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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내 형제들아 - '내 형제들아'의 헬라어 '아델포이 무'(* )는 수신자들에 대한 야고보의 사랑의 감정을 잘 나타내며,또한 이는 새로운 주제로 전환시킬 때 사용하는 표현방식이기도 하다(5절; 1:19; 3:1; 5:7). 이제 야고보는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이 경건한 삶을 어떻게 실천해 나갈 것인가에 대해 권면한다.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너희가 받았으니 - 본문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에케테 텐 피스틴 투 퀴리우 헤몬 예수 크리스투 테스 독세스'(* )이다. '테스독세스'(영광의 주)와 '투 퀴리우 헤몬 예수 크리스투'(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사이의 관계에 대한 해석은 다섯 가지이다. (1)혹자는 '영광'을 '믿음'과 연결시켜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 가운데있는 믿음'이라고 해석한다(Schlatter, Zahn, Grotius).(2)혹자는 '영광'이 '주'를 수식하는 것으로 보아 '우리 영광의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으로 해석한다(KJV, RV, Moo, Burchard).(3)혹자는 '영광'을 '사회적 지위'로 해석하여서 본문이 그리스도의 위대함을 의미한다고 해석한다(Erasmus, Calvin). (4) 혹자는 '영광의 주'에 해당하는 헬라어 '테스 독세스'를 형용사적으로 보아 '우리의 영광스러운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이라고 해석 한다(Cantinat, Chaine, Ropes, Hooker, Luther, Mayor). (5) 혹자는 동격으로 보아 '영광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라고 해석한다(Bengel, Lenski, Tasker, NEB). 이 다섯 가지 견해 중 마지막 견해가 가장 타당한 듯하다.왜냐하면 본문에서 '테스 독세스'가 '예수 그리스도'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모든 성품을 지니신 '영광'이시다(눅 2:32;요 1:14; 17:5; 히 1:3). 한편 '받았니'의 헬라어 '에케테'(* )는 시상이 현재로서 수신자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소유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말라 - '외모로'의 헬라어 '엔 프로소폴렘프시아이스'(* )는 70인역에서 '사람의 얼굴을 보고 경탄하다'라는 의미로 사용되었으나 본래 이것은 '한 사람에게 얼굴을 들다 '라는 의미로서 한 사람에게 호의적으로 대하는 것 즉 같은 상황에서 서로 차별을 두고 대하는 것을 의미한다(Manton). 하나님은 절대로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않으시며 그 중심을 보신다 (삼상 16:7; 행 10:34; 롬 2:11; 엡 6:9; 골 3:25). 그러한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가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이 자기의 유익을 취하기 위하여 외부적인 조건에 얽매이는 것은 잘못이며 영광의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걸맞지 않는다.

=====2:2
 개역성경에는 '가르'(* , '왜냐하면')가 생략되어 있다. '가르'는 2-4절까지가 1절의 '외모로 취하지 말라'는 권면의 논중임을 나타낸다. 본절과 3절은 사람을 '외모'로 취하는 행위에 대한 예이다.
 만일 너희 회당에...들어올 때에 - '회당'(*  , 쉬나고겐)은 유대인들이 예배를 드리기 위해 모이는 일(눅 12:11)이나 사람들이 만나는 장소 (눅4:15,20,28)를 의미한다. 야고보가 본절에서 '쉬나고겐'을 사용한 것은 이 서신을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에게 쓰고 있기 때문이다.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의 모임, 장소를 자연스럽게 '쉬나고겐'이라고 부른 듯하다(Burdick). 한편 야고보는 회당에 들어 오는 사람 중 두 부류의 사람을 예로 들고 있다.
 금가락지를 끼고 아름다운 옷을 입은 사람 - '금가락지를 낀 사람' 본절에서만 등장한다. 이것은 본래 '금손가락의 남자', '금가락지 낀'이라는 의미로 '명예와 존귀를 소유한 사람'을 의미한다(창 41:42). 한편 '아름다운 옷'에 해당하는 '에스데티 람프라'(*   ) '밝고 찬란한 옷'이란 의미로서 부유한 사람이나 높은 관직에 있는 사람들의 옷을 가리킨다. 당시 유대 지방에는 자신의 부와 지위를 나타내기 위하여 반지나 아름다운 장신구를 달고 과시하는 풍습이 있었다(눅15:22).
 더러운 옷을 입은 가난한 사람 - '더러운'에 해당하는 헬라어 '뤼파라'(* )는 '불결한'을 의미 하며 또한 '가난한 사람'(* , 프토코스)은 '구걸하는 사람'을 가리킨다(마 19:21, Mayor). 야고보는 더러운 옷을 입은 사람과 아름다운 옷을 입은 사람을 대조시켜서 당시 수신자들이 외모로사람을 취하는 죄를 지적한다(Hort, Burdick).

=====2:3
 너희가 아름다운 옷을 입은 자를 돌보아 가로되 여기 좋은 자리에 앉으소서 - '돌아 보아' 헬라어 '에피블렙세테'(*  )는 '올려다 보다'라는 뜻의 '에피블레포'(*  )에서 유래한 단어로 '좋은 동기를 가지고 쳐다보다'라는 의미이다(눅 9:38, Burdick). 한편 '좋은 자리'는 특별히 마련된 좌석보다는 앉을 자리를 권유하는 의미이다(Adamson).따라서 본절은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아름다운 옷을 입은 자들을 존경하여 그 표시로 자리를 정중하게 권유함을 시사한다(Ropes).
 가난한자에게 이르되 너는 거기 섰든지 내 발등상 아래 앉으라 - 먼저와는 대조적으로 가난한 자에게 대하는 태도에 관해 언급된다. '섰든지'의 헬라어 '스테디'(* )는 '배치하다'의 의미를 지닌 '히스테미'(* )의 명령법이다.이것은 아무렇게나 자리를 차지하라는 것으로서 아마 회당의 맨 끝이나 구석진 한 곳을 가리키는 말로 볼 수있다. 한편 '네 발등상 아래 앉으라'는 '내 발 아래 앉으라'는 표현이다. 당시에 전쟁에서 승리한 정복자들은 종종 자신들의 발을 피정복자들의 목위에 두었는데(눅 20:43) 본문에서는 그러한 의미보다는 발 아래의 마루바닥에 앉으라는 의미로 사람을 차별하는 모욕적인 행위를 암시한다.

=====2:4
 너희끼리 서로 구별하며...것이 아니냐 - 야고보는 수사학적 질문을 통해서 수신자들이 사람을 외모로 취하고 있음을 지적한다. '구별 하며'에 해당하는 헬라어 '디에크리데테'(*  )는 수동태로 서로 구별하는 잘못을 범하고 있음을 시사한다(RV). 한편 '아니냐'의 헬라어 '우'(* )는 부정 불변화사로 수신자들이 야고보 자신의 지적에 대해 충분히 긍정할 수 있는 것임을 암시한다. 2,3 절에서 야고보가 예를 들어 지적했듯이 수신자들은 아름다운옷을 입은 부한 자들과 더러운 옷을 입은 가난한 자를 차별 대우했다. 이렇게 사람을 구별하여서 판단하는 것은 항상 공정하지 못한 판단을 내릴 수밖에 없으며 범죄가 된다.
 악한 생각으로 판단하느 자 - 부자와 가난한 자를 차별하는 것은 잘못된 동기에서나오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지음을 받은 인간을 무시하는 것은 하나님을 무시하는 것과 동일한 것이며 상대방을 위한 판단이라기보다는 자신의 이기적인 욕심을 채우기 위한 판단이다. 이러한 구별 행위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형제들을 서로 분리시키며 피차 시험에 들게 하기 때문에 악한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며(요 8:15), 확고한 믿음이 결여된 것임을 시사한다(Ropes).

=====2:5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들을지어다 - 야고보는 '형제들아 들을지어다'라고 언급함으로써 새로운 논리를 전개해 나간다. 앞절까지는 사람 외모로 판단했을때 죄가 되는 것을 언급하였지만 본절에서 11절까지는 사람을 구별하여 판단하지 말아야 될 이유를 열거하고 있다.
 하나님이 세상에 대하여는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 실제로 그리스도인들은 초대 교회 당시 사회에서 별로 영향력을 끼치지 못하는 부류였다(마11:5; 고전 1:26-29). 그러나 그들이 돈이 없고 가난해서 사회에서 천대 받는 자들이었다고 할지라도 믿음에 대해서는 결코 가난한 자들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이들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상속자이기 때문이다.야고보는 여기서 미래적인 영적 안목을 가지고 세상에서 외모로 사람을 판단하는 것이 잘못된 시각임을 지적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가난한자들에게 그들이 천국의 백성이 되게 하는 소망을 품게 하셨다. 그러나 가난한 자들이 모두 다 믿음이 부여하게 되는 것은 아니다. 야고보는 '가난한 자'의 헬라어 '투스 프토쿠스' (*  )에서 관사 '투스'(* )를 사용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은 자들이 '가난한 자들' 중에서도 한정된 자들임을 나타내고 있다(고전1:26-28).한편 '택하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엑셀렉사토'(* )는 부정 과거 중간태 용법으로서 하나님이 자신을 위하여 친히 선택하였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고전 1:27).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 하신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아니하셨느냐 - 하나님께서 가난한 자들을 택하신 것이 그들이 하나님을 사랑했기 때문이라고 볼 수는 없다. 그러면 보상으로 인한 약속이 되기 때문이다. 단지 그들은 하나님 나라를 전혀 유업으로 받을 수 없는 자들이지만 하나님은 가난한 자들이 자신을 사랑하도록 부르셨으며 하나님 나라의 유업을 상급으로 마련하셨다. 이러한 것을 믿고 바라는 자는 심령이가난한 자일 수밖에 없으며,그 결과 하나님 나라가 그들의 것이 된다(마 5:3;눅 6:20,Tasker). 한편 '아니하셨느냐'는 본절 상반 절에서 언급된 '택하사'와 연결되어 '하나님께서 택하지 아니하셨느냐'라는 의미이다. 이는 4절에서의 용법처럼 긍정적인 대답을 기대하고 사용한 야고보의 표현 방식이다.

=====2:6,7
 너희는 도리어 가난한 지를 괄시하였도다 - 하나님께서 택하신 가난한 자들은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 선택을 받은 자들이다.그러한 이들을 무시하는 행위는 가증스러운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신자들은 가난한 자들을 외모로 취하여 멸시하였다.야고보는 수신자들이 존귀하게 대했던 '부유한 자들'의 행위를 세 가지의 수사학적 질문을 통해 '부유한 자'와 '가난한 자'를 외모로 취해 차별 대우한 잘못을 지적하고 있다.
 (1) 부자는 너희를 압제하며 - 당시에 부자인 사두개인들은 가난한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을 악독하게 박해하였다. 로마 정부는 유대인들에게 자기의 민족인 디아스포라를 다스릴 수 있는 상당한 지배권을 부여하고 있었다(Lenski).그래서 사두개인들은 특히 유대 그리스도인을 핍박하였다(행 4:1-3; 9:2; 16:19). 그들의 압제는 종교적인 것은 물론 경제적인 이익과 관계된 것들이었다(행 19:23-41). '압제하며'에 해당하는 헬라어 '카타뒤나스튜우신'(*  )은 '카타'(* ,'아래로')와 '뒤나스테스'(*  , '유력자', '군주')의 합성어로 '권력을 잡은 자들이 무자비하게 수탈하는 행위'를 나타낸다. 부유한 자들은 가난한 자들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을 압제하고 착취 하였다.
 (2) 법정으로 끌고 가지 아니하느냐 - 당시 유대 사회에서 채권자는 채무자를 무자비하게 다루었다. '끌고 가지'의 헬라어 '헬쿠신'(*  )은 단순하게 '이끌다'(요 6:44;12:32)라는 의미도 있으나 여기서는 어떤 사람을 강제로 끌고 가는 행위를 나타낸다(행 16:19; 21:30).야고보는 개역성경에는 번역되지 않은 3인칭 대명사 '아우토이'(* , '그들')를 사용하여 가난한자들을 끌고 가는 자가 부자들이라는 사실을 나타내고 있다.
 (3) 저희는 너희에게 대해서 일컫는바 그 아름다운 이름을 훼방하지 아니하느냐- '너희에게 대하여 일컫는바 그 아름다운 이름을'의 헬라어 '토 칼론 오노마 토 에피클레덴 에프 휘마스'(*  )에서 '너희에게 대하여 일컫는바'에 해당하는 헬라어 '토 에피클레덴 에프 휘마스'는 문자적로 '너희 위에 일컬어진'이란 의미로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고전 1:2;딤후 2:19)를 가리키며, '아름다운 이름'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나타낸다.이러한 표현은 히브리 관습으로,관습에 의하면 어린아이에게 자기 조상의 이름을 따서 붙이곤 하였다(창 48:16). 이것은 개개인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일컬어짐을 나타내었고 그 개개인은 하나님이 택한자로서 하나님께 바쳐진 사람으로 구별되었음을 시사한다. 따라서 본문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아 하나님의 백성이 되면 그리스도의 이름을 지니게 됨을 시사한다(Tasker, Burdick). 한편 '훼방하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블라스페무신'(*  )은 '악을 말하는'의 의미인 '블라스페모스'(*  )에서 유래한 것으로 본문에서는 '신성 모독' 즉 '하나님을 모독'하는 행위를 일컫는다(Ropes).부자들은 그리스도의 이름을 받은 그리스도인들을 농락하고 압제함으로 신성 모독의 죄를 범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신자들이 외모로만 사람을 취하여 부자들을 옹호하고 존경하는 것은 그들의 범죄에 동조하는 죄악이다.

=====2:8
 개역성경에는 '멘토이'(* , '참으로')가 생략되어 있다. '멘토이'는 의심스러운 것을 표현한 것이 아니라 견고한 확신을 뜻하는 말로서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의미를 수반한다(Ropes).
 너희가 만일...지키면 - 본문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이 텔레이테'(* )는 조건문으로 '너희가 완전하게 지키면'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것은 하나님의법을 완전히 지킬 수 있다는 완전성보다는 지키기를 노력하는 성실성의 관계를 시사한다(Manton).
 경에 기록한 대로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하신 최고한 법 -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는 것은 나쁜 일이다. 그러나 야고보는 외모로 사람을 취하는 행위의 잘못을 따지기 이전에 그것이 왜 불합리한가를 설명하고 있다. '최고한 법'의 헬라어 '노몬 바실리콘'(*  )에서 '바실리콘'은 '왕'을 의미하는 '바실류스'(*  )에서 유래한 말이다. '바실리콘'을 '노모스'에 적용한 것은 로마 시대에 있어 왔던 일반적인 표현 방식으로(4:11,Robertson) 당시에 로마 황제에 의해 제정된 법은 어느 누구도 바꿀 수 없는 절대적인 법이었다. 야고보가 이러한 표현을 사용한 것은 하나님의 법은 그 자체가 어떤 것에도 견줄 수 없는 탁월한 영향력을 발휘하기 때문이다. 더욱 이 하나님의 법은 다른 율법보다 포괄성을 가지고 인간 관계를 주장하는 법이기 때문에 '최고의 법'이라고 할 수 있다(Mayor,Tasker,Ropes). 그러므로 외모로 판단하지 않는 것은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최고의 법을 실천하는 것이다(레 19:18; 마 22:39). 곧 상대방을 외모로 구별하지 않는 것은 자기에게 유익이 되는 사람만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조건에 얽매이지 않고 사랑하는 것이다.

=====2:9
 본절은 외모로 사람을 취한자들을 향한 징계를 나타낸다.
 만일 너희가 외모로 사람을 취하면 죄를 짓는 것이니 - 사람을 외모로 취하는 것은 최고의 법과 완전히 대치될 뿐만 아니라 죄를 들어 오게하는 요인이 되어 하나님의 율법을 파괴하는 행위가 된다(요일 3: 4).
 율법이 너희를 범죄자로 정하리라 - 여기서의 '율법'은 성경의 일반적인 법보다는 야고보가 8절에서 언급한 최고의 법을 가리킨다(Burdick). 한편 '정하리라'의 헬라어 '엘렁코메노이(*  )는 '증명되다'라는 의미로 범죄를 통하여 '증명 됨'을 시사한다.사람을 외모로 취한자는 최고의 법을 어긴 자이며, 율법은 그를 범죄자로 정하여 범죄하였음을 드러낸다.

=====2:10
 개역성경에는 '가르'(* , '왜냐하면')가 생략되어 있다. '가르'는 본절이 앞절에서 언급한 내용 즉 사람을 외모로 취하면 범죄자가 된다는 사실의 근거임을 시사한다.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에 거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 - 야고보는 온 율법을 지키는 자가 한 가지를 제외시키는 것을 예를 들어서 설명하고 있다. 율법은 모두 다 중요한 것이다. 사람이 율법 한 가지만 범한다 할지라도 범죄한 자가 된다. 야고보는 본절에서 사람들이 율법 중 자기의 필요한 부분만을 취하여 지키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 실제로 사람을 외모로 취하는 자들이 그들에게 이익이 되는 부자들에게는 지나치게 마음을 쓰면서도 가난한 자들에게는 전혀 마음을 쓰지 않는 것은 율법을 취사 선택하여 지키는 것과 동일한 것이다.이러한 행위는 율법을 어기는 것이며 역시 범죄자가 되는 것이다. 율법을 지키는 자는 취사 선택의 방법이 아닌 불리한 율법도 동일하게 지켜야 한다. '거치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프타이세'(* )는 '걸려 넘어지다'의 의미인 '프타이오'(* )에서 파생된 단어로 '처음으로 걸려 넘어지다'를 의미하며(Hort) '범한'의 헬라어 '에노코스'(* )는 '지속된'의 의미를 지닌 형용사이다. 사람이 모든 율법을 지키다가 처음으로 단 한 번 범죄하였다 할지라도 지속적으로 범죄한 것과 동일한 결과가 된다.이는 야고보가 죄의 형벌을 말하려고 했다기보다는 모든 율법에 대한 중요성을 지적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2:11
 간음하지 말라 하신 이가 또한 살인하지 말라 하셨은즉 네가 비록 간음하지 아니하여도 살인하면 율법을 범한 자가 되느니라 - 본절은 앞절의 원론적인 언급에 대한 예이다. 논문에서 언급된 십계명은 그 순서가 서로 바뀌어 있다. 그러나 야고보는 본문에서 어느 가정된 상황을 나타내는 것에 불과하지 순서가 뒤바뀐 것에 대하여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려고 한 것은 아닌 듯하다(Tasker).하나님의 율법은 본질적로 하나님의 성품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에 동일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그러기에 한 가지 율법을 완전하게 지켰다 할지라도 다른 율법을 범한다면 그것은 모든 율법을 범한 것과 동일하며,그러한 자는 하나님의 뜻을 거역한 자이고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운 자가 된다. 그러므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신 포괄적인 최고의 법 가운데 사는 그리스도인들이 사람을 외모로 보는 한 가지만을어겼다 할지라도 그것은 모든 율법을 범하는 것과 동일하다(Calvin).

=====2:12
 너희는 자유의 율법대로 심판받을 자처럼 말도 하고 행하기도 하라 - 야고보는 본절에서 강력하게 권면하고 있다. 모든 율법에 차별없이, 간과하지 말고 행하라는 것이다. '자유의 율법'은 앞서 언급한 최고의 율법을 가리키는 표현으로(8절)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주어진 새 계명 즉 복음을 의미한다.이것은 사람들 속박하고 구속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안에서 은혜와 긍휼로 인도하기 때문에 자유로운 것이다(마 5:44; 요13:34; 골 3:12; 요일 3:11).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서 심판 받을 자처럼(고후 5:10) 말을 하고 행해야한다. '...처럼'에 해당하는 헬라어 '후토스'(* )는 현재 시상의 동사인 '말하고', '행하는'을 동일하게 수식하고 있다. 현재시상은 '말도 하고 행하기도 하라'가 습관적이고 지속적인 행위여야 함을 시사한다.또한 본문은 행하는 것뿐 아니라 말도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이 됨을 나타낸다(Manton).

=====2:13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 본절은 그리스도의 말씀을 근거로 한다(마 18:23-35).'긍휼'은 이웃 사랑으로 나타나는 자비심으로 본절에서는 특별히 가난한 자들에 대한 자비심을 나타낸다. 이러한 긍휼을 행하는 자는 긍휼히 여김을 받게 되며(마 5:7) 타인의 잘못을 용서하는 자는 자신의 잘못을 용서받게 된다(마 6:2). 그러기에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며 가난한자에게 긍휼을 베풀기보다는 멸시하고, 도리어 부유한 자에게 관대한 자는 결코 긍휼히 여김을 받을 수 없다.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 - 긍휼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표시이다(Johnson).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으로 죽음을 이기셨듯이 그리스도인들도 삶 속에서 나타난 긍휼을 통하여 심판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게 되며(요일 4:17), 심판을 이기고 자랑할 수 있게 된다.가난한 자들을 향한 긍휼의 마음을 가진 자들은 심판대 앞에서도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이며 심판도 그 긍휼을 이기지 못하게 될 것이다.

=====2:14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 '만일 사람이...하고'는 가정법을 수반하는 조건문으로서 가식적인 믿음을 지적하는 말이다. 이는 '만약 믿음이 있노라 하고 계속적으로 말만 한다면'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들의 말은 전혀 가치가 없는 거짓이며 행위와는 전혀 무관한 것이다. 이렇게 믿음이 있노라 신앙 고백을 하면 서도 마음 내키는대로 살아서 행함이 전혀 없다면 구원에 있어서 유익된 것이 무엇이겠느냐는 것이다. 한편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에 해당하는 헬라어 '티 오펠로스'(* )는 도덕적으로 비난을 할 때 자주 쓰는 수사 의문문이다(Ropes, Robertson).야고보는 조건문과 비난을 나타내는 수사 의문문을 사용해서 말로만 '믿음'이 있음을 강조하는 사람들을 향해 경고하면서 믿음의 본질을 설명한다. 참된 믿음은 거듭남에 수반되어 생겨나는 것으로 그리스도인들의 생활과 행동에 변화를 가져온다.그러기에 거듭났지만 변화되지 않은 믿음은 피상적인 것이며 참된 믿음이라고 할 수 없다.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메 뒤 나타이 헤피스티스 소사이 아우톤'(* )이다. 야고보는 부정 불변화사 '메'(* )를 처음에 사용하여서 본문의 질문에 대한 대답이 부정적인 것임을 시사하고 있다. 본문은 문자적으로 '행함이 없는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해 낼 수 있겠느냐?'라는 의미이나 실제로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능히 자기를 구원할 수 없다'라는 의미이다. 여기서 야고보가 사용한 '행함이 있는 믿음'은 바울이 주장한것과는 차이가 있다. 바울 사도는 율법과 복음을 대조시켜서 인간이 율법을 지켜서 의롭다 하심을 얻을 수 없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음을 말한 반면에 야고보는 '복음' 안에서 '믿음과 행위'를 비교하며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임을 드러내고 동시에 복음 안에서의 행위를 강조하고 있는 것이(Adamson, Ropes).

=====2:15,16
 만일 형제나 자매해가 헐벗고 일용한 양식이 없는데 - 야고보는 본문에서 행함이 없는 믿음의 예로 가난한 자가 부유한 자를 찾아가서 몸에 쓸 것을 구했을 때 살 것은 주지 않고 말만하는 자를 들고 있다.'형제나 자매'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된자로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으로 결속된 그리스도인임을 나타낸다. 한편 '헐벗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귐노이'(* )는 '벌거벗은'의 의미를 가지고 있으나 본문에서는 '초라한', '남루한' 옷을 입은 자들을 가리킨다. 이것은 궁핍한 자들이 절망의 상태에 있는 것을 강조하여 표현한 것이다(Burdick). 또한 '일용할'의 헬라어 '에페메루'(*  )는 '하루를 지내기 위한'의 의미로 하루 하루 연명할 양식을 가리킨다(Adamson). 야고보는 본문에서 생활하는데 필요한 최소한의 옷과 일용할 양식이 없는 자들에게 행함이 없이 믿는 자들이 하는 세 가지의 '위로의 말'을 예로 들어 그러한 말이 얼마나 공허한가를 드러내고 있다.
 평안히 가라 - 이것의 헬라어 '휘파게테 엔 에이레네'(* )는 히브리어의 '레쿠 레샬롬'(*  )에서 유래된 말로서 유대인들이 헤어질 때 사용했던 통례적인 인사법이었다 (삿 18:6; 삼상1:17; 20:42; 삼하 15:9; 막 5:34; 눅 7:50; 8:48). 걱정이 쌓여있는 '헐벗고 일용한 양식이 없는 자'에게 이러한 인사는 무의미한 것이다.
 더웁게 하라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데르마이네스데'(*  )는 중간태로 '스스로 불을 지펴서 덥게 하라'는 의미이다(눅 22:55; 요 18:18,25). 이는 '옷을 입어라'라는 의미로 앞절에서 언급한 '헐벗은 것'에 대한 반대어이다. 그러나 이들은 스스로 옷을 따뜻하게 입을 능력이 없는 자들이기 때문에 본문과 같은 위로는 전혀 가치가 없는 공허한 말에 불과하다.
 배부르게 하라 - 이것의 헬라어 '코르타제스데'(*  )는 본래 가축을 방목하여 키울 때 스스로 풀을 찾아 먹는 것을 나타낸다.혹자는 수동태로 해석하나(Mayor, Adamson) 중간태로 해석하는 것이 타당하다(빌 4:12,Robertson,Davids,Martin). 만약 수동태로 본다면 교회의 다른 사람들에게 불행한 사람을 더웁게 해주고 배부르게 해주라고 권면하는 것으로 해석되기 때문에 문맥상 어울리지 않는다. 결론적으로 본문은 헐벗고 굶주린 자에게 아무런 실제적인 도움을 주지않고 '네가 알아서 스스로 배부르게 하라'라고 위로하는 것은 공허한 것이며 합당치 못한 것을 강하게 드러내고 있다.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 불행한 자들의 몸에 쓸 것을 채우지 않고 앞서 언급한 세 종류의 공허한 말만 하는 것은 오히려 그들을 차갑게 하는 것이며 깊은 상처를 주는 것이다.충분히 도와줄 능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도와 주지 않고 스스로 믿음이 있노라 하고 떠벌리는 것은 위선에 불과하다(요일 3:18).

=====2:17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 본절도 역시 가정법을 수반하는 조건문의 형식으로 '만약 계속해서 행함이 없다면'으로 해석할 수 있다. 진실된 믿음의 열매는 '행함'으로 나타난다. 행함은 믿음이 살아있다는 증거이다.그러므로 '행함'이라는 열매를 맺지 못하면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 '그 자체'에 해당하는 헬라어 '카드 헤아우텐'(*  )은 내적으로나 외적으로 죽은 것 즉 본질적으로 죽은 것을 시사한다(Mayor).야고보는 여기서 '행함'이 없는 믿음은 올바른 믿음이 아니요, 헛된 믿음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런 믿음은 죽은 나무와 같이 아무런 힘이나 능력이 없어서 외부적으로는 살아있는 것처럼 보이나 실제로는 꽃이나 열매를 맺지 못한다. 이렇듯 행함이 없는 믿음은 자기뿐만 아니라 다른사람도 구원 시키지 못한다(Burdick).

=====2:18
 혹이 가로되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 헬라어 본문에는 '혹이 가로되' 이하에는 구두점이 없다. 그래서 '혹이 가로되'가 수식하는 말이 어디까지인지 확실히 알 수가 없으나 '나는 행함이 있으니'까지 수식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한 듯하다. 이러한 수식절의 '나'(* , 아고)와 '너'(* , 수)가 반드시 야고보와 다른 반대자를 지칭한다고 볼 수는 없다. 다만 일반적인 의미에서 '어떤 사람'과 또 '다른 사람'을 지칭할 따름이다(Ropes, RSV, NIV). 한편 본문은 '너는 믿음이 있느냐? 나는 행함이 있다'라는 의미로 믿음과 행함이 별개의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을 나타낸다고 이것은 믿음이 없는 행함이 있을수 있고, 행함이 없는 믿음도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Tasker).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 본문은 반대자의 주장에 대한 야고보의 답변으로 믿음과 행함을 분리하여 설명하는 자에게 그 증거를 나타내 보이라는 호된 질책이다. '행함이 없는 네 믿음'에 해당하는 헬라어 '텐 피스틴 수 코리스 톤 에르곤'(*  )에서 '... 없는'으로 번역된 헬라어 '코리스'(* )는 '...로부터 분리된' 번역하는 것이 더 확실하다.이것은 '행함'과 '믿음'의 분리를 시사한다.그러나 행함은 믿음으로부터 온 열매이기 때문에 결코 믿음과 행함은 서로 분리하여 나타날수 없으며 믿음이 없이는 결코 행함이라는 결과가 입증될 수 없다. 단순히 입술로써 고백만 한다고 해서 그 실체를 입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직 속사람의 마음 가짐인 믿음을 통하여 행함의 열매를 입증할 수 있는 것이다(Hort). 그래서 야고보는 반대자에게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고 담대하게 선포한다. 이것은 단순히 입술로써만 고백하는 믿음이 아니라 살아있는 믿음의 실체를 증거하겠다는 것으로서 행함이 구원의 도구가 아니라 믿음의 증거임을 시사한다(Robertson).

=====2:19
 네가 하나님은 한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 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리라 - 본절에서 야고보는 다시 하나님을 믿는 믿음만 고백하는 자들의 주장에 대해 언급한다. 행함은 없고 오직 믿음만을 주장하는 자들의 고백인 '한 분이신 하나님' 즉 유일신을 믿는 믿음에는 야고보도 동의한다. 그러나 한 분 하나님께서 존재하신다는 사실을 믿는 것은 확실한 교리로서 기본적인 것이다. 또한 한 분이신 하나님을 믿는 것 그 자체는 중요한 일이다. 이것은 이스라엘이 전통적으로 믿고 따라온 중요한 교리이다(신 6:4, Mussner). 그러나 그 교리 자체가 생명을 살리는 구원의 진리는 아니다. 왜냐하면 귀신들도 그 정도까지는 믿기 때문이다.하나님의 살아 계심과 역사하심은 귀신들도 마땅히 아는 바이다(막 1:24). 그러나 귀신들이 하나님께서 유일신이라는 사실을 알고 믿지만 그것은 그들을 구원으로 인도하지 못하며 다만 떨게 할 뿐이다. '떠느니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프릿수신'(*  )은 '털이 곤두서다','떨다'를 의미하는 '프릿소'(* )에서 유래한 단어로 극도의 공포심 때문에 머리 끝이 곤두서는 것으로 영적인 불안과 공포를 의미한다(Manton). 이처럼 '하나님께서 유일신이시다'라는 믿음은 귀신들과 마찬가지로 지적으로만 받아들이고 입으로만 시인하는 것에 불과할 수도 있다. 구원하는 참된 믿음은 내적으로는 온전한 신앙의 인격체를 만들어 하나님의 평화를 누리게 하며 외적으로 믿음에 대한 행함을 나타나게 한다.

=====2:20
 아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인 줄 알고자 하나니 - '허탄한'에 해당하는 헬라어 '케네'(* )는 '공허한', '속이 빈'의 의미로 행함이 없는 자들을 향한 말로서 행함이 없는 믿음이 참된 믿음이 아니라는 사실을 그들이 전혀 알지 못함을 가리킨다. 따라서 ' 허탄한 사람'은 영적인 진리를 전혀 몰라 행함이 없는 어리석은 사람을 말한다. 한편 '헛것'의 헬라어 '아르게'(* )는 원래 곡식이 전혀 없는 땅이나 노예가 일하지 않아서 전혀 소득이 없는 것을 가리킨다(Hort, Moo, Mussner). 이것은 행함이 없는 믿음이 수고하지 않아 아무것도 성취할 수 없는 것임을 시사한다(14-19절,Burdick).

=====2:21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드릴 때에 - 야고보가 '아브라함'을 예로들면서 '우리 조상'이라고 표현한 것은 수신인이 유대인임을 시사한다(Burdick). 아브라함은 이스라엘 12지파의 조상이었고, 모든 믿는 자들의 조상이다(요 8:53; 행7:2; 롬 4:1). 한편 '드릴 때에'라고 번역된 말은 그 의미가 확실하지 않다.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실제로는 드리지 않았음에도 헬라어 본문에는 부정 과거인 '아네노카스'(*  )가 사용되고 있다.이것은 아브라함이 이삭을 드리기로 작정하고 그 의지를 실천에 옮겼기 때문이다. 즉 사실상 하나님께서 그 뜻하신 바를 실행치 아니하셨을지라도 아브라함은 실제로 아들 이삭을 드렸을 것이 확실하기 때문이다.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 부가 의문문의 형태로 사용된 '아니냐'의 헬라어 '우크'(* )는 긍정적인 대답을 기대하는 야고보의 표현 방식이다. 한편 '의롭다 하심을 받은'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디카이오데'(*  )는 '의로 여기다'라는 의미로 개인의 주관적인 주장이 아니라 객관적으로 모든 사람이 의롭다고 인정할 만한 선포 행위를 일컫는다. 이러한 의롭다함은 '행함으로' 즉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단에 드릴 때에 비로소 선포되었다(창 22:1-14).

=====2:22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 - 본절은 아브라함이 행함으로 의롭다 함을 받았다는 사실에 대한 논증으로 '믿음'과 '행함'과의 관계성을 보여준다. '네가 보거니와'는 '누가 보아도 알 수 있는 증거가 명백할 정도로 충분한 것'을 가리킨다(Robertson). 이것은 '네 가 보느냐'라는 의미로 다시 한번 믿음만을 강조하는 자들을 향한 야고보의 권고를 나타낸다. 야고보는 본절에서 '의롭다 함'의 근거가 오직 행함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하게 제시해 주고 있다. 아브라함의 의롭다 하심은 오직 행함만이 아니라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믿음'과 '행함'은 불가분리의 근본적인 속성을 지니고 있음을 나타낸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온전한 믿음이 아닌 죽은 믿음이며, 반대로 믿음이 없는 행함은 올바른 행함이 아니다.믿음은 행함의 원칙으로 행함과 함께 역사하며 믿음의 바탕 위에서 자연스럽게 나오는 결과가 행함이다(Burdick). 그러한 의미에서 아브라함의 믿음도 행함으로 온전케 된 것이다(Manton, Calvin). 이처럼 믿음의 필연적인 결과로 행함이 나타날때 믿음은 온전케 될 수 있다.

=====2:23
 이에 경에 이른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응하였고 - '경에 이른바'는 창 15:6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런데 창 15:6에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의로 여기시고 나서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는 창 22장의 사건까지는 30년의 시간이 흐른다. 이러한 시차로 인해서 혹자는 아브라함의 믿음이 완전하였기에 '응하였다'고 볼 수는 없으며 이 말 속에는 예언적 의미가 함축되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섭리로 인하여 이루어졌음을 분명하게 해주고 있다고 주장한다(Tasker). 또 다른 이는 이삭이 출생하기 전에 이미 하나님이 의롭다고 여겼기때문에 이삭을 드리는 사건으로 인하여 '응하였다' 즉 의로 여김을 받았다고 하는 사실은 모순이라고 지적하고있다(Luther).더군다나 카톨릭주의자나 소키니안들(Socinians)은 아브라함을 하나님이 '의로 여길 때'의 아브라함의 의는 불완전한 것이었으나 이삭을 드리는 행함을 통하여 비로소 완전한 의가 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창 15장에서의 아브라함의 의는 이미 '완전한 의'였다. '응하였고'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플레로데'(*  )는 '플레로오'(* )에서 온 말로서 성경말씀을 '실행 하다'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드릴 때 이미 믿음이 전제되어 있었으며 그러한 아브라함의 믿음자체가 창 22장의 사건을 낳는 근거가 된 것이다.그러기에 창 15:6의 아브라함의 의는 이삭을 드릴 때 비로소 완전해진 것이 아니라 이미 15장에서 완전한 '의'였다.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물로 바쳤을 때 이러한 믿음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보여준 것이다(Burdick). 따라서 야고보의 주장과 바울의 주장은 서로 상반되고 모순되는 것이 아니다. 다만 서로 다른 측면 즉 행함과 믿음의 측면을 각각 강조한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창 22:1-14절은 창 15:6을 응하였다는 것이다.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 - '하나님의 벗'(* , 필로스 데우)이라는 칭호는 야고보가 사용하기 이전에도 이미 일반적으로 사용된 칭호이다(대하 20:7; 사 41:8, Phillo). 야고보는 이 칭호를 사용함으로 '믿음'과 '행함'을 통해서 '의'로 여김을 받은 아브라함이 하나님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였고 깊이 교제를 나누었음을 나타내고 있다. 하나님과 아브라함이 친밀한 교제를 유지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자신을 숨기지 않았음을 의미한다(창 18:17,Tasker). 예수께서도 십자가의 비밀을 안 제자들에게 '이제부터는 종이라 하지 아니하고 친구라 하리라'고 하셨다(요 15:15).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친구라 함은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물로 드렸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을 성취하는 것으로 아브라함에게 전적으로 특권을 부여하신 하나님의 은혜이다(Knox).

=====2:24
 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 아니니라 - 본절에서 야고보는 아브라함의 예를 통하여 전체적인 결론을 맺고 있다. 진정한 믿음이란 정적인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역사에 대한 올바른 반응인 행함으로 나타난다. 즉 이러한 믿음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응답으로서 순종으로 나타난다. '믿음으로 만 아니니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우크 에크 피스테오스 모논'(*  )은 믿음도 우리가 가져야 하는 필수적인 것이고, 또한 아브라함처럼 행함으로써 나타내 보여야 하는 것임을 시사한다.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는 것은 믿음으로만이 아니다. 믿음을 통한 행동으로써 의롭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본문은 바울이 엡 2:8,9에서 주장한 것과는 의미상의 차이가 있는 것처럼 보이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야고보의 주장은 진실된 믿음으로 인하여 행함이 산출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고(22절), 바울 또한 우리의 구원이 행함으로써가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오직 믿음이 있는 자는 선행을 무시하지 않는 자라고 주장하기 때문에 결코 믿음과 행함은 분리될 수 없다. 바울은 다만 율법을 지킴으로써 구원을 얻는다고 주장한 율법주의자들을 대상으로 말하 였고(롬 3:20,28) 야고보는 그리스도인 가운데 행함과 믿음은 별개라고 주장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말하고 있다(Martin). 따라서 바울과 야고보의 주장은 동일한 것이다(Burdick).

=====2:25
 또 이와 같이 기생 라합이 사자를 접대하여 다른 길로 나가게 할 때에 -본절은 라합의 예이다. 라합은 이방인이었다. 야고보가 라합을 예로 든 것은 아마 행함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은 어떤 특정한 민족이나 한정된 사회 계층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려는 듯하다 (Calvin). 라합은 아브라함과 같은 사람이라고 할 수는없다. 왜냐하면 그녀는 기생이었고,이방인이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의롭다 함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그녀의 믿음에 근거한(수 2:8-13; 히 11:31) 행함이었다. 그녀가 죽음을 무릅쓰고 사자(使者)들을 도피시킨 것은 신실한 믿음에서 나온 것이다.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 그녀가 의롭다함을 인정받은 것은 모든 사람 앞에서 신실한 믿음을 인정받은 것을 가리킨다.실제로 그녀는 여리고 성이 무너지는 날 자신뿐만 아니라 부모, 형제, 친척과 더불어 구원을 받았으며(수 6:23), 다윗왕과 예수 그리스도의 조상이 되는 축복을 받았다 (마 1:1,5,6). 그래서 후대에 신앙의 모범적인 인물로 기록되었다(히 11:31). 야고보의 이러한 주장은 그녀의 과거 생활이나 거짓말했던 것을 간과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그녀의 믿음에 의한 행위를 강조하기 위함이다(Adamson).

=====2:26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 야고보는 본절에서 행함이 없는 믿음을 영혼없는 몸 즉 시체에 비유하고 있다. 이 비유는 산 믿음이라면 반드시 행함이 뒤따라야 하며 행함은 반드시 믿음에 기초해야 함을 암시한다.'영혼'에 해당하는 헬라어 '프뉴마토스'(*  )는 일반적으로 '영'(spirit)이라고 번역한다(NIV, NASB). 그러나 본문에서 야고보가 사용한 비교는 창 2:7을 근거한 것으로 본절의 '프뉴마'는 창세기의 '생기' 즉 생명을 주는 '호흡'을 의미하는 '루아흐'(* )로 보아 '호흡'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왜냐하면 숨을 쉬지 않는 것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나 다름 없으며 만약 야고보가 '영'으로 보았다면 '프쉬케'(* , '영혼')를사용하였을 것이기 때문이다(Robertson, Martin).

 

 

  전장에서 시험에 대한 교훈과 믿음의 도(道)를 행할 것을 설파한 야고보는 본장에서 믿음의 행함을 그 원리적 측면에서 진술하고 있다. 우리는 본서에서 바울의  서신들에서 보는 것과 같은 조직적인 신학이나 논리적인 정연성을 찾기는 어렵다. 하지만 야고보의 권고들은 비록 논리적으로 연결되어 있지 않지만 '복음의 실천'이라는 주제 아래 독특한 방법으로 내용이 연결되어 있다.
  야고보가 그의 서신 모두(冒頭)에서부터 끝까지 지나칠 정도로  철저하게  강조하는 것은 '행함'이다. "너희는 도를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1:22), "영혼이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26절). 본장은 이러한 면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장(章)이라고 할 수 있다.  야고보는 본장에서 만약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받았다고 한다면(1절), "그는  믿음을 가진 자답게 살아야 한다. 만약 그러한 삶을 살지 못한다면 그는 자신의  믿음에 대해서 심각하게 돌아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곧 죽은 믿음이기 때문이다."(17절)라고 엄중히 경고한다.
  이러한 본장의 내용을 상고하기 위해 중심 주제가 되는 '믿음과 행함'에 초점을  맞추어 보기로 하자.
  본장 14-26절과 로마서 4:1-5에 기록된 말씀 사이의 차이점은 오랜 기간 동안  여러사람들에 의하여 논의(論議)되어졌다. 루터는 본서가 '이신칭의'(以信稱義) 사상과 정면으로 대치된다고 보고 본서의 정경성(正經性)조차 부인하였다. 비록 말년에  본서에 대해서 다소 호의적으로 보긴 하였지만, 루터는 그의 저서 [야고보서와 유다서 서문](Perface of St. James and St. Jude. 1546)에서 "야고보서가 초대 교회에 의해서  거절당했지만 나는 그것을 좋은 책으로 추앙한다. 왜냐하면 야고보서는  사람의  교리를 드러내지 않고 하나님의 법(法)을 뚜렷하게 나타내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그것을 사도의 글로 여기지는 않는다. 그 이유는 첫째로, 이신 칭의 사상과 배치되기  때문이고, 둘째로,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에 대한 언급을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pp.395-396)라고 말하였다. 결국 루터는 본서에 대한 부정적인 견해를 떨쳐버리지 못했다.
  칼빈은 루터보다는 보다 객관적인 입장에서 본서를 바라보았다. 그는 그의  저서[기독교 강요](基督敎講要)에서 이렇게 말하였다. "요약하면 야고보는 여기서 어떤  방식으로 의롭게 되는가를 논의하지 않고 신자들에게 선행으로 맺는 의를 요구하고 있다." 즉 칼빈은 야고보가 칭의의 결과로서의 행함을 강조하는 반면, 바울은 칭의의  원인으로서의 믿음을 강조하고 있다는 것이다. 믿음과 행함에 대한 바울과 야고보의  해석을 더욱 구체적으로 살펴보기로 하자.
  (1) 믿음에 대한 바울과 야고보의 해석. 본문 14-16절의 내용은 로마서 4:1-5에  기록된 바울의 '이신 칭의'(以信稱義) 사상과 배치되는 듯이 보여진다.  바울에  의하면 '칭의'(justifucation)는 율법의 행위에 의하지 않고 오직 믿음으로만 되어진다. 믿음은 행위가 아니다. 하지만 야고보는 '칭의'는 행위 - 믿음이 전제된  행위를  말한다. 아무리 그의 삶이 도덕적으로 선하고 완전하다 할지라도 믿음이 전제되지 않으면 구원과는 상관없는 것이다 - 에 의한다고 강조한다.
  바울이 말하는 믿음은 어떤 진술들에 대한 지적(知的)동기가 아닌, 삶 전체를  그리스도께로 맡기는 전인적인 태도를 의미한다. 그러나 야고보는 바울의  그것과는  다른 믿음, 즉 행위에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하는 지적인 동의를 반박,  강조한다.  그는 교리를 인정하는 지적인 믿음으로는 구원을 받을 수 없다고 주장함으로써 당시 믿음의 모양만 있고 믿음의 능력은 상실한 채 살아가는 공식화(公式化)된 신앙을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바울이 말하는 믿음과 야고보의 그것은 본질적으로  서로 다른 믿음이 아니라, 단지 강조점의 차이임을 알게 된다. 바울은 믿음의 뿌리를, 야고보는 믿음의 열매를 보고 있으며, 바울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시작에 대해서 그리고 야고보는 그것을 지속적으로 이루어 나가는 것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이다.
  (2) 행함에 대한 바울과 야고보의 해석. 행함에 대한 야고보의 견해는 자신이  말하는 믿음이 바울의 그것과 다르듯, 바울이 정죄하는 행함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바울이 비판적으로 사용한 '행위'라는 단어는 구원을 얻으려는 행위를  의미한다.  하지만 야고보가 말하는 행위는 바울이 로마서에서 언급한 '율법의 행위'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믿음의 행위'이다. 본서 어느 곳에서도 율법의 행위에 대한 언급은 찾아볼 수  없다. 야고보가 말하는 행위는 믿음의 표현인 행함이다. 하지만 이러한  행위는  인간의 노력과는 구별된다. 그것은 오직 믿음이 전제될 때에 의미를 갖는 것이다. 이러한  행위에 대해서는 바울도 그의 서신들 속에서 여러 차례 강조한 바  있다(고후  9:8;  엡 2:10; 살후 2:17).
  한편 본장의 내용은 두 부분으로 대별된다. 첫째 단락은 1-13절로서 믿음 안에 있는 성도가 마땅히 행하여야 할 것을 서술하고 있다. 둘째 단락은 14-26절로서 참된  믿음에 대해서 기술하고 있다. 이 부분은 바울이 말한 '이신 칭의'교리와 충돌을 일으키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미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바울과 야고보는 서로 다른 주장을 한 것이 아니었다.

  1. 믿음에 수반되는 행위(2:1-13)
  야고보는 이 땅에 살아가는 성도들의 삶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었다.  이러한  그의 관심은 '복음의 실천'으로 나타났다. 오늘날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말하였지만, 그 말씀대로 살지 못했던 것 같다. 그래서 야고보는 참된 그리스도인이라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대로  살아야  한다고 가르친다.
  야고보는 그리스도인의 영성(靈性)을 개인적인 차원으로만  이해하였던  사람들에게 참된 영성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가르쳐주고자 하였다. 영성이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기초로 해서 성령의 내주하심으로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는 것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그러나 진정한 영성은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는 것으로 끝나서는 안  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기대하시는 것은 체험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관심사를 나누는  것이다.  따라서 진정한 영성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창조의 주, 역사의 주, 그리고  구원의 주이신 하나님의 뜻과 목표를 깨닫고 실현하는 삶이라고 할 수  있다.  야고보는 그것을 '행함 있는 믿음'이라고 표현하였다. 야고보의 말을 들어 보자.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이것이니라"(1:27).
  본장에서 야고보는 참된 믿음에 대해 기술하면서 먼저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문제 가운데 하나인 차별, 즉 편견적인 인간 관계에 대해서 기술한다. 참된 믿음이 있는 사람들은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않는다(1절). 야고보는 본문에서 사람을 외모로  취하는 것은 곧 자신의 신앙 고백과 모순되는 것이므로 성도들은 마땅히 이러한 일들을  하지 말아야 한다고 역설한다. 말라기 선지자는 말한다. "너희가 내 도를 지키지  아니하고 율법을 행할 때에 편벽되이 하였으므로 나도 너희로 모든 백성 앞에 멸시와 천대를 당하게 하였느니라 하시니라"(말 2:9).
  문장 구조상 2-7절은 1절에 대한 가정적 실례(實例)로서 부자와 가난한 사람이 회당에 들어오는 모습을 들면서 대답을 기대하는 질문 형식으로 되어 있다. 주의 몸된  교회에서는 재산이나, 학식의 정도, 피부색과 상관없이 누구나 동등한 인격으로  대우를 받아야 한다. 그런데 실제적으로 많은 경우 사람을 외모(外貌)로 취하고 있다(4절).매튜 헨리(Matthew Henry)는 "세상적인 위대함이나 부요함을 치켜 올리는 행위는 그리스도인들의 사회에서 특별히 경계해야 할 일이다"라고 하였다.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지 않으시며(행 10:14; 15:9; 롬 2:11; 엡 6:9; 골 3:25; 벧전 1:17)  '세상의 부'보다 '영적인 부'를 더 귀하게 보신다. 하나님은 부자나 가난한 자도 아닌 주님을 사랑하는 자들, 주님의 뜻대로 살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주신다. 야고보가 말하는 가난한 자는 단지 물질적인 궁핍함에 처해 있는 사람이 아니라 교회 공동체 안에 속해 있었던 가난한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사람들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될 하나님의 택하신 자를 단지 그가 가난하다는  이유로  괄시하였다(6절).
  여기서 특별히 주목해야 할 것은 "부자는 너희를 압제하며 법정으로 끌고 가지 아니하느냐"(6절)라는 말씀이다. 이 말씀 속에서 우리는 본문에 나오는  부자가  성도들의 모임에 참석하지 않는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발견케 된다. 이들이 한 일은  다음과  같다.
  첫째, 성도들을 압제하는 일. 여기서 '압제하다'(카타뒤나스튜우신)란 '착취함'을 의미한다.
  둘째, 성도들을 법정으로 끌고가는 일.
  셋째, 그 아름다운 이름, 곧 주의 이름을 훼방하는 일. '훼방'(블라스페무신)이라는 단어는 '악담'(,블라스페모스)에서 유래되었다. 이렇게 성도들을 착취하고 법정으로 끌고가 주의  이름을  망령되게 하는 사람들을 높이고 가난한 자를 괄시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 야고보는 그들 사이에 있는 악한 생각(4절), 그릇된 동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8-13절은 예상되는 질문을 염두에 두고 서술한 것 같다. 야고보는 자신들이 '부자를 사랑하는 것이 부자의 외모 때문이 아니라 주의 계명, 곧 최고의 법인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에 충실한 것이다'라고 변명한 사람들에게(8절) '왜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그 원리를 적용치 않느냐'라고 지적한다. 이렇게 사람을 외모로  취하는 일은 결국 주의 말씀에 충실하였기 때문이라는 변명은 거짓이  된다(10,11절)는  것이 야고보의 주장이다. 12절과 13절에서 야고보는 이러한 논의를 기초로 성도들에게 자유의 율법대로 행하라고 권면함으로써 본장의 첫번째 단락을 마무리 짓는다.

  * 회당(                 ,쉬나고게). '회당'이란 '함께 모이다'라는 뜻을 가진  동사 '쉬나고'(             )의 명사형으로 '기도하는 곳','성소', '회중'을 의미한다.
  회당의 기원은 확실치 않지만 일반적으로 바벧론 포로기에 회당이 생겼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예루살렘 성전에서 예배를 드릴 수 없는 사람들이 함께 모여 말씀을 낭독하고 기도문을 암송하는 것이 회당의 출발점이었다. 회당은 포로기를  통하여  발전하였다. 그리고 디아스포라뿐만 아니라 팔레스틴, 심지어 예루살렘에서도  회당은  세워졌다. 문헌에 의하면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될 당시 예루살렘에는 480여 개의 회당이  있었다고 한다.
  회당에서는 희생을 드리지 않았기 때문에 기도와 찬양, 율법의 낭독과 해석이  필수적인 요소로 강조되었다. 율법은 연속하여 통독되었다. 문헌에 의하면 팔레스틴  동부 회당에서는 1년을 주기로, 서부 회당에서는 3년을 주기로 율법을 통독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예언서들은 연속적인 순서들로 읽혀지지 않고 오경과 관련되어 선별적으로  낭독되었다. 회당 예배는 예배의 부름과 쉐마(Shema)의 암송, 관련된 축복 기도들, 십계명들과 함께 시작되었다. 그리고 특정한 기도들과 더불어 율법과 예언서의 낭독, 해석이 있었고 축도로써 예배를 마쳤다. 이러한 예배 순서는 초대 기독교 예배 순서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2. 참된 믿음(2:14-26)
  본 단락에서 야고보는 '참된 믿음'에 대해서 기술(記述)하고 있다. 1장에서도  언급하였지만 야고보가 본 서신을 쓰면서 관심을 가진 것은 말에 있어서는 믿는 자의 요소를 갖추었지만, 행위에 있어서는 믿는 자의 모습을 갖추지 않은 사람들이었다. 야고보는 이들에게 구원에 이르는 믿음이 무엇인지 설명해 주어야 할 필요를  느꼈다.  만약 그들의 믿음이 참된 믿음, 구원에 이르는 믿음이라고 한다면, 그 믿음은  역동적(力動的)으로 그의 삶 가운데 나타나야 한다. 그러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러한  믿음의 역동성을 상실하였다. 야고보는 이러한 그들의 삶이 결코 그들을 구원에 이르게 할 수 없다고 보았다. 열매를 보아야 그 나무가 어떤 나무인지 아는 것처럼, 그들의 삶이 그들 각자의 믿음을 증거한다고 생각한 야고보는 구원에 대해서 사람들이 갖고 있는  편견을 날카롭게 지적한다. 행위 즉 신자의 삶은 구원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인식은 점차로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의 잘못된 삶을 정당화하려는 보호막으로  굳어져  갔다. 야고보는 이러한 성도들의 잘못된 믿음에 대한 선이해(先理解)들을 바꾸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야고보는 믿음은 그의 삶과 구별된 어떤 것이 아닌, 오히려 그의 삶과  직접적으로 연결된 것이라는 사실을 보여주려고 다음과 같은 네 가지 예화를  사용한다.
 첫번째 예로서 헐벗고 굶주린 형제들에 대하여 말만 그럴듯하게 하는 행위(15-17절)를,
 두번째 예로서 귀신들의 믿음(18-20절)을,
 세번째 예로 아브라함의 믿음(21-24)을,
그리고 네번째 예로서 기생 라합의 믿음(25절)을 든다. 야고보는 본 단락의  서두에서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914절)라는 질문을 던지고, 위의 네 가지 예를 든 다음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26절)고 결론을 내린다.
  야고보가 구체적인 예를 들면서 지적하고자 하였던 '행함이 없는 믿음'은 본 서신의 중심 주제이다. 행함에 대한 야고보의 강조는 바울의 교리와 상충된 것으로  오해되어서 많은 비판을 받아 왔다. 하지만 1장에서 진술한 바와 같이 바울이 말하는 '믿음'과 '행함'이라는 단어와 야고보가 말하는 그것은 어휘는 같지만 그것이 나타내고자  하는 뜻은 서로 다른 것이었다. 그 대표적인 경우가 19절의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는 말씀이다. 여기에 씌어진 '믿음'이라는 단어는 바울이 사용한 그것과  같은  단어이지만 바울이 말하는 그리스도에 대한 철저한 신뢰와는 다른 의미로서 사용되고 있다.  여기서 야고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지식적인 믿음'이었다. 비록 귀신들도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있었지만, 그들은 자기들이 알고 있는 그 믿음을 자신의 삶  가운데 구체화시키지 못했다. 신앙은 지식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참된 믿음은 그의  전인격 속에 나타나야 하는 것이다.
  이제 본문의 내용을 구조적으로 이해하기 위하여 본문을 도표화하면 다음과 같다.
+------------------------------------------------------------------------------+
|                           참 된  믿 음 (14-26절)                             |
+-----------+-------------------------+--------------------------+-------------+
| 문제 제기 |     헛 된  믿 음        |       참 된  믿 음       |   결  론    |
|   (14절)  |      (15-20절)          |        (21-25절)         |   (26절)    |
+-----------+-----------+-------------+------------+-------------+-------------+
|그 믿음이  |   예 1    |    예 2     |   예 1     |    예 2     | 행함이 없는 |
|자기를 구원+-----------+-------------+------------+-------------+ 믿음은 죽은 |
|하겠느냐 ? |말뿐인믿음 |귀신들의 믿음|아브라함의  |라합의 믿음  | 믿음이다    |
|           |           |             |믿음        |             |             |
|           | (15-17절) |  (18-20절)  | (21-24절)  |  (25절)     |             |
+-----------+-----------+-------------+------------+-------------+-------------+
  (1) 문제 제기(14절). '내 형제들아'라고 시작되는 이 질문은 당시 자신들의 믿음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 보지 않았던 그리스도인들에게 던져진 하나의 큰 도전이었다.  여기서 야고보가 관심을 가진 사람들은 '믿음을 가진사람들'이 아니었다. 그가 말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믿음이 있노라 스스로 말하면서도 그 증거가 나타나지 않는 사람들'이었다. 야고보의 이러한 질문은 마태복음 7:16이하에 기록된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란 말씀과 일맥 상통한다.
  어떤 사람이 사과나무 묘목(苗木)을 사다가 그의 밭에 심었다고 가정해 보자.  결실할 때가 되어 가서 보니 배가 열렸다. 그렇다면 그 나무는 사과나무인가, 아니면 배나무인가 ? 혹시 그 나무가 원래는 사과나무인데 그가 잘못 가꾸어서 배나무가 된  것은 아닌가 ? 결코 그렇지 않다. 그것은 배나무이다. 단지 그가 처음부터 사과나무라고 착각한 것뿐이니다. 사과나무는 당연히 사과를, 배나무는 당연히 배를 맺어야 한다.  믿음에 대한 야고보의 주장은 바로 이것이다. 만약 그가 믿음이 있다고 한다면 그는  당연히 그 믿음의 열매를 맺어야 한다. 만약 어떤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면서도 그 믿음의 열매가 없다면, 그는 믿음이 없거나 아니면 믿음이 있다고 스스로 착각하는 사람이다.
  (2) 말뿐인 믿음(15-17절). 많은 사람들이 신자가 이웃에 대하여  선(善)을  행해야 한다는 가르침의 근거로 이 구절을 사용한다. 물론 이러한 인용이 완전히  잘못되었다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본문이 의도하는 것은 신자가 이웃에 대하여 선을 행해야 할 것을 가르치고자 함이 아니다. 본문은 야고보가 행함이 없는 믿음이 어떤  믿음인가를 보여주기 위하여 선택한 하나의 예화(例話)이다.
  이 예화에서 야고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매우 분명하다. 즉 헐벗고 굶주린 자에게 실제적인 필요를 공급하지 않고 말로만 따뜻하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고 아무리  이야기해도, 그가 배부르거나 따뜻해지는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아무리 입으로 신앙을 그럴듯하게 고백하고 기독교적인 용어를 장황하게  사용한다 할지라도 그에게 그 말에 해당하는 행함이 없으면 믿는다는 그 모든 말들은 그에게 구원이라는 결과를 낼 수 없다. 헐벗고 굶주린 자에게 배부르고 따뜻하라고 하는 말들이 아무런 결과를 내지 못하는 것처럼, 행함이 없이 입으로만 하는 신앙 고백은 비록  그 신앙 고백자의 종교적인 감정을 만족시킬지는 몰라도 실제로 그에게 구원이라는  결과를 내지 않는다고 야고보는 교훈한다.
  (3) 귀신들의 믿음(18-20절). 아마도 이 예화는 누가복음 8:26이하에 기록된  사건, 즉 예수께서 거라사 지방에서 군대 귀신 들린 사람을 고치신 사건을 염두에  두고  한 것 같다. 이 사건에 주목할 것은 귀신은 예수가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는 점이다.  "예수를 보고 부르짖으며 그 앞에 엎드리어  큰 소리로 불러 가로되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나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당신께 구하노니 나를 괴롭게 마옵소서 하니"(눅 8:28). 아직까지 제자들도 예수가 누구인지 확실히  모르던  때였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베드로의 신앙 고백은 이보다  훨씬 뒤에 일어났다. 하지만 귀신은 그보다 먼저 예수가 누구인지 알고 있었고, 그자 장차 자신을 심판하실 것이라는 것도 알았다. 그리고 아직 그때가 되지 않았고,  자신은 예수의 명령에 따를 수밖에 없다는 것도 알았다. 그래서 귀신은 예수께 간구해 허락을 받고 돼지떼에게로 들어갔다. 예수에 대한 귀신의 지식은 놀랄 만한 것이었다. 하지만 귀신은 결코 구원을 받지 못했다. 왜 ? 그는 예수를 단지 지식적으로  알았을  뿐이었다. 그에게 지식은 있었다. 그러나 귀신에게는 그 지식 뒤에 반드시 따라야 할 무엇이 없었다. 많은 사람들이 지식을 믿음으로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믿음과 지식은 별개의 것이다. 예수에 대해서 안다고 그가 구원을 얻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교리에 대한 지적인 동의(同意)로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아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인 줄 알고자 하느냐"(20절).
  (4) 아브라함의 믿음(21-24절). 이 사건은 창세기 22:1-14에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바울과 야고보는 동일한 사건에 대하여 각각 다른 해석을 내리고 있다. 로마서  4:1-5에 의하면 바울은 아브라함이 의롭게 된 것은 그의 믿음 때문이었다고 말한다. 반면에 야고보는 본문에 기록된 바와 같이 아브라함은 그의 행위로 의롭게  되었다고  말한다(21절). 하지만 좀더 자세히 살펴보면 그 모순은 그 표현 형식에 있는 것이지  내용에 있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된다. 야고보가 말하는 행위란 바울이 로마서에서 언급한  '율법의 행위'와는 근본적으로 다름 '믿음의 행위'이다. 그것은 예수께서 말씀하셨던 '회개에 합당한 열매'로서의 행함을 말하는 것이다.
  로마서 4:1 이하에서 바울이 말하는 것과 야고보가 말한 것의 차이는 그들이 염두에 두었던 대상이 달랐기 때문이다. 바울은 유대 율법주의자들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에 행함에 대하여 말할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야고보는 믿음만 고백하면 된다는  안일한 생각을 하는 사람들에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당시 많은 사람들은 바울의 '이신 득의'(以信得義)를 곡해하여 행함은 구원과  상관없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창세기 15:6에 의하면 "아브라함이 여호와를 믿으니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야고보는 아브라함의 믿음이 참된 믿음이었다는 증거가 바로 아들 이삭을 제단(祭檀)에 드린 행함에 있었다고 주장한다. 만약 아브라함이 그의 아들 이삭을 제물(祭物)로 바치지 않았다면 그의 믿음은 온전한 믿음이 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믿었고, 그의 행함으로 그의 믿음이 참믿음이었음을 증거하였다.
  이러한 사실을 볼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의 참된 의미를 알 수 있다. 야고보는 말한다.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22절).
  (5) 라합의 믿음(25절). 이 예화는 여호수아 2:1-24과 6:21-25에 기록되어 있는  사건을 염두에 두고 한 것이다. 모세의 뒤를 이어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된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그는 여리고 성으로 두 명의 정탐꾼을 보냈는데 그들은 라합의 집으로 갔다. 라합은 하나님을 믿었고, 또  하나님께서 이 성을 그의 백성들에게 주셨다고 믿었으므로 그 정탐꾼들을 숨겨주었다.  그로 인해 그녀는 그 성(城)이 멸망할 때 구원(救援)을 받게 된다.
  라합이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은 그녀가 이스라엘  정탐꾼들을 도와주는 것으로 표현되었고, 그 믿음의 표현 때문에 라합은 여리고 성이  멸망당하는 와중에서도 구원을 얻을 수 있었다. 만약 그녀가 자기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있다고 하면서, 그 정탐꾼들을 도와주지 않았다면 다른 사람처럼 성과 함께 멸망했을 것이다.
  (6) 결어(26절). 야고보는 행함이 없는 신앙 고백이 얼마나 쓸모없는가를  보여줌으로써 그의 논의의 결론을 내리고자 한다. 야고보는 행함 없는 믿음을 영혼이 없는  몸에 비유한다. 여기서 '영혼 없는'(코리스 프뉴마토
스)이란 문자적으로 '호흡이 없다'는 뜻이다. 사람에게서 호흡이 끊어졌다고 하는  것은 곧 그의 생명이 다했음을 증거한다. 마찬가지로 믿음은 있는데 믿음의 행함이 없다고 한다면, 그것은 더 이상 믿음이 아니라는 것을 증거한다. 야고보가 그의 논의를 마치면서 이러한 비유를 사용한 것은 영이 몸에 생명을 가져다 주듯이, 행함은 그  믿음을 생명으로 이끈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함인 듯하다.
  사실 믿음과 행함의 관계는 논리적으로나 가능한 것이지 실제적으로 그러한  구분은 불가능하다. 예를 들어 물(H20)은 수소(H) 두 개와 산소(O) 한개로 구성된 화합  물질이다. 만약 이것을 분리하면 H2 와 O로 나뉘어져야 하는데 실제로는 그렇게  나뉘어지지 않는다. 믿음과 행함의 관계도 마찬가지이다. 마태복음 7:21-23에 보면 불법을  행하는 자들에 대한 예수의 경고가 기록되어 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문맥으로 보아 '그 날'은  심판날이다. 그 날에 하나님의 심판이 있는데 어떤 사람은 구원을 받고 어떤 사람은  구원을  받지 못한다.
  위에 기록된 내용으로 미루어 볼 때, 본문에 기록된 사람은 다 믿음 있노라고  자처하는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심판의 기준이 무엇인가 ? 그것은 그의 고백이 아니라, 그가 하나님 뜻대로 행했느냐, 그렇지 않느냐였다. 그렇다. 참된 믿음은 행함과  구별되지 않는다. 한 가지 주의해야 할 점은 야고보가 이야기하는 행위는 율법의 행위난  도덕적인 선한 행위가 아닌 믿음의 행위, 믿음의 결과로서 당연히 그의 삶 가운데  드러나야 할 행함이라는 것이다. 예수께서 이 땅에 계시는 동안 많은 사람들이 그 분을 만났고 그분의 말씀을 들었으며 그분이 베푸셨던 이적을 보았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구원과 상관없는 길을 걸었다. 이러한 사실에서 우리는 심각한  도전을  받는다. 모든 믿음이 우리에게 구원을 주는 것이 아니라는 것, 입으로 '주여 주여'하는 자들과 지식적인 믿음만 가진 자들은 결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경고는 이 땅에서 살아가는 성도들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분명하게 가르쳐 준다. 참된 믿음은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것이다. 이것이 야고보가 말하고자 하는 믿음의 행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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