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1
여로보암 왕 제 십 팔 년에 - 여로보암의 즉위 연대는 B.C. 930년경이다. 그러므로이 해는 B.C. 913년경이 되는 셈이다. 한편 역대기 기자가 동시대의 이스라엘 왕의 통치 연대를 소개하면서 유다 왕의 등극(登極) 사건을 기록한 곳은 단지 여기뿐이다. 여기서 '여로보암 왕 제 18년'이란 기록은 동일한 연대에 통치를 시작한 르호보암(10:16-19)보다 여로보암이 더 오랫동안 통치를 하였으며 여로보암의 영향력이 르호보암의 아들 아비야 때에도 여전하였음을 암시해 준다.
아비야가 유다 왕이 되고 - B.C. 913년경 유다의 제 2년 왕으로 등극한 아비야에 대해서 열왕기서는 "그 부친의 이미 행한 모든 죄를 행하고 그 마음이 그 조상 다윗의마음 같지 아니하여"라고 부정적인 평가를 내리었다(왕상 15:3). 그러나 역대기 기자는 이에 대해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고 있는데 그 이유는 아마 아비야가 여로보암을쳐부순 공적(13-19절)을 극대화하기 위해서인 것 같다. 이러한 사실은 20절에서 "아비야 때에 여로보암이 다시 강성하지 못하고 여호와의 치심을 입어 죽었고"라는 기록에서도 분명히 알 수 있다.
=====13:2
그 모친의 이름은 미가야라 - 이미 11:20 주석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아비야의 모친은 마아가(Maachah)로서 압살롬의 손녀였다. 따라서 본절의 '미가야'(* ,미카야후)는 '마아가'(* , 마아카)의 오기(誤記)일 가능성이 크다(P.C. Barker,O. Zockler, Keil). 한편 '마아가'란 이름은 '압제'란 뜻인 반면 '미가야'는 '누가 여호와와 같으랴'는 뜻이다.
기브아 사람 우리엘의 딸이더라 - 11:20에서 이미 설명하였듯이 '우리엘'은 압살롬의 딸 다말의 남편이며 마아가는 압살롬의 손녀이다. 이러한 가족 관계를 도표상으로간략히 나타내 보면 다음과 같다.
압살롬
│
다 말 ─────────┬───────── 우리엘
│ │ 마아가(일명 미가야) │ │ 아비야(일명 아비얌)
한편 우리엘의 고향인 기브아(Gibeah)가 헤브론 근처에 있는 기브아인지(수 15:57;대상 2:49) 베냐민 땅 기브아(삼상 10:26;15:34;삼하 21:6)인지 분명히 말할 수 없다.왜냐하면 단순히 '기브아'란 말만 가지고서는 양자를 구분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13:3
아비야는...사십 만으로...여로보암은...팔십 만으로 - 르호보암 왕 때에는 유다의군사가 18만에 불과하였다(11:1). 그런데 여기서 40만의 군사가 모였다는 것은 유다가시삭의 침입 이후에 군사적으로 꾸준히 발전해 왔음을 암시한다. 한편 여기 기록된 이스라엘과 유다의 군사 수는 다윗 때에 요압이 조사한 수와 비슷하다(삼하 24:9;대상21:5). 그 후에도 유다는 계속해서 군세(軍勢)를 확장해 나갔으니 아사왕 때에나(14:8), 여호사밧 때에는(17:14-18) 훨씬 많은 군대를 소유하고 있었던 것으로 나타난다.
=====13:4
스마라임 산 - 수 18:22에 따르며 스마라임(Zemaraim)은 베냐민의 한 성읍으로서 벧아라바와 벧엘 사이에 위치한 것으로 나타나있다(Curtis). 그곳은 오늘날 '라스 에즈 제이마라'(Ras ez-Zeimara)로 베냐민 지파 경계(境界)와 에브라임 지파 경계의 접경지이다. 추측컨대 이곳의 스마라임 산은 에브라임 산맥 중에 포함되었던 것 같다(P.C. Barker). 한편 아비야가 스마라임 산에서 이스라엘 열 지파에게 연설하는 모습은 옛적 요담이 그리심 산에서 세겜 사람들에게 연설하던 모습을 연상케 한다(삿 9:7).
=====13:5
소금 언약 - 성경에서 하나님의 언약을 가리켜 '소금 언약'(a Covenant of Salt)이라고 표현한 곳은 여기와 민 18:19 두 곳이다. 그리고 레 2:13에는 "네 하나님의 언약의 소금을 네 소제에 빼지 못할지니"라는 표현이 나온다. 여기서 '소금'이 뜻하는 바는 '불변성', '방부제', '영원함'이다. 몇몇 주석가들에 따르면 언약을 매끼의 식사로 표현한다면 소금은 그 식사의 양념에 해당될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본절이 뜻하는 바는 단순한 양념으로서의 소금이 아니라 부패를 방지하여 끝까지 변치 않게 하는 방부제로서의 소금을 가리킨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Expositor's Bible Commentary). 또 소금은 음식들을 섞었을 때 맛이 서로 어울리도록 하는 양념의 역할을 하는 것으로 보아 둘 사이를 강하게 맺어주는 결속력, 또는 유대감을 나타낸다고도 볼 수 있다. 한편 여기서 아비야가 말한 소금 언약은 '다윗 언약'을 가리킨다(대상 17장). 그런데 아비야가 여기서 다윗 왕조를 소금 언약과 연관시키고 있음은 (1) 다윗 언약의 영원성을 강조하며 (2) 다윗의 후손인 르호보암과 아비야 자신의 왕위 계승이 적법(適法)하다는 사실을 변호하기 위함이다. (3) 그리고 그 반대로 북이스라엘의 건국 자체는 언약을 깨뜨리는 패역한 행위이며 (4) 따라서 그들이 유다를 대적하는 것이 부당하다는 점을 피력하기 위해서였다.
=====13:6
솔로몬의 신복 -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Jeroboam)을 가리켜 '솔로몬의 신복'이라고 한 것은 열왕기에 나오는 표현이기도 하다(왕상 11:11, 26). 여기서 이 말은 특별히 여로보암이 솔로몬의 왕위를 계승하기에 적합치 못한 자였음을 나타낸다. 즉, 여로보암은 솔로몬과 그의 왕조를 마땅히 섬겨야 할 신하의 위치에 있었던 자이지 그의 적법한 후계자가 아니었던 것이다. 한편 구약 시대 당시 이스라엘 사회에서 왕의 계보가 아닌 자가 왕위를 계승하기 위해서는 특별한 신명(神命)을 내세워야 했다. 하지만 그것도 역으로 종종 정통성 시비를 제기하는 문제의 소용돌이가 되곤 하였다.
=====13:7
난봉과 비류(匪類) - 이는 다윗의 왕조를 배반한 무리들을 비아냥거리는 말이다. 여기서 '난봉'(* , 아나쉼 레킴)은 '허탄하고 변덕스런 사람'이라는 뜻인데 삿 9:4에는 '방탕하고 경박한 유'로, 11:3에는 '잡류'로 번역되어 있다. 그리고 '비류'(* , 베네 벧리야알)는 문자적으로 '벧리알의 아들들'이라는 뜻인데 '사람같지 않은 사람', '불량자'를 가리킨다. 훗날 신약 시대에는 이말이 사단(고후 6:15)이나 적그리스도(살후 2:3)를 지칭하는 데에도 사용되었다(Wyciffe). 이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삿 19:22 주석을 참조하라.
르호보암이 어리고 - 여기서 '어리고'에 해당되는 히브리어 '나아르'(* )는 일반적으로 '소년'(왕하 2:24), '종'(왕하 4:12)을 가리키나 때때로 '경험없는 젊은이'(대상 22:5;29:1;왕상 3:7)를 가리키기도 한다. 그런데 41세에 왕위에 오른 르호보암(12:13)을 가리켜 이렇게 표현하는 것은 어쩐지 매우 어색하다. 그래서 혹자들은 르호보암의 즉위시 나이를 21세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하는데 뒷받침할 만한 다른 근거가 없다(O. Zockler, Oettli). 따라서 여기서 르호보암이 어리다는 말은 그가 매우 무지하고 경험이 없었던 사람으로 비난받아 마땅함을 가리킨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P. C. Barker).
마음이 연약하여 능히 막지 못하였었느니라 - 같은 말이 신 20:8에서는 '두려워하고 겁내는 마음'으로 표현되어 있다. 그러나 르호보암의 실제 성격을 이렇게 보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10장에 나타난 그의 성격은 매우 강직하고 포학하기까지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11:5-12을 보면 국방을 견고케 하는 일 속에서도 그의 과감성을 잘 나타난다. 따라서 본절은 르호보암이 대(對) 북이스라엘 정책에 있어서 하나님의 제지 탓에 미처 민족적 반역자들을 처단하지 못한 역사적 사실(11:1-4)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르호보암이 계속해서 여로보암과 전쟁을 했지만(12:15) 뚜렷한 승리를 거두지 못한 사실들에 대한 아비야 나름의 평가라고도 볼 수 있다. 더욱이 본절 속에는 대(對) 북이스라엘에 대한 아비야의 강력한 의지도 내포되어 있다고 하겠다. 즉, 르호보암은 북 왕국 정벌을 포기하고 말았자만 자신은 결코 그러지 않겠다는 것이다.
=====13:8
다윗 자손의 손으로 다스리는 여호와의 나라 - 본절에는 유다의 정통성과 이스라엘의 비정통성에 대한 아비야의 주장이 잘 나타나 있다. 즉, 유다는 다윗의 왕권을 물려받은 여호와의 나라이며 이스라엘은 금송아지를 신으로 모신 패역한 나라라는 것이다. 5절 주석 참조. 너희는 큰 무리요...함께 있도다 - 여기서 이스라엘을 가리켜 '큰 무리'라고 했는데 '무리'(* , 하몬)란 '짐승떼' 또는 '스끄러운 소리를 내는 것들'을 가리킨다. 아마도 이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금송아지를 숭배했기 때문에 조롱거리로 붙여진 말인 듯하다. 즉, 올바른 제사장이 없이 금송아지만을 추종한 그들은 정통성을 지닌 여호와의 나라의 백성과 비교도 할 수 없는 짐승 떼와 같다는 의미이다. 한편 여로보암이 벧엘과 단 두 성읍에 세운 금송아지에 대해서는 왕상 12:28, 29 주석을 참조하라.
=====13:9
아론 자손 된 여호와의 제사장과 레위 사람 - 일반적으로 제사장과 레위인은 아론의 자손으로 언급되었다(출 28:40;29:44;40:12;민 3:6;8:6;18:6 등). 그런데 여기서 이는 특히 '허무한 신의 제사장'과 대비되는 말로서 이스라엘의 여로보암이 쫓아낸 제사장과 레위인 역시 하나님이 세우신 아론의 자손들임을 나타낸다. 그러므로 본절에서 아비야는 계속해서 이스라엘의 비정통성을 공박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방 백성의 풍속을 좇아 -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방 백성들처럼 정통적인 제사장 가문 중에서 제사장을 세우지 아니하고 보통 사람으로 아무나 일정한 의식(儀式)만 거치면 제사장이 될 수 있게 하였다는 말이다. 이러한 사실은 왕상 12:31과 13:33에서도 충분히 입증된다. 아비야의 이러한 공박은 외형적인 종교의 모양만 갖추면 된다는 안일주의에 빠져있던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큰 충격이 되었을 것이다. 왕상 12:31 주석 참조.
장립을 받고자 하는 자마다 - 본절의 문자적인 뜻은 '그의 손을 채우려 오는 자마다'이다. 이는 성경에서 '제사장직을 맏다'라는 뜻으로 자주 쓰이는 관용적 표현이다(출 28:41;29:9, 29, 33, 35;레 8:33;16:32;삿 17:5, 12;왕상 13:33 등). 한편 출 29장에 따르면 제사장으로 세움을 받을 때 드리는 제물은 하루에 어린 수송아지 하나와 흠없는 숫양 둘이며(출 29:1), 이것을 7일 동안 계속 드려야 했음을 알 수 있다(29:35-37). 그런데 이스라엘에서는 새 제사장을 급히 필요로 했기 때문에 수송아지 하나와 숫양 일곱을 끌고 오기만 하면 누구나 제사장이 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더욱이 아비야가 이 사실을 미완료 시제(imperfect)로 언급하고 있는데 그것은 이스라엘이 처음 뿐만 아니라 그러한 일을 계속해서 행하고 있었음을 나타낸다(O. Zockler). 하지만 그렇게 하여 제사장이 된 그들은 여호와의 제사장이 아닌 금송아지 신, 즉 허무한 신의 제사장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들이 섬기던 금송아지가 참 신이 아님은 호세아 선지자도 주장했던 바이다(호 8:6).
=====13:10
우리에게는 여호와께서 우리 하나님이 되시니 - 아비야는 이스라엘의 허무한 신 금송아지(8절)와는 대조적으로 이처럼 여호와가 자신들의 신임을 주장함으로써 유다 왕국의 정통성을 설득력있게 표명하였다.
여호와를 섬기는 제사장들이 있으니...수종을 들어 - 아비야는 계속해서 유다 왕국의 정통성을 주장함에 있어서 가장 중대한 근거로 (1) 자신들에게 '올바른 제사장'이 있다는 사실을 들고 있다. 그리고 (2) 레위인들이 정규적인 방법으로 직무를 행하고 있다는 사실을 든다. 여기서 '수종을 들다'(* , 바멜레케트)는 말은 자신에게 부과된 직무를 행하는 것을 의미한다. 한편, 이와같이 아비야가 유다 왕국의 종교적 정통성을 정치적으로 문제화한 것은 유다 군사와 대치(對峙)하고 있던 이스라엘 군대(3절)의 사기를 꺽는 데 매우 효과적이었을 것이다.
=====13:11
본절에서 아비야는 유다 왕국의 제사장과 레위인들이 율법에 정해진 규례대로 하나님을 섬겼음을 북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강조하고 있다.
조석으로...번제를 드리며 - 이는 매일 아침 저녁으로 드리는 상번제(常幡祭)를 가리킨다(출 29:38-46;민 28:3-8). 이때 드리는 제물은 일년되고 흠없는 수양으로서 아침에 한마리, 저녁에 한 마리씩 바쳤다.
분향하며 - 여호와의 제단 앞에 향 재료를 사르는 일은 매일 두 차례씩 행해졌다(출 30:6-8). 이때 향은 하나님께 상달되는 성도의 기도를 상징하였다.
깨끗한 상에 진설병을 놓고 - 진설병(陳設餠)을 놓는 규례는 출 25:30에 잘 나타나 있다. 제사장들은 매 안식일마다 떡상에 진설병 12개를 놓아야 했는데 그 진설병은 이스라엘 12지파의 하나님께 대한 헌신을 상징하였다. 한편 솔로몬 당시 진설병 상은 모두 10개가 만들어졌는데(4:8) 본절에서 보는 바와 같이 매번 깨끗한 상을 사용하기 위해 하나씩 번갈아 사용했음이 분명하다.
금 등대 - 성소 안을 밝히기 위한 기구이다. 이 등대는 매일 저녁에 불을 켰다가 아침에 끄는 것이 상례였다(출 25:31 이후;30:7, 8:40:24, 25;레 24:3).
=====13:12
경고의 나팔을 불어 - 성경에서 나팔은 엄격히 말하자면 음악적 도구보다는 신호용으로 주로 사용되었다. 이를테면 새로운 달(新月), 안식일의 시작, 유명 인사들의 죽음을 알리는 데 사용되었다. 또한 집회시나 전투시에도 사용되었다. 본절에서 제사장이 나팔을 분 것은, 여호수아가 여리고 성을 함락할 때(수 6:5, 20)와, 기드온이 미디안 군대를 패퇴시킬 때(삿 7:20) 불었던 나팔과 마찬가지로, 머저는 하나님의 도움을 요청하고, 아군의 사기를 진작시키며, 적군을 놀라게하기 위해서였다. 즉, 민 10:9에 기록된 바와 같이 나팔을 불 때 여호와가 저희를 기억하사 대적의 손에서 구원하신다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이다. 그리고 이 나팔은 제사장들이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에(5:12) 여호와는 나팔이 있는 유다의 편이 되신다는 것이 아비야의 논리이다.
너희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와 싸우지 말라 - 이것은 지금까지 행한 아비야의 연설을 마무리 짓는 논리적 결론이다. 즉, 여호와께서 유다와 함께하시므로 유다를 대적하여 싸우는 것은 곧 여호와를 대적하여 싸우는 것과 동일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호와를 대적하는 이스라엘에게 형통함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13:13
여로보암이 유다의 뒤를 둘러 - 군대의 수가 유다의 배나 되었던 여로보암(3절)은 아비야가 연설을 하고 있는 동안에 유다 진영을 포위하였고 뒤에는 복병(伏兵)을 숨겨두었다. 아마도 그는 아비야의 연설로 인하여 자기 군사의 사기가 많이 꺾였다고 판단했든지 아니면 아비야에 대하여 매우 쾌씸하게 생각하여 분노했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여로보암은 유다를 기습 공격하여 아비야를 단번에 쳐부수려고 서둘렀을 것이다.
=====13:14
유다 사람이...여호와께 부르짖고 - 대적을 만났을 때 여호와가 계신 전(殿)을 향하여 기도하면 이에 대해 응답해 주시겠다는 것은 솔로몬의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이었다(대하 6:34, 35). 여로보암은 유다를 겁주기 위해 복병 전술을 썼지만 이로 인하여 유다는 더욱더 하나님께 믿음으로 간절히 매달릴 수 있게 되었다. 이는 오늘날 성도들의 삶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는 바, 환난과 핍박을 당할 때 세속적이며 인위적인 수단에 호소해서는 안 될 것이다.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붙잡고 기도할 때에라야 바울과 실라를 거두었던 철문이 열렸던 것처럼(행 16:26) 모든 어려움은 제거될 것이다.
제사장은 나팔을 부니라 - 유다가 급박한 상황에 처하게 되었으나 제사장들은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나팔을 크게 불었다. 역대기 기자는 이때에 유다가 전적으로 여호와께만 의지하였다(18절)고 기록하고 있다.
=====13:15
유다 사람이 소리 지르매 - 이와같이 제사장들의 나팔 소리와 백성들의 함성이 함께 어우러져 하나님의 도우심을 요청하자 하나님께서 그 소리를 들으시고 여로보암과 온 이스라엘을 유다 앞에서 패하게 하셨다. 이는 마치 수 6:20에서 보는 바, 여호수아의 여리고 성 전투를 연상케 하는데 제사장들과 백성들의 합심한 마음이 여호와의 역사(役事)하심을 불러일으킨 귀중한 역사적 사실이다.
=====13:16
하나님이 그 손에 붙이신 고로 - 이는 성전(Holy War)과 관련, 널리 쓰이는 표현으로서 여호와께서 직접 그 전쟁을 주관하고 계심을 의미한다(신 2:30-36;수 10:8;11:6;21:44). 이에 대해서는 수 5:13-15 강해, '성전'(聖戰)을 참조하라.
=====13:17
엎드러진 자가 오십만이었더라 - 이는 여로보암의 전체 군대 80만(3절)의 과반수를 훨씬 초과하는 수치로서 여로보암의 완전한 패배를 나타낸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 한번 전쟁의 승패가 군대의 다수나 전술상의 우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뜻과 주권에 달려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오늘날 십자가의 군병된 우리 역시 대적자 사단의 막강한 세력에 대하여 결코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이미 사단의 정수를 찍어 결정적인 승리를 쟁취하셨으니(창 3:15;마 4:1-11)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들을 넉넉히 이길 수 있기 때문이다(요 16:33).
=====13:18
그 때에...유다 자손이 이기었으니 - 이는 대(對) 이스라엘 전투에서 승리로 기록된 첫 번째 역사적 사건이다. 왕상 22:13-28 강해, '유다의 전쟁' 참조. 역대기 저자는 이 사건을 단순한 동족간의 싸움으로 보지 않고 이스라엘의 금송아지 신(8절)과 유다의 여호와(10절)의 전투로 보았기 때문에 매우 의미있게 다루었음이 분명하다. 그리고 이것이 역대기 저자가 열왕기 기자처럼 아비야에 대해서 부정적인 평가를 하지 않게 된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1절 주석 참조.
=====13:19
성읍들을 빼앗았으니 - 성읍의 탈취는 대개 전쟁에서의 승리의 상징으로 언급된다(수 6:20;삼하 12:26). 이는 현대전(現代戰)에 있어서도 중요한 개념이다.
벧엘 - 이는 예루살렘 북쪽 약 20km 지점에 위치한 오늘날의 '베이틴'(Beitin)이다. 이 벧엘(Beth-el)은 여로보암이 금송아지를 세웠던 곳이며(왕상 12:29) 이스라엘에게 있어서는 성지(聖地)에 해당되는 곳이다. 그런데 본절에서 금송아지 탈취나 파괴에 대한 언급이 없는 것으로 보아 금송아지 우상은 이번 전쟁 이전에 벌써 다른 곳으로 옮겨진 듯하다(Expositor's Bible Commentary).
여사나 - 혹자는 여사나(Jeshanah)가 삼상 7:12에 나오는 '센'(Shen)과 동일한 곳이라고 생각한다(Cheyne, Reed). 그리고 요세푸스는 유다 변방 지역인 사마리아에 동일한 지명의 장소가 있었다고 말한다(Antique). 만일 그것이 사실이라면 여사는 벧엘 북쪽 약 5km 지점에 위치한 오늘날의 '아인 신자'(Ain Sinja)일 가능성이 크다.
에브론 - 히브리어 원문에는 '에브라인'(Ephrain), 또는 '에브론'(Ephron)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곳은 요 11:54에 따르면 에브라임과 동일한 곳이며, 수 18:23과 삼상 13:17에 따르면 오브라와 동일한 곳으로 추측될 수 있다. 그러나 많은 학자들은 에브론을 오늘날 벧엘에서 북동쪽으로 6.4km 지점에 위치한 '엘 타이이베'(El-Taiyibeh)와 동일한 곳으로 간주하고 있다(Josephus, P.C. Barker). 한편 이번 전쟁에서 유다군의 출정로와 정복한 성읍들을 지도상으로 나타내 보면 다음과 같다.
=====13:20
여호와의 치심을 입어 죽었고 - 이러한 표현은 나발의 죽음을 묘사할 때도 나타나는데(삼상 25:38), 어떤 갑작스런 죽음이나 하나님의 재앙으로 인한 죽음을 가리킨다. 그런데 열왕기의 기록에 따르면 여로보암은 아비야에게 패한 이후로 점점 그 세력을 잃고 급기야 그의 즉위 22년(B.C. 910년경)에 죽고 말았음을 알 수 있다(왕상 14:20). 따라서 여로보암은 아비야(B.C. 913-910)와 거의 동시대에 죽은 셈이다. 이 때문에 혹자는 본절이 '아비야보다 여로보암이 먼저 죽은 것을 가리키므로 역사적인 기록이 아니다'라고 주장하기도 한다(Curtis). 그러나 본절은 여로보암이 아비야에게 패한 이후로 계속 강성하지 못하였고 급기야는 죽고 만 사실을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여호와께서 여로보암에게 재앙을 내리신 사실이 왕상 14:1-18에 나타나 있으니 참조하라.
=====13:21
아비야는 점점 강성하며 - 본절은 여로보암과 대조적인 아비야의 축복된 삶을 보여주고 있다. 역대기 기자는 종종 많은 아내와 자녀들을 얻게된 것을 하나님의 축복의 상징으로 기록하고 있다(11:21). 물론 이는 일부 다처제가 옳다는 뜻이 아니고 하나님의 축복하심으로 아비야의 가정이 번영할 수 있었음을 나타낸다. 이로 볼 때 인간의 죄성은 하나님이 축복해 주시는 중에도 완년하게 드러남을 알 수 있다. 한편 혹자는 본절을 해석함에 있어서 아비야의 부정적인 평가를 담은 기록(왕상 15:3)을 지나치게 의식한 나머지 '강성하며'를 '살찌우며 타락하였더라'(wzxed fat and wanton)로 해석한다(KJV, P.C. Barker). 그러나 역대기 저자의 관점은 결코 아비야를 부정적인 측면에서 보지 않는다. 대신 역대기 저자는 아비야를 뛰어난 웅변가이며, 여로보암의 우상 척결에 공헌한 개혁자로 묘사하고 있을 뿐이다. 따라서 '강성하며'라는 말뜻을 액면 그대로 이해함이 옳은 듯하다.
=====13:22
선지자 잇도의 주석책 - 선지자 잇도(Iddo)는 솔로몬과 르호보암 및 여로보암의 행적을 기록한 선지자이다(9:29;12:15). 그런데 여기서 '주석책'(* , 미드라쉬)이란 저자 나름의 해석을 첨가한 기록으로서 왕의 공식적인 통치 행적에 대한 잇도의 주석서인 듯하다(Payne, Wycliffe).
본장은 유다의 제2데 와이 된 르호보암의 아들아비야(B.C.913-910)가 이스라엘의 여로보암과 전쟁한 사실을 묘사하고 있다. 비록 아비야는 3년 밖에 통치하지 않았지만 역대기 저자는 열왕기 저자와는 달리 아비야의 생애를 대단히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이는 다윗의 집안과 여호와를 배반한 여로보암을 무너뜨린 와이 바로 아비야이기 때문인 것으로 사료된다. 이러한 본장은 남유다와 북이스라엘이 전쟁하기 전의 상황을 언급한 전반부(1-12절)와 전쟁의 경과 및 결과를 기술한 중반부(13-20절), 그리고 전댕 후 아비야의 사적에 대해 기록한 후반부(21,22절)로 구성되어 있다. 본서 저자는 본장을 전쟁 전의 모습->전쟁 상황->전쟁 후의 번영한 유다의 모습의 개략적인 도식 형태로 기술해 유다 왕국과 함께 하신 하나님의 역사와 섭리하심에 초점을 두고 있다.
이와 같은 사실은 본장과 평행을 이루는 왕상 15;1-8과 비교하여 살펴보면 그 차이가 좀더 분명히 나타나는데, 본서 저자와 열왕기 저자의 역사 기록 의도에서 나타난 차이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본장에서는 아비야의 통치에 대한 부정적인 언급이 전혀 없다. 반면에 왕상 15:3은 그 부친의 이미 행한 모든 죄를 행하고...여호와 앞에 온전치 못하였으나 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를 볼 때 아비야는 르호보암과 동일한 죄를 범했음이 틀림없다(12:1). 그러나 역대기 저자는 아비야의 개인적인 일생보다는 하나님께서 그를 통하여 우상을 숭배하는 북이스라엘을 징계한 사실을 부각시킴으로 그가 지은 죄에 대한 문제는 침묵한다. 본서 저자는 제사장과 레위인을 중심으로 한 신정 국가의재건에 더 많은 관심이 있었기 때문에 가의 범죄를 언급하지 않은 것이다가 그 대신에 본장에서는 여로보암과의 전쟁을 대단히 상세하게 묘사함으로써 여호와께서 금송아지 신에 대해 이기셨음을 명백히 하고 있다. 그러나 열왕기 기자는 단지 아비야와 여로보암 사이에 전쟁이 있었다는 사실만을 기록하고 있다(왕상 15:7).
(2) 본장에서는 아비야의 연설을 대단히 상세하게다루었다(4-12절). 반면, 열왕기에는 이 연설에 관한 대목이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이 연설문의 내용에는 당시에유다의입장에서 이스라엘의 금송아지 숭배를 어떻게 보았는가 하는 점이 잘 나타나 있다. 즉, 본서 저자는 북이스라엘의 종교적 타락상과 남유다의 종교적 경건성을 비교해 언급함으로 유다 왕국의 신앙을 나타낸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아비야가 왕위에 즉위할 때는 다음과 같은 문제가 난제로 남아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아비야는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무척 고심했을 것이다. 남유다가 당시 직면했음직한 문제를 고려해 보면 다음과 같다.
(가) 종교적인 측면 : 예루살렘 성전을 떠난 북왕국이 금송아지를 숭배하면서도 여전히 견고하게 존속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유다 백성들에게는 종교적으로 큰 혼돈이 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아비야는 금송아지 숭배는 헛된 것이며그것을 숭배하는 제사장이 모두 가짜임을 입증해야만 했을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성전을 중심으로 하는 유다의 정책을 더욱 공고히 할 수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나) 정치적인 측면 : 르호보암이 북왕국에 대해서 과감한 정책을 펴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북왕국 이스라엘은 더욱더 견고하여 여로보암이 여전히 왕위를 지키고 있었기 때문에다윗의 집의 정통성에 대한 의문이 생길 수도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아비야는 다윗의 집의 정통성을 전쟁을 통하여 입증하여야 했기에 유다는 이스라엘과의 대전에 임했던 것이다.
한편, 본장은 전쟁을 주관하시는 분이 하나님이라는 사실(10,12,15,16,18,20절)과 참 신앙의 모습(10,11절)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는데, 이러한 본문을 통해 우리는 다음과 같은 교훈을 받을 수 있다. (1) 진정으로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최후의 승리를 맛볼 수 있다는 사실이다(렘 17:7). 그러기에 사단과의 영적 전투를 하는 오늘날의 성도 또한 그리스도를 전적으로 의지해야만 참된 승리를 얻을 수 있는 것이다(고후 2:14;계 5:5). (2) 세상에서 거의 멸망하게 된 것처럼 보일 때라도 주의 말씀에 근거한 참 신앙을 소유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실 외적인 전력에 있어서는 유다가 완전히 열세였으나(3절) 남유다가 취한 경건한 종교적인 모습은 유다를 승리로 이끌었다. 이처럼 우리 또한 참 신앙을 소유할 때만이 진정한 승리를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연약함과 절망은 오직 주께서 소생시키시기 때문이다(시 119:87,88).
1. 여로보암과의 대전(對戰)과 아비야의 연설(13:1-12)
아비야가 유다를 통치한 사실을 증거하고 있는 본장에서 그 서두에 해당되는 본문은 아비야와 여로보암이 전쟁을 하기 위해 대치한 상태를 언급한 대목(1-3절)과 전쟁 전에 아비야가 전쟁 중지를 권한 장면(4-12절)을 글고 있다. 이를 통해 저자는 당시 분열 왕국 초기 남유다와 북이스라엘 사이에 전쟁이 빈번하게 있었음을 나타냄과 동시에이러한 혼란의 시기 속에서 남유다가 어떤 신앙의 자세를 갖췄는지에 대해 암시하고 있다.
이러한 의도를 반영한 본문의 내용에서 그 특징적인 것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남왕국과 북왕국의 신앙 상태 대조 : 아비야는 그의 긴 연석(4-12절)에서 북이스라엘 백성의 (가) 우상숭배(8절), (나) 성직자 추방(9a절), (다) 서직 매매(9b절)를 신랄히 공격하고 난 다음 남유다 백성들의 (가) 정규적인 제사(11a절), (나) 하나님의 계명 준수(11b절)를 내세우고 있다. 이에 근거해 볼 때 이 전쟁은 표면적으로는 군사적인 충돌이었으나 이면적으로는 타락한 종교 대(對) 참 여호와 종교이 일전(一戰)이었다고 할 수 있다. (2) 남 유다 왕조의 정통성을 주장한다. 그리고 그는 여로보암의 반역을 하나님과 다윗이 맺은 영원한 언약을 배반한 것으로 반박하고 있다. 이런 측면에서 그는 남유다를 여호와의 나라 로 부른 반면 북이스라엘을 배교자 의 무리로 부르고 있다.
한편 위에서 약간 언급된 아비야의 연설 내용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다음 몇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1) 다윗 어약의 불변성을 주장(5-7절) : 이 주장은 다윗 왕조의 정통성을 증명함과 동시에 북왕국 여로보암이 언약을 배반한 난봉과 비류의 총수임을 말하는 것이다. (2) 금송아지를 숭배하는 북왕국 제사장들의 허위성을 주장(8,9절): 금송아지를 법궤와 같은 상징물로 보고 안일한 생각에 빠져 있는 북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경각심을 일깨우기 위하여 북왕국의 제사장들은 여호와의 규례대로 세움받은 성직자들이 아님을 논리 정연하게 설명하고 있다. (3) 유다가 참 여호와의 나라이며 그의 백성임을 주장(10-12절) : 아비야는 이를 주장하기 위해서 유다가 여호와의 규례대로 예배를 드리고 있다는 사실과 아울러 참 여호와의 제사장들과 레위인이 유다와 함께 있다는 것을 설명했다. 이러한 사실들로 볼 때 여호와는 유다와 함께 계심이 분명하며 이제 이스라엘을 향하여 경고의 나팔을 불 때 여호와께서 징계하시리라는 것이다.
이러한 아비야의 연설을 통하여 우리는 다음과 같은 교훈을 발견하게 된다.
(1) 극단적인 행위는 이유 여하를 불문하고 그 정당성을 잃게 된다는 것이다. 여로보암의 처음 취지는 세금과 노동으로 고역을 당하고 있는 백성들의 입장을 대변하는 것이었을 지 모른다(10:3, 4). 그러나 결국 그는 극단적으로 다윗 왕조를 부정하기에 이르렀을 뿐만 아니라(10:16). 무엇보다 가장 강력한 여호와의 지지를 잃어버리고 말았다. 그래서 병력이 훨씬 우세함에도 불구하고 야비한 복병 전술(伏兵戰術)을 쓰다가 전생에서 패한 것이다(15절). 성도가 사회 운동을 하거나 가가한 민중을 대면하는 일을 하는 것을 좋으나 그 방법은 지혜롭고 선해야 할 것이다. 또한 그 일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뜻대로 안 된다고 하나님을 거부하는 극단적인 행위는 삼가해야 할 것이다.
(2) 여호와를 향한 참 신앙의 소유자를 핍박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여로보암이 타락할 수밖에 없었던 근본 원인은 그가 예루살렘 성전의 정통성을 배격하여 금송아지를 세웠을 뿐만 아니라 올바른 하나님으 제사장들을 축출하고 거짓 제사장들을 세운 데 있다. 이것은 진실한 신앙을 소유한 자를 핍박한 것임과 동시에 하난가 다르면 전부가 다르다고 하는 속좁은 마음을 가진 자들의 대표적인 양상이라 할 수 있다. 만일 여로보암이 하나님의 제사장들이나 레위인들을 축출하지 않고 보호해 주었다면 본문과 같은 내용으로 공격을 받지는 않았을 것이다.
(3) 신앙의 담대함은 오직 경건한 생활에서만 비롯된다는 것이다. 만일 남유다가 북이스라엘과 동일한 우상 숭배에 빠져 있었고 규례대로 여호와께 예배를 드리지 않았다면 본문과 같은 주장은 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따라서 경건의 비밀을 가진 자만이 담대하게 다른 사람들을 책망하거나 교훈하는 자리에 설 수 있는 것이다(딤전 3:1-5).
* 인간의 우상화 경향성(傾向性). 본문을 보면 여로보암이 어떻게 여호와 신앙을 변질시켜 북이스라엘의 백성들을 금송아지 우상 숭배에 빠지게 하였는지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왕상 12:28에 따르면 여로보암은 금송아지를 단지 예루살렘 성전의 대체물로 세운 것이지 금송아지 자체를 우상화하기 위하여 세운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본문의 아비야의 주장에 따르면 그는 명백히 금송아지를 가지고 우상 숭배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다음과 같은 인간의 우상화 경향성 때문인 것으로 판단되는데, 이는 참으로 인간의 본질적인 죄성의 발로이다. 그러기에 본 소고에서는 인간이 갖는 우상화의 경향성에 대해 간단히 고찰하고자 한다.
(1) 인간은 자신을 위하여 신을 세우능 경향성이 있다. 출 20:4에는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나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며 라고 명시되어 있다. 이 율법은 자신을 위하여 신을 세우는 경향성을 지닌 인간에 대한 경게의 말씀이다. 그런데 여로보암은 북이스라엘 백성들이 남쪽에 있는 예루살렘 성전으로 돌아가는 것을 막으려는 정치적인 동기 때문에 우상을 만들어 그것으로 백성들을 기만했다(왕상 12:27). 그리고 제사장을 세우는 방식에 있어서나 예배를 드리는 방식에 있어서 완전히 율법의 규례를 무시하고 자기 방법대로 행했다(9절). 이와같이 여호와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위해서 만든 모든 것은 아무리 여호와 숭배를 가장한다 할지라도 우상 숭배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2) 인간은 우상을 통하여 자기 이미지를 강화하려는 경향성을 지니고 있다. 사실 인간들은 하늘이나 땅, 또는 물 속에 있는 것들의 형상으로 우상을 삼을 때 자기 이미지 강화에 필요한 것 만을 우상으로 삼는 경우가 많다. 송아지는 당시 농경 생활로 정착해 있던 가나안 족속 및 이방 사람들에게 풍요와 다산(多産)의 상징물이었다. 따라서 가나안에 정착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금송아지가 풍요와 다산을 상징한단는 것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여로보암은 자신이 유다 왕국보다 더욱 풍요로운 삶을 백성들에게 보장할 수 있다는 이미지를 강화시키기 위해 이 금송아지를 내세웠다. 오늘날의 정치인들이 정치 도구로 이용하고 있는 이데올로기도 이런 류의 우상 숭배라고 할 수 있다.
(3) 인간은 우상을 통하여 자기를 변명하려는 경향성을 지니고 있다. 왜냐하면 우상은 주로 촉북을 주는 신으로 보다는 저주를 막아 주는 신으로 세워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배자들이 우상을 세워 백성들을 통치할 때 번영이 오면 자신의 능력에 따른 것으로 돌리고, 재난이 오면 자신의 실수는 감추고 신을 제대로 섬기지 못한 백성들의 탓으로 돌려 더욱 우상 숭배를 강화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대체적으로 살펴본 바와 같이 인간은 스스로 우상을 만들어 자기의 이기적인 욕구를 채우고, 자기 이미지를 강화시키며, 변명의 도구로 삼는 경향성을 지니고 있다. 이러한 인간의 타락된 경향성은 자기가 섬기는 우상이 무용 지물(無用之物)인 것을 알고 하나님으 심판을 받기 전까지는 없어지지 아니하나. 그러나 여호와를 아는 자는 자기 욕심보다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자기 이미지 강화보다는 자아의 죽음을 통해서, 자기 변명보다는 철저한 회개의 삶으로 여호와께 무릎을 꿇는다. 그러므로 바울의 경고처럼 가장 진실된 것, 즉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 (롬 1:23)으로 바꾸어서는 안 될 것이다.
2. 유다의 승전(勝戰)과 아비야의 사적(13:13-22)
북이스라엘 여로보암과의 전쟁에서 승리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언급한 전단락(4-12절)에 이어지는 본문은 전쟁의 경과(13-17절)와 승리으 직접적 원인(18, 19절), 그리고 승리의 결과(20-22절) 등을 그리고 있다. 즉, 본문은 유다가 하나님의 도우심을 힘입어 승리하는 대목을 그린 전반부(13-19절)와 그 전쟁의 결과로 주어진 유다의 강성과 북왕국으 쇠퇴를 기술한 중반부(20, 21절), 그리고 아비야에 대한 기록 사실을 언급한 후반부(22절)로 구성되어 있다.
이러한 내용은 담은 본문 또한 저자의 신학적 의도, 즉 유다 왕국 전체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를 위해 사건의 해설을 달리한다. 다시 말해서 열왕기 저자는 남유다가 강성케 되고 견고케 된 이유를 다윗 왕이 여호와 앞에서 정직히 행한 결과라고 언급(왕사 15:4, 5)한 반면 본서 저자는 유다가 튼튼하게 된 것은 저희가 열조리 하나님 여호와를 의지 (18절)한 때문이라고 밝히고 있다. 그리고 이와 더불어 본서는 아비야에 대한 긍정적 평가를 위해 열왕기 저자가 언급한 그의 범죄 사실에 대한 평가(왕상 15:3)는 생략한 채, 전쟁에서 승리한 결과로 주어진 영토 확장 사실(19절)을 언급하나. 또한 세력이 점차 강해짐에 따라 점점 타락의 길로 들어선 아비야의 모습(21절)을 간략히 언급함으로써 본서 저자는 집필 의도를 본문 속에서도 유감없이 나타내는 것이다.
이와 같은 본문에는 유다 왕국을 위해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전쟁 승리 기사 내면세 암시되어 있는데, 이는 곧 전쟁을 주재(主宰)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말해 주고 있는 것이다. 사실 남유다는 군사의 수에 있어서(북이스라엘:80만, 남유다:40만) 열세(3절)를 면치 못했고, 전술상으로도 적군에게 전후방(前後方)이 포위되는 불리한 상황에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다는 적군 50만을 섬멸하고(17절) 많은 성읍을 탈취했을 뿐만 아니라(19절) 여로보암을 재기 불능의 상태에 빠뜨리는(20절) 승리를 거두었다. 이 같은 승리의 원인은 유다 백성들이 철저하게 하나님을 의지했기 때문이었다(18절). 이로써 유다인들은 전쟁의 승리가 오직 여호와께 있다는 전통적인 신앙(출 17:11;삼상 17:50)을 재인식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내용의 본문을 통하여 우리는 다음과 같은 교훈을 발견하게 된다. (1) 전쟁의 승패는 군대의 다수나 전술상의 우위에 따른 것이 아니라 오직 여호와의 주권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비단 본문에 언급된 사실 뿐만 아니라 이와 비슷하게 승리한 역사적인 실게가 성경에는 많이 기록되어 있는데 기드온의 삼백 용사가 메뚜기의 중다(衆多)함 같은 미디안 군대를 격파한 사실(삿 7장) 등을 들 수 있다. 이와같이 성도들은 모든 싸움에 있어 그 주권이 오직 여호와께 있음을 믿어 확고한 신앙으로 무장하고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어 승리해야 할 것이다(엡 6:13).
(2) 악인은 자신의 죄를 지적당했을 때 더욱 악하여지고 야비해진다는 사실이다. 아비야가 장구한 연설을 하는 동안에 여로보암은 한 마디의 대꾸도 하지 못했다. 오히려 그마음이 극도로 분노하였다. 왜냐하면 자신의 죄가 자기 부하들 앞에 낱낱이 공개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아비야를 단번에 쳐부술 기세로 포위 공격하였으나 여호와가 보호하시는 군대를 이길 수는 없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악인들이 분노하는 것을 두려워하여 악인의 죄를 눈감아 주어서는 알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 분노는 악인으 최후 발악일 뿐이며 결국에는 여호와께서 승리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실로, 여호와의 치심을 입어 여로보암이 죽은 것을 보아 이 사실을 충분히 알 수 있다.
(3) 성도돌은 환난이나 핍박이 긴박하게 다가왔을 때 도리어 큰 은혜를 받게 된다는 것이다. 본문 15절을 보면 갑작스런 여로보암의 공격이 유다 사람들을 혼한시키기보다는 오히려 그들로 하여금 간절히 부르짖도록 만들었고 이에 하나님으 크신 역사가 있었던 것이다. 이와같이 성도돌은 진퇴 양난(進退兩難)의 의 위기에 처했을 때 절망하지 안호 여호와의 도움을 구하여야 속히 전화 위복(轉禍爲福)의 기쁨을 맞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는 언제나 하나님 앞에서 정직한 마음을 잃지 않도록 주의해야 할 것이다.
(4) 성도들이 합심하여 단결할 때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있다는 것이다. 유다가 여로보암의 공격을 받을 쌔 제사장의 나팔 소리와 동시에 합심하여 함성을 질렀다. 이것은 유다의 모든 백성들이 국난을 극복하기 위해 한마음 한듯으로 뭉쳐있었음을 나타낸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은 합심하여 모인 성도들을 통하여 역사하신다. 예수께서는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마 18:20)고 말씀하셨는데 여기서 두 세 사람 은 공동체의 최소 단위로서 가장 마음을 일치하기가 쉽다는 것을 나타낸 것이다. 따라서 두 세 사람이 주의 이름으로 모인 것과 같이 모든 교회가 합심할 때 하나님아으 역사하심은 크게 일어나는 것이다.
* 나팔(Trumpet)에 관하여. 성경에서 언급되고 있는 나팔은 크게 두 종류로 나눌수 있는데, 첫째는 양의 뿔로 만든 양각 나팔이며, 둘째는 은으로 만든 은나팔이다. 그래서 본 소고에서는 나팔의 상징과 사용 용례에 관해 일반적인 것을 고찰해 보고자 한다.
첫째, 양각 나팔은 주로 악기로 많이 사용되었는데, 종교적인 축제일이나 예배에서 여호와를 찬양할 때 쓰였다. 그리고 왕의 즉위식과 같은 국가적인 축일에도 양각 나팔을 많이 사용하였다(29:26-28;수 6:4;왕상 1:34, 39;대상 16:6, 42). 이 뿐만 아니라 여호수아의 여리고 성 함락 시에도 양각 나팔이 사용되었는데(수 6:4), 이는 가나안 입성의 첫 관문인 여리고 성 통과가 마치 예수 그리스도의 예루살렘 입성과 같은 축제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둘째, 은 나팔은 회중을 소집하거나 위기 상황을 알릴 때, 그리고 전쟁 시 행군을 통제할 때 신호용으로 사용되었다(민 10:2, 5, 6;겔 33:3-6). 여기서 말하는 은 나팔은 불순물이 전혀 업슨 100% 순은(純銀)으로 만들어진 나팔을 가리키는 것인데, 이것은 오직 제사장만이 불도록 되어 있었다. 이와같이 은나팔의 완전 무결함은 여호와의 구속 사업이 완전 무결하게 이루어질 것을 상징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나팔을 제사장이 불도록 한 것은 제사장은 하나님께 속한 사람이며 하나님의 임재를 알리는 파수꾼과 같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본문 12절은 이를 경고의 나팔 이라 했고, 14절은 함성 소리와 함께 나팔이 불릴 때 하나님으 역사하심이 나타나 여로보암과 북이스라엘이 패하여 도망하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이와 동일하게 여호수아 여리고 성을 함락시킬 때도 나팔 소리와 함께 여리고 성이 무너지는 기적이 나타났는데(수 6:5, 20), 이로 볼 때 나팔은 하나님의 재림과 심판을 상징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한편, 신약 성경에서 나팔은 주로 그리스도의 재림과 관련되어 나타나며(마 24:31;고전 15:51, 52;살전 4:16) 계시록에서 예언된 여러 사건들과 연관해서 나타난다(계 8:2, 6-13;9:13, 14;10:7;11:15). 그리고 이와 더불어 사도 바울은, 만일 나팔이 분명치 못한 소리를 내면 누가 전쟁을 예비하리요 (고전 14:8)라고 말함으로써 나팔의 그 용도에 관해 언급하고 있다. 이는 그리스도의 말씀위에 서서 세상의 죄악을 경고하여 주는 파수꾼의 임무를 말하는 것으로 성도들은 이와같이 죄를 경고하는 일에 게을리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리고 지금도 완전 무결한 구속을 예비해 놓으신 그리스도께서 승리의 나팔을 들고 계시기 때문에 우리는 사단과의 전쟁에서 패배할 것에 대한 두려움을 모두 버려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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