엡 4:1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 바울은 주님을 위하여 옥에 갇혀 있는 자로서 신자들을 권면한다. 그러니만큼 이 권면은 신자들의 마음을 감동시킬 수밖에 없다.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여. 여기 "부르심"이란 말은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구원 받도록 부르신 것(히 3:1)을 의미한다. 이것은 그들로 하여금 복음을 믿도록 인도해 준 전도 행위였다. "합당하게"란 말은 자격 있음을 의미한다.
엡 4:3
평안의 매는 줄 - 이 말의 헤라 원어를 의역(意譯)하면, '매는 줄과 같은 평화'란 말이다. 평화가 먼저 개인의 심령 속에 있어야만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 있어서 띠(帶)의 작용을 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나(개인)의 마음이 그리스도의 평강에 붙잡혀야 된다. 내 마음이 괴로우면 어떻게 남들과 평화를 나눌 수 있으며, 또 남들과 평화롭게 지낼 수 있으랴? 그러면, 나 일개인이 그리스도의 주시는 평화롭게 지낼 수 있으랴? 그러면, 나 일개인이 그리스도의 주시는 평화를 누려야 할 터인데, 그것은 믿고 순종하는 생활과 부지런히 기도하는 생활에 따르는 은혜이다.
성령의 하나되게 하신 것 - 이것은 성령님께 신자들의 심령을 동일한 구원 설계로 이끄시는 운동으로 인하여 피차간 일체(一體)된 느낌을 가지게 하시는 것을 말한다. 성령님께서 신자들로 하여금 서로 일체됨을 알게 하시므로 우리는 그것을 깨닫고 순종하여 힘써 지켜야 할 것이다.
엡 4:4
몸이 하나이요 - 이 귀절부터 6 절 까지는 화평을 힘쓸 이유를 보여주는데 곧, 구원에 관계된 모든 것이 단일 체계로 되었다는 것이다."몸"은 교회를 가리킨다. 동일한 몸에 속한 각 지체들은 서로 충돌하지 않을 것이다. 그 이유는 , 저희들끼리 서로 충돌하면 스스로 자신을 해함이 되는 까닭이다
성령이 하니이니 - 성령님은 교회 가운데서 각 개인을 찾아 역사하시는 분잇신데(3:20), 그가 한 분이시고 두분이 아니신 고로 그로 말미암아 중생한 신자들은 자연히 서로 일체감(一體感)을 가지게 된다(빌 2:1-2). 신자들은 그 일체감을 힘써 지켜야 한다.(4:3)
한 소망 - 여기 "소망"은 '영생의 기업'을 가리킨다(벧전 1:3-4). 신자들은 다 함께 하나님의 자녀로서 같은 기업을 누리게 되어 있다. 천국의 기업은 우리의 모든 거룩한 소원을 만족시킨다.
엡 4:5
주도 하나이요 - 여기 "주"란 말은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그는 자기의 피로 우리를 대속(代贖)하셔서 자기의 것으로 만드셨다(럼 14:8-9;고전 6:19-20).그러므로 그는 우리를 사라하시고 보호하신다. 우리는 그를 구주로만 알 뿐아니라 주재자(임금)로 알고 순종해야 된다. 빌 2:10-11 참조. 우리의 주재자가 동일한 한 분인 사실을 알 때에 우리는 다 함께 순종의 태도를 취하는 것이다. 만일 우리의 주재자가 각각 다르다면 그 명령들도 다르 터이니 거기에 따라 우리의 순종의 길에는 서로 충돌함을 면할 수 없으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주재자가 한 분이시니 우리의 순종의 걸음도 자연히 일치하게 되려니와 또 일치하기를 힘써야 된다.
믿음도 하나이요 - "믿음"이란 말은 여기서 신앙의 객관적 대상과 그것의 주관적 내용을 통합하여 말한다. 신앙의 객관적 대상 곧, 그리스도는 유일하시거니와 신앙의 주관적 내용, 곧 같은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그를 신뢰하는 심리도 모든 참된 성도들에게 있어서 동일하다.
세례도 하니이요 - "세례"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그의 부활에 동참함을 의미하는 예식적 행사이다(롬 6:1-11). 참된 신자마다 이와 같은 의미의 세례를 받아서 동일한 그리스도의 소유가 된 것이니 그들의 생활 노정에 서로 충돌이 있을 리가 없다.
엡 4:6
하나님도 하나이시니 - 신자들이 섬기는 "하나님"이 각각 다르다면 그들의 행동 원리가 각각 다르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하나님이 동일하신 한에는 그들의 행동 원리가 동일한 것은 사실이다.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르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 이 말씀은 다음과 같이 개역할 수 있다. "곧 모든 자들의 아버지이신데 만물 위에 계시고 만물을 통하여 계시고 각자의 안에 계시다" 여기 "만물"이란 말이나 "각자"란 말은 다른 피조물들을 제외시키지 않으나 특별히 신자들을 가리킨다. 하나님은 그들의 아버지로서 사랑으로 그들을 거느리시며, 그들 위에서 그들을 다스리시며, 그들 각자 속에 내재하셔서 역사하신다. 그러므로 신자들이 하나님을 순종할 때에 그들은 하나가 될 수 있다.
엡 4:7
우리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 이 말씀은 아래 있는 11절을 보아서 하나님이 주신 은사가 사람에 따라 각각 다르다는 의미를 가진다. 그러면,신자들이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른 사실이 교회로 하나가 되라는 권면에 무슨 연관성을 가지는가? 이것은 신자들이 받은 은사가 각각 다은 고로 서로 자기에게 있는 것으로써 남의 부족을 도와서 하나가 되라는 의미로 그 권면을 뒷받침한다.
엡 4:8
그가 위로 올라가실 때에 사로잡힌 자를 사로잡고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셨다 - 이 말씀은 시 68:18의 인용이다.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신 것은 사단과 죄악과 사망을 이기신 일이며, 승천하신 후 성령님을 보내심으로 모든 사람들에게 은사를 주신다. 이 귀절 해석에는 난관이 없지 않으나 깊이 생각하면 잘 풀린다.
(1) "사로 잡힌 자를 사로잡고"란 말의 유래를 살펴보면, 다윗을 통하여 승전(勝戰)하신 여호왕께서 많은 포로들을 이끌어 오셨다는 뜻이지만, 궁극적으론느 그리스도께서 그 원수의 우두머리 사단과 또한 죄악과 사망을 저옥하실 사실에 대하여 예언한 말씀이다. (2)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셨다." 이말은 시 68:18의 내용과 다르다. 거기에는 "선물을 인간에게서...받으시니"라고 되어 있다. 그러나 이 두 가지 문구가 결과적으로 같은 것이다. 하나님이 쓰시는 다윗이 승전하고 얻은 전리품들을 후에 많은 사람들에게 나누 주었다(시 68:12). 성령의 감동으로 이 말씀의 예언적 의미를 깨달은 바울은 그 말씀을 인용하여 그리스도의 승천으로 말미암아 궁극적으로 성취된 것을 가르친다.
엡 4:9,10
올라가셨다 하였은즉 땅 아랫 곳으로 내리셨던 것이 아니면 무엇이냐 내리셨던 그가 곧 모든 하늘 위에 오르신 자니 이는 만믈을 충만케
하려하심이니라 - 바울은 앞에 말한 예언(시 68:18)이 그리스도에게 대한 것임을 지적하며 해명한다. 그 예언에, "주께서 높은 곳으로 올라가셨다"한 것은 그가 땅으로 내려오셔서 계신 일이 있었음을 암시한 것이니, 그렇게 하신 아는 예수 그리스도 뿐이시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모든 하늘 위에 오르신"목적은 모든 것들 위에서(하늘에 계셔서)모든 사람들에게 축복하시려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만민에게 영적 축복을 하시기 시작하신 때는 그가 승천하셔서 만물이 위에서 주권을 가지시게 된 그때이다. 만물 위에 주권을 가지신 뒤에 만물에게 모든 은혜를 내리심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엡 4:11
그가 혹은 사도로,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 이것은 윙절의 내용과 같이 "만물을 충만케 하려"는 방법을 보여준다. "사도"는 그리스도께서 친히 세우셨는 데 그리스도를 친히 목격하였고, 교회의 기초 사역을 한 자들이다. 고전 9:1 참조, 여기 "선지자"는 장래 일에 대하여 예언한 경우도 있지만 (행 11:28,21:10), 영적 교훈으로 교회를 권면하여 덕을 세우기도 했다(고전 14:3). 이 직분도 역시 사도처럼 교회를 세우는데 기초 사역을 한 것이다.(2:20). "복음 전하는 자"는 각처에 다니며 복음을 전하는 자니 빌립과 기모데 같은 사람들이 이에 해당된다(행 21:8,8:26-40). "목사와 교사"이 직명들은 하나의 관사로 묶여 있어서 한
직분의 양면을 보여준다. "목사"는 하나님의 양 무리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먹이는 자이니, 그는 "교사"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잘 가르치는 은사를 소유한 자가 이 직분을 받아야 한다.
엡 4:12
성도를 온전케 하며 - 이것은 위의 여러가지 직분들의 목적을 보여준다.
"온전케 한다"는 것은 '강력하게 만듬'(strengthening)의 의미한다.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 성도를 온전케(힘있게)하는 목적은 "봉사의 일"을 하기 위한 것이다. "봉사의 일"이란 말은 '사역'(work of ministry) 이라고 번역되어야 한다. 우리는 여기서 보편화 된 제사장격을 볼 수 있다. 신약교회는 교역자들만이 교회 사역에 임할 것이 아니라 모든 신자들이 총동원되어 교회 사역게 이바지하도록 되어 있다. 이런 의미에서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교역자들이나 일반 신자들이 다 함께제 사장이다.벧전 2:9 참조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회에서 오랜 세월 동안 소수의 교역자들만이 하나님과 더 가까운 것 같은 잘못된 관념으로써 그들이 그같이 처신해왔다. 그같은 것은 신약 교회의 목사를 구약식 제사장제도와 혼동한 폐풍이다. 이제 기독교회는 각성하여 일반 교인들도 제사장 의식으로써(벧전 2:5)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직접 하나님 앞에서 봉사하도록 하여야 한다.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 곧,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건설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에베소 신자들이 성도들의 단체를 건설되어감을 가리킨다. 그리고 이것이 신자들의 수효를 증가시키는 것과도 관계가 있다고 할 수 있으나 그보다느 교회의 질적 향상을 그 중점으로 본 것이다.
엡 4:13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 이 말씀은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세우는 것 (12절끝)의 목표를 보여준다. 그것은, (1)하나님의 아들에 대한 신앙과 지식에 신자들이 통일을 이루어 한 사람처럼 됨 (2) 그들에게 그리스도께서 충만함이다. 위의 두 가지는 참된 교회의 목표이다. 여기서 교회가 하나되는것이 강조되었다. 이것이 기독교 역사상에 외부적으로는 만족하게 실현되지 못하였다. 그러나 교회가 영적으로 마침내 그 목표에 도달하기는 할 것이다.
엡 4:14,15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궤술과 간사한 유혹에 빠져 모든 교훈의 풍조에 말려 요동치 않게하려 함이라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 이 말씀은 교회가 잘 건설된 결과를 보여준다. 그것은, (1)교회가 그릇된 사조에 끌려가지 않고(14정), (2)사랑으로 진리를 행하여 그리스도를 목표하고 장성해 감이다(15절) 진리를 주장하거나 행하는 자들이 사랑으로 하지 않는 것은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진리 운동을 무효하게 만든다.(고전 13:1-3)
엡 4:16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입음으로 연락하고 상합하여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한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 - 이 귀절은 윗절의 사랑으로 진리르 행한 결과를 말해 준다. 그것은 교회의 지체(肢體)된 신자들이 서로 통하게 되며 또 연락하데 됨으로 교회가 화목하는 가운데서 잘 발전됨을 보여준다.
엡 4:17
내가 이것을 말하며 주 안에서 증거하노니 - "이것"이란 말은 이제부터 권면할 일들을 염두에 둔 것이다. "주 안에서 증거함"은 '주님이 친히 증거함과 같은 것'이라는 말이니 그증거의 중대성을 지적한다. 이 증거를 가볍게 여기면 주님 앞에서 심판을 받는다.
허망한 것 - 이 말의 헤라 원어는 거짓되고 따라서 열매 없는 것을 의미하는데, 그들이 우상을 섬기는 일은 특별히 이 말로써 형용된다.
엡 4:18
총명이 어두워지고 - 이것은 그들의 우상 숭배의 결과이다. 롬 1:21에도 우상을 숭배한 결과로 심령이 어두워지는 것을 말하였다.
저희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저희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또다 - "무지"는 하나님을 모르는 우준(愚蠢)을 가리키고(롬 1:22), "굳어짐"은 하나님께 대해 심령이 부드럽지 않고 완고해짐을 말한다. "하나님의 생명"이란 것은 육신의 생명을 가리키지 않고 초자연적 생명 곧,사람이 거듭남으로 받는 하나님의 영적 생명을 가리킨다(Calvin). 위의 두 가지 병통(무지와 굳어짐)으로 인하여 그들은 하나님에겐서 영적 생명의 공급을 얻지 못한다. 하나님으로 부터 오는 영적 생명은 오직 하나님을 아는 참된 지식에 있고, 또 하나님을 순종하는 부더러운 심령이 있는 자만이 얻는 것인데, 그것은 거듭난 자들에게 한하여 내리는 축복이다.
엡 4:19
감각 없는 자 되어 - 이 것으 다하나님 앞에 두려움이나 부끄러움을 느낄 줄 모르는 자를 가를 가리틴다. "방탕"으로 번역된 말은 본래 교만을 의미하였으나 후에는 방종(자기 멋대로 행함)을 가리킨다. 이것은 양심의 가책이 없는 자가 어떤 행위든지 기탄없이 행함을 가리킨다.
"더러운 것" - 은 "더러운 영업"이라고 번역되어야 한다. 그러니만큼 이것은 광범위의 부정과 관련된 말이다. 이 말이 여기서는 '더러운 영리'란 의미르 마가지다. 사람들이 종교적으로 부패해지면(우상주의로 타락함과 같이)도덕적으로도 부패해진다. 롬 1:18-31참조.
엡 4:20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르 이같이 배우지 아니하였느니라 - 이 말씀은 그리스도 신자들의 생활이 위에 관설된 이방인의 불경건하고 부도덕한 생활과 정반대로 되어야 할 것을 가르친다. 에베소교회의 신자들은 그리스도르 믿은 이후에 마땅히 전면적으로 부도덕한 생활을 고쳤어야 될 것이었다.(롬 6:16-23).
엡 4:21
진리가 예수 안에 있는 것 같이 - 불신자들 중에는 허망함이 있으나(4:17) 예수님에게는 진리가 있다. 그러므로 신자들은 허망하지 말고 진리대로 행함이 마땅하다.
너희가 과연 그에게서 듣고 또한 그 안에서 가르침을 받았을진대 - "그에게서 듣고"란 말은 "그를 들었고"라고 번역함이 합당하다. 에베소 교인들은 사도의 전도를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들어 알게 되었다. "그 안에서 가르침을 받았다"는 말은 그리스도에 대한 틀림없는 복음을 생명 있개 영적으로(이론뿐이 아님) 배웠다는 의미이다. 그들은 복음에 대한 바울의 교훈을 두 해 동안 착실히 배웠다(행 19:10)
엡 4:22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 "옛 사람"이란 것은 범죄의 근성을 인격시(人格視)하여 표현한 것인데 이것은 인류의 조상 아담만큼이나 오랜 것이다. 그 이유는, 이것이 타락한 아담으로부터 유전되어 내려오느 것이기 때문이다. 롬 6:6 ;골 3:9 참조. 하지(C.Hodge)는 말하기를, 이것은 (1) 중생하기 전 사람임으로 예 사람이고, (2) 타락하여 파상되었고 또 부패한 인간성임으로 옛 사람이라고 하였다. "벗어버리고", 이는 낡은 의복을 벗어 버리듯이 모든 죄들을 깨끗이 내어버리라는 말이다. 옛 사람을 벗어버리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옛 사람"이라고 할 때에 다만 몇 가지 단점들을 지적하는 것이 아니고 부패한 전인격(全人格)을 가리키는 것이니 만큼, 그것을 벗어버린다는 것은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는 것과 같은 어려운 일이다.(롬 6:6). 그러므로 자기의 힘만으로는 할 수 없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의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이다(2:5). 그렇다고 해서 사람의 노력이 필요치 않다는 것은 아니다. 노력은 그 노력하는 자의 소원의 진실성을 증명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것을 원하신다(시 51:6). 하나님의 은혜는 신자의 노력을 발생시키는 것이지 그로 하여금 게으르게 만드는 것이 아니다. 히 12:4 참조
엡 4:24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 이것을 개역하면 "하나님을 따라 참된 의와 참된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이라고 한다. 중생된 속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 같이 참된 의와 참된 성결을 소유하도록 성령님으로 새로 지으음을 받은 자이다.
엡 4:25
그런즉 - 이것은 17-24절의 말씀과 같이 복음을 듣고 거듭난(특별히 23절 참조)자들이 행할 윤리를 말해준다.
거짓을 버리고 - "거짓"은 다른 것이 아니고 사도 요한이 그 서신들 중에 말한 바와 같으니 주님을 아노라 하면서도 그 계명(서로 사랑하라는 계명 - 요 13:34)을 실행하지 않는 것이니, 곧 한 몸에 붙은 지체를 해함이다. 여기 "참된"이란 말은 22절의 "유혹의 욕심"이란 어귀의 "유혹"이란 말과 대조된다. "욕심"을 품은 자는 스스로 속으나, 하나님의 형상대로 된 의(義)와 성결은 참되어서 사람으로 하여금 그 바른 목적에 도달케 한다.
엡 4:26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 신자가 분을 내려면 그리스도의 거룩하신 의분(義憤)처럼(막 3:5) 무죄하게 할 것이고, 혈기난 악독의 폭발로 하지 말아야 되며 또 그분노를 연장하지 말아야 된다. 바울이 여기서 말한 것은 어떤 형편에서든지 분노는 용납되지 않는다는 스토아 철학의 교훈과 다르다(Lenski). 바울은 사람이 의분을 낼 수는 있다는 의미에서 "분을 내어도"라고 하였다.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 어두운 밤은 사람의 분을 조장시키는 때이므로 바울이 이렇게 말하였다는 벵겔(Bengel)의 해석(affectus noctu retentus alte insidet)은 적합해 보이지 않는다. 이 문구를 문자적으로 취급하지 말아야 할 것은, 1년의 4분지 3에 해당되는 긴 시산 동안 빛을 보지 못하는 그린랜드(Greenland)사람들에게는 해당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말씀을 읽으면서 깨달을 것은, 분노한 사람은 그 분노를 연장시키지 말고 당일로 그 분노를 풀고 화평스러워져야 한다는 것이다. 분노는 시간이 오래 지날수록 악독한 발생시킬 우려가 있는 것이니 그것을 속히 단절해야 된다. 인간은 연약하여 악독에게 그 심신이 감염되면 선악을 분별하지 못할 위험에 빠져 드디어 구타와 살인의 악행까지 감행하게 된다.
엡 4:27
마귀로 틈을 타지 못하게 하라 - 이것은 해 지도록 분노를 품지 말라는 말씀의 이유 문구이다. 분노를 오랫동안 품고 있으면 그 틈을 타서 마귀가 활동을 개시한다. 마귀는 항상 우리의 약해지는 기회를 엿보고 있다가 달려들어 우리를 넘어뜨리려는 간교한 놈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저 간교한 놈이 늘 우리의 곁에 따르고 있음을 영안(靈眼)으로 보고 주의하며 경성해야 된다.
엡 4:28
도적질하지 말고 - "도적"은 여러가지가 있으니, (1) 강탈하는 도적, (2) 절도하는 도적, (2) 사기(詐欺)하는 도적 등이다. 그리고 도적 당하는 것은 여러가지니, 물질, 명예, 권리 등이다. 도적은 첫째, 자기가 자신을 부양할 책임을 하지 않고, 둘째, 가난한 자를 구제할 상부상조의 책임을 못하고 도리어 사회를 해하는 자이다.
빈궁한 자에게 구제할 것이 있기 위하여 제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 - 이 마씀은 신자가 수고롭게 일할 목적을 보여준다. 사람들은 보통으로 자기들의 생계(生計)를 위하여 노동한다. 그러나 남을 나 자신처럼 사랑해야 되는 그리스도의 교훈(마 22:39)으로 사는 신자들의 노동 목적은 위대하다. 그것은 남들을 구제할 것을 앞세운다. 그들의 노동 목적이 진리이고 또 위대한 것이니만큼 그들은 수고하면서도 기뻐할 만하다.
엡 4:29
더러운 말은...내지 말고, - 이것은 모든 악담(惡談)이나 음담(淫談)같은 것을 엄금함이니 곧, 교회의 건덕상(建德上)해로운 언사를 금함이다. 야고보는 악용되는 혀가 우리의 지체들 중 어느 것보다 크게 사람들에게 해독을 끼친다고 말하였다.(약 3:1-12).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 - 여기 이른 바 "덕을 세운다"는 말은 단체, 특별히 교회를 유익하게 함을 가리킨다. 그리고 "소용되는 대로"란 말은 '요구되는'이란 뜻이니, 덕을 세울 기회에 요청되는 선한 말을 하라는 것이다. 잠 25:11에 말하기를, "경우에 합당한 말은 아로새긴 은쟁반에 금사과니라"고 하였다. "은혜를 끼치게 함"은 신자 자신이 남들에게 은혜를 준다는 의미는 아니다. 다만 그가 선한 것을 말할 때에 하나님이 역사하셔서 은혜를 끼치게 되는 것뿐이다.
엡 4:30
헬라 원문에는 이 귀절 초두에 "또", 혹은"그리하여"란 말(* )로 시작하여 말 조심의 목적을 가르친다.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 이 말씀을 보면, 성령께서 신자의 속에 계셔서 그를 사랑하시며 역사하시는 사실이 알려진다. 신자가 괴오를 범하면 성령은 근심하신다. 약 4:5에 성령께서는 이스라엘이 배은 망덕할 때에도 근심하였다(사 63:10).
구속의 날까지 - "구속의 날"은 주님의 재림 때에 신자들이 부활함으로 구원이 완성될 날을 가리킨다. 그 때가 이르기까지 보증하는 인장처럼 우리에게 구원 확신을 주시는 이가 성령이신데 우리가 그를 근심시키면 우리의 확신을 주시는 이가 성령이신데 우리가 그를 근심시키면 우리의 확신이 약해지고 영력도 감축될 우려가 있다.
인치심을 받았느니라 - 곧, 하나님께서 신자에게 성령을 주신 것은 최후까지 그의 구원을 보장하기 위하여 인친 것 같다는 것이다. 그 비유가 성립되는 이유는, (1)그의 받은 성령이 그에게 믿음을 주셨을 뿐 아니라 확신도 주실 수 있기 때문이며(3:16), (2)그의 받은 성령이 마침내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기 때문이다(롬 8:11)
엡 4:31
악독 - 이것은 일종의 불친절을 가리키는데 기분이나 말이나 행동에 있어서 독소를 풍기는 것이다. 이것은 이 아래 기록된 분노를 나타나기도 한다.
노함과 분냄 - 헬라 원문의 순서는 "분냄과 노함"으로 되어있다. 어떤 학설에 말하기를, "분냄"은 속에서 불타듯이 일어나는 것이고, "노함"은 표면에 나타낸 것이니, 분은 노를 발생케하는 원인이 된다고 한다.
떠드는 것과 훼방하는 것 - "떠드는 것"은 위의 분냄과 노함이 노골화하여 쟁론 상태에 들어간 것이고, "훼방"은 남과 명예를 손상시키는 모욕적 언사이다. 이것은 "떠드는 것"의 결과이다. 사람을 훼방하는 자는 동시에 하나님께 대하여 호의 없는 심리를 가지게 되기 쉬우므로 위험하다. 그런데 위의 모든 죄악들은 서로 원인 결과의 관계를 가지고 점층식(漸層式)으로 확대되어 나타난다. "악독"에서 "분냄", "분냄"에서 "노함","노함"에서 "떠드는 것","떠드는 것"에서 "훼방"으로 확대된 것이다. 이처럼 죄는 작은 것에서 큰 것으로 나아가는 경향을 가졌으니 만큼, 그것이 작을 때에 이겨야지 커지면 누를 수 없게 된다.
악의와 함께 버리고 - 여기에 "악의"는 별도로 특기되었으니 그 이유는, 이것이 위에 기록된 모든 죄악들의 뿌리가 되기 때문이다. "악의"는 남을 해하려는 독심(毒心)이다.
엡 4:32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 "인자하게"함은 호의적으로 남에게 행함이니 각박함에 반대되는 것이다. 이것은 그 아랫말인 "불쌍히 여김"(내부에서 솟아오르는 긍휼)에서 나오는 것이니, 이 두 가지는 서로 원인 결과의 관계를 가진다. "용서"하라는 것은 서로서로 죄를 용서하라는 것이니, 이 일은 신자들이 그리스도를 모본해서 은혜로 행할 수 있다. 벵겔(Bengel)은 말하기를, "우리를 정죄할 수 있는 최대의 이유를 가지신 이는 그리스도이다"라고 하였다. 그런데도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용서하셨다. 이 용서하는 일은 누구든지 행하지 아니하면 자기 자신이 손해를 당한다. 아무리 "내"가 옳다고 해도 남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하나님께서도 "나"를 용서하시지 않으신다(마 6:1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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