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
이스라엘 자손이 또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으므로 - 이스라엘 백성이 여호와앞에서 행한 악은 어떤 도덕적인 범죄라기 보다 우상 숭배였다(2:17). 그들은 강력한지도자인 사사들이 살아 있을 동안 우상 숭배에서 멀어졌던 것 같으나 사사의 치리 기간이 끝나면 곧바로 다시 우상 숭배에 빠졌다. 이처럼 타락, 하나님의 징계, 이스라엘의 회개 그리고 하나님의 구원이 순환적으로 반복되던 역사가 곧 사사 시대였다.
미디안 - 아브라함의 후처인 그두라에게서 난 후손들이다(창 25:1-4). 그들은 유목민이었으며 외국과도 무역을 했다. 요셉이 바로 이러한 생활을 하던 미디안 족속에게팔렸다(창 37:28). 한편 이러한 미디안 족속이 거하던 땅은 모세와 아주 중요한 연관을 맺기도 하였다. 즉 모세가 바로의 낯을 피해 도망친 곳이 곧 미디안 땅인데 그는그곳에서 미디안 제사장 이드로의 딸과 결혼해 가정을 이루었었다(출 2:15-22). 미디안땅의 경계는 정확하지않으나 대개 엘란(Elan) 만 동부 지역인 아카바만 일대이다.그런데 간혹 모압 경계선 북부(민 22:4,7)나 시내 반도 부근으로까지 그 경계가 확장되기도 하였다. 그런데 이들 미디안족은 이스라엘 백성의 출애굽시에 모압 족속과 동맹을 맺어 이스라엘을 대적하고자 했으나 오히려 이스라엘에게 대패를 당하고 만다(민31:1-12). 그런 자들이 본문에서처럼 다시 세력을 키워 이스라엘을 침공했으니 비록 7년간이지만 이스라엘 백성은 그 어느 때보다 곤란을 겪었을 것이다.
=====6:2
산에서 구멍과 굴...만들었으며 - 팔레스틴 땅은 대체로 석회석으로 되어 있어서천연동굴이 많았으며 또한 인위적으로 굴을 파기도 쉬웠다. 이떠한 굴은 창고나 무덤(마 27:60)뿐 아니라 일시적 거처나 피신처로도 곧잘 사용되었다(삼상 22:1). 그러기에 이와관련 히브리서 저자는 구약 시대 믿음의 사람들이 핍박을 피해 '산중과 암혈과토굴'에서 유리했다고 언급했다(히 11:38). 그리고 신약의 성도들도 핍박을 피해 동굴생활을 했으며 유대 종파 중 어떤 사람들은 신앙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 쿰란동굴에서 생활했다. 이와같이 사람들이 산속의 구멍이나 굴에서 생활했던 이유는 인적을 피할수 있고 타인의 공격을 쉽게 방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본문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미디안의 침략을 받아 패퇴(敗退)하자 그곳으로 도망친 이유도 그 때문이다. 즉 그들은 적을 대항할 힘이 없었으므로 적의 눈에 잘 띄지 않고 설령 적이 온다고 할지라도어느 정도 쉽게 방어할수 있는 높은 산의 동굴로 피신했던 것이다. 한편 이러한 이스라엘 백성의 생활은 당시 미디안으로 인해 입은 그들의 고통이 매우 컸음을 잘 나타내준다. 그 뿐 아니라 과거 그들이 하나님 편에 섰을 때에는 능히 미디안 족을 물리쳤던것(민 31:1-12)과도 좋은 대조를 이룬다. 마찬가지로 오늘날의 성도들도 하나님과의정상적인 관계에서 이탈할 때에는 사면에서 에워싸는 원수들로 말미암아 괴롭힘을 당하게될 뿐임을 명심해야 한다(Matthew Henry).
=====6:3
이스라엘이 파종한 때 - 우리 나라와는 달리 팔레스틴 지역은 지중해성 기후로 인해 여름철(5-9월경)에 비가 없는 건조기가 계속된다. 그러다가 10월에 들어서서 '이른비'가 내리기 시작하는데 이때에 그곳 사람들은 파종을 시작한다. 그리하여 파종된 씨앗은 겨울 우기(12-2월경) 동안 자라나 결실을 맺고 대개 3,4월 경에 추수하게 된다<성경 총론, '팔레스틴의 기후'>. 그런데 본절에 의하면 미디안과 아말렉, 그리고 동방 사람들은 파종한 겨울 철에서 추수기까지에 걸쳐 이스라엘을 약탈했던것 같다. 특히 유목민인 미디안 사람들은 곡식이 싹을 내어 한창 자랄 때에 가축을 몰고 와서 그곡식을 뜯게 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다 자라 이삭이 여물은 곡식마저 빼앗아 갔으니 이스라엘에 양식이 남아 있을 날이 없었다(4절).
아말렉 사람 - 에서의 아들 엘리바스와 그의 첩 딥나 사이에서 난 '아말렉'의 후손을 가리킨다(창 36:12). 그들은 과거 출애굽하던 이스라엘을 르비딤에서 공격한 적이있는데 오히려 여호수아의 지휘하에 분투한 이스라엘에게 크게 패하였었다(출17:8-16). 이때 하나님께서는 장차 아말렉을 세상에서 완전히 없어지게 하리라고 말씀하셨는데 히스기야왕 때에 이르러 그들은 시므온 자손에 의해 멸절 당했다(대상4:42,43). 이들은 계속 존속하는 동안 이스라엘을 매우 괴롭힌 것으로 악명높다(3:13;삼상 15:7,8;27:8,9). 3:13 주석 참조.
동방 사람 - 창 29:1에서 처음 언급된 족속이다. 그러나 그들이 어떤 족속인지 정확하게 설명할 수 없다. 단지 야곱이 갔던 곳이 밧단아람이었던 점으로 미루어 보아창 29:1에서 가리키는 '동방 사람'은 메소포타미아지역 사람을 지칭한 것으로 이해된다. 그런데 본문에 언급된 '동방 사람'은 이스라엘 남부와 남동부에 자리를 잡고 있던아말렉 및 미디안과 동맹한 것으로 언급되어 있다. 이로 미루어 보아 여기서 가리키는'동방 사람'은 메소포타미아지역의 족속들은 아닌 듯하다. 추측컨데 아마도 이는 미디안과 인접해 있는 시리아 사막 지역의 이말렉 족속 중에 속한 사람들을 가리킬 것이다(Wycliffe).
=====6:4
진을 치고 - 본절에서는 미디안과 아말렉, 그리고 동방 사람들이 어느 곳으로 올라와서 어디에 진을 쳤는지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그들이 뒤에 기드온과 싸우려 할 때에는 요단을 건너와서 '이스르엘'골짜기에 진친 것으로 나와 있다(33절). 그래서 혹자는 그들이 가사에 이르도륵 이스라엘 지경(地境)을 황폐화시킨 점으로 미루어 보아 이번에도 요단을 건너와서 점점 서쪽과 남쪽으로 이동한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Keil).왜냐하면 '가사'는 이스르엘 골짜기보다 훨씬 남서쪽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가사 - 유다 지경에 속한 블레셋인들의 5대 성읍 중 하나이다. 1:18 주석 참조.
토지 소산을 멸하여...나귀도 남기지 아니하니 - 미디안 연합군이 이스라엘 백성을직접적으로 쳤을 뿐아니라 그에 병행하여 생계 수단이 될 만한 것은 하나도 남기지 않고 초토화시키고 갔음을 보여준다.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당장 생계 문제로 극심한 고통을 당해야 했는데 이는 단순히 조공을 바치는 것보다 더 견디기 힘든 고통이었을 것이다. 이로써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 범죄한 대가를 톡톡히 치루었음을 알 수 있다(1절). 한편 이상과 같은 상황 속에서도 백성들이 생명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아마 기드온처럼(11절) 노략꾼들에게 들키지 않게 감추어 둔 곡식이나마 조금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6:5
그들이 그 짐승과 장막을 가지고 올라와서 - 미디안족은 유목민들이었으므로 어느한 곳에 머무르지 않고 초지를 찾아 떠돌아 다녔다. 특히 그들은 약대가 있었으므로장거리 이동이 가능하였는바 가나안의 곡식이 자랄 때 쯤이면 나타나 곡식 밭에 자기들이 몰고 온 짐승들을 방목하고 장막을 지어 장기간 체류였다. 한편 여기서 '올라와서'라는 표현은 반드시 남쪽에서 북쪽으로 혹은 아래에서 위로 이동했다는 의미가 아니다. 단지 이는 이스라엘을 중심으로 이방 땅에서 나아오는 것을 의미한다(왕하17:3;24:1;사 36:1).
메뚜기떼 같이 들어오니 - 성경에서 메뚜기 떼는 종종 하나님의 심판으로 말미암은재앙을 상징한다(출 10:4;신 28:42;시 105:34;욜 2:25). 여기서도 이러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데 특히 대적들의 수효가 엄청났다는 점과 그들로 말미암은 피해가 막심하였음을 강조해 준다.
그 사람과 약대가 무수함이라 - 미디안족은 떠돌아 다니면서 유목 외에 무역도 했으므로 약대가 반드시 필요했다. 고대 근동에서는 짐을 운반하는 수단으로 이 약대가가장 많이 이용되었다(왕상 10:2;사 30:6).
=====6:6
이스라엘이...미약함이 심한지라 - '미약하다'에 해당하는 '와이달'(* )은'쇠하게되다'(be brought low)란 뜻 외에도 어원적으로 '가난하게 되다'(beimpoverished)란 의미도 있다. 그래서 KJV와 NIV. Living Bible등은 이를 '가난하게되다'(was impoverished)로 번역했다. 즉 이스라엘 백성들은 침입자들로 인해 모든 곡식과 짐승을 빼앗겼으므로 가난하게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4절). 그런데 공동 번역은 이와 달리 '와이달'을 '황폐하게 되다'로 번역하고 있다. 이것은 그 단어의 근본뜻과도 밀접한 연관이 없으며 본절의 본래적인 의도와도 조금 다르다. 물론 침입자들로 인해 이스라엘 땅이 황폐하게 되었으나 본문에서는 횡폐하게 된 사실에서 한걸음더 나아가서 이스라엘 백성의 곤궁(困窮)한 처지를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상태가 7년 동안 계속되었으니(1절) 이스라엘 백성들의 고통이 매우 심했음은 말할나위없다.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라 -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 선조들이 애굽의 압제에 못이겨 고통으로 신음할 때와 같이(출 3:7) 극한 상황에서 하나님을 찾았다. 이처럼 주위의 열국들을 이용, 타락한 당신의 백성을 징계하시어 그 타락의 길에서 돌이키게 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는 비단 사사기뿐 아니라 이스라엘의 역사 전반에서찾아볼 수 있는 하나님의 전형적 섭리이다.
=====6:7
부르짖은 고로 - '부르짖다'에 해당하는 '자아크'(* )는 위험이나 고민거리에직면했을때 소리 외쳐 구원자를 청하는 것을 가리킨다. 즉 이스라엘은 미디안의 압제하에 심히 곤궁하자 구원자 '하나님'을 애타게 찾은 것이다.
=====6:8
한 선지자를 보내사 - 모세 시대까지가 신현현(Theophany) 시대라면 사무엘 이후부터 말라기 선지자까지는 선지자(prophet) 시대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중간의 사사시대는 신현현 시대와 선지자 시대의 과도기적 상황으로서 특별히 어떠한 시대라고 정의하기 어렵다. 왜냐하면 당시에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뜻을 계시하시는 통로가 다양했기 때문이다. 즉 하나님께서는 본절에서처럼 선지자를 보내시거나 아니면 사사를 통하여 말씀을 전달하시는가 하면 직접 여호와의 사자를 보내기도 하셨다(11절;2:1;13:3).한편 선지자에 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삼하 12:1-14 강해, '선지자의 사명'을 참조하라.
내가 너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 이처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출애굽역사를 다시 상기시켜 주신 까닭은 가나안 땅에 그들이 거주할 수 있게 된 것이 온전히 당신의 능력에 의해서만 가능했음을 일깨워 주시기 위함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들에게 출애굽 과정에서 맺은 당신과의 언약(출 19:5-8)도 상기시켜 주기위함이었다. 따라서 본절은 배은 망덕한 이스라엘 백성의 허물을 교훈하시는 말씀임을 알 수있다.
=====6:9
너희를 학대하는 모든 자의 손 - 이스라엘의 가나안 입성시 모두들 들고 일어나 이스라엘을 대적하였던 가나안 땅의 원주민들을 지칭한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이스라엘 백성에 의해 그 땅에서 쫓겨났으나 약간의 세력이 남아 있었다. 그런데 가나안 땅에 정착한 이스라엘이 배역(背逆)하고 범죄하자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그 남은 자들을 사용하여 타락한 이스라엘을 징계하겠다고 경고하신 적이 있다(2:19-23). 그 경고가 실제로 성취된 사례는 이미 앞에서 살펴본 바인데 이스라엘은 모압 왕 에글론에의해 18년 동안(3:14), 그리고 가나안 왕 야빈에 의해 20여년 동안 괴롭힘을 당했었다(4:3).
=====6:10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 - 일찍이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주셨던 약속을 상기시켜 주는 구절이다. 즉 당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당신의 계명에 순종하고 세상과 구별된 삶을 살면 '너희로 내 백성을 삼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리라'(출6:7;19:5,6)고 말씀하셨다. 따라서 이후 이스라엘은 그 같은 언약에 충실할 의무가 있었는데 오히려 그들은 틈만 있으면 이를 거스르는 죄악을 저지르곤 하였다.
아모리 사람의 땅의 신들을 두려워 말라 - 성경에서 '아모리 사람'은 종종 '가나안사람'을 지칭하는 말로 사용되었다(창 15:16;수 24:15). 본절 역시 동일한 경우인바'아모리 사람의 땅'은 '가나안 땅'을 의미한다. 한편 이 가나안 땅에는 국가 신(수호신)을 비롯해서 인간의 행.불행과 관련된 신들 등 여러 종류의 신들이있었다. 그중 성경에 언급된 가장 대표적인 신들을 보면, 가나안의 바알과 시돈의 아스다롯을 들 수있다(2:13;10:6;삼상 12:10;왕상 16:31;18:18). 그리고 모압의 그모스(11:24;민21:29;왕상 11:7,33;렘 48:7)와 암몬의 몰록(왕상 11:7), 및 블레셋의 다곤(16:23;삼상 5:2-7) 등도 들수 있다. 다음으로 성경에는 언급되어 있지 않으나 가나안 땅에 유행했던 신들은 만신전의 우두머리인 '엘', 전쟁신 '아낫' 그리고 죽음의 신 '못'이 대표적이다. 그외에도 몇몇을 들자면 헷족속의 폭풍우의 신 '테슛', 모신(母神) '한나한나', 시리아의 폭풍우의 신 '아닷' 등이 있다. 3:7 주석 참조.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땅 가나안에 정착하면서 이러한 우상들을 섬김과 동시에 여호와도 같이 섬겨 종교적혼합주의(syncretism)에 빠져 있었다. 한편 이러한 신들은 조각품에 지나지 않고 사람이 고안한 것에 지나지 않으므로,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의 선민은 그 우상들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었다. 그리고 그 신들이 보호하고 있다는 가나안 열국 역시 두려워할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우상 숭배에 빠진 결과 그러한 신들을 두려워하게 되었으며 열국들의 침략에 대해서도 속수 무책이었다.
=====6:11
여호와의 사자 - 구약 시대에도 현현하시어 당신 백성을 권념(眷念)하시며 부단히활동하셨던 성육신(成肉身) 이전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2:1 주석 참조.
아비에셀 사람 요아스 - '아비에셀'은 므낫세 지파 중 한 가족의 조상이었다. 따라서 '아비에셀 사람'이란 므낫세 지파 중 '아비아셀'의 가계에 속한 자들을 가리킨다(수 17:2). 한편 '요아스'는 이스라엘의 사사 기드온의 아비인바 본절은 기드온의 출신을 밝혀 주는 의의를 지닌다.
오브라 - 이곳의 위치는 아직 확실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다만 이곳은 베냐민 지파의 소유인 '오브라'와는 분명히 구별된다(수 18:23). 혹자는 샤론 평야 부근의 오늘날의 엘파이(Erfai)가 이 오브라인 것으로 추측하기도 한다((Keil & DelitzschCommentary,Vol.II.p.331).
상수리 나무 - 성경에서 이 '상수리 나무'는 종종 우상 숭배와 연관되어 나타난다(사 44:14,15). 기드온이 자기 아버지가 섬기던 우상 중 목신(木神)인 아세라를 찍어불태운 것으로 보아(25,26절) 기드온의 아비 요아스 역시 이 나무를 숭배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밀을 포도주 틀에서 타작하더니 - 고대 근동에서는 대개 땅에 큰 구덩이를 파서 포도주 틀을 만들었던 것 같다(사 5:2). 한편 이처럼 장차 이스라엘의 위대한 구원자로부르심을 받을 기드온이 몰래 숨어서 밀 타작을 하고 있었다는 아이러니컬한 사실을통해, 우리는 다음 두 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다. (1)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당한 압제의 정도가 매우 심했던 것으로 보인다. 원래 밀 타작은 마당이나 넓은 들판에서 타작용 마차나 황소의 발굽을 이용하여 하였으나, 기드온은 미디안 족의 눈을 피해 좁은포도주 틀에서 타작하던 중이었다. (2)기드온의 타작 행위는 그가 장차 이루게 될 큰일을 암시하고 있다. 고기 잡는 어부를 불러서 사람 낚는 어부로 삼으신 하나님께서(마 4:19), 밀 타작하고 있던 기드온을 택하사 미디안 대적을 타작하게 하신 것이다(사 41:15). 오늘날 성도들도 기드온처럼, 생계에 연연해 하던 상태에서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사명을 자각하는 상태로 변모하도록 요청받고 있다. 왜냐하면 시대는 달라도수행되어져야 할 하나님의 일은 여전히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일하지 않고 버려두어도 좋을 곳은 세상에 한 치도 없다.
=====6:12
큰 용사여 - 이에 해당하는 '깁보르 헤하일'(* )은 문법적으로 '능력있는 용사'를 의미한다. 그러나 룻 2:1에서는 '유력한자'곧 '재산과 덕망 그리고 세력을 겸비한 사람'으로도 번역되었다. 한편 혹자는 본절과 관련, 기도온이 실제로 '깁보르 헤하일'이 아니지만 하나님께서 함께 하셔서 주의 능력으로 큰 용사가 된 것으로이해한다(Keil, Goslinga), 다시 말해 기도온은 본래 연약하며 작은 자였지만(15절)여호와께서 함께 하시므로 '큰 용사'가 되었다는 뜻이다. 이는 하나님께서 사사들을불러 세우셨던 제반 유형에 비추어 볼 때 상당히 설득력 있는 견해이다. 2:11-23 강해, '사사들의 입지(立志)' 참조.
=====6:13
나의 주여 - 이 말은 기드온이 처음부터 하나님의 사자를 '여호와 하나님'으로 알아서 사용한 것이 아니라 단지 낯선 사람에 대한 예우로 사용한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기드온이 처음에는 여호와의 사자의 말에 부정적인 반응을 보인 것에서 분명히 알수 있다(P.Cassel).
어찌하여 이 모든 일이 우리에게 미쳤나이까 - 기드온은 자기 백성이 미디안으로부터 고통당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과 함께 하시지 않았던 데서 비롯된 것으로 이해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타락한 백성들을 징계하고 돌이키시기 위해 미디안사람들을 보내셨다. 즉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이 고통당하는 중에도 여전히 함께하셨던 것이다(출 3:7).
그 모든 이적이 어디 있나이까 - 기드온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계셨다면 미디안 사람의 손에서 고생하지 않았을 것이며, 심지어 그들이 쳐들어 와도 출애굽시에 행하셨던 놀라온 이적으로 그 대적들을 물리쳤을 것으로 믿었다. 다시말해 기드온은 고통의 원인이 이스라엘 백성의 죄임을 깨닫지 못하고 거듭 하나님께서 함께계시지 않은 탓으로 돌렸다.
=====6:14
너는 이 네 힘을 의지하고 - '이 네 힘'은 단순히 기드온 자신의 힘을 기리키지 않는다. 대신 이는 하나님께서 기드온과 함께 계셔서 주시는 힘을 의미한다(Keil,Goslinga). 용사라도 자기 힘을 의지하면 실패하지만 연약하고 작은 자라도 여호와를의지하는 자는 승리한다(시 33:16).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기도온에게 인간적인 힘이아니라 전능하신 하나님의 힘을 의지하라고 말씀하심으로써 미디안과의 싸움에서 승리를 보증해 주셨다.
=====6:15
내가 무엇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리이까 - 아직 기드온은 자신이 의지할 인간적인요소나 가시적인 요소가 있어야만 이스라엘을 구원할 수 있는 것으로 이해했다. 즉 그는 하나님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삼상 17:47) 깨닫지 못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면 여리고 성과 같이 견고한 성도 인간적인 수단을 사용치 않고 쉽게 무너뜨려 정복할 수있게 하심을 그는 망각했던 것이다(수 6:1-21). 뿐만 아니라 그는 아직도 하나님의 말씀을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던 것이다(요 11:40).
나의 집은...극히 약하고...제일 작은 자니이다 - 본절은 기드온이 메뚜기 떼 같은미디안 사람과 대적하기에는 자신이 역부족임을 고백한 것이다. 여기서 아직까지 기드온이 인간적인 방편을 의지하려는 모습이 분명히 나타난다. 그렇지만 그의 고백처럼기드온의 가정은 이스라엘 가운데서 지도적 위치에 있기는 커녕 매우 보잘것 없는 위치에 있었음은 사실 일 수 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 그러한 가정의 기드온을 들어쓰사 이스라엘의 사사로 세우신 것은 두 가지 사실을 시사해 준다. (1)하나님께로부터부르심을 받은 일과 관련해서는 그 누구도 교만할 수 없다는 점이다. (2)하나님의 부르심에는 그 어떠한 차별도 있을 수 없다는 점이다(고전 1:26-31).
=====6:16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하리니 - 일찍이 하나님께서는 이와 동일한 약속하에 모세와 함께 하셨고(출 3:12) 여호수아와도 함께하셨다(수 1:5). 그래서 그들을 통하여 큰능력을 행하셨다. 따라서 본절은 하나님께서 모세와 여호수아를 통해 역사하셨던 것처럼 이제 기드온과도 함께 하사 그를 통해 큰 역사를 이루시겠다는 약속의 말씀임을 알수 있다.
네가 미디안 사람 치기를 한 사람을 치듯 하리라 - 미디안 사람은 메뚜기 떼처럼많다(5절). 그런데 이렇게 많은 사람을 한 사람을 치듯 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매우 쉽게 멸망시킬 것에 대한 약속의 말씀이다. 이러한 표현은 민 14:15에서 하나님께서 배은 망덕한 이스라엘 백성을 치시려 한 것을 가리킬 때에도 사용된 적이있다.이는 곧 누구든 한번 하나님의 심판의 장중에 빠져 들면 헤어나지 못하고 반드시 멸절되고 말 뿐임을 시사해 준다.
=====6:17
나와 말씀하신 이가 주 되시는 표징을 내게 보이소서 - 본절은 여호와에 대한 기드온의 불신앙을 드러낸 것으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이후 전개되는 문맥은 단지 그러한 시각으로만 보기에는 무리가 있음을 깨닫게 해준다. 즉 본절은 기드온이 여호와의사자를 통하여 주어진 자신의 소명이 믿을 수 없을 만큼 엄청난 일이기 때문에 그 사실 여부를 확실히 알고 싶어 요구한것으로 보는게 자연스럽다. 사실 과거 모세도 이스라엘의 지도자로서의 소명을 받았을 때, 자신의 소명에 대해서 확신하지 못했다. 이때하나님께서는 모세의 손에 있는 지팡이를 통해, 그리고 모세의 손을 통해 표징을 보여주셨다(출 4:1-8). 또한 예레미야도 하나님의 선지자로서의 소명을 받았을 때, 자신의소명에 대해 확신하지 못하고 자신을 아이와 같은 미약한 존재로 여겼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의 입에 손을 대시는 표징으로써 그에게 소명을 확신시켜 주셨다(렘1:4-9).
=====6:18
예물 - 이에 해당하는 원어 '미느하'(* )는 '선물', '조공', '제물'을 의미한다. 특히 이 단어가 '제물'의 의미로 사용될 때에는 주로 '소제'(grain offering)와관련되어 사용된다(사 66:20;말 1:11). 한편 다음 절에 보면 기드온은 하나님을 위해'미느하'로 염소새끼와 가루 한 에바로 만든 무교 전병과 국을 가져왔음을 알 수 있다(19절). 이와 유사하게 과거 아브라함도 하나님의 사자들을 위해 기름지고 좋은 송아지 요리와 고운 가루 세 스아로 반죽하여 만든 떡과 버터와 우유를 가져와서 대접했던적이 있다(창 18:6-8). 따라서 본절의 '미느하'는 NIV의 번역처럼 '제물'(offering)을가리키는 것으로 보기 보다는 '선물'을 의미하는 것으로 봄이 타당하다.
이곳을 떠나지 마시기를 원하나이다 - 아마도 기드온이 땅에 구덩이를 파 만든 포도주 틀은 자신의 집에서는 조금 떨어진 곳에 위치한 마을 어귀의 상수리나무 부근이었던 것 같다(11,12절). 때문에 그가 집으로 돌아가 음식을 준비해 돌아오기 까지에는어느 정도 시간이 걸렸을 것이다. 기드온이 여호와의 사자에게 자리를 뜨지 말고 잠시기다려 달라고 요청한 것은 이 때문이다.
=====6:19
본절에는 기드온이 여호와께 바친 예물이 언급되어 있다. 그 예물은 미디안 족속의압제로 인해 매우 곤궁한 살림을 하던 기드온(4,11절)에게는 매우 귀중하고 값진 것임에 틀림없다.
가루 한 에바 - 약 23리터, 즉 약 12되 정도되는 부피를 의미한다. 성경 총론, '성경의 도량형과 화폐 및 월력' 참조. 이러한 양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사자들을 위해가져왔던 가루 세 스아와 같은 부피이다(창 18:6). 왜냐하면 한 에바(Ephah)는 세 스아(Seah)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무교전병 - 효소의 역할을 하는 누룩을 넣지 않고 만든 빵이나 떡을 가리킨다. 이것은 구속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먹을 신령한 음식을 상징하기도 한다. 한편 이것은출애굽 사건과도 깊은 관련을 지니고 있는데 이에 대해서 출 12:8 주석을 참조하라.
=====6:20
하나님의 사자 - '여호와의 사자'(11절)와 같은 말이다. 보다 자세한 내용은 그곳주석을 참조하라. 한편 문서설을 주장하는 일부 학자들은 문서를 나눌 때 신(神) 명칭인 '여호와'와 '엘로힘'의 사용에 따라 구분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이 두 이름이 한책 안에서 교호적(交互的)으로 발견되면 '여호와' 문서와 '엘로힘' 문서가 혼합되어편집된 것으로 생각한다. 그들의 그러한 생각은 본장에 대해서도 예외는 아니다. 그까닭은 본장에 '여호와의 사자'란 말과 '하나님의 사자'란 말이 동시에 사용되고 있기때문이다. 그러나 오늘날 문서설의 허구성은 이미 여러 학자들에 의해 명백히 밝혀졌다. 더군다나 일관된 흐름을 보여 주고 있는 본장의 이야기는 편집될 수 있는 성질의것도 아니다. 보다 자세한 내용은 모세 오경 개론, '문서설'을 참조하라.
=====6:21
불이 반석에서 나와 고기와 무교전병을 살랐고 - 훗날 삼손의 부모가 염소 새끼 하나와 소제물을 취하여 반석 위에 두었을 때도 하나님의 사자는 이와 동일한 이적을 행하셨다(13:19,20). 또한 엘리야가 갈멜 산에서 바알 선지자들과 대결할 때도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가운데서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보여 주시기 위해 불로써 제물을 태우셨다(왕상 18:38). 이처럼 하나님께서 초자연적인 불로써 제물을 태우신 것은 한편으로는 기도온의 헌신을 열납하신 증거이며(레 9:24), 다른 한편으로는 징표를 구한기도온의 요구에 대한 응답이었다(Pulpit Commentary, Matthew Henry).
=====6:22
그가 여호와의 사자인줄 알고 - 이제야 기드온은 자기에게 나타나 위로와(12절) 소명과(14절) 확신을(16절) 주신 분이 바로 '여호와의 사자' 곧 '여호와'시라는 사실을깨닫게 되었다. 이는 엠마오를 향해 가던 두 제자가 그들 바로 곁에 동행하셨던 예수님을 미처 알아보지 못하고 '눈이 밝아진' 후에야 깨달은 것과(눅 24:13-32) 유사한예이다. 이처럼 우리도 항상 곁에 계시며 인도해 주시는 하나님의 임재(臨在)를 도무지 인식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때가 많이 있다.
슬프도소이다 - 이 말에 해당하는 원어 '아하흐'(* )는 특정한 의미를 나타낼때 사용하는 단어가 아니라 단지 슬픔을 나타내는 감탄사이다. 그런데 이 말은 '주 여호와'란 단어와 연결되어 주로 사용되었다(수 7:7;렘 1:6;4:10;14:13;32:17;겔4:14;9:8;11:13). 한편 기드온이 이렇게 탄식의 소리를 발했던 것은 사람이 여호와를대면하여 볼 수 없고, 또한 보면 죽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기억했기 때문이다(출20:19;33:20;신 5:25).
=====6:23
너는...죽지 아니하리라 - 이처럼 기드온이 하나님을 보고서도 죽지 아니할 수 있었던 까닭은 그가 하나님의 본체를 보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출 33:20, 23 주석 참조.주 하나님께서는 죄인인 인간이 하나님의 영광의 본체는 보지 못하기 때문에 인간의형상을 취하사 '여호와의 사자'로 기드온에게 나타났던 것이다. 후에 삼손의 부모가하나님을 뵙고서도 죽지 않은 것 역시 이러한 연유에서이다(13:22,23).
안심하라 두려워 말라 - 히브리인들은 동의어 대구법(同義語對句法)을 사용하여 말의 의미를 분명히 하거나 강조하는 습관이 있다. 본절 역시 하나님께서 기드온을 위로하시면서 슬퍼하거나 걱정할 필요가 조금도 없다는 사실을 강조하시기 위해 '동의어대구법'을 사용하신 경우이다.
=====6:24
거기서 - '상수리 나무 아래서'를 가리킨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사자는 상수리 나무 아래에 있는 반석에서 기드온의 예물을 태웠으며(19-21절), 그곳에서 기드온과 대화했기 때문이다(22,23절).
단을 쌓고 - 과거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언약을 재확인한 후 헤브론에서 단을 쌓았다(창 13:18). 그리고 야곱도 벧엘 광야에서 하나님을 만난후 그곳에서 단을 쌓았다(창 28:16-19). 이처럼 구약 시대에는 단을 쌓는다는 것이 하나님에 대한 그 사람의열심과 헌신을 의미했다.
여호와 살롬 - 이에 해당하는 원어 '예호와 솰롬'(* )은 '여호와는평강이시다' 또는 '평강의 여호와'란 의미이다. 앞서 여호와께서는 두려움에 떨고 있는 기드온에게 '안심하라'고 말씀하셨는데(23절), 이 말의 원어 역시 '솰롬', 곧 '평강'이다. 이로써 알 수 있듯이 본절에서 기드온이 쌓은 단은 하나님과의 화해의 제단이요 구원의 제단이었던것이다. 한편 바울이 하나님 나라의 주요 속성중 하나를 평강이라 하였고(롬 14:17),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평강의 왕이라 불리운것 같이(사 9:6),평강이라는 주제는 하나님의 귀한 은총으로서 성경 전편에 걸쳐 흐르고 있다. 그런데특히 불안과 혼란이 팽배해 있는 현대 사회에서 개인과(눅 8:48) 가정과(고전 7:15)나아가 전세계가(왕상 4:24) 평강을 누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하나님과의 화목된 관계가 필수적으로 요청된다(시 29:11;갈 1:3).
=====6:25
수소 곧 칠년 된 둘째 수소 - 본절은 약간 난해한 점이 있다. 왜냐하면 원문상으로본절은 '수소와 칠 년 된 둘째 수소'라는 의미로도 해석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혹자는 '수소'는 기드온이 자기와 자기 가족을 위해 바쳤고, '칠 년 된 둘째 수소'는온 백성을 위해 하나님께 바쳤다고 주장하기도 한다(Matthew Henry's Commentary,Vol.II.p.160). 그러나 사실상 기드온이 제물로 드린 것은 '그 둘째 수소' 밖에 언급되어있지 않다(26,28절). 즉 본문에는 두 마리 수소가 바쳐졌다는 암시가 그 어디에도 없다. 더군다나 대부분의 영어 성경 역시 본절을 개역 성경과 같은 의미로 번역하고있다(bull, the second bull seven years old;KJV, RSV, NUV). 따라서 본절의 '수소' 는'칠 년 된 둘째 수소'와 동의어로 보아야 한다(Pulpit Commentary, Keil & Delitzsch)한편 하나님께서 굳이 번제물로 7년 된 수소를 취하라고 하신 까닭은 이스라엘로 하여금 7년간의 미디안의 압제(1절)로부터 벗어나게 하려 하신 당신의 의사를 상징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네 아비에게 있는 바알의 단 - 이 단은 본래 오브라에 모여 살던 아비에셀 사람들(11절)의 공동 소유이나 특별히 기드온의 아비가 관리 책임을 맡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 근거로 (1)기드온이 자기 아비의 바알.단을 훼파하면서 성읍 사람들을 두려워했다는 점(27절), (2)'단'이 단수로 사용되었다는 점, (3)이튿날 아침에 백성들이바알의 단이 훼파된 것을 알 정도로 그 단에 관심이 있었다는 점 등을 들 수 있다(28절).
아세라 상 - 가나안의 최고 신인 엘(El)의 아내이자 바알(Baal)의 어미이다. 간혹'아스다롯'(Ashtaroth)과 동일신인 것으로 오해되기도 하는데 엄연히 구별된다. 보다자세한 내용은 레 26:1-13 강해, '가나안 땅의 신들'을 참조하라.
=====6:26
이 견고한 성 위에 - 이에 해당하는 원문 '로쉬 하마오즈 하제'(* )는 '이 견고한 것의 끝에'란 의미이다. 이것을 NIV는 원문의 의미와는 달리'적절한 종류의'(a proper kind of)로 번역했으며, KJV는 '이 바위의 끝에'(the topof this rock)로 번역하였다. 그리고 Living Bible은 '이 언덕 위에'(on this hill)로번역하였으며 RSV는 개역 성경처럼 각각 번역했다(the top of the stronghold). 이러한 차이는 '로쉬 하마오즈 하제'가 무엇을 지칭하는지 분명치 않기 때문이다. 추측컨대 이곳은 성읍 사람들이 모두 다 쳐다 볼 수 있는 성읍의 '가장높은 곳'을 의미하는듯하다.
규례대로 - 이 말은 문자적으로 '정돈되게'라는 의미로서, 기드온이 단을 쌓음에있어서 정성을 들였음을 보여 준다(Lange).
아세라 나무 - 이로 미루어보아 아세라 여신상은 통나무로 만들어 세운 목상(木像)이었음을 알 수 있다(왕하 21:7).
번제 - 하나님께 대한 온전한 헌신과 정상적인 관계 유지를 기구(祈求)하는 마음에서 드리던 자발적인 제사이다. 이에 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레 1:3-9 강해, '번제에대하여'를 참조하라.
=====6:27
기드온이...두려워하므로 - '바알'은 농경물의 수확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치는 신이다. 2:13 주석 참조. 따라서 바알 우상 훼파 소식이 그 신봉자들의 귀에 들어갈 경우, 자신들의 소득이 격감되는 것을 생각해서라도 그들이 격노할 것은 자명하다. 기드온이 두려워한 것도 바로 그러한 사태였을 것이다.
=====6:28
아침에 일찌기 일어나 본즉 -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던 장소는 동네에서 어느 정도떨어져 있으나 모든 사람들이 볼 수 있는 높은 곳에 있었음이 분명하다. 26절 주석 참조. 그렇지 않았다면 성읍 백성들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서 그 단이 훼파되었는지를금방 알 수 없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비록 기드온과 그의 종들이 밤중에 신상과산당을 훼파하여 여호와께 제사를 드렸을지라도(26,27절)그곳이 마을 가까이 위치했다면 성읍 백성들이 쉽게 알 수 있었을 것이다.
=====6:29
서로 물어 가로되...기드온이 이를 행하였도다 하고 - 이로 보건대 기드온의 종 열(27절)중에 누군가가 마을 사람들에게 기드온이 바로 범인 임을 자백하거나 고해 바친것 같다(Pulpit Commentary).
=====6:30
그는 당연히 죽을지니 - 기드온이 바알과 아세라를 훼파한 일 때문에 성읍 백성들이 그를 죽이려 한 점은 기드온의 부친이 소유한 바알과 아세라가 그의 가족에게만 속한 것이 아님을 다시 한번 증거해 준다. 4절 주석 참조. 한편 이들 성읍 주민들은 본래 하나님의 백성들로서 우상을 숭배하여 십계명을 범했으면서도 무너진 우상의 제단과 신상을 보고서 자신들의 죄를 뉘우치지 못했다. 도리어 그들은 바알과 아세라 상을훼파한 기드온을 죽이려 하였다. 즉 하나님 앞에서 정작 죽임을 당할 자들은 자신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미처 이를 깨닫지 못했던 것이다.
=====6:31
바알이...스스로 쟁론할 것이니라 - 마을 사람들은 우상을 파괴한 기드온에게 분노를 품고 그 아버지에게 사형을 요구했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 아버지 요아스는 그 아들의 행위를 꾸짖기는 커녕 도리어 그를 위해 변호하였다. 기드온의 심령을 비추었던하나님의 영이 그 아버지의 마음을 감화시켰던 것 같다. 적과 동조하리라 예상했던 아버지가 지금 자기 편이되어 주니, 기드온의 감사한 마음은 어떠했겠는가? 이렇듯 하나님의 편에 서서 진리를 위해 싸우는 자는 언제나 그분의 도우심을 경험하게 된다. 불의와 악한 세력은 생각보다 약하고, 정의와 진리는 무쇠처럼 강하다. 요아스는 참신과거짓 우상, 진리와 오류를 구별하는 길을 마을 사람들에게 제시한 것이다. 즉 참 신은징계하나 거짓 우상은 벌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렇다. 진리는 그 자신을 증명한다.후에 바리새인으로서 뭇 사람들에게 높임을 받았던 교법사 가말리엘도 같은 논법으로예수님의 제자들의 행위를 변호하였다(행 5:34 이하).
=====6:32
그 날에 기드온을 여룹바알이라 하였으니 - '여룹바알'이라는 이름은 '바알에게 대항하다'는 뜻이다. 이 이름에는 기드온이 바알을 쳐부쉈으되 바알은 기드온에게 어떠한 처벌도 내리지 못한 사실을 조롱하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이로써 바알은 허구의산물이며 헛된 우상임이 밝혀진 셈이다. 한편 삼하 11:21에서는 '여룹바알'이 '여룹베셋'으로 표현되어 있다. 이때 '베셋'은 바알의 별명인 '보셋'과 동일한 말로서 '부끄러움', '수치'등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여룹베셋이라는 이름도 바알의 수치를 드러낸사실을 암시하고 있다.
=====6:33
때에 - 원문에는 이 말이 없이 단순히 '그리고' 또는 '그런데'를 의미하는 접속사'우'(* )만이 언급되어 있다. 따라서 접속사 '우'만으로는 본절과 앞의 사건이 시간적으로 어느정도의 간격이 있는지를 알 수 없다.
이스르엘 골짜기에 진을 친지라 - '이스르엘 골짜기'는 요단 강에서 길보아 산(삼상 28:4)부근을 거쳐 갈멜 산(사 33:9) 부근을 지나며 지중해에까지 뻗쳐 있는 비교적큰 계곡이다. 따라서 이 골짜기는 므낫세 반 지파와 잇사갈, 스불론, 아셀지파의 땅에걸쳐 있는 셈인데, 그곳에는 기손강이 흐른다. 4:7 주석 참조. 한편 본절에서 미디안사람과 아말렉 사람과 동방 사람들이 이스르엘 골짜기에 진을 친 것은 이스라엘 백성과 싸우기 위함이라기 보다 이스라엘을 약탈하기 위한 준비를 갖춘 것으로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그들이 먼저 기습적인 군사 행동을 취하기 전까지는 이스라엘 백성들이전혀 그에 대한 방어나 어떠한 군사 행동(34,35절)도 취하지 않았기 때문이다(MatthewHenry's Commentary,Vol.II.p.162).
=====6:34
본절에는 성령이 임한 기드온의 신호에 따라 '아비에셀 족속'이 순종하면서 모여그를 좇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다. 그들은 지극히 심하게 우상을 숭배했던 자들이었으나 성령이 강하게 임한 기드온을 따랐다. 초대 사사 옷니엘도 하나님의 신이 임했을때구산 리사다임과 싸워 승리할 수 있었다(3:10). 여호와의 신이 기드온에게 강림하시니 - '강림하시니'로 번역된 원어 '라바쉬'(* )는 '옷을입히다'라는 뜻을 지닌다. 따라서 본절은 하나님의 영이 기드온을 옷입히시듯 혹은 무거운 장비로 온통 감싸시듯 하여 저항할 수 없는 상태로 만드셨음을의미한다(11:29;13:25;14:6;사 11:2;요 20:22;행 13:2;고전 12:4). 이처럼 신앙 생활에서는 붙잡는 것보다 붙잡히는 것이 더 중요하다. 우리가 주님을 붙잡는 것이 아니라주님께서 우리를 붙잡도륵 해야 한다. 우리의 구원은 우리 지혜나 능력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은 아니며, 신앙의 열매도 하나님께로부터의 은혜로 말미암아 맺어지는 것이다. 구약에서 여호와의 신이 특별히 임하였을 때에는 명철과 지혜(창 41:38,39), 예언(민 11:25,26), 비상한 체력(14:6,19)등이 나타났다. 그리고 신약시대에 와서는 예수그리스도를 주로 시인하는 모든 성도들에게 성령이 보혜사로서 함께 하신다(요15:26). 따라서 우리는 우리 속에 내주하시는 성령을 근심케 해서는 아니 되며, 육신의 정욕을 누그러뜨리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보다 충만히 받기 위해 힘써야 한다(엡5:18). 본절에서는 바야흐로 여호와의 신이 기드온에게 임하시므로서 그가 때마침 침략한 대적들로부터(33절) 이스라엘을 구원할 위대한 지도자로 세움 받는 장면이 나온다.
=====6:35
기드온은 므낫세 지파의 아비에셀 족속 출신이다. 11절 주석 참조. 따라서 자기가속한 므낫세 지파에게 제일 먼저 연락을 취해 그들의 힘을 규합했다. 그러자 적들이진을 치고 있는 이스르엘 골짜기와 접경 지대를 기업으로 받은 므낫세 지파는 기드온의 부름에 쉽게 응했다. 33절 주석 참조.
아셀과 스불론과 납달리 - 이들 역시 이스르엘 골짜기와 인접해 있고 적들의 약탈과 위협에 처해 있었기에 기드온의 부름에 응했다. 33절 주석 참조. 그런데 이 중 '아셀'은 드보라 시대에는 압제자의 영향권 내에 있으면서도 출전치 않아 드보라의 비난을 받은 적이 있는 지파다(5:17).
올라와서 - 이 말에 해당하는 원어 '알라'(* )는 반드시 '올라가다'란 의미만을 지니고 있는 것이 아니다. 대신 이는 어느 중요한 지점으로 나아가거나(스 7:6) 전쟁을 위해 진군하는 것(왕하 17:3;24:1;대하 36:23;나 2:1)을 가리킬 때에도 사용된단어이다. 이 중 본절에서는 '알라'가 전쟁에 나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6:36
내 손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려 하시거든 - 기드온은 자신의 요구를 하나님께 아뢰기 전에 이미 이전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약속하셨던 바를(16절) 먼저 언급했다. 이것은 앞으로 있을 자신의 요구가 앞서의 하나님의 약속과 관련이 있음을 시사해 준다.
=====6:37
이전에 하나님께서는 기드온을 이스라엘의 구원자로 불렀음을 표징으로 보여 주셨던 적이 있다(20,21절).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드온이 다시 하나님께 표적을 구한 것은하나님의 구원하시는 능력에 대한 의심 때문은 아니지만 자신의 연약성에서 비롯된것이다(Keil). 이미 그에게는 하나님의 신이 충만히 임해 있었으나(34절), 그는 자신의 연약한 힘으로써 메뚜기 떼 같은 대적들과(5절) 싸워 이긴다는 사실이 실감나지 않았다. 그에 따라 좀더 확실한 하나님의 표적을 필요로 했던 것이다.
이슬이 양털에만 있고 사면 땅은 마르면... - 근동지방은 강우량이 적은 대신 밤에이슬이 많이 내려 식물을 자라게 한다. 성경 총론, '팔레스틴의 기후' 참조. 따라서기드온 자신이 준비한 양털에만 이슬이 내리고 사면 땅에는 이슬이 내리지 않으면 그것은 분명히 하나님께서 역사하신 기적으로 밖에 볼 수 없는 것이다.
=====6:38
이슬을 짜니 물이 그릇에 가득하더라 - 밤새 이슬이 사면 땅에 내리는 대신에 기드온이 준비한 양털에만 비가 와서 젖은 것처럼 많이 내리게 하시는 것은 하나님께 있어서는 마치 어린애 장난과 같은 일에 불과하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전혀 개념치 않으시고 기드온의 요구를 들어주셨는데 이로써 기드온은 어느정도 자신을 부르신 하나님의 부르심과 그분이 덧입혀 주실 능력에 대하여 확신할 수 있었을 것이다.
=====6:39
양털만 마르고...하옵소서 - 이러한 기드온의 요구는 앞에서 언급한 요구와 정반대된다(38절). 그렇지만 이 요구가 앞의 표적보다 더 어려운 것이라서 기드온이 하나님께 요구한 것은 아니다. 그 대신 이는 앞의 이적을 보다 더 확증하기 위한 목적에서 청한 요구일 뿐이다.
=====6:40
하나님 - 이스라엘 사회에서 사용된 신(神) 명칭 중 '여호와'가 고유 명사라면 '엘로힘'(하나님)은 보통 명사이다. 이 중 '여호와'란 명칭은 다른 이방신과 구별된 하나님을 언급할 때 주로 사용되었다. 반면 '엘로힘'은 보다더 넓은 범위로서 이방신까지포함한 모든 신중의 신이신 하나님을 언급할 때 사용되었다. 그런데 기드온이 하나님께 표징을 구하는 장면(36-40절)에서는 '여호와'가 한 번도 사용되지 않고 대신 '엘로힘'이 사용되었다. 이것은 기드온을 부르신 여호와께서(12절) 이스라엘의 하나님일 뿐만 아니라 자연 만물까지도 주장하시며 섭리하시는 '하나님'이심을 강조한 표현인 듯하다(Goslinga). 이에 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창 1:1 주석을 참조하라.
여선지자이며 사사인 드보라의 활약에 힘입어 40년 동안 태평 성대를 누린 이스라
엘 백성들이(5:31)사사 시대의 전형적인 모습대로 드보라 이후 다시 우상 숭배에 빠진
데 대한 기록이다. 즉 그 결과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징계의 채찍으로 말미암아 미디안
족속들의 침략을 받아 7년 동안 고통을 당해야 했다(1-5절). 그러자 그들이 다시 하나
님께 부르짖고(6, 7절) 이에 대해 하나님께서는 구원자로 기드온을 부르시는 악순환의
역사가 본장에도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11-40절).
이처럼 죄를 범한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필연적인 징계는 곧 신명기적 원칙
에 입각한 것이다(신 4, 28장). 이 신명기적 원칙은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에 근거한
것으로 구약 성경 중 역사서와 선지서에 가장 잘 나타나 있다. 즉 이스라엘 백성들이
죄를 범할 때엔 하나님의 공의가 발동되어 징계가 그들에게 임하나 그들이 회개하거나
하나님의 율법에 순종할 때에는 다시 국력(國力)을 회복하여 태평 성대를 누리게 된다
는 신명기적 .원칙이 역사서 및 선지서에 그대로 반영되어 있는 것이다. 그 가운데서
도 특히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정착해서 왕국 시대에로 접어드는 전환기적 역
사가 바로 사사 시대이므로 여기에는 더욱더 신명기적 원칙이 잘 반영되어 있다. 본장
은 한 선지자를 통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 원칙을 다시 한번 더 상기시켜
주시고 있음을 알 수 있다(7-10절).
이와 같이 구약에 서술된 이스라엘 역사는 우연의 산물도 아니며, 인간의 자기 개발
의 과정도 아니다. 오직 하나님의 뜻에 따라 움직여진 거룩한 역사이다. 그리고 이 역
사는 무의미한 것이 아니라, 역사의 주체되신 하나님의 안에서 그것의 참된 의미가 드
러나게 된다. 뿐만 아니라 무의미하게 신명기적 원칙에 입각해서 반복되는 역사인 것
같으나 실상은 하나의 목표, 곧 역사의 완성이자 메시야 시대의 도래(到來)를 향해 발
전하면서 진행한다. 즉 불완전한 구원자들 곧 사사나 왕들을 통해서 이스라엘의 역사
가 참의미를 채는 것이 아니라 그 역사는 영원 불변한 메시야 왕국의 도래를 향해 발
전적으로 나아간다. 이러 의미에서 구약이나 신약 시대의 역사는 모두 종말론적 성격
을 지닌다.
한편 본장에는 소명을 받은 기드온의 연약한 태도가 자세히 언급되어 있다. 기드온은
자신의 소명에 대해 의구심을 갖고 3번씩이나 하나님께 표징(表徵)을 구하는 등
(17-24, 36-40절)연약한 인간의 모습을 드러내었다. 성경에서 이처럼 나약한 기드온의
모습을 표시한 것은 그토록 연약한 그를 통해 역사하신 하나님의 크신 능력을 부각시
키기 위함이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시어(잠 3:34;
약 4:6; 벧전 5:5) 당신의 능력을 나타내신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함이었다. 이 점은
사도 바울도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고후 12:10)고 고백했던 것이다.
1. 이스라엘의 타락과 하나님의 징계(6:1 - 10)
타락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징계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남동쪽에 거하는 유
목민들을 들어 쓰신 장면이다. 이 유목민들은 아브라함의 후처 그두라의 자손들인 미
디안 족속들을 중심으로 이스라엘을 끊임없이 괴롭힌 아말렉 족속과 아라비아 지방에
거하는 동방사람들로 구성되어 있다(3절). 이들은 초지를 따라 이동하면서 유목 생활
을 했으며 그것으로 인해 이스라엘 백성이 파종하여 밀과 보리가 한참 자랄 때쯤이면
올라와서 그 곡식 밭에다 가축을 풀어 놓아 방목을 했으므로 이스라엘의 식량이 될 곡
식을 싹 쓸어 버렸다(4, 5절). 이들이 7년 동안 그렇게 이스라엘을 괴롭혔으니 어느
때보다도 이스라엘 백성의 생활은 어려웠을 것이다(1절).
또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러한 유목민들을 상대로 싸우기 보다는 커녕 산(山)으로
피하여 그곳에서 구멍과 굴을 파서 생활하게 되었다(2절). 이것은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을 떠나 살게 될 때 얼마나 연약해지는가를 잘 보여 주고 있다. 따라서 하나님
께서는 그들이 연약해진 원인을 그들에게 가르쳐 주시기 위해 먼저 선지자를 보내어
이스라엘의 구원을 위한 신앙의 각성을 촉구하셨다(7-10절). 분명히 그들이 압제자들
의 손에서 구원받기 위해서도 이러한 신앙의 회복은 필수 조건이었다.
이상과 같은 본문에서가우리는 이스라엘의 타락과 하나님의 징게, 그 다음 이스라엘
의 회개, 그 후 하나님의 구원으로 이어지는 사사 시대 역사의 전형적인 악순환을 분
명히 보게 된다. 사실상 사사 시대에 전형적으로 나타난 악순환의 역사는 그 시대에
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출애굽의 역사와 왕국 시대의 역사에도 그대로 반영되어 나타
난다. 뿐만 아니라 그것은 신약 시대 성도들의 삶 가운데에도 적용된다. 성도들이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죄의 생활을 청산하지 못하고 게속 죄 가운데 거할 때, 하나님께
서는 적절한 방법으로 징계의 채찍을 드셔서 성도로 하여금 그 죄악된 길에서 떠나게
하신다. 심지어 성도 자신이 자기 잘못을 깨닫지 못하고 있을 때에는 본문에서 선지
자의 보내심같이(7-10절)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충고자를 보내셔서라도 반드시 잘못
을 깨닫게 해주신다. 따라서 그러한 때 필요한 것은 오직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잘못
을 시인하고 돌이켜 죄악의 길에서 떠나는 것뿐이다.
이스라엘의 주변 국가들 - 이스라엘 역사는 주변 국가들로부터 끊임없이 침략과 도
전, 압제를 받는 질곡(桎梏)의 역사였다. 그 가운데서도 특히 사사 시대는 더욱 그러
하였는데 본문에서만도 미디안의 압제하에 외로움을 겪는 이스라엘의 모습이 부각되어
있다(1-6절). 이제 이와 관련 이스라엘 주변에 위치하면서 누차 이스라엘의 걸림돌이
되었던 나라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나라
메소보 티그리스, 유브라테스 강 아브라함 종이 이삭의 아내를 창 24:10
다미아 유역과 두 강 사이에 있 구하기 위해 갔던 곳
땅
사사 시대 때 8년간 이스라엘 3:8-10
을 압제함
모압 사해의 동쪽에 위치한 롯의 큰 딸이 아버지 롯에게서 창 19:
고원 지대 낳은 아들이 세운 나라 30-38
이스라엘이 출애굽 뒤 가나안 신 2:9
으로 향해 갈때 이 지역을
우회하여 지나감
모압 왕 발락이 이스라엘을 민 22:1
저주하기 위해 발랍 선지자 ; 수24
초청함 :9
이스라엘 백성은요단을 건너 민 22:1
기 전 모압 평원에 거주함 ; 수24
:9
사사 시대 때 모압 왕 에글론 3:12-
이 18년간 이스라엘을 압제함 30
블레셋 욥바에서 가사의 아브라함과 이삭이 블레셋 왕 창 26장
남쪽에 이르는 남 아비멜렉과 거래함
서부 해안의 길다
란 평야 지대 사사 시대때 이스라엘을 40년 12-16장
간 압제함
블레셋의 세력 확장으로 단 지 18:11,
파가 라이스로 이주함 29
미디안 아비아의 북서쪽 아 아브라함의 후처 그두라의 아들 창 25:
카바만 동해안에 위치 미디안이 세운 나라 2, 6
요셉을 은 20개 사간 상인들 창37:28
사람을 죽인 모세가 도망간곳 출2;15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민22:4,
모압 평지에서 쫓아내기 위해 7
미디안 장로들이 모압 사람
들과 관계를 가짐
이스라엘이 미디안과 싸워 민31:1-
5명의 왕과 발람을 쳐죽임 12 ;수
13:21
암몬 요단강과 사해 동쪽에 룻의 둘째 딸이 아버지 창19:38
위치 룻에게 서 낳은 아들이
세운 나라
출애굽한 이스라엘이 이 민 21:24
지역을 우회하여 지나감 ; 신2:19
-21, 37 ;
3:16
사사 시대 때 18년간 이 10:8
스라엘을 압제함
아람 일반적으로 요단 동편과 셈의 다섯번째 아들에게서 창10:22,
팔레스틴 북동부의 비옥 번성한 민족으로 족장 시대 23;25:20
한 지역에서부터 메소보타 에는 하란을 중심으로 거주함 ;28:2,5-7
미아에 이르는 지역
아람의 중심지역인 하란을 창22:20-
중심으로 거주함 24;24:4,
7,10
시돈 지중해 연안에 있는 시돈에 사사 시대에는 단 지파가 18:20
서 가사에 이르는 지역 이 지역을 점령함
두려움의 원인 -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하여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직전에 그들에게 가나안 백성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그들로 인해 떨지 말라고 권고하셨
다. 그와 더불어 이스라엘 백성의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하시면서 그들을
버리지 않겠다고 약속하셨다(신 31:6 ; 수 1:6 ; 10:25).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사 시
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우상 숭배에 빠짐으로 인해 가나안 땅의 신들을 두려워하며
출애굽 때 자기들을 능력으로 인도하여 내신 하나님을 잊어버렸다(9, 10절).
이처럼 하나님의 백성이 범죄하게 되면 두려워하지 않아도 될 것을 두려워하고 하나
님과의 교제도 점점 멀어지게 된다(시 53:5). 그러나 이와 반대로 하나님을 굳게 의
뢰하는 자에게는 결코 두려움이 없다. 심지어 개적이 일어나 진을 치며 위협해도 두
려워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어떤 대적보다도 강하시며, 하나님께서 당신
을 의뢰하는 자의 편이시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기 때문이다(대하 32:7 ; 시 3:6 ;
27:3 ; 118:6 ; 사 12:2).
그렇지만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을 떠나면 떠나는 순간부터 두려움은 시작된다.
사방의 모든 것과 심지어 지신이 좋아서 좇던 것까지도 그에게는 두려움의 대상이 되
어 그를 괴롭힌다. 더 나아가 하나님의 백성이 죄 가운데 거하게 되면 더욱더 마음의
평안이 사라지고 항상 쫓기는 자 같은 삶을 살게 된다. 그래서 지혜자는 '악인을 쫓
아오는 자가 없어도 도망한다'고 가르친다(잠 28:1).
결론적으로, 성도들이 자신들의 삶에 있어서 하나님과 교제가 끊어지고 헛된 것을 추
구할 때부터, 이전에 하나님 안에 거할 때에는 두려워하지 않던 것을 가려워하며 평강
을 잃어 버린다. 그리고 더욱 죄의 길에 빠지게 되며 쫓아오는 자가 없어도 두려워하
게 된다. 즉 성도들에게 두려움이 엄습해 오는 것은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함과 더 나
아가서는 자신의 죄로 인한 것이다. 따라서 이 두려움을 쫓는 길은 하나님을 전적으
로 의뢰함과 동시에 죄를 회개하며 하나님과 교제를 회복하는 길밖에 없다.
2. 여호와의 사자와 기드온의 대면(6:11-24)
기드온이 압제자인 미디안 사람들의 눈을 피해 포도주 틀에서 밀을 타작할 때 하나
님의 사자가 그를 찾아와(11, 12절)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다. 그 대화의 내용은 신정
설(神正設, Theodicy)의 문제였다. 즉 그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계
신다면, 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버려 이방인들의 압제로 인해 고통당하게 하시는
가의 문제였다(13절). 이러한 기드온의 질문은 '하나님께서 택한 백성은 결코 망할
수 없으며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면 그의 백성이 적들에게 억압을 당할 수 없다'는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이같은 질문에 대해 하나님의 사자는 기드온 그를 통해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것이라는 의사 표명이 분명히 한다(14-16절). 그러자 기드온은
그러한 말을 하는 여호와의 사자가 곧 하나님이심을 증거해 줄 만한 표징을 보여 달라
고 요구한다(17, 18절). 이에 여호와의 사자는 그 요구를 흔쾌히 들어 주었는데 이를
기념하여 기드온은 여호와의 사자가 나타났던 곳에 제단을 쌓고 이름을 '여호와 살롬'
이라 칭한다(19-24절). 결국 이로써 기드온의 의문은 명쾌히 풀렸다 할 수 있다.
그러나 이상과 같은 본문에서 우리는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이 있다. 그것은
곧 기드온이 여호와의 사자와 대화함에 있어서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명령을 거스
려 우상 숭배한 것을 간과했다는 점이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이 죄를 지어
도 그들을 영원히 버리시지 않고 그들과 함께 하신다. 그렇지만 그들이 죄에 빠졌을
때에는 침묵하시거나 징계의 채찍을 드신다. 이스라엘이 7년 동안 미디안의 압제를 받
은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드온은 이러한 사실을 인식하지 못했
던 것이다.
한편 오늘날 많은 성도들은 하나님을 믿으면 자신의 어려운 모든 처지가 금방 해결될
것으로 믿고 있다. 그리고 자신이 아무리 죄를 범하여도 하나님께서는 자기를 버리시
지 않을 뿐 아니라 징계하시지도 않는다고 믿고 있다. 그 근거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시므로서 우리의 허물과 죄와 질고까지도 담당하셨다는 사실을 이야기한
다. 다시 말해 성도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책이 따르지 않는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이것은 바로 기드온과 같은 어리석음을 범하는 잘못된 지식이며 확신이다. 그
리고 하나님을 사랑의 하나님으로만 알고 공의의 하나님으로는 알고 있지 않다는 증거
가 된다<신 30:1-10 강해, 공의와 사랑의 하나님>. 성경 전체에서 하나님의 공의가 무
시된 곳이 있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 야고보 사도는 분명히 단언하기를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약 2:26)고 말했다. 또한 사도 바울도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
요"(롬 6:1)라고선언했다. 덧붙여서 그는 "악을 행하는 각 사람의 영에게 환난과 곤고
가 있으리니"(롬 2:9)라고 선포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자신에게 몰아친 고통이나 환
난을 하나님의 탓으로 돌려선 안되고 무엇보다도 자신의 신앙과 삶을 점검하여 그 가
운데 해결책을 찾아야 한다.
하나님께서 함께 한 사람 - 기드온은 므낫세 지파 중에서 가장 미약한 집안의 출신
이며, 그 미약한 가문 중에서도 가장 보잘것 없는 사람이었다(5절). 그러나 그러한 기
드온에게 하나님의 신이 함께 하시자 그는 이스라엘을 압제자의 손으로부터 구원하는
지도자가 되었다. 마찬가지로 모세의 시종이었던 여호수아가 정복을 위해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뽑혔을때에도 하나님께서는 그와 함께 하셨다(수 1:9). 그래서 그는 모든 가
나안 백성이 두려워 떠는 존재가 되었다. 또한 옷니엘에게도 하나님의 신이 임하시니
그도 메소보다미아 왕 구산 리사다임을 물리치고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사사가 되었다
(3:10).
그밖에도 사울에게 하나님의 신이 임하였을 때(삼상 10:7) 그는 이스라엘의 왕이 되
어 적과 싸울 때마다 승리할 수 있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신 증거였다
(삼상 10:8). 그러나 그가 범죄하므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그를 떠나셨을 때(삼상
16:14), 그는 두려움에 잠겼을 뿐바만 아니라 전쟁에서 비참한 최후를 맞이 해야 했
다. 마찬가지로 비천한 목동이었던 다윗 역시 하나님의 신이 임하심으로 이스라엘의
왕이 되어(삼상 16:13) 이스라엘을 유사 이래 가장 강한 국가로 일으켰다. 그는 평생
동안 하나님께서 자기와 함께하심을 믿고 의지하면서 살았던 인물이다(시 13:5). 이외
에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늘로 승천하시기 전 제자들에게 항상 그들과 함께 계시겠다
고 약속하시며(마 28:20), "성령이 너히에게 임하시면 너히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다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행 1:8)말씀하셨다. 그
래서 겁 많고 비천했던 그의 제자들도 결국 성령을 받아 세상이 감당하지 못할 일을
할 수 있게 되었다.
한편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임마누엘의 하나님으로서(사 7:14; 마 1:23)사람들과 함께
하시기 위하여 이 땅에 오셨다. 그리고 부활 승천 후 보헤사 성령 하나님을 보내시어
성도들과 함께 하신다. 더욱이 성도의 몸은 성령이 거하시는 전이 되었다(고전 3:16).
이런 의미에서 모든 성도는 하나님께서 함께 한 사람이다. 다만 각기 받은 바 은사가
달라 하나님의 교회에서 다른 직분을 맡아 봉사하는 것이다(고전 12:4-31).
그러나 앞에서 예를 들었던 인물들이 받은 것과같은 은사는 특별히 주어진 것임에 틀
림없다. 즉 하나님께서 특별한 목적을 위해 특별한 상황 가가운데 비상한 은사를 그들
에게 주셨던 것이다. 그렇다고 특별히 은사받은 한 사람을 통해서만 하나님께서 일하
시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을 돕는 사람들에게도 주셨다(7:7).
특히 하나님께서 당신과 언약관계에 있는 백성들에게 주시는 그 '평강'은 세상 사람
들이 샐각하는 '평강'과는 전혀 다르다. 세상 사람들은 '평강'이므로(요 16:33) 세상
적인 평강과는 전혀 성격이 다르다(요 14:27). 곧 이 '평강'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에 달리시므로서 성도들에게 주어진 '평강'이요(사 53:5 ; 골 1:20), 죄의 굴레에서
벗어난 '평강'이다(마 11:28). 그래서 바울과 실라는 옥주엥서 고난을 받으면서도 찬
양하며 기뻐할 수 있는 평강을 누렸던 것이다(행 16:25).
이처럼 하나님께서 성도에게 주시는 평강은 세상의 고통과 환난을 극복할 수 있는 진
정한 평강이며, 동시에 육체의 평강 뿐 아니라 무엇보다 영혼의 평강이다. 그리고 이
것은 '평강의 왕'이 되신 그리스도께서(사 9:6, 7) 당신을 믿는 자들에게 주시기로 약
속한 평강이며(학 2:9), 아무도 빼앗아 갈 수 없는 평강이다(롬 8:39). 하나님께서는
바로 이 평강을 당신의 언약 백성들에게 주시기로 약속하셨다(시 29:11). 그러기에
성도는 날마다 하나님 안에 거하여 이 평강의 복을 누릴 뿐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이 평강을 나눠 주어야 할 것이다. 더욱이 주님께서도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
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마 5:9)라고 가르치셨다.
3. 기드온의 종교 개혁(6:25-32)
기드온이 사사로서 하나님의 소명을 받은 후 제일 먼저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바알
의 단을 헐며 아세라 상을 찍는 등(25-28절) 종교 개혁을 단행하는 장면이다. 그리고
이에 대하여 성읍 사람들이 쟁론을 벌이나 하나님의 보호하에 기드온이 손가락 하나
다치지 않는 장면이다(29-32절).
사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떠나게 만들었으며 그로 인해 하나님의 징계 아래서
7년 동안 고통스러운 생활을 하게 했던 웡흉(元兇)인 우상들은 기드온 당시 뿐만 아니
라 전체 이스라엘 역사 가운데 이스라엘 백성에게 항상 걸림돌이 되었다. 때문에 이
미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전에 이 우상 숭배를 금지하
셨다(출 23:32, 33 ; 34:12 ; 신 4:23-28).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
안 땅에 정착해서 살 때부터 가나안 땅의 각종 우상이 이스라엘 백성의 종교에 서서히
침투해 들어왔으며 그들 사이에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수백 년 후 요시야 왕이 철저
한 종교 개혁을 단행하기까지(왕하 23:1-25) 이스라엘 사회에 만연했던 우상 숭배의
관습은 지속적으로 존속했다.
아무튼 기드온의 종교 개혁은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정착한 후 우상 숭배가
계속되었을 때 처음으로 시도된 것이었던만큼 주변 사람들로부터 미움을 사 생명의 위
협을 받을 정도로 위험한 일이었다(30절). 그러나 이러한 시대적 상황 속에서도 그가
하나님의 명령울 좇아 바알의 단을 헐며 아세라 목상을 찍어 종교 개혁을 시도했다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기드온의 불타는 신앙을 보여 준다.
한편 한국 기독교가 정착하면서 그 뿌리를 내린 지도 어언 100년이 지났다. 그러나
이에 못지 않게 한국 교회는 토속 신앙인 샤머니즘에 의해 복음의 핵심이 변질돠어 그
것이 곧 진리인 것처럼 왜곡되어 있는 부분이 많다. 그리고 잘못된 토착화 운동의 영
향으로 또 다른 측면에서 복음이 변질되어 있는 부분도 많다. 이러한 현상들로 말미
암아 한국 교회는 복음적인 성령 운동을 펼치는데 많은 애로를 겪고 있으며 극단적으
로는 성령운동을 무시하는 부류들의 도전조차 받고 있기까지 하다. 이 부류의 특징은
말씀에 대한 논쟁은 있으나 실상 가슴은 싸늘하게 식어버린 이성적 신앙 속으로 빠져
버렸다는 점이다. 이 모두는 절름발이의 신앙 유형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오늘날 한국 교회의 지도자들은 바로 이 점에 유의하야 올바른 성령 운동과
더불어 철저한 말씀 중심의 신앙 생활을 회복하는 데에 전심 전력해야 할 것이다. 즉
지도자들은 기독교의 복음을 변질시키는 모든 이교적인 운동을 배격함과 동시에 하나
님의 능력이 되는 복음이 이 땅에 확산될 수 있도록 목숨을 건 개혁자가 되어야 하며,
요시야 왕과 같이 철저한 개혁자적 정신을 지녀야 한다. 이라한 지도자야말로 "충성
되고 지혜있는 종이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사람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 줄 자
"(마 24:25)임에 틀림없다.
그릇된 열심 - 본문에는 기드온이 바알의 단을 훼파하고 아세라 상을 찍어 여호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린 것을 보고 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기드온을 찾아 죽이고자 하
는 장면이 나온다(30절). 기드온은 그들에게 참으로 사는 길을 주기 위해서 그렇게
행했으나 그들은 그의 행동이 자기들을 파멸로 몰아넣는 거승로 생각하여 그러한 행동
을 취했던 것이다. 그런데 마찬가지로 신양의 사도 바울도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예수 믿는 성도들을 죽이기 위해 온갖 열심을 다했었다. 그는 백성들
이 스데반 집사를 죽이는 일에 증인 노릇을 했으며, 다메섹에 있는 성도들을 잡아 예
루살렘으로 데려오기 위해 대제사장의 공문을 가지고 다메섹으로 향해 갈 만큼(행
9:1, 2) 유대교에 열심을 내었었다. 그밖에 예수 당시 대제사장과 바리새인과 서기관
무리 역시 하나님에 대한 잘못된 열심으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았었다. 그 가운데
에서는 성도들을 핍박하고 죽이면서 그렇게 행하는 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예(禮)라고
말하는 자가 있기까지 했다(요 16:2).
이와 같이 성도라 자처하는 사람들 중에서도 잘못된 교리와 신앙에 의해서 그릇된 열
심을 내는 자들이 있을 수 있다.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을 똑같이 고백하면서도 복음
의 참된 본질을 잘못 이해하며 자기가 가고 있는 길을 진정 죽음의 길인지 모르고 열
심히 가는 자들이 많이 있다. 갈라디아 교회를 위해 사도 바울은 힘써 복음의 씨를
뿌려 놓았는데,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자들이 그 교회에 들어와 본질을 변하게 하여
힘써 바울의 사도권을 부정했다(갈 1:6-9). 이러한 자들은 서머나 교회(계 2:8, 9)나
버가모 교회(계 2:12-14)와 같이 그릇된 교훈으로 열심히 성도를 미혹하여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의 자유를 박탈하려는 자들이다(갈 2:4).
따라서 성도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착념하여 좌로나 우로 치우치지 말고 바른 복음 안
에 거하도록 힘써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언제라도 갈라디아 교회와 같이 다른 복음
에 쉽게 넘어갈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염두에 둔 사도 바울은 오늘날 우리들에게 선
줄로 아는 자 넘어질까 조심하라고 권고하고 있다(고전 10:12).
4. 하나님께 다시 표징을 구한 기드온(6:33-40)
하나님의 명령을 좇아 바알의 단을 헐고 아세라 상을 찍어 그 나무로 하나님께 제
사를 드린 기드온(28절) 이제 미디안 사람과 아말렉 사람 그리고 동방 사람들을 대적
하기 위해 백성들을 소집하는 장면이다(34, 35절). 그리고 그런 후 하나님께 표징을
구하는 장면이다(36-40절).
기드온은 자신의 미약한 힘으로 메뚜기 떼 같은 적들을(5절 ; 7:12) 이긴다는 것이
불가능함을 잘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기드온은 그들을 한 사람 치듯 쉽게 쳐서 승리
하게 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확인하기 위해(16절) 앞에서 이어(19-24절) 재차 하
나님께표징을 구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이 아니고 자신
의 소명에 대하여 재확인하는 절차였다. 이러한 예는 힛,기야 왕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다. 즉 그는 자신의 생명이 연장되었음을 확실히 확인하기 위해 하나님께 표징을
구했었다. 이때 하나님께서는 그를 책망하지 않으시고 그의 요구대로 표징을 보여 주
었다(왕하 20:8-11).
이처럼 사람이 하나님께 표징을 구하는 것은 인간의 연약성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인간의 연약함을 잘 아시기 때문에 당신의 약속이 확실히 성취될 것임을 보요
주시기 위해 표적을 베푸셨다(신 29:2, 3 ; 삼상 2:31, 34 ; 왕상 13:3-5). 그리고
당신의 말씀이 신실하다는 사실을 보여 주시기 위해서도 이 표적을 구하는 것은 잘못
이 아님을 알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말라기 선지자를 통해 십일조를 하여 당신의 신실하신 것을 시험해 보
라고 십일조 바치기를 게을리한 이스라엘 백성에게 말씀하시기까지 하셨다(말
3:7-10). 또한 도마가 예수의 부활하셨다는 소식을 믿지 못하고 "내가 그 손의 못자
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
지 아니하겠노라"(요 20:25)고 했을 때, 다시 제자들 앞에 나타나신 예수님께서는 도
마에게 그 손과 옆구리를 만져 보게 하신 후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
라"(요 20:27)고 말씀하셨다. 물론 예수님께서는 보고야 믿으려는 도마의 합리적 신
앙을 책망하셨지만, 도마가 원하는 요구를 둘어 주셨던 것이다. 이것은 표징을 구하
는 자가 믿음이 연약하여 표징을 구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응답하심은
그의 신앙에 확신을 주시기 위함임을 암시해 준다.
풍성한 하나님의 역사 - 본문에는 기드온이 하나님께 표적을 구했을 때, 하나님께
서 풍성하게 그의 요구를 채워 응답하신 장면이다. 즉 기드온이 이슬에 젖은 양털을
짜니 물이 그릇에 가득할 정도로 하나님께선 기드온에게 확실히 응답해 주셨던 것이다
(38절). 그런데 이처럼 풍성한 하나님의 역사는 예수님의 사역 가운데서도 찾아볼 수
있다. 즉 예수님께서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5,000명을 먹이셨을 때 온
무리가 먹고도 남은 것이 열 두 광주리에 가득찰 정도였었다(마 14:20). 그리고 떡
일곱 개와 생선 두어 마리로 4,000명을 먹이셨을 때에도 남은 조각이 일곱 광주리에
가득찰 정도였었다(마 15:37).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풍성한 하나님의 역사를 나타내실 때 하나님께서는 당신
에게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신다고 선포하셧다(마 7:11). 예수님께서는 이 약
속의 말씀을 제자들을 부르실 때 실증시켰다. 베드로와 그의 동무들이 고기잡이를 할
때, 밤새도록 그들이 고기를 한 마리도 잡지 못했으나 베드로가 예수님의 말씀을 의지
하고 그물을 내렸을 때 그물이 찢어질 만큼 많은 고기를 잡았던 것이다(눅 5:4-6).
한편 이상과 같은 사실과 관련하여 우리가 기억해야 할 점이 있다. 그것은 곧 하나
님의 풍성한 역사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들에게만 일어난다는 점이다. 이러
한 약속은 이미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베푸셨던 바 있다(신 28:1-6). 그리고 신약시대
에는 예수님께서 공생애 동안 사람과 함께 계심으로써 확실히 이 약속을 실천하고 게신다(요 16:13 ; 행 1:4, 8 ; 2:17-22). 근본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선 하늘과 땅의 모
든 권세를 가지신 분으로서(마 28:18) 우리와 항상 함께 계시기 때문에(마 28:20) 그
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를 부요케 하신다(롬 10:12). 그러므로 성도들은 약속에신실하신 그분께 기도하여 구함으로써 항상 하나님의 풍성한 역사를 체험할 수 있는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