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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

아브라함의 죽음(창세기 25:1-10)

아브라함은 이삭이 결혼한 후 35년 동안 살았다. 그 동안 아브라함이 어떻게 살아왔는가 하는 것은 이곳에 거의 기록되지 않고 있다. 특별히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신 일도 또는 그를 시험하신 일도 이제는 더 찾아볼 수가 없다. 아무리 훌륭하고 위대한 성인이라 할지라도, 그의 일생의 모든 날이 다 눈에 띄게 유명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어떤 날들은 소리도 없이 사라져버리는 것이다. 그들의 오고감을 아무도 깨닫지 못할 때도 있는 것이다. 아브라함의 말년의 세월이 바로 그러하였다. 여기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들을 찾아 볼 수가 있다

Ⅰ. 사라가 죽은 다음에 아브라함이 결혼한 다른 한 아내 그두라에게서 태어난 자식들에 관한 기록이 있다. 아브라함은 자기 생애의 가장 귀한 동반자였던 사라를 장사지내고, 이삭을 결혼시킨 다음 극히 외로웠다. 그는 자기를 보살펴 줄 사람이 필요했고, 그의 가족에는 주부가 필요했다. 그리고 아브라함이 이렇게 홀로 지내는 것은 좋지 아니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그두라와 결혼을 한 것이다. 아마 그녀는 아브라함의 수석 여종이었을 것이며, 그 집에서 태어났거나 돈을 주고 사온 여종이였을 것이다. 결혼이란 나이 많은 사람들에게라고 금지된 것은 아니다. 그두라에게서 아브라함은 여섯 아들을 낳았다. 그들을 통하여 아브라함의 자손이 크게 번성하리라는 약속이 부분적으로 성취된 것이다. 아마 아브라함은 다시 결혼을 할 때 이 사실을 염두에 둔 것 같다.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서 받은 정력이 여전히 그에게 남아 있었다. 이것은 하나님의 약속의 혜택이 자연적인 힘의 한계를 능가할 수 있다는 것을 잘 보여준 것이다.

Ⅱ. 아브라함이 자기의 재산을 분배했다(5, 6절). 이 여섯 아들이 태어난 후에 아브라함은 신중하고 공평하게 자기의 집안을 정리했다.

1. 아브라함은 이삭을 그의 상속자로 삼았다. 그것은 당연히 그가 해야 할 일이기도 했고, 그래야 그의 첫 아내이며 본부인인 사라에게 대한 올바른 일이기도 했으며, 상속자가 되리라고 확신으로 이삭과 결혼한 리브가에 대한 올바른 일이기도 하였다(24:36). 그가 이삭에게 상속한 이 "모든" 약속 속에는 가나안 땅에 대한 약속과 계약 상속권이 포함되어 있었을 것이다. 혹은 하나님께서 이미 이삭을 약속의 상속자로 결정하셨기 때문에, 아브라함이 그를 자기 재산의 상속자로 삼았는지도 모른다. 우리들의 애정과 선물은 하나님의 사랑과 선물을 실행하는 것이어야 한다.

2. 아브라함은 다른 아들들에게도 재산을 나눠주었다. 즉 처음에 빈손으로 내쫓았던 이스마엘과 그두라가 낳은 아들들에게도 나눠 주었다. 그들에게도 나눠주는 것이 공평하고 올바른 일이었다. 이 점에 있어서 아브라함을 본받지 않는 부모들은 불신앙자들보다 더욱 악한 사람들이다. 또한 그 아들들을 이삭과 멀리 떨어진 곳에 정착시킨 것도 깊은 생각에서 우러나온 신중한 태도였다. 그렇게 해야 그들이 상속된 이삭의 재산을 분배하자고 주장하거나, 이삭이 그들을 보살피거나 그들 때문에 많은 지출을 하는 일이 없을 수 있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은 그가 죽은 다음에 잘못되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하여 "그가 아직 살아 있는 동안에" 이 모든 일을 처리했다는 사실에 주목하자. 많은 경우, 손수해야 할 일을 하고 할 수 있는 한 자기가 살아 있는 동안 할 일을 하는 것이 현명한 처사임을 명심하자. 그는 자기의 서자(庶子)들을 가나안 동쪽에 있는 땅으로 보냈다. 그들의 후손들은 동방 사람이라 불리워졌고, 그 수가 많은 것으로 유명하였다(삿 6:5, 33). 그들이 그렇게 많은 수로 물어난 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그의 씨를 한없이 많게 하겠다고 하신 그 약속의 결과이었다. 아브라함이 재산을 분배해 주었듯이,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복을 나누어주신 것이다. 즉, 일상적인 축복은 이 세상의 자녀, 즉 여종의 자녀들에게 내려 주시는 반면, 계약의 축복은 약속의 상속자를 위해 보존하고 계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가지고 계신 것은 모두 약속의 상속자들의 것이다. 왜냐하면 그 상속자들은 모두 하나님의 이삭과 같은 자들이며, 그 외의 사람들은 영원토록 이들과는 구분될 수밖에 없는 자들인 것이기 때문이다.

Ⅲ. 아브라함의 나이와 죽음의 기록이 있다(7, 8절). 그는 175년간을 살았다. 그것은 그가 가나안에 온지 꼭 100년 후였다. 그는 그처럼 오랫동안 객지에서 한 체류자로 지냈다. 비록 그는 오랫동안 훌륭한 삶을 살았고, 또한 선한 일을 행하고 앓지도 않고 지냈지만, 결국에는 죽은 것이다. 그의 죽음이 여기에 어떻게 묘사되어 있는가를 살펴보자.

1. 그는 "기운이 진하였다" (문자적으로는 "영을 표기했다")고 했다. 그의 생명이 강제로 그에게서 떠난 것이 아니라, 그 자신이 쾌히 그 생명을 하직한 것이다. 자기에게 영을 주신 바 있는 모든 영의 아버지의 손에 양도한 것이었다.

2. 그는 "수가 높아서 죽었다." 이미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그대로였다. 그의 죽음은 그의 나이가 주는 무거운 짐에서 풀려나는 것이었다. 노인은 그런 식으로는 계속 생존하기를 원치 않는다. 또한 나이가 많았음은 영광의 면류관이기도 하였다.

3. 그는 "나이가 많았다. 곧 생 (공급될 만큼 공급되어)이 가득 찼다는 것이다. 또한 삶의 모든 편안함과 안락함을 누리었다는 뜻이다. 그는 세상이 그를 싫증낼 만큼 오래 산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가 세상이 싫증날 만큼 살았던 것이다. 다시 말하면, 그는 충분히 살았기 때문에 세상에 더 살고 싶은 생각이 없었던 것이다. Vixi quantum satis estㅡ 나는 충분히 살았노라. 선한 사람은 비록 그가 늙어서 죽은 것이 아니라 할지라도, 이곳에서의 삶에 만족하고 더 좋은 곳에서의 삶을 동경하면서 충분한 삶을 살고 죽는 것이다.

4. 그는 "자기 열조에게로 돌아갔다" 고 했다. 그의 몸은 죽은 자의 회중으로 돌아갔겠지만, 그의 영혼은 축복 받은 자의 회중으로 돌아간 것이다. 죽음은 우리를 우리의 열 조에게로 돌아가게 한다는 것을 기억하자. 그 열 조들이 하나님의 백성이거나 이 세상의 자녀들이 거나 간에, 죽음은 우리로 하여금 그 열 조들에게 돌아가게 한다.

Ⅳ. 아브라함의 장례(9, 10절). 이 곳에는 아무런 그의 장례의 성대한 의식이다 행사에 대한 기록이 없다. 다만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만을 들을 수 있을 뿐이다.

1. "그의 아들 이삭과 이스마엘이 "그를 장례지냈다. 장례는 그들이 인자한 아버지에게 표할 수 있는 마지막 존경의 임무였다. 이전에는 이삭과 이스마엘 사이에 거리가 있었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직접 그가 살아 있는 동안 그들을 다정하게 만들었든가, 아니면 그의 죽음이 그들 둘 사이를 화해시켜서, 이제는 사이가 좋아졌다.

2. 그는 그가 사서 사라를 장례 지낸 자기 땅에 묻히였다. 살아있는 동안 서로 사랑하던 사람들은 함께 묻히기를 바란다. 그것은 순결한 일인 동시에 칭찬할 만한 일임을 기억하자. 그들은 죽어서도 서로 나누이기를 바라지 않고 있으며, 함께 부활하리라는 희망의 표시를 가지고 함께 묻히기를 원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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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마엘의 족보(창세기 25:11-18)

아브라함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한 후 곧 이어서 모세는 이삭의 이야기를 시작하고 있다(11절). 그가 어디에서 살았고 어떻게 하나님께서 그에게 특별한 은총을 베풀어 주셨는가를 우리에게 이야기해 주고 있는 것이다. 아브라함이 하나님께로 받은 축복은 그의 죽음과 더불어 사라진 것이 아니라, 모든 약속이 자녀들에게 그대로 전하여 졌다는 사실을 명심하자. 그러나 저자는 여기에서 이삭에 대한 이야기를 잠시 떠나서, 이스마엘에 대한 이야기를 간략하게 소개하고 있다. 이스마엘도 아브라함의 아들이고, 그에 관해서도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바다 있으며 또 그 약속이 어떻게 이루어졌는가 하는 것을 우리는 알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언급하고 있는 것은 다음과 같은 사실들이다.

1. 이스마엘의 자손에 대하여, 그는 열 두 아들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12 방백(princes)" 이라고 불리워졌는데(16절), 모두가 가장이었고 후에 제각기 다른 나라와 족속이 되어 그 수사 심히 많게 되었다. 그들은 대단히 큰 대륙을 차지하여 번성하였는데, 그 땅은 애굽과 앗수로 사이에 있어 아라비아라고 불리운 곳이다. 그 열두 아들들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 미디안과 게달이란 이름은 성서에서 흔히 읽을 수 있는 이름이다. 어떤 훌륭한 주석가들은 나란히 적혀 있는 세 이름(14절)의 의미를 밝혀 주기도 한다. 즉 미스마, 두마, 맛사란 이름이 나란히 함께 있는데, 이것은 들으라, 침묵하라, 참으리라는 좋은 충고를 우리에게 들려준다는 것이다. 야고보서 10장 9절에 보면, 이 세 가지 말이 같은 순서로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즉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하며 성내기도 더디하라." 이스마엘의 후손들은 평화로운 때 자기들의 재물을 축적해 놓을 수 있는 장막을 들판에 가지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전쟁이 일어났을 때 스스로를 방어할 수 있는 도시와 성곽들을 가지고 있었다(16절). 이스마엘의 집안이 숫적인 세력에 있어서 확장된 것을 하갈에게 이스마엘에 대하여 행하신 하나님의 약속의 결과이며(16:10) 또한 아브라함에게 행하신 약속의 결과인 것이다(17:20, 21:13). 약속 있는 계약에 대해서는 낯선 자들 중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저들의 경건했던 조상들의 덕분으로 외적인 번성을 축복 받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자. "재물이 저들의 집안에 있으리라."

2. 이스마엘 자신에 대하여, 여기에 그의 나이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근 "137년간을 살았다" (17절). 이는 아브라함이 그를 위하여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 살기를 원하나이다" 라고 기도한 기도(17:18)의 효능을 보여 주기 위하여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는 또한 그의 죽음에 대해서도 언급이 되고 있다. 그도 또한 "그의 열조에게로" 돌아갔다. 그러나 그가 그처럼 오래 살았는데도 그가 "수를 다하였다고" 는 기록되고 있지 않다. 그는 그의 인자한 아버지와는 달리, 세상을 지루해 하지도 않았고 세상을 떠나고 싶어하지도 않았던 것이다. 그가 "그의 형제들의 목전에서 넘어졌다" (개역 성서와 다소 다름: "맞은 편에 거하였다")는 죽었다는 것을 뜻하겠지만, 그것은 "그의 모든 형제 의 목전에서(개역: 동방에서)살리라" 고 하갈에게 말씀하신 것(16:12)이 성취되었음을 보여 주기 위한 것이다. 그 말씀은 그가 그 모든 형제들 중에서 가장 번영하고 탁월한 사람이 되며, 자신의 소유를 끝까지 지키게 되리라는 것을 의미해 준 것이다. 혹은 그가 그를 위로해 주는 많은 친구들이 지켜보는 데서 세상을 떠났다는 것을 뜻하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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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서와 야곱의 출생(창세기 25:19-28)

여기에서 우리는 이삭과 리브가에게서 태어난 쌍둥이 아들 야곱과 에서의 출생에 대한 이야기를 읽게 된다. 그들이 이 세상에 태어난(범상하지 않은)이야기는, 그들에 대한 이야기 중에서도 가장 주목 할 만한 대목이다. 이삭에 대해서는 그의 아버지가 생존해 있는 동안과, 그 후에 그의 아들들이 이야기될 때에 언급이 되고 있으나, 그 자신에 대해서는 많은 언급이 없다. 이삭은 활동적이거나 많은 시련을 겪은 사람이 아니라 그의 생애를 평온하고 조용하게 보낸 사람인 것같이 생각된다. 여기에서 볼 수 있는 야곱과 에서의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Ⅰ. 그들은 기도한 결과로 얻어진 아들들이다. 그들의 부모들이 오랫동안 아이가 없는 다음에 하나님께 간구하여 얻은 것이다(20,21절). "이삭은 40세에 결혼하였다" (20절). 비록 그가 외아들이었고 그를 통하여 약속의 씨가 태어날 그러한 사람이었지만, 그는 결혼을 서두르지 않았던 것이다. 그가 두 아들을 낳은 것은 예순 살이 되었을 때이다.(26절). 그러니 결혼한 후 20년 동안 아이가 없었던 것이다.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는 언제나 확실한 것이다. 그러나 때로는 그 성취가 더디고 하나님의 섭리하심과는 어긋나고 모순되는 것같이 보여 믿는 사람의 믿음이 시련을 받고 그들이 한없는 인내를 견뎌야 하는 수가 종종 있으며, 또한 그러다가 오래 기다렸던 자비가 실현되었을 때는 더욱 기쁨으로 그 자비를 맞이하게 된다는 것을 기억하자. 이 하나님의 은총이 지연되는 동안, 이삭은 아브라함이나 그 후의 야곱과는 달리 여조의 침실에 접근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는 리브가를 사랑했기 때문이다(24:17).

1. 오히려 그는 기도하였다. 그는 자기 아내를 위하여 여호와께 간구했던 것이다. 비록 하나님께서 그의 집안 식구를 무수히 많게 하겠다고 약속하신 바 있지만, 이를 위해 또다시 간절한 기도를 드린 것이다. 하나님의 약속은 우리의 기도를 불필요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약속에 의하여 우리의 기도가 더욱 힘을 얻게 되고, 그 약속이 우리의 믿음의 바탕을 더욱 튼튼하게 해주는 것이다. 이삭은 자주 이 약속하신 은총을 베풀어 줍시사고 기도했고, 이 간청을 여러 해 동안 끊임없이 아뢰어 왔다. 그러나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해서 기도를 중단하지는 않았다. 사람은 언제나 기도해야 하되, 낙심하지 말아야 하기 때문이다(눅 18:1). 또한 쉬지 말고 기도하며 문이 열릴 때까지 두드려야 한다. 그는 그의 아내를 위해서 기도했다. 어떤 사람들은 그의 아내와 함께 기도했다고 읽기도 한다. 남편과 아내는 함께 기도해야 함을 잊지 말자. 그래야만 그들의 기도가 "막히지 않는다" 고 베드로 사도는 조심스러운 충고를 해주고 있다(벧전 3:7). 이삭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그의 자손이 한없이 많게 되리라고 약속하신 (22:17) 모리아산으로 아내와 함께 가서 같이 기도하며, 그의 아내를 위하여 기도하면서, 그 약속이 바로 그곳에서 이루어지게 해 주실 것을 호소했다는 유대인의 전설이 남아 있다.

2. 하나님께서는 그의 기도와 간구를 들으시었다. 자녀들은 하나님의 선물임을 명심하다. 이삭이 한 것처럼 간절한 기도를 끊임없이 계속한 삶들은 마침내 그들이 "헛되이 찾지" 않았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사 45:19).

Ⅱ.그들은 태어나기 전에 이미 예언이 되어 있었다. 그 예언 속에는 신비스러운 일들이 그들이 태어나기 이전부터 쌓여 있었다(22, 23절). 오랫동안 이삭은 아들을 주십사고 기도했었다. 그의 아내는 두 아들을 잉태하여, 그 오랜 기다림은 보상을 받게 되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 이상의 일을 성취해 주신다. 즉 우리가 간구하고 생각할 수 있는 것 이상의 것을 주시는 것이다. 이제 리브가는 두 아들을 잉태하였다. 다음 사실을 살펴보자.

1. 리브가는 지금 자기가 처한 입장에 관하여 마음속으로 무척 당황해 하였다. "아이들이 그의 태 속에서 서로 싸우는지라" 고 했다. 리브가가 느낀 동요는 아주 독특한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몹시 불안하였다. 이 해산이 곧 자기의 죽음이라고 느꼈든지 창자가 뒤틀려 지치게 되었다든가, 혹은 이것은 좋지 못한 징조라고 생각하여, 아이를 갖지 말았든지, 아예 죽어 버리든지, 이렇게 싸우는 태아는 낳지 않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을 품으려 한 것 같다. "이 같으면 내가 어찌할꼬?" 하고 그녀는 말했다(22절). 이전에는 아이가 없는 것이 그의 괴로움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 아이들의 싸움이 그의 괴로움이 된 것이다. 아음 사실을 명심하자.

(1) 우리가 가장 간절하게 바라던 위로가, 때때로 우리가 예상하지 못한 어려움과 불안 속에서 이루어지는 수가 있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해 아래 있는 모든 사물 위에 깃든 허무를 우리에게 깨닫도록 하신다.

(2)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지는 불안 때문에 그것과 함께 오는 위로에 너무 쉽사리 불만을 가지는 수가 있다. 우리는 우리가 언제 기쁜지를 모르고 있다. 우리는 궁핍에 처하는 법도 풍요에 처하는 범도 모르고 있다. 태 안에서 서로 싸우는 야곱과 에서의 이 싸움은 하나님의 나라와 사탄의 나라 사이에 끊임없이 계속되고 있는 싸움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1] 그 싸움은 이 세상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여인의 자손과 뱀의 자손은 그들 사이에 적의가 심어진 이후(3:15)로 끊임없이 다투어 오고 있다. 그리고 이 사실이 인간들 사이의 항구적인 불안을 조성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 그분은 이 세상에 "불을 지르고" 이 세상에 "분열을 일으키러" 오셨다(눅 12:49, 51). 이러한 갈등이 우리들의 장애물이 되어서는 안 된다. 거룩한 전쟁은 악마의 궁전에 있는 평화보다 훨씬 좋은 것이다.

[2] 신자들의 마음속에서 벌어지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영혼 속에 임재하시자마자 영육간의 싸움이 시작된다(갈 5:6). 치열한 싸움이 없이는 이 강물이 변경되지 않는 다. 그러나 그 싸움이 우리를 낙심케 해서는 안 된다. 죄악과 더불어 싸움을 하는 곳은, 나약하게 죄에 굴복하는 것보다 훨씬 좋은 것이다.

2. 리브가는 어떻게 그 불안에서 벗어났는가? 그녀는 "가서 여호와께 물었다" 고 했다. 어떤 사람들은 멜기세덱에게 하나님의 신탁을 물었거나, 또는 우림이나 드라빔을 이용하여 하나님의 뜻을 알고자 했다고 한다. 이 우림과 드라빔은 나중에 판결의 흉패로 사용됐던 것이다. 우리가 매우 당황하고 있을 때는 하나님께 묻는 말이다 기도가 큰 위안을 가져다준다는 것을 기억하자. 우리의 모든 사정을 주님 앞에 털어놓고 그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의견을 구하는 것은 참으로 커다란 마음의 위로가 된다. "성소로 들어가라" (시 73:17).

3. 여호와께서 리브가의 질문에 대하여 답변을 주셨다. 그 답변은 리브가의 궁금증을 해명해 주었다.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도다" 고 했다(23절). 리브가는 두 아기를 임신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두 민족을 임신하고 있는 것이요, 그들은 태도와 성품 뿐 아니라 이해 관계도 크게 상반되므로 서로 싸워야 하는 운명에 처해 있었다. 그리고 그 싸움의 결과는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고 했다. 이것은, 오랜 세월 동안 에돔 사람들이 다윗의 족속에게 종속됨으로써 성취된 일이다. 그 복종은 그들이 반란을 일으키기까지 계속되었다(대하 21:8). 다음의 사실을 살펴보기로 하자.

(1) 하나님께서는 그의 은총을 베푸시는 데 있어서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으시는 자유로우신 분이다. 아직 그들 스스로 선도 악도 행하지 않은 사람들을 구별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특권인 것이다. 바울 사도의 말도 이런 것을 두고 한 말이다(롬 9:12)

(2) 은총과 죄악의 영적 싸움에 있어서, 은총은 죄악보다 어린 자이지만 마침내 큰 자를 쳐부수고 승리할 것이 확실하다.

Ⅲ. 그들이 태어났을 때, 이미 그 둘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었는데 이 사실은 미리 예언된 바(23절)를 뒷받침해주는 것이다. 또한 그 차이는 그 말씀이 성취되리라는 것을 보여 주는 한 전조였고 그 실제의 모형을 잘 말해 주고 있는 것이었다.

1. 그들의 체격도 크게 달랐다(25절). 에서는 태어났을 때 마치 이미 장성한 사람처럼 거칠고 털이 나 있었다. 그래서 그의 이름은 에서 곧 이루어졌더라고 했으니, 이미 다 자랐다는 뜻이다. 이것은 그가 대단히 튼튼한 체격을 가지고 있었다는 암시이다. 그리고 그가 대단히 건강하고 용감하며, 활동적인 인간이 되리라는 기대를 주었다. 그러나 야곱은 다른 아이들처럼 부드럽고 털이 없었다. 이런 것을 기억해 두자.

(1) 인간의 능력이 서로 다르고, 그 결과로 그들이 이 세상에 사는 형편이 서로 다르게 되는 것은, 그들의 선천적인 체질의 차이에 크게 영향을 입는다. 어떤 사람들은 선천적으로 활동성과 영예를 얻을 수 있는 분명한 가능성이 엿보인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눈에 띄게 미천한 모습을 하고 있는 사람도 있다. 섭리의 세계에 나타난 하나님의 주권의 이러한 실례는, 은총의 세계에서 나타날 하나님의 주권에 관한 교리를 보다 잘 이해할 수 있게 해 주고 있는 것이다.

(2)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여 강한 것들을 이기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께서는 늘 취하시는 방법이다(고전 1:26, 27). 그들은 태어날 때에는 분명한 싸움을 보여 주었다.

2. 더 강한 에서가 먼저 태어났다. 그러나 야곱의 손은 "에서의 발꿈치를 잡고" 태어났다(26절). 이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의미하는 것이다.

(1) 야곱은 장자의 권리와 축복을 추구하고 있다. 처음부터 그는 그 권리와 축복을 잡으려고 손을 뻗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가능하면 형이 그것을 붙잡지 못하도록 하려했던 것이다.

(2) 시간이 지남에 따라, 마침내 야곱은 형을 이기어, 장자의 명예를 차지하고 장자의 자리를 얻는다. 그러므로 그의 이름 야곱은 속이는 자 라는 뜻으로 말해지기도 한다(27:36 참조).

3. 그들은 서로 기질이 전혀 달랐고 그들이 선택한 생활 방식도 전혀 달랐다(27절).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은 서로 전혀 다른 성격을 지니고 있음이 드러났다.

(1) 에서는 이 세상일을 추구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사냥꾼이었기 때문에, 자기가 하는 사냥에 몰두한 사람이었다. 그는 또한 생활의 기지를 아는 사람이었다. 따라서 그는 그 오락 기술을 익히고 자기의 모은 시간을 거기에 썼다. 그는 책이나 집안 일을 싫어했다. 그는 니므롯이나 이스마엘과 같이, 사냥만을 위해 살고, 사냥하러 나갈 때 외에는 즐겁지 않았다. 한 마디로 말하면 그는 신사나 군인이 되기에 알맞은 사람이었다.

(2) 야곱은 이 세상이 아니라 다른 세상의 일을 추구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훌륭한 정치가나 위대한 사람은 아니었다. "장막에서 거하는, 평범한(개역: 조용한) 사람" 이었다. 항상 선하고 공평한 정직한 사람이었다. 고독과 조용한 은둔의 참된 기쁨을 번거롭고 소란한 오락이 갖는 외면적인 기쁨보다 더 즐기는 사람이었다. 그는 장막에서 머물고 있었다.

[1] 그는 하나의 목자였다. 그는 양을 지키는 안전하고 조용한 일에 종사하고 있었다. 그리고 자기의 자녀들도 그렇게 양육하였다(46:34).

[2] 그는 하나의 배우는 사람이었다. 어떤 사람들은 그가 멜기세덱이나 에벨의 장막에 자주 들러 그들로부터 거룩한 일에 대하여 배웠다고 하기도 한다. 그런데, 바로 이 아들이 계약을 상속받은 이삭의 아들이었던 것이다.

4. 부모의 애정에 대한 그들의 관심도 서로 달랐다. 이삭과 리브가에게는 이 두 아들밖에 없었다. 하나는 아버지의 사랑을, 또 하나는 어머니의 사랑을 받고 있었던 것 같다(28절). 이삭은 그 자신이 활발한 사람은 아니었으나(그가 들에 나간 것은 사냥을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명상하고 기도하기 위한 것이었던 것 같다)활발한 아들을 사랑했다. 에서는 어떻게 해야 아버지 이삭을 기쁘게 할 수 있는가를 알고 있었다. 그리하여 가끔 사냥한 고기를 대접함으로써 경의를 표하여, 온갖 사랑을 그 인자한 노인으로부터 받을 수가 있었던 것이다.

(2) 리브가는 야곱을 더 사랑했던 하나님의 예언을 언제나 마음에 두고 있었기 때문에, 그를 더 사랑했다. 만약 어떤 이유에서든지 부모가 자녀들을 다르게 취급해야 할 필요가 있는 경우라면,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자를 사랑한 리브가의 태도가 분명히 옳은 일이었다.

 

25:20 없음.

 

25:21 없음.

 

25:22 없음.

 

25:23 없음.

 

25:24 없음.

 

25:25 없음.

 

25:26 없음.

 

25:27 없음.

 

25:28 없음.

 

25:29

장자권을 팔다(창세기 25:29-34)

여기에서 우리는 야곱과 에서가 장자의 권리를 놓고 흥정을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 장자의 권리는 하나님의 섭리에 의하면 에서의 것이었지만, 하나님의 약속에 의하면 야곱의 것이었다. 그 권리에는 탁월한 권위와 능력이 포함되어 있으며, 아울러 재산도 갑절이나 차지할 영적 특권이었다(49:3). 당시의 장자권에는, 그 권리에 따르는 많은 축복과 약속의 상속권까지 내포하고 있었던 것 같다. 이제 다음과 같은 사실들을 살펴보기로 하자.

Ⅰ. 장자권을 가지려는 야곱의 경건한 욕망이 있다. 그는 평범한 사람인 자기의 성품에는 어울리지도 않는, 어떤 우회적인 방법으로 장자권을 획득하려고 조력하였다. 그가 장자권을 탐낸 것은 자만심이나 야망에서 우러난 것이 아니다. 에서는 들판에서 지내면서 미쳐 깨닫고 있지 못했으나, 야곱은 장막에 머물러 있으면서 친숙히 알고있는 영적 축복을 염두에 둔 것이다. 야곱은 최선의 선물을 간절히 탐냈다고 하는 이유 때문에 찬양 받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가 자기형의 절박한 사정을 이용하여 형에게 매우 난처한 흥정을 벌였다는 것은 정당화될 수 없다. "형이 장자의 권리를 오늘날 내게 파소서" (31절). 아마 이전에 이 문제에 관해서 두 사람 사이에 어떤 대화가 있었던 것 같다. 따라서 여기에서 살펴보면 야곱의 그러한 제안이 에서에게 큰 놀라움을 준 것 같지는 않다. 혹은 에서가 그의 장자의 직권과 그에 속한 여러 가지 조건을 가볍게 여기는 말을 자주 했기 때문에, 야곱이 이러한 제안을 에서에게 할 수 있는 용기를 갖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만약 그렇다면, 야곱이 자기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한 행위는 어느 정도 변명의 여지가 있는 것이다. 단순하고 경건한 정직성으로 말하며, 세상적인 지혜가 없는 그러한 평범한 사람들이, 그들의 영혼과 영원에 관하여는 때때로 가장 지혜로울 수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자. 저 세상에 대하여 현명한 사람이 참으로 현명한 사람들이다. 야곱의 지혜는 두 가지로 나타났다.

1. 그는 가장 알맞은 때를, 즉 주어진 기회를 그는 선택했다. 그리하여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2. 흥정을 하고 나서는, 그것을 분명히 하기 위하여 에서로 하여금 맹세하게 하였다. "오늘 내게 맹세하라" (33절). 그는 에서가 마음속으로 바라고 있을 때, 맹세를 시킴으로써 그 흥정을 취소할 수 없도록 해 두었다. 이러한 성질의 일을 하는 데 있어서는 확실히 해 두는 것이 좋은 일이다.

Ⅱ. 에서는 장자의 권리를 함부로 경멸했고, 그것을 어리석게 팔아 부리었다. 그는 이 때문에 "망령된 에서" 라고 불리워졌다(히 12:16). 왜냐하면 한 그릇의 식물(食物)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팔았기" 때문이다. 금단의 열매를 먹은 이래로 인간은 이렇게 한 그릇의 음식을 좋아하게 된 것이다. 후에 그가 후회했으나 그 때는 이미 너무 늦었다. 에서가 한 것같은 어리석은 흥정은 일찍이 한 번도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도 그는 자기 자신의 계획을 스스로 높이 평가했고, 재간 있는 사람이라는 인정을 받고 있었다. 그리고 때로는 자기 동생 야곱을 나약하고 단순한 사람이라고 희롱하기도 했을 것이다. 세상에는 지혜는 몇 푼어치밖에 안 가지고 있으면서 수천량짜리의 어리석음을 가지고 있는 자들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자. 그런 사람들은 마치 다른 사람들보다는 꾀가 많지만, 자기가 친 덫에 걸리고 마는 교활한 사냥꾼과 같은 사람들이다. 그들은 사탄의 계교에 사로잡혀 사탄이 원하는 대로 끌려 다니는 사람들이다. 다시 말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어리석은 자를 택하사, 그들로 하여금 지혜롭다 하는 자를 부끄럽게 하시는 것이다. 평범한 야곱이 교활한 에서를 바보로 만들어 버렸던 것이다. 에서의 어리석음을 살펴보기로 하자.

1. 에서의 식욕은 대단히 강했다(29, 30절). 가련한 야곱은 사냥해 온 고기도 없이 겨우 몇 개의 떡과 팥죽으로(34절) 저녁을 먹고 만족해서 앉아 있었는데 에서는 사냥하러 갔다가 주리고 지쳐서 돌아왔다. 아마 에서는 아무 것도 못 잡은 것 같다. 그런데 야곱의 팥죽을 보니, 이제까지 즐기던 사냥보다 더 좋아 보였던 것이다. 원전에 의하면, 에서는 "그 붉은 것, 붉은 것을 내게 좀 달라" (고 그는 말하였다)고 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것은 그의 피부 색깔과 잘 어울리는 것이었다(55절). 이 일 때문에 사람들은 그를 비난하여 이 후부터 에돔, 붉다 이라고 불렀다. 생각건대, 그는 결코 자기가 음식을 지어먹을 수 없을 정도로 지쳐 있었던 것도 아닌 것 같다. 그러나 그는 자기 동생에게 음식을 달라고 간청한 것이 분명하다. 다음 사실을 명심하자.

(1) 오락에만 몰두하는 사람은 "헛된 일로 곤비하게 되고" 만다(합 2:13). 그러한 어리석은 쾌락을 따르는 에 필요한 수고와 어려움의 반만 들인다 할지라도, 그들은 가장 필요한 일을 할 수 있을 것이고, 최대의 이익을 얻을 수가 있을 것이다.

(2) 침착하고 조용하게 일하는 사람들은 소란을 떨면서 사냥을 하는 사람보다 더 지속적이고 평안히 식량을 갖출 수가 있다. 빵은 언제나 세상일에 현명한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주님을 믿고 선을 행하는 사람에게도 주어지는 것이다. 진실로 그러한 사람들은 주리지 않을 것이니 일용할 양식을 먹을 것이다. 결코 에서와 같이 어느 때는 잔치를 하듯 먹어대고, 어느 때는 주려 죽을 지경이 되고 하지는 않을 것이다.

(3) 감각적인 식욕의 만족은 수많은 귀한 영혼들을 몰락하게 하였다. 만약 정말 에서가 배가 고프고 지쳤었더라도 자기 장자의 권리까지 팔지 않고서도 그보다 값싸게 좋은 고기를 음식으로 구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에서는 무턱대고 팥죽의 빛깔을 보고 좋아했고, 한 그릇 먹고 싶은 욕망을 참지 못하여, 거기에 어떤 대가를 지불해야 할 것인가는 생각지도 못하였다. "마음으로 그들의 눈을 따르고" (욥 31:7), 자기 배를 섬기는 사람에게는, 아무 것도 기대할 것이 없다. 음식이 붉다든가 잔이나 접시에서 붉은 색-이것은 가장 유혹적인 색깔이다-이 있으면, 그 술이나 또는 에서처럼 팥죽일지라도 쳐다보지도 말라고 했다(잠 23:31). 우리가 스스로 자기를 부정할 수만 있다면, 그 때 우리는 가장 두려운 유혹의 힘을 쳐부순 것이다.

2. 에서의 추론은 지극히 빈약한 것이었다(35절). "내가 죽게 되었도다." 만약 그것이 사실이었다면, 어떤 음식으로도 그를 살려낼 수는 없었을 것이다. 더구나 이 팥죽 한 그릇으로 어떻게 그가 살아 날 수 있단 말인가? 라이트 푸트(Light foot) 박사가 생각하듯이, 그 땅에 기근이 들었었다 할지라도(41:56), 이삭이 그 정도로 가난했고 또 리브가가 그처럼 굶주릴 정도로 살림을 잘 못했을 리는 없다. 그러므로 에서에게는 필요한 정도의 음식은 늘 제공되어 왔을 것이며, 장자의 권리를 팔 정도는 아니었을 것이다. 다만 그의 식욕이 그를 사로잡았던 것이다. 그는 간절히 바라고 있던 터이므로, 이 붉은 것, 붉은 팥죽 외에는 어떤 것도 그를 만족시켜 줄 수 없었다. 이 욕망을 채우기 위하여, 자기가 죽을 지경이었다면 불명예 속에서 사는 것보다는 영예롭게 죽는 것이, 그리고 저주 속에 사느니보다는 축복 아래서 죽는 것이 더 낫지 않았을까? 장자의 권리는 먼저 태어난 자들의 교회가 지니는 영적 특권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이제 에서는 장자의 권리를 어떻게 평가하고 있는지를 시험받은 것이다. 그런데 그는 다만 현재 자기가 처한 어려움에만 관심을 가지고 있을 뿐이었다. 즉 그 어려움에서 벗어나려고만 하지 자기의 장자의 권리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있는 것이다. 이에 비하면, 나봇은 더 훌륭한 원리에 입각하여 행동한 사람이었다. 즉 그는 자기 포도원을 파느니 죽음을 택하였던 것이다. 가나안 땅에 있는 자기 땅은 하늘 나라에서의 자기 몫을 상징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왕상 51:3).

(1)만약 우리가 에서의 장자권이 다만 현세적인 이득을 주는 것으로만 본다면, 그의 말에는 일리가 있다. 즉 우리가 가장 좋아하는 이 세상의 즐거움조차도 우리가 죽는 순간에는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한다고 하는 것을 이야기해 주고 있는 것이다(시 49:6-8). 이 세상의 즐거움은 죽음의 습격을 피하게도 하지 못하며, 극심한 고통을 덜어 주지도 못하며, 찌르는 듯한 아픔을 제거해 주지도 못한다. 하나의 신사로서 성장한 에서라면, 그러한 영예를 그처럼 싸게 팔아 버리기보다는 더 크고 도 고상한 정신을 소유하고 있었어야 했을 것이다.

(2) 그러나 영적인 입장에서 본다면 그가 장자의 권리를 경홀히 여긴 것은,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최대의 불경스런 것이다. 이 세상의 부나 명예니 즐거움 때문에 하나님과 그리스도와 하늘나라에 대한 관심을 저버린 것은 말로 할 수 없는 어리석은 짓임을 알자. 그것은 죽 한 그릇에 장자의 권리를 팔아버리는 에서의 흥정과 같이 가장 어리석은 흥정인 것이다.

3. 에서의 눈에서 우리는 어떤 후회의 빛도 찾아볼 수가 없다. "그는 먹고 마셨다" (34절). 자기의 미각을 즐겁게 했다. 소원 성취를 기뻐했다. 맛있는 음식을 먹었다고 자축했다. 그리고 나서는 아무 생각 없이 일어나서 갈 길을 갔다. 그가 한 계약에 조금도 진지한 반성을 해보거나 후회의 빛을 보이지 않았다. 이리하여 에서는 자기의 장자의 권리를 경멸했다. 그는 그 예약을 취소하기 위한 어떤 방법도 취하지 않았다. 이 일에 대하여 아버지에게 나아가 호소하지도 않았다 절박한 사정이 맺은 (그렇다고 우리가 가정한다면) 계약은 ex port facto- 그런 일이 있은 후에 그는 불경한 사람임을 확증해 주었다. 그러고 나서도 자기가 한 행동을 스스로 변명해 버림으로써, 그 계약을 다시는 생각지도 않았다. 사람들이 망하는 것은 잘못을 저질러서라기 보다는, 그 잘못을 저지르고 나서 그것을 회개하지 않고, 그런 일을 계속하고 잘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임을 명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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