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
온 백성이 요단 건너기를 마치매 - 이와 동일한 내용의 표현이 3장 마지막 구절(17절)에는 "온 이스라엘 백성은 마른 땅으로 행하여 요단을 건너니라"로 나타나고 있다.이처럼 3장과 4장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요단 강 도하(渡河) 사건에 관해 기록하고 있는데, 3장에서 요단 강 도하는 사실상 종결되었고, 4장은 요단 강 도하 사건의 요약 및 도하 후의 일들을 다루고 있다. 그리고 본절은 이러한 4장 내용의 서두라고 할 수 있다.
=====4:2
매 지파에 한 사람씩 열 두 사람을 택하고 - 요단 강을 건너기 전 3:12에서는 이스라엘 지파 중 열 두 사람을 택하라는 단순한 언급만 있었다. 그에 비해, 본 구절 이하에서는 왜 열 두 사람을 택했는지에 관한 이유가 명시되어 있다. 즉 그것은 요단 강에서 열 두 돌을 취하여 기념비를 세우도록 하기 위함이었다(3-5절).
=====4:3
제사장들의 발이 굳게 선 그곳에서 -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이 요단 강 가운데 굳게선 결과, 강물은 갈라졌고 강 바닥은 말랐다. 따라서 온 이스라엘 백성들은 무사히 요단 강을 건널 수 있었다(3:17). 그러므로 제사장들이 서 있었던 그곳에서 열 두 돌을 취해 기념비를 세운다는 것은 요단 강 도하를 기념하는 가장 적절한 조치였다.
돌 열 둘을 취하고 - 각 지파의 한 사람이 돌 한 개씩을 취하므로 돌 열 둘이 되었다. 이와같이 각 지파가 한 개씩 취한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일치성을 보여주는 것으로, 이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하나의 연합된 민족임을 깨달을 수 있었고, 또한 후일에 어떤 분열 등을 방지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었을 것이다.
유숙할 그곳 - 이 구절에는 명시되어 있지 않지만, 19절을 통해 볼때 이곳은 '길갈'(Gilgal)임을 알 수 있다.
=====4:4
예비한(* , 쿤) - '준비하다', '확정하다'라는 뜻이다. 이와같이 이미 준비된 12명을 데리고 오라는 것을 볼 때, 이 12명에 대한 선택 작업은 요단 강 도하 전에 이미 있었음을 알 수 있다(3:12).
=====4:5
하나님 여호와의 궤 - '언약궤'를 지칭하는 말이다(3:3). 이에 대한 상세한 내용은 3:14-17 강해, '언약궤에 대하여' 부분을 참조하라.
=====4:6
표징이 되리라 - 여기서 '표징'(表徵, sign)에 해당하는 '오트'(* )는 '표시하다', '나타내다'란 뜻의 '우트'에서 파생된 말로 곧 '기념', '증거'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본절에는 하나님께서 열 두 돌을 취하도록 명령하신 목적이 명시되어 있다. 즉 열 두 돌은 요단 강 도하가 오직 하나님의 권능에 의한 기적적 사건임을 후대에 증거로 보여주는 증표인 것이다. 평상시에는 그 어느 누구도 흐르는 요단 강 한 가운데서 어깨에 짊어질 정도의 큰 돌들을 취할 수 없었는데, 가나안 입성시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 요단 강의 흐름이 멈추게 됨으로써 이것이 가능하였다는 사실을 오고 오는 세대에 전하여 주는 기념물인 것이다.
후일에 너희 자손이 물어 가로되 - 출 12:26, 27; 신 6:20-25에도 '출애굽 사건'과 관련하여 이와 유사한 말이 언급되어 있다. 출애굽 사건과 마찬가지로, 실로 요단 강 도하 사건도 이스라엘에게 있어 기념비적인 대사건으로 후손들에게 두고 두고 기억시켜야 할 역사적 사건이었던 것이다. 한편 여기서 '후일에'라는 말의 히브리어 '마하르'(* )는 '장래에'라는 뜻으로 표징의 목적이 미래를 위한 것임을 보여 준다.
=====4:7
요단 물이...끊어졌었나니 - 3:16 주석 참조.
이 돌들이...영영한 기념이 되리라 - 어떤 사건들을 기념하는데 있어서 돌은 중요한 역할을 했다(7:26;8:29;창 28:18;35:14;삼상 7:12;삼하 18:17). 경우에 따라 큰 돌기둥은 증거물로(24:26, 27;삼상 7:12), 혹은 죽은 사람을 위한 기념비로(왕하 23:17;겔 39:15) 세워졌다. 그리고 어떤 특정한 돌 혹은 기둥들은 하나님께 기념물로 드려지기도 했고(창 28:18-22;사 19:19), 그 장소에는 종교적 명칭이 붙여지기도 했다(창 35:7). 이런 견지에서 여호수아가 길갈에 세운 본문의 돌은 기념비적인 성격을 띤 한 예로 볼 수 있다. 한편 '기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직카론'(* )은 어떤 사실을 마음에 떠오르게 하거나 나타내는 대상이나 행위를 뜻한다. 즉 유월절은 '출애굽'이란 위대한 역사적 사건을 생각나게 하는 하나의 '기념일'이었고(출 12:14), 길갈에 세워진 '열 두 돌'은 요단 강 도하 사건을 나타내는 '기념물'이었던 것이다(20-24절).
=====4:8
명한대로...이르신대로 - 여기서 '...대로'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케'(* 는 '...처럼'(as like), '...에 따라'(according to)라는 뜻을 가진 전사이다. 그러므로 본절은 이스라엘 백성이 여호수아를 통해 전달된 하나님의 명령과 말씀에 철저히 순종했음을 보여준다(출 39:42, 43;40:16, 19, 21, 23, 25, 29, 32).
=====4:9
또...선 곳에 돌 열 둘을 세웠더니 - 지금까지 말로써 명령만 하던 여호수아가 여기서는 직접 행동으로 있음을 볼 수 있다(Buther). 즉 길갈에 기념비를 세우기 위해(20절) 돌 12개를 취하게 한 다음(8절), 여호수아는 먼저물이 흐르는 요단 강 바닥에 또다른 기념비를 세웠다. 따라서 기념비는 이스라엘 백성이 유숙한 길갈에 12개, 제사장들의 발이 섰던 곳에 12개로서 도합 24개가 세워졌던 것이다(Clarke). 이것은 이중 표징 행위로서 사건의 확실성과 중대성을 시사한다(Matthew Henry). 한편, 그런데 어떤 이는 제사장들이 섰던 곳에 세운 열두 돌은 다시 흘러 넘칠 (18절) 요단 강물에 곧 잠겨 버릴 것이기 때문에 이 기념비를 세운 의의를 분명히 알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요단강 가운데 세워진 열두 돌은 비록 보이지는 않을지라도 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 가운데 세워진 것과 같은 효과를 거두어 요단강을 볼때마다 그 사실을 기억하게 할 것이다.그리고 간혹 강물의 수심이 낮아질 때면 그 기념비의 꼭대기가 보이게 됨으로서 그러한 효과를 배가 시킬 수도 있을 것이다.(Calvin's Commentaries, Matthew Henry's Commentary). 한편, 혹자들은 요단 물이 멈춘 시기는 제사장들의 발이 요단 동편 물가에 잠겼을 때이므로(3:15)열 두 기념석은 그 가장 자리에 세워졌다고도 한다(Keil & Delitzsch Commentary, Pulpit Commentary). 만약 그렇다면 이스라엘은 물이 강둑까지 넘쳐 흐르는 모맥 거두은 시기(3:15)를 제외하고는 항상 그 돌들을 바라볼 수 있었을 것이다.
오늘까지 - 즉 이 기사가 기록될 때까지를 가리킨다(Keil). 한편 이 문구는 여호수아서에서 자주 언급되고 있는데(6:25;7:26;8:28;9:27;10:27; 13:13;14:14;15:63;16:10), 이는 여호수아서가 역사적 사실에 잘 부합된다는 사실을 시사할 뿐만 아니라, 당시 사람들에게는 생생한 기록이었음을 보여준다.
=====4:10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이르게 하신 일 - 여기서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선지자적 모습을 띤다. 그는 또 이스라엘을 인도하는 지도자(왕과 같은 사람)였으며, 때로는 백성들의 애통함을 대신 아뢰는 제사장적 면모를 보이기도 했다(7:6-9). 여호수아가 모세와 마찬가지로 참 선지자요, 왕이시며, 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적 인물이 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모세가 여호수아게게 명한 일 - 본절은 여호수아를 모세와 연결시켜 주는 여러 구절들(1:5, 17; 3:7; 11:23) 가운데 하나이다(Woudstra). 생전에 모세는 여호수아를 불러서 하나님의 약속대로 이스라엘을 약속의 땅 가나안에 인도하도록 그에게 지시하였고(신 1:38; 3:28; 31:3), 또한 여호와께서 자신에게 역사하셨던 것처럼 여호수아에게도 함께 하시리란 것을 약속했었다(신 31:7).
다 마치기까지 요단 가운데 섰고 - '마치다'의 히브리어 '탐맘'(* )은 '완성하다', '일을 멈추다'란 뜻으로, 곧 이스라엘 백성이 모두 다 가나안 땅을 밝게 되어 요단 도하에 대한 하나님의 명령이 밝게 되어 요단 도하에 대한 하나님의 명령이 다 수행되었다는 말이다.
백성은 속히 건넜으며 - 이스라엘 백성들이 계속 강을 건너가고 있는 동안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은 한 곳에 굳게 서서 있었기 때문에, 백성들은 그들의 힘이 빠지지 않도록 서둘러 강을 건너야 할 필요가 있었다(Keil & Delitzsch, op. cit. p. 50).
=====4:11
백성의 목전에서 - 곧 3:6, 14의 '백성의 앞에서'와 같은 말이다(Keil). 아마도 백성들이 강을 다 건너자,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도 강을 건너가 다시금 백성들 앞에 선 것을 뜻 한다고 볼 수 있다. 한편 그러한 구체적인 상황은 15-18절에 자세히 묘사되고 있다.
=====4:12,13
르우벤, 갓, 므낫세 반(半) 지파는 일찍이 요단 동편 땅을 분배받을 때 모세와 맺은 약속(민 32:16-32)대로 요단 서편의 가나안 본토 정복 전쟁에 참전키 위해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요단 강을 건넜다. 자세한 내용은 관련 부분인 1:12-15 주석을 참조하라.
여리고 평지 - 요단 강 서쪽에 있는 초원 지대를 가리킨다(Keil, Bartlett). 비스듬한 경사를 이루고 있는 이곳은 여리고 성의 근교 저지대로서 그폭은 도보로 약 3, 4시간 걸릴 정도인데(Robinson), 요단을 건넌 이스라엘의 선봉대가 진친곳이다.
=====4:14
여호수아를 크게 하시매 - 3:7의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된 것이다. 여호수아는 요단 강 도하 사건을 통하여 모세의 후계자로서 지도자적 위치를 공고히 확보할 수 있었다. 한편 여기서 '크게 하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가달'(* )은 '명예와 인격을 높이다', '자랑스럽게 하다'등의 뜻을 지니는 말이다(3:7; 대상 29:12). 실로 하나님께서는 요단 강 도하의 이적을 통하여 여호수아의 지도자적 권위를 더욱 공고히 하심으로, 이스라엘 백성은 사는 날 동안 여호수아를 두려워하게 되었다. 하지만 여호수아에게 위임된 권위는 세상의 많은 지도자들의 경우에서처럼 개인적인 영달과 이기적인 목적으로 사용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주어진 것이었다.
그의 생조난 날 동안에 - 직역하면 '그가 살아있는 모든 날 동안에'이다.
모세를 두려워하던 것 같이 - 1:5, 17;3:7에서와 마찬가지로 여호수아와 모세가 연결되고 있다. 이것은 모세의 공식적이고 합법적인 후계자로서 여호수아를 부각시키려는 시도 때문이다. 한편 '두려워하다'의 히브리어 '야레'(* )는 대체로 (1)공포심에 의한 두려움과 (2)경외심에 의한 두려움을 모두 뜻하는데, 여기서는 후자에 해당한다(24절).
=====4:15,16,17
증거궤 - 레 16:13 주석 참조.
요단에서 올라오게 하라 - '오르다'의 히브리어 '알라'(* )는 '위로 올라가다', '높은 곳으로 오르다'를 뜻하는 말로, 곧 요단강 도하의 상황을 설명해 주고 있다. 즉 제사장들은 발을 강 바닥에 디뎌 놓았으므로 이제는 건너편(요단 서편) 강둑에 올라서야 했던 것이다.
=====4:18
여호와의 언약궤 - 3:14-17 강해, '언약궤에 대하여'를 참조하라.
그 발바닥으로 육지를 밟는 동시에 - 바로 앞 17절에 '요단 강에서 올라왔다'는 문장이 있으므로, 여기서의 '육지'(* , 하라바)는 3:17절에 묘사된 요단강 속의 '마른 땅'과는 구별된다. 그리고 '밟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나타크'(* )는 '선두에 나서다', '치켜 올리다', '뽑다'라는 뜻이 있으므로, 여기서는 '발을 들어 올려 여리고 동편의 육지를 밟았을 때에'라고 해석해야 한다. 한편, 이처럼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의 발이 요단 동편의 물을 밟았을 때 물의 흐름이 멈추었고, 요단 서편의 땅을 밟았을 때 물이 도로 흘렀다는 사실은 다음 두 가지 사실을 뚜렷히 시사해 준다. (1)요단 강 도하 사건은 하나님의 초자연적 이적 사건이다(Matthew Henry). (2)요단 강물의 흐름을 멈추게 한 것은 여호와의 언약궤이다(Keil).
요단 물이 본 곳으로 도로 흘러 - 여기서 '도로'는 '돌이키다', '제곳으로 돌아가다'란 뜻의 '슈브'(* )가 사용되었고, '흘러'는 '가다'(to go)라는 뜻의 '얄라크'(* )가 사용되었으므로, 문자적으로 직역하면 '자기들이 있던 장소로 돌이켜 갔다'라는 뜻이 된다. 그러므로 요단 강이 다시 흐르게 된 이 현상은 높은 데서 낮은 데로 흐르는 물의 자연적인 이치에 의해서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서 원래의 모습으로 되돌아갔음을 말해준다(욥 38:8-11;시104:9;잠 8:29). 이와 같이 하나님은 요단 강을 멈추에 하실 때 뿐만 아니라, 그 물을 다시 흐르게 하실 때에도 당신의 능력을 사용하셨다.
여전히 언덕에 넘쳤더라 - '여전히'(* - , 키트물 쉴숌)는 '이전'(以前), '어제'(yesterday)란 뜻의 '물'(* )과 '3'이란 뜻을 가진 '솰로쉬'( * )의 합성어로서, 곧 '3일전' 혹은 '그저께'를 뜻한다. 아마 강을 건너기 전 요단 동편에 유숙할 때 바라보았던 '넘실대는 강물'을 기억하면서 이 기사를 기록한 듯하다.
=====4:19
정월 십 일 - 이스라엘 백성들이 마침내 요단 강을 건너 가나안 땅을 밟은 이 날은 그들이 애굽에서 나온지 40년에서 만 4일이 모자라는 날로서, 곧 유월절 어린 양을 예비하는 날이었다(출 12:3). 그러므로 여기 이처럼 정확한 날짜가 서술된 것은 유월절 규례와 연관시켜 말하기 위함이었다<5:10>. 한편 '정월'(the first month)은 히브리어로 '아빕'(* ) 월인데, '아빕'은 이미 익었으나 여전히 푸른 색깔을 띤 부드러운 보리를 뜻한다(출 13:4). 그리고 이 시기는 '모맥 거두는 시기'(3:15)와 일치하는 시기로 오늘날 태양력의 3월 말이나 4월 초에 해당되는데, 바벨론 포로기 이후에는 '니산'(Nisan)월이라 불리웠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이 날에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나안 땅으로 들여보내신 것은 그들로 하여금 가나안 땅에서 유월절을 예비하고 지키게 함으로써 그들이 하나님께 성별된 민족임을 깨달아 알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이 애굽에서 유월절의 기적을 통해 구원받은 점을 기억하며, 그 구원이 요단을 건넘으로써 마침내 완성되었다는 것을 느끼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길갈 - 이 명칭의 의의(意義)에 대해서는 5:9에 잘 나타나 있다. 즉 '굴리다'(roll)란 뜻을 가진 동사 '갈랄'(* )에서 파생한 이 명칭은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해방되어 목적지인 약속의 땅 가나안에 도착함으로써 과거 애굽에서 겪은 노예의 수치를 모두 굴려 버렸다는 뜻으로 명명된 것이다. 한편 요단 강 언덕으로부터 약 8km 가량 떨어진 이곳 '길갈(Gilgal)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서 진(陣) 친 첫 숙영지이자 가나안 정복 전쟁을 위한 교두보였다. 따라서 이후 전개되는 가나안 정복 전쟁은 물론, 사사 시대및 초기 왕국 시대에 이르기까지 이곳 길갈은 이스라엘의 정치적, 군사적, 종교적 중심지로서 특히 중요한 성읍이 되었던 것이다. 한편 오늘날 그 위치는 '길벳 엘 메프질'(Khirbet el-Mefjir)로 추정되고 있다(Muilenburg).
=====4:20
열 두 돌을 길갈에 세우고 - 열 두 돌을 세운 목적은 이스라엘 전체 12지파로 하여금 여호수아 시대 뿐 아니라 오고 오는 세대를 통하여 요단 강 도하의 이적을 베푸신 하나님의 크신 은혜와 이적을 기억하고 찬양하며 기리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길갈에 기념비를 세운 이유는 길갈이 요단 강 도하 지점으로부터 가장 가까운 거리에 위치한 성읍으로, 도강 후 최초의 이스라엘 숙영지(宿瀯地)였기 때문이다(3절).
=====4:21,22
훗일에...무슨 뜻이냐 - 6절 주석 참조.
너희는 자손에게 알게 하여 이르기를 - 체계적인 교육 제도가 마련되지 않았던 고대 사회에서는 가정 교육이 차지하는 비중이 실로 막대하였다. 특히 히브리 사회에서는 이러한 가정 교육이 매우 중시되었는데(출 12:26, 27;신 6:20-25), 그것은 무엇보다 가정이 여호와 신앙 교육의 산실이자 언약 전승의 핵심 처소가 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4:23
건너게 하신 것이...건너게 하심과 같았나니 - 여기서는 요단 강 도하 이적과 홍해 도하 이적이 비교되고 있는데, 이 두 사건은 공히 전혀 불가능한 상황에서 오직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 물이 갈라졌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뿐만 아니라 그 이적을 베푸신 목적도 공히 같다. 즉 (1)세상 열방에게는 하나님의 크신능력을 선포하여 두려움을 갖게 하고 (2)선민 이스라엘에게는 그러한 능력의 현시를 통해 찬양과 감사를 받기 위함이었다(24절).
홍해 - '홍해'(紅海)의 히브리어 '얌 숲'(* - )은 본래 '갈대의 바다'(the sea of reeds)란 뜻인데, 70인역에서 '홍해'(* , 헤에루드라 쌀랏사)로 번역하였다. 이후 영역 본들(KJV, RSV, NEB, NTV)도 모두 '홍해'(the Red Sea)로 번역하였다. 출 13:18 주석 참조.
=====4:24
홍해 - 도하 기적과 마찬가지로 요단 강 도하 기적도 두 가지 의미를 갖고 있다. 첫째는 땅의 모든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능력을 알게 하는 것이며(출 14:4, 18), 둘째는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영원토록 경외하게 하는 것이다(출 14:31).
땅의 모든 백성 - 여기에서는 이 말이 가나안 땅의 거민들을 가리키느냐, 아니면 온 세상 사람을 가리키느냐 하는 문제가 성립된다. 원문에는 '그(the) 땅'(* , 하아레츠)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전자의 해석이 정확하다(Clarke). 그러나 동시에 이 길갈의 기념비는 동서 고금의 모든 사람들에게 전능하신 하나님을 증명하기에 충분한 것이라는 점에서 후자의 견해 역시 그 의미상 타당하도 볼 수 있다.
여호와의 손 - 성경에서 '손'(* , 야드)은 흔히 '능력'이나 '힘'을 상징한다(신 8:17). 특히 이 은유는 하나님의 능력을 상징하는 데 두드러지게 사용되고 있다. 대상 29:12은 여호와의 손에 힘과 능력이 있다고 말한다(시 89:13). 그 외에도 성경은 여호와의 손은 약하지 않고 강하며(사 59:1), 세상을 강조했고(시 8:6;95:5), 진리와 정의를 행하시며(시 111:7), 여호와는그의 손으로 의인들을 붙들어주고 인도하신다고 한다(시 37:24;139:10). 그러한 능력의 손을 하나님께서 친히 들어 사용하신 가장 두드러진 경우가 출애굽 사건(출 3:3-16; 민 33:3)이며, 또한 홍해 도하 사건과 요단 강 도하 사건인 것이다(Alden).
경외하게 하려 하심이라 - '경외하다'(* , 야레)는 말에 관해서는 14절 주석을 참조하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든 기념 비석과 기념 절기 등을 통해 자손들을 가르치는 궁극적 목적이 결국 하나님을 경외케 하려는데 있음을 보여준다. 왜냐하면 실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모든 지식의 근본이기 때문이다(잠 1:7;9:10).
앞서 3장의 개요에서 보았듯이 이 4장은 3장과 함께 요단 강 도하 사건을 다루고 있는 갓이다. 그러나 3장이 요단 강을 건널 때의 언약규가에 초점을 맞춘 것이라면 4장은 요단 강을 건넌 후의 기념비에 초점을 맞춘 것이라는 차이가 있다. 한편 이러한 본장은 (1) 요단 강가에서 기념비를 세우기 위해 12돌을 취함(1-9절), (2) 요단 강 도하 사건 재언급(10-18절), (3) 길갈에 기념비를 세움(19-24절)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러한 구성에서 볼 수 있듯이 1-9절, 19-24절은 모두 기념비에 관한 기록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기념비에 대한 이러한 강조는 기념비 그 자체가 중요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에 담긴 의미 때문이다. 곧 하나님께서 요단 강의 기적을 일으키셔서 이스라엘 민족을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인도하셨다는 사실이 중요하기 때문에 그것을 기념하는 기념비에 대하여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더군다나 기념비로 사용된 돌은 다름아닌 요단 강이 멈추었을 때 그 한가운데 마른 땅에서 가져 나온 것이므로 이 돌은 요단 강 도하가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 이루어진 기적적 사건임을 충분히 증거하고도 남는다. 한편 우리가 본장을 읽으면서 주의해야 할것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3장에서 이미 요단 강 도하가 끝났다고 했는데 10-18절에는 요단 강을 건너는 과정이 다시 기록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와 같이 모순되어 보이는 사실을 두고 자유주의 학자들은 이 기록이 여러 사람이 편집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히브리어의 기록 방법 가운데는 결론을 먼저 요약하고 그 다음에 사건의 내용을 진술하는 방법이 있기 때문에 이것은 결코 모순이 아니다. 이러한 방법은 2:15에서도 사용된 적이 있다. 즉 그곳에서 성경 기자는 라합이 창에서 줄을 달아 내렸다고 언급하고선 2:16-21에서야 줄을 달아 내리기까지의 상세한 이야기를 부연(敷衍)하는 표현 기법을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1. 요단 강가에서 취한 12개의 돌(4:1-9)
요단 강을 무사히 도하한 데 대하여 이를 기념하는 돌비를 세우는 장면이다. 즉 이스라엘 백성들의 요단 강 도하가 끝나자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를 통해 12지파에서 각 각 한사람씩 뽑고, 그 뽑힌 12사람들에게 돌 한 개씩을 유숙할 곳에 가져오도록 지시하셨다(1-5절). 그러자 백성들이 이 지시에 따라 실행했다는 것이 본문의 주 내용이다(8절). 아울러 본문에는 훗날에 후손들이 이 돌들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물으면 이것은 요단 강 도하를 기념하는 표시라고 대답하라는 하나님의 지시 내용도 기록되어 있다(6, 7절). 또한 이와 별도로 요단 가운데, 즉 제사장들의 발이 선 곳에 돌 12을
세운 것도 함께 기록되어 있다(9절). 우리는 이러한 본문에서 크게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사실을 중시할 수 있다.
첫째로 이스라엘 자손들과 지파 수대로 돌 한개씩 열 두개의 돌을 취해서 기념비를 쌓도록 한 것인데, 이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의 마음을 갖도록 하는 데 그 의의가 있었다. 즉 그들은 12지파로 나뉘어졌음을에도 불구하고 동일한 조상을 갖고 있는 하나의 민족이었으니 이제 가나안 입성을 위한 제 일보(第一步)로서 요단 강을 건넌 지금 그들의 단결과 일치는 무엇보다 중요했다. 왜냐하면 그들이 만일 단결을 하지 못하고 각 지파대로 분열한다든지 극단적으로 말해 어떤 대립이 있을 경우에는 이후 가나안 정복은 무산되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똘똘 뭉쳐도 가나안 정복은 어려운데, 단결하지 못하면 그것은 더욱 어렵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둘째로 중시할 수 있는 것은 기념비를 세운 목적이다. 이 목적은 6, 7절과 22, 23절 특히 24절에 잘 명시되어 있다. 그것은 곧 (1) 땅의 모든 백성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을 알게 하고, (2)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영원토록 하나님을 경외하게 하려는 거싱었다. 요단 강 도하 사건은 엄청난 기적적 사건으로 기념받을 만한 것이다. 이 세상의 대부분의 비석은 극히 제한적인 의미만을 담고 있다. 즉 정치. 종교적으로 특정 공동체에 대해서만 의미가 있는 비석이 있고, 한 도시의 거주자들이나 한 국가의 백성들에 대해서만 의미자 있는 비석도 있다. 그러나 요단 강가에 세워진 그 기념비에는 전세계 인류에게 전하는 깊은 뜻이 담겨져 있다. 겉으로는 초라한 기념비이지만 그러나 이 기념비는 요단 강이 멈추었을 때 그 마른 땅에서 돌을 취해 세운 것으로 요단 강을 멈추게 하신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생생하게 증거할 수 있었다.
또한 이 기념비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서 어떤 기념할 만한 일에 대해 질문을 받을 때, 그 일에 해당하는 물건이나 절기가 있다면 그것을 설명해 주기에 매우 효과적일 것이다. 추상적인 역사적 사실들을 자녀들에게 희미한 인상만 남겨주지만, 기념물이나 절기 같은 것들을 그들의 관심을 강하게 끌게 한다. 또한 이러한 것들이 없을 때 과거에 있었던 역사적 사실마저 잊혀지고 마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잘 알고 계시는 하나님께서는 모든 세대로 하여금 이 일이 기억하도록 기념비를 세우게 하셨다. 즉 하나님께서는 기념비로써 이스라엘이 과거를 잊지 않도록 하셨다. 어제는 오늘을 위해 의미가 있어야 한다. 어제의 중요한 사건이 오늘에 어떤 의미를 주지 못한다면, 그 중요성은 상실되고 만다. 어제의 사건을 오늘에 의미있게 살리는 것은 지혜라기보다는 소위 만물의 영장(靈長)이라고 하는 인간의 의미인 것이다. 한편 본문에서 주의해야 할 것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곧 12돌을 세운 곳이 길갈과 요단 가운데 두 곳이라는 점이다. 4장 전체를 통해 강조한 것은 길갈에 세워진 12돌이지만 9절에는 또 요단 강 가운데, 곧 제사장들의 발이 선 곳에도 12돌은 길갈에 세워진 12돌과는 다른 것으로, 따라서 이 점을 혼동해서는 안 된다. 이에 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해당 구절의 주석을 참조하라.
2.요단 강 도하(4:10-18)
3:14-17에서 언급된 적이 있는 요단 강 도하 사건을 10, 11, 15-18절에서 재차 진술하고 있는 부분이다. 이러한 반복된 진술을 두고 드라이버(Driver) 등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여러 사람이 편집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영(E. J. Young) 등 보수주의 신학자들은 이러한 중복체는 히브리어에서 어떤 사실을 강조할 때 흔히 사용되는 어법이라고 하면서 그들의 주장이 잘못된 것이라고 반박한다. 사실 3장에서 보았듯이 요단 강 도하 사건은 이스라엘의 역사 가운데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며, 23절에서는 홍해 도하 사건과 비교시킬 만큼 중대시되고 있다. 따라서 여기서 진술된 요단 강 도하 사건에 대한 기록은 단순히 3:14-17에서의 내용을 그대로 반복한 것이 아니라 그 내용을 보다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하여야 한다.
요단 강 도하의 기쁨 - 모세 오경의 중심을 이루는 주제 중의 하나는 가나안 땅이다<출 3:16-22 강해, 젖과 꿀이 흐르는 땅>.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창 12:1-7 ; 13:14-17 ; 15:18-21 ; 17:7, 8), 이삭에게(창 26:2, 4), 그리고 야곱에게(창 28:3, 4, 13-15)이 땅을 주겠다고 약속하셨고, 그 이후 특히 가나안이 가까와졌을 때는 수없이 이 약속을 반복하셨다.
그런데 이 일이 드디어 성취되었다. 즉 본문의 10절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속히' 요단 강을 건너 가나안에 진입했음을 기록하고 있다. 물론 이 '속히'라는 말에 대해 리아스(Lias)같은 학자는 그들이 멈추고 있는 강물이 다시 흐르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때문에 그렇게 서두른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전혀 맞기 않을 뿐만아니라 근거 없는 억측에 불과하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렇게 서두른 데는 다른 이유가 있었다. 요단 강 가운데는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이 있는데 무슨 두려운 마음이 있었겠는가 ? 그들이 속히 건넌 것은, 수백년 전부터 약속되었고, 또 40년 동안 광야 생활을 하면서 학수 고대했던 가나안 땅을 얼른 가보고 싶은 마음 때문이었다. 조금만 있으면 이르게 될 땅을 바라보면서 건너는 그들의 마음은 얼마나 설레고 벅찼겠으며, 그 기쁨은 얼마나 컸겠는가 ! 우리는 본문을 읽으면서 이 사실을 연상할 수 있어야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 강을 건널 때의 장면을 보다 실감나게 느낄 수 있을 것이다.
3. 길갈에 세운 기념비(4:19-24)
이스라엘 12지파를 대표하는 사람들이 요단 강 가운데서 취한 12개의 기념 돌(1- 9절)을 정월 십 일, 이스라엘의 요단 강 도하 후 그들의 유숙지인 길갈에 세우는 장면이다(19, 20절). 그리고 이에 덧붙여 이와 같은 기념비를 세운 목적과 그 의의에 대하여 상술하고 있는 부분이다(21 - 24절).
한편 이 가운데 기념비의 의의는 6, 7절에서 이미 언급된 사항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서 다시 한번 언급하는 것은 요단 강 도하 사건을 기념하는 일의 중대성을 더욱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이와 관련 요단 강 도하 사건이 이스라엘에게 가져다 준 의의에 대해서는 3:7 - 13 주제 강해, '요단 강 도하의 의의'를 참조하라.
여호수아서에 나타난 여호수아와 모세 비교 - 여호수아서에서는, 특히 1 - 4장에는 여호수아를 모세와 비교해서 설명한 내용이 많이 나온다. 1:5에서 하나님께서는 모세와 함께하셨던 것처럼 여호수아에게도 함께 하실 것임을 약속하셨고, 1:17에서는 백성들이 "우리는범사에 모세를 청종한 것 같이 당신을 청종하려니와 오직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모세와 함께 계셨던 것같이 당신과 함께 계시기를 원하나이다" 라고 맹세하는 장면이 나온다. 또한 3:7에서 하나님께서는 요단 강 도하의 기적을 통해 당신이 모세를 크게 보이게끔 하셨던 것처럼 여호수아도 백성들의 눈에 크게 보이게끔 하실 것이라고 약속하셨다. 그 결과 본장 14절에서는 요단 강 고하의 기적이 일어난 후 백성들이 모세를 두려워했던 것처럼 여호수아도 두려워하였다고 기술되어 있다. 그리고 23절에서도 요단 강 도하의 기적을 홍해의 기적과 비교시킴으로 이 기적들을 주도했던 여호수아와 모세를 비교하고 있다.
이와같이 여호수아의 시작 부분에서 여호수아와 모세가 두드러지게 비교되고 있는 것은 여호수아서 저자의 의도에 따른 것이다. 즉 그가 이렇게 한 것은 여호수아가 모세의 후계자로서 이스라엘의 새로운 지도자임을 부각시키기 위해서였다. 다시 말해 이제 위대한 지도자였던 모세는 죽었지만 여호수아는 모세와 비견할 수 있는 새로운 지도자임을 강조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런데 여호수아가 모세 못지 않은 지도자임을 충분히 입증시킨 것이 곧 요단 강 고하 사건이다. 모세를 통해 기적이 일어났듯이 여호수아를 통해 요단 강 도하 기적이 일어났다. 즉 이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가 모세와 마찬가지로 이스라엘의 위대한 지도자임을 보여 주셨던 것이다.
요단 강 - 성경에서 특별하고 중요한 사건들이 이 요단 강을 중심하여 일어났기 때문에 우리가 중시해 볼 필요가 있다. 요단 강은 북쪽 헤르몬 산에서 출발하여 전 국토를 가로질러 사해까지 흐르는 큰 낙차를 가진, 팔레스틴에서 가장 길고 중요한 강이다. 그 일직선상의 길이만도 약 130Km에 달하는 이 강은 굴곡에 의한 길이는 보다 더 길어 무려 400Km에 이른다. 이 요단 강은 그 지류로서 두 개의 주요 강을 거느리고 있는 바 곧 야르묵 강과 얍복 강(창 32:22)이다. 이러한 요단 강은 지정학적으로도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는데 곧 가나안 동쪽 경계를 이룬다는 점이다(민 34:12).
한편 성경에서 이 '요단'이 최초로 언급된 곳은 아브라함과 롯에 대한 기록에서이다(창 13:10 - 12). 즉 그들 두 사람이 목축지 문제로 갈라서기로 작정하였을 때 롯은 '요단 들'을 택하여 소돔에 가까운 곳에 자리를 잡았다. 그러나 얼마 안 되어서 북방 왕들에게 이 지역에 있는 성읍들을 빼앗기고 롯도 포로로 잡히고 말았다. 이 소식을 들은 아브라함은 용사들을 데리고 쳐들어가 모든 잡힌 사람들과 전리품을 구해 내었다(창 14장). 야곱 또한 이 강을 두 차례 건넜다. 그가 부자가 되어 고향으로 돌아올 때 그는 지팡이를 의지하여 요단 강을 건넜다(창 32:10). 이러한 일들이 있은 후 오랜 세월이 지나고 요단은 본장에서 다시 언급되고 있다.
한편 사사 시대와 초기 왕국 시대에 있어서 요단 강의 나루를 한 차례 이상 차지한다는 것은 군사적으로 주도권을 갖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모압 족속들이 요단 강을 건너와 베냐민 지파의 사람들을 포로로 사로잡았을 때, 모압 왕 에글론을 살해할 수 있었던 것도 이스라엘 사람들이 에훗을 중심으로 하여 요단 강 나루를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삿 3:28, 29). 또한 기드온이 미디안 사람들을 치자 그들 중 반은 강을 거너 무사히 산 속으로 도망을 갔지만, 그 나머지 반은 남쪽으로 달아나다가 그들을 앞질러 요단 강 나루에 잠복한 에브라임 병사들에 의해 죽임을 달하거나 사로 잡혔다(삿 7:24, 25). 또 에브라임 사람이 도망하다가 '십볼렛'을 발음하지 못하여 길르앗 사람들에게 퇴로를 차단당하고 죽임을 당한 곳도 또한 이곳이다(삿 12:5, 6). 이외에도 요단과 관련된 성경 구절은 무수히 많다. 예를 들면 엘리야가 겉옷을 취하여 말아 물을 쳐서 요단 강을 건넜고(왕하 2:7, 8), 아람 왕의 군대 장관인 나아만 장군이 문둥병을 고치기 위해 몸을 일곱 번 담근 후에 깨끗함을 얻은 곳이 이곳이었다.(왕하 5:1-7). 또 엘리사가 그의 생도 한 사람이 나무를 베다 빠뜨린 도끼를 떠오르게 했던 곳도 바로 이 요단 강이었다(왕하 6:6). 이처럼 요단 강은 군사적인 중요도가 매우 높은 난공 불락(難功不落)의 요새로서 튼튼한 방어선을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신약 시대로 넘어가서 볼 때도 그 중요성이 계속되고 있다. 즉 복음서의 본질적인 이야기도 바로 이 요단 강이었고 예수님께서도 이곳에서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다(마 3장 ; 막 1:4-9 ; 눅 3장 ; 요 1:29-34). 예수님의 공생애 또한 이곳에서 시작되었고, 베드로를 비롯하여 4명의 제자를 부르신 곳도 이곳이다(마 4:18-22 ; 막 1:16-20 ; 눅 4:1-11). 폭풍을 잠잠케 하신 곳도(마 8:23-27), 물 위로 걸으시고, 오천 명을 먹이신 곳도 이곳이다(마 14:13-36 ; 막 6:30-56 ; 눅 9:10-17). 또한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베드로의 신앙 고백을 통하여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신성(神性)을 지닌 분이심을 알게 된 곳도 바로 이곳이다(마 16:13-20 ; 막 8:27-30 ; 눅 9:19-21). 또한 이곳은 예수님께서 당신 잣신를 고난당하시고 부활하시는 그리스도로 친히 증거한 곳이기도 하다(마 16:21 -28; 막 8:31; 9:1 ; 눅 9:22 - 27). 이처럼 요단 강은 이스라엘 역사 뿐 아니라 오늘날 모든 성도와 관계되는 성경 역사에 있어서도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유서깊은 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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