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크마 주석, 여호수아 03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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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아침에 일찌기 일어나서 - '일찌기 일어나다'의 히브리어 '솨캄'(* )은 그 자체 로서 아침 일찍이 일어나는 것을 뜻하지만, 본절에서처럼 '아침에'(* , 밥보케르)라는 수식어와 함께 사용되기도 한다. 여호수아는 여리고 성(6:12), 아이 성(8:10)을 정복하기 위해서도 아침에 일찍이 일어났는데, 이는 대사(大事)를 앞두고 여호수아가 항상 영적으로 먼저 무장했음을 보여준다.
싯딤에서 떠나 요단에...유숙하니라 - '싯딤'과 '요단'에 관해서는 각각 1:2과 2:1 주석을 참조하라. 한편 '떠나다'의 히브리어 '나사'(* )는 '천막 말뚝을 뽑다', '출발하다', '여행하다'를 뜻하는 말로서, 천막 생활을 하며 유랑하였던 초기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적 생활 무대와 잘 어울리는 말이다. 즉 그들은 다음 여행지로 갈 때 천막 말뚝을 뽑아 천막을 걷은 다음 출발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유숙하다'의 히브리어 '룬'(* )은 대개 어떤 장소에서 밤을 보내려고 숙박하는 것과 관련하여 사용된다.

=====3:2
삼일 후 - 즉 싯딤(Shittim)에서 요단 강둑에 이른 지 3일이 지난 때이다. 이처럼 요단 강둑에 이르러 3일을 유숙한 이유는 요단 강 도하(渡河)직전 최종 마무리 준비를 해야 했고, 또한 여호와의 지시를 기다려야 했기 때문이다(Loen Wood, C.F. Keil).
유사 - 1:10 주석 참조.

=====3:3
레위 사람 제사장들 - 레위 지파 사람이라고 해서 모두 제사장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제사장은 그 가운데서 오직 아론의 자손에만 국한되었다(민 3:1-4). 신 31:25 주석 참조.
하나님 여호와의 언약궤 - '법궤'(레 16:2), '증거궤'(출 30:6), '여호와의 궤'(수 4:11), '하나님의 궤'(삼상 3:3), '주의 능력의 궤'(대하 6:41)등으로 불리워지기도 하는 언약궤는 출 25:10-22에 그 규모가 상세히 설명되어 있다. 이 궤 속에는 십계명 두 돌판과 만나 항아리, 그리고 아론의 싹난 지팡이가 담겨져 있었다(히 9:4; 왕상 8:9). 한편 이 언약궤를 운반할 경우, 규정상으로는 레위 지파의 고핫 자손들이 어깨에 메어 운반하도록 되어 있었지만(민 4:4-15), 특별히 중요한 경우에는 제사장들이 직접 운반하기도 했다(신 31:9; 왕상 8:3, 6).
그 뒤를 좇으라 - 광야 생활 동안에도 줄곧 언약궤가 앞서 가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뒤를 따라 행진하였다(민 10:33-36). 여기서 '언약궤'는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바, 이를 뒤따르는 것은 곧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순종하며 따르는 것을 뜻한다(Matthew Henry).

=====3:4
그 사이 상거가 이천 규빗쯤 되게 하고 - 여기서 '상거'(相距)는 '멀리 나가다'( * , 라하크)에서 파생한 형용사로 여기서 '...만큼의 거리거 떨어'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규빗(Cubit)은 통상 손가락 끝에서 팔꿈치 까지의 거리고 약 45cm이다. 그러므로 2000 규빗은 약 900m 정도의 거리인데, 이 거리는 요단 강의 바깥 둑, 곧 엘 그호르(el-Ghor)에서 강바닥, 곧 에즈 조르(ez-Jor)에 이르는 거리고, 이는 제사장들의 발이 강가에 닿았을 때(8절) 백성들은 여전히 바깥 강둑에 머물러 있었음을 보여 준다. 한편 이처럼 일정한 간격을 두고 언약궤를 따라가게 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1)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인 언약궤에 대해 경외심을 심어 주기 위함이었다(Calvin, Matthew Henry). (2)온 백성으로 하여금 언약궤를 충분히 바라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다(Keil, Woudstra). 한편 후일 유대 랍비들은 본절에 언급된 바 백성들과 언약궤 사이의 거리를 근거로 안식일에 걸을 수 있는 허용 거리를 산출하기도 했다.
가까이 하지는 말라 - '가까이 하다'의 히브리어 '카라브'(* )는 '끌어당기다', '접근하다'를 뜻한다. 후일 법궤 운반시 웃사(Uzzah)가 무분별하게 법궤에 손을 댓다가 죽임을 당한 사건(삼하 6:6, 7)으로 미루어 볼때, 이 명령은 언약궤가 거룩성을 나타낸다고 할 수 있다.

=====3:5
스스로 성결케 하라 - 요단 강 도하를 앞두고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성결'(* , 코데쉬)을 명하였다. 그런데 여기서는 성결의 구체적인 행위로 의복을 빤다든가(출 19:10, 14), 옷을 갈아 입는다는가(창 35:2), 또는 여인을 멀리하는 것(출 35:2)등과 같은 외부적 성결 행위를 의미하는 것 같지는 않다. 왜냐하면 당시로서는 그러한 준비를 할만큼 시간적 여유가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기서 여호수아가 명령한 성결(聖潔)은 심령의 성결, 곧 영적 성결의 자세를 삼가 가다듬으라는 의미로 봄이 좋다(Keil & Delitzsch, Vol. ?. p. 41). 한편 공동번역은 "목욕 재계하여라"고 번역하였다.
기사(* ,팔라) - 하나님의 권능이 역사 속에 개입하는 것을 뜻하는 말로, 출 34:10에서도 가나안 정복과 관련하여 이 단어가 사용되었다.

=====3:6
앞서 건너라 - 여기서 '앞서'의 히브리어 '리프네'(* )는 단순히 '앞에서'(before ; KJV, RSV)라는 뜻보다는 '선두에서'(ahead of ; NTV, 공동 번역)라는 뜻이 더 강하다. 실로 넘실대는 요단 강물에 발을 내디딘다는 것은 큰 믿음과 용기가 요구되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임재와 동행의 상징인 언약궤가 함께 하였으므로 오직 믿음으로 발을 내디딜 수 있었다.

=====3:7
여호와께서...이르시되 - 모세가 죽은후 그의 후계자 여호수아에게 나타나 크신 위로와 격려의 말씀으로 용기를 주셨던(1:9) 하나님께서 요단 강 도하 직전, 다시 한번 크신 능력의 말씀으로 여호수아를 격려하신다.
오늘부터 시작하여 - 기적적인 요단 강 도하 사건은 장차 여호수아를 영화롭게 할 일련의 기적적인 사건들의 시작에 불과함을 시사한다.
그들로 알게 하리라 - 홍해 도하(渡河)의 기적이 모세를 주의 종으로 확실히 인정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듯이(출 14:31), 요단 강 도하 사건의 기적은 여호수아를 이스라엘의 신뢰할만한 지도자로 확실히 인정받게 하는 계기가 될 것이라는 뜻이다(Keil & Delitzsch, Vol. II. 42).

=====3:8
명하여 이르기를 - 홍해 도하 기적에 있어서의 모세의 역할보다 요단강 도하 기적에 있어서의 여호수아의 역할은 간접적이다. 즉 모세는 지팡이를 들므로써 직접 사역한 반면에(출 14:16, 21), 여호수아는 제사장들에게 명령을 내림으로써 간접 사역을 하였던 것이다.
요단에 들어서라 - '들어서다'의 히브리어 '아마다'(* )는 '서다', '머무르다'란 의미이다. 따라서 요단 강에 들어가 계속 서 있음을 뜻한다.

=====3:9
이리 와서 - 여기서 '와서'에 해당하는 '고슈'(* )는 '끌어 당기다', '가까이 가다'란 의미이다(삼상 14:38; 룻 2:14). 이는 곧 여호와의 말씀을 듣기 위해 가까이 나아오라는 뜻으로, 이하 선포되는 말씀의 중요성을 암시할 뿐 아니라, 그 말씀에 주의를 기울이게 한다. 물론 여기서 여호수아가 직접 말씀을 선포한 대상은 이스라엘 백성의 대표자들일 것이다(Keil).

=====3:10
사시는 하나님 - 이 말은 생명의 근원으로서 영원토록 살아계시사 우주 만물의 운행과 인간의 모든 역사에 친히 섭리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을 일컫는 말이다. 실로 여호와는 이방의 온갖 목석의 죽은 신(神, 시 96:5;115:3-7)과는 현격히 대조되는 살아계신 하나님 이시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살아계심을 특별한 사역을 통해서 당신의 백성들에게 친히 나타내시는데, 여기서는 이스라엘 백성 앞에서 가나안 일곱 족속을 진멸시키심으로써 당신의 살아계심을 보여주실 것이었다(Keil).
계시사(* , 카라브) - '가까이 오다', '접근하다'란 의미로서, 9절의 '고슈'와 동의어이다. 그런데 그곳에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로 가까이 나아올 것이 요구되었지만, 여기서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까이 접근하심이 묘사되어 있다.
가나안 족속...여부스 족속 - 소위 가나안의 후기 일곱 족속이다. 이들 족속에 대해서는 신 7:1 주석과 여호수아 서론, '가나안의 여러 족속들' 및 9:1-2 강해, '가나안의 일곱 족속' 부분을 참조하라.
정녕히 쫓아내실 줄을...알리라 - 가나안 일곱 족속의 진멸의 필연성이 강조되어 있다. 여기서 '쫓아내다'의 히브리어 '야라쉬'(* )는 '어느 특정한 지역에 거주하고 있는 주민들을 쫓아내고, 그 지역을 점유하는것'을 뜻하는 이중적 의미의 낱말로서, 구약 성경, 특히 신명기에서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복과 관련하여 많이 사용되었다(Hartley).

=====3:11
보라(* , 힌네) - 단순히 '바라보라'는 개념이 아니라, 큰 주의를 요(要)할 때 쓰는 감탄사이다.
온 땅의 주 - 당시대의 사람들은 모든 신을 민족신 내지는 지역신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따라서 사람들은 어느 한 지역(민족)에서 다른 지역(민족)으로 들어갈 경우에 그 지역(민족)의 신을 따라 섬기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여호수아는 여기서 분명 지역과 민족을 초월하는 하나님의 무변성(無邊性) 및 무소부재성(無所不在性)을 강조함으로써 하나님을 어느 폐쇄적 공간이나 특정한 대상에게만 국한시키려는 시도들을 미연에 방지하고 있다(왕상 8:27;사 66:1;행 7:48, 49). 한편, 특히 이 표현이 요단 강 도하와 관련하여 사용된 것은 세상의 전 영역 즉, 바다와 강들도 하나님의 통치아래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나타내기 위함이었다(Calvin, Keil).

=====3:12
십 이 명을 택하라 - 이스라엘 열 두 지파에서 한 사람씩 도합 열 두 명이 선발된 것은 이스라엘 민족의 통일성(統一性)과 완전성(完全性)을 뜻한다. 이들은 전 이스라엘 백성을 대표하여 여호수아, 혹은 제사장들 곁에서 요단 도하 사건과 관련하여 그때 그때 주어지는 임무를 수행한 것으로 보인다(4:3).

=====3:13
위에서부터 흘러 내리던 물 - 요단강은 헬몬 산 부근의 4개의 수원(水原)에서 시작되므로 '위'는 곧 '헬몬 산에서부터 발원하는 곳'을 나타낸다고 볼 수 있다. 1:2 주석 참조. 실로 반석에서 물을 내실 수 있는 하나님은(출 17:6). 또한 물의 근원을 막으실 수 있는 분이기도 하다.
끊어지고 쌓여 서리라 - 출 15:8에 나타나 있는 홍해의 기적을 연상시키는 표현이다. 여기서 '끊어지다'의 히브리어 '카라트'(* )는 '자르다', '분리하다'의 뜻으로서, 흘러내리던 요단 물이 분리되어 그 아래의 물과 합쳐지지 않았음을 가리킨다. 그리고 '쌓이다'의 히브리어 '나다드'(* )는 멈춘 물이 점차 산처럼 쌓여갔음을 보여주고, '서다'의 히브리어 '아마드'(* )는 마치 사람이 자기의 몸을 일으켜 세우듯 물이 자기 자리에서 일어서 계속 불어났음을 나타낸다.

=====3:14
본절로부터 17절까지는 요단 강이 갈라지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곳으로 통과한 이적적인 사건이 간단 명료하게 기록되어 있다. 이와같이 수사학적인 미사여구(美辭麗句)로 장식하지 않고 발생한 사건만을 간략히 기록한 것은 이 사건의 실제성을 더욱 분명히 전달하기 위함이었다. 한편 본 사건이 일어난 때는 니산월(오늘날 태양력으로는 3, 4월경) 10일이었는데, 출애굽할 때에도 역시 니산(Nisan)월이었다. 이 무렵의 팔레스틴은 많은 강수량으로 인해 호수나 강들이 최고 수위(水位)를 기록한다. 이러한 때에 처자식과 가축을 거느린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 강을 건넜다는 사실은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 외에 다른 것으로써는 도저히 설명 되어질 수 없다. 진정 출애굽 당시나 광야 생활때와 마찬가지로 가나안 진입 때에도 하나님의 초자연적 역사(役事)가 나타났던 것이다(출 14:21;16:13). 그리고 이는 향후 가나안 땅에 서도 하나님의 보호와 도우심이 계속될 것이라는 전조(前兆)라 할 수 있다.
언약궤 - 3절 주석 참조.

=====3:15
모맥 거두는 시기 - '모맥'(牟麥)은 '밀과 보리'를 뜻한다. 그런데 이 '모맥'이란 말은 히브리 맛소라 사본(MT)에는 나타나지 아니하고, 헬라어 70인역(LXX)에 나타난 말이다. 한편 아열대(亞熱帶) 기후에 속하는 여리고 지역은 태양력 4,5월 경이 그 수확기이다.
언덕에 넘치더라 - 여기서 '언덕'(* , 가다)은 퇴적 작용으로 생긴 강의 양쪽 자연 제방을 가리킨다. 또한 '넘친다'(* , 말라 알)는 것은 단순히 물이 제방에 가득 차는 것을 뜻하지 않고 가득 차 범람하는 것을 뜻한다(Keil & Delitzsch Commentary, Pulpit Commentary). 실제로 모맥 거두는 시기 쯤에는 북쪽 헬몬 산의 눈이 녹을 뿐 아니라 또한 봄비가 내리기 때문에 갈릴리 호수는 최고 수위에 오르게 되고 요단 강물은 크게 불어 그 깊이는 3-4m, 그 넓이는 30m 이상이 된다고 한다(J.P. Free, Archaeology and Bible History). 이처럼 전체 요단 강물이 만수가 되어 염해(사해)로 흘러가는 이 때에는 요단 강의 가장 좁은 나루터라 할지라도 일반적인 방법으로 도강(渡江)하는 것은 불가능하였다(Rovinson). 더구나 처자식을 거느린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엄두조차 못낼 일이었다(Keil). 그러나 이러한 완전 불가능한 상황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 강을 건널 수 있었던 것은 그 도강(渡江)이 오직 하나님의 기적임을 더욱 돋보이게 한다(Calvin).
발이 물가에 잠기자 - 강둑을 넘칠 정도의 거센 물결은 사람들에게 공포심을 주기에 충분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궤를 메고 물 속으로 담대히 들어간 제사장들의 용기는 아주 크다고 하겠다(Calvin). 그들의 이러한 용기는 오로지 가나안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여호와 신앙에서 나온 것이라 볼수 있다.

=====3:16
흘러 내리던 물이 그쳐서 -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의 발이 요단 강물에 잠기자 곧 요단 강물은 그 흐름을 멈추었다. 이것은 분명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기적의 섭리임에 틀리없다. 한편 우리는 성경을 고찰할 때, 하나님께서 당신의 기적을 이루시는데 두 가지 방법으로 역사하고 계심을 알 수 있다. 그 하나는 자연을 이용한 초자연적인 기적 사건이고, 다른 하나는 순수한 초자연적인 기적 사건이다. 전자의 예로 우리는 애굽에 내린 10대 재앙 중 개구리, 이, 파리, 악질, 독종, 우박, 메뚜기, 흑암 재앙(출 12:29, 30), 그리고 태양과 달이 멈춘 사건(수 10:12-15)및 일영표 위의 해 그림자가 10도를 물러난 사건(왕하 20:8-11)등을 들 수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여기 나타난 요단 강물의 멈춤 사건에 대하여 자연을 이용한 기적으로 보는 학자들이 있다. 즉 아담 지방 근처에는 오늘날 까지도 큰 절벽이 있는데, 가끔 지진 등으로 인해 바위가 무너져 내려 요단 강물을 일시 정지하게 한다고 한다. 실제 그러한 일이 A.D. 1267년 12월에 일어나 16시간, A.D. 1927년 7월에 일어나 21시간 30분 가량 요단 강물을 막았다는 기록이 있다(J.P. Free, en-Nuwairi). 따라서 하나님께서 이러한 방법을 통해 당시의 요단 강물도 막았다는 주장을 편다. 이것 역시 가능한 주장이지만 (그렇다고 하나님의 이적이 부인되는 것은 아니다), 본문의 내용상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의 발이 강물에 닿자마자 방금 까지도 넘실대며 흐르던 물이 곧 멈추며 뒤로 물러나 쌓였다는 기록으로 볼 때, 그리고 이스라엘 모든 백성들 및 가축 떼까지 건너기 위해서는 상당량의 시간이 걸렸을 것이라는 추측에 근거해 볼 때, 요단 강물의 멈춤 사건은 순수한 하나님의 초자연적 이적 사건으로 봄이 좋다(Leon Wood, A Survey of Israel's Histrory).
심히 멀리 사르단에 가까운 아담 읍 변방 - 흐르던 물이 그치고 쌓이는 바람에 일종의 역류(逆流) 현상이 일어났음을 보여준다. '사르단'(Zarethan)은 여리고 북방 약 20km 지점의 요단 강 기슭에 있는 성읍인데, 후일 솔로몬이 성전을 만들 때 이곳에서 놋을 부어 기구를 만들었다(왕상 4:12;7:46).

=====3:17
여호와의 언약궤 - 3절 주석 참조.
요단 가운데 - 이말은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이 단지 '강 가'(by the river)에 서있었다는 말이 아니라, '강 바닥'(the bed of the river)에 서있었다는 뜻이다(Keil).
마른 땅에 굳게 섰고 - 여기서 '마른 땅'은 '물기 없는 땅'(dry ground;창 7:22;출 14:21)을 뜻한다. 그리고 '굳게'라는 말은 '서다'(* , 아마드)와 대등한 의미를 지닌 동사 '쿤'(* )에서 파생했는데, 이는 '확정짓다', '고정시키다'라는 의미를 가진다. 그러므로 이 말은 이스라엘 백성이 요단 강을 다 건널 때까지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은 자기가 선 자리를 확고 부동하게 지켰다는 말이다.
요단을 건너니라 - 원문에는 '완전히'(* , 탐무)라는 단어의 수식을 받고 있다. 멈추었던 물이 다시 흐르게 되면 죽음을 면치 못할 상황에서 오직 믿음으로 요단 강을 온전히 건너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을 엿볼 수 있다. 한편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의 수효를 도합 200만으로 추산할 때(민 26:51), 그들이 그 행군의 폭을 1-2km 정도로 했다면 요단 강을 건너는데 소요되는 시간은 대략 반나절(half a day) 정도 걸렸으리라 추정된다(Keil & Delitzsch, Commentary on the Old Testament, Vol. II. p. 47).

 

 

 

   정탐꾼을 파송, 여리고 성을 정탐한 이스라엘(2장)이 이제 여리고로 진군하기 위하여 요단 강을 도하(渡河)하는 장면이다.  이러한 본장은 내용상 크게 3부분으로  나눌 수 있는데 곧 요단 강 도하 준비(1-6절), 요단 강 도하에 대한 지시(7-13절),  그리고 요단 강 도하(14-17절)이다.  한편 이와 관련 다시 한번 3장을 전후한 전체의  흐름을 살펴보면, 1장, 2장은 가나안 정복을 위한 준비에 관한 기록이다.  그리고 3-5장은 요단강을 건너가 가나안 땅에 진입(進入)하게 된 사건의 기록이고 6장 이후로는  가나안 정복에 관한 구체적 내용의 기록이다.  그런데 3-5장 가운데, 3, 4장은  모두  요단강 도하 사건에 관해 기록한 장들로서 서로 매우 밀접한 관련성을 갖고 기슬되고 있다.   한편 요단강 도하 사건은 14-17절에 언급되는데 이것은 4:10, 11, 15-18에  중복하여 언급됨으로써 보다 구체적으로 설명된다.  또한 우드스트라(Woudstra)가 지적하였듯이 3, 4장에 (강을) '건너다'라는 용어가 22번 이상 나오고 (강이) ;서다'라는 용어는  5번 이상 나오고 있는데, 이러한 사실들은 이 두 장이 신학적으로 공통된 특성을  갖고 있음을 보여 준다.  즉 요단 강 도하 사건에 대해 이렇게 반복까지 하면서 두 장에 걸쳐 길게 설명하고 있는 것은 이 사건이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두 장은 이같이 하나의 사건을 다루면서도 강조점의  차이가  각각  있다.  즉 3장은 요단 강을 건널 때의 언약궤에, 4장은 요단 강을 건넌 의  기념비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당시는 우기(雨期)로 요단 강의 양편 둑이 넘칠 정도였기 때문에(3:15)이 범람하는 강을 건넌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하나님께서는 요단 강을 건널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하셨는데, 그것은 제사장들로 하여금 언약궤를 메고 요단 강을 밟으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수행하는 것이었다.  제사장들이 이 명령대로 실행한 결과, 요단 강의 흐름은 멈추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강물을 무사히 통과하게 되었다.
 여기서 언약궤는 하나님의 임재를 뜻하는 것으로, 요단 강 도하시에 언약궤가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 것은 이 도하가 전적으로 하나님에 의해 되어진 것임을 강조해  준다.  이미 하나님께서는 1:6에서 가나안 정복이 당신의 능력에 의해서 되어질 것임을  분명히 하셨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가나안 정복의 시작에 해당하는 요단 강 도하의  일부터 전적으로 당신의 능력에 의해 수행하려 하셨고 때문에 당신의 능력이 임재를  상징하는 언약궤를 제사장들이 멜 것을 명령하셨던 것이다.

         1. 요단 강 도하 준비(3:1-6)
   이스라엘 요단 강 도하를 준비함에 있어서 여호수아가 인간적으로 전혀 서두름  없이 먼저 백성들이 갖추어야 할 준비 사항을 하나하나 지시하고 이를 실행에  옮기도록 독려하고 있는 부분이다.
 즉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백성들과 더불어 요단에서 3일 동안  유숙한다(1절).   유사(有司)등을 통해 백성들에게 제사장들이 언약궤를 메는 것을 보면,  언약궤와  일정한 거리를 두고 출발할 것을 명한다(2-4절).  이어서 그는 백성들에게는  성결케할  것을 명하고(5절), 제사장들에게는 언약궤를 메고 백성들 앞에 서서 진행할 것을  명령하는바 이에 백성들과 제사장들은 이를 실행에 옮긴다(6절).
 한편 이상의 본문에서 우리는 행여 다음과 같은 의문을 품을 수도 있다.  즉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40년간 유리 방황하는 것과 같은 우여 곡절을 겪은  끝에  이제 요단 강 나루에 이르렀으면서도 왜 곧바로 도하하지 않고 그곳에서 구태여  3일간이나 머물렀을까 ?  요단 강을 건너는 데 굳이 백성들의 정결 의식이 요구된 특별한 이유는 무엇인가 ?  이에 대하여서는 바로 뒤이어 나오는 주제 강해에서 그 이유와 의미를 잘 밝혀 놓았으니 참조하라.

   요단 강 도하 준비의 내용 및 의미 - 위에 설명된 일련의 일들은 요단  강  도하를 위한 준비적 일들로서 이는 특히 두 가지 - (1) 요단 강을 건너기 전 3일 동안 강가에 머물렀다는 사실(1절), (2) 백성들이 성결 명령을 받았다는 사실(5절) - 강조점을  지니고 있다.
 먼저 첫째 사실에 대해서부터 알아보도록 하자.  이스라엘 백성들은 요단 강가에  이르렀지만 바로 강을 건너지 않고 3일 동안 강가에 유숙하여야 했다.  즉 그토록  학수 고대하던 약속의 땅이 요단 강 바로 건너편에 보인다고 해서 무모하고 경솔하게  강을 건너려고 해서는 안되었고 그들은 주도 면밀(周到綿密)한 계획을 세우는 준비  기간을 가져야 했다.  서양에 '서두르면 일을 망치고 만다'는 속담이 있고,  동양에도  '욕속 부달'(慾速不達)이란 속담이 있듯이, 그들에게 있어서 서두르는 것은  절대  금물이었다.  왜냐하면 출애굽을 한 이후 여기에 이르기까지 40년이란 장구한 기간(신  1:3)이 걸렸는데, 성급하게 행동하다가 가나인 진입에 실패한다면 지금까지의 수고가  너무도 헛되고 아까운 것이 되고 말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도 누가복음 14:28에서 "너희 중에 누가 망대를 세우고자 할진대 자기의 가진 것이 준공하기까지에 족할는지 먼저  앉아 그 비용을 예산하지는 아니하겠느냐"고 하심으로 어떤 일을 시작하기 전에는  사전 준비가 철저해야 함을 강조하시기도 했다.
 이제 두번째 사실, 즉 성결의 준비에 대하여 살펴보도록 하자.   우리는  하나님께서 요단 강 도하를 위하여 다른 어떤 것보다도 이 성결을 요구하셨다는 사실을 주시할 필요가 있다.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성결을 요구하신 것은 언약궤와 관련이 있다.   본장의 개요에서 보았듯이 언약궤는 하나님의 임재를 위해서는 백성들의 성결이  선행되어야 했던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거룩하신 분이므로 하나님의 거룩한 임재가 있는 곳에는 백성들 역시 불결한 것을 제거하고 깨끗해야만 했다.  백성들의 성결이 없는  곳에는 하나님의 임재가 있을 수 없고, 하나님의 임재가 없으면 요단 강 도하의  기적은 일어날 수가 없는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이 영육간에 깨끗할 때  하나님께서는  함께 하시지만, 불결할 때에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지 않는다는 것은 성경 전체에 흐르는 큰 진리이다(출 19:22 ; 삼상 16:5).  따라서 요단 강 도하라는 큰 사건을 앞두고 그  어느 때보다 성결이 요구된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는 사람은 다른 어떤 것보다도 우리 자신을 깨끗하게 하는 일을 가장 우선적으로 해야 한다는 교훈을 배울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은혜를 베풀어 주시기를 원하시지만 우리가 깨끗하지 못하면 그 은혜는 임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가까이 오셔서 은혜를 베푸실 수  있도록  하는  최고의  첩경이  바로  이  성결인  것이다<레 11:20-28, 정결법과 그 상징적 의미>.

         3. 요단 강 도하(3:14-17)
   하나님께서 앞에서 약속하신 대로(13절) 실제로 요단 강이 갈라지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강을 통과한 사실에 대해 간결하게 보도하고 있는 부분이다.  이러한 요단 강 도하 사건은 4장에서 보다 구체적으로 설명되고 있는데, 3, 4장의 내용을 종합하여 요단 강 도하 과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제사장들이 언약궤를 메고 요단 강을 향해 나아감(3:3, 6, 14).   (2)  백성들이 약 2천 규빗의 거리를 두고 그들의 뒤를 따름(3:4).  (3) 제사장들의 발이 요단  강에 잠길 때 요단 강이 멈춤(3:8. 15 ; 4:7).  (4) 제사장들이 마른 땅에 굳게  섬(3:17).  (5) 르우벤, 갓, 므낫세 반 지파가 맨 처음 강을 건넘(4:12, 13).  (6) 제사장들이 요단 강에서 나옴(4:18).  (7) 요단 강이 다시 흐르게 됨(4:18).
 한편 이상과 같은 이스라엘의 요단 도하 사건이 일어난 때는 유대  종교적으로  니산 월(양력 3, 4월경) 10일이가(4:19).  이때 팔레스틴은 소위 '늦은 비'(호 6:3) 또는 '봄비'(슥 10:1)로 불리우는 많은 비가 내리므로 대개 강이나 하천 등은 최고  수위(水位)를 기록한다.  그러므로 그러한 때 남녀 노소를 합하여 약 200만 명에나 달하는 이스라엘이 요단 강을 건넜다는 것은 배후에서 강한 능력으로, 강권력으로 역사하신  하나님의 전능성 외에는 달리 무엇으로 설명할 수 없다.  결국 이는 이후 전개될 가나안 정복 전쟁에 있어서도 하나님께서 크신 능력으로 이스라엘을 돌보아 주실 것을 나타내는 표징이라 하겠다.  즉"네가 어다로 가든지 네 하나님 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리라"(1:9)고 하신 하나님의 약속을 단적으로 보증해 주는 놀라운 능력의 사건이 바로 이 요단 강 도하 사건이었던 것이다.

   언약궤와 그리스도 - 본문에 나오는 언약궤는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것으로 이는 오늘날 그리스도를 예표해 주고 있다<출 25:10-22 강해, 2. 법궤의 양식>.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서넘쳐 흐르던 요단 강은 죄와 사망과 고통과 각종 문제의  거친 물결로 출렁이는 이 세상을 상징하며, 가나안 땅은 천국을 상징한다.  그런데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이 백성들 앞에 나아갔고, 이들의 발이 요단 강에 닿자마자 거세게  흐르던 요단 강물은 그 흐름을 멈추었으며,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언약궤의 인도를 받으며 무사히 요단 강을 건널 수 있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께서는 오늘날 우리 앞서 죄와 죽음의 강물을 멈추게  하셨다.  언약궤가 요단 강에 들어갔을 때 요단 강물이 더 이상 흐르지 애다고 멈추어  섰듯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심으로 성도들 앞에서 죄와 사망은 사라지게  되었다.  즉 요단 강물이 언약궤를 수몰(水沒)시킬 수 없었듯이 죄와 사망도 그리스도를 이기지 못한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언약궤를 바라보며 요단 강을  건너갔다.  언약궤가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요단 강을 건너게 하는 인도자  역할을  하였듯이
그리스도 역시 이 거친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는 우리의 인도자가 되신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언약궤에 의해서 인도함을 받아 요단 강을 건너 무사히  가나안 땅에 들어 갔듯이, 우리는 오늘날 그리스도에 의해서 인도함을 받아 이 세상을  살다가 마침내 천국에 이르게 된다.  결국 당시 요단 강을 건너는 데는 언약궤가 절대적으로 필요하였듯이 오늘날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는 예수 그리스도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한편 범럼할 정도로 출렁이던 요단 강과 같은 어려움은 천국 가나안으 마향해 살아가는 우리 인생의 여정에서 작게 또는 크게 항상 놓이게 마련이다.  우리는  오늘  현재 불행을 당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또 현재는 평안하다고 하더라도 언제  우리의  삶이 불행이라는 거센 물결에 휩쓸릴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이 모든 것에 있어  걱정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우리 앞에는 이 모든 현재와 미래의  어려움으로부터  구원해 주실 언약궤 되신 그리스도께서 계시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앞에  있는 "큰 산과 작은 산을 황무케 하며, 그 초목을 마르게 하여 강들로 섬이 되게 하며 못들을 마르게 할 거싱며, 내가 소경을  그들의 알지 못하는 길로 이끌며 그들이 알지  못하는 첩경으로 인도"(사 42:15, 16)하실 것이다.  그리스도의 인도함을 받는 자는  물이나 불 가운데로 지날 때에라도 이들이 그를 범치 못하게 될 것이다.(사  43:1,  2).  따라서 우리 곁에는 넘실대는 요단 강과 같은 큰 어려움이 있어도 결코 그것이 우리를 해치지 못한다.  우리를 말씀으로 인도하시는 언약궤되신 그리스도께서  계신  곳에는 늘 고요함과 평안함만이 있을 뿐이다(요 14:27).

   언약궤에 대하여 -
1. 명칭
 (1) 어원 - '상자' 또는 '궤'(box)를 뜻하는'아론'(*         )이 언약궤의 명칭으로 195회 사용되었다.
 (2) 용례 - 법궤(레 16:2), 여호와의 궤(삼상 4:6), 하나님의 궤(삼하 6:4), 언약궤(수 3:6), 증거궤(출 25:22)등으로 불리워졌다.
 (3) 형태 - 길이 112.5cm, 폭 67.5cm, 높이 67.5cm이며, 안팎에는 정금으로 장식되어 있는 아카시아로 만든 궤이다(출 25:10-22).
 (4) 제작 - 모세의 명령에 따라 브라셀과 오홀리압이 제작했다(출 31:6).
 (5) 내용물 - 십계명 돌판(왕상 8:21) 및 만나와 아론의 싹난 지팡이(히 9:4).
 (6) 상징 - 하나님의 지속적인 언약적 활동에 대한 신성한 상징으로서의 역할을했다.
     까. 하나님의 임재 -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주할 때마다 하나님께서는 언약궤를 통해 가시적인 임재로 그들과 함께 하셨다(출 13:21 ; 14:19, 20).  따라서 언약궤 앞에 있는 것은 곧 하나님앞에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인식되었다(6:8; 민 10:35).
     다. 계시 -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임재하시는 하나님께서는 동시에 그들에게 말씀하시고 계시하시는 분이셨다(출 25:22).
     따. 섭리 - 하나님께서는 이 언약궤를 통해 당신의 백성들을 인도하시고 보호하셨다(민 10:11, 33, 35).
     마. 속죄 - 이 언약궤는 1년에 한번씩 있는 속죄의 제사에서 온 백성의 죄를 속하는 제단 역할을 하였다(레 16:11-17).
 (7) 역사 - 모세는 성막을 세운 후에 언약궤를 만들어 처음으로 성막 안에 두고(출40:21), 고핫 자손들로 하여금 언약궤를 책임지고 관리하도록 했다.  광야 생활동안 이 언약궤를 책임지고 관리하도록 했다.  광야 생활 동안 이 언약궤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진찰 장소를 안내하는 역할을 했으며(민 2:17),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 강을 건널 때는 무사히 건널 수 있도록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17절).  
     한편 요단 강 도하 후 언약궤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진쳤던 길갈에 두어 졌다가(4:19 ; 9:6) 다시 실로로 옮겨져 안치 되었다(18:10.  사사 기대에는 이 언약궤 실로에 두어 보관할 '집'(삿 18:31)이나 '전'(삼상 1:9 ; 3;3)을 지었는데 이곳 실로의 하나님의 집(전)은 해마다 개최되는 순례 절기 행사의 중심지가 되었다(삿 21:19 ; 삼상 1:3).
 그 후 이 언약궤는 이스라엘이 블레셋과 싸움에서 진 후 블레셋인들에게  탈취당했다가(삼상 4:110, 꼭 7개월 만에 벧세메스로 되돌아 오게 되고(삼상 6:1-16) 이어서  기럇 여아림으로 옮겨져 이곳에서 약 20년 동안 머무르게 된다(삼상 7:2).  다윗이 왕위에 오르자 예루살렘을 온 이스라엘의 정치 및 종교적인 수도로 삼고 법궤를 그곳의 성막에 안치시켜 그곳을 예배의 중심지로 삼았다(삼하 6장).  솔로몬 시대에 이르러  이 언약궤는 영구적인 성전의 지성소에 안치되었다가, 약한 왕인 므낫세 때에 잠시  이동을 하긴 했지만(대하 33:7 ; 35:3), 바벧론 왕 느부갓네살이 성전을 불태울 때까지 계속 남아 있었고, 그 이후에는 법궤에 대한 언급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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