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둘람 굴의 다윗(사무엘 상 22:1-5)
Ⅰ. 다윗은 아둘람 굴에 자기 몸을 피했다(1절). 그곳이 자연적인 요새인지, 또는 인공적으로 만든 요새인지는 나와 있지 않다. 아마 그 굴 속으로 출입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다윗은 혼자서도 능히 사울의 많은 군사들을 골리앗의 칼로 막을 수있다고 생각하고, (자기가 말한대로 - 3절) 하나님께서 자기를 어떻게 하실 것인가를 알 수 있도록 기다려 보는 동안 그 안에 몸을 숨기고자 했을 것이다. 왕국에의 약속은 그 왕국을 보존하도록 하여 주신다는 약속까지를 포함하고 있다. 그런데도 다윗은 자신의 안전을 위해 자신의 방법을 선택하였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는 하나님을 시험하였을 것이다.그는 사울을 멸망시킬 어떤 행동은 전혀 취하지 않았다. 오직 그 자신을 보호하는 데만 힘썼다.
자기 조국을 위해서, 사사로서 또는 장군으로서 큰 공을 세운 사람이 여기 한 굴 속에 갇혔으며, 아무 소용이 없는 그릇처럼 버림을 받고 있다. 때로 빛나는 광명이 이처럼 등경 밑에 숨겨지며, 그 빛이 가리워진다고 해도 조금도 이상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 아마 히브리서의 저자는 구약 성서에 나오는 믿음의 용사들에 대해 말하며, "저희가 광야와 산중과 암혈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 (히 11:38)라고 말했을 때, 다른 사람들고 함께 이 때의 다윗의 경우를 생각했을 것이다. 이 시기에 다윗은 시편 142편을 지었다. 그 제목은 "다윗이 굴에 있을 때에 지은 기도" 라고 되어 있다. 그 시편에서 다윗은 "나를 아는 자도 없고, 피난처도 없다" 고 불평했지마는 곧 이어 "의인이 나를 두르리이다" 라는 희망을 피력하기도 했다.
Ⅱ. 그의 친척들이 다윗을 찾아 그 곳까지 갔다. "그의 형제와 아비의 온 집이" 그의 보호를 받으며, 그를 돕고, 그와 운명을 같이 하기 위해 찾아왔다. "형제란 어려운 때 도와 주기 위해 태어났다." 이제 요압과 아비새와 그리고 남은 그의 친척들이 잠시 그와 함께 고난을 같이하면 곧 크게 성공할 것을 바라고 그에게로 왔다. 과연 그들의 생각대로 되었다. 과연 다윗의 신하들 가운데 처음 세 사람은 그가 그 굴속에 있을 때에 제일 먼저 그에게 찾아온 사람들이다(대상 11:15 이하).
Ⅲ. 여기서 다윗은 자신의 방비를 위해 힘을 기르기 시작했다(2절). 그는 도망다니는 것 만으로는 자신들을 구할 수 없다는 것을 최근의 경험을 통해서 알게 되었다. 그리하여 힘으로 이를 지켜야 한다는 것도 깨닫게 되었다. 그러나 이 문제에 있어서도 그는 절대로 공격적인 자세를 취하지 않았다. 왕을 공격하거나 왕국의 평화를 유린하는 행동을 취하지 않았다. 다만 그의 힘을 가지고 자신을 방비하는 데만 사용하였다.
그러나 아무리 그 사람들이 다윗을 지켜 주는 군사들이라고 하여도 그에게 큰 도움을 주지 못하였다. 왜냐하면 그에게 모여든 사람들이란 위대한 사람도, 부자도, 그리고 건장한 사람도 또 좋은 사람들도 못 되었기 때문이다. 그에게 모여든 사람들이란 "환난당한 모든 자와, 빚진자와, 마음이 원통한 자" 였다. 다시 말해서 불행한 자와 불안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어찌할 바도 잘 모르는 사람들이었다. 다윗이 아둘람 굴에 본부를 정했을 때 그들은 다윗을 찾아왔으며, 그렇게 모인 사람들이 4백명 가량이 되었다. 하나님은 때로 이처럼 약한 자를 들어 자기의 뜻을 펴신다. 다윗의 후손도 이런 고난받는 사람들을 맞아 들이시고, 그들의 대장이 되시매 그들을 다스리신다.
Ⅳ. 다윗은 그의 부모를 안전한 곳에 계시게 하였다. 사울이 살아서 다윗과 그리고 다윗에게 속한 모든 자의 생명을 악착같이 노리는 동안에는 이스라엘 땅 안에 다윗의 부모가 안전하게 거할 만한 장소가 없었다. 그러므로 다윗은 부모를 모시고 모압 왕에게 가서 그의 보호를 받게 하였다(3,4절).
1. 그는 나이 많은 부모를 위해 자상한 배려를 잊지 않았다. 그들은 다윗이 사울과 싸우는 동안 받게 될 여러가지 놀라 운 일과 괴로움을 감당할 수 없었다(그것은 그들의 나이가 이미 많아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자기 자신은 어떻게 되든지 간에 우선 부모님께 안전한 곳을 마련해 드리는 일을 하였다. 모든 자녀들은 "먼저 자기 집에서 효를 행하며 부모에게 보답하기를" (딤전 5:4) 다윗에게서 배워야 한다. 자녀들은 결코 부모의 마음을 불안케 해서는 안 된다. 그들의 마음에 들게끔 하여 드려야 한다. 사람이 아무리 높은 자리에 앉았거나 부리는 종이 많아도 먼저 나이 많은 자기 부모를 잊지 말아야 한다.2. 그는 현재의 고난 속에서도 이 문제가 쉬 해결될 것이라는 신앙을 가지고 있었다. "하나님이 나를 위하여 어떻게 하실 것을 내가 알기까지" 부모를 맡아달라는 부탁을 한 바가 있다. 그는 자신을 전적으로 하나님께 맡기는 자답게 겸손하게 자신의 희망을 표시하였다. 그는 문제가 잘 해결되리라는 것을 기대하기는 하지마는 그것이 그 자신의 기술이나, 무력이나 또는 공로로 이룩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그에게 베풀어 주시는 지혜와 능력과 그리고 선하심으로 말미암아 이룩된다는 것을 전적으로 믿고 있었다. 다윗의 부모는 그를 버렸으나 하나님은 그를 버리지 않으셨다(시 27:10).
Ⅴ. 다윗은 선지자 갓의 충고와 도움을 받아들였다. 그는 사무엘 밑에서 성장한 선지자의 생도 중의 한 사람으로서, 사무엘로부터 다윗의 군복과 그리고 영적인 지도자로 지명받은 사람일 것이다. 선지자로서 갓은 다윗을 위하여 기도하였으며, 그에게 하나님의 뜻을 알려 주었다. 그리고 다윗 자신도 선지자이지만 그의 도움을 기쁘게 받아들였다.
갓은 다윗에게 유다 땅으로 들어가라고 충고하였다(5절). 그는 다윗에게 자신의 무죄를 확신하며, 또 하나님의 보호를 믿고, 현재의 환경이 매우 어렵다고 하자 자기 민족과 자기 나라를 위해 무엇인가 봉사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그 곳으로 가라고 하였다. 인간은 자신의 주장을 부끄럼 없이 내세울 수 있어야 하지만 동시에 그에게 제공되는 협조를 거절하지도 말아야 한다. 갓의 말에 용기를 얻고 다윗은 여러 사람들 앞에 나서기로 작정하였다. 이것이 바로 "여호와의 명을 받은 의인의 발걸음이다."
여호와의 제사장을 죽인 사울(사무엘 상 22:6-19)
우리는 다윗의 고난의 과정을 살펴보았다. 그런데 여기에서는 사울의 악한 일들을 볼 수 있다. 그는 다른 모든 일들은 온전히 제쳐놓고 전적으로 다윗을 추격하는 일만을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드디어 사울은 다윗과 그와 함께 있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는 말을 들었다(다시 말해서 다윗이 얼굴을 내밀고 여러 사람들이 그를 도왔다는 말이다). 그 말을 듣고 사울은 그의 신하들을 불러 옆에 세우고, 자기는 기브아 높은 곳에 있는 한 나무 아래 앉아 있었다. 그의 손에는 단창이 들려져 있었다. 그것은 그의 통치력을 나타내는 것이었으며, 현재의 그의 불안한 심령을 나타내는 것이기도 하였다. 그는 자기의 길에 방해가 되는 자는 모두 죽이고자 하는 마음을 나타내었다.
Ⅰ. 사울은 이런 핏발이 서린 심판대에 앉아서 다윗과 요나단에 대한 정보를 듣고자 하였다(7,8절). 사울은 그의 주변에 있던 가장 훌륭한 두 사람에 대해 자기의 적의를 퍼붓기 위해서 두 가지 사실을 알고 싶었고 또 그것이 사실임이 증명되기를 원했다.
1. 사울은 그의 신하인 다윗이 "매복하였다가" 자기를 "치려 한다" 고 하였다. 그것은 전적으로 거짓말이다. 사실은 사울이 다윗의 생명을 노렸다. 그리하여 다윗이 자기의 생명을 노린다고 꾸며댔다. 왜냐하면 다윗에게 어떤 혐의를 씌울 만한 다른 허물을 발견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2. 그의 아들 요나단이 다윗으로 하여금 이런 일을 하도록 선동하고 그와 함께 왕을 죽일 음모를 꾸몄다고 말했다. 이것 역시 전적으로 거짓말이다. 다윗과 요나단 사이에 우정의 맹세는 있었다. 그러나 어떤 악을 행하고자 하는 공모는 없었다. 그들이 세운 언약속에는 사울에 대해 어떤 해를 가하고자 하는 조항이 하나도 없었다. 사울이 죽은 뒤에 다윗이 왕권을 계승하여야 한다고 동의한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섭리에 순종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전혀 사울을 해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왕과 나라에 대해 충성을 다하는 사람이 때로는 원수로 여김을 받는 경우가 많다. 그리스도께서도 그런 혐의를 받으셨다. 사울은 다윗과 요나단이 틀림없이 자기를 죽이고 자기의 왕위와 권위를 찬탈하려는 음모를 꾸몄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의 신하들에게 그들이 틀림없이 그런 사실을 알면서도 아무런 말을 하여 주지 않았다고 불평하였다. 하지만 그런 일은 전혀 없었던 일이다. 질투의 악독한 본성과 그리고 없는 사실도 있다고 꾸며대려고 하는 그 가련한 술수를 보라. 사울은 자기가 말한대로 말하지 않는다고 하여 주변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원수시 하였다. 그리고 신하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1) 저들은 지혜롭지 못하여, 그들의 지파와 가족의 이익에 반하는 행동을 한다고 말했다(왜냐하면 그들은 베냐민 지파 사람들인데 만일 다윗이 성공하면, 현재 베냐민 지파가 가지고 있는 영광과 권세가 유다 지파로 넘어가기 때문이다). 다윗은 결코 그들이 다윗에게 해 준 일에 대한 보상을 해 주지 않을 것이라고 하였다. 즉 다윗은 그들에게 "밭과 포도원을" 주지 않을 것이며, "천부장과 백부장을" 삼지도 않을 것이라고 하였다.
(2) 그들은 불실한 신하라고 말했다. "너희가 다 공모하여 나를 대적하였다" 고 사울은 말했다. 질투의 영에게 사로잡힌 자의 끊임없는 동요와 괴로움에 시달리는모습을 보라! "관원이 거짓말을 신청하면 그 하인은 다 악하다" (잠 29:12). 다시 말해서 관원의 눈에 모든 사람이 악한 사람으로 보인다.
(3) 그들은 친절하지 못하다고 말했다. 사울은 신하들에게 "나를 위하여 슬퍼하는 자" 가 없다고 말하면 이 말이 그들의 마음을 움직이리라고 생각한 모양이다. 어떤 사람은 이 말을 "나 위하여 염려하는 자" 가 없다는 말로 읽기도 한다. 사울은 이런 말을 가지고 신하들로 하여금 자기의 악의를 실천에 옮겨 줄 도구로 삼고자 하였다.
Ⅱ. 사울은 신하들로부터 다윗과 요나단에 관한 아무런 이야기를 듣지는 못했지마는, 도엑으로부터 제사장 아히멜렉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다.
1. 도엑이 아히멜렉을 고발하였고, 그 자신이 증거를 제시하였다(9,10절). 도엑은 나쁜 사람이었던 만큼 사울이 이를 강요하지 않았다면 이를 자진해서 사울에게 말하고자 했으며, 벌써 말을 했을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제 와서는 사울의 신하들이 아무도 다윗과 요나단에 대하여 고발하지 못 한다면 그들이 모두 반역자가 된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래서 목격자의 입장에서, 아히멜렉이 다윗에게 행한 일을 고해 바쳤다.아히멜렉이 "그를 위하여 여호와께 묻고" (보통 제사장은 공적인 일이나, 공적인 일을 하는 사람을 위해서가 아니면 이런 일을 하지 않는다) 그리고 "식물과 칼" 을 그에게 주었다고 도엑은 사울에게 말했다. 그의 말은 모두 사실이었다. 그러나 전반적인 사실은 아니었다. 도엑은 다윗이 아히멜렉으로 하여금 그가 왕의 일을 하기 위해 간다고 믿게든 사실도 말해야만 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아히멜렉이 다윗을 위해 한 일은 곧 사울의 명예를 인하여 행한 일이었음을 밝혀 주어야 했을 것이다. 그렇게 했다면, 지금 사울의 수중에 들어있는 아히멜렉의 잘못은 벗겨지고 모든 허물은 사울의 손이 미치지 못하는 다윗에게만 씌워질 수 있었을 것이다.
2. 아히멜렉은 사울의 소환을 받아 그의 앞에서 이 고소의 내용에 관해서 문초를 받았다. 왕은 아히멜렉과 그리고 그 때 성전에 있던 모든 제사장들을 전부 데려오게 하였다. 왕은 그들이 모두 다윗을 돕는 일을 방조 하였다고 추측 하였다. 그들은 조금도 잘못한 생각이 없었으며 따라서 위험이 있으이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하고 "그들이 다 왕께 이르렀으며" (11절), 누구 한 사람 도망치거나 다윗에게로 피하려 하지 않았다.사울은 가장 그를 멸시하며 분하게 여기는 말로 아히멜렉을 책망하여 말하기를 "너 아히둡의 아들아 들으라" 라고 하였다(12절). 사울은 그의 이름을 부르지도 않았으며, 그의 높은 직위의 명칭을 부르지도 않았다. 이로써 사울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그의 제사장들을 전혀 존경치 않고, 다만 그들을 멸시하는데 즐거움을 느끼고 있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아히멜렉은 "내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는 잘못한 일이 없나이다. 내가 책망 받아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란 말 한마디만 하고 그대로 피고석에 들어섰다. 그는 사울의 재판권에대해 반대하지도 않고, 제사장으로서의 면책권도 주장하지 않았다. 그러나 사울은 자기에게 부여된 왕으로서의 통치권을 가지고 비록 대제사장이라도 일반 이스라엘 백성과 마찬가지로 그를 다루고자 하였다. "각 사람은(비록 성직자라도)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 (롬 13:1).
3. 그에 대한 고소장을 읽어 주었다(13장). 즉 아히멜렉은 반역자로서 이새의 아들과 공모하여 왕을 대적하려고 하였다는 것이다. "다윗의 계획은 나를 치려는 것인데 네가 그에게 떡과 물을 주어 이 일을 도와 주었다" 고 사울은 말했다. 조금도 잘못이 없는 행동에 대해서 어쩌면 그렇게도 잘못된 해석을 내릴 수 있을까! 폭군의 통치하에 사는 사람들의 불안함이 얼마나 클 것인가! 오늘날 우리는 공정한 헌법의 통치 하에 있다는 것을 참으로 다행하게 생각해야 한다.4. 이러한 고소에 대해 아히멜렉은 죄가 없다고 주장하였다(14,15절). 그는 그러한 행위 자체는 시인하였다. 그러나 그 일은 결코 반역적으로, 그리고 적의를 가지고 왕을 해하기 위해 한 행동은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아히멜렉은 사울과 다윗의 사이가 불화하게 된 것을 전혀 몰랐으며, 따라서 다윗을 전과 똑같이 대해 주었다고 말했다. 사실 다윗이 아히멜렉을 속였건마는 그는 다윗이 그를 속였으며, 거짓말을 하였노라는 말은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는 어찌하든지 다윗이 생명을 노리고자 하는 사울 앞에서는, 더욱 더 자신의 입장을 변명하기 위한 영의로운 자의 약함을 들어내 줄 수는 없었다. 반면에 다윗의 명성을 추겨 세웠으며, 그가 사울의 충실한 신하였음을 말했고, 왕이 그를 자기의 사위로 삼을 정도로 그를 높인 사실도 말해 주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그는 왕의 모신도 되고 왕실에서 존귀한 자니이다. 그러므로 그를 죄인으로 보지 않고 존경을 표시한 것은 왕실에 대해 경의를 표시한 훌륭한 행동으로 누구나 볼 것입니다."
아히멜렉은 다윗이 사울의 보냄을 받아 왔을 때마다 "그를 위하여 하나님께 물었던 것" 과 같이 이번에도 그를 위하여 물은 것은 조금도 잘못이 없는 일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는 왕을 해치고자 하는 음모에 전혀 가담하지 않았노라고 역설하였다. "아무 것도 나에게 돌리지 마소서. 나는 다만 나의 일에 충실하였을 따름이며, 나라의 일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일입니다."
아히멜렉은 왕의 자비를 호소하였다. "왕은 종에게 아무 것도 돌리지 마옵소서" 라고 호소하였다. 그리고 자기의 무관함을 분명히 밝혔다. "왕의 종은 이 모든 일이 대소 간에 아는 것이 없나이다" 라고 하였다. 인간이 이 이상 더 확실한 증거를 댈 수 있겠는가? 그가 만일 정직한 이스라엘 사람들을 배심원으로 세워 판결을 받았다면 틀림없이 무죄 방면을 받았을 것이다. 누가 그에게서 잘못을 찾아낼 수 있단 말인가?
5. 그러나 사울은 그에게 해로운 판결을 내렸다(16절). "아히멜렉이여, 너는 반역자로서 반드시 죽을 것이요, 네 아비의 온 집도 그러하리라" 고 하였다. 이 이상 더 불의한 재판이 또 어디에 있을 것인가? "내가 해 아래서 보건대 재판하는 곳에 악이 있다" (전 3:16).(1) 이 판결은 사울 자신이, 다만 혼자서 자기 마음대로 판결하였기 때문에 공평치 못한 판결이다. 그는 어떤 사사나 선지자에게 물어 보지도 않았으며, 자기의 참모들에게 의논하지도 않았다.
(2) 정당한 항변에 대해서는 정당한 이유가 제시되지 못하거나, 이를 반증할 만한 확실한 증거를 제시하지 않고는 도저히 거절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러한 처사는 오직 독단적인 처사일 따름이다.
(3) 그 판결 선고는 사사로 하여금 자세히 검토하며, 사사가 직접 조사를 해 볼 수 있는 시간적 여유를 가질 수가 없을 정도로 성급히 조급하게 선고되었다.
(4) 그 선고는 도엑에 의해 무고를 당한 장본인인 아히멜렉에게만 선고된 것이 아니라, 아무 관련이 없는 "그의 아비의 온 집" 이 함께 선고를 받았다. 아버지의 잘못 때문에 자녀들이 죽어야 한단 말인가?
(5) 그 선언은 정당한 법적인 근거도 없이 자기이 감정에서 나온 것이며, 자기의 야만적인 분노를 만족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6. 사울은 그를 즉시 사형집행 하라는 명령을 (다만 구두로만) 내렸다.
(1) 사울은 자기의 시위자에게 사형을 집행하라고 명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이를 거절하였다(17절). 이 일로 인하여 사울은 제사장들을 더욱 욕되게 하고자 하였다. 그들은 군인들의 손에 의해 죽임을 당할 수는 없었다. 만일 사울의 시위자들이 그를 죽였다면 그들은 그들의 손을 제사장들의 피로 물들여야만 했다.
[1] "여호와의 제사장을 죽이라" 고 하는 왕의 명령만큼 잔인한 명령은 또 없다. 그것은 비교할 수 없으리만큼 무자비한 명령이었다. 사울은 제사장들의 성스러운 직무와 하나님과 그들과의 관계를 잊어 버렸던 것 같다. 그리고 또 그렇게 말함으로 하나님의 제사장 전체에 대해 자기의 불쾌감을 나타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 것 같다. 한편 그의 시위자들에게 그들의 목을 치라고 명령할 때 그들을 일컬어 "여호와의 제사장들" 이라고 한 것은 바로 그렇게 때문에 사울이 그들을 싫어 한다는것을 나타낸 것으로 보인다.
하나님께서 사울을 버리시고, 그의 뒤를 이을 다른 사람을 기름 부으셨다. 그래서 사울은 하나님에게는 손을 댈 수 없기 때문에 그의 제사장들에게 이를 복수하고자 그 기회를 이용한 것으로 보인다. 악령이 인간을 사로잡으면 어떤 악한 일이라도 시키지 못할 것인가! 사울은 그들을 죽이라고 명령하면서 그들이 다윗의 도망친 사실을 알고도 자기에게 고하지 않았다고 엉터리 없는 주장을 되풀이 하셨다. 악독과 살륙은 언제나 거짓을 동반하기 마련이다.
[2] 시위자들이 왕의 명령을 거역한 것은 참으로 명예로운 행동이었다. 시위자들은 그들의 주인보다 더 훌륭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으며 은혜에 대해서 알고 있었다. 만일 그들이 왕의 명령을 거역하고 제사장들을 죽이지 않으면 그들의 지위가 박탈 당하리 라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그러나 어떤 결과가 오든지, 제사장의 직분을 존경하며 또 그들이 무죄하다는 것을 확신하면서는 여호와의 제사장들을 죽일 수는 없었다.
(2) 사울은(고발자인) 도엑에게 사형을 집행하라고 명하였고, 도엑은 그 명령을 실행했다. 어떤 사람은 시위자들의 거부가 사울의 양심을 일깨워 주었으며, 그래서 시위자들에게 그 일을 계속 강요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사울의 마음은 맹목적이었으며, 매우 강퍅해졌기 때문에 그들이 하지 못한다면 "증인으로 하여금 먼저 손을 대게 하자" (신 17:7)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피에 굶주린 폭군들은 그 자신처럼 사나운 도구들을 찾아 내어 그들의 악독함을 실행시킨다.
도엑은 제사장들을 죽이라는 명령을 받자마자,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그의 손으로 그 날에 제사장 팔십 오인을 죽였다. 그들은 "세마포를 입은" 제사장들로서 한창 일할 나이인 25세에서 50세까지의 제사장들 이었다. 그들은 습관에 따라 사울 앞에 나왔던 사람들 이었다.
이만하면 아무리 피에 굶주렸던 자라도 충분했을 것이다(라고 어떤 사람은 생각한다). 그러나 핍박자의 말 거머리는계속해서 "더, 더 달라" 고 소리 친다. 도엑은 제사장들을 죽이고 또 사울의 명령을 받아, 제사장들의 성읍인 놉에 가서, "남녀와 아이들" 과 그리고 소와 나귀들을 칼로 쳤다. 그 잔악함에 무서워 떨지 않을 수 없다. 어떻게 인간의 마음 속에 그 처럼 비정스런 마음과 비인간적인 마음이 들어갈 수 있단 말인가! 우리는 여기서 다음의 사실들을 볼 수 있다.
[1] 여호와의 신이 그에게서 떠나가자, 사울은 매우 악독한 인간이 되었다. 하나님을 노하시게 하여 하나님께서 그들의 욕심대로 하도록 내버려 두시지 않는 한 인간은 이 이상 더 악독해질 수 없다.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면서까지 아각과 그리고 아말렉 사람들의 소떼를 살려 주었던 사울이 여기서는 여호와의 제사장들을 조금도 불쌍히 여기지 않고 그들에게 속한 자들을 하나도 살아 남게 하지 않았다. 그 때의 죄 때문에 하나님은 사울을 떠났던 것이며 이러한 결과를 가져 오게 되었다.
[2] 오래 전에 엘리의 집에 내렸던 형벌에 대한 경고가 이루어졌다. 왜냐하면 아히멜렉은 엘리의 후손이었기 때문이다. 비록 사울은 그의 불의함 때문에 이런 악행을 행했지마는, 하나님은 당신의 정의 속에서 이를 시행하도록 하셨다. 하나님은 엘리에게 "그의 집을 영영히 심판하겠으며" 그것을 듣는 자마다 두 귀가 울리리라고 하셨다(3:11-13). 하나님의 말씀은 결코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
[3] 이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내리신 심판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때가 이르면 한 왕을 내려 주시고자 하셨건마는 그것을 기다리지 못하고, 다른 왕을 구했던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의로운 징벌이라고 볼 수 있다. 그 당시의 이스라엘의 종교적인 상태응 얼마나 한심스러운 것이었을까! 비록 하나님의 궤의 존재가 희미한 상태에 있었지만 그래도 다행히 하나님의 제단이 설치되어 있었기에 거기서 제사장들이 하나님을 섬길 수 있었다. 그런데 이제 제사장들과 그들의 후계자 들이 그들의 피 위에 딩굴게 되었고, 제사장의 성읍은 폐허가 되었다. 이제 찾는 자가 없어 하나님의 제단이 다시금 더 버림을 받게 되었다. 그것도 자기의 야만적인 복수심을 만족시키고자 하는 그들의 왕의 가혹한 명령에 의해 그렇게 되었다. 경건한 이스라엘 사람들은 사무엘과 그의 아들들에 의한 통치를 얼마나 그리워 했을 것인가? 아무리 그들의 지독한 원수라고 하더라도 이 보다 더 가혹한 일을 결코 행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비아달이 다윗에게 도망침(사무엘 상 22:20-23)
1. 아히멜렉의 아들 아비아달이, 제사장의 성읍을 살륙하는 가운데서 도망하였다. 아마 그의 아버지가 사울의 부름을 받아 사울에게 갔을 때, 그는 제단을 섬기기 위해 집에 남아 있었기 때문에 첫 번째의 화를 면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도엑과 그의 사냥개들이 놉에 오기 전에 그는 위험을 알고 재빨리 자기 몸을 피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는 왜 다른 곳으로 가지 않고 다윗에게로 갔을까?(20절). 다윗의 자손을 위해 고난을 당하는 자는 "그의 영혼을 미쁘신 조물주께 부탁할 찌어다" (벧전 4:19).2. 그 슬픈 소식을 듣고 다윗은 울분에 떨었다. 아비아달은 사울이 시켜서 여호와의 제사장들을 죽인 사실을 다윗에게 말했다(21절). 세례 요한이 목베임을 당했을 때 그의 제자들이 "예수께 가서 고했던 것" 과 같다(마 14:12). 재난의 소식을 듣고 다윗은 크게 한탄하였다. 더우기 자기 때문에 그런 일이 일어난 것을 더욱 안타까와 하였다. "네 아비 집의 모든 사람 죽은 것이 나의 연고로다" (22절)라고 다윗은 말했다.
의로운 사람이 자기 때문에 교회가 어떤 어려움을 당하게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될 때, 이는 참으로 괴로운 일이다. 다윗은 도엑의 사람됨을 알았기 때문에 그를 성전에서 보았을 때, 그가 이런 잘못을 범하리라는 것을 두려워하였다. "그가 반드시 사울에게 고할 줄 알았노라" 라고 말했다. 다윗은 "에돔 사람 도엑" 이라고 그를 일컬었다. 왜냐하면 그는 비록 이스라엘의 신앙을 고백하고, 이스라엘 사람의 표적을 외모로는 가지고 있으나 여전히 그의 마음 속에는 에돔 사람의 기질을 간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3. 다윗은 아비아달을 지켜 주겠노라고 약속하였다. 다윗은 자기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아비아달이 두려워 떨고 있다는 것을 알고 그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했다. 다윗은 그를 자기 몸처럼 돌봐 주겠다고 하였다. "네가 나와 함께 있으면 보전하리라" (23절)라고 다윗은 말했다. 냉정을 되찾은 다윗은 자기 자신이 안전하다는 것을 자신 있게 말하고, 그가 아비아달도 틀림없이 안전하게 보호해 줄 수 있다고 약속하였다. 하나님은 다윗의 자손에게 "그를 자기의 손 그늘에 숨겨 주시겠다" (사 49:2)고 약속하셨으며, 그와 함께 그의 사람들도 모두 안전하리라고 약속하셨다(시 91:1).다윗은 이제 한 사람의 선지자 뿐만 아니라 또 한 사람의 제사장, 그것도 대제사장을 그와 함께 있을 수 있게 하였다. 다윗은 그들의 축복이 되었고, 그들 역시 다윗에게 축복이 되었다. 그들은 모두 다윗의 성공을 위한 좋은 징조가 되었다. 그런데 사울에게도 대제사장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28:6 절에 의해서 볼 때 그렇다). 왜냐하면 우림으로 하나님의 신탁을 구했다고 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울은 엘르아살의 가문인 사독의 아버지 아히둡을 발탁한 것으로 추측된다(대상 6:8). 왜냐하면 아무리 하나님의 능력을 미워할찌언정 전혀 형식을 무시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다윗이 이 때에 시편 52편을 썼다는 것을 기억하자. 그 시편의 제목에 그 사실이 명기되어 있다. 그 시편에서 다윗은 도엑이 악독한 자이며, 간악한 자일 뿐만 아니라, 거짓된 자요 남을 속이는 자라고도 하였다. 왜냐하면 그의 말이 본질적인 면에서는 사실이기는 하나, 남을 해하고자 하거기에 거짓된 색깔을 입혔기 때문이다.
다윗은 제사장의 직분이 메마른 가지처럼 되었을 때에도 스스로는 "하나님의 집에 있는 푸른 감람나무 같다" 고 보았다(시 52:8). 이런 다급한 소란 속에서도 다윗은 언제나 하나님과 사귐을 가질 수 있는 마음의 여유와 시간적 여유를 가질 수 있었으며, 거기서 크신 위로를 받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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