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
요단 서편의 아모리 사람...가나안 사람 - 여기 '아모리 사람'(the Amorites)과 '가나안 사람'(the Canaanites)은 요단 강 서편의 모든 가나안 거민(30:10;신 7:1)을 대표하여 지칭하는 말이다. 왜냐하면 아모리 사람은 산지에 살고 있던 족속이며, 가나안 사람은 평지에 살고 있던 족속이기 때문이다(Keil). 그리고 '요단 서편'은 문자적으로 ' 요단 건너편 서쪽'(beyond the Jordan to the west, KJV)으로, 이 말은 여기에 기록된 '아모리 사람'과 2:10에 나타나있는 요단 동편의 아모리 사람을 구별지어 준다(Woudstra). 민 32:19 주석 참조. 한편 가나안 여러 족속들에 대한 상세한 내용은 <9:1-2 강해, 가나안의 일곱 족속> 부분을 참조하라.
여호와께서...말리시고 우리를 건네셨음을 듣고 - 직역하면 "여호와께서 그들이 건널 때까지...말리시고"이다. 그러므로 개역 성경의 '우리들'이는 번역은 '그들을'고쳐 생각함이 좋다.
마음이 녹았고...정신을 잃었더라 - 가나안의 모든 거민들은 과거 출애굽 사건과 요단 두편 아모리 족속의 두 왕 전멸 사건에 관한 소식을 듣고 이미 마음이 녹고 정신을 잃은 적이 있는데(2:9-11), 이에 덧붙여 요단 강 도하(渡河) 사건은 심적으로 비틀거리고 있는 그들에게 더 큰 충격을 가하는 치명타적 사건 이었다. 한편 '마음이 녹다', '정신을 잃다'에 관한 내용은 2:11 주석을 참조하라.
=====5:2
그 때에 - 즉 요단 강을 도하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길갈에 진을 치고 있었을 때를 가리킨다(Keil). 이 때는 가나안 거민들이 심히 낙담하고 있었을 때였으므로 곧장 공격하기에 최적의 시기였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공격에 앞서 먼저 할례의 성결(聖潔)을 명하셨다.
부싯돌로 칼을 만들어 - '부싯돌'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추르'(* )는 '단단한 돌', '반석', '바위'를 뜻한다. B.C. 13-15세기 당시에는 청동(靑銅, bronze) 제품들이 돌로 만든 기구들을 대신하여 널리 퍼져갔고, 그후 곧 철(鐵)이 청동을 대신하게 되었다. 그러나 여기 할례 의식에 청동이나 철 대신 돌을 사용한 것은 고대 관습을 따르기 위한 것이다(출 4:25; Blair, Clarke, Keil).
다시 할례를 행하라 - 여기서 '행하라'의 히브리어 '슈브'(* )는 '돌아가다', '돌이키다'란 뜻으로, 이 명령은 이미 받았던 할례를 한번 더 반복해서 받으라는 뜻으로 사용된 것이 아니다(Blair, Clarke). 40년 전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 모든 남자들은 할례를 받았으나 그들은 광야에서 모두 죽었고, 그 후에 태어난 이스라엘 자손들은 아직 할례를 받지 못한 상태에 있었다(4, 5절). 따라서 이 명령은 가나안에 도착한 새 세대에서 주어진것으로, 곧 '이전에 조상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할례를 받은것 같이 너희 후손들도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다시 할례를 받으라'(Keil). 또는 '이제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할례받은 백성으로서 이전의 상태로 되돌아 가라'(Blair)라는 의미이다. 다시 말해 광야 생활 40년 동안 시행 하지 않았던 할례 의식을 이제 재시행하라는 뜻이다. 한편 '할례'(割禮, circumcision)는 사내아이가 태어난지 8일 만에 생식기의 포피(包皮) 맨 끝 부분을 잘라내는 포경(包莖) 제거 의식으로, 이것은 일찍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에 대한 증거이며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표지(標識)였다(창 17:9-14). '할례'에 관한 보다 상세한 내용은<창 17:1-14 강해, 할례 언약과 세례> 부분을 참조하라.
=====5:3
할례산 - 이 말은 '언덕'(hill; KJV, NTV, RSV, 공동번역)을 뜻하는 '기브아'( * )와 '포피'(包皮)를 뜻하는 '아를라'(* )의 합성어로, 곧 할례를 실시한 후 베어낸 포피(양피)를 이곳에 묻었기 때문에 붙여진 명칭이다(Keil).
할례를 행하니라 - 약 40년 동안 유보되었던 할례 의식이 재시행됨으로써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언약 관계는 새로이 회복되었다.
=====5:4
시행한 까닭은 이것이니 - 본절은 할례를 재시행하게 된 배경과 이유를 상술하고 있다. 애굽에서 나온...남자 곧 모든 군사 - '나오다'의 히브리어 '야차'(* )는 구약 성경에서 신학적 주요 관심인 출애굽 사건과 관련하여 자주 사용되었다(출 3:10;6:13, 26;13:3, 9, 14, 16;20:2;신 4:37). 그리고 여기서 '남자'는 군사와 동격어로서, 20세 이상된 남자로 싸움(전쟁)에 나갈 만한 자를 가리킨다(민 1:2, 3; 14:29).
광야 노중에서 죽었는데 - 즉 출애굽 제 2년째 해에 가데스 바네아에서 정탐꾼들의 불신앙적 보고(민 13:31-33)로 말미암아 낙담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른 지도자를 세워 다시 애굽으로 돌아가려다 결국 하나님의 징벌을 받아 38년 동안 광야에서 모두 죽고 만 사실을 가리킨다(민 14:29-35;신 2:14-16).
=====5:5
노중에서 난 자는 할례를 받지 못하였음이라 - 출애굽시 이스라엘의 모든 남자들은 유월절 음식을 먹기 위하여 모두 할례를 받았다(출 12:43-51). 그러나 이러한 할례 의식이 중단된 때는 출애굽 제 2년째 되던 해인 가데스 바네아 사건(민 13:1-14:38)때였다. 왜냐하면 그 사건은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정면 거부한 중대한 '언약 파기 사건'이었으므로, 그들에게 있어 '언약의 징표'인 할례는 더이상 의미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그 세대(즉 그 사건 당시 20세 이상된 세대)는 그 불순종의 징벌로 광야 38년 유리 생활 동안 죽어갔고, 그 후세대(즉 당시 20세 미만된 자들과 광야 38년 기간 동안에 태어난 자들, 곧 노중에서 난자)는 아비의 죄를 더불어 지고(민 14: 33) '할례 없이' 광야 38년 동안을 지내야 했던 것이다(Keil, Calvin, Hengstenberg, Matthew Henry).
=====5:6
청종치 아니하므로 - 이 말은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적으로 배척하고 거부했다는 말로 하나님을 싫어한 이스라엘의 패역(悖逆) 정도를 잘 나타내 주고 있다.
열조에게 맹세하여 - '열조'(列粗)는 '조상', '선조', '아버지'의 뜻을가진 '아브'(* )의 복수형으로 곧 아브라함, 이삭, 야곱 등 이스라엘의 조상들을 가리킨다(민 11:12;신 1:8).
젖과 꿀이 흐르는 땅 - 가나안을 가리키는 별칭이다(출 3:8, 17; 레 20:24; 민 13:27; 14:8; 신 6:3). 실제로 가나안 지방은 목축하기에 적합했고 야생 꿀도 많았다(삿 14:8; 삼상 14:26; 마 3:4).
신 11:9 주석 참조.
다 멸절하기까지 - '멸절하다'의 히브리어 '타맘'(* )은 '완성하다', '끝내다', '완전히 멸망시키다'를 뜻하는데, 여기서는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제 1세대(가데스 바네아 사건 당시 20세 이상 된 자들)가 모두 죽게 되기까지를 뜻한다.
=====5:7
그들의 대를 잇게 하신 이 자손 - 여기서 '대'(代)는 '타하트'(* )로서, '...의아래', '...대신'이란 뜻이다. 그리고 '잇게 하다'의 히브리어 '쿰'(* )은 들어올리다', '세우다', '단단하게 고정시키다', '임명하다'를 뜻한다. 따라서 이 문구는 축어적(逐語的)으로 '하나님이 그들 대신에 일으켜 세우신 자손'(KJV, RSV)이란 뜻이다.
길에서는...할례를 행치 못하였으므로 - 40년(보다 정확히는 38년, 민 14:34 주석 참조) 동안의 광야 생활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이 할례를 받지 못난 사실을 설명하고 있다. 그러면 광야 40년 동안 왜 할례를 행치 못했을까? 그 이유로 다음과 같은 견해가 제시된다. 즉 (1)광야 생활 동안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스스로 다른 민족과 구별된 상태였기 때문에 구태여 할례를 받을 필요가 없었다는 견해. (2)시내 산 언약에서 할례에 대한 언급이 없을 뿐 아니라, 할례는 본래 가나안 언약에 대한 표징이므로(창 17:10) 광야기간 동안에는 할례의 의무가 주어지지 않았다는 견해. (3)광야 생활 동안에는 자주 이동해야 했기 때문에 일정한 휴식을 요하는 할례가 시행될 수 없었다는 견해 등이다(Matthew Henry's Commentary). 그러나 우리는 광야 기간 동안 할례가 금지된 이유를 성경 본문(4-7절)의 맥락속에서 충실히 찾아야 한다. 즉 그 이유는 '가데스 바네아 사건'(민 14:26-35) 때문이었다. 곧 가데스 바네아 사건은 가나안 땅을 주시겠다고 하신 하나님의 약속을 이스라엘이 정면 거부하고 배척한 패역한 사건으로서, 그결과 진노하신 하나님께서 당신의 약속을 그 패역한 세대로부터 거두어 들인 사건이다. 아울러 그 불순종에 대한 책임을 그들의 자손들에게까지 짊어지운 사건이다(민 14:33). 그러나 동시에 그 시한을 '출애굽 제 1세대(당시 20세 이상된 세대)가 광야에서 모두 소멸되기까지'로 한정하신 사건이다. 바로 이러한 이유로 인해 '광야 생활 동안'에는 가나안 언약의 징표인 할례를 행치 못했던 것이다(Keil, Matthew Henry, Hengstenberg, Calvin). 5절 주석 참조.
=====5:8
할례 행하기를 필하매 - 여기서 '필하매'는 4:1의 '마치매'와 같은 단어로, 문자적으로 '끝미쳤을 때에'를 뜻한다. 한편 여기서 카일(Keil)은 당시 할례를 받은 수효를 대략 70만명 가량으로 보고 있는데, 그 산출 근거는 다음과 같다.
즉 난 지 8일 이상 된 남자를 할례 대상으로 삼을 때(창 17:12) 이스라엘 전체 인구(20세 이상 된 성인 남자만 601,730명이므로, 전체 인구는 도합 200만명 가량으로 추정될 수 있음 - 민 26:51) 중 남자는 100만명으로 산출될 수 있다.
그중에서도 가데스 바네아 사건(민 14:29) 당시 20세 미만이었던 자는 출애굽 때 이미 할례를 받은 것으로 보아야 하기 때문에(5절) 이들의 비율(약 1/3 - 1/3.5)을 빼면 길갈에서 할례를 받을 대상자는 대략 70만명 정도가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정도의 수효는 나머지 30만명의 어른들(요단 강 도하시 이들의 나이는 38세로부터 58세까지로 구성되어 있었다)에 의해 하루 동안에 할례를 다 필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Keil & Delitzsch, Vol. II. p. 58).
진중 각 처소에 처하여 - 여기서 '진'(陣)의 히브리어 '마하네'(* )는 '진을 치다'(encamp)를 뜻하는 '하나'(* )에서 유래한 말로, 구약 성경에서 이 말은 지파나 군대를 일시적으로 보호하기 위해 친 울타리를 뜻한다(민 1:47-2:34; 10:11-28 ). 그리고 '처하여'의 히브리어 '야솨브'(* )는 '앉다', '머루르다'라는 뜻으로 영역본 RSV, NTV는 '머무르다'(remain)로 번역하였다.
낫기를 기다릴 때에 - 직역하면 '나을 때까지'이다. 여기서 '낫다'의 히브리어 '하야'(* )는 '소생할'(창 45:27; 욥 14:14), '회복하다'(왕하 1:2; 8:8)란 듯으로(Keil), 이 문구는 할례의 상처가 치유될 때까지 머칠동안 장막에 머물러 있었음을 보여 준다. 왜냐하면 할례를 받고 나면 베어 낸 상처가 아물 때까지 심한 활동을 할수가 없기 때문이다(창 34:25).
=====5:9
애굽의 수치 - 여기서 '수치'가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서는 약간의 이견이 있다. 즉 (1)애굽에서의 노예 신분으로서 이스라엘이 당한 수모를 가리킨다는 견해(Bright)와 (2)이스라엘이 광야에서 유리 방황하는 것을 보고, 하나님이 광야에서 자기 백성들을 죽이려고 그들을 애굽에서 인도해 내었다고 조롱하던 애굽인들의 모욕적인 생각이나 언사(출 32:12;민 14:13-16;신 9:28)를 가리킨다는 견해(Keil), (3)그리고 위의 2가지 견해 모두 일리가 있다고 생각하는 견해(Campbell, Woudstra, Maxwell, Matthew Henry, Fay)등이 있다. 그런데 영역본들(KJV, NTV, RSV)은 이를 '비난', '힐책'이란 뜻이 강한 'reproach'로 번역함으로써 카일(Keil)의 견해를 강화시켜 주고 있다. 그러나 광의적인 의미에서는 양자를 모두 포함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굴러가게 하였다 - 애굽의 속박 생활로 인한 모멸, 혹은 출애굽을 하고서도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했다고 조롱하던 애굽인들의 비난을 멀리 굴려 버렸다는 뜻이다. 즉 요단 강을 건너가 가나안 땅 길갈에서 언약의 징표인 할례를 받음으로써 그러한 모든 모멸, 수치, 비난, 힐책 등을 멀리 내어버렸다는 뜻이다(Calvin, Keil, Lange).
길갈 - 4:19 주석 참조.
=====5:10
그 달 십 사실 저녁에 - 출애굽의 구속 사건을 기념하는 유월절 행사는 엄밀한 의미에서 아빕월 십 사일 저녁(출 12:6, 18; 레 23:5; 민 28:16; 신 16:6)하루 밤 사이에 지켜 지는 행사를 가리킨다. 그리고 유월절의 밤을 포함하여 향후 7일간 지켜지는 절기 행사를 '무교절'이라 한다. 그러나 이 두 절기, 곧 유월절과 무교절은 한 가지 사건을 기념하는 두 행사이기 때문에 엄밀히 구분할 수가 없다. 따라서 성경은 이 두 절기를 구분없이 사용하고 있다(출 12:15-20). 한편 여기서 '저녁에'의 히브리어 '바에레브'(* )는 '황혼이 지는 때에'란 뜻이다.
히브리인들은 그날 황혼 때부터 다음날 황혼까지를 하루로 보았다
여리고 평지 - 요단 강 서쪽의 대초원 지대를 가리킨다(Woudstra).
유월절을 지켰고 - 성경 기록에 의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 길갈에서 지킨 유월절은 세번째로 시켜진 셈이 된다. 즉 첫번째는 애굽에서 출애굽 직전에 지켰고(출 12:3-28), 두번째는 시내 광야에서 시내 산을 떠나기 직전에 지켰다(민 9:1-5). 그후 가데스 바네아 사건(민 14:26-35)이 일어났고, 그후로는 유월절을 지켰다는 기록이 나타나지 않는다. 아마 그 저주의 38년 기간 동안에는 할례없는 자들이 되었기 때문에 유월절 역시 지켜지지 않은 듯하다(L. Wood, Keil). 왜냐하면 할례는 유월절 예식의 참여를 위한 전제 예식이었기 때문이다(출 12:48; Woudstra). 그러나 저주의 기간이 지나고, 요단 도하 후 길갈에서 이스라엘 모든 백성이 할례를 받아 하나님과의 언약을 다시 회복함으로써, 이제 그들은 언약 백성으로서 근 40년간 유보되었던 유월절을 지킬 수 있었던 것이다. 한편 유월절 예식에 관한 자세한 내용은 <레위기 서론, 히브리 절기와 축제> 부분을 참조하라.
=====5:11
유월절 이튿 날 - 10절에 따르면 유월절이 아빕월 14일이므로, 이날은 아빕월 15일이다(민 33:3). 그리고 레위기 23:6에 의하면 이날부터 무교절이 시작되어 칠 일 동안 계속된다(Woudstra).
그 땅 소산 - 성경 전체를 통틀어 이곳과 12절 두 곳에만 나오는 말로서, 곧 '가나안 땅에서 소출된 식물'을 뜻한다(Keil).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 강을 도하할 당시는 보리 추수기였다(3:15). 그리고 여호수아서 저자는 그것이 '무교병'과 '볶은 곡식'임을 뒤이어 구체적으로 말하고 있다.
무교병과 볶은 곡식 - 가나안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처음으로 먹은 식물인데, '무교병'(無敎餠)은 '누룩을 넣지 않은 떡'을 뜻하는 말로서 유월절 규례와 관련되어 사용된 것이며 (출 12:8) ,'볶은 곡식'은 '볶다' ,'굽다',를 뜻하는 칼라(* )에서 유래된 말로서 ,원문에는 '곡식'이란 말이 생략되어 있다. 레 2:14 주석참조.
=====5:12
그 땅 소산을 먹은 다음 날에 만나가 그쳤으니 - '만나'(Manna)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40년 동안 생활할 때 그들에게 주어진 광야의 음식이요, 하늘의 음식이었다(출 16:15 주석 참조). 그러나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람 사는 땅'(출 16:35) 가나안에 이르러 땅에서 생산되는 곡식을 먹을 수 있게 되었으므로, 더이상 만나의 이적이 베풀어질 필요가 없게 된 것이다. 이와같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의 곡식을 먹자마자 만나가 그치게 되었다는 사실에서 주석가 메튜 헨리(Matthew Henry)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점을 발견할 수 있다고 하였다. 즉 (1)만나는 결코 우연적이거나 자연적인 현상에 의해 주어진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기적적인 간섭에 의해 주어졌다는 점, (2)자연적인 방식으로 곡식이 주어지게 되면, 만나와 같은 초자연적이고 이적적인 식량을 받을 생각을 포기해야 한다는 점이다(Maatthew Henry's Commentary, Vol. II. Joshua).
=====5:13
여리고에 가까왔을 때 - 여호수아는 길갈에서 할례와 유월절이라는 종교 의식을 집행하고 난 다음, 이제 가나안 정복을 수행하기 위해 여리고로 향하고 있었다. 아마 당시 그는 여리고 공략 작전에 골몰하고 있었을 것이다. 이때 그의 앞에 하늘의 메신저(the Messenger)가 나타났던 것이다.
한 사람이 칼을 빼어 손에 들고 - 종교 의식을 끝내고 여리고로 향해 가던 여호수아 앞에 칼을 빼든 한 사람이 나타났다. 여기서 '한 사람'은 14절에서 '여호와의 군대 장관'으로 명시되어 있다. 한편, 이와같이 길에서 여호와의 사자를 만난 것은 발람의 경우 에서도 발견된다(민 22:23). 그러나 발람에게 나타난 여호와의 사자는 발람의 잘못된 행동을 시정토록 하기 위함이었던데 반해, 여호수아의 경우에는 여리고 전투를 앞둔 그를 더욱 위로 하고 격려하기 위함이었다. 그것은 여호수아의 군대를 돕기 위하여 당당하게 칼을 빼들고 무장한 채 나타났다는 사실이 충분히 입증해 준다. 한편 여기서 카일(Keil)은 이와같이 여호와의 군대 장관이 칼을 손에 들고 나타난 현상은 결코 주관적이고 심리적인 어떤 비현실적 환상이 아니라, 실지로 있었던 객관적이고 외적인 현상이었다고 주장하면서, 그 근거로 여호수아가 여호와의 군대 장관과 일정한 거리를 두고 대면하며 말을 하고 있는 사실을 들었다(Keil & Delitzsch, Vol. II. p. 63).
우리를 위하느냐 ...대적을 위하느냐 - 여리고 전투를 앞둔 긴박한 상황에서 갑자기 나타난 이 위풍당당한 장관에 대하여, 이스라엘의 군대 지휘자로서의 여호수아가 물을 수 있는 당연한 질문이다(Knobel).
=====5:14
여호와의 군대 - 호프만(Hofmann)은 이 군대를 이스라엘 군대로 보고 있는데, 이것은 전혀 근거가 없다. 왜냐하면 비록 출 12:41에서 애굽을 탈출한 이스라엘의 군대를 여호와의 군대라고 지칭한 적이 있기는 하지만, 여기에서 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을 단수 명사로서의 여호와의 군대나 군사로 지칭한 곳은 성경 그 어느 곳에서도 발견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카일(Keil)은 이와 같은 호프만의 견해를 비판하면서, 여기서 여호와의 군대는 '하늘의 만군'(왕상 22:19), '천군'(시 103:21), (하늘의)'사자'(시 148:2)등을 뜻한다고 하였다(Keil & Delitzsch, op. cit. p. 62).
여호수아가 땅에 엎드려 절하고 - 여호수아는 전 이스라엘을 지휘하는 군대 장관이었지만, 그러나 하늘 만군의 군대장관 앞에서 그는 땅에 엎드려 그를 경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제 본격적인 가나안 정복 전쟁을 앞두고 여호와의 군대 장관이 나타난 것은 여호수아에게 실로 큰 힘과 용기를 주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가나안 정복 전쟁은 성전(聖戰)으로서, 이 전쟁의 승패는 오직 하나님께 달려 있음을 그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여호와의 군대 장관 앞에 스스럼 없이 경배를 드렸던 것이다.
=====5:15
여호와의 군대 장관 - 구약 시대에 간혹 육신(肉身)을 덧입고 사람의 형상으로 당신의 종들을 찾아오셨던 제 2위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창 16:7; 18:1; 32 :24, 30: 출 3:2, 4). 자세한 내용은 5:13-15강해, '여호와의 군대 장관'을 보라. 그리고 창 16:7-16 강해, '여호와의 사자' 부분도 참조하라.
신을 벗으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하니라 - 여기서 '신'(shoes, RSV ; sandals, NTV)은 '거룩'과 상반되는 세상의 온갖 죄악을 상징하는 말로 사용되었다. 따라서 거룩하신 하나님의 거룩한 임재 장소에 신을 신고 서 있을 수 없었다. 출 3:5 주석 참조.
요단 강을 도하한 이스라엘이 본격적으로 가나안 정복 전쟁에 나서기 앞서 다시 한번 기본 전열(戰列)을 가다듬고 하나님의 성군(聖軍)으로서 마땅히 갖추어야 할 자세를 다지고 있는 장면이다. 이러한 본장은 크게 길갈에서 할례를 받음(1 - 9절), 유월절을 지킴(10 - 12절), 여호와의 군대 장관이 나타남(13 -15절)으로 구성되어 있다. 즉 요단 강을 도하한 후(3, 4장) 가나안 땅에 진입하자마자 여호수아응 그 땅을 정복하고 그곳의 거민을 쫓아내기 위한 준비를 곧바로 착수하게 된다. 그 준비로서 그는 율법을 잘 지키기만 하면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1:7 - 18)무엇보다도 먼저 율법 준수부터 시행하고자 했다. 사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40년 동안 마땅히 지켜야 할 율법의 상당수를 지키지 않고 있었다. 그래서 여호수아는 특별히 두 가지의 율법을 지키려 했는데 그것은 곧 할례 의식과 유월절 의식이었다. 이 두 의식이 율법에 설명된 대로 실시되고 나자 하나님께서는 여호와의 군대 장관으로 여호수아에게 나타나셨다. 그분께서 직접 군대 장관의 모습으로 나타나신 족속들을 쫓아내어 주실 것을 보여 주기 위해서였다.
가나안 정복 전쟁은 6장에서부터 시작되어 12장에서 종결되고 13장에서부터는 정복한 가나안 땅의 분배에 대해서 기술되기 시작한다.
1. 할례 시행(5:1-9)
이스라엘 민족이 요단 강 도하 후 길갈에서 할례를 받는 장면이다. 요단 강 서편의 가나안 모든 왕들은 이스라엘의 요단 강 도하 소식을 듣고 겁에 질리게 된다(1절). 그들은 지금까지 이스라엘 백성들의 행동을 주시해 왔으며 그들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에 대해 긴장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들이 쉽게 건널 수 없으리라고 생각했던 요단 강까지도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 쉽게 건너게 되자 아연 실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와 같이 가나안 족속이 무서움에 사로잡혀 있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할례를 행한다(2-9절). 그 중 2, 3절은 하나님의 분부를 받은 여호수아가 백성들에게 할례를 실시하는 장면이다. 그리고 4-9절은 가나안 정복을 눈앞에 둔 시점에서 이스라엘이 이처럼 갑작스럽게 할레를 받아야만 했던 이유에 대한 설명이다.
주지하다시피 '할례'는 이스라엘이 이방인들과 구별되는 하나님의 언약 백성임을 나타내는 의식이다<창 17:1-14 강해, 할례 언약과 세례>. 그런데 가나안 성읍들을 향해 돌진해야 할 이스라엘에게 하나님께서 이러한 할례를 요구하신 데는 특별한 의미가 있다. 이제 이에 대하여서는 바로 뒤이어 나오는 주제 강해를 참조하라.
요단 강 도하 후의 할례의 의의(意義) - 이스라엘이 할례를 행한 때는 가나안 족속들이 두려움에 떨고 있을 때이므로(4절) 일견 할례를 행하기에는 적절한 때였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왜 하필이면 지금 행할까 하는 의문을 가질 수 잇다. 과거 할례의 고통으로 인해 몰살당했던 세겜족의 경우처럼(창 34:15-25) 이스라엘이 지금 할례를 행한다는 것은 아무리 가나안 거민이 두려움에 떨고 있다 하더라도 이 소시까을 듣고 그들이 기습을 해오면 큰 피해를 입을 공산(公算)이 컸다. 차라리 요단 강 도하 전에 이 일이 시행되었더라면 더 좋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위험을 무릅쓰면서까지 지금 시행하는 것은 그만한 이유와 의미가 있었기 때문이다.
즉 가나안 땅, 이 땅은 아브라함때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장구한 세월 동안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주실 것이라고 약속하신 땅이었다<출 3:16-22 강해, 젖과 꿀이 흐르는 땅>. 바로 이러한 땅에서 할례를 행한다는 것은 특별한 의의가 있는 것이었다. 할례는 하나님의 백성임을 나타내 주는 외적인 표시인데(창 17:10-14), 가나안에 들어간 그들로서는 반드시 성별된 민족임을 인식해야만 했다.
물론 인간적인 견지에서 볼 때 여호수아는 장군으로서 부적격자인 듯 보일 수도 있다. 왜냐하면 군대를 총지휘하는 장군이 언제 기습을 당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그것도 적어도 자신의 병력보다 몇 배로 우세한 병력을 가진 적을 앞에 두고 백성들에게 할례를 시행한다는 것은 심히 어리석은 일로 생각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호수아는 우리의 인간적 생각과는 달리 가나안 정복 전투는 하나님의 능력에 달려 있으며 이 전투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가 무엇보다 먼저 정립되어 있어
야 함을 알고 있다. 즉 여호수아가 두려워했던 것은 가나안 족속의 병력이 아니라 마땅히 지켜야 할 율법을 지키지 않으므로 당하게 될 하나님의 심판과 저주였던 것이다.
2. 유월절 준수와 가나안의 첫 소산(5:10-12)
이스라엘 백성들이 할례를 행한 데 이어 유월절을 지키며(10절), 애굽을 탈출한 지 40년만에 처음으로 가나안 땅의 소산을 먹는 장면이다(11절).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40년 동안이나 먹었던 만나가 더 이상 하늘로부터 내리지 않은 데 대한 기록이다(12절).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에 진입하자마자 두 가지 의식을 행하였는데, 첫번째는 앞에서 설명되었던 할례 의식이며, 두번째는 본문에 설명되어 있는 유월절 의식이다. 유월절은 이스라엘의 3대 절기 중의 하나로서 애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탈출한 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제정되었다(출 12:14 ; 21:24, 27). 그러나 그들은 출애굽 이듬해에 시내 산에서 두번째의 유월절을 지킨(민 9:1-14) 후로는 한번도 유월절을 지키지 못하였는데, 요단 강을 건넌 지금 다시 유월절을 지키게 되었다.
이 유월절 의식을 지키는 것은 할례 의식을 지키는 것과 마찬가지로 당시의 상황으로 보아서 아주 위험한 일이었다. 언제 기습을 당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이러한 축제 행위는 일반적으로 생각할 때 얼른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출애굽을 했던 일을 기념하는 이 유월절 축제를 지키면서, 애굽 군대를 물리치고 기적을 일으키셔서 그들을 보호해 주셨던 그 하나님의 능력이 지금도 함께 하여 가나안 군대도 능히 물리칠 것을 확신하였다. 아마 인간적으로 볼 때는 어리석고 무모하기 짝이 없는 듯 해 보이는 이러한 할례 의식과 유월절 의식은 오히려 요단 강 도하의 기적으로 압도당한 가나안 족속들의 기세를 더욱 꺽어버리는 역설적인 일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한편 이스라엘 백성이 신 광야에서부터 먹기 시작한 만나는(출 16:15) 40년이 지난 해의 정월 17일에 이르러 중단되었다(11, 12절). 험난하고 메마른 생활을 마치고 가나안 땅의 소출을 대하게 된 백성들에게는 더 이상 초자연적인 음식 공급 방법이 필요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만나가 그친 사실에서 우리는 두 가지 교훈을 생각해 볼 수 있다.
(1) 하나님께서는 당신께 대한 맹목적 의뢰를 용납하시지 않는다. 사람의 힘으로 불가능한 것들을 하나님께서는 이적을 통해서라도 이루어 주시지만 사람의 힘으로 해결될 수 있는 것들에 대해서는 각자 열심과 성의있는 노력으로 해결하길 요구하신다.
(2) 우리의 필요를 먼저 아시는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들을 적절한 시기에 적절한 양으로 채워 주신다(마 6:8 ; 빌 4:19). 따라서 성도들은 자신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를 지혜롭게 분별하여 하나님께 무리한 요구를 하거나 받은 바 달란트를 썩히는 일이없도록 해야 할 것이다(마 25:24-26).
3. 여호와의 군대 장관(5:13-15)
할례 시행(1-9절), 유월절 준수(10-12절)등과 같은 일련의 의식들을 거행함으로써 먼저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재정립한 여호수아가 백성들을 이끌고 길갈에서부터 여리고 부근에 이르렀을 때 발생한 일이다. 즉 여호수아는 여리고 가까이 이르렀을 때 칼을 손에 빼어 들고 선 여호와의 군대 장관을 만나게 된다(13, 14절). 이에 여호수아가 그에게 엎드려 절하자 그는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하니라"고 말한다(15절).
여호수아의 소명 광경은 마치 모세가 시내 산에서 소명을 받을 때의 광경을 연상시킨다(출 3:5). 즉 모세가 이스라엘의 구원을 위해 소명을 받았듯이, 이제 여호수아는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이스라엘을 인도하기 위해 소명을 받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나타나셨을 때 당신 자신을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하셨다(출 3:6). 비록 여기서는 이러한 말이 없지만 여호수아에게 나타나신 하나님 역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심에 틀림없다. 하나님께서는 늘 이스라엘 족장들에게 가나안 땅을 그들의 후손들에게 주실 것이라고 약속하셨는데(창 13:14, 15;26:2, 3;28:13)이제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에게 나타나셔서 그들에게 약속했떤 것을 성취시키려 하고 있는 것이다.
성전(聖戰) - 본문에서 하나님의 군대 장관이 여호수아에게 나타난 것은 큰 의미가 있다. 이것은 6장 이후부터 전개될 가나안 정복 전쟁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하나님께서 친히 이스라엘을 위해서 싸우실 것임을 가식적으로 보여 준 것이다. 이처럼 여호와 하나님께서 직접 참가하셔서 싸우시는 전쟁, 또는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수행하는 전쟁을 소위 성전(聖戰, Holy War)이라고 하는데, 여기서 이 성전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자.
성전(聖戰)의 일반적 개념은 '여호와는 용사시니'라는 말씀(출 15:3)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삼상 17:14)이라는 말씀에 근거한다. 이는 곧 성전이 단순한 영토 확장이라는 일반적 전쟁의 성격을 가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는 세력들에 대한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이라는 성격을 지니고 있음을 의미한다(암 1:1 - 2:3). 이러한 성전 개념은 가나안 정복 전쟁과 사사 시대의 전쟁을 통해 뚜렷이 발전되었으나, 다윗 시대 이후로는 점차 희미해져 갔다.
한편 성전은 곧 하나님의 거룩한 전쟁이기 때문에 전쟁을 수행하기 전에 반드시 선행되어야 했던 것은 하나님의 허락을 받는 것이였다. 이 하나님의 허락이 없이는 어떠한 전쟁도 수행할 수 없었다. 하나님께 묻는 방법은 꿈, 우림, 에봇, 그리고 선지자의 말씀 등이 사용되었는데(삿 7:9-14 ; 삼상 28:6 ; 30:7 ; 삼하 5:19, 23 ; 왕상 22;5, 7, 8), 이와 같이 하나님께 묻는 것은 전략을 결정하는 필수적인 요소였다(삼하 5:19-23). 즉 이스라엘 군대 장관들은 자신의 이름이나 재능에 힘입어 전쟁을 지휘한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최고의 군대 장관 이었던 '하나님의 신'의 특별한 은총을 힘입어 지휘했던 것이다(삿 6:34 ; 11:29). 하지만 어떠한 경우에서든지 하나님의 신이 일단 그에게서 떠나면 그의 지휘권은 또한 떠나 버렸다(삿 16:20 ; 삼상 16:14).
그리고 하나님의 신의 인도를 받는 지도자를 따라서 성전에 참여하려는 사람은 전심으로 하나님께 헌신해야만 했다. 때문에 군대 장관들은 전쟁을 겁내는 사람, 갓 결혼한 사람, 혹은 재정 문제나 집안 일로 정신력이 약한 사람들은 집으로 돌아가도록 요구하기도 했다(신 20:5-9). 그런 사람이 있으면 '기꺼이 헌신한' 사람들의 단결력이 깨질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아무튼 성전을 수행함에 있어서 군대의 수는 거의 중요하지 애다았다(삿 7장 ; 삼상 14:6). 군인들만이 성전을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하셨기 때문이다. 즉 "너희 하나님 여호와는 너희와 함께 행하시며 너희를 위하여 너희 대적을 치고 너희를 구원하시는 자"이셨기 때문이다(출 14:14 ; 신 9:3 ; 20:4). 그러므로 군사들은 성전을 '여호와의 싸움'(삼상 18:17 ; 25:28)이라고 하였으며 전쟁에서 외치는 함성 가운데 하나를 들어보면 '하나님께서 원수를 우리의 손에 붙이셨다'(삿 3:28 ; 7:15 ; 삼상 7:8)라는 것이었다.
한편 신약 시대에 이르러 성전의 개념은 영적인 범위로 확대되고 재해석되었다(고전 14:8 ; 고후 10:10:3 ; 딤전 1:18, 19). 즉 하나님께서 택하신 백성들의 모임인 교회(헬, 에클레시아)는 죄와 악의 세계를 지배하는 사단과 그를 추종하는 세력에 대항하여 전쟁을 치루는 것이다(엡 6:10-12). 이 싸움은 영적인 전쟁이기 때문에 성도들은 영적인 무장을 하고 싸움에 임해야 한다(엡 6:10-17). 물론 여기서의 싸움은 성도들이 육신의 정욕과 악의 유혹, 죄와 싸워 나가는 하루하루의 신앙 생활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 싸움도 구약 시대의 성전(聖戰)처럼 하나님께서 같이 하셔야만 승리할 수 있다. 결국 성도들에게 있어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사실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최후의 승리가 이미 보장되었기 때문에(골 2:12-15) 성도들은 그분을 의지하고 신앙의 확신을 갖는 것이다(골 3:10, 16, 17).
여호와의 군대 장관 - 본문에는 여호수아에게 여호와의 군대 장관이 나타났다는 기사가 나온다(13-15절).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서 이 여호와의 군대 장관이 누구인가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 여호와의 군대 장관은 13절에서는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난 것으로 묘사되어 있는데, 6:2에는 그가 여호와 하나님인 것으로 나타났다. 13-15절과 6:1-7에서 여호수아에게 나타난 여호와의 군대 장관과 동일한 분이다. 따라서 우리가 여기서 주시해야 하는 것은 본문의 여호와의 군대 장관은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난 분인 동시에 또한 하나님이시라는 점이다.
그러면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나신 분이면서 하나님인 분은 누구인가 ? 이에 대해 신학자들은 그분을 그리스도라고 말한다. 약 2000년 전에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성육신을 통해 사람인 동시에 하나님으로 이 땅에 오셨지만, 그러나 이미 그 이전 구약 시대때도 천사의 모습으로 나타나 하나님의 권위를 가지고 말씀라시고 행동하신 적이 종종 있다. 다만 본문에는 그리스도께서 '여호와의 군대 장관'이란 이름으로 나타났었지만, 구약 시대에는 거의 '여호와의 사자'란 이름으로 나타나셨다는 차이만 있을 뿐이다<창 16:7-16 강해, 여호와의 사자>.
한편 '여호와의 사자'는 조직 신학에서 기독론을 다룰 때 성육신 이전 시대에 나타나신 그리스도라 해석하여 중요하게 취급한다. 사실 창 16:7-13에서 보면 16:7-12까지는 여호와의 사자가 말한 것으로 되어 있으나 16:13에서는 그가 곧 여호와인 것으로 언급되어 있다. 이와 같이 성부(聖父) 하나님과는 다른 인격이면서도 또 동시에 근본 하나님이신 분은 바로 그리스도이신 것이다. 이 여호와의 사자란 이름은 특별한 이름으로 일반적인 천사와는 달리 학개서 1:3의 한 곳을 제외하고 대개 그리스도를 가리킬 때 사용되었다. 즉 구약에서 그리스도께서는 여호와의 사자란 이름으로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물로 바치기 위해 칼로 죽이려 할 때 그의 손을 멈추게 하셨고(창 22:11-18), 시내 산에서 모세를 부르셨고(출 14:19), 이스라엘이 출애굽할 때에 그들 앞에 행하셨다(출 14:19 ; 23:20 ; 32:34). 이 외에도 그리스도께서 여호와의 사자란 이름으로 나타난 곳은 민 22:25-35 ; 삿 6:11-23 ; 대상 21:1-27 ; 왕상 19:5-7 ; 왕하 19:35 등 무수히 많다. 어떤 신학자는 다니엘의 세 친구 사드락, 메삭, 아벱느고가 풀무불에 던져졌을 때 나타나셔서 그들을 조금도 상하게 하지 않은 천사도 바로 그
리스도라고 보고 있기도 하다.
한편 이와 같이 그리스도께서 구약 시대에도 천사 혹은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나신 것은 성육신(成肉身)과 관련이 있다. 즉 천사 혹은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나셨던 제 2위 하나님 그리스도께서 낮아질 대로 낮아지신 최절정이 바로 성육신 사건이다. 사실 하나님께서는 육체도 없고 또 무한 거룩하시기 때문에 육체를 가진 인간이 이런 하나님을 바로 대면하기는 불가능하다(사 6:1-5).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구약 시대에는 인간들에게 천사 혹은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나셨고 또한 마침내 성육신을 통해 신약 시대에는 사람으로 나타나셨던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는 성육신을 통해 낮아질 대로 낮아
지셔서 인간과 동일한 육체까지 입고 오심으로 인간의 구속을 이루신 것이다. 이러한 성육신 사건에 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마 1:23 주석 및 강해를 참조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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