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 그러나. [히, 웨헨] ‘그러나 보라’(KJV, RSV: but behold)란 말로써 다음에 이어질 부정의 뜻을 더 강화시켜 주는 표현이다.
믿지. ‘믿다’란 뜻의 히브리어 ‘아만’은 (어린 아이를) ‘양육하다’, (부모를) ‘신뢰하다’ 등의 기본적 의미가 있다. 따라서 백성들이 자신을 믿지 않을 것이라는 모세의 걱정은 3:18에 이미 주어진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모세의 불신이 반영된 말이다. 즉 모세는 인간적인 생각으로 ‘동족으로부터 쫓겨난 초라한 일개 양치기가 그들에게서 어떻게 신뢰를 얻을 수 있겠는가’라고 걱정했던 것이다. 사실 그는 40여 년 전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자처했다가 동족에게서 조소와 비난에 찬 말을 듣고 맥없이 물러나야 했었던 뼈저린 과거를 지니고 있었다(2:41). 그러나 하나님은 이처럼 부끄러운 과거와 비천한 현재를 살고 있는 모세에게 자신을 바라보기보다 거룩하시고 전능하신 당신만을 바라보게 하셨다.
여호와께서 네게 나타나지 아니하셨다. 야곱의 가나안 이거(移去) 이후(창 46:2-4) 족장시대와 출애굽 사이를 잇는 약 400년간은 소위 하나님의 말씀이 당신의 종에게 임하지 않았던 계시부재의 시대라 할 수 있다. 따라서 백성들은 갑작스럽게 임한 하나님의 계시와 그에 따른 모세의 신적 권위를 의심할 것임에 틀림없었다.
4:2 네 손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 이는 좌절과 낙담에 익숙해 있었던 모세에게 자신감을 불어 넣고자 한 질문이었다. 즉, 모세의 ‘손에’는 겉보기에는 초라하나 하나님의 권능이 임할 때 큰 힘을 발휘할 수 있는 지팡이가 쥐어져 있었던 것이다.
지팡이. 목자가 양을 인도하며, 맹수로부터 양을 보호하기 위해 가지고 다녔던 손잡이가 구부러진 휴대용 막대기를 가리킨다. 따라서 이것은 상징적으로 인도와 보호를 뜻하는데(시 23:4) 하나님께서는 이 막대기를 큰 이적의 도구로 활용하셨다. 이는 장차 이적과 기사로 이스라엘을 인도해내실 것에 대한 예표이다.
4:3 뱀. [히, 나하쉬] 나하쉬는 ‘쉿쉿하는 소리를 내다’(hiss)는 뜻의 동사에서 유래한 말로서 뱀을 가리키는 일반 명칭이다. 뱀은 팔레스타인 및 애굽 전역에 서식한다. 그런데 이 뱀은 원시(原始) 계시(창 3:15) 이후 인간의 원수, 즉 하나님의 백성을 상해하는 사탄 혹은 사탄의 세력을 상징한다(계 12:9). 여기서는 선민 이스라엘을 압제하는 애굽의 왕권을 상징한다.
4:4 꼬리를 잡으라. 뱀은 목을 잡아야 물리지 않는다. 따라서 ‘꼬리를 잡으라’는 명령은 인간의 상식과는 배치되는 것으로 하나님의 이적적 권능을 더욱 강렬하게 인식시키기 위해 주어진 것이다. 한편 ‘잡으라’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아하즈’는 ‘제지하다’, ‘조롱하다’란 의미도 내포하는 바, 하나님의 권능이 함께 하면 어떤 난관이나 방해물도 제지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조롱하듯 그것들을 극복할 수 있음을 시사한다(막 16:8).
내밀어. 주저함없이 손을 뻗치는 모양을 묘사하는 말로, 방금 전에 두려워 피했던 것과는(3절) 대조되는 표현이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 과감히 순종하는 지도자로서의 기본적 자세가 여기에도 잘 드러난다. 한편 이러한 순종으로써 나타난 이적을 통해 (1)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부르셨을 뿐 아니라, 뱀처럼 교활한 애굽의 세력을 깨뜨릴 수 있는 힘을 그에게 주셨음을 밝혔고 또한 (2) 하나님의 장중 안에 있는 애굽은 모세에 대하여 아무런 힘도 발휘할 수 없을 것임을 암시하였다.
4:5 조상의 하나님 곧 아브라함의 … 야곱의 하나님. 믿음이 없고 완고한 인간에게 하나님은 자신을 계시하시기 위해 이적을 사용하실 뿐아니라 역사적 사실로써도 당신의 뜻을 드러내신다. 이적을 행하시는 하나님이 또한 과거 족장들에게 은혜를 베푸사 그들의 후손이 창대해질 것과 또한 애굽에서 구출될 것을 예언하신 바로 그 하나님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모세에게 상기시키고 있다(3:6).
믿게 하려 함이니라.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이적의 궁극적인 목적을 일깨워준다. 즉 하나님은 당신이 이 세상의 주관자이시며, 모세는 바로 그러한 분의 보내심을 받은 자라는 사실을 이스라엘 온 백성에게 알려서 그것을 믿도록 하기 위해 이적을 베푸셨던 것이다. 복음과 이적의 상관 관계는 바로 이같은 관점에서 이해되어야 한다(행 3:6-8).
4:6 품. [히, 헤크] ‘둘러싸다’란 뜻을 가진 어근에서 유래하였다. 따라서 이말은 어미닭이 병아리를 감싸듯 당신의 백성을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긍휼을 암시한다(마 23: 37).
나병이 생겨. [히, 메초라트] ‘몹시 고통스럽다’는 뜻인 ‘차라’에서 파생된 말로 오직 과거 분사형으로만 쓰인다. 당시 나병은 불치의 병으로서 하나님의 저주의 표라 여겨졌다. 특히 본 절에서 이 나병 기적은 애굽에서 나병 환자와같은 처참한 노예 생활을 보내고 있었던 이스라엘 백성의 현실과 또한 그들이 애굽에서 범했던 부정한 허물들을 상징한다. 이 병의 시초는 비듬 딱지 같은 것이 생겨 경미한 상처를 입히는 정도이나 환처에 흰 털이 덮히면서 재빨리 퍼져 나중에는 피부가 ‘눈처럼 희어지고’ 건조하고 두꺼워진다(레 13:1-14:57).
4:7 본래의 살로 되돌아왔더라. [히, 웨히네 샤바 키브사로] ‘키브사로’는 ‘ … 처럼’의 뜻인 전치사 ‘키’와 (생기 넘치는) ‘살’(육체)이란 뜻의 ‘바사르’가 결합한 말이다. 그리고 ‘웨히네’는 ‘확실히’(certainly, surely)란 뜻이고, ‘쇠바’는 ‘획득하다’란 의미이다. 따라서 이는 ‘원래의 건강한 모습 그대로 회복되었다’는 뜻이다. 하나님은 이같은 두 번째 이적을 통해 (1) 이스라엘을 애굽의 노예 생활과 그들의 죄악으로부터 완전히 구원해내실 것을 밝히셨고(사 46:3, 4, 49:15, 16) (2) 모세를 그 구원사역의 동역자로 부르셨을 뿐 아니라 그에게 그 일을 감당할 능력을 주셨음을 보이셨다(민 11:11, 12).
4:8 표적. [히, 오트] ‘허가하다’, ‘응낙하다’는 동사에서 유래한 말이다. 이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허락이 있고서야 비로소 나타나는 초자연적인 징조를 가르킨다(창 1:14).
표징. [히, 칼] ‘부르다’, ‘고함치다’란 뜻의 동사 ‘콜’에서 유래한 말로 문자적 의미는 ‘소리’이나 여기서는 ‘교훈’으로 이해된다. 피조된 우주 만물이 하나님의 뜻을 선포하는 음성을 발하듯(욥 12:7, 8, 시 19:1-3), 모세를 통해 나타나는 한 이적이 당신의 뜻을 가르치고 입증해줄 것이라는 의미이다.
4:9 나일 강. [히, 예오르] 나일 강을 일컫는다. 히브리인들이 이 강을 ‘예오르’(Yeor)라 한 반면 애굽인들은 이를 ‘하피’(Hapi)라 칭했는데 ‘하피’는 이 강을 주관한다고 믿어졌던 신의 이름이다. 즉 ‘하피’란 ‘라(Ra)’, ‘오아시스’(Oasis), ‘이시스’(Isis) 같이 세력있는 신은 못되었으나 건장한 남성 형상의 신이었다. 한편 ‘나일’(Nile)이라는 이름은 후일 헬라인들이 그 강을 ‘네일로스’(Neilos)로, 로마인들이 ‘닐루스’(Nilus)로 명명한데서 유래한 명칭인데 공식적으로는 역사가 헤로도투스(Herodotus, B.C. 484-425) 이후부터 부르기 시작하였다. 따라서 성경에는 다만 ‘강’, ‘바다’, ‘하수’ 등으로 기록되었다(나 3:8). 나일 강은 애굽의 산업과 교통의 중추(中樞)였을 뿐 아니라 애굽인들에 의해 생명의 젖줄로서 신격화되었다. 더욱이 그들은 이 강이 생명의 신 ‘오시리스’(Osiris)가 내려준 성스러운 물이자, 태양 신이 항해하는 천해(天海)의 일부로 믿었다. 그러기에 성경은 애굽과 나일 강을 동일시하였다. 따라서 모세가 애굽의 생명 젖줄인 이 물을 파괴와 죽음을 상징하는 피로 변하게 할 수 있다는 것은 모세의 배후에 역사하시는 지존자 여호와께서 능히 애굽의 헛된 우상들을 멸망시킬 수 있다는 사실을 생생히 증거한다.
피. [히, 담] ‘잘라내다’, ‘멸망하다’란 의미의 동사 ‘다맘’에서 온 말로 피를 흘리는 것은 곧 죽음을 뜻한다. 특히 본 절에서 피는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자들에게 닥칠 파멸을 예고하는 것이다.
4:10 주여. [히, 비 아도나이] ‘비’는 흔히 ‘주인’ 또는 ‘하나님’을 뜻하는 ‘אֲדֹנָי 아도나이’와 결합하여 간절한 탄원의 뜻을 강조해 주는 감탄사이다(창 43:20, 44:17, 민 12:11, 수 7:8). 여기서는 탄원은 물론 막중한 임무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완곡한 변명의 의도도 내포된 표현이다.
말을 잘 하지 못하는 자. 이를 원문에 가깝게 번역하면 ‘말의 사람이 아니다’가 된다. 즉 자신의 의사를 자유자재로 표현할 줄 모른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여기 ‘말’은 단순히 연설이라는 측면 외에 ‘꾀’나 ‘능력’, ‘모략’ 등을 의미하기도 한다.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한 자. ‘뻣뻣하고’, ‘둔한’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모두 ‘카베드’로서 ‘무겁다’, ‘느리다’는 뜻이다(KJV, RSV: slow). 유대 전승에 의하면 실제로 모세는 순음(脣音, d, v, m, ph, p) 발음에 서툴러 말을 매우 느리게 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굳이 모세를 어눌(語訥)한 자로 볼 필요는 없다. 아마 그는 어느 정도 말에는 능하였으되(행 7:22), 뛰어난 능변가는 아니었던 것 같다. 하나님의 소명을 받은 모세는 대국의 왕 바로를 설득시키고, 완고한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해 내기 위해서는 특출한 달변과 사자후(獅子吼)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철저히 인간 위주의 생각이다. 실로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다(고전 4:20).
4:11 누가. [히, 미] 성(性), 수(數), 격(格)에 따라 변하지 않는 의문 대명사로서 곧 ‘내가 바로 … 창조주가 아니냐’는 반문을 이끌어내는 말로 사용되었다(롬 9:21).
입. [히, 폐] (물이) ‘흐르다’, (바람이) ‘불어 날리다’란 뜻의 동사 ‘파아’에서 유래하였다. 이는 한번 입에서 나온 말은 다시 주워 담겨질 수 없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4:12 가라. ‘출발하다’, ‘데려가다’, ‘행진하다’ 등의 뜻을 동시에 내포하고 있는 말이다. 따라서 이 명령 속에는 바로 앞에 나아갈 일은 물론, 출애굽과 40년 광야 생활을 이끌어 나가야 할 모세의 임무가 암시되어 있다.
가르치리라. [히, 아라] (화살을) ‘겨냥하다’란 의미도 내포한다. 하나님께서 친히 기도자로서의 모세에게 요구되는 모든 지혜의 원천이 되사 화살로 과녁을 겨냥하듯 가장 적절한 시기에 가장 정확한 대처 방안을 제시하겠다는 약속이다.
4:13 보낼 만한 자. [히, 베야드 티쉴라흐] ‘베야드’는 ‘손(능력)을 지닌’이라는 뜻이고 ‘티쉴라흐’는 ‘쉴라흐’(‘보내다’는 뜻)의 미완료형으로서 수동의 의미를 담고 있다. 따라서 본 구절은 ‘보냄을 받을 만한 능력을 지닌 자’로 풀이된다(KJV: the hand of him whom thou wilt send). 혹자는 이를 모세가 자신의 형 아론을 염두에 둔 말이라 주장하나 별 근거가 없는 말이다. 한편 모세는 이전까지 네 번(3:11, 13, 4:1, 10)에 걸쳐 사양의 뜻을 표했는데 하나님께서는 그 때마다 해결책을 제시하셨다. 그러나 다섯 번째도 거절하자 하나님께서는 마침내 진노하시며 그에게 또 다른 해결책으로서 그의 형 아론을 대변자로 삼으셨다. 이처럼 하나님은 어떠한 경우에서라도(심지어 당신의 백성이 믿음이 없어 당신을 화내게 만드는 경우에도) 당신의 뜻을 포기하지 않으시고 기어이 이루신다. 이것이 바로 당신의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신실함이다.
4:14 노하여. [히, 아프 … 이하르] ‘아프’는 ‘코를 씨근거리다’, ‘진노하다’란 뜻인 ‘아나프’에서 유래하였고, ‘이하르’는 ‘불태우다’, ‘진노하다’란 뜻인 ‘하라’의 미완료 3인칭 남성 단수이다. 물론 이는 신인동형 동성론적 표현으로서 하나님의 강렬한 진노를 함축하고 있지만, 이 분노는 멸망받을 자들에 대할 진노와는 달리 당신의 거룩하신 뜻 가운데로 인도하시고자 하는 뜨거운 연민과 사랑을 내포한 진노로 이해되어야 한다.
레위 사람. 레위 족속의 전형적인 인물이란 뜻이다(Lange). 아울러 이 말 속에는 장차 그의 후손들이 담당하게 될 특수한 임무, 곧 성막 봉사의 의미까지 내포되어있는 말이다(Pulpit Commentary).아론. ‘고상(高尙)하다’는 뜻을 지닌 이름이다. 아므람과 요게벳의 첫째 아들로서 동생 모세보다 3년 연상이다(6:16-20).
만나러. 주로 ‘우연히 일이 발생하다’, ‘우연히 마주치다’를 뜻하나, 여기서는 정반대의 의미를 담고 있다. 27절에 나타난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모세와 아론과의 만남을 미리 작정하고 계셨던 것이다.
기쁨이 있을. [히, 사메아흐] 동일한 어근으로부터 종교적 환희를 뜻하는 ‘심하’가 파생되었다(삼하 6:12, 시 16:11, 100:2, 사 55:12). 결국 여기서 뜻하는 바는, 아론이 민족 구원의 소명을 받은 모세를 만나 영적 환희를 경험하게 되리라는 것이다.
4:15 그의 입에 말을 주라. ‘(내가 네게 제시하는) 메시지를 그에게 전해주라’(Modern Language Bible: convey to him the message)는 뜻이다. 결국 모세가 하나님께 받은 계시의 핵심을 전해주면 아론이 그 메시지를 능력있게 백성들과 바로에게 말하도록 한 것이다.
4:16 대신하여. 오히려 ‘위하여’로 번역함이 원문에 더 가깝다.
하나님 같이 되리라. ‘네 형 아론은 네 대언자가 되리라’는 말씀(7:1)과 그 뜻이 같은 구절이다. 즉 모세는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계시의 말씀의 소유자임과 아울러 아론에게 그 말씀을 전달해야 하는 중개자(仲介者)이므로 아론에게는 모세가 마치 하나님과 같은 권위를 지니게 된다는 뜻이다. 한편 이와 관련하여 루터(M. Luther)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그 속에서 살아가는 자는 하나님의 지혜, 능력 등을 모두 소유하는 특권을 누린다고 갈파하였다.
4:17 이 지팡이. 한 때 뱀이 되었던 바로 그 지팡이(3절)를 가리킨다. 그것이 이제 하나님의 동행하심과 권능을 뜻하는 보이는 상징물이 되어 3:20의 예언에서처럼 향후 많은 이적과 기사를 행하게 될 것이다(7:20, 14:16, 민 20:11).
이적. [히, 오트] 헬라어 ‘세메이온’과 유사한 의미를 지니는 말로 화산의 폭발과 같은 ‘강력한 힘’이란 뜻을 내포한다. 결국 모세가 하나님의 전권대사로서의 특별 책무를 감당하기 위해서는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초자연적 능력을 힘입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4:18 내 형제들. 좁은 의미로는 부모, 형제, 친척들을, 넓은 의미로는 이스라엘 백성 전체를 가리킨다. 지난 40년 동안 애굽의 노예로서 험한 일을 도맡아 감당했던 이스라엘 백성들 중 많은 사람이 사고사(事故死) 당했으리라는 예감과 모세의 신분이 노출되고 살인 사건이 드러남으로써 자신의 일가족이 몰살당했을 수 있다는 예감 등으로 인해 모세는 복잡한 심경에 빠졌을 것이다.
돌아가서. 기본 동사 ‘야샤브’는 ‘남아 있다’, ‘견디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따라서 이는 민족의 고난 가운데 함께 남아 견디겠다는 의지를 함축한 말이다.
살아 있는지.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하이’는 ‘신선한’, ‘힘센’ 등의 의미도 지니고 있지만 여기서는 ‘살아 있는’의 뜻이다. 여기서 모세는 친지들의 안부(安否) 여부보다는 생존 여부 그 자체를 염려하고 있다.
평안히 가라. 이 말속에는 ‘내가 너를 막지는 않겠다. 그러나 부디 몸조심하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모세에게 일어난 일에 대해 자초지종을 몰랐던 이드로로서는 단지 모세가 골육지친에 대한 정(情)을 잊지 못하여 목숨을 건 모험을 감행하고 있다고 생각하였다. 여기서 모세가 자신의 여행 목적을 솔직히 밝히지 않는 것은 장인에게는 하나님의 계시를 확실히 이해할 수 있는 마음이 없었기 때문이라 짐작된다. 한편 ‘평안히’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샬롬’은 안녕, 건강, 번창 등을 묻는데 가장 널리 사용되는 히브리 전통적 인사말이다(창 43:27).
4:19 돌아가라. [히, 샤브] 18절에 언급된 ‘야샤브’의 명령형이다. 하나님은 모세의 말(18절)을 재언급하심으로써 그의 결심을 굳히고자 하셨다. 모세는 하나님의 약속과 계시에 힘입어 미디안을 떠날 의사를 장인에게 밝히긴 했지만 시시각각 다가오는 불안과 두려움에 사로잡힐 수밖에 없었을 터였다. 따라서 하나님은 모세에게 “네 목숨을 노리던 자가 다 죽었느니라”는 말로서 그를 안심시키면서 애굽 귀환을 독려하셨다.
네 목숨을 노리던 자. 여기서 ‘노리던’의 기본동사 ‘바카쉬’는 ‘찾아내다’, ‘추구하다’, ‘탄원하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이 말이 긍정적인 의미로 쓰일 때는 여호와를 간절히 사모하여 그 얼굴(이름)을 ‘찾는다’는 뜻으로 사용된다(대하 15:15, 시 27:8). 그러나 여기서는 부정적인 의미로, 어떤 사람이나 물건을 찾기 위해 눈에 불을 켜고 각별한 주의를 기울여 샅샅이 수색함을 가리킨다. 오늘날도 사탄은 우는 사자와도 같이 삼킬 자를 찾고 있다(벧전 5:8). 한편 모세의 ‘생명을 찾던 자’란 절대권좌(權座)를 보다 확고히 하기 위해 모세를 기어이 제거하고자 했던 투트모세 3세와 그 수하의 무리들을 가리킨다(2:11-15).
4:20 나귀. [히, 하하모르] 여기서 ‘하’는 나귀가 모세의 개인 소유 재산임을 명시해 주는 정관사이며, ‘하모르’는 ‘붉다’의 뜻인 ‘하마르’에서 온 말로 당시 교통, 운반을 위한 보편적 수단으로 사용되었던 붉은 숫나귀를 가리킨다(창 22:3, 42:26). 반면에 ‘아이르’는 나귀 새끼(삿 10:4, 슥 9:9), ‘페레’는 들나귀를 가르킨다(시 104:11, 호 8:9). 한편 모세가 처자식(십보라, 게르솜, 엘리에셀)까지 여행에 대동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담대히 순종하고자 하는 그의 신앙적 의지를 반영한다.
하나님의 지팡이. 여기서 지팡이는 본래 모세가 양 떼를 치던 그 지팡이(2절)이다. 그런데 그 지팡이가 하나님의 이적(3, 4절)에 의하여 이제는 하나님의 지팡이가 되었다. 따라서 대국의 왕 바로와 대결하기 위해 애굽으로 향하는 모세는 비록 외관상으로는 처자식들을 나귀에 태우고, 손에는 단지 양치던 지팡이만을 잡았을 뿐이지만, 그 지팡이가 바로 하나님의 지팡이이기에 하나님과 함께 가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따라서 “바로의 모든 세력은 그 지팡이 앞에 굴복되어질 것이었다”(Keil).
4:21 내가 네 손에 준 이적. 3:30의 예언에서처럼 애굽에서 행해질 각종 이적을 가리킨다. 물론 여기에는 4:3-9에서의 이적도 포함한다. 한편 애굽에서 행해질 이적에 대한 묘사로 원문에는 세 가지 형태의 단어를 취하고 있다. 즉 (1) 표징(sign)으로서의 이적(오트, 4:8, 17)과 (2) 전조(前兆, portent)로서의 이적(모페트, 4:21), (3) 놀랄만한 경이(marvel)로서의 이적(팔라, 3:20) 등이다. 이는 하나님께서 베푸신 이적의 다양한 성격을 표현하는 동시에 그 이적의 목적을 강력히 시사해 주고 있다. 즉 하나님께서 베푸신 이적의 목적은 그것을 통해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줌로써 하나님의 존재와 그 말씀을 의심하는 자들에게 강한 믿음과 확신을 심어주는 것이다.
내가 그의 마음을 완악하게 한즉. 여기서 당혹스러운 것은 하나님께서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여 이스라엘 백성을 보내지 않을 것으로 미리 정하셨는데, 바로가 그대로 행한 것 때문에 애굽에 열 재앙을 내린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바로가 이런 역할을 담당하도록 하나님께서 미리 정하셨다면 그것은 바로에게 책임이 없고 하나님께 책임이 있는 것이 된다. 정말 그런가?
바로의 마음이 완악하게 되었다는 말은 출애굽기 3장과 14장 사이에 여러 번 나타나는데,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1) 하나님께서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시겠다고 미리 말씀하셨다(출 4:21, 7:3).
(2) 그렇게 한 이유는 밝히지 않고 바로의 마음이 완악하였다고만 말한다(출 7:13, 14, 22, 8:19, 9:7, 35).
(3) 바로가 자신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였다(출 8:15, 32, 9:34).
(4) 하나님께서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셨다(출 9:12, 10:1, 20, 27, 11:10).
‘완악하게 하다’는 히브리어로 ‘하자크’인데 뜻을 굽히지 않고 완강한 태도를 취하는 것을 일컫는 말이다. 그렇다면 바로가 완악하게 된 것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는가, 아니면 바로 스스로 또는 다른 이유로 완악하게 된 것인가?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가? 위에 열거한 성경의 내용들을 주의 깊이 살펴보면, 완악한 것의 책임은 바로에게 있음을 알 수 있다. 예를 들면, 여덟 번째 재앙이 시작되기 전에, 모세와 아론이 제기한 질문에서 바로의 개인적인 책임이 분명하게 지적된다. “모세와 아론이 바로에게 들어가서 그에게 이르되 히브리 사람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네가 어느 때까지 내 앞에 겸비하지 아니하겠느냐 내 백성을 보내라 그들이 나를 섬길 것이라”(출 10:3). 바로는 자신이 잘못했다는 것을 인정했지만 여전히 이스라엘 백성들을 놓아주지 않았다. 하나님의 용서하심도 그에게 효과가 없었다(10:16-17). 바로는 계속하여 완강했고, 이런 연후에 “여호와께서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셨”(출 10:20)다는 본문이 나온다. 즉 하나님께서 바로가 그분을 계속적으로 거역하도록 허용하실 수밖에 없었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셨다’는 표현은 하나님께서 [그분의 예지하심과 예언적 섭리 아래에서] 바로의 ‘완악함을 허락하셨다’는 뜻으로 볼 수 있다. 사실 온 우주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므로 그분의 허락 없이 일어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엘렌 지 화잇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하나님께서 바로에 대하여 ‘내가 그의 마음을 완악하게 한즉 그가 백성을 보내 주지 아니하리’(출 4:21)라고 말씀하셨다. 왕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는 초자연적 능력이 행사되었던 것은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에게 당신의 능력에 대한 아주 분명하고 놀라운 증거를 주셨다. 그러나 왕은 완고하게 그 빛을 거절하고 그것에 유의하지 않았다. 그가 거절한 무한한 능력이 나타날 때마다 그의 반역은 더욱 굳어지고 결정적이 되었다”(부조와 선지자, 268).
태양빛이 밀랍은 녹이고 진흙은 굳게 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에 대한 계시가 어떤 사람들은 굴복과 순종으로 이끌었고, 어떤 사람들은 완악하게 하였다.
4:22 말씀에. [히, 아마르] ‘말하다’(창 3:1), ‘생각하다’, ‘마음에 이르다’(신 8:17), ‘약속하다’(대하 21:7), ‘명령하다’(민 15:38) 등의 뜻으로 이는 하나님 말씀의 성격을 여러모로 보여준다.
이스라엘은 내 아들 내 장자라. 하나님과 이스라엘간의 관계를 부자(父子) 관계로 명시한 최초의 구절이다. 한편 여기서 장자(베코리)는 (태를) ‘열다’ ‘첫 아이를 낳다’(첫 열매를 맺다) 등의 뜻인 동사 ‘바카르’에서 유래하였다. 특별히 출애굽 직전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장자로 명명된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천하 만민 중에서 이스라엘은 선민(選民)으로 부름받아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특별한 민족으로서그 종교적 특권을 인정한다는 뜻이다. (2) 한 집안에 있어서 장자가 귀하듯, 하나님께 있어서 장자처럼 귀한 이스라엘을 결코 포기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반영된 말이다. (3) 특히 이스라엘을 독자(獨子, Only Son)라 부르지 않고, 장자(長子, Firstborn Son)라 부른 것은 차자(次子)도 있을 것임을 전제로 한 것이기 때문에 후일 이방인에 대한 소명도 내포되어 있는 말이다. 한편, 당시 애굽의 바로(Pharaoh)들은 스스로를 ‘태양신의 아들’로 자처하는 등 신자(神子)라는 개념에 익숙해져 있었으므로 본 절과 같은 모세의 선포가 결코 낯설지는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결국 출애굽 과정에 있어서 남은 것은 이스라엘이 섬기는 신 여호와 하나님과 바로가 섬기는 애굽의 각종 신들과의 숙명적인 대결 뿐이었다. 이것은 실로 살아계신 참신 여호와와 헛된 이방신과의 이미 승부가 난 싸움에 다름아니었던 것이다. 한편 23절에서 ‘내 아들’과 ‘네 아들’이 비교된 점에 유의하라.
4:23 섬기게. [히, 아바드] ‘일하다’(출 20:9), ‘봉사하다’(출 21:2)보다 더 강한 의미로’ 노예가 되다’, ‘종살이 하다’는 뜻을 지닌다. 성도가 하나님의 종이 될 때에 비로소 온전한 자유를 누리거니와, 반대로 하나님 섬기기를 거부할 때는 이스라엘이 애굽에게 종살이하듯 죄악과 죽음의 노예로 전락하고 만다(요 8:36, 룻 6:16, 20).
네 장자를 죽이리라.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장자이기에 하나님 이외에 누구의 굴레에도 머물 수 없었다. 그럼에도 바로가 이스라엘을 자신의 노예로 삼고 계속 압제하게 되면 하나님의 공의의 칼이 바로의 장자를 칠 것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경고는 실제로 12:29에서 성취되었다. 실로 하나님의 뜻을 계속 거부하는 자는 이처럼 참혹한 결과를 맞게 될 것이다.
4:24 숙소. 먼 여행을 하는 대상(隊商)들이나 광야 여행자들이 임시 머무는 휴식처 내지는 하룻밤 기거하는 침소를 가리킨다. 그리고 광야 여행자들에게 자유롭게 개방은 되었으나, 식사와 이불 등은 제공되지 않는 공공건물이었다.
만나사. [히, 파가쉬] (거칠게) ‘접촉하다’는 뜻이다. 이는 주로 적대 관계에서의 만남을 일컫는 말로(잠 17:12, 호 13:8), 친밀하고 따스한 우호 관계에서의 만남을 뜻하는 ‘카라’(민 23:3, 왕상 18:7)와는 대조된다.
그를 죽이려 하신지라. 하나님께서 크신 노기를 띠고 길의 숙소에서 모세를 만나 그를 죽이려 하신 이유를 우리는 이어지는 25, 26절에서 찾아볼 수 있다. 즉 모세가 생후 8일이 훨씬 경과한 그의 아들에게 할례를 시행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모세가 할례에 관한 하나님의 준엄하신 명령(창 17:10)을 소홀히 여긴 까닭은 아마 그의 이방인 아내 십보라의 고집 때문이었던 것 같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그 방법은 알 수 없으나(참조, 민 22:31) 그를 죽이려 하셨던 것이다. 결국 이 사건은 모세가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나서기 전에 자신의 가정에서부터 하나님의 법을 실행해야 함을 보여 준다. 신앙으로 바로 서지 못한 자가 신앙 공동체를 지도하는 것은 곧 하나님을 경시하는 처사이며, 하나님과 적대 관계를 이루는 악행이다. 한편 이 사건 이후 십보라는 아들들을 데리고 미디안 자기 집으로 돌아갔고 많은 시간이 경과한 후에야 비로소 남편과 재회할 수 있었다(18:2).
엘렌 지 화잇은 이 사건을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미디안에서 나오는 길에 모세는 여호와의 불쾌히 여기심에 대한 놀랍고 무서운 경고를 받았다. 그를 당장 죽일 것처럼 한 천사가 그에게 위협하는 몸짓으로 나타났다. 아무 설명은 없었으나 모세는 그가 하나님의 요구 중 하나를 무시한 것을 기억하였다. 아내의 권유에 못이겨 그는 막내 아들에게 할례식을 거행하는 일을 등한히 하였다. 모세는 그의 아들이 이스라엘로 더불어 세우신 하나님의 언약의 축복을 받을 자격을 얻게 해주는 조건을 이행하지 않았다. … 십보라는 남편이 죽임을 당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으로 손수 의식을 거행하였다. 그제야 천사가 모세로 하여금 여행을 계속하도록 허락해 주었다. 모세는 바로에 대한 그의 사명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매우 위험한 처지에 놓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의 생명은 거룩한 천사들의 보호를 통하여서만 보존될 수 있었다. 그러나 그가 알고 있는 의무를 등한히 하는 생활을 사는 한 천사들의 보호를 받을 수 없기 때문에 결코 안전하지 못할 것이었다. 그리스도의 재림 직전에 있을 시련의 때에 의인들은 하늘 천사의 봉사를 통하여 보호를 받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율법을 범한 자들에게는 안전이 없을 것이다. 그 때에 천사들은 하나님의 교훈 중 어느 하나라도 무시하는 사람들을 보호할 수 없다”(부조와 선지자, 255-256).
4:25 돌칼. [히, 초르] ‘날카롭다’, ‘고통주다’란 뜻의 ‘차라르’ 혹은 ‘바위’를 의미하는 ‘추르’에서 파생된 말로 할례 때 사용된 돌칼을 가리킨다(수 5:2, 3). 탈무드에 금속칼로 할례를 행한 사실이 기록된 것으로 미루어, 본 절은 석기(石器)를 많이 사용했던 당시의 시대 상황을 반영하는 것 같다.
그의 아들. 둘째 아들 엘리에셀을 가리킨다. 아마 십보라는 여행 직전 둘째 아들 엘리에셀을 낳았으며, 여행 동안 할례 연한인 8일을 넘긴 것 같다.
베어. [히, 카라트] ‘자르다’, ‘언약을 체결하다’는 뜻이다. 고대 근동에서는 언약을 맺을 때 고기를 둘로 가른 후 그 사이로 지나가게 함으로써 언약의 절대이행을 다짐했다. 성경에서 이는 사람들간에 뿐만 아니라 하나님과 당신의 백성 간에 체결된 언약을 가리키는 말로도 사용된다(삼상 20:16, 시 89:3). 한편 모세는 이유야 어떻든 언약의 징표인 할례를 소홀히 했던 것만은 사실이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할례 시행명령을 소홀히 여긴 모세의 이러한 우유부단한 처사를 심각히 경고함으로써 모세로 하여금 아무리 사소한 의무라도 하나님께 소홀히 하면 큰 죄가 된다는 사실을 따끔하게 교육하셨던 것이다.
피 남편. [히, 하탄 다밈] 문자적으로 ‘피의 남편’(bridgegroom of blood)이다. 십보라가 이 말을 하게 된 진의(眞意)가 무엇인지는 문맥의 간략성 때문에 분명히 결정하기 어렵지만 대략 다음 두 가지로 추측할 수 있다. 즉 (1) 자신으로서는 이해불가한 할례 의식으로 인해 소중한 아들이 피흘림을 당했다는 식의 독설(毒舌)이거나 (2) 아들의 피흘림을 통해 가까스로 남편을 구원하게 되었다는 감사와 안도의 말로서 ‘피로 산 남편’이란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이 중에서 그녀가 이 사건 후 모세와 계속 동행치 못했던 점으로 보아 첫 번째 추측이 더 타당한 것 같다(Lange, Pulpit Commentary).
4:26 놓아 주시니라. 원 의미는 ‘치료하다’이다. 이는 24절에 모세를 죽이려고 천사가 사용하셨던 방법을 철회하고 놓아 주셨음을 가리킨다.
할례. [히, 물라] ‘잘라내다’란 뜻의 ‘물’에서 유래한 말로 포피(남자 성기의 귀두부를 덮고 있는 포피)를 ‘잘라내는’ 의식과 잘 부합되는 말이다. 히브리인들의 할례는 피의 언약에 대한 표징으로서 그 기원은 하나님과 아브라함과의 언약에서 발견된다(창 17:10-14). 한걸음 더 나아가 영적으로 할례는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에 동참한다고 하는 상징적 의미를 지닌다(골 2:11, 12). 한편 원문상 할례가 복수형으로 표기된 것은 장자 게르솜의 할례까지 염두에 둔 때문일 수 있다.
4:27 가서 모세를 맞으라. 하나님의 완전하고도 적절한 준비를 보여준다. 하나님은 노예로 신음하고 있던 아론에게 찾아오셔서 그에게 모세에게 제시하셨던 동일한 비젼을 허락하시고(28절), 그 계획에 동참할 것을 명하셨던 것이다. 여기서도 확인되듯이 이스라엘의 출애굽은 그 준비에서부터 완성까지 모두 하나님의 의지에 따라 실행된 단독사역(單獨事役)이요, 성사(Sacred Work)이다.
하나님의 산. 3:1의 주석을 참고하라.
입맞추니. 기본적 의미는 ‘접촉하다’, ‘단단히 묶다’로서 반가움, 결속, 사랑 등을 표현하는 행위이다(창 27:26, 룻 1:9). 아론은 40년간 서로의 생사 여부도 모른채 헤어져 있었던 동생을 다시 보게된 기쁨과, 하나님의 특별하신 섭리를 깨달음으로 느끼는 감격에 벅차 있었다.
4:28 모든 말씀과 … 이적을 아론에게 알리니라. 모세는 이제 출애굽 운동의 동역자가 된 아론에게 자신의 시내 산 소명 사건을 중심으로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상세히 설명해줌으로써, 그에게 확실한 믿음과 분명한 비젼을 심어주고 있다.
4:29 모으고. (어떤 목적으로) ‘소집하다’이다. 이스라엘의 체계적 행정 제도는 왕정시대에 비로소 마련되었으며, 그 이전에는 민족공동체의 대사를 논할 때 각 지파의 족장들이나 장로들 혹은 백성들을 소집하여 회의하였다(민 21:16, 수 24:1). 애굽 치하에서 무거운 종살이에 시달렸던 이스라엘 백성들로서 감히 국가적 회합에 참여할 엄두를 내기란 힘들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모든 장로들이 소집에 응했다는 사실은 하나님의 주권적 역사로 말미암아 이스라엘의 운명에 일대 전환점이 마련되기 시작했다는 뚜렷한 증거이다.
4:30 아론이 … 전하고. 모세의 대언자로서의 역할(16절)이 이제 시작되었다. 그는 자신의 의지보다 모세의 말 곧 하나님이 계시해 주신 내용을 백성에게 전하는 도구가 되었던 것이다. 여기서 복음 사역자의 철칙을 발견하게 되는데 메신저(Messenger)는 전하는 메시지(Message)의 권위 아래 놓인다는 것이다.
이적을 행하니. 성경 기록상 인간이 행한 최초의 이적이었다. 따라서 최초의 이적 행사자는 출애굽 운동의 지도자로 소명받은 하나님의 전권대사 모세였다. 그리고 이적의 내용은 이미 하나님께서 허락하신대로 지팡이가 뱀으로 변하는 것과 손에 문등병이 발했다가 다시 깨끗케 되는 이적이었다(4:3-8).
4:31 백성이 믿으며. 애굽의 바로는 이스라엘을 육체적으로는 노예로 전락시킬 수 있었으나, 영적으로는 감히 범접할 수 없었음을 보여준다. 즉 이스라엘 백성들은 고난 중에서도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그리고 야곱의 열두 아들들 이후 면면히 이어온 여호와 신앙을 고수해오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까닭에 모세와 아론의 고지(告知)와 이적을 한 마음으로 믿을 수 있었다.
찾으시고. ‘찾아오다’(13:19), ‘돌보다’(사 23:17), ‘수를 세다’(삼상 11:8), ‘방문하다’, ‘판단하다’ 등의 뜻으로서 마치 목자가 양을 보살피기 위해 찾아가 모든 환경을 일일이 돌아보는 상태를 일컫는다(렘 23:2). 한편 하나님의 방문 혹은 감찰하심은 악인에 있어서는 복수와 징벌로 작용하지만, 의인에게 있어서는 보호와 권고(眷顧)로 작용한다.
경배하였더라. [히, 샤하] ‘몸을 구부리다’, ‘납작 엎드리다’, ‘존경하다’등의 의미를 내포한다. 이는 상대방에 대한 전적인 신뢰와 경의를 표하는 상징적 행동이다. 사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고난을 통해 여호와의 도우심을 더욱 갈급하고 기다렸을 것이다(2:23). 그런 상황에서 모세와 아론을 통해 여호와의 이적과 말씀을 접하자, 간절한 신앙심으로 여호와께 경배드리게 되었던 것이다. 아울러 이스라엘 백성들의 이같은 경배는 모세와 아론을 민족의 지도자로 인정한다는 의미도 내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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