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복으로써 전송 받는 야곱(창세기 28:1-5)
야곱은 축복을 받자마자, 곧 본국을 떠나 도망을 가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 그가 이제까지 그 곳에서 한 이방인이요 체류자로 지냈지만 그것은 아직도 불충분했던 것처럼, 또 한 타국에 가서 망명과 다름없는 나그네 신세가 되어야 했던 것이다. "야곱은 아람 들로 도망했다" (호 12:12). 그는 풍성한 곡식과 포도주가 풍성하리라는 축복을 받았지만, 가나한 채 길을 떠났다. 지배하고 다스리리라는 축복을 받았으나 지금은 섬기러, 그것도 고생스럽고 어려운 섬김을 하려 떠난 것이다.
1. 아마도 이것은 야곱이 그의 아버지 이삭을 속였던 일에 대한 징계인지도 모른다. 축복이 그에게 주어질 것은 확실하지만, 그가 사용한 우회적인 방법 때문에 그는 여전히 고통을 받아야 했던 것이다. 우리의 의무 속에 죄악된 불순물이 깃들어 있을 때에는, 우리의 위안 속에도 고통이라는 불순물이 따라 온다는 것을 각오해야 한다.2. 그러나 이것은 축복을 상속받는 사람들은 박해도 기대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우리들에게 가르쳐 주기 위한 것이었다. 그리스도 안에서 평화를 누리는 사람들은 세상에서는 환란을 당할 것이다(요 16:33). 이미 이 사실을 들었기 때문에, 이러한 환란을 당하더라도 우리는 이상스럽게 생각하지 말아야 하며, 장차에는 보상이 있을 것을 확신하기 때문에 그 환란을 어려운 것이라고 생각해서도 안 된다. 또한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가 때로 하나님의 약속과 모순되는 것 같이 느껴지기도 하고, 서로 어긋나는 것 같이 보인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러나 하나님의 신비가 모두 끝나면, 모든 것이 최선을 위한 것이었음을 알게 될 것이고, 서로 어긋나는 것 같이 보였던 하나님의 섭리도 약속과 그 약속의 성취를 더 잘 드러내기 위한 것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이제 야곱은 그의 아버지에 의해서 길을 떠나게 된다.
Ⅰ. 아버지 이삭은 엄숙한 의무를 지워서 보냈다. "그에게 축복하고 또 부탁하였다" 고 했다(1, 2절). 축복을 받은 사람들은 그에 따르는 의무를 지키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잊지 말자. 그리고 하나님께서 결합하시는 것을 분리시키려 해서도 안 된다. 야곱에게 주어진 부탁은 고린도 후서 6장 14절에 있는,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하지 말라" 고 한 것과 같은 것이었다. 죄사함을 얻는 약속과 성령의 은사를 선물로 받는 모든 사람들은 이 의무를 지녀야 한다. 그 의무는 "그 약속을 좇아 너희가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 하는 것이다(행 2:38-40). 특별한 은총을 받은 사람들은 별난 사람들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 야곱이 약속의 상속자가 되기 위해서는, "아내를 가나안 사람의 딸들 중에서 택해서는 안 되었다." 신앙 고백자가 불신앙인과 결혼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Ⅱ. 엄숙한 축복을 해주고 보냈다(3, 4절). 이전에 그는 야곱을 모르고 축복했었다. 그러나 이제는 외로운 곳으로 옮겨야 하는 야곱을 크게 격려하기 위하여 의도적으로 축복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번의 축복은 전의 축복보다 더 명백하고 완전한 것이었다. 그 축복은 아브라함의 축복을 계승할 권리였다. 곧 아브라함의 머리 위에 관유처럼 부어진 축복이요, 그 기름이 기름 부음 받은 자의 옷자락에 흘러내리듯 아브라함의 선택된 자손에게 물려 줄 축복이었다. 또 아브라함의 축복이란 믿음에 의해서 이방인께 전해진(갈 3:14) 복음의 축복이요, 교회만이 지니는 특권의 축복이다. 그것은 전능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온 축복이다. 하나님께서는 족장들에게 전능하신 하나님이란 이름으로 나타나셨던 것이다(출 6:3).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축복해주시는 사람들은 참으로 축복을 받은 사람들이다. 왜냐하면 그는 축복을 명령하시고 이루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이 받고 이삭이 다시 야곱에게 상속해 준 축복에는 커다란 두 가지 약속이 들어 있다.
1. 축복의 상속자에 대한 약속, "전능하신 하나님이 네게 복을 주어 너로 생육하고 번성케 하리라" 고 했다(3절).(1) 야곱을 통하여 아브라함의 후손들이 하늘의 별과 바다의 모래와 같이 많아질 것이며 그 자손들은 모든 다른 민족들보다 많아져서, "큰 무리의 사람들" -난 외에는 이렇게 읽고 있다. 이스라엘 족속이 될 것이라 했다. 그들이 광야에 있는 동안 그처럼 많은 사람들이 한 집단으로 모인 것은 그 후에도 거의 없었다.
(2) 야곱을 이은 아브라함의 후손들 중에서, 세상의 모든 가족들의 축복의 근원이 되고 모든 사람들이 그를 중심으로 모여들 그러한 한 사람이 태어날 것이라는 것이다. 야곱은 자기 속에 참으로 많은 백성들을 품고 있었다. 왜냐하면 천지간의 모든 사람은 그리스도 안에서 연합되며(엡 1:10), 땅 속에 떨어져 수많은 열매를 맺을 알곡과 같은 그를 중심으로 모든 사람들이 모여들 것이기 때문이다(요 12:24).
2. 그들 상속자들이 물려받을 상속 물에 대한 약속, "너의 우거하는 땅을 유업으로 받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4절). 여기에 보면 가나안 땅을 에서의 후손들은 전적으로 제외하고 야곱의 자손들에게만 상속되었다. 이삭은 지금 야곱을 먼 나라로 보내어, 거기서 얼마동안 정착하도록 하고 있다. 그런데 이 사실이 그 땅을 야곱에게 상속하지 않는 것으로 알까봐, 그 땅은 야곱에게 주어진 것임을 재확인하고 그가 계속 이 땅에 머물러 그 땅을 소유하지 않더라도 그것이 그의 권리를 폐기하는 것이 아님을 확인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살펴보아야 할 것은 바로 그가 우거(체류)하는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라고 이야기된 사실이다. 체류하고 있던 나그네들이 이제 영원한 상속자가 될 것이라는 것이다. 지금도 세상을 상속받는 사람들은(그들이 세상의 모든 것을 상속받은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이 세상에서 나그네와 같이 지내는 사람들이다. 현세에 가장 집착하지 아니하는 자가 현세를 가장 잘 즐기고 있는 자들이다. 이 약속은 하늘 나라처럼 높이 우러러 보이며, 가나안은 바로 그 하늘나라를 상징해 주는 것이었다. 야곱이 그 땅에 있으면서, 다른 족장들과 마찬가지로, 자기는 이 세상의 나그네요 순례자라고 고백했을 때, 그가 염두에 두고 있던 더 놓은 나라는 바로 하늘 나라이었다(히 11:13). 야곱은 아버지에게 작별을 고하자마자 자기형이 자기에게 악을 범할 수 있는 기회를 주지 않으려고 급히 서둘러 밧단아람으로 갔다(5절). 이삭이 종을 그곳으로부터 자기 아버지의 고향으로 보내어 아내를 취했던 사실과는 얼마나 사정이 다른가! 이삭은 종이나 약대를 보낼 수도 있었다. 그러나 야곱은 걸어서 홀로 가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는 또한 언제 돌아올지도 모르면서도 자기 아버지의 집을 떠나야만 했다. 만약 하나님께서 특별하신 섭리가 있으시기 때문에 우리를 어려운 처지에 빠지게 하심으로써, 우리가 우리 조상이 누렸던 그런 상태에 이르지 못한다 할지라도, 우리는 만족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명심하자. 우리는 언제나 조사의 존귀함보다는 경건을 배우고, 그들의 위대함보다는 그들의 선함을 본받아야 한다. 여기에서 리브가는 "야곱과 에서의 어머니" 라고 불리워지고 있다. 야곱의 이름이 먼저 나와 있다. 그것은 어머니가 제일 사랑하는 아들이 야곱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이제 그가 아버지의 상속자가 되었기 때문이며, 이런 의미에서 에서는 옆으로 제쳐놓게 된 것이다. 지금 형편이야 어쨌든 경건한 신앙이 지배권을 갖는 때가 올 것임을 잊지 말자.
모범을 보여준 동생(창세기 28:6-9)
야곱에 대한 이야기 도중에 에서 이야기가 나타나는 것은 다음의 두 가지 중의 한 이유 때문이리라.
1. 한 좋은 본이 어떻게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다. 에서는 비록 자기가 형이었지만, 이제는 야곱이 더 좋은 사람이라고 느끼기 시작했다. 그래서 아브라함의 딸에게 장가드는 특별한 결혼을 통해서 야곱의 본을 서슴치 않고 따르고 있다. 형들은 동생들에게 순종과 복종의 모범을 보여 주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그릇된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못할 경우 에서가 야곱을 본받아 한 것처럼, 형들이 동생을 본받을 수도 있을 것이고 그렇게 되면 형들의 잘못은 다소 경감될 수 있을 것이다.2. 뒤늦게 깨닫는 자의 어리석음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다. 에서가 한 일은 잘못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너무 늦은 일이었다. 그는 "가나안 사람들의 딸들이 그 아비 이삭을 기쁘게 하지 못하는 것을 보았다. "만약 그가 자기 기호대로 선택하듯 그렇게 아버지의 판단을 경청했더라면, 이 같은 깨달음은 오래 전에 이미 이루어졌어야 할 일이었다. 그래서 지금이라도 과거의 자기 잘못을 고치려 한 것이지만, 과연 그는 어떻게 행동했던가? 왜 그는 사태를 더욱 악화시키고 마는가?
(1) 그는 이스마엘의 딸과 결혼했다. 그런데 이스마엘은 계집종의 아들로, 이삭과 같이 상속자가 될 수 있는 그런 권리가 없는, 내쫓긴 사람이다. 그런데 에서는 그의 딸과 결혼함으로써 하나님이 거절하신 집안과 함께 있게 된 것이다. 결국 또 한 번 주제넘은 짓을 함으로써 자기의 의식적 태도를 더 크게 드러내고 만 것이다.
(2) 그의 두 아내가 죽지도 않았고 그들과 이혼을 한 것도 아닌데 그들은 아랑곳 없이 세 번째 아내를 얻은 것이다.
(3) 그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하여 이러한 일을 한 것이 아니라, 다만 아버지를 위해서 했다. 이제 야곱이 먼 나라로 가면 집은 온통 자기의 차지가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아버지를 기쁘시게 하여 새로운 축복의 유언을 하시도록 함으로써, 야곱에게 베푼 축복을 취소하고 자기에게 괴로운 약속을 더 해 주실 것을 바랐던 것이다.
[1] 그러므로 그는, 마치 하나님의 지엄하신 질책을 경험하고 나서야 슬피 통곡하던 이스라엘 사람처럼(민 14:40), 그리고 어리석은 처녀들처럼(마 25:11) 뒤늦게야 겨우 깨닫는 그런 사람이었다.
[2] 그는 부분적인 회개를 하고 만족하면서, 한 가지 일로 부모님을 기쁘시게 하면서 자기가 행한 많은 잘못이 용서받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순종하는 야곱의 모습을 보고, 부모님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야곱의 모습을 보면서도, 그가 야곱에게 행하려던 악의를 참회했다는 기사는 없다. 그는 그러한 악의를 그 후에도 끝내 버리지 않고 지니고 있었다. 육적인 마음은 자기들이 당연히 되어야 할만큼 선하다고 생각하기가 일쑤임을 기억하자. 때로 어떤 특정한 경우에는 지금까지 해오던 것처럼 그렇게 나쁘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미가는 자기의 우상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레위인이 자기 제사장이 되었으니,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복을 주실 줄을 아노라하고 행복해 했던 것이다(삿 17:13).
벧엘에서 본 환상(창세기 28:10-15)
야곱은 쓸쓸하게 아람을 향해 가고 있었다. 마치 자기의 행운을 찾아 나선 자와도 같았다. 그러나 우리는 그가 홀로 있었지만, 실제로는 결코 홀로 있었던 것이 아니었음을 알 수가 있다. 왜냐하면 아버지께서 "그와 함께 계셨기" 때문이다(요 16:32). 여기 기록된 사실이 첫 날 저녁에 일어난 일이라고 가정한다면(분명히 그랬을 것 같은데) 야곱은 브엘세바로부터 벧엘까지 하루 종일 40마일 이상을 여행한 것이다. 하나님의 섭리가 그날 밤을 보다 편리하고 안락한 곳에서 쉬도록 그를 인도하신 것일 것이다. 아마도 그 곳에는 무성하게 숲이 우거져 있었을 것이다. 그 때 그 곳에서 야곱은,
Ⅰ. "돌 베개를" 베고, 하늘을 지붕과 장막으로 삼고 하룻밤을 지냈다. 그 때 형편으로 본다면 이렇게 하룻밤을 보낸다는 것이 우리가 오늘날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불행한 일은 아니었던 것 같다.
1. 그는 차디찬 바닥에서 차디찬 돌을 베고, 찬 밤공기 속에 누워 있었다.2. 그는 무척 불편했다. 하루종일 여행한 피곤한 몸이 노천에서 밤을 지내면서 더 쑤시고 아팠을 것이다.
3. 그는 자기 몸을 숨기지 못하고, 완전히 위험에 노출된 상태 였다. 그는 자신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도망치고 있다는 것을 잊고 있었다. 만약 그의 형이 노해서 쫓아온다거나 자객을 보냈다고 한다면, 그는 그대로 살해당할 수밖에 없는 그런 무방비한 처지에 있었던 것이다. 그가 가난해서 이렇게 초라했던 것은 아닌 것 같다.
(1) 그 당시는 오늘날의 나약한 사람들이 그렇듯이, 그렇게 자기들의 신분을 중히 여기거나 안락을 애써 추구하지 아니하던 때였으므로, 당시의 사람들이 지녔던 소박함과 단순성 때문인 것 같다.
(2) 야곱은 특별히 여러 생활의 어려움에 익숙해 있던 사람이었다. 그는 늘 장막을 치고 살았다. 그리고 지금은 남을 섬기는 삶을 살기 위해 가는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스스로 모든 고생에 더욱 익숙하게 되기를 바랐을 것이다. 후에 이와 같은 그의 태도는 잘 실증되었다(31:40).
(3) 비록 그가 그처럼 스스로를 무방비한 채로 노출하고 있었으나, 하나님의 축복으로 스스로 위안하고, 하나님이 지켜 주실 것이라는 데 대한 신뢰를 통하여 그는 태평할 수 있었다. 하나님께서 그를 안전하게 해 주실 것이라 믿었기 때문에 누워서 돌 베개를 베고 편히 잠을 잘 수가 있었던 것이다.
Ⅱ. 비록 불편하고 거북한 잠자리였지만, 그는 즐거운 꿈을 꾸었다. 만약 이스라엘 사람들이 야곱의 베개를 가지고 싶다고 한다면, 그것은 그 돌 베개 때문에가 아니라 바로 이 즐거운 꿈을 꾸고 싶은 생각 때문일 것이다. 그 때 그곳에서 야곱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전능하신 분의 환상을 보았던 것이다." 그 날 밤은 지금까지 야곱이 겪었던 밤중에서 최고의 밤이었다. 인간이 모든 위로를 가지고 그 백성을 찾아오신다는 것을 잊지 말자. 의무를 수행해야 하는 과정에서 어려움이 많으면 많을수록 그에 대한 위로하심도 더욱 많은 법이다. 이제 다음과 같은 사실을 살펴보기로 하자.
1. 야곱은 고무적인 환상을 보았다(12절). 그는 땅에서부터 하늘에까지 가 닿은 사다리와 천사들이 그 사다리를 오르내리는 광경을 보았고, 그 사다리 끝에는 하나님 자신이 계신 것을 보았다. 이 같은 사실은 언제 어떤 경우에든지 모든 선한 사람들에게 큰 위로를 주는 두 가지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1) 하나님의 섭리에 의하여 하늘과 땅 사이에는 끊임없는 소통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하늘의 뜻이 땅 위에서 이루어지고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행동과 사건들은 모두 하늘에 알려지고, 거기서 심판도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같은 일을 서서히, 한 걸음 한 걸음씩 실천하신다. 천사들이 섭리자의 모든 뜻과 계획을 받들고 있는, 일하는 영으로 고용된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지혜가 사다리 윗 끝에 있는 것은, 모든 제2의(자연의) 원인들의 작용이 제일 선인(조물주)의 영광에 이바지하도록 지도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천사들은 지극히 활동적인 영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끊임없이 사다리를 오르내리고 있다. 그들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자기가 맡은 자리에서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조금도 뒤지 않는다. 그들이 이룬 바를 보고하고 명령을 다시 받기 위해 사다리를 올라가며, 그들이 받은 명령을 실행하기 위해 다시 내려온다. 그처럼 우리도 언제나 주님이 맡기신 많은 일들을 천사처럼 쉬지 않고 행하여야 한다(시 103:20, 21). 이 환상은 야곱에게 극히 때 맞는 위로가 되었다. 그는 그가 어디를 가든지, 선한 인도자와 선한 보호자가 있음을 알게 된 것이다. 즉 그는 비록 아버지의 집을 떠나 방랑하고 있지만, 여전히 하나님의 친절한 보살피심 속에 머물러 있고, 거룩한 천사가 돌보고 있음을 알았던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우리가 이러한 생각을 인정할 필요는 없다)가나안의 수호 천사들이 야곱을 그 고향에서부터 보호해 왔으나 이제 올리고 있는 것이요, 아람의 천사들이 그를 지키려고 내려오고 있었다고 한다. 하여간 야곱은 그 꿈속에서 더할 수 없는 위로를 얻었던 것이다. 이 야곱은 천사들이 수호의 책임을 맡고 있는 전체 교회의 한 상징이요 대표였던 것이다.
(2) 그리스도의 중보라는 위로가 있다. 그리스도는 바로 이 사다리이다. 인간의 모습으로 이 땅 위에 발을 붙이고 계시며, 하나님의 모습으로 하늘 끝에 계신다. 인성(人性)은 그의 비하하심 속에, 신성(神性)은 그의 존귀케 되심 속에 나타났다. 타락 이후의 모든 하늘과 땅 사이의 소통은, 이 사다리를 통하여 이루어진다. 그리스도는 유일한 길이시다. 우리에게 주시고 하나님의 사랑 전체이시다. 우리의 모든 봉사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께 상달된다. 만약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거하시고 우리가 하나님과 더불어 살 수 있다면 그것은 그리스도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이다. 이 사다리 외에는 어떠한 길로도 하늘에 오를 수 없다. 다른 길을 통해 올라간다면, 그는 도둑이요 강도이다. 그렇기 때문에 구원주이신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천사가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에 대하여 말씀하셨던 것이다(요 1:51). 천사가 우리에게 하는 모든 직무나, 우리가 그러한 천사들의 직무를 통하여 많은 덕을 입는 것은, 하늘에 있는 것과 땅에 있는 것을 화해시키시고(골 1:20) 그 모든 것을 자기 안에서 만나게 하시는(엡 1:10) 그리스도의 은총 때문인 것이다.
2. 야곱은 고무적인 말씀을 들었다. 하나님은 이제 야곱을 광야로 불러내어 사다리의 꼭대기에서 위로의 말씀을 해주신 것이다. 우리가 하늘로부터 받아들이는 모든 좋은 소식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오는 것이다.
(1) 이전에 아버지 이삭에게 약속했던 그 약속이 야곱에게서 다시 반복되고 인정된다(13, 14절). 일반적으로 보면, 하나님께서는 대체로 볼 때 아브라함이나 이삭에게 그러셨던 것처럼 야곱에게도 마찬가지고 친근하시었다. 경건한 부모의 발자취를 따르는 사람들은 그 부모에게 이루어진 약속이나 그들이 지니고 있던 특권과 무관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보면,
[1] "그가 누워 있는 땅," 곧 가나안 땅이 그에게 약속이 되었다. 그것은 마치 그가 그 황폐한 땅에 만족하게 누웠기 때문에, 그 모든 땅을 상속받게 된 것처럼 되었다.
[2] 그의 자손이 땅의 티끌같이 번성하리라는 것을 약속 받았다. 지금 그의 형편은 마치 잘리어진 가지처럼 시들어 있다. 그러나 그가 무성한 나무가 되어, 세상 끝에까지 가지를 뻗칠 수 있으리라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은 그의 아버지가 그에게 축복한 바로 그 축복이었다(3, 4절) 하나님께서는 여기에서 그 모든 축복에 아멘 이라고 하심으로써, 야곱이 더할 수 없이 강한 위로를 갖게 해 주신다.
[3] 또한 메시야가 그의 자손에게서 태어날 것이며, 그 안에서 모든 세상의 가족들이 복을 받을 거라는 약속을 더해 주셨다. 그리스도는 이 세상의 가장 큰 축복 받은 사람들은 그들이 어떤 가족에 속해 있든지 간에, 그분 안에서 축복을 받는다. 또한 자기 스스로를 그 축복에서 축출한 자 외에는 아무도 그 축복에서 축출된 사람이 없다.
(2) 그의 현 상태에 편의를 제공해 주는 새 약속을 더해 주었다(15절)
[1] 야곱은 자기의 형 에서에게 위험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를 보호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 하나님께서 보호해 주시는 사람은 누가 그를 해치려 하든 안전하다는 것을 명심하자.
[2] 그는 지금부터 미지의 나라를 향하여 미지의 길을 따라 긴 여행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하나님은 "보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리라" 하고 말씀하고 계신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 속에 거할 수 있다면, 우리가 어디를 가든지 안전하고 평안하리라는 것을 기억하자.
[3] 야곱은 그가 자기 삼촌의 집에서 어떤 고난을 겪어야 할는지 알지 못했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를 미리 아시고 어떤 곳에서든지 그를 보호하겠다고 약속하신 것이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의 현상태 뿐만 아니라 장차의 상태에게 알맞은 은혜나 위안을 주실 줄 아신다는 점을 명심하자.
[4] 그는 지금 멀고 먼 곳으로 도망을 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를 이 땅에 다시 되돌아오게 하겠다고 약속을 하셨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이 나아갈 때에나 들어 올 때에나 언제든지 지켜보신다는 것을 기억하자(시 121:8).
[5] 야곱은 모든 친구들에게 버림을 받은 것 같았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나는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는 확신을 주셨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도 그를 결코 버리시지 않는다는 것을 알자. 이 약속은 그의 모든 후손들에게도 확실한 것이다(히 13:5).
[6] 섭리가 약속과 모순되는 듯이 보였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때가 되면 이 모든 약속을 이루어 주시리라고 약속하셨던 것이다. "내가 네게 말한 모든 것을 다 이루리라." 하나님께서는 우리와는 달리 말과 행동이 서로 다른 두 가지가 아니다.
야곱의 서원(誓願)(창세기 28:16-22)
하나님께서는 야곱이 깊이 잠들어 있는 동안에, 당신 지신과 은총을 나타내셨다. 그렇기 때문에 이 모든 일은 야곱에게는 순수히 수동적으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바람처럼 성령은 당신의 뜻대로 불고, 이슬처럼 하나님의 은총은 인생들을 기다리지 않는다(마 5:7). 야곱은 하나님의 방문을 선용하기에 이른다. 야곱은 잠을 깨고 나서, 예레미야 예언자처럼(렘 31:26) 내 잠이 달았더라고 했을 것이다. 이 때의 야곱의 신앙심이 여러 가지로 나타나 있다.
Ⅰ. 그는 그 장소에서 하나님이 자기와 특별히 함께 계시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 그 징표에 대해 큰 놀라움을 표했다.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16절). 다음 사실을 명심해 두자.
1. 자기 백성에게 나타나시는 하나님의 현현에는 언제나 증거가 따른다. 하나님은 당신의 임재에 대한 부정될 수 없는 증거를 능히 주신다. 즉 다른 사람들이 전달될 수 있는 만족은 아니지만,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신실하시다는 것을 스스로 깨닫게 해 주심으로써, 신실한 영혼들에게 만족감을 주시는 것이다.2. 우리는 때때로 전혀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하나님과 만나게되는 수가 있다. 그가 계시리라고 생각하지 못한 곳에 계시고, 우리가 만나려고 찾지 아니한 곳에서도 만나 주신다. 하나님이 방문하실 수 없는 곳은 아무데도 없다(16:13 "어떻게 여기서도" 라고 했다). 도시안에 있든지 사막에 있든지 집안에 있든지 들판에 나가 있든지, 상점에가 있든지 길거리에 있든지, 우리에게 잘못이 없는 한, 그 어디서도 하나님과 교제를 나눌 수 있다.
Ⅱ. 그 광경은 그에게 경외감을 주었다(17절). "이에 두려워하였다" 고 했다. 풍성한 계시로 인하여 그가 교만해지거나 분수 이상으로 높아지지 않았다(고후 12:7). 오히려 두려워했다. 하나님을 많이 죄면 뵐수록, 우리는 그 앞에서 더욱 깊은 경외심과 겸손을 가지게 된다는 것을 잊지 말자. 하나님께서 자신을 나타내시기를 즐겨하시는 사람들은, 그것 때문에 오히려 극히 겸손해져야 하고 주님과 그의 선하심에 대하여도 두렵고 경외하는 마음으로 나아가지 않으면 안된다(호 3:5). 야곱은 "두렵도다! 이 곳이여!" 라고 말했다. 즉" 이곳에 하나님이 나타나셨다고 하는 것을 두렵고 떨리는 경외 없이 어떻게 생각할 수 있으랴! 이 장소를 존중하고 내가 살아 있는 한 이것을 한 증표의 장소로 기억하지 않을 수 없다" 고 생각한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 장소가 다른 어떤 장소보다 하나님께 더 가깝다고 생각한 것은 아니다. 다만 야곱은 그 때 이 곳을 마치 "하나님의 집" 전능하신 분의 거처로 생각했고, 마치 도서의 회합이 성문이 있는 곳에 모이듯 이 곳을 하늘 나라의 백성들과 만날 수 있는 "하늘의 문" 으로 생각했으며, 오르락 내리락하는 천사들은 마치 도성의 성문을 드나드는 여행객들처럼 생각했던 것이다. 이런 것을 명심하자.
1. 하나님의 은총이 있는 곳, 하나님의 계약이 수립되고 조인되는 곳에는, 어디에든 하나님께서 임재해 계신다. 그리고 특별하신 방식으로 임재해 계신다. 옛날에는 천사들을 통하여 그리하셨고, 오늘날에는 제도적 규례에 의하여서 그리하신다(마 28:20).2. 특별한 임재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나 주실 때, 우리는 하나님의 정의와 성결, 그리고 우리의 어리석음과 죄 많음을 기억하면서 지극히 겸손하고 경의 하는 태도로 하나님을 뵙지 않으면 안된다.
Ⅲ. 야곱은 두 가지 방법으로 이를 오래 이 사건을 기념하고 기억하고자 했다.
1. 그는 돌로 기둥을 세웠다(18절). 자기가 베고 잔 그 돌 때문에, 그가 그러한 환상을 보았다고 생각해서가 아니라, 다시 돌아와 하나님께서 그에게 은총을 베푸신 그 장소를 영구히 기념하고 싶어서 그랬던 것이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뵈었을 때 그랬던 것처럼(12:7) 그렇게 제단을 쌓을 시간이 지금은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들에다 기름을 부었다." 아마도 그것은 당시에 제단을 봉헌할 때 행해지던 의식이었던 것 같다. 이렇게 함으로써 이 환상의 경험에 감사하여 적당할 때 다시 돌아와 제단을 증거로 삼았다. 후에 그는 이를 지켰다(35:7). 은총을 받았을 때는 거기에 대한 의무를 다함으로써 보답해야 한다는 것을 기억하자. 그러므로 하나님과 더불어 아름다운 관계를 맺었을 때에는, 그것을 영원히 기억해야 한다.2. 그는 그 장소에 새 이름을 지어 주었다(19절). 그곳의 본래 이름은 루스 곧 알모드(扁木) 나무라는 뜻으로 불렀다. 그러나 그는 이후로는 이곳을 벧엘 곧 하나님의 집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하나님의 자비로운 나타나심 때문에, 그곳은 참으로 영광스러운 곳이 되었다. 또 많은 알모드 나무가 자라는 다른 곳에서 "하나님께서 저를 만나셨고, 거기서 우리에게 말씀하셨다" 고 한 그 벧엘이다(호 12:4). 세월이 흘러, 벧엘 곧 하나님의 집은 여로보암이 그의 황금 송아지를 그 곳에 두게 되자, 벧아벤 곧 허무의 집이 되었던 것이다.
Ⅳ. 이 때 야곱은 엄숙한 서약을 했다(20-22절). 신앙적인 서약을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하나님을 의지하게 되며, 우리 자신의 영혼에 자갈을 물려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복종을 열심히하고 부지런히 하게 한다. 야곱은 지금 두려움과 근심 속에 있었다. 어려운 곤경에 처해 있을 때, 또는 특별한 은총을 추구하고 있을 때에, 서약을 한다는 것은 때맞은 일이었다(요 1:16; 시 66:13, 14; 삼상 1:11; 민 21:1-3). 야곱은 방금 하나님의 영광스런 방문을 받았다.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계약을 새로이 해 주셨다. 그 계약은 상호적인 것이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떤 약속을 재가해 주실 때면, 우리도 하나님께 우리의 약속을 반복해야 마땅하다. 이제 이 야곱의 서원을 살펴보기로 하자.
1. 야곱의 믿음. 하나냄께서는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너를 지키리라" 고 말씀하셨다(15절). 야곱은 이 말씀을 포착하고 추론했다.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계시사, 나를 지키시리라고 말씀하셨으니, 나를 편안케 해 주실 것이며(사실상 이것은 그 약속 속에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내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게 하리라(자기 아버지의 죽음을 기다리던 에서와는 달리)고 약속했으니, 나는 평안히 돌아가기를 바랠 수 있겠노라- 나는 이 약속을 의지하리로다" 라고 했다. 하나님의 약속은 우리의 욕구와 기대의 안내와 척도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기억하자.2. 야곱의 겸손과 그의 온건한 욕구. 그는 먹을 양식과 입을 옷으로 즐겁게 만족하겠다고 했다. 비록 하나님의 약속이 엄청난 토지의 상속자로 그를 세우시겠다는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부드러운 옷과 맛 좋은 고기를 주문하지 않았다. "맛있는 음식으로 나를 먹이소서" 라고 한 아굴의 소원이 바로 그의 소원이었다(딤전 6:8 참조). 본성(자연)은 작은 것으로 만족하나, 은혜는 더욱 작은 것에도 만족한다. 아무리 많이 가진 사람도 실은 먹을 양식과 입을 옷이 상의 것이 더 필요한 것은 아니다. 많은 재산을 가진 사람은 재물을 보관하는 사람이 되든가 주는 사람은 될지언정 결코 재물을 즐기지는 못한다. 만약 하나님께서 많은 것을 주시면, 우리는 그것에 감사하고 하나님을 위해 쓰지 않으면 안 된다. 또 하나님께서 그저 이만큼만 주셨다면, 그것에 만족하고 하나님 안에서 그것을 즐겨야 한다.
3. 여기에서 하나님께 대한 야곱의 경건함과 하나님께 대한 그의 관심을 살펴 볼 수 있다.
(1) 그가 원한 것은,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시고 지켜달라는 것이었다. 우리가 어디에 있든지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고 보호해 줍시사고 하는 것 외에는 우리의 행복과 평안을 위해 바랄 것이 없음을 깨닫자. 여행을 할 때, 미지의 길에서 안내자를 만나거나, 위험한 길에서 우리가 잘 갈 수 있도록 지켜 주는 보호자를 만나 잘 지내고 잘 먹을 수 있게 되며, 선한 동행을 만나게 된다는 것은 위안을 주는 일이다. 하나님이 함께 계시는 것이 그 모든 것에 있어서의 최상의 방책이다.
(2) 그의 장래 계획 속에서 그의 신앙심을 살펴 볼 수 있다. 그의 결심은 이러하다.
[1] 일반적인 각도에서 보면, 여호와를 자기 계약의 하나님으로 고수하겠다는 것이다.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다." 만일 하나님께 음식과 의복이 떨어지면, 그를 잊고 도망가리라는 심산이 아니었다. 하나님이 우리를 죽일지라도 그만 붙들겠다는 것도 아니다. 다만 "나는 당신을 나의 하나님으로 즐거이 찬양할 것이니라. 그 때에 더욱 열심히 하나님 당신께 거하리이다" 라는 태도이다.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모든 은총은 그 하나님을 우리의 하나님으로 모시고 더 가까이 그 분과 동행해야 한다는 의무를 준다는 것을 알아야겠다.
[2] 구체적인 각도에서 보면, 그는 감사의 뜻을 표하는, 신앙의 어떤 특별한 행동을 보여 주고 싶었다. 첫째, 내가 평안히 되돌아와 이곳이 하나님의 집이 될 때까지, 내가 이 기둥을 여기에 세워 두리라. 즉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한 제단을 여기에 세우리라" 는 것이다. 둘째, 하나님의 집을 잘 장식할 것이요, 제단에는 제물이 있게 하리라.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 중에서 십분의 일을 하나님께 바치리니, 하나님의 제단을 위해서나 하나님의 가난한 백성들을 위해서 사용하리라" 고 생각했다. 아브라함과 야곱이 그들의 소득 중에서 십분의 일을 이렇게 하나님께 바친 것을 보면, 이러한 것은 하늘로부터 어떤 일반적인 교훈이 있었던 것을 보면, 이러한 것은 하늘로부터 어떤 일반적인 교훈이 있었던 것 같다. 다음 사실에 유의하자.
1. 우리는 우리의 재산을 가지고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하며 하나님의 몫은 하나님께 바치지 않으면 안 된다. 또 우리가 보통 때와는 달리 특별히 많은 은총을 입었을 때는, 하나님께 어떻게 하면 이 은총에 대한 감사를 구체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가 하는 방법을 연구해야 한다.
2.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형편에 따라 다소 여러 가지로 축복해 주시지만, 하나님께 바치고 하나님께 쓰일 분량은 십분의 일이 합당하다(고전 16:2; 고후 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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