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1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모든 지파를 세겜에 모으고 - 23장에 이어서 여호수아는 다시한번 고별 연설을 하기 위해 이스라엘의 각 지파지도자들을 세겜에 소집하였다. 특별히 소집장소를 세겜으로 정한 데에는 다음과 같은 큰 역사적 의의가 그곳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즉 '세겜'(Shechem)은 (1) 일찍이 하브라함이 가나안 땅에 들어와서 처음으로 제단을 쌓은 성스러운 곳이며(창 12:6, 7) (2) 하란에서 돌아온 야곱이 '디나 사건'(창 34장) 이후 크게 각성하고 이방의 각종 우상들을 묻어버린 개혁의 장소일 뿐 아니라(창 35:4) (3) 가나안 땅에 들어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약속대로 계약을 새롭게 한 맹세의 장소였기 때문에(8:30-35),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소집하여 언약을갱신하기로는 가장 적합한 장소였던 것이다. "이와같이 에발 산과 그리심 산 사이에 위치하고 있는 이곳은 족장 시대 이후 줄곧 신성한 장소로 여겨져 왔기 때문에 이곳에서 우상 척결 맹세를 중심으로 언약 갱신이라는 신성한 일을 한다는것은 그 자체로서 큰 효과가 있었다"(Hengstenberg, Keil & Delitzsch, Vol. 2. p. 226-227).
장로들과 그 두령들과 재판장들과 유사들 - 23:2주석 참조.
그들이 하나님 앞에 보인지라 - 여기서 '하나님 앞'이라는 말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견해가 있다. 즉 (1) 언약궤가 세겜으로 옮겨져 18:6;19:51에서처럼 '언약궤 앞'을 가리키는 말이라고 하는 견해. (2) 제단이 세겜에 세워져 있음을 뜻하는 견해 등이다. 그러나 카일(Keil)은 헹스텐베르그(Hengstenberg)의 입장을 따라 이러한 견해들을 다음과 같이 비판한다. 즉 여기서 '여호와 앞'이란 일반적인 의미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뜻한다고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더구나 2절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여호수아에게 임한 것을 볼 때, 본절의 '여호와의 앞'이란 일반적으로 하나님의 면전에서 거룩한 종교적 의식을 치루는 신전 사상(神前思想)을 반영하는 말이라고 볼 수 있다(Ibid)는 것이다.
=====24:2
아브라함의 아비, 나홀의 아비 데라 - 창 11:26에 따르면 데라(Terah)는 아브라함, 나홀, 하란 세 아들을 두었는데, 장자 하란은 본토 갈대아 우르에서 일찍이 죽었기 때문에(창 11:28) 본절에서는 아브라함과 나홀만이 언급되었다. 한편, 아브라함과 나홀의 부친 데라는 갈대아 우르에서 살다가 그의 가족을 데리고 가나안 땅으로 가는 도중에 하란에 이르러 그곳에 거주하였으며, 205세를 살다가 그곳에서 죽었다(창 11:31, 32).
강 저편에 거하여 - 여기서 '강 저편'은 유프라테스 강 건너편 지역으로, 아브라함의 조상들이 거주했던 '갈대아 우르'(Ur of the Chaldeans) 지방을 가리킨다(창 11:31).
다른 신들을 섬겼으나 - 여기서 '다른 신(神)'은 아브라함의 조상들이 섬겼던 우상으로, 당시 갈대아 우르 지방의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섬겼던 월신(月神, moon-god)을 가리킨다. 그런데 아브라함도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기전 당시 이러한 우상 숭배에 빠졌었는지는 분명히 알 수 없다. 그러나 한가지 확실한 사실은 아브라함이 비록 우상 숭배에 빠지지는 않았다고 할지라도, 그역시 우상의 영향권에서 완전히 벗어난 것은 아닐 것이라는 점이다(Keil). 이러한 사실은 결국 이스라엘이 만백성 중 선택받게된 것이 결코 그들의 공로 때문이 아님을 보여준다. 즉 그들도 옛적 조상 때에는 우상을 섬기고, 그 영향권 하에 있었던 똑같은 이방 족속이었으나, 오직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총의 소명(부르심)에 의해 구별된 민족, 언약의 백성이 되었던 것이다. 여호수아는 지금 이 은혜로운 사실을 회고하면서, 이 점을 분명히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일깨워 주고 있었던 것이다.
=====24:3
내가 너희 조상 아브라함을 강 저편에서 이끌어내어 - 본 구절에는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를 떠나 유프라테스 강을 건넌 것이 아브라함의 공로 때문이 아니라 오로지 하나님의 주권적 은총 때문임이 강조되고 있다. 다시말해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된 것은 결코 자발적 의사로 된 것이 아니라, 우상 숭배의 도시 우르(Ur)로부터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오로지 그 부르심을 따라 행한 것 뿐이다(창 15:7). 따라서 이스라엘의 역사는 은총의 역사인 것이다. 한편, 이러한 하나님의 주권적 은총은 신약 시대에도 적용이 되는데, 즉 우리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구원받게 된 것은 오직 값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은총 때문이지(엡 1:6, 7) 결코 우리의 공로 때문이 아닌 것이다(롬 3:23, 24).
그에게 이삭을 주었고 - 아브라함이 나이 100세 때에 본처인 사라를 통해 얻은 이삭은 실로 하나님의 오래고 깊은 경륜 하에 태어난 '약속의 씨'였다(창 15:4;17:19, 21;18:14). 그런 의미에서 여기에 아브라함의 다른 아들인 이스마엘(창 16:15)은 언급되지 아니하고, 이삭만이 언급된 것은 바로 그만이 하나님의 택함받은 약속의 자녀였기 때문이다(갈 4:28-31). 한편 여기서 '주었다'(* , 에텐)란 표현은 이삭의 출생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에 의한 것임을 강조해 주고 있다(창 21:1-7).
=====24:4
이삭에게는 야곱과 에서를 주었으며 - 이삭은 나이 60세에 리브가로부터 쌍동이인 두 아들 야곱과 에서를 낳았다. 그러나 야곱과 에서의 출생 역시 간절한 간구 끝에 얻어진 기도의 열매로(창 25:21), 하나님의 섭리와 경륜을 따라 이삭에게 주어진 자녀들이었다(창 25:23).
에서에게는 세일 산을 소유로 주었으나 - 세일(Seir)은 에돔의 산악 지대로서 아라바 저지대 동쪽에 위치해 있다. 즉 이 세일 산 지대는 남쪽으로 아르논 저지대에서부터 지금의 아라바 근처에까지 광활하게 펼쳐져 있는 험준한 에돔의 산악 지대를 가리킨다. 한편, 가나안 땅에서 분리된(창 36:6-8) 에서와 그의 자손들인 에돔(Edom) 족속은 당시 이곳에 거주하고 있던 원주민인 호리 족속을 쫓아내고 이곳에 거주하였다(창32:3;33:14, 16;신 2:22).
야곱과 그 자손들은 애굽으로 내려갔으므로 - 야곱과 그의 후손들이 애굽으로 내려가는 기사는 창 46:1-7에 잘 설명되어 있다. 당시 야곱은 하나님의 지시를 받고(창 46:2-4), 마침내 애굽으로의 이주를 결행하게 되었는데(창 46:5-7), 이는 일찍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창 15:13-17)가운데 그의 후손들이 이방의 객이 될 것이라는 예언이 성취된 사건이었다. 아울러 야곱 일행의 '입(入)애굽 사건'은 역설적으로 '출(出)애굽 사건'의 전조가 되며, 결국 '가나안 입성'을 위한 준비 기간이 된 것이다. 결국 이는 야곱 일행의 '입(入)애굽 사건' 역시 하나님의 오묘하신 섭리의 결과였음을 역력히 보여 준다.
=====24:5
내가 - 이스라엘의 역사를 간략히 회고하는 내용(2-13절) 중 이 '내가'(I)라는 말이 원문상 16번이나 나오는데, 이는 이스라엘 역사를 홀로 주관 섭리 역사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을 생생히 드러내 보여 준다.
모세와 아론을 보내었고 - 이 내용은 모세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다섯 번에 걸쳐 사양과 변명(출 3:11-13;4:1, 10, 13)을 하였지만, 결국 그의 대변자 아론과 함께 애굽 왕 바로에게 가게 된 사실을 가리킨다(출 4:14-17).
애굽에 재앙을 내렸나니 - 출 7:14-12:36에 기록되어 있는 (1) 피 재앙 (2) 개구리 재앙 (3) 이 재앙 (4) 파리 재앙 (5) 가축의 악질 재앙 (6) 독종 재앙 (7) 우박 재앙 (8) 메뚜기 재앙 (9) 암흑 재앙 (10) 장자의 죽음 재앙 등 10가지 재앙을 가리킨다<출 12:29-36 강해, 여호와의 10대 재앙>. 내가...그 후에 너희를 인도하여 내었었노라 - 이 말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것이라는 당신의 약속대로(창 15:14;출 3:8-10) 초자연적인 10가지 재앙을 통해 애굽을 치심으로, 실제로 그들을 애굽의 압제로부터 구원해 내신 사실을 뜻한다(출 3:20).
=====24:6
애굽 사람이...너희 열조를 홍해까지 따르므로 - 이 구절과 7절 상반절의 내용은 출애굽 직후로부터 홍해 도하(渡河)까지에 관한 내용으로, 이에 대해서는 출 14장에 상세히 설명되어 있다. 본문에서는 이러한 모든 사건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권능에 의해 되어진 것임이 강조되고 있다.
=====24:7
나 여호와께 부르짖기로 - 여기서 '부르짖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차아크'(* )는 '날카로운 비명을 지르다'란 뜻으로, 여기서는 위험한 위기 상황에 처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간절히 구원해 달라고 요청하는 것을 뜻한다. 출 14:15 주석 참조. 출애굽기에는 '출애굽 사건'과 관련하여 이러한 표현이 자주 나온다. 그러므로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힘만으로는 불가능한 출애굽을 오직 하나님께서 당신의 권능으로 가능케 하셨다는 사실을 입증해 준다.
너희와 애굽 사람 사이에 흑암을 두고 - 애굽 군대가 이스라엘 백성을 홍해까지 추격해 왔을 때, 이스라엘 진(陳) 앞에 서있던 여호와의 사자가 뒤로 옮겨가자 구름기둥도 앞에서 뒤로 옮겨져 애굽 진과 이스라엘 진 사이에 이르러 서게 되었다. 그러자 구름과 흑암이 그들 사이에 임하여 이스라엘 백성의 진에는 광명이, 그리고 애굽 군대의 진에는 흑암이 내려 덮은 사실을 가리킨다(출 14:19, 20).
바다를 이끌어 그들을 덮었었나니 - 이 내용은 출 14:21-31에 잘 나타나 있다. 즉 하나님께서는 큰 동풍으로 밤새도록 바다물을 물러가게 하심으로 홍해를 좌우로 갈라 이스라엘 백성들로 무사히 건너게 하셨으나, 애굽 군대가 건너갈 때는 그 물을 도로 합쳐 그들을 바다속에 수장시켰던 것이다. 실로 출애굽을 종결짓는 이 홍해 도하 사건은 그 시종(始終)이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 외에는 그 어떤 것으로도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이적적 사건의 연속이었다.
너희가 여러 날을 광야에 거하였었느니라 - 여기서 '여러 날'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보낸 40년 기간을 가리킨다(Keil). 이와같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40년 동안이나 방랑했던 것은 하나님께 대한 그들의 불순종과 죄 때문이었다(민 14:33, 34).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그들의 죄악에도 불구하고, 결국 그들로 하여금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 그 땅을 정복하게 하셨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총인 것이다.
=====24:8
요단 저편에 거하는 - 여기서 '요단저편'은 곧 '요단 동편 지역'(Transjordan)을 가리킨다(민 32:19). 즉 이 말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을 건너기 전에는 요단 서편의 가나안 땅을 가리켰지만(신 3:20), 요단 강을 건넌 후에는 요단 동편 땅을 가리키게 되었던 것이다(2:10;7:7;20:8). 아모리 사람의 땅...멸절시켰으며 - 이 요단 동편 땅은 본래 아모리 족속의 두 왕 시혼과 옥의 땅이었는데, 이 땅은 결국 이스라엘에 의해 점령되고 말았다(민 21:21-35). 그리고 나중에 기업 분배시 이 땅은 르우벤, 갓, 므낫세 반 지파에게 주어진다(13:8). 이와같이 이스라엘이 강력한 아모리 족속의 두 왕을 진멸시키고 그 땅을차지할 수 있었던 것은 거듭 강조된 바 오로지 하나님의 기적적인 간섭 때문에 가능했다(신 2:24;3:2).
=====24:9
모압 왕 십볼의 아들 발락...저주케 하려 하였으나 - '발락'(Balak, '약탈자', '파괴 자'란 뜻)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가나안으로 진행하여 모압 평지에 진 쳤을 당시의 모압 왕이었다. 때에 발락은 이스라엘이 아모리 사람들에게 행한 모든 두려운 일들을 보았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을 저주하기 위해 당시 이방의 유명한 술사(術士) '발람'(Balaam)을 고용했었다(민 22:1-6).
=====24:10
발람을 듣기를 원치 아니한고로...축복하였고 - '발람'(Balaam)은 그 이름의 의미가 '탐닉하는 자', '멸망시키는 자'를 뜻하는데, 이러한 이름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멸망시키고자 했던 그의 행동과 잘 부합된다. 즉 그는 하나님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탑욕에 눈이 어두워(벧후 2:1-22;계 2:14), 결국 발락의 제의를 받아들여 3번이나 이스라엘을 저주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의 적극적인 개입으로 오히려 이스라엘을 축복하였다(민 23:1-24:9). 이와갈이 발람이 이스라엘에게 저주를 하지 못하고 축복을 하게 된 것은 오직 하나님의 주권적인 간섭때문이었는데, 결국 이로 인해 발람의 저주를 통해 이스라엘을 패망시키려 한 모압 왕 발락의 계획을 좌절시켰던 것이다. 결국 이스라엘 백성들도 모르는 사이 그 막후에서 일어난 이 발람의 사건에까지 하나님께서 적극 간섭하심으로써,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주위의 온갖 사악한 세력들의 손으로 부터 건져 내었던 것이다.
=====24:11
요단을 건너 여리고에 이른즉...너희의 손에 붙였으며 - 본절은 이스라엘이 가나안땅을 정복한 사실에 대해 포괄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즉 요단 강 도하 후 이스라엘이 강력한 가나안의 모든 족속을 진멸할 수 있었던 것은 오직 하나님의 능력 때문이었음이 강조되고 있는 것이다. 한편 여기에 기록되어 있는 가나안의 여러 족속들에 관해서는 서론, '가나안의 여러족속'들 및 9:1-2 강해, '가나안의 일곱 족속'부분을 참조하라.
=====24:12
왕벌을 너희 앞에 보내어 - 여기서 '왕벌'(* , 치르아)은 사해(死海) 주변의 사막을 포함하여 팔레스틴의 여러 지역에서 찾아볼 수 있는 곤충으로, 그 침은 큰 피해를 줄수 있는 독(毒)을 함유하고 있다. 따라서 이런침을 가진 왕벌이 사방에 있을 때 군인들이 이를 잘못 건드려 큰 어려움을 당하곤 했다. 이런 이유로 이 왕벌은 전쟁의 승패에까지 영향을 미쳤으며, 따라서 여기 언급되어 있는 왕벌이 문자 그대로의 '왕벌'(hornet)을 가리킬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어떤 학자는 여기의 왕벌을 애굽 왕 바로를 가리키는 상징물로 간주하여, 이 구절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 도착하기 이전에 왕벌, 즉 애굽 왕이 가나안 족속을 먼저 침으로써 가나안 세력을 약화시켜 결과적으로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복을 도왔다고 해석하기도 한다. 이 외에도 왕벌을 은유적으로 해석하여, 가나안 족속에게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난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재해 현상'으로 보기도 하며, 또는 가나안 족속들의 마음 속에 주입시킨 왕벌과 같은 '공포심'을 의미한다고 보기도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서 '왕벌'을 문자 그대로의 '왕벌'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복 전쟁에 직접 또는 간접으로 영향을 미쳤던 '하나님의 모든 도움'을 또한 가리킨다고 봄이 가장 무난할 것 같다. 출 23:28;신 7:20 주석 참조.
두 왕 - 이스라엘이 요단 강을 건너기 전에 진멸하였던 아모리 사람의 두 왕, 곧 헤스본 왕 시혼(Sihon)과 바산 왕 옥(Og)을 가리킨다(민 21:21-25). 이 두 왕의 진멸 사건은 구약 시대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위해 역사하신 여러 기적적인 사건 중의 하나로 자주 등장한다.
너희 칼로나 너희 활로나 이같이 한것이 아니며 - 이와 동일한 표현이 시 44:3에도나타나고 있는데, 이것은 가나안 정복이 결코 이스라엘 군대의 군사력에 의해서 성취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서 성취된 것임을 직접적으로 강조해 주고 있는 것이다. 비록 이스라엘이 칼이나 활 등의 군장비를 사용해서 이긴 것은 사실이라 할지라도 궁극적으로 그들이 가나안을 정복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의 군장비가 뛰어났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군장비 면에선 철병거까지 보유한 가나안 족속이 훨씬 우세하였다. 따라서 어느 면으로 보더라도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복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때문이었다.
=====24:13
건축지 아니한 성읍...심지 아니한...과실을 먹는다 하셨느니라 - 본절은 신 6:10, 11에서 인용된 말로, 여기서도 가나안 정복 전쟁결과 그 승리의 열매를 향유함이 이스라엘 백성의 수고와 노력에 의한 것이 아니라 오로지 하나님의 축복에 의한 것임이 강조되어 있다. 사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가나안 땅과 성읍을 그저 취하기만하면 되었다. 따라서 비록 그들이 몸소 전쟁을 하긴 하였지만, 그러나 그 모든 결과는 하나님께로부터 거저 얻은 선물과도 같은 것이었다.
=====24:14
그러므로 이제는...여호와만 섬기라 - 2-13절에서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지금까지 베풀어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열거한후에, 이 사실에 근거하여 이제 그들에게 우상숭배를 포기하고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을 섬길것에 대한 신앙적 결단을 요구하고 있다. 따라서 여호수아의 결단 촉구는 백성들에게 맹목적으로 종교적 굴레를 씌우려 하는 것이 아니라, 지난 역사를 통해 생생히 역사하신 하나님의 존재를 분명히 알고 깨달으며 감사한 후 비로소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그러한 결단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결단은 백성들 각자가 지나온 역사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과 우상의 존재 및 역할을 엄밀히 비교한 후 지정의(知情意)를 포함하여 전인격적으로 냉철히 내려야 할 엄숙한 결단이어야 했다.
성실과 진정으로 - 여기서 '성실'(* , 타밈)은 '온전함' 또는 '순수함'이란 뜻이다. 그리고 '진정'(* , 에메트)은 '견고함' 또는 '확실함'이란 의미이다. 따라서 이 말은 하나님을 섬기되 다른 잡다한 생각 없이 오직 하나님만을 향하는 순수한 마음과, 또한 어떠한 유혹에도 견딜 수 있는 견고한 마음가짐으로 섬기라는 의미이다.
열조가 강 저편과 애굽에서 섬기던 신들 - 이스라엘의 조상 아브라함의 가족은 유프라테스 강 건너편 갈대아 우르에서 월(月)신을 섬겼으며(2절), 그들의 후손인 이스라엘 백성들 역시 애굽에서 수염소를 비롯한 여러 음란한 우상을 섬겼었다(레 17:7;겔 20:7). 아울러 여호수아의 이 말은 여호수아 당시에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러한 우상의 영향을 여전히 받고 있고, 또한 그러한 우상으로부터 완전히 떠난 상태가 아님을 암시한다.
=====24:15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임 라 베에네켐'(* )은 직역하면 '만일 너희의 눈에 악하다면'(if it is evil in your eyes)인데, 곧 이말은 '내키지 않거든'(if you are unwilling to-, RSV, Living Bible). '바람직스럽게 보이지 않거든'(if-seems undesirable to you, NIV)등의 뜻으로 의역될 수 있다. 이와같이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너희가 하나님을 섬기는것이 내키지 않거든'이라고 말한 것은 하나님을 섬기되 결코 억지로나 마지못해서가 아니라, 오직 성실과 진정으로 섬겨야 한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기 위함이었다.
너희 섬길 자를 오늘날 택하라 - 임종을 목전에 둔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공동체의 신앙을 새롭게 다지기 위하여 분명한 신앙의 결단을 촉구하고 있다. 즉 그는 언약을 갱신함에 있어서, 어중간한 태도를 단호히 배격하고 이방의 우상이냐 아니면 여호와 하나님이냐를 확실히 결정하도록 백성들에게 촉구하였던 것이다. 사실 신앙에 있어서 어중간한 중립(회색)지대란 있을 수 없다(왕상 18:21). 또한 양쪽 다 택하는 일도 있을 수 없다(마 6:24). 왜냐하면 우상을 섬긴다면 하나님을 부정한다는 것과 같고, 하나님을 섬긴다면 곧 모든 우상을 배격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이는 마치 빛과 어두움이 서로 공존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고후 6:14-16). 이런 의미에서 여호와의 종교는 유일신교(唯一神敎)이지, 결코 일신교(一神敎)가 아닌 것이다(신 6:4 주석 참조). 즉 다른 많은 신들 중에 '여호와'도 하나의 신이며, 그중 비교적 뛰어난 신이란 의미가 아닌 것이다. 오직 '여호와'(Jehovah) 그만이 홀로 참신이시고, 다른 나머지 모든 우상들은 한낱 돌이나 나무, 쇳조각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 기독교적 유일신교인 것이다(사 45:20;렘 10:5).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 여호수아는 백성들의 결단을 촉구한 뒤 지체없이 자신의 입장을 분명히 밝혔다. 이것은 결코 백성을 선동하려거나 또는 위협하려는 목적에서 한 말이 아니라, 자신의 전생애를 통해 몸소 체득한 바 스스로 우러나온 신앙고백일 뿐이다. 즉 여호수아의 입장에서는 비교할 가치나 머뭇거릴 하등의 이유가 없었기 때문에 지체없이 자신의 신앙을 고백한 것 뿐이다. 자세한 내용은 본장 14-28절 강해, '여호수아의 촉구와 결단'을 참조하라.
=====24:16
결단코 하지 아니하오리니 - 본절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신앙적 결단을 호소하는 여호수아의 촉구에 적극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다. 즉 그들은 결코 우상 숭배에 빠지지 않고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을 섬기겠다고 굳게 결의 하였다. 이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이 단호히 신앙적 결단을 하게 된 것은 가나안 정복 전쟁을 치르는 동안 하나님의 도우심을 생생히 경험했기 때문이요, 또한 그들의 지도자 여호수아의 신앙적 자세에 큰 영향을 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24:17,18
이스라엘 백성들은 2-13절에서 여호수아가 술회했던 이스라엘의 역사를 여기서 다시 한번 간략히 언급하면서, 이 은혜의 역사를 친히 이끄신 하나님께 대한 신앙을 결코 버리지 않을 것이라고 굳게 서약하고 있다.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이 결단은 단순한 감정적 결단이 아니라, 과거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역동적으로 활동하셨던 하나님의 섭리에 전적으로 동의한 데서 비롯된 전인격적 결단이었다. 그리고 가나안 정복 전쟁 동안 친히 경험하고 느낀 확신에서부터 우러나온 체험적 결단이었다.
애굽 땅 종 되었던 집 - 이 표현은 십계명 서문에 나타나는 말로(출 20:2;신 5:6), 곧 애굽의 종살이로부터 이스라엘을 구원해 내신 구속주 하나님의 은혜로우신 사역과 관련하여 자주 쓰인 말이다. 출 20:2 주석 참조.
아모리 사람 - 이는 곧 가나안 족속 전체를 대표하여 지칭하는 말인데, 그 이유는 가나안 여러 민족 중 아모리 족속이 가장 강력한 족속이었기 때문이다(창 15:16).
=====24:19
너희가 여호와를 능히 섬기지 못할것은 - 이 구절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두 가지 견해가 있다. 즉 (1) 장차 이스라엘 백성들은 실제로 거룩하신 하나님을 섬기지 못할 것임을 여호수아가 미리 예견했다는 견해(Pulpit Commentary), (2)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보다 강력한 결단을 촉구하기 위해 여호수아가 이 말을 했다는 견해(Keil & Delitzsch Commentary) 등이다. 이 가운데 후자의 견해가 더 일리 있는 듯하다. 즉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들의 인간적 연약성 때문에 쉽게 우상 숭배에 빠져들 우려가 있음을 충분히 알고 있었기에 보다 강한 어조로 그들의 신앙을 철저히 무장시키고 있는 것이다.
거룩하신 하나님이시요 - 이에 대한 상세한 내용은 본장 14-28절 강해, '하나님의 거룩성' 부분을 참조하라. 거룩하신 하나님이란 피조물과는 본질적으로 구별되는 분임을 보여주는 말이다.
질투하는 하나님이시니 - '질투하는 하나님'이란 말은 하나님께서는 당신 이외의 다른 신을 절대 허락지 않으시는 분이심을 보여주는 표현이다. 신 6:15 주석 참조.
너희 허물과 죄를 사하지 아니하실 것임이라 - 여기서 '허물과 죄'는 일반적인 죄악이 아니라, 특별히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 숭배에 빠지게 되는 죄악을 가리킨다. 이러한 죄는 결코 용서를 받을수 없다. 십계명 가운데 제 2 계명에서,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질투하시는 하나님이므로 우상에게 절하거나 섬기지 말 것을 명령하시면서, 이 죄를 범한 자에게는 그 죄를 반드시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삼, 사대까지 이르게 할것이라고 규정하고 있다(출 20:4-6).
=====24:20
여호와를 버리고 이방 신들을 섬기면...너희를 멸하시리라 - 여호수아가이와같이 강한 위협적인 말을 사용한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적 결단이 결코 변해서는 안된다는 사실을 역설적으로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이 정복한 가나안 땅에는 이방의 우상 문화가 뿌리 깊이 잠재해 있어, 늘 올무와 덫으로 작용할 소지가 충분히 있었기 때문이다. 한편 실제로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해 볼 때,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잘 섬길 때는 축복을 받았지만 하나님을 버리고 이방 신을 섬기면 어김없이 하나님의 심판을 당했다.
=====24:21
정녕 여호와를 섬기겠나이다 -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수아의 우려를 완전히 불식시키면서 다시 한번 굳게 여호와 신앙을 다지는 장면이다. 사실 전체 이스라엘 역사를 놓고 볼 때 이때만큼 백성들의 신앙 열기가 뜨거웠던 때도 드물었다.
=====24:22
스스로...증인이 되었나이다 - 이 말은 백성들 스스로가 그들이 고백한 의 증인(證人)이 되었음을 가리키는 말로, 곧 그들이 했던 고백을 전적으로 시인한다는 뜻이다(Rosenmuler). 따라서 이 말에는 만일 그들이 이 고백과는 달리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 숭배에 빠지면, 다른 증인까지도 필요없이 자신들 스스로가 그 유죄(有罪)의 증인이 된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24:23
너희 중에 있는 이방 신들을 제하여 버리고 - 혹자는 이 말을 근거로,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는 여전히 '드라빔'(teraphim, 창 31:19 주석 참조)과 갈은 류(類)의 여러가지 깎아 새겨 만든 우상들이 존재하고 있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Pulpit Commentary). 그러나 카일(Keil)은 어거스틴(Augustine)과 칼빈(Calvin)의 견해를 따라 여기서 '너희 중에'를 '너희 마음에 있는'으로 해석하여, 여호수아 저자가 여기서 말하는 우상은 나무, 돌, 철 등으로 만든 외면적인 우상이 아니라, 내면적인 마음의 우상을 가리킨다고 하였다. 즉 전적으로 여호와만을 향한 마음가짐의 상태가 아닌, 아직껏 남아 있는 우상에로의 경향을 의미한다고 보았다. 사실 성경적으로 볼 때 반드시 형상(形象)을 가진것만이 우상이 아니다. 비록 눈에는 보이지 않더라도 하나님보다 더 섬기는 어떤 것이 있다면, 그리고 하나님 외에 섬기는 어떤 것이 있다면 그것 역시 우상에 해당된다. 그런 의미에서 신약성경 골 3:5에서는 '탐심 그 자체가 우상 숭배'라고 규정하고 있는 것이다.
=====24:24
그 목소리를 우리가 청종하리이다 -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겠다는것은 곧 하나님께 전적으로 순종하겠다는 것을 의미한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의 이러한 고백은 어떤 가식적인 고백이 아니라 진실한 신앙적 고백이었다. 그것은 그 후에 그들이 하나님을 잘 섬겼다는 내용(31절)이 잘 입증해 준다.
=====24:25
여호수아가...언약을 세우고 - 이스라엘 백성들의 반복된 서약(16-18, 21,24절)은이 언약 체결로 완전히 확증된다. 한편, 여기서 '언약을 세우다'는 직역하면 '언약을 자르다'이다. 이와같이 '언약'과 '자르다'가 결합되는 것은 언약 체결시 양이나 송아지 같은 짐승을 죽여 쪼개어 놓기 때문이다(렘 34:18-20). 이와같이 짐승을 쪼개놓은 이유는 만일 체결한 언약을 이행치 않으면 쪼개어진 짐승처럼 죽음을 면치 못하게 된다는 것을 뜻하기 위함이었다. 자세한 내용은 신 29:16-29 강해, '언약의 어원적 고찰'을 참조하라.
세겜 - 1절 주석 참조.
그들을 위하여 율례와 법도를 베풀었더라 - 출 15:25에서도 하나님께서는 쓴 물을 달게 하신후에 이와같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하여 율례와 법도를 베푸신 일이 있었다. 한편, 여기서 '율례'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호크'(* )는 어떤 제정된 '법규'를 뜻하며, '법도'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미쉬파트'(* )는 '판단하다', '심판하다'를 뜻하는 '솨파드'에서 유래된 말로, 곧 판단의 근거가 되는 '지시', '계명'들을 뜻한다. 그러나 이 양자는 엄밀히 구분할 수 없다(신 4:1). 여하튼 본절을 성문법(成文法)이나 불문법(不汶法)을 막론하고 여호수아가 이전의 모세 율법을 다시금 새롭게 갱신(更新)하였음을 뜻하는 말이다.
=====24:26
이 모든 맡씀을 하나님의 율법 책에 기록하고 - 여기서 '이 모든 말씀'이란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행했던 고별사의 내용(1-13절)을 중심으로 당시 행해졌던 전반적인 의식(儀式) 행위(14-25절) 모두를 가리킨다.
큰 돌을 취하여 - 여호수아가 이와같이 큰돌을 취한 목적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과의 언약 갱신(16-18, 21, 24절)을 기념하기 위해서였다. 당시 돌은 여러 기념물 중 가장 오래된 형태로, 구약 시대에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 행하신 일을 기념하기 위해 종종 기념비가 세워졌다(4:9;삼상 7:12).
여호와의 성소 - 카일(Keil)은 여기 '여호와의 성소'(the Sanctuary of Jehovah)를 단지 '성스러운 장소'(the holy place, NIV)를 가리킨다고 주장하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즉 성막(Tabernacle)은 당시 '실로'에 있었기 때문에(18:1) 성막도 아니고, 또한 당시에는 성전이 없었기 때문에 성전도 아니며, 이스라엘의 조상인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으로 들어와 처음으로 제단을 쌓은 장소(창 12:6, 7)였을 뿐만 아니라, 후일 야곱이 또한 제단을 쌓고 하나님을 경배하였던 그 정결의 장소(창 35:2, 4)라는 의미에서 거룩한 곳이라는 것이다(Keil & Delitzsch Commentary, Vol. 2, p. 223).
상수리 나무 - 약 10m 높이까지 자라는 이 나무는 팔레스틴에 널리 퍼져 있으며 매우 강하고 단단하다. 그런데 여기서의 이 상수리 나무(the oak)는 아브라함과 야곱의 사건과 연관있는 유서 깊은 그 상수리나무로, 곧 그러한 역사를 일깨워 주는 기념수(記念樹)일 가능성이 크다.
=====24:27
이 돌이 우리에게 증거가 되리니 - 본절에는 돌을 취하여 세운 목적이 분명히 명시되어 있다. 즉 그것은 이 돌이 변치않는 영원한 기념비가 되어, 만일 이스라엘 백성들이 언약을 깨뜨릴 경우 이 돌이 그들에게 증거가 되도록 하기 위해서인 것이다. 따라서 후손들은 이 기념비를 볼 때마다 그들 조상들이 맺었던 언약을 다시금 생각하면서 그들의 지은 죄를 회개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 돌이 들었음이라 - 여호수아는 이 기념비가 말을 듣는 귀를 가진 것처럼 의인화(擬人化) 시키고 있다. 이에 대해 칼빈(Valvin)은, 이 말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어떤 영적인 뜻을 전달하는 데 큰 효력이 있는 표현이라고 하였다. 즉 그에 의하면 무생물인 돌까지도 이 말씀을 들었는데, 하물며 사람들이 말씀을 듣지 못한 양 하나님을 배반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된다는 의미의 말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을 배반치 않게 하도록 - 여기서 '배반하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카하쉬'(* )는 '거짓말하다', '부정하다', '부인하다'를 뜻하는 말로, 하나님을 속이거나 부인하는 행위를 가리킬 때 사용된다.
=====24:28
백성을...각기 기업으로 돌아가게 - 마지막 고별사를 한 후, 언약 갱신을기념하기위해 큰 돌로 기념비를 세워 증거를 삼음으로써, 여호수아는 자신의 공적(公的)인 모든 임무를 끝마쳤다. 따라서 그는 이제 이스라엘 모든 지파를 각자 분배받은 기업의 땅으로 돌려보냈고, 자신도 역시 자신의 기업의 땅인 담낫세라로 돌아가 조용히 여생을 보내다가 거기서 임종을 맞이했다(3절).
=====24:29
이 일 후에 여호와의 종...여호수아가...죽으매 - 여호수아의 죽음과 장에 관한기록은 신명기 마지막 부분에 기록되어 있는 모세의 죽음과 장사에 관한 기록과 유사성이있다. 그런데 여호수아서에서는 이 구절에서 뿐만 아니라 여러 곳에서 모세와 여호수아가 대조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예를들면 홍해 도하와 요단 강 도하, 그리고 그들의 초기 사역에 있어서의 여러 이적들과 현상들이다(1:17;4:14). 이러한 사실에 근거하여 모세에게 주어졌던 여호와의 종이란 명예로운 칭호(1:1)가 여호수아에게도 공히 주어졌다. 이러한 사실을 통해 우리는 여호수아서 저자가 구속사적 관점에서 여호수아가 모세의 후계자라는 점을 의식적으로 부각시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일백 십세에 죽으매 - 여호수아가 죽은 나이는 32절에 언급되어 있는 그의 조상 요셉이 죽은 나이와 일치한다(창 50:26). 구약 시대에 있어 장수는 하나님의 축복의 증거로서(시 91:16), 이와같이 여호수아도 축복받은 자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은혜롭게 생을 마감한 것이다.
=====24:30
그를 그의 기업의 경내...장사하였으니 - 나그네로서 가나안 원주민에게산 무덤에 장사되었던 초기 족장들(창 23:19, 20;25:7-10;35:27-29; 49:29-32;50:12-14)과는 달리 여호수아는 자신이 정복한 자신의 기업에 장사되었다.
딤낫 세라 - 19:50 주석 참조.
=====24:31
여호수아의 사는 날 동안...여호와를 섬겼더라 - 이 말 속에는 이스라엘이여호수아와 여호수아 당시의 장로들이 모두 죽고 난 후에 결국 신앙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부터 멀어지게 되었음을 암시하고 있다. 즉 지도자 여호수아의 막강한 영향력으로 그의 직접적인 지도를 받았던 세대들은 변함없이 여호와 신앙을 유지하였지만, 그 다음 세대에 이르자 곧바로 우상 숭배에 빠져 버리고 말았던 것이다(삿 3:5, 6). 이에 대한 상세한 내용은 삿 2:6-15에 잘 나타나 있다.
=====24:32
요셉의 뼈를 세겜에 장사하였으니 - 이스라엘 자손들이 요셉의 뼈를 가나안 땅 세겜에 장사한 것은 창 50:25에 나타나 있는대로 요셉의 유언에 따른 것이었다. 이와같이 요셉이 자신의 유해가 가나안 땅에 매장되기를 원했던 것은 가나안 땅을 주마 하신 하나님의 언약을 굳게 믿은 강한 신념 때문이었다. 결국 그 믿음대로 요셉의 유해는 그의 사후 대략 415년후에 그리던 약속의 땅에 안치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비록 더딜지라도 하나님의 약속은 반드시 성취되고야 만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한편,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러한 요셉의 유언을 좇아 출애굽시 요셉의 유해를 함께 가지고 나왔었다(출 13:19).
세겜의 아비 하몰의 자손 - 야곱이 밧단아람에서 돌아왔을 때, 그는 하몰의 아들들에게서 약간의 땅을 산 후 그곳을 단(壇)을 쌓음으로 그곳을 정결케 한 적이 있는데(창 33:18-20), 그 땅은 결국 요셉의 매장지가 되었다. 한편, 여호수아의 기업 분배시이 땅은 요셉의 자손에게 할당되었는데(21:20, 21), 요셉의 자손들은 땅을 분배받은 후 곧 바로 요셉의 유해를 이곳에 안치한 것 같다(Keil).
=====24:33
엘르아살도 죽으매...장사하였더라 - 여호수아서는 당시 대제사장이었던엘르아살의 죽음으로 끝을 맺고 있다. 여기서 엘르아살이 여호수아보다 먼저 죽었는지 아니면 후에 죽었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다. 어쩌면 같은 해에 죽었는 지도 모른다(Matthew, Henry). 여하튼 여호수아와 엘르아살의 죽음은 모세 시대에 이어 여호수아 시대도 그 막이 내려졌음을 암시하고, 따라서 이후 사사 시대의 전개를 예고해준다. 한편 헬라어 70인역(LXX)은 본절 이후에 이스라엘 백성들의 타락 기사를 덧붙이고 있으나, 그것은 단지 사사기의 초기 기록(삿 2:6-15;3:7, 12)을 발췌하여 부가한 것에 불과하다(Keil).
비느하스가 에브라임 산지에서 받은 산 - 곧 옐르아살이 장사된 곳으로 '비느하스의 언덕'(the hill of Phinehas)을 가리킨다. 아마도 이 언덕은 비느하스가 이스라엘을 위해 봉사한 공로(민 25:7, 8)의 대가로 특별히 부여받은 그의 세습적 기업일 가능성이 크다. 오늘날 학자들은 이곳을 베냐민 지파 중에서 레위인에게 할당된 '게바'(18:24)로 추정하기도 한다(Keil & Delitzsch Commentary, Vol. 2. p. 235). 한편, 엘르아살의 아들이요 후계자인 제사장 '비느하스'(Phinehas)에 대해서는 22:13 주석을 참조하라.
본장은 본서의 마지막 부분으로서 여호수아의 생애와 통치에 관해 종결짓고 있는 부분이다. 지금까지 이스라엘의 지도자로서 수많은 가나안 전투들을 승리로 이끌었고, 또한 땅을 각 지파들에게 분배했던 여호수아는 그의 임종을 앞두고서 이미 앞에서 한차례 고별 연설을 하였었다(23장). 그에 이어 여호수아는 본장에서 다시 한 번 고별 연설을 하고 온 백성과 더불어 하나님 앞에서 엄숙한 서원을 한다(1-28절). 그 연설의 요지는 지금까지 이스라엘을 위하여 역사하신 하나님을 섬기든지 아니면 이방 신들을 섬기든지 둘 중의 하나를 택하는 것이었다. 이제 백성들은 일심으로 여호와만을 섬기리라 맹세하는데 이를 기념하기 위해 여호수아는 '증거의 글'을 세운다(26, 27절).
이상으로 모세의 뒤를 이은 이스라엘의 지도자로서의 여호수아의 공식적인 사역은 모두 끝난다. 본장의 나머지 부분은 여호수아의 죽음과 그의 장례식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29-31절). 그리고 그에 덧붙여 과거 애굽에서부터 운구(運柩)해 온 요셉의 유골을 가나안 땅 세겜에 안장한 사실(32절)과 대제사장 엘르아살의 죽음에 관하여 증거한다(33절).
이처럼 본서의 기자가 본서의 대미(大尾)에서 요셉의 유골이 가나안 땅에 장사되었음을 굳이 언급하고 있는 것은 가나안 땅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이 확실히 성취되었음을 강조하기 위함이다(창 15:16). 그리고 여호수아의 죽음 뿐 아니라 엘르아살의 죽음에 대해서까지 언급한 것은 이로써 여호수아의 동년배 시대가 끝나고 바야흐로 또 다시 새로운 한 시대가 시작됨을 시사하기 위함이다. 사실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복사와 정착사에 있어서 핵심적인 역할을 한 여호수아와 대제사장 엘르아살의 죽음은 가나안 정복 역사가 주제인 본서의 결론을 맺는 데 아주 적절하다.
1. 하나님의 구원 역사 회고(24:1-13)
전장에서 이미 유언적 고별사를 행한 여호수아는 이제 그의 마지막 기력과 마지막까지 남은 시간을 다하여 온 이스라엘과 그 지도자들에게 여호와 신앙을 고취시키려 힘쓴다. 여기서 먼저 아브라함의 소명으로부터 시작하여 지금에 이르기까지 이스라엘을 지켜 주시고 인도해 주신 하나님의 구원 역사의 주역인 하나님을 강조한다. 즉 여호수아는 다음과 같은 순으로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구원사를 일깨워 주고 있는 것이다.
(1) 아브라함의 소명(2절), (2) 믿음의 자손 이삭 출생(3절), (3) 야곱의 애굽 이주(4절), (4) 모세와 아론을 통한 애굽 심판(5절), (5) 홍해 도하의 기적(6, 7절), (6) 아모리 족속 격파(8절), (7) 발람 사건(9, 10절), (8) 헤스본과 바산 정복(11, 12절), (9) 가나안 정복 및 정착(13절).
이상과 같은 일련의 사건들은 모든 역사의 주관자가 바로 하나님이시라는 점을 강조해 준다. 즉 이 모든 사건들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얼마나 간섭하시고 사랑하셨는지를 보여 준다. 실로 인류의 모든 역사(History)는 바로 하나님 그분의(His) 이야기(story)이다. 온 우주와 인류의 역사가 살아 계신 하나님의 권념(眷念)하심을 확신하며 기쁨과 소망 중에 살 수 있는 근거가 있다.
2. 백성들의 맹세(24:14-28)
지금껏 하나님의 구원 역사에 대하여 회고한 여호수아는 이제 마지막으로 백성들의 결단을 촉구한다. 즉 자신과 자신의 집은 이처럼 이스라엘을 권념하신 하나님을 섬길 터인데 백성들은 어떻게 할 것인지 묻는다. 그러면서 하나님만을 섬기고 이방신을 버릴 것인지, 아니면 이방신을 따르고 하나님을 버릴 것인지 결단하라고 촉구한다. 이에 백성들은 자신들도 여호수아처럼 이방신을 섬기지 않고 하나님만 섬길 것이라고 굳게 맹세한다(14-18절).
그러나 여호수아는 이러한 백성들의 맹세만으로 만족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인간의 순간적인 결단은 쉽게 사그라들기 때문이다. 게다가 가나안 땅에는 이방 종교와 풍습이 뿌리 깊게 산재해 있던 터라, 이들이 늘 유혹과 위협의 요인으로 작용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여호수아는 불순종에 따르는 저주에 대하여 경고를 발하면서까지 맹세의 신중성을 강조한다(19-23절).
그런데도 백성들은 한결같이 하나님만 섬기리라 맹세하니 이에 여호수아는 그들에게 하나님의 율례와 법도를 증거한다. 그리고선 백성들의 맹세를 기념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성막 곁 상수리나무 아래에 증거의 비석을 세운다(24-28절).
이상에서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수아의 호소에 적극적으로 응답하여 하나님만 의지하고 순종할 것을 굳게 결의한 것은 우리들에게 깊은 감명을 준다. 왜냐하면 그들의 결의는 여호수아가 들려준 회고담을 통해 이스라엘 역사 가운데서 역사하신 하나님의 섭리에 전심으로 공감한 데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이다. 즉 그들의 신앙은 단순한 감정의 산물이 아니라 직접 피부로 절감하고 눈으로 목격함으로써 체득한 것과 다름없는 확신에서 비롯된 신앙 이었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를 신앙한다는 우리들도 우리의 전존재가 그분을 체험하고 그분과 인격적 교제를 나누는 가운데 성숙된 신앙을 견지해야지 결코 관렴적, 일시적 감정에 치우친 절름발이 신앙을 답습해서는 안 될 것이다.
여호수아의 촉구와 결단 - 본문은 여호수아가 백성들에게 이방신을 버리고 하나님만 섬길 것을 권면한 후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좋지 않게 생각들면 이방신과 하나님, 둘 중 하나를 선택할 것을 촉구하는 장면이다(14-16절). 여기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교훈들을 얻릉 수 있다.
(1) 우리에게는 하나님과 세상 중 양자 택일만 있다는 사실이다. 여호수아는 하나님도 섬기지 않고 우상도 섬기지 않는 종교적 중용의 길이나 혹 하나님도 섬기고 우상도 섬기는 종교적 혼합의 길을 허락지 않았다.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 자는 곧 우상을 섬기는 자이다. 이왕 하나님을 섬길 바에는 그분만을 섬겨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두 마음을 품고 당신을 섬기는 자를 원치 않으신다(마 6:24 ; 고후 6:15-18).
(2) 그 선택은 지금 이 시간에 해야 한다는 점이다. 여호수아는 "너희 섬길 자를 오늘날 택하라"(15절)고 하였다. 머뭇거리거나 주저하면서 하나님 섬기는 것을 미루면 그만큼 자신을 타락시키는 것이다. 하나님을 섬기는 선택은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 지금 하나님을 섬기기로 결단하지 못한다면 또 다시 지금과 같은 기회가 있을 것이라고 말할 수 없다. 바로 오늘 이 시간이 참 종교를 선택할 최선의 시기이다(고후 6:2). 사람의 마음은 항상 변하기 때문에 마음이 변하기 전에 선택의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된다. 토기장이는 진흙의 반죽 상태가 가장 좋을 때 자신의 원하는 모양대로 토기를 만든다. 진흙이 굳어 버린 다음에 모양을 만들려고 할 때에는 이미 때가 늦었다. 만사에는 때가 있다(전 3:1). 선택해야 할 시기에 선택하지 못하다가 나중에 선택하려고 할 때는 이미 때가 늦다.
(3) 결단력이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결단력이 없이 우유 부단하고 자신의 길을 스스로 선택하지 못하고 주위의 상황을 보아가며 눈치껏 살아간다. 하지만 우리가 올바른 인간으로 성자애려면 결단력이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자신의 주관 없이 살아가는 사람은 스스로를 움직일 능력이 없어서 바닷물이 흘러가는 대로 이리저리 흘러 다니는 해파리와도 같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늘 주저하거나 머뭇머뭇 하기만 하는 사람은 결단력 있게 행동하지 못한다. 환한 대낮이 되었는데도 어디로 여행해야 할지 망설이고 있다면 그는 결코 유익한 여행을 할 수 없을 것이다. 또한 항해사가 늘 방향을 결정하지 못하고 이랬다 저랬다 하면 1등항해사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길을 선택해야 하낟. 주위 환경에 좌우되거나 감정에 따라 움직이지 말고 자신의 이성과 신앙의 소리에 길을 기울이며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야 한다. 늘 두 갈래 길 앞에서 우왕좌왕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된다. 분명한 하나의 목표를 정하고 그것을 향해 정진할 때 인생의 진보가 주어지는 것이다(빌 3:13, 14).
(4) 여호수아는 올바른 결단력을 가진 인물이었다는 점이다. 여호수아는 백성들에게 이방신과 하나님,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촉구하면서 자신과 자신의 집은 하나님만을 섬기겠다고 하였다(15절). 그는 백성들이 자신의 말에 어떻게 반응하는지 보고나서 자기의 생각을 표명하지 않고 누구보다 먼저 자신의 입장을 나타내었다. 그의 결심은 단호하고도 엄숙했다. 그의 말은 마치 백성들이 모두 우상 섬기는 것을 선택하고 자기에게까지 우상을 섬기라고 권유해도 나는 끝까지 하나님만을 섬기겠다고 하는 것과 같다. 그는 이와 같이 과단성 있게 결단하는 모범을 보임으로써 백성들에게 하나님을 선택하고 싶은 마음이 일어나도록 하였다. 이 사실은 여호수아의 지도자로서의 일면을 다시 한번 보여 주었다. 의사, 목사, 스승, 부모의 행동은 그들의 지도와 교육을 받고 있는 사람들에게 큰 영향을 줄 수 있다. 한 국가의 통치자들이 어떻게 결단하여 행동하느냐에 따라 일반 백성들은 크게 영향을 받는다. 통치자가 악한 길을 가면 백성들도 악한 길로 걸으려 할 것이고 선한 길로 가면 백성들도 선한 길로 걸으려 할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 여호수아의 바른 선택과 결단력은 모두 지도자들과 사람들에게 훌륭한 귀감이 된다고 하겠다.
기독교 가정에서의 부모의 책임 - 우리가 본문에서 유의할 수 있는 것 중의 하나는 여호수아가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15절)고 말한 것이다. 가정을 책임지고 있는 가장이라면 누구든지 이 여호수아와 같이 그의 가족의 신앙 생활에 관심을 가질 수 있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태초에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그들로 하여금 한 몸이 되게하여 가정 제도를 세우신 이래 가정은 인간 사회에 있어서 가장 소중한 곳으로 여겨져 왔다. 그 가운데 특히 가장(家長)이 차지하는 위치는 매우 중요하다<창 2:18025 강해, 창조론에 나타난 성경적 남녀 관계>. 온 가족은 아버지가 결정하고 행하는 대로 따르게 된다. 만일 가장이 성실하게 하나님을 섬기면 가족들도 그를 본받아 신앙 생활을 착실히 하게 되지만 가장이 우상을 섬기면 가족들 역시 우상을 섬기게 된다. 이런 점에서 여호수아가 가정을 포함시켜 하나님을 섬기겠다고 말한 것은 가장으로서 훌륭한 본보기가 된다. 구약과 신약을 막론하고 전체적으로 성경은 우리에게 가정이 매우 중요한 곳이라고 가르친다. 가정은 사회에 있어서 가장 작은 기본 구성 단위이며 또한 가장 작은 교회라고 할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도 어렸을 때 가족과 함께 하나님께 예배하러 왔으며(눈 2:41-51). 모세가 그토록 훌륭한 신앙의 소유자가 될 수 있었던 것도 역시 그의 어머니의 철저한 신앙 때문이라는 것은 잘 아는 사실이다(출 2:1-10). 가정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신성한 장소이다. 이 가정이 작은 교회로서의 역할을 잘 담당하여 모든 가족이 하나님의 말씀과 은혜가 충만한 생활을 하게 되면 태양이 빛을 비추듯이 그들 모두는 세상에 빛을 환하게 비추게 될 것이다. 따라서 부모된 자들 특히 그리스도인 부모들은 그 자녀들을 신앙적으로 자라나도록 지도해야 하는 신성한 책임이 있다 하겠다<삼상 2:11-26 강해, 부모의 자녀 교육>.
하나님의 거룩성 - 브라이첸(Vreichen)에 의하면 '거룩'이란 개념은 구약에서 가장 중심적인 요소라고 하였다. '거룩'을 뜻하는 히브리어 '코데쉬'(* )는 항상 거룩한 하나님이나 하나님과의 관계 때문에 거룩하게 된 사람들과 때와 장소와 사물들에만 사용된다. '어떤 사물이나 사람도 본래는 거룩하지 않지만 하나님과 관계를 맺을 때 거룩하게 된다'(Ringgren). 이제 여기서는 하나님의 거룩성에 개해서 살펴보도록 하자.
(1) 거룩은 단지 하나님의 속성 중 하나가 아니다. 거룩은 하나님의 본질적인 성품을 나타낸다. 거룩은 하나님 당신의 신분(Selfhood)이며 당신 주장이다. 다시 말해 거룩은 하나님의 성품과 인격의 본질이다. 따라서 이 세상에는 하나님의 거룩을 따를 만한 사람이 아무도 없다. 하나님은 유일 무이한 지존자이신 것이다(삼상 2:2 ; 6:20 ; 욥 25:5).
(2) 이 거룩은 피조물과 비교할 수 없는 하나님의 구별성을 뜻한다. 하나님의 거룩은 당신을 천사들과 구별시킨다(욥 4:17, 18 ; 15:14). 이러한 거룩은 죄에 대한 하나님의 태도에서도 나타난다. 하나님의 거룩은 인간의 죄에서 분리되는 것 뿐만아니라 죄에 대한 그의 증오와 적대감을 나타낸다(신 32:4 ; 합 1:15). 인간이 자기의 죄를 깨닫는 것은 하나님의 거룩을 보았을 때이다(사 6:3-8).
(3) 그러나 이 거룩이 피조물에 속한 것과의 구별을 뜻하다고 해서 하나님의 거룩성을 그분의 초월성과 동등시하는 것과 그분의 내재성과 분리하여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택하시어 그들에게 긍휼을 베풀어 주신 것은 그의 거룩과 관련이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거룩이 지고하게 나타난 것이 그의 사랑이다. 호세아 예언서에서 우리는 거룩의 개념이 사랑의 개념으로 숭고하게 승화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즉 자기의 부정한 아내를 사랑하고 그녀를 다시 따뜻한 가정으로 데려오고 싶어하는 호세아의 지극한 애정은 길잃고 헤매이는 죄많은 백성들에 대한 하나님의 지극한 사랑을 반영한다(호 1:1-3:5). 이처럼 하나님의 거룩은 인간의 죄악과 반대되면서도 이 거룩하지 못한 인간에 대한 사랑을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3. 여호수아의 임종(24:29-33)
본서 전체를 마감하는 결론부이다. 여기에는 먼저 하나님의 용감한 군사로서 또한 이스라엘의 지도자로서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복과 정착을 위해 용맹스런 싸움을 싸웠던 여호수아의 죽음과 장사(葬事)가 언급된다(19-31절). 다음으로 요셉의 유골이 가나안 땅 세겜에 안장된 사실과 대재사장 엘르아살의 죽음이 언급된다(32. 33절).
여기서 우리는 여호수아의 죽음이 매우 간략하게 언급되었을 뿐임을 보게 된다. 이는 곧 본서가 여호수아의 전기(傳記)가 아니라 여호수아를 통한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기록한 책임을 증거해 준다.
또한 본문은 대제사장 엘르아살의 죽음에 대해서는 언급하면서도 여호수아 사후(死後), 누가 이스라엘의 새로운 지도자가 되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이 없다. 이는 곧 여호수아 이후 비롯되는 사사 시대의 특징을 은연 중에 암시해 준다. 즉 사사 시대에는 하나님께로부터 직접적 부르심을 받아 여러 사사들이 지도자로 등장, 활동하게 될 뿐 모세나 여호수아 같은 카리스마(Charisma)적 대지도자가 없을 것임을 시사하고 있는 것이다.
아무튼 이상으로 이스라엘 족장 시대 때부터 주어진 '가나안 땅'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은 온전히 구현되고 이후로는 그 땅에서 살아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역사가 시작된다. 그 첫문을 여는 장이 곧 사사기인데 그 역시 마이스라엘 역사 가운데서 간섭하시고 섭리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적 사역이 강조된다.
그리스도의 예표로서의 여호수아 - 본서에서 여호수아는 장차 오실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인물로 부각되고 있다. 우선 그의 이름 '여호수아'는 '여허와는 구원이시다'라는 뜻으로 헬라어로 '예수'와 동일한 의미를 갖고 있다. 그리고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인도한 것은 그리스도께서 영적 이스라엘 백성들인 우리를 하늘 가나안인 천국으로 인도하는 것을 예표한다.
또한 여호수아가 하나님의 백성들을 가나안으로 인도한 후 그 땅을 분배한 것 역시 예수님께서 우리를 천국으로 인도하여 기업을 분배해 주시는 것들의 예표가 된다(요 14:1-3). 더욱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범죄하여 전투에서 패배를 당하게 되었을 때 여호수아가 그들을 위하여 중보 기도를 드렸던 것(수 7:6-15) 역시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를 위해 중보 기도를 하시는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여 준다(롬 8:4). 그 밖에도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지휘하여 그들의 원수들에 대해서 이기도록 하신다(요 16:33). 이처럼 여러 면에서 여호수아는 우리의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해 준다. 그런데 주의할 사실은 위대한 삶을 살다간 신앙 선조들에게선 모두 그리스도의 모습을 제각기 찾아볼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성경 중 여호수아만을 또는 모세만을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인물로 주장해서는 안될 것이다. 그리고 우리들 역시 그들과 마찬가지로 성도란 이름에 걸맞게 그리스도인으로서의 향기를 드러내고 내 속에서 그리스도의 모습이 발견될 수 있도록 부단히 자신을 연마해야 할 것이다(고후 2: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