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에 대한 골리앗의 도전(사무엘 상 17:1-11)
얼마 전에 블레셋의 이스라엘에 의해 늘씬하게 두들겨 맞았으며, 그때 만일 사울의 성급한 처사가 없었다면 그들은 재기 불능의 상태에까지 떨어져 나갔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 그들이 또다시 머리를 쳐들고 이스라엘에 대해 도전해 오는 것을 볼 수 있다.
Ⅰ. 블레셋은 그들의 군대를 이끌고 와서 이스라엘에 대해 싸움을 걸었다(1절). 그들은 이스라엘 땅을 습격하여 이미 그 영토의 일부를 차지한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그들은 "유다에 속한" 한 곳에 진을 쳤기 때문이다. 만일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들의 하나님께 충실한 생활을 하였다면 블레셋 군대들은 감히 이스라엘의 땅을 밟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아마 블레셋 사람들은 사무엘과 사울이 싸우고, 사무엘이 사울을 버리고 다시는 그를 도와주거나 충고를 해 주지 않게 되었으며, 또 사울은 점점 더 정신착란을 일으켜서 일을 할 수 없게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소식을 듣자 지난 번에 당했던 패배를 앙갚음할 좋은 기회가 되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이처럼 교회의 원수들은 교회를 공격할 만한 좋은 기회가 없을 것인가를 항상 살핀다. 그리고 교회의 보호자들이 하나님의 성령과 선지자들을 노하게 하여 그들을 떠나게 하는 것이 그들에게 있어서 가장 좋은 기회가 된다. 사울은 그의 군사들을 소집하고, 블레셋과 대면하여 진을 쳤다(2,3절). 여기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에 주목할 수 있다.
1. 지금은 악신이 사울을 떠나 있었다(16:23). 다윗의 수금이 그의 병을 어느 정도 낫게 했고, 그리고 아마 전쟁의 경고와 또 전쟁의 발발이 그의 병을 중단시켜 준 것인지 모른다. 일은 정신착란증을 위한 좋은 치료제이다. 만일 우리의 마음에 집착해서 할 만한 일을 주지 않는다면 그 마음은 스스로를 잡아먹는 위험한 처지에 빠질 것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자비를 베푸사 그 심판을 잠시 늦추어 주셨다. 왜냐하면 그들의 임금이 혼란한 지경에 있을 때에 심판을 내리신다면 이스라엘 전체에 혼란이 얼마나 더 극심할 것을 아시기 때문이다.2. 지금 다윗은 궁전을 떠나서 베들레헴에 돌아가 있었다(15절). 다윗은 기름부음도 받았고 또 사울도 그를 자기의 병기를 드는 자로 삼았던 것인 만큼 다윗이 사울의 가신이 되어 그의 궁중에 그대로 남고 싶으면 얼마든지 남아 있을 수 있었지마는, 사울의 병을 위해서는 더 이상 그가 남아 있을 필요가 없게 되자, 다윗은 아버지의 양을 치기 위해 베들레헴으로 돌아갔다. 그처럼 출세한 젊은이가 부모에게 관심을 가지고 순종한다는 것은 매우 드문 일이다. 그는 출세를 시작한 마당에 다시 해야 하는 것도 좋다는 것을 알고 궁전의 화려한 환락을 버리고 목장 생활로 되돌아갔다. 그는 참으로 영광과 존경을 받을 만한 사람이며 또 동시에 그런 것들에 무관심한 사람이었다.
Ⅱ. 블레셋은 그들의 용사인 골리앗을 내세워 이스라엘에 대해 싸움을 걸었다. 블레셋은 골리앗을 내세우면 상실하였던 그들의 평판과 통치권을 회복할 수 있으리라고 바라고 그를 크게 자랑스럽게 생각하였다. 이스라엘 군사가 숫자나 그 힘에 있어서 블레셋 군사들보다 우세하였던 것 같다. 그래서 블레셋 사람들은 곤란한 처지에 있기 때문에 싸움을 잠시 끌면서, 그런 용사를 내세워 단기 접전을 시켜 싸움을 승리로 이끌 속셈을 차렸을 것이다. 이제 이 용사에 대하여 자세히 살펴보자.
1. 그의 거대한 몸집에 대하여 살펴보자. 그는 여호수아의 시대에 가드에 자리잡은 아낙 사람들의 자손이었으며(수 11:22), 골리앗은 그들 가운데서도 가장 큰 사람이었을 것이다. 그의 키는 여섯규빗 한 뼘이었다(4절). 학문에 조예가 깊은 콤벌란드(Cumberland) 주교는 성서에 나오는 한 큐빗은 21인치(반 야드와 3인치) 정도가 되며, 한 뼘은 밤 큐빗이 된다고 하였다. 따라서 이를 토대로 해서 계산하면 골리앗은 그 키가 4야드 8인치, 11피트 4인치가 된다. 만일 그가 그의 거대한 몸집에 어울리는 힘과 정신력만 가지고 있었다면 그는 굉장한 사람이었을 것이다.2. 그의 무장에 대해 알아보자. 자연적인 그의 생김새와 마찬가지로 그 꾸밈새도 굉장히 무서울 정도였다. 그는 방비를 위한 무장을 썩 잘 갖추고 있었다(5,6절). "머리에는 놋투구를 썼고" 몸에는 물고기 비늘과 같은 놋쇠 조각을 붙인 갑옷을 입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발은 보통 사람들의 손이 잘 미치는 곳에 있었기 때문에 놋쇠 구두를 신고 놋 경갑을 치고 있었다. 그의 갑옷의 무게는 5,000세겔이라고 하였다. 보통 한 세겔은 반 온스이다. 그러므로 그 옷의 무게만 해도 보통 사람은 입고 다닐 수 없으리만큼 무거운 것이며, 거기에다 다른 부분들도 그만큼 따라서 무거울 것이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그것이 "무게" 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옷이5,000세겔의 "값" 이 나간다고 번역하여야 한다고 말한다.
여기서는 단지 그의 창에 대해서만 언급하고 있는데(7절), 그의 공격용 무기 역시 보통과는 다르다. 그것은 마치 배틀채와 같다고 하였다. 보통사람은 간신히 들 수 있는 것을 그는 마음대로 조작하였다. 그의 모든 장비들 가운데서 그래도 제일 가벼운 방패는 다만 위엄을 나타내기 위한 것으로서, 그의 호위병이 그의 앞에서 들고 다녔다. 온 몸을 놋으로 감싼 그에게는 방패가 그다지 필요없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3. 그의 도전하는 언사에 대해 알아보자. 블레셋 사람들은 전쟁을 유리하게 이끌기 위해 골리앗을 대장으로 뽑아서 내세웠기 때문에 그는 이스라엘의 군사들을 무시하고 마구 도전적인 언사를 퍼부었다(8-10절). 그는 두 진영 사이에 있는 골짜기에 나와 섰다. 그의 팔처럼 그의 목소리로 우렁찼기 때문에 모두가 그의 소리를 들을 수 있었을 것이다. "나와 싸울 자, 한 사람을 내게로 보내라" 고 그는 소리쳤다. 그는 주위에 있는 어느 누구보다도 키가 크고 힘이 강하기 때문에 매우 우쭐하였다. 그의 심장은 교만의 고기 덩어리에 불과하였다(고 홀 주교는말했다). 그는 이스라엘 중에 자기와 같은 거인이 없다고 무시하며 자기와 짝할 만한 자가 있으면 내세워 보라고 큰 소리쳤다.(1) 골리앗은 이스라엘을 향해 많은 군사를 이끌고 온 것은 어리석은 것이라고 꾸짖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너희가 어찌하여 나와서 항오를 벌였느냐? 너희가 어떻게 우리 강한 블레셋을 대항할 수 있단 말인가?" 그는 또 이렇게 말했다고도 볼 수 있다. "결판이 단번에 날터인데, 무엇때문에 두 군대가 서로 결전을 벌여야 하겠는가? 누구든 한 사람만 목숨을 버리고 다른 사람들을 살려주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
(2) 그는 그 싸움을 그가 제안하는 대로 두 사람의 결투로 결판을 내자고 하였다. "만일 너희의 대장이 나를 죽이면 우리는 너희의 종이 되겠고, 내가 이기면 너희는 우리의 종이 되리라." 이것은 한갖 허세에 불과한 것이었다고 패트릭(Patrick) 주교는 말했다. 왜냐하면 어떤 나라도 그 나라의 운명을 감히 한 사람에게 걸 나라가 없을 것이며, 이는 조금도 이치에 맞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또 골리앗의 명백한 약속에도 불구하고 골리앗이 죽임을 당했을 때, 블레셋이 그의 말을 따르지 않았고, 그들이 이스라엘의 종이 되지 않은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골리앗이 이스라엘에 대해 싸움을 걸면서, 대장의 한 사람인 그가 "나는 블레셋 사람이 아니며, 너희는 사울의 심복이 아니냐" 고 한것은 자신의 겸양을 표시한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그는 그는 이스라엘 군사들을 한갖 종으로 밖에 여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갈데아판 성서에 의하면 그가 바로 홉니와 비느하스를 죽인 사람이며, 하나님의 궤를 노획한 사람이라고 자랑하였다. 그러나 블레셋 사람은 그의 업적에 상당할 만한 직책을 주지 않았다는 것이다. 한편 사울은 그의 업적에 의해 왕이 되었다. 그러므로 그는 사울에 대해 "그가 와서 나의 도전을 받게 하라" 는 것이라 볼 수도 있다고 한다.
4. 이스라엘을 휩쓴 두려움에 대해 알아보자. "사울과 이스라엘이 이 말을 듣고 놀라 크게 두려워하였다" (11절). 만일 사울의 용기가 그의 기를 꺾어 놓는 것을 보았다면 백성들은 그처럼 겁에 질리지 않았을 것이다. 지도자가 겁장이이면서 그 추종자들 만이 담대해지기를 기대할 수는 없다. 전에 하나님의 신이 사울에게 임했을 때는(11:6), 그가 암몬 사람 나하스의 도전에 대해 누구보다도 용감하게 대항하였던 것을 보았다. 그런데 지금은 "하나님의 신이 그를 떠나자", 덩치가 크고 큰 소리치는 한 블레셋 사람이 능히 그를 새파랗게 질리게 만들어 버렸다.그런데 지금 요나단은 어디 있을까? 지난 번 마지막 블레셋과의 싸움에서 그 온 군대를 상대로 용감하게 싸웠었는데, 왜 이 도전을 받아들이지 않았는가? 아마 틀림없이 지난 번 경우와 같은 하나님의 감동을 받지 못했을 것이다. 결국 용감한 사람도, 훌륭한 사람도 모두 하나님께서 만들어 주신다. 골리앗과 맞싸울 영광은 다윗을 위해 마련된 것이기에 요나단은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었다. 위대한 일을 위해서는 하나님의 성령의 바람이 원하시는 때에 원하시는 곳으로 불어주신다. 이때 경건한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들의 왕이 사무엘과 불화하여 그 관계를 끊은 것을 애타게 생각했을 것이다.
이스라엘 진영에 온 다윗(사무엘 상 17:12-30)
사십일 동안 두 군사들은 유리한 자리에 자리잡고 상대방을 바라 보기만 하고 서로 나와서 싸우지는 않았다. 그들은 서로 담판을 하며 유리한 강화조약을 매고자 하였던가 아니면 보충병들이 오기를 기다렸는지 모른다. 그러면서도 지엽적인 소전투는 자주 있었을 것이다. 그러는 동안 하루에 두 번, 아침과 저녁에 이스라엘을 모욕하는 그 용사가 나타나 계속해서 이스라엘에 대한 도전을 반복하였다. 이스라엘이 이에 대해 아무런 응답이 없으므로 그의 마음은 점점 더 교만으로 가득해지고, 한편 이스라엘 백성들의 의기는 더욱 소침해졌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의 멸망의 때가 점차 무르익어 가게 이끄시었고, 이스라엘의 구원을 보다 인상적으로 하시기 위해 일을 꾸미시고 계셨다. 그 동안 다윗은 그의 아버지의 양들을 치고 있었다. 그러나 40일이 지날 무렵에 하나님은 다윗으로 하여금 다른 사람들이 감히 하려고 하지 못했던 모험을 시도하고 그리하여 그 싸움에 이겨 승리의 월계관을 쓰게 하시고자 그를 전쟁터로 이끌어 가셨다. 우리는 여기서 다음과 같은 것들을 볼 수 있다.
Ⅰ. 다윗의 가족들의 현재의 형편을 볼 수 있다. 그의 아버지는 나이가 많았다(12절). 그는 "당시 사람중에 나이 많아 늙은 자로" 취급되었다. 그리하여 공적인 봉사에서 면제되어 전쟁에 나가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아들들이 전쟁에 나갔다. 그는 그의 나이 때문에 존경을 받았다. 그의 백발은 그에게 영광의 면류관이 되었다. 다윗의 큰 형들 셋은 궁전에서의 다윗의 지위를 시기하여, 그들의 아버지에게 다윗을 집으로 불러들여 그 명성을 떨어뜨리게 하고 자기들은 전쟁터에 나가게 하여 명성을 얻고자 하였다(13,14절). 하지만 다윗은 왕을 위해서 행한 자기의 일을 자랑하지도 않았으며, 그 이상의 출세에 대해서도 어떤 야망을 가지지 않았다. 그는 화려한 궁전의 생활을 떠나 단지 자기 아버지의 집에서 조용히 지내기 위해선 온 것이 아니라(34절에서 증명되었듯이)" 아버지의 양들을 지켜 주는" 수고를 위해서 돌아왔다. 그의 겸손은 나라의 대신이라는 귀한 명예를 받은 뒤의 겸손이기에 더욱 칭찬 받을 만하다. 그는 그처럼 겸손했기에 정복자가 될 수 있었다. "명예 앞에는 겸손이 있다." 그는 군대에서 할 수 있는 일보다 훨씬 더 훌륭한 일을 할 준비를 갖추기 위해 더 많은 시간을 내어 명상하고 기도하며 그리고 신앙 생활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Ⅱ. 그의 아버지가 전쟁터에 나가 있는 형들을 찾아가서 만나고 오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는 호기심을 만족시키며, 무엇인가 경험을 얻고자 하여 그곳으로 가겠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다만 그의 아버지가 별로 쓸모없고, 천한 심부름으로 그를 보냈을 따름이다. 그런 일이라면 능히 사환을 시킬 수도 있었다. 다윗은 형들을 위해서 떡 열 덩어리와 볶은 곡식을(17절), 그리고 형들의 천부장에게 선물로 줄 치스 열 덩이를 가지고 형들에게 가야만 했다(18절). 다윗은 그의 가족을 크게 빛낼 사람이 될 터인데 아직까지는 그들의 심부름꾼에 불과하였다. 그는 짐을 싣고 갈 나귀가 없었다. 그래서 그것들을 등에 짊어지고, 싸움터로 달려갔다. 이새는 그가 기름부음을 받은 것을 숨기기 위해 부지런히 그를 그처럼 천한 일을 시켰다고 볼 수 있다. 이새는 다윗이 분명히 다음 왕으로 등극할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의 의혹과 시기의 눈에서 그를 숨겨두고자 하였을 것이다.
다윗은 형들이 잘 있는지, 전쟁이 너무 오래 끌기 때문에 식량보급이 형편이 없어서 배를 곯지나 않는지 알아 보아야 했다. 그래서 필요하다면 아버지가 그들에게 더 많은 것들을 보내고자 하였다. 또 다윗은 형들의 증표를 받아 가야만 했다. 말하자면 형들이 어떤 것을 저당잡힌 것이 있으면 그것을 보상해 주어야만 했다. 어떤 사람은 이 말을 "동료들의 형편도 살피고 오라" 는 말로 본다. 그들과 함께 지내고 있는 사람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보라는 것이다. 다윗도 요셉과 같이 전에 그 형들에 대한 좋지 못한 보고를 아버지께 하였던 일이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이번에도 그들의 태도가 어떤 것인지 알아 보고자 다윗을 보냈던 것으로 보인다.
자식들이 그들을 떠나 멀리 가 있으며, 특히 유혹이 많은 곳에 가 있을 때의 그들의 경건한 부모들이 자식들에 대해 걱정하고 근심하고 있는 모습을 보라. 그들은 그들의 자식들이 어떻게 몸가짐을 가지고 있으며, 또 어떤 친구들과 사귀고 있는가를 늘 근심하고 있다. 자녀들은 이 사실을 언제나 기억하며, 부모의 뜻에 맞도록 처신하여야 한다. 그리고 그들은 부모의 눈을 떠나 있을 때에도 언제나 하나님의 눈 아래 있다는 것을 기억하여야 한다.
Ⅲ. 다윗은 아버지의 명령을 충실히 수행하였다. 부지런하고 조심성이 많은 다윗은 아침에 일찍 일어났다(20절). 그리고 양들을 지키는 자에게 맡기고서야 길을 떠났다. 그 만큼 그는 적은 일에 충성한 사람이었다. 그러므로 그는 많은 일도 충분히 맡아서 할 만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는 다른 사람들에게 명령하는 것을 배우기 전에 자기 스스로가 복종하는 법을 배웠다. 하나님은 가장 알맞은 때에 그를 싸움터로 이끌어 오셨다. 그 때가 바로 양쪽 군사가 서로 항오를 벌이고 서로 대하고 있었던 때였다. 그리고 지난 40일 중의 어떤 때보다도 금방이라도 싸움이 벌어질 것 같은 때였다(21절). 양쪽이 모두 싸울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이새는 그의 아들을 그처럼 위험한 시기에 전쟁터에 내보내는 일에 대해 미처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러나 지혜로우신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이익을 위하여 또 그의 마음에 드는 자의 출세를 위해서 그 시간과 그 환경을 마련해 놓으셨다.
1. 다윗은 매우 활발하고 생기가 넘쳐 흘렀다(22절). 그는 조심스럽게 짐을 가지고 와서 그것들을 짐 지키는 자에게 맡겼다. 그리고 무거운 짐을 가지고 먼 길을 왔음에도 불구하고,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보기 위해 "군대로 달려갔으며," 형들에게 문안도 하였다. "그처럼 자기 일에 부지런한 사람은" 반드시 출세할 것이며, "왕 앞에 반드시 서게 될 것이다."2. 블레셋 사람은 대단히 담대하였다(23절). 양쪽 군사들은 서로 항오를 벌이고 대치하고 있었다. 그때 그 블레셋 사람이 대열앞에 나와서 다시금 싸움을 돋우었다. 아마 그는 자기의 영광과 승리를 열심히 추구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헛된 생각이었다. 사실 그때 그는 자기의 멸망을 재촉하고 있었다.
3. 이스라엘 사람들은 매우 겁에 질렸고, 의기가 소침해 있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40일 간이나 함께 있으면서, 오만한 몸집과 위협적인 언사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빈 말 뿐이었다는 것을 알았으면, 골리앗의 엄포를 무섭지 않게 생각했을 수도 있었겠는데, 그가 가까이 오자 "심히 두려워하여 그 앞에서 도망하였다" (24절). 그들의 반석이 천만 뜻밖에도 흔들려서 "그들을 팔고, 그들을 내어주지 않는다면 "블레셋 사람 하나가 천 명의 이스라엘 사람을 쫓을 수 없으며, 만 명의 이스라엘 사람을 도망가게 할 수는 없었다(신 32:30).
4. 사울은 골리앗을 치는 사람에게 줄 많은 상급을 걸었다. 이스라엘 사람들 중에서 가장 키가 컸던 사울은 하나님과 가까이만 지내고 있었다면, 골리앗이 내건 도전에 마음놓고 응했을 것이다. 그러나 여호와의 신이 그를 떠났기 때문에 사울은 감히 도전에 응할 수도 없었고, 요나단을 나서게 할 수도 없었다. 그대신 누구든지 그에게 도전하는 자에게는 그가 줄 수 있는 최고의 출세를 시켜 주겠다고 하였다(25절). 그가 어떤 사람이든지 그 위험한 모험에 성공한다면 원하는 만큼의 재품과 명예를 주고, 또 왕의 딸과 결혼하게 될 것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또 그가 성공하든지 못하든지 "아비의 집이" 모든 세금과 왕가에 대한 부담으로부터 "자유하게 할 것이며, 귀한 지위와 귀족의 호칭을 받게 될 것이라" 고 말한 것으로 보인다.
5. 다윗은 골리앗의 시건방진 도전에 대해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 큰 관심을 표명하였다. 그는 이미 알고 있으면서도, 이 블레셋 사람을 죽이는 사람에게 어떤 보상이 수여되리라고 약속되었는가고 물었다. 그것은 다윗이 그 보상과 명예를 바라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는 여기 이스라엘과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가해진 치욕에 대해 그 자신이 얼마나 분격하고 있는지를 사울이 알 수 있도록 그에게 보고되어 지기를 바라기 때문이었다.
그는 궁전에서의 일 때문에 사울과 이미 잘 아는 사이였기 때문에 그 자신이 직접 사울 왕에게 가서 그 자신이 하겠노라고 나설 수도 있었다. 그러나 매사에 겸손하고 수줍어하기를 잘하는 다윗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왕 앞에서 스스로 높은 체하지 말며, 대인의 자리에 서지 말라" (잠 25:6)는 잠언은 그의 아들 솔로몬의 잠언이기 전에 다윗 자신의 생활 신조였다. 그러나 다윗의 열심은 이 위대한 일에 그 자신이 종사할 수 있는 방법을 생각나게 하여 주었다. 다윗은 두 가지 면에서 의문을 느꼈다고 보여진다.
(1) 그 도전자는 할례받지 않은, 하나님을 모르는, 하나님의 언약을 받지 못한 백성이었다.
(2) 한편 그의 도전을 받은 백성들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군대이며, 하나님께 몸을 바쳤고, 하나님을 위해 하나님에 의해 고용된 군사들이다. 따라서 그들에게 준 모욕은 살아 계신 하나님께 대한 모욕이기에 다윗은 이를 참을 수 없었다. 따라서 어떤 사람이 그에게 블레셋 사람을 죽인 자에게 줄 상급에 대해 대답을 해 주었건마는(27절), 이를 또다시 다른 사람에게 물어 보았다(30절). 이것은 사울의 귀까지 그의 말이 들려지기를 바랐기 때문이었다.
6. 그의 장형 엘리압은 다윗을 꾸짖고 그를 낙심시키는 말을 했다. 그는 다윗이 건방지다고 생각하고 그에게 매우 화를 냈으며 그에게 마구 욕을 퍼부었다(28절).
(1) 이것은 엘리압의 시기 때문에 일어났다. 엘리압은 제일 큰 형이었고 다윗은 제일 막내였다(대개 형들이 동생에 대해 그렇듯이) 엘리압은 언제나 다윗을 무시하고 어떤 일에나 그를 꾸짖기를 잘했던 것 같다. 그러나 아랫 사람들 앞에서 자기를 높이고자 하는 자들은 그 자신의 생활은 형편 없으면서 아랫 사람들을 깎아 내려야 자기가 올라가는 줄 안다. 이제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길 때가 올 것이다. 그런데 지금 엘리압은 자기도 감히 할 수 없는 말, 즉 그 블레셋 사람에 대해 대담한 말을 자기의 어린 동생이 하고 있기 때문에 더욱 화를 냈다. 그는 다윗이 이미 궁전에서 높은 명예를 얻은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자기 자신이 유명해질 수 있는 방법으로 생각했던 방법이었는데), 이 전쟁터에서조차 또다시 다윗이 명예를 올린다면, 큰 형으로서의 자기 체면이 말이 아닌 것이 되리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므로 (그런 것이 바로 질투의 본성인데) 엘리압은 다윗이 골리앗을 이기기보다는 골리앗이 이스라엘에 대해 이기기를 바랐는지 모른다. "진노는 잔악하고 노여움도 포악한 것이지만, 질투 앞에서는 견디어 낼 사람이 없다." 더우기 형제의 질투는 가장 악랄한 것이다. 야곱과 요셉이 그리고 다윗이 그것을 체험했다(잠 18:19 참조).
엘리압은 아주 거친 말씨로 다윗을 욕했다. 단지 공평치 못하고 친절치 못한 말이었을 뿐만 아니라, 이 경우에는 은혜조차 잊어버린 말이었다. 다윗은 요셉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아버지의 심부름으로 형들을 위해서 그들을 찾아왔다. 엘리압은 단지 다윗을 슬프게 하고 그래서 용기를 잃게 하며 그리고 다윗의 마음 속에서 타오르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고상한 불을 꺼버리기 위해서만 그런 말을 한 것이 아니라, 다윗은 게으른 아이이기 때문에 주목할 만한 가치조차 없는 애라고 사람들에게 말하고자 했다. 엘리압은 사람들에게 다윗은 한갖 목동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하고자 했으며, 또 은근히 그가 충실치 못한 목동이라는 것을 나타내고자 했다. 다윗은 그의 책임을 잘 맡겨 놓고 왔건마는(20절), 엘리압은 "들에 있는 양들은 뉘게 맡겼느냐" 고 욕하며 물었다.
다윗이 싸움터에 온 것은 아버지의 명령을 순종한 것이며, 형들에게 친절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엘리압도 이것을 알았다. 하건마는 비난만을 하였다. 그래서 이렇게 말했다. "네가 온 것은 어떤 일 때문이 아니라, 네 호기심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전쟁을 구경하기 위한 것이다." 그리고 엘리압은 다윗의 "교만과 마음의 완악함" 을 아노라고 하였다. 그는 마치 다윗의 마음 속에라도 들어갔던 자처럼 말했다.
다윗은 그의 겸손함과 정직함을 하나님께 호소하며(시 17:3; 131:1) 이번에는 그 두 가지에 대해 모두 확실한 증거를 내세울 수 있었다. 그러나 그의 친형 앞에서는 이런 심한 말을 피할 수가 없었다. 교만하고 시기심이 많은 사람들의 어리석음과 불합리함과 그리고 그 악독함 을 보라. 그 질투는 끝없는 것이며, 그 비난은 정당한 것이 못되고, 그 표현은 부당하며, 그 악담은 지독하고 그리고 그 말씨는 매우 못마땅하다. 하나님은 그의 은혜로써, 우리는 그런 심령이 되지 않도록 지켜 주신다.
(2) 그리고 또 엘리압의 그런 말은 다윗의 유순함과 참을성과 그리고 꾸준함을 시험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것은 매우 간단한 시험이었다. 그리고 다윗은 그것을 잘 통과하였다.
[1] 다윗은 매우 분통이 터질 만한 말을 놀라우리만큼 침착한 마음으로 참아냈다(29절).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무엇을 하였나이까? 내가 욕을 먹을 만한 잘못을 저지른 것이 어떤 것입니까? 아버지가 보내서 왔는데 전쟁터에 올 만한 이유가 없으리이까? 골리앗의 도전으로 이스라엘의 명예가 이처럼 손상을 받았는데, 내가 분해할 만한 이유가 없으리이까?" 다윗은 정당한 이유가 있었다. 또 그것을 알고 있기도 했다. 그러므로 형을 비난하지 않고 부드러운 대답으로 형의 노여움을 누구러뜨렸다. 어떤 면에서는 다윗이 이처럼 자기의 감정을 정복했다는 것이 골리앗을 정복한 것보다 더 훌륭하다. "자기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용사보다 낫다." 블레셋이 몰려온 그런 때에 다윗은 형과 다투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교회의 원수들의 위협이 크면 클수록 교회는 더욱 참아야 한다.
[2] 다윗은 확고부동한 결심을 가지고 계속 용기를 잃지 않았다. 그는 형들의 그릇된 생각 때문에 그 블레셋 사람과 맞서려고 하였던 생각을 포기하지 않았다. 위대한 공적 사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간혹 협조를 하여 주리라고 기대했던 사람들로부터 오히려 방해를 받고 반대를 받았다고 하여도 별로 이상히 여길 필요가 없다. 아무리 원수들의 위협과 그리고 또 친구들의 멸시와 의심을 정면으로 받는다고 하여도 다만 묵묵히 자기가 하고자 하였던 일을 계속하여야 한다.
사울의 허락받은 다윗(사무엘 상 17:31-39)
드디어 다윗은 사울의 부름을 받게 되었고(31절), 용감하게 그 블레셋 사람과 싸우겠노라고 말하고 나섰다(32절). "그를 인하여 사람이 낙심하지 말 것이라" 고 다윗은 말했다. 다윗이 만일 "당신이 낙심하지 말 것이라" 고 말했다면 왕의 용기에 대해 매우 체면을 손상시키는 말이 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일반적으로 말해서 "사람이 낙심하지 말 것이라" 고 말했다. 그날 아침까지도 양을 치던 어린 목동이 이스라엘의 어떤 용사보다도 용기가 있었으며, 그들에게 용기를 넣어 줄 수 있었다. 이처럼 하나님은 때로 세상의 약하고 미련한 것을 통해서 그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좋은 소식을 전하시며 또 위대한 일을 행하신다. 다윗은 다만 사울의 허락을 받아, 나가서 블레셋 사람과 싸우기를 원했다. 그는 사울이 제안한 보상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가 바라는 것은 그런 보상이 아니라, 하나님과 그의 나라를 위해 봉사할 수 있는 명예였기 때문이었다. 그는 또 사울의 관대함을 구한 것 같지도 않다. 다윗은 다음의 두 가지를 사울과 밝히기를 원했다.
Ⅰ. 다윗은 자기가 하고자 하는 일에 대한 사울의 동의를 얻고자 하였다. 사울은 이렇게 말했다. "오! 네가 참 훌륭한 생각을 했구나. 하지만 너는 그 블레셋 사람과 싸울 만한 상대가 못되겠다. 그와 맞싸운다는 것은 목숨을 버리는 것과 조금도 다름이 없으니, 보다 더 유용한 때를 위해 잠시 보관해 두는 것이 좋겠다. 너는 경솔하고 아직 지각이 덜 낫고, 그리고 무기를 다루는 데도 익숙하지 못한 소년이 아니냐? 그는 어려서부터 싸움을 익혀온(33절) 어른이요 군인인데, 네가 어떻게 감히 그런 사람을 이기겠다고 하느냐?" 다윗은 그의 형이 가졌던 노여운 감정에 대해 부드러운 말로 대답했던 경우와 같이 사울에게도 믿음을 가지고 그의 두려움에 대답하였다. 그리고 사울을 만족시켜 줄 수 있도록 그가 블레셋 사람을 능히 정복할 수 있는 "희망적인 근거" 를 말해 주었다.
사울은 하나님의 말씀을 잘 알지 못했으며 이를 중히 여기지도 않았다. 따라서 다윗은 사울을 설득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그의 마음 속에는 간직하면서도 이 점에서 사울을 설득하기 시작하지는 않았다. 다윗은 그의 경험에서부터 시작하엿다. 비록 그가 나이가 젊고 전쟁에 나가 본 일도 없지만, 지금까지 골리앗을 죽이는 일과 같은 일은 몇 번 경험했다는 데서부터 시작하였다. 그는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그의 새끼 양들을 훔쳐가는 사자나 곰을 굴복시킬 수 있었다고 하였다(34-36절). 그리고 이로 미루어 보아 이 할례받지 못한 블레셋 사람은 한갖 굶주린 그런 짐승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고 말했고, 자기는 그를 쉽사리 이길 수 있다고 말했다. 이로써 다윗은 사울에게 그가 결코 이제 나가고자 하는 그런 치열한 싸움 같은 것을 경험해 보지 못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하여 주었다.
1. 다윗은 그의 이야기를 할 때 성령이 충만한 사람으로서 이야기하였다. 그의 형은 조금 전에 그가 목동이었다는 사실을 들어 그를 깎아내리려고 하였지만, 그는 자기가 아버지의 양들을 지켰던 사실을 조금도 부끄럽게 여기지 않고 다 이야기하였다. 다윗은 오늘날 자기에게 있는 그런 활력은 모두 목동의 생활 경험에서 얻은 것임을 조금도 숨기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주변에 있는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가 보통 목동이 아니란 것을 알게 하였다. 우리는 우리의 직업이 어떤 것이든 간에 또 그것이 얼마나 천한 것이든, 그 일에 있어서 제일 탁월한 사람이 되도록 노력하며, 최선을 다해서 그 일을 하여야 한다. 다윗은 양들을 치면서도 그렇게 하였다.(1) 다윗은 자기의 양이 아니고, 아버지의 양이지만 그 양떼들을 아주 정성껏 잘 살펴 주었다. 그는 자기 목숨을 거는 한이 있더라도, 새끼양 한 마리가 어려움을 당하는 것을 그대로 보아 넘길 수가 없었다. 이러한 그의 성품이 백성들의 생명을 사랑하며, 그들의 피가 귀한 줄 아는 왕이 되게 하였다(시 72:14). 그리고 또 "어린양을 그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시며" (사 40:11), "양들을 위해 목숨을 버리는" 선한 목자이신 그리스도의 예표가 되게 하였다. 이처럼 다윗은 교인들의 영혼을 우는 사자의 밥으로 내어 주지 않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해 그들을 지켜 주는 훌륭한 목회자의 모범이기도 하다.
(2) 그는 자기 양떼를 지키기 위해 매우 용감하였으며, 있는 용기를 다하였다. 다윗은 지금 이것이 사실임을 증명하고자 한다. 그리고 그 이상의 어떤 다른 증거가 필요없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주의 종은 단지 새끼 양들을 구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그것들이 나를 해하려고 하면 나는 사자와 곰도 쳐죽였나이다."
2. 다윗은 믿음이 충만한 사람과 같이 그의 이야기를 하였다. 그는 "여호와께서 그들 사자와 곰의 발톱에서 건져내셨다" 는 것을 시인하였다(37절). 그것은 다윗이 그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고자 하는 동시에 하나님께서 "나를 이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라" 는 것을 말하고자 하였기 때문이다. "사자와 곰은 단지 나와 양들의 원수였읍니다. 그래서 그것들을 쳐물리친 것은 다만 나 자신의 이익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블레셋 사람은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원수이며, 살아계신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했읍니다. 그러므로 나는 그들의 명예를 위해 이제 그를 치겠나이다."
(1) 우리의 경험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우리의 용기와 그리고 우리의 의무를 용감하게 실행하는 것으로 증명하여야 한다. 우리를 건져내 주신 분은 지금도 건져내 주실 것이요, 앞으로도 건져내 주실 것이다.
(2) 하나님의 일반적인 섭리가 하등 짐승들을 돌아보고 그들을 지켜 주시는 것을 볼 때, 하나님의 이스라엘을 감싸고 있는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를 우리는 감히 의지할 수 있다. 바다 물결의 한 계를 긋고, 사나운 짐승들의 표호를 꺾으시는 하나님은 악인의 진노를 막아 주신다. 바울이 "내가 사자의 입에서 건지웠느니라," 그러므로 "주께서 나를 모든 악한 일에서 건져내시리라" 는 것을 내가 믿는다(딤후 4:17, 18)라고 하였을 때, 다윗을 생각하였을 것이다. 그 다윗은 여기서 삼손의 이야기를 생각하고 용기를 얻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가 한 마리의 사자를 죽인 것은 한 번의 싸움에서 많은 블레셋을 이길 수 있는 승리를 예고해 주는 행복한 전조였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하여 다윗은 드디어 블레셋 사람과 싸울 수 있는 허락을 사울로부터 받아냈다. 그때 사울은 충심으로부터 나오는 축복을 기원하였다. 사울은 자기가 몸소 나가 싸우지 못하기 때문에, 그를 위해서 꼭 싸워 이기기를 기도하였다. "가라,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기를 원하노라" 라고 사울은 말했다. 이 말이 보통하듯이 형식적으로 했거나 습관적으로 한 것이 아니었다면, 그것은 매우 훌륭한 기원이다. 그러나 다윗에게는 이미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어떤 무엇이 있었다.
Ⅱ. 다윗은 또 사물이 어떻게 해서든지 그에게 입히려고 하는 갑옷(38절)을 입지 않아도 되는 점을 밝혀야만 했다. "사울은 자기 갑옷을 다윗에게 입혔다." 그러나 그것은 사울 자신이 입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들의 키가 차이 나기 때문에 맞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울의 무기고에 있었던 갑옷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사울은 그가 지금 자기의 투구를 씌워주고 자기 갑옷을 입혀 주는 사람에게 얼마 안 가서 자기의 왕관과 홍포를 넘겨 주어야 한다는 것은 도저히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아직 어떤 방법으로 적을 공격할는지 결정하지 못했던 다윗은 "칼을 차 보았다." 그러나 아직 그는 그 칼을 사용할 기회가 올는지 알지 못했다. 하지만 다윗은 그 갑옷이 오히려 방해가 되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갑옷이 그를 막아 주기는 커녕 오히려 짐거리가 되었다. 그래서 다윗은 사울에게 그것들을 벗고 가기를 원했다. "익숙치 못하니 이것을 입고 가지 못하겠나이다. "이 말은 다시 말하면" 이런 복장은 입어 버릇하지 않았기 때문에 거북하다" 는 뜻이다.
우리는 사울의 갑옷이 매우 훌륭하고 또 튼튼한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하지만 다윗에게 맞지 않는데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또 그것을 입는 법을 모르는 데는 아무 소용이 없을 것이다. 모름지기 배운 것도 없고 익숙치도 못하면서도 왕의 옷과 갑옷을 탐내는 사람들은, 지금 우리가 익숙하게 입고 있는 우리의 옷이 우리에게 가장 잘 아울린다는 것을 잊어버린 사람들이다. 우리가 만일 그런 생각을 가진 일이 있었다면, 우리는 다시금 우리의 옷을 입기를 원해야 한다. 그리고 "이것을 입고 가지 못하겠나이다" 고 말해야 한다. 우리는 그것들을 입지 않고 가는 것이 제일 좋다.
골리앗과 마주선 다윗(사무엘 상 17:40-47)
우리는 이제 이 유명한 전투의 중심부에 거의 이르게 되었다. 그리고 여기서 그 준비와 서로 주고 받은 충고의 말을 볼 수 있다.
Ⅰ. 서로가 싸울 준비를 다 하였다. 블레셋 사람은 지난 40일간 내내 그랬던 것처럼 이미 앞으로 나와 있었다. 그 사람은 갑옷을 입는데 익숙했으므로 완전 무장을 갖추고 있었다. 우리는 다만 그가 점점 행하여 다윗에게로 나아 왔다는 기록만을 볼 수 있는데(41절), 그의 도전을 받아들인다는 신호가 전달 되었던 것 같다. 그는 마치 그의 투구와 갑옷을 믿지 못하겠다는 듯이, 그의 방패를 든 사람을 앞서 걸어오게 하고 있었다. 그의 손에는 칼과 창으로 만도 가득차 있었다(45절).
그러나 다윗은 어떤 무기와 무장을 갖추고 있었나? 참으로 그는 목자의 차림새 그대로였다. 그는 흉배도 붙이지 않았고, 갑옷도 입지 않았다. 그리고 칼이 아니라 막대기를, 그리고 활 대신에 물매를 가지고 있었으며, 화살통이 아니라 목자의 제구 주머니를 가졌고 화살대신에 시내에서 골라잡은 매끄러운 다섯 개의 작은 돌을 가졌을 뿐이었다(40절). 이것으로 볼 때 다윗은 확실히 자기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을 전적으로 믿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는 그 블레셋 사람과 싸울 마음을 그에게 주신 하나님께서 어떤 무기로 그와 싸워야 할 것도 그의 머리 속에 넣어 주셨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Ⅱ. 이제 그들이 마주서고 나서 어떻게 하였는가를 보자.
1. 골리앗은 매우 거드름을 피웠다.(1) 그는 그의 상대를 매우 경멸하였다(42절). 그는 키가 크고 힘이 센 사람이 나오리라고 기대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의 상대가 매우 보잘 것 없는 외모를 가진 사람인 것을 알고 그를 몹시 업신여겼다. 그는 다윗이 그와 같은 용사와는 도저히 짝이 될 수 없으며, 그런 자를 이긴다고 해서 조금도 영광스러운 일이 되지 못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골리앗은 다윗의 외모만을 보았다. 그는 도저히 힘을 쓸 것 같지 않아 보이는 젊은이이며, "붉고 용모가 아름답기" 때문에, 싸움에 내보낼 것이 아니라 (당시에도 사교춤이 있었다면) 춤 추러나 같이 가기에 알맞는 이스라엘의 처녀로만 생각했을 것이다. 그는 다윗의 차림새를 보고 대단히 분개하였다. "네가 나를 개로 여기고 막대기를 가지고 내게 나아왔느냐? 네가 네 양치는 개를 다루듯 나를 그 막대기로 쉽사리 칠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2) 그는 자기의 승리를 확신하고 있었다. 그는 그의 우상의 나약한 복수를 기원하면서 그의 신의 이름으로 다윗을 저주하였다. 그는 불덩어리라도 나와서 다윗을 내리쳐서 그의 말이 사실임을 증거해 줄 듯이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러므로 그는 다윗을 죽일 듯한 힘을 그에게 퍼부었다(44절). "내게로 오라. 내가 네 고기를 공중의 새들에게 주리라. 저들이 맛 있게 먹으리라." 이처럼 어리석은 자들의 헛된 안심과 추측이 그 자신들을 멸망으로 이끈다.
2. 다윗은 매우 경건한 자세를 취했다. 그의 말에는 조금도 자기 자랑이 들어 있지 않았다. 오직 하나님만을 내세웠다(45-47절).
(1) 그는 그의 권위를 하나님께로부터 이끌어왔다. "나는 하늘의 지시와 명령을 받고 여호와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 그는 이 일을 위하사 나를 부르시고 기름을 부어 주신 분이다. 그는 만군의 여호와시라. 원하시는 일을 모두 하실 수 있는 능력을 가지셨느니라. 그분은 또 특별한 은혜의 계약으로 맺은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이시며 따라서 그의 능력으로 저들을 보호하시며, 저들을 모욕한 너 같은 자를 처치하게 하신다." 골리앗은 칼과 창을 의지하였고, 다윗은 하나님의 이름을 의지하였다(시 20:7; 118:10, 11 참조).
(2) 다윗은 그의 성공을 하나님께 의탁하였다(46절). 다윗은 마치 골리앗이 이미 땅에 쓰러진 것과 같은 확신을 가지고 말했다. 그는 신앙 가운데서 이렇게 말했다. "오늘 여호와께서 너를 내 손에 붙이시리니, 네 시체뿐 아니라 블레셋 군대의 시체들로 공중의 새와 땅의 짐승들에게 주리라."
93) 다윗은 찬송과 영광을 모두 하나님께 바쳤다. 다윗은 골리앗과 같이 자기의 영광을 구하지 아니 하였고, 이 일이 분명히 성공할 것을 믿으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길을 생각하였다.
[1] 온 땅에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알게 되고, 이스라엘의 하나님만이 유일하신, 살아 계신 참 하나님이시며, 다른 모든 신들은 헛된 거짓 신들임을 알게 되리라고 하였다.
[2] 온 이스라엘 "무리로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리라" 고 하였다(47절). 그리고 하나님은 칼과 창이 없이도 그것들과 싸워 이기신다고 하였다(시 46:9). (이때 다윗은 이스라엘 군대라 하지 않고 "무리" 또는 교회라고 하였다. 그것은 지금은 이스라엘 회중이 성전에서와 마찬가지로 하나님과 임금이신 여호와께 나가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 때 다윗은 나라의 원수와 싸우러 나가는 한 군인으로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존전에 희생의 제물을 바치러 나가는 제사장과 같은 심정으로 이 싸움에 임했다고 보여진다.
골리앗을 죽인 다윗(사무엘 상 17:48-58)
1. 두 용사 간에 접전이 있었다(48절). 이 접전을 위해 블레셋 사람은 한 난쟁이를 만난다는 생각에, 흔히거인들이 자기 허세를 부리듯, 위풍만을 내세우며 천천히 걸어나왔다. 그가 걸어나오는 모습의 표현에서 우리는 그러한 뜻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일어나 다윗에게로 마주 가까이 왔다." 그것은 마치 놋과 절로 덮어 씌운 큰 산이 걸어오는 것 같았다.
한편 다윗은 일을 꾸미기 시작하는 자가 아니라, 마무리짓는 자로서 즐거움을 가지고 날쌔게 뛰어나갔다. 그는 차림새가 가벼웠기 때문에 "블레셋 사람을 향해 빨리 달려갔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스스로 자멸의 길로 기쁘게 뛰어드는 젊은이를 측은한 마음과 연민의 정을 가지고 바라 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다윗은 자기가 어떤 분을 믿고 있으며, 어떤 분을 위해 일하고 있는지를 알고 있었다.
2. 이 접전에서 골리앗이 쓰러졌다. 그는 그다지 서둘지 않았다. 그는 조금도 두려움이 없었고, 잠시 후에는 그의 일격으로 상대자의 머리를 두 조각으로 낼 수있다고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골리앗이 장엄하게 그런 준비를 하는 동안, 다윗은 아무런 허식이 없이 일을 효과적으로 진행시키고 있었다. 다윗은 순식간에 돌 하나로 물매를 던져 골리앗의 이마를 명중시켜 그를 땅에 쓰러뜨렸다(49절). 골리앗은 이스라엘 사람들 중에는 물매질을 잘하는 자들이 있다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그 사실을 잊어 버렸든지 아니면 뻗대는 마음으로 그의 투구의 면갑을 올렸을 것이다. 그래서 그의 몸에서 유일하게 그 얼굴을 노출시켰었는데, 다윗의 기술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의 섭리가 그 곳에 명중하게 하였고, 그 굳은 이마를 뚫고 들어가게 하셨을 것이다.인간의 생명이란 이처럼 덧 없고 불확실한 것이다. 자기 자신은 튼튼하다고 생각하는 그 때에도 그처럼 빨리 또 그처럼 쉽게 그리고 매우 하찮은 일을 통해서도 그 생명이 빠져 나가고 죽음이 들어 온다. 골리앗도 "생기를 주장하며 생기로 머무르게 할" 능력이 없었다(전 8:8) . 강한 자도 그 강한 힘을 자랑하지 말고 무장한 자도 그의 무장을 자랑하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와 그의 백성들을 모욕한 자의 교만을 꺾으시며, 그들을 멸시하시는가를 보라. 골리얏이야말로 하나님께 대해 그의 마음를 가장 강퍅하게 가졌던 자였다. 한 이스라엘의 랍비는 골리앗이 다윗에게 "내게로 오라. 내가 네 고기를 공중의 새들에게 주리라" 고 말했을 때, 급히 하늘을 쳐다 보다가, 투구를 떨어뜨렸기 때문에 그의 넓은 이마가 다윗의 멋진 표적이 되었다고 말한 바가 있다.
다윗은 그의 작업을 완결 짓기 위해서 두 손으로 골리앗의 칼을 빼어들고 그의 머리를 베었다(51절). 다윗은 단 한 번만 칼을 쓰면 되므로 적의 칼로도 충분히 목적을 달성할 수 있었는데 무엇 때문에 자기의 칼을 가지고 오려고 했을까? 다윗은 교만한 적의 목을 그 자신의 칼로 내려치고, "저희의 혀가 저희를 해하게" (시 64:8) 함으로 하나님께 더 크신 영광을 돌려 드렸다. 다윗의 승리는 사탄과 모든 어두움의 세력에 대한 다윗의 자손(예수)의 승리의 예표였다. 다윗의 자손은 "어두움의 세력을 밝혀 드러내시고 십자가로 승리하셨다" (골 2:15). 그리고 우리도 그를 통하여 "승리한다."
3. 이로 말미암아 블레셋 군대도 패망하였다. 그들은 전적으로 그들의 용사의 힘을 의지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골리앗이 죽는 것을 보고, 골리앗이 제안했던 그대로 무기를 버리고 이스라엘의 종이 되도록 굴복하지는 않았지마는(9절), 기가 꺾였고 그런 용사 앞에서는 도저히 당해낼 수 가 없다고 생각하고 줄행랑을 쳤다. "그들은 도망하였다" (51절). 이것이 이스라엘에게 생기를 북돋아 주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일어나서 블레셋 사람들의 성문까지 쫓아갔다" (52절). (다윗은 아마 이 추격을 이끌었을 것이다.)그들은 추격에서 돌아오면서 블레셋의 진을 노략하여 많은 짐들을 가지고 왔다.4. 다윗은 그의 전리품을 다음과 같이 처리하였다. 그는 블레셋 사람의 머리를 예루살렘에 가지고 갔다. 그것은 시온성을 장악하고 있는 여부스 사람들에게 두려움을 주고자 했기 때문이었다. 아마 다윗은 다른 성읍에 개선할 때도 이를 들고 갔을 것이다. "갑주는 자기의 장막에 두었다." 그리고 칼만은 하나님께 봉헌하여, 그의 영광으로 승리한 것을 기념하듯 성전에 있는 에봇 뒤에 보관해 두었다(21:9).
5. 다윗이 유명하게 되었다. 다윗은 전에 궁전에 있었던 일이 있었건마는 한동안 떠나 있었기 때문에(15절), 사울은 그에 대한 것을 잊어버렸다. 사울은 정신착란증에 걸렸던 것이며, 또 도저히 그 노래하던 소년이 이처럼 늠름한 용사가 되리라고도 상상도 못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사울은 전에 한 번도 다윗을 만나본 일이 없는 듯이 그가 누구의 아들이냐고 물었다. 아브넬은 다윗을 알아 보지 못했다. 그러나 다윗을 사울에게로 데리고 갔다(57절). 다윗은 겸손하게 자기에 관한 말을 하였다(58절). 이제 다윗은 전보다 훨씬 높은 지위를 가진 사람으로서 궁전에 들어가게 되었다. 다윗은 거기서 하나님의 손이 자기의 모든 일을 성취시켜 주심을 고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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