸시받고 거의 아무도 눈여겨 봐주지 않지만 실제로는 "지혜롭고" 사려 깊으며 경건한 자는 "왕보다" 나으며 "나이 많은 왕보다" 더 참되고 고귀하며 존경받을 만한 가치가 있다. 그는 자기 자신을 위해서 뿐만 아니라 자기 세대를 위해서도 늙은 임금보다 더 큰 복이 되며, 그의 신중성과 엄위성 때문에 존경을 받기에 합당한 것이다. 그러나 임금이 만약 "우둔하고" 공공 업무를 스스로 처리할 줄 모르며, 타인들의 "간함"과 충고를 받지도 아니한다면, 지혜로운 청년이 그보다 더 나을 것이다. 그런 자는 "간함"을 받을줄도 모르며, 자기에게 어떤 간언이나 충고가 주어지는 것을 허용하려 하지 않고(그 주위에 있는 자들은 감히 그를 논박하려 하지 않는다), 자기에게 주어진 어떤 의견이나 간언도 경청하려 들지 않을 것이다. "간함"을 받지 않는 것은 결코 임금의 명예가 되지 못하고 오히려 불명예가 된다. 어리석음과 고집은 흔히 동반되어서 충고를 가장 필요로 하는 자들이 한사코 그 충고에 저항하게 된다. 사람이 칭찬을 들을 만한 덕과 진정한 지혜를 소유하지 못한다면 나이나 칭호도 존경을 확보하지 못할 것이다. 반면에 연소(年少)와 빈곤이란 불리한 조건하에 있더라도 지혜와 덕이 있으면 명예를 획득할 수 있을 것이다. 전도자는 "지혜로운 소년이 우매한 임금보다 낫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세부적으로 보여 주고 있다(14절).

1. "가난한 사람"은 그의 지혜로 요셉처럼 출세를 하게 된다. 요셉은 아직 젊을 때 "감옥에서" 이끌려 나와 그 나라의 제 2인자가 되었는데 솔로몬은 그 이야기를 가리키는 것같이 보여진다. 섭리는 때때로 가난한 자를 "진토에서 일으키시어 그들을 방백과 함께 세우신다"(시 113:7, 8). 지혜는 인간의 자유와 존엄을 이룩해 내었고 사람들을 두엄더미로부터, 감옥으로부터 일으켜 왕좌에까지 이르게 하였다.

2. "왕"은 자기의 우매함과 고집스러움으로 인하여 가난하게 된다. 비록 그는 "자기 왕국에 태어나" 왕위를 상속하게 되었고 오랜 세월을 그 왕좌에서 보냈으며 자기 보고를 가득 채울 만큼 시간을 보냈지만, 만약 그가 일단 그릇된 길로 들어서게 되어 이전같이 "간함을 받지 않으려 한다면" 그는 "가난하게 된다." 즉 자기는 나이가 많기 때문에 모든 것을 다 겪었다고 생각하여 이전과는 달리 남의 충고를 듣지 않으려 한다면 그는 가난하게 된다. 그의 재산은 탕진되어 아마 자기 왕관을 벗고 은퇴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될 것이다.

Ⅱ. 왕이 만약 민중의 사랑을 확보하지 못한다면 그는 왕위에 계속 머무르지 못할 것이다. 이런 의미가 암시되어 있기는 하나 마지막 두 귀절에서는 약간 모호하게 암시되어 있다.

1. 왕된 자는 후계자를 갖지 않으면 안 되는데 그는 "자기 대신으로 일어 날 소년" 즉 "2세"이다. 그러한 2세는 자기 자신의 소생이거나, 아니면 아마 13절에서 말하는, "가난하지만 지혜로운 소년"이라고 가정할 수도 있겠다. 임금들은 노년에 접어들면 자기들을 밀어 젖히고 그 자리를 대신 차지할 자들을 봐야 하는 굴욕을 갖게 된다.

2. 민중들이 떠오르는 태양을 찬양하는 일은 흔하다. "해 아래서 다니는 인생들은 버금되는 소년과 함께" 있으며 그의 세력이 되고 아버지보다 그에게 더 비위를 맞춘다. 그들은 그 아버지를 사라져 버릴 자로 간주하며 그 전성기가 지났다고 하여 무시한다. 솔로몬은 이 점을 고찰하였다. 그는 이것이 자기 자신의 백성들이 가진 기질임을 알았으며, 이 점은 그의 사후에 곧 나타났으니 그들은 그의 통치에 대한 불평을 늘어 놓았고 그같은 변화를 좋아하였던 것이다.

3. 백성들은 결코 오래 편안하거나 만족하는 법이 없다. "모든 백성에게는 끝도 휴식도 없다." 그들은 끊임없이 변화를 좋아하며 자기들이 무엇을 소유하기를 원하는지 조차 알지 못 한다.

4. 이것은 새로운 일이 아니고 "그들 앞에 있어 온 모든 것"의 모습 대로이다.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이런 일에 대한 산 예가 있다. 사무엘과 다윗조차 언제나 백성을 즐겁게 해 줄 수는 없었다.

5. 그것이 이제까지 그러했듯이 앞으로도 여전할 것이다. "후에 오는 자들"도 같은 마음일 것이어서, 처음에는 극히 좋아했던 것처럼 보이는 "그를 오래 기뻐하지는 않을 것이다." 오늘은 "호산나"요, 내일은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 하는게 민중이다.

6. 은혜를 입히려고 궁리하며 의지하였던 백성들에게 이처럼 괄시당하는 것을 스스로 본다는 것은 군주된 자들에게 있어서 큰 비애가 아닐 수 없다. "인간에게는 믿음도 확고부동함도 없으며 이것도 헛되고 심증의 헛수고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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