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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2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양의 우리에 문으로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 데로 넘어가는 자는 절도며 강도요 문으로 들어가는 이가 양의 목자라 - 이 말씀은, 사람이 합법적으로 양에게 관계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백성을 인도하는 자도 하나님의 법을 거쳐야 된다는 것을 가르친다. 우리 본문의 "문으로" 들어간다는 말씀은,예수님으로 말미암아서만 하나님의 양을 정당하게 인도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예수님으로 말미암는다는 것은, 그 자신이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의 보내심을 받아 교회의 인도자가 된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보내심을 받지 않고 스스로 교회의 인도자가 되는 자는, 문으로 들어가는 자가 아니고 다른 데로 넘어가는 자이다. 사람이 자기 스스로는양을 먹일 만한 진리와 능력을 받지 못한다. 자기 스스로 된 일군은, 결국 하나님의교회를 진정한 의미에서 돕지 못하고 도리어 양 떼에게 해를 끼친다. 그는, 무의식 중에, 혹은 의식 중에 저렇게 불행한 생활을 보내기 쉽다.

=====10:3-5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자기 양을 다 내어 놓은 후에 앞서 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고로 따라 오되 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는고로 타인을 따르지 아니하고 도리어 도망하느니라. - 여기 이른바 "문지기"는 누구를 가리키는가? 어떤 학자는 이것이 세례 요한을 의미한다 하고, 또 다른 학자들은 말하기를, 이것이 하나님 아버지를 의미한다고 하였다. 하나님의 보호하시는 역사를 생각할 때에, 그를 가리켜 문지기라고 하는 것이 반드시 낮은 칭호라고 할 것은 없다. 그러나 하나님 아버지를 문지기라고 생각하는 것은 문맥상으로 보아 부합하지 않는 듯하다. 그러므로 "문지기"는 성령님을 가리킨다. 성령님께서 예수님과 하나님 백성과의 관계를 맺어 주시는 점으로 보아서 이 해석이 적당하다.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라는 문구는 10장에 많이 나온다. 4,5,27절을 참조하여라. 양이 목자의 음성을 듣는다는 것은, 택한 백성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의 말씀을 알아 듣는 사실을 비유한다. 택한 백성은 그 목자 되시는 하나님(혹은 하나님의 아들)의 말씀을 알아 듣고 모이는 법이다. 교회의 사역자(使役者)는 하나님의 양을 자기 힘으로 만들 수 없다. 온 천하의 모든 세력과 능력을 가지고라도 하나님의 양 하나를 만들지 못한다. 하나님의 양(택한 백성)은, 오직 영원 전에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뜻대로 하나님 자신이 이루어 놓으신 백성이다. 그러므로 오직 하나님의 말씀으로만 그들을 모울 수 있고 또한 완성시킬 수 있다. 교회의 사역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정미롭게 전파할 뿐이다. 그리하면 하나님의 양 된 자들은 모여서 한 무리가 된다.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이 점에 있어서 행스텐벌키(Hengstenberg)는, 시 147편; 사 40:26, 43:1; 출 33:12,17도 인용하면서,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주님의 지식이 얼마나 친근하고 개별적인 사실을 지적하였다. 이름을 각각 불러 낸다는 것은, 지도자로서 피지도자에 대하여 깊은 지식을 가질 뿐 아니라, 뜨거운 사랑과 정성을 가지고 지도하는 것을 가리킨다. 영혼을 먹이는 자는, 대중 본위로 사업의 동기를 가지지 말고, 다만 한 사람의 영혼을 천하보다 귀히 여기는 마음으로 영혼 하나에게라도 모든 사랑과 성의의 정력을 기울여 일해야 된다. 그런 역사(役事)가 진정한 복음의 열매를 맺힌다. 그것은 마
다. 그와 같이, 하나님의 백성을 목양하는 인도자는 소자 한 사람도 가볍게 여기지 않아야 된다.

=====10:6
예수께서 이 비유로 저희에게 말씀하셨으나 저희는 그 하신 말씀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니라. - 목자와 양에 대한 비유는 구약에도 많이 있다. 시 23편, 79:13, 80:1, 95:7; 사 40:11; 렘 23:1; 겔 34:1-2; 슥 11:17, 13:7 참조. 그때 유대인들이 구약을 알았더면 이 비유를 깨달았을 번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구약에 무식하였으므로 주님의 교훈을 이해하지 못하였다.

=====10:7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 - 여기서는, 윗부분(1-5)의 말씀을 해설하는 것 뿐이다. 1-6절 해석에 대한 머리말을 참조하여라. 버나드(Bernard)에 의하면, 여기 "문"이란 말이 사히딕(Sahidic) 사본에는 "목자"(* )란 말로 읽게되어 있는데, 모판트(Moffat)는 그것을 지지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버나드(Bernard) 자신은 그것을 받지 않았다. "양의 문"이란 것은, 하나님의 백성이 영적 세계에 들어갈 수 있는 길을 가리킨 것이다. 그것은 곧바로 하나님 아버지에게로 인도하는 통로를 의미한다(14:6). 로마의 클레멘트(Clement of Rome)는, 시 118:19-20을 해석하면서 말하기를, 문은 의(義)의 문, 곧, 그리스도라 하였고, 익나디오(Ignatius)는, 사람이 하나님 아버지에게로 가는 문, 곧, 그리스도라 하고, 그것을 통하여 아브라함, 이삭, 야곱, 선지자들, 사도들, 또는 교회가 들어간다고 하였다. 슐라텔(Schlatter)에 의하면, 예수님은, 시 118:20의 예언("이는 여호와의 문이라 의인들이 그리로 들어가리로다")대로 오신 분이다. 그는 말하기를, "시 118:20에 있는 '이는'이란 말은 그리스도를 가리키는데, 그가 하나님의 문이시다. 거기 '의인들'이란 말은 그리스도에게 순종하는 양들을 의미한다."라고 하였다. (dieser, namlich der Christus, ist das Tor Gottes. Die Gerechten des Psalms sind bei Joh. die dem Christus gehorenden Schafe.-Der Evangelist Johannes, p. 235) =====10:8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니 양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 "나보다 먼저"(* )란 말에 대하여는 사본상 차이가 있다. 곧, 몇몇사본(* ,A,B,D,L,W)이 우리 본문과 같이 이 문구를 가지고 있고, 다른사본(* )은 이것을 가지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가, 이 문구를 가지고 있는 것이 원본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그 사본들의 증거가 강하기 때문이다. "나보다 먼저"(* )란 말씀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1) "내 권위를 횡령하여"(above me)란 뜻이라고 함. 이 해석이 옳다면, 이 귀절의 내용은, 그리스도의 권위를 무시한 바리새인들과 같은 자들을 절도나 강도로 간주한 것이다. (2) 이것은, 시간적으로 예수님보다 먼저 온 자들을 가리킨다는 것. "먼저"라는 헬라 원어가 그런 뜻으로 요한 복음에 많이 나와 있다(11:55, 12:1, 13:1, 19, 17:5, 24). 크로솨이데(Grosheide)는 이 해석을 합당하게 여기는 이유로서 그 아래 나온 에이신(* ),곧, "이요"로 번역된 동사가 현재사라는 것을 들어 말한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의 염두에 있었던 인물이 예수님보다 시간적으로 먼저 와서 교권을 잡았는데, 아직도 그 현재에(예수님 당시에)있는 자들이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이 아니고 바리새인들인 것이 분명하다. 많은 학자들이 이 해석을 취한다.

=====10:9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 "누구든지"란 말은, 그리스도의 복음이 민족이나 국가의 차별 없이 관계한다는 보편성을 가리키는 것이다.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란 말씀은, 예수님을 유일한 구주로 믿고 그의 중보 역사를 통하여서 하나님에게 들어감을 의미한다. 이렇게 믿는 자는 영생을 얻는다. 그 뿐 아니라, 그는 생명의 부요를 얻기 위하여 영의 양식을 자유롭게 받는다. 이 사실이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는 말씀으로 알려진다. "들어가며 나오며"란 것은 자유로운 활동을 의미한다(신28:6; 시121:8; 렘37:4). 그리스도 신자는, 그의 안에서 얼마든지 자유롭게 신령한 양식을 섭취할 수 있다. 그리고 그의 주시는 양식은 영원한 만족을 준다. 땅에 속한 모든 것은 인간이 가져 볼수록 더 많이 가지고 싶다. 그것들로써는 인간의 갈증을 멈출 수 없다. 그것으로 만족하려는 자는 소금 물을 마셔서 갈증을 없애려는 것과 같다. 그것은 마시면 마실수록 갈증이 더 심하여질 뿐이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는 꼴은, 먹는자마다 영원한 만족을 얻어서 모든 다른 것들을 진토와 같이 여기게 된다. 이 아래 10절에,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이 얻게 하려는 것이라"고 한 말씀이 그 뜻이다.

=====10:10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 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 이 말씀은, 기독교회에 거짓 스승들이 종종 들어올 것을 미리 경고한것이라고 생각된다. 교회에 나타나는 도적은 거짓 교훈을 가진 자들이다(골2:8; 렘23:2; 겔34:2). 이런 자들은 양을 귀히 여기지 않고 저희의 사리 사복을 위주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참 목자로서 양들의 진정한 유익을 구하신다. 곧, 그는 신자들에게 영적 생명을 주시며, 또한 그 생명을 장성케 하신다(시23편; 히13:20-21).

=====10:11-13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삯군은 목자도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늑탈하고 또 헤치느니라 달아나는 것은 저가 삯군인 까닭에 양을 돌아보지 아니함이나. - "선한 목자"에 대하여는, 구약에도 많이 예언하였으니, 대상11:2; 시23편; 사40:11; 겔34:23; 슥11장 등이다. 이 귀절들을 보면, 여호와 자신이 바로 하나님 백성의 선한 목자라고 했으니,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오신 때 그 예언들은 성취되었다. 선한 목자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린다고 하였으니, 그것이 무슨 뜻인가? 헹스텐벌키(Hengstenberg)는, 그말이 그 양을 위하여 목숨을 대속물(代贖物)로 주실 것을 가리켰다고 한다(막10:45; 마20:28). 그리스도께서 이 말씀을 하실 때에, 사53:10을 염두에 두셨을 것이다. 고데이(F.Godet)도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란 말씀이, 다른 이의 요구에 응하여 생명을 내어 놓음, 혹은 바침, 또 혹은 희생함을 가리킨다고 하였다.

=====10:14,15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 여기 목자와 양이 서로 안다는 것은 어떤 지식을 말함인가? 예수님이 그의 백성(양)을 아신다는 것은, 그들이 선택되어 그의 것이 되었기 때문에 그가 그들을 아신다는 뜻이다(민16:5; 딤후2:19). 그것은 그의 전지(全知) 성품에 의한 것이다. 그리고 그의 백성이 그를 안다는 것은 성령에 의하여 성립된다. 이것은, 성부자(聖父子)의 서로 아심과 같이 신령하고 정확하다. 그러므로 이 지식은 인간의 자율적인 지식이 아니다. 마11:27 하반에 말하기를, "아들과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고 하였다. 볼트만(Bultmann)은, 여기 양이 목자를 안다는 지식이 노시스(Gnosis)의 실존 각성(Seinsverstandnis, Existenzverstandnis)과 유사하다고 한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곧, "이와 같은 지식은 노시스 신미 문건에서 왔을 터인데, 그 지식은, 아는 자와 알리운 자가 서로 일체로 관련된 사실을 결정함이다. 그런 지식은 이론적 지식이 아니고(nicht ein rationales, theoretisches Erkennen), 속에서 일어나는 것으로 실존적으로 결정함이다"라고 하였다(ein Innerwerden, in seiner ganzen Existenz bestimmt ist.-Johannes Evangelium, p.290). 그는, 요한 복음의 이 부분 사상이 분명히 노시스를 배경하고 있다고 한다(Der gnostische Hintergrund dieser Gedankenbildung ist unverkennbar.-Johannes Evangelium, p. 285). 그러나 신약이 말하는 양과 목자 사이의 지식은 그런 빌려온 것(Lehnsatz)이 아니다. 요한 복음의 구속자(목자)는 노시스 문헌의 그것과 다르다. (1) 사도들이 전파한 그리스도는 명백한 역사적 인물로서 죽었다가 다시 살으셨고, 노시스(만데안 문학)에서 말한 구속자는 전사 시대(前史時代)의 신화적 인물에 불과하다. (2) 사도들이 전파한 구속자(救贖者)는 유신론적(有神論的)이고 구원사적(救援史的)인 구속자요, 노시스에서 말한 구속자는 이원론적인 우주 세력들과 싸운 상상적인 전쟁 영웅이다.

=====10:16
또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할 터이니 저희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 - 이것은 이방 선교에 대한 예수님의 사명을 가리킨다. 이방 선교에 대하여는 벌써 구약에 많이 예언되었다. 사 49:1-13, 52:13-15, 53:10-12;미 4:2; 슥 8:23; 마 8:11 참조. 선한 목자 되시는 예수님께서 그 백성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하여 죽으심으로만 이런 놀라운 선교가 시작되겠으므로, 그의 목숨 버리신다는 말씀이 이 귀절 앞뒤에 배치되어 있다. 뱅겔(Bengel)은, 하나님 백성의 통일성을 위하여 아름다운 목자도 한 분(예수님)이심을, 이 귀절이 지적한다는 의미로 말하였다.

=====10:17,18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것은 내가 다시 목숨을 얻기 위하여 목숨을 버림이라 이는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 하시니라 - 이 점에 있어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사랑을 받으신 이유가 그의 목숨 버리심과 다시 사심에 있다는 것을 주목한다. 예수님은 영원하신 성자(聖者)이시니 존재론적으로 영원토록 아버지의 사랑을 받으신다(5:20). 그러나 그가 인성(人性)을 입으시고 세상에 오시는 때에 구속 사업의 사명을 받으셨으므로, 그의 사명에 순종하신(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심) 그 만큼 아버지의 사랑을 받으신 방면도 있다.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곧, 그가 목숨을 버리시는 것과 다시 사시는 것이 순연히 독자적(獨自的)인 의지(意志)로 순종하심이라는 것을 가리킨다. 특히 그 위의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한 말씀이, 그 사실을 역설(力說)한다. 여기 이 말씀은, 하나님 아버지도 예수님의 생명 버리심을 강요하시지 않는다는 뜻을 포함한다. 곧, 하나님 아버지도 성자(聖子)의 생명을 빼앗을 처지에 계시지 않다는 말이다. 그는 순연히 자유 의지로써 단 마음으로 순종하신 것 뿐이다. "계명"이란 말은 하나님 앞에서 받으신 사명을 의미한다.

=====10:19-21
이 말씀을 인하여 유대인 중에 다시 분쟁이 일어나니 그 중에 많은 사람이 말하되 저가 귀신 들려 미쳤거늘 어찌하여 그 말을 듣느냐 하며 혹은 말하되 이 말은 귀신 들린 자의 말이 아니라 귀신이 소경의 눈을 뜨게 할 수 있느냐 하더라 - 예수님의 말씀으로 인하여 듣는 자들이 두 편으로 갈렸다. 언제나 진리는 이 세상에서 전적으로 환영 받지 못한다. 그 이유는, 이 세상에는 하나님께 속한 자들이 있는 반면에 마귀에게 속한 자도 있기 때문이다(창 3:15).

=====10:22,23
예루살렘에 수전절이 이르니 때는 겨울이라 예수께서 성전 안 솔로몬 행각에서 다니시니 - "수전절"은, 유다의 매코비가 성전을 중수(重修)한 뒤에 그것을 기념하는 절일을 정했는데, 그것을 말함이다( .매코비 4:51, .메코비 10:5-8). 이날은 12월 25일이다. "솔로몬 행각"은, 비를 피하기 위하여 시설한 현관과 같은 것을 가리킨다. 팔레스틴에는 12월이 우기(雨期)이므로 예수님께서 그 때에 솔로몬 행각에 다니신 듯하다.

=====10:24
유대인들이 에워싸고 가로되 당신이 언제까지나 우리 마음을 의혹케 하려나이까 그리스도여든 밝히 말하시오 하니 - 주님께서는 자기가 메시야이신 사실을 직설(直說)하심보다, 흔히 비유적으로 하시고 밝히 말씀하시지 않았다. 그가 그렇게 하신 이유는, 그 때 민중의 메시야 관념이 그릇되어서 정치적 메시야를 기대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때에 유대인들은 예수님더러 그의 메시야이신 여부를 "밝히 말하시오"라고 한다.

=====10:25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였으되 믿지 아니하는도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행하는 일들이 나를 증거하는 것이어늘 - 이 말씀에는, 예수님의 메시야격에 대한 두 가지 증거가 나타났다. (1) 그의 말씀의 증거는 언제나 흔들리지 않음. 예수님의 말씀은, 신자들이 등한히 해도 언제나 살아 역사(役事)한다. 그의 말씀을 오해하고 선전하는 자들이 많아도 그의 말씀은 그대로 살아 있다. 그 뿐 아니라, 그의 말씀을 반대하는 자들이 많아도 그의 말씀은 계속 살아 있다. 그것이 그렇게 되는 이유는, 그의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마 24:35에는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였고, 요 8:51엔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내 말을 지키면 죽음을 영원히 보지 아니하리라"고 하였다. 예수님의 말씀은 이렇게 권위 있고 진실하다. (2) 예수님의 행하는 일들이 그를 증거함. 예수님의 일은 어떤 것인가? 그것은 그의 이적들을 가리킨다. 현대인은, 기독교에서 그 이적 요소를 제외하려고 한다. 그러나 그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기독교는 이적으로 된 종교인데 거기서 이적을 제외하고 믿으려고 하는 것은, 돌 집에서 돌을 모두 다 뽑아 버리고 남은 데서 살아 보려는 것과 같은 어리석음이다. 그런데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그리스도의 이적은 구원사적(救援史的)인 진실과 구속적인 사랑을 그 성립 요소로 한다는 것이다. 메시야께서 이런 권능을 행하시리라는 것은 구약에 예언되어 있는데(사 29:18, 35:5-6), 그것이, 과연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졌다. 그것을 가리켜 구원사적 이적이고 한다. 이것을 보고도 믿지 않음은 메시야를 보고도 믿지 않는 죄악이다.

=====10:26
너희가 내 양이 아니므로 믿지 아니하는도다 - 우리가 하나님을 알기 전에 먼저 하나님이 우리를 아셨다(벧젠 1:2). 곧, 그가 우리를 택한 백성으로 삼으셨으므로, 우리가 그를 믿게 된 것이다. "양"이란 말은 택한 백성을 비유한다. 사람들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믿게 할 증거들은 많이 나타났다. 그 증거들은 하나님의 진실성에 의하여 완전하게 나타났다. 기독교는 이렇게 가장 믿을만하게 된 유일하고도 진정한 종교이다. 그래도 믿지 못하는 자들이 있다면, 그들은 쌀이 가득한 창고 안에서 굶어 죽는 자들과 같고, 샘 앞에서 목 말라 죽는 자들과 같다. 결국 그들은 영생의 복을 받도록 택함이 되지 못한 자들이다.

=====10:27
이 귀절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양(택한 백성)의 성질이 어떠함을 밝혀준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음성(하나님 말씀)을 알아 듣고 따른다(닮는다)는 것이다. 그들이 그리스도의 음성을 안다는 것은 그리스도에게 대한 그들의 편애(偏愛)가 아니고,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먼저 택하신 사실에서 일어난 반응이다. 그것은, "나는 저희를 알며"란 말씀이 밝혀 준다.

=====10:28,29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테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저희를 주신 내 아버지는 만유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 - 이 귀절들은, 그리스도의 양 된 자의 행복에 대하여 말한다. 그 행복은 그들이 영생을 받음이다. 아무도 그들의 받은 영생을 빼앗지 못한다. 그 이유는, 만유보다 크신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지키시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목적은, 그의 양 된 자들, 곧, 참된 신자들로 하여금 그 받는 구원의 불변성을 알고 안전감을 느끼게 하려는 것이다. 그의 양 된 자들은 힘있는 원수들에게 둘러 싸였고, 그들 자체는 심히 연약하다. 그러나 그들의 의뢰한 자가 그들의 의탁한 것을 그 날까지 능히 지키실 줄을 그들은 확신한다(딤후 1:21). 하나님의 양 떼인 교회는, 악한 것들이 가득한 세상에 놓여 있어도 근심할 것 없다. 악한 것들도 하나님의 주권에 복속하지 않을 수 없다. 28절 상반 말씀은, 7-10절의 사상과 연락하고 나온다. 곧, 이 귀절은, 그리스도께서 그 백성에게 영생을 주신다고 하는 사상을 재음미한다. "주노니"라는 말(* )은 현재 동사로서, 현대시 곧, 신약 시대에 세계적으로 신자들에게 영생 주시는 운동이 시작됨을 염두에 둔 말이다.(E.Smilde, Leven in de Johanneische Geschriften, p.111). 그리고 28절 하반(29절도 참조)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고 한 말씀은, 11-18절의 사상을 재음미한다. 그리스독게서 그 양들을 위하여 원수들(도적, 갇도 같은 자들)과 싸워 이기시므로, 양들은 영원토록 안전하다. "저희를 주신 내 아버지는 만유보다 크시매"란 문구(* )에 대하여, 우리 한역과 같이 번역된 것을 찬성하는 학자들도 있다. (Godet, B. Weiss, Bernard). 그런 경우에는, 이 문구의 의미가 양들(신자들)을 그리스도에게 주신 하나님이 만유보다 위대하시다는 뜻이겠다. 그러나 스밀데(Smilde)는 이 문구를 우리 한역의 각주(脚註)와 같이 번역하여,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것이 만물보다 크매"라고 하였다. 그리고 그는, "주신 것"이란 말이 신자들을 총칭한 것이라고 하며, 또 말하기를, "신자들은 시간 세계에서나 영원한 세계에서나 하나님의 은혜로운 역사의 대상이고 그리스도의 소유니만큼, 만물보다 크다고 할 수 있다. 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승리자들이다. 그들은 원칙에 있어서는 벌써 세상을 이긴 자들이다. 그들 중

====10:30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하신대 - 28절에서는 하나님의 택한 백성을 예수님의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다고 하였다. 그 이유로서 29-30절 말씀이 나왔다. 그들을 아버지의 손에서 빼앗지 못한다는 것은, 예수님의 손에서 빼앗지 못한다는 것과 같다. 그 이유는, 아버지와 아들 예수님은 일체이시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고 하심은, 본질적으로 그가 아버지로 더불어 일체로서 영원하신 하나님 아들이시기 때문이다. 그와 동시에, 그는 아버지의 계시자(啓示者)로서 세상에 보내심을 받아 아버지의 뜻을 완전히 순종하시는 것 만큼, 그의 모든 행동은 곧바로 아버지의 행동과 완전히 일체(一體)였다.

====10:31,32
유대인들이 다시 돌을 들어 치려 하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아버지께로 말미암아 여러가지 선한 일을 너희에게 보였거늘 그 중에 어떤 일로 나를 돌로 치려 하느냐 - 그 때 유대인들은 자칭 경건하다고 하며, 거짓 선지자를 돌로 치라는 성경 말씀(신 13:5)을 실행한다는 의미에서 이런 악행을 연출하였다. 그러나 예수님은 담대히 답변하신다. 그 답변은, 유대인들의 완강한 불신앙을 지적하신 것이니, 곧, 그들이 너무도 하나님의 계시(啓示)를 몰라 본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계시가 어떻게 완전하고 철저함에 대하여는 다음과 같은 말씀들이 보여준다. 곧, "아버지께로 말미암아", "여러가지 선한 일", "너희에게 보였거늘"이란 말씀들이다. (1) "아버지께로 말미암아"란 말은, 그의 하신 선(善)이 하나님께서 그를 보내신 사실이 증명될 것이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그것을 알아 보지 못했으니 그들의 불신앙은 현저하다. (2) 그 뿐 아니라, 그 선한 일이 한 가지만 아니고 여러가지였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불신앙 하였다. (3) 또 그 뿐 아니라, 그런 선한 일들을 그들에게 밝히 보였으되 그들은 불신앙 하였다. "보였거늘"이란 말의 헬라 원어(* )는, 모든 사람이 볼 수 있도록 공중 앞에서 행한 것을 가리킨다. 이렇게 밝히 보여주었으되, 그들은 강팍하여 아직도 믿지 않았다.

=====10:33
유대인들이 대답하되 선한 일을 인하여 우리가 너를 돌로 치려는 것이 아니라 참람함을 인함이니 네가 사람이 되어 자칭 하나님이라 함이로라 - 유대인들의 불신앙의 철면피는 저렇게 두텁다.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을 대적하면서도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듯이 자처한다. 곧, 그들이 하나님께 특별히 충성하는 듯이, 예수님의 발표하신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하신 말씀을 책잡아 그것이 "참람"한 말이라고 한다. 그들은, 예수님의 그 말씀이 진리와 시실에 근거한 여부는 알아 보지 않고 먼저 정죄한다. 그것은 그들의 교만과 편견과 시기에서 나온 행동이다.

====10:34-36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 율법에 기록한 바 내가 너희를 신이라하였노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성경은 폐하지 못하나니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을 신이라 하셨거든 하물며 아버지께서 거룩하게 하사 세상에 보내신 자가 나는 하나님 아들이라 하는 것으로 너희가 어찌 참람하다 하느냐 - 여기 "율법"이란 말은 시 82:6을 가리킨다. 시편을 왜 율법이라고 하였는가? 그것은 다음과 같이 설명된다. 곧, 모세의 율법이 구약의 처음부분에 있는 것만큼, 예수님 당시의 사람들이 구약 전체의 책 이름을 "율법"이라고 하는 풍속이 있었다. 요 12:34, 15:25; 롬 3:19; 고전 14:21 참조 시 82:6에는 재판장들을 가리켜 "신들"이라고 하였는데, 그것은, 재판장들이 신(神)의 시키심을 받아 재판을 대행(代行)한다는 의미에서 그렇다는 말이고, 그들 자신이 영원한 신들이라고 함은 아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의 신격(神格)이나 신자격(神子格) 주장의 정당성을 이 시구에 두셨다. 그것은 얼른 보아 예수님도 순 인간으로서 신의 시키시는 일을 맡은 의미의 하나님 아들이고, 영원 자존하신 하나님 아들(Ontological Sonship)이 아님을 증거하시는 것 같이 보인다. 그러나 이 시구에 근거한 예수님의 논증의 귀결은, 추론의 등위적 이론(等位的理=Analogical argument)이 아니고 강이유 결론(a fortiori)이니, 곧, 보통 인간들도 신의 시키심을 받은 자라면, 그 본질에 있어서는 신(神)이 아니로되 그들을 "신들"이라, 또는 "자존자의 아들들"(시 82:6)이라고 하였거든, 하물며 아버지께서 거룩하게 하사 세상에 보내신 영원하신 하나님 아들이야 말할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결론이다.

====10:37,38
만일 내가 내 아버지의 일을 행치 아니하거든 나를 믿지 말려니와 내가 행하거든 나를 믿지 아니할지라도 그 일은 믿으라 그러면 너희가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음을 깨달아 알리라 하신대 - 여기 "내 아버지의 일"이란 말은 그가 행하신 이적들을 가리킨다. 그는, 그의 이적 행하신 사실을 저 불신앙자들 앞에 도전적으로 내세우신다. 그것은, 그 이적들의 역사성과 진실성에 대하여 천하가 공인한 사실을 지적함이다.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이적들은, 어떤 한 구석에서 되어진 것이 아니고 대중이 주목하는 공석에서 되었으며,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과 같은 강퍅한 교권자들이 끈질기게 책잡으려는 무서운 눈초리 앞에서 성립된 일들이다. "그 일은 믿으라."이것은, 그의 행하신 이적들이 초자연적이고, 사람으로는 할 수 없는 것이고, 하나님 아버지께서 예수님 안에 계신 표적인 사실을 믿으라는 뜻이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다 함은, 하나님께서 땅에 있는 그의 기관(organ)이라고 할 수 있는 인간성(예수님)에게 하늘의 모든 부요(富嶢)를 충만히 전달시킨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아버지(하나님) 안에" 계신다 함은, 그리스도께서 전적으로 자기를 포기 하시므로 하나님 아버지의 모든 부요에서 모든 것을 가져오심을 가리킨다(Godet). 예수님의 이적은, 저렇게 땅에 계시면서 하늘에 계시는 (3:13) 오묘를 보여준다. 그것은 내세(來世)의 새 하늘과 새 땅의 영광을 예표하는 것이다. 바빙크(Bavinck)는 말하기를, "내세는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완성되는 것이니 거기 의(義)가 거한다. 그 때에는 이적과 자연이 하나가 된다. 그 때에는 하나님 나라와 세상 나라가 하나가 된다"라고 하였다(Geref. Dog. Uitgave van J.H Kok Te Kampen 1928, Vol I, p.311).

====10:39
저희가 다시 예수를 잡고자 하였으나 그 손에서 벗어나 나가시니라 - 아직도 때가 이르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허락하시지 않으므로 원수들이 그를 해하지 못하였다.

======10:40,41
다시 요단강 저편 요한이 처음으로 세례 주던 곳에 가사 거기 거하시니 많은 사람이 왔다가 말하되 요한은 아무 표적도 행치 아니하였으나 요한이 이 사람을 가리켜 말한 것은 다 참이라 하더라 - 예수님은, 불신 유대인들의 핍박을 받아 예루살렘에서 떠나 요단강 저편으로 가셨다. 그곳은 물론 적막한 땅이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곳에도 대중으로 하여금 그를 따르게 하셨다. 그들이 예수님을 믿은 이유는, 세례 요한의 이적(세례 요한은 이적을 행치 않았음)을 본 까닭이 아니고 그의 증거한 말(그의 메시야 증거)이 참된 까닭이었다. 말의 진실성은 이렇게 귀하다.



10;1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 그리스도께서는 교회의 목자(牧者)라고 자부하고 있는 서기관과 제사장들을 상대로 말씀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자기의 가르침을 그들에게 전달하기 위해 목자라는 칭호를 그들로부터 제거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믿는 자의 수가 적은 것도 그의 가르침의 권위를 약화시킬 수 있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교회 내에서 자기 위치를 주장하는 사람들을 모두 목자나 양으로 간주해서는 안된다고 강조하고 있다. 올바른 목자와 잘못된 목자를 구분하고, 참된 양과 거짓된 양을 구별하자. 그 기준은 그리스도께서 친히 모든 것의 목표와 시작과 끝이 되느냐 하는 데에 있다.
이 경고는 어느 시대에나 매우 유익한 것이었다. 이러한 경고는 오늘날 특별히 더 필요하다. 이리가 목자의 탈을 쓰고 돌아다니는 것보다 교회에 더 파괴적인 질병은 없다. 우리는 타락한 이스라엘인이나 사생자가 교회의 자녀로 행세하며 믿는 성도들을 이기고 승리할 때 그것이 얼마나 심각한 범죄인가를 알고 있다. 거의 모든 세계를 통하여 교회는 이 두 가지 악으로 인하여 피해를 입어왔다. 그러나 오늘날 교회의 가장 큰 원수들에 의하여 하나님의 성전이 채워지고 있는 것을 보는 것보다 무지한 자와 연약한 자들에게 더 경종이 되는 것은 없다. 왜냐하면 교회의 목자들이 신랄하게 저항하고 있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가르침이라는 사실을 그들에게 이해시키기가 더욱 쉽지 않기 때문이다. 더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거짓된 가르침에 의하여 오류에 빠지고 있는 때에, 사람들은 각각 다른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또 기다린다. 그래서 스스로 바른 길을 찾아 들어가는 사람은 별로 없다.
그러므로 만일 우리가 스스로 자의에 따라 자신을 이리와 강도에게 내맡기기를 원치 않는다면, 우리는 특별히 거짓 목자나 양에게 속지 않도록 경계를 게을리해서는 안될 것이다. '교회'라는 명칭은 존귀한 것이고 또 마땅히 그래야 한다. 그러마 교회가 더욱 존귀히 여김을 받는 만큼, 참된 교회와 거짓 교회의 차이를 살피는 데에 우리는 더욱 더 조심과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여기서 목자라는 칭호를 가지고 자격을 주장하는 사람들을 우리가 함부로 목자로 간주해서도 안되며, 외적인 표시를 자랑하는 자들을 다 양으로 간주해서는 안된다고 분명히 말씀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유대인의 교회에 대하여 말씀하고 계시지만 우리의 교회도 이런 점에서 다를 것이 없다. 우리도 또한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시는 목적을 깊이 생각함으로 연약한 양심의 소유자들이 목자의 자리에 앉아 교회를 다스리며 복음을 대적하고 반대하는 것을 볼 때 놀라거나 실망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크리스챤이라고 불리우는 사람들 가운데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경청하는 동료 크리스찬이 별로 없다고 하여 믿음에서 이탈해서는 안될 것이다.
양의 우리에 문으로 들어가지 아니하고 - 내 의견에는 이 비유의 각 부분을 매우 상세히 음미하지 않는 사람은 시간을 낭비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교회를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모으는 양의 우리에 비유하고 있으며 자기 자신을 문에다 비교하고 있다는 일반적인 견해로 만족하도록 하자. 그리스도께서는 교회에 들어가는 유일한 입구가 되시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사람들을 그리스도에게 곧 바로 인도하는 목자만이 선한 목자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자신을 그리스도에게만 내맡기는 사람들만이 하나님의 우리에 들어와 그의 양떼로 여김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그 가르침을 두고 하는 말이다. 그리스도 안에 모든 지혜와 지식의 보화가 감추어져 있기 때문에(골2:3) 그리스도를 떠나 다른 곳으로 가는 사람은 잘못된 길로 탈선하는 것이고 문으로 들어가는 것도 아니다. 그리스도를 자기 선생으로 멸시하지 않는 사람은 교회가 무엇이며 경청해야 할 목자가 누구인가에 대하여 많은 사람을 당황하게 하거나 망설임을 갖지 않을 것이다. 소위 목사라는 사람들이 만일 우리를 그리스도로부터 멀리 유인하려 한다면 우리는-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대로-그들이 절도나 강도인 것처럼 그들로부터 피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복음의 순수한 신앙에 화합하지 않는 어떠한 단체나 모임에도 가입하거나 머물러 있어서는 안되겠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제자들에게 믿지 않는 무리에게서 분리될 것을 권고하고 있으며 또 불경건한 제사장에 지배되거나 교만하고 허황된 이름(칭호)에 사로잡히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말라고 권면하시는 것이다.

10:3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 어떤 사람이 여기서 문지기는 하나님을 두고 하는 말이라고 한다면 나는 이를 반대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심지어 목자를 인정하는 데에 있어서 하나님의 판단과 사람의 거짓된 의견을 직접적으로 대조시키고 있는 것 같다. 그리스도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다. "세상에는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칭친하고 기꺼이 높여주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정사와 권세를 잡고 계신 하나님께서는 양떼를 바른 길로 인도하는 사람들만을 인정하시고 승인한다."
주님께서 자기 앙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낸다고 말씀하실 때, 나는 그것을 믿음의 상호 동조를 가리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제자와 선생은 같은 하나님의 성령에 의해서 연합되어 있어 선생이 앞서 가면 제자가 따라가게 마련이다. 어떤 이는 이것이 목자가 각 양에 대하여 가져야 할 밀접한 이해와 정도를 표현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나는 이러한 해석은 약간 의미가 약하다고 생각한다.

10:4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고로 따라오되 - 비록 그리스도께서는 여기서 사역자들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지만, 주님은 그들의 말보다도 하나님께서 그들을 통하여 하시는 말씀을 사람들이 경청하기를 바라고 계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한 분만이 교회의 신실한 목자로서 그의 양떼를 다스리신다고 하는 예외적인 사실에 우리는 유의해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양들이 따라가는 이유가 무엇인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것은 양들이 음성을 듣고 그 음성에 따라 목자와 강도를 구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진리와 사람의 거짓된 의견을 구분할 수 있는 분별의 영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양떼 가운데는 첫째 진리에 대한 지식이 있고, 그 다음으로 순종하기를 원하는 간절한 소원이 있다. 따라서 이들은 진리가 어떤 것인지를 알 뿐만 아니라 충심으로 그 진리를 받아들인가. 주님께서는 양들이 목자의 음성을 듣고 순복하고 따를 뿐만 아니라, 낯선 사람의 음성에는 귀를 기울이지도 않고 누가 그들에게 소리를 지른다고 해서 흩어지는 일도 없기 때문에 믿음의 순종을 칭찬하고 있다.

10;6
예수께서 이 비유로 저희에게 말씀하셨으나 저희는 그 하신 말씀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니라 -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의 지혜를 교만스럽게 내세워 그리스도의 빛을 거절했다. 아주 분명한 일에 대하여 그들은 둔했기 때문이다. "저희는 그 하신 말씀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니라"는 말씀에 대한 헬라어 번역은 몇가지가 있다. 어떤 사본은 "저희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니라"고 번역하고 있다. 칼빈이 사용한 번역은 "저희는 그가 하신 말씀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니라"로서 결국 같은 뜻이다. 세번째 번역은 "저희는 자신에 대하여 말씀하신 분이 곧 하나님의 아들임을 알지 못했다"고 되어 있으나 이것은 별로 환영을 받지 못하고 있다.

10:7
나는 양의 문이라 - 이 설명이 주어지지 않았다면 본문 말씀은 비유로 끝났을 것이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자기가 문이라고 선언함으로써 이 비유의 주요부분을 더 명확히 해명하고 있다. 이 말씀의 요지는 영혼에 영양을 공급해주는 모든 영적인 가르침의 핵심은 그리스도에게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목자 중 한 사람이었던 바울도 "내가 예수 그리스도......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다"(고전2:2)고 말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 표현은 우리 모두는 함께 모일 때에 그리스도 한 분에게로 모여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구원을 바라는 사람은 모두 자기에게로 나아오라고 초청하며 권면하시는 것이다. 이 말씀은 또한 그리스도를 떠나 하나님을 찾는 이들은 헛된 방황을 하고 있을 뿐이라고 말하고 있다. 오직 한가지 문만이 열려 있고 다른 문은 모두 닫혀있기 때문이다.

10:9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 경건한 자들에게는 그들이 그리스도를 영접한 후에 위험에서 벗어났다는 말을 듣는 것보다 더 큰 위로가 없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에게 구원과 행복한 나라를 약속하시기 때문이다. 그후에 주님께서는 그들이 어느 곳으로 가든지 안전히 행할 것이며 충분한 꼴을 먹게 되리라고 두 부분으로 나누어 표현하셨다. '들어가며 나오며'라는 표현은 성경에서 종종 인생의 모든 활동을 희미한다. 이는 프랑스어에서 '거한다'(aller et venir)의 뜻으로 쓰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이 말씀에 따라 복음은 우리에게 두가지로 도움을 주고 있는데, 첫째 복음에서 우리의 영혼은 영양을 공급받는다. 복음이 없다면 우리의 영혼은 굶주림으로 기진할 것이며 바람만을 먹고 허기가 질 것이다. 또한 주님은 이리와 강도의 공격에 대항하여 우리를 지켜주는 신실한 보호자가 되신다.

10:10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 뿐이요 - 이 말씀으로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주의를 끌고 있다. 우리가 졸며 방심할 때 사단의 사자는 우리를 공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무관심은 사방에서 거짓된 가르침을 받을 수 있도록 우리를 열어 놓는다. 그러므로 이러한 경신(經信)으로 인하여 그리스도 안에 거했어야 할 많은 이들이 수 없이 많은 오류를 범하였다. 많은 거짓 선생들에 대한 충분한 두려움과 방어자세를 갖추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뿐만 아니라 우리의 억제할 수 없는 호기심은 인간의 고상하고 이상한 철학과 이론을 좋아하기 때문에 우리 스스로 강도와 절도를 찾아 뛰어 든다. 그리스도께서 거짓 선생들이, 아무리 교묘하게 스스로를 가장하고 나타날지라도, 죽음에 이르는 독소를 전파한다고 말씀한데는 이유가 있다. 우리는 그들을 멀리하도록 더욱 더 각별한 경계를 해야 할 것이다. 바울의 경고도 우리에게 비슷한 주의를 환기시키고 있다.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노략질할까 주의하라"(골2:8).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다 - 이것은 또 하나의 비교다. 그리스도께서는 앞에서 자신을 문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이 문으로 양을 인도하는 자들을 참된 목자라고 했다. 이제 주님께서는 친히 목자의 역할을 담당하신다. 그리고 자신이 유일한 목자임을 확인하고 있다. 사실 이러한 영예와 호칭은 다른 누구에게도 적용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교회의 신실한 목자들을 일으키고 그들에게 필요한 은사를 공급해 주시고 성령으로 그들을 다스리고 그들을 통하여 역사하시는 분이 바로 주님이기 때문에, 그들은 주님께서 그의 교회의 유일한 주관자가 되시는 것을 막지 않고 또 주님이 유일한 목자장으로서 다스리는 것을 막지 않는 것이다. 비록 주님께서 그들을 통하여 그의 사역을 이루시지만 그는 자신의 능력을 따라 목자장의 직분을 이행하는 일을 멈추지 않는다. 그리고 그들은 주님께서 유일한 참 선생님이 되신다는 점에서 그의 명예를 손상시키지 않는 범위 내에서 교사와 선생인 것이다. 간단히 말해서 목자라는 말이 사람에게 적용되었을 때, 그것은 종속적인 의미에서 사용된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이와 같은 위치에서 자신의 영광을 그의 사역자들에게 나타내기 때문에 그는 그들과 전체 양떼의 유일한 목자장이 되신다.
이제 주님께서 자기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하실 때, 주님은 그의 목자의 지팡이에 순복하지 않는 자만이 강도와 절도의 공격을 받게 된다고 말씀하고 있다. 사실 어떤 사람이고 믿음이 성장하는 만큼, 그는 그만큼 더 풍요한 생명을 누리게 된다. 생명이 되시는 성령께서 그 안에서 더 흥왕하시기 때문이다.

10:11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 양들을 향한 그의 특이한 사랑으로부터 주님은 자기가 참으로 그들의 목자로서 행동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주님은 그들의 구원을 너무나 간절히 원하시기 때문에 자기 자신의 생명도 아끼지 않으셨다. 여기서 우리는 이와 같이 친절하고 사랑스러운 목자의 보호를 거절하는 사람들은 전혀 은혜를 모르는 자들로서 수백 번 멸망을 당해 마땅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여기서 우리가 교회 정치에서 바라는 것이 무엇이며 피할 것과 참을 것이 무엇인가를 깨달을 수 있다고 한 어거스틴의 말은 사실이다. 교회가 선하고 부지런한 목자들의 다스림을 받는 것 보다 우리에겐 더 바랄 것이 없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이 그의 교회를 안전하고 건전하게 지키는 유일한 목자장으로, 첫째는 자신이 직접, 둘째는 자기의 도구(사역자)를 통하여 교회를 보전한다고 말씀하고 있다. 어디든지 질서가 잡혀있고 적절한 사람이 다스리고 있는 곳은 그리스도께서 사실상 목자장으로 역사하고 있는 곳이다. 그러나 목자의 가면을 쓰고 사악하게 교회를 해치는 절도와 강도가 얼마든지 있는 것이다. 그들이 어떤 이름으로 나타나든 그들을 피해야 한다고 그리스도께서는 말씀하고 있다. 교회 내에 있는 삯군 목자들이 제거될 수 있다면 그만큼 좋을 것이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이와 같은 방법으로 신자들의 인내를 단련하시고 있고 또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참된 목자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출현하는 놀라운 축복을 받을 자격이 없기 때문에, 그들이 싫고 인정할 수 없는 자들이라 하더라도, 그대로 용납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10:25
내가 너희에게 말하였으되 믿지 아니하는도다 - 주님께서는 자기가 그리스도라는
것을 숨기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이 배울 준비가 되어 있는 것처럼 그들에게 가르치지
도 않으신다. 오히려 주님께서는 그들의 완악함을 책망하고 계신다. 그것은 비록 그들
이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일을 통하여 가르침을 받았는데도 그것이 그들에게 아무
런 유익을 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그들이 자기를 알아보지 못하
는 것은 그들 자신의 잘못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나의 교훈은 그 자체가 쉽게
될 수 있는 것이다. 책망의 말은 너희가 들어야 한다. 너희는 악의적으로 하나님을 대
항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서 그는 그들의 이중적인 완악함을 지적하기 위하여 자기의 행하는 일들을
말하고 있다. 그들이 만일 하나님께 감사할 줄 아는 자들이었다면 그의 교훈 이외에도
그가 행하는 표적이 훌륭한 증거가 될 수 있었다. 주님께서는 두번씩이나 그들이 스스
로 그의 가르침에 대하여 귀를 막고 또 그의 일에 대하여 눈을 감고 있음을 증거하기
라도 하듯이 "너희가 믿지 아니하는도다"라고 말씀하셨다.

10:26
너희가 내 양이 아니므로 믿지 아니하는도다 - 주님께서는 여기서 그들이 기적도,
교훈도 믿지 아니하는, 보다 더 근본적인 이유를 제시하고 있다. 그 이유는 그들이 버
림받은, 잃어버려진 양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목표하는 바에
유의하여야겠다. 그들은 스스로 하나님의 교회롤 자부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이 믿
지 아니함이 복음의 힘을 약화시키는 일이 없도록, 주님께서는 믿음이 특별한 은사라
고 확언하고 있다. 그리고 사실 사람이 하나님을 알려하면, 바울이 말하고 있는 것처
럼(갈4:9) 먼저 하나님께 알려진 바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반면에 하나님께서 알아보
지 못하는 사람들은 필연적으로 하나님을 등지고 있게 마련이다. 만일 어느 사람이 믿
지 않는 불신의 원인은 하나님께 있다고 말한다면-양을 만드는 것은 하나님만이 하실
일이니까-나는 하나님께는 전혀 잘못이 없다고 대답할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
를 거절하는 것은 오직 그들 자신의 자발적인 완악함에 원인이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
께서는 자신에 대한 믿음을 자아내는데 필요한 것을 모두 행하신다. 그러나 길들지 않
은 들짐승은 하나님의 성령에 의하여 먼저 '양'으로 변화되기 전에는 결코 길들일 수
가 없는 것이다. '길들지 않은 짐승'은 자신의 난폭한 원인에 대해 하나님을 탓한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는 헛된 일이다. 길들지 않은 짐승은 그들의 타고난 성품에 기인하
는 것이기 때문이다. 간단히 말해서, 그리스도께서는 자기의 복음에 순종하는 자들이
소수에 불과하더라도 그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라고 말씀하고 있다. 하나님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믿음의 순종에 이르지 못하는 자들은 모두가 사납고 길들지 않은 짐승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복음의 권위가 사람의 승낙 여하에 따라 좌우된다는 것은 용납할 수
도 없고 이치에도 맞지 않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이 어두움 가운데 남아 있을 동안에,
믿는 사람들은 성령의 깨우침에 따라 그리스도에게 인도되었다는 사실을 생각한다면
신자들은 주님께 더 단단히 매여 있음을 인식하게 될 것이다. 이것은 또한 복음의 사
역자들에게 위로가 된다. 이들의 수고는 모든 사람에게 골고루 유익을 주지 못하기 때
문이다.


10:27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 - 주님은 진
위를 대조시킴으로써 그들이 양이 아님을 증명하고 있다. 그들은 복음을 순종하지 아
니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자기가 택한 자들을 헛되이 부르지 않는다. 그리스도의 양
은 그들의 믿음에 의하여 증명되기 때문이다. 과연 믿는 자들은 자신을 하나님께 바쳐
목자장의 손에 다스림을 받으며, 처음의 난폭함을 버리고 온유하게 인도함을 받기 때
문에 양이라고 불린다. 비록 대부분의 세상사람들이 그리스도의 말씀에 경청하지 않는
다 하더라도, 주님께는 자기가 아는 그리고 주님 자신에게 알려진 양이 있기 때문에,
이것은 경건하게 주님을 섬기는 교사들에게 적지않은 위로가 된다. 이들은 온 세상을
그리스도의 우리 안으로 인도하려고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자기들이 원하
는 것만큼 성과가 없을 때 이들은 양이 그들의 사역을 통하여 한데 모여들 것이라는
한가지 생각으로 만족해야 할 것이다. 나머지 부분에 대해서는 이미 앞에서 설명한 바
있다.


10:28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의 우리 안에 들어왔
을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확신 가운데 염려하지 말라고 명하시는 것은 믿음의 가
장 가치있는 열매이다. 그러나 어떠한 근거 위에서 이러한 확신을 가질 수 있는가를
알아야 한다. 그 근거는 주님께서 우리의 구원을 신실하게 지켜주는 파수군이 되신다
는 것이다. 우리의 구원은 주님의 손 안에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으로도 충분치
않다는 듯이 주님께서는 양들이 아버지의 권능에 의하여 안전하게 보호될 것이라고 말
하고 있다. 이 귀절은 모든 택한 자들의 구원은 하나님의 능력만큼이나 확실한 것임을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놀라운 귀절이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는 별 생각없이 이 말씀을
공중에 띄우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마음에 깊이 박힐 약속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말씀이 택한 자들의 구원은 확실히 보장되어 있다는 것을
암시해주고 있다고 유추할 수 있다. 우리는 힘센 원수들에 의하여 둘러싸여 있다. 우
리의 연약함은 너무나 큰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언제나 사망에서 멀리 떠나 있지 못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의탁한 것을 지키시는 분은 만유보다 크시고 더 능력이 있는
분이시다. 그러므로 우리의 생명이 위험에 처해 있는 것처럼 두려워할 이유에 의지하
고 있는 가톨릭 교도들의 확신이 얼마나 어처구니 없는 것인가를 알 수 있다. 이와는
반대로 그리스도께서는 자기를 따르는 자들에게 이 세상에서 그들이 수 많은 강도의
굴혈에 둘러싸여 살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라고 가르치고 있으며, 뿐만 아니라 죽음
의 원인이 자기자신 안에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보호에 의뢰할 때에만 안전하게 행할
수 있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다. 간단히 말해서 우리의 믿음은 연약하다. 그리고 그 믿
음은 흔들릴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그의 장중에 붙들고 계시며 우리
원수들의 모든 노력을 단숨에 쓸어버릴 수 있는 능력을 소유하고 계신다. 이를 아는
것은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일이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쉽게 유혹에 대한 두려움에
빠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또한 양들이 어떻게 이리떼 속에서 조용히 살
수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10:29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 - 이 문장에는 '그러므로'라는 접속사
대신에 연사(蓮辭)를 쓰고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능력을 신뢰하면
서 하나님께서 택하신 백성들의 구원은 결코 원수들이 노략질할 수 없다고 말씀하셨
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을 하나님의 장중에 보호하시며 그의 절대적인
능력으로 지키시기 때문이다.

10:30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하신대 - 주님은 경건치 않은 자들의 비웃음에 정면으
로 응해 주기를 원했다. 그들은 하나님의 능력이 그리스도에게 속한다고 믿지 않았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이를 명확히 함으로써 제자들에게 확실한 도움을 약속할 수 있었
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그의 하는 일은 아버지의 일과 너무나 일치되는 것이어서 자
기자신과 그의 양들에 대한 아버지의 도움에는 결코 부족함이 없다고 선언하셨다. 옛
날 사람들은 이 말씀을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와 함께 * (호모우-시
오스)임을 증명하는데 잘못 이용했다. 그리스도께서는 여기서 본질의 연합을 논하고
있는 것이 아니고 자기와 아버지 사이에 존재하는 조화와 일치를 이야기 하고 있다.
그래서 무엇이든지 그리스도께서 하시는 일은 아버지의 능력에 의해서 확증되는 것이
다.


10:31
유대인들이 다시돌을 들어 치려 하거늘 - 경건함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때 그
경건심은 하나님의 영으로 말미암은 조장된 열심으로 불타게 된다. 마찬가지로 불신
(不信)은 분노의 어머니로서, 마귀는 경건치 않은 자들을 충돌질하여 그들로 하여금
살인을 하도록 만든다. 결과는 그들이 그리스도에게 질문을 던졌던 동기가 무엇인지를
보여주고 있다. 그들이 가장하려고 하였던 그들의 저의(底意)가 그리스도의 공개적인
말씀으로 드러나게 되자 그들은 즉시 광분했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비록 그들이
그리스도를 억압하려고 폭력을 행사하려 하면서도, 그들은 하나님께서 거짓 선지자들
을 돌로 치라고 명하셨던(신13:5) 그 율법의 명령대로 행하는 것처럼 율법의 허울 밑
에 숨어 있었던 것이 틀림없다.


10:32
여러가지 선한 일을 너희에게 보였거늘 - 그리스도께서는 여기서 그들이 잔인하게
굴 이유도 없을 뿐더러 하나님의 축복에 대한 그들의 배은망덕을 책망하고 있다. 주님
께서는 그들에게 한 두 가지 선한 일을 했기 때문에 선대를 받아야 한다고 말씀하시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저들에 대하여 여러가지로 은혜를 베풀었다고 말씀하셨다. 그리
고 나서 주님은 그들이 자기자신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 대하여도 감사할 줄을 알지 못
한다고 그들을 책망하고 있다. 주님께서는 아버지의 능력을 그들에게 알리고 증거하는
아버지의 사신(Father's Minister)이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주님께서 '아버지께
로 말미암아'라고 말씀하실 때 그는 아버지께서 자기가 행한 일의 주인임을 뜻하고 있
다. 이 말씀의 요지는 "하나님께서는 나의손을 통하여 너희에게 베푼 놀라운 은혜를
나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알리기를 원하셨다. 너희가 원한다면 자세히 살펴 보라. 내가
너희 중에서 행한 것은 칭찬과 감사를 받아 마땅한 일들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내 안
에 있는 하나님의 은사를 핍박하려는 것이 틀림없다." 그러나 이 말씀은 질문 형식으
로 주어진 만큼 직설적으로 말한 것보다 그들의 양심을 찌르는 힘이 훨씬 크게 작용했
다.


10:33
선한 일을 인하여 우리가 너를 돌로 치려는 것이 아니라 - 비록 경건치 않은 자들
이 하나님께 대항하여 공공연한 싸움을 벌일지라도, 그들은 꼼짝없이 죄의 흉내를 내
지 않고는 견딜 수 없다. 그러므로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에 대항하여 격분할 때 그들
은 이러한 잔인으로 만족하지 않고 이유없이 그를 송사하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수호하
고 주창하는 자들로 자처하고 있다. 선한 양심은 마치 우리에게 무쇠 벽과 같은 것으
로서 우리를 공격하는 모든 중상과 모략을 담대히 물리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그
들이 아무리 아름다운 말로 그들의 완악한 저의를 숨기고 또 우리에게 잠시동안 불명
예를 가져다 준다 해도, 우리가 하나님의 대의를 위하여 싸우고 있다면 주님께서는 그
의 진리를 끝까지 수호할 것이다. 그러나 경건치 못한 자들은 하나님의 종들을 억압하
는 데 갖가지 핑계와 구실을 만들어내며, 그들의 마음은 너무나 뻔뻔스럽게 굳어 있기
때문에 완전히 압도되었을 때에도 비방을 그치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를 끝까지 보
전하려면 우리에겐 인내와 온유가 필요하다. 참람함(blasphemy;훼방)이라는 말은 세상
의 저술가들이 일반적으로 어떤 종류의 비방을 표현할 때 쓰는 말이지만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권위가 손상되거나 모욕을 당했을 때 사용하고 있다.
네가 사람이 되어 자칭 하나님이라 함이로라 - 세상에는 두가지 종류의 훼방이 있
다. 한 가지는 하나님께 마땅히 드려져야 할 영광이 박탈을 당했을 때이고 다른 한 가
지는 하나님의 성품에 맞지 않는 것을 하나님에게 돌릴 때이다. 그러므로 이들은 그리
스도께서 죽을 수 밖에 없는 하나의 인간으로서 하나님의 영광을 횡령하고 있기 때문
에 하나님을 훼방하고 모독하는 참람한 사람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
서 사실 하나의 인간에 불과하였다면 이것은 참람함에 대한 올바른 정의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의 잘못은 그리스도의 신성(神性)이 그가 행한 이적에서 두드러지게 나타
났는데도 이를 깊이 생각하지 않은 데 있었다.


10:34
너희 율법에 기록한바 내가 너희를 신이라 하였노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 그리스
도께서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고 부인함으로써 자기의 누명을 벗지 않고,
오히려 자기가 하나의 아들이라고 말한 것이 옳다는 것을 강조함으로써 자기에게 씌워
진 누명을 벗고 있다. 그러나 그는 문제를 분명히 설명하는 대신에 그의 대답을 신들
(gods)의 복수 인칭에 적용시킴으로써 그들의 비난에 대처하고 있는데, 이는 주님께서
그 당시로서는 그들의 악의를 논박하는 것으로 족하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
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부르는 의미를 직설적으로 설명하지 않고 간접적으로 암시하
고 있다. 주님께서 사용하고 있는 논법은, 동일한 성질로부터의 유추가 아닌, 작은 것
으로부터 큰 것으로의 유도이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영예로운 직분을 맡겼던 사람들은 '신들'(gods)이라고 부르고 있
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다른 어떤 사람보다도 뛰어난 존재로 구분해 주신 그리스도야
말로 이 존귀한 칭호를 받아 마땅한 것이다. 그러므로 전자(前者)를 인정하면서도 후
자의 경우를 역겨워하는 사람들은 악의에 차있고 거짓된 주석가임을 알 수 있다. 그리
스도께서는 시편 82편 6절의 말씀을 인용하고 있는데 여기서 하나님은 자신의 정욕을
위하여 권세를 독재적으로 남용하며 가난한 자를 압제하는 세상의 왕들과 방백들을 권
고하고 계신다. 하나님께서는 그와같이 높은 영예를 내려주신 분에 대하여 무관심하고
또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힌 것에 대하여 재판장들을 책망하고 계신다. 그리스도께서는
이를 현재의 상황에 적용하고 있다. 그들은 신들(gods)이라는 이름으로 단장되었다.
그들은 세상을 다스리는 하나님의 방백들이기 때문이다. 성경에서는 꼭 같은 이유로
천사들을 신들이라고 부르고 있다. 천사들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영광을 세상
에 나타내시기 때문이다.


10:35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을 신이라 하셨거든 - 그리스도께서는 이들이 하나님
으로부터 확실한 명령을 받았음을 의미하고 있다.여기서 우리는 세상의 제국이 사람의
실수나 우연에 의하여 생겨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의하여 세워진 것임을 알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정치 질서가 사람들 사이에 세워져 우리가 정의와 법에 의하여 다
스린 바 되기를 원하셨던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권세를 거스리는 자는 하나님의 명을
거스리는 것이라고 말했던 것이다. "권세는 하나님께로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
는 다 하나님의 정하신 바라"(롬13:1,2). 다른 직업도 역시 하나님께로부터 왔으며,
하나님께서 인정하신 것인데도, 우리는 농부나 목자, 구두 수선공 등을 '신들'이라고
부르지 않는다는 이의(異意)를 제기하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이 '신들'이라는 호칭은
누구에게나 다 적용되는 일반적인 칭호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부르셔서 특별한 사역을
하게 하시는 사람들에게 해당되고 다스리도록 높은 자리에 일으켜 세우신 왕들에 대하
여 이야기하고 있다. 간단히 말해서 '신들'이라 불리고 있음을 알자.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이 옛 백성을 다스리던 가르침 전체를 '율법'이라는 말 속에 포함시키고 있다.
선지자들은 율법을 풀이해서 전달하는 자들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에 시편도 또한 율법
에 대한 부가문으로 간주되었다. "성경은 폐하지 못하나니"라는 말씀은 성경의 교훈은
불가침의 권위를 갖고 있음을 뜻한다.


10:36
아버지께서 거룩하게 하사 세상에 보내신 자가 - 모든 경건한 자들에게 공통되는
거룩함이 있다. 그러나 여기서 그리스도께서는 이보다 훨씬 더 나은 것을 자신에게 적
용하여 말씀하고 있는데, 그것은 자기를 다른 모든 사람들과 구분함으로써 하나님의
능력과 위엄이 그안에 나타나도록 하셨다고 하는 주장이다. 주님께서 앞서 말씀하신
대로, 그리스도는 아버지 하나님의 인치신 자이다(6:27). 그러나 이것은 육신으로 나
타나신 바 그리스도의 위격(person)을 가리켜 하신 말씀이다. 그러므로 이 두 가지가
연합되어, 주님은 거룩하게 되었고 또 세상에 보내심을 받았다. 그러나 우리는 또한
그리스도가 무슨 이유로 어떠한 조건하에 보내심을 받았는지 알아야겠다. 그것은 하나
님으로부터 우리에게 구원을 가져다 주고 갖가지 방법으로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로서
증거하고 나타내 보이기 위한 것이었다.
너희가 어찌 참람하다 하느냐 - 아리안 학파는 이 말씀을 의곡하여 그리스도는 본체
적으로 하나님이 아니며 다만 일종의 부차적인 신성(神性)을 소유하고 있을 뿐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러한 오류는 쉽게 논박할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자기 본체를
논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육신을 입고 행하신 그의 표적으로부터 우리가 알아
보아야 할 그분의 신분을 두고 말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아버지께서 우리
에게 계시하신 구속주(Redeemer)로서 그리스도를 영접하기 전에는 그의 영원한 신성을
깨달을 수가 없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앞에서 본인이 이미 암시한 대로, 그리스도
께서는 여기서 자기의 본체와 신분을 터놓고 분명히 말씀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의
원수들의 비방과 중상을 논박하는 데 화제의 초점을 두고 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되
겠다.


10:37
만일 내가 내 아버지의 일을 행치 아니하거든 - 그리스도께서는 유대인들이 자신
의 거룩함을 자랑하고 헛되이 거룩함에 의지한다고 그를 힐문하지 못하도록 다시 한번
그의 이적을 강조하고 있다. 그가 행하는 이적들은 그의 신성을 무엇보다도 분명히 증
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주님은 "나는 사실 자체가 분명히 나타내 보여주는 것 이외에
다른 이유로 하는 수 없이 억지로 나를 믿으라고 너희에게 말하고 싶지 않다. 하나님
께서 나에 대하여 공개적으로 증거하시지 않았다면 담대하게 나를 거절해도 좋다"고
말씀하신 것이나 다름없게 양보의 형태로 말씀하고 계신다. 주님은 그의 기적을 '내
아버지의 일'이라고 불렀다. 그 이적들은 참으로 하나님께로 말미암은 것이고 사람에
게 속한 능력보다 더 큰 능력이 그 가운데 나타나 보였기 때문이다.


10:38
내가 행하거든 나를 믿지 아니할지라도 그 일은 믿으라 - 주님께서는 그들이 완연
하게 나타난 하나님의 일에 아무런 경의를 표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그들은 분명히 불
경건한 신성 모독의 죄를 범하고 있다고 말씀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비록 내가
너희들에게 나의 교훈을 의심하는 것을 허락한다 하더라도, 내가 행한 기적이 하나님
께로 말미암은 것이라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그러므로 너희들은 공개적으로 하나
님을 거부하고 있는 것이지 사람을 거스리는 것이 아니다"라가가 말씀하심으로 두번째
양보를 하고 있다. 믿음이 지식보다 못한 것처럼, 주님이 비록 믿음을 지식 다음에 놓
고 있지만, 이것은 주님께서 상대하고 있는 사람들이 불신앙의 사악한 사람들이어서
하나님의 능력 앞에 굴복당하는 절대적인 체험이 있기 전에는 믿지 않을 패역한 사람
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용납하사 그의 일에 대한 지식을 통
하여 믿을 수 있도록 우리를 준비시켜 주신다. 그러나 하나님과 그의 숨은 지혜에 대
한 지식은 순서적으로 믿음 뒤에 따르는 것이다. 믿음의 순종은 우리에게 하늘나라의
문을 열어주기 때문이다.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 주님께서는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고 다른 곳에
서 하신 말씀을 다시 반복하고 있다. 이 말씀은 주님께서 하신 일 가운데 아버지의 뜻
에 어긋나는 것은 하나도 없다는 뜻으로 집약될 수 있다. "내가 아버지 안에 있음을
깨달아 알리라." 즉 하나님의 권위와 결재가 없이는 어떤 일도 하지 않는다는 말씀이
다. 그래서 나와 아버지 사이에는 상호연관이 있다는 것이다. 이 말씀은 본질의 일치
여부를 가리켜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타남으
로 그리스도가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았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


10:39
저희가 다시 예수를 잡고자 하였으나 - 그들은 의심할 여지없이 주님을 성전에서
끌어내어 돌로 치려고 했다. 그들의 분노는 그리스도의 말씀에 의하여 진정되지 않았
다. "저희가 다시 예수를 잡고자 하였으나 그 손에서 벗어나 나가시니라"는 말씀이 기
록되어 있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능력이 아니고서는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었다. 이
말씀은 우리가 악인의 정욕에 내어준 바 된 것이 아님을 상기시켜 주고 있다. 하나님
께서는 자기의 원하시는 뜻을 따라 악인의 정욕을 제어하시기 때문이다.


10:40
다시 요단 강 저편 요한이 처음으로 세례주던 곳에 가사 거기 거하시니 - 그리스
도께서 항상 이득없는 싸움을 계속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요단강을 건너갔다. 그리함
으로 주님께서는 본을 보이시어 적절한 기회를 이용하도록 우리를 교훈하셨다. 주님
이 피하셨던 장소에 대하여는 1장 28절을 보라.


10:41
많은 사람이 왔다가 말하되 - 큰 무리가 모여든 것을 보면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의무를 소홀히 하기 위하여 한적한 장소를 찾은 것이 아니라 그의 소유된 장소, 예루
살렘이 완악하게 그를 몰아내었을 때 광야에 하나님을 위한 성소를 세우기 위하여 한
적한 곳을 찾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나님께서 택하신 성전이 강도의 굴혈이 되었
을 때, 하나님의 교회가 멸시받는 장소에 모이게 되었다는 것은 분명 하나님의 무서운
진노가 아닐 수 없다.
요한은 아무 표적도 행치 아니하였으나 -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요한보다 훨씬 뛰어
난 분이라고 말하고 있다. 요한은 아무 기적도 행치 않은 데 비하여 주님의 기적은 뛰
어난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항상 기적을 보고 판단해야 된다는 것이 아니다. 그러
나 기적의 가르침이 따를 때 앞에서도 종종 말한 것처럼, 그 기적은 적지 않은 비중을
지니게 된다. 더구나 그들의 논조에는 결함이 있다. 그들은 그리스도와 요한을 비교하
고 있으나 부분적으로만 견주어 보고 있다. 그들은 요한을 성령의 독특한 은사를 받은
뛰어난 하나님의 선지자라고 당연시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다른 면에서 매우
위대했던 선지자인 요한이었지만 기적을 행하는 영광이 주어지지 않았던 것을 보면 그
것은 하나님의 어떤 섭리가 있었던 게 틀림없다고 생각하고 그리스도가 요한보다 앞선
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더 존귀히 여김을 받을 수 있도록 그리스
도를 인하여 이러한 일이 있었다고 결론을 내렸다.
요한이 이 사람을 가리켜 말한 것은 다 참이라 - 이 말은 그들이 직접 말했다기보다
그들이 이중(二重)의 증거에 의하여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음을 보여주기 위하여 복음서 저자가 덧붙인 것으로 보인다. 그들은 요한이 주님에 대하여 하였던 증거가 참이었다는 것과 그가 행한 기적은 그에게 더 큰 영광을 안겨주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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