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1 본장은 다윗 왕이 4천명의 레위인 찬양 대원(23:5)을 제사장들과 레위인의 반차에 맞추어 24반차로 편성하는 장면이다. 이 찬양 대원들은 대개 아삽, 헤만, 여두둔의 자손들이라는 특징을 지닌다.
다윗이 군대 장관들로 더불어. 혹자는 여기서 ‘군대 장관’이 ‘예배 담당자’를 가리킨다고 주장한다(Myers).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옳지 않다. 왜냐하면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사레 핫차바’는 대부분의 경우 ‘군대의 지휘자’를 의미하고 있기 때문이다(출 12:17, 41). 물론 ‘사르’는 ‘다스리는 자’를, ‘차바’는 ‘봉사’(민 8:25), ‘군대’, ‘용사’(신 20:9, 삼하 3:23)를 의미하므로 ‘사레 핫차바’를 ‘봉사의 두목들’로 해석하는 것은 가능하다. 그럴 경우 이들은 다윗의 통치에 조력(助力)한 각 지파의 우두머리들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이들은 23:2에선 ‘이스라엘 모든 방백’으로 24:6에선 그냥 ‘방백’으로 불리웠다. 그렇지만 ‘사레핫차바’를 ‘예배 담당자’로 해석할 수는 없다(Keil, Payne). 아무튼 다윗이 종교적인 문제에 있어서도 이처럼 자기 독단으로 행하지 아니하고 신하들과 의논한 것은 참으로 그가 범사에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려 한 선왕(善王)이었음을 증거해 준다.
아삽과 헤만과 여두둔의 자손 중에서 구별하여 섬기게 하되. 아삽과 헤만과 여두둔은 성가대의 우두머리로서 각기 게르손, 그핫, 므라리 가문에 속한 자들이었다. 이들의 족보에 대해서는 6:33-47에 상세히 소개되어 있으니 그곳 주석을 참조하라. 한편 다윗 왕은 이전에 여호와의 언약궤를 다윗 성에 모셔온 직후 이들에게 찬양대를 맡기어 하나님을 찬양하게 하였다. 그 중에 아삽의 찬양대는 예루살렘, 여호와의 언약궤 앞에서 봉사하였고(16:4, 5) 헤만과 여두둔의 찬양대는 기브온 산당에서 봉사하였다(16:39-42).
수금과 비파와 제금. 역대기에서 이 세 악기는 종종 함께 언급되고 있다(13:8, 16:5, 대하 5:12, 29:25). 여기서 수금은 모든 악기 중 가장 고귀한 악기로 간주된 현악기로서 손가락이나 채로 연주되었다. 그리고 비파는 현이 12개인 현악기이며 제금은 박자를 맞추는 데 사용된 일종의 심벌즈와 같은 타악기이다. 이 악기들은 역대기에서 모두 하나님을 찬양하는 데 사용되어졌다. 이에 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15:16 주석을 참조하라.
신령한 노래를 하게 하였으니. 여기서 ‘신령한 노래’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하니베임’은 ‘예언하다’, ‘대변하다’는 뜻의 동사 ‘나바’에서 파생한 용어이다. 본래 ‘나바’라는 동사의 의미는 ‘부글부글 넘치다’, ‘끓어 오르다’라는 뜻으로 선지자나 시인, 또는 악사가 하나님의 영감을 받아 감동된 말씀을 쏟아내는 것을 나타내는 말이다. 따라서 본 절에서 성가 대원들이 신령한 노래를 하였다함은 그들이 마음 속으로 하나님의 크신 감동을 받아 감동된 노래, 감동된 시구(詩句)를 쏟아내었음을 의미한다.
그 직분대로 일하는 자의 수효가 이러하니라. 여기서 말하는 수효는 7절의 이백팔십 팔인을 가리키는 것이기 보다는 아삽의 네아들(2절), 여두둔의 여섯 아들(3절),그리고 헤만의 열 네 아들(5절), 곧 24반차의 우두머리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추정된다(Curtis). 왜냐하면 나머지 찬양 대원들은 모두 이들의 수하에 소속되어 직임을 감당하였기 때문이다. 7절 주석 참조.
25:2 삭굴. 느 12:35에는 포로 귀환 이후의 그의 후손들이 언급되어 있다. 그들은 성전에서 나팔부는 직무를 맡았던 것으로 나와 있다.
아사렐라. 14절에 나오는 여사렐라(Jesharelah)와 동일 인물이다. 참고로 아사렐라(Asharelah)는 ‘하나님께 정직한’이란 뜻이며 ‘여사렐라’는 ‘하나님께서 채우셨다’란 뜻이다.
아삽의 수하에 속하여 … 신령한 노래를 하며. 신령한 노래를 하였다는 말의 의미에 대해서는 1절 주석을 참조하라. 아삽의 찬양대는 하나님의 영감을 받아 찬송하였는데 시편에 기록된 아삽의 찬송만도 12편에 달하고 있다(시 50, 73-83편). 한편, 본 장에는 여두둔의 아들들과 헤만의 아들들의 명수가 각기 정확하게 언급되어 있다(3, 5절). 이에 반해 본 절에서 아삽의 아들들의 수가 분명하게 언급되지 않은 점은 특이하다.
25:3 스리. 11절에 나오는 이스리(Izri)와 동일 인물이다. 원래는 이름의 첫머리에 ‘요드’가 있었지만 필사시에 탈락된 듯하다.
여섯 사람이니. 본 절에는 여두둔의 아들이 여섯이라고 기록되었으나 실상은 5명의 이름밖에 나오지 않았다. 이는 한 명의 이름이 누락되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누락된한 명의 이름을 17절에서 발견할 수 있는데 그 이름은 시므이(Shimei)이다. 이와 관련 70인역(LXX)에서는 17절을 근거로 하여 본 절에다 시므이라는 이름을 첨가해서 기록해놓고 있다.
여두둔의 수하에 속하여 수금을 잡아. 이는 곧, 여두둔의 지도하에 수금으로 찬양했다는 말이다. 한편 여두둔(Jeduthun)은 일명 에단(Ethan)으로도 불리웠는데(6:44)’에단’이 본 이름이며 ‘여두둔’은 별명인 것 같다. 6:44 주석 참조. 그런데 이 에단은 유다 지파 세라의 후손으로서 시 89편의 저자인 것으로 추정되는 에단과는 구별되어야할 것 같다.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2:6 주석을 참조하라.
신령한 노래를 하며. 여두둔의 찬양대가 찬양한 노래는 성경에서 시 39편, 62편, 77편을 들 수 있다.
25:4 웃시엘. 18절에 나오는 아사렐(Azareel)과 동일 인물이다. 참고로 ‘아사렐’은 ‘하나님께서 도우심’이란 뜻이며 웃시엘(Uzziel)은 ‘하나님은 나의 힘이시다’란 뜻이다.
스브엘. 그는 20절에서 수바엘(Shubael)로도 언급되고 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아므람의 후손, 게르솜의 아들인 스브엘(일명 수바엘, 23:16, 24:20)과는 분명히 구별된다.
하나냐 … 마하시옷이라. 본 절에서 흥미로운 것은 헤만의 여섯째 아들인 하나냐로부터 시작하여 마지막 열넷째 아들까지 그 이름을 나열시켜 볼 때 그 이름들이 지니고 있는 의미로 인하여 다음과 같은 멋진 시가 이루어진다는 사실이다. 이제 이들 아홉명의 아들들이 가진 이름의 뜻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The Expositor’s BibleCommentary).
1. 여섯째 - 하나냐(여호와여, 은혜로우소서)2. 일곱째 - 하나니(나에게 은혜로우소서)3. 여덟째 - 엘리아다(오 나의 하나님이여)4. 아홉째 - 깃달디(내가 찬양하나이다)5. 열째 - 로암디에셀(그리고 도우심을 찬양하나이다)6. 열한째 - 요스브가사(비록 외로운 처지에 있을 지라도)7. 열두째 - 말로디(나는 선포하나이다)8. 열셋째 - 호딜(가장 높은)9. 열넷째 - 마하시옷(환상들을)
25:5 헤만 … 나팔을 부는 자며. 여기서 ‘나팔을 부는 자’는 히브리어 원문상으로 볼 때 헤만의 아들들에게 적용되는 말이 아니라 헤만에게 적용되는 말이다. 그런데 ‘나팔을부는 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하림 케렌’은 다음과 같이 두 가지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즉, 혹자는 이 말을 ‘나팔을 들어올리다’(To lift up thehorn)는 뜻으로 해석하는 데 반해(Bertheau, Barnes) 다른 이들은 ‘권세를 높이다’는 뜻으로 해석한다(Keil, Kittel, Benzinger). 하지만 이상의 두 견해 중 후자의 해석을 취함이 옳다. 왜냐하면 ‘케렌’이란 용어는 성경 전체에서 살펴볼 때 권세를 상징하는 뿔을 의미하기 때문이다(창 22:23, 출 27:2, 욥 16:15, 시 18:2, 22:21, 89:17, 렘17:1, 애 2:3, 17, 슥 1:18, 19, 21 등). 그리고 ‘케렌’이 ‘높이다’는 뜻의 ‘하림’과 결합되어 사용되었을 때 그 의미는 ‘어떤 자의 권세를 높이다’는 뜻이 되기 때문이다(삼상 2:10, 시 89:18, 92:10, 148:14, 애 2:17). 따라서 본 절의 ‘나팔을 부는 자’란 오역이며 이에 해당하는 올바른 해석은 ‘뿔을 높이신 자’이다. 더욱이 이처럼 하나님께서 헤만의 뿔을 높이셨다는 사실은 본 절에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하나님께서 그에게 중다(衆多)한 아들들을 허락해 주셨다는 사실이다. 이로써 헤만의 가문은 악사들의 반차 중 가장 많은 비율을 차지하게 된 것이다. 한편 이 헤만과 시 88편의 저자인 ‘에스라인 헤만’은 서로 다른 사람인 것 같다. 왜냐하면 왕상 4:31을 참조해 볼 때 ‘에스라인 헤만’은 2:6에 나오는 유다 지파 세라의 후손 헤만과 거의 동일시되기 때문이다.이에 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2:6 주석을 참조하라.
하나님의 말씀을 받드는 왕의 선견자라. ‘선견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호제’는 ‘환상을 본 자’란 의미이다. 삼상 9:9 주석 참조. 그런데 여기서 ‘왕의 선견자’라 함은 하나님과 왕 사이에서 하나님의 뜻을 왕에게 전달해 주는 자를 가리킨다. 한편 다른 곳에서는 아삽(대하 29:30)과 여두둔(대하 35:15)도 선견자로 소개되었다. 그러나 이들은 악사들이었으므로 선견자 갓이나 나단 선지자와 같이 중요한 시기때마다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는 전문 선견자는 아니었다. 따라서 이들은 하나님의 영에 감동된 찬송시를 통해 왕에게 하나님의 뜻을 전달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25:6 이들이 다 그 아비의 수하에 속하여. 여기서 ‘이들’이란 헤만의 아들들(4, 5절)만 가리키는 말이 아니고 2-5절에 소개된 아삽과 여두둔과 헤만의 아들들 모두를 가리키는 말로 이해하여야 한다(Lange). 왜냐하면 이어지는 구절에서 아삽과 여두둔과 헤만이 함께 소개되고 있기 때문이다.
아삽과 여두둔과 헤만은 왕의 수하에 속하였으니. 이들 세 악사들은 다윗으로부터 성가대 대장이라는 공식 직함을 받고서는 철저하게 다윗 왕의 지시 하에 활동하였다(6:31-33, 39, 44). 그러나 이는 질서를 세워 효율적으로 성가대가 운영되게 하는데 근본 목적이 있었지 다윗이 성가대를 통제하려는 데 목적이 있었던 것은 아니니 오해가 없어야 할 것이다. 6:32 주석 참조.
25:7 저희와 모든 형제 … 의 수효가 이백 팔십 팔 인이라. 288이라는 숫자는 24반차에 12를 곱한 숫자가 된다. 우리는 여기서 아삽과 여두둔과 헤만의 아들들 24명(9-31절)이 각각 11명의 찬양 대원을 거느려 각 반차가 12명으로 구성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Lange, Pulpit Commentary, Curtis). 한편, ‘익숙한 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메빈’은 ‘가르치다’, ‘설명하다’는 뜻인 동사 ‘빈’의 사역형 분사로서 ‘가르치는 자’, 곧 ‘선생’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렇게 볼 때 세 악사의 아들들을 포함한 288명은 여호와를 찬송하기 위해 뽑힌 다른 레위인들을 가르치는 선생들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들을 포함하여 하나님을 찬양하기 위해 다윗이 소집한 레위인의 총수는 모두 4천명이었다(23:5).
25:8 큰 자나 … 제자를 무론하고 일례로 제비뽑아 직임을 얻었으니. 이는 곧 다윗 왕이 소집한 사천 명의 찬양 대원 모두가 예외없이 그리고 아무런 차별없이 찬양대의 24반차에 속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말해 주고 있다. 즉, 찬양 대원들 중에는 남을 가르치는 위치에 있는 자만도 288명이나 되었다(7절). 그러나 그들을 포함한 모든 찬양 대원들은 24반열의 순서를 결정함에 있어서 아무런 차별없이 제비를 뽑아 정하였던 것이다. 이는 하나님 안에서 봉사함에 있어서는 차별이 없는 은혜를 시사해 준다(고전12:4-31).
25:9 요셉. 아삽의 둘째 아들이며 그의 이름은 ‘여호와께서 더하실 것이다’는 뜻이다.
그달리야. 여두둔의 맏아들이며 이름의 뜻은 ‘여호와는 위대하심’이다.
25:10 삭굴. 아삽의 맏아들로서 ‘순결’이라는 뜻이다.
25:11 이스리. 여두둔의 둘째 아들로서 3절에서는 ‘스리’라고 언급되어 있다. 3절 주석 참조. 한편 ‘이스리’란 이름의 뜻은 ‘여호와께서 형성하셨다’이다.
25:12 느다냐. 아삽의 셋째 아들로서 ‘여호와께서 주시다’는 뜻이다.
25:13 북기야. 헤만의 맏아들로서 ‘여호와의 그릇’이라는 뜻이다.
25:14 여사렐라. 아삽의 막내 아들인데 2절에서는 일명 ‘아사렐라’로 기록되어 있다. 한편 ‘여사렐라’라는 이름은 ‘하나님께서 채우셨다’는 뜻이다.
25:15 여사야. 여두둔의 셋째 아들로서 ‘여호와께서 구원하심’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그는 엘리에셀의 후손 여사야(26:25)와는 구별된다.
25:16 맛다냐. 헤만의 둘째 아들이다. 이름의 뜻은 ‘여호와의 선물’이다. 한편 바벨론 포로에서 귀환한 성가 대원 중에서도 맛다냐란 이름을 찾아볼 수 있다(느 11:17).
25:17 시므이. 여두둔의 막내 아들로서 ‘들어주심’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3절에서는 그 이름이 생략되어 있다.
25:18 아사렐. 헤만의 셋째 아들로서 ‘하나님께서 도우심’이라는 뜻이다. 그는 4절에서 일명 ‘웃시엘’로 불리우고 있다.
25:19 하사뱌. 여두둔의 넷째 아들이며 그 이름은 ‘여호와께서 생각하셨다’라는 뜻이다.
25:20 수바엘. 헤만의 넷째 아들로서 4절에서는 일명 ‘스브엘’로 기록되어 있다. ‘수바벨’이란 이름은 ‘오 하나님 돌아오소서’라는 뜻이다.
25:21 맛디디야. 여두둔의 다섯째 아들로서 ‘선물’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이와 동일한 이름을 바벨론 포로 귀환민 중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스 10:43).
25:22 여레못. 헤만의 다섯째 아들로서 ‘높은 곳들’이라는 뜻이다.
25:23 하나냐. 헤만의 여섯째 아들로서 ‘여호와여 은혜로우소서’라는 뜻이다. 한편 우리는 이 이름과 관련,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다니엘의 세 친구 중 한 명인 하나냐(단1:6, 7)를 기억할 수 있다.
25:24 요스브가사. 헤만의 열한 번째 아들이다. 이름의 뜻이 비교적 긴데 곧 ‘하나님께서 외로운 처지에 있게 하심’이다.
25:25 하나니. 헤만의 일곱째 아들로서 ‘은혜로우심’이란 뜻이다. 한편 바벨론 포로 귀환민들이 예루살렘 성곽 재건을 마친 후 봉헌식을 할 때 나팔를 잡은 레위인 중 한 명의 이름 또한 하나니였다(느 12:36).
25:26 말로디. 헤만의 열둘째 아들로서 그 이름은 ‘내가 선포하나이다’는 뜻이다.
25:27 엘리아다. 헤만의 여덟째 아들로서 그 이름은 ‘하나님은 아신다’는 뜻이다. 한편 ‘엘리아다’의 축약형은 ‘엘랴다’인데 다윗의 아들 중 한 명이 이 같은 이름을 지니고 있었다(삼하 5:16).
25:28 호딜. 헤만의 열셋째 아들로서 ‘풍부함’이란 뜻이다.
25:29 깃달디. 헤만의 아홉째 아들로서 ‘내가 찬양하나이다’라는 뜻이다.
25:30 마하시옷. 헤만의 열넷째 아들이며 그 이름은 ‘환상들’이라는 뜻이다.
25:31 로암디에셀. 헤만의 열째 아들로서 ‘내가 도우심을 찬양하나이다’라는 뜻이다.
다윗이 군대 장관들로 더불어. 혹자는 여기서 ‘군대 장관’이 ‘예배 담당자’를 가리킨다고 주장한다(Myers).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옳지 않다. 왜냐하면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사레 핫차바’는 대부분의 경우 ‘군대의 지휘자’를 의미하고 있기 때문이다(출 12:17, 41). 물론 ‘사르’는 ‘다스리는 자’를, ‘차바’는 ‘봉사’(민 8:25), ‘군대’, ‘용사’(신 20:9, 삼하 3:23)를 의미하므로 ‘사레 핫차바’를 ‘봉사의 두목들’로 해석하는 것은 가능하다. 그럴 경우 이들은 다윗의 통치에 조력(助力)한 각 지파의 우두머리들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이들은 23:2에선 ‘이스라엘 모든 방백’으로 24:6에선 그냥 ‘방백’으로 불리웠다. 그렇지만 ‘사레핫차바’를 ‘예배 담당자’로 해석할 수는 없다(Keil, Payne). 아무튼 다윗이 종교적인 문제에 있어서도 이처럼 자기 독단으로 행하지 아니하고 신하들과 의논한 것은 참으로 그가 범사에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려 한 선왕(善王)이었음을 증거해 준다.
아삽과 헤만과 여두둔의 자손 중에서 구별하여 섬기게 하되. 아삽과 헤만과 여두둔은 성가대의 우두머리로서 각기 게르손, 그핫, 므라리 가문에 속한 자들이었다. 이들의 족보에 대해서는 6:33-47에 상세히 소개되어 있으니 그곳 주석을 참조하라. 한편 다윗 왕은 이전에 여호와의 언약궤를 다윗 성에 모셔온 직후 이들에게 찬양대를 맡기어 하나님을 찬양하게 하였다. 그 중에 아삽의 찬양대는 예루살렘, 여호와의 언약궤 앞에서 봉사하였고(16:4, 5) 헤만과 여두둔의 찬양대는 기브온 산당에서 봉사하였다(16:39-42).
수금과 비파와 제금. 역대기에서 이 세 악기는 종종 함께 언급되고 있다(13:8, 16:5, 대하 5:12, 29:25). 여기서 수금은 모든 악기 중 가장 고귀한 악기로 간주된 현악기로서 손가락이나 채로 연주되었다. 그리고 비파는 현이 12개인 현악기이며 제금은 박자를 맞추는 데 사용된 일종의 심벌즈와 같은 타악기이다. 이 악기들은 역대기에서 모두 하나님을 찬양하는 데 사용되어졌다. 이에 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15:16 주석을 참조하라.
신령한 노래를 하게 하였으니. 여기서 ‘신령한 노래’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하니베임’은 ‘예언하다’, ‘대변하다’는 뜻의 동사 ‘나바’에서 파생한 용어이다. 본래 ‘나바’라는 동사의 의미는 ‘부글부글 넘치다’, ‘끓어 오르다’라는 뜻으로 선지자나 시인, 또는 악사가 하나님의 영감을 받아 감동된 말씀을 쏟아내는 것을 나타내는 말이다. 따라서 본 절에서 성가 대원들이 신령한 노래를 하였다함은 그들이 마음 속으로 하나님의 크신 감동을 받아 감동된 노래, 감동된 시구(詩句)를 쏟아내었음을 의미한다.
그 직분대로 일하는 자의 수효가 이러하니라. 여기서 말하는 수효는 7절의 이백팔십 팔인을 가리키는 것이기 보다는 아삽의 네아들(2절), 여두둔의 여섯 아들(3절),그리고 헤만의 열 네 아들(5절), 곧 24반차의 우두머리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추정된다(Curtis). 왜냐하면 나머지 찬양 대원들은 모두 이들의 수하에 소속되어 직임을 감당하였기 때문이다. 7절 주석 참조.
25:2 삭굴. 느 12:35에는 포로 귀환 이후의 그의 후손들이 언급되어 있다. 그들은 성전에서 나팔부는 직무를 맡았던 것으로 나와 있다.
아사렐라. 14절에 나오는 여사렐라(Jesharelah)와 동일 인물이다. 참고로 아사렐라(Asharelah)는 ‘하나님께 정직한’이란 뜻이며 ‘여사렐라’는 ‘하나님께서 채우셨다’란 뜻이다.
아삽의 수하에 속하여 … 신령한 노래를 하며. 신령한 노래를 하였다는 말의 의미에 대해서는 1절 주석을 참조하라. 아삽의 찬양대는 하나님의 영감을 받아 찬송하였는데 시편에 기록된 아삽의 찬송만도 12편에 달하고 있다(시 50, 73-83편). 한편, 본 장에는 여두둔의 아들들과 헤만의 아들들의 명수가 각기 정확하게 언급되어 있다(3, 5절). 이에 반해 본 절에서 아삽의 아들들의 수가 분명하게 언급되지 않은 점은 특이하다.
25:3 스리. 11절에 나오는 이스리(Izri)와 동일 인물이다. 원래는 이름의 첫머리에 ‘요드’가 있었지만 필사시에 탈락된 듯하다.
여섯 사람이니. 본 절에는 여두둔의 아들이 여섯이라고 기록되었으나 실상은 5명의 이름밖에 나오지 않았다. 이는 한 명의 이름이 누락되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누락된한 명의 이름을 17절에서 발견할 수 있는데 그 이름은 시므이(Shimei)이다. 이와 관련 70인역(LXX)에서는 17절을 근거로 하여 본 절에다 시므이라는 이름을 첨가해서 기록해놓고 있다.
여두둔의 수하에 속하여 수금을 잡아. 이는 곧, 여두둔의 지도하에 수금으로 찬양했다는 말이다. 한편 여두둔(Jeduthun)은 일명 에단(Ethan)으로도 불리웠는데(6:44)’에단’이 본 이름이며 ‘여두둔’은 별명인 것 같다. 6:44 주석 참조. 그런데 이 에단은 유다 지파 세라의 후손으로서 시 89편의 저자인 것으로 추정되는 에단과는 구별되어야할 것 같다.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2:6 주석을 참조하라.
신령한 노래를 하며. 여두둔의 찬양대가 찬양한 노래는 성경에서 시 39편, 62편, 77편을 들 수 있다.
25:4 웃시엘. 18절에 나오는 아사렐(Azareel)과 동일 인물이다. 참고로 ‘아사렐’은 ‘하나님께서 도우심’이란 뜻이며 웃시엘(Uzziel)은 ‘하나님은 나의 힘이시다’란 뜻이다.
스브엘. 그는 20절에서 수바엘(Shubael)로도 언급되고 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아므람의 후손, 게르솜의 아들인 스브엘(일명 수바엘, 23:16, 24:20)과는 분명히 구별된다.
하나냐 … 마하시옷이라. 본 절에서 흥미로운 것은 헤만의 여섯째 아들인 하나냐로부터 시작하여 마지막 열넷째 아들까지 그 이름을 나열시켜 볼 때 그 이름들이 지니고 있는 의미로 인하여 다음과 같은 멋진 시가 이루어진다는 사실이다. 이제 이들 아홉명의 아들들이 가진 이름의 뜻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The Expositor’s BibleCommentary).
1. 여섯째 - 하나냐(여호와여, 은혜로우소서)2. 일곱째 - 하나니(나에게 은혜로우소서)3. 여덟째 - 엘리아다(오 나의 하나님이여)4. 아홉째 - 깃달디(내가 찬양하나이다)5. 열째 - 로암디에셀(그리고 도우심을 찬양하나이다)6. 열한째 - 요스브가사(비록 외로운 처지에 있을 지라도)7. 열두째 - 말로디(나는 선포하나이다)8. 열셋째 - 호딜(가장 높은)9. 열넷째 - 마하시옷(환상들을)
25:5 헤만 … 나팔을 부는 자며. 여기서 ‘나팔을 부는 자’는 히브리어 원문상으로 볼 때 헤만의 아들들에게 적용되는 말이 아니라 헤만에게 적용되는 말이다. 그런데 ‘나팔을부는 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하림 케렌’은 다음과 같이 두 가지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즉, 혹자는 이 말을 ‘나팔을 들어올리다’(To lift up thehorn)는 뜻으로 해석하는 데 반해(Bertheau, Barnes) 다른 이들은 ‘권세를 높이다’는 뜻으로 해석한다(Keil, Kittel, Benzinger). 하지만 이상의 두 견해 중 후자의 해석을 취함이 옳다. 왜냐하면 ‘케렌’이란 용어는 성경 전체에서 살펴볼 때 권세를 상징하는 뿔을 의미하기 때문이다(창 22:23, 출 27:2, 욥 16:15, 시 18:2, 22:21, 89:17, 렘17:1, 애 2:3, 17, 슥 1:18, 19, 21 등). 그리고 ‘케렌’이 ‘높이다’는 뜻의 ‘하림’과 결합되어 사용되었을 때 그 의미는 ‘어떤 자의 권세를 높이다’는 뜻이 되기 때문이다(삼상 2:10, 시 89:18, 92:10, 148:14, 애 2:17). 따라서 본 절의 ‘나팔을 부는 자’란 오역이며 이에 해당하는 올바른 해석은 ‘뿔을 높이신 자’이다. 더욱이 이처럼 하나님께서 헤만의 뿔을 높이셨다는 사실은 본 절에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하나님께서 그에게 중다(衆多)한 아들들을 허락해 주셨다는 사실이다. 이로써 헤만의 가문은 악사들의 반차 중 가장 많은 비율을 차지하게 된 것이다. 한편 이 헤만과 시 88편의 저자인 ‘에스라인 헤만’은 서로 다른 사람인 것 같다. 왜냐하면 왕상 4:31을 참조해 볼 때 ‘에스라인 헤만’은 2:6에 나오는 유다 지파 세라의 후손 헤만과 거의 동일시되기 때문이다.이에 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2:6 주석을 참조하라.
하나님의 말씀을 받드는 왕의 선견자라. ‘선견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호제’는 ‘환상을 본 자’란 의미이다. 삼상 9:9 주석 참조. 그런데 여기서 ‘왕의 선견자’라 함은 하나님과 왕 사이에서 하나님의 뜻을 왕에게 전달해 주는 자를 가리킨다. 한편 다른 곳에서는 아삽(대하 29:30)과 여두둔(대하 35:15)도 선견자로 소개되었다. 그러나 이들은 악사들이었으므로 선견자 갓이나 나단 선지자와 같이 중요한 시기때마다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는 전문 선견자는 아니었다. 따라서 이들은 하나님의 영에 감동된 찬송시를 통해 왕에게 하나님의 뜻을 전달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25:6 이들이 다 그 아비의 수하에 속하여. 여기서 ‘이들’이란 헤만의 아들들(4, 5절)만 가리키는 말이 아니고 2-5절에 소개된 아삽과 여두둔과 헤만의 아들들 모두를 가리키는 말로 이해하여야 한다(Lange). 왜냐하면 이어지는 구절에서 아삽과 여두둔과 헤만이 함께 소개되고 있기 때문이다.
아삽과 여두둔과 헤만은 왕의 수하에 속하였으니. 이들 세 악사들은 다윗으로부터 성가대 대장이라는 공식 직함을 받고서는 철저하게 다윗 왕의 지시 하에 활동하였다(6:31-33, 39, 44). 그러나 이는 질서를 세워 효율적으로 성가대가 운영되게 하는데 근본 목적이 있었지 다윗이 성가대를 통제하려는 데 목적이 있었던 것은 아니니 오해가 없어야 할 것이다. 6:32 주석 참조.
25:7 저희와 모든 형제 … 의 수효가 이백 팔십 팔 인이라. 288이라는 숫자는 24반차에 12를 곱한 숫자가 된다. 우리는 여기서 아삽과 여두둔과 헤만의 아들들 24명(9-31절)이 각각 11명의 찬양 대원을 거느려 각 반차가 12명으로 구성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Lange, Pulpit Commentary, Curtis). 한편, ‘익숙한 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메빈’은 ‘가르치다’, ‘설명하다’는 뜻인 동사 ‘빈’의 사역형 분사로서 ‘가르치는 자’, 곧 ‘선생’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렇게 볼 때 세 악사의 아들들을 포함한 288명은 여호와를 찬송하기 위해 뽑힌 다른 레위인들을 가르치는 선생들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들을 포함하여 하나님을 찬양하기 위해 다윗이 소집한 레위인의 총수는 모두 4천명이었다(23:5).
25:8 큰 자나 … 제자를 무론하고 일례로 제비뽑아 직임을 얻었으니. 이는 곧 다윗 왕이 소집한 사천 명의 찬양 대원 모두가 예외없이 그리고 아무런 차별없이 찬양대의 24반차에 속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말해 주고 있다. 즉, 찬양 대원들 중에는 남을 가르치는 위치에 있는 자만도 288명이나 되었다(7절). 그러나 그들을 포함한 모든 찬양 대원들은 24반열의 순서를 결정함에 있어서 아무런 차별없이 제비를 뽑아 정하였던 것이다. 이는 하나님 안에서 봉사함에 있어서는 차별이 없는 은혜를 시사해 준다(고전12:4-31).
25:9 요셉. 아삽의 둘째 아들이며 그의 이름은 ‘여호와께서 더하실 것이다’는 뜻이다.
그달리야. 여두둔의 맏아들이며 이름의 뜻은 ‘여호와는 위대하심’이다.
25:10 삭굴. 아삽의 맏아들로서 ‘순결’이라는 뜻이다.
25:11 이스리. 여두둔의 둘째 아들로서 3절에서는 ‘스리’라고 언급되어 있다. 3절 주석 참조. 한편 ‘이스리’란 이름의 뜻은 ‘여호와께서 형성하셨다’이다.
25:12 느다냐. 아삽의 셋째 아들로서 ‘여호와께서 주시다’는 뜻이다.
25:13 북기야. 헤만의 맏아들로서 ‘여호와의 그릇’이라는 뜻이다.
25:14 여사렐라. 아삽의 막내 아들인데 2절에서는 일명 ‘아사렐라’로 기록되어 있다. 한편 ‘여사렐라’라는 이름은 ‘하나님께서 채우셨다’는 뜻이다.
25:15 여사야. 여두둔의 셋째 아들로서 ‘여호와께서 구원하심’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그는 엘리에셀의 후손 여사야(26:25)와는 구별된다.
25:16 맛다냐. 헤만의 둘째 아들이다. 이름의 뜻은 ‘여호와의 선물’이다. 한편 바벨론 포로에서 귀환한 성가 대원 중에서도 맛다냐란 이름을 찾아볼 수 있다(느 11:17).
25:17 시므이. 여두둔의 막내 아들로서 ‘들어주심’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3절에서는 그 이름이 생략되어 있다.
25:18 아사렐. 헤만의 셋째 아들로서 ‘하나님께서 도우심’이라는 뜻이다. 그는 4절에서 일명 ‘웃시엘’로 불리우고 있다.
25:19 하사뱌. 여두둔의 넷째 아들이며 그 이름은 ‘여호와께서 생각하셨다’라는 뜻이다.
25:20 수바엘. 헤만의 넷째 아들로서 4절에서는 일명 ‘스브엘’로 기록되어 있다. ‘수바벨’이란 이름은 ‘오 하나님 돌아오소서’라는 뜻이다.
25:21 맛디디야. 여두둔의 다섯째 아들로서 ‘선물’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이와 동일한 이름을 바벨론 포로 귀환민 중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스 10:43).
25:22 여레못. 헤만의 다섯째 아들로서 ‘높은 곳들’이라는 뜻이다.
25:23 하나냐. 헤만의 여섯째 아들로서 ‘여호와여 은혜로우소서’라는 뜻이다. 한편 우리는 이 이름과 관련,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다니엘의 세 친구 중 한 명인 하나냐(단1:6, 7)를 기억할 수 있다.
25:24 요스브가사. 헤만의 열한 번째 아들이다. 이름의 뜻이 비교적 긴데 곧 ‘하나님께서 외로운 처지에 있게 하심’이다.
25:25 하나니. 헤만의 일곱째 아들로서 ‘은혜로우심’이란 뜻이다. 한편 바벨론 포로 귀환민들이 예루살렘 성곽 재건을 마친 후 봉헌식을 할 때 나팔를 잡은 레위인 중 한 명의 이름 또한 하나니였다(느 12:36).
25:26 말로디. 헤만의 열둘째 아들로서 그 이름은 ‘내가 선포하나이다’는 뜻이다.
25:27 엘리아다. 헤만의 여덟째 아들로서 그 이름은 ‘하나님은 아신다’는 뜻이다. 한편 ‘엘리아다’의 축약형은 ‘엘랴다’인데 다윗의 아들 중 한 명이 이 같은 이름을 지니고 있었다(삼하 5:16).
25:28 호딜. 헤만의 열셋째 아들로서 ‘풍부함’이란 뜻이다.
25:29 깃달디. 헤만의 아홉째 아들로서 ‘내가 찬양하나이다’라는 뜻이다.
25:30 마하시옷. 헤만의 열넷째 아들이며 그 이름은 ‘환상들’이라는 뜻이다.
25:31 로암디에셀. 헤만의 열째 아들로서 ‘내가 도우심을 찬양하나이다’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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