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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1-3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 하시니라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니 저녁 먹는 중 예수는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자기 손에 맡기신 것과 또 자기가 하나님께로부터 오셨다가 하나님께로 돌아가실 것을 아시고 - 이 귀절들에는 예수님의 사랑의 동기가 기록되어 있다. 그는, 세가지 동기로써 제자들에게 사랑의 일, 곧, 발 씻는 일을 행하셨다. (1)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1 절), 이 일을 행하셨음. 이것은 제자들을 떠나신다는 그의 인성(人性)편의 무거운 느낌에서 행하신 것. (2) "마귀가...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은 줄 아시고(2 절), 이 일을 행하셨음. 이것은 가장 마음 아픈 일이었을 것이다. 선생으로서 제자에게 팔리운다는 것은, 인간으로서는 견딜 수 없는 장면이고, 낙심될 일이다. 그런데, 그가 계속하여 제자들을 극진히 사랑하심은 하나님의 성품이다. 그는, 가장 검은 미움의 활동이 일어난 곳에 가장 부드러운 사랑으로 대하셨다. (3)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자기 손에 맡기신 것과 또 자기가 하나님께로부터 오셨다가 하나님께로 돌아가실 것을 아시고"(3 절), 이 일을 행하셨음. 이것은, 그가 자기의 영광 받으실 사실을 아셨다는 뜻이다(마 28:18). 그는 저렇게 영광 받으실 것을 내다보시면서, 사람이 천국에서 진정으로 위대해지는 비결을 제자들에게 보여 주셨다. 그것이 제자들의 발을 씻기는 것으로 나타난 그의 겸손이다. "저녁 먹는 중." 이것이 유월절 만찬을 가리킨 것일까? 혹은 다른 때의 저녁 식사를 의미한 것일까? 어떤 학자들은, 이것이 유월절 하루 전(니산월 13 일 저녁)의 식사를 가리킨 것이라고 한다(Meyer). 그러나 21-30절의 내용을 보니, 유다가 예수님을 잡아 줄 자로 지적된 저녁인 것이 드러난다. 그 저녁은 유월절 만찬 저녁이다. 공관 복음은 그렇게 말한다(마 26:17-25; 막 14:17-21).

=====13:4,5
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시고 이에 대야에 물을 담아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그 두르신 수건으로 씻기기를 시작하여 - 유대인의 풍속에는 보통 식사 전에 손님의 발을 씻어 주는 법인데, 이 때에는 식사 도중에 그 일을 행하셨다. 그것은, 아마도 그 때에 이 일을 할 종이 없어서 그렇게 된 듯하다. "겉옷"은 저고리를 말함이 아니고 그 위에 입는 옷을 가리킨다. "수건을 허리에 두르시고" 이러한 차림은 종이 취하는 것이었다. 그는 이렇게 종의 자리로 내려가셔서 일할 준비를 하신 것이다. 이것은, 그의 겸손의 극치(極致)이다. 그가 최종의 행동 교훈으로 식사 도중에 이런 일을 하신 것은, 의미심장하다. 그것은, 그의 별세 후에 제자들이 언제나 지켜야 할 겸덕을 고조하신 것이다. 하나님의 지극한 사랑은, 저렇게 계급을 초월하시고 영광의 주님을 사랑의 발 씻는 종으로 삼으셨다. 고데이(F. Godet)는 추측하기를, 이 발 씻는 일이 아마도 제자들의 서로 다툰 사건(눅 22:24-27)을 동기로 하고 있은 듯하다고 하였다. 예수님의 이와 같은 봉사는 두 가지 의미를 가진다. (1)이것으로 제자들에게 본을 보이시고 서로 낮아지기를 힘써야 한다고 설교하신 셈이다(12-16). 실행으로 본을 보이는 설교자는 그 설교로써 사람들의 심령을 아주 점령해 버린다. (2)이것은, 그가 그의 백성을 사랑하셔서 속죄하시는 중보(中保)의 역사를 비유로 가르치시는 지극히 크신 사랑의 행동이시다. 그가 피를 흘려서 그의 백성의 죄를 씻으신 일도 지극한 사랑이면서 역시 지극한 겸손을 나타낸다. 유명한 변증 학자 스킬더(Schilder)는, 주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일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곧,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기 위하여 물을 휘저으신 주님의 손은 죄에 속한 자에게 이해될 수 없다. 그것은 마치, 그의 못 박히신 손에서 흐르는 피가 죄에 속한 자에게 이해되지 못함과 같다"라고 하였으며, 그는 또 말하기를, "주님께서 그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뜻은, 그의 몇 제자들에게만 그의 친절과 겸손의 모본을 보이시려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이 행위로써 온 세계를 찾으시는 그의 속죄의 역사를 비유하신 것이다"라고 하였다.

=====13:6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니 가로되 주여 주께서 내 발을 씻기시나이까 - 이것은 베드로가 너무 황송한 중에 한 말이다. 이와 비슷한 말은, 그가 주님의 명령대로 순종하여 고기를 많이 잡은 때에도 하였으니, 그 때에는 "주여 나를 떠나소서"라고 하였다(눅 5:8). 베드로는, 예수님의 하시는 일을 이렇게 인간적으로만 취급하면서 그것을 황송하게 여겨 사양하려고 하였던 것이다. 그가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예수님의 수난하실 일에 대하여 들었을 때에도 역시 "그리 마옵소서"라고 하였다(마 16:22). 저렇게 베드로는, 예수님의 구속 사업 관계의 행위에 대하여 이해하지 못하고 인간적인 해석으로 잘못 말하였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겸손과 희생에 대하여, 인간으로서 황송(惶悚)하게 생각함은 좋으나 그 행하심이 구원의 행위인 것인 만큼, 그것을 감격하여 받아야 된다. 그것을 받지 않겠다고 사랑하는 것은, 병자가 의사의 진료를 받지 않겠다는 것과 같은 일이다.

=====13:7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나의 하는 것을 네가 이제는 알지 못하나 이 후에는 알리라 - 이것은, 그 현재에 베드로가 죄로 인하여 어두워서 깨닫지 못하나, 후에는 하나님의 은혜로 깨달을 날이 있을 것을 가리킨다. 주님께서 발을 씻기심은, 그의 속죄의 고난으로 신자들의 죄 씻을 것을 비유한 것이다(11절). 베드로는, 예수님의 속죄의 죽음을 본 뒤에야 그의 발 씻기신 뜻을 깨닫게 될 것이었다.

=====13:8
내가 너를 씻기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 - 베드로가 발 씻기시는 예수님의 봉사를 받지 않는다면, 그것은, 영적 의미로 생각해 볼 때에 예수님의 구원 은총을 원치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그가 예수님의 받으실 영광에 참여하지 못하는 것이 되고 만다.

=====13:9
시몬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내 발 뿐 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겨 주옵소서 - 베드로는 여기서 새로운 깨달음을 가지고 말한다. 그러나 그는 여기서도 또 실수함을 면치 못했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발을 씻기심이, 구속의 사랑에 대하여는 상징하는 정도 뿐인 사실을 베드로는 몰랐다. 그러므로 그는, 그것이 죄를 깨끗하게 하시는 일의 실제인 줄 오해하고 욕심을 부렸다.

=====13:10
이미 목욕하는 자는 발 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온 몸이 깨끗하니라 - 예수님의 제자들은, 속죄를 받은 자들이라고 간주된 때 벌써 온 몸이 깨끗해진 셈이다(15:3). 그러나 그들도 매일 세상과 접촉하여 허물과 죄로 더러워진 일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매일 그리스도의 공로와 성령에 의하여 사죄를 받아야 할 것이었다. 그것은 발 씻는 일로 비유된 것이다.

=====13:11
이는 자기를 팔 자가 누구인지 아심이라 그러므로 다는 깨끗지 아니하다 하시니라 - 이 말씀을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것이, 단순히 겸손의 덕을 나타내신 것만이 아니고, 그의 백성을 속죄하여 깨끗하게 해 주실 것을 상징하기도 한다. 예수님을 파는 자는 천하에 가장 더러운 죄를 범하는 자이다. 예수님께서 만민을 구속하여 깨끗하게 하는 일을 하시지만, 그를 파는 유다는 깨끗지 못한 자들 중 하나이다.

=====13:12-15
이 귀절들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것이 겸손한 봉사의 표본인 사실을 보여 준다. 이 일로써 예수님이 나타내신 것은, 위 사람으로서 아랫 사람을 겸손히 봉사하신 고상한 정신이다. 아랫 사람으로서 윗 사람에게 대하여 겸손하기는 쉬우나, 윗 사람으로 아랫 사람에게 대하여 그렇게 하기는 어렵다.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 이 말씀에 기준하여, 톨레도(Toledo)회의에서 발 씻는 것을 하나의 교회 의식으로 세웠다(694 A.D.). 그러나 종교 개혁자들이 그것을 폐지하였다. 예수님께서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라"고 부탁하신 것은, 다만 제자들더러 서로 겸손하게 봉사하라는 것 뿐이었다.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 이것은, 예수님을 본받아 자진하여 형제를 겸손히 봉사하는 자가 하나님 앞에 크게 간주될 것을 가리킨다(마 18:4).

=====13:18
이 귀절부터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일의 상징적 의미, 곧, 구속에 관하여 말한다. 예수님께서 구속 사업을 이루시지만, 그 은혜에 참여할 자들은 오직 택함을 받은 자들이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희를 다 가리켜 말한 것이 아니라"고 하셨다. 곧, 그의 제자들이 모두 다 "복이 있을"것(17절)이 아니라, 오직 택함을 받은 자들에게만 복이 있을 것이라고 하셨다(18절).
내 떡을 먹는 자가 내게 발꿈치를 들었다 한 성경을 응하게 하려는 것이니라 - 이것은, 매우 친근하던 자에게 배신을 당하고 큰 손해를 본 다윗의 경험을 들어 말씀하심이다(시 41:9). 그리스도의 모형이었던 다윗의 당한 일은, 그리스도께서 당하실 일의 예표였던 것이다.

=====13:19
지금부터 일이 이루기 전에 미리 너희에게 이름은 일이 이를 때에 내가 그 인줄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로라 - 예언이란 것은, 언제나 우리의 신앙을 강화하기 위하여 주어진다. 그것이 성취될 때에, (1) 그 예언을 주신 이의 진실성과 권위를 믿게 되며, (2) 그 성취된 사건 자체를 믿게 되며, (3) 그 예언 성취가 지향한 장래 행복의 활실성도 믿어진다. "내가 그 인줄"(* )이란 말은, "나 곧 나만 좆재자요 보내심을 받은 자요 메시야라"는 뜻이다(Grosheide).

====13:20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의 보낸 자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 - 이 말씀의 목적한 바는 이렇다. 곧, 비록 유다와 같은 배신자가 있다 할지라도 다른 사도들의 권위는 손상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나의 보낸자". 곧, 그리스도께서 보내신 사도들을 영접하는 자는 결국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과 같다. 그 만큼 사도들의 권위는 높은 것이다.

======13:21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심령에 민망하여 증거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 하시니 - 예수님께서 그의 심령에 민망하시게 된 것은, 여러가지 원인이 있을 것이다. 그 중에 특별히 생각되는 것은, (1) 그의 제자가 그를 팔아 먹는 일이 너무도 그에게는 고통이 된다는 것과, (2) 그런 일에 대하여 이제 공적으로 지적하여 말하기가 역시 괴로운 사실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제 이 일을 지적하여 말씀하시지 않으면 안될 단계였다. 그것은 너무도 확실한 일이기 때문에, 그는 엄격한 법정 선언과 같이 "증거하여" 말씀하셨다. 여기 "증거"란 말이 법정 용어의 의미를 가진다고 하는 것이, 일반 학자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13:22
제자들이 서로 보며 뉘게 대하여 말씀하시는지 의심하더라 - 이것은, 제자들이(유다를 제외하고는)강퍅하지 않은 증표이다.

=====13:23
"그의 사랑하시는 자"는 사도 요한일 것이다.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누웠는지라 - 이것은, 유대인들의 식사할 때 취하는 자세를 말함이다. 요한은 예수님에게 가장 가까이 있었기 때문에 저런 위치에 놓였을 것이다. 그 때 풍속은, 사람들이 식탁에 앉지 않고 왼 팔에 의지하여 옆으로 누워서 먹었다고 한다(Westcott).

=====13:24,25
시몬 베드로가 머릿짓을 하여 말하되 말씀하신 자가 누구인지 말하라 한대 그가 예수의 가슴에 그대로 의지하여 말하되 주여 누구오니이까 - 윗절에 말한바, "그의 사랑하시는 자"는 사도 요한을 가리킨 것인데, 이제 베드로가 그더러 주님을 팔 자가 누구인지 알려 달라는 것이다. 그것을 보면, 사도 요한은 누구보다도 예수님의 생각을 알 수 있게 되는 측근자였던 것이 확실하다. "예수의 가슴에 그대로 의지하여." 이것은, 유대인들이 음식 먹을 때에 원형으로 팔꿈치를 의지해서 서로끼리 가슴에 기대다시피 연접하여 누워서 먹는 풍속이 있었음을 말한다.

=====13:26,27
한 조각을 찍으셔다가...유다를 주시니 - 그 당시에 연회 주인이 떡 조각을 찍어서 손님에게 주는 것은 친절한 대접이었다고 한다. 예수님께서 취하신 이 행동은 가룟 유다의 회개를 독촉하신 사랑이다.
사단이 그 속에 들어간지라 - 사단이 유다의 마음에 들어간 이유는, 그가 끝까지 회기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눅 22:3-6; 요 13:2 참조

=====13:28,29
이 부분 말씀을 보면, 제자들이 유다의 행할 악의 내용을 자세히 알지 못하였다.

====13:30
유다가 그 조각을 받고 곧 나가니 밤이러라 - 유다는 주님을 팔 자로 지적된 때에, 회기하지 않고 그냥 그 악한 계획을 실행하려고 그 좌석에서 떠나 나갔다. "때가 밤이러라"고 한 것은, 영적 의미도 가진다. 곧, 회개하지 않는 그의 마음도 밤과 같이 캄캄하다는 의미인 동시에, 그의 앞길도 영원히 캄캄할 뿐이라는 것을 암시한다.

=====13:31
지금 인자가 영광을얻었고 여기서 "인자"란 말(* )은, 메시야를 가리킨다. "영광을 얻었다"는 말씀은, 그의 부활 승천을 의미한다는 학자들이 있다. 그러나 저가(유다가)나간 후에, 곧 이어서 예수님의 이 말씀이 있는 것을 보아서, 이것은 예수님의 죽으심을 가리킨다. 유다가 나간 것은, 예수님에게 고난이 닥칠 것을 알게 한 사건이다. 그 뿐 아니라, 다음 절에, "영광을 주시리니"(* )라고 미래사(未來詞)로써 그리스도의 죽으신 후의 일(부활, 승천)을 의미한 것을 보아서도, 이 귀절의 "영광을 얻었고"란 과거사는 그리스도의 죽으실 고난을 가리킨다. 예수님은 그의 받으실 고난을 영광으로 보셨다.
하나님도 인자를 인하여 영광을 얻으셨도다 - "인자를 인하여"란 말은 "인자 안에서"란 뜻이다. 하나님 아버지는 아들과 일체이심으로, 아들이 영광을 얻으심에 따라서 그 자신도 영광을 얻으신다.

=====13:32
하나님도 자기로 인하여 저에게 영광을 주시리니 - 여기 "자기로 인하여"란 말(* )은, 하나님 계신 곳을 가리킨다. 17:5에서는, 이 뜻이 "아버지와 함께"(* )란 말로 표현되었다. 그러면, 이 귀절의 뜻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부활 층천케 하셔서 자기의 계신 곳에 함께 계시도록 하심을 가리킨다(6:62, 17:5, 20:17; 빌 2:9-11). 그리스도께서 이렇게 영광스러운 곳에 가시게 되므로 그 제자들과는 당분간 나누이게 된다. 다음의 33절 말씀이 그 뜻이다.

=====13:33
유대인들에게 너희는 나의 가는 곳에 올 수 없다고 말한 것과 같이 지금 너희에게도 이르노라 - 이 말씀이 윗절(32 절)과 무슨 연락을 가지는가? 그 연락은 이렇다. 곧,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에게 영광을 주신 결과(32절 하반)로 그는 아버지의 계신 곳으로 가시게 된다. 그의 제자들은 당분간 그와 함께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36절 참조.

=====13:34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 여기 "새 계명"이란 말에 대하여 우리가 몇 가지 생각할 것이 있다. (1) "새 계명"이란 명칭의 이유, 창조 질서로 말하면, 하나님께서 천하만민을 한 혈맥으로 지으셨다고 하였는데(행 17:26), 그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남들을 자기 자신과 같이 사랑해야 될 근거를 성립시켰다. 그러므로 구약에도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는 계명이 있다(레 19:18). 구약의 계명도 사랑 중심의 것이다(롬 13:8-10). 그러나 예수님이 주신 새 계명은 독특한 동기들을 제공한다. 종말관적 동기. 그것은, "사랑하라"는 계명이면서도 구약의 예언적인 것이 성취된 종류이다. 그것이야말로 종말관적인 것이다(요일 2:8). 예숯님의 보혈로 이루신 속죄를 믿는 자들은, 그가 우리를 사랑하심 같이(34절 하반), 다른 신자들을 위하여 희생하며, 필요하면 그들을 위하여 죽을 처지에 있다. 영원한 기업의 동기. 같은 혈맥에 속한 자들 중에서(행 17:26)도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마침내 영원히 나누인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보혈에 의하여 구원 받은 형제들은 영원히 나누이지 않고 마침내 하나님 앞에 한 자리에서 영원히 함께 살게 된다. 그러므로 신자들은 서로끼리 위하여 희생할 처지에 있다. (2) 새 계명을 지키는 방법. 그것은 물론 위에 관설한 바와 같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 같이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다. 34절 하반에 말하기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하였다. 그러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셨는가? 그는 우리를 위하여 희생하시는 것으로써 사랑을 보여 주셨다. 그것이 바로 13장의 제목이 되어 있으니, 곧바로 그가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사실이다. 그가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것이 지극한 사랑이라고, 1절은 말하고 있다. 그가 그들의 발을 씻기신 것은 겸손이지만(겸손도 사랑임-고전 13:4), 그가 그들의 죄를 씻기 위하여 십자가 위에서 대속의 죽음을 죽으실 것을 비유하기도 한다(10-11). 그는, 희생의 정신으로 세상 사람들의 죄를 대신 담당하셨다. 우리가 예수님처럼 대속의 희생은 될 수 없으나, 남들의 짐을 자신이 걸머지게 되는 경우는 있을 수 있다. 그것은 큰 사랑이다(갈 6:2). 우리가 이 진리를 이론으로 배유면서도 실제로 남들을 위해 희생할 줄은 모른다. 우리가 남들에게 대하여 이렇게 무관
이 세상에 있는 것은 마치, 양 몇 마리가 많은 이리들 가운데 있음과 같고, 몇 백만 군대에게 포위된 것과도 같다. 이 세상엔 불신의 세력이 얼마나 강한가? 우리는 그 세력을 복음으로 이겨야 되지 않겠는가? 우리는 서로 시기하거나 험담하지 말고 서로 아끼고 도와 주어야 된다. 신자가 영원한 나라를 기억하지 못한 까닥. 그리스도께서도 그 백성을 그렇게 사랑하시게 된 동기가 그의 가실 영광의 나라를 생각하심에 있었다(1,3). 32-34절의 문맥도 이 내용을 보여준다. 곧, 그가 하나님 아버지에게서 영광(내세에 들어가심)을 받으시게 될 것을 염두에 두시고(32 절) 이 새 계명을 주셨다. 내세에 대한 확신을 가지는 자는, 이 세상의 것은 그 무엇이든지 초개와 같이 생각하고 희생한다. 한 번은, 구세군 사관들 109명이 아일란드의 황후(Empress of Ireland)란 배를 타고 가다가 파선되어 다 물에 빠졌다. 그들 중에 어떤 이들은, 함께 빠진 자들의 구명대(救命袋) 없음을 보고 자기들의 것을 벗어 주면서, "나는 당신보다 잘 죽을 수 있다"라고 하면서 희생하였다. 그들은 내세를 확신하였기 때문에 이렇게 죽기까지 사랑을 베풀었다. 내가 남을 위하여 희생할 의용이 끝까지 생기지 않으면, 한 가지는 해야 됨. 그것은, 내가 남들을 위하여 죽기까지라도 희생할 책임감은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 책임감을 가진 자는 그대로 행치 못한 처지에도 극도의 겸손을 소유하게 된다. 하나님은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약 4:6) (3) 예수님께서 새 계명을 주신 목적. 예수님의 새 계명은 모세의 10계명을 폐지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그와 그의 사도들은, 모세의 10계명을 그대로 세워 나가셨다(마 22:37-40; 롬 13:8-10). 그는 진리이시니, 하나님의 선하신 뜻대로 계시된 구약의 계명들을 폐지하실 리가 없다. 하나님의 계명은 선(善) 자체이다. 이 사실은 다음과 같이 설명된다. 곧, 선은 피조물이 아니고 하나님의 본질적 의지이다. 종교와 도덕(선과 관련된 것)은, 서로 달라도 서로 독립된 것은 아니다. 그것들은 함께, 우리가 하나님과 관계된 방면이다. 하나님의 의지 자체인 선의 표현 곧, 계명은 어느 시대으 것이든지 페지되지 않는다. 모세의 율법 중 유대인들만을 위한 제도들은 신약 시대에 폐지되었다. 그러나 인류 전체를 위한 도덕적인 십계명은 폐지되지 않는다. 예를 들면, 십계명 중 제 4 계명에, 쉬라고 한 것은 보편적 도덕 요소이다. 쉬라는 것은, 사람이 하나님을 섬기
경되었다. 그것이 그렇게 된 원인은,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창조(創造)를 기념했으나, 기독자는 그리스도의 부활(復活)을 기념하기 때문이다.

=====13:35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 여기 이른바, "서로 사랑"한다는 것은, 인도주의(人道主義)에 속하는 사랑이 아니고 주님을 믿으며 사랑하는 일의 열매이다. 모든 사람들(세상)이 이 사랑을 보고 예수님의 제자를 실별한다는 것은, 두 가지 내용을 포함한 말씀이다. 이것은, (1) 예수님의 제자된 표가 사랑이라는 말과 같고, (2) 또한 이 사랑으로 말미암아 불신자들을 주님께로 인도하게 된다는 뜻도 있다. 17:21-23 참조

=====13:36-38
이 부분의 말씀은, 베드로의 결심과 예수님의 예언이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가신다"는 것(33 절), 그가 죽어서 하나님 계신 하늘 나라에 가실 것을 가리킨 것이다. 그러나 베드로는 그것을 오해하고 질문하기를,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라고 하였다(36 절). 그리고 그는, 예수님의 가시는 곳에 목숨을 버리기까지 따르겠다고 맹세하였다. 그것은, 진리대로 움직인 신앙의 용기가 아니고 하나의 유적인 용기였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육적인 용기를 꺾어 겸손하게 하시려고 예언의 말씀으로 경고하셨으니, 곧,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고 하셨다(38 절). 그가 이렇게 경고하신 이유는, 육적 용기는 도리어 주님께 대한 신앙과 충성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13;1
유월절 전에 - 요한은 마태와 다른 저자들이 서술하고 있는 것 가운데서 여러 가
지를 일부러 생략하고 있다. 대신 그는 발 씻기는 이야기와 같이 그들이 취급하지 않
은 문제를 다루고 있다. 그는 뒷부분에서 왜 그리스도께서 그의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
는가 하는 점을 더 자세하게 설명하겠지만 여기서는 그리스도께서 이 상징을 통해서
제자들에 대한 그의 처음 사랑이 한결 같고 영원하시다는 점을 증거하셨으며, 이것은
그의 제자들이 그리스도를 빼앗기더라도 죽음마저 이 사랑을 소멸할 수 없다는 사실을
확신하게 하려는 뜻에서였다는 내용으로 이 서론을 시작하고 있다. 이 확신은 또한 오
늘날 우리 마음에 확고한 자리를 잡고 있어야 마땅하다.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고 사도
들이라는 말을 이렇게 완곡한 표현을 써서 사용하는 것은 그들 역시 우리들과 마찬가
지로 위험하고 어려운 전투에서 분투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더욱 더
보살펴 주셨다는 점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기 위해서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러므로
비록 우리에게 그리스도께서 멀리 떨어져 있는 것 같은 생각이 들더라도 우리는 그리
스도께서 세상에 있는 자신의 백성을 사랑하신다는 표현에서 그가 우리를 마음에 두고
있다는 점을 배우도록 하자.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죽음의 위기에 직면했을 때 가졌던
동일한 태도를 오늘날도 여전히 품고 계시다는 점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 이것은 그리스도께
서 그의 죽음이 하나님의 하늘 나라로 향하시는 길임을 알고 계셨다는 점을 말하는 중
요한 귀절이다. 그가 그곳을 향해 급히 가시면서도 그의 백성에 대해서는 전과 다름없
이 사랑을 베푸셨다면 오늘날도 그의 태도가 바뀌었다고 생각할 이유가 전혀 없다. 이
제 그는 죽은 자들 가운데 받아 들이시므로 이 죽음의 정의는 역시 교회 전체에 그대
로 적용되기도 한다. 곧 그 길이 바로 하나님께로 향하는 길인데 사람들이 이 길을 떠
나서 방황하고 있다.

13;3
저녁 먹는 중 -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는 의도와 이 이야기의 성과에
대해서는 다음에 더 상세하게 다룰 것이다. 여기서는 실질적인 말을 눈여겨 보도록 하
자. 요한은 유다가 이미 그리스도를 배신하기로 마음에 결정을 내렸을 때 이 발씻김이
있었던 것으로 말하고 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놀라운 참을성, 곧 그처럼 사악하고
흉칙한 배신자의 발을 묵묵히 씻어 주신 면을 강조하고 있다. 게다가 그리스도께서는
죽음이 가까와 오자 생존시의 마지막 행동을 실천하는 뜻에서 이 시간을 의도적으로
선택 하셨다는 점을 우리는 알 수 있다.
그리스도를 배신하려는 유다의 결정이 마귀의 자극을 받은 것으로 이야기되고 있는
데 이것은 이 죄악의 극악성을 증명하는 말과 같다. 왜냐하면 그것은 더없이 비참하고
소름 끼치는 사악으로서 거기에 사단의 능력이 역력히 드러나 보이고 있었기 때문이
다. 물론 사람이 행하는 악은 모두 사단의 유혹에서 시작되지만 죄악이 더 반항적이요
저주스러울수록 그만큼 더 우리는 하나님에게서 버림 받은 자들을 이리저리 몰고 다니
는 마귀의 횡포를 볼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인간의 격정(concupiscentia)이 사단의
풀무에 의해서 불이 확 달아 오른다지만 그것 자체로서도 화로(furnace)다. 곧 그 자
체에 이글거리는 불이 있는데 풀무의 바람을 게걸스럽게 받아 들인다는 말이다. 따라
서 불경건한 자들에게는 변명의 여지가 없다.
예수는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자기 손에 맡기신 것과.....아시고 - 나는 이것을 그
리스도의 마음의 평정의 근원에 대한 설명으로 본다. 그는 이미 사망에 대한 승리를
확보하셨기 때문에 그의 마음은 곧 이어질 영광스러운 개선을 바라 보고 있었다. 인간
이란 공포에 사로 잡히게 되면 크게 당황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비록
곧 유다의 배신을 받으실 예정이었지만,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그에게 주셨다는 것을
알고 계셨기 때문에 이러한 당황이 그에게는 없었다는 것을 복음서 기자들은 나타내고
있다. 혹 어떤 사람이 그는 왜 피땀을 흘릴 정도로 비통에 빠지게 되었는가 하고 묻는
다면 나는 양면이, 곧 그가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과 그가 두려움 없이 중보자의 모든
임무를 수행하는 것이 필요했다고 대답한다.


13;4
겉옷을 벗고 - 여기서 말하는 옷은 어디까지나 상의(上衣)이지 통옷(tunic)이 아
니다. 우리가 아는 대로 동양인들은 긴 옷을 입었다. 그리고 다음에 이어지는 "......
제자들의 발을......씻기기를 시작하여"라는 표현은 아직 그리스도께서 외형적인 행동
을 그렇게 하셨다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하기로 작정하셨음을 나타낸다. 그러기에 복
음서 기자는 그가 베드로부터 시작했다는 점을 덧붙이고 있다.


13:6
주여 주께서 내 발을 씻기시나이까 - 이 말은 어리석고 무가치한 것에 대한 혐오
감을 나타낸다. 베드로는 그리스도에게 무슨 그런 일을 하시려느냐는 투로, 말하자면,
자기 손으로 예수님을 떠미는 셈이었다. 이 겸손은 하나님 보시기에 그 어떠한 봉사나
존대보다도 순종이 더귀하지 않다면 칭찬을 받을 만도 했다. 아니 하나님께 순종하며
우리의 모든 의식을 그의 선한 뜻에 내어 맡기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자신의 뜻이라고
선언하시는 점에 대해서는 이론의 여지 없이 받아 들이는 것이 참되고 유일한 겸손의
법칙이 아니라면 이것은 칭찬을 받을 만도 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언제 어느 때고
무엇을 명령하시든지 항상 지체 말고 거기에 순응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바르
게 섬기는 일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명심할 필요가 있다.


13:7
나의 하는 것을 - 이 말씀은 그리스도께서 왜 우리에게 이런저런 일을 시키시는지
그 이유가 명확하지 않더라도 그저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점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다. 잘 정돈된 집 안에는 가장 한 사람에게만 결정권이 있고 나머지 종들은 그
를 위해 손과 발의 역할을 할 뿐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명령을 두고 그 명령에 순종에
대한 이유를 모른다는 이유로 거절하는 사람은 너무나 오만불손하다. 그러나 이 권면
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서 당분간 숨기시고자 하는 문제를 우
리가 모르고 있다 해서 걱정할 필요는 하나도 없다. 하나님께서 우리 보다 현명하시다
는 점을 인정하는 경우 우리의 이러한 종류의 무지는 그 어떠한 지식보다도 더 지혜롭
기 때문이다.

13:8
내 발을 절대로 씻기지 못하시리이다 - 지금까지 베드로의 사양은 물론 완전히 흠
잡을 데가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런대로 용서할 만했다. 그러나 여기서 그는 꾸중
을 듣고도 굴복하지 않고 있는 데에 더 큰 죄를 범하고 있다. 이것은 오만에 흔히 따
르는 과오다. 이 사양은 존경심에서 우러나오는 것이라는 그럴듯한 변명을 내세울 수
도 있겠지만, 그러나 그는 말씀을 순종하지 않고 있는 만큼 그리스도를 공경한다는 핑
계는 성립되지 않는다. 신앙의 진정한 지혜란 하나님에게서 오는 것은 무엇이든지 올
바르고 적합한 것으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우리가 그의 이름을 거룩하게 받
드는 것으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우리가 그의 이름을 거룩하게 받드는 데 있
어서 그 밖에 또 다른 방법이 있을 수 없다. 그렇지 않고 우리가 하나님의 하시는 일
이 최선의 것이 아니라고 판단한다면 본래부터 오만하기 짝이 없는 우리의 육신은 계
속 불평을 일삼을 것이요, 강요를 받기 전에는 그에게 그의 몫을 돌리지 않을 것이다.
한 마디로 사람이 하나님의 일을 판단하는 재량권을 포기하기 전에는, 그가 제 아무리
하나님을 존귀하게 모시려해도, 겉 모양만의 겸손 밑에는 언제고 교만이 깔려 있기 마
련이다.
내가 너를 씻기지 아니하면 - 그리스도의 이 답변에는 아직 그의 제자들의 발을 씻
기기로 결정한 의도가 명백하게 드러나 있지는 않다. 그러나 그는 영혼에 해당한 내용
을 신체에 비교하심으로써 그는 제자들의 발을 씻기는 일을 결코 자신에게나 그의 역
할에 있어서 신기하거나 생소하지 않다는 점을 입증하고 있다. 그와 동시에 그는 베드
로의 지혜의 어리석음을 보여 주고 있다. 우리에게 있어서도 주님께서 우리와 다투기
시작할 때는 언제고 똑같은 일이 일어나고 말 것이다. 주님께서 잠잠히 계신다 해서
인간들은 그들이 그분과 천지차이라는 점을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분에게 있어서
는 단 한 마디로 이 모든 그럴듯한 이론을 반박하시는 것보다 더 수월한 일도 없다.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주요 선생인 만큼 그가 그의 발을 씻어야 한다는 문제가 베드로
에게는 모순으로 보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그러한 봉사를 거절함으로써 자신의
구원의 핵심을 거절한 셈이다. 물론 이 귀절에는 일반적인 교훈도 담겨 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얼룩을 씻어 주시기 전에는 더럽게 오염되어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여기서 씻어 주시마고 자청하고 있는 만큼 각자는 자신의
더러움이 씻겨지도록 자신을 내어 바치며 마침내 하나님의 자녀들 가운데 한 자리를
확보할 수 있어야겠다.
그러나 먼저 우리는 '씻다'는 말의 의미를 이해하고 넘어가야겠다. 어떤 사람들은
이것을 죄에 대한 값없는 용서로, 또 어떤 사람들은 생명의 새로움으로, 또 어떤 사람
들은 이 양자에 다 해당하는 것으로 본다. 나는 맨 마지막 견해를 받아들인다. 왜냐하
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씻는다는 것은 그의 희생제사의 속죄를 통해서 우리의 죄악을
말끔히 씻어 버림으로써 이것이 다시 하나님의 심판을 받지 않게 하신다는 뜻이기 때
문이다. 그런가 하면 그의 성령을 통해 육신의 타락하고 악한 욕망을 제거하시는 것을
가리켜 그가 우리를 씻는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문맥을 통해 볼 때 여기서 그가
말씀하고 있는 것은 중생의 은혜라는 점이 곧 판명될 것이므로 나는 여기에 꼭 사죄의
씻음이 포함된다고 주장하지는 않겠다.


13:9
주여 내 발 뿐 아니라 - 베드로는 그리스도께서 제공하시는 청결에 자신을 내어
맡기지 않을 경우 자신은 잃어진 사람이라는 말씀을 듣고서야 마침내 자신을 길들일
주인이 절실히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러므로 그는 자신의 반대 입장을 포기하
고 온 몸까지도 씻겨 달라고 나선다. 곧 자신이 태어날 적부터 요염으로 덮여 있기 때
문에 일부분만 씻음 받는 것으로는 부족하다는 점을 인정한 셈이다. 그러나 여기서도
그는 경솔하게 그가 이미 혜택을 무가치한 것으로 돌리는 잘못을 범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지금까지 죄의 용서와 성령의 성화가 전혀 그에게 없었다는 식으로 그는 말하
고 있다. 그러기에 그리스도께서는 그가 과거에 그에게 베푸신 것을 지적함으로써 그
를 꾸짖고 있다. 그와 동시에 그리스도께서는 한 사람을 통해서 그의 모든 제자들에게
그들이 지금까지 받은 은혜를 기억할 뿐 아니라 그들이 앞으로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
를 또한 곰곰히 생각해야 한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먼저 그는 신자들의 온 몸이 '깨끗하다'고 말씀하고 있다. 이것은 그들이 모든 면에
있어서 순결하기 때문에 더 이상 그들에게 아무런 오점이 없다는 뜻이 아니라 죄의 지
배가 무너짐으로 말미암아 그들의 중심 부분이 깨끗하게 되었으므로 하나님의 의가 장
악하고 있다는 뜻이다. 이것은 마치 우리 육체가 어떤 병으로 감염되어 있지 않을 경
우 그것을 가리켜 완전히 건강하다고 말하는 것이나 다름 없는 이야기다. 그리스도께
서는 자신만이 모든 그의 백성의 청결의 원천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만큼 우리는 모두
생명의 새로움을 통해서 그의 제자됨을 선언해야 한다.
더우기 현재의 사건에 다른 비교가 적용된 것은 베드로로 하여금 발씻는 문제를 어
리석은 것으로 반대하지 못하게 하려는 뜻에서이다. 곧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제자로
받아들이는 자들을 머리부터 발까지 씻겨 주시는 만큼 그가 이미 깨끗하게 해 주신 자
들은 아래 부분만 날마다 씻음 받는 것으로 충분하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첫 날 완전
히 중생해서 하늘의 생활을 사는 것은 아니다. 반대로 육신의 잔재가 그들에게 남아
있기 때문에 그들은 일생에 걸쳐서 투쟁할 수 밖에 없다. 그러므로 발이란 우리가 날
마다 이 세상과 접하면서 대하는 모든 욕망과 염려에 대한 비유적 표현이다. 왜냐하면
성령께서 우리의 모든 부분을 장악하고 있다면, 우리는 더 이상 이 세상의 오염과 관
계가 없겠지만 우리는 육적이요, 땅에 살고 있는 만큼 최소한 우리의 발은 진창을 밟
지 않을 수 없으며 그 정도에 한해서 불결한 것은 도리가 없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
서는 언제고 우리에게 청결케 해야 할 것이 있음을 발견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이야기되고 있는 것은 죄의 용서가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그를 따르는 자들을 점차적으
로 그리고 계속적으로 육신의 욕망에서 완전히 구원하는 갱신이다.


13:10
너희가 깨끗하나 - 이것은 삼단논법의 소전제와 같은 것이다. 그러기에 발을 씻는
것이 그들에게 적합하다는 결론이 따르고 있다. 그러나 그들 모두 자신을 검토 하도록
하는 뜻에서 곧 혹시 유다가 회개의 감정을 느끼는가 하는 점을 보기 위해서 예외 조
항이 덧붙여지고 있다. 하지만 그의 의도는 그들이 곧 뒤이어 나타날 죄악의 극악성을
보고 염려하지 않도록 하는 뜻에서 미리 나머지 제자들의 마음을 다지는 데 있었다.
그러면서도 일부러 그의 이름을 지목하지 않는 것은 그에게 회개의 문을 완전히 봉쇄
하지 않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그는 이미 절망적이었으므로 이 경고는 그의 죄책을 가
중시킬 뿐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다른 제자들에게는 큰 도움이 되었다. 곧 경고를 통
해서 그리스도의 신성이 그들에게 더 완전하게 알려지게 되었으며 그들은 또한 순결이
결코 성령의 평법한 은사가 아니라는 점을 깨닫게 되었다.


13:12
저희 발을 씻기신 후에 - 여기서 마침내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는 의도를 설명하고 있다. 지금까지 영적인 씻음에 대해서 말씀하신 것은 그의 주제
에서 떠난 일종의 객담과 마찬가지였다. 베드로의 반대가 아니었더라면 그리스도께서
는 그것에 대해서 한 마디도 말씀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제 그는 그의 행동에 대한 이
유를 밝히고 있다. 만민의 선생이요 주되시는 그가 모든 경건한 자들로 하여금 따르도
록 하나의 본을 보여 주셨는데 이것은 아무도 자기 형제나 동료를 위한 일이라면, 그
것이 아무리 천박한 일일지라도, 그것을 몸소 허리를 구부려가며 실천하는 것을 짐으
로 여기지 않게 하려는 뜻에서 취하신 행동이다. 사랑이 무시되고 있는 이유는 각자가
자신을 과대 평가하고 거의 대부분의 타인을 무시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의도는
겸손을 가르치는 것 뿐 아니라 이러한 사랑의 법칙을 규정함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서
로 봉사하게 하는 데 있다. 이웃을 돕는 데 있어서 자발적인 봉사가 없다면 거기에는
진정한 사랑이 있을 수 없다.
너희가 아느냐 - 우리는 여기서 그리스도께서 그의 제자들을 당분간 어둠속에 있도
록 하신 것은 그가 그들의 순종을 인내하기 위해서였다는 점을 알 수 있다. 그와 동시
에 우리는 적당한 시간이 되자 그들이 먼저 알았을 경우 도움이 되지 못했을 일을 계
시하셨다는 점도 알 수 있다. 그는 그들이 묻기까지 기다리시는 것이 아니라 먼저 그
들의 질문을 예상하고 있다. 우리도 우리의 가는 길이 설혹 사람들이 가보지 못한 길
이라 할지라도 그의 손길의 안내에 자신을 내어 맡긴다면 동일한 체험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13:14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 이것은 보다 큰것에서 부터 보
다 작은 것을 입증하는 논리다. 우리는 교만 때문에 우리 사이에서 성행해야 하는 평
등을 조장하지 못하고 만다. 그러나 우리 모두 보다 훨씬 뛰어나신 그리스도께서는 자
신을 낮추심으로써 자신들의 위치와 처지를 망각하고 형제로서의 교제에서 스스로 빠
져 나가는 자들의 교만을 꺾고 있다. 자신의 형제들의 짐을 나눠 지는 것을 마다하고
그들의 숩관에 어울리지 않으려 하는, 한 마디로 교회의 연합을 도모하는 여러 임무를
실천하기를 거절하는 사람은 도대체 자기가 누구라고 생각하는 것일까? 간단히 말해서
천해 보이고 자신에게 큰 부담이 되는 일이지만 친절하고 상냥하게 순응하면서 약한
형제들과 연합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는 사람이다.
여기서 또 한가지 명심할 점은 자기가 본을 보였다고 말하는 그리스도의 말씀이다.
그의 모든 행동을 무분별하게 모방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잘못이다. 로마 가톨릭에서
는 사순절의 단식을 지키는 것이 그리스도의 본을 따르는 것이라고 자랑한다. 그러나
우리는 먼저 그리스도께서 어떠한 행동을 하실 때 그것이 제자들로 하여금 본받도록
하는 규범으로서의 본인가 아닌가를 생각해야 한다. 여기서는 그러한 면을 전혀 찾아
볼 수 없다. 그러므로 이 행동을 모방하는 것은 하늘에 날아 올라가겠다는 처사와 같
이 사악한 짓이다. 더군다나 그들은 그리스도를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원숭이처럼 흉
내만 내고 있다. 해마다 그들은 거청하게 발씻는 행사를 치른다. 그들은 이 허례허식
을 치르고 나서는 그들의 임무를 멋있기 다한 것으로 생각하며 그리고 나서 자기의 형
제들을 미워해도 상관없는 것으로 생각한다. 더우기 그들은 열 두 사람의 발을 씻는데
이것은 그리스도의 모든 지체를 잔인하게 고문하고 그리스도 자신의 얼굴에 침을 뱉는
처사다. 이 의식적인 희극은 여기서 매년 마다 의식으로 지킬 것을 명하는 것이 아니
라 일생에 걸쳐서 우리 형제들의 발을 씻어 줄 수 있는 마음의 자세를 갖도록 당부하
고 있다.


13:16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 이것은 물론 현재의 상황에도 적용되어
야 하지만 보다 넓은 의미로 사용될 수 있는 경고의 귀절이다. 여기서 이 말씀을 일반
적인 말로 취급해서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에게 십자가를 짊어질 것을 권면하시는 것으
로 보는 자들이 있는데 내 생각에는 잘못이다. 그보다는 그리스도께서 이 경구(警句)
를 그의 의도에 적용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하다.
그는 다음에 그들이 이것을 알고 행한다면 '복이 있을 것이다'는 말씀을 덧붙이고
있다. 지식이란 그것이 신자들로 하여금 그들의 머리되시는 그리스도에게 순종하도록
인도하지 않을 경우에는 참되다고 말할 수 없다. 반대로 그리스도와 그에게 속하는 일
들을 우리 자신과 무관한 것으로 보는 것도 잘못이다. 여기서 우리가 배울 점은, 우리
가 형제들에게 양보하는 것을 배우기 전에는 그리스도가 우리의 선생인지 아닌지 확실
히 모른다는 사실이다. 어느 누구고 모든 면에 있어서 자기 형제들에게 자신을 내어
맡기는 사람은 없으며 사랑이 여러 임무에 있어서 게으르고 냉담한 사람이 많다는 사
실은 우리에게 신앙의 완전하 빛이 얼마나 부족한가 하는 점을 역력히 보여주고 있다.


13:18
내가 너희를 다 가리켜 말하는 것이 아니라 - 그는 다시 제자들 가운데 실제로 제
자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 있다는 점을 선언하고 있다. 이것은 한편으로는 유다로 하여
금 더욱 더 핑계의 여지가 없게 하려는 뜻에서일뿐 아니라, 또 한편으로는 제자들로
하여금 유다의 타락을 보고 동하지 않게 하려는 뜻에서 하신 말씀이다. 그는 그들이
유다의 타락에 상관없이 그들의 소명에 집착할 것을 권하고 있을 뿐 아니라, 그가 말
한 복은 모두에게 공통적인 것이 아닌 만큼 그들로 하여금 그것을 더욱 진지하게 구하
며 그 안에 더욱 확고하게 머물러 있을 것을 당부하고 있다.
그들이 인내할 것이라는 사실을 그는 그들의 선택의 덕으로 돌리고 있다. 주님께서
그의 손길로 인간의 힘을 붙잡아 주시지 않는다면 이 약한 힘은 산들 바람만 불어도
이리저리 흔들리며 더 없이 하찮은 동요에도 넘어지고 만다. 그러나 그는 그가 선택하
신 자들을 인도하시고 있는 만큼 사단이 유도하는 모든 전략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끝
까지 요지부동하게 인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그들의 견인 뿐 아니라 그들
의 경건의 시작까지도 선택의 덕으로 돌리고 있다. 저 사람이 아니라 이 사람이 하나
님 말씀에 헌신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그가 선택받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사람이 끝까지 지속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한번 시작하는 일을 완성하기까지 한결같
이 지속적이기 때문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짧게 말해서 하나님의 자녀와 불신자들의
차이점은 전자는 양자(養子)의 영에 의해서 구원으로 이끌림을 받지만 후자는 그들의
육신에 의해서 파멸로 이끌려감을 당하며 어떠한 구속도 마다 하는 데 있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그리스도께서는 "너희들 각자가 어떤 사람인지 내가 앎이라"고 말씀하셨을
것이다. 그러나 이는 그들에게 그들이 근거하고 있는 값없는 입양(入養)을 제시하고
있는데 이것은 그들이 자신의 것을 주장하지 말고 자기들과 유다의 차이점은 오직 은
혜에 달린 것이지 그들의 덕에 달린 것이 아니라는 점을 인정하게 하려는 뜻에서 그러
하다. 그러므로 우리 구원의 모든 단계는 이것에 의존하고 있다는 점을 명심하도록 하
자.
그는 다른 곳에서는(요6:70) 유다를 택한 자의 숫자에 도합시키고 있지만 이것은 모
순된 것이 아니라 상이한 표현이다. 왜냐하면 거기서의 의도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정
해서 특별한 임무를 맡기시는 잠정적인 선택이기 때문이다. 이것을 우리는 왕으로 선
택받았지만 버림받았던 사울에게서 그 예를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 그리스도께
서는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세 전에 생명으로 예정하신
그 영원한 선택을 두고 말씀하고 있다. 사실 버림받은 자들도 때로는 하나님에 의해서
성령의 은사를 부여 받아 그가 그들에게 맡기시는 임무를 실천한다. 그러기에 사울에
게 잠시동안 왕의 덕이 비취었으며 유다도 그리스도의 사도에 어울리는 뛰어난 은사에
의해 구별되었었다. 그러나 이것은 주님께서 그의 친 자녀들에 대해서만 허용하시는
성령의 성화와는 구별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이들의 지성과 마음을 모두 새롭게
하시어 자신이 보시기에 거룩하고 흠잡을 데가 없게 하시기 때문이다. 더우기 하나님
께서는 그의 입양을 두고 후회하시는 일이 없는 만큼 그것은 그들에게 깊숙이 뿌리를
박고 있으며 파기될 수 없다. 그와 동시에, 우리가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받
아들인 후에 일생에 걸쳐서 그것을 따를 경우 이것이 신령한 선택의 은사라는 점은 명
백하게 된다. 그리고 이것만이 우리가 버림받은 자들로부터 구별되는 우리의 행복의
원인이기도 하다. 버림받은 자들에게는 성령의 은혜가 없기 때문에 그들은 비참하게
멸망하지만 우리에게는 우리의 안내자로서 그리스도가 계시므로 그의 손길로 우리를
인도하시며 그의 능력으로 우리를 부축해 주신다.
더우기 그리스도께서는 여기서 그의 신성에 대한 명백한 증거를 제시하고 있다. 먼
저 그는 인간적인 방법으로 판단하지 않는다는 점을 선언하고 있으며 다음으로 그는
자신을 선택의 원저자로 제시하고 있다. 곧 내가 앎이라 하면서 말씀하시는 지식은 하
나님에게만 특유한 것이다. 그러나 두번째 증거는 더 강력하다. 곧 그는 창세 전에 선
택받은 자들이 바로 자신에 의해서 선택 받았다는 점을 그는 증거하고 있다. 우리는
그의 신령한 능력에 대한 이러한 뛰어난 제시에서 성경이 그를 가리켜 수백번 하나님
이라고 말하는 것보다 더 강력한 감명을 받아야 마땅하다.
발꿈치를 들었다 - 는 비유적인 표현은 우정을 가장하고 덤벼 들었다가 상대편이 방
심할 때 공격한다는 뜻이다. 오늘날 우리의 머리요 귀감이신 그리스도께서 당하셨던
것을 그의 지체인 우리는 참을성 있게 견뎌 내는 것이 마땅하다. 사실 교회 역사상 거
의 모든 세기에 걸쳐서 집안 식구 보다 더 위험한 원수도 없었다. 그러므로 신자들이
그러한 수치스러운 일로 고민하지 않으려면 미리부터 배신자들을 두고 참는 습관을 길
러야 한다.
한 성경을 응하게 하려는 것이니라 - 참 신앙을 부여 받지 않은 사람이 그처럼 존귀
한 자리에 선택 받았다는 것은 모순된 것으로 생각될지도 모른다. 그리스도께서는 왜
사도로 삼을 자를 선택하지 않았는가? 아니, 왜 그는 그처럼 악하게 될 줄 알면서 그
를 사도로 정했는가? 하는 반박이 있을 수도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것이 예언되어
있었던 일인 만큼 일어날 수 밖에 없었다고, 아니 다윗도 똑같은 일을 당했기 때문에
그것이 생소한 일은 아니라고 말씀하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이 예언이 바로 그리스도
에게 적용된다고 보는가 하면 또 다른 사람들은 이것을 하나의 비교로 본다. 곧 다윗
이 자기 집안의 원수에게서 배신을 받았듯이 이와 비슷한 상태가 하나님의 아들에게도
기다리고 있다는 식으로 보는 것이다. 이 후자의 견해를 따른다면 그 의미는 "나의 제
자들 가운데 하나가 악하게 자기 선생을 배신한다는 사실은 이 세상에 처음 일어나는
배신행위가 아니다. 반대로 우리는 성경이 옛날에 일어났다고 말하는 것을 오늘날 체
험하고 있다"하는 식이 될 것이다. 그러나 후에 그리스도에게서 보다 더 완전하게 볼
수 있었던 것이 다윗에게서 윤곽만 그려졌으므로 나는 이것을 다윗이 예언의 영에 따
라 미리 말한 것에 대한 엄격한 성취로 보는 전자의 견해에 동의한다(시41:9). 어떤
사람들은 이 문장은 주동사를 보충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말이 끊긴다고 본다. 그러나
이것을 계속적으로 읽는다면, 곧 "성경이 성취되려고 나의 빵을 먹는 자가 내게 그의
발꿈치를 들었다"하는 식으로 읽으면 문제될 것이 하나도 없다.


13:19
지금부터 일이 이루기 전에 미리 너희에게 이름은 - 여기서 그는 제자들에게 한
버림 받은 사람이 그들과의 교제를 저버리더라고 그것 때문에 실망해서는 안된다는 점
을 말씀하고 있다. 그것은 오히려 그들의 신앙을 확증하는 계기가 되어야 했다. 교회
가 당한 고난과 투쟁에 대한 예언이 우리 눈 앞에 제시되지 않을 경우에는 우리의 마
음 속에는, 그 모든 예언이 다 어디로 갔나 하는 의심이 생길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
나 성경의 진리가 우리의 체험과 일치할 경우에는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살피시
며 우리가 그의 섭리의 지배를 받고 있다는 점을 더욱 더 명백하게 깨닫게 된다.
더우기 "내가 그인줄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로다"라는 귀절은 그가 바로 약속된 메
시아라는 뜻이다. 이것은 유다의 배신이 제자들을 믿게끔 만들기 시작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그리스도의 입을 통해 전해 들은 사실을 체험하게 되자 그들의 신앙이 더욱 큰
발전을 보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두가지 면으로, 곧 그가, 아무 것도 그에게는 숨겨진
것이 없었으므로, 그들이 사건이 일어난 후에 믿을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으로 볼 수
도 있고 아니면 성경이 그리스도에 대해서 증거하고 있는 모든 점이 그에게 하나도 모
자란 것이 없을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이 두 해석은 서로 잘 조
화를 이루고 있는 만큼 어느 것을 택하느냐 하는 문제는 독자들의 선택에 맡긴다.


13;20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 여기서 요한이 문맥이 끊기는 새로운 가
르침을 서숭하고 있거나 아니면 그리스도께서 유다의 죄악에서 일어날 실족사건을 예
언하고 있었거나 둘 중에 하나이다. 복음서 기자들은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항상 순서
대로 정리하는 것은 아니고 때에 따라서는 여러가지 단편적인 말씀을 한 군데 모으는
수가 있다. 하지만 그리스도께서는 실족을 막는 뜻에서 이 말씀을 하셨을 것으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 우리가 나쁜 본을 보고 상심하기 쉽다는 점에 대해서는 다들 아는
그대로다. 따라서 경건한 사람 열 사람 스무 사람의 인내는 한 사람에게 감화를 끼치
지 못해도 한 사람의 실수는 나머지 200명의 사람들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주고 그들의
신앙을 불식시키고 만다. 그러기에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의 눈 앞에 극악무도한 죄를
제시하면서 그들이 이 새로운 사건에 압도되어 넘어지지 않도록 하는 뜻에서 그의 손
을 펴서 그들을 붙잡아 줄 필요가 있었다. 물론 그는 이들만 생각하고 있던 것이 아니
고 뒤따라 오는 모든 자들을 또한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렇지 않다면 유다를 생각할
경우 오늘날 우리는 심한 상처를 받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마귀는 그리스도에 대한
증오를 통해서 우리와 그리스도의 사이를 떼어 놓을 수 없을 경우 사역자들에 대한 싫
증이나 멸시를 유발하기 마련이다.
그리스도의 이 교훈에서 우리는 어떤 사람들이 그들의 직무를 수행하는 데 있어서
그 행동이 악하고 죄악스럽기 때문에 그들의 불경건이 드러난다 해서 그것이 결코 사
도적 권위를 훼손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명백히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 사
역의 주인되시는 하나님을 생각해야 마땅하며 그에게서는 결코 멸시받을 만한 것을 찾
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는 아버지에 의해 유일한 교사로 임명받은 가운데
그의 사도들을 통해서 말씀하시는 그리스도를 생각해야 한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복음
의 사역자들을 받아들이려하지 않는 자는 그들 속에 계시는 그리스도를, 그리고 그리
스도 안에 계시는 하나님을 배척하는 셈이다.
로마 가톨릭에서는 이것을 들어 자신들을 자화자찬하고 자신들의 독재를 추켜 세우
는데 이것은 어리석고 터무니 없는 것이다. 먼저 그들은 그리스도의 사도들과 전혀 무
관한 이상한 옷으로 자신들의 몸을 장식하고 있다. 둘째로 물론 제자들이 사도였다는
점을 감안하지 않을 수 엇지만 우리는 이 귀절에서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권리를 인간
에게 양도한다는 의미를 찾아볼 수 없다. 그리스도께서 보내는 자들을 받아 들인다는
것은 그들이 그들에게 위임된 임무를 수행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
겠는가?


13;21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 사도직의 성결성과 탁월성을 생각하면 유다의 배신
은 더욱 더 가증스럽게 느껴진다. 하나님의 위엄이 밝히 드러나야 할 성직(sacrum
ordinem)이 한 사람의 지독한 사악으로 더럽혀지는 것을 보고서 그리스도마저 경악을
금치 못하셨다. '증거하여'라는 말 역시 같은 의미에서 덧붙여진 귀절이다. 곧 그것은
너무도 가증스러웠기 때문에 얼핏 들었을 경우에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다는 이야기
다.
복음서 기자는 그리스도께서 영으로 민망하였다는 말을 하고 있는데 이것은 그저 얼
굴 표정이나 목소리로만 고민스러운 표정을 지으신 것이 아니라 가슴 속 깊이 괴로롸
하셨다는 뜻이다.
여기서 말하는 '영'(spirit)은 마음이나 영혼을 뜻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이 영의 격
렬한 충동에 이끌린 나머지 이 말씀을 쏟으시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해석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나는 이 해석에 동의하지 않는다. 물론 그리스도의 모든 감정이 이 영의 지배
를 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복음서 기자의 의미는 전혀 다른 데 있다. 곧 그리스
도의 고난은 내면적인 것이었으며 꾸밈이 없는 그대로였다는 뜻이다. 우리는 여기서
교훈을 얻어야겠다. 곧 그리스도의 열정을 본받아 하나님과 그의 교회의 거룩한 자리
(sacrum ordinem)를 뒤엎는 극악한 일들을 대할 경우에는 깊이 고민하는 것이 당연하
다.


13;22
제자들이 서로 보며 - 아무런 내용을 모르고 있던 그들이 이제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고 동요하기 시작하고 있다. 유다만이 혼자서 자신의 악의에 집착한 나머지 덤덤해
하고 있다. 제자들 가운데서 차지하는 그리스도의 권위란 대단한 것이었기 때문에 그
들은 그가 생각없는 말을 하지 않으신다는 점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사단은 유다
의 마음으로부터 모든 경외심을 제외하여 버렸기 때문에 그의 마음은 마치 절벽과 같
아서 온갖 권고를 뒤로 던져 버렸다. 물론 그리스도께서 잠시 동안이나마 무고한 자들
을 괴롭히는 것이 불친절한 행동으로 보일 수도 있겠지만 이러한 종류의 불안은 그들
에게 필요했으며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에게 전혀 해를 끼치지 않으셨다. 하나님의 자녀
들은 불경건한 자들에게 내리는 심판을 전해 들을 때 자신들도 역시 고민하는 가운데
자신들을 반성하고 위선을 경계하는 것이 당연하다. 곧 그들 자신과 그들의 생활을 반
성하는 계기로 삼는 것이 당연하다.
이 귀절은 또한 우리가 불경건한 자들을 당장 지적해 낸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
신의 손으로 끌어 낼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점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다. 흔히
있는 일이지만 교회에는 우리가 숨겨서는 안될 그러한 은밀한 병폐가 있지만 그러나
거기에 관련된 사람들의 사악이 아직 드러날 정도로 무르익지 않은 경우가 있다. 이런
경우 우리는 이 중간 노선을 취하는 것이 마땅하다.


13;23
그의 사랑하시는 자 - 그리스도께서 요한에게 가지셨던 특별한 사랑에서 우리는
우리가 어떤 사람들을 다른 사람들 보다 더 사랑할 경우 그것이 언제고 기독교의 사랑
(carites)에 위배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의 사랑이
하나님을 향하고 있느냐,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의 은사에 뛰어난 그만큼 모든 사람을
사랑하고 있느냐에 달려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이 목적에서 조금도 이탈하지 않으셨
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문제가 다르다. 우리의 마음은 너무도 허영으로 가득차 있기
때문에 사람을 사랑하면서 하나님에게 더 가까이 다가서는 자는 아무도 없을 정도이
다. 인간들 서로 간의 사랑은 그것이 하나님을 지향하고 있지 않을 경우 제대로 조정
할 수 없다.
요한은 "그가 예수의 품에 기대고 누웠는지라"하는 말을 하고 있는데 이 표현은 오
늘날 이해가 잘 안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당시 식사 습관이었다. 그들은 오늘날 우
리들처럼 식탁에 앉은 것이 아니고 신발을 벗고 다리를 쭉 뻗은 다음에 긴 소파
(couch)에 기대고 누웠다.



13;26
내가 한 조각을 찍어다가 주는 자가 - 그리스도께서는 공공연하게 배신자의 이름
을 지목할 수도 있었는데 빵조각을 적시어서 지적하는 것은 무슨 이유 때문인가 하고 물을 수도 있다. 여기에 대한 나의 대답은 이것이다. 곧 이 몸짓은 유다가 배신자라는 사실을 오직 한 사람에게만 알려 주었을 뿐 당장에 그들 모두에게 폭로하지는 않았다. 이것은 요한이 후에 적당한 때에 가서 이 사실을 다른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여주고 증거 하는 데 있어서 유익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의도적으로 유다의 가면을 벗기는 것을 지연하신 것을 보고 우리 역시 위선자들의 모습이 스스로 드러날 때까지 그들이 숨겨 있는 것을 참아야겠다. 유다는 다른 제자들과 같은 자리에 앉아 있었지만 그는 이미 심판관의 입으로 정죄를 받은 사람이었다. 오늘날 하나님의 자녀들로 행세하고 있는 자들 역시 이보다 더 나을 수 없다.

13;27
사단이 그 속에 들어간지라 - 유다는 처음부터 사단의 꼬임을 받아 그러한 죄악을
생각해 냈음에 틀림없다. 그러면 왜 이제야, 곧 이미 사단이 유다의 마음을 휘어 잡고
있는 지금에 와서야 사단이 그에게 들어갔다고 기록되고 있는가? 이미 신앙이 있는 자
들이 그 신앙에 더 확신을 가질 경우 우리는 그들이 믿는다고 말하듯이 그들의 신앙의
증대를 가리켜 신앙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리고 유다가 완전히 사단에게 버린 바 되
어 격정에 휩쓸려 과격하게 나가는 지금 사단이 그에게 들어 갔다고 말하는 것도 마찬
가지 이치다. 왜냐하면 성도들이 점차적으로 발전하는 가운데 새로운 은사를 더 받을
경우 우리는 그들이 성령으로 충만하다는 말을 하듯이, 불경건한 자들이 배은망덕하게
하나님의 분노를 자처하는데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서 그의 영, 이성의 모든
빛,아니 인간으로서의 모든 감정을 박탈하시고 그들을 사단에게 내어 주기 때문이다.
인간이 버려진 마음 상태 그대로 버림 받는 가운데 금수와 다를 바 없이 되는 것, 아
니 금수마저 몸을 움츠리는 그러한 죄악으로 돌진하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처참한 심
판의 결과이다. 그러므로 우리도 우리의 악으로 하나님의 선하심을 극복해 버리고 말
경우 마침내 그가 우리를 사단에게 넘겨 주는 비참함을 당하지 않으려면 그를 경외하
는 가운데 조심성있게 살아가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빵 조각을 건네 주는 동작과 함께 그를 사탄에게 넘겨 주신 것이 아
니다. 오히려 유다가 그 빵 조각을 받는 것과 동시에 자신을 완전히 사단에게 넘겨준
셈이다. 그것은 계기었지 원인이 아니었다. 유다의 마음은 그리스도의 크나큰 친절에
누그러졌어야 마땅했지만 그것은 오히려 강철보다 더 단단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의 의로운 심판 가운데 그의 마음을 사단을 통해서 더욱 강퍅케 하시는 것은 그의
절망적인 불치의 오만에 대한 보응이다. 우리가 원수들에게 친절을 베푸는 가운데 그
들의 머리 위에 모닥불을 피울 경우, 만약에 그들이 절망적일 경우에는, 그들은 오히
려 그 불에 태워지고 만다. 그러나 이 때 우리의 친절이 비난을 받을 수 없는 것은 그
들의 마음이 누그러져 우리를 사랑했어야 옳기 때문이다.
어거스틴은 이 빵조각이 그리스도의 몸을 상징한다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잘못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성만찬 이후에 유다에게 건네졌기 때문이다. 더우기 여기서 유다에게
마귀의 본질이 들어갔다고 보는 사람들이 있는데 터무니 없는 소리다. 복음서 기자는
마귀의 능력과 영향력만 말하고 있을 따름이다. 여기서 우리는 주님의 여러 축복을 무
시할 경우 모두에게 기다리는 처참한 처벌이 무엇인가를 역력히 알 수 있다.
네 하는 일을 속히 하라 - 그리스도께서는 유다에게 재촉하는 뜻으로 이 말씀을 하
신 것이 아니다. 이것은 오히려 혐오의 말씨다. 지금까지 그는 여러가지 방법을 통해
서 그를 돌이키려고 노력하셨지만 유다는 막무가내였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께서
는 그를 소망이 없는 사람으로 취급하고, "그래, 기어코 죽겠다니 죽어봐라"하는 투로
말씀하고 있다. 이 경우 그는 물론 심판관의 직무를 수행하고 있지만, 이 심판관의 자
리는 자신의 편에서 파멸을 원해서가 아니라 이미 자신들의 실수로 파멸되어 버린 사
람들이기에 그들을 사형에 처하는 그러한 자리와 같다. 짧게 말해서 그리스도께서는
유다에게 멸망의 필연성을 강요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오래 전부터 지니고 있던
그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선언하고 있다.


13:28
그 앉은 자 중에 아는 이가 없고 - 이것은 요한이 그가 그리스도에게서 들은 내용
을 아직 다른 제자들에게 이야기하지 않았거나 아니면 그들이 그 말을 듣고 너무 당황
한 나머지 자신들의 마음의 평정을 상실했거나 둘중에 하나다. 아마 요한 자신도 거의
넋을 잃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당시 제자들에게 일어났던 사건이 오늘날 종종 일
어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신자들이 주님께서 우렁찬 목소리로 정죄하고 있는 위선자
들을 알아보지 못하는 것이 그것이다.


13;29
혹 가난한 자들에게 무엇을 주라 하시는 줄로 생각하더라 - 그리스도의 지독한 가
난에 대해서는 다른 귀절을 통해서 잘 알고 있는 그대로다. 그렇지만 그는 없는 가운
데서도 가난한 자들에게 무엇인가를 주셔서 우리에게 본을 보여 주셨다는 점을 여기서
알 수 있다. 다시 말해서 가난한 자를 돕는 것이 그들의 습관이 아니었더라면 사도들
은 그가 가난한 자들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것으로 추측하지 않았을 것이다.


13;32
하나님이...영광을 얻으셨으면 - 그리스도께서 그가 그의 죽음을 통해서 영광스러
운 승리를 거두실 것으로 결론을 내리는 것은 그 죽음을 통한 그의 유일한 목적은 그
의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버지께서도 아들의 죽음을 통
해서 그의 영광을 추구하시되 아들로 하여금 이 동일한 영광에의 참여자가 되게 하는
그러한 방법을 택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는 그가 당분간 당하실 치욕이 씻겨지
고 나면 장엄한 영광이 그의 죽음을 통해 비칠 것이라는 점을 약속하고 있다. 그리고
이 약속은 성취되었다. 곧 그리스도께서 당하신 십자가의 죽음은 그의 영광을 흐리게
한 것이 아니라 바로 그곳에서 더 없이 밝게 비취고 있다. 바로 그곳에서 인류에 대한
그의 불가사의한 사랑이, 죄를 속하고 하나님의 진노를 달래는 그의 끝없는 의가, 사
망을 정복하고 사단을 짓밟는, 아니 하늘 문을 열어 제치는 그의 놀라운 능력이 최대
한의 광채를 발하고 있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 모두가 체험하는 진리이기도 하다. 곧
비록 온 세상이 우리를 깔아 뭉개려고 음모를 꾸민다 해도, 우리가 진심으로 그리고
정직하게 하나님의 영광을 촉진하고자 분투한다면, 우리는 그가 그의 편에서 우리를
영화롭게 하실 것을 의심할 수 없다.
그리스도께서는 위로를 더하시는 뜻에서 그것이 '곧'(straightway) 일어날 것이라는
약속과 함께 그 시간이 짧을 것이라는 점을 언급하고 있다. 물론 이 영광은 그의 부활
의 날에 시작되었지만 그는 특별히 이 영광의 확대를 묘사하고 있다. 이 확대는 그리
스도께서 복음과 그의 영의 능력을 통해서 죽은 자들을 일으키심으로써 자신을 위한
새로운 백성을 창조하셨을 때 곧 따라 일어났다. 그리스도의 죽음의 특수한 영광은 거
기에서 나온 인간의 구원이라는 열매가 아닐 수 없다.


13:33
소자들아 내가 아직 잠시 - 제자들이 그들의 선생이 떠나고 없을 경우 큰 슬픔에
잠기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으므로 그는 그가 그들과 함께 있어서 그들에게 인내
할 것을 권면할 수 없다는 점을 미리 말씀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그는 시기에 어울리
지 않는 열성을 제거하는 뜻에서 그들이 당장에는 그를 따라 올 수 없을 것이라는 말
씀을 하고 있다. 그는 제자들을 가리켜 귀엽게 '애들아'하고 부르고 있다. 여기서 그
리스도는 그가 제자들에게서 헤어지는 것은 그들의 구원을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
라는 점을 가르치고 있다. 그는 더 없이 친근한 사랑을 그들에게 베풀고 있지 않는가?
물론 그가 우리의 육신을 입으신 것은 우리의 형제가 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이 다
른 명칭을 통해서 그는 그의 사랑의 열정을 더욱 강렬하게 표현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가 과거에 유대인들에게 이야기하셨던 것을 여기서 되풀이 하고
있다고 말씀하고 있는데 단어에 있어서는 맞는 말이지만 그 의미는 전혀 다르다. 제자
들이 그를 따라 올 수 없다고 말씀하시는 것은 그들이 그의 잠시동안의 부채를 참을성
있게 인내하도록 하려는 뜻에서이다. 말하자면 그는 그들이 그들의 지상 전투를 다 마
칠 때까지 그들의 위치에 남아 있도록 하는 뜻에서 그들에게 제동을 걸고 있는 셈이
다.


13;34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 그들을 위로하는 뜻에서 그는 그들이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이 권고를 덧붙이고 있다. 이것은 마치 "나의 몸이 너희들과 함께 없
는 동안 너희들 서로 간의 사랑을 통해서 너희들이 나에게 헛배우지 않았다는 점을 증
거하도록 하라. 이것을 꼭 명심하거라"하는 말씀과 같다. 여기서 그가 왜 이것을 가리
켜 새 계명이라고 부르는가 하는 점에 대해서는 아직 의견의 일치를 못 보고 있다. 어
떤 사람들은 과거에 율법에서 말한 사랑에 대한 내용은 문자적이요 외형적이었지만 그
리스도께서는 그의 영을 통해서 그것을 신자들의 마음에 새겼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이들의 견해에 의하면, 그리스도께서 율법을 새로운 방법으로 공표하셔서 그
것이 모든 면에서 활기를 띠게 하셨기 때문에 율법이 새롭게 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너무 억지요 그리스도의 의도와 거리가 먼 이야기이다. 또 어떤 사람들은 이것을 이렇
게, 곧 비록 율법이 우리에게 사랑할 것을 요구하지만 그 속에 들어있는 사랑의 가르
침은 너무도 많은 의식과 첨부된 사항으로 뒤범벅이 되어 있어서 그 가르침이 그렇게
선명하게 드러나지 않는 반면, 복음에서는 아무런 그림자가 없이 완전한 사랑의 모습
이 드러나고 있다고 해석한다. 물론 나는 이 해석을 완전히 무시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리스도의 의도는 이보다 훨씬 간단한 것으로 본다. 우리가 아는 대로 율법이란 처음
에는 잘 지켜지다가도 시간이 흘러 감에 따라 사람들의 마음에서 잊혀지고 마침내 진
부한 취급을 받기 마련이다. 그러기에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제자들의 마음에 사랑의
교리를 보다 더 확고하게 고정시키는 뜻에서 이것이 새로운 것이라고 권하고 있다. 이
것은 마치, "나는 너희들이 이 계명을 명심하되 언제고 바로 얼마 전에 제정된 법인
것처럼 여기라"하는 말씀과 같다.
간단히 말하자면 이 귀절에서의 그리스도의 의도는 그의 제자들에게 사랑할 것을,
그결과 그들이 이것을 추구하는 것을 포기하거나 이것의 진실성이 그들에게서 사라지
는 일이 없을 것을 권면하는 것이다. 이 권면이 얼마나 필수적인 것인가 하는 점을 우
리는 날마다의 생활에서 체험하고 있다. 한결같이 사랑하기란 어려운 노릇이다. 그래
서 인간들은 그것을 집어 치우고 하나님을 예배하는 데 있어서 새로운 방법을 이것 저
것 고안해 내기 마련이요 사단은 여기에 대한 여러가지 방법을 제시해서 그들로 하여
금 거기에 집착하도록 만들기 마련이다. 여기에 따라 그들은 공연히 하나님을 조롱하
려 덤비지만 사실은 스스로를 기만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이 사랑의 새로움이 우
리로 하여금 사랑을 개발하도록 하자. 그와 동시에 우리는 이것이 새로운 것으로 불리
우는 것은 이제야 이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시작했기 때문이 아니라는 점을 명
심하도록 하자. 다른 곳에 보면 이것을 가리켜 율법의 성취라는 말로 표현되고 있다.
서로 사랑하라 - 물론 사랑이 외부 사람들에게 베풀어지는 것은 우리 모두 같은 육
신을 입고 하나님의 형상에 따라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형상을 중생
한 자들 가운데서 더욱 밝게 빛나므로 그리스도의 제자들 사이에서 이 사랑의 결속이
더욱 더 다져지는 것이 마땅하다. 사랑의 원인은 하나님에게 있고 그분에게 그 뿌리가
있으며 그분을 향해서 지향되고 있다. 따라서 이 사랑이 하나님의 자녀를 만날 경우에
는 그를 더욱 더 큰 열성과 애정으로 껴안기 마련이다. 더우기 서로 사랑하는 자세는
동일한 영의 지배를 받는 자들의 경우에 있어서만 있을 수 있다. 여기서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최고 수준의 사랑이지만 한편, 하나님의 선하심은 온 세상에 베풀어
지고 부어지고 있듯이, 우리 역시 모두를, 우리를 미워하는 사람들까지 사랑해야 한다
는 사실을 명심해야겠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그의 본을 제시하신 것은 우리가 그 수
준에 미칠 수 있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는 우리에 비해 무한히 앞서 있지만 우리가
어쨋든 동일한 표적을 목표로 삼도록 하려는 뜻에서다.


13;35
이로써 모든 사람이......알리라 - 그리스도께서는 여기서 서로 사랑하는 자들은
그의 도장에서 헛배운 것이 아니라는 점을 다시 한번 확증하고 있다. 이것은 마치,
"너희들이 나의 제자라는 점을 너희들만 아는 데서 그칠 것이 아니라 너희들의 언행이
타인들에게 진정한 것으로 인정을 받을 것이다."하는 말씀과 같다. 그리스도께서는 이
표적을 통해서 자기 자신의 백성과 이방인들을 구별하고 있는 만큼, 사랑을 배척하고
새롭게 조작된 예배를 택하는 자들은 헛수고를 하고 있을 뿐이다. 이러한 허영이 오늘
날 로마 가톨릭에서 성행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이것을 그처럼 집요하게 고수하시는
것은 공연한 일이 아니다. 자신에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은 마치 물과 불처럼
하나가 될 수 없는 관계다. 이기적인 사랑은 사랑을 완전히 배제하고 말 정도로 우리
의 오관을 한 데로 묶어 버리고 만다. 그러나 우리는 언제고 이러한 사랑으로 만족하
고 있을 뿐인데 그것은 사단이 우리를 속이려고 던지는 수많은 유혹 때문이다. 그러므
로 누구든지 진정으로 그리스도에게 귀속되어 하나님의 인정을 받기를 원한다면 자신
의 생활 전체가 형제들을 사랑하도록 재조정해서 이 일에 매진해야 마땅하다.


13:36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 이 질문은 그리스도의 '내가 유대인들에게......'하는
말씀과 관련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베드로가 얼마나 무지했는가를 알 수 있다.
그는 그렇게 자주 그리스도의 떠나심에 대한 경고를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그에
게 전혀 생소한 소식이었다는 듯이 걱정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날마다 그리스
도의 입을 통해서 우리의 생활에 적합하고 필요한 모든 내용에 대해서 가르침을 받고
있지만, 정작 실천해야 할 마당에 직면하게 되면 그것에 대해서 전혀 아는 바 없는 문
외한(novitii)처럼 당황한다. 베드로는 또한 그가 그리스도의 육체적 임재에 너무 집
착되어 있었다는 점을 보여 주고 있는데 이것은 그가 그리스도께서 다른 곳으로 가신
다는 사실을 있을 수 없는 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나의 가는 곳에 - 이 말씀으로 그리스도께서는 베드로의 부적당한 욕망을 견제하고
있다. 그는 교사답게 간략하게 가르치고 있지만 곧 그의 말씀의 가혹성을 누그러뜨리
고 있다. 이 귀절에서 우리는 우리의 모든 욕망을 하나님께 복종하는 가운데 그것이
한계를 넘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는 점을 배울 수 있다. 만약 이 욕망이 곁길로 갈 경
우에는 이 재갈을 입에 물리도록 하자. 더우기 우리가 낙심하지 않도록 하는 뜻에서
그리스도께서는 어느날 우리가 그에게 모이게 될 것이라는 약속을 통해서 곧장 위로를
베푸시고 있다.
그의 말씀의 의도는 베드로가 아직은 십자가를 짊어질 준비가 되어 있지 않지만 곡
식이 영글듯이 시간이 흐름에 따라 무르익어 가고 단단하게 되어 그를 따를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시작하신 일을 중대하시고
개선해 주시라고 기도해야 겠다. 그와 동시에 우리는 우리가 잽싸게 달릴 수 있는 힘
을 얻기까지는 기어 다닐 수 밖에 없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연약함을 멸시하시지 않
듯이 우리 또한 아직 목표에서 훨씬 뒤져있는 연약한 형제들을 멸시하지 않는 습관을
몸에 익히도록 하자. 물론 우리 모두가 최대한의 열성과 속력을 다해 전진하는 것이
우리의 바람이어야 하지만 그러나 보다 더 느리게 가는 사람이 있다해도 그가 제 길을
가고 있는 한 그가 최선을 다할 것만을 기대하는 것이 마땅하다.


13:37
내가 지금은 어찌하여 따를 수 없나이까 - 베드로의 이 말은 그가 그리스도의 대
답에 대해서 불만이 있다는 이야기다. 물론 그는 자신의 연약성에 대해서 수차에 걸쳐
경고를 받았으며 그러기에 그리스도를 즉각 따를 수 없는 책임은 자신에게 있다는 것
을 이해는 하였지만 아직 이 점을 확신하지는 못하고 있었다. 인간은 천성적으로 자신
의 힘에 대한 과신으로 부풀어 있다. 베드로의 말은 자신의 힘을 과신하는 우리의 타
고난 천성에 대한 표현이기도 하다. 따라서 힘이 없는 자들일수록 하나님의 도움을 청
하지 않고 모든 것을 시도하려고 덤비기 마련이다.


13:38
네가 나를 위하여 네 목숨을 버리겠느냐 - 그리스도께서는 베드로와 논쟁을 벌이
려고 한 것이 아니라 그가 자신의 체험을 통해서 배워 가기를 바라셨다. 이것은 실패
를 맛보기 전에는 제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어리석은 사람들에게 해당하는 말씀이다.
베드로의 불굴의 지조에 대한 약속은 물론 진지한 확신에 의한 것이었지만, 그에게 주
어진 분량을 생각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그의 확신은 자만심으로 가득차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이것은 우리 모두에게 해당하는 본보기다. 따라서 우리도 헛된 자만심으로
물들지 않으려면 각자의 결점을 면밀히 검토해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
서는 제 아무리 많은 것을 약속해도 잘못이 없지만 여기서 책망되고 있는 것은 육신의
경솔과 뻔뻔스러움이다. 신앙은 두려움과 불안을 낳는다.
닭 울기 전에 - 저돌성과 오만은 무지에서 나오는 것인 만큼 베드로는 그가 전쟁터
밖에 있으면서 용맹스러운 군인 행세를 하고 있다는 꾸중을 듣고 있다. 곧 그는 그의 힘을 아무 데고 시험해 본 일이 없기 때문에 아무 것이나 다 해낼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후에 가서 그는 그의 오만에 대한 처벌을 받고 있는데 이것은 그의 당연한 보응이다. 우리 모두 우리 자신의 힘을 믿지 말고 주님에게 매달리는 가운데 그가 그의 능력을 통해서 우리를 붙들도록 하자.

13:38
네가 나를 위하여 네 목숨을 버리겠느냐 - 그리스도께서는 베드로와 논쟁을 벌이려고 한 것이 아니라 그가 자신의 체험을 통해서 배워 가기를 바라셨다. 이것은 실패를 맛보기 전에는 제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어리석은 사람들에게 해당하는 말씀이다. 베드로의 불굴의 지조에 대한 약속은 물론 진지한 확신에 의한 것이었지만, 그에게 주어진 분량을 생각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그의 확신은 자만심으로 가득차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이것은 우리 모두에게 해당하는 본보기다. 따라서 우리도 헛된 자만심으로 물들지 않으려면 각자의 결점을 면밀히 검토해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는 제 아무리 많은 것을 약속해도 잘못이 없지만 여기서 책망되고 있는 것은 육신의 경솔과 뻔뻔스러움이다. 신앙은 두려움과 불안을 낳는다.
닭 울기 전에 - 저돌성과 오만은 무지에서 나오는 것인 만큼 베드로는 그가 전쟁터 밖에 있으면서 용맹스러운 군인 행세를 하고 있다는 꾸중을 듣고 있다. 곧 그는 그의 힘을 아무 데고 시험해 본 일이 없기 때문에 아무 것이나 다 해낼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후에 가서 그는 그의 오만에 대한 처벌을 받고 있는데 이것은 그의 당연한 보응이다. 우리 모두 우리 자신의 힘을 믿지 말고 주님에게 매달리는 가운데 그가 그의 능력을 통해서 우리를 붙들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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