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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전 9:1
   내가 자유자가 아니냐 사도가 아니냐 예수 우리 주를 보지 못하였느냐  주  안에서 행한 나의 일이 너희가 아니냐. - 여기 "자유자"라는 것은, 율법의 모든 의식의  속박에서 방면(放免)된 자라는 뜻이다. 바울은, 모든 다른 기독자들과 같이 의식적 속박에서 방면된 것인만큼, 물질과 외형(外形)에 속하는 법규들의 제재를 받지 않을  수  있다. "사도가 아니냐"라는 말씀은, 바울의 받은 직위(職位)가 보통 교역자가 아니고 단회성(單回性)있는 사도라는 것이다. 사도는 구약의 선지직(先知職) 수준에 병행(竝行)하는 신약의 기초직(基礎職)이다. 하나님께서 기독교 복음을 전하심에 있어서  특수한 직분을 세우시고 그들을 통하여 만민에게 말씀을 전하도록 하셨으니 그것이  사도직이다. 그들은 (1) 그리스도 사건(事件) 곧,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사신 것을 확실성 있게 목격(目擊)한 자들이다. 겸하여 (2) 성신의 특수한 은혜를 받아서 그들이  목도(目睹)한 그 사건을 전하되 전연 실수 없이 하도록 한 것이다. 누구든지 그들의  복음 전파를 통하여, 친히 눈으로 본 것 이상 확신을 가지도록 된다. 그 이유는 위에 말한 바와 같이 사도들은 그리스도 사건을 그대로 전하도록 역사적  사실(歷史的事實)에 충분히 접촉하였고 또한 성령의 특수한 은혜를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은, 사도들의 전파한 그리스도 사건 곧, 신약의 케뤽마(*             )에 접촉하기만 하면 하나님의 기쁘신 뜻대로 역사하시는 성령에 의하여 구원받는 믿음을 얻도록 되어 있다.
   "예수 우리 주를 보지 못하였느냐." 이것은 바울이 환상으로 주를 보았다 함이  아니고 부활하신 주님이 친히 그에게 나타나신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주님의  부활하신 것을 친히 목도한 것은 모든 사도들의 자격을 성립시키는 중요한 조건이다.  주님께서 다시 살아나신 후에 사도들에게 나타나셨으나 그들이 처음에는 의심하였다. 그러나 그가 40일 동안이나 긴 세월을 다방면(多方面)으로 나타나셨으니만큼 그들의 의심은  다 깨어지고 필경 견고한 신앙에 이르게 되었다.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그들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게 하신 목적은, 기독교의 출발이 어떤 사상(思想)이 아니고  사건(곧 그리스도 사건)임을 성힙시키려는 데 있다. 기독교는 사색(思索)의 운동이 아니고 그리스도 사건을 그대로 전파하여 그저 그 사건을 믿는 자마다 구원을 받도록 하는 것이다. 구원은 그리스도 사건에 대한 예언이고 신약은 그 예언대로 이루어진 사건을 설명하는 하나님 말씀이다. 바울이 이렇게 다시 사신 주님을 친히 보았다고 할 때에, 그 자신이 사도의 반열에 참여한 사실을 확증한다.
   "주 안에서 행한 나의 일이 너희가 아니냐." 주 안에서 행하였다는 말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복음을 전파한 것을 이름이니 이렇게 복음을 전파한 결과로 고린도  교회의 신자들이 존재하게 된 것이다. 바울은 이 말을 하여, 고린도 교인들로 하여금 그의 사도직의 확실성을 의심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바울이 이렇게 말한 것은 위사(僞師)들의 미혹을 받고 있었던(고후 10:2) 고린도 교인들에게 적절(適切)한 것이다.
  내가 내 임의로 이것을 행하면 상을 얻으려니와 임의로 아니한다 할지라도 나는 직분을 맡았노라. - 바울이 자기 사명 아닌 것을 자진하여서 행한 경우에 상이 있을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 직분을 받은 때문에 하는 일이라고하면, 상 받을 이유가  없다는 뜻이다. 여기서 상이란 말은 보수를 의미한다. "임으로 아니한다 할지라도"라는 말은, 차라리 "임의로 아니하는 경우면"이라고 함이 더욱 뜻을 용이(容易)하게 밝힌다. 바울은 여기서 생각한 대로 교역자가 하나님 앞에서 복음 전도의 사명을 받은 것인만큼 그것을 실행함에 있어서 보수를 기대하는 심리에 속박되어서는 안 될 것을 가르친다. 그는 보수를 받을 수는 있다. 그러나 그것은 별도로 취급될 일이다. 그의 일하는 심리는 다만 하나님이 주신 소명감(召命感)에서 움직여야 된다.

 고전 9:2
 다른 사람들에게는 내가 사도가 아닐지라도 너희에게는 사도니 나의  사도됨을  주 안에서 인친 것이 너희라. - 본절에서도 바울은 자기가 사도인  사실을  역설(力說)한다. "나의 사도됨을 주 안에서 인친 것이 너희라"라는 말씀이 역시, 이론보다도  사실로써 그의 논제를 확증한다.

 고전 9:3-6
  나를 힐문하는 자들에게 발명할 것이 이것이니 우리가 먹고 마시는 권이  없겠느냐 우리가 다른 사도들과 주의 형제들과 게바와 같이 자매된 아내를 데리고 다닐 권이 없겠느냐 어찌 나와 바나바만 일하지 아니할 권이 없겠느냐... - 여기서 바울은 자기 사도직의 권위를 깎으려는 위사들의 힐문을 파괴시킨다. 이 점에 있어서, 그는 다른  사도들과 마찬가지로 권위를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쓸만 한 자유도 쓰지 않게 된  이유를 설명한다. 특별히 "먹고 마시는 권" 곧, 월급 받을 수 있는 권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 권리를 사용하지 않는다고 말하기 위하여 여기서 그경위(經緯)를 밝힌다. 그는 가정 생활을 가지지 않음으로 생활을 단순하게 하여 자급 전도(自給傳道)를 힘썼는데, 그가 그렇게 한 것은 하나님의 일군으로 생활비를 받을만한 권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한 것이다. 그는 바나바도 같은 원리로 일하였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고전 9:7-10
  바울은 여기서 일군이 생활비를 받는 것이 합당하다는 의미로 여러 가지  실례들을 들어 말한다. 곧, 병정, 포도원에서 일하는 자, 양떼를 기르는 자 등이다.  그는,  이 사실을 율법의 말씀대로 더욱 견고히 증명하기 위하여 신 25:4을  인용하고  타작하는 소를 들어 말하였다. 그리고 그는 이 율법의 말씀이 복음 전도자들을 가리켰다는 의미에서 "밭가는 자" "타작하는 자" 등의 실례(實例)를 들었다. 바울은 이상의 실례를 들어 전도자인 자기도 보수(報酬)를 받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전도자로서 인간 상대로 어떤 보수를 부채(負債)와 같이 지운 것처럼 생각하고 사람에게서 그것을 어디까지든지 요구하여야 된다는 말씀은 아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복음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고도 하셨다. 그러니만큼 전도자가 보수를  요구할 데는 하나님 밖에 없다.

 고전 9:11
 우리가 너희에게 신령한 것을 뿌렸은즉 너희 육신의 것을 거두기로 과하다  하겠느냐. - 신령한 것은 육신의 것보다 무한히 중요하다. 그 이유는, 신령한  것은  영생을 주는 것이요 육신의 것은 잠간되는 이 세상에서만 유효한 것이기 때문이다. 물질을 가지고 복음 운동에 수종드는 것은 하나님께서 명하신 것이고 또 기뻐하시는  일이다(롬 15:27; 갈 6:6; 빌 4:10-18 참조).

 고전 9:12
  다른 이들도 너희에게 이런 권을 가졌거든 하물며 우리일까보냐 그러나 우리가  이 권을 쓰지 아니하고 범사에 참는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아무 장애가 없게 하려 함이로라. - 여기 이른바 "우리가 이 권을 쓰지 아니하고"란 말씀은 바울이  당연히  받을 보수를 받지 아니하였다는 것인데, 그가 이렇게 하기 위하여서는 친수(親手)로 수고하여 (1) 자기의 생활뿐 아니라 동역자들의 생활도 당하였으며(행 20:34),  (2)  그렇게 하여 약한 교회에 누(累)를 끼치지 않도록 힘썼다(고후 11:9). 이것을 보면, 그의  자급전도(自給傳道)의 목적은 교회에서 권세를 쓰려는 데 있지 않고 남들과 자기를 도우려는 데 있었다. 교계에는 종종 자급 전도자들이 일어난다. 그러나  그들이  교회에서 주는 봉급을 받지 않는다는 심산(心算)에서 권세 있게 교인들을 대할  때는  은혜되지 않는다. 하나님의 은혜는 권세 부리는 자리에 임하지 않고 언제든지 미천하여진  자와 업신여김이 된 자와 버젓한 심리를 가지지 못하는 자에게 더욱 풍성히 임한다. 바울의 자급 전도는 거의 이와 같은 미천한 자리(그가 흔히 말한 대로 연약한  것)를  보존한 때문에 자신의 은혜를 많이 받았고 교회에는 유익을 주었다. 그의 자급  전도야  말로
"그리스도의 복음에 아무 장애가 없게 하려 함"에 유조(有助)하였다(고전  9:12  하반절). 그러나 위에 벌써 말한 바와 같이 사람이 자급 전도를 하면서 그 교역 생활에 있어서 당당한 자세를 취한다면, 그것은 도리어 십자가를 지는 생활에서 멀어지게  만든다. 이렇게 될 바에는, 차라리 교회에서 봉급을 받고 때로는 이와 같이 주고 받는  관계에 있어서 미안한 생각도 가지며 따라서 하나님 앞에서 자기 사역의 효과를  반성하며 때로는 이 점에 있어서 주는 자들 측에서 자세(藉勢)하는 기쁘지 않은 일도 당하면서 겸손히 하나님 앞에 찾아 나가는 생활이 오히려 은혜되는 것이다.   "아무 장애가 없게 하려함." 그 때에 위사(僞師)들이 물질을 탐하여 교계에 돌아다니는 일이 있어서 바울 자신으로서는 이 점에 교훈을 주기 위하여 자급 전도의 처세를 한 것이다. 그의 자급 전도의 또 한 가지 목적은 그 때에 교회에 폐를 끼치지  않으려는 데 있었다.
   만일 바울이 그 때에 보수를 받았더라면 위사들에게 공연한 비평을 받았을지도  모른다. 곧, 그가 물질을 탐한다는 비평을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물질  문제에 있어서 어디까지든지 청렴하였고 비평거리를 만들지 않음에 있어서  만전(萬全)을  기(期)하였다. 교회 역사상에 모범적 교역자들은 모두 다 물질 문제에 있어서  청백하였다. 어거스틴은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복음 운동에 이바지하였고 모든 다른 교역자들과 나누었다. 칼빈은 일평생 빈한(貧寒)한 생활을 하였고 물질을 탐하지 않은데  있어서 명백하였다. 그렇게 때문에 그의 원수들도 이 점에 대하여서는 증명하였다.

 고전 9:13.14
  성전의 일을 하는 이들은 성전에서 나는 것을 먹으며 제단을 모시는 이들은 제단과 함께 나누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이와 같이 주께서도 복음 전하는 자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명하셨느니라. - 위의 두 귀절을보면 구약의  제사장에  해당한 직분이 신약의 교역자 인듯이 오해되기 쉽다. 그러나사도 바울이 의미한 바는 그런 것이 아니다. 신약시대의 성직은 구약 시대의 제사장직에 해당한 것이 아니다. 촬스하지(Charles Hodge)는 그의 조직신학 제2권 p.467-468에, 신약 시대의 성직이 구약  시대의 제사장에 해당한 것이 아니라는 의미에서 다음과 같이 논하였따. (1)  "제사장이란 말 히에류스(*           )가 신약 교역자에게 대하여 한 번도 쓰인 적이  없다.  (2) 구약의 제사장이 하는 일이 신약의 성직자들에게는 속하지 않는다. 구약의 제사장들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仲保)하는 역할을 하였으나, 신약의 사역자들은 우리의 죄를 위하여 제물을 드려주는 것과 같은 사역을 하는 일이 전연 없다. 신약의  교직자들이 남들을 위하여 기도하는 일은 있으나 그런 일은 일반 신자들도 하도록 되어  있다.
(3) 모든 신자들은 교직자들과 꼭 마찬가지로 그리스도만을  경유하여(즉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나갈 수 있으며 열납(悅納)될 수 있다. 신약  시대에도  신자들이 다른 사람의 중개(仲介)를 통하여 비로소 하나님께 열납된다 하면 그것은 신약 성경의 명백한 교훈을 어기는 잘못이다"라고 하였다. 신약 시대의 제사장은, 대 제사자가으로서는 하늘에 계신 예수님 밖에 없고, 일반 제사장으로서는 모든 신자들이  다  거기에 해당한다(벧전 2:9). 그렇다면 이 두 귀절에 있는 대로, 양 시대(兩時代)의  사역자들 사이의 유비(類比)는 그 직제(職制)의 위치(位置)에 대한 것이 아니고, 다만  양자(兩者)가 수고한 결과로써 각각 보수를 받는 점만은 서로 같다는 것이다. 구약 시대에 성전의 일을 본 제사장들이 그 제물에서 분깃을 취한 일에 대하여는 레 7:6, 14, 28-36, 10:12-15에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신약 시대의 사역자들이 그 수고의 보수를 받는 것이 마땅하다는 말씀은 마 10:10에 기록되어 있다. 본절에 "주께서도 복음 전하는 자들
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하셨다는 것은, 전도자가 인간들의 손에서 받을 보수를 기대하는 생각으로 일하라는 의미는 아니다. 마 10:8에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고 하셨다. 복음을 전하는 사람 자신도 그 귀한 복음을 하나님에게서 거저  받았으니 어찌 그것을 남에게 팔아 먹으랴? 그것은 인류가 공동으로 받아진  유산(遺産)이니 그것을 먼저 받은 자가 남들에게 돌려 주어야 할 무서운 책임을 졌다는 것은  상식으로도 알려지는 사실이다. 인류에게 주신 공동 유산을 어찌 자기의 사적(私的)  소유에 가두어 둘 것인가? 특별히 복음은 주님께서 그의 백성을 위하여 죽으신 사실을  전파하는 것인데, 그 사실을 알고 있는 자가 주님이 위하여 죽으신  백성들에게  대하여 어찌 그 사실을 말하지 아니하고 침묵을 지킬 수 있으랴? 만일 그러한 침묵을  지키는 자가 있다면, 그는 저주를 받아 마땅하다. 그러므로 전도자는 복음을  전하는  처지에 있어서, 인간의 손에서 보수를 너무 기대하는 생각이 없어야 된다. 그는 하나님에게서 갚음을 받을 자이다.

 고전 9:15
  그러나 내가 이것을 하나도 쓰지 아니하였고 또 이 말을 쓰는 것은 내게 이같이 하여 달라는 것이 아니라 내가 차라리 죽을지언정... 누구든지 내 자랑하는  것을  헛된 데로 돌리지 못하게 하리라. - 여기 이른바 "내가 이것을 하나도 쓰지  아니하였다"는 말씀은, 그가 복음 전한 수고에 대한 보수 받을 권리를 사용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여기 특별히 "하나도"라는 말은, 이 사실을 더욱 강하게 표현하여 그런  권리를  사용한 일이 전연 없다는 것을 말하여 준다.
   "이 말을 쓰는 것은 내게 이같이 하여 달라는 것이 아니라." 곧, 바울이 위에 말한 대로 복음을 위하여 수고하는 자가 보수를 받는 것이 마땅하다는 의미로 쓴 것은,  그가 그렇게 의사(意思)를 발표하여 고린도 교인들로 하여금 보수를 주도록 하려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이다. 그는 보수를 받지 않으려는 결심이 언제나 공고(鞏固)하였다.  그럿은 이 아랫말이 더욱 명백히 보여 준다. 곧, "내가 차라리 죽을지언정"이라는  말씀이다. 그가 이와 같이 보수를 받지 않기 위하여 죽음의 각오까지 하였다는 것은  얼핏 보면 과장(誇張)하는 말 같기도 하고 혹은 그런 지엽 문제(枝葉問題)로  인하여  너무 과도한 생각을 가진 듯이도 보인다. 그러나 그때 그 교회의 사정과 형편을 생각할  때에 바울로서는 보수를 받는 것이 그의 사역에 있어서 지장이 될번 하였다. 그  이유는 그대의 위사(僞師)들이 바울을 어떤 모양으로든지 트집잡아 사도로서의 위신을 깎으려는 운동에 맹렬하였기 때문이다. 바울은 어디까지든지 자기의 복음 전도에 털끝만치라도 손해를 받지 않으려고 하였다. 그는 그만큼 복음을 사랑하였다.  그가  말한  대로 "죽을지언정"이라고 한 것은 복음을 위한 심각한 표현이고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다. 바울은 복음을 위하는 일이라면 대소(大小)를 가리지 않고 일사(一死)를 각오하였던 것이다. 그는 그만큼 복음을 사랑하였다.
   "죽을지언정... 누구든지 내 자랑하는 것을 헛된 데로 돌리지 못하게 하히라."  여
기 우리 한역에 점선(點線)은, 이때까지 해석가들이 똑바로 번역하기  어렵게  생각한 말을 번역할 수 없어서 그냥 지나간 표이다. 우리가 그것을 번역하지  못한다고  하여 이 문장에 표시된 큰 뜻이 손해를 보는 것은 아니다. 이 문장이 보여주는 큰 뜻은, 바울이 죽을지언정 위사들 앞에서 가질 수 있는 그의 자랑거리(교만한 자랑은 아니고 다만 그들의 탐심있는 처신 원리와 정 반대인 자급 전도)를 그대로 지니겠다는 뜻이다.

 고전 9:16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이로라. - 바울의 복음 전도는 하나님 앞에서 받은 사명감에서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므로 그것은 자랑할 바는 되지 못한다고  한다.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이 말뜻은, 바울이 복음 전도를 하지 않을 수 없도록 매였다는 뜻이니 곧, 하나님 앞에서 사명을 받은 것만큼 그것을 피하면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는 것이니 화를 받을 수 밖에 없다. 요나도 니느웨로 가라는 소명(召命)을  받았으나 그 명령을 어기고 다시스로 가다가 뱃사람들의 손으로 말미암아 바다에 던짐이 되어 물고기 뱃속에 들어가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면 복음을 전하지 않는 것이 이렇게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순종하지 않은 죄 때문에만 화를 받을 것인가? 그런 것이  아니다. 기독신자들마다 하나님에게서 거저 받은 복음을 모든 불신자들에게  거저  주어야 할 처지에 있다. 그것을 남들에게 나누어 주지 않으면 인류에게 공동적으로 주어진 구원의 기쁜 소식을 감추는 죄가 있다. 이런 의미에서 기독 신자는 누구든지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화를 받을 수 밖에 없다.
   "내게 화가 있을 것임이로다". "화"란 것은 사람에게서 받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에게서 받게 되는 재앙을 의미한다. 따라서 그것을 당하게 된 자는 피할 수  없는  것이다.(왕상 12:25-13:29;렘 48:10;사 56:9-12참조).

 고전 9:18
  그런즉 내 상이 무엇이냐 내가 복음을 전할 때에 값 없이 전하고 복음으로  인하여 내게 있는 권을 다 쓰지 아니하는 이것이로라. - 바울은 여기서 자기의 복음 전한  결과로 받을 물질적 보수가 기대되지 않는다는 것을 역설하면서 말하기를, 자기로서  받을 상(보수)이 있다면 그것은 자급 전도하면서 권(權)을 쓰지 않는 생활 그  자체라고 한다. 그는 이렇게 말하여 그의 자급 전도 생활이 얼마나 그에게 자랑거리(교만한  자랑은 아님)라는 것을 확연하게 내세운다. 이것을 보면 교역자들로서 언제나  명심하여야 될 것이, 주님의 복음 사역이 잘 되어 나감과 또는 자기의 희생이  확실성에  대한 것이다. 바울이 자급 전도하므로 복음 사역을 잘 되게 하는 점, 또는 자기로서는 희생을 행한다는 점, 이 두 가지가  기쁜 사실들이었다. 주님의 종은 그 어떠한  모양으로든지 복음이 열매 있게 전파된다는 것을 기뻐한다(빌 1:18). 그뿐 아니라 그는 주님의 일을 위하여 자기로서는 희생을 당한다는 것을 최고의 즐거움으로  삼는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관제와 같이 벌써 내가 부음이 되고"라고 하면서 복음  전하는
생활에 있어서 자기로서는 최후까지 희생이 되는 것을 기뻐하였다(딤후 4:6;롬  9:3참조).

 고전 9:19,20
  내가 모든 사라멩게 자유하였으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유대인들에게는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나 율법아래  있는  자 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 여기서 바울이,  여러  종류의 사람을 복음으로 인도하기 위하여 취한 처세 원리를 보여준다. 그는,  형편과  사정이 다른 모든 사람들과 연합하기 위하여 최가능한 한(限) 양보와  교류(交流)에  힘썼다. 물론 그가 이렇게 하는 것은 복음을 위반하거나 죄를 범하는 일이 되지 않는 범위  안에서 한 것이다.
   "내가 모든 사람에게 자유하였으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사는 자로서 정죄에 해방되었으니 만큼, 세상 사람들에게 아무런  속박받을 일이 없었다. 그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에게만 종이었으니 만큼,  그는  인류에게 종이 될 필요는 없었다.  그러나 그가 하나님의 종이 되었다는 것은,  결국  하나님이 명하신 대로 모든 사람들을 주께로 인도하여야 될 사명 아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는 이 사명을 완수하기 위하여 모든 사람의 종이 되지 아니치 못하였다. 사람을  주께로 인도하는 것은, 권력으로 하는 것이 아니고 희생으로만 되는 일이니 그 일을  하려는 자는 감심으로 모든 사람의 종이 되지 않을 수 없다. 이렇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아들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본보기로 나타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을 자기의 백성으로 삼기 위하여 종의 형상을 입으셨다(빌 2:6-11).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 있는 자 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여기 이른바 유대인이란 것은  무엇을 의미하며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유대인"이란 것은, 구약 시대에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유대인을 이름이니, 그리스도 오신때에 복음을 가지고 먼저 그들을 찾은 것이 바울의 순서였다. 롬 1:16의 이와같은 순서가 언제나 지켜야 할 철칙은  아니나,  그리스도에게 대한 예언을 받은 그들로부터 시작하여복음을 이방에 전개 시키는 것은   효과적(效果的)이 아니라고 할 수 없다. 바울은 유대인의 마음을 얻기 위하여서라도, 그 전도  여행에 있어서 어디를 가든지 먼저 회당을 찾았고 유대인을 찾았다.   그리고  다음으로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이란 것은, 복음이 세상에 나타난 사도 시대에도  아직껏  모세 율법의 의식(儀式)을 주장하는 자들이 있었던 것을 생각케 한다. 저들이 주장하는  의식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취된 것인 만큼 신약 시대에 이르러서 그것을  그대로 지킬 필요는 없다(히 9:10). 신약 시대에는 그런 것을 성취된 형태(形態) 곧,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영적으로 지켜진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믿는  자로서도  모세 율법의  의식(儀式)과 제도를 그대로 지킬 필요는 없다. 그러나 바울의  시대에  어떤 유대인 기독자들 중에서 이런 의식적 법규들을 가지고 기독자가 지켜야 한다도 주장하는 것인 만큼, 바울은 저들의 그런 주장 앞에서도 필요에 의하여 양보한 때가 있었다.  이 원리에 의지하여 그가 디모데를 할례하였으나 디도는 할례하지 않았다.   또  그는 어떤 때에 결례를 지킨 일도 있었다(행 21:17-26).
   바울의 이와 같은 행동은 결코 외식이 아니고 사고 방식(思考方式)이 다소 다른 신자들과의 연합을 끊지 않으려는 사랑의 고충(苦衷)에서 그리 한 것 뿐이다. 그뿐 아니라 우리 본문이 말한 대로는, "얻고자"하는 것이 그 목적이었으니 여기서는 특별히 그들을 그리스도에게 인도하기 위한 목적을 내포한다.

 고전 9:21
  율법 없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아래 있는 자나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  - 여기 이른바 "율법 없는 자"란 말은, 이방인을 가리킨다.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  있었으므로 복음적 원리에 의하여(율법주의 자들의 주장하는 의식을 따르는 자가 아님) 율법을 지키는 자였다. 그런데 그가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때가 있은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그가 이방인의 풍속이나 도덕이 죄악이 아닌 한(限)에 있어서  거기에 참여하게 된 생활을 가리킬 것이다(갈 2:11-21). 그가 이방인들로  더불어  이렇게 장벽없이 교류(交流)하지 않으면 심령상 교제로야 되어지는 복음 전파가 유력하게  될 수 없었다.

고전 9:22
  약한 자들에게는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여러 사람에게 내가 여러 모양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몇 사람들을 구원코자 함이니. - 여기서 "약한 자들"이란 것은, 로마서 14장에 관설된대로 진리 지식에있어서 구속(球束)의 효과를 충분히 누리도록 하는 복음대로 사물(事物)을 취급하지 못하는 자들을 가리킨다. 그들의 사고 방식(思考方式)의 약한 점이 죄라고 할 수 없다. 그들이 그렇게 사색하는 것은, 다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려는 양심 때문이니 그들은 그 양심대로 행하는 것이유익하다. 그러나 바울은 그들과 다소 다른 점이 있으면서도 그들의 양심을 위하여 자기 생활을 조종(操縱)하는 때가 있었다.   

 고전 9:23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예 하고자 함이라. - 바울은  불신자에게 복음을 전하는 자이니만큼, 위에 말한 것은, 전도자로서 많은 사람을 주님께로 인도하려는 것이 그 목적이라고 하였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여기(23절) 와서는 바울이 이때까지 전도자로서 취한 처세 원리(處世原理)가 자기로서 친히 복음에  참예(구원에 참예함)하기 위함이라고 한다. 이것은 얼핏 보면 전후(前後)가 모순된 듯하다. 그러나 전도자는 두 가지 동기(動機)의 지배(支配)를 받는다. 하나는 그의  전도로  말미암아 다른 사람들을 주님께 인도하려는 동기요, 다른 하나는 그 전도 행위에  의하여  자기 자신의 영이 살려는 동기이다. 전도자 자신이 영적으로 사는데 관계없는 직업적인  또는 기계적인 전도 행위는 남들을 구원하는 효과를 내지 못한다.  

 고전 9:24
   운동장에서 달음질 하는 자들이 다 달아날지라도 오직 상 얻는 자는  하나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얻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 - 여기서 바울은  헬라의 알렉산더 대왕 이후 헬라 각처에 풍속이 되어 있었던 경주회(競走會)를  염두에  두고 신앙 생활을 비유한 것이다. 신앙 생활을 경주에 비유한 것은 신약 다른 부분에도  있으니 히 12:1-4;빌 3:10-14;딤후 4:7,2:5 등이다. 이 모든 말씀들을 보면  경주  하는 자가 법대로 하여야 된다는 것, 푯대를 향하여 달음질 하여야 된다는 것, 승리한 사람들이 앞서 가서 지금 구름과 같이 많은 수효로 하늘에 있다는 것 등을 생각하게 한다. 여기서는, 특별히 상을 얻는 자가 전수가 아니고 합격(合格)된 자 뿐이라는 것이 역설되어있다.  여기 이른바 "하나"라는 수효가 이 비유의 요점은 아니다. 물론 신령한 세계에 있어서 구원을 향하여 달음질하는 자들 중에 구원의 상급을 받을 자가 하나 뿐이라는 의미를, 이 비유가 가르치지 않는다.   

 고전 9:25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저희는 썩을 면류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 이 비유에 있어서 이긴다는 것은, 다른 사람과 대항하여 이긴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고 보이지 아니하는 사단의 권세를 대항하여 이기는 것을 가르쳤다는 것이 그 요점이다. 여기 "절제"한다는 말 뜻은  극기(克己)를 의미 하는데, 그때에 경주자들이 경주를 앞두고 미리부터 음식을 먹는데 있어서나  잠자는데 있어서 일정한 규칙을 지키며 특별히 향락 생활을 제지(制止)하였다. 그와  마찬가지로 기독자의 승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달려 있는 것이 아니고 인간편에서는  자기 자신에게 달려 있는 것이니 그는 무슨 일에 있어서나 수원 수구(誰怨誰咎)로  다만 주님이 주시는 힘을 구하여 받아가지고 극기(克己)하는 데 힘써야 될 것이다. 그의 극기 생활은, 결단코 이교도(異敎徒)들이 가지는 소망 없는 고행주의 생활(苦行主義  生活)이 아니고 즐거움으로 주님의 계명을 지키도록 되어지며 또한 영원히 썩지  아니할
상급을 향하여 기쁘게 움직여 질 극기 생활이다. 바울이 이 비유에서  특별히  고조한 것은, 이 세상 사람들이 썩을 것을 구하기 위하여서도 모든 고생을 하며 달음질  하는데 하물며 썩지 않을 영생의 상급을 위하여서는 얼마나 더욱 고생하며 힘써야 될 것을 가르치는데 있다.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이 썩을 것을 위하여는 죽기까지 한다.

 고전 9:26
 그러므로 내가 달음질 하기를 향방 없는 것 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느
것 같이 아니하여. - 여기서는 바울이 확실하지 않게 신앙 생활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신앙 생활의 목적물(目的物)이 되는 구원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확실케 하셨으니 영원히 썩지도 아니하고 변치도 아니하는 것이다. 그러나 신자 자신이  그와 같은 견고한 구원을 목표함에 있어서 확실치 못하고 아직도 이 세상 것들을  애착하여 부동(浮動)하여 그 눈을 땅 끝에 둘 때에(즉 모든 허욕으로 움직일 때), 그는 실상 주여 주여 하지만, "방향 없이" 헛되이 행하는 자이다. 신앙 생활은 먼저 일정한 방향으로 생활을 단순화(單純化)하여 진실되이 정결하게(따라서 유력하게)움직이는 데서  비로소 성과(成果)를 거둔다.
   바울은 이 귀절에 있어서 신자를 군인(軍人)에 비유한다. 그것도 신약 성경이 다른데서도 취한 표현법이다(딤후 2:4;엡 6:10-17;딤후 4:7;계  17:14,19:11-16).  신자가 이 세상에 처하여 있는 것은 접전 중(接戰中)에 있는 군사와 같다. 그는 대기하고  있는 병사(兵士)가 아니다. 그는 물론 재향 군인(在鄕軍人)도 아니다. 그 이유는 이세상은 바로 하나님과 사단과의 사이에 일어난 전쟁 마당이기 때문이다. 이  전쟁  마당에 있어서 완충지대(緩衝地帶)는 전연 없다. 하나님과 사단 사이에는 인간이  취할  만한 중간 처지가 없다.전쟁 마당에는 중간 처지(中間處地)라는 것이 전연 없다. 전쟁 마당에 있는 자는 생사(生死)를 결단하는 결심으로 어느 한 편에 속하여 싸워야 된다.
   바울은 자기의 이와 같은 처지를 각성하고 마땅히 공격할  대상을  명중(命中)시켜 싸웠으니 그것은 곧 자기 몸을 쳐 복종시킴이다.
   
 고전 9:27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라. - 여기 이른바, "몸을 쳐 복종하게"한다는 것은, 몸 자체가  죄가 되는 까닭이 아니다. 인간의 부패성과 또는 마귀가 우리의 몸을 충동시켜 죄를 범하도록 하는 것인 만큼, 결국 신자는 자기몸을 제지(制止)시켜야 된다. "쳐 복종하게"  한다는 것은 구타(毆打)하거나 파상(破傷)시킴을 의미하지 않고 다만 지배(支配)하며 견제(牽制)하는 행위를 비유하는 말 뿐이다. 이렇게 몸을 쳐 복종 시키는 일은,  인간이 자발적(自發的)으로 자기의 사상이나 행동을 잘 통솔(統率)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하나님이 주시는 고난 밑에서 그 몸을 복종 시켜 성화  생활(聖化生活)에  전진(前進)함을 의미하기도 한다(시 119:67,71 참조). 그러나 바울이 여기서 주요하게 생각한 것은, 신자가 주님이 주시는 능력을 통하여 자기의 악한 생각의 충동을 죽이며 견제하여야 된다는 것이다.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 이  말씀  뜻은,
얼핏보면, 성경에 분명히 가르친 성도의 궁극적 구제(Perserverance of saints)의  도리, 곧, 하나님의 택한 자가 끝까지 구원받게 된다는 교리를 위반하는 것 같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물론, 예수님이나 바울이 가르친대로, 택한 백성은 복음을 들어 거듭날 수  밖에  없고  거듭난  자는  영원히  구원에서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요 10:28-29;롬 8:30). 그러나 성도의 궁극적 구원을 포함하는 구원 계획  때문에 기독자가 방심(放心)하는 것은 아니다. 기독자는 구원에서 떨어질까 두려워하는심정을  그의 인격 구성의 요소로 가진다. 하나님께서는 신자를 그렇게 만들어 죄를 멀리하게  하며 방심 하지 않게 하셨다.  이렇게 두려워 떨며 방심하지 않고 힘쓰는 자에게만 실상 확신과 희열을 가지도록 경륜하셨다. 주님을 두려워 하는 자가 실상 모든  참된  확신의 은혜를 받게 되는 것이다. 모든 방종스러운 자들은 하나님의 영적 사역(靈的  使役)을 받지 못하고 그 중심에 확신도 가지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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