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 야보 - 이와 같은표현 방식은 다른 서신에서도쉽게 발견 할 수 있다. 이는 초대 교회 당시 여러 서신에서 일반적으로 사용되던 형태이다 (롬 1:1; 빌 1:1; 딛 1:1; 벧후 1:1; 유 1:1; 계 1:1).본절에서 야고보가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를 결합하여 하나님과 예수를 동격의 위치에 놓은 것은 예수의신성을 부인하던 당시의 에비온파(Ebionites)에 대해서 예수의 신성을 강조하기 위함이다.'종'은 직분보다는 신분을 나타내는 말로서 야고보 자신이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소유된 자임을 시사한다. 그러나 이것은 야고보가 주께 예속되었음을 강조한다기보다는 그의 신분이 자랑스러움을 나타내는 것으로 온전히 하나님의 뜻만 좇아서 사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한편 이 서신의 기록자 '야고보'(* ,야코보스)는 예수그리스도의 육신의 어머니 마리아에게서 태어난 동생이며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 중 한 사람이었다(행 15:13; 21:18, 본서 서론 '저자론'참조).
흩어져 있는 열 두 지파에게 문안하노라 - 흩어져 있는 열 두 시파에 대한 해석은 두 가지이다.(1) 혹자는 예루살렘 멸망 이후 팔레스틴 이외의 흩어진 유대인들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Mayer, Hort, Chaine).(2) 혹자는 스데반의 순고 이후에 흩어진 종말론 구원의 참이스라엘인 그리스도인을 의미하는 것으로 그리스도인 중에서도 유대인 그리스도인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Moo, Burdick, Tasker, Martin). 이 두 가지 견해 중 후자가 타당하다(본서 서론 '수신자' 참조). 한 편 '문안 하노라'의 헬라어 '카이레인'(* )은 '즐거워하다', 기뻐하다'라는 의미이다. 야고보는 스데반의 순교 이후 박해를 피해 여러 곳에 흩어져 있는 유대인 그리스도인에게 시련 가운데 있을지라도 더욱 감사하며 기뻐할 것을 종용한다.
=====1:2
내 형제들아 - 야고보는 본서를 2인칭으로 시작함으로써 수신자들로 하여금 친근한 느낌을 갖도륵 한다. '형제들' 은 야고보가 자주 사용하는 어투로서 본서에서 5번이나 사용되고 있다. '형제'라는 호칭의 헬라어 '아델포이' (* )는 본래 유대인들이 같은 동족에게 사용하였으나(출 2:11; 신 15:2) 초대 교회에서 교인들이 서로를 부를 때 사용하였던 것으로(Deissmann),본절에서는 야고보와 수신자 사이의 따뜻한 사랑의 관계를 시사한다(2:1,14; 3:1,10,12; 5:12,19).
너희가 여러 기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 야고보는 신자들이 박해를 파해 흩어진 자들이기 때문에 먼저 그들의 최대 관심사인 시험에 대해 권면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시험에 들지않도록 기도해야 하며(마 6:13) 일단 시험을 맞게 되면 잠시 근심하게 될지라도 그것이 뜻하는 바가 있기 때문에 기쁘게 여겨야 한다(벧전1:6).
'시험'에 해당하는 헬라어 '페이라스모이스'(* )는 외부로부터 야기되는 것으로 내부로부터 오는사람의 생각 즉 죄의 '유혹'(temptation)이 아니라 '시련'(trial)을 가리킨다(Kuhn). 한편 '만나거든'의 헬라어 '페리페세테' (* )는 문자적으로 '한 가운데 떨어지다'의 의미인데 본문에서는 사건에 직면한 현실을 나타낸다(눅 10:30). 사람들의 내부로부터 오는 '유혹'은 육체를 파괴하고 죽이려는 것이지만 외부로부터 오는 '시련'은 낙심하지 않고 이겨 내면 자신의 믿음이 연단을 받아 더욱 굳건한 믿음으로 성장할 수 있기 때문에 야고보는 수신자들에게 충만한 기쁨으로 기뻐하라고 권면한다(롬 5:3-5).
( * 릭 워렌 "당신이 꼭 알아야 할 네 가지 '삶의 진실'
1. 문제는 반드시 있다. "만나거든"
2. 문제는 예측할 수 없다. "시험을 만나거든"이란 예상치 못한 일에 빠져들었다라는 의미이다.
3. 문제는 가지각색이다. "여러가지"
4. 문제에는 뜻이 있다(3절이하 참조) -순결하게 해 준다, 인내심을 길러준다, 인격을 성화시킨다.
=====1:3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을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 시험이 기쁨의원인이 될 수 있는 이유는 '인내'를 만들어 내기 때문이다. '시련'의 헬라어 '도키미온'(* )은 결과적인 의미로 '시험하여서 인정된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잘 정제된 금과 같은 '믿음의 표준'이라 할 수 있다(Mayor). 그런데 시련에 대한 야고보의 표현은 바울의 표현과 차이가 있다. 바울은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라'(롬 5:4)고 하여 '인내'(* , 휘포모넨)를 원인적인 위치에 둔다. 그러나 야고보는 '인내'가 시련의 과정을 거친 결과로 보고 있다. 이런 상이한 표현은 강조점의 차이 때문이다. 바울은 시련의 과정을 중요시 한 반면 야고보는 고난 자체를 중요시하기 때문이다(Manton).
=====1:4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 '온진히'에 해당하는 혤라어 '텔레이온'(* )은 '끝'올 의미하는 '텔로스'(* )에서 유래된 말 로서 '온전히 이루라'는 말은 '중도에서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참고 견디라'는 의미이다. 이는 하나님께서 온전하신 것처럼 성도들도 온전하여 져야 함을 시사한다(마 5:48).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 여기서의 '온전하고'는 그리스도의 지체로서 인내를 갖춤으로 부족함이 없는 상태를 가리킨다 ( Ropes,Manton). 이 말은 구약성경에서는 '타밈'(* , '흠이 없는')으로 인간 생활이나 재물에 '흠이 없는'상태를 가리킬 때 사용하였다(창 6:9). 한편 '구비하여'의 헬라어 '홀로클레로이(* )는 '전체'를 의미하는 '홀로스'(* )와 '할당'을 의미하는 '클레로스'(* )의 합성어이다. 이는 신체의 각 부분이 모두 건전한 것을 가리키는 것으로(행 3:16) 그리스도인들이 모든 부분에서 갖춰야 할 것들을 시사한다. 야고보는 본절에서 그리스도인이 지상의 생활에서 완전한 하나님의 형상을닮을 수 있다는 것을 말하고자 한 것은 아니다. 다만 목표를 향하여 나아가는 마음 자세를 가지라는 것이다.
=====1:5
너희 중에 누구든 지혜가 부족하거든 - 인간이 가지고 있는 지혜는 항상 불완전하여 온전한 인내를 이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인간의 생각이나 이성은 잘못된 길로 빠지기 쉬우며 환난 가운데서 기뻐하는 마음을 가진다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렇기 때문에 야고보는 시련을 온전히 이기기 위해서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지혜가 필요함을 진술한다.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지혜는 과학적인 지식이 아니고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의로운 생활을 하도록 하는 것이며 솔로몬이 구했던 지혜와 동일한 것이다(왕상 3:9-12;대하 1:7-12). 이런 지혜를 통해서 그리스도인들은 시험이 올 때 이를 적절 하게 대처할 수 있게 된다.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 하나님은 간구하는 자에게 결코 인색하지 않고 풍성히 주시는 분이다. 본절에서는 이러한 하나님의 성품을 잘 나타내 주고 있다. 신약성경에서 본문에만 나오는 '후히'(* , 하플로스)는 '풍성하게'라는 의미와(RV, KJV,Ropes), '즉 각성'이란 의미를 내포한다(Calvin). 또한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은 너무 빈번히 기도하여 번거롭게 한다고 해도 결코 책망하지 않는 분이어서 그리스도인들의 간절한 기도에 항상 관대하게 응답하심을 뜻한다.한편 '모든 사람'은 비그리스도인까지 포함하는 것이 아니라 기도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것으로 본절은 하나님께서 기도하는 모든 사람에게 풍성하게 주시기 위해서 준비하고 계시는 분이심을 시사한다.
=====1:6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 응답받는 기도는 믿음으로 하는것이어야한다. 그 '믿음'은 '지혜'를 구하는 그리스도인 들에게 하나님께서 반드시 응답해 주신다는 약속을 확신하고 신뢰하는 것이다(마 21:21;막 11:23). 따라서 성도들은 기도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신뢰 즉 하나님에 대한 신앙 행위가 있어야 한다(Ropes). 한편 '의심하다'에 해당하는 원어 '디아크리노메스'(* )는 '디아'(* ,'사이에')와 '크리노'(* , '분리시키다')의 합성어로서 어떤 문제에 대해 양쪽에서 저울질하는 것을 나타낸다(Calvin). 따라서 이 말은 심리적으로 두 마음을 품은 분리된 상태 즉 마음 속에서 의심하는 것에 대한 생생한 묘사이다(행 10:20).
=====1:7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 '이런 사람' 은 기도할 때의심하는 사람을 가리킨다. 의심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실 것이라는 확신이없으므로 결국 하나님께로부터 아무것도 받을 수가 없다.이것은 하나님의 기도 응답에대한 부정성보다는 사람이 기도할 때 자기 판단에 맡겨 버리는 어리석음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 에게 의심이 전혀 생기지 않는 것은 아니다.다만 그 의심을 극복하고 이겨낼 때 하나님의 약속을 소망할 수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주'(* , 퀴리우)란 예수 그리스도를 지칭한다. 그리스도는 그리스도인들이 기도할때 그 기도를 듣고 계셔서, 의심치 않고 지혜를 구하는 자에게 지혜를 주실 뿐만 아니라 시련을 당할 때 인내할 수 있도록 힘을 주실 것이다.
=====1:8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 - '두 마음'(* ,디프쉬코스)은 본서에만 나오는 말이다(4:8). '디프쉬코스'는 신약성경 이전에 전혀 사용된 문헌이 없고 신약성경 이후의 교부시대에 자주 사용된 것으로 보아서(Clement of Rome, Hermas) 아마 야고보가 만들어 낸 단어일 것으로 추측된다(Gibson). 이 말은 '정함이 없는'(* , 아카타스타토스)과 평행을 이루는 말로서 두 가지의 방법이나 생각에서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것을 가리킨다. 이런 자들은 마음이 항상 불안정하여 변하기 쉬우므로 하나님을 떠나기 쉬운 자들이다.
=====1:9
개역성경에는 '데'(* ,'그러나')가 생략 되어있다. 이 '데'는 9-11절의 내용이2-5절의 시험과 연결된 것임을 나타낸다(Burdick,Martin).왜냐하면 12절에서 다시 '시험'에 대해 언급되기 때문이다.
낮은 형제는 자기의 높음을 자랑하고 - '낮은'에 해당하는 '호 타페이노스'(* )가 신분적인 것인지 아니면 물질적 또는 육체적인 것인지는명백하지 않으나 70인역에서는 이 단어가 물질적으로나 영적으로 가난한 것을 가리켰으며(시 72:4;잠 30:14, Robertson) 10절의 '부한 형제'(* , 호 플루시오스) 와 대조를 이루는 것으로 보아 본절의 '호 타페이노스'는 물질적으로나 육체적으로 어려운 상황에 있는 자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Burdick). 이렇게 비천에 처한 자들이 자랑해야할것은 '높음'이라 했다.여기서 '높음'이란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새롭게 된 피조물의 가치 즉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 영적 승귀를 나타낸다(요15:15; 계 3:21). 그리스도인들은 비록 육체적으로나 물질적으로 어려움을 당하고 비천한 자리에 처한다 할지라도 그리스도를 위해 고난을 당하고 인내함으로 보다 더 영예로운 지위를 얻게 될 것이다.
=====1:10
부한 형제는 자기의 낮아짐을 자랑할 지니 - '낮은 형제'와 마찬가지로 부자들도 취해야 할 마음이 있다.그것은 자신들이 많이 소유하고 있다는 것을 하나님 앞에서 뽐내지 말고 겸손해야 한다는 것이다. '부한 자'에 대해서 혹자는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자신들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Dibelius, Blackman).그 이유는 본문상 9절에는 '형제'라는 말이 있지만 본절에는 그 단어를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것은 자연스럽지 못하다. 왜냐하면 헬라어 본문에서 '형제'를 생략한 것은 9절에서 사용한 것이므로 본절에서는 반복을 피하여 생략하였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하기 때문이다(Burdick, Martin). 따라서 본문의 '부한 자'는 그리스도인이면서 물질적으로 부요하거나 어려움을 당해보지 않은 자를 가리킨다(Marton, Adamson, Cantinat, Mayor, Ropes, Mussner). 일반적으로 부자인 형제들은 자신들의 부요함으로 인하여 영적인 교만함까지 가지게 된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인 부한 형제들은 지상에서 소유한 부가 자신이 죄인이란 사실을 변화시킬 수 없으며 일시적인 것임을 깨달아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것처럼(빌 2:8) 낮은 자와 동일시하며 부를 자랑하기 보다는 하나님 앞에서 겸손해야 한다(Moo, Tasker).
이는 풀의 꽃과 같이 지나감이라 - 본절은 부한 형제들이 낮아짐을 자랑해야 할 이유이다. 아무리 부요한 자라고 할지라도 그 부요함을 영원히 누리지는 못한다. 마치 꽃이 시드는 것처럼 부(富)뿐만 아니라 생명도 곧 시들어 버릴 것이기 때문에 겸손해야 한다(시 102:11; 사 40:6,7; 고전 7:31; 벧전 1:24).
=====1:11
해가 돋고 뜨거운 바람이 불어 풀을 말리우면 꽃이 떨어져 그 모양의 아름다움이 없어지나니 - 야고보는 사 40:7을 인용하여 부한자의 부를 덧없는 풀의 꽃에 비유하여 부한 형제들이 낮아져야 함을 권면한다. '해가 돋고 뜨거은 바람이 불어'는 순간적으로 변하는 것을 나타내고자 함이다. '뜨거운 바람'에 해당하는 헬라어 '카우소니'(* ) 란 말은 사하라 사막에서 불어 오는 '시로코' 라는 뜨거운 남동풍으로 이 바람이 불어 오면 곧장 채소 따위의 식물이 말라죽곤 하였다(욥 1:19;눅 12:55).이처럼 부자의 입는 옷과 물질적인 풍요로움으로 오는 안락은 쉽게 시들어 버린다. 그러기에 부한자는 일시적인 부나 아름다움을 추구하거나 자랑하지 말고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게 낮아져야 한다.
부한 자도 그 행하는 일에 이와 같이 쇠잔하리라 - '쇠잔하다'의 헬라어 '마란데세타이'(* )는 '불을 끄다'라는 의미를 지닌 '마라이노'(* )에서 유래하였다. 이것은 지상에서의 부와 영화가 영원하지 않으며 사라지는 것임을 나타내는 것으로(Ropes) 그리스도께서 오시는 종말의 때에 부로 인하여 마음이 교만해 있던 자들은 그들이 가지고 있는 부와 행한 일로 인하여 심판을 받고 역시 그것들과 함께 사라질 것을 시사한다(Martin). 따라서 본문을 해석할때 '부와 함께'를 포함하여 해석하는 것이 적절하다(Erasmus, Calvin).
=====1:12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도다 - '시험'에 해당하는 혤라어 '페이라스몬(* )은 2절에서 사용된 '페이라스모이스'(* ,'시험')와 동일한 것으로 믿음의 연단을 위하여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것이다. 이것은 본절이 2-11절과 연결된 것이며 13절 이하의 '시험'(temptation)과는 차이가 있음을 나타낸다(Ropes). 한편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도다'라는 표현은 유대의 지혜서와 묵시 문학적인 표현 방법으로 성경에서 자주 사용되었으며(시 1:1;32:1;잠 8:32,34;사56:2) 예수께서도 동일한 방법으로 축복을 말하였다(마 5:3-11).따라서 야고보는 이러한 표현법에 익숙하였음을 밝혀 주고 있다(Burdick).
이것에 옳다 인정하심을 받은 후에 주께서 자기를 사랑 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임이니라 - 본절은 '호티'(* )로 시작하며 시험을 참는자에 대한 결과를 설명하는 목적절이다. '인정하심을 받은'의 헬라어 '도키모스'(* )는 3절에서 사용된 것처럼 '금이나 은을 제련하여 귀금속이나 동전으로서 자격을 얻는 것'과 같은 인정함을 의미한다(롬 5: 4). 이것은 시험의 과정에 대한 중요성을 강조하는 표현으로 시험의 과정을 통과하는 자에게 순수함이 인정되면 '생명의 면류관'을 얻게 됨을 시사한다. 여기서 '면류관'(* ,스테파논)은 운동 경기에서 승리한 자에게 주는 면류관으로 (고전 9:25;딤후 4:8) 시험과 박해 속에서도 끊임없이 주를 사랑하는 자에게 주어 지는 '생명의 면류관'을 가리키는 것으로 하나님께 인정을 받았다는 증거로 보아야 한다(Ropes, tasker).
=====1:13
사람이 시험을 받고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지니 - 본절의 '시험' 에 해당하는 헬라어 '페이라조메노스'(* ,)는 앞서 언급한 '시험'(2,12절)이 의미하는 '시련'(trial,test) 아니라 '유혹'(temptation)을 의미한다. 야고보는 '페이라조메노스'를 '하나님께'(* , 아포 데우, '하나님께로부터')받는 것이 아님을 강조하면서 매개(媒介)의 성격이 강한 '휘포'(* ,'...의하여')를 사용하지 않고 '근원'을 의미하는 '아포'(* ,'...로부터')를 사용하여 '페이라조메노스'가 발생하게 되는 진원지가 하나님이 아님을 강하게 강조하고 있다(Robertson). 그 '유혹'은 하나님에게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사람이 자기 속에 있는 악한 죄악의 기질과 욕심에 미혹되어 발생하는 것으로(14절) 죄의 책임은 인간에게 있다.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이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 하나님은 시험을 창조하시거나 사람을 시험하지 아니하실 뿐더러 아무에게도 시험을 받지 아니하신다. '시험을 받지 아니하시고'에 해당 하는 헬라어 '아페이라스토스'(* )는 부정 접두어 '아'(* )와 '시험하다'의 '페이라조'(* )의 합성어이다. 이것은 '악에서부터 거리가 먼' 상태를 가리킬 뿐만 아니라(Hort, Diodorus, Josephus),유혹을 받을 수 있는 가능성이 전혀 없음을 시사한다(Burdick).전능하시고 거룩하신 하나님은 악으로부터 영향을 받지 않으실 뿐만아니라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않으신다.
=====1:14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 본절은 사람이 유혹을 받는 근원을 설명하고 있다. '시험'(temptation)이 사람을 연단시키기 위해서 주신 하나님 섭리라고 합리화 시킬 수는 없다. 오히려 사람이 자기 욕심에 이끌려 미혹되는 것이다. '미혹됨'에 해당하는 헬라어 '델레아조메노스'(* )는 원래 사냥이나 고기잡이에서 유래한 말로서 문자적으로 '미끼로 고기를 꿰어 내다', '올가미로 사냥하다'를 의미한다(Mayor). 사람들이 유혹을 받는 것은 마치 물고기가 자기앞에 놓인 낚시 바늘에 물려 이리 저리로 이끌려 다니는 모습과 같은 것이다. 한편 '욕심'의 헬라어 '에피뒤미아스'(* )는 악한뜻에 대한 열망이다(롬 7:17-23; 갈 5:16-21; 엡 2:3; 살전 4:5).
=====1:15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 '욕심이 행동으로 유발되지 않은 상태 즉 내적 상태로 머물러 있을때는 죄가 아니다'라고 말할 수 없다. 야고보는 인간이 욕심을 갖기 시작할 때부터 죄가 싹이트고 결국에는 사망에까지 이른다고 강조하고 있다. '잉태하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쉴라부사'(* )는 문자적으로 '함께 붙잡다'라는 의미이나 여자의 임신을 말할 때 주로 사용되었다(눅 1:24). 여기서는 죄의 단계를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욕심' 그 자체가 바로 죄이다. 혹자는 욕심을 자연적이고 오염되지 않은 상태라고 말한다(Mayor). 그러나 인간의 죄란 욕심에게 굴복당하는 시점으로부터 출발하기 때문에 욕심이 순수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어리석은 생각이다(Calvin).욕심은 부족한 것을 채우기 위해 필연적으로 죄를 유발하고 그 마음의 상태가 습관으로 굳어 져서 사망에 이르게 된다(창 3:19; 롬 5:12).
'낳다'에 해당하는 두 단어 '틱테이'(* )와 '아포퀴에이'(* )는 '여자가 아이를 낳는것'을 의미하나 전자는 문학적인 표현이고 후자는 의학적인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Ropes). 또한 정상적으로나 비정상적으로나 출산하는 것 모두를 뜻하나 본문에서는 비정상적인 출산 즉 유산을 나타내는 말이다(Robertson).이것은 처음부터 하나님으로부터의 분리를 의미하는 영적 사망을 잉태하고 있었음을 시사한다(롬 6:23).
=====1:16
내 사랑하는 행제들아 속지 말라 - 본절은 애정이 깃들어있는 부드러운 권면이다.
'속지 말라'(* ,메 플라나스데)는 심각한 말로 권면할 때 사용된 어법으로 (고전 15:33; 갈 6:7; 요일 3:7) '메'는 금지를 암시하는 완곡어법이다(Robertson). 그리스도인들은 시험을 받을 때에 그 시험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라고 착각하는 경우가 많으나 이런 착각은 스스로 미혹을 받아 사망에 이르게 되는 것이므로 속지 말아야 한다.
=====1:17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서 내려오나니 - 지혜가 부족한 자에게 풍족하게 내려 주시는 하나님에 대해서 5절에서 언급하였던 것처럼 본절에서도 좋은 은사와 선물들의 공급자가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언급하고 있다. '은사'(* ,도시스)와 '선물'(* ,도레마)은 동일하게 '주다'라는 의미의 헬라어 '디도미'(* )라는 동사에서 비롯된 것으로 문체론적 변화이다(Moo). '좋은 은사'는 일반 은총이 아닌 그의 사랑하는 백성들에게 내리는 특별 은총을 의미하며(Manton) '온전한 선물'은 성도들을 부르시고 인도하시며 영화로운 상태에까지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모든 행위이다. 이러한 은사와 선물은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서 내려오는 것이기 때문에 좋은 것이며 온전한 것으로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유혹에서 범죄치 않도록 도와준다(Burdick). 한편 '빛들의 아버지'는 하나님께서 빛의 왕으로 모든 빛들을 창조하시고 주관하고 계심을 시사한다(Manton, Martin). '빛들의'는 하늘의 빛나는 별을 가리키는 모든 하나님의 선물을 찬양하는 표현이다(Philo). 한편 본절은 특별히 6행시로 구성되어 있다. 그래서 혹자는 야고보가 다른 자료에서 인용하였을 것이라고 주장하나(Mayor, Moo, Dibelius,Davids, Ropes). 본서의 문체나 운율적인 리듬의 형태를 볼 때 야고보의 독창적인 저술이라고 보는 것이 무방하다(Lenski, Martin, Mussner, Reicke, Schrage).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 - 야고보는 지구가 자전과 공전을 할 때 여러 가지 형태의 변화된 빛으로 보여지는 하늘의 별들과 하나님을 비교하여 하나님의 불변하심을 강조한다(Ropes). 그러나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에게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들을 변함없이 내리시는 분이다. '변함도'에 해당하는 헬라어 '파랄라게'(* )는 천문학 용어로서 별들이 시차에 따라서 다르게 나타나는 것을 나타내는 단어이다(Manton). 한편 '회전하는 그림자'(* ,트로페스 아포스키아스마)는 태양으로부터 오는 빛의 변화를 의미하는지,달의 그림자 즉 일식, 월식 등을 의미하는지는 분명치 않으나 지구의 회전으로 인한 태양빛의 변화로 생기는 사물의 그림자를 가리킨다(Ropes, RSV). 이것은 모든 것이 변한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에게 베푸시는 은사와 선물은 변함이 없음을 시사한다.
=====1:18
그가 그 조물 중에 우리로 한 첫 열매가 되게 하시려고 - 본절은 하나님이 시험을 주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마지막 이유이다(Burdick). '한 첫 열매'(* , 아파르켄 티나)는 구약성경에서 수확된 첫 곡물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을 나타낸다(출 34:22;레 23:10). 모든 곡식의 첫 소산물이 하나님께 바쳐지듯이 하나님의 은혜를 발견하고 회개한 그리스도인들은 특별히 선택되어서 모든 피조물을 대표하는 첫 열매가 된다. 혹자는 야고보가 '우리'를 사용한 것이 보편적인 인류 전체를 의미한다고 하나(Hort), 중생한 자들이나 당시 초대 교회의 성도들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Burdick, Moo). 왜냐하면 야고보는 비교의 뜻이 담겨있는 '티나'(* )를 사용하여 피조물과 구별하고 있기 때문이다(Calvin).
자기의 뜻을 좇아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 - '뜻'에 해당하는 헬라어 '불레데이스'(* )는 피조물에게 은혜를 베풀고자 하는 하나님의 선한 의지를 나타내는 말로(엡 1:11;벧전 1:3) 하나님의 뜻은 모든 사람이 예수그리스도를 통하여 거룩하고 흠이 없는 자녀가 되게 하는 것이다(엡 1:4,5).따라서 야고보가 '불레데이스'를 사용한 의도는 택한 자녀들이 구원을 얻게 되는 것이 자기 공로나 외부적 환경의 영향으로 말미암지 않고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와 섭리 가운데서 이루어졌음을 강조하기 위함이다(Manton, Calvin).한편 '진리의 말씀'이란 진리를 통하여 확증된 복음의 말씀이며(엡 1:13; 골 1:5; 딤후 2:15). '낳다'에 해당하는 '아페퀴에센'(* )은 자연적인 출생의 의미로 '창조하다'를 나타낼 때도 사용되었다(행 17:28). 따라서 '진리의 말씀으로 낳았다'라는 말은 복음의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께 부름을 받은 자들 즉 첫 열매된 자들이 옛 성품을 버리고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음을 암시한다.
=====1:19
너희가 알거니와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이스테'(* )는 명령법이라기보다는 직설법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Robertson). 만약 야고보가 명령법의 의도로 사용했다면 4:4 처럼 '오이다'( * , '알다')의 명령형 '오이다테'(* )를 사용하였을 것이다.그러므로 '이스테'는 수신자들이 과거에 알고있는 거듭난 사실에 대한 인정이나 권고 등을 나타낸다고 볼 수 있다. 야고보는 본절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지켜야 할 세 가지를 권면한다.
듣기는 속히 하고 - 거듭나는 것은 순간적인 현상으로 그치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 꾸준히 지속되는 여러 과정을 통하여 변화되어야 한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속히 들을 준비가 되어있어야 한다(Ropes). 말하기는 더디하며 - 이것은 말을 천천히 하라는 뜻이 아니라 성급하게 자기의 의견만을 주장하거나 자기의 고집만을 내세우지 말라는 것이다. 계속하여 말하거나 자기의 주장만을 내세우는 사람은 논쟁에 빠지기 쉽고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바를 온전히깨닫지 못하게 된다.그리스도인들은 말을 하기전에 먼저 겸손히 진리를 받아들이는 태도를 갖추어야 한다(Burdick,Tasker).
성내기도 더디 하라 - 본문은 일반적으로 분노, 증오 등으로부터 자기 자신의 마음을 보존하는 것을 의미한다. 감정의 격분이 마음속에 자리잡고 있을 때 하나님의 의(義)나 말씀을 받아들일 수 없다.
=====1:20
개역성경에는 '가르'(* , '왜냐하면')가 생략되어 있다. '가르'는 본절이 앞절에서 행한 권면에 대한 근거임을 나타낸다.
사람의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니라 - 성내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마음을 해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는 삶에 위배된다.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이 원하시고 인정하시는 그리스도인의 올바른 행위이다(Burdick,Tasker,Moo).
=====1:21
그러므로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내어 버리고 - 야고보는 본문에서 다시 그리스도인이 말씀을 받기에 합당한 조건을 언급 한다. 그리스도를 영접한 자가 마땅히 해야 할일은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내어 버리는 것이며,이미 우리 속에 와서 역사하시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통하여 항상 새롭게 되어야 하는 것이다. '내어 버리고'의 '아포데메노이'(* )는 '옷을 벗어 버리다'라는 의미로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더 잘 받아들이기 위해서 세심하게 자신을 살펴 마음속에 있는 모든 탐욕과 정욕 등을 내어 버려야 함을 시사한다. 그렇지않고 부주의할 경우 쉽게 악에 빠지기 때문이다. '더러운 것'에 해당하는 헬라어 '뤼파리안'(* )은 본래 '옷에 붙어 있는 더러운 때'를 의미하였으나 종종 '몸에 불결하게 생긴 상처' 등을말할 때도 사용되었다. 이것은 모든 도덕적인 악을 가리키는 것으로(Manton, Martin) 야고보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이런 '뤼파리안'을 떨쳐버려야 함을 권면한다. '넘치는 악'(* ,페릿세이안 카키아스)에 '페릿세이안'은 '충분한','남은 것'을 뜻하는 단어로 흘러 넘치는 것을 가리키며 '카키아스'는 '악한'의 뜻 보다는 '위선', '더러운 욕망'을 의미한다(Calvin, Lenski, Lightfoot). 이것은 앞서 언급된 '뤼파리안'과 동의어로 중복된 표현을 통해서 야고보는 그리스도인들이 모든 도덕적인 악을 버려야 함을 강력하게 권면하고 있다(Martin).
능히 너희 영혼을 구원할바 마음 심긴도를 온유함으로 받으라 - 본문은 구원의 수단으로 '마음에 심긴 도'를 말한다. 이것은 수신자들이 이미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인 자임을 암시함과 동시에 하나님의 말씀을 통한 구원의 확실성을 강조하는 것이다. 또한 본절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인 그리스도인들이 책임감있게 말씀에 응답해야하며 그것을 실제로 행함으로 열매를 맺을 것을 권고하는 것이다(Burdick, Martin).
=====1:22
너희는 도를 행하는 자가 되고 - 그리스도인들은 사람의 영혼을 거듭나게 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단지 받기만 해서는 안 된다. 단지 듣기만을 좋아하는 자는 나태한 자이며 자신 속이는 자이다. 그래서 야고보는 본절에서 그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될 것을 권면한다. '행하는 자'에 해당하는 헬라어 '포이에타이'(* )는 '아사'('행하다')에서 유래한 것으로 윤리적 측면의 행위를 가리킨다. 따라서 '포이에타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그 말씀을 생활로써 증거하는 자를 의미한다(롬 2:13,Calvin, Adamson). 야고보는 수신자들에게 도를 듣는 상태에만 머물러 있지 말고 행하는 자가 되라고 권면한다.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 - 말씀을 들은 자는 그것을 행하여야 할 책임이 있다.그러나 그 책임을 수행하지 않고 말씀을 듣는 것만으로 하나님의 영광스런 보좌에 참여할 것으로 생각한다면 그것은 자기 자신을 기만하는 행위이다(마7:21).
=====1:23
누구든지 도를 듣고 행하지 아니하면 그는 거울로 자기의 생긴 얼굴을 보는 사람과 같으니 - 야고보는 본절에서 도를 듣고 행치 않는자를 거울을 보는 사람에 비유하고 있다. '보는'에 해당하는 헬라어 '카타노운티'(* )는 경솔하게 힐끔 쳐다보는 것이 아니라 주의를 기울여서 자세히 관찰하는 것을 나타낸다(Burdick, Martin). 당시의 거울은 유리가 아닌 구리로 만들었기 때문에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면밀히 관찰하나 희미한 모습으로 비춰질 뿐 확신이 없음을 나타낸다(Adamson). 이는 단지 말씀을 듣고 행치 않는 것을 비유한 것으로 열심히 주의하여 말씀을 들었다 할지라도 행하지 않으면 희미한 거울을 보는 것과 같음을 시사한다(Mayor).
=====1:24
제 자신을 보고 가서...곧 잊어버리거니와 - 본절은 말씀을 듣고 행치 않는 것이마치 회미한 거울을 주의 깊게 살펴서 자신의 얼굴을 관찰하였지만 거울을 떠나면 자신의 모양을 곧 잊어버리는 것과 같은 것으로 하나님의 말씀 듣기만 하는 것이 전부가 아니고 행함이 있어야 함을 시사한다.이론적인 지식으로만 모든 것이 이루어진다고 할 수 없다. 말씀은 오직 듣고 행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 여기서 야고보는 '보고'(*, 카타노에센),'가서'(* ,아펠렐뤼덴),'잊어버리거니와'(* , 에펠라데토)의 단순 과거형을 사용하여서 진리의 말씀을 희미하게 듣고 나서 실행치 않는 자가 곧 말씀을 잊어 버리고 다시 죄의 상태로 되돌아 가는 모습을 언급하고 있다.
=====1:25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 보고있는 자 - 본절은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자에 대한 설명이다.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은 야고보와 수신자가 유대지향적인 배경을 갖고 있음을 암시하는 것으로(Burdick), 구약 시대의 율법과 대조를 이루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진리의 복음'을 의미한다(렘 31:33, Moo,Tasker).구약 시대의 율법이 사람을 얽매이게 하는 강제적인 것이라면 그리스도를 통한 은혜의 율법은 사람을 생명으로 인도하는 자유로운 것이다(요 8:32; 고후 3:16). 이것은 제도를 통하여 법적 구속력을 지닌 모세의 율법이 신약 시대에 이르러 확실하게 드러난 실체가 되었음을 시사한다. 이러한 율법의 특징은 첫째로 택하신 자들을 진리와 자유로 인도하는 것에 모순과 결합이 전혀 없는 것을 의미한다. 두번째 특징은 자유하게 한다는 것이다. 구속력을 지녀서 억지로 지키게 하는 것보다 성령의 능력으로 자유롭고 기쁜 마음으로 지킬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Burdick). 한편 '들여다보고'에 해당하는 헬라어 '파라큅사스'(* )는 몸을 구부려서 보는 것을 나타낸다. 혹자는 이것이 '대충 힐끔 보다'라는 의미라고 주장하나(Hort) 본문에서는 문맥상 '주의깊게 관찰하다'라는 의미로 해석 하는 것이 더 타당하다(Tasker, Burdick, Martin).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행하는 자니 이 사람이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 - '듣고 잊어버리는 자'(* ,아크로아테스 에필레스모네스)는 히브리식 표현으로 글자대로는 '망각을 듣는 자'란 뜻이다. 야고보는 개역성경에는 번역되지 않은 '알라'(* , '그러나')를 사용하여 '실행하는 자'를 강조하고 있다. 여기서 '실행하는자'란 말씀을 듣고 실천하지 못해도 그 행할것을 위해 심사숙고하는 자도 이 범주에 포함될 수 있다(Manton). 한편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는 말을 '율법을 행함으로 인해 복을 받는다'는 의미로 해석해서는 안된다. 만약 그렇게 해석할 경우 율법을 지키는 그 일로 인하여 만사가 복을 받게 된다는 의미가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는 실행하는 자체에 의미를 두어서 행위 자체가 아무리 힘들고 어렵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복이라는 것이다.
=====1:26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를 재갈 먹이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 - 신약성경에서 본문에만 나오는 '경건하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드레스코스'(* )는 '기도문을 중얼거리다'에 해당하는 '드레오마이'(* )에서 유래된 듯하다(Robertson). 이는 예배의 외적인 모습 즉 기도, 구제, 금식 등을 언급하는 것으로서 외식적인 바리새인들의 모습을 암시한다. 이렇게 스스로 경건하다고 하는 사람이 말에 대해서 자제하지 못할 때 자기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 된다. '재갈 먹이지'에 해당하는 헬라어 '칼리나고곤'(* )은 '재갈'을 의미하는 '칼리노스'(* )와 '이끌다'의 뜻인 '아고'(* )의 합성어이다. 이는 재갈 먹이지 않는 말을 함부로 날뛰지 못하도록 막는 것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으로(Lenski) 남을 비방하거나 악담하는 것을 제어하는 모습을 나타낸다. 혀를 절제하지 않으면서 스스로 경건하다고 생각하며 확신하는 것은 자신을 속이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며 이렇게 말과 행위가 틀린 경건은 위선자들에게서 오는 헛된 것이다(마 6:2,16).
=====1:27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이것이니라 - 본절은 경건의 정의라고는 할수 없지만 경건한 삶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나타나야 할 것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실제로 경건한 삶은 내적인 모습으로부터 다른 사람이 인식할 수 있는 외적인 삶의 모습으로 나타나야 한다. '하나님 앞에서'의 헬라어 '파라토 데오'(* )는 문자적으로 '하나님의 편에 서서'라는 의미로 하나님의 평가방법으로 사람을 보는 것을 의미한다(Lightfoot).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이라 함은 경건의 구체적인 한 방법을 소개하는 것이라 하겠다. '더러움이 없는'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미안토스'(* )는 '더럽히다'의 '미아이노'(* )와 부정 접두어 '아'(* )가 합성된 형용사로서 후에 의미가 변천되어 '정결한(* , 카다라)이란 의미로 사용 되었다(Robertson). 이로 보아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이란 표현은 의미상 동의어 중복으로 강조를 나타내는 것이다. 특히 고대에는 종교 예식에 있어서 기독교든 이교도든 정결하고 흠 없는 제사가 요구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모습은 초대 기독교 사회에서 바리새인에 의해 지속되어졌었다(마23:25; 막 7:3, Ropes). 야고보는 본절에서 내적인 경건 생활에서 비롯되는 외적인 경건 생활의 모습에 대해서 두 가지로 언급하고 있다.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고 - 본문에서는 특별히 두 부류의 대상만을 언급하고 있으나 그 외의 다른 부류인 나그네나 병든 자, 갇힌 자 등을 제외시키지는 않는다. 이들은 한 공동체 안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보여주어야 하는 (마 25:40) 구제 대상들이다(Ropes). 한편 '돌아보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피스케프테스다이'(* )는 문자적으로 '보러 가다', '조사하러 가다'를 의미하는 것으로 단순히 교제를 나누기 위한 돌아봄보다는 극히 어려움에 처해있을 때 돌아보는 것을 시사한다(갈 5:6, Burdick).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 야고보는 '세속'(* , 코스무)이라는 단어롤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을 통한 죄악을 나타내기 위하여 사용하였다(Lenski, Burdick). 이는 사도 요한이 잘 쓰는 표현 방법으로(요일 2:16) 이웃 사랑은 물론 자신 스스로가 죄악에 빠지지 아니하고 성화를 위해 계속적인 노력을 경주할 것을 권면하는 것이다. 따라서 경건한 자의 삶에 있어서 이웃 사랑과 자기의 거룩한 생활과의 관계는 불가분의 관계이다.
본서는 교의(敎義)보다 행위(行爲)를 강조한다. 이러한 특성 때문에 정경(正經)으로 인정되기까지 많은 논란이 있었다. 나중에 정경으로 인정되었지만 행위에 대한 강조 때문에 많은 비판을 받아야 했다.
본장의 내용을 상고하기 위해 본장의 기록 배경이자 중심 주제가 되는 다음 사항에 초점을 모으기로 하자.
(1) 이신 득의와 믿음의 행위. 종교 개혁의 기치를 높이 들었던 루터(M. Luther)는 본서를 바울의 이신 득의(以信得義)사상과 배치된다고 보고 '지푸라기 서신'이라고 혹평하였다. 그는 야고보의 신학이 바울의 신학과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즉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롬 3:28)는 말씀과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 아니니라"(2:24)는 말씀은 상충되게 보인다. 의롭다 하심을 얻는 조건으로서 전자는 믿음을, 후자(後者)는 행함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두 구절의 전후 문맥을 살펴보면 두 구절이 서로 충돌을 일으키지 않는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바울은 로마서를 쓸 때 구약의 율법을 지킴으로써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음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래서 바울은 로마서를 통해 사람이 율법만을 준수함으로 구원받을 수 없다고 역설하였다. 그러나 야고보가 관심을 둔 것은 바울의 그것과는 다른 부류의 사람들이었다. 즉 믿음만 고백하면 된다고 하는 안일한 생각을 하는 사람들을 염두에 두고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2:14)하고 행함없는 믿음의 무위성을 역설하고 있다.
본서에서 강조하는 행위는 로마서에서 바울이 언급하는 '율법의 행위'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믿음의 행위'이다. 어떤 사람들은 본서에 나타난 믿음과 행위의 관계를 '동전의 양면'에 비유한다. 그러나 야고보의 논증에 의하면 이러한 비유는 적절치 못한 것이다. 만약 믿음과 행위의 관계를 동전의 양면에 비유한다면, 한편은 믿음 그리고 다른 한면은 행함이라는 구별이 가능케 된다. 그러나 야고보가 말하는 믿음과 행함이란 그렇게 구별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단지 이론적으로 구별이 가능하다 할지라도 실제로 어느 것이 믿음이고, 어느 것이 행함인지 구분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점에 대해서는 2장 강해에서 자세히 언급하도록 한다.
(2) 복음의 실천과 성숙한 그리스도. 본 서신에서 우리가 바울의 서신들처럼 조직적으로 제시되는 신학(神學)을 찾는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야고보는 이 땅에서 살아가는 신자들의 삶에 대해서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관심을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복음의 실천'이라고 할수 있다. 야고보는 유대 그리스도인들이 그들의 개인적인 삶에 있어서 직면하였던 여러 가지 문제들을 염두에 두고 본 서신을 기록하였다. 그런데 이러한 문제들은 주로 영적인 미성숙에 기인한 것이었다. 본서를 읽다 보면 '온전'( ,텔레이오이)이라는 단어를 자주 보게 되는데, 그것은 바로 앞에서 언급한 '영적 미성숙'에 대칭되는 개념으로서 '성숙'을 의미하는 것이다. 야고보가 염두에 둔 것은 '성숙한 그리스도인'이었다. 성숙한 그리스도인이란 곧 믿음이 있노라고 자처하면서 그의 믿음을 자신의 생활 속에서 구체화시키는 사람을 의미한다. "너희는 도를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22절)는 말씀은 그의 서신 전체에 흐르는 중심 주제이다.
야고보는 구체적인 신자들의 삶의 모습에 관심을 가지고 그의 서신을 기술하였다. 이러한 그의 관심은 '신행 일치'(信行一致)라는 메시지로 표현되었다. 만약 야고보가 이 시대에 살았다면 그는 아마도 "당신의 예배는 당신이 예배당 문을 열고 나간 다음부터 시작됩니다"라고 하였을 것이다. 그의 메시지를 보면 바울의 서신들에서 보는 것처럼 논리적으로 신학 사상을 전개하지 않는다. 야고보는 당시 유대 그리스도인들에게 필요한 것은 새로운 교리가 아니라 진리의 말씀에 대한 실천이라고 보았다. 따라서 본서에는 성도들의 삶을 위한 일련의 권고와 훈계들로 가득차 있다. 폴 씨다(Paul Cedar)는 본서의 이러한 면을 보고 "야고보서는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위한 실제적 지침서이다"라고 하였다.
이제 본문을 좀더 자세히 단락별로 살펴보도록 하자. 본문을 분해하면 크게 두 개의 단락으로 나눌 수 있는데 전반부(1-18절)는 시험에 대한 교훈을 서술하고 있으며, 후반부(19-27절)는 거듭난 자의 새 생활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1. 시험에 대한 교훈(1:1-18)
본장의 전반부에 해당하는 이 단락에서 야고보는 시련과 유혹을 당하고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시험에 대한 바른 이해를 가져야 할 것을 촉구하고 있다.
(1) 인사말(1절). 야고보는 자신을 소개할 때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는 독특한 용어를 사용한다. 예수는 메시야요 곧 주이시라는 신학적 고백이 여기에 표현된 것인데 이 명칭에 대한 상세한 설명은 복음서와 바울 서신에 이미 전술하였으므로 생략하도록 한다. 여기서 '주'( ,퀴리오스)라는 명칭은 주로 예수의 신성에 연결지어 사용되어졌고, '예수'( )는 '여호와는 구원이시다'라는 의미를 가진 히브리어의 자역(字譯)으로 개인적인 이름이었으며, '그리스도'( ,크리스토스)라는 명칭은 그의 메시야적 직임(職任)과 연결지어 사용되었다.
(2) 삶의 시련(2-4절). 야고보는 성도들이 그들의 믿음 때문에 받아야 할 여러 가지 시련(試練)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 당시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스스로 힘들게 살기로 결단한 것을 의미했다. 우리가 주지하는 것처럼 기독교가 공인(公認)될 때까지 매우 심한 박해(迫害)가 그리스도인에게 가해졌다. 본문에서 말하는 '여러가지 시험'(2절)이란 3절에 기록된 바와 같이 '믿음의 시련', 즉 그들이 믿음 때문에 받아야 하는 시련들을 가리킨다.
이러한 시련에 대한 야고보의 대답은 이것이다. '기쁘게 여기라'(2절). '여기라'의 헬라어 '헤게사스데'( )는 '평가하다'라는 의미이다. 즉 어떤 사람이 시련 중에 있을 때 그는 자신이 처한 상황 속에서 그를 만들어 가시는 하나님의 뜻을 기쁜 마음으로 헤아려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작품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라는 말이 있다. 중요한 것은 오늘보다는 내일에 되어질 나의 모습이다. 세네카(Seneca)는 "우리의 슬픔은 고통에 대한 우리 자신의 의견과 이해에 달려 있다"고 말했다. 따라서 시련에 대한 올바른 인식이란 하나님은 나에게 최선의 것 이외에는 주시지 않는다는 인식하에 내가 당한 시련들을 기쁨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왜 ? 그것은 '믿음의 시련'이기 때문이다. 신.구약 성경을 통틀어 '믿음의 시련'이라는 단어는 3번 사용되었는데, 그 중 하나는 본문에 기록된 것이고 나머지는 베드로전서 1:7의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에, 그리고 욥기 23:10의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는 말씀에 사용되어졌다.
이러한 구절들과 비교해 볼 때 '시련은 연단'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만약 우리에게 닥쳐오는 시련이 장차 우리를 어떤 자리로 인도할 것을 안다면, 비록 시험이 고통스러울지라도 참을 수 있게 될 것이다. 이러한 야고보의 교훈은 바울이 로마서에세 언급한 "생각건대 현재 우리가 당하는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롬 8:18)라는 말씀과 일맥 상통한다.
이러한 인식이 전제된다면 성도들은 당연히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는 야고보의 말씀에 동의할 것이다. 옛 서양 격언에 "생각이 바꿔지면 행동이 바뀌고, 행동이 바꿔지면 운명이 바뀐다"라는 말이 있다. 먼저 생각이 바뀌어야 한다. 시련에 대한 인식이 새롭게 정리될 때, 시련을 맞이하는 삶의 태도 즉, 행동이 바뀌게 될 것이며 이렇게 기쁜 마음으로 인내를 온전히 이루어갈 때 그의 삶은 바뀌게 될 것이다.
그 결과가 무엇인가 ?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성도가 되는 것이다(4절). '온전'( , 텔레이오이)이란 '성숙'을 의미한다. 헬라에서는 견습공이 훈련 기간을 다 끝내고 정식으로 일을 맡게 될 때 '온전'이란 말을 사용한다.
또한 '구비'( 홀로클레로이)란 구약성경에서 많이 쓰이는 용어로서 '흠이 없다'는 뜻이다. 야고보는 이 두 단어를 합성하여 '모든 점에서 완전하게 되었다'라는 의미로 쓰고 있다. 이것이 바로 성도들에게 시련이 임하는 목적이라고 할 수 있다. 성도들은 시련 가운데 인내를 배우게 되고, 인내를 통해 하나님 앞에서 흠 없는 자녀로 서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시련은 어떤 숨겨진 목적을 갖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우리를 바로잡기 위한, 온전케 하기 위한 하나님의 방편인 것이다.
(3) 하나님께 구하라(5-8절). 야고보는 시련에 처해 있는 성도들을 돕기 위해 실제적인 제안을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시련이 올 때 그 시련의 때에 올바로 설 수 있는 방법을 망각한 채 무방비한 상태로 자신을 시련 가운데 내던진다. 그것은 그들이 지혜(智慧)가 없기 때문이다. 지혜는 지식과 다르다. 지식은 어떤 사물에 대해 알고 있는 내용이나 지혜는 그 지식을 적용하는 능력이다.
여기서 관심을 갖고 보아야 할 것은 '구하라'( ,아이테이토)란 단어이다. '아이테이토'는 '아이테오'( )의 현재 능동태 명령형으로 '구하기를 계속하라'는 뜻이다. 여기서 우리는 기도의 지속성(持續性)에 대해서 배우게 된다. 그리고 6절에서 그가 가져야 할 기도의 태도, 즉 의심치 말고 믿음으로 구할 것을 배운다. 하나님은 한번 말씀하신 것은 반드시 이루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기초하여 기도할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우리가 생각한 것 이상으로 후히 주실 것이다(5절).
(4) 신앙인의 태도(9-11절). 경제적으로 가난한 그리스도인과 부유한 그리스도인들에 대하여 야고보는 인생의 무상함에 대하여 언급함으로써 부가 결코 성도들에게 참된 가치가 될 수 없음을 경고하고 있다. 그것은 단지 잠시 있다가 없어질 것들이다. 그러나 우리의 생은 영원한 것이다. 어떻게 영원한 존재가 잠시 있다 사라질 것들에 연연하며 살겠는가 ? 이것이 야고보가 의도하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성도들의 관심을 자연스럽게 하나님께로 인도한다.
(5) 시험과 상(12-18절). 본문은 시험의 근원에 대하여 두 가지 견해를 언급한다.
하나는 외부로부터 온 시험(trial, 12절)이고 다른 하나는 내부에서 온 시험(temptation, 13,14 절)이다. 전자의 경우는 2-4절에서 언급된 고난을 의미한다. 성도들이 고난 가운데서도 바르고 견실(堅實)하게 믿음을 지킬 때 생명의 면류관을 얻게 될 것이다.
13절에 나오는 '시험'( ,페이라조메노스)은 위에서 언급한 것과는 다른 종류의 시험이다. 그것은 '유혹'(誘惑)으로 번역되기도 한다. 전자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라면 이것은 각 사람의 마음속에 있는 욕심에서 비롯된 것이다.
악(惡)의 근원이 자신에게, 즉 자기 욕심 안에 있기 때문에 그 누구도 죄를 짓게 된 것이 하나님 때문이었다고 전가할 수 없다고 야고보는 말한다. 그러나 처음 사람이었던 아담은 하나님께서 먹지 말라고 하신 선악과를 따먹은 후, 그가 하나님께 범죄케 된 원인이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여자'에게 있다고 전가함으로써 그의 범죄의 원인을 아내에게, 나아가 아내를 주신 하나님께 전가하려 하였다(창 3:12). 그러나 성경은 말한다. '하나님은 시험하시지도 맏으시지도 않으신다'(13절). 특별히 '죄가 장성하여 사망을 낳는다'(15절)는 말씀은 우리에게 심각한 경고를 준다. 죄는 점진적으로 사람의 영혼을 침식시킨다. 따라서 성도들은 욕심이 자신을 미혹(迷惑)하지 못하도록 늘 깨어 있어야 한다.
* 야고보( ,야코보스). 본서의 저자는 서신 모두(冒頭)에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 야고보'라고 언급된 것으로 보아 야고보라고 할 있다. 하지만 야고보는 매우 흔한 유대 이름이었다. 본 서신의 저자는 본서에 사용된 헬라어와 예루살렘 공의회에서 야고보가 행한 연설에 나타난 헬라어의 표현 방식이 서로 일치한다는 사실로 미루어 볼때(1절; 행 15:23/24절; 행 15:24/2:5; 행 15:13/2:7; 행 15:17/5:19,20; 행 15:19) 주의 동생 야고보임이 분명하거니와, 여기서는 주의 형제 야고보와 그 외의 동명 이인(同名二人), 즉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 및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를 함께 살펴보기로 하자.
(1)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는 복음서에서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이라고 한 것으로 보아 요한의 형제인 것으로 보인다(마 19:2; 17:1; 막 3:17; 5:37). 그의 아버지 세베대는 어부로서 여러 채의 선박(船舶)을 소유하고 있었으며 고기 잡은 사업을 위해서 여러 명의 삯꾼을 고용하고 있었다(막 1:20).따라서 야고보는 그의 아버지의 부(富)로 인해 상당한 영향력을 갖고 있었다 (요 18:15).
그는 갈릴리 바다에서 '나를 따르라'는 예수의 부르심을 듣고 그의 형제 요한과 함께 배와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를 따라가 그의 제자가 되었다. 그는 성미가 매우 급했던 것으로 여겨지는데(마 4:21,22) 이러한 그들의 기질로 인해 '우뢰의 아들'이라 불려지기도 하였다.
야고보는 예수의 제자 가운데 제일 먼저 죽은 제자였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최초의 순교자'라고 부른다. 그는 A.D. 44년에 헤롯 아그립바 1세에 의해 처형당했다(행 12:1-3).
(2)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에 대한 언급은 열 두 사도의 명단(마 10:3; 막 3:18; 눅 6:15; 행 1:13)에 포함된 것 외에는 신약성경에 나타나지 않는다. 그는 마태의 형제로서(막 2:14; 행 1:13) 초대 교회의 문서를 보면 열심 당원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그는 열심 당원을 포기하고 예수를 따라가 그의 제자가 되었다.
그의 사역에 대해선 별로 알려진 것이 없지만 역사가 유세비우스(Eusebius)는 그에 대해서 이렇게 평가를 한다. "그는 한때 훌륭한 애국자였다. 그러나 그는 후에 훌륭한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그는 금욕적인 자기 수양에 매우 힘을 썼던 제자였다. 열 두 제자 가운데 그는 기도를 가장 많이 한 제자였다." 그의 죽음에 대해서 성경에 구체적인 언급은 없지만 유세비우스의 기록에 의하면 시리아에서 전도를 하다가 예루살렘에 돌아와 돌에 맞아 죽게 되었는데, 그의 목숨이 쉽게 끊어지지 않자 유대인들은 그를 톱으로 켜서 죽였다고 한다.
(3) 주의 형제 야고보. 주의 형제인 야고보는 신약성경에서 단순하게 '야고보'라고 불렸다(1절; 행 12:17; 15:13; 21:18; 고전 15:7; 갈 2:9; 유 1:1). 그는 예순게서 지상에서 사역하시는 동안에는 예수를 믿지 않았지만(요 7:5), 부활하신 주님의 특별하신 나타나심을 보았고(고전 15:7), 성령의 강림을 기다리고 있었던 사도들과 진실한
여인들의 작은 모임에도 참여하였다(행 1;13,14). 그리고 후에 야고보는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가 되었다(행 12:17; 15:4-29; 21:18; 갈 2:9).
* 디아스포라. '디아스포라'라는 말은 '이산(離散) 혹은 '흩어짐'을 의미하는 단어로 팔레스틴 바깥에 흩어져 사는 유대인들을 지칭하는 대명사이다. 이들이 흩어져 사는 궁극적 원인은 선지자들의 지적에 의하면 이스라엘의 범죄에 있었다(렘 9:16). 최초의 흩어짐은 B.C. 722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앗수르의 침략으로 인해 북왕국 이스라엘은 무너지고 많은 사람들이 강제로 자신들이 거주하던 곳을 떠나야 했다(왕하 17:6). 두번째 흩어짐은 B.C.586년 남 유다가 바벧론에 정복당하면서 이루어졌다.(왕하 21:11,26). 하지만 세번째 흩어짐은 앞의 두 경우와는 달리 자의적으로 이루어졌다. 많은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안전과 부(富)를 위해서 자신들의 삶의 터전을 떠났던 것이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어디에 흩어져 살아도 '유대 민족' 에 속해 있었다. 그들은 회당과 예루살렘 성전 순례를 통해서 종교적 유대감을 유지시켰다. 이들에게 회당은 민족적 동질성을 유지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유대인들이 정착하는 곳은 어디서나 회당이 세워졌으며 각 지방의 회당들은 집회 장소, 공공 생활의 중심지, 학교, 문서고(文書庫)로서의 기능을 수행하고 있었다. 더욱이 그들은 각기 자신이 처한 지역 시민으로서의 권리를 포기하지 않고 있었다. 따라서 유대인들은 자신이 속한 지역의 구성원으로서의 권리를 누리면서도 유대인 공동체 속에서 자치권을 갖는 이원적 삶의 체계를 유지하였다.
이러한 '유대 공동체' 는 그들이 속한 각 지역에서, 그들이 지키는 규범들로 인하여 다른 이방인들과 구분되어졌다. 특별히 유대인들의 높은 도덕률(道德律)은 주위의 이방인들에게 적잖은 영향을 끼쳤다.고넬료의 경우처럼 모든 디아스포라 지역들 내에서 개종자들이 있었다. 그 수효가 얼마나 되었는가에 대한 구체적인 자료들은 없지만 그 수가 상당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유세비우스(Eusebius)는 이들의 개종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모든 기적 가운데 가장 위대한 기적은 우리의 율법이 관능적인 쾌락이라는 유혹의 미끼를 전혀 가지지 않고 오히려 율법 자체가 지니고 있는 보편적이 덕성을 통하여 그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는 것이다"(Cap. ii:38).
어떤 사람은 이 '흩어진 유대 공동체'를 "훗날 기독교가 세계로 확장하는 데 쓰여지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였다"라고 한다. 왜냐하면 이들을 통하여 로마 전역에 기독교가 전파되었기 때문이다. 그 중에 하나가 구약의 헬라어 번역이다. 당시 헬라어는 공용어로서 지중해 연안에서 통용되었고, 심지어 유대인, 구레네인, 로마인까지도 헬라어를 사용하였다. 따라서 헬라어가 공용어로 사용되는 지역에 살고 있었던 유대인을에게 히브리 경전의 헬라어 번역은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었다. '셉투아진트'(Septuagint), 혹은 '70인역'(LXX)이라고 불리는 이 번역성경은 초대 교회 용어들이 형성되는데 많은 영향을 끼쳤다. 신약성경의 기자들은 '히브리 경전'도 알고 있었지만 '70인역'의 용어에 익숙하였다. 이 때문에 초대 교회에 사용되던 용어들은 '셉투아진트'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예를 들면 '그리스도 '(Christ)라는 명칭은 '기름부음을 받은 자'(Anointed One), '메시야' (Messiah)를 가리키는 셉투아진트의 용어에서 온 것이다.
또한 이 번역성경은 초대 교회 신자들이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데 효과적으로 쓰였다.
*은사와 선물. '은사'(도시스)와 '선물'(도레마)은 모두 동사 '주다'(디도미)에 기원을 둔 명사이다. 본문에서는 '도시스'를 '은사'라고 번역하였는데 이것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주어지는 은사'인 '카리스마' ( )와 다른 '선물'의 의미를 갖는다. 따라서 '은사'와 '선물'은 같은 의미로서 두 단어를 나열한 것 이상의 의미를 갖지 못한다. 맨튼(Manton)은 그의 주석에서 이렇게 말한다. '이 두 구절은 각기 다른 관점에서 점진적인 방법으로 동일한 은혜를 가리킨다.'
그렇다면 본문의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란 무엇을 말하는가 ? 형용사 '좋은'은 '최선'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따라서 '좋은 은사'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최선의 것들을 말한다. 때때로 그것들은 성도들이 이해할 수 없는 방법으로 오기도 하는데 믿음의 시련이 그 좋은 예라 할 수 있다. 결국 '좋은 은사'는 우리를 온전케 하기 위한 것으로 '최선의 선물'이다. 또한 '온전한 선물'이란 어떤 방식으로든 우리를 온전케 하는 하나님의 다루심을 의미한다.
2. 거듭난 자의 새생활(1:19-27)
전반부에서 시련과 유혹을 당하고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도우심에 대하여 교훈하면서 시험에 대한 바른 이해를 가질 것을 서설한 야고보는 후반부에서는 진리의 말씀으로 거듭난 새사람들이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에 대하여 언급한다. 야고보는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 가운데 하나는 '행함'이라고 강조한다.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그들이 믿음에 대해서 갖는 것보다 행함에 대새서는 부정적인 입장을 취하는데, 이것은 믿음과 행함을 따로 구분하여 이해하여 왔던 잘못된 이원론(二元論)에 기인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루터(M. Luther)의 말처럼 본서는 단지 '지푸라기 서신'정도로 취급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본서는 루터가 오해하였던 정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에게 믿음과 행위에 대한 바른 인식을 제공해 주는 귀한 서신이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2장의 주제 강해에서 별도로 다루기로 하고 본 문단 강해에서는 하나님의 의를 이룸(19-21절)과 도를 행함(22-25절) 그리고 참된 경건(26,27절)에 대해서 살펴보기로 하자.
(1) 하나님의 의를 이룸(19-21절). 본문에서 야고보는 하나님의 의를 이루기 위한 세 가지 방안을 제시한다. 그것은 (까) 듣기는 속히 하고, (다) 말하기는 더디 하고, (따) 성내기도 더디 하는 것이다(19절). 레이먼드 브라운(R. Brown)은 이 구절들을 '말의 표현 방식'으로 해석하기도 하는데 이러한 사도는 본문의 참된 의미를 간과한 것이다. 만약 이러한 견해를 받아들인다면 19-21절은 차라리 본 서신의 후반부(3:1-12)에 편입하는 것이 더 적절하다.
'듣기는 속히 하고'. 무엇을 들으라는 것인가 ? 이것은 인간 관계에서 오는 일상적인 대화를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앞에서 열거한 말씀들, 즉 시련과 유혹 가운데 있을 때 우리가 들어야 할 하나님의 말씀을 말한다. 따라서 '듣기는 속히 하고'라는 말씀은 인내를 온전히 이루는 가운데 하나님의 뜻을 기다리라는 의미로 보아야 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는 말씀을 해석하면 "자기의 입장에서 함부로 자기가 처한 상황에 대하여 이렇다 저렇다 평가하지 말고, 설사 그것이 자신의 생각과 다르다고 해서 함부로 화를 내어 노를 발하지 말라"가 된다.
만약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며 살려고 할 때 그는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한다. 만약 그렇지 않고 함부로 말하거나, 성을 내게 되면 그는 하나님의 의를 이룰 수 없게 된다. 열왕기하 5장에는 문둥병자인 나아만 장군이 요단 강에 들어가라는 엘리사의 말에 노하여 병도 고치지 못한 채 돌아가려다가, 종의 권고 때문에 문둥병을 고침받았다는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다. 만약 나아만 장군이 자신이 당한 일에 대하여 함부로 평가하고, 노를 발하여 본국으로 돌아갔다면 그는 일생을 문둥병자로 살아야 했을 것이다.
(2) 도를 행함(22-25절). 본문의 중심 구절은 22절의 "너희는 도를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이다. 이것은 우리가 신약성경을 이해하는데 아주 중요한 열쇠를 제공해 준다. 여기서 말하는 '도'란 우리의 마음속에 깊이 새겨야 할 구원에 관한 복된 소식을 의미한다. 그것은 예수께서 이 땅에서 사시는 동안 무리들에게 가르치셨던 말씀이다. 그런데 야고보는 이 '구원의 도'는 듣기만 해서는 소용이 없다고 단언하면서 참된 구원은 우리가 받은 복음을 온유한 맘으로 마음에 새기고, 그 말씀대로 살아갈 때 받을 수 있는 것이라고 가르친다.
예수께서 이 땅에 사시는 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그분을 만났다. 당시 예루살렘에 살았던 사람들이 약 5만 명이었고, 팔레스틴 전역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70에서 80만 명 정도였다고 한다. 어떤 문서에는 유월절에만 약 200만 명의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을 방문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들 가운데 적지 않은 사람들이 예수를 만났을 것이고, 그분의 설교와 그분이 베푸신 이적들을 듣고 보았을 것이다. 그런데 정작 예수의 제자는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말하는 대로 예수의 부활을 목격한 500명에 불과하였다.
우리는 어떤가 ? 이러한 물음에 대한 솔직한 대답은 예수 당시나, 야고보가 본 서신을 기록할 때나, 지금이나 별 차이가 없다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의 가르침을 듣지만 여전히 구원과는 상관없는 길을 걷고 있다. 듣는다고 다 구원받는 것은 아니다. 듣기만 하는 것은 자신을 속이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받아들인 복음을 행해야 한다. 이것이 야고보 사도가 말하는 참된 믿음이다.
(3) 참된 경건(26,27절). 야고보는 앞에서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어야 할 것을 언급하면서 본문에 와서는 말씀을 듣기만 하고 행하지 않는 자에 대해서 기술한다. 스스로 경건(敬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야고보는 '혀'라는 구체적인 예를 통하여 "자신의 혀를 다스리지도 못하면서 어떻게 스스로 경건하다 할 수 있느냐"라고 훈계하고 있다. 따라서 참된 경건이란 그가 들은 말씀을 행하는 것인데 그것은 환난 가운데 있는 고아와 과부를 돌아보며 자신을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않게 하는 것이다.
특별히 야고보가 이웃 사랑의 의무에 대해 말하면서 자신을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않게 하라는 권면을 첨가시킨 것은 이웃 사랑과 거룩한 생활은 서로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지혜는 그 행한 일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 (마11:19)는 말씀처럼 참된 경건은 그의 삶을 통해서 나타난다. 바로 이러한 삶이 세속에 물들지 않는 삶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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