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ip to content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살전 2:1

    헬라 원문대로는 이 귀절 첫 머리에 "왜 그런고 하면"이란 말(*      )이  있어서
본절을 앞장 끝부분(특별히 9절 상반)에 연락시킨다. 사도와 그 일행이 복음을 가지고
데살로니가로 가서 전도할 때에 놀라운 형편은 그 교회 자체가 잘 아는 사실이다.
    우리가 너희 가운데 들어감이 헛되지 않을 줄을 너희가 친히 아나니 - 이것은  사
도 바울이 데살로니가에서 전도할 때에 영력(靈力)이 결핍되지 않았던 것을 의미한다.
비록 언변(言辯)과 지식과 재능이 풍부할지라도 성령 의 능력이 함께 하지 않는  전도
자는 영적 자격에 결핍한 자(헛된 자)임을 면할 수 없다. 바울이  데살로니가  전도에
있어서 영력이 충만했던 증거는 무엇인가? 그것은 2절에 밝힌 대로 그가 고난과  능욕
을 받은 직후에 오히려 대담하게 전도한 사실이다.      

    

 살전 2:2

   고난과 능욕 - 여기 "고난"은 '육신상으로 받는 고통'이고, "능욕"은 '인격상으로
받는 치욕(恥辱)'이다. 그가 빌립보에서 박해를 받아 감금(監禁)되었을 때에, 그는 육
신상으로  아픈 매를 맞았다(행 16:23). 이런 박해를 받게 되면 흔히 낙심하기 쉬운데
바울은 계속하여 용기 있게 복음을 전하였다. 그것은 결코 사람의 힘만으로 행한 일이
아니고 하나님의 권능의 역사로 실행된 것임이 분명하다.1:5 참조.
    우리 하나님을 힘입어 - 여기 "우리"란 말은 얼핏 보면 본서의 독자들 곧, 데살로
니가신자들까지 포함한 것 같이 보이나 실상은 그렇지 않다. 하나님의 능력을  행하게
된 자는 사도 자신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겸손하게 동역자들까지 포함시켜  "우리"
라고 말한 것이다. "우리 하나님"이란 말은 그에게 단순히 도그마(Dogma-교리)가 아니
고 그 안에 살아계신 분이시었다(빌 1:21). 바울이 하나님과 연합하여 사는 동안에는,
하나님은 그의 능력의 원천이시다.
    많은 싸움 중에 하나님의 복음을 너희에게 말하였노라 - 여기 "싸움"이란 말로 번
역된 헬라 원어(*        )는 '경기의 분투'를 의미한다. 곧, 여러가지 위험 혹은  우
고(憂苦)를 무릅쓰고 승리를 얻기 위해 분투함을 가리킨다.  바울은   데살로니가에서
모험과 분투로 전도하였다. 기독신자의 수난(受難)은 승리의 면류관을 얻으려는  경기
자의 분투와 같다는 의미에서, 바울은 이 말을 사용한 것이다. 딤후  4:7-8에,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
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고 하였다.  여기서도  "싸
움"이란 말은 '경기의 분투'를 의미한 것이다. 고전 9:26-27;딤후 2:5;히 10:32 참조.
    "하나님의 복음"이란 말은 하나님의 소유하신 복음이라는 말이 아니고,  하나님으
로부터 나오는 혹은 '하나님이 주신 복음'이라는 것이다. 곧, 이것은 하나님께서 복음
의 저작자이시고 또 근원이심을 가리키는 것이다. "하나님의 복음"이란 말(롬  1:1;고
후 11:7;살전 2:8)은 '그리스도를  내용으로  한  복음'이란  말이다(롬  1:2-4).  롬
1:9,15:19;고전 9:12;고후 2:12,9:13,10:14;갈 1:7;빌 1:15;살전 3:2;살후 2:14에서는
"우리 복음"이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내가 전하는 복음',또 '우리가 전하는  복음'이
란 말이다.   

 

 살전 2:3

   우리의 권면은 간사에서나 부정에서 난 것도 아니요 궤계 있는 것도 아니라 -  헬
라 원문대로는 "왜 그런고 하면"이란 말(*      )로 시작하여, 윗절에 말한 "많은  싸
움 중에"서도 담대히 하나님의 복음을 말하게 된 이유를 설명한다. 그가 그렇게  담대
히 복음을 말하게 된(2절)이유는, 사도의 전도 동기가 오류(誤謬)와 탐욕에서 났거나,
궤계(詭計)에 의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권면"이란 말의 헬라 원어(*           
         )는 복음을 가지고 사람들에게 설유(說諭)함을 가리킨다(행 13:15).  라이트
푸트는 이 말을 "호소"(appeal)라고 번역하였는데, 이 의미도 역시 복음 전도의  간곡
한 설유를 포함한다.
    "간사에서나 부정에서 난 것도 아니요 궤계에 있는 것도 아니라." "간사",  "부정
"궤계"는 전도자에게 있어서 삼대 금물(三大禁物)이다. "간사"(*            )는 오류
를 의미한다. 그의 전하는 도리는 절대적으로 그릇된 것이 없다. "부정"이란 말(*
                     )을  라이트푸트는  '음욕'의   의미로   보았으나,   엘리콧트
(Ellicott)는 '물욕'의 의미로 보았다. 바울이 복음을 전하는 동기는, 그가  하나님에
게 부름을 받은 데 있었고(4절)탐욕에 있지 않았다.  고전  9:16-18  참조.  "궤계"(*        
)는 여기서 전도 방법에 관하여 말한 것이니, 바울은 하나님의  권능만을  의뢰하였고
(고전 2:1-5), 조금도 인간적 술책을 사용하지 않았다(고후 2:17).  그러므로  본절과
앞절과의 연락은 이러하다. 바울은 "많은 싸움 중에" 담대히 전도하기를 힘썼으니, 그
렇게 된 원인은,(1) 바울은 복음을 절대적 진리(간사함이 없음)로  확신하기  때문에,
어떠한 난관에 봉착하든지 사상상 동요가 없었던 까닭이며, (2) 그의 전도의동기가 사
리(사리)를 탐하는 데 있지 않았던 까닭이고(사리를 탐하여 전도에 종사한 일군은  환
난 때에 도망함-요 10:12), (3) 또 한 가지 이유는, 그가 사람들을 복음으로 돌아오게
하려고 진실히 행한 까닭이다. 그러므로 그에게 있어서는 사람들의 배척과 핍박이  하
등의 문제도 되지 않았던 것이다.

 

 살전 2:4

   본절은 앞절 끝의 "궤계에 있는 것도 아니라"란 말을 해명하는 것이다. 사도 바울
은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궤계"를 사용해 가면서까지 사람들의 마음을 얻으려고 노력
하지 않았다.그 이유는, 그를 사도로 택하고 또한 그 임무를 가능케 하시는 이는 하나
님이시요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옳게 여기심을 입어 - 여기 "옳게 여기심을 입"는다는 말은 '인정을  받
는다'는 뜻이다. 곧, 바울이 하나님에게 인정을 받는다는 말이다. 바울이  하나님에게
인정을 받은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것이요  자기  공로로  된  것은  아니다.  고전
15:9-10에 말하기를, "나는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라 내가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
였으므로 사도라 칭함을 받기에 감당치 못할 자로라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라고 하였다.
    우리가 이와 같이 말함은 - 이 문구는 바로 번역되었다고 하기 어렵다. 헬라 원문
(*          ...                          )을 바로 번역하면, 곧, "그러므로 우리가
바로 그렇게 말하기를"이다. 영국 왕역도 이렇게 번역하였다(even so we speak). 바울
은 자기를 사도로 세워 주신 이가 하나님이시니만큼, 말할 때에 "사람을 기쁘게 하려"
고 하지 않고 "하나님을 기쁘시게"하려 한다. 여기 "말하기를"이란 말(*             
   )은 바울의 전도 설유(說諭)의 모든 말씀을 의미한다(고후 2:17).  
    사람을 기쁘게 하려 함이 아니요 - 이 문구는 기독자의 대인 관계(對人關係)의 친
절을 무시함이 아니다(고후 8:21). 고전 10:33 참조. 바울의 논점은 그의 인생의 목적
이 겨우 인간의 마음을 영합(迎合)하는 데 그칠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 함이라 - 사람을 기쁘게 하는 데는 혹
시 외면적 행동(外面的行動)만으로도 할 수 있으나, 그것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수
는 없다. 후자(後者)는 반드시 중심의 신실을 요건(要件)으로 하는 것이다(시 51:6).

 

 살전 2:5

   너희도 알거니와 우리가 아무 때에도 아첨의 말이나 탐심의 탈을 쓰지 아니한  것
을 하나님이 증거하시느니라 -  이  귀절  첫머리에  "왜냐하면"이란  이유  접속사(*      
)가 있어서 이것이 윗말("궤계에 있는 것도 아니라"는 말, "사람을 기쁘게 하려  함이
아니라"는 말)의 이유인 것을 알려준다. "아첨"이란 간사한 말로써 이익을 취하는  것
이고, "탐심의 탈"은 음흉하게 남을 속여 취리하는 것이니, 위의 두 가지가 똑같이 위
선(僞善)이다. 칼빈은 이 두가지 죄의 유무(有無)를 보아서 복음 전도자의 진위(眞僞)
를 구별 할 수 있다고 하였다. 복음의 진정한 일군은 일체의  이기주의적(利己主義的)
속임수를 버린다.

 

 살전 2:6

   우리가 그리스도의 사도로 능히 존중할 터이나 그러나 너희에게든지 다른  이에게
든지 사람에게는 영광을 구치 아니하고 - 여기 이른바 "능히 존중할 터이나"란 문구에
있어서 "존중"함이란 것(*          )은 권위를 가진다는 뜻이라는 해석이  있다.  한
역은 이 해석을 따른 것이다. 그러나 문맥상으로 보아서 이것은 물질적 짐을 지운다는
뜻이다. 9절에서 바울 자신의 생활비 해결 방도에 대하여 말한 것을 보면  이  해석이
옳다. 그는 데살로니가교회에 자기의 생활비를 부담시키려면 할 수도  있으나  그렇게
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고전 9:11-12;고후 11:9,12:16;살후 3:8 참조. 바울은  자기를
위하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하여서만 열중하기 때문에 자기 자신은 잊어버
린 듯하였다. 그러므로 그는 으례 쓸려면 쓸 수 있는 권(權)을 쓰지 않은 것이다.  사
역자는 이렇게 자기 속을 썩여서 교인들에게 거름이 되면서 마땅히 쓸 만한 권리도 쓰
지 않아야 하며, 화풀이를 해야 할 경우에도 죽은 듯이 침묵해야 한다. 사역자로서 참
된 자라면 지식이나 은혜면에 있어서 일반 신자들보다 우월해야 되지만, 특별히  겸손
에 있어서 교우들보다 깊어야 된다. 그는 무의식 중에라도 교만해지기 쉬우니  이것을
잘 제재해야 된다.

 

 살전 2:7

    오직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유순한 자 되어 유모가 자기 자녀를 기름과 같이 하였
으니 - 여기 "유순한"이란 말의 헬라 원어는 에피오이(*          )라고 하는데  시내
산 사본(*  )의 제 4교정인(校正人)이 지지한다. 그와 반면에, 알려, 비, 씨, 디(*  ,
B,C,D,)사본들은 모두 네피오이(*            )곧, '갓난 아이들'이란 뜻을 가진 말로
표시되어 있다. 외증(外證)으로는 후자(後者)가 강하다. 만일 후자가 옳다면 그  의미
는, 사도 바울이 무사기(無邪氣)하게 교제한다는 것이다. 그런 교제는 마치 젖 먹이는
어머니가 그의 어린아이를 양육하면서 뻣뻣하지 않고 아이와 동화(同化)되어 노는  것
과 같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문맥상으로는 "유순"이란 말이 적합하다. 바울이  "유순"
하여 사랑의 희생을 아끼지 않음이 마치 젖 먹이는 어머니가 그의 어린아이를  대하는
것과 같다.


 살전 2:8

   우리 목숨까지 너희에게 주기를 즐겨함 - 자식을 사랑하는 어머니는 젖만  아니라
그의 생명까지 주기를 아까와 하지 않는다(사 49:15). 그와 같이 바울은 그가 친히 영
적으로 나은 신도들에게 생명까지 주기를 아까와 않을 정도로 그들을 사랑한  것이다.
이것이 선한 목자의 도덕이다(요 10:11).
    너희가 우리의 사랑하는 자 됨이라 - 바울은 그리스도를  사랑하기때문에  그들을
사랑하게 되었다(요 21:15-17). 그들도 이제는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변화되어가니  그
들에 대한 사랑이 또 다시 뜨거워진 것이다.

 

 살전 2:9

   형제들아 우리의 수고와 애쓴 것을 너희가 기억하리니 너희 아무에게도 누를 끼치
지 아니하려고 밤과 낮으로 일하면서 너희에게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였노라 -  본절
초두에 "왜냐하면"이란 이유 접속사(*      )가 있기 때문에 본절은 윗말(바울이 그들
을 사랑한다는 말)의 이유 해설로 알려진다. 그의 사랑은 그들에게 물질적 부담을  지
우지 않으려고 극력 힘쓴 것으로도 알려진다. 이 귀절에 증거한 대로  바울이  복음을
위하여 손으로 일하면서 사랑의 수고를 달게 받은 사실은 그가 앞절에서 말한  모성애
(母性愛)의 증거이다.
    10-12. 이 귀절들은 바울이 데살로니가신도들에게 대하여 엄격한 교훈자로서 행한
자격을 말한다.

 

 살전 2:10

   거룩하고 옳고 흠 없이 행한 것 - 다른 사람을 가르치려면 먼저 자기 자신에게 흠
이 없어야 한다. 바울은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고", 사람 앞에서 "옳고 흠 없이 행"한
까닭에 하나님과 사람에게 책잡힐 것이 없었다. 그러므로 그는 부성적(父性的)교훈(11
절)을 그들에게 세울 수 있었다.

 

 살전 2:11

   위의 7절에 언급된 "유모"의 비유에서 "아비"의 비유로 옮긴다. 앞의 것은 데살로
니가신도들을 향한 사도의 애정을 가리키고, 뒤의 것은 엄한 교훈자의 태도를  가리킨
다.
    각 사람에게 - 복음이 전파된 뒤에는 목회사역이 필요하니, 그 이유는,  신자들을
개별적으로 돌아보고 가르침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칼빈은 말하기를, "공중(公衆)에게
일반적으로 주는 효과가 적을 때도 있다. 어떤 자는 개별적으로 훈계하여야  바로  될
수 있다"라고 하였다.
    권면하고 위로하고 경계하노니 - "권면"은  사람의 의지(意志)에 설유(說諭)하여
어떤 선행을 실행하기로 결심케 함이고, "위로"  낙심한 자를 일으켜 주는 것이다(5:14).
그리고 "경계"는 게으른 자나 그 밖에 방종하는 자에게 엄히  훈계함을 의미한다(5:14).
벴겔은 "권면"은 사람으로 하여금 선행을 하고자 하게 하고,  "경계"는 그 일을 할 때
주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하게 한다고 말하였다.

 

 살전 2:12

   이는 너희를 부르사 자기 나라와 영광에 이르게 하시는 하나님께  합당히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 바울이 데살로니가신자들을 "권면하고 위로하고 경계"한(11절  하반)
목적이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마음에 "합당히 행하게 하려 함"이라고 한다.
    "나라와  영광."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교회'를  가리키기도  한다(바
16:18-19). 그러나 여기서는 그리스도가 다시 오실 때에 그의 세우실 '영광의 나라'를
가리킨다(Alford). "영광"이란 것은 신자들이 내세(來世)에 참예하여  누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킨다(롬 5:2,8:18;고전 15:43;엡 3:21; 빌 4:20;벧전 1:7). 이 영광은  주
님의 초림시에 계시(啓示)의 목적으로 땅 위에 나타났고(요 1:14,2:11), 신자들로  하
여금 구원을 미리 맛보게 하려고 복음과 성령으로 교통된다(벧전 1:8). "하나님께  합
당히 행하게 하려 함."엡 4:1;빌 1:27;골 1:10 참조. 이 말씀의 뜻은 '하나님의  마음
에 맞게 행함'이다.


 살전 2:13

   이러므로 - 본절 초두의  이 말은 앞절에 기록된 사실 곧, 데살로니가교인들이 하
나님 "나라와 영광"에 이르게 된 것을 가리킨다. 바울은 이 사실 때문에 여기서  감사
한다. 그리고 그 사실에 대하여 그는 16절까지에 진술한다.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아니하고  하나
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 여기 "받는다"는 말이 두 번 나오는데, 헬라 원어에서는 같
은 말이 아니다. 앞의 것은 외형적 접수를 의미하는 파라람바노란 것이고, 뒤의 것은
주관적으로 기쁘게 받아 들임을 의미하는 데코마이란 것이다(Van Leeuwen, Wohlenberg).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속에서 역사하느니라 - 여기 "또한"이란 말은  위에
진술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데살로니가신자들의 반응에 대하여 또 한  가지를  부가
(附加)시킨다는 말이다.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뿐 아니라, 또한 그 말씀이  그
들 가운데서 역사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 말씀의 "역사"는 반드시 진정한  믿음이
있는 사람들에게만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도는 "믿는"이란 말을 "너희"란 말에 붙였다.   

 

 살전 2:14

   본절은 윗절 끝에 기록된,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속에서  역사하느니라"란
말의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내용을 말한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유대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들을 본받은 자 되었으니 - 여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란 말은 기독신자가 행한 선(善)은 무엇이든지 스스로 행한 것
이 아니고, 그리스도를 힘입어 행한 것임을 밝혀준다(요 15:5 참조). 어떤 학설에, 이
말은 아랫말 "유대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란 말과 관계되어 그 교회가 그리스도  안에
있음을 해명한다고 한다(Van Leewen). 그러나 그것은 자연스럽지 않은 설명이다.  "하
나님의 교회"란 말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란 말과 관계하지 않고라도 기독교회란  의
미를 잘 나타낸다. 고전 1:2,10:32,11:16,22,15:9;갈 1:13 참조.  데살로니가신자들이
"유대에 있는... 교회들을 본받"았다고 함은, 그들이 유대의 교회처럼 핍박을 참아 견
디었다는 의미이다.
    너희 나라 사람들에게 동일한 것을 받았느니라 - "너희 나라 사람들"이란 말은 데
살로니가의 이방인들을 의미한다. 이 말이 데살로니가의 이방인과 유대인을  다  포함
한다고 주장하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유대에 있는 교회가 유대인에게 핍박당하였다는
대구조가 직전에 있음을 보든지, 데살로니가교인의 대다수가 이방인이었을 것이  분명
한 점으로 보든지, 이 말은 데살로니가의 이방인들을 의미한 것임에 틀림이 없다. "동
일한 것"이란 말은 그들이 받은 핍박을 가리킨다. 이 핍박은 행 17:5  이하에  기록된
사건에 뒤이어 있었을 어떤 사건이었을 것이다.

 

 살전 2:15

   주 예수와 선지자들을 죽이고 - 여기 "주"란 말은 원문상 말의 순서로 보아  강세
(强勢)를 띤다. 바울은 본절 이하에 유대인들의 죄가 어떻게 큰가를 지적하기 위하여,
그들이 죽였던 "예수"는 "주"라는 사실을 고조한다(고전 2:8). "주"란 말(*          
  )은 구약의 "여호와"(*        )란 성호의 70인역(LXX)을 따른 것이다.  "선지자들"
은 구약의 예언자들을 가리키는바, 역사적 순서로 보아서는 "주 예수와 선지자들"이란
어순(語順)은 부자연스러워 보인다. 그러나 바울은 유대인들의 죄가 크다는 것을 지적
하기 위하여 무엇보다 큰 죄 곧, 그들이 예수 죽인 죄를 먼저 지적하기 위해서  "선지
자들"이란 말보다 "주 예수"라는 말을 먼저 거론한 것뿐이다.
    우리를 쫓아내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아니하므로 모든 사람에게 대적이 되어 - "우
리"는  바울  자신과  그의  동역자들과  모든  사도들을  일반적으로  가리킨다.  행
17:5,13,18:6 참조. 복음을 반대하는 유대인의 운동을 근본적으로 살필 때에,  그것은
복음 그것을 반대한 것 뿐아니라, 그 복음을 통하여 죄인들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을
공격한 셈이다. 그리고 그것은 역시 만민의 구원의 길을 방해하는 행동이므로  만민을
대적하는 일이다.  

 

 살전 2:16

   우리가 이방인에게 말하여 구원 얻게 함을 저희가 금하여 자기 죄를 항상  채우매
-  유대인들은  특별히  이방  전도에  저항하여  여러가지   모양으로   방해하며(행
9:23,13:45,17:5,13,22:22)죄를 채웠다. 마 23:32-36 참조. 하나님께서 죄인을 벌하시
기 전에, 그 죄인은 어리석게 죄를 축적(蓄積)하느라고 분망하다. 이방  전도에  대한
유대인들의 저항과 방해하는 그들의 죄를 쌓는 미련한 작업이었다.
    노하심이 끝까지 저희에게 임하였느니라 - "끝까지"(*                 )란  말은
두 가지 의미를 가지는데 '양(量)껏' 혹은 '최종에는'이다. 그런데, 이 말 직전에 "죄
를...채우매"라는 분량적(分量的) 의미의 병행구(竝行句)가 있으므로 '양껏'이란 의미
를 취함이 자연스럽다. 하나님의 진노는 이미 유대인에게 극단적 분량으로 임하여  형
벌의 실시에 이르렀다. 그러나 본절에서 말하는 유대인에게 내린 하나님의 진노는  종
말관적(終末觀的)인 것이 아니다. 그 이유는, 롬 11:25이 가리키는 대로, 유대인은 이
세상 종말에 이르러는 회개하고 구원받을 소망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주석가들은
다음과 같이 몇 가지 의견들을 제시한다. (1) 하나님의 이 진노는 주후 46-47년에  걸
친 기근과 두다의 반란 이후에 로마 정부가 유대인에게 가한 학정과, 주후 49-50년 사
이에 클라우디오 황제가 유대인을 로마에서 축출한 사실등을 가리킨  것이라고  하고,
(2) 하나님의 진노는 주후 70년에 있을 예루살렘 멸망을 가리킨다고도 하며,  (3)  또
이것은 유대인이 예수님과 그 사도들을 박해한 죄로 인해서 종교적으로 받은 재앙 곧,
그들의 심령이 강팍해진 것을 가리킨다고도 한다(Van Leeuwen). (4) 가장 합당한 해석
은 위의 모든 해석을 종합한 것인데, 하나님의 이 진노는 유대인이 국운상으로 혼미해
질 것을 가리킨다는 것이다(마 23:37-39; 롬 11:7-8,20). 유대인이 근 2000년 동안 국
민적으로 파멸을 당하고 종교적으로 혼미에 빠진 것은 하나님의 형벌을  받은  결과이
다.

 

 살전 2:17

   형제들아 우리가 잠시 너희를 떠난 것은 얼굴이요 마음은 아니니 너희 얼굴  보기
를 열정으로 더욱 힘썼노라 - 위의 14절에서 말한 바와 같이 데살로니가 신도들은  박
해를 받았다. 그동안 바울은 그들과 함께 있지 않았으니 얼핏 보면, 그가 그 때에  그
들을 돌아보지 않고 내버린 것 같이 생각되기 쉬웠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본절  이
하에서 자신의 형편을 변해(辯解)한다.
    "떠난 것"이란 말(*                              )은 가족이나 혹은 일반  친애
하는 자를 사별(死別)함을 의미한다. 바울이 데살로니가신자들을 떠난 것은 그처럼 부
득이한 일이었고 그가 원한 것은 아니었다(Van Leeuwen). 이말이 헬라 원문에는  수동
태(受動態)이니 그 글자대로 번역하면 "떠난 것"이 아니고 "떠나게 된 것"이다.  이것
을 보면, 그와 데살로니가신자들과의 이별은 부득이한 사정에 의하여  되어진  것이었
다. 이 사실은 "얼굴이요 마음은 아니니 너희 얼굴 보기를 열정으로 더욱 힘썼노라"고
한 그의 말이 역시 증거한다. 골 2:5 참조. 바울이 그들을 만나보기 원하는 것은 영적
인 것이고 육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19절에 밝힌 대로 그리스도의 재림 때에  그들
이 바울에게 "소망", "기쁨", "면류관"이라는 것이다. 그는 이렇게 내세 본위로  소망
이나 기쁨을 인식하며 느낀다.


 살전 2:18

   나 바울 - 이것은 바울 자신만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 말이 여기 있기 때문에, 본
절의 주격은 바울 한 사람에게 국한된 것으로 볼 수 있다.
    한 번 두 번 - 이 어투는 '종종' 혹은 '누차'라는 의미이다(Felt, Lightfoot). 칼
빈은 말하기를, "이 '한 번 두 번'이라는 말은 데살로니가를 심방하려던 그의  소원이
갑자기 뜨거웠다가 갑자기 식어버리는 종류의 것이 아니라, 목표를 굳게 정하여  동요
함이 없는 것이었음을 가리킨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즈안은 이 말을 여자적으로 해석
하여, 꼭 "두번"으로만 본다. 곧, 바울이 베뢰아에 있을 때에 한 번 데살로니가에  돌
아가려 하였고, 그 뒤 에덴에서 실루아노와 디모데를 기다리는 중에 다시 한번 그리했
던 것이라고 한다(Introd 1. 204). 행 17:10-15 참조.
    사단이 우리를 막았도다 - "사단"이란 말은 히브리어 사탄(*      =원수 혹은  장
애자)의 음역(音譯)이니(대상 21:1;욥 1:6)곧, 마귀를 가리키는 명사이다(마  4:10;계
12:9,20:2). 그런데, 사단이 어떤 방식으로 바울의 길을 막았는지에 대하여는  알  수
없다. 이 점에 있어서 우리는 사단이 방해하더라도, 그 방해 행위는 전능하신  하나님
의 제재에 의해 결국 그 성도에게 유익한 결과가 되고 만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는 사
단의 방해에 굴복할 의사를 가질 것은 아니다. 우리의 책임은 그놈의 방해를 받지  않
도록 노력함에 있다.

 

 살전 2:19

  사도가 데살로니가 신도들을 애모(愛慕)하여 보고자 하는 이유는, 그가 그들을 영
적으로 존귀하게 보기 때문이다.
    소망이나 기쁨이나 자랑의 면류관이 무엇이냐 그의 강림하실 때 주 예수 앞에  너
희가 아니냐 - 사도의 전도를 듣고 믿는 자들이 있는 것은 곧, 그가 그  소명(召命)에
충성한 증표임에 틀림 없다. 그러므로 심판 때에 데살로니가 신도들은 사도의  "소망"
일 것이다. 그리고 "기쁨"은 사도가  그  사역의  결과로  얻은  내세의  기쁨이다(요
4:36). "자랑의 면류관"이란 말의 "자랑"은 어떤 교만을 포함하는 자긍이 아니고,  은
혜로 받은 상급을  영광으로 생각함이다. "면류관"은 왕관이라기보다 '승리'를 상징한
다. 잠 16:31;겔 16:12;고전 9:25;빌 4:1;딤후 4:7 참조.
    "강림"이란 말(*                )은 헬라 문학에서 주로 두 가지 용법을 가진다.
(1) 하나님이 예배하는 자들을 돌아보시기 위해 그들 중에 영광으로 임재(臨在)하심을
가리키는 종교적 술어로 사용되기도 하며(Dibelius), (2) 임금이 백성에게 내림(來臨)
함을 의미하기도 한다. 사도 바울은 이 말을 주의 "재림"에만 국한하지  않고  일반적
"내림"의 의미로도 사용하였으나(고전 16:17;고후 7:6-7;빌 1:26,2:12), 그것 역시 의
미심장하고 중대한 "내림"을 가리키는 것만은 사실이다. 게할더스  보스는  말하기를,
"이 말이 가리키는 '내림'이 엄숙성과 중대성을 띠는 이유는, 그 내림에 수반하는  사
건 (구속  완성과  심판)이  그러하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Pauline  Eschatology,
p.74). 이러므로 이 말은 주의 재림을 가리키는 데에 가장 적합하게  채용되었다(살전
2:19,3:13,4:15,5:23;살후 2:1).
    
 살전 2:20
   너희는 우리의 영광이요 기쁨이니라 - "영광", "기쁨". 이 두  말은  앞절의  "소망...기쁨...자랑의 면류관"을 조금 다른 형식으로 재설한 것뿐이다. 앞절의 "소망"과 "자랑의 면류관"의 내용은 본절의 "영광"이란 말에 포함되었다(Van Leeuwen).
    "너희는 우리의 영광"이란 말은 무슨 뜻인가? 바울이 데살로니가 신자들에게 영광을 취한다는 뜻인가? 그런 것은 아니다. 이 말은 (1) 바울의 영적 소원의 성취를 가리키는 동시에, (2) 그가 그들을 존귀하게 여긴다는 뜻이기도 하다. 신앙이  성숙할수록 우리는 진실한 다른 신자들을 존귀하게 보게 된다. 다윗은 말하기를, "땅에 있는 성도는 존귀한 자니 나의 모든 즐거움이 저희에게 있도다"라고 하였다(시 16:3).


List of Articles
번호 분류 제목
공지 박윤선 주석을 읽을 때에 내용이 없는 장
89 에베소서 박윤선 주석, 에베소서 04장
88 에베소서 박윤선 주석, 에베소서 05장
87 에베소서 박윤선 주석, 에베소서 06장
86 빌립보서 박윤선 주석, 빌립보서 01장
85 빌립보서 박윤선 주석, 빌립보서 02장
84 빌립보서 박윤선 주석, 빌립보서 03장
83 빌립보서 박윤선 주석, 빌립보서 04장
82 골로새서 박윤선 주석, 골로새서 01장
81 골로새서 박윤선 주석, 골로새서 02장
80 골로새서 박윤선 주석, 골로새서 03장
79 골로새서 박윤선 주석, 골로새서 04장
78 데살로니가전서 박윤선 주석, 데살로니가전서 01장
» 데살로니가전서 박윤선 주석, 데살로니가전서 02장
76 데살로니가전서 박윤선 주석, 데살로니가전서 03장
75 데살로니가전서 박윤선 주석, 데살로니가전서 04장
74 데살로니가전서 박윤선 주석, 데살로니가전서 05장
73 데살로니가후서 박윤선 주석, 데살로니가후서 01장
72 데살로니가후서 박윤선 주석, 데살로니가후서 02장
71 데살로니가후서 박윤선 주석, 데살로니가후서 03장
70 디모데전서 박윤선 주석, 디모데전서 01장
69 디모데전서 박윤선 주석, 디모데전서 02장
68 디모데전서 박윤선 주석, 디모데전서 03장
67 디모데전서 박윤선 주석, 디모데전서 04장
66 디모데전서 박윤선 주석, 디모데전서 05장
65 디모데전서 박윤선 주석, 디모데전서 06장
64 디모데후서 박윤선 주석, 디모데후서 01장
63 디모데후서 박윤선 주석, 디모데후서 02장
62 디모데후서 박윤선 주석, 디모데후서 03장
61 디모데후서 박윤선 주석, 디모데후서 04장
60 디도서 박윤선 주석, 디도서 01장
59 디도서 박윤선 주석, 디도서 02장
58 디도서 박윤선 주석, 디도서 03장
57 빌레몬서 박윤선 주석, 빌레몬서 01장
56 히브리서 박윤선 주석, 히브리서 01장
55 히브리서 박윤선 주석, 히브리서 02장
54 히브리서 박윤선 주석, 히브리서 03장
53 히브리서 박윤선 주석, 히브리서 04장
52 히브리서 박윤선 주석, 히브리서 05장
51 히브리서 박윤선 주석, 히브리서 06장
50 히브리서 박윤선 주석, 히브리서 07장
49 히브리서 박윤선 주석, 히브리서 08장
48 히브리서 박윤선 주석, 히브리서 09장
47 히브리서 박윤선 주석, 히브리서 10장
46 히브리서 박윤선 주석, 히브리서 11장
45 히브리서 박윤선 주석, 히브리서 12장
44 히브리서 박윤선 주석, 히브리서 13장
43 야고보서 박윤선 주석, 야고보서 01장
42 야고보서 박윤선 주석, 야고보서 02장
41 야고보서 박윤선 주석, 야고보서 03장
40 야고보서 박윤선 주석, 야고보서 04장
목록
Board Pagination Prev 1 ...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Next
/ 24

All the Bibles, Commentaries and Dictionaries here have their own rights.
All rights are reserved for them, not for us. Thanks! Praise our great God, Christ Jesus!

HANGL Lingua Franca 한글 링구아 프랑카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

나눔글꼴 설치 안내


이 PC에는 나눔글꼴이 설치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 사이트를 나눔글꼴로 보기 위해서는
나눔글꼴을 설치해야 합니다.

설치 취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