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1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 다윗은 처음부터 탄식하고 있다. '어느 때까지'라는말은 본절과 2절에 모두 네 번이나 언급되어 있다. 이 같은 사실은 도저히 참을 수 없었던 고통의 실상을 능히 짐작케 해준다(6:3;35:17;74:10;79:5;80:4;94:3).
나를 영영히 잊으시니이까 - 다윗은 그의 대적들이 득세하고 자신은 극심한 질병에 걸린 고통스런 현실을 보고 하나님께서 자신을 잊어버리신 것으로 생각한 것이다. 그리고 자신에 대한 하나님의 잊으심이 영원히 지속될 것에 대해 크게 염려하며 부르짖은 것이다(Craigie, Rawlinson). 우리는 이 구절에서 다윗이 탄식했던 가장 큰 이유를 찾을 수 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를 버리셨다는 느낌이었다. 다시 말해서 다윗으로서는 하나님의 버림을 받는 그것이 가장 참을 수 없는 고통이 되었던 것이다(22:1, Kraus).
주의 얼굴을 나에게서 언제까지 숨기시겠나이까 - 이는 바로 앞구절과 병행구이다. '주의 얼굴'은 하나님 자신을 계시하시는 하나의 방편으로 의인들에게 나타나는 것이다(Kraus). 그러므로 본절에서 주의 얼굴이 숨겨졌다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았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일반적으로 하나님의 얼굴 빛은 의인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복을 상징한다(4:6;67:1;80:3, 7). 이렇게 보면 본 구절은 저주만이 임한 자신의 고통스런 현실을 탄식하는 내용의 구절이다(Rawlinson).
=====13:2
내가 나의 영혼에 경영하고 - 이를 직역하면, '내가 나의 영혼 속에 생각을 두었고'이다. 이는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깊은 생각에 빠져있음을 의미한다. 여기서 '생각'(* , 에초트)은 물론 지금 당하고 있는 모든 고통에 대한 잡다한 생각들, 또는 회의(懷疑)를 의미한다(Delitzsch, Kraus). 다윗은 이처럼 자신의 고통에 대해 여러 가지 생각들을 해 보았지만 그것은 쓸데없는 노력이었고 그의 고통을 가중시킬 뿐이었다(Rawlinson).
종일토록 - 이 말에서 그는 끊임없이 근심의 나날을 보내고 있는 자신의 딱한 형편을 잘 표현하고 있다.
내 원수가 나를 쳐서 자긍하기를 - 다윗의 비참한 형편을 보고 다윗의 원수는 크게 기뻐한 것이 분명하다. 그 원수는 고통당하는 다윗을 향해 온갖 독설로 비난했을 것이다. 혹자는 이 원수를 사울 왕으로 보았다(Rawlinson).
=====13:3
다윗은 회의와 탄식에서부터 간구로 전환하고 있다.
나를 생각하사 응답하시고 나의 눈을 밝히소서 - 하나님께 버림받았다고 느낀 다윗은 이제 하나님의 동정과 주목을 끌기 위해 몸부림치고 있다. 여기서 '응답하시고'란 '어느때까지니이까'(1, 2절)라는 자신의 기도에 응답해 달라는 말이다. 그리고 '나의 눈을 밝히소서'란 질병과 슬픔으로 흐려진 눈을 밝게 해 달라는 간구로서 건강의 회복과 탄식으로부터의 구원을 호소하는 말이다. 눈의 밝음은 구약에서 건강한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었다(신 34:7, Craigie). 그러나 이 눈의 밝음, 곧 건강의 회복은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이다. 따라서 근본적인 면에서 볼 때 '나의 눈을 밝히소서'라는 말은 '나의 눈으로 하나님의 얼굴의 빛을 보게 하소서'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왜냐하면 주께서 얼굴을 숨기셨을 때 그의 건강이 쇠하여졌던 것처럼(1절) 주께서 얼굴을 보여주실 때 그의 건강이 회복될 것이기 때문이다(민 6:25).
그러므로 이를 알기 쉽게 번역하면, '나의 눈으로 당신의 생명의(얼굴의) 빛을 보게 하소서'가 된다(Kraus, Lange), 두렵건대 내가 사망의 잠을 잘까하오며 - 다윗의 극도로 악화된 건강 상태를 보여주고 있다. 즉, 다윗은 죽음 가까이에 있었던 것이다. 구약에서는 죽음이 종종 '잠'에 비유되었다(욥 3:13;14:12;렘 51:39, 57;단 12:2). 우리는 '잠'이라는 비유에서 죽음이란 멸절의 상태가 아니라 다른 세계에서 깨어나는 상태임을 엿볼 수 있다(요 11: 1-13;고전 11:30;15:51;살전 4:14). 그러나 다윗이 이러한 의미로 죽음을 잠에 비유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
=====13:4
나의 원수가...요동될 때에 나의 대적들이 기뻐할까 하나이다 - 여기서 '나의 원수'는 단수형이며, '나의 대적들'은 복수이다. 혹자는 전자와 후자 모두 다윗의 정적들을 가리킨다고 보나(Rawlinson), 여기에서 단수와 복수의 차이점을 다음과 같이 해석해 볼 수 있다. 즉, 단수로 언급된 '나의 원수'는 인생의 마지막 원수인 죽음을 의인화한 것이라고 볼 수 있으며, 복수로 언급된 '나의 대적들'은 다윗의 일반적인 정적들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Craigie). 한편, '요동될 때에'란 말은 죽음에 대한 완곡한 표현으로 짐작된다. 왜냐하면 본절은 분명히 죽음에 관한 내용을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 달리 혹자는 이를 환난 때에 다윗의 믿음이 흔들리는 것으로 간주하였으나(Barnes) 과연 다윗의 대적들이 보이지 않는 영적인 상태만을 보고 기뻐할 수 있을지 의문스럽다.
=====13:5
다윗은 자신의 전형적인 서술 방식을 따라 간구에서 또다시 확신으로 전환하고 있다.
나는 오직 주의 인자하심을 의뢰하였사오니 - 여기서 '인자하심'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헤세드'(* )는 하나님의 언약적 사랑을 의미한다. 이에 대해서는 5장 주제 강해, '하나님의 언약적 사랑'을 참조하라. 다윗은 하나님의 언약적인 사랑에 대한 확신이 있었기에 그 큰 고통에서 소망을 가질 수 있었다.
내 마음은 주의 구원을 기뻐하리이다 - 이는 다윗의 확고한 소망을 나타낸다. 주의 구원이 아직 임하지 아니하였으나 그는 너무나도 확고한 소망 가운데 이 구원을 기뻐하고 있다. 이것이야말로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는(롬 4:18) 신앙이다. 이런 신앙을 가졌기에 다윗은 극한 시련과 고통 가운데서도 결코 좌절하지 않았다.
=====13:6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 이 말은 1절 상반절의 '어느 때까지니이까'와 완전히 대조적이다. 그는 기도 중에 하나님의 언약적 사랑에 대한 확신을 얻고 탄식에서 찬송으로 전환할 수 있었다.
이는 나를 후대하심이로다 - 여기서 '후대하심이로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가말' (* )은 '보상하다', '갚다'라는 뜻으로 선과 악 모두에 적용되는 말이다. 즉, 선이든 악이든 하나님께서는 그대로 갚아주신다는 말이다. 그런데 여기서 다윗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선으로 보상해 주실 것을 확신하고 있다. 이러한 확신은 하나님의 언약적 사랑에 근거한 것이다. 그러나 이 용어는 인간의 어떠한 공로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를 받게 된다는 식의 사상을 나타내는 것은 아니며 다만 하나님께서는 순종하는 자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신다는 단순한 사실만을 나타낼 뿐이다(Calvin).
고통당하는 자의 처절한 외침과 하나님께 대한 간구와 찬양이 대조적으로 드러나고 있는 본시는 (1) 극심한 고통에 대한 탄식(1, 2절), (2) 구원에 대한 간구(3, 4절), (3) 여호와께 대한 확신과 찬양(5, 6절)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본시에는 다윗의 마음이 단계적으로 발전되어 가는 과정이 명확히 나타나 있다. 먼저 다윗은 극도의 위기 상황을 맞으면서 주어진 현실에 대해 탄식한다. 그 다음 하나님께로 눈을 돌려 구원을 요청한다. 이어서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기억하고 응답을 확신하며 찬양한다. 이처럼 탄식에서 간구로, 간구에서 찬양으로의 진행은 하나님의 신실한 언약을 믿는 다윗의 신앙을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다윗은 신앙을 통하여 환경의 변화와 무관하게 마음의 전환을 성취한다. 이러한 전환 과정은 고난에 직면한 성도들에게 깊은 공감대를 느끼게 한다.
본시의 역사적 배경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려진 바가 없다. 다만 다윗이 육체적, 정신적으로 극한 고통을 당하던 시기에 기록되어졌음은 사실이다. 다윗은 참혹한 현실속에서 절망의 심연(深淵)으로 떨어졌다가 하나님게 대한 호소와 간구를 통하여 확신과 찬양으로 올라가는 과정을 솔직하게 묘사하고 있다.
한편 본시의 장르에 관해서 몇몇 학자들은 '개인적인 비탄시'로 보기도 하지만, 일반적으로 '간구시'(prayer song)로 알려져 있다.
첫째, 고통스러운 현실에 대한 탄식이 드러나고 있다(1, 2절). 본 대목에서 다윗은 '어느 때까지니이까'라는 탄원적 질문을 네 번이나 반복하고 있는데 이것은 다윗의 극심한 고통을 효과적으로 나타내 준다. 그렇다면 다윗이 이처럼 고통받는 이유는 무엇인가?
우리는 1절을 참조하여 볼 때 아마도 외부적인 문제가 아니라 내적인 문제일 것으로추정할 수 있다. 사실 다윗은 당면한 고통으로 인하여 하나님게서 자기로부터 멀리 떨어져 계신다고 생각했고 이러한 사실 때문에 매우 괴로워한 것이다. 이로 말미암아 다윗의 영혼은 잡다한 생각으로 가득 찾으며, 마음의 근심을 극복할 능력이 상실되었다.그리고 원수들의 조롱을 두려워하였다(2절).
이와 같은 다윗의 번민을 보면서 우리는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질 때 고통은시작되고 심화(深化)된다는 사실을 인식할 수 있다. 또한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인간은 결코 행복해 질 수 없음을 배울 수 있다. 하나님을 멀리하는 상태 자체가 곧 저주요, 하나님을 가까이하는 것이 곧 복(福)이다. 이러한 원리는 시편 전체의 대강령이자 성경 전체의 대주제인 것이다.
둘째,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호소와 간구가 드러나고 있다(3, 4절). 본 대목에서는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을 위한 다윗의 절박한 기도가 나타난다. 앞에서 다윗은 고통을당하면서 하나님께서 자기를 멀리하시는 이유를 곰곰이 숙고해 보았다(2절). 그러나자신에게 임한 답답한 상황과 원수들의 핍박에 대해 해답을 얻지 못했고, 오히려 회의와 근심만이 가중될 뿐이었다. 다윗의 이상적인 노력은 아무 효과가 없었고 오히려 육신적 사고를 부추길 뿐이었다. 만일 그가 인간적 고민만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다면, 본시의 결말을 맺지 못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인본주의적 사고 방식에 머물지 않았고, 믿음으로 하나님게 나아가 모든 문제를 내어 놓았다. 그는 자기의 간절한 소원을 아뢰었고 자신의 염려를털어놓았으며 자기의 형편을 솔직하게 고백했다. 이처럼 하나님 앞에 모든 것을 내어놓고 간구한 것은 방향 전환의 절대적인 계기가 되었고, 다윗을 믿음의 본보기로 만든요인이 되었다. 다윗은 모든 의심과 회의를 뛰어 넘어 하나님을 신회하고 그에게 모든것을 맡겼다. 그는 원수와의 싸움에서 승리하는 길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의 도우심이라고 밀믿고 하나님만을 붙잡았4다.
이러한 다윗의 기도는 역경을 극복하고 찬송을 회복하는 근본적 원인이 되었다. 다윗은 믿음을 통하여 위태로운 상황을 완전히 역전시켜서 하나님을 의뢰하는 계기로 만들었다. 우리는 여기서 성도의 승리의 근거는 상황의 변화가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며, 이것을 통하여 어떤 경우에도 절망하거나 자포 자기하지 않는 영원한 소망을소유하게 된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다.
셋째,하나님에 대한 신뢰의 회복과 찬양이 나타난다(5, 6절). 하나님에 대한 기도를 통하여 확신을 소유하게 된 다윗은 본 대목에 이르러 하나님을 찬양하기 시작한다. 다윗은 현재 자신의 처지가 고통 중에 있을지라도 하나님의 구원을 예감하고 하나님께 찬송을 드린다. 이처럼 구원을 이미 체험했기 때문에 찬송하는 것이 아니라, 고통스러운 상황 속에서 오직 믿음으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회상하며 부르는 찬송이 아니다. 오히려 그의 찬송은 모든 고통과 싸우는 중에 부르는 믿음의 찬송이었다. 다윗은 육신의 눈으로는 볼 수 없는 하나님의 언약적 사랑을 의뢰하였고(5절), 미래에 성취될 하나님의 구원과 은혜를 바라보았다. 그는 이러한 믿음에 근거하여 온갖 역경 속에서도 하나님을 찬송할 수 있었다.
우리는 이상에서 다음과 같은 귀중한 교훈을 얻을 수 있다. (1) 참된 믿음이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복을 확신하는 것이며(히 11:1) (2) 지상에서의 성도의 찬송은 참된 영적인 사실에 근거할 때 비로소 지속적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