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ip to content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12:1

나단의 비유(사무엘 하 12:1-14)

다윗이 회개하게 된 것은 그가 밧세바와의 간통죄를 범한지 한참 뒤의 일인 것 같다. 왜냐하면 나단이 다윗에게 보내심을 받았을 때는 아이가 이미 태어나 있었기 때문이다. 다윗이 이 죄를 범하고 회개치 않은 상태에 있은 것은 약 9개월 정도였을 것이다. 우리는 그 동안의 다윗을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그의 마음은 결코 가책을 받지 않았으며 그는 하나님 앞에서 남몰래 애통하지 않았다고 생각할 수 있을까? 나는 그가 자기의 범죄를 슬퍼했다고 생각하고 싶다. 아이가 태어나자 즉시 나단은 다윗에게 보냄을 받았다. 아이의 출생으로 그들의 비행은 세상에 다 알려지고 화제꺼리가 되었던 것이다. 나단은 하나님의 영광과 타인의 훈계를 위해 그에게서 죄의 고백을 받으려고 갔다. 동시에 그는 다윗으로 하여금 제약이 딸린 사연을 얻게 하려고 그에게 갔다. 우리는 이 아홉달 동안 그에게 대한 은혜의 위로와 역사가 유예되고 하나님과의 교제가 중단되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확실히 그는 시편을 짓지도 않았으며 그의 수금은 곡조가 맞지 않았고 그의 영혼은 뿌리에만 생명이 남아있는 겨울 나무 같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나단이 자기와 함께 한 뒤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키시고 내 입술을 열어 주소서" (시 51:12, 15)라고 기도한다. 다음을 관찰하라.

Ⅰ. 하나님은 다윗에게 사자를 보내셨다. 우리는 11장 말미에서 "다윗의 소위가 여호와 보시기에 매우 악하였다" 는 말씀을 읽었다. 이로 미루어 볼 때 누구나 그 다음에는 여호와께서 원수들을 보내 그를 침략케 하시고 공포를 내려 그를 사로잡게 하시며 죽음의 사자를 그에게 보낸다는 기사가 나올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에게 신실한 친구 나단 선지를 그에게 보내셨다. 그는 신실하고 믿을 수 있는 종이었다. 그는 다윗에게 충실히 훈계하고 권고할 자였다. 다윗에게는 그때만치 고백자기 필요한 때도 없었다. 그렇지만 다윗은 나단을 부르러 사람을 보내지 않았고 하나님께서 나단을 다윗에게 보내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비록 자기 백성이 죄에 빠지도록 허용하시지만 그 죄 중에 계속 머물러 있도록 놔두지는 않으신다는 것을 주목하자. "그는 패역하여 자기 마음의 길로 행하였다." 그는 제 혼자 내버려 두면 끝없이 방황할 것이다. 그러나 "내가 그 길을 보았은 즉 그를 고쳐 줄 것이라" 고 하나님은 말씀하신다(사 57:17). 하나님은 우리가 그를 찾기 전에 우리를 찾으러 보내신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틀림 없이 길을 잃고 말 것이다. 나단은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대한 인자하신 의도를 알리려고 보내신 선지자였다(7:4). 그러나 이제는 그를 통해 자기의 진노의 메시지를 보내신다. 목사들의 입으로 나오는 하나님의 말씀은 공포의 말이든 위로의 말이든 불지 않으면 안 된다. 나단은 하늘의 환상에 순종하고 하나님의 심부름으로 다윗에게 간다. 그는 다윗이 범죄하였으므로 나는 그에게 가까이 가지 않겠노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를 원수와 같이 생각하지 말고 형제와 같이 권하라" (살후 3:15). 그는 '다윗은 왕이므로 나는 감히 그를 책망하지 못한다'고 말하지도 않는다. 그는 하나님이 보내시면 "자기 얼굴을 부싯돌같이 굳게 한다" (사 50:7).

Ⅱ. 나단이 다윗에게 전한 말씀이 나오는데 이는 그로 자기 잘못을 확실히 깨닫게 하기 위한 말이었다.

1. 그는 비유를 들어 완곡하게 표현하였다. 다윗에게는 이것이 자기 신복 중 하나가 불쌍한 이웃을 학대하였으니 피해자의 억울한 사정을 시정해 주고 가해자를 처벌해 달라는 호소로 들렸다. 나단은 전에도 이런 일로 다윗에게 나아오곤 했을 것이다. 그래서 다윗은 더 더욱 이 비유가 자기에게 대한 것임을 눈치채지 못했을 것이다. 권세자에게 자유로이 드나들 수 있고 그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자들은 억울하게 피해입는 자를 위해 나서야 마땅하다. 그래서 그들의 사정을 바로잡아 주도록 해야 한다.

(1) 나단은 다윗에게 한 억울한 피해자의 경우를 설명해 준다. 한 부자가 자기와 다툴 능력이 없는 정직한 이웃에게 몹쓸 짓을 했다는 것이다. "그 부한 자는 양과 소가 심히 많으나" (2절) 가난한 자는 작은 암양 새끼 하나뿐이었다. 이와 같이 세상은 너무나 불공평하다. 그러나 무한히 지혜로우시고 의로우시고 선하신 분께서는 부자로 하여금 자비를 알게 하시고 가난한 자는 만족을 알게 하셔서 분배를 하신다. 이 가난한 자는 더 많이 사거나 기를 재력이 없어서 오직 암양 새끼 한 마리밖에 소유하고 있지 않았다. 그러나 그 양새끼는(그렇게 불렀다) 그의 자식과 함께 자랐다(3절). 그는 그 암양 새끼를 귀여워했고 그 양새끼는 자나깨나 그와 친숙히 지냈다. 그런데 부자는 양새끼를 친구로 삼을 필요도 없으면서 그 가난한 자의 양새끼를 폭력으로 빼앗아 가지고 잡아 먹었다(4절). 그는 탐심에서 그랬거나 아니면 허영심에서 그랬을 것이다. 즉 자기 양을 잡기가 아까와서 그랬거나 아니면 자식처럼 고이고이 기른 양새끼는 자기 양보다 더 별미일테고 그 맛이 기막힐 것이라는 생각에서 그랬을 것이다.

(2) 나단은 이 비유로써 다윗이 밧세바를 더럽힌 죄가 얼마나 악한 것인지 그에게 제시하였다. 그는 처첩이 많았으면서 마치 부자가 자기 가축을 들에 두고 있는 것처럼 그들을 멀찍이 두고 있었다. 그가 단 한명의 아내만 거느리고 그 아내가 가난한 자의 암양새끼처럼 그에게 소중하며 그 아내가 사랑스러운 암사슴같고 아름다운 암노루 같아서 그가 그 품을 항상 족하게 여겼다면 그는 더 이상 다른 여인에게 시선을 향하지 않았을 것이다(잠 5:19). 결혼은 간음죄에 대한 치료약이지만 중혼은 그렇지 못하다. 왜냐하면 일단 부부일체의 법이 깨뜨려지면 방종한 욕망은 터진 뚝처럼 쏟아질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아는 가난한 자처럼 단 한 명의 아내밖에 없었다. 밧세바는 우리아에게 있어서 그의 영혼이나 다름 없었고 늘 그의 품에 누운 새끼양과 같았다. 왜냐하면 그는 자기 품에 누울 아내가 달리 없었고 다른 것을 원치도 않은 때문이다. 패트릭 감독이 유대인 기록자들의 글에서 해석하듯 본문에 나오는 '행인'은 악한 생각, 악한 욕망을 나타낸다. 그 악한 생각은 다윗의 마음에 들어온 것이다. 즉 자기 처첩으로 만족할 수 있는데도 우리아의 아내가 아니면 안 된다는 생각이 바로 악한 생각이다. 이 악한 생각이 나그네로 표현되고 있는 것은 타당하다. 왜냐하면 악한 생각이 처음에는 행인에 지나지 않으나 때가 되면 손님이 되고 마지막에는 그 집의 주인이 되기 때문이다. 또 4절 서두에서는 "행인" 이라고 불리우는 자가 끝에서는 "사람" (아쉬-남편)이라고 불리우는 것도 그 이유가 된다. 그러나 혹자는 단 하루 저녁만 묵고 가는 길손처럼 욕망도 다윗의 마음 속에 잠시 머물렀기 때문에 이렇게 표현했다고 관찰한다. 욕망은 다윗의 마음 속에 항구적으로 거하지도 않았고 거기서 영원히 왕노릇 한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3) 그는 이 비유로써 자기 자신에 대한 다윗의 판결을 이끌어낸다. 나단에게서 이 이야기를 듣자, 그 말의 진실성을 전혀 의심치 않고 실제로 있었던 일이라고 생각한 다윗은 즉시 그 범법자에게 대한 판결을 내리고 맹세로써 그 판결을 확증했다(5, 6절).

[1] 새끼양을 강탈한 불의로 인해 그는 양 한 마리 당 네 마리라는 율법에 따라(출 22:1) 네 배나 갚아 주어야 한다고 다윗은 판결했다.

[2] 가난한 자를 학대함으로써 쾌감을 느낀 그의 포학성과 독선은 극형을 받아 마땅하다고 다윗은 판결한다. 굶주린 가난한 사람이 배부름을 얻기 위해 부자의 물건을 훔치는 경우에는 "자기 집에 있는 것을 다 내어 주게" 되더라도 배상하기만 하면 될 것이다(잠 6:31). 또 솔로몬은 32절에서 이것과 간음을 비교하고 있다. 그러나 부자가 도둑질하는 경우에는 이와 다르다. 궁핍해서가 아니라 허영심에서 훔치며 도둑질을 위한 도둑질을 하며 단지 거만을 떨고 남을 괴롭힐 목적에서 도둑질한다면 그는 죽어 마땅하다. 그런 자에게는 배상만으로는 처벌이 안 된다. 그런 자는 극형을 받아야 된다. 이 판결은 너무 가혹한 것 같다. 그러나 그것은 죄를 짓고서 아직 자비를 얻지 못한 다윗의 예리한 신경 때문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2. 그는 드디어 이 비유를 다윗에게 적용한다. 비유로 시작하면서 그는 자기의 슬기를 보여 주었다. 책망이나 견책에는 슬기가 아주 필요하다. 여기에서와 같이 범법자가 자기 일인 줄 모르고 자기 자신을 정죄하며 유죄로 인정하게 할 수 있다면 좋은 책망이라고 하겠다. 그러나 나단은 이 비유를 해설하면서 자신의 충실성을 보여 주고 있다. 그는 마치 다윗이 평민이기라도 한양 다윗에게 노골적이면서도 준엄한 말을 하고 있다. 그 어휘는 노골적이다. "당신이 그 사람이라. 이 나쁜 짓을 한 이는 바로 당신이다. 아니 당신이 이웃에게 한 짓은 그보다 더 나쁘다. 그러기에 당신은 자신의 판결로 죽어야 마땅하다고 했고 자신의 입으로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자기 이웃의 양새끼를 빼앗은 자가 마땅히 죽어야 한다면 네 이웃의 아내를 빼앗은 너는 어떻겠느냐? 그 부자는 새끼양을 뺏긴 했지만 너처럼 그 주인의 생명을 뺏진 않았다. 그러니 너는 백 번 죽어 마땅하지 않는가?" 나단은 하나님의 말씀을 그의 이름으로 직접 말하고 있다. 그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처럼 이르신다" 고 말을 시작하고 있다. 다윗에게는 그 이름이 신성하고 경외할 만한 이름이어서 그의 주의를 끌만도 하였다. 나단은 이제 가난한 자를 위한 탄원자로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체면을 돌보지 않으시고 차별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사자로서 말하는 것이다.

(1) 하나님은 나단을 통해 자신이 다윗을 위해 행하시고 계획하셨던 크나큰 일을 상기시키신다. 하나님은 그에게 기름을 부어 왕으로 삼으시고 그를 보존하여 나라를 차지하게 하셨다. 하나님은 그에게 권세를 주셔서 그의 전임자 사울의 집과 그의 주인되었던 자들의 가정을 다스리게 하셨으니 나발이 그 한 예이다. 하나님은 그에게 이스라엘과 유다 족속도 주셨다. 나라의 재물은 모두 자기 마음대로였고 누구든지 기꺼이 그에게 은혜를 베풀고 싶어했다. 아니, 하나님은 그를 편안하게 하시기 위해서 무엇이든지 그에게 주시려고 하셨다. "내가 네게 이것 저것을 더 주었으리라" (8절). 하나님은 선물을 얼마나 아낌없이 주시는 분인지 주목하자. 우리는 하나님 안에 있으면 부족한 것이 없다. 그는 많이 주시는 자에게는 더욱 많이 주신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에게 후하시면 후할수록 우리의 불만이나 금단의 열매에 대한 욕망은 더욱 중한 죄가 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바라서 마음대로 기도할 수 있다. 그것으로 족하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금지하신 것을 탐낸다는 것은 이만저만 배은망덕한 짓이 아니다.

(2) 그는 다윗이 이 간음죄로써 하나님의 권위를 아주 업신여겼다고 책망한다. "그러한데 어찌하여 네가(네 자신의 권위와 권세를 믿고) 여호와의 말씀을 업신여겼느냐?" (9절) 하나님의 법과 그 법을 제정하신 하나님을 경시하는 것은 죄의 근원이며 죄의 악함이다. 하나님의 법에 대한 의무가 별 것 아닌 듯, 그 교훈이 시시하고 그 경고가 별로 두려워할 것이 아닌 듯 생각하는 것은 바로 죄악의 기초이다. 하나님의 법을 다윗보다 정중하게 쓴 자도 드물었다. 그렇다고 해도 이 사례에서 알 수 있듯 그가 하나님의 법을 경시했다고 책망받는 것은 당연하다. 화근이 된 밧세바와의 간음은 여기에 언급되지 않는 것은 아마 그가 이미 그 일을 깨닫고 있었기 때문이리라.

[1] 우리아 모살은 두 번 언급되고 있다. "네가 칼로 헷사람 우리아를 죽였다." 비록 자기 칼로 죽이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그는 펜으로 그를 죽였고, 명령을 내려 그를 최전방에 배치시켰다. 악한 짓을 궁리하고 명령하는 자는 하수자와 꼭 같이 범인이다. 이 일은 더욱 나쁜 것으로 거듭 언급되고 있다. "네가 그를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할례받지 못한 대적 암몬인의 칼로 죽였다."

[2] 마찬가지로 밧세바와의 결혼도 두 번 언급되고 있는데 이것은 그가 이 일을 해로 여기지 않았기 때문이다(9, 10절). 먼저 더럽혔던 여인과의 결혼, 더욱이 그 남편을 살해하고 결혼한다는 것은 결혼 의식에 대한 모독이다. 그것은 악행에 대한 위장일 뿐만 아니라 악행을 성별하는 행위이기도 하다. 이런 모든 일로 그는 여호와의 말씀을 업신여겼다. 그런 짓을 금지한 전반적 계명을 무시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약속하신 개개의 말씀도 업신여겼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앞에서 나단을 통해 자기가 다윗에게 집을 세워주리라고 약속하셨던 것을 상기시켰다. 그가 만약 이 거룩한 약속을 정당하게 존중하였더라면 이처럼 자기 집을 피와 정욕으로 더럽히지 않았을 것이다.

(3) 그는 다윗가에 대한 심판을 경고한다(10절). "칼이 네 집에 영영히 떠나지 아니하리라. 네 당대뿐만 아니라 네 뒤에도, 너나 네 자손은 대부분 전쟁에 휩쓸릴 것이다." 아니면 이것은 다윗의 자식들 곧 암논과 압살롬과 아도니야에게 있었던 유혈극을 가리킬 것이다. 이 자들은 모두 칼에 엎드러진 자들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그와 그의 집에서 자비가 떠나지 않으리라고 약속하셨으나(7:15) 여기서는 칼이 떠나지 않을 것이라고 경고하신다. 자비와 칼이 양립할 수 있는가? 할 수 있다. 언약의 은혜로부터 제외되지 않은 자라도 크고 오랜 환란을 당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심판에 대해 제시하고 있는 이유는 "네가 나를 업신여겼다" 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과 법을 경멸하는 자들은 하나님을 업신여기는 자들이며 그들은 하나님께로부터 존중받지 못할 것이다. 특히 여기서 경고하는 내용은 두 가지이다.

[1] 그의 자녀가 그의 슬픔이 되리라는 것. "내가 네 집에 재화를 일으키리라." 죄는 가정에 어려움을 가져오며 한 가지 죄는 다른 죄의 벌인 경우가 적지 않다.

[2] 그의 처들이 그의 수치가 되며 유례가 없는 악행으로 그들이 모든 이스라엘 사람 앞에서 능욕을 당하리라는 것(11, 12절). 이 일이 그 자신의 아들에 의해 행해지리라는 말은 나오지 않는데 이는 예언이 너무 명시되면 그 예언의 성취가 방해받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일은 압살롬이 아히도벨의 권고를 받아들여 그대로 행했던 것이다(16:21, 22). 자기 이웃의 아내를 더럽히는 자는 자신의 아내도 남에게 더럽힘을 당해야 한다. 욥의 탄원 가운데 나타나듯 그 죄는 그렇게 처벌되곤 했다(욥 31:10, 내 처가 타인의 매를 돌리며 타인이 더불어 동침하는 것이 마땅하니라). 호세아도 그것을 경고한다(호 4:14). 그 죄는 은밀했고 부지런히 감춰졌지만 그 벌은 공개되고 부지런히 선포되어 다윗에게 수치가 될 것이다. 비록 다윗의 죄는 수년 전에 저지른 것이라 하더라도 이 때가 되면 사람들이 회상하고 화제에 올리게 될 것이다. 거울에 비취는 얼굴이 자기 모습과 꼭 같듯 벌은 죄와 부합할 것이다. 여기에서는 피는 피로, 음란은 음란으로 처벌되고 있다. 이렇게 하여 하나님은 자기가 죄를 얼마나 미워하시며 어느 곳에서 발견하든지 간에 그 죄를 벌하지 않고 무사히 넘기는 법이 없다는 것을 나타내신다.

3. 자기 죄에 대한 다윗의 고백과 참회. 그는 자신을 변명하거나 자기 죄를 낮추기 위한 말은 한 마디도 하지 않는다. "내가 여호와께 범죄하였노라" (13절). 그는 무조건 자기 죄를 시인하고 있다. 그는 아마 이런 취지로 더 많은 말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짤막한 고백은 그가 나단의 말에 진정으로 겸손해졌고 잘못을 깨닫게 되었다는 것을 나타내고도 남음이 있다. 그는 자기 죄를 시인한다. "내가 죄를 범하였노라." 그리고 더욱 가증한 것은 그 죄가 여호와께 범죄했다는 것이다. 그는 시편 51편 1절에서도 "내가 주께만 범죄하였나이다" 라고 같은 말을 하고 있다.

4. 이 참회의 고백에 그의 사유가 선언된다. 그러나 여기에는 조건이 붙는다. "여호와께서도 당신의 죄를 사하셨나니 당신이 죽지 아니 하리이다. 그가 복수의 눈 앞에서 당신의 죄를 제거하셨으니 당신이 영원히 죽지는 아니하리이다. 당신이 당신의 죄를 제하지 않았더라면 당신도 영원히 하나님께로부터 제거될 테지만 죄를 고백하고 회개하였기에 영원히 그에게 제거되지는 않으리이다." 이로써 징벌의 의무는 취소되고 무효로 되었다. "그는 정죄되지 아니하리라." 이것이 바로 사유의 본질이다. "네 죄가 너의 영원한 멸망이 되지 않으리라" 는 것이 곧 용서이다. 그는 "칼이 네 집에 영영히 떠나지 아니하리라" 는 판결을 받았다.

[1] 그러나 칼은 그를 끊어버리지 않을 것이다. 그는 평안히 무덤에 내려갈 것이다. 다윗은 간음자와 살인자로서 마땅히 죽음을 당해야 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를 멸절시키려고 아니하셨다.

[2] 그는 평생토록 여호와께 징계를 받을 것이나 세상 사람에게는 정죄를 받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죄를 사하시는 데 얼마나 신속한 분인지 주목하자. 다윗은 아마 이것을 가리켜 "내가 자복하리라 하였더니 주께서 사하셨다" (시 32:5)고 말했을 것이다. 큰 죄인이라도 진심으로 회개하면 하나님께 자비를 얻을 수 있으니 낙심치 말아야 한다. 누가 하나님처럼 허물을 용서해 주는가?

(2) 그럼에도 나단은 그 아이에 대해 사형 선고를 내린다(14절). 하나님의 주권을 보라! 죄지은 부모는 살고 무죄한 아이는 죽는다. 그러나 모든 영혼은 그의 것이다. 하나님은 어떤 식으로든 원하시는 대로 자기 피조물을 통해 영광 받으신다.

[1] 다윗은 범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명예에 먹칠을 하였다. 그는 이 일로 인하여 여호와의 원수로 크게 훼방할 거리를 얻게 하였다. 그 세대의 악인과 이교도와 우상 숭배자와 독신자들은 다윗의 타락을 기뻐했을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율법을 경외하고 존중한다던 자가 그토록 큰 죄를 범하는 것을 보고 하나님과 그의 율법을 비방했을 것이다. "이런 자들이 소위 신앙을 고백하는 자들이다. 열심히 기도하 고 찬미의 시를 노래하며 그토록 신앙이 돈독하다는 자가 이 모양이다. 간음과 살인을 막지 못한다면 그 따위 신앙 행위의 선한 점이 무엇이냐?" 라고 할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이 사람과 달라서 중심을 살피신다(삼상 16:7)는 것을 고려하지 않고 "사울은 이보다 작은 일로도 하나님께 싫어버린 바 되지 않았느냐? 그런데 어째서 다윗은 살아서 왕노릇 해도 된단 말인가?" 라고 말할 것이다. 오늘날까지도 다윗의 선례를 들어 하나님을 비난하며 완악한 죄를 짓는 자들이 있다. 어느 누구도 사실 다윗 때문에 하나님을 혹평하거나 그의 말씀과 그의 처사를 비난할만한 정당한 이유를 갖지 못한다. 그런 행위는 죄가 된다. 그렇지만 다윗은 그런 자에게 거침돌이 되었고 정당하진 않더라도 비난할 구실을 주었으므로 그에 대한 책임을 면할 수 없다. 신앙을 고백하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자처하는 자들이 평판 나쁜 죄를 범하는 경우에는 큰 폐해가 생기게 된다는 것을 잊지 말자. 즉 그들은 하나님과 기독교의 원수들에게 비난거리와 훼방할 재료를 제공하게 되는 것이다(롬 2:24).

[2]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다윗에게 대한 당신의 노여움을 나타내심으로써 세상 사람에게 자기가 다윗을 사랑하시지만 그의 죄는 미워하신다는 것을 알리시고 그럼으로써 자신의 명예를 옹호하신다. 그는 아이의 죽음으로써 자기의 정당성을 입증하시려고 하신다. 땅 주인은 자기가 좋아하는 곳이면 어디든지 압류할 권리가 있다. 아마 유아 이환율이나 사망률은 그 당시가 요즘보다 더 낮았을 것이다. 그래서 이 일은 흔치 않는 일이었을 것이고 하나님의 진노를 더 명백히 입증하는 표적이 되었을 것이다. 이것은 "그 아비의 죄를 자손에게 갚겠다" 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된 일이다.

 

12:2 없음.

 

12:3 없음.

 

12:4 없음.

 

12:5 없음.

 

12:6 없음.

 

12:7 없음.

 

12:8 없음.

 

12:9 없음.

 

12:10 없음.

 

12:11 없음.

 

12:12 없음.

 

12:13 없음.

 

12:14 없음.

 

12:15

다윗의 겸비(사무엘 하 12:15-25)

나단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 뒤 궁에 머물지 않고 집으로 돌아갔는데 이는 아마 자기가 설교한 다윗을 위해 기도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하나님은 다윗을 회개시키기 위한 도구로써, 그리고 자비와 심판의 선포자로서 나단을 사용하셨고 그럼으로써 그의 사역을 존귀하게 하셨으며 "그의 말을 그의 모든 이름 위에 높게 하셨다" (시 138:2). 다윗은 이 선지자를 존경하여 밧세바에게서 얻은 아들 중 하나를 나단이란 이름으로 불렀으며(대상 3:5) 위대한 선지자 그리스도께서는 바로 이 아들의 후손이었다(눅 3:31). 나단이 물러가자 다윗도 아마 한적한 곳에 가서 시편 51편을 지었을 것이다. 그는 이 시편에서(비록 자기가 죄사함 받았다는 것을 확신했지만) 간절히 용서를 빌고 자기 범죄를 크게 슬퍼한다. 진정한 회개자는 하나님께서 용서한 뒤에는 자기들이 행한 일을 부끄러워할 것이다(겔 16:63). 이 문단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Ⅰ. 아이의 앓음. "여호와께서 아이를 치시매 아이가 심히 앓았다" (15절). 아이는 경풍이나 다른 무서운 질병에 걸렸을 것이다.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아이들의 질병이나 사망(롬 5:14)은 이들이 잉태될 때의 죄나 원죄를 증거한다.

Ⅱ. 다윗은 이것이 하나님의 진노하신 표징인 줄 깨닫고 겸비케 되어 아이의 생명을 위해 하나님께 보고한다(16, 17절). 그는 금식하고 밤새도록 땅에 엎드렸으며 자기 시종들의 공궤나 부축을 허용하지 않았다. 이것은 그의 회개가 진정에서 우러난 것임을 증명한다. 그 이유는 이렇다.

1. 이로써 보건대 다윗은 자기 죄의 수치를 기꺼이 받아들이고 자기 죄를 항상 자기 앞에 두며 그 죄에 대한 끊임없는 책망을 감수하려고 한 것 같기 때문이다. 이 아이가 살아있는 한 그는 다윗이나 남들에게 그의 죄를 알리는 기념물이 될 텐데도 다윗은 그의 생존을 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윗은 아이의 죽음을 원하기는커녕 대개의 경우에 그러하듯 아이의 회복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였다. 진정한 회개자는 어렸을 때의 치욕을 참을성 있게 지고 젊었을 때의 욕망을 부끄러워한다(렘 31:19).

2. 여기에 나타나는 부성애와 인정은 보통 사람 특히 무인으로서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깊고 크기 때문이다. 이것은 상하고 통회하는 심령을 나타내는 또 다른 증거이다. 회개하는 자는 동정심이 많게 될 것이다.

3. 그는 이 일로 저 다른 세상에 대한 큰 관심을 깨닫기 때문이다. 이 또한 회개의 증거가 된다. 나단은 그에게 이 아이가 정녕 죽으리라고 말했다. 그런데도 그는 아직 기도할 수 있는 동안 아이의 생명을 위해 하나님께 열심히 간구한다. 그의 기도는 주로 아이의 영혼이 되며 저 세상에서 안전하게 행복하게 되며 자기 죄가 아이를 해롭게 하지 않으며 아이가 다윗 자신의 죄로 인해 장차 올 상태에서 곤란을 당치 않도록 해달라는 것이었다.

4. 그는 하나님과 그의 노여움에 대해 거룩한 두려움을 느꼈다. 이는 주로 아이의 죽음이 자기와 자기 집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의 표시였고 위협의 전주곡인 까닭이다. 그러므로 다윗은 하나님의 뜻이라면 아이를 살게 해 주시도록 이처럼 간절히 기도한다. 왜냐하면 그것이 다윗에게는 하나님께서 그와 화해하셨다는 표시가 될 것이였기 때문이다. "여호와여 주의 분으로 나를 견책하지 마옵소서" (시 6:1)

Ⅲ. 아이의 죽음. "그 아이가 죽으니라." 그 아이는 그 때 생후 팔일이었고 따라서 할례도 받지 못했다. 다윗은 아마 더더욱 그 아이가 언약의 인침 아래 들기 전 죽은 것을 하나님의 진노의 표시로 해석했을 것이다. 그러나 다윗은 아이의 행복을 믿어 의심치 않는데 이는 언약의 혜택은 인침에 좌우되지 않는 까닭이다. 다윗의 신복들은 자기 주군의 성미로 보아 아이가 죽었다는 것을 알면 극도로 혼란을 일으킬 것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그에게 고하기를 두려워하였다. 그래서 다윗은 직접 물어 보고서야 비로소 아이의 죽음을 알았다(19절).

Ⅳ. 다윗은 아이가 죽었다는 것을 알자 놀랍게도 평정과 침착을 잃지 않았다.

1. 그는 어떻게 행하였는가?

(1) 그는 슬픔의 표시를 불식해 버렸다. 그는 몸을 씻고 기름을 바르며 깨끗한 옷을 가져오라고 명하였다. 이것은 단정히 하고 여호와의 전에 들어가 하나님께 경배하기 위함이었다.

(2) 욥이 자기 자식들의 부음을 듣자 그랬던 것처럼 그는 "여호와의 전(원의:장막)에 들어가서 경배하였다." 그는 이 환란 속에 하나님의 손질을 인식하고 겸비케 되며 그의 거룩하신 뜻에 복종하며 자기를 살려두시고 자기 죄를 사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대한 쟁변을 계속하시거나 그의 모든 분을 일으키지 마시도록 기도하였다. "너희 중에 고난당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기도할 것이다" (약 5;13). 애곡이 예배를 방해해서는 안 된다.

(3) 그리고 나자 그는 궁으로 돌아와서 환란 날에 자기 종교로 은혜를 받은 자답게 스스로 기운을 차린다. "경배" 했으므로 그는 음식을 먹고 그 얼굴에는 수색이 더 이상 없었다.

2. 그가 자기의 행동에 대해 제시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의 신복들은 다윗이 아이가 앓을 때는 그토록 자기 학대를 하다가 아이가 죽자 그것을 아주 편안히 받아들이는 것에 의아심을 느끼고 그에게 묻는다(21절). 그 물음에 답하여 그는 자기 행동을 이렇게 분명히 설명해 준다.

(1) 아이가 살았을 동안에는 아이에게 대한 하나님의 은총을 간구하는 것이 자기 도리라고 생각했다는 것이다(22절). 나단이 아이가 정녕 죽으리라고 말한 것은 사실이나 그는 히스기야의 경우처럼 그 경고가 유동적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을 법하다. 하나님께서는 왕왕 그의 곡성을 들으셨다(시 6:8). 그런 하나님께서는 그의 크게 낮춤과 간절한 기도에 판결을 번복하시고 아이를 살려 주려고 하실지도 몰랐다. "혹시 여호와께서 나를 불쌍히 여기사 아이를 살려주실지 누가 알까?" 하나님께서는 비록 우리가 기대할 만한 특정 약속이 없더라도 하나님의 능력과 일반적 자비심에 대한 신뢰감에서 어떤 특정 축복을 간절히 구하도록 허락하신다. 우리는 이런 저런 일에서 결과를 확실히 알 순 없지만 기도는 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불쌍히 여기실지 누가 알랴? 우리 친척이나 친구가 병에 걸렸을 때 믿음의 기도는 역사함이 많다. 생명이 있는 한 소망이 있으며 소망이 있는 동안에는 기도할 여지가 있다.

(2) 이제 아이가 죽자 그는 하나님의 처사에 만족하는 것이 자기 도리라고 생각한다(23절). "시방은 죽었으니 어찌 금식하랴?" 그의 슬픔을 억제하는 것은 두 가지다.

[1] "나는 저에게로 가려니와 저는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리라." 죽은 자들은 기도의 영역 밖에 있으며 우리의 눈물도 그들에게 아무런 유익이 되지 못한다. 우리는 통곡으로도 기도로도 그들을 이 세상에 불러오지 못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왜 금식해야 하겠는가? 이렇게 "슬프게 행하는 것이 무엇이 유익하랴?" (말 3:14) 그러나 다윗은 요나단이 죽었을 때는 그를 추모하여 금식하고 애곡하였다.

[2] "나는 저에게로 가리라."

첫째, 그는 무덤 속의 아이에게로 간다. 우리는 친지가 죽을 때 우리 자신의 죽음을 생각하면 슬픔이 완화된다는 것을 잊지 말자. 그것은 공통된 운명이다. 우리는 그들의 죽음을 슬퍼하는 대신 우리들 자신의 죽음을 생각해야 한다. 비록 지금은 그들을 잃는 손실이야 어떻든 간에 우리도 곧 죽어서 그들에게로 갈 것이다.

둘째, 그는 천국에 있는 아이에게로 간다. 천국은 복된 나라여서 구약 성도들도 다소 기대를 하였다. 하나님의 뜻대로 슬퍼하는 경건한 부모들은 유시에 죽는 자녀에 대해 그들의 영혼이 저 세상에서 복되다는 것을 생각할 만한 이유가 있다. 왜냐하면 "약속은 우리와 우리 자녀에게 하신 것" 이기 때문이다(행 2:39). 이 약속은 자기 문에 빗장을 걸지 않는 자들에게 이행될 것이다. favores sunt awpliandi-즉 모든 은총을 받으면 은총에 대한 희망이 더 많아진다. 하나님은 자기에게 태어난 자들을 자기 자녀라고 부르신다. 만약 그들이 하나님의 소생이라면 그는 그들을 구원하실 것이다. 우리 자녀가 우리와 사별하더라도 그들이 이 세상의 일과 재물보다 더 나은 일과 부귀를 받는다고 생각하면 우리는 마음이 편안해진다. 우리는 잠간이면 그들과 함께 있게 될 것이며 그 때에는 더 이상 이별이 없을 것이다.

Ⅴ. 솔로몬의 탄생. 여호와는 다윗이 밧세바와 결혼한 것을 노여워하셨지만 이혼하라고 명하시지는 않으셨다. 아니, 하나님은 오히려 그들에게 아들을 주셔서 왕권의 언약까지 그와 맺으셨던 것이다. 밧세바는 틀림 없이 죄의식과 하나님의 노여우신 표징으로 큰 고통을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그의 구원의 기쁨을 축복해 주셨으므로 다윗은 자기가 하나님께 받은 바로 그 위로로써 밧세바를 위로하였다(24절). 다윗과 밧세바 양인은 하나님의 화해하신 표징 가운데서 위로를 얻을 만하였다. 그 이유는 다음 두 가지다.

1. 하나님은 섭리로써 그들에게 한 아들을 주셨기 때문이다. 이 아들은 분노하신 가운데 주셨다가 진노하심으로 빼앗아 가버린 먼저 번 아들과 달리 은혜 속에서 주셔서 예루살렘의 산 자 중에 기록된 아이였다. 그들은 그 이름을 솔로몬이라 하였으니 그 의미는 "평화스럽다" 는 뜻이다. 이는 그의 출생이 하나님께서 그들과 화평하심을 나타내며 그에게는 번영이 약속되고 그의 평강의 왕 그리스도의 예표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그들에게서 한 아들을 데려가 버리셨으나 아벨 대신 셋을 주셨던 것처럼(창 4:25) 그들에게도 그 대신 다른 아들을 주셨던 것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왕왕 자기 백성의 슬픔을 동일한 일에 의한 위로로써 상쇄시키신다. 즉 하나님이 어떤 일로 고난을 주시면 바로 그 일로 위로를 주셔서 전자와 후자를 대조시키시는 경우가 흔히 있다. 다윗은 먼저 번 아이가 죽었을 때 매우 참을성 있게 하나님의 뜻에 복종했는데 이제는 하나님께서 그 손실을 보상하실 뿐만 아니라 이 아이의 탄생으로 풍성한 혜택을 내리시기까지 한다. 우리의 위안물을 계속 보유하거나 회복하거나 아니면 그 손실을 다른 모습으로 보충하는 비결은 그것들을 기꺼이 하나님께 맡기는 데 있다.

2. 하나님은 은혜로써 그 아들을 특별히 인정하시고 총애하셨기 때문이다. "여호와께서 그를 사랑하사 선지자 나단을 보내셔서 그 이름을 여디디야 즉 여호와께 사랑받는 자라고 하셨더라" (24, 25절). 그는 비록 행악자(다윗과 밧세바는 행악자였다)의 자식이었지만 언약은 너무도 관대하여 면류관까지 그의 머리 위에 씌워 주며 부패한 피와 모든 상실한 권리를 회복시켜 주었다. 이것은 태어나면서 진노와 불순종의 자식되었던 자들이 은혜의 언약으로 말미암아 화해받을 뿐만 아니라 은총받는 자가 됨을 상징한다. 또 솔로몬은 여디디야라는 이름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가 되었다. 그리스도의 복된 "여디디야" 이며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아들이셨고 하나님께서는 몇 번이고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고 선언하셨다.

 

12:16 없음.

 

12:17 없음.

 

12:18 없음.

 

12:19 없음.

 

12:20 없음.

 

12:21 없음.

 

12:22 없음.

 

12:23 없음.

 

12:24 없음.

 

12:25 없음.

 

12:26

랍바 함락(사무엘 하 12:26-31)

여기에는 랍바 공략과 암몬족의 다른 성들에 관한 기사가 나온다. 이 기사는 다윗의 득남 기사 다음에 나오지만 이 일은 이보다 훨씬 먼저 있었던 일일 것이다. 아마 우리아가 죽고 난 뒤 밧세바가 그를 위해 호곡하던 동안 랍바성은 함락되었을 것이다. 다음을 관찰하자.

1. 하나님께서는 은혜롭게도 다윗에게 승리를 주셨다. 다윗은 이 전쟁기간 중에 범죄했고 더욱이 사악하게도 암몬인의 칼을 빌어 우리아를 살해했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 때부터 바로 암몬인의 칼을 다윗과 그 나라의 재앙으로 삼으셨어야 마땅할 터였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칼을 꺾으시고 다윗이 아직 회개하기 전에 다윗의 칼을 승리의 칼로 만들어 주신다. 이는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그를 인도하여 화개케 하시기 위해서이다" (롬 2:4). 다윗은 하나님께서 자기 죄를 따라 처치하지 않으신다(시 103:10)고 고백할 만 하였다.

2. 요압은 매우 정직하고 공손하게 처신하였다. 그는 "물들의 성" 곧 암몬 자손의 왕궁이 있는 성을 곧 취하게 되었다. 도성 나머지 지역은 왕궁이 있는 곳에서 물을 공급받았다. 그러므로 왕성을 차단하면 나머지 지역은 곧 항복하지 않을 수 없게 돼 있었다. 요압은 다윗에게 사람을 보내 왕이 친히 이 위대한 작전을 성사시키라고 청하였으니 이는 다윗으로 하여금 랍바 공략의 찬사를 듣게 하기 위함이었다(26-28절). 이로써 요압은 자기가 충실한 신복임을 나타내었다. 그는 주인의 명예를 먼저 구하였고 자신의 명예는 다만 주인의 명예에 귀속시키는 가운데서 구했을 따름이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종들에게 본을 끼쳤다. 그리스도의 모든 종들은 무슨 일에서나 그리스도의 영광만을 도모해야 한다. "우리를 영화롭게 마시고 주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소서."

3. 이때 다윗은 극히 오만하고 엄하여서 겸손하거나 인정스러운 모습이라곤 추호도 없었다.

(1) 그는 암몬 왕의 면류관을 너무 좋아했던 것 같다(30절). 그 왕관은 보석들이 박혀 있어서 아주 값비싼 것이었으므로 자기 머리 위에 쓰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차라리 이 왕관을 하나님 발 앞에 던져 버리는 게 더 나았을 것이다. 더군다나 그는 이 때 죄를 입고 있던 몸이 아닌가! 그는 땅에 엎드려 입에 흙을 머금어야 할 때였다. 죄 때문에 진심으로 겸손해진 심령은 세상의 영화에 대해서는 스스로 죽어서 그것을 거룩한 경멸감으로 바라본다.

(2) 그는 전쟁 포로를 너무 가혹하게 취급한 것 같다(31절). "그가 그 가운데 백성들을 끌어내어 톱으로 켜고 써레로 썰고 도끼로 찍고 벽돌가마로 지나게 하였더라" (한글 개역과 다름). 그 도성은 오래도록 완강히 버티었고 공격군에게 많은 피해를 입힌 끝에 함락되었다. 그렇다고 해도 전투 속에서 눈에 띄는 적군을 도륙한 것으로 충분했다. 그것만 해도 가혹한 짓이었다. 그런데 전쟁이 끝난 뒤 냉혈한처럼 살육과 고문을 자행하여 톱과 써레로 능지처참한 행위는 그답지 않은 짓이었다. 그는 통치를 할 때 인자와 공의를 찬송하겠다고 약속했기 때문이다(시 101:1). 자기 사자들을 모욕하거나 그 일을 권고하고 방조한 자들만 본때를 보여 주어 국제법의 위반을 문제삼았더라면 다른 나라들한테도 두려움을 주는 동시에 명분이 뚜렷한 정의의 행위로 간주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암몬족의 모든 성을(즉 모든 성의 수비대나 병사) 이 같이 한 것은 지나치게 가혹한 행위일뿐더러 다윗의 마음이 아직 회개로써 부드러워지지 않았다는 표시였다. 그렇지 않았다면 어찌 그의 긍휼심이 이렇게 꽉 막혀 있을 리 있는가! 이것은 아직 그가 자비를 얻지 못한 증거이기도 하다. 그렇지 않다면 그는 더 많은 자비를 보였으리라!

 

12:27 없음.

 

12:28 없음.

 

12:29 없음.

 

12:30 없음.

 

12:31 없음.




































 


List of Articles
번호 분류 제목
24 사무엘하 메튜 헨리 주석, 사무엘하 01장
23 사무엘하 메튜 헨리 주석, 사무엘하 02장
22 사무엘하 메튜 헨리 주석, 사무엘하 03장
21 사무엘하 메튜 헨리 주석, 사무엘하 04장
20 사무엘하 메튜 헨리 주석, 사무엘하 05장
19 사무엘하 메튜 헨리 주석, 사무엘하 06장
18 사무엘하 메튜 헨리 주석, 사무엘하 07장
17 사무엘하 메튜 헨리 주석, 사무엘하 08장
16 사무엘하 메튜 헨리 주석, 사무엘하 09장
15 사무엘하 메튜 헨리 주석, 사무엘하 10장
14 사무엘하 메튜 헨리 주석, 사무엘하 11장
» 사무엘하 메튜 헨리 주석, 사무엘하 12장
12 사무엘하 메튜 헨리 주석, 사무엘하 13장
11 사무엘하 메튜 헨리 주석, 사무엘하 14장
10 사무엘하 메튜 헨리 주석, 사무엘하 15장
9 사무엘하 메튜 헨리 주석, 사무엘하 16장
8 사무엘하 메튜 헨리 주석, 사무엘하 17장
7 사무엘하 메튜 헨리 주석, 사무엘하 18장
6 사무엘하 메튜 헨리 주석, 사무엘하 19장
5 사무엘하 메튜 헨리 주석, 사무엘하 20장
4 사무엘하 메튜 헨리 주석, 사무엘하 21장
3 사무엘하 메튜 헨리 주석, 사무엘하 22장
2 사무엘하 메튜 헨리 주석, 사무엘하 23장
1 사무엘하 메튜 헨리 주석, 사무엘하 24장
목록
Board Pagination Prev 1 Next
/ 1

All the Bibles, Commentaries and Dictionaries here have their own rights.
All rights are reserved for them, not for us. Thanks! Praise our great God, Christ Jesus!

HANGL Lingua Franca 한글 링구아 프랑카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

나눔글꼴 설치 안내


이 PC에는 나눔글꼴이 설치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 사이트를 나눔글꼴로 보기 위해서는
나눔글꼴을 설치해야 합니다.

설치 취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