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그러므로 - 전후 문맥으로 보아 이 접속사가 어떤 부분과 직접적으로 연관되는지 분명하지 않다. 혹자는 이 접속사가 앞에서 설명된 이방인들의 부도덕한 행위와 관련이 있다고 주장한다(Hendriksen). 또한 어떤 학자는 본절 전체를 1:20과 같이 삼단 논법식으로 재구성하여 다음과 같은 사상적 전개로 이해하고자 했다(J. Murray). (1) 다른 사람의 행동을 너는 판단한다. (2) 너도 똑같이 그 행동을 한다. (3) '그러므로' 너는 너의 행동을 정죄하는 것이고, 너도 핑계치 못할 것이다. 그렇지만 유대인들은 종종 어떤 문장을 다른 주제로 전환하고자 할 때 별 의미 없이 접속사를 사용하여 주의를 환기시키는 문법 구조를 사용한다(삼하 8:1;10:1;13:1;히 4:14). 바울도 이와 같이 이방인의 죄악상을 폭로하는 주제로 전환하는 시점에서 별 의미없이 이 접속사를 사용하였다.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원문 '비판하는 모든, 오 사람아! 권성수-좀 어색하나 이것이 바울의 감정을 잘 전달한다) - '판단하는'의 헬라어 '크리논'( )은 하나님의 '판단'( , 크리마)과는 구분되는 것으로서 '의심한다'(눅 24:38), '헤아린다'(마 7:2), '구별하다'(마 13:30)라는 뜻으로 사용되며 본절에서는 인간이 그 이웃에 대하여 편견을 가졌다는 의미로 쓰여졌다(요 8:15;약 4:12). 한편 '남을 판단하는 사람'이 구체적으로 어떤 사람을 지시하는지의 문제는 의견이 분분하다. (1) 혹자는 이 부류의 사람을 스스로 남을 규탄하고 지도하며 판단하는 입장에 있다고 생각하는 '많은 선생'(약 3:1)이라고 주장한다(Matthew Henry). (2) 또 혹자는 '판단하는 사람아'에 해당하는 헬라어 '파스 호 크리논'( ) 가운데 '파스' ( , '모든')를 강조하여 '남을 판단하는 모든 사람'이란 유대인이나 이방인 모두를 포함하며 판단하는 일을 습관적으로 반복하는 자들이라고 한다(J. Barmby). 그러나 본장 전체의 흐름으로 보아 본절의 이 말은 율법을 받고 자랑하면서 율법에 따라 살지 아니하는 유대인들을 칭하는 뜻으로 해석하는 것이 보다 바람직할 것 같다. 물론 유대인이라는 구체적 표현이 나타나지는 않지만 당시 유대인들의 삶이 이웃을 판단하는 교만한 삶이었음은 사실이다. 하지만 유대인들이 가장 적합한 대상이라는 견해를 마치 이방인은 이 부류에서 제외된다는 뜻으로 해석하는 것은 또 다른 오해를 발생하게 할 것이다.
네가 핑계치 못할 것은 - 바르트(Barth)는 하나님께 핑계할 수 없는 부류에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아는 사람도 포함시킨다. 왜냐하면 어떤 사람이 비록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있더라도 유한한 인간이며 시간에 속한 존재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즉 인간은 제한되고 연약한 존재로 항상 죄악 가운데 그 영향권 아래 살아가므로 누구든지 하나님께 핑계할 수 없다는 의미이다. 그런데 바르트의 주장대로라면 핑계치 못할 자의 범주에 바울 자신도 포함되므로 바울 역시 또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있는 오류를 범하게 된다. 따라서 본 절은 신앙에서 떠난 유대인들을 향한 바울의 책망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다(Luther, Calving, Hendriksen). 유대인이 하나님의 율법을 받아 이방인보다 더욱 밝은 계시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며 살았기 때문에 그들은 하나님께 핑계할 수 없는 것이다.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 아담의 범죄로 말미암아 전적으로 타락한 인간은 판단력이 무능해졌을 뿐만 아니라 스스로 의를 이룰 능력도 무력해졌다. 그렇기에 남을 판단하는 자는 자신이 자신을 정죄하는 모순에 빠지게 된다. '정죄함이니'로 번역된 헬라어 '카타크리네이스'( )는 '카타'( , '...에 반대하여')와 '크리노'( , '구별하다, 판단하다')가 합쳐진 '카타크리노'( )의 현재 직설법 2인칭 단수 동사로서 '세아우톤'( , '너 자신을')과 함께 쓰여 스스로를 죄있다고 판단하는 것을 의미한다. 혹자에 의하면 이 '정죄'는 남을 저주했을 때 분만 아니라 용서했을 때도 받게 되는데 그것은 자기 자신이 판단의 기준이 되었기 때문이라고 한다(Lenski).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 - 이 표현은 유대인들이 범하는 잘못이 이중적인 성격을 띠고 있음을 보여준다(Calvin). 즉 그들은 이방인과 똑같은 잘못을 범하고 있으면서도 뻔뻔스럽게 다른 사람의 잘못을 신랄하게 정죄하는 양면성을 가지고 있다. 이것을 좀더 간략하게 나타내자면 '어두움과 위선'(Murray)이 될 수 있겠다. 이와 같은 바울의 논리는 예수의 가르침에 근거한다(마 7:1-5;툭 6:41, 42).
=====2:2
하나님의 판단 - 여기서의 '판단'( , 크리마)은 공의의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심판 또는 정죄를 의미한다(약 3:1). 사람이 스스로 하는 판단은 항상 한계가 있고 상대적이지만 하나님의 판단은 절대적인 표준이므로 모든 범죄자에 대해 심판과 정죄를 내리심이 당연하다. 이러한 하나님의 판단(심판)은 종말에 궁극적으로 이루어지는데, 어느 누구도 그의 심판에서 제외되거나 특권을 부여받지 못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진리이시므로 그의 절대적인 공의 성취하시기 때문이다(Murray).
진리대로 - 이 말에는 심판의 순결성과 외모를 취하지 않으시고 인간의 내면을 감찰하시어 판단하시는(삼상 16:7) 하나님의 절대적인 공의(Calvin, Harrison, Barmby)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우리가 아노라 - 본절에서 부울이 사용한 1인칭 복수 '우리'와 1:5에서의 '우리'는 그 지시하는 바가 각기 다르다. 즉 본절에서는 수신자와 바울 자신을 같은 공동체로 여기고 '우리'라고 하고 있고, 1:5에서는 복음을 전하는 바울 일행을 가리키고 있기 때문에, 거기서는 송신자들을 의미하고 있다.
=====2:3
이런 일을 행하는 자를...행하는 사람아('이런 것들을 행하는 사람들을 비판하면서도 그것들을 행하는, 오 사람!'-권성수) - 바르트(Barth)는 본절을 매우 실존주의적으로 해석한다. 즉 그는 판단하는 일이 어떤 체계나 사상에서 비롯된 것으로 생각하며, 그러한 체계나 사상에서 나오는 선행은 인간적인 것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그에게 있어서 체계적인 사상은 복음의 생동력을 잃게 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그는 이성을 통해 체계적인 사상을 통합하고자 했던 헤겔(Hegel)에 정면 도전한 키에르 케고르(Kierkegaard)의 실존주의적 신앙 노선에 서 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체계적인 사상을 고집하면 복음의 생명력을 상실하게 되는 것은 교회사를 통해서 입증될 수 있다. 그러나 기독교는 논리와 사상의 체계에만 집착해서도 안 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극단적으로 사상의 체계를 부정해서도 안 된다. 전자의 경우는 기독교를 논리의 체계 속에 질식(窒息)시키게 하며, 후자는 신비 주의에로 흐르게 하기 때문이다. 오직 기독교는 복음의 진리를 왜곡시키지 않는 범위에서 체계를 지님과 동시에 복음의 생명력을 지녀야 참 종교로서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다.
네가 하나님의 판단을 피할 줄로 생각하느냐 - 예수의 가르침 중에서도 볼 수 있는 것처럼, 유대인들은 하나님께 재물 바치는 것을 빙자하여 자기 부모를 부양하고 공궤(供饋)할 책임을 회피했다(막 7:11). 이러한 그들의 행위는 종교라는 허울 아래 '하니님'을 이용하여 자신의 명예나 이익을 추구하고 자신의 잘못을 합리화한 행위인 것이다. 이 같은 이들은 겉모습과 말을 그럴 듯 하지만 속마음은 이미 부패해서 회칠한 무덤(23:27, 28)과도 같이 양면성을 갖고 있었다. 이와 같은 사람은 하나님으로부터의 공의로운 심판을 결코 피할 수 없다(고후 5:10). 설령 그 사람이 유대인 중에 유대인이라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정죄적 선언을 피할 수 없다. '피하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크프세'( )는 '사라지다' 또는 '도망가 안전한 곳을 찾다'(행 19:6)라는 뜻이 있고, '에크퓨고'( )의 미래중간태이다. 죄인이 여호와의 낯을 피하여 숨을 수 있는 곳은 어디에도 없다(시 139:8;벧전 3:12).
=====2:4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케 하심을...멸시하느뇨 - '인도하여'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게이'( )는 현재 직설법 3인칭 동사로서, 하나님의 지속적이고 적극적인 행동을 나타낸다. 하나님께서 이방의 우상숭배와 부도덕, 그리고 남을 판단하는 어떤 자들의 교만을 지켜보심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방향을 전환하여 마음과 태도를 바꾸기를 원하시는 것은 하나님 자신의 속성, 곧 '인자하심' 때문이다. 본절에서 '인자하심'은 거듭 사용되어 중요한 사상임을 보여 준다. 본 구절의 '인자하심' ( , 크레스토테토스)은 하반절의 '인자하심'( , 크레스톤)과 의미상 별차이는 없지만 특히 하나님의 선하심을 의미하며(11:22), 보다 포괄적이고 근본적인 뜻을 갖는다. 이는 또한 부모가 자녀를 대하는 것과 같은 성품을 시사한다(마 7:9-11). 그러나 유대인들을 포함한 모든 죄인들은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이용하여 오히려 자기의 의를 자랑할 뿐더러 그의 오래 참으심을 자신들의 안전을 보장하는 수단으로 생각했다. 더 나아가 인생들은 악한 일을 행함에도 속히 징벌을 행하시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너그러움을 이용하여 악을 행하기에 담대하였다(전 8:11). 본절에서 이와 같은 죄인의 태도는 '하나님을 멸시하는'( , 카타프로네이스) 것이라고 지적된다. 유대인의 교만과 이방인의 부도덕은 같은 죄악으로서 하나님을 깔보거나 업신여기는 방자한 행동이며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풍성함을 멸시하는 죄악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죄인들 가운데 나타나서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켰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며 동시에 복된 소식이 아닐 수 없다. 이 복음이 바로 죄인들에게 주어졌다(1:16).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의 풍성함을 - 유대인들은 자기들이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기에 죄를 범할지라도 그 죄에 따라 공의의 심판을 받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든지, 아니면 자기들이 죄를 범해도 하나님께서 즉각적으로 심판을 내리시지 않기에 자기들의 행위가 하나님의 뜻에 별로 어긋나지 않는 것으로 착각했을 수도 있다. 다시 말해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잘못에 대해 하나님께서 심판하지 않는 것으로 여겨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을 무시해 버렸다. 이것은 곧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대해서도 소홀히 여겼다는 말이 된다. 이러한 유대인들의 완악한 심령에 대하여 바울은 '네 고집과 회개치 아니한 마음'(5절)이라고 표현했다. 한편 본절의 '용납하심'( , 아노케)은 잠시 쉬는 것을 의미하며 '자제'(self-restrain)의 개념을 지닌다. 본절에서는 '너그러움'을 뜻하며 구체적으로 '징벌의 지연'을 뜻한다. 또한 '길이 참으심'( , 마크로뒤미아)은 '어떤 충격에도 곧바로 반응하지 않음'을 뜻한다. 이 두 단어는 '인자하심'( , 크레스톤)과 합해져서 심판을 연기하여 회개의 기회를 주시는(벧후 3:15) 하나님의 성품을 시사한다(Harrison).
=====2:5
네 고집과 회개치 아니한 마음 - 인간이 갖고 있는 완고함이나 회개치 않는 마음은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상반된 대조를 보인다. '회개치 아니한'의 헬라어 '아메타노에톤'( )은 하나님의 권고적인 회개를 뜻하는 '메타노이안'( )과 부정접두사 '아'( )의 합성어이다. 이는 하나님의 권고에도 불구하고 개조되거나 변화되지 않는 마음을 뜻하며, 동시에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거부하는 반항적인 의미를 내포한다. 이러한 반항은 빛에 대한 거부로서 온순하고 순종적인 마음을 잊어 버린 완고한 행동이다. 또한 '고집'에 해당되는 헬라어 '스클레로테타'( )는 '완악', '완고' 또는 '잔인'을 뜻하는 '스클레로테스'( )의 목적격으로서 영적으로 경화(硬化)되거나 딱딱하게 굳어버린 상태를 의미한다. 이들 두 단어는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경고와 함께 자주 사용되었으며(신 9:27) 본절에서는 서로 연결되어 서로의 의미를 보다 선명하게 밝혀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죄인은 자기의 고집과 회개치 아니하는 마음으로 인하여 스스로 하나님의 진노를 쌓고 있는 것이다.
그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 - '진노의 날'을 A.D. 70년 예루살렘이 로마의 티투스(Titus) 장군에 의해 포위되어 함락되던 것과 반드시 연관지을 필요는 없다. 1절에서 본절까지의 내용이 하나님을 거역한 유대 민족 전체에 대한 것으로 생각될 수도 있으나, 6절부터는 개인의 행위에 따른 심판이 분명하게 언급되고 있다. 따라서 본절은 민족적인 심판에 대한 언급이라기보다는 개인의 행위에 대하여 보응하는 마지막 심판으로 이해해야 한다(Luther, Calvin, Hendriksen, Harrison). 한편 '그 날'( , 헤 헤메라)은 종말론적인 용어로서 '주의 날'( , 헤 헤메라 퀴리우). 곧 심판의 날을 가리킨다(고전 3:13;살전 5:4). 16절에 언급 된 '사람들의 은밀한 것을 심판하시는 그 날'은 구체적으로 마지막 심판 날을 가리키므로 본절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2:6
그 행한대로 - 심판의 기준이 되는 '행함'은 단순히 겉으로 드러난 행위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생각하는 바까지도 포함한다(시 139:1-4). 본절에서의 '행함'은 특히 인간이 하나님과 어떤 관계를 맺었으며 또한 어떻게 살아왔는가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즉 어떤 사람이 하나님과 관계를 맺지 않은 상태에서 많은 선을 베풀었을지라도 그의 선행이 아무 쓸모없는 것이고, 또 어떤 사람이 하나님과 관련을 맺었으나 그 믿음에 따른 행위가 없으면 그는 구원을 얻을지라도 상급은 없다. 그러므로 본절은 인간이 하나님을 믿느냐 믿지 않느냐에서부터 시작하여 모든 행위에 그 보응을 받게 된다는 의미로 이해되어야 한다.
보응하시되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포도세이'( )는 '아포디도미'( ) 의 미래 직설법으로 좋거나 나쁜 의미의 모든 보상을 뜻한다. 따라서 본 구절에 의하면 믿는 자에게는 선한 상급이 주어지겠지만, 불신자는 그 형ㅁ편에 따라 형벌을 받게 될 것이다(고후 5:10). 그리고 그러한 심판은 누구도 예외가 있을 수 없는 공정한 것이다.
=====2:7
참고 선을 행하여 - 본문을 보면 바울이 6절에서 언급했던 '행위'가 단순히 율법적인 차원의 것만을 의미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참고 선을 행한다'는 것은 성도가 영광의 면류관을 향해 끊임없이 달음박질 해나가는 것(빌 3:12-14)으로 이해되는데 이는 이신 칭의의 가르침과 불가분리의 관계에 있다(마 24:13;골 1:23;히 3:14;계 2:10). 성경에서 말하는 '선'은 율법이 요구하는 것 이상이며 오직 하나님을 믿는 성도만 그 믿음에 따라 하나님과 이웃에게 '선'을 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예수의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와(눅 10:25-37), 포도나무 비유(요 15;1-14)에서 더욱 분명해진다. 성도의 선행이란 예수를 떠나서는 있을 수 없으며 오직 그와 연합된 가운데서 비롯될 수 있다. 즉 그리스도와 연합한 삶이 성령을 따라 사는 것이며(갈 5:16-18;6:8), 그렇게 될 때 성령의 아홉가지 열매 가운데 선이 나온다(갈 5:22, 23). 그리고 이 열매는 낙심하지 않고 참고 인내하며 행할 때 거두게 된다(갈 6:9).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 - 이것들의 본질은 영생이며, 그것들이 나타나는 장소는 하나님의 나라이다. 즉 바울은 하나님의 나라에서 영생을 누리며 사는 성도에게 주어지는 특권을 이 세 가지로 표현했다. 따라서 여기서 언급된 '영광'은 하나님의 속성과 관련되어 나타나는 '영광'과는 다른 것으로서(1:23 주석 참조) 성도가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반사하게 될 때에 나타나게 될 변화를 가리킨다(J. Murray). 그리고 성도가 얻게 될 그 '영광'은 '존귀한 것'이며 결코 '썩지 아니하는 것'이다.
영생으로 하시고 - 영생( , 조엔 아이오니온)은 항상 궁극적인 구원으로 표현되었다. 유대교도 하나님의 말씀이 생명을 준다는 것을 가르쳤으나 그들은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지 않고 율법을 행함으로 생명얻기를 원했다. 그러나 율법을 행하면서 썩어질 육체의 증표(證標)를 구하는 자들에게는 영생이 허락되지 않았다(8:6). 영생은 언제나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만 찾을 수 있으며(6:23) 또한 그를 믿는 자들에게만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이다(요 1:12;3:15). 한편 본절에서 영생은 6절에 기록된 '하나님의 보응'의 목적격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8절의 '노와 분'이라는 말과 대조를 이룬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에게는 심판이라는 개념보다 생명이라는 개념이 더 중요하다. 그리스도께서 죽음으로부터 승리하시고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신 후 그를 따르는 모든 성도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부활과 영생을 소망하며 다시 오실 그리스도의 영광을 바라보는 삶을 보장받고 있기 때문이다.
=====2:8
당을 지어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토이스 여스 에리데이아스'( )는 논란의 여지가 있는 구절이다. 왜냐하면 '에리데이아'( )가 '보수(報酬)에 얽매인 고용인'이라는 뜻을 가진 헬라어 '에리도스'( )에서 파생되었다면, 본절은 '이기적인 욕망이나 야망을 가진 자들에게'라고 번역될 수 있고, '다툼'이나 '논쟁'의 의미를 가진 헬라어 '에리스'( )에서 나왔다면, '논쟁하는 자들에게'로 번역될 수 있기 때문이다. 빌 1:16에서의 '에리데이아'( )는 분명히 '에리스'( )와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빌 2:3에서는 '다툼'이라는 의미보다는 오히려 '이기적인 욕망'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그외 갈 5:20이나 약 3:14 등에서는 두 가지 의미를 동시에 내포하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그리고 본절은 단순히 '당을 지어'로 번역되면 바울이 전달하고자 하는 의미가 분명히 나타나지 않는다. 따라서 이것은 두 가지 의미를 모두 합쳐서 '이기적인 욕망을 따라 논쟁에 가담하는 자들'로 이해하는 편이 좋다. 즉 진리에 대한 명확한 이해가 없어 어떤 분쟁이 일어나면 항상 쉽게 발뺌할 수 있거나 이익이 되는 편에서는 자들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모습은 예수님 당시에 유대인 민중들 사이에서 나타나던 공통된 특징이었다.
진리를 좇지 아니하고 불의를 좇는 자 - 진리와 의는 상호 보충적인 관계로 쓰여진(엡 4;24) 반면 진리와 불의는 상반적인 관계로 쓰여졌다(1:18;고전 13:6;살후 2:12). 진리로 자기들의 생활을 다스리지 않고(1:21) 강퍅하게 회개치 않는 마음으로 자기의 의를 좇는 자는 결국 불의에 순종하는 자로 나타날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진리와 불의의 두 주인을 섬길 수 없기 때문이다. 진리에 대한 불순종은 불의에 순종하는 것이며 또한 붕의에 순종하는 것은 궁극적인 영원한 의를 포기하는 행위이기에 그들에게 주어질 것이라고는 하나님의 분노 외에 아무것도 없다. 그들에게 주어지는 분노는 불신앙에 따른 적극적인 불순종에 대하여 발생하는 것이며, 또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하시려는 궁극적인 구원을 거부하는 것이기에 하나님의 보응은 더욱 가증될 것이다. 바울이 '진리를 좇지 아니하고 불의를 좇는 자'라고 같은 말을 반복한 것도 그들에게 임할 진노의 강도를 보다 명백하게 나타내고자 한 것이라고 할수 있다.
노와 분으로 하시리라 - '노'에 해당하는 헬라어 '뒤모스'( )는 보통 '분노'로 번역되지만 '진노'( , 오르게)와 특별한 구별 없이 사용될 수 있다. 바울이 유사한 의미를 가진 두 단어를 같이 사용한 것은 일종의 중복어법으로 하나님께서 불순종하는 자들에 대하여 무시무시한 진노로 보응하시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2:9
악을 행하는 각 사람의 영에게 - '각 사람의 영'( , 파산 프쉬켄 안드로푸)이라는 표현은 사람의 영혼과 육체 중 '영혼'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바울은 '영'에 해당하는 헬라어 '프쉬케'( )를 '사람'을 의미하는 용어로 사용하기 때문이다(13:1;행 2:41, 43). 또한 전후 문맥상 '사람'으로 이해하는 것이 더욱 타당하다 고데(Godet)의 견해에 따르면 9절과 10절의 구성은 7절과 8절의 대조적 구성을 거꾸로 재배열 시킨 것이라고 했다. 이렇게 볼 때 '각 사람'이라는 말과 '각 사람의 영'이라는 말은 동일한 의미로서 '모든 사람'을 의미한다. 따라서 '악을 행하는 각 사람의 영'이라는 표현 역시 악의 계획을 추진하는 사람들에게 임할 보응의 보편성(6절)을 강조하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악을 행하는 각 사람은 선을 행하는 각 사람과 마찬가지로 그 행한대로 하나님의 판단을 받게 된다.
환난과 곤고가 있으리니 - 8절에 언급된 '노와 분'이 심판자이신 하나님 편에 속한 것이라면 본절의 '환난과 곤고'는 하나님이 발하신 '노와 분'으로 인하여 약한 자에게 내려지는 결과이다. 그리고 이 두 단어는 선을 행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상급인 '영광과 존귀와 평강'과 반대되는 것이기도 하다. 혹자는 '환난'은 외적인 것으로 '곤고'는 내적인 것으로 설명한다(Hendriksen).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며 - 본 구절은 다음 10절에서도 반복된다. 구원이나 은혜와 마찬가지로 심판과 형벌에 있어서도 유대인이 우선적이다. 언약과 약속에 따른 복이 유대인들에게 먼저 주어졌듯이 그 복을 거절한 데에 대한 형벌도 유대인들에게 우선적으로 적용된다. 왜냐하면 우선적인 특권을 부여한 자에게 거기에 상응하는 책임을 묻는 것이 하나님의 법칙이기 때문이다(시 50:3-6;눅 12:47, 48;벧전 4:17). 한편 본절에 언급된 '헬라인'은 모든 이방인을 대표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2:10
영광과 존귀와 평강 - 7절에서도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이 나왔으나 본절에서는 '썩지 아니함' 대신 '평강'이 언급되었다 혹자는 이것을 '하나님과의 화목'(5:1)으로 이해하기도 하며(Black, Murray), 또다른 학자는 보다 넓은 의미로 해석하여 '새 하늘과 새 땅의 모든 축복 속에서 새롭게 변화된 영혼과 육체로 영원히 즐거워하며 충만한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구원'이라고 설명한다(Hendriksen).
어떤 의미이든 바울은 악한 자에게 형벌로 내리시는 '환난과 곤고'(9절)에 대조를 이루는 용어로서 '평강'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그 결과가 상반되는 것을 보여준=====2:11
하나님께서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아니하심이니라 - 본절은 앞 부분(1-10절)과 그 다음에 이어지는 부분(12-29절)을 이어주는 다리의 역할을 하는데, 문자적으로 '하나님께서는 어떠한 불공평도 없으시다', 또는 '하나님께서는 어떠한 편애도 없으시다'를 의미한다. 하나님의 심판은 편파적(偏頗的)인 것이 될 수 없다. 이 사실은 '하나님의의로우신 판단'이라는 (5절) 구절이 이미 증명한 바 있다. 하나님의 판단 기준은 특권이나 지위가 아니라 사람이 행한 일들의 성격이 어떠한 것이냐의 문제이다. '사람을 외모로 취한다'( , 프로소폴렘프시아)는 개념을 히브리적 사고에서 온 것으로서 재판관의 편견이나 편애를 지시하는 의미로 쓰여졌다(삼상 16:7;대하 19:7;욥 34:19). 하나님은 편견이나 편애가 없어서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외형상 유대인에게 우선권을 부여한 사실과 모순을 이루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유대인 역시 그의 행한대로 판단받으며, 오히려 그들에게 있어서는 우선권이 부여된만큼 악행에 대하여 더 큰 환난과 곤고를 당해야 한다. 유대인이기 때문에 편견과 편애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것도 아니며 또한 특권을 주장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라도 그분의 선하신 뜻에 대하여 이의를 제기하지 못한다(마 20:15). 오직 공의로우신 그분만이 판단받는 자들의 다양한 입장을 고려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로 있다.
=====2:12
본절에서 바울이 이야기하고자 하는 요지는 율법을 받지 못한 이방인이든지 율법을 받은 유대인이든지 누구나 자신들의 죄로 인해 심판을 받을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방인이나 유대인이나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 뜻에 순복했느냐 하지 않았느냐 하는 문제이다.
율법 없이 범죄한 자는 - '율법 없이'( , 아노모스)라는 말은 부사로서 신약성경에서는 여기서만 사용되었다. '율법 없이'( , 아노모스)의 명사형 '아노미아'( )나 형용사형 '아노모스'( )는 대개 '불법'이나 '범법'을 의미한다. 그러나 본절의 경우에는 '율법을 가지고 있지 않은' 상태를 말한다(고전 9:21). 즉 '아노모스'는 14절의 '타 메노몬 에콘타'( , '율법을 갖지 아니한')와 같은 의미로 해석되어야 하는 바, 계약을 맺어 율법의 기준에 따라 살기로 약속한 일이 없는 자들, 곧 씌어진 율법을 받지 않은 이방인들로 이해되어야 한다(행 2:23).
율법 없이 망하고...율법으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으리라 - 바울은 율법 없이 범죄한 자들은 '망한다'( , 아폴룬타이)라고 서술하고 율법 아래서 범죄한 자들은 '심판을 받으리라'( , 크리데손타이)고 서술한다. 이 두 단어는 모두 수동태로서 하나님의 능동적인 보응이 있을 것을 시사한다. 율법을 받지 아니한 이방인들은 우주 만물과 양심에 나타내신 하나님의 뜻에 순복하지 않음으로 인하여 파멸된 것이며(1:20), 율법을 받은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뜻을 잘 알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순종하지 않았으므로 율법의 기준에 따라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특별히 유대인들이 '율법으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게 된다는 주장은 매우 중요한 사상이다. 바울은 율법을 자랑거리로 여기지 아니하고 죄인들을 정죄하거나 규제하는 수단에 불과한 것으로 정의하였다. 그러나 율법은 심판의 기준이 되는 것이고, 율법 자체가 멸망하게 하는 것이 아니다. 율법 아래서 범죄한 자들은 이 율법을 기준으로 심판받아 멸망에 이르게 될 것이다(J.
Murray)
=====2:13
율법을 - 12절에서와 마찬가지로 '율법'( , 노모스)은 관사가 없이 사용되었다. 공인 본문(Textus Receptus, Majority Text)에는 정관사 '투'( )가 '노무'( , '율법의')앞에 있는데, 대부분의 고대 사본( , A. B)에는 이 관사가 생략되어 있다. 그런데 '노모스'( , '율법')에 관사가 붙고 안 붙고에 따라 약간의 의미상 차이가 있다. (1) '노모스' 앞에 정관사 '호'( )가 붙으면, 거의 대부분 모세 율법을 의미한다. (2) '노모스' 앞에 관사가 붙어 있지 않으면 대부분의 경우 모세의 율법이나 율법의 특정한 조문(條文)을 의미하기 보다는 보다 포괄적인 의미로서 추상적인 법 개념을 의미한다. 즉 인간의 양심 속에 주어진 법이나, 자연적 계시 속에 나타난 법이나 어떤 순종을 요구하는 일반적인 개념의 법을 가리킨다. (3) 특수한 경우로서 관사가 생략되어 있으나 모세 율법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해야 하는 경우이다. 이는 헬라어 문법상 이미 알려진 어떤 확실한 개념을 보다 선명하게 나타내거나 그 단어의 본래적 개념을 강조하고나 할 때 관사를 생략하는 용법으로서 율법의 특수한 의미를 강조하고자 하는 의도로 쓰인 경우가 있다. 만약 본절을 관사없는 사본을 따라 해석한다 하더라도 '율법'은 12절의 '율법'과 같은 것으로서 모세의 율법을 뜻하는 특수한 경우로 해석해야 할 것이다(J. Murray).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 유대인들은 율법을 받았을 뿐 아니라 익히 배우고 들어서 잘 알게 되었다. 이것은 그들의 자랑거리다. 그렇지만 이 지식은 그들을 심판에서 제외시킬 수 있는 힘이 될 수 없다. 율법을 들었으면 행해야하기 때문이다. 성경은 율법이 의의 법칙일지라도 그것을 행하는 사람만이 그것으로 인해 살리라고 가르친다(레 18:5;신 4:1). 그러나 본절은 행함으로 의롭게 되는 원리를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범죄할 수밖에 없는 죄인(3:23)이라는 사실을 부각시키기 위해 이 논리를 전개하고 있을 뿐이다.
의롭다 하심을 얻으리니 - 본서에서 '의롭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디카이오데손타이'( )가 처음으로 등장하고 있다. 유대인들은 단지 자신들이 율법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의롭게 되리라고 생각했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문제가 달랐다(J. Murray). 글자 그대로 보면 '의롭게 된다'는 것이 율법을 행하는 자에게 해당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보다 근본적인 기준과 목적은 '하나님 앞에서'라는 말 속에서 찾을 수 있다. 바울은 행함으로 의롭게 된다는 것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편에서 보시는 판단에 의하여 칭의가 결정된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2:14
이방인이 본성으로 - 율법이 요구하는 바를 본성(nature)을 따라 부분적으로 행할 수 있을지 모르나 완전히 행할 수는 없으므로 이방인 역시 죄인일 수밖에 없다. 간혹 이방인도 율법의 행위를 수행하면 구원에 이를 수 있다는 논리를 펴는 자들이 있으니 이들은 바울이 전개하는 논리의 흐름을 전혀 파악하지 못한 자들이다. 비록 본절이나 앞절(13절)에서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을 만족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긍정적으로 표현하였지만 계속되는 바울의 논리는 어느 누구도 율법의 요구대로 완전히 순종할 수 없기에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가르쳐 준다(3:9, 19). 무엇보다도 본절은 율법을 받았다고 자랑하는 유대인들에게 율법을 받은 것 자체가 아무런 의미도 없음을 보여 주고 있으며, 이방인들도 양심의 법칙을 따라 율법이 요구하는 바 행위를 할 때가 있음을 가르침으로써 유대인들이 저지르는 어리석음을 경고하고 있다.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나니 - 인간은 그 본성에 심어진 양심과 생각 때문에 스스로 하나님의 율법에 직면하게 된다(J. Murray). 즉 인간들의 본성 속에 존재하는 도덕적 성향은 하나님의 일반적 계시에 의하여 생긴 것으로서 명령하거나 금지하는 양심의 소리를 수반한다(Murray). 이방인들은 유대인의 율법과 동일하지는 않지만, 그들은 본래적인 양심의 법을 따라 일반 계시의 도움을 받아서 하나님의 계시를 유비적(類比的)으로 받는다. 그러나 그들의 율법은 궁극적인 구원을 보장하지 않는다. 이방인이 갖는 양심의 법은 간혹 모세 율법과 비슷한 법과 규례를 가질 수 있으나, 율법의 궁극적인 의미에는 전혀 도달할 수 없다.
=====2:15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 '양심'에 해당하는 헬라어 '쉬네이데시스'( )는 문자적으로 '함께 안다'라는 의미로서 본절에서는 '함께 증거하다'라는 의미를 가진 '쉼마르튀루세스'( )와 함께 쓰여 사람의 마음속에서 연대적으로 증거하므로 율법처럼 증인으로서 그 역할을 감당한다는 뜻으로 쓰여졌다. 양심은 인간이 마음속에서 자신의 행동을 살피면서 때로는 자신을 정죄하기도 하며, 율법과 일치한 행동에 대하여는 스스로 선한 증거로 인정하기도 하는 인간의 '바른 인식의 주체'인 것이다(고전 8:7-12). 칼빈(Calvin)은 양심을 정의하면서 '합리적인 행위에 대하여서는 변호하며 악한 행실에 대하여서는 고발하고 유죄 선고를 내리기도 하는 것'이라고 정의하였다. 이러한 양심은 타락한 인간의 마음속에 남아 있는 도덕적 성품을 보여준다(고호 4:2). 그러나 양심에 화인 맞은 자들은 계속해서 죄 가운데 자신을 방치하여 스스로 속이기도 하고 속기도 하는 거짓 속에서 멸망으로 나아간다(갈 6:3;딤전 4:2;딛 1:15).
송사하며 혹은 변명하여 - 이것은 인간의 마음속에 일어나는 여러가지 생각이 갈등 상태에 놓여 있음을 보여 준다. 즉 사람이 어떤 잘못을 범했을 때 그 행위가 잘못된 것이라는 생각이 들면 한쪽에서는 그것을 합리화시키려는 생각이 일어난다. 이러한 갈등이 반복되는 상태가 모든 사람의 내부에 존재한다. 이것이 곧 인간의 양심에 새겨져 있는 율법적인 요소인 것이다.
율법의 행위 - 율법에 따르는 행위로 해석되기 보다는 율법적인 요소가 인간의 양심 가운데 활동하며 그것이 행위로 나타나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이 어떤 행위를 통해 양심의 갈등을 느낀 후에 이전보다 나은 행동을 하게 되는 것이 '율법의 행위'라고 할 수 있다.
====2:16
내 복음에 이른 바와 같이 - 본 구절은 문자적으로 '내 복음을 따라'( , 카타 토 유앙겔리온 무)로 번역될 수 있다. 이 말은 바울 자신이 전파한 복음을 근거로 하나님의 심판에 대하여 이야기한다는 의미이다. 여기서 바울은 '내 복음'이란 표현을 취했는데, 이것은 협소한 의미로 사용되어 '이신 칭의'의 교리에 대한 것이 아니라 바울이 전파한 모든 내용을 가리킨다. 초대 교육 교부들은 이것을 '누가복음'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했으나(Origen, Jerome)여기서는 바울의 전파 내용 중 종말론적인 설교를 지칭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편이 타당하다. 왜냐하면 바울이 본절에서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편 바울은 '내 복음'이란 표현을 사용함으로써 '복음'의 출처가 자기 자신인 것처럼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이는 바울의 사도적 권위와 깊이 연관되는 표현으로 바울 자신이 예수께로부터 사도로 세우심을 받아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한다는 인식을 드러내 주며 자기가 그 복음을 위해 택정함을 받게 되었다는 사실을 명백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바울은 이러한 부르심에 대해 전인격적으로 반응한다는 뜻에서 복음을 자신의 것으로 소개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 이 용어가 원문에서는 '내 복음에 이른 바와 같이'라는 구절 뒤에 따라 나오지만, 굳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주어진 복음과 연결지을 핑요는 없다(Calvin). 오히려 본 구절은 하나님의 심판이 하나님의 단독 사역이 아니라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어지고 있음을 나타내고자(요 5:27;행 17:31)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복음이 성취되어 인간들에게 주어졌듯이 그 복음으로 인한 심판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실행되는 것이 정당한 절차일 것이다. 예수께서도 심판날 왕권을 가지고 오실 것을 말슴하셨다(마 16:28).
사람들의 은밀한 것을 심판하시는 - 심판날에는 감추인 것이 하나도 남김없이 모두 드러나게 된다(고전 4:5). 예수께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외식을 신랄하게 비판하신 것도 어떤면에서는 마지막 날에 있을 심판에 대한 본보기라고 할 수 있다. 사람들 앞에서는 선하게 행동하고 선한 말을 했을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중심을 보시기에외식하는 자들의 마음과 생각을 심판날에 남김없이 드러내실 것이다(마 12:36, 37).
그날이라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엔 헤메라'( )는 문장 맨 앞에 위치하여 강조적으로 사용되었다. 바티칸 사본(B;codex Vaticanus)에서는 정관사 '헤'( )가 표기되어 있는데 문법상으로는 맞는 듯하다. 그러나 이처럼 정관사를 생략하는 것은 바울의 서술 방법 중 하나이다(12절). 더욱이 5절에서 '그날'에 대해 언급하면서 정관사를 사용했기 때문에 굳이 이를 사용하지 않아도 의미가 통하고 본절에서는 내용 자체가 마지막 심판 날을 명백히 보여주고 있으므로 생략한 것 같다.
=====2:17
개역 성경에는 번역되어 있지 않으나 본절 첫머리에 '이데'( , '보라'), 혹은 '에이 데'( , '그러나 만약')가 있다. 흠정역(KJV)이 번역한 공인 본문(Textus Receptus)은 전자를 취하지만, 대부분의 사본들과 비교적 오래된 사본들( , A, B, D, K, )은 후자를 취하였다. '에이 데'는 직설법과 함께 사용되어 실제로 발생될 수 있는 상태를 가정하는 조건절을 갖는다. 따라서 본절의 '에이'( , '만약')는 20절까지 조건문으로 취한다.
유대인이라 칭하는 네가 - '칭하는'의 헬라어 '에포노마제'( )는 '이름을 붙이다' 또는 '칭함을 받다'라는 뜻을 가진 '에포노마조'( )의 현재 조건문으로 그 의미는 '유대인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는 것이다. 여기서 '유대인'( , 유다이오스)은 '히브리인'( , 헤브라이오스)이나 '이스라엘인'( , 이스라엘리터스)이라는 용어와 구별된다. 히브리인이라는 호칭은 언어 군(群)의 개념을 강조하고 있고, 이스라엘인이라는 호칭은 구속사적인 개념을 강조하는데, 유대인이라는 호칭은 헬라인이나 이방인들과 상대되는 개념으로서 모세 율법을 중심으로 형성된 종교 공동체로서의 특성을 반영한다.
율법을 의지하며 하나님을 자랑하며 - 유대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율법을 부여받은 특권을 누리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 특권을 자랑할 뿐 아니라 그 특권을 받지 못한 이방인들을 경멸하기도 했다. 이러한 우월감이 하나님께 감사하며 순종함으로 나타났으면 하나님께 칭찬을 받을 수 있었을지도 모르나, 그들은 특권만을 중요하게 여기며 그에 따르는 책임을 무시했다. 그들은 제사장 나라에 걸맞는 거룩한 백성으로서의(출 19:6) 특권을 유지하려면 '언약을 지켜야 할'(출 19:5) 책임이 있음을 무시했다. 그들은 율법을 의지하고 하나님을 자랑한다고 내세웠으나 실상은 율법의 요구에 순종하지 않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 못하면서 그들이 부여받은 특권만을 자랑스럽게 여겼던 것이다. 이러한 유대인들의 모습은 세례 요한의 책망에서 분명하게 나타난다(마 3:9).
=====2:18
본절에서는 유대인들이 율법을 통해서 얻게 된 유익이 언급되어 있다.
하나님의 뜻을 알고 - 인간을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는 길은 하나님께서 친히 계시해 주셔야만 가능하다. 하나님께서는 유대인들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을 통해서 여러 모양으로 계시하셨기에 유대인들은 이방인들과 달리 하나님의 뜻을 아는 백성이 되었다. '하나님의 뜻'은 구체적으로 '구원 계시'를 가리키지만 좀더 폭넓게 하나님의 섭리까지도 포괄할 수 있는 용어이다. 성도는 하나님의 구원 계시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를 통한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 계시된 성경을 읽고 기도하는 생활이 요청된다.
지극히 선한 것을 좋게 여기며 - 본 구절에 대해서는 해석자들마다 약간씩 견해가 다르다. 예를 들어 틴델(Tyndale)은 '선악에 대한 경험을 가지는 것'으로 해석하며, 모펫(Moffat)은 '종교에 있어서 생동력있는 것에 대한 의식을 가지는 것'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또한 영역 성경중에서 이 구절을 '도덕적인 구분에 대한 지식을 가지는 것'으로 번역하기도 한다(NEB). 이러한 해석상의 어려움을 피하기 위해 칼빈(Calvin)은 선한 것을 받아들이는 것과 선악을 구별하는 것을 동시에 인정한다. 이러한 해석은 메튜 헨리(Mattew Henry)같은 주석가도 동의한다. 그렇지만 본문이 뜻하는 바는 칼빈의 첫번째 견해에 더 접근해 있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본절은 유대인들이 단순히 선악간에 판단한다기 보다는 율법의 선한 교훈을 인정하고 있음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이 율법을 통해 선한 것을 인정한다는 사실은 그 선을 옳은 원리로 받아들였다는 의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은 믿음으로 율법에 따르는 선한 삶을 살지 않은 어리석음을 저질렀다. 이러한 어리석음은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한'(1:21) 이방인들의 어리석음과 동일하다.
=====2:19
율법에 있는 지식과 진리의 규모를 가진 자로서 - 본절에 해당하는 헬라어 본문을 부산 구문의 형식으로, 직역하면 '율법에 있는 지식과 진리의 모양을 가지고서'가 된다. 이에 대해 칼빈(Calvin)은 이유를 나타내는 분사 구문으로 이해하여 '지식과 진리의 모양을 가지고 있으므로'라고 해석했다. 그리고 영역 성경 중에서도 이 구절을 이유를 나타내는 접속사(because)를 사용하여 번역했다(NIV). 이러한 해석은 본문의 흐름상 적합하다고 본다. 한편 '지식'과 '진리'는 특별한 의미상의 구별 없이 중복어법으로 사용된 것으로 보아도 무방한다(Black). 그리고 '규모'에 해당하는 헬라어 '모르포시스'( )는 '모양'이나 '외모'를 뜻하지만 외적인 모양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참된 표현'을 의미하기도 한다(Barmby). 그래서 혹자는 '모르포시스'를 '본질'( , 휘포스타시스)과 같은 의미로 해석하기도 했다(Black). 간혹 학자들 중에는 '모르포시스'를 유대인들의 '외식'과 같이 '과장된 외형'(Calvin)이나 '경건이 없는 겉 모양'(Matthew Henry)으로 이해하기도 하나 이러한 해석은 본문의 성격상 적합하지 않다. 본문에서는 유대인이 율법을 통해 가진 지식이나 진리가 거짓되다든지 알맹이가 없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유대인들이 율법을 통한 참된 지식의 본질을 소유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Murray, Barmby) 그 지식을 좇지 않고 자기 임의대로 행하는 것을 책망하는데 그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소경의 길을 인도하는 자요 어두움에 있는 자의 빛 - 성경에서 소경과 어두움에 있는 자는 동일한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영적으로나 도덕적으로 눈이 먼 상태에 있다는 것은 어둠 가운데서 헤매이는 것과 조금도 다를 바 없다(사 42:19;56:10;마 6:23;요 1:5;고후 4:4;요일 2:11). 여기서도 바울은 역시 중복어법을 사용하여 자신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의 내용을 강조하고 있다. 한편 '어두움에 있는 자들의 빛'이라는 표현은 이방인을 향한 유대인들의 사명을 시사한다. 유대인들은 토라를 자기의 등불이라고 생각한 것처럼 토라를 소유한 자신들이 이방인들에게 등불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이 사명마저도 자신들의 특권을 자랑하는 도구로 삼고 말았다. 오늘날 성도들도 '주의 말씀은 내발에 등'이라고(시 169:105) 고백하면서 빛된 삶을 살지 못한다면 유대인들처럼 말씀을 가졌다는 것만으로 자랑하려 하는 잘못을 범하는 것이다.
=====2:20
어리석은 자의 훈도요 어린아이의 선생 - 영적으로 '이리석은 자'와 '어린아이'는 동일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어린아이'가 영적인 의미에서 상징하는 바가 '연약한 존재'(고전 14:20;엡 4:14) 또는 '어리석은 존재'(잠 22:15)로 나타난 점으로 미루어 보아 본 구절도 앞절과 마찬가지로 중복어법에 의한 강조적인 형식을 취하고 있다. 한편 '훈도'란 용어는 헬라어 '파이듀테스'( )로 보통 '선생'으로 번역되는 헬라어 '디다스칼로스'( )와 동일한 의미를 지니지만, 좁은 의미에서 '파이듀테스'는 잘못을 범할 때 채찍질도 가하는 '엄한 선생'을 가리킨다.
스스로 믿으니 -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결정적인 잘못은 특권을 부여받은 자들이라는 자기 만족에 빠져 있었다는 사실이다. 부울은 갈라디아서에서도 유사한 표현을 사용하고 있는데(갈 6:3, 4) 본절과 같이 행함 없는 자랑을 위선이라고 폭로하고 있다.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이 갖지 못한 특권을 가지고 있었지만 오히려 그 특권을 가지고 있었지만 오히려 그 특권으로 말미암아 더 큰 행악에 빠지게 된 것이다. 그들은 자기의 신념을 신뢰하였을 뿐만 아니라 부패한 인간의 도덕적 무능력에 지나친 기대를 가짐으로 인하여 아무것도 아닌 초라한 가운데서 자신을 속이는 잘못을 범하였다. 또한 율법주의자들은 그 이웃들에게 자신도 질 수 없는 무거운 짐들을 지우는 반율법적인 잘못을 범하였으며 더 나아가 그들의 신념은 자신을 속였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만홀히 여기는 결과를 초래함으로 인하여 스스로 하나님의 징계를 초래하고 말았다.
=====2:21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네가 네 자신을 가르치지 아니하느냐 - 이 질문은 유대인들의 형식적인 삶에 대하여 다음에 계속되는 네 가지 질문을 유도하기 위한 대표적인 의문문이다. 그리고 이 질문은 유대 랍비들의 문헌에서 자주 발견되고 있다(Hendriksen). 유대교 지도자들은 자신들만이 율법에 대한 정확한 지식을 가지고 있으며 진리를 알고 있다고 자부했고(요 9:34), 이 점은 주님께서도 인정해 주신 바 있다(ak 23:3). 그들에게 있어서 문제는 자기들이 가르치는 바를 자신들은 지키지 않으면서 의로운 체 하는 그들의 외식이었다(마 23:23-28). 이러한 의미에서 유대교 지도자들은 여호와 신앙을 형식적인 종교로 전락시킨 책임을 면할 수 없다. 그들은 입술로는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행동으로는 하나님께 순복하는 것처럼 나타내 보이지만, 실상 그들의 심령은 전혀 하나님과 무관하며 단순히 형식적이고 외면적인 종교 지도자에 불과했다.
=====2:22
간음하지 말라 말하는 네가 간음하느냐 - '간음'에 해당하는 헬라어 '모이큐오'( )는 히브리적 표현에서 '영적 간음'이나 '우상 숭배'를 뜻하는 말로 사용되기도 하였으나(계 2:22) 본절에서는 우상 숭배를 따로 언급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영적 간음'이라는 의미로 사용된 것은 아닌 것 같다. 오히려 바울은 의도적이며 구체적인 사실을 선명하게 표현하면서 그들 가운데서 실제로 행해지고 있는 온갖 음행과 간통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율법주의자들은 가장 엄격한 율법을 종교의 원리로 삼고 있었지만, 그들의 도덕적 기준은 여전히 부패한 인간 본성의 심연에 머물러 있었다.
우상을 가증히 여기는 네가 신사 물건을 도적질하느냐 - 앞에서 언급된 '도적질'과 '간음'이란 용어를 비추어 볼 때 바울은 십계명을 염두에 두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유대인은 십계명에 따라 우상을 가증스럽게 여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이나 우상을 위해 만들어진 것을 탐내어 도적질했다. 신사(神社) 물건을 도적질 한 것이 악행인가에 대해서 성경이 명백히 가르치고 있느냐 그렇지 않느냐를 따지는 것은 매우 어리석은 일이다. 본절에서 바울은 그러한 행위가 죄인지 죄가 아닌지에 대해서 논하고자 이 질문을 내놓은 것이 아니라 가증스러이 여기는 우상 제물을 탐낸, 우상 숭배 이상의 죄악을 폭로하고자 한 것이다. 그리고 신명기에서는 이 문제를 암시적으로보여주면서 그 행위가 죄가 된다고 교훈하고 있다. 즉 신명기는 우상들에 입힌 은이나 금을 탐내어 취하지 말라는 말씀과 함께 그 금지의 이유로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일로 인해 올무에 빠질 것이 염려되기 때문인 것을 들고 있다(신 7:25).
=====2:23
학자들 사이에는 본절을 의문문으로 해석하느냐 평서문으로 해석하느냐에 대한 의견이 분분하다. 평서문을 주장하는 학자들(Cranfield)은 24절에서 헬라어 원문상 24절에 이유를 나타내는 접속사 '가르'( )가 사용되고 있으므로 본절은 그 접속사를 유도할 만한 이유를 묻는 의문문이 되든지 아니면 그 이유를 유도해 내는 평서문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본절은 이유를 묻는 의문문의 성격을 띠지 않았으므로 이유를 유도해 내거나 확정을 나타내는 평서문이 되어야 한다고 한다. 그러나 반드시 그렇게 생각할 근거는 본문 가운데서 발견할 수 없다. 오히려 24절의 접속사 '가르'( )는 21절에서 23절까지에 언급된 다섯 가지 질문을 하게 된 근거를 설명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그리고 본절은 내용상 앞에서 언급된 네 가지 질문의 형식과 잘 부합될 뿐 아니라 특히 21절에 언급된 첫번째 질문을 보다 구체화시켜 대비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러면서 그 나머지 세 가지 질문을 요약한 질문도 된다. 따라서 본절은 의문문으로 해석하는 편이 본문 이해에 더욱 도움이 된다.
율법을 범함으로 - 이말은 유대인들이 범한 잘못들(22, 23절)이 곧 율법을 범한 행위임을 지적하고 있다. 그리고 21절에서 '네 자신을 가르치지 아니하느냐 ?'는 질문의 내용이 율법을 범하고 있는 사실에 대한 것임도 본절에 잘 나타나고 있다.
=====2:24
기록된 바와 같이 - 이 표현은 본절이 사 52:5의 인용구임을 시사해 준다. 이렇게 함으로써 바울은 이사야 선지자의 권위를 내세우는 동시에 자신의 논리를 더욱 확고히 정당화시킬 수 있게 되었다. 비록 바울이 이사야 선지자의 직접적인 선포를 간접적인 내용으로 변형시켰으나 내용상으로는 동일한 의미를 유지하고 있다.
하나님의 이름이 너희로 인하여 이방인 중에서 모독을 받는도다 - 당시 이방인들은 유대인들을 마치 하나님과 동일한 인격을 소유한 거룩한 백성인 양 취급했다. 그것은 실제로 그들의 삶이 고상했기 때문이라기보다는 그들의 지나친 자랑에 이방인들이 속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방인들이 바울이 고발한 것과 같은 유대인의 범죄함을 발견한다면 유대인들은 스스로 하나님을 모독하는 도구가 되고 말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는 자들이 오히려 하나님의 신성을 모독하는 자들임을 바울은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J. Murray).
=====2:25
네가 율법을 행한즉 할례가 유익하나 - 바울은 유대인들의 가장 큰 자랑거리인 율법과 함께 또 다른 자랑거리인 할례의 문제로 주의를 환기시키면서 자신이 의도한 복음의 본질에 한 걸음 더 접근하고 있다. 유대인을 이방인과 구별시키는 유일한 기준은 율법이지만 표식은 할례이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지금까지 유대인들에게 율법을 들어 논리를 전개해 왔지만, 이제는 아브라함의 자손으로서의 자랑거리요 표식인 할례 문제를 거론함으로써 더욱더 유대인들이 변명할 수 없도록 만들고 있다. 여기서 '율법을 행한다'는 것은 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뜻을 좇는 것으로 이해해도 무방하다. 하나님의 편에 서 있을 때 유대인들의 할례가 그진가를 발휘할 수 있는 것이지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형식적인 할례 의식에 그치며 이는 그들을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계속 유지시킬 수 있는 신적인 힘을 상실케 하고 만다. 그래서 세례 요한이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에게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지 말라...하나님이 능히 이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마 3:9)고 경고했던 것이다.
네 할 례가 무할례가 되었느니라 - 유대인들은 할례 자체가 의의 조건,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조건, 구원의 조건이 되는 것으로 오해했다. 실제로 유대교의 전승에 따르면 '게헨나(지옥) 문 옆에 앉았을지라도 할례받은 사람은 아무도 지옥에 떨어지지 않도록 아브라함이 책임을 져 준다'는 내용의 교훈이 있다(Harrison). 이와 같이 유대인들 사이에서는 할 례가 다른 어떤 의식보다도 가장 중요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이 형식적인 유대인들의 할례는 무할례와 같다고 선포한 것은 혁명적인 선언이었다. 이러한 바울의 선포로 인해 유대인의 자랑은 쓸모없는 것으로 변하게 되며 형식적인 신앙에서 실제적인 신앙으로의 결단이 요구되고 있다.
앞장에서 바울은 본서의 핵심인 복음과 구원, 그리고 하나님의 의(義)에 관한 대주
제를 내걸고 장황한 논증을 시작하였다. 먼저 그는 죄의 문제를 논하였거니와 앞장에
서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이방인의 죄를 적나라하게 폭로하였고 이어 본장에서는 선
민(選民) 유대인의 죄를 다루고 있다. 즉 하나님께로부터 율법을 받은 유대인들은 그
특권에도 불구하고 형식적 율법주의의 오류를 범하였음으로 여지없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야 한다는 신랄한 비판이 가해지고 있다. 본장의 내용에 들어가기 전에 염두에 두
어야 할 사항은 다음과 같다.
(1) 문맥상의 유의점. 바울의 기독교 강론은 앞장에서 이미 시작되었거니와 바울은
먼저 인간의 죄 문제를 다루었다. 인간에세 왜 복음이 필요한가를 설명함에 있어서 하
나님을 떠난 인간의 죄악된 상황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그는 복음이야말
로 인간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정의하였던 바,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온전
한 존재라면 구원이라는 말은 필요 없을 것이다. 이에 바울은 구원의 당위성을 설파
(說破)하기 위해 인간의 죄를 집중적으로 파헤쳐 고발하였고 이로써 독자들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서 죄인된 자신의 정체를 깨닫게 하고자 하였다.
앞장에서 바울은 이방인의 참람한 죄악상을 폭로하였거니와(1:18-32) 본장에서는 유
대인의 죄악상을 낱낱이 폭로하고 있으며 이는 다음 장까지 계속된다(1절-3:8). 바울
은 본장에서 율법 없는 이방인도 죄인이고 하나님께로부터 율법을 받은 유대인도 똑같
이 죄인임을 증명하므로 모든 인간은 죄인이고 하나님께로부터 율법을 받은 유대인도
똑같이 죄인임을 증명하므로 모든 인간은 죄인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3:9-20). 인
간은 누구나 다 죄인으로서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다는 것이 바울의 인간 이해의 출발
점이다. 이렇듯 바울은 로마교회에 자신의 기독교 신앙 체계를 알리고자 함에 있어서
죄론(罪論)으로부터 시작하고 있으니 이는 앞장 18절에서 다음 장 20절까지 계속되고
있다. 그 뒤부터는 바울의 구원론이 펼쳐지게 될 것이다.
(2) 내용과 구조 및 문체상의 특징. 본장은 내용과 구조면에서 앞장 후반부
(1:18-32)와 병행을 이룬다. 내용상의 공통점은 하나님의 관점에서 본 인간의 부당성
이다. 다른 점이 있다면 단지 앞장에서는 이방인의 죄성(罪性)에 초점을 두었으며 본
장에서는 타락한 유대인들에게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는 것이다. 이 두 부분에서는 각
각 이방인과 유대인의 죄에 대한 일반적인 묘사가 이루어지고 있으며 뒤따라 매우 구
체적인 죄목들이 열거되고 있다(1:16, 17-29;1:18-23, 16-32).
한편 바울은 본장을 기록함에 있어서 특수한 문체를 사용하고 있다. 그것은 소위
'디아트리베'(* , '가정')라고 하는 문체로서 당시 고대인(古代人)들이 자주
사용하던 문체였다. 즉 가상적인 비판자를 설정해 두고 그로부터 나올 듯한 질문이나
반론에 대답하는 방식이다. 본장에서 바울은 누군가를 향해서 계속 그의 죄를 고발하
고 있거니와 처음에는 그 대상이 누구인지 전혀 암시를 주지 않지만, 차츰 그 대상이
유대인들이라는 사실이 명백히 드러나고 있다. 이로써 앞장에서 바울의 설교를 열심히
듣고 있던 상상의 인물 또한 바로 유대인들이었음이 밝혀진다. 바울은 본장에서 유대
인의 죄를 지적하기 위하여 먼저 이방인의 죄를 언급하였던 것이다. 바울은 동족에 대
한 애착을 가지고 유대인의 민족적인 속성(屬性)을 잘 지적하면서 무엇보다도 그들이
하나님께 돌아오도록 호소하고 있는 것이다.
바울은 유대인들을 향한 논증(論證)을 전개함에 있어서 호칭과 물음 등의 생생한 대
화체의 논술 방법을 사용하고 있다(1, 3, 4, 21절). 또한 바울은 본장에서 법적인 용
어들을 사용하고 있는 바(5, 12, 15, 16절), 이는 앞장(1:18-32)과는 달리 묵시 문학
적 종말 사상과 결합되어 나타난다. 즉 세상 역사의 마지막 날에 하나님께서 각사람의
행한대로 심판하신다는 선언이다. 바울은 본장을 통하여 단순히 유대인들을 향한 엄한
책망에 머물지 않고 나아가 유대인의 회개를 강렬하게 호소하고 있으니 그의 동족(同
族)에 대한 복음 전도의 열정을 발견할 수 있으며 또한 기독교 신앙을 체계화 시키는
데 있어서 탁월한 그의 수사학적(修辭學的) 재능을 엿볼 수 있다 하겠다.
(3) 본장의 강조점. 본장의 논증을 통하여 바울이 강조하고 있는 것은 모든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동일하게 죄인이라는 사실이다. 즉 하나님 없는 이방인이나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라고 자부하는 유대인이나 똑같은 심판의 대상이 된다는 것이다. 바울은
하나님의 심판은 공정하여 대상의 여하를 막론하고 행위대로 판단하신다는 사실을 강
조하면서 율법과 할례의 의미를 새롭게 계시하고 있다.
유대인들은 남달리 하나님의 말씀을 위탁받고 할례까지 받은 자들이었으나 그로 인
하여 하나님의 뜻과 진리는 더 잘 이해하고 행하기는 커녕 오히려 이방인들과 마찬가
지로 불의를 행하였다. 이방인의 사악한 세계를 심판하는 경건한 유대인들조차 허구로
가득하였으며 율법과 할례에 대한 그들의 자부심과 우월의식 또한 허구와 어리석음에
서 벗어날 수 없었다.
이처럼 외형에 치중하는 표면적 유대인이 아니라 오직 이면적(裏面的) 유대인이 유
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 것이라는 바울의 선언(19절)은 본장의 핵심을 잘 나타내
준다. 인간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지 않을 때에는 율법이나 할례가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이다. 복음의 관점에서 평가할 때 당시의 유대인들은 이방인들과 마찬가지로 하나님
의 심판을 받아 마땅한 존재들이었다. 이로써 바울은 하나님 앞에서 모든 인간은 심판
받아야 할 죄인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바울의 사상은 당시 민족주
의(民族主義) 감정이 고조되어가고 있던 유대인들의 극심한 반대와 핍박에 부딪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동족 유대인을 향한 바울의 뜨거운 열정은 그들의 온갖 환난
과 박해에도 불구하고 진리를 선포하고 회개를 촉구하게 하였다.
한편 본장의 내용은 네 부분으로 나뉜다. 첫째 문단은 기본 명제로서 심판자이신 하
나님 앞에서 인간의 외모(外貌)는 중요하지 않음을 강조하였고(1-11절), 둘째 문단에
서는 율법을 소유하고 있는 것에 근거하여 의롭게 될 수 있다는 유대인의 생각을 부인
하며(12-16절), 셋째 문단에서는 유대인들으 율법 위반, 즉 죄악상을 폭로하고 있으며
(17-24절), 마지막 문잔에서는 할례의 특권을 박탈함과 동시에 그 의미를 새롭게 부여
하고 있다(25-29절).
1. 하나님의 공명 정대하심(2:1-11)
본문은 인간은 누구나 하나님의 진리의 척도(尺度)에 의하여 심판을 받는다는 사실
을 표명하고 있다. 앞장에서 이방인을 신랄하게 고발한 내용을 듣고 공감하던 유대인
들을 향하여 바울은 그들이 범한 판단의 오류를 지적하고 있으며 그들 역시 하나님의
공명 정대(公明正大)하신 심판을 피할 수 없음을 일깨워 주고 있다. 하나님은 결코 외
모로 사람을 판단하지 않는다는 것이 본문에 나타난 바울의 논지이다. 즉 하나님의 심
판은 유대인에게나 이방인에게나 똑같이 임한다는 사실이다. 본문에서 바울은 특권 의
식에 사로잡혀 우(愚)를 범하고 있는 유대인들의 환상을 깨뜨리기 위한 기초 작업에
들어가고 있다. 다음 사항들을 주의깊게 살펴 봄으로써 본문을 상고해 보기로 하자.
(1) 유대인들의 그릇된 자기 이해. 바울은 그리스도의 사도가 되기 이전에 철저한
유대교인이었으므로 자신의 체험을 통하여 유대인들의 생각을 정확하게 꿰뚫고 있었
다. 유대인들은 자기들 나름대로의 척도를 가지고 모든 인간을 판단하고 평가하였으
니, 그들의 판단 기준은 율법과 할례였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율법을 소유하고 있으
며 할례도 받았으므로 이방인들과는 달리 의로운 자이며 고로 만사가 형통할 것이라는
영적 오만과 편견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들은 우상 숭배하는 이방인들을 정죄했으며
이방인드리 부도덕함에 대해 멸시와 조롱을 일삼았고 심지어는 짐승보다는 못한 존재
로 취급하였다. 또한 유대인들은 남을 가르치고 판단한다는 특권 의식을 가지고, 자기
들은 전혀 별다른 계급, 또는 하나님의 심판에서 제외된 자들이라고 스스로 자부하고
있었던 것이다.
바울은 본문에서 이러한 유대인들의 그릇된 자기 이해와 그것을 기준으로 하여 이방
인을 판다하는 행위가 얼마나 잘못된 것인가를 지적하고 있다. 스스로 의롭다고 자부
하는 그들이 율법을 행하지 아니하고 이방인과 똑같이 죄를 범하고 있다는 사실을 고
발하면서 유대인도 이방인과 마찬가지로 세상 끝날 하나님의 심판을 면치 못할 것이라
는 선언을 하고 있다.
(2) 유대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뜻. 본문에는 하나님의 택한 백성인 유대인들을 향하
신 하나님으 뜻과 섭리가 잘 나타나 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 대하여 인자하심
과 용서하심, 그리고 오래 참으심으로 말미암아 그들이 진정으로 회개하기를 원하신
다.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인자하심은 거듭 중요한 사상으로 등장하고 있거니와
(11:22) 하나님께서 인자하심을 베푸시는 의도는 회개의 기회를 주시고자 함이라는 뜻
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회개하기를 기다리면서 오래 참고 계시는데, 그러한 하나
님의 선하신 뜻과 섭리를 무시해서는 안된다는 것이 바울의 교훈이다. 만약에 유대인
들이 계속해서 회개케 하시려는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지 못하고 자기 만족에 빠져 하
나님의 인자하심을 멸시한다면 저들은 하나님의 심판의 때에 진노의 벌을 받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하나님으로부터 특권을 받은 유대인들은 스스로 의롭다 여기며 전혀 회개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였을 뿐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은혜의 계시를
배척하기에 이르렀으니 유대인들의 이 같은 과오(過誤)를 지적하며 그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오기를 간절히 바라는 바울의 염원이 본문에 잘 드러나 있다. 유대인들의 어리석
음과 무지함은 예수께서 십자가 위에서 자신을 못박는 무리들을 향하여 "아버지여 저
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라고 하신 말씀(눅 23:34)
에 잘 나타나 있다. 그러나 동시에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뜻을 깨닫지 못하고 회개하기
를 거부하고 어리석음을 고집한다면 그들은 하나님으 공의의 심판을 결코 면치 못한다
는 것이다.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오래 참으심은 결국 진노의 지연(遲延)을 의미한다
(요 8:33-44;9:39;살후 1:8, 9).
(3) 하나님의 심판 원리. 바울은 앞에서 심판의 보편성, 즉 심판은 이방인뿐 아니라
유대인에게도 동일하게 임한다는 사실을 언급하였거니와 또한 심판의 원리를 말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각 사람의 행한대로 보응하신다'는 것이 본문에서 바울이 말하고
있는 미래의 심판에 대한 원리이다. 또한 이 원리는 성경에 일관되게 흐르고 있는 사
상이라 하겠다(욥 34:11;고후 5:10). 이러한 심판 원리는 외형적으로는 이신 득의(以
信得義)의 원리와 모순되는 것같이 보인다. 만약에 인간의 행위가 심판의 기준이 된다
면 이 세상에 구원을 받을 자가 어디에 있겠는가? 그러나 본문에서 말하는 행위란 하
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은 외적 증거로서 나타나는 행위를 의미한다(약 2:17, 18,
22, 26).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은 광의적(廣義的)인 의미에서 두 가지 양상으로 나타난 터
인즉, 의인에게는 영생으로 악인에게는 환난과 곤고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바울은 인
간을 크게 두 부류로 나누고 있거니와 한 부류는 참고 선을 행하는 자들이고 다른 부
류는 불의(不義)를 좇는 자들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바울이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선
을 행함으로 영생을 얻게 된다는 사실이 아니라 영생을 얻은 자들의 삶의 방향을 제시
하고 있는 것이다. 선행, 즉 행함은 인간이 추구해야 할 성취의 표식(標識)이 아니다.
인간으 선행은 구원을 가져다 주는 것이 아니라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의 유일한
근원이신 하나님을 향한 고귀한 믿음만이 인간에게 구원을 가져다 준다.
바울은 결론적으로 하나님께서는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아니 하신다고 선언함으로써
하나님의 심판은 공정하다는 원리를 시종 일관 표명하고 있다. 질리를 거역하고 불의
를 좇을 경우에는 유대인이라도 하나님의 진노를 면치 못할 것이며 겸허하게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들에게는 영생의 축복을 주신다는 것이 바울이 역설하는 심판의 원리이다.
바울은 본문을 통하여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면할 것이라는 유대인들의 환상을 여지
없이 깨뜨렸다.
* 하나님의 진노. '하나님의 진노'라는 바울의 표현은 하나님으 심판을 뜻하는 지배
적인 개념으로 여러번 등장하고 있다(5절;1:18;5:9;12:19;엡 5:6;골 3:6;살전 1:10).
본 주제 강해헤서는 '하나님의 진노'에 관한 신학적 의미에 관하여 살펴보기로 하자.
'하나님의 진노'는 하나님 자신의 인격적인 표현, 즉 신적인 감정을 나타내고 있다
기보다는 죄와 세상에 대하여 선언되는 하나님의 능동적인 심판의 의미를 가진다. '하
나님의 진노'는 하나님이 무엇을 행하시느냐에 대하여 말하고 있을 뿐 아니라 또한 그
의 사역에 있어서 그분이 어떤 분이시내에 대하여 말하고 있을 뿐 아니라 또한 그의
사역에 있어서 그분이 어떤 분이시냐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예컨대, 하나님의 진노와
'의로운 심판'(* , 디카이오크리시아), 혹은 하나님의 진노와
'의'(* , 디카이오쉬네)는 동의어로 사용되고 있다(2:5;5:2). '하
나님의 진노'는 하나님께서 그의 거룩한 책벌로서 설정한 저주의 실현이다(갈 3:10).
이같이 '하나님의 진노'는 하나님의 의와 거룩을 잘 나타내 주고 있는 개념이라 하겠
다.
한편 '하나님의 진노'는 때때로 종말론적 심판의 개념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이 사
실은 거듭 반복되고 있는 '오는 진노'에 대한 언급으로부터 드러나고 있다(5:9;엡
5:6;골 3:6;살전 1:10). 이 진노는 '하나님의 진노의 날'에 나타날 것이며(5절) 그 때
에 의로우신 심판이 수행될 것이다.
결론적으로 바울은 피할 수 없는 하나님의 심판의 실재로 '하나님의 진노'를 엄급함
으로써 복음의 필요성을 강조하고자 하였다. 즉 하나님을 떠난 자들에게 임하는 '하나
님의 진노'에 관한 지식은 율법에 대한 그 자신의 행위를 바탕으로 하여 자력(自力)으
로 의를 성취한다는 것이 전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사실과 오직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만
이 가능함을 시사한다.
2. 행위에 따른 하나님의 심판(2:12-16)
본문에서 바울은 앞 문단에서 논의된 문제를 더욱 집중적으로 공격하고 있다. 앞에
서 하나님의 심판은 이방인뿐 아니라 유대인에게도 동일하게 임한다는 사실을 강조하
였거니와, 본문에서는 하나님의 거룩한 판단 기준인 율법의 개념을 도입하여 그 정죄
적 측면을 부각시킴으로써 인간은 오직 믿음으로만이 의롭게 될 수 있다는 원리로 이
끌어가고 있다. 다음 사항들을 통하여 본문의 내용을 상고해 보기로 하자.
(1) 유대인의 법. 바울은 차별이 없는 하나님의 심판, 곧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마
찬가지이며 율법을 가지고 있는 자나 율법을 가지고 있지 않은 자나 똑같이 심판을 받
는 사실을 거듭 강조하고 있다. 유애인은 하나님의 율법을 받았으므로 그 법이 곧 하
나님의 심판 기준이 될 것이다. 즉 율법을 받은 유대인들은 율법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뜻을 알고 선악을 분별할 수 있는 특권을 지녔으므로 율법을 어길 경우 율법에 의해서
정죄를 받는다. 그리고 율법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지 않고 범죄하는 유대인
들은 율법 없는 이방인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이다.
바울은 유대인들이 율법을 가지고 있으면서 범죄하였다는 사실을 더욱 확실하게 이
해시키기 위하여 다음과 같은 원리를 내세우고 있다. 즉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라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가 의롭다 하심을 얻게 된다는 것이다. 율
법을 행하는 것이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에 대한 감사와 헌신의 결과라는 의미에서 율
법을 행하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의롭다 하심을 얻는 중요한 근거가 되는 것이다
(6:13, 19;14:18;고전 6:9;히 12:23).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것이 중요
하다는 사상은 일찍이 예수께서 산상 수훈에서 강조한 바이며(마 7:15-27) 야고보서에
서도 누누이 강조되고 있거니와(약 1:22-24) 유대인들은 회당에서 율법은 들을 수 있
었지만 그것이 그들의 삶에 어떠한 영향도 미치지 못하였을 때 그들은 하나님의 진노
의 대상이 되었다. 단순히 율법을 소유하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하나님의 인정을 받고
자 하는 유대인들의 불성실하고 오만한 태도는 하나님 앞에 결코 용납될 수 없었다.
(2) 이방인의 법. 앞 문다에서 바울은 유대이이 행위에 따라 심판을 받는다는 원리
를 설명하였거니와(6절), 이방인에게도 그 행위에 따르는 심판이 적용되는가 하는 문
제를 본문에서 다루고 있다. 이방인은 비록 유대인과 같이 율법을 부여받진 않았지만,
이로써 자신으 범죄를 변면하지 못하는 것은 그에게 양심(良心)의 법이 부여되었기 때
문이다. 율법을 받지 않은 이방인일지라도 마음에 새겨진 율법에 의해 지배를 받는다
는 사실이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본성을 통하여 당신의 뜻을 계시하셨으니 이미 율
법으 기본적 요구 사항이 인간으 마음에 새겨져 있다는 것이다. 다시말해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인간의 본성에 도장처럼 찍혀져 있으니 저들은 비록 율법을 듣지 못하였
으나 자신과 타인의 행위를 판단할수 있는 양심을 지니고 있다. 여기에는 바울은 인간
의 내면 세계를 마치 법정처럼 묘사하고 있는바(15절), 인간은 양심의 법정에서 무죄
로 선고되기도 하고 유죄로 선고되기도 한다. 바울이 말하는 이방인에게 있어서의 양
심의 기능은 유대인에게 있어서의 율법의 기능과 거으 유사하다.
그들은 한편으로는 율법이 없는 사람들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율법 아래 있는 사람
들이다. 양심이 스스로에게 율법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방인도 유대인과 마찬
가지로 행위에 의하여 심판을 받게 된다는 논리가 성립되는 것이다.
바울은 앞장에서와 마찬가지로(1:18-20) 자연 계시를 통한 하나님의 섭리를 강조하
고 있거니와 그 의도는 전인류가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라는 사실과 고로 복음을 필요
로 하는 존재임을 알리고자 하였던 것이다. 인류는 하나님의 법에 관하여 핑계할 수
없는 충분한 분량의 지식을 가졌다.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 충분한 분량의 진리의 빛을
받은 것이 분명한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빛을 거스리며 계속해서 죄를 반복하며
어두움 속에 거하고 있었으니 이로써 비극적인 종말이 점점 가까이 임박하게 되었다.
그들 앞에는 오로지 피할 수 없는 하나님의 심판이 놓여져 있다는 사실이 본장에 계속
되는 바울의 강조점이다.
(3) 행위에 따른 심판. 바울은 행위에 의한 심판 곧 인간의 행위에 대한 하나님의
응보(應報)를 전하고 있다. 이 심판에 관한 가르침은 과연 본서의 메시지의 중심인 믿
음으로 의롭다 인정받는 원리와 일치하는가? 또는 어떠한 연관성을 가지는가?
행위에 의한 심판과 행위 때문에 이루어지는 구원은 전혀 다른 것이다. 바울이 전파
한 복음에 의하면 행위가 안닌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 하지만 이러한 전제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고려되어야 한다. 즉 구원에 있어서 믿음과 은혜를 강조하는 나머
지 구원 받은 자가 취해야 할 올바른 삶의 자세를 간과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다. 구
원의 개념 속에는 우리가 무엇으로 구원을 받았는가는 물론 무엇을 향하여 구원을 받
았는가 하는 사실도 포함되어 있다.
신자들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이다(엡 2:10).
선행의 기준은 하나님의 율법이며 신자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율법 아래 있다
(고전 9:21). 바울에게 있어서 율법은 거룩하고 의롭고 선하다(7:12). 그러나 그리스
도께서 율법의 마지막, 즉 율법의 완성이라는 전제 아래서 그렇다.
바울은 결코 율법을 폐기시키고 있지 않으며 오히려 율법과 복음을 내적으로 통일시
키고 있다. 바울에 의하면 율법이 요구하는 의를 실현하기 위하여는 은총이 있어야 한
다는 것이다. 은총으로 말미암은 믿음의 의가 선행을 하도록 한다. 이것이 바울이 말
하고자 하는 믿음으로 의롭게 됨의 목적이다. 모든 것은 믿음과 은총으로부터 오나 동
시에 모든 것은 인간의 행위에 달렸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마지막 날에 사람들의 은
말힌 것까지 심판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신자는 떨리는 마음으로 구원을 이
루어 나가야 한다(빌 2:12). 바울에게 있어서 믿음과 행위는 불가분리(不可分離)의 관
계에 있다.
* 바울의 '양심'의 개념. '양심'(* , 쉬네이데시스)이라는 말은
신약성경에 모두 32회 나타나며 거의가 바울 서신에서만 사용되고 있다(15절;고전
8:7;10:25, 29;딤전 1:5;3:9;4:2). 헬라인들은 양심을 선악에 대한 판단의 자리로 생
각하였거니와 바울은 그의 서신에서 이 단어를 자주 사용하여 독특한 기독교적 개념으
로 발전시켰다. 본문에서도 '양심'은 매우 중요한 개념으로 등장하고 있으므로 이에
관해 살펴보기로 하자.
(1) 어휘 설명. '양심'이라는 말은 '함께 있다', '함께 본다'는 말로서 하나님이나
어떤 초월적 존재가 자기 곁에 증인으로 있다는 뜻이다. 이와 같이 '양심'아리는 말은
사람 안에 있는 하나님으 소리를 의미하는 개념이었다. 이것이 헬라 문화권의 영향을
많이 받은 유대인들에게는 심판하고, 고소하는 자를 의미하였다.
(2) 양심의 기능. 양심은 율법과 동일시 될 수는 없으나 율법과 동일한 기능을 하는
선악을 판단하는 자리이다. 즉 문자화(文字化)되기 이전의 율법이라 할 수 있다. 그것
은 도덕적 결정과 판단의 영역에서 기능을 발휘하고 있는 인격적인 것이다. 그것은 긍
훌히 여기고 지식을 구하고 명예를 세우려는 마음의 깊은 자리라고도 할 수 있다. 그
러나 인간은 양심에 대하여 자기 자신이 최고의 법과니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최고 법관이 되신다(고전 4:4).
(3) 양심과 성령. 바울에게 있어서 독특한 것은 양심의 판단이 인간 안에 내재한 능
력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성령의 능력으로 이루어지는 것으로 보았다는 것이다.
타락한 인간은 양심이 어두워졌으므로 스스로 양심의 기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없다.
인간은 성령의 지시로서만이 그리스도께서 나타내신 진리를 판단할 수 있으며(9:1;고
후 1:12).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양심은 두두러지게 활동할 수 있다. 양심은 반드시
성령과 동행아는 것이며 성령을 통해서 인간은 두드러지게 활동할 수 있다. 양심은 반
드시 성령과 동행하는 것이며 성령을 통해서 인간은 그 기능을 온전히 회복하게 될 것
이고 그때에야 비로소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새로운 피조물로서의 새 삶을 살게 될 것
이다.
3. 유대인의 율법 위반(2:17-24)
본문은 앞 문단에서 선언한 행함에 따른 심판의 원리(13절)에 근거하여 율법에 대한
유대인의 문제점을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다. 하나님의 택한 백성으로서 율법을 수여받
은 유대인들은 큰 특권을 누리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율법의 참된 의미를 망각하
고 형식만 좇음으로 인하여 도리어 걸림돌이 되고 말았다. 본문에서 바울은 유대인의
정신적인 착각과 행동적 위선을 적나라하게 폭로하며 책망하고 있다. 본문은 유대인
전체를 향항 질문 형식으 대화체로 문장이 전개된다. 다음의 항목들을 살펴봄으로써
내용을 좀더 깊이 분석해 보기로 하자.
(1) '유대인'이라는 이름. 바울은 본문에서 집단적 유대교도를 대상으로 설교를 시
작하고 있거니와 '유대인'이라는 공식 명칭을 언급함으로써 유대인의 특수한 위치를
부각시키고 있다. 유대인이라는 이름 속에는 유대인의 민족적 특징이 내포되어 있다.
'유대인'이라는 이름은 '히브리인'이나 '이스라엘인'과는 다른 개념이다.
'유대인'은 이방인과 대립되는 개념으로 율법을 종교 원리로 삼는 사람을 가리킨다.
유대인이라는 자의식(自意識)은 그들을 지탱하는 힘이었으며 그들은 유대인이라는 이
름을 명예스러운 이름으로 삼았다. 한 이름을 가진다는 것은 그 이름에 부합된 의무와
긍지를 갖는 것인 바, 유대인들은 이방 세계에서 유일신 하나님의 존재를 고백하고 그
분의 뜻에 따라 행하는 민족이었다. 그러므로 유대인이라는 개념은 율법과 하나님의
개념이 포함되어 있는 이름이라고 할 수 있다. 유대인은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을 의지
하고(왕하 5:18;7:2, 17;미 3:11) 하나님을 자랑하는 자들이었다(렘 9:23;눅 18:11).
다시말해서 유대인이라는 이름 속에는 율법과 하나님을 자랑하는 그들의 민족적, 종교
적 특성이 잘 드러나 있다.
바울이 본문에서 특별히 '유대인'이라는 이름을 내세운 까닭은 바울 자신이 유대인
으로서 누구보다도 그 이름을 자랑스럽게 여기던 자였으나 그 위대한 이름에 합당한
신앙적 삶을 영위하지 못하는 동족 유대인들의 현실을 안타깝게 여기고 저들이 회개하
고 하나님께로 돌아옴으로 그 이름의 명예를 회복하기를 기대하였던 것이다.
(2) 유대인과 율법. 앞에서도 언급한 바거니와 유대인의 독특한 표식은 율법과 할례
이다. 본문에서는 유대인이 소유한 율법에 대하여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다. 바울은 본
문에서 먼저 유대인의 현실을 그대로 표현하고 있다. 즉 율법을 받은 자로서의 유대인
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 유대인은 이방인과는 달리 하나님께로부터 율법을 받은 자로
서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긍지를 가지고 있었으며 따라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분간
하고 있었고 율법을 통하여 어느 것이 선한 것인지를 구분할 수 있는 특권을 받았다.
그래서 그들은 소경의 길을 인도하는 자, 흑암 중에 있는 인간에게 빛을 주는자. 어리
석은 자를 교육하는 자, 어린이들의 교사와 같은 자격을 가졌다고 자랑하였다. 그들이
그렇게 자만할 수 있었던 이유는 율법에 있는 지식과 진리의 규모를 가진 자였기 때문
이다. 즉 그들은 율법에 대한 구체적인 지식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가
르치고 인도할 능력이 있다고 자신하였다. 반면 이방인은 본문에 '소경', '어두움에
있는 자', '어리석은 자'등으로 언급되면서 율법을 소유하지 못한 사실이 부각되고 있
다(사 42:6, 19;고전 3:1;엡 4:14).
바울은 이렇게 유대인이 이방인에 대하여 사용하는 용어들을 나열하면서 유대인의
우월감을 추켜주고 있다. 그러나 당당하게 쌓아올린 유대인들의 우수성은 곧 바울에
의하여 가차없이 무너져 버린다. 바울은 율법에 대한 유대인들의 자랑이 얼마나 어리
석은가를 폭로하기 위하여 그들을 끌어올렸던 것이다. 여기에 사용된 바울의 수사법
(修辭法)은 상당히 효과적이었다. 유대인들이 율법을 소유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결
코 우월할 수 없다는 사실과 그들도 역시 이방인과 다를 바 없는 죄인이라는 엄청난
사실이 이제 적나라하게 드러나기 시작하나.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
이 아니라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함을 얻기 때문이다(13절).
(3) 유대인으 율법 위반. 유대인의 우월감에 대한 바울의 진술은 돌연 변하여 공격
적이 되면서 일련의 연속적인 질문들을 통하여 그들을 고발하고 있다. 바울의 고발(告
發)은 유대인 스스로 자랑하는 그 율법을 범하였다는 비난으로 요약된다. 즉 율법을
소유한 데 대해 대단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조금도 실천하지 않은 그
들의 죄악된 모순성을 책망하였다. 바울은 본문에서 그들의 죄를 구체적으로 나열하고
있다. 여기에 제시된 세 가지 구체적인 죄목, 즉 도적질, 간음, 우상의 제물을 훔치는
것은 당시 유대 사회에 만연하였던 것으로 이방 민족에게도 소문이 나 있었다. 바울은
이사야의 말씀(사 52:5)을 인용하여 그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하기는커녕 도리어
그 이름을 모독하였다는 비난을 하고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
함으로 징계를 받아 이방 민족의 포로가 되었고 그로 인하여 하나님의 이름은 이방인
의 조롱거리가 되었던 것이다. 이 모든것은 유대인들이 율법 행하기를 거부하였기 때
문이다.
바울이 유대인의 죄를 여지없이 몰아세운 것은 그들로 하여금 그 자신들의 영혼의
상태를 직시(直視)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는 참 유대인의 모습으로 돌아오기를 염원하였
던 까닭이다. 하나님은 인간을 외모로 판단하지 않는다는 것(11절)이 계속되는 바울의
주장이다. 그들의 형식적 율법주의는 하나님 목전에 아무런 의미도 갖지 못하고 오히
려 가증되이 여겨질 뿐이다. 비록 율법 없는 이방인일지라도 하나님을 신뢰하고 선을
행하명 의롭다 함을 얻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바울 자신이 이방인 선교를 통하여 친히 체험한 바였다. 하나님께서
는 그를 경외하는 이방인들에게 놀랍게 역사하셨던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는 모든 인
간이 동일한 선상에 놓여져 있다. 본문에서 날카롭게 지적된 유대인의 형식적 율법주
의는 마지막 문단에서 할례와 연관되어 계속 이어진다.
4. 인간을 의롭게 하지 못하는 할례(2:25-29)
앞 문다에서 유대인을 구별시키는 가장 큰 표식인 율법을 중심으로 유대인의 죄를
드러낸 바울은 이어 본문에서는 할례를 들어 유대인의 위선적 형식주의를 신랄하게 지
적하고 있다. 과연 참 유대인이 누구인가가 결론적인 문제가 되고 있다. 본문을 상고
하기 위하여 다음 사항들을 고찰해 보기로 하자.
(1) 할례의 본래적인 의미. 할례는 남성 생식기의 표피를 잘라내는 행위로서 히브리
인들이 출생 후 8일만에 행하는 종교적 의식의 하나였다. 이 의식은 고대 세계에서 널
리 행해졌는데 바벧론인과 앗시리아인을 제외한 대부분의 셈족 사람들과 이집트인들
가운데서도 행해졌다. 히브리인들은 할례를 받지 않은 만족들을 '무할례자'라 부르며
경멸하였다(삿 14:3;삼상 14:6;대상 10:4). 그러나 비록 할례 의식이 여러 민족들 사
이에 행해졌던 것이었다 할지라도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할례는 율법과 마찬가지로 특
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할례의 시작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선택하시고 언약을 세우
실 때 그 언약에 대한 인간 측의 순종과 충성의 맹세로 요구하신 사건이었다(창
17:9-14). 마음의 결심과 회개를 자신의 육체를 통해 나타내는 것이 바로 할례였다.
다시 말해서 할례란 몸과 마음을 정결케 하여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를 형성한다는 상
징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신약 시대의 세례와 그 의미가 유사한 것
으로 하나님의 백성으로 새롭게 태어남을 의미한다(신 10:16;30:6;렘 4:4). 한편 할례
와 세례는 모두 그것이 계속되는 순종과 충성으로 연결될 때에만이 참된 의미를 발휘
할 수 있는 것이었다.
(2) 율법 준수와 할례. 유대인에게 있어서 할례는 고귀한 언약의 상징이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할례를 육체의 자랑거리로 삼았으며(갈 6:13) 할례를 받아야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그릇된 생각을 갖고 있었다. 바울은 본문에서 이러한 유대인의 그릇된 할례 이해를 율법 준수와 관련하여 지적하고 있다. 할례와 율법 준수는 결코 분리하여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 즉 유대인들이 생각하는 바와 같이 할례를 받았다는 사실만으로 구원을 받을 수는 없다는 것이 바울의 단호한 결론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주시고 할례를 받게 하신 것은 이방인들보다 하나님의 뜻과 진리를 더 잘 알고 그것을 행하여 모범이 되고 인도자가 되게 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이 사실을 알면서도 율법을 준수하지 않고 이방인과 똑같이 범죄하였으니 하나님의 말씀을 위탁받고 할례를받은 특권은 아무 소용이 없게 되었다.
바울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유대인과 이방인이 각기 그 위치가 바뀔 수도 있음을 지적한다. 만일 무할례자인 이방인이 율법을 온전히 지키면 의문(儀文)과 할례를 가지고 율법을 범하는 유대인을 능가하리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율법을 지키지 않는 한 의문이나 할례는 아무런 의미도 갖지 못한다. 그것들 자체는 생명과 능력을 주지 못하기 때문이다(고후 3:6).
이렇듯 바울은 유대인으로 하여금 그들이 율법과 할례라는 특권을 소유하고 있으나 율법의 진정한 성취를 전혀 이루지 못하고 있음을 깨닫게 하고 있다. 그리고 율법의 성취를 통한 의의 실현은 인간에게 불가능하며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만 의에 이를 수 있다는 복음으로 이끌어가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율법을 성취하신 분이기 때문에 그분을 통해서만이 인간은 의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다.
(3) 참 유대인의 자격. 본문은 본장의 절정(絶頂)을 이루고 있는 부분으로 참 유대인, 참 이스라엘의 자격에 관하여 논의하고 있으며 유대인과 율법, 그리고 할례에 관한 논쟁의 결론을 내리고 있다(28, 29절). 지금까지 바울은 유대인의 어리석음과 완악함에 대하여 적나라하게 비판하였거니와 이제 그들이 어떻게 하여야 선민으로서의 자격을 회복할 수 있는가를 제시한다.
바울에 의하면 그들은 형식적 율법주의를 과감히 청산해야 한따. 참 유대인은 표면적(表面的) 유대인이기 때문이며 참 할례는 육신의 할례가 아니라 마음의 할례이기 때문이다. 이 말은 단순히 아브라함의 육체적 후손이 유대인이 아니요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가 참 유대인이라는 뜻이다. 사람의 은밀한 것까지 감찰하시는 하나님께 의롭다 인정받는 자만이 참 유대인이다(16절;히 4:13). 또한 바울은 말하기를 참 유대인은 율법의 의문에 따라 육신의 할례를 행한 자가 아니라 마음에 할례를 행한 자이다(7:6). 마음에 할례를 행하라는 바울의 권면은 일찍이 구약의 선지자들이 당시의 타락한 이스라엘을 향해 외쳤던 메시지로서(레 26:41;신 10:16;렘 4:4;9:26;겔 44:7)마음의 악을 버리고 정결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도를 행하라는 것이 그 핵심 내용이었다.
유대인을 향한 바울의 날카로운 비판은 그들의 환상을 깨뜨리기에 충분했다. 그들은 율법을 내면적으로 실천하는 데 실패했고 고로 할례는 육체의 자랑에 그치고 모든 것은 형식적인 것으로 남을 수밖에 없었다. 오히려 마음에 율법을 행하는 이방인들이 할례자로 간주되고 율법을 소유하되 지키지 못한 유대인들은 무할례자와 같다는 사실이다. 인간들의 순간적인 칭찬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시는 칭찬으로 사는 자가 참 유대인이다. 바울의 마지막 경고는 마음의 할례를 행하라는 것이다. 곧 겸손하게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의를 붙잡으라는 것이다. 그 때에 비로소 그들은 살 것이기 때문이다.(합 2:4)
Previous
Li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