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1
내 백성에게 ... 고하라 - 여기 '백성'이란 선지자 시대의 백성 혹은 바벨론 포로 시대의 백성, 둘 중으 하나이겠다. 우리는 다수 주석가들의 견해에 따라 후자의 견해를 취하고자 한다(Delitzsch, Rosenmuller, J. Watts, Whybray). 그 근거로서 성전, 희생 제사, 므낫세 시대에 유행했던 우상 숭배 따위에 대한 언급이 없는 것을 들 수 있겠다.
=====58:2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찾기는 하되 그것은 형식적이요 외면적일 뿐, 하나님의 뜻을 구하기보다는 도리어 자기의 뜻을 구했던 사실에 대한 조롱이 담기 다역설적 표현이다. '그들은 나를 날마다 찾으며, 나의 뜻을 몹시도 알고 싶다면서, 마치 옳은 일을 해 온 백성이기나 하듯이, 자기 신의 법을 어기지 않은 백성이기나 하듯이, 무엇이 옳은 법인지 나에게 묻고 하나님꼐 가까이 나가고 싶다면서'(공동 번역).
=====58:3
본절은 이스라엘이 금식의 본래적 목적과 의의를 외면하고 오히려 현실상의 축복을 비는 수단으로, 단지 종교적 자랑을 과시하기 위한 수단으로 악용한 사실을 계속 책망하는 내용이다. 본래 금식은 회개와 성결을 위해 제정된 것으로서(느 9:1,2;시 69:10), 철저한 회개를 통해 자신의 이기적인 뜻과 정욕을 억누르고 자기를 부인케 하기 위한 것이었다. 한편, 금식에 대한 언급은 이른 시기부터 보여진다(삼상 31:13;삼하 12:11-23;대하 20:3). 그러나 개인 금식이 경건의 표현으로서 대중화되고 정기적으로 공동 금식이 준행된 것은 포로기 이후의 일이다. 슥 8:19에는 정기 금식의 네 시기가 언급되어 있다. 그중 4월 9일의 금식은 예루살렘 함락을(와하 25:3-21), 5월 10일의 금식은 성전 파괴를(렘 52:12,13), 7월 2일의 금식은 그달리야 살해를(왕하 25:23-25) 그리고 10월 10일의 금식은 예루살렘이 처음 공략된 것을 각각 기억하는 데에 애초의 목적이 있었다(J. Watts).
금식하는 날에 오락을 찾아 얻으며 - 그들의 영혼이 괴로움을 당했다고 자랑하였던 사실이 위선이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들은 오히려 금식을 즐기고 있었다.
온갖 일을 시키는도다 - 여기 '일'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에체브'( )는 매우 힘들고 고통이 따르는 노동, 땀, 산고등을 가리킬 때 사용되는 용어이며 또한 '시키는도다'에 해당하는 '나가스'( )눈 '폭정을 가하다', '강제 징수하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본 구절은 금식하고 있다고 말하면서도 자신의 유익을 챙기기 위해 그 종이나 일꾼에게 가혹한 일을 강요하는 악덕 주인을 고발하는 내용이 되겠다(느 5:1-5).
=====58:4
다투며 싸우며 - 물론 이스라엘 백성이 다투고 싸우는 것을 금식의 목적으로 삼고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금식하는 중에조차 그러한 이욕(利慾)적인 혈기를 부릴 정도로, 그들은 금식의 목적 자체에 대해 무지하였음을 보여준다(Whybray).
=====58:5
나의 기뻐하는 금식이 되겠으며 - 여기 '기뻐하는'의 원문적 의미는 '선택한'이다. 말하자면, 너희들이 취하는 형태의 금식은 하나님이 택하신 곧 하나님이 인정하고 명령하신 금식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 머리를 갈대같이 숙이고 ... 재를 펴는 것 - 이는 극도의 겸손을 표현하는 말이다. 그러나 형식적 모양만 갖춘다고 하여 다된 걸로 생각하는 것은 위선일 뿐이다. 본절의 요지는 금식의 방법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금식의 정신이 결여되었다는 것이다. 금식의 참정신이 6절 이하에서 전개되는 바, 그것은 결국 경건의 모양과 능력을 동시에 갖추는 것이다(마 6:16-18).
=====58:6
흉악의 결박( , 하레추보트) - 문자적인 뜻은 '악의 띠'로 불의하고 잔혹한 권위를 가지고 타인의 권리나 유익을 억압하는 행위를 가리킨다.
명에의 줄을 끌러 주며 - 여기 '멍에'는 악압 혹은 강제적인 노동의 상징으로 사용되는 용어로, 여기서도 그런 의미로 사용되고 있음이 분명하다.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케하며 - 여기 거론되고 있는 상대는 문자 그대로는 '상한 자'이며 폭력, 압제 등의 '부당한 대우를 받고 하는 자'이다. 그러나 이 사람의 실체를 결정적으로 밝혀주는 단서는 '자유케 하며'로 번역된 '하페쉼'( )이다. 이 용어는 한번 노예가 되었다가 자유를 얻은 자를 묘사할 때 주로 사용되는 용어이다(신 15:12;욥 3:19 등). 이 단서에 근거할 때 본 구절이 서술하려는 존재는 의심의 여지없이 '노예'라고 볼 수 있다.
=====58:7
주린 자에게 ... 나눠 주며 - 이것은 한 아비가 그 자녀에게 그렇게 하듯이 가진 자가 그 소유를 필요로 하는 자에게 공급하는 것을 가리킨다. 대체로 이 행실은 신앙인의 필수적 의무로 간주되었는데, 고난의 사람 욥은 이러한 선행의 모범을 아름다벡 서술한 바 있다(욥 31:16-22).
네 골육을 피하여 스스로 숨지 아니하는 것 - 원문 직역은 '너 자신의 살(육체)로부터 너 자신을 숨기지 않는 것'이다. 여기 '살(육신)'은 '바사르'( )로서 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를 뼈 중의 뼈 그리고 '살 중의 살'이라 칭할 때(창 2:23), 그리고 라반이 야곱을 그의 '골육'이라 칭할 때(창 29:14), 각각 사용하던 용어이다. 그런 점을 고려할 때 본 용어는 혈육상 밀접한 관계에 있는 상대를 지칭하는 용어로 보념 되겠는데, 그런 의미에서 개역 성경의 번역 '골육'은 적절하다. 골육, 곧 친척에게서 자신을 숨기는 경우란 그 친척의 사회적 신분이 낮거나 재물이 없을 때 혹은 그들의 필요를 공급하는 일을 꺼려할 때이겠다. 참신앙인이라면 골육 친척이 어떤 신분이나 처지에 있든 간에 친절과 애정을 갖고 그와 친교를 나누고 그의 필요를 공급하는 데 힘을 써야 함이 마땅하다. 성경은 친척, 곧 가족을 돌보지 않는 믿는 자는 믿지 않는 자보다 더 약하다고 경고하고 있다(딤전 5:8).
=====58:8
네 빛이 아침같이 비췰 것이며 - 올바른 동기와 목적을 가지고서 금식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풍성한 번영의 축복을 주신다는 뜻이다. 성경에서 '번영'은 흔히 아침에 비치는 찬란한 빛에 비유되고 있다(욥 11:17).
네 치료가 급속할 것이며 - 원문 직역은 '네 상처는 빨리 치료될 것이다'이다. 여기 '치료'의 본래 뜻은 상처를 치료할 때 사용되는 '긴 붕대'이다(1:6과 비교하라). 따라서 본 구절은 오랫동안의 정신적, 육체적 상처, 곧 전인적인 상처를 전제로 한다고 볼 수 있다.
네 의가 네 앞에 행하고 - 말하자면 하나님의 율법에의 순응은 행복, 번영, 평화의 길로 이끄는 선봉장의 역할을 할 것이라는 뜻이다.
여호와의 영광이 네 뒤에 호위하리니 - 이것은 이스라엘과 그들을 분리하기 위하여 그 사이를 가로막고 섰었던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인 구름 기둥과 불 기둥을 연상케 한다(출 14:19, 20).
=====58:9
손가락질 - 문자적인 뜻은 '손가락을 뻗치는 것'이다. 이것은 남을 경멸하고 조롱하기 위하여 손가락질하는 것을 가리키는데, 여기서는 법적 기소(起訴)를 암시하는 말로 쓰였다고 볼 수도 있겠다(Whybray).
허망할 말( , 다베르 아웬) - 이는 무(無), 헛됨, 텅 빈 것(41:29;슥 10:2), 거짓, 속임수(시 36:4;잠 17:4), 무가치한 것, 사악함 , 죄악(1:13;욥 36:21) 등을 가리킬 때 사용되는 용어인데, 결국 여기서는 당시 사회에 만연하였던 온갖 종류의 거짓, 거친 행동 그리고 불의한 언사 등을 의미하는 것 같다.
=====58:10
주린 자에게 네 심정을 동(動)하며 - 원문 직역은 '너의 영혼을 주린 자에게 끄집어 내며'이다. 직역의 내용이 어색하기 때문에 몇 역본들과 사본들은 '너의 빵을 주린 자에게 내밀며'로 번역하고 있다(사해 사본, 시리아역, Noyes, Horsley). 그러나 이 번역은 원문을 크게 수정한 번역으로, 굳이 이렇게 옮길 필연성은 없다. 여기 '영혼'( , 네페쉬)은 '마음' 혹은 '선행의 마음' 등과 동의어로 보면 된다. 따라서 원문 수정 없이도 본문의 의미는 정확히 드러난다고 본다 : '너의 선행의 마음을 주린 자에게 드러내며.
' 네 빛이 흑암 중에서 발하여 - 지금까지 불투명하고 암담했던 삶의 여정이 분명하고 긍정적인 것으로 바뀔 것이라는 말이다. 말하자면 지금까지의 재앙들 그리고 시련들의 과정이 끝나고 풍성한 번영의 과정이 이어질 것이라는 뜻이다.
=====58:11
마른 곳에서도 네 영혼을 만족케 하며 - '마른 곳'( , 차흐차호트)은 태양의 강렬한 햇살에 노출되거나 가뭄 때문에 습기가 완전히 말라버린 곳을 가리킨다. 그러나 본문이 약속하는 것은 단순한 마른 땅, 가뭄에 내릴 비 정도가 아님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그 혜택을 받을 대상이 '영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문이 암시하는 바는 오랜 고통에서 벗어난 자가 얻게 될 마음의 평안, 더 나아가서는 메시야의 도래와 그의 사역으로 말미암을 구원의 약속까지로 보아야겠다. 본서는 메시야의 구원 사역으로 인한 그 택한 백성의 구원을 암시할 때 '마른 땅'의 이미지를 자주 등장시킨 바 있다(41:17 등).
물 댄 동산 - 이는 근동 지역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을 나타내려 할 때 흔히 사용된 표현이다. 시리아역(Syriac)은 본 구절을 '천국'으로 번역하고 있다. 그런데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천국을 이뤄본 적은 없다. 따라서 우리는 이 표현을 종말론적 측면에서 이해해볼 수도 있겠다. 이제 주님이 재림하시면 이스라엘의 남은 자와 이방의 택함받은 자들은 완성된 천국에서 살게 될 것이다.
물이 끊어지지 아니하는 샘 - 여기 '끊어지지'로 번역된 '예카제부'( )는 그 문자적인 뜻이 '속이다', '거짓말하다'이다. 이것은 샘의 근원이 말라 있을 경우 물을 얻기 위해 그곳을 찾은 대상들, 혹은 짐승들의 허탕을 치게 되는 사실을 연상케 한다. 그러나 하나님이 예비하실 샘은 켤코 마르지 않고 항상 풍성한 샘이다. 이 샘은 바로 반석이라고 불리기도 하는 그리스도이시다. 그리스도가 이루신 구속 사역 때문에 그분을 찾는 모든 사람은 항상 영생의 물을 얻게 될 것이다(요 4:13,14;고전 10:4).
=====58:12
네게서 날 자들 - '너를 통하여 있게 될 자들'이란 뜻이다. 이는 이스라엘 후손들을 가리킨다. 오래 황폐된 곳 ... 역대의 파괴된 기초 - 이것은 분명 바벨론 포로 시댕 동안 황폐된 상태로 방치되었던 이스라엘 성을 가리킨다. 그성은, 건물은 물론 그 기초까지도완전히 파고되었었다. 이 성의 수측은 1차적으로는 이스라엘의 회복을, 더 나아가서는 이방의 회심이라는 축복을 암시한다(암 9:11,12;행 15:16,17)=====58:13
본절의 시점은 포로 귀환 이후의 시대이다. 바로 이 시대에도 안식일 준수는 중요한 의무로 주어지고 있다(느 13:15-22). 네 발을 금하여 ... 오락을 행치 아니하고 - '발'은 동작을 일으키는 수단이다(잠 4:27). 안식일에 사람들은 자신들의 쾌락을 위해 어떤 일을 도모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유대인들은 따라서 안식일에 회당이나 성전에 가는 일 외에 다른 일에 그 발을 사용하지 않았다(행 1:12 참조).
성일(聖日) - '나의 거룩한 날'이란 뜻이다. 하나님은 이날을 나의 날이라 부르신다. 따라서 그날을 인간의 즐거움을 위해 사용하면 그분은 소유를 도둑질 하는 것이 된다. 그러나 문제는 '즐거움'이 아니라 그 즐거움이 육적인 것이냐 아니면 영적인 것이냐는 것이다. 만일 육적인 즐거움을 취한다면 그는 하나님의 안식일 규례를 범한 것이 된다.
=====58:14
땅의 높은 곳에 올리고 - 쉽지 않은 구절로서 해석 견해는 크게 둘로 나뉜다. 그 하나는 이스라엘이 살던 팔레스틴 땅은 고지대인데 바로 그 고지대로 다시 돌아오게 하겠다는 것, 곧 포로 귀환의 약속으로 보는 견해이고, 또 다른 하나는 높은 지대가 상징하는 번영, 안정에 대한 약속으로 보는 견해이다. 이 두 견해를 연속적 개념으로 보는 것이 나을 것이다. 즉, 포로로부터 귀환시킨 후 번영과 안정을 허락하겠다는 약속으로 보는 것이다.
조상 야곱의 업으로 기르리라 - 야곱에게 약속된 땅 가나안을 소유하게 될 것이라는 뜻이다.
여호와의 입의 말이니라 - 원문 직역은 '왜냐하면 여호와의 입이 그 것을 말씀하셨기 때문이다'이다. 말하자면 여호와께서 약속하셨기 때문에 포로 후 이스라엘 자손은 가나안 땅을 소유케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한번 주신 약속이 반드시 성취될 것을 강조할 때 흔히 이 표현이 사용된다.
전장(57장)에서는 우상 숭배로 요약되는 이스라엘의 죄악상을 지적하고 회개를 촉
구하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이제 이어지는 본장부터 59장까지는 회개할 내용을 집
중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특히 본장에서 이스라엘이 회개할 대표적 죄악으로 볼 수 있
는 거짓 금식과 안식일의 경시 풍조를 다루고 있으며, 59장은 기타 세부적인 죄악들을
기술하고 있다. 그러므로 본장은 이스라엘의 죄악을 고발하는 신호탄으로서 신앙 생활
에 대한 총평인 동시에 회개에 대한 촉구이다.
이러한 본장은 거짓 금식을 다루고 있는 전반부(1-5절), 바른 금식을 설명해주는
중반부(6-9a절), 바른 금식을 하도록 촉구하는 후반부(9b-14절) 등으로 구성되어 있
다. 이를 좀더 세분하면 (1) 서론적 죄에 대한 지적(1절), (2) 거짓 금식가들의 탄원
(2, 3a절), (3) 거짓 금식의 진상에 대한 책망(3b-5절), (4) 참된 금식에 대한 소개
(6, 7절), (5) 참된 금식으로 인한 축복(8, 9a절), (6) 참된 금식의 내용(9b, 10절),
(7) 참된 금식의 결과(11, 12절), (8) 안식일의 준수와 그 결과(13, 14절) 등으로 나
누어 볼 수 있다.
한편, 저자는 본장을 기술함에 있어서 '핵심 진술-핵심 반복'이라는 구조상의 특징
을 취하고 있다(6, 7절-8, 9절;9b, 10a절-10b, 11절). 이러한 방법을 통하여 본장의
핵심을 분명히 부각시킬 뿐만 아니라 회개자가 얻을 축복의 풍성함을 효과적으로 드러
내고 있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에 관한 내용으로 시작하여(1절) 다시 '하나님의 말
씀'에 대한 언급으로 끝맺음(14절) 봉합 구조를 사용하고 있다. 이러한 구성을 통하여
저자는 진술되는 내용의 권위를 높이며 책망의 신빙성을 주장하고 있다.
또한 저자는 전체적으로 탄원과 응답이라는 구도를 통하여 내용을 전개하고 있다.
그럼으로써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회개할 내용이 무엇인지를 실감나고도 생생하게 알려
주고 있다. 그리고 본장이 취하는 문학적 특징의 또 다른 요소는 객체, 곧 청중이 급
박하게 바뀌고 있다는 사실이다. 저자는 청중을 2인칭 복수에서(1-6절) 2인칭 단수로
변화시킴으로서(7-14절) 각 개인에게 관심을 집중시키고 구체적으로 죄를 지적하려고
한다.
이상과 같은 특징을 소유하고 있는 본장을 통해 저자는 신앙의 본질을 외형이 아니
라 내면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요구된 율법은 외형(형식)과
내면(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외견상 율법은 과도하다고 여겨질 만큼 자세한 외형을
요구하고 있는 것 같지만(출 21-31장 등) 사실은 예배자의진실한 마음의 상태를 더욱
중시한다(마 6:16-18;7:21;요 4:23, 24). 그런데 이 사실을 깨닫지 못한 이스라엘은
외형에만 치우쳐 형식주의에 함몰됨으로써 참됨 신앙인이 되지 못하여 하나님의 책망
을 받게 되는 것이다. 예수님도 공생애 기간 동안 바리세인들의 외식을 자주 책망하신
바 있다(마 23:13-36). 참신앙은 내면의 변화이며, 그 반응으로써 헐벗고 소외되고 갇
히고 눌린 자에 대한 사랑을 실천하게 된다(마 25:35, 36). 선지자는 이러한 사랑을
바탕으로 한 것을 참다운 금식이라고 부른다. 그러면서 신앙 생활의 본질을 파악하지
못하고 형식적 예배에 만족하고 있는 위선자들을 향한 참다운 경건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본장을 몇 단락으로 나누어 좀더 자세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책망받는 거짓 금식(58:1-5)
통회를 촉구함으로써 죄악으로 이한 고통 속에서도 평안으로 회복할 수 있는 가능
성을 열어 놓았던 전장 마지막 단락(57:14-21)에 이어지는 본문은 통회해야 할 구체적
내용으로서 거짓된 금식에 대해 진술하고 있다. 저자는 금식의 수행에도 불구하고 자
신의 문제에 대해 해결을 받지 못한 이스라엘이 밝히는 불평과 이에 대한 하나님의 대
답을 소개함으로써 금식 문제에 있어서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의 견해 차이가
심각함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내용을 담고 있는 본장은 (1) 하나님의 절박한 폭로
명령(1절), (2) 이스라엘의 백성의 위선적인 접근과 불평(2-3a절), (3) 책망조의 거짓
금식에 대한 폭로(3b-5절) 등으로 나눌 수 있다. 여기서 저자는 금식의 성격을 분명히
규정하고 아울러 이스라엘의 착각을 드러내고 있다. 이제 본문의 핵심적인 내용을 살
펴보면 다음과 같다.
(1) 저자는 형식적인 열심 자세가 하나님께 열납되는 것은 아나라고 말한다(2, 3
절):이스라엘은 하나님이 금식을 명령하시고도(느 9:1, 2;시 69:10) 금식하는 자신들
을 돌아보지 않고 도리어 마음을 괴롭게 하셨다고 불평한다. 그러나 사실 그들은 외적
으로만 열신을 내었고, 마음은 하나님께로부터 떠났던 것이다. 이와같이 신령과 진정
이 뒤따르지 않은 채 의식에만 열심히 참여하는 자들은(29:13;막 7:6) 하나님 앞에서
'가증한 자'(딛 :16)가 되는 것이다.
(2) 저자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금식이 잘못되었음을 다양한 관점에서 지적한다(3-5
절):(까) 금식의 동기-그들은 금식을 회개와 성결을 위하여 제한된 사실을 외면한 채
외적인 축복을 수여받는 도구로 생각하였다(3절). (다) 금식의 자세-금식자들의 영원
순화에 애써야 한다(시 69:10). 그러나 그들은 육적 오락을 즐김으로 영원을 스스로
더럽혔다(딤전 5:6). 뿐만 아니라 본래 금식이란 철저한 회개의 표로서 자기 의지와
정욕의 억제가 수반되어야 한다. 그런데 그들은 금식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의
지 관철과 이익 추구를 위해 이웃에게 중노동을 시켰고(3절) 급기야 충돌까지 하게 되
었다(4절).
이스라엘 백성들의 외식적인 금식 태도를 신랄하게 바난하였던(1-5절) 저자는 본문
에서 대조적으로 금식의 바른 정신과 그 결과를 기술하고 있다. 특히 저자는 금식 그
자체보다 금식하는 자들의 생활 방식을 중점적으로 언급하고 있는데 심지어 악행 금지
와 사회적 선행을 참된 금식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와같이 금식에 대한 시각을 새롭게
전환하고 있는 본문은 첫째, 참된 금식의 내용(6, 7절) 둘째, 바른 금식이 초래하는
축복(8, 9a절) 등으로 나눌 수 있다. 이제 본 단락의 중심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
다.
(1) 저자는 하느님이 원하는 참됨 금식은 사회적 선행들로 나타나야 함을 강조한
다. 참됨 금식을 한 자는 먼저 자신이 과거 이웃에게 저질럿던 악행에 대해 회개하고
이웃에 진 빚을 청산하며 사회적으로 신분이 낮은 자들을 억압하지 않는다(신 24:14).
더 나아가서 주린 자를 먹이고 벗은 자를 입히고 어려운 친척을 돕는 등 적극적으로
선행을 실천한다. 주님은 바로 소자 하나에게 한 행위가 곧 자신에게 한 것이라고 가
르치셨다(마 25:34-40). 결국 이사야는 금식이 음식을 단절하는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
의 은혜와 능력을 공급받고 바른 삶을 영위하는 자세임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2) 저자는 참된 금식자가 돌연히 완벽한 축복을 수여받게 된다고 주장한다(8절).
하나님께서는 올바른 금식을 행하는 자들에게 위로와 평안을 허락하시며 하나님의 영
광이 가득하도록 인도하신다(59:19;60:1). 마치 모세 시대에 관야를 통과하는 이스라
엘 백성을 이끄신 것처럼 참된 금식자를 축복의 영역으로 나아가도록 하신다.
3. 참된 금식과 안식일 준수에 대한 촉구(58:9b-14)
앞에서 참된 금식이 무엇인가에 대해 기록한 저자는 이제 다시 한번 제거되어야 할
악습들을 제시하고 바른 금식의 실행과 안식일의 준수를 명령한다. 특히 사회악의 종
교 의식의 연관성을 강조함으로써 하나님께서는 정교한 의식 제도의 기계적인 수행을
요구하시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신앙적 자세를 원하심을 분명히 드러내고 있다(2
절). 이러한 내용을 담고 있는 본문은 (1) 제거되어야 할 악습들(9b, 10a절), (2) 참
된 금식자의 축복(10b-12절), (3) 안식일 준수에서의 개혁(13, 14절) 등으로 나눌 수
있다.
여기서 이사야는 다시 한번 참된 금식자의 행동 규례에 대해 언급한다. 앞 부분과
비교할 때 '압제의 금지'(6, 9절), '주린 자에게 먹을 것을 주기'(7, 10절) 등은 공통
적으로 나타나고, '손가락질' 및 '허망한 말하지 않기'(9절) 등은 새롭게 등장한다.
이러한 사실로 볼 때 당시 가장 심각하고 현저했던 죄악은 힘 없는 자에 대한 압제와
굶주린 자에 대한 외면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 두 가지 죄악은 한마디로 이웃 사랑의
결핍으로 요약된다. 선지자 이사야는 이웃을 사랑하지 않고 오히려 착취하는 사람들을
향해 반복적으로 질타하는 것이다. 사실 예수님께서도 수차례 이웃 사랑을 강조하셨고
(눅 6:36;요 13:14, 15, 34, 35), 사도 요한도 마찬가지였다(요일 2:10;3:23). 결국
선지자는 음식의 단절보다 자기 욕심의 부정인 선행되어야 함을 거듭 강조하였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선지자는 안식일을 지키는 바른 자세와 그에 따른 축복을 소개한다. 안식일에
는 세속적 사업을 중단하고, 육신의 즐거움을 좇는 오락을 일체 금하고(딤전 5:6) 안
식일 자체를 존귀히 여기고 사사로운 생각과 말을 억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내용은 결국 육신의 욕망을 최대한 억제하고 하나님만 바라보도록 촉구하는 것이다.
선지자는 외적 의식의 준수보다 내면적 상태를 더욱 강조한다.
이상과 같은 본장에서 우리는 신앙적 자세의 중요성을 확인할 수 있다. 비록 구약이 매우 자세하고 정교한 종교 의식을 요구할지라도 사실상 영적인 내용이 상실된 형식을 가증히 여긴다. 즉, 아무리 금식과 안식일 준수와 제사 의식에 충실하다고 할지라도 이기심과 이웃에 대한 압제로 가득 차 있다면 절대로 하나님께서는 그를 열납하시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외형적인 예식에 참여한다는 사실로 인하여 만족하지 말고 진정으로 자기 부인과 회개를 실천해야 할 것이다(마 3:8).
내 백성에게 ... 고하라 - 여기 '백성'이란 선지자 시대의 백성 혹은 바벨론 포로 시대의 백성, 둘 중으 하나이겠다. 우리는 다수 주석가들의 견해에 따라 후자의 견해를 취하고자 한다(Delitzsch, Rosenmuller, J. Watts, Whybray). 그 근거로서 성전, 희생 제사, 므낫세 시대에 유행했던 우상 숭배 따위에 대한 언급이 없는 것을 들 수 있겠다.
=====58:2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찾기는 하되 그것은 형식적이요 외면적일 뿐, 하나님의 뜻을 구하기보다는 도리어 자기의 뜻을 구했던 사실에 대한 조롱이 담기 다역설적 표현이다. '그들은 나를 날마다 찾으며, 나의 뜻을 몹시도 알고 싶다면서, 마치 옳은 일을 해 온 백성이기나 하듯이, 자기 신의 법을 어기지 않은 백성이기나 하듯이, 무엇이 옳은 법인지 나에게 묻고 하나님꼐 가까이 나가고 싶다면서'(공동 번역).
=====58:3
본절은 이스라엘이 금식의 본래적 목적과 의의를 외면하고 오히려 현실상의 축복을 비는 수단으로, 단지 종교적 자랑을 과시하기 위한 수단으로 악용한 사실을 계속 책망하는 내용이다. 본래 금식은 회개와 성결을 위해 제정된 것으로서(느 9:1,2;시 69:10), 철저한 회개를 통해 자신의 이기적인 뜻과 정욕을 억누르고 자기를 부인케 하기 위한 것이었다. 한편, 금식에 대한 언급은 이른 시기부터 보여진다(삼상 31:13;삼하 12:11-23;대하 20:3). 그러나 개인 금식이 경건의 표현으로서 대중화되고 정기적으로 공동 금식이 준행된 것은 포로기 이후의 일이다. 슥 8:19에는 정기 금식의 네 시기가 언급되어 있다. 그중 4월 9일의 금식은 예루살렘 함락을(와하 25:3-21), 5월 10일의 금식은 성전 파괴를(렘 52:12,13), 7월 2일의 금식은 그달리야 살해를(왕하 25:23-25) 그리고 10월 10일의 금식은 예루살렘이 처음 공략된 것을 각각 기억하는 데에 애초의 목적이 있었다(J. Watts).
금식하는 날에 오락을 찾아 얻으며 - 그들의 영혼이 괴로움을 당했다고 자랑하였던 사실이 위선이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들은 오히려 금식을 즐기고 있었다.
온갖 일을 시키는도다 - 여기 '일'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에체브'( )는 매우 힘들고 고통이 따르는 노동, 땀, 산고등을 가리킬 때 사용되는 용어이며 또한 '시키는도다'에 해당하는 '나가스'( )눈 '폭정을 가하다', '강제 징수하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본 구절은 금식하고 있다고 말하면서도 자신의 유익을 챙기기 위해 그 종이나 일꾼에게 가혹한 일을 강요하는 악덕 주인을 고발하는 내용이 되겠다(느 5:1-5).
=====58:4
다투며 싸우며 - 물론 이스라엘 백성이 다투고 싸우는 것을 금식의 목적으로 삼고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금식하는 중에조차 그러한 이욕(利慾)적인 혈기를 부릴 정도로, 그들은 금식의 목적 자체에 대해 무지하였음을 보여준다(Whybray).
=====58:5
나의 기뻐하는 금식이 되겠으며 - 여기 '기뻐하는'의 원문적 의미는 '선택한'이다. 말하자면, 너희들이 취하는 형태의 금식은 하나님이 택하신 곧 하나님이 인정하고 명령하신 금식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 머리를 갈대같이 숙이고 ... 재를 펴는 것 - 이는 극도의 겸손을 표현하는 말이다. 그러나 형식적 모양만 갖춘다고 하여 다된 걸로 생각하는 것은 위선일 뿐이다. 본절의 요지는 금식의 방법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금식의 정신이 결여되었다는 것이다. 금식의 참정신이 6절 이하에서 전개되는 바, 그것은 결국 경건의 모양과 능력을 동시에 갖추는 것이다(마 6:16-18).
=====58:6
흉악의 결박( , 하레추보트) - 문자적인 뜻은 '악의 띠'로 불의하고 잔혹한 권위를 가지고 타인의 권리나 유익을 억압하는 행위를 가리킨다.
명에의 줄을 끌러 주며 - 여기 '멍에'는 악압 혹은 강제적인 노동의 상징으로 사용되는 용어로, 여기서도 그런 의미로 사용되고 있음이 분명하다.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케하며 - 여기 거론되고 있는 상대는 문자 그대로는 '상한 자'이며 폭력, 압제 등의 '부당한 대우를 받고 하는 자'이다. 그러나 이 사람의 실체를 결정적으로 밝혀주는 단서는 '자유케 하며'로 번역된 '하페쉼'( )이다. 이 용어는 한번 노예가 되었다가 자유를 얻은 자를 묘사할 때 주로 사용되는 용어이다(신 15:12;욥 3:19 등). 이 단서에 근거할 때 본 구절이 서술하려는 존재는 의심의 여지없이 '노예'라고 볼 수 있다.
=====58:7
주린 자에게 ... 나눠 주며 - 이것은 한 아비가 그 자녀에게 그렇게 하듯이 가진 자가 그 소유를 필요로 하는 자에게 공급하는 것을 가리킨다. 대체로 이 행실은 신앙인의 필수적 의무로 간주되었는데, 고난의 사람 욥은 이러한 선행의 모범을 아름다벡 서술한 바 있다(욥 31:16-22).
네 골육을 피하여 스스로 숨지 아니하는 것 - 원문 직역은 '너 자신의 살(육체)로부터 너 자신을 숨기지 않는 것'이다. 여기 '살(육신)'은 '바사르'( )로서 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를 뼈 중의 뼈 그리고 '살 중의 살'이라 칭할 때(창 2:23), 그리고 라반이 야곱을 그의 '골육'이라 칭할 때(창 29:14), 각각 사용하던 용어이다. 그런 점을 고려할 때 본 용어는 혈육상 밀접한 관계에 있는 상대를 지칭하는 용어로 보념 되겠는데, 그런 의미에서 개역 성경의 번역 '골육'은 적절하다. 골육, 곧 친척에게서 자신을 숨기는 경우란 그 친척의 사회적 신분이 낮거나 재물이 없을 때 혹은 그들의 필요를 공급하는 일을 꺼려할 때이겠다. 참신앙인이라면 골육 친척이 어떤 신분이나 처지에 있든 간에 친절과 애정을 갖고 그와 친교를 나누고 그의 필요를 공급하는 데 힘을 써야 함이 마땅하다. 성경은 친척, 곧 가족을 돌보지 않는 믿는 자는 믿지 않는 자보다 더 약하다고 경고하고 있다(딤전 5:8).
=====58:8
네 빛이 아침같이 비췰 것이며 - 올바른 동기와 목적을 가지고서 금식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풍성한 번영의 축복을 주신다는 뜻이다. 성경에서 '번영'은 흔히 아침에 비치는 찬란한 빛에 비유되고 있다(욥 11:17).
네 치료가 급속할 것이며 - 원문 직역은 '네 상처는 빨리 치료될 것이다'이다. 여기 '치료'의 본래 뜻은 상처를 치료할 때 사용되는 '긴 붕대'이다(1:6과 비교하라). 따라서 본 구절은 오랫동안의 정신적, 육체적 상처, 곧 전인적인 상처를 전제로 한다고 볼 수 있다.
네 의가 네 앞에 행하고 - 말하자면 하나님의 율법에의 순응은 행복, 번영, 평화의 길로 이끄는 선봉장의 역할을 할 것이라는 뜻이다.
여호와의 영광이 네 뒤에 호위하리니 - 이것은 이스라엘과 그들을 분리하기 위하여 그 사이를 가로막고 섰었던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인 구름 기둥과 불 기둥을 연상케 한다(출 14:19, 20).
=====58:9
손가락질 - 문자적인 뜻은 '손가락을 뻗치는 것'이다. 이것은 남을 경멸하고 조롱하기 위하여 손가락질하는 것을 가리키는데, 여기서는 법적 기소(起訴)를 암시하는 말로 쓰였다고 볼 수도 있겠다(Whybray).
허망할 말( , 다베르 아웬) - 이는 무(無), 헛됨, 텅 빈 것(41:29;슥 10:2), 거짓, 속임수(시 36:4;잠 17:4), 무가치한 것, 사악함 , 죄악(1:13;욥 36:21) 등을 가리킬 때 사용되는 용어인데, 결국 여기서는 당시 사회에 만연하였던 온갖 종류의 거짓, 거친 행동 그리고 불의한 언사 등을 의미하는 것 같다.
=====58:10
주린 자에게 네 심정을 동(動)하며 - 원문 직역은 '너의 영혼을 주린 자에게 끄집어 내며'이다. 직역의 내용이 어색하기 때문에 몇 역본들과 사본들은 '너의 빵을 주린 자에게 내밀며'로 번역하고 있다(사해 사본, 시리아역, Noyes, Horsley). 그러나 이 번역은 원문을 크게 수정한 번역으로, 굳이 이렇게 옮길 필연성은 없다. 여기 '영혼'( , 네페쉬)은 '마음' 혹은 '선행의 마음' 등과 동의어로 보면 된다. 따라서 원문 수정 없이도 본문의 의미는 정확히 드러난다고 본다 : '너의 선행의 마음을 주린 자에게 드러내며.
' 네 빛이 흑암 중에서 발하여 - 지금까지 불투명하고 암담했던 삶의 여정이 분명하고 긍정적인 것으로 바뀔 것이라는 말이다. 말하자면 지금까지의 재앙들 그리고 시련들의 과정이 끝나고 풍성한 번영의 과정이 이어질 것이라는 뜻이다.
=====58:11
마른 곳에서도 네 영혼을 만족케 하며 - '마른 곳'( , 차흐차호트)은 태양의 강렬한 햇살에 노출되거나 가뭄 때문에 습기가 완전히 말라버린 곳을 가리킨다. 그러나 본문이 약속하는 것은 단순한 마른 땅, 가뭄에 내릴 비 정도가 아님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그 혜택을 받을 대상이 '영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문이 암시하는 바는 오랜 고통에서 벗어난 자가 얻게 될 마음의 평안, 더 나아가서는 메시야의 도래와 그의 사역으로 말미암을 구원의 약속까지로 보아야겠다. 본서는 메시야의 구원 사역으로 인한 그 택한 백성의 구원을 암시할 때 '마른 땅'의 이미지를 자주 등장시킨 바 있다(41:17 등).
물 댄 동산 - 이는 근동 지역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을 나타내려 할 때 흔히 사용된 표현이다. 시리아역(Syriac)은 본 구절을 '천국'으로 번역하고 있다. 그런데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천국을 이뤄본 적은 없다. 따라서 우리는 이 표현을 종말론적 측면에서 이해해볼 수도 있겠다. 이제 주님이 재림하시면 이스라엘의 남은 자와 이방의 택함받은 자들은 완성된 천국에서 살게 될 것이다.
물이 끊어지지 아니하는 샘 - 여기 '끊어지지'로 번역된 '예카제부'( )는 그 문자적인 뜻이 '속이다', '거짓말하다'이다. 이것은 샘의 근원이 말라 있을 경우 물을 얻기 위해 그곳을 찾은 대상들, 혹은 짐승들의 허탕을 치게 되는 사실을 연상케 한다. 그러나 하나님이 예비하실 샘은 켤코 마르지 않고 항상 풍성한 샘이다. 이 샘은 바로 반석이라고 불리기도 하는 그리스도이시다. 그리스도가 이루신 구속 사역 때문에 그분을 찾는 모든 사람은 항상 영생의 물을 얻게 될 것이다(요 4:13,14;고전 10:4).
=====58:12
네게서 날 자들 - '너를 통하여 있게 될 자들'이란 뜻이다. 이는 이스라엘 후손들을 가리킨다. 오래 황폐된 곳 ... 역대의 파괴된 기초 - 이것은 분명 바벨론 포로 시댕 동안 황폐된 상태로 방치되었던 이스라엘 성을 가리킨다. 그성은, 건물은 물론 그 기초까지도완전히 파고되었었다. 이 성의 수측은 1차적으로는 이스라엘의 회복을, 더 나아가서는 이방의 회심이라는 축복을 암시한다(암 9:11,12;행 15:16,17)=====58:13
본절의 시점은 포로 귀환 이후의 시대이다. 바로 이 시대에도 안식일 준수는 중요한 의무로 주어지고 있다(느 13:15-22). 네 발을 금하여 ... 오락을 행치 아니하고 - '발'은 동작을 일으키는 수단이다(잠 4:27). 안식일에 사람들은 자신들의 쾌락을 위해 어떤 일을 도모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유대인들은 따라서 안식일에 회당이나 성전에 가는 일 외에 다른 일에 그 발을 사용하지 않았다(행 1:12 참조).
성일(聖日) - '나의 거룩한 날'이란 뜻이다. 하나님은 이날을 나의 날이라 부르신다. 따라서 그날을 인간의 즐거움을 위해 사용하면 그분은 소유를 도둑질 하는 것이 된다. 그러나 문제는 '즐거움'이 아니라 그 즐거움이 육적인 것이냐 아니면 영적인 것이냐는 것이다. 만일 육적인 즐거움을 취한다면 그는 하나님의 안식일 규례를 범한 것이 된다.
=====58:14
땅의 높은 곳에 올리고 - 쉽지 않은 구절로서 해석 견해는 크게 둘로 나뉜다. 그 하나는 이스라엘이 살던 팔레스틴 땅은 고지대인데 바로 그 고지대로 다시 돌아오게 하겠다는 것, 곧 포로 귀환의 약속으로 보는 견해이고, 또 다른 하나는 높은 지대가 상징하는 번영, 안정에 대한 약속으로 보는 견해이다. 이 두 견해를 연속적 개념으로 보는 것이 나을 것이다. 즉, 포로로부터 귀환시킨 후 번영과 안정을 허락하겠다는 약속으로 보는 것이다.
조상 야곱의 업으로 기르리라 - 야곱에게 약속된 땅 가나안을 소유하게 될 것이라는 뜻이다.
여호와의 입의 말이니라 - 원문 직역은 '왜냐하면 여호와의 입이 그 것을 말씀하셨기 때문이다'이다. 말하자면 여호와께서 약속하셨기 때문에 포로 후 이스라엘 자손은 가나안 땅을 소유케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한번 주신 약속이 반드시 성취될 것을 강조할 때 흔히 이 표현이 사용된다.
전장(57장)에서는 우상 숭배로 요약되는 이스라엘의 죄악상을 지적하고 회개를 촉
구하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이제 이어지는 본장부터 59장까지는 회개할 내용을 집
중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특히 본장에서 이스라엘이 회개할 대표적 죄악으로 볼 수 있
는 거짓 금식과 안식일의 경시 풍조를 다루고 있으며, 59장은 기타 세부적인 죄악들을
기술하고 있다. 그러므로 본장은 이스라엘의 죄악을 고발하는 신호탄으로서 신앙 생활
에 대한 총평인 동시에 회개에 대한 촉구이다.
이러한 본장은 거짓 금식을 다루고 있는 전반부(1-5절), 바른 금식을 설명해주는
중반부(6-9a절), 바른 금식을 하도록 촉구하는 후반부(9b-14절) 등으로 구성되어 있
다. 이를 좀더 세분하면 (1) 서론적 죄에 대한 지적(1절), (2) 거짓 금식가들의 탄원
(2, 3a절), (3) 거짓 금식의 진상에 대한 책망(3b-5절), (4) 참된 금식에 대한 소개
(6, 7절), (5) 참된 금식으로 인한 축복(8, 9a절), (6) 참된 금식의 내용(9b, 10절),
(7) 참된 금식의 결과(11, 12절), (8) 안식일의 준수와 그 결과(13, 14절) 등으로 나
누어 볼 수 있다.
한편, 저자는 본장을 기술함에 있어서 '핵심 진술-핵심 반복'이라는 구조상의 특징
을 취하고 있다(6, 7절-8, 9절;9b, 10a절-10b, 11절). 이러한 방법을 통하여 본장의
핵심을 분명히 부각시킬 뿐만 아니라 회개자가 얻을 축복의 풍성함을 효과적으로 드러
내고 있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에 관한 내용으로 시작하여(1절) 다시 '하나님의 말
씀'에 대한 언급으로 끝맺음(14절) 봉합 구조를 사용하고 있다. 이러한 구성을 통하여
저자는 진술되는 내용의 권위를 높이며 책망의 신빙성을 주장하고 있다.
또한 저자는 전체적으로 탄원과 응답이라는 구도를 통하여 내용을 전개하고 있다.
그럼으로써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회개할 내용이 무엇인지를 실감나고도 생생하게 알려
주고 있다. 그리고 본장이 취하는 문학적 특징의 또 다른 요소는 객체, 곧 청중이 급
박하게 바뀌고 있다는 사실이다. 저자는 청중을 2인칭 복수에서(1-6절) 2인칭 단수로
변화시킴으로서(7-14절) 각 개인에게 관심을 집중시키고 구체적으로 죄를 지적하려고
한다.
이상과 같은 특징을 소유하고 있는 본장을 통해 저자는 신앙의 본질을 외형이 아니
라 내면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요구된 율법은 외형(형식)과
내면(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외견상 율법은 과도하다고 여겨질 만큼 자세한 외형을
요구하고 있는 것 같지만(출 21-31장 등) 사실은 예배자의진실한 마음의 상태를 더욱
중시한다(마 6:16-18;7:21;요 4:23, 24). 그런데 이 사실을 깨닫지 못한 이스라엘은
외형에만 치우쳐 형식주의에 함몰됨으로써 참됨 신앙인이 되지 못하여 하나님의 책망
을 받게 되는 것이다. 예수님도 공생애 기간 동안 바리세인들의 외식을 자주 책망하신
바 있다(마 23:13-36). 참신앙은 내면의 변화이며, 그 반응으로써 헐벗고 소외되고 갇
히고 눌린 자에 대한 사랑을 실천하게 된다(마 25:35, 36). 선지자는 이러한 사랑을
바탕으로 한 것을 참다운 금식이라고 부른다. 그러면서 신앙 생활의 본질을 파악하지
못하고 형식적 예배에 만족하고 있는 위선자들을 향한 참다운 경건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본장을 몇 단락으로 나누어 좀더 자세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책망받는 거짓 금식(58:1-5)
통회를 촉구함으로써 죄악으로 이한 고통 속에서도 평안으로 회복할 수 있는 가능
성을 열어 놓았던 전장 마지막 단락(57:14-21)에 이어지는 본문은 통회해야 할 구체적
내용으로서 거짓된 금식에 대해 진술하고 있다. 저자는 금식의 수행에도 불구하고 자
신의 문제에 대해 해결을 받지 못한 이스라엘이 밝히는 불평과 이에 대한 하나님의 대
답을 소개함으로써 금식 문제에 있어서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의 견해 차이가
심각함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내용을 담고 있는 본장은 (1) 하나님의 절박한 폭로
명령(1절), (2) 이스라엘의 백성의 위선적인 접근과 불평(2-3a절), (3) 책망조의 거짓
금식에 대한 폭로(3b-5절) 등으로 나눌 수 있다. 여기서 저자는 금식의 성격을 분명히
규정하고 아울러 이스라엘의 착각을 드러내고 있다. 이제 본문의 핵심적인 내용을 살
펴보면 다음과 같다.
(1) 저자는 형식적인 열심 자세가 하나님께 열납되는 것은 아나라고 말한다(2, 3
절):이스라엘은 하나님이 금식을 명령하시고도(느 9:1, 2;시 69:10) 금식하는 자신들
을 돌아보지 않고 도리어 마음을 괴롭게 하셨다고 불평한다. 그러나 사실 그들은 외적
으로만 열신을 내었고, 마음은 하나님께로부터 떠났던 것이다. 이와같이 신령과 진정
이 뒤따르지 않은 채 의식에만 열심히 참여하는 자들은(29:13;막 7:6) 하나님 앞에서
'가증한 자'(딛 :16)가 되는 것이다.
(2) 저자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금식이 잘못되었음을 다양한 관점에서 지적한다(3-5
절):(까) 금식의 동기-그들은 금식을 회개와 성결을 위하여 제한된 사실을 외면한 채
외적인 축복을 수여받는 도구로 생각하였다(3절). (다) 금식의 자세-금식자들의 영원
순화에 애써야 한다(시 69:10). 그러나 그들은 육적 오락을 즐김으로 영원을 스스로
더럽혔다(딤전 5:6). 뿐만 아니라 본래 금식이란 철저한 회개의 표로서 자기 의지와
정욕의 억제가 수반되어야 한다. 그런데 그들은 금식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의
지 관철과 이익 추구를 위해 이웃에게 중노동을 시켰고(3절) 급기야 충돌까지 하게 되
었다(4절).
이스라엘 백성들의 외식적인 금식 태도를 신랄하게 바난하였던(1-5절) 저자는 본문
에서 대조적으로 금식의 바른 정신과 그 결과를 기술하고 있다. 특히 저자는 금식 그
자체보다 금식하는 자들의 생활 방식을 중점적으로 언급하고 있는데 심지어 악행 금지
와 사회적 선행을 참된 금식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와같이 금식에 대한 시각을 새롭게
전환하고 있는 본문은 첫째, 참된 금식의 내용(6, 7절) 둘째, 바른 금식이 초래하는
축복(8, 9a절) 등으로 나눌 수 있다. 이제 본 단락의 중심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
다.
(1) 저자는 하느님이 원하는 참됨 금식은 사회적 선행들로 나타나야 함을 강조한
다. 참됨 금식을 한 자는 먼저 자신이 과거 이웃에게 저질럿던 악행에 대해 회개하고
이웃에 진 빚을 청산하며 사회적으로 신분이 낮은 자들을 억압하지 않는다(신 24:14).
더 나아가서 주린 자를 먹이고 벗은 자를 입히고 어려운 친척을 돕는 등 적극적으로
선행을 실천한다. 주님은 바로 소자 하나에게 한 행위가 곧 자신에게 한 것이라고 가
르치셨다(마 25:34-40). 결국 이사야는 금식이 음식을 단절하는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
의 은혜와 능력을 공급받고 바른 삶을 영위하는 자세임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2) 저자는 참된 금식자가 돌연히 완벽한 축복을 수여받게 된다고 주장한다(8절).
하나님께서는 올바른 금식을 행하는 자들에게 위로와 평안을 허락하시며 하나님의 영
광이 가득하도록 인도하신다(59:19;60:1). 마치 모세 시대에 관야를 통과하는 이스라
엘 백성을 이끄신 것처럼 참된 금식자를 축복의 영역으로 나아가도록 하신다.
3. 참된 금식과 안식일 준수에 대한 촉구(58:9b-14)
앞에서 참된 금식이 무엇인가에 대해 기록한 저자는 이제 다시 한번 제거되어야 할
악습들을 제시하고 바른 금식의 실행과 안식일의 준수를 명령한다. 특히 사회악의 종
교 의식의 연관성을 강조함으로써 하나님께서는 정교한 의식 제도의 기계적인 수행을
요구하시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신앙적 자세를 원하심을 분명히 드러내고 있다(2
절). 이러한 내용을 담고 있는 본문은 (1) 제거되어야 할 악습들(9b, 10a절), (2) 참
된 금식자의 축복(10b-12절), (3) 안식일 준수에서의 개혁(13, 14절) 등으로 나눌 수
있다.
여기서 이사야는 다시 한번 참된 금식자의 행동 규례에 대해 언급한다. 앞 부분과
비교할 때 '압제의 금지'(6, 9절), '주린 자에게 먹을 것을 주기'(7, 10절) 등은 공통
적으로 나타나고, '손가락질' 및 '허망한 말하지 않기'(9절) 등은 새롭게 등장한다.
이러한 사실로 볼 때 당시 가장 심각하고 현저했던 죄악은 힘 없는 자에 대한 압제와
굶주린 자에 대한 외면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 두 가지 죄악은 한마디로 이웃 사랑의
결핍으로 요약된다. 선지자 이사야는 이웃을 사랑하지 않고 오히려 착취하는 사람들을
향해 반복적으로 질타하는 것이다. 사실 예수님께서도 수차례 이웃 사랑을 강조하셨고
(눅 6:36;요 13:14, 15, 34, 35), 사도 요한도 마찬가지였다(요일 2:10;3:23). 결국
선지자는 음식의 단절보다 자기 욕심의 부정인 선행되어야 함을 거듭 강조하였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선지자는 안식일을 지키는 바른 자세와 그에 따른 축복을 소개한다. 안식일에
는 세속적 사업을 중단하고, 육신의 즐거움을 좇는 오락을 일체 금하고(딤전 5:6) 안
식일 자체를 존귀히 여기고 사사로운 생각과 말을 억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내용은 결국 육신의 욕망을 최대한 억제하고 하나님만 바라보도록 촉구하는 것이다.
선지자는 외적 의식의 준수보다 내면적 상태를 더욱 강조한다.
이상과 같은 본장에서 우리는 신앙적 자세의 중요성을 확인할 수 있다. 비록 구약이 매우 자세하고 정교한 종교 의식을 요구할지라도 사실상 영적인 내용이 상실된 형식을 가증히 여긴다. 즉, 아무리 금식과 안식일 준수와 제사 의식에 충실하다고 할지라도 이기심과 이웃에 대한 압제로 가득 차 있다면 절대로 하나님께서는 그를 열납하시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외형적인 예식에 참여한다는 사실로 인하여 만족하지 말고 진정으로 자기 부인과 회개를 실천해야 할 것이다(마 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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