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께서 들으시고. 하나님은 당신 백성의 모든 언행 심사(言行心思)를 관찰하고 계신다(잠 15:3). 이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에게 얼마나 큰 관심을 가지고 계신가를 대변해 준다.
진노하사 여호와의 불을. 여호와께서 진노하신다는 말은 신인동형동성론(anthropomorphism)적 표현으로서, 곧 당신의 공의로우심과 영광이 손상당할 때 그 속성상 우러나오는 신적(神的) 반응을 두고 한 말이다. 한편 여기서 ‘여호와의 불’이란 여호와께로부터 직접 분출되는 불이 아니라, 여호와께서 초자연적으로 일으키신 불을 말한다(Keil). 그리고 이것은 불(구름) 기둥에서 뿜어나온 것인지, 아니면 번개로 인한 것인지는 알 길 없으나 하나님의 진노로 인한 심판의 도구로 사용된 것임이 분명하다(출 19:18, 레 10:2, 신 4:11).
진영 끝을 사르게 하시매. 하나님은 진(陳) 전체에 심판의 불을 확산시키지 않고 단지 이스라엘 진영의 가장자리에 쳐진 장막에만 불을 붙이셨다. 이는 이 심판이 철저한 멸망을 목적한 것이 아니라, 그들의 잘못을 환기시켜 바른 길로 가게하려는 데 있었음을 보여준다. 동시에 여호와의 위엄을 현시하여 경외심을 갖게 함으로써 다시는 그러한 불평 불만을 터뜨리지 못하도록 하는데 있었음을 보여준다(Keil & Delitzsch). 그런데 2절에 나타나는 백성의 다급한 ‘부르짖음’으로 보아 진영 끝을 사른 여호와의 불길은 그 위력이 대단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이것이다. 즉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전에 출애굽하여 시내 산으로 향할 때에도 같은 불평이 있었으나(출 15:24, 16:2), 그 때에는 하나님의 징계를 받지 않았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곧 시내 산 언약을 중심으로 그 이전의 이스라엘은 마치 젖먹이 신앙과 같았기 때문에(고전 3:2) 하나님께서 묵인하셨으나, 시내 산 율법 전수 후의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보다 분명히 알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뜻을 거스렸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진노하사 징계를 내린 것이다.
모세가 … 기도하니 … 꺼졌더라. 여기서 ‘기도하니’(히, 이트팔렐)란 말은 ‘중재하다’, ‘탄원하다’, ‘판단하다’는 뜻의 히브리어 ‘팔랄’에서 유래한 말로, 곧 여호와께 절규하듯 간청하면서 그 모든 판단을 하나님께 온전히 맡겼다는 의미이다. 즉 백성들이 불평, 원망한 죄를 용서해 줄 것을 모세가 증보 기도한 것이다. 이에 대한 응답으로 하나님은 맹렬한 불길을 거두어 가셨다. 하나님께서는 백성들에게 불평이 가져다 주는 심각한 결과를 깨닫게 하시는 것으로 그 목적하신 바를 이루셨다. 한편 여기서 모세의 기도에 대한 응답은 이웃의 생명과 구원을 위한 의인의 중보 기도는 그 역사하는 힘이 큼을 실증적으로 보여 주었다(약 5:16, 19, 20). 일찍이 모세는 금송아지 숭배사건에서도 간절한 중보기도로 말미암아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한 바 있었다(출 32:11-14).
탐욕을 품으매. 탐욕이란 절실히 필요한 것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분수에 넘치는 것을 무리하게 취하고자 하는 마음이다(창 3:6). 그들은 현재 맛있는 음식보다 더 중요하고 시급한 문제들(가나안 정복, 하나님 뜻의 성취)이 산적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육신의 욕심을 따라 원망을 일삼았다. 그러나 이러한 욕심은 끝내 죄와 죽음을 불러오는 파괴적인 욕망이다(약 1:15).
이스라엘 자손도 다시 울며. 섞여 사는 무리들의 불평 불만이 곧 이스라엘 백성들에게까지 전염된 것을 볼 수 있다. 여기서 ‘울다’(히, 바카)란 말은 ‘통곡하다’는 뜻 외에 ‘애통한다’, 즉 ‘몹시 한탄하다’는 의미도 내포하고 있다. 즉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이 과거에 즐겼던 음식들(5절)을 못내 아쉬워하며 현 생활을 비관하고 낙담하면서 후회와 불만섞인 울음을 터뜨렸던 것이다. 이처럼 죄는 전염성과 파괴성이 강하여 온 공동체를 일시에 불신과 파멸의 상태로 이끈다.
고기를 주어 먹게 하랴. 물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출애굽시 데리고 나온 많은 가축들이 있었다. 그러나 그 가축들은 제사 제물용으로, 혹은 앞으로 얼마나 걸릴지 모르는 광야 여행에 대비하여 보존용으로 삼았음에 틀림없었다(Keil). 만일 자유로운 식용 도살이 허용되었더라면 그 가축들은 얼마 못가서 다 없어지고 말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지금 먹고 있는 만나 외에 좀더 자극성 있고 입맛을 돋구는 것을 원했다.
오이. 연하고 단맛이 나는 오이로서, 오늘날 ‘카테’(katteh)라 불린다.
참외. 고온과 풍부한 습기를 지닌 애굽의 기후 조건에서 잘 자라기 때문에 누구나 손쉽게 구할 수 있었던 과일이었다. 오늘날 ‘밧티에’(battieh)라 불리운다.
부추. 본래는 ‘풀’을 뜻하는 말이나 여기서는 각종 푸성귀를 일컫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파. 고대 역사가 헤로도투스(Herodotus)에 의하면, 이것은 마늘과 더불어 피라밋 공사 때 노동자들에게 제공된 주요 음식이었다고 한다. 애굽의 기후 조건상 이 파의 재배도 매우 잘 되었기 때문에 지금도 노동자 계층의 음식으로 즐겨 사용된다고 한다.
마늘. 파와 더불어 노동자들에게 힘을 돋구는 음식물로 즐겨 사용되던 것으로, 오늘날 ‘툼’(tum)이라 불리운다(Keil & Delitzsch). 따라서 1년여 동안 이것들은 섭취하지 못했던 애굽 노동자 출신 잡족과 또한 이스라엘인들에게는 괴로운 일이었음에 분명하다. 그러나 그들은 영원한 기쁨과 만족을 위해 잠시의 고통을 감내할 수 있어야 했다. 이것이 참신앙인의 자세이다.
만나 외에는 … 아무 것도 없도다. 하나님께서 제공하신 가장 완전한 건강식인 ‘만나’(출 16:15)를 팽개치고 과거의 얼큰하고 자극적인 음식물을 찾기에 급급한 이스라엘 백성의 저급한 불만이다. 실로 세상의 자극적인 향략과 얼큰한 탐욕에 취한 자들에게는 하늘의 순수하고도 담백한 신령한 음식이 눈에 차지 않는 법이다(요 6:66-68). 이러한 사실을 주석가 바움가르텐(Baumgarten)은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이것은 정결하고 순수한 음식물의 은근한 맛을 계속 즐기지 못하고, 자신의 내적 탐욕으로부터 생겨나는 톡 쏘고 시큼한 맛이 뒤섞인 자극적인 음식물을 갈구하는 인간의 타락한 본성에 기인한다’(Keil & Delitzsch).
깟씨 … 진주와 같은 것. 이것은 그렇게 크지 않은(대략 굵은 모래알 크기) 타원 형태의 음식물로 보여진다. 그리고 그 색깔에 있어서는 출 16:31과 본문의 ‘진주’(계 2:17)라는 표현으로 미루어 볼 때 아이보리(ivory) 색 정도로 상상할 수 있다. 한편, 여기서 ‘깟씨’는 미나리과에 속하는 고수풀(coriander)의 씨를 가리키는데, 크기는 직경 약 3mm 정도되며, 향료 또는 조미료로 사용된다.
기름 섞은 과자 맛. ‘기름’과 ‘꿀’(출 16:31)과 ‘초’(6:3)는 음식물에 발라 먹는 향신료로서, 이것들이 언급된 것으로 보아 ‘만나’는 그 맛이나 모양에 있어서 최상의 음식물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처럼 만나의 모양과 맛을 자세히 언급한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평이 얼마나 근거 없는 것인지를 보여 주기 위함이다.
모세도 기뻐하지 아니하여. 여기서 모세가 불유쾌했던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도를 넘어 불만을 터뜨리고 심술을 부리는 백성들과, (2) 그에 대해 진노하시는 여호와 때문이었다. 즉 모세는 무한정으로 불평을 일삼는 백성들의 완악함에 대해 그 역시 불만을 품었고, 동시에 그러한 상황에서 자신이 옳게 처리할 수 있도록 지혜와 힘을 주시지는 않고 침묵으로 당시의 진노만을 표현하시는 하나님께 유감을 표시했던 것이다(시 44:23, 사 51:9). 또한, 곧 이어 11절에 반복해서 ‘어찌하여’라는 말이 사용된 것으로 보아 그의 유감의 정도가 심각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는 여호와께 대한 도전이나 불신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을 책임진 지도자들이 한계 이상의 하중(荷重)을 받을 때 누구나 느끼는 무력감에서 비롯된 것이다(11-15절). 그럼에도 그의 유감은 분명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한데서 비롯된 미숙한 감정 표현이었던 것이 사실이다.
나의 고난당함을 보지 않게. 여기서 ‘곤고함’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라’는 ‘고통’, ‘재난’, ‘불행’, ‘슬픔’ 등 온갖 인생의 ‘험악한 일들’을 총칭하는 말이다. 따라서 모세는 이제 시내 산을 출발하여 가나안을 향해 첫 발을 내딛는 노정에서 벌써 이 정도의 곤고함이 자기 앞에 닥친다면, 앞으로 이 백성들을 이끌고 어떻게 계속 가나안 행군을 할 수 있을 것인가라는 생각에서 하나님께 죽음을 요청하고 잇는 것이다. 즉 그는 죽도록 고생만 하다가 그 소망의 열매도 보지 못하고 어차피 죽을 바에야 차라리 지금 죽은 것이 낫다고 생각한 것 같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생각은 출애굽을 시킨 분이 하나님이시며, 또한 가나안 땅을 약속한 분도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고려하지 못한 것이다. 따라서 모세는 자신은 단지 앞장 서는 선두 주자일 뿐, 이스라엘을 친히 이끄시고 인도하는 책임자는 바로 하나님이시라는 굳은 믿음을 가지고 모든 문제가 생길 때마다 먼저 기도로써 하나님의 도움을 청했어야 했다.
지도자. 군사, 행정에 유능한 인물을 가리킨다. 결국 모세에게 보내진 자들은 인격적인 면에서 뿐 아니라, 실무에서도 실력이 있는 자들이었으며 주로 세상적인 일보다 모세와 더불어 종교적이며 거룩한 일에 투입될 자들이었다.
네가 알기로. 이는 모세의 동역자를 선택하는 일에 하나님께서 모세의 재량권을 대폭 하락하셨음을 보여 준다.
회막에 이르러.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공식적인 인준을 위해서 모세가 택한 70인의 장로와 지도자들을 당신의 임재 처소 앞으로 오게 하셨다.
네게 임한 영. 여기서 ‘영’이란 흔히 ‘바람’을 뜻하는 히브리어 ‘루아흐’에 정관사 ‘하’가 결합된 형태로서, 곧 ‘성령’(the Spirit) 또는 그 ‘성령의 은사’(gifts of the Spirit)를 의미한다. 이처럼 성령은 하나님께서 인준하신 자들 위에 임하셔서 각자에게 필요한 풍성한 은사와 능력을 부어 주심으로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일을 수행케 하신다(삿 3:10, 6:34, 삼상 10:6, 10). 하나님의 일은 오직 하나님의 영으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슥 4:6). 그래서 성령은 구약 시대에도 어떤 특별한 자들에게 임했는데, 그 대표적인 겅우가 브살렐(출 35:30), 옷니엘(삿 3:10), 기드온(삿 6:34), 입다(삿 11:29), 삼손(삿 13:25) 등이다(L. Wood). 그러나 구약 시대 당시 성령의 활동은 극히 제한적이고 한시적(限時的)이어서, 제한된 인물에게 한시적으로 임했다. 따라서 때로 성령은 떠나가기도 하였다. 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울의 경우가 그에 해당된다(삼상 16:14). 그러므로 다윗은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시 51:11)라고 기도했다. 그러나 오순절 성령 대강림 사건(행 2:1-4) 이후의 성령은 떠나지 아니하시고 영원토록 거주하신다(요 14:16).
고기 먹기를 기다리라. 고기 먹기를 소원하는 것 자체는 인간의 생리적 욕구로써 큰 흠이 될 수 없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잘못은 고기에 대한 욕구가 지나쳐 현재 주어진 것에 감사치 않을 뿐 아니라, 그것을 먹지 못하는 현실을 원망한 데 있었다. 이것은 자신들의 처참한 옛 처지를 망각한 배은망덕한 행위였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들의 불만에 징계로 대응하시지 않고 고기를 주시겠다고 하셨다. 이는 그들의 요구를 인정해서가 아니라, 그들로 하여금 질리도록 고기를 먹는 가운데 자신들의 행동이 하나님 앞에서 불손했음을 스스로 자각하도록 하기 위함인 듯하다(눅 15:11-21).
애굽에 있을 때가 우리에게 좋았다. 이는 출애굽을 주도하시고 가나안 땅을 약속하신 하나님을 지극히 모독하는 처사이다. 이처럼 크신 은혜를 멸시하고 과거 애굽의 노에 시절을 동경한 태도가 하나님의 심판을 자초하게 된 이유였다(20절).
여호와를 멸시하고. 여호와께서 진노하신 근본 이유이다. 즉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구원과 보호와 약속 모두를 멸시하고 자신들의 죄악된 욕구를 따라 하나님을 원망했다. 한편 여기서 ‘멸시하다’(히, 마아스)란 말은 ‘내쫓다’, ‘증오하다’, ‘비난하다’는 의미도 내포된 것으로서, 결국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와를 의뢰하거나 자신들의 왕으로 모시지 않고 오히려 그분의 약속과 구원 사역을 비난하고 업신여겼음을 가리킨다.
어찌하여 애굽에서 나왔던가.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서 노예 생활을 할 때 그 혹독한 노역에 못이겨 ‘탄식하며 부르짖었다’(출 2:23). 하나님께서는 그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모세를 보내사 당신의 크신 권능으로 그들을 바로의 손에서 구출하셨다. 그러한 출애굽 사건이 고작 1년여 전의 일이었다. 그런데 이제 광야 노정이 좀 고달프다고 해서 그들은 ‘어찌하여 애굽에서 나왔던가’라고 원망하고 있는 것이다. 그 광야 생활은 고생을 위한 고생이 아니라 가나안 땅을 목적하는 의미있는 고생임에도 불구하고 이처럼 배은망덕한 언사를 서슴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가나안 땅을 차지할 아무런 가치도 없는 자들이었다.
예언을 하다가. 문자적으로는 ‘계속해서 지껄이다’, ‘많은 말로 탄원하다’로써 곧 성령의 감동에 의해 신적인 황홀경에 몰입되어 다발적(多發的)인 말을 하는 상태를 일컫는다(Keil). 그러므로 이것은 일반 예언자들에 의해 선포되어지는 현재와 미래에 대한 예언이 아니라, 그들이 하나님께로부터 신적 권위를 부여받은 사실을 가시적(可時的)으로 증명하고, 그로 인해 백성들이 ‘70인 장로’에게 복종하도록 하기 위한 성령의 특별하신 감동으로 볼 수 있다(삼상 10:6).
다시는 하지 아니하였더라. 이는 ‘더 이상 계속하지 않았다’(RSV, did so no more), ‘되풀이 하지 않았다’(NIV, did not do so again)는 의미이다. 그러나 이 ‘멈춤’은 영원히 ‘예언’을 하지 않았다는 뜻이 아니라, 일순간 예언하다가 곧바로 멈춘 상태를 일컫는 말이다. 따라서 그들이 예언을 멈추었다고 해서 그들에게 주어진 성령의 은사와 능력이 소멸된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모세를 도와 여호와 신앙을 보존하는 일과 백성들을 개도해가는데 필요한 능력을 계속적으로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고전 12:28).
엘닷 … 메닷 … 진영에서 예언한지라. 엘닷(뜻: 하나님의 친구)과 메닷(뜻: 우정)이 회막 앞에 모이지 않고 진에 남아 있었던 이유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아마 피치 못할 사정이 있었던 것 같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도 성령의 능력을 주셔서 예언하게 하셨다. 이처럼 성령의 역사는 상황과 장소와 시간에 구애됨 없이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따라 임한다(시 139:17).
내 주 모세여 그들을 말리소서. 여호수아는 모세를 수종들던 신실한 종의 입장에서 모세의 명예를 위하여 엘닷과 메닷이 모세의 지도나 중재 없이 개인 거처에서 예언한 것을 놓고 시기하였다. 따라서 그는 그 일을 이스라엘의 행정적 기강과 모세의 권위를 침해한 일로 단정하였다. 이는 마치 신약 시대에 예수의 제자들이 축사(逐邪)하는 어떤 자에게 대해 주님의 명예를 위하여 흥분했던 것과 유사하다(막 9:38-40). 그러나 이 모두는 성령과 그 역사의 초월성을 이해하지 못한 질투의 결과였다.
다 선지자 되게 하시기를. 여기서 ‘선지자’란 하나님께로부터 전달된 기별을 조금도 손상시키지 않고 인간들에게 그대로 선포하는 자를 가리킨다(출 7:1, 겔 3:4, 암 3:8). 이들은 왕이나 제사장처럼 세습에 의해 그 직무를 맡지 않고, 당신의 메시지를 전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이 있을 때에만 직무를 감당했다. 한편 ‘선지자’를 뜻하는 히브리어 ‘나비’의 어원은 정확히 알수 없으나, 그 용례를 통해 의미를 확인할 수 있다. 즉 그 직무는 (1) 하나님의 뜻을 미리 알아 선포하며, (2) 백성을 가르치며, 인도하기 위해 말씀을 선포하고, (3) 타락시에는 담대히 신적 심판(divine judgement)을 선포하여 백성의 마음을 변화시키는 일 등을 하였다. 한편 모세는 모든 백성이 위와 같이 하나님의 메시지를 받고 전하며 성령에 사로 잡히게 되기를 원하였다. 따라서 그는 성령의 은사를 독점하거나, 그 주어진 능력을 동원하여 자기의 지위를 절대화하려 들지 않았다. 이처럼 자기의 권위와 지위를 중요시 하기보다 이스라엘 전체의 영적 성숙을 추구했던(욜 2:28) 모세야말로 하나님 집에서의 모범적인 지도자 상(像)을 구현한 자이다. 그의 이러한 신앙적 소망은 후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으로 말미암아 각 성도에게 충만히 임하신 성령을 통해 온전히 성취되었다(눅 23:45, 요 14:16, 행 2:1-4).
하룻길 되는 지면 위 두 규빗쯤. 메추라기가 진을 중심으로 남동서북 사면에 하룻길(약 32 km) 정도에 걸쳐 지면에서 두 규빗(1m) 높이로 쌓였다. 혹자에 의하면 이것은 땅 위 1m까지 메추라기가 쌓인 것이 아니라, 기진한 수많은 새들이 1m 높이 정도에서 날아다님으로써 백성들이 손쉽게 잡을수 있었던 것을 의미한다고 한다(Targum, Vulgate). 그러나 이는 “적게 모은 자도 10호멜”(약 120말)이라는 다음 절(32절)의 표현과 조화되기 어렵다. 따라서 이는 말 그대로 기진맥진한 메추라기 떼가 이스라엘 진 사방에 그냥 맥없이 떨어져 쌓였다고 봄이 옳다(Keil). 이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당시 보기만해도 질릴 정도의 엄청난 고기를 얻을 수 있었던 것으로 보아 분명하다.
호멜. 호멜(homer)은 구약 시대의 고체 건량 단위로서 한 호멜은 약 6 부셀(bushel)에 해당한다. 그리고 한 ‘부셀’은 대략 36리터에 해당된다.
진영 사면에 펴 두었더라. 햇볕에 말려서 장기 보관하기 위해서였다. 이는 마치 애굽 사람들이 생선을 햇볕에 말려 오래도록 먹는 것과 동일한 방법이었다(Herodotus).
심히 큰 재앙으로. 혹자는 이 재앙이 당시 몸에 해롭다고 간주된(Pliny) 메추라기 고기를 갑자기 많이 섭취함으로 생겨난 식중독 또는 기타 질병일 것으로 추정한다(Knobel, Bochart). 그러나 재앙을 음식물로 인한 자연적인 질병에 국한시키기 보다 여호와께서 특별하게 내리신 어떤 죽음의 징계인 역병(疫病)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리고 그 징계의 대상자는 아마 고기를 달라고 앞장 서서 불평을 선동했던 자들일 것으로 추정된다(Pulpit Commentary). 이 사건은 결국 (1) 여호와의 백성으로서 원망과 탐욕을 일삼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를 깨우쳐 주고, (2) ‘배부른 생활’이 항상 개인에게 유익한 것만은 아님을 교훈한다. 오히려 악인의 번영은 멸망을 앞당기는 역할을 한다(잠 23:17, 전 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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