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
본절은 두 개의 수사학적 질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질문은 야고보가 자신의 주장에 대해 수신자들이 동의할 것을 전제로 한 것이며 3장과 깊은 논리적 연관성을 갖고 있다(Adamson, Burdick, Tasker, Lenski).
너희 중에 싸움이 어디로 다툼이 어디로 좇아 나느뇨 - '싸움'은 헬라어 '폴레모이'(* )는 본래 국가간의 큰 전쟁을 의미하며 '다툼'의 헬라어 '마카이'(* )는 일반적으로 규모가 작은 분쟁을 뜻한다(고후 7:5;딤후 2:23;딛 3:9). 야고보는 동의어에 가까운 두 단어를 사용하여 당시 수신자들 사이에 일어났던 개인적 혹은 집단적인 분쟁이나 불화를 지적하면서(Burdick, Gibson, Moo, Martin) 수신자들로 하여금 그 불화의 진원지에 대해 재고하도록 한다.
너희 지체 중에서 싸우는 정욕으로 좇아 난 것이 아니냐 - '지체'는 고유한 기능을 가진 몸의 각부분이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강조하는 표현이다(롬 7:23;엡 4:13-16). 한편 '정욕'에 해당하는 헬라어 '헤도논'(* )은 '쾌락'을 의미한다. 이는 인간의 육체 내에서 단순히 일어나는 '욕망'이 아니라 쾌락 그 자체를 삶의 목적으로 함을 뜻한다(딛 3:3;벧전 2:11,Tasker,Manton,Calvin). 이렇듯 쾌락을 추구하다보면 필연코 다툼을 초래하게 된다.
=====4:2
너희가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하고 살인하며 시기하여도 능히 취하지 못하나니 너희가 다투고 싸우는도다(* ,에피뒤메이테 카이우크 에케테 포뉴에테 카이 젤루테 카이 우 뒤나스데 에피튀케인 마케스데 카이 폴레메이테) - 헬라어 본문에는 구두점이 없어서 독법이 두 가지로 나뉜다. (1) '살인하며'에 해당하는 헬라어 '포뉴에테'(* ) 다음에 나타나는 '카이'(* ,'그리고')를 강조할 경우 본문은 세 개의 문장으로 나뉜다(Moffatt, ASV, KJV, NIV, Textus Receptus). (까)너희가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하고. (다)살인하며 시기하여도 능히 취하지 못하나니. (따)너희가 다투고 싸우는 도다. 이 견해의 경우 '포뉴에테'는 문자적으로 '살인'을 의미한다기 보다는 은유적 표현으로 '미움'을 의미한다(마 5:21,22;요일 3:15). 따라서 본문은 좌절된 욕망 자체를 강조한다. (2)'포뉴에테' 다음에 구두점을 삽입할 경우 본문은 두개의 문장으로 나뉜다(RSV, NEB, NASB, Hort, Cantinat, Ropes). (까) 너희가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한다. (다) 시기하여도 능히 취하지 못한다. 그래서 너희가 다투고 싸운다. 이 견해의 경우 '포뉴에테'는 은유적인 표현이 아니라 문자적인 표현 그대로 '살인'을 의미한다. 따라서 본문은 좌절된 욕망에서 비롯된 결과를 강조한다. 이러한 두 가지 견해 중 전자가 타당하다. 왜냐하면 본문의 수신자가 그리스도인인데(2:1) 그 가운데서 문자적인 의미 그대로의 '살인'이 언급된다는 것은 자연스럽지 못하며 3절 역시 좌절된 욕망 자체를 설명하여서 문맥상 일치하기 때문이다(Tasker, Burdick). 쾌락 즉 과도한 욕망은 채워지면 채워질수록 더 많은 부족감과 갈증을 유발(誘發)시킬 뿐이다. 그 결과 죄의 욕망은 만족될 수 없으며 오직 좌절의 연속을 겪게 된다.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함이요 - 야고보는 앞에서 죄의 욕망은 채워질 수 없고 오직 좌절만이 있을 수밖에 없음을 언급한 반면에 본문에서는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는 하나님에게 구함으로써 실제적인 만족을 얻을 수 있음을 강조한다. 이것은 사람들이 구하고 추구해야 할 대상이 누구인가를 강하게 시사한다(Tasker, Manton).
=====4:3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이니라 - 본절에서 야고보는 만족을 채우기 위해 그릇된 동기에서 구하는 문제를 지적한다. 본절의 '정욕' 역시 1절과 마찬가지로 '쾌락'을 가리킨다. 사람들이 하나님께 구하여도 얻지 못하는 것은 자신의 쾌락을 채우기 위해서 구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자의 간구는 외면하시나 의로운 자(시 34:15), 진실하고 참되게 구하는 자(시 145:18), 자신을 낮추고 회개하는 자(눅 18:14) 그리고 하나님의 뜻대로 구하는 자(요 5:14)의 간구는 들으신다.
=====4:4
간음하는 여자들이여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모이칼리데스'(* )는 여성 명사로 문자적으로 '간음하는 여자들'을 가리키나 실제로는 구약성경에서 자주 나타나듯이 하나님을 거역하는 영적인 불충실성을 나타낸다(호 2:2-5;렘 31:22;겔 23:45;말 3:5, Burdick, Adamson). 야고보는 이 비유를 통해 수신자들의 육신에 속한 모습을 암시하고 있다(Gibson, Tasker, Manton).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의 원수임을 알지 못하느뇨 - 야고보는 본문에서 '세상'과 '하나님','벗'과 '원수'를 대조시키고 있다. '세상'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악한 영역을 가리킨다. 따라서 사람이 세상과 벗된다는 것은 곧 하나님을 대적하고 원수 관계를 맺는 것이다. 야고보는 수사학적인 질문을 통해 수신자들의 세상과 벗됨을 지적함으로 그들이 '쾌락'과 '정욕'에 사로잡혀 있음을 나타내고 있다.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게 하는 것이니라 - '되고자 하는'에 해당하는 헬라어 '불레데'(* )는 '-할 작정이다'라는 의미를 가진 '불로마이'(* )의 단순과거로 무엇을 하려고 계획한 자가 정해진 계획대로 이루었음을 의미한다(딤전 2:8;5:14;딛 3:8,Burdick, Robertson, Manton). 이것은 하나님께 불충스런 자들이 저들의 계획된 목적에 따라 '고의적으로' 세상과 짝한 것을 뜻한다. 한편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게 하는 것이니라'는 말은 사람들이 스스로 세상과 벗 되는 것이 결국 하나님과 원수되는 결과로 나타나며 하나님과 원수된 책임이 인간에게 있음을 시사한다(Manton, Reicke).
=====4:5
너희가 하나님이 우리 속에 거하게 하신 성령이 시기하기까지 사모한다 하신 말씀을 헛된 줄로 생각하느뇨 - 본문은 해석상 두 가지 문제를 갖고 있다. (1) 본문에 나타난 인용문의 근거가 어디인가 하는 것이다. 이에 대한 견해는 네 가지이다. (까) 혹자는 70인역의 창 6:3-7과 출 20:5이라고 주장한다(Mayor, Knowling, Ropes). (다) 혹자는 신약성경의 마 6:24;롬 8:7;요일 2:15이라고 주장한다(de Wette). (따) 혹자는 상실된 히브리 복음서나 외경 가운데서 인용한 것으로 주장한다(Resch, Moffatt, Spitta, Debelius). (마) 혹자는 축자적인 인용이 아니기 때문에 출 20:5;34:14 그리고 슥 8:2이라고 주장한다(Burdick, Moo). 이러한 견해 중 마지막 견해가 가장 타당한 듯하다. (2) '성령'의 헬라어 '프뉴마'(* )에 대한 해석의 차이이다. '프뉴마'에 대해서는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까) 인간의 영(NIV, NEB, GNB, Phillips). (다) 성령(JB, Martin, Adamson, Burdick). 전자의 견해는 '시기하기'에 해당하는 헬라어 '프도논'(* )의 사용례에서 비롯된 해석이다. 즉 '프도논'은 하나님의 행위를 수식하는 데 사용되지 않으며(Mitton, Mayor) '선한 행위'로 인식되지 않기 때문에(Trench) 본문에서 '프도논'이 수식하는 '프뉴마'는 하나님께서 창조 때에 인간에게 불어넣어 주신 '인간의 영'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프도논'은 '젤로스'(* , '열심', '시기')와 혼용되어 '하나님의 질투'를 묘사하는 데 사용되며(I Macc 8:16;I Clem. 3.2;4.7;5.2, Martin, Mussner) 개역성경에는 번역되지 않은 '에'(* , '혹은')가 헬라어 본문에는 삽입되어 있어 본절과 앞절이 연관된 것임을 나타낸다. 따라서 '프뉴마'는 '성령'으로 해석하는 것이 더 타당하다.
=====4:6
그러나 더욱 큰 은혜를 주시나니 - 혹자는 본문이 5절과 연속된 구문이라고 주장하나(Manton, NIV) 5절과는 대조를 이루는 독립된 문장으로 해석하는 것이 타당하다(Burdick, Martin, Moo). 야고보는 앞절에서 언급한 내용 즉 하나님께서 질투하기까지 자기 백성을 사랑하셔서 그 요구하시는 바가 엄격할지라도 또한 더욱 큰 은혜를 주셔서 백성들의 결점을 보완하신다는 점을 들어 수신자들을 위로하고 있다.
그러므로 일렀으되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 - 본문은 잠 3:34(LXX)의 인용이다. 본문에서의 '교만'이 잠 3:34에서는 '거만'으로 언급되어 있다. '교만'은 남을 비웃거나 업신여기며 자신의 우월성을 드러내는 것을 의미하며(Manton) '겸손'은 자신의 부족을 인식하여 영적인 통회(痛悔)를 하며 창조주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존하는 것을 의미한다(Tasker). 야고보는 인용문을 통해 하나님에게서 떠나 자신만을 인정하고 자기 만족을 위해 '쾌락'을 추구하는 '교만한 자'와 자신의 부족을 인식하고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의지하여 순종하는 '겸손한 자'를 대조시켜서 수신자들에게 '쾌락을 추구하는 자'와 같이 되어 하나님과 원수가 되지 말고 자신의 결점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며 순종하는 자가 될 것을 권면한다(7절).
=====4:7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순복할지어다 - '순복할지어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휘포타게테'(* )는 단순과거 명령형으로 즉각적인 반응을 요구하는 표현이다. 이것의 문자적인 의미는 '자신을 더 낮은 위치에 두라'는 의미로 단순한 복종을 요구하는 것이라기 보다는 철저하게 낮은 위치에서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하며(마 11:29), 겸손히 아뢰며(고후 5:10), 자신을 하나님의 섭리에 맡기라는 의미이다(눅 2:51;행 21:14;엡 5:22;딛 2:9;벧전 2:13, Burdick, Manton).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 - 몇몇 사본에는 본문 앞에 반어적인 접속사 '데'(* , '그러나')가 삽입되어 있다(A,B). 이것은 본문의 전반부와 관련되어 하나님께서 순복해야 하나 마귀는 대적해야 하며, 만약 하나님께 순복하려면 우선 마귀를 대적해야 함을 뜻한다. '마귀'의 헬라어 '디아볼로'(* )는 '비방하는 자'라는 의미로 '악한 세상의 영역'이나 '외적인 능력'을 가리킨다(마 13:19;25:41;엡 4:27;6:11;딤전 3:7,Adamson, Martin) . 이러한 '디아볼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하나님께 순복하는 것을 방해하는 가장 주된 세력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마귀를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강력하게 대적해야 한다. 그러할 때에 마귀는 그리스도인들을 피하게 된다.
=====4:8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 하시리라 - 그리스도인들은 마귀를 대적하는 것과는 반대로 그리스도인들이 소유한 특권이자 의무인 새 언약 아래서 하나님께 가까이 가야 한다. 이처럼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는 것은 쾌락을 즐기는 자들로부터 그리스도인들을 구분짓는 결정적인 특권이다. 옛 계약 아래서는 동물의 피를 통한 희생 제사 가운데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었으나(출 19:22;레 10:3;신 4:7;겔 43:19;44:13) 이제는 그리스도 안에서 누구든지 담대히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히 4:16, Lenski, Tasker, Gibson).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구습을 좇고 쾌락에 얽매인 모습을 단호히 배격(排擊)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영광 돌리는 삶을 살아야 한다(시 19:10;고전 14:12;엡 4:22;벧전 2:2).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케 하라 - 야고보는 두 가지 호칭으로 수신자들을 부르고 있다. '죄인들아'는 수신자들이 젖어 있었던 죄악된 성향의 삶을 단호히 지적하는 표현이며 '두 마음을 품은 자'는 하나님을 사랑하려는 마음과 쾌락을 즐기려는 마음을 동시에 소유한 자를 가리킨다. 그러나 사람들은 '하나님'과 '세상' 두 주인을 동시에 섬길 수 없다(눅 16:13). 따라서 이러한 마음은 죄에서 비롯된 것이다. 한편 '손을 깨끗이 하라'는 말은 외적인 행위를 정결케 하라는 표현이며, '마음을 성결케하라'는 말은 내적인 생각과 동기의 순수성을 유지하라는 표현이다. 즉 그리스도인들은 내적, 외적 정결을 유지하여 하나님의 자녀다운 합당한 삶을 영위해가야 한다(출 30:20;마 7:3,4;요일 1:7, Burdick, Adamson, Moo).
=====4:9
'슬퍼하며'에 해당하는 헬라어 '탈라이포레오'(* )는 '불행해지다' 혹은 '비참해지다'는 의미를 가진 '탈라이포레오'(* )에서 유래한 단어로 스스로 고행을 통해서 비참해지라는 것이 아니라 '쾌락'을 추구했던 자신의 죄악의 비참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뜻대로 하게 되는 근심을 하라는 의미이다(Burdick, Tasker). '애통하며'(* , 펜데사테)와 '울지어다'(* , 클라우사테)는 모두 억누를 수 없이 격앙(激昻)된 뉘우치는 심정의 모습을 묘사한다(욥 8:21;마 5:4). 야고보는 위의 세 단어를 사용하여 수신자들이 거짓됨이 없이 진실되게 회개할 것을 권면한다.
너희 웃음을 애통으로, 너희 즐거움을 근심으로 바꿀지어다 - '웃음'과 '즐거움'은 수신자들이 죄 아래 있는 삶을 살 때 느낀 상태를 나타낸다. 이것은 수신자들이 '쾌락'을 삶의 본질로 좇고 있었음을 비유적으로 시사하는 표현이다(1,2절). 야고보는 이렇게 죄에 빠져 즐겼던 삶에서의 '웃음'과 '즐거움'을 예수께서 복된 삶의 기본 요소로 가르치셨던 '예통'(마 5:4)과 '근심'으로 바꿀 것을 권면한다. 여기서 '근심'의 헬라어 '카테페이안'(* )은 문자적으로 '낙담'을 의미하는 것으로 감히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죄인을 용서해 주기를 바라는 자세를 가리킨다. 본문에서 야고보는 어리석게도 쾌락으로 일관하던 죄 아래서의 삶을 과감히 청산하고 하나님의 긍휼에 의지할 것을 권면한다(Martin, Lenski, Tasker).
=====4:10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 - 본절은 7절에서 시작된 일련의 권고들에 대한 결론이다. 본절에서 내적 겸손을 계속적으로 강조한 것은 그리스도인들이 한낱 형식적으로 회개하는 모습을 지적하려는 의도인 듯하다(Manton). 야고보는 8절에서 언급한 하나님께 순복하라는 권면을 본절에서 다시금 확인시키며 예수께서 교훈하시는 바와 같이(마 23:12;눅 14:11;18:14) 하나님 앞에서의 겸손이 참된 기쁨을 얻는 유일한 길임을 강조한다(Martin).
=====4:11
형제들아 - 이 호칭은 '간음하는 여자들'(4절),'죄인들'(8절)이라는 호칭에 이어서 다시금 주의를 환기시키기 위해 제시된 것으로 야고보의 간절한 사랑을 시사한다(Tasker, Martin).
피차에 비방하지 말라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메 카탈랄레이테 알렐론'(* )은 강한 부정을 나타내는 '메'(* )와 현재 명령을 나타내는 '카탈랄레이테'(* )가 결합되어 지금 계속되고 있는 행동을 지속적으로 금지할 것을 권면하는 강한 부정 구문이다. '비방하지'에 해당하는 헬라어 '카탈랄레이테'(* )는 문자적으로 '타인을 멸시하며 말하다' 혹은 '다른 사람을 대적하여 말하다'는 뜻으로(시 50:20;벧전 2:12;3:16) 그리스도 안에서 영적으로 연합된 형제들의 수치스러운 모습을 나타낸다(Robertson, Tasker).
형제들 비방하는 자나 형제를 판단하는 자는 곧 율법을 비방하고 율법을 판단하는 것이라 네가 만일 율법을 판단하면 율법의 준행자가 아니요 재판자로다 - 본문은 형제를 비방하거나 판단치 말아야 할 이유이다. '형제를'의 헬라어는 '톤 아델폰 아우투'(* )로 그리스도 안에서 맺어진 형제들의 신령한 관계를 강조한다. 한편 '율법'에 대한 견해는 세 가지이다. (1) 혹자는 판단을 금지하라는 그리스도의 황금률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마 7:1-5,12, Plumptre). (2) 혹자는 1:25에서 언급된 자유의 법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Hunter). (3) 혹자는 예수께서 더 강화시키신 옛 도덕법으로서 그리스도인들이 마땅히 준행해야 할 삶의 법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2:8,Alford). 세 가지 견해 중 마지막 견해가 가장 타당하다. 왜냐하면 본문의 내용상 레 19:18에 언급된 이웃 사랑에 대한 법이 야고보의 권면과 일치하기 때문이다(Burdick, Tasker). 따라서 본문은 그리스도인이 된 자들이 남을 헐뜯거나 멸시하는 말을 한다는 것은 곧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최고의 법을 자기 마음대로 해석하여 준행자가 아니라 재판자의 입장에서 서는 경우가 된다는 말이다.
=====4:12
입법자와 재판자는 오직 하나이시니 - 앞절에서 야고보는 형제를 비방하거나 판단하는 것은 율법을 재판하는 자의 자리에 앉은 행위임을 지적하였다. 본절에서는 율법의 입법자나 재판자가 오직 하나님임을 밝혀서 형제를 비방하거나 판단하는 자의 죄악이 얼마나 큰 것인가를 강조한다. '입법자와 재판자'에 해당하는 헬라어 '노모데테스 카이 크리테스'(* )는 하나의 관사에 두 낱말이 연결되고 있어 동일하시며 절대 변경될 수 없는 오직 하나이신 주 하나님을 가리킨다. 이것은 율법을 정하는 것과 심판권을 오직 하나님만이 소유하고 계심을 시사한다(Tasker, Lenski, Burdick, Martin).
능히 구원하기도 하시며 멸하기도 하시느니라 - 본절은 입법자와 재판자로서의 하나님의 위치를 확증시킨다(마 25:46). 하나님께서는 율법을 제정하신 분이며 율법의 준수 여부에 대한 재판자이시기 때문에 사람을 구원하실 수도, 혹은 멸하실 수도 있는 분이다. 그러한 하나님께서 사람들은 단지 율법을 준행하는 자에 불과하기 때문에(11절) 재판자만이 할 수 있는 판단을 하는 것은 죄악이며 금해야 할 행위이다.
너는 누구관대 이웃을 판단하느냐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쉬 데 티스 에이 호 크리논톤 플레시온'(* )은 문자적으로 '그러나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너는 누구냐?'라는 의미로 개역 성경에는 번역되지 않는 강조형 반의 접속사 '데'(* , '그러나')와 인칭 대명사 '쉬'(* , '당신')가 합하여 일종의 수사학적 질문이다(Moo, Martin, Tasker). 야고보는 이 수사학적 질문을 통해서 사람들이 타인을 판단하는 것이 절대 불가(不可)한 것임을 다시 한번 확인시킨다.
=====4:13
들으라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게뉜'(* )은 문자적으로 '지금 들으라'는 의미로 수신자들로 하여금 지금 곧 주의해야 함을 나타낸다. 여기서 '아게'는 명령의 형태를 취하고 있으나 부사적으로 사용되어 수신자들에게 생각해 볼 기회를 갖게 한다(5:1;삿 19:6, Manton, Tasker, Gibson, Burdick).
너희 중에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아무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년을 유하며 장사하여 이를 보리라 하는 자들아 - '말하기를'에 해당하는 헬라어 '레곤테스'(* )는 현재 분사로 현재 많은 삶들이 허탄한 계획을 세우고 그것에 집착하고 있음을 시사한다(Burdick). 한편 본절은 당시 유대인 중개업자나 상인들의 생각과 어투를 표현하고 있다(Manton, Moo). 야고보는 당시 상인들의 생활 관념과 태도를 꼬집어 자신의 이익에만 집착하고 하나님의 뜻을 무시하는 어리석고 고집스런 교만을 지적한다.
=====4:14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 본문은 잠 27:1을 반영한 것으로 앞절에서 언급된 육신적인 목적만을 추구하는 자들이 어리석은 이유를 나타낸다. 그들은 먼 미래에 대해 확신을 가지고 육신적인 목적을 위해 계획하고 추구하지만 실상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인생들이다. 야고보는 이렇듯 하나님의 손길을 무시한 채 목전의 이익에만 눈이 먼 자들의 삶의 자세를 경고한다(사 56:12;암 6:3;눅 12:19).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에 해당하는 헬라어 '포이아 헤 조에 휘문'(* )은 문자적으로 '너희 생명이 무엇을 위하여 존재하는가?'라는 의미이다. '무엇'으로 번역된 헬라어 '포이아'(* )는 '어떤 특성'을 나타내는 표현으로 인간의 생명이 지니고 있는 한계성(限界性)을 시사한다(Tasker, Robertson). 한편 '안개'의 헬라어 '아트미스'(* )는 '증기' 혹은 '호흡'을 의미하지만 본절에서의 의미는 '생의 무가치성과 유한성'이다(Adamson). 본문은 짙게 깔린 안개가 태양이 떠오르면 사라지는 것과 같이 인간의 생명이 덧없고 짧다는 점을 들어 헛된 인간의 욕망에 집착하여 확신하는 자들의 모든 생각과 행위가 헛된 것임을 암시한다(욥 7:7;13:25;14:2;사 40:6,7).
=====4:15
너희가 도리어 말하기를 주의 뜻이면 - '주의 뜻이면'은 사도들과 초대 교회 그리스도인들이 흔히 쓰는 말로(행 18:21;롬 1:10;고전 4:19;16:7;히 6:3) 자신들의 경건성을 나타낼 때 사용하던 관용구였다(Manton). '뜻'의 헬라어 '델레세'(* )는 계시된 말씀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만물을 다스리시고 통치하시는 모든 계획을 의미한다(Calvin).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 저것을 하리라 할 것이거늘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제소멘 카이 포이에소멘투토 에 에케이노'(* )는 가정법이 아니라 미래형이다. 이것은 야고보 자신의 의지와 권고를 나타내는 것으로 하나님의 계획이 그리스도인의 행동뿐만 아니라 전 삶을 지배하도록 하자는 권고문의 형태를 띠고 있다(행 18:21;롬 15:28;고전 4:19, Burdick, Robertson, Gibson).
=====4:16
이제 너희가 허탄한 자랑을 자랑하니 이러한 자랑은 다 악한 것이라 - '허탄한 자랑'에 해당하는 헬라어 '알라조네이아이스'(* )는 일반적으로 자신을 지나치게 신뢰하거나 과대 평가하는 '오만'을 의미하나 본문에서는 복수로 사용되어 야고보가 본서를 통해 제시한 온갖 종류의 세상적인 확신을 가리킨다(Manton, Calvin). 세상 것에 대한 어리석은 확신과 천박한 자만심은 결국 악으로 치닫게 된다.
=====4:17
이러므로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운'(* )은 본절이 야고보 자신의 주장의 결론임을 나타낸다.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치 아니하면 죄니라 - 본문은 롬 14:23을 반영하는 것으로 두 가지로 해석된다. (1) 혹자는 사람이 어떤 일을 행하고 있으면서 그것이 옳은 일인지를 의심하는 것은 죄라는 의미라고 주장한다(Scott). (2) 혹자는 어떤 일이 선한 줄 알고 또 그것이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줄 알면서 고의적으로 거역하면 죄가 된다는 의미라고 주장한다(요 9:31, Manton). 두 가지 해석 중 후자가 더 타당하다. 왜냐하면 본문과 유사한 병행 구절이 이를 뒷받침하고 있기 때문이다(눅 12:47;요 15:22;벧후 3:5).
본장에서 야고보는 계속해서 성숙한 신앙인으로서의 모습을 보여주고자 한다. 1장에서 그가 보여주고자 했던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은 시련 가운데 인내하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2장에서는 믿음을 자신의 삶 가운데서 구체적으로 드러내는 사람으로서 신앙인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3장에서 야고보는 그의 논의를 보다 좁혀서 진행해 나간다. 먼저 그는 혀와 지혜를 언급하였다. 아마도 이것은 본장에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다툼이라는 주제를 끌어내기 위한 전(前) 단계였을 것이다.
(1) 주제의 진행 과정.
본서를 읽는 가운데 우리는 비록 부분적이기는 하지만 초대 교회의 생활상에 대한 약간의 지식을 갖게 된다. 사도행전 4:32의 "믿는 무리가 한 마음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제 제물을 조금도 제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는 말씀은 생동력 있는 초대 교회의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었고, 이러한 초대 교회의 모습은 복음의 역동성(力動性)을 상실한 현대 교회에서 하나의 좋은 표본이 되어 왔다. 그런데 본서에서 우리는 실망스러운 교회의 모습들을 보게 된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첫 사랑을 잃어버린 채 세속화의 길을 걸어간 교회의 모습에 비애를 느끼기도 한다. 야고보는 본장에서 내용은 상실하고 신앙의 형식만 남은 성도들에게 온전한 믿음이 무엇인지 보여주고자 하였다. 야고보가 보여주고자 했던 온전한 믿음은 고백과 삶이 일치하는 믿음이었다. 만약 어떤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고 한다면 그 믿음은 역동적으로 그의 삶 가운데 나타나야 한다. 만일 그렇지 못한다면 스스로 속고 있는 것이다. 1,2,3장에서 야고보는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삶이란 어떤 것인지 보여주고자 하였다. 본장은 이러한 논의가 더욱 구체화 되어 진행된다. 특별히 13-17절은 성도들의 삶을 종말과 연결시켜서 오늘의 나의 삶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새롭게 부각시킨다.
(2) 중심 주제.
본장의 중심 주제는 '다툼'이다. 본장 1절에 나오는 '싸움'(폴레모이)은 '지속적인 전쟁'을 그리고 '다툼'( ,마카이)은 '개별적인 분쟁'을 의미하는 단어이다. 그렇다면 야고보가 지적하는 싸움과 다툼이란 어떤 것인가 ? 그것은 아마도 교회 안에서 일어났던 분파들간의 갈등일 것이다. 우리는 신약성경을 통해서 초대 교회 안에 많은 분파들이 있음을 보았다. 분파들의 발생 이유는 워낙 다양해서 일반화 시키기는 어렵지만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그것은 본문이 말한 바와 같이 '정욕'이라고 할 수 있다. 정욕이란 무엇인가 ? 그것은 '자기 주장을 고수하려는 의지'이다. 1장에서 보는 것처럼 이러한 자기 주장의 의지는 죄의 본질이 된다. 사람들 사이에 일어나는 모든 문제들은 결국 사람이 하나님과 다른 사람들에 대해 자기를 주장하는 데서 발생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람들의 자기 주장 의지 때문에 사람들이 사는 곳엔 어디서나 다툼이 일어나게 된다. 따라서 다툼을 극복하는 비결은 '자기 주장'을 그만두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타락한 인간의 본성 때문에 자기 주장을 포기하는 것이 쉽지가 않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야고보는 하나님께 나아가 그 발 앞에 엎드리라고 말한다. 7절에 기록된 '순복할지어다'( ,휘포타게테)란 동사는 전치사 '아래'( ,휘포)와 동사 '놓다'( ,탓소)가 결합된 단어로 하나님 아래 자신을 두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의 자기 주장이 포기된 공동체, 이것이 야고보가 꿈꾸던 교회의 모습이었다. 이것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분의 뜻에 순종하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범을 보이신 것처럼 자기를 내어줄 때 비로소 이룰 수 있는 것이다. 자기 주장의 의지는 하나님과 인간들과의 소외와 갈등을 일으키지만, 자기 주장을 포기하고 자기를 내어주는 것은 구속(救贖)과 치유를 가져다 준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하면 자기 주장이 극대화된 세상에 살면서 자기 주장을 포기하며 살 수 있겠는가 ? 우리는 시시각각으로 자기를 주장하며 자기의 이익을 도모할 것인가, 아니면 자기를 내어주어 남을 섬기라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것인가에 대한 선택에 직면한다. 야고보는 '후자를 선택하는 것이 우리의 믿음이 참되다는 것을 증거하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삶에서 표현되지 않는 믿음은 진정한 의미로서의 믿음이라고 할 수 없다. 우리가 온전한 그리스도인이 될 때, 다툼은 자연히 그치게 되는 것이다.
(3) 내용 분석.
본장을 좀더 자세히 단락을 나누어서 살펴보도록 하자. 본장은 크게 둘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는바, 첫번째 단락은 1-12절로서 다툼의 원인을 제시하고(1-6절), 다툼을 극복할 수 있는 비결을 제시한다(7-12절). 두번째 단락은 13-17절로서 신자들의 삶을 미래와 연결시켜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비유적으로 설명한다.
본장의 내용을 구조적으로 이해하기 위해 본장을 도표화하면 다음과 같다.
+------------------------------------------------------------------------------+
|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 |
+-------------------------------------+----------------------------------------+
| 오늘의 삶(1-12절) | 미래를 준비하는 삶(13-17절) |
+-----------+-------------+-----------+-------------+-------------+------------+
|다툼의 원인| 다툼을 극복 | 제 안 |불확실한 인생| 허탄한 자랑 | 제 안 |
| | 하는 길 | | | | |
| (1-6절) | (7-10절) | (11,12절) | (13,14절) | (15,16절) | ( 17절 ) |
+-----------+-------------+-----------+-------------+-------------+------------+
1. 오늘의 삶(4:1-12)
본문은 이 세상을 살아가는 성도들의 삶을 위한 실제적인 권고를 담고 있다. 이 세상은 어떤 곳인가 ? 이 세상은 인간의 자기를 주장하려는 의지들이 서로 충돌을 일으키는 곳이다. 사람들이 서로 자기만을 주장하기 때문에 인간 사회는 생존 경쟁(生存 競爭)이 벌어지고, 약육강식(弱肉强食)이 지배하는 곳이 된다. 어느 역사 학자의 통계를 보면 유사 이래로 지구상에 국부적인 전쟁이 아닌 나라와 나라 사이의 큰 전쟁만 해도 14,531회난 발생하였다고 한다. 이것의 평균을 내어 보면 1년에 약 2.6회의 큰 전쟁이 일어난 셈이다. 이처럼 이 세상에는 끊임없이 다툼이 일어나고 있다. 사람들은 또한 개인과 개인과의 문제들을 해결하고자 정치를 한다. 그래서 정치는 사회 구성원들 각자의 주장들을 절제시키거나 상호 타협시키기 위하여 노력한다. 하지만 이러한 정치도 자기를 주장하려는 의지에 의해서 이루어 지기 때문에 인간 상호간에 이루어지는 갈등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유대인들이 갈망하던 정치적인 메시야가 되기를 거부하셨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러한 다툼을 극복할 수 있겠는가? 본문은 이에 대한 몇 가지 대안을 제시한다. 그것은 먼저 자기를 주장하려는 의지를 포기하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범을 보이신 것처럼 자기를 내어 놓는 것이다(빌 2:7). 인간의 자기 주장은 소외와 갈등을 가져오지만, 자기를 내어주는 것은 화해와 치유를 가져다 준다.
야고보는 본문의 내용 속에서 다툼의 원인(1-6절)과 다툼을 극복하는 비결(7-10절)을 제시한다. 그리고 후반부에서 서로 비방하지 말 것을 제안함으로써(11,12절) 다툼에 대한 그의 논의를 정리한다. 본문을 좀더 자세히 살펴보자.
(1) 다툼의 원인(1-6절). "너희 중에 싸움이 어디로, 다툼이 어디로 좇아 나느뇨"(1절)란 말 속에서 초대 교회 안에 많은 갈등이 있었음을 엿보게 된다. 누가복음 9:46 이하에 의하면 제자들 사이에 높아지고자 하는 갈등이 있었다.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 성령께서 강림한 이후 신자들은 서로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통용(通用)하고 자기 재물을 조금도 제 것이라 하는 이가 없었다(행 4:32).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교회 안에 다툼이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비교적 선한 동기에서 다툼이 일어나기도 하였지만 심한 경우엔 법정 고소하기까지 하였다(고전 6:1-8).
(가) 다툼의 정의. 본문에 기록된 싸움과 다툼은 개인적인 분쟁과 소송, 사회적인 경쟁이나 파벌, 그리고 신앙 논쟁을 포괄하는 단어이다. 이 단어는 개인적인 논쟁이나 말 다툼을 표현할 때도 사용되었는데, 본문에서도 이러한 의미로 사용되었다. 본서에 보면 교회 안에 많은 다툼이 있었음을 보게 된다(2:1-13; 3:8,9, 13-18).
(나) 다툼의 원인. 다툼의 원인은 사람들 마음속에 내재되어 있는 자기를 주장하려는 의지이다. 본문은 이것을 정욕(情欲)이라고 표현하였다. '너희 지체 중에서 싸우는 정욕으로 좇아난 것이 아니냐'(1절). '정욕'( ,헤도논)은 이기적인 쾌락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1:14,15에서는 이것을 욕심(desire)이라고 표현한다. 정욕은 이기적인 쾌락을 추구하려는 욕심이다. 이것은 자기만을 주장한다. 이러한 자기를 주장하려는 의지는 상대편의 의지와 필연적으로 충돌을 일으켜 다툼을 야기시킨다. 따라서 사람이 자기 주장을 포기하지 않는 한 다툼은 인간 사회에 필연적으로 따라오게 된다.
(다) 다툼의 양상(樣相). 본문 1절에 '너희 지체 중에 싸우는'이라는 기록으로 보아 교회안에 자기를 주장하려는 사람들 사이의 충돌이 많이 있었음을 엿보게 된다. '지체'란 무엇을 말하는가 ? 문자적으로 그것은 팔, 다리와 같은 신체의 일부분을 의미한다. 하지만 본문에 기록된 지체는 육체를 의미하기보다는 그리스도의 지체인 성도들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롬 12:5; 고전 12:27). 그러나 야고보가 본문에서 말하는 지체는 그리스도의 지체인 일반 성도들이라고 하기엔 다소 무리가 생긴다. 왜냐하면 모든 성도들이 다 다툼을 벌이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어떤 성도들은 자신의 옛 성품을 죽이려고 부단히 애를 쓰고 있었다. 따라서 본문에 기록된 지체는 교회 안에서 자기를 주장하려는 의지로 인하여 서로 갈등을 벌이는 사람들을 의미한다. 이들은 각기 자신의 정욕을 충족시키기 위해 싸웠다. 본문에 기록된 '싸우는'의 헬라어 '스트라튜메논'( )은 '전투를 하다'의 헬라어 '스트라튜오'( )의 현재 중간태 분사로 '싸움을 만드는'(to make war)이란 의미를 갖고 있다. 입으로는 그럴듯하게 신앙을 고백하면서도 아직 옛 사람의 성품(性品)을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지 못한 이들은 계속해서 자신의 욕망이 충족될 때까지 다툼을 일삼았다.
(라) 다툼의 결과.
자기 만족을 추구하는 사람은 늘 경쟁 속에서 살아간다. 그는 자신의 상대적인 우월감이 충족될 때까지 계속해서 자기를 주장할 것이다. 하지만 성경은 말한다. "너희가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하고 살인하며 시기하여도 능히 얻지 못하나니"(2절). 이룰 수 없는 끊임없는 욕심은 우리를 죄의 노예로 만든다. 그래서 야고보는 "욕심이 잉태한 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1:15)고 경고하였다. 본문에 기록된 살인은 문자 그대로 사람을 죽이는 것을 의미하기보다는 다른 사람의 영성(靈性)을 파괴함을 의미한다. 자기를 주장하는 사람들의 결과는 무엇인가? 한마디로 파국이다. 그토록 얻고자 하였지만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남는 것은 이기심에 멍든 초라한 자신뿐이다. 이들은 자신의 정욕이 충족되기 위하여 하나님께 기도를 드린다. 하지만 아무리 하나님께 기도를 드려도 이들은 자신들이 구하는 바를 얻지 못한다(3절). 기도의 핵심은 준게서 가르쳐 주신 기도에서 보는 것과 같이 '저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것'(마 6:10)이다. 한마디로 기도란 내 뜻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뜻을 나의 뜻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런데 이들은 하나님의 뜻을 거부하고 자신의 의지만 부각시켰다. 이러한 기도는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신다.
(마) 다툼에 대한 경고. 4절에 기록된 '세상'은 하나님의 다스림을 거부하는 곳, 인간의 자기 주장이 만연하 곳을 말한다. 인간의 자기 주장과 하나님에 대한 신앙은 양립(兩立)할 수 없다. 신앙은 자기 주장을 포기하는 것이다. 자아를 버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를 즐거워하며 그분의 다스리심을 받는 것이다. 그러나 정욕에 따라 사는 삶은 그에 대한 하나님의 다스리심과 스스로 하나님의 백성됨을 거부하는 삶이다. 백성은 왕의 통치를 받아들여야 한다. 백성이 왕의 통치를 거부하는 것은 왕의 백성됨을 거부하는 것일뿐만 아니라 왕에 대한 반역을 의미하는 것이다. 처음 인류인 아담과 하와가 그러했다. 그들은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뜻보다 자신의 정욕을 채우기를 즐겨 하였다. 그리고 그 결과는 에덴으로부터의 추방이었다. 더 이상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인간의 처지를 불쌍히 여기셨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셔서 그의 백성들을 다시 회복코자 하셨다. 누구든지 왕의 통치를 받아들이기로 결단만 하면 그는 다시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입으로는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말하면서도 그들의 삶 속에서는 그의 통치를 거부하고 정욕에 이끌려 살았다. 야고보는 이러한 사람들에게 말한다. "스스로 속지 말라, 정욕에 따라 사는 것은 하나님과 상관없는 삶이다. 이러한 삶을 사는 사람은 하나님과 원수된 것이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자를 물리치신다(6절). '교만한 자'의 '훼페레파노이스'( )는 '위에'를 뜻하는 '휘페르'( )와 '자신을 나타내다'를 뜻하는 '파이노마이'( )의 합성어로서 '우월감에 빠져 있는 자'란 의미를 갖는다. 교만한 사람들은 언제나 상대적 우월감에 젖어 있어서 다른 사람들, 심지어 하나님도 의지하지 않는다. 이에 성경은 말한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잠 16:18). 교만은 사단의 선봉이며 이것은 성도들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것이다.
(2) 다툼을 극복하는 길(7-10절).
그러면 어떻게 다툼을 극복할 수 있는가 ? 본문은 다툼을 극복할 수 있는 몇 가지 대안(代案)을 제시한다.
(가) 하나님께 순복하라(7절). '순복하라'( ,휘포타게테)는 군대 용어로서 전치사 '아래'( ,휘포)와 동사 '놓다'( ,탓소)의 합성어로 '하나님 아래에 자신을 두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앞에 자신의 의지를 굽혀 복종시키는 것, 이것이 신자됨의 의미이며 다툼을 극복하는 비결이다.
(나) 마귀를 대적하라(7절). '마귀'의 헬라어 '디아볼로'( )는 '고발자', '중상자', '모략자'로 번역되는데 사단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대적하라'의 헬라어 '안티스테테'( )는 단어 '반대하여'의 헬라어 '안티'( )와 '서라'의 헬라어 '히스테미'( )가 합쳐진 것이다. 따라서 '마귀를 대적하라'는 것은 '마귀, 곧 하나님의 통치를 거부하고 자신을 드러내는 것을 거부하라'는 의미이다. 마귀는 정복할 수 없는 대상이 아니다. 우리가 마귀를 대적할 때 마귀는 우리를 피해 달아난다. 사람들은 필요 이상으로 마귀를 두려워 한다. 자연인에게 마귀는 위협적인 존재인지 모른다. 하지만 중생(重生)한 성도들에게 마귀는 아무것도 아니다. 한때 공포물로서 '드라큐라'라는 영화가 유행한 적이 있다. 그 영화의 내용은 드라큐라라는 흡혈귀가 밤이면 나타나 사람들의 피를 빨아 먹는다는 것이다. 이 영화의 결론은 십자가에 의해서 흡혈귀가 죽임을 당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아무도 이 영화를 보고 십자가의 위대함을 찬양하지 않는다. 오히려 드라큐라에 대한 공포감만 가득할 뿐이다. 사단은 이러한 영화를 통해서 성도들의 의식 속에 공포감을 심어 놓으려 한다. 하지만 사단은 주께서 피로 사신 성도들을 해할 수 없다. 그런데 많은 신자들이 이러한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마귀에 대한 두려움에 빠져 있다. 이에 성경은 말한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
(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8절). '가까이 하라'( ,엥기사테)는 말은 제사장들이 하나님께 나아갈 때 사용된 단어이다(출 19:22). 사람들이 하나님께 가까이 가려고 할 때 하나님과 사람 사이를 가로막는 것이 죄(罪)이다. 그래서 성경은 '손을 깨끗이 하라', '마음을 성결케 하라'고 말한다. '손을 깨끗이 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 구약 시대에는 제사장들이 지성소(지성소)에 들어가기 전에 물두멍에서 손을 씻었다. 구약에서 '손'은 '부패한 행동'을 의미하였다. 따라서 손을 씻는 것은 '내가 하나님 앞에서 깨끗이 서기 원한다'는 것을 나타내는 상징적 행위이다. 이것은 또한 '마음을 성결케 하라'는 말씀과 연결된다.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 누구며 그 거룩한 곳에 설 자가 누군고 곧 손이 깨끗하며 마음이 청결하며 뜻을 허탄한 데 두지 아니하며 거짓 맹세치 아니하는 자로다"(시 24:3,4)라고 노래하였다. 여기서 '손'은 외적 행동을 그리고 '마음'은 내적 사상을 의미한다. 성도는 하나님 앞에서 깨끗이 서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외적 행동만으로 불충분하다. 외적 행동은 내적 마음에서 시작된다. 이처럼 거룩한 삶은 성결한 마음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본문에 '두 마음'을 품었다는 것은 '두 혼'을 의미한다. 어떻게 보면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 같고, 또 다시 보면 자기를 주장하는 의지에 이끌려 사는 것 같은 이중적인 삶을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의지와 세상의 원리 사이에서 그때그때 자기에게 유익을 주는 것을 선택하는 삶을 사는 성도들에게 성경은 마음을 성결케 하여 한 마음을 가지라고 말하고 있다.
(라) 슬퍼하며 애통하며 울지어다(9절). 성도들은 자신들의 영적 상태를 돌아보면서 내게 있어야 할 것이 없음을 인해서, 또 내게 없어야 할 것이 있음을 인하여 슬퍼하며, 애통하며, 울어야 한다. 바울은 자신에게 있어야 할 선(善)이 없고 없어야 할 죄만 가득한 것을 보고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롬 7:24)라고 탄식하였다. 우리는 자신의 잘못된 삶에 대해서, 하나님의 뜻보다 내 육신(肉身)이 원하는 것을 더 즐거워한 것에 대해서 슬퍼하여야 한다. 애통하며 울어야 한다. 우리의 즐거움이 무엇인가 ? 돈, 명예, 권력, 사람들의 인정, 학식, 아름다움과 같은 것들은 잠시 있다가 사라지는 것들이다. 그것들은 우리에게 참된 기쁨을 주지 못한다. 그러한 것들을 얻기 위해 영겁(永劫)의 시간 중에 한 찰나에 불과한 우리의 인생을 허비하지 말아야 한다.
(마) 주 앞에서 낮추라(10절). 주 앞에서 자기를 낮추는 것은 자신의 영적 가난을 인식함과 아울러 하나님의 뜻에 자신의 삶 전체를 순복함을 의미한다. 예수께서 말씀하신다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눅 18:14).
(3) 제안(11,12절).
앞에서 다툼의 원인과 다툼을 극복하는 길을 소개한 야고보는 본 단락에 와서 서로 비방하지 말 것을 제안한다. 왜 형제를 비방해서는 안 되는가 ?
첫째로, 우리 모두가 한 형제, 자매이기 때문이다. 내가 비방하는 그 사람은 주(주)께서 온 천하보다도 귀하게 생각하시는 당신의 피로 사신 성도이다. 주께서 그를 위해서 십자가위에서 돌아가셨는데 어떻게 우리가 그를 함부로 평가하고 헐뜯을 수가 있는가 ?
둘째로, 형제를 비방하는 것은 곧 율법을 어기는 것이기 때문이다. 본문에 사용된 율법은 모세의 율법과는 구별된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1:25), '최고한 법'(2:8)을 의미한다. 즉 성도들의 삶의 원리를 말하는 것이다.
셋째로, 그것은 또한 하나님의 주권을 침해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사람을 판단하시는 분은 하나님 한 분밖에는 없다. 그런데 감히 누가 다른 사람을 판단할 수 있겠는가 ? 만일 그가 다른 사람을 판단하려 한다면 그는 자신을 하나님의 위치에 올려둠을 의미한다. 그래서 야고보는 말한다. "입법자와 재판자는 오직 하나이시니 능히 구원하기도 하시며 멸하기도 하시느리라 너는 누구관대 이웃을 판단하느냐"(12절).
2. 미래를 준비하는 삶(4:13-17)
앞 단락에서 야고보는 이 세상에 인간의 자기를 주장하는 의지가 서로 다툼과 충돌을 일으킴을 보고, 어떻게 하면 성도들이 자기를 주장하는 의지들이 끊임없이 격돌하는 이 세상에서 성도로서의 정체성(identity)을 유지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 기술하였다. 이제 본 단락에 와서 야고보는 그의 논의를 미래의 삶과 연결시켜서 계속 확장시켜 나간다. 먼저 그는 불확실한 인생에 대해서 언급한다(13,14절). 영원을 말하면서도 바로 다음 순간의 일을 모르는 것이 사람이다. 그러한 사람이 무엇을 자랑할 수가 있는가 ? 인생의 자랑은 다 허탄한 것이다(15,16절). 따라서 성도들은 잠시 있다가 사라질 안개와 같은 것들에 얽매여 살지 말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야 한다. 이것을 야고보는 역설적으로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이러므로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치
아니하면 죄니라"(17절).
(1) 불확실한 인생(13,14절). 13절은 이 땅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특성을 잘 묘사하고 있다. 이 땅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특징이 무엇인가 ? 이기적인 욕망에 사로잡힌 채 불확실한 미래를 향하여 큰 소리를 치는 것이다. 사람들의 말을 들어 보자.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아무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년을 유하며 장사하여 이를 보리라"(13절). 이들의 계획은 장사하여 이익을 남기는 것이다. 그런데 유의해야 할 사실은 본문의 전체적인 분위기가 이들의 계획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흐르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이들의 부도덕한 상술(商術) 때문은 아니다. 본문 어디에도 이들의 상행위(商行爲)가 부도덕하다는 것을 암시하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이들의 문제가 무엇인가 ? 그것은 두 가지로 정리될 수 있다. 첫째는 그들의 물질 중심적인 가치관이고 둘째는 하나님 없이 계획을 세우는 행위이다.
물질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다. 물질은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누리라고 주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하기 위한 방편에 불과한 것이지 우리의 삶의 목표일 수는 없다. 비록 그것이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수단이기는 하지만 물질이 곧 풍요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또 하나 이러한 사람들의 문제는 하나님과 상관없이 자신의 힘으로 무엇을 해보려는 점이다. 이러한 사람들으 어리석음에 대해서 예레미야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생수의 근원되신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물을 저축지 못할 터진 웅덩이니라"(렘 2:13). 하나님 없이 세운 계획은 제대로 될 수가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생수(生水)의 근원이시기 때문이다. 아무리 사람들이 제 힘으로 이익을 보려고 하지만 터진 웅덩이라 물이 고이지 않는다.
이처럼 불확실한 미래를 향하여 큰 소리를 치는 인생의 허무함에 대해서 야고보는 이렇게 말한다.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14절). 잠언서 기자는 "너는 내일 일을 자랑하지 말라 하루 동안에 무슨 일이 날는지 네가 알 수 없음이니라"(잠 27:1)고 하였다. 한치 앞을 내다보지 못하는 것이 인생이다. 영원을 말하면서도 당장 눈 앞에 벌어질 일에 대해서 모르는 것이 사람이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간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14절). 야고보는 불확실한 미래와 인생의 허무를 연결시켜서 하나님 없이 이익을 보려고 하고, 물질을 최우선의 가치로 여기는 사람들에게 경고를 한다. 우리의 생은 안개와 같은 것이다. 영겁의 시간에 비교하면 찰나에 불과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자신의 생이 마치 영원한 것처럼 착각하며 살아간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함에 있지 않다고 말씀하셨다(눅 12:15).
(2) 허탄한 자랑(15,16절). 인생의 자랑은 다 허탄한 것이다. 허탄한 자랑이란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착가하고 자랑하는 것을 말한다, 허탄한 자랑이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가 ? 그것은 세상의 부를 자랑하며(2장) 마치 자신만이 지혜로운 듯이 함부로 말하고(3장)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는 것이다.
이러한 것들은 모두 잠시 있다가 사라질 것들이다. 또 어떤 것은 누려보지도 못한 채 상상 속에서만 머무르다 사라지기도 한다. 그러나 허탄치 않은 것이 있다. 그것은 주의 뜻대로 행하는 삶이다. 그런 삶은 후회가 없다. 그러나 자기를 주장하는 의지, 즉 욕심에 이끌려 사는 삶은 그렇지 못하다. 언제나 부족하다. 받으면 받을수록, 마시면 마실수록 갈증을 느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아무리 먹어도 충족되지 않는 욕심을 따라 행하며 자신의 그러한 모습을 자랑한다. 그러나 성도들의 자랑은 소유의 넉넉함에 있지 않다.
(3) 제안(17절). 본문이 말하는 선은 하나님의 뜻과 연결되어 있다.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알고도 행치 않으면 그것은 곧 죄가 된다. 사실 사람들이 망하는 것은 지식이 없어서가 아니다. 지혜가 없어서 그렇다. 자기가 깨달은 하나님의 뜻을 그의 삶 가운데 적용하는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왜 말로는 '주의 뜻이면 살기도 하고, 이것저것을 하리라'하면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못하는가 ? 주의 뜻을 모르는가 ? 아니면 고의로 거부하고 제 육신이 즐거워하는 것을 행하는가 ?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알고도 행치 아니하면 죄니라'는 말씀을 통해서 야고보는 역설적으로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삶이 미래를 준비하는 성도들의 삶의 모습임을 밝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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