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울의 죽음을 슬퍼하는 다윗(사무엘 하 1:1-10)
Ⅰ. 다윗은 아말렉 군사의 손에서 그의 가족과 친구들을 구해 준 후에 그의 고향인 시글락에 유했다. "시글락에 이틀을 유하더니…(1절)" 다윗은 그곳에서 전리품을 그의 친구들에게 선물로 보냈다(삼상 30:26). 그리고 그는 그곳에서 자기에게 모여드는 사람들을 받아들일 준비를 하고 있었다. 처음에 그에게 모여온 사람들은 궁지에 몰려있거나 빚진 자들이었으나 시글락에서 그에게 모여온 사람들은 "용사" 와 "싸움에 익숙한 자" 와 "천부장" 들이었다(대상 12:1, 8, 20).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므로 이 같은 사람들이 매일 계속 모여와서 "큰 군대를 이루어 하나님의 군대와 같았다" (대상 12:22). 이 같은 혁명의 원동력은 설명할 수 없는 것이었으며 필연 하나님의 섭리였다.
Ⅱ. 다윗이 시글락에 있을 때 한 사람이 사울이 죽었다는 소식을 전해 주었다. 다윗은 사울의 진영에 정보원을 배치해서 교전에 대한 결과와 사울이 죽었다는 소식을 좀 더 빨리 알게 하지 않은 것은 이상한 일이다. 다윗은 왕위에 오를 것을 조급하게 기다리지도 않았고 오히려 모든 소식이 들려지기만 기다리고 있었다. 확신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서두르지 않고 들려오는 소식만을 들을 뿐이며 불안을 느끼지 않는다.
1. 사울의 진영에서 소식을 가지고 온 사람은 긴급하게 달려왔다. 그 사람은 전사한 사울 왕에 대해서는 슬픔을 표시하는 듯했고 왕권을 이어받을 다윗에게는 복종하는 자세였다. 그 사람은 찢어진 옷을 입고 다윗 앞에 엎드려서(2절) 왕 앞에 최초로 경의를 표하는 변덕을 부렸으나 그는 다윗의 판단에 의해 최초로 사형 선고를 받은 사람이 되었다. 그 사람은 다윗에게 이스라엘 진영에서 왔다고 말했다. 그는 자기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서 진영에서 탈출해 나왔다고 떠들어대면서 비열한 태도를 보였다.2. 그는 다윗에게 전쟁에 대한 대략적인 보고를 한다. 백성에 대해서 누구보다도 걱정을 하는 다윗은 전쟁의 결과가 어떻게 되었는지 알고 싶어했다. 그는 다윗에게 이스라엘 군사가 패배당해서 많은 사람이 전사했고 사울과 그의 아들 요나단도 죽었다고 말했다(4절). 그는 사울과 요나단의 이름만 밝혔다. 왜냐하면 다윗은 사울과 요나단의 운명에 대해서만 알고 싶어하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고, 사울은 다윗이 가장 두려워하는 사람이었고 요나단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3. 전달자는 다윗에게 사울의 죽음에 대한 상세한 설명을 한다. 다윗은 다른 사람의 보고로 전쟁의 결과를 들었으리라고 추측할 수 있다. 왜냐하면 무리들이 그에게 왕래했기 때문이다. 다윗이 확실하게 알고자 하는 것은 사울과 요나단에 대한 소식이었다. 왜냐하면 다윗은 미리부터 앞질러서 예측하거나 확실성이 있기까지는 왕권을 자기의 것으로 인정하지 않으려고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윗은 "사울과 요나단이 죽은 줄을 네가 어떻게 아느냐?" 고 질문한다. 다윗의 질문에 대해서 그는 대답할 말을 미리 준비했던 듯이 사울이 죽은 것을 자기의 눈으로 목격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이 사울을 죽이는 도구로 사용되었다고 말해서 다윗으로 하여금 자기가 증거하는 말을 믿게 했다. 그는 요나단의 죽음이 다윗에게 얼마나 충격이 되리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요나단이 어떻게 죽었는지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고 다윗은 사울이 죽었다는 소식만을 기뻐할 것이고 그 소식을 전해 준 것에 대한 상을 받을 줄 알고 사울의 죽음에 대해서만 말한다. 그의 말을 통해서 다음과 같은 것을 추측할 수 있다.
(1) 매우 특이하고 상세하다. 그는 사울이 있던 곳을 병사로서가 아니라 우연히 길가는 사람으로 지나가다가 사울이 자기의 창에 의지해서 죽으려고 하는 것을 보았는데 사울의 수행원 중에 아무도 사울을 죽이고자 하는 사람이 없었고 사울 자신으로서도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고 했다. 비참한 처지에 있는 사울은 살 수 있는 힘도 없었고 죽을 수 있는 기력도 없었다. 그래서 사울은 이 사람을 불러서 어느 나라 사람이냐고 물었다(7절). 이 사람이 블레셋 사람만 아니라면 사울은 그의 "자비의 일격" (merciful sroke)을 받아서 죽음의 고통을 면하려 했다. 사울은 그 사람이 아말렉 사람(부하도 아니고 원수도 아님)임을 알고 "너는 내 곁에 서서 나를 죽이라" 고 간청한다(9절). 사울은 자기의 지위와 권위가 짓밟히고 생명이 살해당할 것으로 고심한다. 그러면 터무니없이 인생이나 명예를 즐길 사람이 누구일까? 이러한 부류의 사람들은 죽음에 대한 소망이 없으나 "죽기를 구하여도 얻지 못하고 죽고 싶으나 죽음이 너희를 피한다" (계 9:6). 사울은 자기의 영혼에 엄습하는 죽음에 대한 고통과 공포심으로 인해 "내가 고통에 들었나니" (9절)라고 불평했다. 만약 사울의 양심에 다윗을 죽이려고 던졌던 창과 자만심과 악의를 깨닫는다면 고통을 당하는 것이 놀라울 것이 못된다. 당시 사람들이 통용하는 말 중에 "사람이 죽을 때 두더지가 죽는 사람의 눈을 뜨게 한다" 는 말이 있다. 다른 사람의 과오를 용서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죽음이 공포일 수밖에 없다. 다른 사람의 신념을 좌절시킨 사람에게도 죽을 때에 공포가 엄습한다. 사울은 죽을 때에 그의 복장 때문에 빨리 죽지 못하는 것을 원망했을 것이다. 쇠붙이를 단 갑옷과 수를 놓고 장식품을 붙인 옷을 입었기 때문에 창으로 그의 몸을 깊숙이 찌르기가 어려웠을 것이고 몸이 뻣뻣하고 부어서 호흡에 장애를 느끼므로 불평과 원망을 했을 것이다. 사람이 복장으로 인해서 자만하게 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그 복장이 때로는 멍에가 되고 덫이 되기 때문이다. 청년은 내가 그 곁에 서서 죽였나이다(10절)하고 말할 때 다윗은 불쾌한 표정을 지으면서 "그가 엎드러진 후에는 살 수 없는 줄 알고" 그렇게 했다는 말을 듣지 않는다. 사울의 생명은 전적으로 아말렉 청년의 손에 달려 있었으므로 블레셋 군사의 손에 넘겨서 한 번 더 찌르게 할 수도 있었다.
(2) 이 이야기가 사실인지는 의문이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고 하나님의 공의가 인정된다면 하나님께서 멸시하신 아말렉 사람들을 죽인 사울은 그에 대한 대가로 아말렉 사람에 의해 죽음을 당한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주석가들은 이 같은 추측을 인정하지 않고 다만 이 아말렉 청년이 우연히 사울이 죽기 직전에 있는 것을 목격하고 죽이지도 않았으면서 다윗에게 그와 같이 말한 것은 다윗을 위한 공로가 될 것이므로 그에 대한 보상을 받을 줄 알고 했을 것이다. 자기의 원수가 죽는 것을 보고 기뻐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도 자기와 같은 생각을 할 것으로 추측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마음에 합당한 사람은 이같은 평범한 사람의 판단에 좌우되지 않는다. 이 젊은이의 이야기가 사실인지 아닌지 확언하기는 어렵다. 이 이야기는 마치 베드로가 사도행전 1장 18절의 가롯 유다에 대한 이야기를 마태복음 27장 5절의 내용과 연관시킨 것같이 사무엘 상 마지막 장(31장)과 연관시켰을지도 모른다. 사무엘 상 31장 4절에서 말하는 "칼" 은 본장 6절의 "창" 을 뜻하는 것으로 "칼 위에 엎드러졌다" 는 것은 "창" 에 엎드러진 것을 의미할지도 모른다.
(3) 아말렉 청년은 사울의 죽음이 확실하다는 증거로 그의 머리에 있던 왕관과 팔에 있던 고리를 가지고 왔다. 사울이 어리석게 왕관과 장신구를 지닌 채 전쟁터에 나간 것은 활을 쏘는 적군에게 왕임을 식별하기 좋게 하는 표식이 되게 했다. "교만은 부끄러움을 모른다" 는 말과 같이 위험도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만족을 느낀다. 사울의 이 같은 처사는 아말렉 사람의 손에 죽는 결과가 되었다. 사울은 자신이 가장 귀중히 여기던 보물을 분실하지 않게 하여 자신이 헌신하던 나라에 돌아오게 했다. 아말렉 청년은 사울이 죽었으므로 의심의 여지없이 이 보물의 참 주인이 될 다윗에게 바쳐서 궁전이나 전쟁터에서 가장 위대하게 된 그를 비공식적으로 추대했다. 유대인들의 전설에 의하면 이 아말렉 청년은 도엑의 아들이라 한다(아말렉 사람들은 에돔의 후손임). 전설에 의하면 도엑은 사울의 마부였는데 칼로 자결하기 전에 사울에게서 왕관과 팔고리를 받아서 자기의 아들에게 주어서 아첨의 표시로 다윗에게 전하게 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 같은 이야기는 근거가 없다. 이 사람이 도엑의 아들이라면 사울에게 잘 알려진 사람이었을 것이기 때문에 "너는 누구냐?" (8절)고 묻지 않았을 것이다. 다윗은 오랫동안 왕관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이제 그 왕관을 아말렉 사람이 가지고 왔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목적과 의도를 비록 허술한 계획이긴 하지만 자신의 뜻만 이루려는 사람을 통해 진행하시는 것에 눈길을 돌리자.
아말렉 사람을 죽임(사무엘 하 1:11-16)
Ⅰ. 다윗이 아말렉 사람이 전하는 소식을 수긍한다. 다윗은 아말렉 청년이 기대했던 바와 같이 이스라엘 백성과 그의 친구 요나단 뿐만 아니라 그의 원수 사울로 인해서 기쁨이 울분으로 변하여 "옷을 잡아 찢으며" (11절) "슬퍼하며 금식" 했다(12절). 이 같은 다윗의 처사는 넘어진 사람을 모욕하지 말고 죽은 사람에게서 덕을 보았든지 해를 입었든지 존경하는 마음으로 무덤 앞에 임하라는 예의를 지키며 존경할 뿐만 아니라 선량하고 양심적인 사람으로 사울에게서 입은 마음의 상처를 용서하고 적개심을 품지 않는 것이다. 다윗은 그의 아들 솔로몬이 "네 원수가 넘어질 때에 마음에 즐거워하지 말라. 여호와께서 이것을 보시고 기뻐아니하시느니라" (잠 24:17, 18). 그리고 "사람의 재앙을 기뻐하는 자는 형벌을 면치 못할 자니라" (잠 17:5)고 말하기 전부터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이 같은 다윗의 마음씨는 그가 기록한 시에서 원수가 멸망하여 승리하기를 바라는 것은 복수심이나 비정상적인 열망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과 사회 정의를 위한 성스러운 열심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 이유는 다윗이 사울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행한 것은 그의 성품이 부드러웠고 심지어 자기를 증오하는 사람들까지 사랑하였음을 알 수 있다. 다윗이 사울에 대해서 슬퍼하는 것은 진심이었으며 가장을 하거나 체면상으로만 한 것이 아니었다. 다윗의 슬픔은 너무도 강열했기 때문에 그의 주위에 있던 사람들까지 감동을 받았다. 다윗에게 복종하는 의미도 있었겠지만 슬픔의 표시로써 함께 있던 모든 사람도 옷을 찢고 저녁 때까지 금식했다. 이 금식은 종교 의식적인 금식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겸손한 태도를 보이고 이 전쟁의 패배로 인해서 생긴 틈을 메우기 위해서 기도했다.
Ⅱ. 사울의 소식을 전 해준 사람에 대한 보상.
다윗은 이 청년을 발탁해서 쓰지 않고 오히려 왕을 죽인 살인범으로 단정하고 그가 행한 동일한 죄과로 죽이라고 명령한다. 고통 중에 있는 사울에게 호의를 베풀었다고 생각한 청년에게 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청년은 사울이 필연적으로 죽을 줄 알고 사울의 간청을 들어 주는 것이 그에게 친절을 베푸는 것으로 알고 공연한 일을 했다. 청년의 항변(抗辯)은 아래와 같은 말로 무효가 되고 말았다. "네 입이 네게 대하여 증거하기를 내 여호와가 기름부음 받은 자를 죽였노라(16절)고 하였으니 너는 죽어야 하느니라." 다음 사실을 관찰해 보자.
1. 이 시점에서 다윗의 행위는 불의가 아니다.(1) 그 사람은 아말렉 사람이었다. 이것은 그가 하는 말에 잘못이 있을 수 있다. 다윗은 그에게 두 번째로 그가 어디 사람인가를 자백하게 했다(13절). 아말렉과 그에 속한 모든 것은 마땅히 파멸당해야 한다. 그래서 다윗은 그의 전임자(사울)가 당연히 했어야 할 것을 했다.
(2) 아말렉 사람은 자신의 죄를 자백했다. 그래서 모든 법의 일치에 의해서 죄를 정하기에 충분한 증거가 되었다. 모든 사람은 자기 자신을 가장 고귀한 존재라고 생각한다. 만약 그가 자기의 말과 같이 했다면 "반역죄" 로(14절) 당연히 죽어야 한다. 이 사람은 사울의 마부가 사울의 간청을 거절했다는 말을 들었을지도 모른다. 만약 자랑삼아 했다면 그것으로 인해 아무런 가치도 없는 일을 기회가 있기만 하면 했을 것이다. 아말렉 사람은 사울에 대한 자기의 의견을 자랑하면서 자기로서는 "여호와의 기름 부음 받은 사람" 에게 손을 들어 치기를 몇 번이고 거절하였으나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고 했다. 그가 다윗에게 말하는 것이 거짓말이라면 그는 큰 죄인임에 틀림없고 조만간에 죄가 자신에게 임할 것을 증거할 것이다.
2. 다윗이 아말렉 사람에게 행한 일은 명철한 처사이다. 여기서 다윗은 자신의 슬픔이 진실함을 공개하고 아말렉 사람이 사울에게 행한 것 같은 무고한 행위로 다윗의 마음을 끌겠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뜻을 좌절시켰고, 이 사람에게 사울의 가족이 했어야 할 보복을 했으며, 인간의 본의를 무시하고 사회 정의에만 열성을 보이고자 하는 사람을 백성들 앞에서 본을 보였다. 우리는 이 이야기 속에서 직접이든 간접이든 생명을 해하는 일에 조력하는 것은 살인행위라는 사실과 왕의 생명이 소중하다는 사실을 특이한 방법으로 깨닫게 한다.
사울과 요나단에 대한 다윗의 애가(사무엘 하 1:17-27)
다윗은 사울의 죽음을 슬퍼하는 뜻으로 옷을 찢고 통곡하며 금식했다. 그리고 사울에 대해서 살인죄를 범한 사람에게 정당한 처벌을 내렸다. 다윗의 이같은 처사는 사울에게서 입은 은혜(초기에 사울에게서 입은 은혜:역자 주)에 대한 보답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으나 그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다윗은 검을 사용하는 데도 능했지만 감정도 풍부하여 사울의 죽음에 대한 애도의 시(詩)를 썼다. 다윗은 이 애가(哀歌)에서 사울이 당한 참화(慘禍)에 대한 자신의 슬픔과 다른 사람들의 심정을 묘사했다. 시로 묘사된 애가는 백성들에게 몇 가지 교훈을 준다.
1. 보다 깊은 감동과 사랑을 느끼게 한다. 시인(다윗)의 슬픔이 시를 읽는 사람이나 애가를 듣는 사람들과 공감을 갖게 한다.2. 보다 오랫 동안 보존된다. 그리하여 기록된 애가는 널리 퍼질 뿐만 아니라 오랫 동안 기억에 남아서 대대로 전달된다. 그리고 역사를 읽지 않는 사람일지라도 그 시를 통해서 역사의 자료를 수집할 수 있다. 다음 사실을 명심하자.
Ⅰ. 다윗은 이 애가와 함께 명령을 내린다. "명하여 그것을 유다 족속(다윗의 족속)에게 가르치라 하였으니 곧 활 노래라" (18절).
1. 활은 전쟁에서 사용했다. 유다 족속 중에 활을 사용할 줄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활은 이보다 오래 전부터 창과 함께 무기로 사용되었다. 창 48:22). 다윗이 골리앗을 죽일 때 사용한 것으로 보아 활보다 비용이 작게 드는 물매를 사용했을 것이다. 다윗은 이 때 물매를 가지고 있었을 것이나 활보다 명중률이 좋지 않음을 알았을 것이다(왜냐하면 사울이 블레셋 사람의 화살에 맞아 전사했기 때문이다. 삼상 31:3). 그래서 활 사용하는 것을 더 일반화시키고 훈련해서 이스라엘의 왕을 죽인 블레셋을 보복할 능력을 길러서 그들의 원수를 제압할 뜻을 세웠다. 전쟁으로 보복한다는 것은 슬픈 일이지만 머리가 명석한 유다 족속들은 필연코 잘 무장해야 했다. 다윗은 여기서 이스라엘 나라와 군대에 대해 자신의 권위를 보이고 사울의 과오에 대해서 수정할 결심을 한다. 그런데 시글락에 있는 다윗에게로 몰려온 사람들은 활로 무장하고 있었다(대상 12:2).2. 어떤 사람은 활을 일종의 악기로 알고 그것으로 민요나 애가를 연주하리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었다. 다윗은 사울과 요나단을 위해서 이 노래를 지어 공적을 찬양하고 배우게 했다. "다윗이 명하여 그것을 유다 족속에게 가르치라 하였으니 곧 활노래라." 모세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가 지은 노래를 배우라고 한 것같이(신 31:19) 다윗도 자기의 노래를 배우라고 했다. 아마도 레위 족속에게 이 노래를 가르치라고 했을 것이다. 이 노래는 "야살의 책에 기록되어" 역사에 기록되었다. 야살의 책은 일종의 민족시집이었을 것이다(수 10:13). 그러므로 이 책에 기록으로 남기는 것은 역사적인 시나 단편이었을 것이다. 입에서 입으로 전달되는 노래일지라도 기록하여 보존하지 않으면 상실될 것이다.
Ⅱ. 이 애가는 신성한 찬송도 아니고 제사 의식에 사용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된 것도 아니고 다만 인간적인 것이다. 그래서 시편에 들어있지 않고 잊혀지지 않기 위해서 일반 시집인 야살의 책에만 기록되어 있다. 이 애가는 다윗에 대해서 몇 가지 사실을 알게 한다.
1. 다윗은 네 가지 관점에서 영적인 사람임을 알 수 있다.(1) 다윗은 그의 철천지 원수인 사울에게 매우 관대했다. 사울은 다윗의 장인이고 그의 왕이었으며 하나님의 기름부음 받은 자였다. 그러므로 비록 사울에게 보복을 가하지 않고 오히려 선량하고 존경하는 사람을 대하는 것같이 한다.
[1] 다윗은 사울의 과오를 은폐시킨다. 그리고 비록 사울의 생애 중에 과오를 예방하지 못했다 할지라도 이 애가에 그의 과오를 나타낼 필요가 없다. 다윗은 우리에게 선행이란 모든 사람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며 특히 세상을 떠난 사람이 범한 과오에 대해서 말하지 않는 것임을 가르쳐 준다. 죽은 사람에 대해서는 좋은 것만 말하는 지혜를 배우자. 우리는 자신에게 해롭게 한 사람을 비난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말아야 한다. 기억에 남는 악한 생각은 악한 사람과 함께 장사지내 버리자(" 흙은 흙으로 재는 재로"). 인간의 결점은 감추고 결함에는 너울을 씌우자.
[2] 다윗은 사울에 대해서 칭찬할 만한 것만 열거하여 칭송한다. 사실이 아닌 것은 칭송하지 않고 애국심이나 충성심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는다. 사실에 근거한 칭송은 받을 만한 사람에게는 당연한 것이지만 부당한 칭송은 오히려 비난이 된다. 그런데 다윗은 사울에 대한 존경의 표시로 칭송한다.
첫째, 사울은 기름부음을 받았기 때문에(21절) 존경해야 한다. 거룩한 기름부음을 받았다는 것은 존경을 받고 나라를 다스릴 자격이 있음을 뜻한다. 사울에게는 대제사장과 같이 "하나님의 위임한 관유가 그 위에 있음이니라" (레 21:12)고 말씀하신 기름이 부어졌다. 기름부음을 받은 사람은 존경해야 한다. 왜냐하면 존경의 근원이신 하나님이 기름으로 구별하셨기 때문이다.
둘째, 사울은 용사(19절)였기 때문에 존경해야 한다. 사울은 종종 이스라엘의 원수들을 무찌르고 승리하였고 "향하는 곳마다 이기었다" (삼상 14:47). 사울의 칼은 "죽은 자의 피에서, 용사의 기름에서 헛되이 돌아오지 아니하였다" (22절). 사울은 그의 마지막 불명예와 실패로 인해서 그 이전의 성공과 공로가 망각되어서는 안 된다. 비록 그의 태양이 구름 뒤로 졌다고 하지만 한 때 찬란하게 빛났었다.
셋째, 사울과 요나단이 뜻이 통하는 사람이었다고 말한다. "사울과 요나단은 생전에 사랑스럽고 아름다운 자더니……" (23절) 요나단은 한결같이 변함이 없었고 사울도 요나단과 일치하였다. 사울과 요나단이 함께 적을 추격할 때 그들보다 더 담대하고 용감한 사람이 없었다. "그들은 독수리보다 빨랐고 사자보다 강하였다" (23절). 다음 사실을 관찰하자. 전쟁터에서 강하고 용감했던 사울과 요나단이 궁전에서는 상냥하고 사랑스러워서 원수들에게 만만치 않은 존재들이었고, 어떤 기질의 사람이라도 부러워할 희귀한 부드러움과 예리한 성품의 조화를 이루었었다. 이것은 사울과 요나단이 사랑과 조화로 대부분의 생애를 살았음을 의미한다. 그들은 서로 사랑스럽고 아름다워서 요나단은 충성스러운 아들이었고 사울은 인자한 아버지였다. 그러므로 그들은 서로의 생명을 존귀하게 여기면서 "죽을 때에도 서로 떠나지 아니하고" 그들의 원수 블레셋 군대와 대항해서 싸우다가 함께 쓰러졌다.
넷째, 사울은 이스라엘을 침략하고 괴롭히던 나라를 무찌르고 나라를 부강하게 하고 더욱 빛나게 했다. 이 같은 왕이 있을 때에는 백성들도 좋은 옷을 입을 수 있었다. 사울은 특히 여인들에게 큰 은혜를 베풀었다(24절). 이스라엘 딸들은 그들이 좋아하는 "붉은 옷으로 화려하게" 입을 수 있었다.
(2) 다윗은 그의 절친한 친구 요나단을 칭송한다. 다윗은 요나단을 위해 눈물을 흘리고 사울과 대등한 찬사와 함께 요나단의 특성을 말한다. "오호라, 요나단이 너의 산 위에서 죽임을 당하였도다" (25절)라고 한 말을 19절과 비교하면 산(山)에서 죽은 것이 이스라엘의 영광임을 알 수 있다. 다윗은 요나단이 특별한 친구였음을 슬퍼한다. "내 형 요나단" (26절)이라고 말한 것은 요나단이 살아서 자기에게 해 주기를 바랬던 것이 수포로 돌아가서도 아니고 자기가 왕위에 오르게 될 때 도움이 되지 못하기 때문도 아니다(다윗이 이 때문에 슬퍼한다면 이기주의자에 불과하다). 그러나 다윗이 요나단으로 인해서 슬퍼하는 것은 요나단이 생전에 자기에게 베풀어 준 것에 감격해서 "내가 그대를 애통함은 그대는 내게 심히 아름다움이라" 고 했다(26절). 그런데 이 아름다움이 끝나서 슬퍼한다. 다윗이 요나단의 사랑이 아름다웠다고 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요나단은 다윗의 머리에 씌워질 왕관을 탈취하려 하지 않았고, 실상은 그의 적수(敵手)였음에도 극진히 사랑해 준 때문이다. 이 같은 사랑은 부부간의 사랑이나 정절을 능가하는 사랑이다. 다음 사실을 관찰하자.
[1] 세상에서 참된 친구보다 더 기쁨을 주는 것이 없다. 우정은 어질고 좋으며, 친밀하게 사랑을 주고 받으며, 모든 참된 관심사에 도움이 된다.
[2] 참된 친구를 잃는 것보다 더 고통을 주는 것이 없다. 좋은 친구를 잃는 것은 자기 생명의 일부를 상실한 것과 같은 것이다. 그리고 세상에서 가장 허무하고 무상(無常)한 것은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던 것을 잃었을 때이다. 사람이 많이 사랑하고 좋아하는 것일수록 더욱 큰 슬픔을 안겨 준다.
(3) 다윗은 하나님의 명예와 영광에 대해서 깊은 관심을 기울인다. 다윗은 "할례받지 못한 딸들" 과 하나님의 약속밖에 있는 사람들이 이스라엘과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정복할 것에 눈길을 돌리며 두려워한다(20절). 선량한 사람은 하나님을 모욕하는 비난에 매우 민감했다.
(4) 다윗은 국가 안정에 깊은 관심을 표했다. 다윗은 이스라엘의 아름다움과 국가의 영광인 "용사가 엎드러졌다" 고 하였다(다윗은 이 말을 세 번 반복하며 슬퍼했다. 19, 25, 27절). 이로 인해서 백성들의 용기가 약화되었다. 국가적인 손실은 애국심을 가진 사람들에게 큰 충격을 입힌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자기를 이 큰 손실을 회복시키는 도구로 쓰시기를 바라고 있다.
2. 다윗은 상상력이 풍부할 뿐만 아니라, 지혜롭고 경건한 사람이다. 다윗의 표현들은 탁월하고 공적을 귀중하게 생각했다.
(1) 명예와 관련된 소문을 금지한 것은 현명하다. "이 일을 가도에도 고하지 말라" (20절). 다윗은 사울이 죽었다는 소식이 블레셋 성읍에 전파되어서 블레셋 사람들이 이스라엘을 모욕할까 걱정하고 전에 블레셋에게 승리하여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삼상 18:7)하고 개선가를 부르던 일을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 승리가 지금 역습을 당했기 때문이다.
(2) 사울은 비극의 공연장인 길보아산에 치욕을 남겼다. 다윗은 "길보아 산들아 너희 위에 우로가 내리지 아니하며 제물 낼 밭도 없을지어다" (21절)하고 말한다. 이 말은 "나의 난 날이 멸망하였더라면……" (욥 3)하고 탄식한 욥의 말과 대등하다. 다윗이 이렇게 말하는 것은 이스라엘의 땅이 황무하게 되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그의 슬픔의 울분을 길보아 땅에 하는 것이다. 다음 사항을 관찰하자.
[1] 땅이 비옥한 것은 하나님의 축복이다. 다윗이 길보아 산을 향해 바라는 최악의 사태는 황무하게 되어 사람에게 무가치하게 되는 것이다. 무용지물이 된다는 것은 비참한 것이다. 예수님께서 무화과 나무를 향해 "이제부터 네게 열매가 맺지 못하리라" 하고 저주하시니 그 무화가 나무가 말랐다. 그러나 길보아산은 이렇게 되지 않았다. 다윗은 비가 내리지 않으므로 황무하게 되기를 바랐다. 하늘이 "놋쇠" 로 변하면 땅은 곧 무쇠로 변한다.
[2] 다윗이 "제물 낼 밭" 이라고 하는 이 비옥한 땅이 하나님을 위해서 어떻게 사용될 수 있을까? 이 밭에서 나는 농작물들은 하나님께 제물로 드려지는 것이 자랑이요 영광이다. 그러므로 그 농작물이 제물이 되지 못하는 것은 비참한 결과이다(요엘 1:9 참조). 농작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은 생명을 유지해서 영광 돌리는 것보다 못하다. 다윗은 왕의 피로 얼룩진 길보아 산에 우로(雨露)를 금하는 하늘의 형벌을 내리기를 바라고 있다. 사울은 이 애가에서 그의 시체를 장사한 야베스에서 보다 더 영광을 받는다(삼상 31:12, 13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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