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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

다윗의 마지막 말(사무엘 하 23:1-7)

여기서는 다윗왕의 유언과 거기에 붙은 유언 보충서를 보게 된다. 그것은 솔로몬에게 왕위를 물려 주고, 나중에 지을 성전에 관한 재보를 마련한 후였다. 지위 높고 선한 사람들의 유언은 특별히 기억해 둘 가치가 있다. 다윗은 그것이 특별히 유의되기를 원했을 것이다. 그래서 자기의 시편에다가 붙이든가(여기서 앞 장의 끝에 붙였듯이), 그의 역대기에 붙여 두기를 희망했을 것이다. 특히, 이전에 자기를 위로하기 위해 암송했던 구절인 것 같다. 그래서 그의 "마지막 말" 이라 했을 것이다.

죽음이 다가올 때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우리 주변에 있는 자비를, 지혜의 즐거움을 오랜 동안 경험한 자들은, 일생을 마치게 될 때, 그들의 경험록을 남겨서 그 약속의 진실성을 입증하는 증거를 남겨두도록 하라. 우리에게는 야곱과 모세, 그리고 이곳의 다윗 같은 이들의 유언 기록이 남아있다. 그것은 그들이 남기고 간 후손들의 유산을 위한 것이다.

본문에서는 이런 것을 살필 수 있다.

Ⅰ. 이것은 누구의 유언인가? 일상적인 사례대로 유언자 자신이 한 최후의 말이든지 아니면 사무엘서 기록자가 전해 준 최후의 말이다(1절). 그런데 다윗은 이렇게 기록되었다.

1. 그의 근원부터 기록되었다. 그는 "이새의 아들" 이다. 아무리 출세한 자라도 종종 "자기들이 깎아져 나온 그 바위" 를 기억해 봄이 좋으리라.

2. 그의 높은 출세가 기록되었다. 그는 "높이 들려졌다." 하나님의 총애를 받는 자가 되었고, 보다 위대한 무엇이 그에게 예정되어 있고, 자기 이웃 민족들 이상으로 뛰어났으며, 예언자처럼 앞을 내다보게 되었다.

(1) 그는 "야곱의 하나님의 기름부음 받은 자" 였었고, 따라서 하나님의 백성의 일반 정치적 이권과 국토의 보호 및 그들에게 대한 정의의 집행에 유용한 자가 되었던 때문이다.

(2) 그는 "이스라엘 중 가장 아름다운 시를 쓰는 사람" 이었고, 따라서 그들의 신앙에 도움이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시를 쓰고, 곡을 붙이고, 노래하는 자와 악기 연주자에게 그것을 주었으며, 그것 때문에 선한 사람들의 신앙심은 크게 북돋아졌다. 시를 노래한다는 것은 아름다운 규례요, 하나님을 찬미하기를 즐거워하는 자들에게는 매우 어울리는 일임을 기억해두자.

다윗이 시편 기자였다는 사실이 그가 유명하게 된 이유 중의 하나로 간주되어 있다. 그가 "이렇게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은 자" 였기 때문에 위대하듯, 역시 시편 기자였기 때문에도 위대했었다. 참된 진급은 교회의 신앙에도 도움이 되고, 기도와 찬미의 복된 일도 증진시킨다는 것을 기억해 두자.

다윗이 임군이었던가? 그것은 야곱을 위해서이다. 그가 시편 기자였던가? 그것은 이스라엘을 위해서이다. 성령의 은사는 그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유일을 끼치기 위해서다. 따라서 "각자가 은사를 받은 대로 동일한 것을 섬기라."

Ⅱ. 이 유언의 취지는 무엇인가? 다윗이 하나님과 나누었던 교제를 기록하기 위함이었다.

1. 하나님이 왕으로서의 다윗을 훈계하고 격려하기 위해서 그리고 거의 후계자들에게도 도움을 주기 위해서 하신 말씀은 무엇인가? 경건한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전에 하신 말씀을 되새겨 보기를 즐거워하며, 그의 말씀을 기억하여 다른 사람에게 전해 주기를 좋아한다. 이리하여 하나님은 한 번 말씀하신 것은 다윗은 두 번씩 듣게도 되었던 것이다.

(1) 누가 말씀하셨는가? "여호와의 영" "이스라엘의 하나님" 그리고 "이스라엘의 반석" -혹자는 이것이 삼위일체를 가리키는 말이라 한다. 그래서 성부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이요, 성자는 "이스라엘의 반석" 이며, 성령은 아버지와 아들에게서 나왔고, "예언자들을 통해서 말씀하신" 그 영이라 한다. 그리고 그 성령이 특별히 다윗을 통해서 말씀하셨고, 성령께서 그만이 아니라 타인들에게 유익을 주기 위해서 다윗의 마음만이 아니라 혀까지 감동시키었다 한다.

여기에 보면 다윗은 자기가 신의 영감을 받았음을 단언하고 있다. "여호와의 영이 나를 통해 말을 하셨도다."

다윗과 다른 거룩한 사람들은 "성신의 감동을 받은 대로" 말하기도 하고 쓰기도 한다. 이 사실은 시편서의 영예를 더해 준다. 성령께서 가르치신 말씀이기 때문에 그 시편을 우리의 신앙에 맞게 이용할 것을 명령해 준다.



(2) 무슨 말을 했는가? 본문에 보면 성령께서 다윗을 "통해 하신 말씀과 다윗에게 하신 말씀" 을 구별하고 있는 듯하다. 사역자들은 하나님께서 자기들을 통해서 남에게 하시는 말씀도 주의해서 잘 들어야 한다. 남을 가르치는 것이 직책인 자들은 먼저 배우고 자기들을 먼저 확실히 가르쳐야 할 의무를 지니고 있다.

그러면 여기에 나와 있는 말씀(3, 4절)을 생각해 보자.



[1] 먼저 다윗과 그의 가족에게 관한 말씀일 것이다. 그렇다면,

첫째, 다스리는 자들에게도 의무가 있다. 왕이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을 때에는, 자기의 위신과 권세가 높다하여 불평도 하지 말고, 그 의무를 들어야 한다. 영국 속담에 "해야 한다는 말은 왕을 위해서 있다" 는 말이 있다. 여기서는 다윗 왕을 위한 "해야 한다" 는 말을 하나 엿볼 수 있다. "그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 다스림으로써, 정의로와야 한다." 또한 하급 관원들도 각자의 자리에서 모두 그리해야 한다.

다스리는 자들은 자기들이 마음대로 처분해도 좋은 그런 짐승을 다스리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이상을 가지고 있는 자기들과 동등한 인간을 다스리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또한 결점과 약점을 지니고 있는 자들을 다스리는 고로 지도자는 인내할 줄 알아야 한다. 그들은 사람들을 다스린다. 그러나 하나님 밑에서, 하나님을 위해서이다.

1. 그러므로 그들은 그들이 다스리는 자들에 대해서는 그들 개개인에 대해서 공정해야 한다. 그 권력을 피해자들을 바로잡아 주는 데에 이용되어야 한다(신 1:16, 17 참조). 자기들이 잘못을 범하지 않는 것으로 충분한 것이 아니다. 잘못이 일어나지 않도록 막아야 하는 것이다.

2.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중에 다스려야 한다. 즉 그들 자신이 하나님을 경외해야 하고, 그것 때문에 실제로 온갖 불의와 압제가 금지되어야 한다. 느헤미야가 그러했다(느 5:15). "내가 하느님을 두려워하므로, 그리하지 아니했노라." 그리고 요셉도 그러했다(창 42:18). 또한 지도자는 자기들 휘하의 사람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통치자는 율법판의 두 판을 모두 보호해야 한다. 곧 신앙과 정직 둘이다.

둘째, 그들이 의무를 다하면 번영이 약속된다 했다. "하나님을 경외함으로써 다스리는 자는 아침 빛같이 되리라" (4절). 빛이란 쾌적하다. 의무를 하는 자는 그 빛의 은혜를 누리리라. 그리고 그의 즐거움은 양심이 그를 증언해 주고 있다는 점이 되리라. 빛은 밝다. 그처럼 훌륭한 임군은 찬란해지리라. 그의 공정과 경건심이 그의 영예가 될 것이다. 빛은 축복이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면서 다스리는" 임금보다 백성에게 더 좋은 선물은 없다.

"아침 빛" 이 밤의 흑암이 지난 뒤에 가장 즐거이 환영되듯이(사울의 정부 이후의 다윗 정부가 그러했다. 시 75:3), 또 점점 빛나게 하듯이 선한 정부의 발전이 바로 그러하리라. 그러한 정부는 바로 부드러운 풀에 비유된다. 그것은 땅이 인간의 수고의 산물로 내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인간에게 은혜로운 수확을 가져다 준다(시 72:6, 16 참조). 아마 그곳 시편 말씀도 다윗의 유언 중의 일부일 것이며, 여기에 나온 말도 그것과 연관되어 있는 것 같다.



[2] 다윗의 아들 그리스도에게 적용시킬 수 있다. 이럴 때는 그것이 예언으로 받아들여지는데, 아마 본래는 그런 것이었으리라. "사람들 중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중에 다스리는 한 공정한 자가 있으리라." 그것은 그가 자기 아버지의 뜻을 따라 신앙의 사업과 하나님 예배를 명할 것이며, 그것으로써 그가 "아침 빛같이 되리라." 그는 세상의 빛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부드러운 풀" 같이 되리니, 그는 "여호와의 가지" 요, "땅의 열매" 이기 때문이다(사 4:2).

이 말씀을 그리스도의 "의의 통치" 와 "여호와의 경외 중에 있는 민감한 총명" 을 약속한 그리스도의 약속과 비교해 보라(사 11:1-5; 32:1, 2; 시 72:2).

성령을 통해서 하나님은 이것을 예견케 하셨고, 그의 가족의 수많은 비극과 그의 후손이 당할 우울한 전망에도 불구하고 위로를 받게 해 주신 것이다.

2. 이 같은 하나님의 말씀에 그는 어떻게 응답했는가?(5절) 이것은 그 같은 소식이 전해졌을 때의 그의 명상과 비슷하다. 그것은 이스라엘의 반석 앞에 있는 자가 그에게 말씀하셨던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그를 "통해서" 성령이 말씀하신 것이다. 이것은 그가 영원한 계약을 믿고 소망하는 신앙을 가장 잘 표현해 주는 말이다.

(1) 그러나 여기에 곤란이 예상되어 있다. "내 집이 하나님 앞에 그 같지 아니될지라도" (4절-다소 다름), 그리고 "그가 그것을 자라게 아니할지라도" (역시 다소 다름-5절 끝부분)라고 했다. 다윗의 집안은 하나님 앞에서 3, 4절에 기록된 것과는 달랐다. 다윗이 바랐던 것과도 달랐다. 그가 생존해 있는 동안도 그러했다. 그러므로 자기가 좋은 뒤에는 자기 집안이 더 엉망으로 될 것을 알았다.

[1] "하나님 앞에 이 같지 아니하다." 우리나 우리 식구의 참 모습은 하나님 앞에서의 모습임을 기억하자. 하나님 앞에서 올바르고, 그에게 신실하며, 그를 위해 열심을 내기를 바라는 것이 자녀들에 대한 다윗의 생각이었다. 그러나 신앙이 돈독한 어버이의 자식들이 때로는 기대와는 달리 거룩하지도 행복하지도 못한 경우가 종종 있다. 혈통을 따라 흐르는 것은 은총이 아니라 죄악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은 그의 성령을 자기 마음대로 주신다.

[2] "자라지 않게 되었다." 즉 수적으로나 권세에 있어서 말이다. 집안을 크게 하거나 작게 하는 이는 바로 하나님이시다(시 107:41). 선한 자에게도 때로는 암담한 자기 식구들의 장래를 내다보는 경우가 있다.

다윗의 집은 그리스도의 집이신 그의 교회에 대한 한 상징이었다(히 3:3). 우리가 생각하듯이, 그렇게 하나님 앞에 있지도 아니했고, 실수와 타락으로 퇴락해 버렸다. 거의 멸족의 위기를 맞이했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교회의 머리와, 곧 다윗의 아들과 세운 언약이 이루어진다. 지옥 문이 그의 집을 범하지 못하리라 했다. 우리 구주께서 고난을 받으면서도 기뻐하신 것은, 자신을 통해서 그 약속이 실현되기 때문이었다(사 53:10-12).



(2) 위로가 보증되어 있다. "그러나 그가 나와 영원한 계약을 맺었도다." 하나님의 자녀에 대한 전망이 어떠하든, 그 슬픔을 능히 물리칠 만한 몇몇 위로가 있다(고후 4:8, 9). 마치 이 시편 기자의 경우와 흡사하다. 우리는 그것을 이렇게 이해할 수 있으리라.

[1] 하나님이 다윗과 그의 자손들, 그리고 그 나라를 염두에(예형적으로) 두고 왕권을 약속하신 것이다(시 132:11, 12). 그러나,

[2] 모든 신도들에 대한 은총의 약속이기도 하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신도의 하나님이 되시고, 그 사실은 왕권의 계약이 상징해 준 바이다. 따라서 그 계약의 약속을 "다윗의 확실한 자비" 라 했다(사 55:3). 그것이 영원한 계약일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점에 있어서 만이다. 다윗이 수많은 시편 속에서 말한 그리스도와 그 복음의 은총이 이 유언에서는 빠져 있으리라고 생각할 수 없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와 은총의 계약을 맺으셨다. 그래서,

첫째, 그것을 "영원한" 계약이라 했다. 그 계약의 협정이 영원하고, 그 결과가 영원하기 때문이다.

둘째, 그것은 "예정된" 것이다. 만물 중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중보자의 이름을 높이며, 그럼으로써 신도들의 성격과 위도를 더하게 하도록 예정된 것이다. 계약을 통해서 약속된 모든 것을 받을 수 있고, 잘못을 범함에도 불구하고 우리 자신이 아니라 중보자의 보호 덕분으로 우리가 구원받는 것은 바로 이같은 뜻(예정) 때문이다.

셋째, 그것은 "확실하다." 잘 예정된 것이므로 확실하다. 그 계약의 전문이 확실하다. 또 약속된 자비가 조건 이행에 따라서 확실하다. 또 믿는 자들에 대한 구체적 적용이 확실하다.

넷째, 그것은 "우리 모두의 구원" 이다. 바로 이것이 우리를 구원하며, 이것이면 족하다. 우리의 구원의 유일한 기초가 이것이다.

다섯째, 그러므로 그것은 "우리 모두의 소원" 이 됨이 틀림 없다. 이 계약과 그 약속의 이권에 참여하자. 그러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으리라.

3. 여기서 벨리알 자손들의 운명을 읽을 수 있다(6, 7절).

(1) 가시나무같이 버림받고 버려지리라. 그들은 가시나무 같다. 손댈 수가 없다. 현명하고 신실한 훈계도 견디지 못한다. 때문에 법과 정의의 검으로 통제시키는 수밖에 없다(시 32:9). 그래서 가시나무 같은 것이다.

(2) 결국엔 당장에 불로 소멸되고 말 것이다(히 6:8). 그 뜻은 이런 것이다.

[1] 치리자는 자기들의 권세를 이용하여 이 사악한 자들을 벌주고 다스리라는 명령이다. "벨리알의 아들들은 버리라" (시 101:8 참조).

[2] 또는 치리자들, 특히 다윗의 아들들과 그 후계자들에게 주는 주의로 볼 수도 있다. 즉 그들 자신은(그 중 너무 많은 자들이 그러하시다) 벨리알의 아들들이 되지 말아야 한다는 주의이다. 만일 그렇게 되면, 다윗과의 관계나 하나님과의 관계도 그들의 정의의 칼에 희생됨을 막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그들을 그렇게 할 수 없으나, 하나님은 그렇게 하시리라.

[3] 그리스도의 나라의 원수들의 멸망을 예고하는 예언이기도 하다. 그리스도의 나라를 대항하는 외부의 원수들이 있다. 그리고 은밀히 배역하고 거짓말을 하는 내부의 적이 있다. 그 둘 다 벨리알의 아들들이다. 곧 독사의 자손이다. 그들 모두가 걱정과 조심을 주는 가시 나무들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그들을 쳐부수고 자기 나라를 세울 때면, 그들도 쫓겨나고 말 것이다(사 27:4). 그리고 때가 오면, 교회에는 "쥐어 뜯는 엉겅퀴도 삼키는 가시나무" 도 없게 되리라. 회개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아니하는 자는 심판날에 영원한 불에 던져지리라(갈대아역 의역판은 그런 식으로 되어 있다)(눅 19:27 참조).

 

23:2 없음.

 

23:3 없음.

 

23:4 없음.

 

23:5 없음.

 

23:6 없음.

 

23:7 없음.

 

23:8

다윗의 용사들(사무엘 하 23:8-39)

Ⅰ. 사무엘 기록자가 다윗 시대에 활약한 주요 군인들의 명단을 기록한 데는 이유가 있다.

1. 다윗의 영광을 위해서이다. 다윗은 그들을 훈련시켜 전쟁 기술을 익히게 했고, 훌륭한 위용의 모범을 친히 보여 주었다. 여기에 나온 것 같은 그런 훌륭한 군인들을 거느리고 있다는 것은 왕의 장점인 동시에 영예이다.

2. 스스로를 훌륭하게 한 자들을 위해서이다. 그들은 다윗을 왕위에 앉게 했고, 그의 왕좌를 보호하며, 그의 정복을 돕는 일을 한 자들이다. 공직에 있으면서 자기 몸을 돌보지 아니하고 나라의 이익을 위해 일한 자들은 갑절의 영광을 받아야 한다. 그 시대만이 아니라 후대까지도 기억하는 것이 마땅하다.

3. 후대들로 하여금 관대한 경쟁을 하도록 자극하기 위함이다.

4. 신앙은 용기를 북돋아 주는데 큰 역할을 한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이다.

다윗은 시를 통해서만 아니라 그의 건실한 예배를 통해서도 나라 안의 공신들 중에 신앙을 더욱 증진시켰다(대상 29:6). 그리고 그 공신들이 신앙으로 유명해지자, 역시 그 용맹으로도 유명해졌다.

Ⅱ. 이제 그 용사들을 3등급으로 나누어 보자.

1. 첫 3 용사. 그들은 가장 큰 일을 했고, 그래서 최대의 영예를 얻었다. 그들은 아디노(8절), 엘르아살(9, 10절), 그리고 삼마(11, 12절)이다. 다윗의 이야기 중 어디에도 이들에게 대한 이야기가 나오지 않다가, 이곳과 그 병행 부분인 역대기(대상 11장)에만 나온다. 다윗의 위대한 많은 사건이 역대 일지에 빠져있는 것이다. 이것은 다윗의 영광이 아니라 결점을 말해준다. 특히 우리아의 문제로 죄를 지은 이후에 그러하다. 따라서 실상 우리가 기록에 남은 것을 읽는 것보다는 훨씬 더 그의 업적이 찬연했을 것이다.

이 용감한 3총사들의 활약이 나와 있다. 그들은 외적, 특히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공을 세웠다.



(1) 아디노는 자기의 창으로 한 번에 800명을 죽였다.

(2) 엘르아살은 골리앗이 이스라엘을 쳤듯이, 블레셋을 섬멸했다. 그러나 그 용맹은 골리앗보다 더욱 컸다. 이스라엘 병사들이 도망간 뒤에도, 그는 자기의 진을 지켰을 뿐 아니라, "일어나 블레셋을 쳤다." 이에게 놀라운 용기를 주셨듯, 하나님은 저들에게 놀라운 공포심을 주셨던 것이다. 그의 팔이 피곤해졌으나, 그의 칼은 계속 일을 했다. 마지막 힘이 떨어지기까지, 그는 칼을 휘둘렀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일을 할 때에는, 비록 우리의 육체는 피곤해지고 약해졌더라도-정신만은 즐겁고 단호한 태도로 일해야 한다. 피곤하나 달려가고, 손이 피로해 있으나, 칼을 놓지 아니했다(삿 8:4).

이스라엘 병사들이 싸움터에서 물러간 후에도, 엘르아살은 적을 쳤다. 그래서 그들은 뒤늦게 와서 노획에 참여했던 것이다(9, 10절). 할 일이 많을 때 물러간 자들도, 얻을 게 있을 때는 신속히 모여드는 것이 인간의 상례다.



(3) 삼마는 적의 일단이 군량 때문에 헤매고 있는 중에 만나서 쳤다(11, 12절). 그러나 이번 원정과 지난 번 것을 비교해 보라, 여기에는 "여호와께서 큰 승리를 이루셨다" 고 했다.

도구(사람)의 용맹이 아무리 크더라도 그 결과의 찬양은 하나님께 돌아가야 한다. 그들이 싸웠으나, 승리는 하나님이 이룩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아무리 강한 자라도 자기의 힘을 자랑하거나 군사적 활동을 자랑하지 말라. 오직 "그 영광을 여호와께 돌리라."

2. 그 다음 세 사람은 삼십인과 구별되고 그들보다 존귀하였으나 첫 삼인에 미치지는 못했다(23절). 위대한 자라고 하여 전부가 다 같은 규모는 아니다. 일등성이 아니면서도 밝고 따뜻한 별은 많으며 일급은 아니면서도 좋은 배는 많다. 두 번째 3인조 중에서는 아비새와 브나야의 이름만 기록되어 있는데 이들은 다윗의 이야기에 종종 나타난다. 양인은 계급상으로는 처음 삼인보다 열등했지만 그 유용성으로는 그들에게 뒤지지 않은 것 같다.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사실이 나온다.

(1) 이들 세 사람이 용감한 합작 행위. 이들은 다윗이 도피 중 아둘람 굴에서 곤란을 겪을 때 그를 시종하던 자들이다. 이들은 그와 함께 고난을 겪었기에(13절) 나중에 중용되었다. 다윗과 그를 시종하던 용사들은 아주 용감하게 블레셋인들을 막았지만 사울의 치세시에 시세가 불리하여 쫓겨다니게 되었고 왕의 진노를 피하기 위해 동굴과 성채에 숨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이 때 블레셋 사람들이 르바임 골짜기에 진치고 심지어 베들레헴에까지 수비대를 두었다고 해서 놀랄 것은 없다(13, 14절). 만약 교회의 지도자들이 가장 좋은 친구들과 신앙의 투사들을 핍박할 정도로 교회를 그릇 인도 한다면 공동의 적이 그 기회를 틈탈 것은 명약관화하다. 다윗이 자유로이 활동하고 있었다면 베들레헴이 어찌 블레셋의 수중에 들어갔겠는가! 다음을 살피자.

[1] 다윗은 베들레헴의 우물 물을 몹시 갈망했다. 혹자는 다윗의 이 말을 애국적 소원으로 해석하여 "오! 우리가 베들레헴에서 저 블레셋의 수비대를 쫓아내고 저 사랑스런 성읍을 다시 우리의 소유로 만들 수 있다면 좋으련만" 이란 의미로 받아들인다. 왕왕 강이 국가를 상징하듯 우물은 성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윗이 설령 그런 의미로 말했다고 하더라도 그 주위 사람들은 그의 의중을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오히려 다윗의 신체적 쇠약을 나타내는 것으로 보인다. 때는 추수기여서 일기는 더웠고 그의 갈증은 심했다. 아마 먹을 만한 물은 귀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베들레헴의 우물 물을 단 한 모금이라도 마셔 보았으면" 하고 간절히 바랬을 것이다. 소년시절에도 그 우물 물로 심신을 상쾌하게 한 적이 어디 한두 번 뿐이랴! 지금은 비록 접근조차 불가능에 가깝지만 그 우물 물이 아니면 못살 것 같은 심경이었으리라. 다윗은 이상하게도 까닭 모를 기분에 젖었다. 갈증이라면 다른 물을 마셔도 될 터였다. 그런데도 그는 유독 베들레헴 우물 물을 마시고 싶어한 것이다. 이런 묘한 기분을 즐긴다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며 그런 기분의 충족을 고집하는 것은 더더욱 어리석은 짓이다. 우리의 식욕이 다른 것보다 더 맛있고 참으로 구미에 맞는 음식을 향해 과도히 발동할 때 우리는 그 식욕을 억제해야 마땅하다(진찬을 탐하지 말라, 잠 23:3). 하물며 이 같은 기분을 충족시키려는 일이랴!

[2] 다윗의 세 용사 곧 아비새와 브나야와 이름이 밝혀지지 않은 용사는 용맹무쌍하게 호구(虎口)인 블레셋인의 진영을 통과하여 베들레헴의 우물 물을 길어 왔다(16절). 그것은 목숨을 건 모험이었으나 다윗은 이를 알지 못했다. 다윗이 처음 이 소원을 피력할 때 자기 부하 중 누구라도 목숨을 걸고 이를 감행해 주도록 바란 것은 결코 아니었다. 그런데도 이 세 사람은 이 일을 해냈다. 이것은 다음 두 가지 사실을 나타낸다.

첫째, 이들은 자기 군주를 몹시 중히 여겼으며 그를 섬기는 일이라면 아무리 위험하고 어려운 일이라도 서슴치 않았다. 다윗은 비록 왕으로 기름 부음을 받았지만 유형당한 죄인이나 다름없었고 추종자들의 애호나 존경을 끌 만한 외면적 이점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는 그들을 중용하거나 상 줄 만한 능력도 없는 가난한 군주이었다. 그럼에도 이들은 보상의 시기가 오리라는 것을 확신하고 이렇게 열성적으로 그의 마음을 흡족히 하려고 했다. 이와 같이 우리도 그리스도를 위한 일이라면 기꺼이 모험을 강행해야 한다. 비록 고난받는 일이라 하더라도 결국 득세하여 손해보는 일이 없을 것이라고 확신하는 자답게 위험을 무릅쓰고 그리스도를 섬기자. 그들은 자기 군주의 극히 작은 암시만 받고서도 그처럼 분연히 뛰쳐나가 그를 만족시키려고 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어찌 우리가 주님께 인정받으려고 탐내지 않겠는가? 주님께서는 이미 그의 말씀과 성령과 섭리로써 자기 의사를 갖가지로 암시하셨는데 우리가 어찌 그 뜻에 순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둘째, 그들은 블레셋인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들은 블레셋인을 무시할 수 있는 기회가 온 것에 희열을 느꼈다. 그들이 남 몰래 적진을 돌파하고 그 돌파술이 너무도 교묘해서 적에게 발각되지도 않았는지, 아니면 공공연하게 침투하고 그 표정이 너무나 두려워 블레셋인이 감히 막지 못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그들은 칼을 손에 쥐고 힘들여 길을 열었던 것처럼 보인다.



[3] 다윗은 멀리서 떠 온 이 귀중한 물을 받자 굉장히 극기심을 발휘하여 그 물을 여호와께 부어드렸다(17절).

첫째, 이렇게 함으로써 그는 자기 부하의 생명에 대한 존중심을 나타내고자 했고 그들의 피를 낭비할 생각이 추호도 없었음을 나타내려고 했다(시 72:14). 하나님은 성도의 죽음을 귀하게 여기신다는 것을 명심하자.

둘째, 그는 이로써 자기의 어리석은 발언에 대한 유감을 증명하려고 했다. 그들은 다윗의 말 한 마디 때문에 목숨을 적군에게 내어 주려고 한 셈이었던 것이다. 권세자들은 말 조심을 해야 한다. 왜냐하면 자기 주위에 있는 자들이 그 말을 곡해하거나 오용할지도 모르는 때문이다.

셋째, 이렇게 하여 그는 장차 있을지도 모를 자기 부하의 성급한 처사를 방지하려고 했다.

넷째, 이렇게 함으로써 그는 자신의 미련한 취미를 억제하고 그런 것을 즐기고 탐닉한 자신을 책하려 했다. 그는 자기가 경솔한 행위를 시정할 만큼 건전한 사고를 하고 있으며 극히 좋아하는 것에도 극기할 줄 안다는 것을 표시하려고 했다. 지혜로운 자와 권세자와 선한 자에게는 이런 폭넓은 극기가 어울린다.

다섯째, 이렇게 함으로써 그는 하나님을 존귀케 하고 그에게 영광을 돌리고자 하였다. 그는 이렇게 얻은 물이 자기가 마시기에는 너무도 값비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이 물을 하나님께 전제로써 부어드려야 마땅하다고 생각했다. 그 물이 그들의 피라면 그것은 하나님께 드려야 마땅하였다. 피는 언제나 하나님께 속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여섯째, 패트릭 감독은 다윗이 동경한 물이 자연수가 아니라 생수를 가진 메시야였다고 생각하는 어떤 자들을 언급한다. 그는 메시야가 베들레헴에서 나실 것을 알았다. 그러므로 블레셋인들이 베들레헴을 파괴시킬 수가 없었을 것이다.

일곱째, 다윗은 자기 부하들이 피의 위험을 무릅쓰고 획득한 물을 매우 귀중히 여겼다. 그렇다면 우리의 복되신 구주께서 자기 보혈을 흘려가면서 사신 은혜를 우리는 더 더욱 귀하게 여겨야 하지 않겠는가? 우리는 언약의 축복을 과소 평가하는 자들처럼 언약의 피를 값없이 여기지 말자.



(2) 또 다른 경우에 나타난 두 사람의 용감한 행동. 아비새는 한 때 삼백 명을 살육했고(18, 19절). 브나야는 효용한 일을 많이 행했다.

[1] 브나야는 두 모압인을 죽였는데 그들은 사자처럼 용맹하고 대담하고 강하고 흉포하고 맹렬했다.

[2] 그는 함정에 빠진 사자를 죽였다. 이는 삼손처럼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서였거나 아니면 사자가 사람들을 해쳤기 때문에 애국심에서 행한 일이었을 것이다. 강설기였던 터라 그는 여늬 때보다 몸을 움직이기가 더 어려웠을 것이며 사자는 더 흉맹하고 굶주려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사자를 제압했다.

[3] 그는 애굽인을 죽였다. 그 시기는 나오지 않는다. 그 애굽인은 완전무장을 갖추고 있었지만 브나야는 무기라곤 막대기밖에 없이 그를 공격하여 그의 손에 들려있던 창을 잽싸게 빼앗아 그를 찔러 죽였다(21절). 이런 전공과 다른 유사한 공훈으로 다윗은 그를 시위대장으로 중용하였다(23절).

3. 두 번째 삼 인보다는 못하나 이름을 크게 날리던 삼십 인의 명단이 여기에 나온다(24절). 맨 먼저 나오는 이름은 아사헬이다. 그는 다윗의 통치 초기에 아브넬에게 살해되었지만 이 명단에 빠지지 않고 나온다. 그 다음에 오는 엘하난은 첫 번째 삼인 중 하나인 엘르아살의 아우였다. 이들의 이름 앞에 붙은 별칭은 출생지나 거주지에서 따온 것인 듯하다. 전국에서 가장 지혜롭고 용맹한 자들이 선발되어 왕을 섬겼다. 여기에 나오는 이름 중 몇몇은 다윗이 연중 한 달씩 체번하도록 임명한 반열의 반장으로도 나타난다(대상 27:1). 가치 있는 일을 한 자들은 그 공을 따라 승진되었다. 아히도벨의 아들도 그런 자 중 하나였다(34절).

아버지가 군신 회의장에서 모략으로 유명했듯 아들은 전장에서 용맹을 날렸던 것이다. 삼십인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헷 사람 우리아에게 이르러서는 다윗의 죄가 회상된다. 그것은 다윗의 죄를 더욱 가중시킨다. 자기 왕과 나라로부터 상을 받아야 마땅할 사람이 그토록 억울한 일을 당했기 때문이다. 요압은 이들 중에 언급되지 않는데 그 이유는 다음 두 가지 중 하나일 것이다.



(1) 그는 너무나 큰 자여서 언급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첫 삼인 중 첫째 인물은 군장 중 두목이었다. 그러나 요압은 총사령관격으로 이들을 지휘하였던 것이다.

(2) 또는 그가 너무도 악하여 언급될 가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가 위대한 군인이란 것은 자타가 공인하는 바였고 자기 전리품을 하나님의 전에 바칠 정도로 신앙이 깊은 인물이었지만(대상 26:28), 다윗의 두 친구를 살해함으로써 얻은 불명예는 적군을 살육해서 얻은 명예만큼이나 컸던 것이다.

다윗의 아들인 그리스도께도 존귀한 용사들이 있다. 이들은 다윗의 용사들처럼 그리스도의 모범에 감화를 받고 그의 나라의 영적 원수들과 싸우며 그의 강한 힘으로 정복자들 이상 가는 존재들이다. 그리스도의 사도들은 그의 직계 시종자들이었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위해 효용한 일을 많이 했었고 그를 위해 크게 고난을 받았다. 그래서 결국 그와 함께 왕노릇을 하게 되었다. 이들이 구약에 언급되고 있듯 사도들은 신약에서 존귀한 자로 언급되고 있다(계 21:14 참조). 아니, 그리스도의 모든 선한 군사들은 이들 존귀한 자들보다 그 이름이 더욱 잘 보존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늘에 그 이름이 기록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모든 성인들은 이런 명예와 존귀를 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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