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과 아브람과의 계약(1)(창세기 15:1)
여기서는 다음 사실들을 관찰해 볼 수 있다.
Ⅰ. 하나님께서 아브람과 이 조약을 맺은 시기. 그것은 "이 일 후에" 였다. 즉 다음 일들이 있은 후였다.
1. 친구와 이웃들을 그들의 고통에서 구출해 줌으로써 아브람의 관대한 사랑이라는 훌륭한 행동이 있은 후였다. 그것도 값이나 보답을 위한 것이 아닌 행동을 한 후였다. 이 일 후에, 하나님께서는 은혜스럽게 그에게 임하셨다. 사람에게 은혜를 베푸는 자는 하나님께로부터 은혜를 받는다는 것을 명심하자.2. 4왕과 싸운 전쟁에서 승리를 거둔 후였다. 아브람이 그 승리로 인하여 지나치게 의기양양하고 뽐내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나타나셔서 그를 위해 보다 좋은 것을 마련해 두셨다고 말씀해 주신다. 영적인 축복과의 신앙적인 대화는 지나치게 현세적 기쁨에 탐닉하지 않도록 우리를 지켜 주는 훌륭한 방법이 됨을 명심하자. 일반 섭리의 은사는 계약의 사랑의 은사와는 비교가 안된다.
Ⅱ. 하나님이 아브람과 함께 이야기하신 방법. "여호와의 말씀이 이상중에 아브람에게 임하여" (이는 곧 하나님께서 친히 그 뜻을 아브람에게 나타내셨다는 뜻이다)라 했으니, 이는 아브람이 깨어 있었다는 뜻이며, 속죄소에 나타나시는 여호와의 어떤 가견적 모습이 나타났거나 또는 하나님의 영광의 임재가 어떤 감각적인 현현으로 나타났음을 뜻한다. 하나님의 계시하시는 방법은 감각 세계에 거하는 우리들의 상황에 맞추어 주신다는 점을 기억하라.
Ⅲ. 하나님이 주시는 은총의 은혜로운 보증.
1. 하나님은 "아브람아!" 라고 그의 이름을 부르셨다. 이는 곧 아브람의 큰 영광이었으며, 그 이름을 위대하게 한 것이요, 그 신앙에도 큰 용기와 도움을 준 것이다. 특별한 경우에 하나님의 심중에 올려올 때,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선을 베푸시는 것임을 명심하라. 말씀이 "오라, 모든 사람이여!" (사 55:1)라 하시고, 성령은 "오라, 누구이든!" 이라고 하신다.2. 불안해하고 당황해 하지 말라고 아브람에게 경고하셨다. 즉 "아브람아, 두려워 말라." 아브람은 자기가 괴멸시킨 4왕들이 재 규합하여 자기를 습격하여 망하게 하지 않을까 하여 두려워하였을지 모른다. 그러나 "아니다, 두려워 말라. 그들의 보복이나 이웃들의 시기를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돌보리라" 고 말씀하신 것이다. 주목 해 둘 것이 있다.
(1) 깊은 믿음이 있는 사람에게라도 두려움이 있을 수 있다(고후 7:5).
(2) 하나님은 지금껏 은밀히 계셨다 하더라도, 자기 백성의 공포심을 감찰하시고 "그들의 영혼을 아신다" (시 31:7)
(3) 하나님의 백성은 어떠한 두려움이든 그 두려움에 좌절되지 않은 것이 아니라는 하나님의 뜻이다. 시온에 있는 죄인들을 두려워 할 것이나 아브람은 두려워 말라.
3. 하나님은 그에게 영원한 안전과 행복을 보증하셨으니, 다음과 같다.
(1) 하나님께서 친히 보호하시는 안전이다. "나는 너의 방패라." 또는 보다 강조하여 "나는 네에게 방패이니라" 고 말씀하시니 그와 함께 하시고 돌보시리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실뿐 아니라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이신 분이다(대상 17:24 참조). 이것을 생각할 때, 하나님께서 친히 그 백성에게 대항하는 온갖 파괴적인 죄악에서 그들을 안보하는 방패요, 그들에게 준비가 되는 방패이며, 그리고 그들의 주위를 둘러싸는 방패이시니, 장래에도 그리할 것이며, 또 하나님의 백성들을 당혹케 하고 괴롭히는 모든 공포를 잠잠케 하신다는 것을 기억하자.
(2) 하나님께서 친히 배푸시는 행복이다. 즉 "나는 너의 지극히 큰 상급" 이라고 했다. 상급을 주시는 자일 뿐 아니라 상급(자체)이라는 것이다. 아브람은 소돔 왕이 제의한 보상을 기꺼이 거절했으나, 하나님께서 오셔서 그 때문에 그의 상급이 상실되는 일이 없도록 해 주시리라는 약속을 의미한다. 다음을 주목하자.
[1] 신앙의 순종과 극기에 대한 상급은 지극히 큰 것이다(고전 2:9).
[2] 하나님 자신이 거룩한 영혼들의 선택되고 약속된 행복이 되니, 이 세상에서 택하여 내고 보다 나은 곳을 약속해 주는 행복이 되신다. 그가 곧 "그들의 상속과 잔은 분깃" 이시다.
하나님과 아브람과의 계약(2)(창세기 15:2-6)
여기에는 아브람에게 수많은 자손이 계승될 것을 허락하신다는 확증이 있다.
Ⅰ. 거듭되는 아브람의 불평(2,3절). 이것이 그 약속에 대한 한 계기가 된다. 아브람을 몹시 괴롭히는 고통은 그에게 자녀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자기의 불평을 여호와 앞에 토하며 자기의 우환을 그 앞에 진술한다" (시 142:2). 하나님께 불평을 해서는 결코 안 된다. 그러나 그에게 불평을 호소하고 우리 슬픔을 자세히 아뢸 수 있도록 우리에게 허락되어 있다는 사실을 주목하라. 신의가 두텁고 인정 깊은 친구에게 불평의 사유를 털어놓은 것은 무거운 짐진 영혼에게 다소간 마음에 편안을 준다. 그와 같은 친구가 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며, 그의 귀는 항상 열려 있다. 아브람의 불평은 4가지였다.
1. 지식이 없다는 것(3절). "주께서 내게 씨를 아니 주셨으니", 아들 뿐 아니라 "아무런 씨도" 주시기 아니하셨다는 뜻이다. 만일 그에게 딸이라도 있었다면 그 딸로부터 약속된 메시야가 오셨을 것이며, 메시야는 그 여인의 씨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에게는 아들도 딸도 전혀 없었다. 그는 "내게" 하는 점을 강조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의 이웃에는 자녀들이 많고, 자기 종들도 자기의 집에서 낳은 자녀들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내게는 주께서 아무 것도 주시지 아니하셨나이다" 라고 불평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누구보다도 아브람을 총애한다고 그에게 말씀하셨다. 자녀가 없는 자들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만드셨다고 보아야 함을 기억하자. 또한 하나님께서는, 흔히 하나님께 낯선 다른 사람들에게는 풍성히 주시는 현세적 즐거움을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허락지 아니하시기도 하신다.2. 자기에게는 앞으로도 자식이 있을 것 같지 않다는 불평이다. 그것은 다음과 같이 암시되어 있다. "내가 자식 없이 가오니, 점점 늙어가고, 언덕을 급히 내려가는도다. 오히려 그보다는, 나는 이 세상을 떠나가고 있으니, 세상 사람의 모든 길을 가고 있도다. 나는 자식 없이 죽는구나." 70인역 성격에 기록된 대로 "나는 세상을 떠나지만 내 뒤에는 자식을 남기지 않는도다."
3. 지금으로서는 자기에게 있는 종들이 아들을 대신해야 할 형편이라는 불평이다. 그가 살아 있는 동안에, "그 집의 청지기는 다메섹의 엘리에셀이었다." 아브람은 그에게 자가 가정일과 재산을 위임하였고, 그 종은 신실했을 것이니 그의 충성은 아들로서가 아니라 종으로서의 충성뿐이었다. 그가 죽은 후에는, "그의 집에서 길리운자" 가 그의 후사가 될 것이며, 지금까지 위하여 수고했던 모든 것을 그가 다스리게 될 것이며, 지금까지 위하여 수고했던 모든 것을 그가 다스리게 될 처지였다.(전 2:18, 19, 21). 하나님께서는 이미 아브람으로 "큰 민족" 을 이루게 하시리라는 것(12:2)과 "그의 자손이 땅의 티끌처럼" 되게 하리라고 하셨다(13:6).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의 자손이란 것은 그가 낳은 씨일 것인지, 양자 삼은 씨일 것인지 즉 자기가 난 아들에 의해서일지 단지 그의 집안 중의 한 아들에 의해서일지를 의심스럽게 만들었다. 아브람은 "이제 여호와여, 만일 그가 양자에 불과하다면 내 종들 가운데 하나일 것이 틀림없으니, 그로부터 계승됨을 약속된 씨에 대한 불명예가 될 것입니다." 라고 말하는 것이다. 약속된 자비가 지연되는 동안, 우리들의 불신앙과 초조가 그 약속을 부정하는 결론에 이르게 하기 쉽다는 점을 명심하자.
4. 아들이 없는 것이 굉장히 큰 고통이라는 불평이다. 즉 그것이 그가 향유했던 온갖 즐거움을 앗아가고 만다는 불평이다. "여호와여 무엇을 내게 주셨나이까? 내게 아들이 없다면 모든 것이 내게는 무의미합니다.
(1) 만일 아브람이 현세의 즐거움 이상의 것을 바라고 있지 않았다면, 이러한 불평은 비판받을 만하다. 하나님께서는 섭리로써 좋은 것을 주셨다. 그리나 약속을 통해 더욱 좋은 것은 그에게 주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브람은 그것을 헤아리지 못하고 있으니, 그것은 그에게 아들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나는 너의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고 말씀하신 직후에, 신앙의 조상 아브람이, "주 여호와여, 무엇을 내게 주시려나이까? 나는 무자(無子)하나이다" 라고 말했다는 것은 지극히 큰 잘못이라 하겠다. 하나님과 계약적 관계에 있다는 것의 이점과 하나님께 관심하는 일의 이점이 모든 세상적 위안의 결여를 능히 보상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 자들은 그 계약관계와 관심의 이점을 올바로 평가하지 못한 자들이라는 사실을 주목하라.
(2) 그러나 아브람이 여기서 약속된 씨에 유의하고 있었던 것이라면, 그의 욕망이 간절함은 매우 본받은 만한 일이라 할 수 있다. 그 위대한 축복에 대한 보증과 자기와 메시야와의 관련에 대한 확증이 없었다면 모든 것이 그에게는 무의미했었을 것이지만, 하나님께서는 그것들에 대한 기대를 품으라고 이미 아브람에게 격려해 주신 바 있었다. 그는 부귀와 승리와 명예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 주요한 문제가 회의로 남아 있는 한, 모든 것이 그에게는 무의미 했다. 그리스도와 새 계약에 관한 우리들의 관심에 어떤 충분한 증거를 얻기까지는, 다른 어떤 것으로 만족해서도 안 된다는 사실을 유의하자. "이것도 저것도 내게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 없이 나아간다면, 그 모든 것이 내게 무슨 소용이랴? 그러나 이러한 불평은 비난을 받을 수 있으니, 그것은 그 불평의 저변에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다소간의 불신과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지 못하는 권태가 있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약속과 때를 기다리지 못하는 권태가 있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약속과 섭리가 서로 일치되지 않는 것처럼 보일 때는 종종 신앙인 마저도 그것을 조화시키기 어려움을 알게 된다는 점을 주목하자.
Ⅱ. 이 불평에 대한 하나님의 은혜로운 응답. 그 불평의 첫 부분에 대하여는(2절), 하나님께서 즉각적인 응답을 주시지 않았다. 그 불평 속에는 조급함이 들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아브람이 다소 보다 침착하게 자기 말을 고쳤을 때에는(3절).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은혜로이 응답하였다. 끊임없이 기도를 힘쓰되 겸손하게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마음으로 기도하지 아니하면, 우리의 간구함이 헛된 일로 끝남을 기억해 두자.
1.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아들의 약속을 분명히 해 주셨다(4절). 네가 가장 염려하듯이, 너의 집에서 길리운 자가 "너의 후사가 될 것이 아니라, 네 몸에서 난 자가 네 후사가 되리라" 고 했다. 살펴보자.(1) 하나님께서는 후사를 만드신다. "이것은 아니되리라. 이것은 되리라" 고 말씀하신다. 사람이 자기의 재산을 처분하기 위하여 어떤 궁리와 계획을 하든, 이루어지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라는 점을 명심하자.
(2) 하나님은 때로 우리가 걱정하는 것보다는 훨씬 더 인자하시며, 오래도록 우리가 단념해 버렸던 긍휼을 다시 베풀어 주신다.
2. 이 같은 약속에 대한 보다 큰 확증을 주기 위하여, 하나님은 아브람을 밖으로 이끌어내고 하늘의 별을 보여 주셨으며(이것을 목적케 한 것은 낮이 오기 전의 이른 아침이었다),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5절0고 말씀해 주셨다. 즉 다음과 같이 되리라는 말씀이다.
(1) 그렇게 엄청나게 많게. 별은 보통 사람의 눈으로 보더라도 무수히 많이 보인다. 아브람은 자기가 전혀 자식이 없게 되지 않을까 두려워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에게서 나는 자손들의 수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되리라고 보증해 주셨다.
(2) 그렇게 빛나게. 곤 찬란히 빛나는 별과 같이 되리라는 것이다. "그들에게는 영광이 주어지기" (롬 9:4) 때문이다. 아브람의 육신을 좇아 난 그의 자손이 땅의 티끌과도 같았으나(13:16), 그의 영적인 자손을 하늘의 별과 같이 엄청난 수효가 될 뿐 아니라 영광스럽고 매우 귀중하게 된 것이다.
Ⅲ. 하나님께서 지금 세우신 그 약속을 아브람은 확고히 믿었고, 하나님은 그의 믿음을 열납하신다(6절).
1. 아브람의 "여호와의 믿으니라" 고 했다. 즉 계약을 주신 이의 저항할 수 없는 능력과 범할 수 없는 신성을 의지하여 지금 자기에게 준 하나님의 약속의 진실성을 믿었다는 것이다. "그가 말씀하셨으니, 그것을 이루지 아니하겠는가?" 약속으로 위안을 받고자 하는 자는 그 약속을 신앙과 잘 조화시켜야만 함을 명심하자. 바울 사도가 이와 같은 아브람의 믿음을 그 얼마나 찬미했으며 표본으로 삼고 있었던가를 살펴보자(롬 4:19-20). 그의 믿음은 약하지 아니하였다. 그의 약속을 의심치 않았다. 그는 믿음에 강하였다. 그는 전적으로 확신에 찼었다. 여호와에게 그와 같은 믿음이 우리 각자 속에 역사하도록 하신다. 혹자는 생각하기를, 여호와에 대한 그의 신앙은 약속을 주시는 여호와뿐만 아니라, 새 계약의 중보자 되시는 우리 주 예수 곧 약속된 주님에 대한 신앙이기도 한다.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곧 자신에 관한 하나님의 계시를 받고 깨달아, 비록 매우 요원한 일이었지만, "여호와의 때를 보고 싶어하였다" (요 8:56)2.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셨다." 곧 이 일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를 받아들이셨고, 다른 족장들처럼 "믿음으로써 의로운 자라 하는 증거를 얻었다" (히 11:4). 그러므로 신약성서는 율법의 공로가 아니라 믿음으로써 의롭게 된다고 역설하는 바이다(롬 4:3; 갈 3:6). 아브람은 아직 할례를 받지 않았을 때에도 그처럼 의로왔기 때문이다. 선행을 그렇게 많이 한 아브람이 그 선행에 의해서가 아니라 믿음으로 의로와졌다면, 그런 선행을 많이 하지 못한 우리들이야 더욱 그럴 수 없는 법이다. 아브람에게 의를 가져다 준 이런 믿음도 전에는 불신앙과 애써 싸웠으나(2절), 이제는 승리자가 되어 면류관과 명예를 얻은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또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타나신 바 은혜롭고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약속을 실제로 확고히 받아들이고 의지하는 일은, 세 계약의 대의에 따르면, 그 약속 안에 내포되어 있는 모든 축복에 대한 권리를 획득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주목하자. 아브람처럼, 모든 믿는 자들은 의로와진다. "또한 그를 의롭다고 여기게 하는" 것은 그의 믿음인 때문이다.
하나님과 아브람과의 계약(3)(창세기 15:7-11)
여기서는 가나안 땅을 아브람에게 유업으로 보증해 주시는 기사를 볼 수 있다.
Ⅰ. 가나안 땅에 관한 하나님 자신의 의도를 선언하신다(7절). 아브람이 자식이 없음을 불평하면서도, 이 문제에 대해서는 불평치 않았음을 주목하라. 약속의 씨에 분명한 관심을 두고 있는 자는 약속된 땅에 대한 자격을 의심해야 할 까닭이 없음을 명심하라. 그리스도가 우리의 것이라면, 하늘 나라도 우리의 것이다. 또한 앞서 준 약속을 믿었을 때(6절), 그 때에 하나님께서는 이 약속을 설명해 주시고 확인해 주셨음을 재삼 주목하라. 가진 가가(그것을 늘이어) 더 많이 갖게 됨을 주목하라. 이 좋은 땅에 관하여 아브람에게 용기를 많이 갖게 됨을 주목하라. 이 좋은 땅에 관하여 아브람에게 용기를 북돋아 주기 위하여, 하나님은 그에게 3가지 일을 상기시킨다.
1. 하나님 그분은 누구이냐? "나는 여호와로다."(1) 그러므로 "그것을 내가 네게 주나니, 나는 모든 것을 다스리는 여호와이므로, 그리하여 모든 땅을 처리할 권리 또한 내가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 는 것이다.
(2) "어떤 반대가 있더라도, 아낙의 아들들도 말미암는다 하더라도, 나는 그것을 네게 줄 수 있느니라." 흔히 있는 인간의 경우와는 달리, 하나님께서는 결코 이룰 수 없는 어떤 것을 약속하지 않는다.
(3) "내가 나의 약속을 네게 이루게 하리라." 여호와는 거짓말을 하는 인간 따위의 존재가 아니다.
2.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위해 행하셨던 일. 하나님께서 그를 갈대아 우르에서 이끌어 내셨다. 혹자는 "그를 갈대아 불에서" 이끌어 냈다고 한다. 이것은 저들의 우상숭배(갈대아 사람들은 불을 섬기고 있었기 때문이다)에서 끌어내셨던 것이든지 또는 저들이 핍박에서 이끌어내셨다는 뜻이다. 아브람은 우상 숭배를 거절했기 때문에 불길이 심한 화로에 던져졌으나 기적적으로 구출되었다는 전설이 유대 저작자들에게는 전해지고 있다. 그 곳은 아마 그런 이름에 합당한 곳이리라. 그러므로 하나님은 한 효력 있는 소명을 주어 그를 거기서 이끌어내셨고, 은혜로운 강권으로 이끌어내셨으니, 타나 남은 그루터기 같이 불 속에서 낚아채 주신 것이다.
(1) 이것은 특별한 자비였다. 즉 "내가 너를 이끌어내고 수천의 다른 자들은 그 곳에서 멸망하도록 남겨 두었느니라" 고 하신다. "하나님은 그를 부르셨다" (사 51:2).
(2) 그것은 영적인 자비로서, 그의 영혼에 대한 자비요, 죄와 죄의 치명적인 결과에서의 구원이었다. 하나님께서 우리 영혼을 구원해 주신다면, 우리들에게는 아무 것도 부족할 것이 없다.
(3) 이것은 새로운 자비이다. 최근에 주신 자비이다. 그러므로 더욱 감동적인 자비였다. 10계명의 서두에, 최근에 "너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의 하나님 여호와로다" 는 말씀이 있음과 같다.
(4) 기초가 되는 자비요, 자비의 시작이요, 아브람에게 특정된 자비이다. 따라서 이것은 앞으로 있을 자비에 대한 공약이요 보증이다(사 66:9). 하나님께서 얼마나 자랑스럽게 말씀하시는가를 살펴보라. "나는 너를 이끌어낸 여호와로다." 이것은 권능의 행동인 동시에 은혜의 행동이라고 하나님께서 자랑하신 것이다. 오랜 후에 자랑한 것과 비교해 보라(사 29:22 참조). "그러므로" 아브람을 "구속하신 여호와께서 말씀하셨고", 그를 죄악에서 구원하셨다.
3. 장차 그를 위해 행하실 바, "이 땅을 차지하게 하기 위하여 저 뿐만 아니라, 유업으로 이 땅을 네가 주기 위하여, 내가 너를 여기까지 이끌어 내었으니, 이것은 가장 친절하고 확실한 권리 부여이다." 다음을 주목하자.
(1) 선한 사람들에게 베풀어지는 하나님의 모든 섭리 속에는 은밀하나 은혜스러운 계획들이 들어 있다. 그러나 모든 자비와 영광 속에서 그 사건이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게 될 때 비로소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의 목적을 깨달을 수 있다.
(2)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다루시는 온갖 일 속에서 계획하시고 있는 위대한 일, 바로 그것은 그들을 안전하게 하늘로 이끌어 주시는 것이다. 저들은 "구원을 얻도록 선택되었고" (살후 2:13), "하늘 나라에 이르도록 부름 받았고" (살전 1:3-4), "기업을 잇게 하셨고" (벧전 1:3-4), 모든 것으로 그것에 "합당하게 되었느니라" (골 1:12, 13; 고후 4:17).
Ⅱ. "내가 이 땅으로 업을 삼을 줄 무엇으로 알리리까?" 하였다. 아브람은 어떤 표적을 바랐다(8절). 이는 사가랴의 불신처럼 하나님의 능력과 약속을 불신하는 것에서 우러나온 것은 아니었다. 그가 이것을 바란 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가 있었다.
1. 자신의 믿음을 강화하고 굳세게 하기 위하여. 그는 믿고 있었다(6절). 그러나 그가 간절히 빌고 바랐던 것은 "여호와여, 나의 불 신앙을 도우소서" 하는 것이었다. 지금은 그가 믿었으나, 자기의 믿음이 앞으로 여러 가지 사건을 당하여 충격과 시험을 받을지도 모르므로, 그 유혹의 때를 대비하여 간직해 둘 어떤 표적을 바라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모두 자신의 믿음을 공고히 하기 위하여 하늘로부터 오는 도움을 바랄 필요가 있으며, 또 그래야겠다. 그 같은 목적을 위하여 세워진 표적인 바 성례전을 행해야 하겠다(삿 6:36-40; 왕하 20:8-10; 사 7:11, 12 참조).2. 자기 후손에 대한 약속에 승인을 얻기 위하여. 그래서 그들도 이것을 믿게 하기를 원했다. 자신은 스스로 만족하더라도 남들도 역시 하나님의 약속의 진리로 만족할 수 있기를 바라야 한다는 것을 명심하자. 요한이 자기 제자들을 그리스도에게로 보냈던 것은 자기의 만족을 채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제자들의 만족을 이루기 위해서였다(마 11:2, 3). 가나안은 하늘 나라의 모형이다. 우리들이 하늘의 가나안을 기업으로 받게 되리라는 것을 아는 일, 즉 그 행복의 진리에 대한 우리의 신앙을 확고히 한다는 것, 그래서 하늘의 가나안을 계승할 우리의 권리의 점점 더 명백히 한다는 것은 매우 바람직한 일이다.
Ⅲ. 하나님은 희생 제물을 준비하라고 아브람에게 명령하신다. 그것으로써 그에게 표적을 주기 위해서였다. 그리하여 아브람은 그것을 준비한다(9-11절). "나를 위하여 암소를 취하라" 하신다. 아브람은 아마 하늘에서 오는 어떤 특별한 표적을 기대했으리라. 그러나 하나님은 희생 제물 위에다 표적을 주신다.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확증을 얻고자 하는 자들, 또 자기들을 믿음을 확고히 하고자 하는 자들은 지정된 의식을 따르고 그 의식을 통하여 하나님과 만날 것을 기대해야 함을 유념하라. 다음을 살펴보자.
1. 하나님은 이 의식에 쓰일 각 짐승은 3년 된 것이어야 한다고 정하셨다. 그 때가 되어야 짐승들이 충분히 성장하고 강해지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최선의 것을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 하나님은 역시 우리의 최선이기 때문이다.2.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그 짐승과 새를 구체적으로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특별 지시를 하신 말씀이 없다. 이는 아브람이 제사법과 관습에 조예가 있어서 다른 특별 지시가 필요치 않았든지, 성서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하나님의 지시가 있었고, 그는 그대로 주의 깊게 지켰을 것이다. 최소한 여기에 암시되어 있는 바는 아브람은 계약 승인을 위한 의식 때문에서라도 제물을 준비해야 했고, 그는 그것을 준비하는 법을 익히 알고 있었다는 점이다.
3. 아브람은 비록 이것이 어떻게 되어 표적이 될는지는 아직 몰랐지만, 하나님의 지시대로 따랐다. 이것이 그의 묵종의 첫 실례는 아니다. 계약 확증의 의식을 따라 아브람은 짐승의 중간을 쪼개었다(렘 34:18, 19). 그 성경 구절에는 "그들이 송아지를 둘로 쪼개고 그 둘 사이로 지나갔다" 고 기록되어 있다.
4. 아브람은 하나님의 지시를 따라 제물을 준비하고 난 다음, 파수대 위에 섰던 예언자와 같이(합 2:1), 이런 일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실 표적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실 표적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나님께서 속히 그의 제사를 받으시려 나타나지 않았어도, 아브람은 계속 기다리고 있었다. 하나님의 나타나심이 지체된 것은 아브람의 기대심을 불러일으켰다. "솔개가 그 시체 위에 내려와서" 쪼아먹으려 할 때, 흔히는 이런 일을 소홀히 여기고 마는 일이지만, "아브람은 그들을 쫓아 버렸다" (11절). 아브람은 하나님께서 환상으로라도 나타나셔서 "말씀하시고 거짓말하지 않으리라" 는 것을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매우 조심성 있는 눈은 우리의 영적 제물을 경계하여 어느 누구도 그것을 쪼아먹도록 버려두거나 하나님 받으시기에 불합당한 것이 되지 않게 해야 함을 기억하자. 이런 솔개들처럼 헛된 생각이 우리들의 제물 위에 내려올 때에 우리는 그런 것들을 쫓아 버려 우리 안에 깃들지 못하게 해야 한다. 방심하지 말고 하나님을 섬겨야 한다.
하나님과 아브람과의 계약(4)(창세기 15:12-16)
아브람의 자손에 관한 하나님의 목적이 완전하고 상세한 발표가 여기에 나타나 있다. 다음 사실을 고찰해 보자.
Ⅰ. 이러한 발표를 가지고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신 그 때. "해 질 때에" 또는 "기울 때" 이었다. 이것은 "저녁 소재 드릴" 무렵을 뜻한다(왕상 18:36; 단 9:21). 해 뜨기 전 이른 아침, 아직 별이 보일 때에 하나님께서 그에게 제사에 대한 명령을 내리셨다(5절). 생각건대, 그 제사를 준비하여 차려놓는 것은 적어도 아침에 해야 할 일이었다. 그리고 나서 저녁때가 될 때까지 기도하고 기다리면서 규례를 굳게 지켰던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때때로 자기가 베풀 위로를 그 백성들이 오래 기다리도록 하신다. 이것은 그들의 믿음을 돈독히 하기 위함이라는 것을 명심하자. 또 기도의 응답이나 약속의 실현이 늦어지는 수가 있지만 필경은 이루어진다는 것을 아울러 명심하자. 저녁이면 새벽도 오리라.
Ⅱ. 이 발표를 위한 예비적 일들.
1. "아브람은 깊이 잠들었다." 이것은 피곤이나 부주의로 인한 보통 수면이 아니라,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신 것" (2:21)과 같이 하나님께서 준 무아경이며, 감각적인 사물의 시계(視界)가 완전히 차단되고, 온전히 영적 사물만 묵상하도록 하게 한 것이다. 육체의 문을 폐쇄하고, 영혼을 은밀하고 한적케 하여 영혼만이 홀로 보다 자유롭게 활동하도록 하신 것이다.2. 이 잠으로 "캄캄함이 임하여 심히 두려워하였다." 이 얼마나 돌발적인 변화인가! 잠시 전에는 하나님의 계약이 주는 위안과 그와의 교제로 인하여 자위하고 있었는데, 이제 "캄캄함이 임하여 심히 두려워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빛의 자녀라고 하여 항상 빛 가운데로 걸어가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구름과 어두움이 그들 주위에 임한다는 것을 기억하자. 공포를 몰고 온 이 큰 어두움 속에는 다음과 같은 의도가 있었다.
(1) 아브람의 영에 경외하는 심정을 지니게 하고 거룩한 숭앙을 지니게 하여, 하나님께서 기쁘게 허락하신 허물없는 친교가 치욕을 당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다. 거룩한 두려움은 영혼에 거룩한 기쁨을 준다는 것을 기억하자. 또한 속박된 영(the spirit of bondage)은 택함 받은 영(the spirit of adoption)에 이르는 길을 예비한다는 것을 알아두자. 하나님께서는 먼저 상처를 주고 나서 고쳐주시며, 낮추신 후에야 높이 올리신다(사 6:5, 6 이하).
(2) 하나님께서 아브람의 자손들을 상대하시는 그 방법의 표본을 삼고자 함이었다. 아브람의 자손들은 먼저 애굽인의 노예라는 공포와 어두움에 처한 후에야 기쁨으로 복된 땅에 들어갔다. 따라서 아브람은 자손들의 행복을 예견하기 전에 먼저 그들의 고난을 미리 맛보아야 했던 것이다.
(3) 이제 곧 아브람과 세울 특별 계약의 성실성을 보여 주기 위함이었다. 기 계약에 기초하여 있는 것이 구약 성서의 율법이니, 그 율법은
[1] 어두움과 불분명한 율법이며(고후 3:13, 14).
[2] 두려움과 공포의 율법이었다(히 12:18 이하).
Ⅲ. 그 자체가 예언이었다. 여러 가지 일이 거기에 예고되어 있다.
1. 장기간에 걸칠 아브람의 자손의 고난상(13절). 아브람은 자기 식구들의 영예와 번창만을 자랑할 수는 없었다. 아니, 그는 믿고 싶지 않았지만 약속된 자손들이 핍박의 씨가 되리라는 사실을 확실히 알아야 했다. 하나님께서는 최악의 것을 먼저 보내 주신다는 것을 주목하자. 우리들은 고난을 당한 후에야 지배권을 가지게 된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이 최악의 것에 도달하기 전에 그것을 미리 알게 하여, 그 일에 닥칠 때 당황하지 않게 해 주신다(요 16:4). 여기서 다음을 알 수 있다.(1) 그들이 받을 고난의 구체적 내용.
[1] 그들은 나그네 되리라. 처음에는 가나안에서 그랬고(시 105:12). 나중에는 애굽 땅에서 그러하였다. 자기들의 땅에서 주인이 되기 전에, 그들은 이방에서 나그네가 되어야 했다. 불안정의 불편은 즐거운 정착을 보다 큰 기쁨으로 맞도록 해 준다. 이와 같이 하늘 나라의 상속자들은 먼저 그들의 땅이 아닌 이 세상에서는 나그네들이 되는 것이다.
[2] 그들은 종이 되리라. 애굽인들의 종이 되었다(출 1:13). 가나안인들의 운명이 아브람 자손들의 고통을 어떻게 드러냈는가를 살펴보라. 그들도 남을 섬기는 신세가 되었으나 가나안인들과는 다른 점이 있다. 즉 가나안들을 저주로 인하여 남을 섬기나, 히브리인들은 축복을 받아 남을 섬긴다는 차이점이다. "정직한 자는 아침이 오면 다스리리라" (시 49:14).
[3] 고난받는 자가 되리라. 그들이 섬기는 자들이 그들은 괴롭힐 것이라 했다(출 1:11 참조). 하나님께 축복을 받고 사랑 받는 자들이 흔히 악한 자들에게서 심한 괴로움을 당한다는 사실은 명심하자.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예견하시고 인정하고 계심을 또한 알아두자.
(2) 그들의 고난은" 400년 간" 계속되리라. 이러한 핍박은 애굽 여인의 소생인 이스마엘이 "성령을 따라 난" 이삭을 핍박하였을 때의 조롱으로 시작되어(창 21:9; 갈 4:29), 히브리인과 애굽인의 상호적 혐오심으로 계속 되었다. 히브리인과 함께 식사하는 일이 애굽인들에게는 부정한 일이었기 때문이다(시 43:32). 그리하여 마침내는 애굽인들의 새로 태어난 자녀를 죽이는 잔인한 살인에까지 이른다. 그리하여 결국은 그렇게 긴 기간은 아닐지 모르나, 400년간 핍박이 계속되었다. 이 기간은 오랜 기간이었다. 그러나 한정된 기간이었다.
2. 아브람의 자손들의 원수들이 받을 심판. "그 섬기는 나라 곧 애굽인들까지도 내가 응징하리라" 고 했다(14절). 이것은 애굽의 재앙을 의미한다. 이 재앙 때문에 애굽인들은 할 수 없이 이스라엘인들을 해방시켜 주었을 뿐 아니라, 그들이 이스라엘인들에게 주었던 온갖 고생에 대한 벌이되었던 것이다. 다음을 알아두자.
(1) 하나님은 비록 핍박자와 압제자들이 지극히 오랫동안 하나님의 백성들을 유리하도록 허락하시지만, 필경 그들을 헤아리신다는 명백한 사실. "그의 날이 다가오고" 있기 때문이다(시 36:12, 13).
(2) 핍박자들을 벌하시는 일은 곧 심판이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을 괴롭히는 자들은 재난으로 보응하시니, 이것은 하나님의 의로운 행동이요 정의의 구체적 행동이라는 사실이다. 교회의 원수들을 심판하는 일은 하나님께 속한 일이다. "내가 심판하리라" 고 하셨다. 하나님은 원수들을 심판하실 수 있으니, 그것은 그가 여호와의 시기 때문이다. 또 그의 백성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렇게 하실 것이다. "보수(報讐)는 내 것이니, 내가 보응하리라" 고 하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하나님 나름의 방법과 때를 따라 그 일을 이룰 수 있도록, 심판하는 일은 하나님께 맡겨야 한다.
3. 아브람의 자손들을 애굽에서 구해 내리라는 사실. 그 위대한 일이 여기에 예고되어 있는 것이다. "그 후에 네 자손이 큰 재물을 이끌고 나아오리라" 고 하신다. 다음의 것이 약속되어 있다.
(1) 그들이 해방되리라는 것. "후에 네 자손이 나오리라" 고 했다. 이것은 곧 400년 간 그들이 괴로움을 받고 예속이 끝난 후든지 애굽인들이 심판을 받고 재앙을 받은 그 후에, 그들에게 해방이 있으리라는 것이다. 압제자의 멸망은 피압제자들의 구원이라는 점을 기억하자. 그들의 강압을 받기까지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가게 하지 않는다는 것도 주목하라.
(2) 부유하게 되리라는 것. "네 자손이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오리라" 했다. 이것은 그대로 이루어졌다(출 12:35, 36).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복된 땅으로 이끄실 뿐만 아니라, 저들 많은 재물을 함께 가지고 나오도록 돌보아 주셨다.
4. 가나안 땅에서는 복된 정착(16절). 그들은 애굽에서 나올 뿐아니라 "그들이 이 땅으로 돌아오리라" 했다. 가나안 땅으로, 곧 저희가 지금 살고 있는 그 땅으로 오게 되리라는 것이다. 그들이 그 땅을 잠시 동안 차지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 그들의 권리 폐기는 아니다. 우리에게서 잠시 동안 위안이 중단된다고 하여 영원히 위안을 상실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들이 제 4대에 이르기까지는 그 약속의 땅을 차지하지 못하였었는데, 그 이유는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아직 차지 아니하였기 때문이다." 아모리 족속들이 가나안 땅을 내어 놓기까지는 이스라엘이 그 땅을 차지할 수 없었다. 그들의 멸망의 때가 아직 이르기 아니했었기 때문이다. 의의 하나님은 아모리 족속들을 그토록 오랫동안 조악 가운데 버려두어 그 죄악의 한계에 이르게 하신다. 그것은 그들의 죄악과 멸망 사이에 어느 정도 공평한 균형이 드러날 때까지는, 폐망시키지 않기로 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 때가 이르기까지는 아브람의 자손들이 그 땅을 차지할 수 없었던 것이다.
(1) 죄악의 분량은 점차적으로 가득찬다는 점을 유의하자. 회개하지 않고 길을 계속 걷는 자기의 진노를 저축하고 있는 셈이 된다.
(2) 또 어떤 사람들의 죄의 분량은 서서히 가득 찬다는 점을 유의하자. 여호와 앞에 큰 죄인들이었던 소돔 사람들은 즉시 그들의 분량을 채웠다. 하나님과 가까이 있는 유대인들은 그들의 신앙의 분량을 즉시 채웠다. 그러나 아모리 족속들의 죄악의 분량이 다 차기까지는 오랜 기일이 걸렸다.
(3) 이것이 사악한 자들이 번창할 수 있는 이유이다. 그들의 죄악의 분량이 아직 가득하지 아니했음을 명심하자. 하나님이 "그들의 죄악을 자녀들에게 갚기 위하여 쌓아 두시는" 동안, 악인들이 "살고 수(壽)를 누르고 세력을 강하게" 하는 것이다(욥 21:7, 19; 마 23:32; 신 32:34 참조)
5. 이런 일이 이르기 전에 아브람은 평안하고 조용히 죽고 장사되리라는 것(15절). 그는 생전에 그 복된 땅이 자기 가족의 소유지가 되는 것을 목격하지 못한 채 죽어야 했다. 그러나 그가 그 땅에서 나그네로서 살아야 했던 일과 균형을 이루기 위하여 그의 생전에는 자손의 고난을 보지 않게 하였고, 또 그 고난을 함께 당하지도 않게 하였다. 이런 일은 요시야에게도 약속되었던 바이다(왕하 22:20). 의인이 때로 "재앙이 이르기 전에 데려감을" 받는 것은 큰 은총이라는 것을 유의하자(사 57:1). 아브람은 다음과 같은 일로 만족하였다.
(1) 그는 "평안히 조상에게로 돌아가게 된다" 는 것이다.
[1] 하나님의 친구요 그의 은총을 입을 자들까지도 죽음은 피할 수 없음을 기억하자. 이미 죽은 우리 조상 아브람보다 우리가 더 위대한가?(요 8:53).
[2] 선한 사람은 기꺼이 죽음이 임한다는 것을 기억하자. 끌려가는 것도 아니요, 강요당하는 것도 아니며, 오직 그들이 가는 것뿐이다. 그들의 영혼은 어리석은 부자의 영혼처럼 하나님이 도로 찾으시는 것이 아니라(눅 12:2) 그들 자신이 기꺼이 맡긴다. 그들은 언제든지 살기만을 원하지는 않는다.
[3] 죽으면 우리는 조상들에게로 간다. 즉 우리보다 앞서 죽음의 상태로 가신 모든 우리 조상들에게로 간다(욥 21:22, 23). 또 우리보다 앞서 축복의 상태로 가신 우리들의 경건한 조상들에게로 가는 것이다(히 12:23). 전자는 죽음의 공포를 제거해 주고, 후자는 죽음에 대한 안도감을 준다.
[4] 경건한 자는 언제나 평안히 죽는다는 것을 알아두자. 그의 길이 경건하다면, 그의 종말도 평안일 것이다(시 37:37). 결국 분명한 평화가 아브람에게 약속되었으니, 이후에 오는 것은 무엇이든 그의 생전에는 평화와 진리가 깃들 것이다(왕하 20:19). 하나님과의 화해와 영원한 평화가 모든 그의 자손들에게 있을 것이 확실하다.
(2) 그는 "장수하고 장사되리라." 이것은 아마 그가 그 곳에 묻힐 것이라는 말일 것이다. 즉 가나안 땅은 그에게 약속된 곳이다. 왜냐하면 그가 장사될 곳은, 그가 가나안에서 처음에 소유했던 그 땅이었기 때문이다. 또 그는 평안히 죽게 될 뿐 아니라, 명예롭고 고상하게 죽을 것이며 예모 있게 장사되리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평안히 죽을 뿐 아니라 알맞은 때에 죽으리라는 것이다(욥 5:26). 다음을 주목하라.
[1] 장수는 축복이다. 그것은 제 5계명에 약속되어 있고 인간의 본성에도 즐거운 것이며, 또한 유용한 일을 위한 것이 좋은 기회를 주기도 한다.
[2] 행복하게 장수한다는 것은 특히 그러하다. 아브람은 행복하게 장수했다고 말할 수 있다. 첫째로, 그는 생애 염증을 주는 심신의 질병 따위가 없이, 나이 들었고 건강했기 때문이다. 둘째로, 그는 연로하나 거룩했고, 하나님을 오랫동안 따라다닌 제자(행 21:16)이었으며, 그의 백발은 "의로운 길에서 얻은" 것이며(잠 16:31). 나이 들었으나 쓸모 있었고, 경건의 유서 깊은 모범이었다는 사실 때문이다. 그것은 참으로 행복한 장수라 하겠다.
하나님과 아브람과의 계약(5)(창세기 15:17-21)
Ⅰ. 그 계약은 승인되었다(17절). 드디어 해가 지고 어두워졌을 때에 아브람이 바라던 표적이 주어졌다. 구약의 율법은 어두운 율법이었기 때문이다.
1. "연기나는 풀무" 는, 애굽에서 그의 자손들이 당할 고생을 의미한다. 곧 그들은 불 가운데서 고생하면서, "쇠풀무 가운데" (신 4:20), "고난의 풀무 가운데" (사 48:10) 거하였었다. 그들이 그 곳의 연기 속에 있었고, 눈이 어두워졌기 때문에, 그들은 자기들의 고생이 언제 끝날는지 알지 못하였고,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베푸실 바를 깨달을 수 없어 당황했다. 구름과 어두움이 그들을 둘러싸고 있었다.2. "타는 횃불" 은 이러한 고난 속에서 주어진 위안을 나타낸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연기나는 풀무" 를 보여 주시는 것과 동시에 이 "타는 횃불" 도 보여 주신 것이다.
(1) 빛은 풀무로부터의 구원을 의미한다. 그들의 구원은 "타는 횃불" 과 같았다(사 62:1). 하나님께서 그들을 구하시려고 내려오셨을 때, 하나님은 "불이 붙었으나 소멸되지 아니하는" 떨기나무 속에 나타나셨었다(출 3:2).
(2) 횃불은 연기 속에서의 지시를 뜻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들의 횃불이요, 아브람에게 주신 이 말씀도 그와 같은 것이었다. 그것은 어두움 속에서 빛나고 있는 빛이었다. 아마 이 불타는 횃불은 구름기둥과 불기둥을 예시해 주신 것일 것이다. 이것은 그 속에 하나님께서 임재하셔서 그들을 애굽에서 이끌어내신 기둥이다.
(3) 타는 횃불은 그들을 오래도록 풀무 가운데 던져 놓았던 그 원수들이 멸망됨을 뜻한다(슥 12:6 참조). 이스라엘 사람을 빛나게 한 바로 그 구름이 애굽 사람들을 번민 속에 불타게 하였다.
3.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갔다" 는 말은, 하나님께서 그와 맺은 계약을 확증하는 것이요, 약속하신 바는 분명히 이루어 주신다는 사실을 아브람이 확실히 믿게 하여 그에게 확고한 위안을 주는 것이었다. 아마 쪼개진 두 조각 사이로 지나간 그 풀무와 횃불은 그 제물을 불태워 소멸시킴으로써 그 제사를 완전케 했고, 또한 하나님께서 그 제시를 열납하셨음을 입증해 주는 것일 것이다. 그것은 기드온의 제사(삿 6:21), 마노아의 제사(삿 18:19, 20), 그리고 솔로몬의 제사(대하 7:1)와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리하여 이 사건은 다음을 의미해 준다.
(1) 하나님과 인간과의 계약은 제사로, 곧 위대한 희생 제물인 그리스도를 통하여 맺어지는 것이며, 속죄함이 없이는 어떠한 계약도 있을 수 없다.
(2) 우리들의 영적 제사를 하나님께서 받아들이신다는 사실은, 앞으로 계속 우리에게 내려질 선하고 신실한 은총이 표적이다(삿 13:23 참조).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의 제사를 통하여 우리 영혼 속에 경건하고 헌신적인 사랑의 거룩한 불길을 붙이셨다면, 그것으로써 하나님께서 우리 제사를 열납하셨음을 알 수 있다.
Ⅱ. 그 계약은 반복해서 설명된다. "그 날에" 라고 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과 계약을 세운" 그 날은 결코 잊지 못할 날이었다. 그날은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었다" 고 말씀하심으로써(18절) 아브람에게 약속을 주신 날이었다. 다음과 같은 사실이 나타나 있다.
1. 허락한다는 이야기. 하나님께서 이미 전에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12:7; 13:15)고 말했다. 그러나 지금은 "내가 그것을(이미) 주었다" 고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다음과 같은 뜻이다.(1) 하나님께서 그것에 대한 약속을 주었고, 그 계약서에 노장을 찍어서 나누어 가졌으니, 취소될 수 없다. 하나님의 약속은 하나님의 선물이며, 또 그렇게 생각해야 한다는 것을 기억하자.
(2) 그 땅의 소유권은 마치 실제로 그들에게 주어진 것이나 다름없어서, 때가 오면 그것이 분명해진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은 이미 이루어진 것처럼 분명하다. 그리고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다" 고 했다(요 3:36). 믿는 자는 이미 하늘 나라에 있는 것이나 다름없이 분명히 거기에 갈 것이기 때문이다.
2. 허락하는 세부 사항의 진술. 이런 일은 땅을 양도할 때는 흔히 있는 것이다. 하나님이 주시려는 땅의 경계를 일일이 이름을 들어 나열했다(18절). 땅의 양도 때에는 흔히 그리하듯이, 보다 명백히 하기 위하여 그 땅의 현재 소유자와 점유인을 또한 언급하신다. "아브람의 자손" 에게 내어주기 위하여 쫓겨나야 할 수십 민족이나 족속들이 여기에 나타나 있다(19-21절).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가나안으로 인도했을 당시는 이 모든 땅이 그들의 소유가 아니었다. 그 때의 경계는 훨씬 더 협소하게 정해져 있었다(민 34:2, 3 이하).
(1) 그러나 다윗과 솔로몬 시대에 가서는, 그들의 관할 경계가 최대로 확장되었다(대하 9:26).
(2) 또한 그들이 그 모든 지역을 보다 속히 그리고 보다 오래도록 소유하고 있지 못했던 것은 그들 자신의 과오 때문이었다. 그들은 죄악과 태만으로 자기들의 권리를 빼앗겼고, 비겁하여 그 권리를 차지하지 못하게 되고만 것이다.
(3) 여기서 허락된 그 땅은 충분한 여유가 있는 하늘 나라 상속을 상징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그 허락의 경계가 최대한의 범위로 기술되어 있다. 우리 아버지의 집에는 거할 곳이 많다. 현재 소유자의 이름이 낱낱이 기록되어 있는 것은, 그들의 수효와 권세와 오랫동안의 취득 시효는 알맞은 때에 이 약속이 실현되는 것을 방해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또한 그 한 민족에게 많은 민족들의 소유지를 내어 주심으로써 아브람과 그의 자손에게 보여 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찬양하는데에 아무런 방해가 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 보시기에 그토록 귀중했고, 그토록 영예로웠던 것이다(사 6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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