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1
내가 참 포도 나무요 - 이 비유의 핵심은 이것이다. 곧 우리가 그리스도에게 접붙
혀져 그에게서 새롭고 다른 힘을 끌어 들이기 전에는 우리는 본래 열매를 맺지 못하는
마른 나무에 불과하다는 뜻이다. 나도 다른 사람들을 따라서 (암펠로스)를 포도나무(vitis)로 (클
래마타)를 가지(palmites)로 번역한다.
그리고 바이티스(vitis)는 포도나무가 있는 밭(vinea)이 아니라 나무 자체로 보는 것
이 옳다. 물론 이것이 경우에 따라서는 vinea로 쓰이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 이러한
예를 우리는 키케로의 '빈민들의 소작지와 조그만 포도밭'(pauperum agellos et
viticulas)이라는 말에서 찾아 볼 수 있다. 팔미테스(palmites)는 그 나무의 땅위로
뻗는 가지다. 그러나 (클래미)가 '포도나무'를 의미하고 (암아로스)가 포도원을 의미하는 경우
도 더러 있으므로 나는 여기서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포도나무가 심겨진 밭에, 우리를 이 포도
나무들에 비유하고 있다고 보는 의견을
따르고 싶다. 하지만 이 문제를 가지고 누구하고 토론을 벌이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다. 독자들은 문맥에 따라서 더 가능한 쪽을 택하기 바란다.
먼저 생각할 것은 모든 비유에서 우리가 지켜야 하는 원칙이다. 우리는 포도나무의
특성을 낱낱히 조사할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이 비유에 적용하시는 목적을 일반적
으로 생각하는 데서 그치는 것이 마땅하다. 여기에는 세가지 주요 부분이 있다. 첫째,
우리에게는 그에게서 오는 능력을 제외하고는 선을 행할 능력이 전혀 없다. 둘째, 우
리가 그에게 우리의 뿌리를 박고 있을 때 아버지께서는 우리를 전지(剪枝)하시며 키우
신다. 셋째, 그는 열매맺지 않는 가지를 제거하셔서 그것을 불에 던지고 태워 버리신
다.
모든 선한 것이 하나님에게서 온다는 점을 뻔뻔스럽게 부정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나 인간들은 그들에게 허락되는 보편적인 은혜(universalem gratiam)가 마치 그들
에게 본래부터 있었던 것으로 상상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이 중요한
수액(sap)은 자신에게서만 흘러 나온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여기서 인간의 본성에
는 열매가 없으며 모든 선이 결핍되어 있다는 결론이 나온다. 이것은 인간이 그 안에
접붙혀지기 전에는 그에게 포도나무의 본성이 없다는 이야기다. 따라서 이것은 특별
은혜를 (speciali gratia)통해서 선택 받은 자들에게만 허용된다. 그러므로 우리를 그
의 손으로 심어 주시며 모든 축복을 내려 주시는 주(主)이신 아버지이시다. 또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뿌리를 박기 시작한다는 점에서 볼 때 생명의 시작은 그리스도 안에
서 비롯된다.
그는 자신을 참 포도나무로 부르고 있는데 이것은, "내가 정말로 그 포도나무다. 그
러므로 다른 곳에서 힘을 찾으려 하는 것은 헛수고 일 뿐이다. 쓸만한 열매는 나 외에
다른 무엇을 통해서도 맺어질 수 없다"고 하는 말씀과 같다.
15;2
무릇......가지는 - 열매맺지 않는 가지는 모두 나무에서 제거될 것이라는 말씀으
로 그리스도께서는 불안을 조성하고 있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더럽히는 사람들
이 있는가 하면, 그것을 악의적으로 억제하거나 태만으로 그것을 질식하게 만드는 사
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서 그리스도 안에 접붙혀진 사람이 열매를 맺지 못
할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을 제기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나의 대답은 이것이다. 곧
사람 보기에는 포도나무 안에 있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이 많지만 실제로는 포도나무
에 뿌리를 박지 못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여호와께서는 여러 선지자들을 통해서 이스
라엘 백성을 그의 포도나무라고 부르고 있는데 이것은 외형적으로는 그들이 교회의 이
름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무릇 과실을 맺는 가지는 - 이 말씀으로 그는 신자들이 타락하지 않으려면 계속적인
재배를 받아야 하며 하나님께서 항상 같이 계셔서 일하지 않을 경우에는 아무 열매도
맺지 못한다는 점을 가르치고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계속 은혜를 베풀지 않을 경
우에는 우리가 입양의 참여자가 되는 것만 가지고는 충분하지 못하다. 전지하는 문제
가 여기에 언급되고 있는 것은 우리의 육신은 필요 없는 것들, 해악스러운 것들로 가
득할 뿐 아니라 그 분야에 있어서는 비옥하며 우리가 하나님의 손에 의해서 깨끗하게
되지 않는다면 이 모든 것이 한없이 뻗어 나가고 말기 때문이다. 열매를 더 풍성하게
맺기 위해서는 포도나무들이 전지를 받아야 한다는 말씀으로써 그는 경건한 사람들의
경건한 생활에 있어서 어떠한 진전이 필요한가를 가르쳐 주시고 있다.
15;3
너희는......이미 깨끗하였으니 - 이것은 그들이 이미 그의 말씀하신 바를 체험했
다는 말이다. 그들은 그분 안에 심겨졌으며 또한 깨끗하게 되었다. 그는 여기서 청결
의 방법으로써 가르침을 지시하고 있다. 그는 그들이 그의 입에서 직접 들은 말씀을
명백히 언급하고 있는데 여기서 우리는 그가 틀림없이 외적인 전도를 두고 말씀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이것은 인간의 입에서 나오는 음성 그 자체에 그만한
효력이 있다는 뜻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성령에 의해서 마음에 작용하시기 때문이
다. 곧 우리의 음성 그 자체는 청결케 하는 도구이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의도는 사도
들이 모든 죄악으로부터 자유롭다는 뜻이 아니다. 그는 그들의 체험을 그들에게 제시
함으로써 거기서 은혜의 지속이 얼마나 필요한가 하는 점을 그들로 하여금 깨닫게 하
고 있다. 그는 또한 은혜의 열매로서의 복음의 가르침을 강조함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이 은혜를 계속적으로 생각하도록 하고 있는데 그것은 이 은혜는 마치 불결한 것을 청
결케 하는 정원사의 칼과 같기 때문이다.
15:4
내 안에 거하라 - 그리스도는 다시 제자들에게 그들이 부여받은 은혜를 지키는 데
정성과 열심을 품을 것을 권하고 있다. 이것은 육신에 대한 격려에 끝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의도는 암탉이 병아리를 날개 아래 품듯이 우리를 보호해서 우
리가 무관심에 이끌려 가거나 파멸의 길로 덤벼드는 것을 막는데 있다. 그러므로 그리
스도는 그가 도중에서 그만 두려고 우리의 구원을 시작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입증하
는 뜻에서 우리가 성령을 훼방하지 않는 한 이 성령이 항상 우리 안에서 감화를 끼칠
것이라는 점을 약속하고 있다. "내 안에 머물러 있거라, 나도 너희들 안에 머물러 있
도록 하겠다"하고 그는 말씀하신다. 그리고 그는 "저가 내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
실을 많이 맺나니"하는 말씀을 계속하고 있다. 이 말씀으로 그는 그에게 산 뿌리를 박
고 있는 사람은 모두 열매가 풍성한 자들이라는 점을 선언하고 있다.
15:5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 - 이것이 전체 비유의 결론과 응
용이다. 우리가 그에게서 떠나 있는 한 하나님께 기쁨이 되는 선한 열매를 맺을 수 없
는 것은, 우리에게는 도무지 선한 일을 할 자질이 없기 때문이다. 로마 가톨릭에서는
이 말씀을 약화할 뿐 아니라 그 의미를 완전히 배제하고 만다. 아니, 그들은 그것을
아예 기피하고 만다. 왜냐하면 비록 그들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떠나서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점은 인정하지만, 그것 자체로서는 부족해도 하나님의 은혜의 도움을 받을
경우에는 여기에 협조할 수 있는 그러한 기능(faculty)이 우리에게 있다는 몽상을 펴
기 때문이다. 인간은 너무 무능하기 때문에 스스로는 아무 것도 기여할 수 없다는 사
실을 그들은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말씀의 내용은 너무도 명백하기 때
문에 우리는 그 사실을 그렇게 쉽게 기피할 수 없다. 가톨릭의 착상을 종합하자면 이
것이다. 곧 우리가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지만, 그러나 우리가 그의
도움을 받을 경우 그의 은혜말고 우리 자신 속에 뭔가 가능성이 있다는 말이다. 그러
나 그리스도께서는 정반대로 우리 스스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선언하고
있다. "가지가 절로(스스로는)과실을-전혀-맺을 수 없다"고 그는 말씀하고 있다. 그러
므로 그리스도는 단지 그의 은혜의 협조를 극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오지
않는 모든 능력은 우리에게서 완전히 배제하고 있다. 따라서 '나를 떠나서'라는 말은
'나에게서 나온 것이 아닐 경우에는'하는 뜻이다.
여기에 또 다른 잘못된 소리를 덧붙이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접목하는 가지 자체
가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것이라면, 그것이 포도나무에 접붙혀진다 해도 아무 열매도
맺지 못할 것이라는 점을 생각할 때 그 가지 자체에 타고 난 무엇이 있다는 식으로 변
론한다. 그러나 여기에 대한 대답은 간단하다. 그리스도께서는 포도나무에 접붙여지기
이전의 가지에 대해서는 관심을 표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에게 연합될 때
비로소 우리는 가지가 되기 시작한다는 뜻으로 말씀하고 있다. 사실 성경은 우리가 그
안에 있기 전에는 무용하고 마른 장작에 지나지 않는 존재라는 점을 여러 곳에서 우리
에게 제시하고 있다.
15:6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 그는 또 배은망덕의 처벌에 그들의 관심을 기
울이시면서 그들로 하여금 인내할 것을 자극하며 격려하고 있다. 이 인내야말로 하나
님에게서 오는 선물이지만 여기에 두려워 하라는 권고가 필요한 것은 우리의 반역적인
육신은 우리를 뿌리째 뽑아 버리고 말 그러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에게서 잘리워 나간 사람들이 '시들어서' 썩은 장작처럼 되고 마는 것은 처
음 기운이 그에게서 올 뿐 아니라 그것의 끊임없는 지속 또한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것은 선택받은 자들이 하나라도 끊어져 나간다는 뜻은 아니다. 그러나 이 세상
에는 잠시 동안은 그럴듯하게 잎이 무성하며 또 풀잎이 만발하지만, 후에 정작 열매를
맺어야 할 시기에 가서는 주님의 소망을 꺾고 마는 위선자들이 많다.
15:7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 신자들은 종종 자신들이 풍성한 열매를 내는 풍부한 자
양분과 거리가 멀다고 생각하는 가운데 빈곤한 것처럼 여길 때가 있다. 그러기에, "그
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이 무엇을 필요로 하든 그들이 그것을 하나님에게서 구하기만
한다면 그들의 빈곤에 대한 대비책은 언제고 마련되어 있다"하는 말씀이 덧붙여지고
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기도에 대한 열성을 훈련시키시려고 종종 허리띠를 졸라
매게 하시는 경우가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것은 아주 유익한 교훈이 아닐 수 없다.
우리가 그에게 속히 닥아가기만 한다면 우리는 결코 우리의 구하는 바에 대해서 궁핍
을 느끼지 않을 것이요, 그는 우리의 모든 필요를 그의 무궁한 보고에서 충당해주실
것이다(고전1:5).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 이 말씀은, 우리가 신앙으로 그의 안에 뿌리를 박고 있
으면, 하는 뜻이다. 우리는 복음의 가르침에서 떠나는 순간 그리스도를 다른 곳에서
찾는 셈이다. 우리의 모든 소원을 들어 주시겠다는 약속은 우리의 무절제한 요청을 다
들어 주신다는 뜻은 아니다. 인간들이 얼마나 어리석은 욕망에 빠지고 마는가 하는 점
을 생각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요구 사항을 그처럼 쉽고 풍성하게 양보하신다면 그
는 우리의 구원을 잘못 관리하는 셈이 되고 말 것이다. 그러기에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백성의 소원을 하나님의 뜻에 복종시키는 올바른 기도의 원칙에 제한하고 있다. 그의
백성은 육신이 어리석게 열망하는 부와 영광, 그리고 이와 같은 것을 원하지(will)않
고 열매를 내는 성령의 진액(vital sap)을 원한다는 것이 본문의 의도이므로 앞서의
주장은 문맥의 확증을 받고 있다.
15:8
너희가 과실을 많이 맺으면 - 이것은 앞 문장의 확증이다. 곧 그는 여기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백성이 결실을 맺기를 바라는 기도는 하나님을 크게 영화롭게 하는다
것임으로 들어주시고 만다는 점을 의심하지 않도록 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목
적 내지는 결과를 통해서 그들의 마음 속에 선을 행하려는 욕망을 불어 넣어 주고 있
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이름이 우리를 통해서 영화롭게 되는 것보다 더 귀한 것이 우리
에게 또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너희가 내 제자가 되리라 - 이 귀절도 동일한 내용이다. 곧 그의 양무리 가운데는
하나님에게 영광이 되는 열매를 맺지 않는 자가 아무도 없다는 점을 그는 밝히 선언하
고 있다.
15:9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 그는 보통 이상의 뛰어난 사상을 표현하고자
하셨다. 여기서 그는 성부 하나님께서 항상 성자에 대해서 가졌던 은밀한 사랑을 이야
기 하고 있다고 상상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것은 요점을 벗어난 논리다. 그보다는 우
리의 가슴에 우리에 대한 신령한 사랑의 확실한 담보를 놓아 두는 것이 그리스도의 의
도였다. 그러므로 성부께서 항상 성자 안에서 자신을 사랑하셨다는 교묘한 생각은 이
귀절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 여기에 언급되고 있는 사랑은 우리에 대한 사랑으로 보아
야 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께서 자기를 교회의 머리로서 사랑하고 있다
는 점을 선언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사실은 우리에게 아주 필요한 것이다. 중보자를
떠나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자 하는 자는 심연에 빠진 나머지 올바른 길은 고사하고
출구도 찾지 못하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령한 사랑의 담보되시는 그리스도
만을 바라 보아야겠다. 하나님의 사랑이 그에게 완전히 쏟아진 것은 그것이 그를 통해
서 그의 지체에게 흘러 넘치게 하려는 뜻에서였다. 그는 이미 아버지께서 기뻐하시는
사랑하는 아들이라는 명칭을 일찌기 받은 바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목적을, 곧 하나
님께서 그를 통해서 우리를 기쁘게 받으시려는 뜻에서 그에게 그런 명칭을 허용하셨다
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그 안에서, 마치 거울을 통해서 보듯, 우리가 하
나님의 우리 모두에 대한 부성애를 볼 수 있는 것은 그가 따로 사랑을 받거나 자신의
유익만을 위한 사랑을 받는 것이 아니고 그가 우리와 그를 아버지에게 연합하려는 뜻
에서 사랑을 받기 때문이다.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 어떤 사람들은 여기서 그리스도께서 그의 제자들에게 사랑
을 요구하는 것으로 해석한다. 이것을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적극적으로 보는 사람들의
견해가 오히려 더 낫다. 그는 그가 일단 우리를 감싸주신 그 사랑을 우리가 계속적으
로 누릴 것을 원하고 있으며 그러기에 이것을 박탈당하지 말것을 경고하고 있다. 이것
은 자신들에게 제공된 은혜를 저버리는 자들이 많고 그들의 손에 한번 쥐어졌던 것을
내던지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일단 그리스도의 은혜에 받아들여
지고 나면 우리는 우리 자신의 실수때문에 거기서 떨어져 나가는 일이 없도록 주의해
야겠다.
어떤 사람들은 어리석게도 여기서 우리의 인내의 뒷받침이 없는 한 하나님의 은혜는
효력을 발휘하지 못한다는 주장을 끌어낸다. 나는 성령께서 우리에게 우리가 할 수 있
는 일만 요청하는 것으로 생각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우리가 당연히 해야 할 일을 요
구하는 가운데 우리에게 힘이 모자랄 경우에는 그것을 다른 곳에서 구해야 한다는 점
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께서는 여기서 우리에게 인내할 것을
권고하고 있는데 우리는 우리 자신의 노력이나 활동에 의존할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이런 명령을 주시는 분에게 우리를 그의 사랑 안에 확고히 세워 주십사 하고 기도해야
한다.
15:10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한 것같이 -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 받았기
때문에 우리의 부리심에 대한 생생한 형상이 그를 통해서 우리에게 제시되고 있다. 그
러므로 그가 자신을 여기서 귀감으로 내세워서 모든 경건한 자들로 하여금 그것을 본
받게 하고 있는 것은 정당하다. 그의 말씀의 요지는, "내가 너희들에게 요구하는 것과
비슷한 예가 나를 통해서 비취고 있다. 너희들이 보는대로 나는 아버지에게 순종하는
일과 이 길을 지키는 일에 전념하고 있지 않느냐? 그도 또한 나를 사랑하셨다. 그러나
그의 나에 대한 사랑은 순간적이거나 잠정적인 것이 아니라 끊임이 없이 지속되는 그
러한 사랑이다"하는 뜻이다. 신자들은 항상 머리와 지체 간의 이 일치를 명심해야 하
는 가운데 그리스도의 귀감을 따르도록 노력할 뿐 아니라 그의 성령을 통해서 보다 더
나은 생활을 향해 날마다 새롭게 되어질 것을 믿고 끝까지 생명의 새로움 가운데 살아
갈 수 있어야겠다.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 그는 여기서 그의 부르심을 따라 가는데 있어서 어떻게
우리가 인내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을 보여 주시고 있다. 바울이 말한 대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육신을 좇지 않고 영을 좇아"(롬8:4) 행하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리스
도의 값없는 사랑을 깨닫는 믿음과 선한 양심 및 새로운 생명은 언제고 같이 묶여 있
다. 참으로 그리스도께서 신자들을 아버지에게 화해시키는 것은 그들이 벌을 받지 않
고 방종하게 하려는 뜻에서가 아니라, 그들을 그의 영에 의해 다스리심으로써 그들을
그의 아버지의 손길과 지배 아래 두려는 뜻에서이다. 여기서 진정한 순종을 통해서 자
신들이 그리스도의 제자라는 점을 입증하는 자들이 아니고서는 모두 그의 사랑을 배척
하고 있는 셈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이것은 우리의 구원의 확실성을 우리 자신에게 달린 것으로 보는 것이 아니냐"하고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나는 그리스도의 말씀에서 이러한 견해를 끌어내는 것은 잘
못이라고 대답하겠다. 신자들이 그에게 드리는 순종은 그가 그의 사랑을 그들에게 지
속하는 원인이라기 보다는 그의 사랑의 결과이다. 그들이 그들의 양자됨에 반응을 보
이는 것은 거저 베푸신 입양의 영이 그들을 활동하게 하기 때문이 아니고 무엇이겠는
가?
우리가 천사의 순결성을 부여받지 않는 한 그리스도의 사랑은 우리에게 무용지물이
아니냐 하는 생각이 들 수 있다는 점을 감안할 경우 글자 그대로 우리의 역량을 초과
하는 완전한 의를 필요로 하는 그리스도의 계명 준수하는 조건이 우리에게 부과된 것
은 너무도 가혹한 것으로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해결책은 간단하다. 그리스도께서는
선하고 거룩한 생활을 살려는 마음을 말씀하시면서 그의 가르침에서 핵심적인 조항,
곧 의의 값없는 전가(imputation)를 결코 배제하지 않고 있다. 우리의 임무 자체로서
는 불완전하고 불결한 것으로 배척을 받아 마땅하지만 사죄를 통한 이 전가가 있기 때
문에 우리의 임무는 하나님에게 기쁨이 된다. 그러므로 신자들이 그리스도의 계명에
전념할 때, 비록 그들이 그들의 목표에 훨씬 미달한다 해도, 계명을 지키는 것으로 간
주된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은, 신자들이 율법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는 엄격한 율법으로 부터 해방되어 있기 때문이다.
15:11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 경건한 자들이 신앙으로 그의 사랑을 깨닫는 가운
데 마음의 복된 평안을 누리기 전에는 그의 사랑이 그들에게 전혀 알려지고 있지 않은
것이나 다름 없다는 점을 그는 여기서 덧붙이고 있다. 그것은 그가 여기서 언급하는
기쁨은 거저 의롭다 함을 받은 모든 자들이 하나님과 함께 누리는 평안에서 우러나오
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 선포될 때마다 우리는 우
리에게 진정한 기쁨의 바탕이 허용되고 있으며 여기에 따라 평안한 마음으로 우리는
우리의 구원을 확실할 수 있다는 점을 명심하도록 하자. 여기서 이 기쁨이 그리스도의
것이면서 또한 우리의 것으로 이야기 되고 있는데 이것은 각각 다른 의미에서이다. 그
것이 그리스도의 것인 이유는 그가 그것의 저자와 원인으로서 그것을 우리에게 주시기
때문이다. 내가 그리스도를 가리켜 이 기쁨의 원인이라고 부르는 것은 우리의 평화에
대한 징계가 그에게 부과되었을 때 우리는 죄책으로부터 자유롭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를 가리켜 이 기쁨의 주(主)라고 부르는 것은 그의 영에 의해서 우리 마음의
공포와 불안을 파괴하시며 여기서 평화스러운 기쁨이 나오기 때문이다. 그것이 우리의
것이라는 이야기는 다른 각도에서 하는 말이다. 우리가 그것을 누리는 것은 그것이 우
리에게 허락되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에게 기쁨이 있도록 하려는 뜻에
서 그가 이 말씀을 하셨다는 점을 밝히 선언하고 있는 만큼 이 말씀에서 혜택을 받는
자들은 안심하고 믿어도 좋은 그 무엇을 모두 소유하고 있는 셈이다.
'있어'(remain;머물러 있어)라는 말씀은 그가 말씀하는 기쁨이 순간적이거나 잠정적
인 것이 아니라 결코 사라지지 않을 그러한 것이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
도의 가르침에서 생사 간에 흘러 넘치는 구원의 보장을 찾을 수 있어야 겠다.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니라 - 그는 이 기쁨이 근본적이요 충만한 것이라는
점을 덧붙이고 있다. 이것은 신자들이 모든 슬픔에서 완전히 해방될 것이기 때문이 아
니라 기쁨의 바탕이 얼마나 뛰어나든지 어떤 공포와 불안과 슬픔도 그들을 결코 삼킬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자랑하도록 허락 받은 자들은 생명이나 죽
음이나, 그 어떠한 불행이 닥쳐 오더라도 그 슬픔을 이기고 승리하고 말 것이다.
15:12
내 계명은......이것이니라 - 우리는 마땅히 그리스도의 계명에 따라서 우리의 생
활의 방향을 세워야 하므로 먼저 우리는 그의 뜻, 곧 명령이 무엇인가를 이해하고 있
어야 한다. 그러므로 그는 앞에서 말씀하신 것을 다시 반복하고 있는데 그것은 무엇보
다도 신자들 서로 간에 사랑을 가꾸어 나가는 것을 그가 원하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경외가 순서상 먼저 오지만 그것에 대한 진정한 증거는 우리 이
웃에 대한 사랑이므로 그는 특별히 이 점을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앞에서는 일반적인
가르침을 따르는데 있어서 자신을 귀감으로 제시하셨듯이 여기서는 우리들이 특별히
따라야할 사랑에 있어서 자신을 본보기로 제시하고 있다. 이것은 그가 그의 모든 백성
을 보살피신 것은 그들로 하여금 서로 사랑하게 하려는 뜻에서 였기 때문이다. 그가
왜 이 귀절에서 불신자들을 사랑하는 문제에 대해서 전혀 언급을 하지 않는가 하는 점
은 이미 14장에서 설명한 바 있다.
15;13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 - 그리스도께서는 종종 우리의 구원에 대한 보장을
보다 더 잘 설명하는 뜻에서 자신의 사랑의 위대성을 말씀하신다. 그러나 여기서는 한
걸음 더 나가서 그의 본을 통해서 우리가 형제들을 열렬히 사랑하게 하고 있다. 하지
만 그는 양자를 하나로 묶는다. 곧 그는 우리가 그의 무한한 선하심을 믿음으로 깨닫
기를 원하실 뿐 아니라 다음으로 그는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우리들이 사랑하는 일에
힘쓸 것을 권유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 같
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고 말하고 있다(엡5:2). 하나님께서는 그의 독생자를 아끼지
않고 희생하심으로써 그가 우리의 구원에 대해서 얼마나 관심을 가지고 있는가 하는
점을 직접 증거하셨는데 이 방법이 아니고 그에게 더 최선의 방법이 따로 있었더라면
그는 말씀 한 마디나 간단한 소원으로 해낼 수도 있었을 것이다. 여기서 이 비길데 없
는 신령한 사랑에 의해 마음이 누구러지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들의 마음은 무쇠
나 돌멩이로 볼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화해하시기 전에는 원수들이었는데 어떻게 그가
그의 친구들을 위해서 죽었다고 볼 수 있겠는가 하는 질문이 제기될 수 있다. 곧 그는
그의 죽음의 희생제사를 통해서 우리의 죄악을 슬퍼하신 다음에야 하나님과 우리 사이
의 적대 관계를 철폐하셨다는 점을 생각하면 그렇다. 여기에 대한 대답은 제 3장에서
찾을 수 있다. 거기서 우리는 우리에 관한 한 그리스도의 죽음에 의해서 우리의 죄악
이 말소되기 전에는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 불화가 있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제시되었
던 은혜의 원인은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이었으며 이 사랑으로 그는 그의 원수들까지도
사랑하셨다는 점을 지적한 바 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께서는 이방인들(strangers)
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바치셨는데 이것은 그가 그들을 이미 사랑하셨기 때문이다. 그
렇지 않으면 그는 그들을 위해서 돌아가시지 않았을 것이다.
15;14
너희가......곧 나의 친구라 - 이것은 우리 자신의 무슨 공로에 의해서 이 큰 영
광을 얻는다는 뜻이 아니다. 그는 단지 그들에게 그가 우리에게 사랑을 베푸시고 우리
를 그의 친구로 삼아주시는 조건을 상기시켜 주고 있을 뿐이다. 그는 앞에서 이미 "너
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안에 거하리라"는 말씀을 하셨다. 또 "우리 구주 하나
님의 은혜가 나타나서 우리로 하여금 불경건과 세속적인 욕정을 부정하고 이 세상에서
검소하고 의롭고 경건하게 살 것(딛2:11)을 가르치셨다". 그러나 불경건한 자들은 복
음을 사악하게 멸시하는 가운데 그리스도에게 반기를 들고 있으며 그의 우정을 배척하
고 있다.
15:15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 그는 친구간에는 친밀한 의사 소통
이 있기 마련이듯이 그의 마음을 그들에게 충분하게 열어 제쳐놓으셨다는 점을 이야기
함으로써 제자들에 대한 그의 사랑을 나타내고 있다. 그의 말씀의 내용은, "나는 인간
들이 통상 그들의 종들을 상대로 하는 것보다 훨씬 더 친근하게 너희들을 공손하게 다
루어 왔다. 그러므로 내가 아버지에게서 들은 하늘의 지혜의 비밀을 너희들에게 친절
하게 설명해 주었다는 이 사실을 나의 너희들에 대한 사랑의 표적으로 삼도록 하여라"
하는 뜻이다.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마음이 열려 있는 복음이 있어서 그의 사랑이 우리
에게 의심스럽거나 애매하지 않게 되었다는 사실은 얼마나 놀라운 일인지 모른다. 우
리는 우리의 구원에 대한 확실성을 알아보기 위해서 구름 위로 올라가거나 땅 속을 파
고 들어갈 필요가 없다. 우리 모두 복음에 담겨 있는 우리에 대한 그의 사랑의 증거로
만족하도록 하자. 복음은 우리를 속이는 일이 없다. 모세는 옛날 백성들에게, "하늘
아래 어떤 민족이 오늘날 하나님께서 너희들에게 말씀하시듯이 하나님을 가까이 모실
정도로 사랑을 받고 있느냐?"(신4:7)하고 말한 적이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의 아
들을 통해서 자신을 우리에게 완전히 허용하셨다는 이 점에서 우리의 영예는 더 높다.
따라서 복음의 놀라운 지혜로 만족하지 않고 교만의 열성을 쫓아 신기한 사상으로 날
아 가는 자들의 배은망덕과 사악은 그만큼 더 큰 것이다.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 물론 제자들은 그리스도가 알고 계셨던 것을 다
알고 있지는 않았으며, 그러한 수준에 다다를 수도 없었다. 하나님의 지혜는 불가해한
만큼 그리스도께서는 각자에게 그들의 지식의 분량에 따라 필요한 만큼의 것을 허용하
셨을 뿐이다. 그러면 왜 그는 그들에게 모든 것을 계시하셨다고 말씀하고 있는가? 나
는 이것이 중보자의 인격과 임무에 국한된다고 대답한다. 그가 자신의 위치를 하나님
과 우리 사이에 두시는 것은 그는 우리에게 낱낱히 전해 줄 것들을 하나님의 은밀한
성소에서 받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구원에 관계되고 우리가 알아서 유
익한 것 가운데 그 어느 것도 그의 제자들에게 가르치지 않으신 것이 없었다. 마찬가
지로 그는 교회의 유일한 지도자와 스승(Master and Teacher)으로 예정되셨던 만큼 그
가 아버지에게 들은 것 가운데 그의 제자들에게 충실하게 가르치지 않으신 것이 하나
도 없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겸손하게 배우려는 마음을 갖도록 하자. 그렇게 될 때
복음을 가리켜 인간을 완전하게 하는 지혜라고 부르는 바울의 말이 옳다는 점을 우리
는 깨닫게 될 것이다(골1:28).
15:16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 여기서 그는 그들이 그처럼 큰 영예를 받게 되는
것은 자신들의 공로가 아니라 그의 은혜 때문이라는 점을 보다 명백하게 표현하고 있
다. 곧 그들이 그리스도를 택하지 않았다는 말씀은 그들에게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
들 자신의 재주나 노력에 의해 얻어진 것이 아니라는 말이나 다름 없다. 흔히들 여기
에 하나님의 은혜와 인간의 의지 사이에 일정한 상호 작용이 있는 것으로들 생각하지
만 "내가 너희를 택한 것이지 내가 너희들의 선택을 받은 것이 아니다"하는 말씀은 통
상적으로 말하는 그와 인간의 구별이 그리스도에게만 완전하게 (in solidum) 적용되는
것으로 주장하고 있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인간에게 찾아오시기 전에는 자발적으
로 그를 찾을 생각을 않는다"하는 말씀과 같다.
물론 이것은 신자들을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시는 일반적인 선택이 아니라 그가 그의
제자들을 복음 전파의 임무에 예정하신 특별한 선택을 다루고 있다. 그러나 그들이 자
신들의 공로가 아니가 거저 사도직에 선택받았다면 진노의 자녀요 저주받은 후손인 우
리를 그의 영원한 상속으로 삼는 선택 역시 값없이 주신 것임에 틀림없다. 더우기 여
기서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을 사도로 선택한 그의 은혜와 그들을 교회의 몸으로 접붙여
준 이전의(earlier)선택을 서로 하나로 묶고 있다. 분명히 이 말씀에는 그가 그들에게
베푸신 모든 위엄이 포함되어 있다. 하지만 나는 그가 특별히 사도직을 두고 언급하고
있다는 점을 인정한다. 곧 여기서 그리스도의 의도는 제자들에게 그들의 임무를 적극
적으로 수행하도록 격려하는 것이다.
이 권고의 근거로서 그리스도는 그가 그들에게 베푸신 값없는 사랑을 들추어 말씀하
고 있는데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에게 빚진 것이 많으면 많을 수록 그만큼 더욱 더 열
렬하게 그가 우리에게서 요청하시는 임무를 수행하는 것이 마땅하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을 경우 우리는 천박하고 배은 망덕하다는 비난을 면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거룩하고 경건한 생활을 추구하도록 자극하는 데 있어서 우리의 모든 것은
하나님의 것이지 자신에게는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으며, 우리의 구원의 시작과 거기
에 따르는 모든 축복이 그의 값없이 베푸시는 자비에서 흘러 넘치고 있다는 점을 인정
하는 것보다 더 적절한 것도 없다는 사실이 명백하게 된 셈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이 말씀의 진실성을 우리는 그가 누구보다도 부적격한 자들을 사도로 선택하셨다는 사
실에서 명백하게 읽을 수 있다. 하지만 그는 그들을 통해서 그의 은혜에 대한 영원한
기념비를 세우고자 하셨다. 바울이 말하는 대로, 인간 가운데서 누가 하나님께서 인류
를 자신과 화해시키는 그러한 사신의 역할(embassy)을 수행하는 데 있어서 적격자일
수 있겠는가?(고후2:16). 아니, 어느 유한한 인간이 하나님을 대표할 수 있겠는가? 그
들을 그의 선택에 따라 적격자로 만드시는 분은 그리스도 뿐이다. 그러기에 바울은 자
신의 사도직을 은혜에서 나온 것으로 말하고 있다(롬1:5). 그리고 그는 또 그가 모태
로부터 구별되었다는 점도 선언하고 있다(갈1:15). 더 나아가서 우리는 모두가 무익한
종들인 만큼 다른 모든 사람들에 비해 더 없이 뛰어나 보이는 사람들이라도 그들이 먼
저 선택받기 전에는 가장 천한 소명도 감당할 수 없을 것이다. 누구든지 보다 더 높은
존귀를 받을 경우 그는 하나님에게 힘입은 바가 그만큼 더 많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
것이다.
......세웠나니 - 선택은 한 사람이 그가 이미 예정되어 있던 직무를 받을 때에야
비로서 나타난다. 앞에서 인용한 귀절에서 바울은 그가 모태로부터 구별되었다는 말을
하고 나서 그가 사도로 창조된 것은 하나님께서 그것을 기뻐하셨기 때문이라는 점을
덧붙이고 있다. 마찬가지로 여호와께서는 예레미야를 자신의 좋은 시기에 가서야 마침
내 예언자의 직무를 감당하도록 부르시면서도 그를 모태에 있기 전부터 알고 계셨다는
점을 증거하고 있다(렘1:5). 물론 가르칠 자격을 갖춘 사람이 이 직무를 받는 것도 사
실이다. 아니 아무도 미리 필요한 은사를 구비하기 전에는 부름 받지 않는다는 것이
교회의 질서의 일부다. 그리스도께서는 그가 이 양자의 원저자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하나님께서는 그를 통해서 행동하시고 그는 하나님과 함께 행동한다는 점을 생각하면
별로 놀라운 이야기가 아니다. 그러므로 선택과 소명은 똑같이 그리스도와 하나님에게
속한다.
이는 너희로 가서 - 그는 이제 왜 그의 은사를 언급했는가 하는 이유는, 곧 그들로
하여금 그들의 일에 더욱 더 열성을 보이게 하려는 뜻에서라는 점을 밝히고 있다. 사
도직은 무슨 한직(閑職)이 아니었다. 오히려 더 없이 큰 어려움을 당해야 할 그들이었
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이 숱한 수고와 당황 그리고 위험에서 물러 서지 않
도록 하는 뜻에서 채찍을 가하고 있다. 이것은 목적에서부터 이론을 전개하는 식이라
고 보겠다. 그러나 '과실을 맺게 하고'라는 말슴은 결과에서부터 이론을 전개하는 것
이다. 어느 누구도 자신의 수고가 열매를 맺을 것으로 생각하지 않고서는 그 일을 성
심성의껏 하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에게 순종하려는 마
음이 있는 한 그들의 노력은 허사로 끝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선언하고 있다. 곧 그
는 사도들에게 그들의 소명에 관련되는 것과 거기에 요청되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점
을 말씀하고 있을 뿐 아니라 그들이 냉담하거나 무기력하게 되지 않도록 하는 뜻에서
그들에게 성공을 약속하고 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종들이 오늘날 날마다 부딪치는
그 숱한 시련에 대해서 얼마나 큰 위로가 되는지 모른다. 그러므로 헛수고 하는 것만
같은 생각이 들 때마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마침내 우리의 노력이 결코 수포로 돌아
가지 않도록 도와 주실 것이라는 사실을 되새기도록 하자. 이 약속은 특별히 아무런
결실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그러한 때에 아주 적합하다. 우리의 현대 지성과 세상에
현명한 것처럼 보이는 자들은 우리의 노력을 하늘과 땅을 뒤섞으려는 공연하고 무분별
한 시도라고 하면서 비웃는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반대로 일의 보상이 잠시 동안
은 숨겨져 있지만. 꼭 따르고 말 것이라는 점을 약속하고 있는 만큼 우리 모두 세상의
조롱에 상관 없이 우리의 임무에 전력을 다하도록 하자.
여기서 그리스도께서는 왜 "너희 과실이 항상 있게 하여라"는 말로서 이 열매가 영
원할 것으로 선언하고 있는가 하는 질문이 제기될 수도 있다. 복음 전파가 뭇영혼들을
그리스도에게 이끌어 영원한 구원을 받게 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것을 이 열매의 영속
성으로 보는 사람들이 많을 수 있다. 그러나 나는 이 말씀을 교회가 세상 끝까지 지속
될 것이라는 뜻으로 확대 해석하고자 한다. 왜냐하면 사도들의 수고는 오늘날도 열매
를 맺고 있으며 우리의 전도는 한 세대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교회를 계속 증가시켜
가는 것이요 우리가 죽은 후에도 새로운 결과가 나타날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너희 과실'이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이것은 마치 그 열매가 그들 자신의 노력
에 의해서 얻어진 것처럼 말씀하고 있지만 바울은 물을 뿌리거나 심는 자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점을 밝히 말하고 있다(고전3:7). 물론 교회 창설의 영광을 인간의 것으로
돌리기에는 너무도 탁월한 하나님의 일이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의 능력을 인간들의
손을 빌어 나타내고 있는 만큼 그들이 헛수고 한 것으로 생각지 않도록 하는 뜻에서
그는 자신에게 특유한 것을 기쁘게 그들에게 양도하고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그
의 제자들을 이처럼 친절하게 높이 평가하시는 것은 그들을 격려하는 뜻에서이며 그들
로 하여금 교만하게 하려는 뜻에서가 아니라는 점을 우리는 명심해야 한다.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 이 귀절은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문맥과 무관한 귀절이 아니다. 가르치는 일이란 원래 인간의 능력을 능가하는 것인 만큼 사단으로부터 수 없이 공격을 받기 마련이요 이것은 하나님의 능력이 아니고서는 저지할 수 없다. 그러므로 사도들이 낙심하지 않도록 하는 뜻에서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에게 최선의 도움을 사전에 베푸시고 있다. 곧 그는, "그 일이 너희들에게 벅차서 임무를 성취할 수 없을지 모르지만 내 아버지께서 너희들을 실망시키지 않을 것이다. 나는 너희들을 복음의 사역자로 임명할 때 이미 너희들이 내 이름으로 아버지에게 도움을 청하면 언제고 그는 그의 손을 뻗치사 너희들에게 도움을 베푸시기로 보장이 되어 있다"하는 식으로 말씀하고 있다. 사실 대부분의 교사들이 나태한 가운데 뒷걸음질치거나 낙심하는 가운데 완전히 패배하고 마는 것은 그들이 기도의 임무에 소홀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약속은 우리로 하여금 계속해서 하나님에게 호소할 것을 권하고 있는데, 그것은 자신의 일의 결과가 하나님에게만 달려 있다는 점을 고백하는 자들만이 그 일을 그에게 두려운 마음으로 바칠 수 있기 때문이다. 대신 자신의 근면성만 믿고 하나님의 도움을 소홀히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막상 일에 부딪칠 때 창과 방패를 내던지거나 아무런 소득없이 그저 바쁘게만 돌아가는 그런 사람이 되고 말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두가지 잘못, 교만과 불신을 경계해야 겠다. 이 세상에는 스스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면서 하나님의 도움을 단호하게 무시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들이 하나님의 능력과 보호를 통해서 싸우고 있으며 그의 깃발을 들고서 전쟁에 임하고 있다는 점을 깊이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어려움을 당하면 굴복하고 마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15:17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명함은 - 사도들에게 무엇보다도 서로간의 사랑이 요청되고 있는 것은 그들로 하여금 진정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교회를 건설하게 하려는 뜻에서인데, 이것은 각자가 자신의 일만 하고 각 개인이 자신의 일을 공동체(common pool)에 가져오지 않는 것 보다 더 큰 장애물로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역자들이 서로 간에 형제로서의 교제를 키워 나가지 않을 경우 어떤 대집단을 세울 수는 있지만 그 집단은 뿔뿔이 흩어질 것이요 결코 교회(Church)가 세워질 수는 없다.
15:18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 그리스도께서는 사도들에게 전투 무장을 시킨 다음에 인내를 강조하고 있는데 이것은 복음이 전파될 경우 세상이 왈칵 뒤집혀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경건한 교사들이 세상의 증오를 피한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하다. 그리스도께서 이것을 미리 예고하시는 것은 전투가 발생했을 경우 그들이 풋나기 신병들처럼 원수를 보기도 전에 겁을 집어 먹는 일이 없도록 하려는 뜻에서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제자들에게 결코 새롭거나 예기치 않은 일이 발생할 것이 아니라는 점을 경고하면서 동시에 자신의 본을 통해서 그들을 확신시켜 주고 있다. 이것은 그가 세상의 미움을 받는데 그의 인격을 대표하는 우리는 세상의 총애를 받을 수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나는 (기노스케테)를 직설법으로 해석하는 편을 택하지만 명령법으로 보는 것도 반대하지 않는다. 어느 경우나 의미가 바뀌는 것은 아니다. 다음에 이어지는 단어가 더 어렵다. 곧 그가 제자들 보다 앞선다는 말은 시간에 대해서나 직위에 대해서 다 적용될 수 있다. 전자의 견해, 곧 그리스도께서 사도들 보다 먼저 세상의 미움을 받았다고 보는 견해가 더 지배적이다. 그러나 나는 혼자, 곧 그들보다 훨씬 뛰어나시는 그리스도께서 세상의 증오를 면할 수 없었으니 그의 사역자들 역시 동일한 운명을 거절하지 말아야 한다고 보는 견해를 택한다. 이것은 1장 27절과 30절에 있는 "내 뒤에 오는 사람이 나보다 앞선 것은 그가 내 앞에 계심이라"하는 말과 동일한 내용이다.
15:19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 그들이 세상의 미움을 받는 것은 그들이 거기서 구별되어 있기 때문이라는 사실은 또 다른 위로가 아닐 수 없다. 이것이야말로 그들의 진정한 행복과 영광이요 이것을 위해서 그들은 파멸에서 구출을 받았다.
'택하다'에는 '구별한다'는 뜻이 있다. 그들이 이 세상에서 선택을 받았다는 것은 그들이 이 세상의 일부였는데 하나님의 자비에 의해서 그들이 멸망 받은 나머지 사람들과 구별되고 있다는 결론이 나온다. 여기에 나타나나 그리스도께서 사용하시는 세상이란 하나님의 영으로 중생되지 않은 모두를 지칭하는 말이다. 제 17장에 가서 더 자세하게 볼 수 있겠지만 그는 여기서 교회와 세상을 대조하고 있다. 그러나 이 가르침이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하라"(롬12:8)는 바울의 권고와 모순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덧붙이는 말씀의 내용은 우리에게 올바르고 적합한 것이 무엇인가를 제대로 보는 가운데 아무도 세상을 기쁘게 하려 하거나 그것의 타락에 굴복하지 말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흔히 보는대로 세상의 일부인 악인들이 증오를 받을 뿐 아니라 저주를 받고 있으며 이런 면에서 사실 세상은 그 백성을 사랑하지 않고 있다는 식의 반론이 제기될 수도 있다. 나의 대답은 이것이다. 육적인 관점의 지배를 받고 있는 지상적인 사람들은 죄를 진정으로 증오할 수 없으며 오직 그들 자신에게 얼마나 편리한가, 아니면 손해를 끼치느냐에 따라서 그것을 처리할 뿐이다. 그리스도의 의도는 세상이 자체 내에서 서로 반란을 일으킨다는 뜻이 아니다. 그는 오직 세상이 신자들에게서 미워하는 것은 하나님에 관한 문제라는 점을 제시하고자 하셨을 뿐이다. 이 한 귀절에서 재세례파에서는 자기들이 대다수의 사람들의 미움을 받고 있다는 그 사실만으로 하나님의 종들이라는 결론을 내리는데 얼마나 어리석은 짓인지 모른다. 세상에 속한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가르침을 좋아하는 것은 그들은 뭐든지 혼란스러운 것을 좋아하기 때문이요, 세상에 속하지 않은 많은 사람들이 그가르침을 싫어하는 것은 그들이 정치적인 질서가 그대로 건전하게 남아 있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15:20
내가......한 말을 기억하라 - 이것도 "너희들은......기억하고 있다"하는 식의 직설법으로 읽을 수 있지만 의미상의 차이는 별로 없다. 그러나 내 생각에는 명령법이 더 나은 것 같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세상의 증오를 사는 것은 그가 그의 제자들에 비해 뛰어나기 때문이라는 말씀에 대한 확증이기도 하다. 종들의 상태가 그의 주인의 상태보다 더 나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사람들과 동시에 그의 가르침을 말씀하고 있는데 이것은 하나님에게 속하는 가르침이 인간들의 멸시를 받는 것을 보는 것보다 경건한 자들에게 더 큰 슬픔은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모습은 끔찍한 것이요 제 아무리 건장한 마음이라도 뒤흔들기에 충분한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 하나님의 아들 자신도 그에 못지 않은 오만의 저항을 받으셨다는 점을 생각하면 하나님의 가르침이 인간들에게서 존경을 받지 못하는 것을 볼 때 별로 놀랄 필요가 없다. 그는 이 가르침을 가리켜 그의 것이며 동시에 그들의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이것은 사역과 관계된다. 그리스도만이 교회의 유일한 스승이지만 그는 그가 처음 교사가 되어 가르치신 그의 가르침이 후에 사도들에 의해서 전파될 것이라는 뜻으로 말씀하고 있다.
15:21
그러나 사람들이......하리니 - 세상 사람들이 그들 자신의 구원을 위하여 복음을 전파하는 그 복음 자체에 대하여 그렇게도 맹렬한 분노로 대적하고 있는데, 그리스도께서는 그 이유를 사람들이 맹목적인 무지에 이끌려 파멸의 길을 달려가고 있기 때문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어느 누구도 고의적으로 하나님에게 반기를 들려 하는 사람은 없다. 그것은 세상이 하나님을 깨닫지 못하며 무지하기 때문에, 이 무지와 어리석음이 세상에 가득차서 그리스도께 대적하기를 주저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런 행동의 이유를 항상 명심하는 가운데 선한 양심의 증거에서 위로를 받아야겠다. 세상은 눈먼 가운데 멸망하고 말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그의 빛을 허용하셨다는 점에서 우리는 항상 감사한 마음을 가다듬어야 한다. 하지만 그리스도에 대한 증오는 우둔한 마음에서 생기며 그만큼 하나님은 알려지지 않은 그대로 남아 있다는 점을 우리는 이해해야겠다. 내가 자주 말한대로 불신앙은 맹목적(blind)이다. 이것은 불경건한 자들이 이해하지 못하거나 모르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에게 있는 지식이 혼잡하고 당장 사라지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 문제에 대해서 다른 곳에서 이어 충분하게 설명한 바 있다.
15:22
내가 와서......아니하였더면 - 유대인들이 복음을 미워한 것은 그들이 하나님을 모르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점을 그는 이미 지적한 바 있다. 그리고 여기서, 그는 이것 때문에 그들의 죄책이 가벼워지는 것으로 생각하지 못하도록, 그들은 마치 빛을 볼 수 밖에 없게 되자 눈을 감아 버린 사람들처럼 악의적으로 눈을 감고 있는 사람들이라는 점을 덧붙이고 있다. 그러나 여기에 대해서도 "그들이 당신의 아버지를 모르고 있다면 왜 그들의 무지를 치료하지 않는가? 그리고 당신은 그들이 아예 순응할 수 없는 사람들인지 아니면 가능한지를 왜 시험해 보지 않는가? 하는 질문이 그리스도에게 제기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스도의 대답은 이것이다. 곧 그가 선하고 신실한 교사의 직무를 수행했지만 그것이 그들에게 성공하지 못한것은 그들이 자신들의 악으로 인하여 올바른 마음을 지닐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더우기 그리스도께서는 이 사람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진리가 자신들에게 제공될 때 그것을 배척하거나 또 그것이 알려지게 될 때 거기에 자발적으로 반기를 드는 모든 사람들의 마음에 경종을 울려 주고자 하셨다. 그리고 하나님의 무서운 재앙이 이런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지만 그리스도께서는 여기서 그의 제자들을 바라보시면서 그들에게 승리에 대한 확신을 갖도록 격려하고 있는데 이것은 그들이 불경건한 자들의 악의 앞에서 굴복하지 않게 하려는 목적에서였다. 곧 우리에게 이러한 결과가 나올 것이라는 이야기를 듣는 것은 이미 전투 도중에 승리한 것이나 다름없는 말이다.
죄가 없었으려니와 - 그리스도께서는 이 말씀으로 그들에게 불신앙 이외에는 아무런 죄가 없다는 뜻을 비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또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더러 있다. 어거스틴도 조심스럽게 말하고 있지만 그의 견해도 이와 비슷하다. 곧 그는, 신앙은 모든 죄악을 용서하고 도말하는 만큼 정죄받는 유일한 죄는 불신앙이다 하는 식으로 말하고 있다. 불신앙이 인간으로 하여금 사망의 정죄에서 구원받지 못하도록 훼방을 놓을 뿐 아니라 모든 악의 샘과 원인이라는 점에서 볼 때 이 말은 옳다. 그러나 이 모든 추리는 본문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 왜냐하면 여기에 나타나 있는 '죄'라는 단어는 일반적인 의미로 쓰여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현재 여기서 문제 삼고 있는 주제와 관련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의 무지를 결코 핑계로 내세울 수 없는 것은 그들이 그를 통해서 하나님을 악하게 배척했기 때문이라는 식으로 말씀하고 있는데, 이것은 우리가 어떤 사람이 혐의 받아 오던 한가지 범죄를 용서할 경우 그를 가리켜 정직하고 의롭고 깨끗한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이나 다름 없다. 그들에 대한 그리스도의 용서가 한가지 죄악에만 국한되는 것은 그것 때문에 복음을 멸시하고 증오하는 유대인들의 무지에 대한 핑계가 제거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서,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전의 불신앙은 사람들을 정죄하기에 충분하지 않았는가 하는 질문이 또 제기된다. 어떤 광신자들은 이 귀절에서, 그리스도의 오심 전에 죽은 모든 사람들을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그들에게 계시하시기 전까지 신앙이 없었으며 의심 가운데 지내고 있었다는 잘못된 추리를 한다. 이것은 그들의 양심만으로 그들을 정죄하는 데 충분
하다는 성경 귀절이 수 없이 많은데도 이것을 무시하는 태도나 다름없다. 바울은 "사망이 모세 때까지 세상에서 왕노릇 하였다"(롬5:14)고 말하고 있다. 그는 또, "무릇 율법 없이 범죄한 자는 또한 율법 없이 망하고"(롬2:12)하는 말을 하고 있다. 그러면 그리스도의 의미는 무엇인가? 여기에 분명히 유대인들이 그들에게 제공된 생명을 알면서 고의적으로 배척했기 때문에 그들의 죄책을 더 이상 가볍게 이야기할 수 없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따라서 그리스도께서 그들에게 허용하는 핑계 때문에 그들의 죄가 완전히 용서 받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범죄의 심각성을 완화할 뿐이다. 이것은 "주인이 뜻을 알면서 그것을 무시하는 자는 더 심한 매를 맞을 것이다"라는 말씀 그대로다. 그리스도께서는 여기서 어떤 사람에게 용서를 약속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완고하게 배척한 그의 원수들을 정죄하는 가운데 그들에게 사면이나 자비의 여지가 추호도 없다는 점을 뚜렷하게 만들고 있을 뿐이다.
우리는 여기서 그는 그의 오심 자체만 놓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가르침과 관련해서 그것을 말씀하고 있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곧 그들의 죄책이 그의 육체적 임재에만 관련된 것이라면 그렇게 중하지 않았겠지만 그의 가르침에 대한 그들의 멸시는 핑계의 여지를 전혀 허락치 않았다.
15:23
나를 미워하는 자는 - 이 유명한 귀절에서 그는 누구든지 복음의 가르침을 증오하는 자는 하나님에 대한 불신앙을 드러 내는 셈이라는 사실을 가르치고 있다. 복음에 대해서는 증오심으로 가득 차 있으면서도 하나님의 선한 예배자들이라고 자처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그들은 속으로는 하나님을 멸시하고 있는 자들인 만큼 쓸데 없는 짓들이다.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가르침의 빛을 통해서 수 많은 사람들의 위선을 드러내 보여 주고 있다. 이 문제에 대한 상세한 설명은,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한다"(요2:20)는 귀절과 "아들을 공경치 아니하는 자는 그를 보내신 아버지를 공경치 아니하느니라"(요5:23)하는 귀절을 참고하기 바란다.
15:24
내가...일을 저희 중에서 하지 아니하였더면 - 여기서 말하는 '일'속에는 그가 그의 거룩한 영광에 대해서 보여 주신 모든 실예가 포함되는 것으로 생각한다. 곧 그는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많은 기적, 성령의 능력, 그리고 다른 실예를 통해서 보여주셨으며 그 결과, 제 1장에서 취급했듯이, 독생자의 위엄이 그에게서 분명하게 드러났다. 간혹 그는 모세나 다른 선지자들에 비해 더 많고 큰 기적을 베풀지 않았다고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다. 여기에 대한 설명은 다들 아는 그대로이다. 곧 그리스도의 기적이 더 뛰어난 것은 그는 다른 사람들과 같은 봉사자가 아니라 그들의 주인(Author)이였기 때문이다. 곧 그리스도께서는 기적을 베푸시면서 자신의 이름과 자신의 권위 및 자신의 능력을 사용하셨다. 여기서 말씀하는 '일'의 범주에는 그의 신성을 드러내 보여 준 하늘의 영적인 능력에 대한 모든 증거가 포함된다.
지금은......미워하였도다 - 이것은 그의 원수들이 명백하게 신령한 것으로 드러난 그의 능력을 멸시하고 있는 만큼 그들이 여기서 발뺌할 수 없다는 결론이다. 곧 하나님께서는 그의 아들에게서 그의 신성을 공개적으로 나타내 보여 주셨기 때문에 그들이 단지 유한한 인간을 상대하고 있었다는 핑계는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는 내용이다. 이 귀절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일을 곰곰히 살피는 가운데 거기서 그에게 마땅히 돌려야 할 영광을 깨달아야 하며 그것을 그에게 돌려야 한다는 점을 경고하고 있다. 따라서 하나님의 은사를 모호하게 하거나 그것을 천대하는 자들은 하나님에게 배은망덕한 자들이요 악의적인 자들이다.
15:25
그러나 이는......응하게 하려 함이니라 - 자연에 어긋나는 것은 믿어지지 않기 마련이다. 그러나 하나님을 증오하는 것보다 더 이치에 어긋나는 일도 없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이 어찌나 큰 악의에 젖어 있던지 아무런 이유도 없이 하나님을 미워하였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이것은 시편 35장19절의 인용으로서 그리스도께서는 이것이 지금 성취되고 있는 것으로 말씀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똑같은 일이 다윗에게 일찌기 일어나지 않았다는 뜻에서가 아니라 그들 민족의 오만한 악의를 질책하는 의미에서 인용되고 있다. 곧 이 악의는 그들의 조상 대대로 끊임없이 계속 전해 내려오고 있는 죄악이라는 뜻에서 이것이 인용되고 있다. 이것은 마치, 너희들은 아무 까닭없이 다윗을 증오했던 조상들에 비해 다른 점이 하나도 없다하고 말슴하신 것과 같다.
여기서 말하는 '율법'이란 시편이다. 왜냐하면 모든 선지자들의 전체 가르침은 율법에 대한 일종의 보충이요 모세의 사역은 그리스도 오시기까지 계속되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율법'이라는 말은 그들을 높이 평가하는 뜻에서가 아니라 그들이 익히 알고 있는 명칭을 들어서 그들을 보다 더 통렬하게 찌르는 뜻에서 사용된 말이다. 이것은 마치, "그들에게는 상속을 통해 전수되어 오는 율법이 있어서 그들의 행동이 거기에 명백하게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하는 말씀과 같다.
15:26
보혜사......오실 때에 - 그리스도께서는 사도들에게 복음을 반대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해서, 아니 교회 자체안에도 그런 사람들이 있다고 해서 복음을 보다 못한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된다는 점을 당부하시고 나서 성령의 증거와 그런 사람들의 불경건한 광포를 대조시키고 있다. 그들의 양심이 이러한 사실의 지지를 받을 경우 그들은 결코 실패하지 않을 것이라는 말이다. 이것을 우리는 "세상이 너희들에게 반기를 들면서 법석을 피울 것이다. 너희들의 가르침을 조롱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그것을 저주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성령이 너희들에게 허락되어 그의 증거를 통해서 너희들을 확고하게 할 경우에는 그 어떠한 공격도 너희들의 신앙의 확고성을 파괴할 수 없을 것이다"하는 식으로 새겨 들을 수도 있다. 사실 온 세상이 사방에서 미쳐 날뛸 때 우리에게 한가지 든든한 보호가 있다면 그것은 성령을 통해서 우리 마음에 새겨진 하나님의 진리가 세상의 모든 것을 무시한다는 사실이다. 그렇지 않고 이 진리가 인간의 판단에 굴복한다면 우리의 신앙은 하루에도 수백번 넘어지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숱한 요란 속에서 우리 자신 어디에 서야 하는가를 유위해야겠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용하신 것들을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았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속하는 영을 받았기 때문이다(고전2:12). 이 한가지 증거만 가지면 세상이 하나님의 진리를 흐리게 하거나 파괴하려고 내세우는 장애물을 무엇이든지 분산시키고 무력하게 만들 수 있다. 누구든지 이 영을 부여 받은 사람은 결코 세상의 증오나 멸시 때문에 낙심하지 않고 온 세상을 상대로 승자로 등장하게 될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사람들의 그럴듯한 의견에 매달리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하는데 그 이유는 우리의 신앙이 마치 자주 하나님의 성소를 떠나듯이 이리저리 방황한다면 비참하게 계속 배회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신앙은 신자들이 잘 알고 있듯이 하늘에서 그들에게 주어진 성령의 내적이요 은밀한 증거(interius et arcanum Spiritus testimonium)와 항상 연관지어 생각되어져야 한다.
성령이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으로 이야기 되고 있는데 그것은 성령께서 우리의 신앙을 그리스도 안에 유지 시키고 정착시켜서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구원의 어느 부분이라도 다른 곳에서 구하지 못하게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명칭을 사용해서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신앙을 북돋워 주시는 가운데 그것이 시험에 굴복하지 않도록 하고 있다. 그리고 그는 그를 가리켜 '진리의 영'으로 부르고 있는데 이것은 우리가 다루고 있는 문제에 응용될 수 있는 것이다. 곧 성령의 증거가 없이는 인간은 온 사방으로 떠돌아 다닐 수 밖에 없으며 어느 곳에서도 정착할 수 없지만, 그가 말씀하는 곳에서는 그는 인간의 마음에서 모든 의심과 기만의 공포를 제거해 주신다.
15:27
너희도......증거하느니라 - 그리스도의 의도는 성령의 증거란 사도들만 개별적으로 소유하거나 그들만 독자적으로 누리는 것이 아니라 그들은 성령의 도구가 되어 그의 입노릇을 하면서 이것을 널리 퍼뜨리게 될 것이라는 뜻이다. 우리는 여기서 신앙이 들음을 통해서 오지만 그 확실성은 성령의 인치심과 보증에 의존한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인간의 마음의 강퍅함을 충분히 깨닫지 못하는 자들은 믿음이란 전도에 의해서 자연적으로 형성되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런가 하면 외적인 전도를 무시하고 은밀한 계시와 (엔도우시아스무스;은혜의 선물들)을 무분별하게 받아들인 광신자들도 많다. 그러나 우리가 보는 대로 그리스도께서는 이 양자를 하나로 묶고 있다. 그러므로 비록 하나님의 영이 우리의 지성을 깨우쳐 주고 리의 마음에 인을 치시기 전에는 믿음을 가질 수 없지만, 그렇다고 우리가 구름 저편에서 오는 환상이나 말씀을 찾아 헤멜 것이 아니라 우리 가까이 있어서 우리의 입과 마음에 있는 말씀이 (신30:14,롬10:8) 우리의 온 의식을 하나로 묶어 사로잡도록 해야 한다. 이것은 여호와께서 또 가라사대 내가 그들과 세운 나의 언약이 이러하니 곧 네 위에 있는 나의 신과 네 입에 둔 나의 말이 이제부터 영원토록 네 입에서 네 후손의......떠나지 니하리라"(사59:21)고 이사야 선지가 잘 표현한 그대로다.
"너희도 처음부터 나와 함께 있었으므로"라는 귀절이 덧붙여진 것은 우리로 하여금 신들이 전파하는 내용에 대한 목격자로서의 사도들을 더욱 신임하게 하려는 뜻에서이다. 이것은 요한이,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요일1:1)하고 말하고 있는 그대로이다. 이처럼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모든것을 다 구비시켜 주셔서 복음에 대한 완전한 확신으로 부족 사항이 전혀 없도록 하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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