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은 므낫세의 우상 숭배에 관한 기록으로 왕하 21:1-9과 거의 일치한다. 그런데 본문은 열왕기의 기록과는 달리 이방 문화의 본질과 근원에 대해 첨언하고 있다(Williamson).
33:1
나이 십 이 세라 - 이로 볼 때 므낫세는 히스기야가 생명을 연장받은 15년 동안의 기간에 태어난 아들임을 알 수 있다. 즉, 그는 히스기야가 15년간의 생명을 연장받은 때로부터 제3년째 태어난 셈이다(왕하 20:6). 한편, 병행 구절 (왕하 21:1)에는 므낫세 모친의 이름이 '나는 그녀 안에 있다'란 뜻의 '헵시바 '(Hephzibah)였다고 소개하고 있으나 여기에서는 생략하고 있다. 그런데 이처 럼 본절에서 므낫세(Manasseh)의 모친 이름이 생략된 기록 형태에 대해 월리 암슨(Williamson)은 이것을 본서 저자의 규칙적인 습관이라고 이해한다(II Chronicles, p. 390).
33:2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여 - 이는 주로 열왕기서에서 우상 숭배의 죄를 가리킬 때 쓰는 표현이다(Curtis). 3-7절에서 보듯 므낫세는 본래 가나안 원주 민들이 숭배하던 가중한 것들을 받아들이고 직접 악을 시행했다(28:3; 왕하 16:3; 17:8, 11).
이방 사람의 가증(可憎)한 일을 본받아 -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왕하 21:2의 주석을 참조하라(신 18:9-14).
33:3
히스기야의 헐어 버린 산당 - 이에 대해서는 31:1을 참조하라. 바알들...아세 라 목상 - 여기서 바알을 가리키는 히브리어 원어는 복수로 언급되어 있다. 그러나 병행 구절인 왕하 21:3에는 바알과 아세라 목상 둘 가다 단수로 언급 되어 있으며 이와 같은 표현 뒤에 '아합의 소위(所爲)를 본받아'라는 설명이 첨가되어 있다. 이로 볼 때 열왕기 기자는 구체적인 어떤 바알상과 아세라 상 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이 분명한 듯하다. 이에 반해 역대기 저자는 바알들이 란 표현으로 가나안인들의 신들을 지칭하고 있으며(17:3), 아세라 목상은 따로 구별하여 언급하고 있는 듯하다(14:3, Curtis). 한편, 아세라(Asherahs)는 가나안 땅에 있던 어떤 신들 중 하나로 우가릿(Ugarit) 문서에는 '바라의 여신'으로 언 급되어 있다. 이 신은 가나안 뿐만 아니라 고대 근동의 여러 지방에서 숭배되 었는데 남부 아라비아인들에게는 엘(El) 신의 배우자로, 아람인들에게는 여인의 출산과 관련된 신으로 이해 되었다.
하늘의 일월 성신을 숭배하여 섬기며 - 해, 달, 별들과 같은 천재들을 숭배 하는 것은 고대 이방 종교에서 널리 볼 수 있는 현상이다. 이 같은 천체 숭배 가 남유다와는 달리 북 이스라엘에서는 널리 만연해 있던 것처럼 보인다(왕하 17:16). 그러나 남유다에도 일월 성신(日月星辰) 숭배가 아하스 때 처음으로 소 개되어(왕하 23:12) 므낫세 때에 비로소 널리 유행한 듯하다. 그런데 율법에서 는 이런 것들을 숭배치 말 것을 경고하고 있다(신 4:19 ; 17:3). 한편 학자들은 앗수르의 영향 때문에 므낫세가 일월 성신을 숭배하게 되었다고 말하는데 (Curtis, Payne, Wycliff), 이 시대에 이러한 우상 숭배가 만연해 있었던 사실에 관해서는 습 1:5과 렘 8:2; 19:13을 참조하라.
33:4
내가 내 이름을 예루살렘에 영영히 두리라 - 여호와께서 한 곳을 택하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이 이미 신 12:14에 나타나 있다(6:6 ; 7:16; 왕상 8:16 ; 9:3).
단들을 쌓고 - 이는 여호와의 전에 바알 주상들과 다른 이방 신들의 우상들 을 세웠음을 가리킨다. 여기서 므낫세는 단지 우상들을 숭배함으로 여호와를 배교했을 뿐만 아니라 보다 더 사악하게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게 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기에 이 같은 므낫세의 행동을 여호와의 주권적 권위에 대한 도전이며 여호와의 신앙(신 5:7)에 대한 반항이라고 이해할 수밖에 없다.
33:5
여호와의 전(殿) 두 마당에 - 이는 성전의 안뜰과 바깥뜰을 가리킨다. 여기서 안뜰을 다른 말로 '제사장의 뜰'이라고 칭하기도 한다. 이에 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4:9의 주석을 참조하라.
33:6
본절에는 므낫세가 신 18:10, 11에서 금하고 있는 가증한 행위 6가지를 행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 아들들을 불 가운데로 지나게 하며 - 여기서 '아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단어 '바나요'(* )는 '세우다', '짓다', '건축하다'를 뜻하는 '바나'(* )에서 유래 한 복수형이다. 그러나 병행 구절인 왕하 21:6에는 단수 '베노'(* )가 언급되어 있어 이곳의 표현과 약간 다르게 나타나 있다. 아하스의 이 같은 범죄를 언급 하고 있는 28:3에서도 아들을 복수로 언급하고 있고, 왕하 16:3에는 단수로 언 급되어 있다. 그러나 여기서 므낫세는 한 아들만을 희생 제물로 바쳤을 것이 라는 생각이 학자들의 일치된 견해이다(Keil, Zockler). 왜냐하면 역대기에 나타 난 복수형을 저자와 사상을 자연스런 방법으로 기술하기 위한 수학적 표현으 로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편, 열왕기에는 이 제사가 '한 놈의 아들 골짜 기'에서 드려졌다는 표현이 없다. ]
점치며 - 점(soothsaying)에 대해서는 성경 여러 곳에 언급되어 있다(레 19:26; 사 2:6; 렘 27:9; 미 5:12).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오넨'(* )을 '구름' 또는 '하늘'이란 뜻의 어근 '아난'(* )에서 파생된 것으로 보기도 하고 (Davidson), 또 '눈'이란 어근 '아인'(* )에서 파생돤 것으로 보기도 하는데 이것은 점치는 행위가 구름의 현상들을 눈으로 보고 해석하는 것과 연관이 있기 때문인 듯하다. 또 다른 학자들은 이 단어가 '뱀이 내는 쉿하는 소리' 또는 ' 목이 쉰 거친 소리'와 연관이 있다고 생각한다(Curtis). 어찌 되었든 이같은 점 치는 행위에 대해서 성경은 엄격히 금하고 있다(출 22:18 ; 레 20:6, 27; 신 18:14).
사술(邪術) -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니훼쉬'(* )의 어근 '나하쉬'(* )가 '뱀' 을 뜻하는 '나하쉬(* )와 비슷하기 때문에 사술의 행위는 뱀을 이용한 방법이 라고 생각하는 학자들이 있다(Davidson). 그러나 어근이 이와 같이 비슷한 것 은 마술사가 내는 소리가 뱀의 소리와 유사하기 때문인지 사술이 뱀을 사용 해서 하는 행위이기 때문은 아닌 듯하다. 그리고 창 44:5, 15에서 요셉은 컵으 로 조=가을 쳤다고 말하고 있는데, 그것은 당시 애굽에서 유행했던 것으로서 아마 컵에 담은 물의 파장이나 빛의 굴절을 보고 예언하는 점인 듯이 보인다. 여기에서 사용된 '사술'이란 단어는 일반적으로 어떤 징조를 보기 위한 점술을 뜻하는 용어로 사용되었다(레 19:26).
요술(妖術) - 이에 해당하는 동사 '카솨프'(* )의 의미는 매우 여러 가지로 설 명이 된다. 즉, (1) 풀잎이나 약초를 자른다'는 의미로 설명되는 경우이다 (Curtis). 요술의 행위를 약초나 마법의 풀을 잘게 부수어 끓여서 '마법의 물'을 만든 뒤에 무당과 같이 신적 행위를 하며 사용하는 점술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된다. (2) '주문을 속삭이다', '흐리다', '마술을 걸다'는 뜻으로 해석한다 (Zockler). 요술의 행위를 상대에게 주문을 걸어 청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 나 이에 대해서 율법(신 18:10-12)은 철저히 금지하고 있다.
신접한 자와 박수를 신임하여 - 이는 일반적으로 위에서 언급한 점, 사술, 요술등을 사용하는 사람들을 가리킨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신접자'는 '접신술 '(接神術)을 하는 사람, 곧 '죽은 자와 교통하는 자'를 가리키고, '박수'는 남자 무당을 가리킨다. 한편, 삼상 28:8에 신접한 여인이 나오고, 행 16:16 이후에도 귀신들린 여자가 점을 친 사실이 언급되어 있음을 보아 이러한 자들은 유대 인들이 생활 깊숙히 침투해 들어 왔었던 것 같다. 므낫세 또한 이런 사람들을 곁에 두고 수시로 자문을 구했던 것으로 보인다.
33:7
자기가 만든 아로새긴 목상 - 왕하 21:7에는 '아로새긴 아세라 목상'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므로 이 목상은 '아세라 상'을 가리키고 있는 것이 분명하 다(Keil). 한편 '목상'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세멜'(* )은 '닮다'란 뜻의 어근에서 유래한 용어로 '우상', '형상'을 뜻한다(신 4:16; 겔 8:3). 그러므로 28:2의 '부어 만든 우상'(*, 마쎄케)과는 구별된다. 그래서 '아로새긴 상'에 해당되는 히브리 어로 '새기다', '조각하다', '베다'를 뜻하는 용어에서 유래한 '페셀'(* )을 쓴 것이다.
33:8
정하여 준 땅에서 옮기지 않게 하리라 - 이는 이스라엘 백성과 맺은 땅에 관한 하나님의 언약(삼하 7:10)으로서 율법을 지켜 행하면 하나님의 축복이 영 원할 것이라는 의미이다. 이것은 유다의 백성들에게 율법에의 순종만이 요구 됨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신12:10; 수 21:44).
33:9
므낫세의 꾀임을 받고 - 므낫세는 신정 왕국인 유다의 최고 통치자로서 자신이 마땅히 참여호와 신앙을 준수하는 모범을 백성들에게 보였어야 했다. 그 러나 그는 스스로 우상을 숭배해 섬겼을 뿐만 아니라 이 같은 행위를 백성들 이 본 받도록 강요함으로써 자신의 범죄를 가중시켰다. 이로써 유다는 바벨론 의 침입을 받았으며 므낫세 자신도 바벨론으로 잡혀가게 되었다. 흔히 지도자 들의 타락은 그 자신 뿐만 아니라 국가 전체를 위기에 몰아 넣는다. 실례로 르호보암의 타락은(12:1) 애굽 왕 시삭의 침입을 초래했으며(12:2-12), 여호람 은 자신의 사악함으로 인해(21:4-6) 에돔과 립나의 반역을 당했다(21:8-10). 그 러므로 국가나 교회의 지도자들은 하나님을 경외하기에 힘써야 하며, 공의로 백성들은 통치하기에 전력을 다해야 할 것이다.
열방보다 더욱 심하였더라 - 이는 유다에 죄가 관영하는 심판의 때가 찼음 을 보여주고 있다. 역대기 저자는 이러한 유다의 죄악과 배반을 회상시켜 바 벧론에서 돌아온 유대인들에게 보여 줌으로써 하나님 앞에 더욱 신실한 백성이 되게 하려는 목적으로 이 글을 썼을 것이다.
33:10
여호와께서...이르셨으나 - 병행 구절인 왕하 21:10-15과 연관시켜 생각해 보면 여호와께서 선지자들응 통해서 므낫세와 그의 백성들에게 심판의 말씀 을 전했을 것으로 추축된다. 므낫세의 통치 기간(B.C.697-642)에 어떤 선지자 가 활동했는지 전혀 알려진 바가 없으나 열왕기와 비교해서 본절을 이해할 때,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방법으로, 또는 익명의 하나님의 사 람들을 통하여 계속해서 선포되었음이 분명하다(왕하 21:10). 한편 11절은 므 낫세가 바로 그 경고의 말씀에 불순종하였기 때문에 그러한 형벌을 받았음을 보여주고 있다.
33:11
앗수르 왕 - 이 왕은 에살핫돈(B.C.681-669)이거나 그의 아들 앗술바니팔 (B.C.669-626)일 것이다(Curtis, Barker). 그러나 므낫세가 바벨론으로 끌려간 때를 B.C.648년으로 추측해 보면 여기에 언급된 앗술 왕은 앗술바니팔이 틀림없 다. 이유인 즉, 이 때는 바벨론에서 4년 동안 지속되던 형제들의 반란을 앗술 바니팔(Asurbanipal)이 진압하던 시기이기 때문이다.
므낫세를 사로 잡고 - 여기서 '사로잡고'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바호힘'(* ) 은 유일하게 여기서만 언급되고 있다. 그래서 학자들에 따라서 이 단어는 여 러 가지로 해석된다. (1) 야생동물의 코를 꿰어 끌고 가듯 므낫세를 그렇게 다 루었다는 뜻(Baker, Keil). 왜냐하면 원형 '호아흐'(* )는 '찌르다'라는 뜻의 어근 에서 유래한 용어로 '가시 고리', '고기를 끌어내는 갈고리'를 뜻하기 때문이 다. (2) 쇠사슬과 비슷한 족쇄(足鎖)를 채웠다는 뜻(LXX, Targum). (3) 가시로 만든 울에 가두었다는 뜻(Starke). (4) 잘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엘로힘'이라는 어떤 장소로 끌려갔다는 뜻(Thenius). 그런데 대영 박물관에 보관된 앗수르 시 대의 부조(浮彫)에서 당시 앗수르 왕들이 때때로 포로들의 코에 갈고리를 꿰 고 끌고 가는 모습을 볼 수 있다(Barnes). 따라서 이것은 문자적인 의미로 므 낫세의 코를 갈고리로 꿰고 또 쇠사슬로 결박하여 끌고갔다고 볼 수 있다 (Zockler, Williamson, Curtis).
바벨론으로 - 혹자는 바벨론이 아니고 니드웨라고 하기도 한다(McCurdy). 그러나 대부분의 보수적 성향을 띠는 학자들은 이곳이 바벨론(Babylon) 이라 고 여긴다(Keil, Williamson, Zockler).
33:12
여호와께 간구하고 -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구문의 문자적인 의미는 '여 호와의 면전(面前)에서 애걸하다', '신음하여 앓다', '자비를 구하다' 혹은 '여호 와의 얼굴을 어루만지다'이다(출 32:11; 삼상 13:12; 왕상 13:6; 단 9:13). 이 처럼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을 환난을 통해 겸비하게도 하시며 간구케고 하셔서 당신의 품으로 돌아오게 하신다.
33:13
기도한 고모 - 므낫세가 기도한 내용은 모두 이스라엘 열왕의 행장(18절)과 호새의 사기(19절)에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외경 가운데 하나인 '므낫세의 기 도'와는 그 내용이 다른 것으로 이해된다(P. C. Barker, Keil, Zockler).
므낫세가 그제서야 여호와께서 하나님이신 줄을 알았더라 - 므낫세의 이 러한 깨달음과 연관시킬 수 있을 것이다. 욥은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 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욥 42:5)라고 고백한 적이 있 다. 마찬가지로 므낫세는 여호와를 이방신들과 동일하게 여겼다가 그제서야 여호와만이 참하나님이심을 깨달은 것이다. 욥과 비교해 볼 때 그 신앙의 차 원은 다르지만 이것을 계기로 하여 므낫세는 지금까지의 정책을 바꾸어 일대 개혁을 단행하게 된 것이다. 이처럼 모든 사람은 여호와를 참하나님으로 깨달 을 때만이 진정한 신앙을 소유할 수 있는 것이다.
33:14-17
본문에는 므낫세가 성벽을 확장하여 세우고 우상을 제하며 그 단을 파괴 하는 등의 개혁을 시행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종교 개혁은 앞에 서 언급된 므낫세의 회개와 관련된 것으로 그가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 은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본문의 이러한 내용이 열왕기에는 언급되지 있지 않다.
33:14
본절에서는 므낫세가 외성(外城)을 쌓은 사실에 관하여 언급하고 있다. 그런데 이것이 히스기야가 쌓은 외성(32:5)을 다시 더 확장하고 높게 쌓아 그 공사를 마무리 한 것을 의미하는지(Zockler), 아니면 므낫세가 새로 다른 외성을 쌓은 것을 가리키는지(Keil) 분명치 않다(Barker).
기혼 서편 골짜기 - 이는 다윗성의 서편에 있는 골짜기(Keil), 즉 다윗 성과 그 아래 성 사이에 있는 골짜기이다. 그런데 힛,기야가 쌓은 외성이 예루살렘 의 남동쪽(32:5 주석 참조)인 것을 고려해 볼 때 이곳과는 상당히 떨어져 있음 을 알 수 있다(Curtis).
생선문 어귀 - 느 13:16에도 암시적으로 언급되어 있는 이 문은 예루살렘 성전의 북쪽 방향에 있다(Baker,Wycliff,Cuetis). 그러나 재클러(O.Zockler)는 이 문이 성의 동쪽 방향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이 양자의 견해를 종합 해 볼 때 생선문 어귀는 성벽의 동쪽 끝, 북동쪽 모퉁이에 있는 망대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임을 알 수 있다(Keil).
오벧을 둘러 심히 높이 쌓고 - 여기서 '오벧'(*, 오펠)은 작은 산, 또는 언 덕을 가리킨다. 왜냐하면 이 말의 원뜻은 '부풀다', '치켜 올리다'에서 유래한 ' 둔덕', '성채', '튼튼한 요새'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므낫세는 성의 서쪽에서부터 북쪽 생선문 어귀까지 언덕을 쌓고 언덕을 이용하여 성을 아주 높이 쌓았 을 것이다(Zockler). 그렇게 해서 므낫세는 내성(內城)인 예루살렘 이외에 외성 (外成)까지 쌓아서 방비벽을 이중으로 구축하여 앗수르의 침입에 대비했던 것 같다.
33:15
우상을 제하며...다 성밖에 던지고 - 왕하 23:6, 12에 따르면 므낫세가 섬기던 우상들을 완전히 제거한 왕은 요시야였다고 한다. 그리고 어떤 학자는 므 낫세가 우상들을 제거하였다가 다시 우상들을 섬겼다(Eward)고 말한다. 그러 나 우상들은 므낫세에 의해 완전히 제거되어 성밖에 버리워졌음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던지고'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솨라크'(* )는 '멀리 던지다', '아래로 던지다', '밖으로 세게 던지다'를 가리키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와 더불어 '제 하여'에 해당되는 히브리어 원형 '수르'(* )는 '쫓아버리다', '치우다', '잡아 찢다'란 의미를 갖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악한 므낫세의 아들 아몬이 다시 그것들을 제자리에 세웠기 때문에 요시야 때 가서야 비로소 완전히 부수어 지고 태워졌음이 분명하다(Keil). 그래야만 이러한 견해는 34:3-7의 말씀과도 완전히 일치한다. 즉, 므낫세는 우상들을 여호와의 전에서 옮겨 밖에 버리기는 하였으나(*, 헤씨르) 완전히 부수고 빻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카라트).
33:16
여호와의 단을 중수하고 - 이는 므낫세가 번제단을 다시 세웠다는 뜻이다. 여기서 '중수하고'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와이켄'(* )의 의미는 '세우다', '고정시키다'로서 다시 건축하는 것을 뜻한다. 그런데 므낫세가 번제단을 언제 제거했었는지에 대해서는 분명치 않다. 그래서 어떤 학자는 이에 대한 본절의 의미를 축소하 여 '수리하다'라는 뜻으로 해석한다(O. Zockler). 그러나 아마 므낫세는 아하스 왕이 했듯이(왕하 16:14) 일월 성신을 위하여 여호와의 전 두 마당에 단을 쌓 을 때에 번제단을 다른 곳으로 옮겼을 것이 분명하다(5절, Eward). 그래서 므 낫세는 이 번제단을 본래의 자리에 되세우는 것을 개혁의 큰 성과로 생각하 고 실행했을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일부의 성경 번역본들이 이를 '세우다'라고 옮기고 있다(공동 번역, '세워'; Living Bibble, rebuil).
33:17
백성이... 오히려 산당에서 제사를 드렸더라 - 본절은 유다 백성들을 향하여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만을 섬기라고 한 므낫세의 명령이 제대로 실행되 지 않았음을 보여 준다. 즉, 백성들은 므낫세의 명령 때문에 겉으로는 여호와 만을 섬겼으나 실제로는 중앙 성소에서 예배드리지 않고 옛적 산당 예배를 다시 부활시켰던 것이다. 이와 같은 현상이 발생한 이유로 다음과 같은 것들 을 고려할 수 있다. (1) 므낫세의 개혁이 철저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에 대 한 증거로 15절을 보면 므낫세가 우상과 그 단을 제기하기는 하였으나, 완전 히 파괴하지는 않았음을 알 수 있다(15절 주석 참조). 그리고 백성들로 하여금 중앙 성소에서 예배드리도록 적극적으로 장려하지 못하고 산당에서 예배드리 는 것을 그냥 방치 하였다는 사실을 들 수 있다. (2) 장기간의 우상 숭배로 말 미암아 백성들을 참여호와 신앙으로 회복시키기가 매우 어려웠기 때문이다. 즉, 므낫세가 B.C. 697년에 즉위하여 B.C. 650년경 앗수르의 포로로 끌려가기 까지 약 반세기 동안 우상 숭배를 적극적으로 강요했었기 때문에 당연히 백 성들은 우상 숭배에 깊이 빠져있었을 것이다(Payne). 그래서 그러한 백성들의 악습을 6년이라는 짧은 기간의 개혁으로 고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3) 중앙 성소가 므낫세에 의해 이미 더럽혀졌었기 때문이다. 비록 므낫세가 여호와께 회개하고 종교 개혁을 실시했다고는 하나 한번 우상 숭배에 빠졌었기 때문에 그의 참된 명령은 백성들로부터 큰 신뢰를 받지 못했을 것이다. 이와 같은 이 유로 예배의 중앙 집중화는 붕괴되고 산당 예배가 활상화되기 시작한 것이다.
33:18
하나님께 기도한 말씀 - 왕하 21:17에는 '므낫세의 기도'에 대한 언급이 없 고 다만 선지자의 권고한 말씀만을 왕하 21:10-15에서 언급하고 있다. 한편 혹자는 본서 저자가 말하는 '므낫세의 기도'는 외경에 나오는 '므낫세의 기도' 내용의 근거가 된다고 말한다(Dictionary of the Bible). 그러나 대부분의 보수적인 학자들은 외경에 나오는 므낫세의 기도와 본문의 사실과는 다른 것으로 이해한다(13절 주석 참조, Barker, Keil, Zockler).
이스라엘 열왕의 행장(行狀) - 좀더 현대적인 감각에 의해서 의역해 펴향하면 '잇,라엘 왕조 실록'(공동 번역)을 가리킨다. 대부분의 영어 역본들은 이것 을 '이스라엘 왕들의 연대기 혹은 역사'라고 기술하고 있다(Living, NIV, the Annals of the kings of Israle; RSV,the chronicles of the kings of Israel).
33:19
호새의 사기 - 이는 역대기 저자가 사용한 독립적인 자료로서 열왕기 저자 와 다른 자료를 사용한 사실을 입증해 준다. 이에 대한 자세한 것은 35:20-27 주제 강해 '구약 성서 기록에 사용된 자료들'을 참조하라.
33:20
그 궁에 장사하고 - 왕하 21:18에서는 보다 정확하게 '웃사의 동산'에 장사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한편 '웃사의 동산'의 위치에 관해서는 왕하 21:18 주석을 참조하라.
33:21-25
본문은 므낫세의 뒤를 이은 아몬의 통치에 관한 기록이다. 이것은 왕하 21:19-24의 내용과 거의 일치하는데 다만 본서에는 그가 므낫세와 같이 스스로 겸비치 않고 더욱 범죄하였다는 기록만이 첨가되었을 뿐 오히려 그 내용은 보다 더 축소되었다.
33:21
아몬이 위에 나아갈 때에 - 이는 B.C. 642년을 가리킨다. 아몬은 이때에 므낫세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으나 므낫세가 오랜 기간 동안 (B.C. 697-642) 통치한 것과는 달리 그는 단 2년간이라는 짧은 기간만 통치하였다.
아몬이... 이십 이 세라 - 이로 볼 때 아몬의 아들 요시야(B.C. 640-609)는 결국 그가 16세 때 낳은 아들임을 알 수 있다. 한편, 왕하 21:19에는 아몬의 모친이 욧바 하루스의 딸 므술레멧(Meshullemeth) 이라고 기술되어 있으나 본서에서는 밝히지 않는다. 그 이유는 아마 모친이 이방 여인이기 때문일 것이다(왕하 21:9 주석 참조).
33:22
그 부친 므낫세가 만든 아로새긴 모든 우상...섬겼으며 - 왕하 21:21에는 ' 그 부친의 섬기던 우상을 섬겨 경배하고'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이와는 달 리 본서 저자는 아몬이 므낫세가 제하여 버린 바로 그 우상을 다시 세우고 섬겼음을 암시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듯하다(15절 주석 참조). 그래서 페인 (Paynx)은 이같은 기록이 므낫세가 우상을 파괴시키지 않았으며, 예루살렘에 만 개혁을 집중시켜 오히려 우상 숭배를 분산시켜 행케 하는 결과를 낳았다 는 사실을 암시한다고 보고 있다(17절 주석 참조).
33:23
아몬이...스스로 겸비치 아니하고 - 이 대목은 본서 저자에 의해 첨가된 듯 하다. 이는 앞에서 언급된 므낫세의 겸비함(12절)과 비교했을 때 아몬은 전적 으로 겸비치 아니했던 인물이라는 사실을 명백히 나타내고자 하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다(Williamson). 한편 므낫세가 앗수르에 조공을 바치며 친 앗수르 정책을 펼쳤듯이 아몬도 마찬가지로 부친과 같은 정책을 취했다. 그리고 아몬 은 아마 부친 므낫세의 종교 개혁이 친 앗수르 정책에 전혀 도움이 되지 못 한다고 판단하여 계속 우상 숭배를 장려했을 것이다(Curtis). 그래서 그는 하나님 앞에서 겸비치 아니했다는 본서 저자의 평가를 받은 듯하다.
33:24
그 신복이 반역하여 - 아몬은 요아스와 아마샤처럼 신복들의 반역으로 죽임을 당했다(24:25, 26; 25:27). 그런데 어떤 학자는 그 신복들이 친애굽 세력 이기 때문에 애굽의 사주(使嗾)에 의해 아몬을 죽였을 것이라고 추측한다(Curtis). 그러나 성경에서는 아몬의 신복들이 왕을 반역한 이유에 대해서 전혀 언급하고 있지 않다.
33:25
국민이...반역한 사람들을 다 죽이고 - 여기에 등장하는 '국민'이 어떤 성격의 부류인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의견들이 있다. 즉, (1) 친앗수르파이든가 아니면 (2) 왕의 권위에 대하여 절대적인 충성심 갖고 있는 일반 백성이라고 본다(Barker, Curtis). 그런데 역대기 뿐만 아니라 열왕기 전체에 등장하고 있는 '국민'의 성 격은 (1)처럼 특정한 부류를 지칭하지 않고, (2)처럼 포괄적인 성격의 부류들을 지칭한다. 그러므로 '국민'은 다윗 왕조의 회복을 갈망하는 유다 백성을 지칭 한다고 이해할 수 있다(왕하 21:24 주석 참조). 이에 대한 보다 상세한 설명은 23:16-21 주제 강해,;'역대기에 나타난 하나님 백성의 특징'을 참조하라.
본장은 선왕(先王) 히스기야의 치적을 언급한 이전 장(章)과는 상반되게 악한 두 왕 므낫세와 아몬의 악정(惡政)에 관하여 기록하고 있다. 즉, 본장은 유다 제14대 왕인 므낫세와 그의 아들 제15대 왕인 아몬의 치적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이러한 본장은 므낫세의 치세를 기술하고 있는 전반부(1-20절)와 아몬의 치적을 서술한 후반부(21-25절)로 구성되어 있는 바, 이를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므낫세는 선왕 히스기야와는 달리 하나님을 배반하고 우상 숭배 및 악을 행하는 일에 물이 들었다(1-9절). (2)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 바벨론으로 끌려가 환난을 당하자 겸비하여 회개하였다(10-13절). (3) 그리고 그 회개의 열매로 그는 우상을 파괴하고 여호와 신앙을 회복하는 종교 개혁을 시행하였다(14-17절). (4) 그래서 본서의 저자는 그의 사적을 기술하면서 그가 보여준 신앙적 모습에 관해 언급한다(18-20절). (5) 이러한 므낫세를 이어 왕이 된 아몬은 므낫세의 초기처럼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범죄하다가 반역을 당해 죽음을 맞는다(21-25절).
이 같은 내용의 본장은 왕하 21장과 병행을 이루는 부분인 바 이를 그 기록과 비교해 볼 때 특별한 한 가지 차이점을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역대기 저자가 본장을 기록하면서 므낫세의 통치를 유다 멸망의 종국적인 원인으로 보지 않고 회개하여 스스로 자신을 겸비케 한 가으로 보고 있다는 것이다(12, 13절). 그러나 열왕기에서는 므낫세으 행악이 너무 극심하여 유다를 멸망의 구렁텅이로 급속히 빠져들게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왕하 21:11-15). 또한 아몬의 통치에 관하여 기록하면서도 본서 저자는 아몬이 그 부친 므낫세의 스스로 겸비한 같이 여호와 앞에서 스스로 겸비치 아니하고 더욱 범죄하였다 (23절)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본서 저자가 므낫세의 회개를 얼마나 중요하게 다루고 이쓴가를 반영하는 분명한 증거이다. 즉, 본서 저자는 유다 왕국을 멸망으로 치닫게 한 주범인 므낫세일지라도 자신의 죄를 자백하고 회개할 때 하나님의 은혜가 무한히 주어진다는 사실을 의도적으로 부각시킨 것이다.
또한 본서 저자는 이후의 장(章), 특히 36장에서 유다 멸망의 원인을 어떤 특정한 사람에게 돌리지 않고, 단지 마지막까지 그 백성들을 용서하실 준비가 되어 있는 하나님의 모습만을 드러내고 있다(36:15). 이것은 역대기 저자의 관심이 어떤 한 사람에게만 국한되어 있지 않고 이스라엘과 함께한 하나님의 은혜와 백성들 전체 운명에 대하여 깊게 뿌리박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한편, 본장은 므낫세와 아몬의 통치를 다음과 같이 특징있게 묘사하고 있는 바, 이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므낫세가 행한 우상 숭배와 모든 악행은 너무 극심하여서 이전 선왕 히스기야가 이루어 놓은 종교 개혁의 업적을 완전히 뒤엎어 버리고(3절) 모든 열방보다 더 악하게 되어 하나니믓 진노를 쌓아갔다(9절). (2) 하나님이 므낫세를 징벌하셨는데(11절), 그것은 궁극적으로 므낫세로 하여금 회개에 이르게 하는 복된 채찍이 되었다. 그 결과 일방적인 하나님의 주도하에서 므낫세와 하나님의 관게가 회복되었다(13절). (3) 여호와를 체험적으로 알게 된 므낫세는(13절) 죽는 날까지 최선을 다해 종교 개혁을 수행하였으나(14-16절), 므낫세가 경험한 하나님을 알지 못한 백성들의 완고한 마음을 여호와께로 돌아서게 하는 데는 역부족이었다(17절). (4) 아몬의 통치는 한 마디로 말해서 하나님의 극진한 은헤에 비해 인간의 사악함이 얼마나 큰가를 보여주는 좋은 예로서 소개되고 있다. 즉, 아몬이 행한 범죄와 겸비치 아니한 모
습, 그리고 그의 완고한 고집은(23절) 하나님의 은헤에 대한 정면적인 도전이었다. 그래서 이러한 아몬 왕을 국민이 처단하고 선한 요시야를 대신하여 왕을 삼은 것은(25절) 전체 백성들을 위한 하나님의 은총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중요한 사실 한 가지는 인간의 사악함과 상반되는 하나니므이 한 없는 은혜이다. 혹 히스기야가 여호와께 축복받은 것이 그의 선한 행위 때문이었다고 착각할 수 있을 지 모르지만 므낫세를 통해서 볼 때 히스기야의 축복도 전적인 하나님으 참으심과 은혜 때문이었다고 말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으 선한 공적은 인간의 사악함에 비교해 볼 때 정말 아무것도 아니며 하나님의 심판을 피하는 데에는 전혀 무가치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구원은 자신이 행한 선한 공적 때문이 아니라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이며 주께서 허락하신 선물이라고 고백할 수밖에 없다(엡 2:8, 9).
이와 더불어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깨달을 수가 있다. 즉, 므낫세와 아몬은 악을 행했다는 측면에서는 비슷하면서도 그들의 동말은 대조적인 모습을 보여 준다는 것이다. 그들은 똑같이 악을 행해 범죄했으나 오래 통치한 므낫세(B.C.697-642)는 회개하였고 아몬(B.C.642-640)은 그렇지 않았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죄인의 생명을 연장시켜 주심은 그가 회개하고 여호와께 돌아오기를 바라시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롬 2:4;벧후 3:9)
1. 므낫세의 우상 숭배(33:1-11)
본문은 선왕 히스기야의 종교 개혁으로 말미암아 어느 정도 수습되어 가던 유다의 종교적 정황에 일대 반전(反轉)을 일으킨 므낫세의 극단적인 우상 숭배에 대해 소개하고 있는 대목이다. 이러한 그의 악행은 하나님의 전을 건축할 때 맺은 다윗의 언약(7, 8절;7:16;삼하 7:10;대상 29:19)과 대조되면서 그 범죄의 중대성이 극대화되고 있다.
이러한 내용을 담고 있는 본문은 므낫세가 범한 우상 숭배의 극단적 모습을 서술한 전반주(1-9절)와 포로가 되어 바벨론으로 끌려간 사실을 언급한 후반부(10-11절)로 구성되어 있다. 그래서 본문의 전반부에 나타난 사실이 므낫세가 포로로 잡혀간 원인처럼 나타나 있고, 후반부에 언급된 사건이 우상 숭배의 결과같이 기술되어 있다. 그로 인해 본서 저자는 범죄의 결과는 곧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사실을 나타낸 듯하다. 이와 같은 본문은 다음과 같이 정리될 수 있다.
첫째, 우상 숭배(1-9절) : 본문과 평행구인 왕하 21:1-9를 종합해 볼 때 므낫세는 바알의 단을 건축하였을 뿐만 아니라 일월 성신 숭배, 사술(邪術)과 요술 등을 신봉하였음을 알 수 있다. 더욱이 그가 아하스 왕처럼(28:3) 인신 제사까지 행함으로써 자신으 범죄를 가중시켰다.
둘째, 포로가 되어 바벨론으로 잡혀감(10, 11절) : 대체적으로 앗수르의 유다 침입이 B.C.650년 경에 일어났다고 추측하기 때문에 이때 므낫세가 바벨론으로 끌려갔던 것 같다. 그가 포로로 끌려가게 된 동기는 그의 범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직접적인 원인이었짐나 그당시 고조되기 시작한 반(反)앗수르 물결에 유다가 가담했을 가능성 또한 배제하기 힘들다.
한편, 이 같은 본문은 황하 21:1-16의 내용과 평행을 이루는 부분이다. 그런데 본문에서는 우상을 숭배한 므낫세의 행위에 대해 선지자들이 심판을 예언한 사실(왕하 21:10-15)을 생략한 채 그 결과를 다루고 있다. 이와 더불어, 열왕기 저자가 그 결과를 한절(왕하 21:10-15)로 평가했으메 비해서 본문은 하나님께서 내리신 심판과 진노의 사실을 생생히 그리고 있다(10, 11절). 이러한 본문을 통하여 우리는 다음과 같은 교훈들을 발견할 수 있다.
(1)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선택된 백성으로 삼으신 것은 그들의 선함 때문이 아니라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족특한 선민 사상이 있다(레 20:24). 그런데 이것은 때로 특별한 특권 의식으로 자리잡고 있어서, 예수님 당시에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이 아브하함의 자손들이라는 것에 대해서 광장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마 3:9). 그러나 본문 9절은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이 결코 열방보다 선하였기 때문이 아님을 보여준다. 이는 오늘날 일부 어떤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인 이라는 이름만으로 지나친 자부심을 갖고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지 않는 것에 좋은 경고가 될 것이다.
(2) 하나님의 심판은 궁극적으로 인간의 도덕적 타락 때문에만 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을 거부하기 때문에 임한다는 것이다(7-10절). 즉, 므낫세의 죄악 가운데 하나님의 심판을 불가피하게 만든 것은 무엇보다도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아니한 것(10절)이었다.
(3) 인간의 어떤 잔꾀로도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므낫세에게는 왕으로서의 권력 뿐만 아니라 재력도 있었고, 스스로 숨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심판은 그것보다 더 크고 확실하기 때문에 피할 길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므낫세는 갈고리와 쇠사슬로 결박당한 때 바벨론으로 끌려가서 감옥 생활을 했던 것이다. 인간이 하나님의 심판을 피하기 위해 취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하나님 앞에 나와 회개하는 것 뿐이었다.
* 히브리인의 주거 형태. 본문은 므낫세가 행한 일월 성신 숭배 에 관해서 언급하고 있는데(3절), 예레미야서에 보면 이러한 숭배 의식이 지붕에서 행해졌다고 한다(렘 19:13;습 1:5), 이는 팔레스틴에서 거주하던 히브리인들의 독특한 주거 형해는 반영하고 있느 바, 이해를 돕기 위해 성경에 언급된 히브리인들의 주거 형태에 대해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동굴 : 자연적으로 생긴 동굴들이 때로는 거주지로 사용되었다(창 19:30). 그리고 이러한 동굴은 다윗이 아둘람 동굴에 피신하여 있었던 사실(삼상 22:1)에서 알 수 있듯이 은신처로 사용되는 경우도 있었으며(삼상 13:6), 군사적인 목적을 위해 사용되는 때도 있었다(삼상 24;사 2:19). 또 동굴 가운데 비교적 마른 상태로 잘 보존되어 있는 동굴은 매장지로도 안성마춤이었다(창 23:19;요 11:38, 39). 그런데 이 같은 주거지는 안락도가 매우 낮은 곳으로 이스라엘의 극빈자들이 거주한 곳이기도 하다.
(2) 장막(천막) : 장막이란 일반적으로 염소 털로 짠 질기고 검은 천으로 만든 일시적인 주거 형태인데, 아주 고대부터 유목민으 전형적인 거처로 사용되었다(창 13:3;24;67;31:33). 이러한 장막으 유형에는 원추형, 난형(卵形), 장방형이 있는데, 때로는 장막이 거처로 사용되는 것 이외 은신처9시 31:20), 군인들의 병영(왕상 20:12, 16), 포도밭을 지키는 감시인들의 원두막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그리고 히브리인들이 절기을 지내는 동안에는 모두 장막에서 거주하였는바, 이는 출애굽 당시 이스라엘 선조들이 광야 40년 동안 장막 생활을 한 것을 기념하고 그 의의를 되새기기 위한 것이었다(출 15:27).
(3) 초막 : 이것은 올리브 나무와 같이 낙엽성 나무나 시냇가에서 자라는 버드나무를 이용하여 만든 일종의 임시 오두막이다9레 23:40;느 8:15). 이와 같은 초막은 여러 개의 기둥을 세워 나뭇가지로 지붕을 엮어 만드는데, 이것은 움막(booth) 또는 망대라고도 불리운다. 이러한 초막은 한낮의 뜨거운 열기나 밤 이슬을 피하는 데 도움이 되었으며, 성경에서는 동물들의 우리(창 33:17)나, 일시적인 거처(욘 4:5), 전시의 병영926:9;삼하 11:11), 추수기에 들이나 밭을 지키는 원두막(사 1:8)으로 사용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4) 흙집 : 이것은 히브리인들이 가나안에 정착했을 때 사용한 주거지로서 주로 서민들의 거처로 사용되었다. 일찍이 애굽에서 진흙 벽돌이 발달하였으므로 (창 11:3) 팔레스틴 지역과 메소포타미아 지역에 이런 흙집이 널리 유행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 같은 흙집의 형태는 주로 직사각형이었는데 담으로 둘러싸인 마당에는 우물이 있고, 우물이 없는 집에는 물저장 항아리가 있었다. 집은 보통 단층이나, 방은 높은 칸(가족들의 숙소), 낮은 칸(가재 도구나 기타 물건의 저장소, 밤이나 비가 올 때 가축들의 거처)으로 나뉘어져 있다. 때로 가난한 사람들은 보통 방이 하나 뿐이었으며 그 공간을 나누어 사람과 가축의 거처로 사용하기도 했다. 그리고 지붕은 대개 평평하고 외부 계단으로 올라갈 수 있게 되어 있어 농작물의 건조지(수 2:6), 여름의 거실(삿 3:20), 휴식처(삼상 9:25), 기도 처소(행 10:9)로 사용되었고 때로 본문에서 볼 수 있듯이 우
상 숭배 장소로 사용되기도 했다. 한편 지붕위에는 다락방을 들이는 경우가 많았는데 엘리야의 거처(왕상 17:19), 아하시야의 추락 장소(왕하 1:2), 예수님의 성만잔 장소(눅 22:12) 등이 모두 이 사실을 암시해 준다. 그리고 지붕을 지을 때는 난간을 만들어서 사람이 떨어지지 않게 했다(신 22:8). 또한 집에는 보통 안팎으로 창문이 달려 있느데 집안의 정원으로 향해 있는 창문은 크고, 거리 쪽으가 나 있는 창문은 작았다. 이 뿐만 아니라 창은 적군의 침입을 막기 위해 격자창으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다메섹에는 창문이 지면에서 높이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격자창이 없었다. 그래서 바울은 이 창문으로 도망갈 수 있었던 것이다(고후 11:33). 이러한 집의 문은 문짝과 문지방, 문설주, 인방(引枋) 등으로 되어 있으며 문설주에는 쉐마 (신 6:4-9)를 기록하여 넣어 두는 함(函)이 달려있었다.
(5) 돌집 : 이는 주로 사회적으로 계급이 높은 부유층에 속한 자들의 거주지로서 다듬은 돌을 석회로 쌓아 건축했다. 그리고 벽에는 종종 채색한 장식물이 있었고 때로 금이나 호박(electrum)으로 부조하여 벽을 장식하기도 했다. 기타 가옥 구조는 유사하다.
2. 므낫세의 회개와 개혁 사업(33:12-20)
므낫세의 치적을 언급하는 과정에서 앞단락에서는 그가 행한 우상 숭배의 적나라한 모습과 그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으로서 바벨론으로 포수된 사실을 언급했다. 이에 이어지는 본문은 환난을 당한 므낫세가 회개하고 그에 합당한 회개의 열매을 맺는 장면을 서술하고 있다. 즉, 본문은 므낫세가 여호와께 회개해 다시 복위되는 모습을 기술한 전반부(12, 13절)와 국방을 강화하고 종교개혁을 일으킨 사실을 언급한 중반부(14-17절), 그리고 그의 사적을 서술한 후반부(18-20절)로 구성되어 있다. 그래서 본문은 악을 행한 므낫세였음에도 불구하고 그에 대한 평가를 전체적으로 긍정적인 면이 드러나도록 기술한 듯하다.
이처럼 본문에 소개된 바와 같이 회개->그 결과라는 도식으로 그려질 수 있는 본 내용은 크게 두 가지로 설명할 수 있는데, 첫째는 하나님 편에서 보여주신 은혜와 자비하심이고, 둘째는 므낫세의 적극적인 회개의 삶이다. 이를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즉, 므낫세가 환난 중에 그 하나님 혀오와께 간구하였을 때(12절), 하나님은 그의 기도를 들으셨고, 그를 다시 례루살렘으로 돌아올 수 있게 하셨으며, 다시 왕위에 앉게 하셨다(13절). 여기서 우리는 인간적인 측면에서 볼 때에 도저히 용서받을 수 없는 자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은혜는 그보다 더 크고 위대하셔서 회개에 합당한 은혜를 베푸심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므낫세의 회개는 단순히 일시적인 감정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하나님에 대한 철저한 인식으로 말미암아(13절), 과거의 죄를 청산하는 의미로서 거국적인 개혁 사업을 실시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본서 저자는 그의 개혁 사업의 불완전함은 차치하고 그의 회개 기도와 겸비함을 높이 평하하였는데
여기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교훈을 생각하게 된다.
(1) 비록 회개하여 새로운 삶을 산 므낫세이지만 평생 자신이 지은 죄과를 청산하기에 급급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즉, 그는 회개한 후에 이방 신들과 여호와의 전으 우상을 제하며, 예루살렘 각지에 세운 우상의 단을 제거하는 데 많은 세월을 보냈다는 것이다. 그가 부친 히스기야의 업적을 이어받아 처음부터 선정을 베풀었다면 이와 같은 허송 세월은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이스라엘 역사상 유래없이 긴 기간 동안(1절) 통치자로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남긴 것은 죄의 상처 뿐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삶이 보다 값지게 되기 위해서는 죄에 물들지 않도록 성도의 구별된 삶을 유지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하겠다.
(2) 진정한 회개는 회개 이전에 스스로 쌓아놓은 장애물까지 다 극복하는 것을 말한다. 므낫세가 개혁 사업으 추진할 때 가장 큰 장애물로 등장한 것은 타락한 백성들의 완고함이었다. 그래서 우상들을 제하긴 하였으나 완전히 파괴하지는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15절 주석 참조), 유다 백성들에게 여호와만을 섬기라 명하여도 그들은 오히려 음성(陰性)적으로 더 깊이 우상 숭배에 빠지게 되었던 것이다(17절). 이러한 장애물은 결국 므낫세 자신이 만들어 놓은 죄의 결과였는바, 그는 평생 이 장애물을 제거하기 위해 애쓰다가 최후를 맞이했다. 그리고 그가 죽은 후에도 그의 종교 개혁은 백성들로부터 인정을 받지 못하여 백성들은 그를 열조의 묘실에 장사 지내지도 않았다(왕하 21:18). 이로 볼 때 그가 쌓은 죄의 장애물이 얼마나 컸던가를 능히 짐작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대기 저자는 비록 그가 개혁에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끝까지 장애물들을 극복하기 위하여 노력했고, 기도하며 살았다고 말하고 있다(18절). 이와같이 우리도 과거의 죄로 말미암아 우리 앞에 놓여진 장애물이 아무리 크다 할지라도, 또 설령 그것이 평생 자신을 찌르는 가시가 된다 할지라도 중도에 죄의 삶으로 회귀하지 않고 끝까지 회개의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그러면 사람들오부터은 인정을 받지 못한다 하여도 반드시 하나님으로부터는 인정을 받게 될 것이다.
* 참된 회개의 의미. 본문에 나타난 바와 같이 므낫세는 행악을 범하다 바벨론으로 끌려가서야 겸비해져서 하나님께 기도했다. 이러한 므낫세의 회개를 통하여 회개의 참된 의미가 무엇이며, 그에 따른 결과가 어떠할 때 참된 회개라고 할 수 있는지 생각해 보자.
(1) 회개의 의미 : 히브리어에서 회개 를 뜻하는 대표적인 단어는 슈브 (* )이다. 이것의 기본적인 의미는 돌아가다 , 돌아오다 , 돌아서다 인데 이 단어는 문맥에 따라 그 의미가 매우 다양하게 쓰인다. 그중에서 대표적으로 세 가지만 살펴보면, (가) 물리적 동작이나 운동의 뜻을 함축해서 사용되는 돌아오다 는 뜻, (나) 반복적인 행위를 뜻하는 다시 란 의미, 그리고 (다) 회개의 의미로서 언약의 공동체가 하나님께 돌아오는 것 , 악으로부터 돌아서는 것 , 배교의 행위로부터 여호와의 신앙으로 돌아오는것 등을 나타낸다. 이로 볼 때 슈브 의 진정한 의미는 인간의 결단적인 행위에 따라 삶의 방향을 완전히 하나님께로 바꾸는 것임을 알 수 있다.
한편, 성경에서는 회개의 과정에 잇어서 인간의 책임있는 결정을 언급하는 관용구가 많은데, 너희마음을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로 향하라 (수 24:23), 스스로 할례를 행하여...여호와께 속하라 (렘 4:4), 네 마음의 악을 씻어 버리라 (렘 4;14), 너희 묵은 땅을 기경하라 (호 10:12) 등이 바로 그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회개의 필수 요건에 해당되는 두 가지, 즉 회개는 죄를 버리는 것과 혀오와께로 돌아가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에는 인간의 의지적인 결정과 더불어 인격적인 변화가 함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예외적인 경우이긴 하지만 수많은 성경 구절에서 이 단어는 포로 생활에서 돌아오는 것 과 연관되어 쓰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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