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
예수께서 베다니에 이르시니 - 우리는 예수께서 명절에 올라가지 않으리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이 성급하게 판단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우리에게 성급하게 굴지 말고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은 때가 올 때까지 조용히 계속 기다려야 한다는 것을 경고해 주고 있다. 지금 그리스도께서는 먼저 베다니에 이르셨다. 그것은 베다니를 거쳐 사흘 후에 예루살렘까지 올라가기 위함이었다. 반면에 주님은 유다에게 자기를 배반할 적당한 시간과 장소를 제공해 주기를 원했다. 이는 정해진 시간에 제사를 위하여 준비된 제물로서 자기 자신을 바치기 위함이었다. 주님은 자기에게 닥칠 일이 어떤 것인지 알고 있었다. 그러나 자원해서 자신을 제물로 바치기 위하여 나아갔다.
그리스도께서 유월절 엿새 전에 베다니에 이르신 것을 볼 때 우리는 마태 복음과 마가복음에서 그가 베다니에 나흘동안 머무셨다는 것을 유추할 수 있다. 요한은 어느 날에 주님을 위하여 만찬이 배설되었는지 또는 마리아가 주님께 향유를 부은 날이 언제인지를 말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예수께서 거기 도착하신지 얼마되지 않아서 있었던 일처럼 보인다. 마가와 마태가 언급하고 있는 향유에 대한 사건은 이 사건과 다른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잘못되어 있다. 시간적인 요소가 그들을 잘못 인식하게 하였다. 마가와 마태는 그리스도께서 기름 부으심을 받으신 이야기를 하기 전에 이틀을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해답은 용이하게 두 가지로 설명할 수 있다.요한은 그리스도께서 도착하시는 첫날에 향유의 인침을 받았다고 말하지 않고 있다. 그러므로 이 사건은 주님께서 떠날 준비를 하고 있을 때에 벌어졌을 수도 있다. 그러나 본인이 이미 말한 대로 그리스도께서는 그가 떠나기 전 적어도 하루나 이틀 쯤에 기름부음을 받았을 가능성이 많다. 유다는 그리스도께서 유월절을 준비하도록 그의 두 제자들을 보내시기 전에, 제사장들과 흥정을 했음이 분명하다. 이제 이 두 사건 사이에 적어도 하루의 시간이 흐른 것은 틀림없다. 복음서 저자는 유다가 뇌물을 받은 후에 그리스도를 팔아넘길 편리한 시간을 찾고 있었다고 부언하고 있다. 그래서 이틀을 언급한 후 향유를 부은 이야기를 덧붙일 때 그들은 먼저 일어났던 일을 나중에 이야기 하고 있다. 그 이유는 두 복음서 저자가 "이틀 후에 인자가 팔리울 것이다"라는 말을 전한 후에 그들은 이제 생략했던 내용, 즉 주님께서 그의 제자에 의해서 어떤 모양으로 어떤 기회에 팔리울 것인가를 기록하고 있다.
마태와 마가는 이 때에 주님께서 문둥병자 시몬과 식사를 같이 하고 있었다고 말하고 있다. 요한은 집 이름을 밝히지 않고, 주님께서 나사로와 마르다의 집에서 식사하고 있지 않았다는 것을 분명히 암시하고 있다. 요한은 나사로를 "예수와 함께 앉은 자 중에 있더라"고 그리스도와 함께 초청된 손님으로 취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마태와 마가는 그리스도의 '머리'에 향유가 부어졌다고 기록했는데 요한은 그의 발에 기름을 부었다고 한 것은 전혀 모순이 아니다. 향유는 보통 머리에 붓는 것이었다. 그래서 풀리니(pliny)는 향유를 발에 부었다고 했기 때문에 이를 낭비라고 간주했던 것이다. 세 명의 복음서 저자는 마리아가 그리스도에게 향유를 아끼지 않고 많은 양의 향유를 부었다는 사실에 내용을 같이 하고 있다. 요한이 주님의 발을 언급하고 있는 것은 그리스도의 몸 전체가 발끝까지 향유를 부은 바 되었다고 말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발'이라는 말은 그 다음에 나오는 말, 즉 마리아가 그녀의 머리로 주님의 발을 씻었다고 부인한 데서 더욱 자세히 설명되고 있다.
12:3
향유 냄세가 집에 가득하더라 - 그것은 나드에서 취한 단순한 액체가 아닌 여러가지 향유를 섞은 것이었다. 따라서 온 집안이 향유로 가득했다고 하는 것도놀라운 일이 아닌 것이다.
12:4
제자 중 하나로서 예수를 잡아 줄 가롯 유다가 말하되 - 여기에 유다의 불평이 따르고 있다. 마태는 이를 제자들 전체에게 돌리고 있고, 마가는 이를 제자 중 몇 사람에게 돌리고 있다. 그러나 성경에서 대유법을 써서 한 사람이나 소수의 사람에게 사실이었던 것을 많은 사람에게 적용하는 것은 흔히 있는 일이다. 그러나 나는 불평이 유다에게서 시작되어 나머지 다른 제자들의 마음에 영향을 주어 유다를 지지하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불평은 마치 풀무와 같은 것이어서 우리 안에 각종 생각을 불러 일으키며 따라서 우리가 잘못된 판단을 내리기 더 쉽게 때문에 비판과 불평이 따르기 마련이다. 하나님의 성령께서 책망하고 계신 제자들의 경신(輕信;쉽게 남의 불만을 받아들이는 것)은 우리가 악의에 찬 말을 들을 때에 너무나 경솔하게 동화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경고하고 있다.
12:5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 플리니(pliny)는 보통 향유의 1파운드의 값이 십 데나리온을 넘지 않았다고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다. 그러나 그는 동시에 최고로 좋은 향유의 값은 310데나리온까지 나갔다고 말하고 있다. 복음서 저자들은 이것이 매우 비싼 향유였다고 동의하고 있다. 그리고 유다도 그 가치를 300데나리온으로 정확하게 측정하고 있다(이것은 부다우스의 환산에 의하면 프랑스 돈으로 50루불에 해당한다). 게다가 대부분의 사치품들은 과다한 여분을 뜻하고 있기 때문에 가격이 크면 클수록 유다는 불평하기에 좋은 그럴 듯한 이유를 찾아내게 되었다. 유다는 다음과 같이 말한 것이나 다름이 없다. "마리아가 향유를 조금만 썼더라면 핑계할 만한 근거라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여자는 너무나 방대한 액수의 돈을 아무 목적없이 낭비해 버렸다. 이러한 액수의 돈이면 가난한 사람들을 크게 도울 수 있었을 터인데, 그녀는 가난한 자들에게 해로운 일을 한 것이 아닌가? 그러므로 그녀의 행동은 용서할 수 없다."
12:6
저는 도적이라 -나머지 제자들은 별 생각없이 마리아를 정죄하고 있으나 무슨 악의를 가지고 그런 것은 아니다. 그러나 유다는 가난한 자들을 내세워 자기의 악한 동기를 그럴 듯한 말로 가리려 했다. 그는 가난한 자들을 위해 실제로는 아무 관심이 없었다. 여기서 우리는 탐욕이라는 것이 얼마나 혐오감을 일으키는 냉담한 괴물인가를 알 수 있다. 유다는 향유를 팔아 돈궤에 넣었으면 그것을 훔쳐갈 수 있었을 텐데 그 기회를 상실하게 된것이 화가 났던 것이다. 그러한 탐욕이 그로 하여금 주저하지 않고 그리스도를 팔아 넘기도록 만들었던 것이다. 유다는 가난한 자들이 횡령을 당했다고 말함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거짓말을 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마치 그리스도를 팔아 넘기는 것은 자기의 손해를 보상하는 것으로서 별로 큰 잘못이 아닌 것처럼, 보통 위선자들이 하는 것처럼 자신을 속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에게는 사실 그리스도를 배반하는 데 단 한 가지 이유 밖에는 없었다. 그것은 자기 손가락 사이를 빠져 나간 약탈물은 되찾자는 것이었다. 이득을 상실한 것에 대한 분노가 그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배반하도록 만들었던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도적인 줄 알고 있던 사람을 돈궤를 맡는 회계로 택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그것은 자신을 매달 수 있는 밧줄을 유다에게 제공한 것 외에 무엇을 주었는가? 죽을 수 밖에 없는 범인의 유일한 대답은 하나님의 판단은 깊고 심오한 연못과 같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행동이 가난한 자를 돌보는 일이나 어떤 연보를 믿을 수 없고 악한 사람에게 맡겨도 된다는 일반적인 원칙으로 받아들여서는 안되겠다. 하나님께서 누가 교회를 다스리고 그밖의 직분을 맡을 것인가에 대하여 하나의 율법을 제시하셨다. 그리고 이 법을 어기는 것은 합당한 일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경우는 상황이 달랐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영원한 지혜가 되시는 분으로서 유다라는 사람을 비밀리에 예정하셨던 것이다.
12:7
저를 가만 두어 - 그리스도께서 그들에게 마리아를 가만두라고 말씀하실 때 주님께서는 이웃을 이유없이 괴롭게 하고 무턱대고 말다툼을 시작하는 자들은 악하고 부당하게 행동하는 것임을 보여주고 있다. 다른 복음서에는 그리스도의 답변이 더 길게 되어 있으나 근본내용은 같은 것이다. 유다가 책잡고 있는 향유를 부음은 주님의 장사를 위한 것이라는 근거로 변호되고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이런 것을 일반적인 예배 절차나 교회내에서 늘 행해져야 할 본보기로서 인정하지 않는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이런 종류의 예식이 매일 행해지는 것을 원하셨다면, 그는 이 사건을 장례에 연관시키는 대신 무엇인가 다른 말씀을 하셨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외적인 전시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이 육적인 예식에 잘 기울기 때문에, 가끔 그러한 예식을 사용하는 데 있어서 신중하게 선별할 것을 명하고 계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하신 말씀에서 값 비싸고 화려한 예배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이라고 유추하는 자들은 엉뚱한 풀이를 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주님께서는 그녀가 하나님을 예배하는 영속적인 절차로 간주되어서는 안될 특별한 봉사를 해드렸다는 근거로 마리아를 용서해 주신 것이다.
나의 장사할 날을 위하여 이를 두게 하라 - 주님께서 이를 두게 하라고 말씀하실 때 그는 향유가 잘못된 사건이 아닌 적절한 때에 제대로 부어졌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다. 어떤 일이 보전되었을 경우 그것은 적절한 때에 드러나도록 간수되었다는 것을 말하기 때문이다. 만일 이전에 어떤 사람이 주님께 값진 별미를 대접했다면 주님은 틀림없이 이를 거절했을 것이다. 그러나 주님은 마리아가 이를 보통 흔히 있는 일로 행한 것이 아니라 자기에 대한 그녀의 마지막 의무를 수행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몸에 향유를 뭇는 것은 그당시 하나의 영적인 상징이었으며, 무의미한 예식이 아니었다. 이것은 그들 앞에 부활의 소망을 제시하였다. 약속들은 아직 모호한 것이었으며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라고 불리운 그리스도(고전15:20)께서는 아직 부활하시기 전이었다. 그러므로 믿는 자들에게는 이와 같은 도움이 필요했다. 이러한 약속이 아직 현실로 나타나지 않은 그리스도를 믿도록 그들을 인도했던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께 향유를 부은 것은 그당시 불필요한 행사가 아니었다. 주님은 곧 죽게 되어 있었으며, 그는 마치 장사되어 무덤에 들어가기 위하여 인침을 받은 것이나 다름이 없었기 때문이다. 제자들은 아직 이를 알지 못했다. 그런데 마리아는 갑자기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전에는 생각지 못했던 일을 행하도록 마음에 감동함을 받았던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이 인정하지 않는 것을 그의 부활에 대한 소망에 적용시키고 있다. 그래서 이를 인하여 그들의 악한 혈기로부터 깨어날 수 있도록 하셨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옛 백성의 자녀들이 이러한 의식의 다스림을 받는 것을 바라셨다. 그러나 오늘날 같은 일을 하려 한다면 그것은 어리석은 짓일 것이다. 만일 그렇게 한다면 반드시 그리스도의 영광을 손상시키는 일이 될 것이다. 주님의 오심으로 그러한 그림자는 완전히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님의 부활이 율법의 그림자에 종지부를 찍은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의 장사는 외형적인 예식에 의하여 장식되어야만 했다. 이제 주님의 부활의 향기는 향유가 없이도 온 세상을 살릴 수 있는 만큼 강력하다. 그리고 우리가 사람의 행동을 판단할 때는 그리스도의 판결만을 따르도록 유의하는 것을 잊지 말자. 우리는 언젠가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서야 할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12:8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 우리는 이미 앞에서 지적한 대로 마리아의 이례적인 행동과 우리가 매일 그리스도께 드려야 할 예배 사이에 한계를 그어야 한다는 점을 유의해야겠다. 화려하고 값진 치장으로 그리스도를 예배하려 하는 사람들은 원숭이들이지, 모방자가 아니다. 그리스도께서는 한 번 행해진 것을 인정했으나 그것이 반복되는 것은 금하셨다.
주님께서 그의 제자들과 항상 같이 있지 아니할 것이라고 말한 것은 육적인 예배와 쓸데 없는 영예가 어울리는 것은 그런 임재함이 계속되지 않을 것을 두고 말한 것이다. 주님께서 그의 성령의은혜와 능력으로 우리와 같이 하시고, 우리 안에 내재하시고 그의 살과 피로 우리를 먹이시는 것은 육신적인 예식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가톨릭 교도들이 그리스도를 예배한다고 창안해낸 모든 허례허식은 헛된 겉치레에 불과한 것이다. 주님께서는 이를 노골적으로 거부하고 있기 때문이다. 주님께서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실 때 그는 유다의 위선을 책망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에서 가난한 자들의 필요를 위해서 구제하는 것은 하나님께 드려지는 향기로운 제물이라는 교훈과 하나님을 예배하는 데 있어서 쓰여지는 다른 비용은 모두 합당하지 못하다는 교훈을 배우게 된다.
12:9
유대인의 큰 무리가 예수께서 여기 계신줄을 알고 오니 - 그리스도의 죽음의 시간이 가까와옴에 따라, 주님의 죽음 이후에 보다 충만한 믿음을 위한 준비 과정으로서, 그의 이름이 사방에 알려지는 것이 더욱 필요하게 되었다. 특별히 복음서 저자는 최근에 있었던 나사로의 부활이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 표적을 통하여 그의 신성을 여실히 증명히 보여주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것에 대하여 많은 증인이 나타나기를 원하셨다. 복음서 저자가 그들이 온 것은 예수만 위함이 아니요,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도 보려 함이라고 할 때, 그는 사람들이 나사로에게 특별히 경의를 표하기 위하여 왔다는 말이 아니라, 사람들이 나사로에게서 그리스도의 능력을 보기 위하여 왔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12:10
대제사장들이 나사로까지 죽이려고 모의하니 - 하나님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난 사람을 죽이려고 하다니 이 얼마나 광란적인 행동이냐!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악한 자들을 이와 같은 혼미의 영으로 괴롭히시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과 바다로 저들의 광란을 막으신다 하더라도 그들의 광기는 끝이 없을 것이다. 이 악한 모의가 이러한 식으로 기록된 것은 그리스도의 원수들이 그와같은 완악함으로 치달은 것이 어떤 어리석음을 인함이 아니라 분노에 찬 악의에 의한 것임을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그들은 하나님을 대항해서 싸우는 것도 두렵지 않았던 것이다. 이것은 또한 나사로를 살리는 데 나타났던 하나님의 능력이 모호한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다. 경건치 않은 자들이 이를 말살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저속하고 충격적으로 죄없는 나사로를 제거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사단은 어느 정도까지 아니면 완전히 하나님의 일을 약화시키거나 멸하려고 발광하고 있다. 그러므로 주님의 일을 계속적으로 상고하는 것이 우리의 할 일인 것이다.
12:12
그 이튿날에는 명절에 온 큰 무리가 - 그리스도의 입성은 다른 복음서의 저자들에 의해서 더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요한은 이를 완전히 요약해 주고 있다. 첫째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목적을 기억해야 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을 죽음에 넘겨주기 위해서 자기의 뜻에 따라 자진해서 예루살렘에 오셨다. 그의 죽음은 자발적인 필요가 있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진노는 순종의 제사에 의해서만 가라앉힐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결과는 주님에게 숨겨진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주님께서 십자가로 끌려가기 전에 그는 엄숙한 예식을 통하여 백성들에게 영접받기를 원하신 것은 아니다. 주님께서는 자기의 통치가 그의 죽음을 향한 진군에 의하여 시작되었음을 공개적으로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비록 그의 도착을 많은 무리가 반겨 맞았으나, 주님은 예언을 이루심으로 자기가 참 메시아라는 것을 증명하실 때까지 그의 원수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채로 계셨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믿음을 본질적으로 확인해 주는 데 도움이 되는 어떠한 것도 생략하기를 원치 않으셨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오신다 함을 듣고 - 모든 사람에게 본이 되었어야 할 예루살렘 주민들은 매일 제사를 드렸고 성전도 그들 앞에 있었고, 이런 것들은 마땅히 그들의 마음 속에 하나님을 찾고 싶은 욕망을 불러 일으켰을 것이다. 교회의 대선생들이 거기 있었고 하나님의 빛이 비치는 성소도 그들 가운데 있었다. 따라서 그들의 감사할 줄 모르는 마음은 땅에 닿았고 그들은 어릴 때부터 그렇게 기울어져 있었다. 그들은 따라서 그들에게 약속된 구속주를 거들더 보지 않고 거절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자신을 더 가까이 그리고 친밀하게 보여 주실수록 더욱 무엄하게 하나님을 멸시한 것은 거의 모든 시대에 걸쳐 인간이 범하는 공통적인 오류이다. 자기 땅을 떠나 외지에 가 살다가 명절을 지키러 온 무리들이 더 큰 열성을 보였다. 그들은 열심히 그리스도에 대하여 묻고 그가 에루살렘에 오신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나아가서 그와 함께 기뻐했다. 그러나 그들이 성령의 숨은 충동에 의하여 그를 찾아 나아간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우리는 이런 일이 전에 있었다는 것을 읽을 수가 없다. 그러나 세상의 군왕들이 그들의 왕국을 차지할 때 전령의 소리나 나팔소리로 신하들을 불러 모으듯이 그리스도께서도 그의 성령으로 사람들을 불러모아 자기를 왕으로 환호하게 하였던 것이다. 무리가 그를 잡아 광야에서 임금을 삼으려고 했을 때 그는 혼자서 산으로 피하셨다. 당시에 그들이 생각했던 유일한 왕국은 실컷 먹고 소처럼 배불릴 수 있는 왕국이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께서 자기에게 맡겨준 직분을 포기하거나 자신을 부인하지 않고서는 그들의 어리석고 엉뚱한 요구에 응할 수도 동의할 수도 없었다. 그러나 이제 나는 주님을 맞으러 나갔던 사람들이 참으로 그의 나라의 성격을 깨닫지 못했다는 것을 고백한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앞날을 바라보셨다. 반면에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신령한 나라와 일치되지 않는 어떠한 것도 행해지는 것을 원치 않으셨다.
12:13
종려나무 가지를 가지고 맞으러 나가 - 종려나무는 옛날에 평화와 권리의 상징이었다. 그러나 사람들이 어떤 사람에게 왕위를 부여하거나 정복자에게 겸손하게 용서를 구할 때 종려나무 가지를 쓰는 것도 통상적인 일이었다. 그러나 이 사람들은 새로운 왕을 환영하는 환희와 즐거움의 표시로종려나무 가지를 사용한 것 같다.
외치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 이 표현을 사용함으로써 그들은 그리스도를 조상들에게 약속했던 메시아로 인식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들은 그리스도에게서 구원과 구속을 찾았다.
이 외침은 시편 118장 25절부터 26절까지에서 인용한 것인데 이는 모든 성도들이 끊임없는 열망으로 메시아의 오심을 바라도록 그리고 메시아가 나타나셨을 때 그를 존귀하게 영접할 수 있도록 기록된 것이다. 이 기도가 모든 유대인들 사이에 흔히 있었던 것이고 따라서 모든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는 것은 쉽게 유추해 볼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영은 이 사람들에게 이 말씀을 공급하여 그리스도를 축복하게 했던 것이고, 주님께서는 그들을 메시아가 왔다는 것을 증거하는 전령으로 삼았던 것이다.
"호산나"라는 말은 두개의 히브리 단어로 이루어져 있는데, '구원하라!' 또는 '기도하노리, 안정하게 하소서!'라는 말과 같은 뜻이다. 히브리인들은 이를 호시아나(Hosiah-na)라고 달리 발음한다. 그러나 어떤 말이 외국어로 옮겨질 때 발음이 변질되는 것은 아주 흔히 있는 일이다. 비록 복음서 저자들이 헬라어를 기록했지만, 그들은 온 무리가 다윗에 의하여 처음 드려졌던 기도의 형태가 대대로 하나님의 백성들 사이에 전해지고 특별히 그리스도의 나라를 축복하는 데 쓰여졌다는 것을 더 잘 표현하기 위하여 일부러 히브리어를 보전하였다. 똑같은 목적을 위하여 곧 이어서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라고 그들은 외쳤다. 이것은 하나님의 교회의 회복과 축복이 달려있던 그 나라의 행복과 번영을 비는 즐거운 기도였다.
그러나 다윗은 그 시편에서 그리스도보다도 자기 자신을 말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므로 이 문제를 먼저 해결해야 한다. 그런데 그 해결은 그리 어렵지 않다. 우리는 왕국이 다윗과 그이 후손에게 주어진 것은 때가 되면 나타나게 될 영원한 나라에 대한 전주곡으로 주어졌던 것임을 알고 있다. 다윗이 이를 자기 자신에게 적용하는 것은 어울리지도 않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종종 그의 선지자들을 통하여 모든 경건한 자들의 눈을 다른 분에게로 돌리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다윗이 자기 자신에 대하여 노래했던 모든 것은 왕중의 왕되신 분에게 돌려져야 마땅한 것이다. 그의 씨에서 구속주가 나오실 것이 약속되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유용한 교훈을 얻을 수 있다. 만일 우리가 교회의 일원이라면, 주님께서는 오늘날도 율법 아래 있던 성도들과 함께 같은 욕망을 품도록 우리 마음을 움직이신다. 우리는 마음을 다하여 그리스도의 나라가 흥왕할 것을 갈망해야 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기도는 이를 보여주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의 기도에 좀더 영력이 있게 하기 위하여 기도의 말을 우리에게 불러주고 있다는 것을 유의해야겠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께서 불붙여주신 신앙의 열정을 우리의 냉냉함으로나 우리의 미지근함으로 꺼버린다면 우리의 나태함에 화가 있으리로다! 그러나 하나님의 인도하심이나 가르치심에 의해서 하게 되는 기도는 헛되지 않다는 것을 주지하자. 우리가 구하는 일에 게으르지 않거나 피곤치 아니하면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나라를 충실히 지키는 주인이 되셔서 그의 능력과 보호하심으로 그 나라를 방어하실 것이다. 비록 우리가 계속 태만한 자세를 버리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의 위엄은 흔들리지 않고 굳게 설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가 마땅히 흥왕해야 할 대로 장업하게 흥왕하지 않고 오늘날 우리가 보는 것처럼 크게 흩어져 황폐된다 할지라도 이것은 분명히 우리의 잘못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다. 그리고 회복이 느리고 미미하게 보일 때는, 우리의 게으름을 탓하도록 하자. 우리는 매일같이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것을 기도하지만 진지하게 기도하는 때가 극히 드물다. 이 축복을 구하는 데 많은 어려움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이 하나님의 축복을 사실상 박탈당하고 있는 것이다. 이 말씀에서 우리는 또한 교회를 구원하기도 하시고 지키기도 하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 한분 뿐이라는 것을 배우게 된다. 주님께서는 스스로 자신을 위해서 주장하시지도 않고 자기 것외에 다른 것을 그에게 바치라고 우리에게 명령하지도 않으셨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나라를 구해 주실 것을 기도하고, 하나님께서 이 나라를 굳건하게 지키시는 안전의 주인이 되심을 인정한다. 주님께서는 이 목적을 위해서 인간의 행동을 이용하신다. 그러나 그들을 하나님께서 친히 준비한 사람들이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이용하여 그리스도의 나라를 확장하고 보전하시되 자기 혼자서 성령의 능력으로 사람들을 통하여 모든 것을 시작하시고 완성하신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 우리는 먼저 '주의 이름으로 온다'는 말의 의미를 이해해야 한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오는 사람은 경솔하게 자신을 앞에 내세우거나 거짓되이 영광을 취하지 않고, 부름을 받았기 때문에, 자기의 행동의 주체와 지도자로서 하나님을 내세운다. 이러한 표현은 참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모든 사람에게 적용된다. 선지자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와서 성령의 지시하심을 따라 자기가 하늘로부터 받은 교훈을 솔직하게 사람에게 전달한다. 왕도 같은 이름으로 온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도 그의 손을 빌어서 자기 백성을 다스리신다. 그러나 주의 영이 그리스도 위에 머물렀기 때문에, 그리고 주님께서 모든 만물의 머리가 되시기 때문에 교회를 다스리도록 부르심을 받은 모든 사람들은 다 주님의 명령 아래 있는 것이다. 아니 생명의 샘에서 흘러 내리는 물줄기들이다. 주님은 과연 하나님의 이름으로 오셨다고 말해야 마땅할 것이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왕의 지위상 다른 왕들보다 뛰어나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자기자신을 완전히 주님 안에서 나타내셨다. 바울이 말한 대로 "그 안에는 신성이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기"때문이다(골2:9). 주님은 하나님의 살아있는 형상이시며 간단히 말해서 참된 임마누엘이 되신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특별한 권한에 의하여 주의 이름으로 오셨다고 말할 수 있다. 주님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는 전에 선지자들을 통하여 한 것처럼 부분적으로 하지 않고 완전히 자신을 세상에 나타내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종들을 축복하기 원할 때는 머리되시는 주님으로부터 시작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제 거짓 선지자들이 교만하게 하나님의 이름을 내세우고 이 거짓된 가면 아래 스스로를 선전하기 때문에(사실에 있어서는 그들이 교회를 멸하려는 마귀의 충동에 의하여 움직이는 것이지만) 우리는 주님께서 그들을 흩으시고 멸할 수 있도록 그 정반대되는 대전제를 제시하여야 한다. 따라서 우리는 그리스도를 축복하면서 동시에 교황과 교황이 그리스도를 대항하여 세워 놓은 신성모독적인 독재를 저주하지 않을 수가 없다. 교황은 천둥치는 듯한 횡포로 우리에게 저주의 말을 내뱉고 있지만 우리는 그의 저주를 단순한 호언장담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제쳐놓을 수가 있다. 그러나 여기서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교황을 그의 모든 영광과 허풍과 함께 지옥 밑바닥까지 저주하도록지시하고 있다. 그렇다고 교황에게 저주를 선언하기 위하여 우리에게 또 다른 교황이 필요한 것도 아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복음서 저자들이 기록하고 있는 대로, 어린아이들이 소리지르는 것을 보셨을 때 자녀들에게 일단 이 권한을 부여하셨기 때문이다.
12:14
예수는 한 어린 나귀를 만나서 타시니 - 다른 복음서의 저자들은 이부분을 더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그들은 그의 제자 두명을 보내어 이 나귀를 끌어오도록 하셨다고 말해주고 있다. 요한은 끝으로 이를 기록하면서 이미 다른 사람들이 말한 것의 본질적인 내용만을 기록하는 것으로 족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요한은 많은 세부사항을 생략하고 있는 것이다. 많은 사람을 걱정하도록 만드는 모순이 여기서 쉽게 풀리게 된다. 마태가 그리스도께서 나귀와 나귀새끼를 탔다고 말했을 때, 우리는 이를 하나의 대유(代喩)로 받아 들인다. 어떤 사람들은 주님께서 먼저 나귀를 타셨다가 후에 나귀 새끼로 옮겨 탔다고 상상한다. 이러한 억측에서부터 그들은 주님께서 오래전에 율법의 멍에를 지고 시달리던 유대인들을 타시고 그후에 나귀새끼와 같은 이방인들을 길들이셨다는 비유를 창조해 냈다. 그러나 단순한 진리는 그런 것이 아니라 예수께서 어미 나귀와 함께 끌려온 나귀 새깨를 탔다는 것이다.그리고 이것은 같은 내용을 두 번에 걸쳐 다른 말로 표현했던 선지자의 말과도 일치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반복법은 유대인들 사이에 흔히 있는 일이다. 선지자는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라고 말하고 있다. 간략하게 표현하려고 노력하고 있는 우리의 복음서 저자는 앞부분을 빼고 후반부 말씀만을 인용하고 있다.
유대인들은 그때에 이루어졌던, 스가랴 선지자가 메시아에 대하여 한 예언(슥9:9)을 설명하도록 강요당하고 있다. 그러나 동시에 그들은 우리가 사소한 나귀에 대한 예언에 의해서 메시아의 영예를 마리아의 아들에게 돌리고 있다고 우리를 비웃는다. 그러나 우리의 믿음은 전혀 다른 증거 위에 서있다. 우리가 예수는 그리스도라 말할 때, 우리는 예수께서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하는 데서부터 시작하지 않는다. 예수 안에는 하나님의 아들에 합당한 그런 영광이 보였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를 본 복음서의 1장에서 살펴 보았다. 그러나 주님의 신성한 능력이 특별히 두드러지게 나타난 것은 그의 부활에서였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의 놀라운 섭리 가운데서 스가랴의 예언이 이루어진 것을 보여주셨다는 확증을 멸시해서는 안되겠다.
12:15
두려워 말라 - 복음서 저자가 인용하고 있는 선지자의 말에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우리 가운데 왕노릇 하실 때에만 우리 마음은 평온을 되찾고 두려움과 떨림이 사라진다는 것을 유념해야겠다. 선지자가 실제로 한 말은 다르다. 그는 믿는 자들에게 기뻐하고 즐거워 할 것을 권유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의 복음서 저자는 우리의 마음이 얼마나 참된 기쁨으로 기뻐하고 있는가를 표현하고 있다. 모든 사람을 괴롭히고 있는 두려움이 제거되는 것은 믿는 자들이 하나님과 화해하여 믿음에서 나는 평안을 얻었을 때인 것이다(롬5:1).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는 사단의 횡포에서 벗어나고 죄의 굴레에서 자유하고 죄책감은 사라지고 죽음을 이기는 혜택을 받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왕되신 그리스도의 보호 아래 마음놓고 즐거워 하는 것이다. 주님의 보호 아래 있는 사람들은 어떠한 위험도 두려워 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살아가는 동안 두려움에서 해방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모든 두려움을 이길 수 있다는 말이다. 비록 그리스도께서는 아직 멀리 계셨지만 선지자는 그 시대의 경건한 사람들에게 메시아가 앞으로 나타나실 것을 생각하여 기뻐하고 즐거워하라고 말했던 것이다. 그는 "보라, 너희의 왕이 오신다. 그러므로 두려워 말라"고 말했다. 이제 주님께서 친히 임재하셔서 우리로 즐길 수 있게 하셨으니 우리는 더욱 더 담대히 두려움에 대항하여 싸워야 할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원수들로부터 벗어난 우리들은 평안함과 즐거움으로 우리의 왕에게 영광을 돌려야 할 것이다.
선지자는 교회의 자리와 위치가 당시에 시온에 있었기 때문에 시온에 대하여 돈호법(頓呼法)을 쓰고 있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전 세계 각처에서 하나의 교회를 불러 모으셨다. 하나 이 약속은 그리스도께서 자기 안에 왕노릇하도록 그리스도에게 순복하는 사람들에게만 주어진 것이다. 요한이 그리스도께서 나귀를 타고 입성하는 것을 기록했을 때, 그는 그리스도의 왕국이 세상의 허세와 부귀나 영화와 거리가 멀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그 나라는 신령한 나라라는 것을 알 수 있도록 이것을 외적인 형태로 보여주는 것은 타당한 것이었다.
12:16
제자들은 처음에 이 일을 깨닫지 못하였다가 - 씨가 땅에 떨어지는 순간에 바로 싹을 내지 않는 것처럼, 하나님의 일의 열매도 즉시 나타나지 않는다. 사도들은 예언을 이루는 데 쓰여졌던 하나님의 종들이었지만, 그들이 하는 일을 깨닫지 못했다. 그들은 무리가 외치는 소리를 혼란스러운 소음으로 듣지 않고 분명히 왕되신 그리스도를 환영하는 소리로 들었다. 그러나 그들은 그 소리의 요점이나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알지 못했다. 그러므로 사도들에게는 주님께서 그들의 눈을 뜨게 하실 때까지는 이것이 하나의 구경거리에 불과했던 것이다.
요한은 이것이 그리스도에 대하여 기록된 것임을 제자들이 기억했다고 말했다. 그때 그는 그들이 깨닫기 전의 무지했던 원인이 무엇인지를 암시하고 있다. 그 원인은 그들에게 바르고 청결한 생각을 할 수 있도록 그들의 마음을 이끌어 줄 안내자와 선생이 될 성경 말씀이 우리의 나갈 길을 인도할 때까지 우리는 눈먼 장님이기 때문이다. 성령께서 또 우리의 눈을 밝혀 주시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길을 비쳐주는 것으로도 부족하다. 성령의 도움이 없이 우리 눈은 가장 밝은 빛에도 어둡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자기가 부활하신 후에 제자들에게 이 은혜를 베푸셨다. 우리가 7장 39절에서 본대로, 그리스도께서 영광 가운데 하늘로 들리우시기 전에는, 말하자면 성령께서 흡족하게 그의 은사를 부어줄 때가 무르익지 않았던 것이다. 이러한 예로부터 우리는 그리스도에 관계되는 모든 것을 판단할 때 육신적인 감각에 이하여 할 것이 아니라 성경을 근거로 판단할 것을 배우도록 하자. 하나님의 일을 상고하는데 있어서 점차로 우리를 교육시켜 무지함에서 벗어나도록 하는 것은 성령의 특별한 은혜라는 것을 또한 깨달아야 하겠다.
이것이 예수께 대하여 기록된 것임과 사람들이 예수께 이같이 한 것인줄 생각났더라 - 이 귀절을 나는 이렇게 해석한다. 그리스도께서 별 생각없이 이런 일을 행하신 것이 아니며, 사람들이 그저 의미없는 짓을 했던 것이 아니라, 이 모든 일이 기록된 대로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섭리에 의하여 이루어지게 되었다는 것을 그때 처음으로 제자들이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그들이 예수께 대하여 기록된 그대로 이런 일을 그에게 행했다"는 뜻으로 이해하라.
12;17
함께 있던 무리가 증거한지라 - 요한은 많은 사람이 그 위대한 기적에 대한 소식을 듣고 그리스도를 만나러 나아오게 되었다는 것을 다시 반복해서 말하고 있다. 그들은 나사로가 다시 살아났다는 소문이 사방에 퍼졌기 때문에 많은 무리가 몰려왔다. 그들은 마리아의 아들에게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는 칭호를 돌릴만한 충분한 이유를 갖고 있었다. 그의 가장 뛰어난 능력이 그들에게 알려졌기 때문이다.
12:19
너희 하는 일이 쓸 데 없다 - 이 말을 함으로 그들은 자신들에게 더욱 광분할 것을 채찍질하고 있다. 그들은 자신들이 지나치게 나태했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리스도에게 가는 것처럼 자신들의 게으름을 책망하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그들의 최후 노력을 준비하고 있을 때 이와 같이 절박하게 말할 수 있다. 그리고 하나님의 원수들이 악을 행하기에 그와 같이 담대하고 끈질기다면 우리는 의로운 일에 더욱 굳게 서서 전진하는 것이 마땅한 것이다.
12:20
예배하러 올라 온 사람 중에 - 그들은 자기 나라에서도 예배를 드릴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요한은 여기서 제사와 관련된 의식적인 예배에 대하여 기술하고 있다. 비록 종교와 경건이 성전에만 제한되어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들은 다른 곳에서는 하나님께 제물을 바치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다. 그리고 다른 곳에는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상징하는 언약궤가 없었다. 모든 사람이 각자 자기 집에서 매일 영적으로 예배를 드렸다. 그러나 율법 아래 있던 성도들에게는 모세가 정해준 것과 같이 하나님이 계신 성전에 나와서 외적으로 예배하는 것이 기대되고 있었다. 그리고 만일 그때 이 사람들이 큰 비용을 들여 상당한 불편을 겪으며, 위험을 각오하고 그와 같이 긴 여행을 하면서까지 외적인 경건의 모양을 지키는 일을 소홀히 하지 않았다면, 우리가 사는 나라에서 참 하나님을 예배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무슨 핑계를 댈 수 있겠는가? 물론 율법의 예배는 이제 끝장이 났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의 교회에 세례와 거룩한 성찬과 공중기도를 행하도록 하셨다. 우리가 이러한 예식을 소홀히 한다면, 그것은 우리의 경건한 생활에 대한 욕망이 매우 메말라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헬라인 몇이 있는데 - 나는 이들이 이방인이나 할례받지 않은 자들이었다고 생각지 않는다. 우리는 즉시 그들이 예배하러 올라온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자기 지방의 예배를 떠나 유대교로 개종하는 것은 로마법에 의하여 엄격히 금지되어 있었고 그런 것이 발견되면 총독에 의해 엄벌을 받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아시아와 헬라에 흩어져 살던 유대인들은 바다를 건너가 성전에서 제사들이는 것이 허용되어 있었다. 뿐만 아니라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엄숙한 일에 이방인과 섞이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다. 만일 이방인과 어울린다면 유대인들은 그들 자신과 성전과 제물이 다 더러워진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비록 그들이 유대인의 후손이지만 바다를 건너 멀리 살고 있었기 때문에, 복음서 저자가 그들을 당시에 예루살렘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에 대하여 잘 알지 못하는 외국인들로 소개하고 있는 것도 놀라운 일이 아니다. 이 말씀의 의의는, 따라서 여러 마을과 동네로부터 모여든 유대에 거주하는 유대인들로 뿐만 아니라 소문이 바다 건너까지 퍼져 먼 나라에 살고 있는 유대인들도 예배하러 올라왔다는 데 있다.
12:21
저희가 갈릴리 벱새다 사람 빌립에게 가서 - 그들이 자신을 그리스도에게 강제적으로 나타내지 않고 빌립을 통하여 주님께 접근하고 있는 것은 경외심의 표현이다. 경외심은 언제나 겸손을 자아내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서 가톨릭 교도들이 죽은 자들을 기도로 불러 하나님과 그리스도 앞에 우리의 변호인으로 삼을 때, 그것은 논박할 가치조차도 없는 것이다. 헬라인들은 그 자리에 있던 빌립에게 말했다. 이것이 죽은 자를 불러 주님께 부탁하는 것과 어떻게 비교될 수 있는가? 나는 여러분에게 묻고 싶다. 그러나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의 한계를 벗어나는 것을 일단 허용하면 인간의 주제넘은 생각은 이러한 결과를 낳는 것이다. 가톨릭 교도들은 자기들의 머리속에서 죽은 자들을 불러내는 것을 창안해냈다. 그래서 이제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거짓된 보증을 얻어내기 위하여, 성경을 부패시키고 의곡시켜 그것을 가치없는 조소거리가 되게 만드는 일을 서슴지 않고 있다.
12:23
인자의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 이 말씀은 주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만큼 또 그
의 죽음을 설명하고 있다고 많은 사람들은 이 말씀을 풀이한다. 이들에 의하여 그리스
도께서 자기의 죽을 시간이 눈앞에 이르렀다고 선언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오히려 이 말씀을 복음의 선포와 연관시키고 싶다. 그는 자기를 아는 지식이 세계 도
처에 퍼지게 되리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주님은 그의 죽음이 제자들을
경악시키고 실망케 할 것을 아시고 이를 미리 예방하고 있다. 그는 복음의 교훈이 온
세상에 두루 선포될 것이기 때문에 조금도 실망할 이유가 없음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
이다. 그리고 주님께서 사형 선고를 받고 십자가에 달렸다가 장사지낸 바 될때에 그의
영광에 장애가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미리 경고하고 또 그들에게 기대하도록 하신
것이다. 이러한 목적으로 주님은 아주 적절한 비유를 쓰고 계신다.
12:24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 한 알 그대로 열매를 맺지 못하지만
씨의 죽음은 발육을 촉진하여 열매를 맺는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죽음을 씨
뿌리는 데 비유하고 있다. 씨를 뿌리면 밀알은 파괴되는 것같이 보이지만 그것은 풍성
한 열매의 원인이 되는 것이다. 이 권고가 그 당시에는 특별히 필요한 것이었으나 지
금도 교회내에 계속 쓰여질 필요가 있는 것이다. 우선 우리는 머리되신 주님에게서 시
작하여야 한다. 그리스도의 죽음에 보이는 불명예와 저주의 무서운 출현은 주님의 영
광을 흐리게 할 뿐만 아니라 그 영광을 우리의 시야에서 부터 빼앗아 간다. 이때에 우
리는 그의 죽음만을 붙들고 늘어질 것이 아니라 주님의 부활이 맺어준 열매를 또한 묵
상해야 할 것이다. 이렇게 한다면 그의 영광의 광채는 어느 곳에서도 먹을 수 없을 것
이다. 주님으로 부터 시작한 우리는 주님의 지체로 옮겨 가야 한다. 우리는 죽음으로
서 멸망한다고 생각할 뿐만 아니라 우리의 삶 자체가 일종의 계속적인 죽음인 것이다
(골3:3). "겉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고후4:16)라고 한 바울의
위로가 우리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 우리는 소망이 없다. 경건한 사람들은 계속 갖
가지 환란으로 고난을 당하고 배고픔과 헐벗음과 병으로 고생하고 비난을 받아 상심하
고 거의 매순간마다 거의 죽음에 삼키운 바 된다. 그렇다면 경건한 성도들은, 씨를 뿌
린 것이 때가 되면 열매를 맺는다는 것을 계속 묵상해야 할 것이다.
12;25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가르침에 하
나의 권고의 말씀을 더하고 있다. 만일 열매를 맺기 위하여 우리가 죽어야 한다면, 하
나님께서 우리를 연단하시도록 우리는 인내하여야 한다. 그러나 주님께서 생명을 사랑
하는 것과 미워하는 것을 비교할 때, 우리는 무엇이 생명을 사랑하는 것이고 무엇이
생명을 미워하는 것인지를 깨달아 알아야 한다. 현세에 대한 지나친 정욕으로 마음이
뺏겨 있는 사람, 즉 억지로가 아니면 이 세상을 버릴 수 없는 사람은 생명을 사랑한다
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생명을 멸시하고 용감히 죽음을 항하여 전진해 나갈 수
있는 사람은 생명을 미워한다고 말할 수 있다. 이 말은 생명을 전적으로 미워하라는
것이 아니다. 생명은 하나님의 최상의 축복 중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믿는 자
들은 그 생명이 그리스도에게 가가이 가는 것에 방해가 된다면 이를 기쁨으로 내어 놓
아야 할 것이다. 이것은 어떤 일을 서두르는 사람이 무겁고 불편한 것은 어깨에서 벗
어 던지고 싶어하는 것과 같다. 간단히 말해서, 우리가 외국인과 나그네로서 본향을
바라보면서 이 세상을 여행한다면 이 생명을 사랑하는 것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다.
참으로 인생을 사랑하는 방법은 하나님께서 기뻐하는 동안에는 그 생명 안에 남아 있
다가 하나님께서 말씀하시자마자 우리의 거처를 바꿀 준비를 갖출 때-즉 다시 말하면
우리의 생명을 살아가다가 필요할 때 하나님께 제물로 바치는 것이다. 누구든지 이 현
재의 생명에 지나치게 집착되어 있는 사람은 그의 생명을 잃는다. 다시 말해서 그는
그의 생명을 영원한 파멸에 내던지는 것이다. 왜냐하면 잃어버린다는 것은 포기한다거
나 어떤 가치있는 것의 상실을 겪는다는 뜻이 아니라 그것을 파멸에 넘겨준다는 뜻이
기 때문이다.
어떤 이들은 여기에 쓰인 생명(soul;영혼)을 애정의 처소로 보고있다. 그리스도께서
는 "육신의 정욕에 빠져있는 사람은 그의 생명을 잃는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나 다름
이 없다. 그러나 이것은 너무나 억지같은 말이다. 오히려 자기 생명을 거들떠 보지 않
는 사람은 생명을 영원히 즐기는 최선의 길을 가고 있다고 풀이하는 편이 더 자연스럽
다.
의미를 더 분명하게 하기 위하여, '이 세상에서'라는 문귀를 한번 더 반복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이 세상에서 그들의 생명을 사랑하는 자들은 마음에 제일 좋은 것을 누
리지 못한다. 반면에 이 세상에서 그들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들은 참으로 그 생명을
보전하는 법을 알고 있다. 그리고 이 세상에 매여 있는 사람은 스스로 하늘에 속한 생
명을 자신으로 부터 박탈하는것이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나그네와 행인이 될 때에만
영생의 후사가 될 수 있다. 그러므로 생존하되 그 생존을 이 세상에만 국한시키고 싶
어하는 것은 모든 믿는 자들 속에 군림하고 있는 짐승과 같은 태도인 것이다. 그래서
자신의 안전에 대해서 염려할수록 사람은 하나님을 나라에서, 즉 참된 생명에서 점점
더 멀어지게 되는 것이다.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 나는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을 방해하지 않을
정도로 생명을 미워해야 한다고 말함으로써 이 말씀이 비교적으로 언급된 것임을 이미
지적한 바 있다. 만일 하늘의 생명에 대한 묵상이 우리 마음을 지배하고 있다면, 세상
은 우리를 주관할 능력이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일어날 수 있는 반대도 쉽게
해결되었다. 많은 사람은 절망과 기타 이유로 특별히 인생살이에 지쳐서 자살을 감행
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이 자신의 안전을 위하여 준비했다고 말할 수 없다. 다른 사
람들은 또 야망과 포부에 의하여 죽음으로 휩쓸려 들어간다. 이들도 자신을 파멸에 니
어던지는 것이다.그러나 여기서 그리스도께서는 바람과 같이 지나가는 이 생명에 대한
미움과 경멸을 표현하고 있다. 결국 하늘을 바라보지 못하는 사람은 인생이 구원받을
수 있는 방법을 아직 터득하지 못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께서는 땅에 속한
삶을 너무 갈망하는 사람들을 경고하기 위하여 이 후반절을 덧붙이고 있다. 만일 우리
가 세상에 대한 사랑에 압도되어 그 세상에 대한 집념을 버릴 수 없다면 천국에 들어
가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너무나 심각하게 우리를 일깨우고
있기 때문에 죽음의 잠을 자는 것은 미친 일이라 할 것이다.
12:26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 죽음이 우리에게 덜 비통한 것이 되도록, 그
리스도께서는 친히 본을 보이심으로써 기쁨으로 죽음에 순응할 수 있도록 우리를 초청
하고 있다. 그리고 분명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의 제자가 되는 영예를 거절하는 것
을 수치스럽게 느끼도록 만든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가 제시하는 길을 우리가 따른
다는 조건으로 우리를 그 수에 가입시켜 주신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앞길을 인도하심
으로 죽음을 맞을 수 있게 하신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과 함께 죽음을 경
험할 때는 죽음의 쓰라림이 조절되고 달게 느껴질 수도 있는 것이다. 우리는 십자가
때문에 그리스도로부터 피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주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하여 죽음을
구해야 할 것이다. 즉시 뒤에 나오는 말씀도 같은 목적을 두고 하신 말씀이다.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 주님께서는 그의 종들이 죽음에 순
복하는 일에 거부하지 않을 것을 요구하고 있다. 그들은 주님께서 먼저 죽음을 향해
가는 것을 보고 있었다. 종이 그 주인과 별도로 다른것을 갖는 것은 옳지 않기 때문이
다. 여기에 쓰인 '있으리니'(shall be)라는 미래 시제는 히브리어의 습관을 따라 명령
적인 뜻을 지니고 있다. 어떤 이들은 그리스도께서 자기와 죽는 것을 꺼려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자기의 부활에 참예하는 자가 되리라고 약속한 것처럼, 이를 하나의 위로
의 말씀으로 받고 있다. 그러나 이미 본인이 말한 대로 전자의 견해가 더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주님께서 그후에, 종들이 삶과 죽음에서 그와 나뉠 수 없는 짝으로 생활했
을 때 아버지께서 그리스도의 종들에게 보상하실 것이라고 위로를 덧붙이고 있기 때문
이다.
12:27
지금 내 마음이 민망하니 - 이 말씀은 언뜻 보기에는 전에 하신 말씀과 크게 차이
가 나는 것처럼 보인다. 주님께서는 그의 제자들에게 죽음을 감수할 뿐만 아니라 경우
에 따라서는 기꺼이 그리고 열심히 죽음을 간구하라고 권고하심으로써 뛰어나게 영웅
적인 용기를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이제 그는 죽음에서 주춤 물러서서 자신의 연약함
을 고백하고 있다. 그러나 모든 성도가 각자의 경험으로 알고 있듯이, 우리는 여기서
일관성이 없는 것을 전혀 발견하지 못한다. 냉소적인 사람들이 이를 비웃는다 해도 놀
랄 것이 없다. 그것은 실행에 의해서만 깨닫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 그와같이 연약함을 드러낸 것은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유용하고 필요한 것이었다. 주님의 죽음에서 가장 먼저 고려해야 할 것은 그의 죽음으
로 하나님의 저주와 진노를 진정시켰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책감
을 그에게 담당시키지 않았다면 그러한 속죄의 죽음을 죽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므
로 그가 겪은 죽음은 두려움과 공포로 가득찬 것이었다. 주님은 자신의 감각에 하나님
의 두려운 심판을 몸소 체험하지 않고 우리를 위해 만족한 죽음을 죽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죄악의 막중함에 대하여 더 잘 알게 된다. 하늘에 계신 아버
지께서 그의 유일한 독생자에게 그와 같이 무서운 심판을 내리셨기 때문이다. 그러므
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죽음이 어떤 오락이나 장난이 아니었다는 것과 그가 우리의 죄
를 인하여 가장 극심한 고통에 내어준 바 되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의 아들이 그와 같이 민망해 하신 것도 어처구니 없는 것이 아니었다. 주님의
신성은 감취어 있었고 그 능력은 속죄할 기회가 주어질 때까지 나타나지 않은 채, 쉬
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육신을 입으셨을 뿐만 아니라 인
간적인 감정도 취하셨다. 그리스도 안에 이러한 느낌들은 자발적이었던 것이 사실이
다. 그는 두려워 했다. 두려워하도록 강요되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스스로 자의에 의
해서 자신을 두려움에 내어 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주님이 두려워 한 것이
거짓으로 한 것이 아니라 참이었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그러나 주님은 다른 사람과
차이가 있었다. 우리가 다른 데서 말했던 대로, 주님은 하나님의 의에 순종함으로 자
신의 감정을 다스렸던 것이다.
이것은 우리에게 또 하나의 이점을 가져다 준다. 만일 죽음의 두려움이 그리스도를
거스리지 않았다면 우리 중에 누가 그의 죽음이 우리와 관계가 있다고 생각했을 것인
가? 슬픔이 없이 죽음을 맞는 것은 우리에게 어울리지 않는 일이다. 그러나 주님도 그
에게 강철같은 강인함이 없었다는 것을 알 때, 우리는 용기를 모아 그를 따르게 된다.
그리고 죽음 앞에 공포를 느끼는 육신의 연약함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지도자의 친
구가 되는 일을 방해하지 않는다.
무슨 말을 하리요 - 우리는 여기서 마치 우리 눈 앞에 보듯이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하나님의 아들이 어떠한 의생을 치렀는가를 알 수 있다. 주님께서 깊은 곤경에 처했을
때 그는 슬픔의 정도를 표현할 말도 찾지 못하였으며, 하나의 인간으로서 내려야 할
결정도 내리지 못할 정도였다. 주님은 자기에게 남아 있는 유일한 돌파구인 기도로 피
신하여 죽음을 면하게 되기를 간구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원한 뜻에 의하여 죄를 위
한 제물로 내정되어 있는 자신을 생각하며 그는 그의 깊은 슬픔이 요현했던 소원을 즉
시 시정한다. 말하자면, 자기 손을 뻗쳐서 자신을 제어하며 아버지의 뜻에 완전히 순
복하도록 하였다.
이 말씀에서 우리는 다섯가지 단계를 유의하여 보아야 한다. 첫째로 무한한 슬픔에
서 솟아난 불평이 눈에 띈다. 둘째로 그는 자기에게 치유가 필요하다는 것을 느낀다.
그리고 두려움에 압도당하지 않기 위하여 그는 자신에게 무슨 일을 어떻게 해야 좋을
지를 묻는다. 세째로 그는 아버지에게로 가서 자기를 구해 달라고 간구한다. 네째로
주님은 자기가 표현했던 소원이 자신이 소명에 상반되는 것임을 알고 이를 철회한다.
그리고 아버지께서 그에게 명한 것을 이루지 않는 것보다는 어떠한 고통이라도 받겠다
고 결심한다. 끝으로 그는 하나님의 영광 하나로 만족하고 나머지 모든 것을 망각하고
그런 것을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아버지께 순종하기 위하여 즉시 철회해야 할 소원을 토로했다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에게 어울리지 않는 일같아 보인다. 나는 이것이 십자가의 미련한 것으로 교만한
사람들에게 거치는 것이라는 사실을 인정한다. 그러나 영광의 주님께서 자신을 겸손하
게 낮추실수록 우리는 우리를 향한 주님의 무한한 사랑의 증거를 더욱 뚜렷하게 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이미 앞에서 말한 대로, 그리스도께서 가지고 있던 인간적인 감정
은 순결하고 죄와 관계가 없는 것이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되겠다. 그 이유는 그
감정들이 하나님을 순종하도록 규제되었다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죽음에 대한 자연
스러운 두려움을 갖는 것과 하나님을 순종하려는 욕망을 갖는 것을 막을 만한 어떠한
것도 없었다. 그러므로 그는 다음과 같은 말로 이를 시정했다.
아버지여 나를 구원하여 - 우리가 두려움에 싸여 낙담할 때나 슬픔으로 인하여 마음
이 억눌려 있을 때 우리가 준수해야 할 법칙은 즉시 하나님께로 우리의 마음을 돌리는
것이다. 우리를 괴롭게 하는 것에 대하여 속으로 걱정하는 것보다 더 잘못되고 해로운
것은 따로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세상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숨은 고통으로 인하여 괴
로와 하고 있는 것을 본다. 그리고 그것은 마음에 위로를 받기 위하여 하나님을 우러
러 보지 않는 모든 이들의 무관심에 대한 공의로운 심판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내가 이를 위하여 이 때에 왔나이다 - 비록 주님께서 정당하게 죽음을 두려
워 했다 하더라도, 자기가 보냄을 받은 이유와 중재자로서의 직분이 요구하는 것이 무
엇인가를 생각할 때, 그는 자신의 타고난 감각에 의하여 품었던 두려움을 아버지에게
내놓고 그 두려움을 제거하여 달라고 구했다. 아니 차라리 그 두려움을 가라앉히고 하
나님의 뜻을 기쁘게 이루어 드리겠다고 결심하였다. 이제 죄와 전혀 상관이 없었던 그
리스도의 감정은 주님께서 아버지께 순종하기 위하여 제어될 필요가 있었다. 우리는
이 문제를 심각하게 그리고 간절하게 다루지 않으면 안된다. 우리의 육신에서 솟아 나
오는 수많은 감정이 우리의 내면의 원수가 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또한 하나님의 뜻에
정면으로 배치되고 있는 이 감정들을 다스려야 할 뿐 아니라, 다른 면에서 악하거나
죄스러운 것이 아닌 감정이라도 우리의 소명에 방해가 되는 감정일 때는 이를 제거해
야 된다는 것을 유의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를 더욱 더 분명히 하기 위하여 우리는 첫
째로 하나님의 뜻을 중시해야 하겠다. 둘째로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주신 것과 같은,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 있었던 그러한 순수하고 완전한 인간의 뜻을 생각해야 할 것이
며, 끝으로 죄의 병에 의하여 감염된 우리 자신의 뜻을 생각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의
뜻은 그보다 못한 다른 모든 것이 순종해야 하는 대원칙이다. 이제 자연의 순수한 뜻
은 그 자체가 하나님께 대항하여 일어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이 온전히 의롭
게 지음을 받았다 할지라도 자신의 감정을 하나님께 복종시키지 않는다면 많은 장애물
에 부딪치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에게는 싸워야 할 싸움이 꼭 하나가 있었는데 그것은
자신이 육신적으로 두려워하던 것을,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을 아는 즉시 두려워하지
않도록 공포를 멈추는 것이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이중(二重)의 싸움이 있다. 우리
는 우리 육신의 완악함과 싸우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이다. 결국 용감한 씨름군이 부상
하나 입지 않고 이기는 일은 결코 없는 것이다.
12:28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 - 이 말씀에 의하여 주님은 무엇
보다도 아버지의 영광을 우선적으로 생각했으며 자신의 생명까지도 도외시하고 등한시
했다는 것을 증거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의 욕망을 참으로 제어하는 것은 다른 모든
것이 하나님의 영광 앞에 머리를 숙이도록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것이다. 우리가 평
온하고 고요한 마음으로 힘들고 괴로운 것을 모두 견뎌낼 수 있도록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것 자체를 충분한 보상으로 간주해야 할 것이다.
내가 이미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 다시 영광스럽게 하리라 - 이 말씀은 시편 138장 8
절에 "여호와께서 내게 관계된 것을 완전케 하실지라......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을
버리지 마옵소서"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목적은 십자
가의 거치는 것을 미리 제거하자는 데 있었기 때문에, 그는 그리스도의 죽음이 영광스
럽다고 약속하실 뿐만 아니라 그 죽음을 이미 여러가지 장식품으로 아름답게 꾸몄다고
말씀하고 있다.
12:29
우뢰가 울었다고도 하며 - 곁에 섰던 무리가 그와 같이 완연한 이적에 대하여 그
처럼 둔감했다고 하는 것은 기이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어떤 사람들은 귀가 멀어 있어
서 하나님께서 분명히 선언하신 것을 하나의 혼돈된 소리로만 들었다. 다른 사람들은
둔한 정도가 덜했으나 그 음성의 주인이 천사라고 돌려댐으로써 하나님의 음성의 권위
를 약화시켰다. 그러나 오늘날도 같은 현상이 만연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복음을 통
하여 아주 분명하게 말씀하고 계신다. 복음에도 하늘과 땅을 진동시킬 만한 성령의 능
력이 잘 나타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가르침이 마치 죽은 사람에게서 나온 것처
럼 복음에 냉담한 사람이 많이 있다. 반면에 다른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천둥 소
리에 불과한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야만인의 잔소리로 간주하고 있다.
그러나 하늘에서 울렸던 소리가 헛된 것으로서 아무 유익을 주지 못한 것이 아니냐
고 묻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나는 복음서 저자가 여기서 무리에 대하여 기술한 말
은 그들 일부의 태도를 말한 것이라고 대답한다. 사도들 이외에도 그 말씀을 바로 깨
달은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나 복음서 저자는 세상에 흔히 일어나는 일, 즉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큰 소리로 분명히 말씀하시는 것을 들으면서도 실제로 그의 음성
을 듣지 못한다는 사실을 간단하게 표현하기를 원했다.
12:30
나를 위한 것이 아니요 너희를 위한 것이니라 - 그리스도께서는 확증이 필요없었
던 것일까? 아니면 아버지께서 주님보다도 우리를 더 염려하신 것일까? 우리는 다음의
원칙을 지키지 않으면 안되겠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육신을 입으셨기 때문
에, 주님께서 아버지로부터 받은 모든 축복은 우리를 위한 것이다. 그리고 하늘에서
들렸던 음성은 우리를, 즉 사람들을 위한 것이었다. 주님께는 외부적인 이적이 필요치
않았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여기에는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막고 있다
는 질책이 나타나 있따. 귀를 기울이지 않은 그들의 배은망덕한 태도는 용서할 수 없
는 것이기 때문이다.
12:31
지금 인자가 영광을 얻었고 - 마지막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리스도께서는 제
자들의 마음이 얼마나 연약한가를 알고 계셨기 때문에 그들을 가능한 한 모든 방법을
통해서 부축해 줌으로써 그들이 실수하지 않기를 바라셨다. 오늘날도 그가 십자가에서
사단, 죄, 그리고 사망을 이기시고 승리하셨다는 위로가 우리에게 없다면 우리는 그리
스도의 십자가를 생각할 때 무서운 마음을 금할 수 없을 것이다. 사도들은 주님께서
갖은 모욕을 받으시며 십자가로 끌려 가는 것을 보았을 때 어떠 했을까? 그 처참하고
흉칙한 광경을 보았을 때 백번이면 백번 다 어인이 벙벙하게 되지 않았겠는가? 그러므
로 그리스도께서는 이 위험을 미리 내다 보시고 그의 죽음의 외적인 면에서 영적인 성
과를 내다 보게 하고 있다. 따라서 십자가에서 신자들을 당황하게 만드는 치욕이 제
아무리 크게 부각되더라도 바로 이 십자가가 그에게 영광스럽다는 점을 그들에게 증거
하시고 있다.
다음에 곧 이어지는, "하나님도 인자를 인하여 영광을 얻으셨도다"하는 말씀은 확증
을 위한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적으로 볼 때 그처럼 흉칙한, 아니 하나님 앞에 저주받
은 그 죽음에서 인자의 영광이 드러난다는 것은 역리(paradox)가 아닐 수 없기 때문이
었다. 그러므로 그는 그가 그러한 죽음을 통해서 영광을 받는 것은 바로 그가 아버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때문이라는 점을 밝혀 주고 있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의 십
자가는 하나님의 비길 데 없는 선하심을 온 세상 앞에 제시하는 휘황찬란한 극장과 같
다. 물론 하나님의 영광은 크고 작은 모든 피조물을 통해 빛나고 있지만 그러나 십자
가에서 처럼 그렇게 찬란하게 드러나지는 않는다. 이 십자가야말로 만물의 놀라운 변
화(admiraailis rerum conversio)가 일어난 현장이었다. 곧 모든 인간의 저주가 드러
나고, 죄가 말끔히 씻겨졌는가 하면 인간에게 구원이 회복된 현장이었다. 한마디로 온
세상이 새롭게 되고 만물이 질서를 회복한 곳이었다.
물론 '안에서'(in)라는 전치사가 히브리어 * (벧)로 쓰이는 경우가 많고 그런 경우
에는 '통해서'라는 말과 동일한 의미를 지니지만 나는 그저 '하나님께서 인자 안에서
영화롭게 되고 있다'로 번역하는 편을 택한다. 이것이 더 강조적인 의미를 지닌다.
"하나님도.....영광을 얻으셨도다"에서 '도'(and)는 원인접속사(for)로 보는 것이
마땅한 것 같다.
12:32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 - 그 다음에 나오는 것은 심
판이 어떻게 결정되느냐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들리시면 사람을 땅에서 하
늘로 끌어 올리기 위해서 모든 사람을 자기에게도 모을 것이다. 복음서 저자는 그리스
도께서 자신의 죽음이 어떤 방법으로 이루어질 것인가를 보여주고 있다고 말하고 있
다. 그러므로 이 말씀이 의미하는 바는 십자가가 주님께서 모든 사람을 아버지께로 끌
어 올리는 일종의 운반수단이 되리라는 것이다. 그런 후 그리스도께서는 땅에서 들어
올리워 가신 후 인간과 더 이상 아무런 관련을 갖지 않게 되리라고 생각되었을 것이
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자기의 떠남이 매우 다른 형태로 이루어 질 것이라고 선언하고
있다. 주님께서는 땅에 있는 사람들을 자기에게로 이끌 것이기 때문이다. 비록 주님께
서 자신의 죽음의 형태에 대하여 말하고 있지만, 그는 자신을 인간과 분리시키기 위한
떠남이 아니라 땅을 하늘로 끌어 올리기 위한 새로운 방법임을 뜻하고 있다.
주님께서 '모든 사람'이라고 말씀하실 때, 그것은 자기 양떼에 속한 하나님의 자녀
들을 가리켜 말씀하고 있음이 틀림없다. 그러나 나는 교회는 이방인과 유대인 중에서
모아져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보편성이 있는 낱말을 사용하였다고 설명
한 크리소스톰(Chrysostom)과 동감이다.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요
1910:16) 라틴어 번역에는 "내가 모든 것을 내게로 이끌겠노라"고 되어 있는데, 어거
스틴은 이 말씀이 마땅히 그렇게 번역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헬라어 사
본이 모두 이와 일치하고 있다는 점이 우리에게는 더 중요한 것이다.
12:34
우리는 율법에서 그리스도가 영원히 계신다 함을 들었거늘 - 의심할 여지없이 그
들은 악의적으로 그리스도의 말씀에 트집을 잡으려고 했다. 그리고 그들의 악의는 그
들의 눈을 완전히 멀게 하여 그들은 밝은 빛 가운데서도 아무 것도 볼 수가 없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간주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것은 율법은 그리스도 즉 메시아
가 영원히 계신다고 하는데 비하여 예수께서는 죽는다고 말씀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들은 마치 율법이 그리스도께서 죽으실 것과 또 그리스도의 나라가 세상 끝날까지
흥왕할 것을 결정적으로 선언하지 않기라도 한 것처럼 이러한 트집을 잡는 것이다. 그
러나 그들은 중상모략을 위한 구실로써 두번째 귀절을 붙들고 늘어지고 있다. 그들의
근본적인 실수의 원인은 메시아의 나라의 영화를 그들의 육신적인 감각으로 판단했다
는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가 그들의 개념에 부응하지 않기 때문에 그들은 그리스도
를 배척한다. '율법에서'라는 말을 쓴것을 보면 그들은 선지자들의 글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계신다(rdmaineth)라는 현재 시제는 히브리어의 용법을 따라서 미래시제를 대
신하여 쓰인 것이다.
이 인자는 누구냐 - 라는 질문은 그리스도께서 마치 그 조그마한 논박에 의하여 패
배당하기라도 한 것처럼, 그 말속에 조소를 포함하고 있다. 이것은 인간의 무지가 얼
마나 교만스러운 것인가를 보여주고 있다. 그들은 마치 "할 테면 해보아라, 네 자신의
고백이 네가 그리스도와 아무런 관련이 없음을 입증하고 있는데 스스로 그리스도라고
자랑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12:35
아직 잠시 동안 빛이 너희 중에 - 주님께서는 그의 대답을 통하여 부드럽게 그들
을 권면하고 있다. 그리고 동시에 그들의 양심을 날카롭게 찌르고 있다. 주님께서는
그들이 빛에 대하여 눈이 멀어 있다고 책망하고 있으며 그 빛이 곧 그들로부터 취하여
감을 입을 것이라고 위협하고 있다. 잠시동안 빛이 남아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실 때
그는 자기 죽음에 대하여 이미 앞에서 말한 것을 확인하고 있는 것이다. 비록 빛이 그
의 육신적인 임재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복음을 의미하는 것이지만, 그는 자기의
떠남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 그는 마치 "내가 떠나간 후에라도 빛의 역할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내 안에 있는 어떤 것도 너희의 어두움으로 인해 감소되지는
않을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과 같다.
주님께서 "빛이 너희 중에 있을 동안에"라고 말씀하실 때, 그는 그들이 눈을 감고
빛을 막고 있음에 대하여 간접적으로 책망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은 그들의
반대에 대답할 가치가 없다고 말씀하고 있다. 그것은 그들이 일부러 득죄할 기회를 찾
았기 때문이다.
주님께서 빛을 잠시동안 그들 위에 비친다고 말씀하실 때, 이 말씀은 모든 믿지 않
는 자들에게 적용되는 것이다. 성경은 의(義)의 해가 떠올라서 결코 지지 않을 것이라
고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약속하고 있다. "다시는 낮에 해가 네 빛이 되지 아니하며 달
도 네게 빛을 비취지 않을 것이요 오직 여호와가 네게 영영한 빛이 되며 네 하나님이
네 영광이 되리라"(사60:19). 그러나 모두가 조심스럽게 행하지 않으면 안된다. 어두
움이 빛을 미워하여 그 뒤를 따르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와 같이 어두운 밤이 이
때까지 여러 세기 동안 세상에 깔려 있었던 것은 하늘의 밝은 지혜의 빛으로 나아가려
고 노력한 사람이 너무나 적었기 때문이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복음을 통하여 우
리의 길을 비춰주심으로 우리가 그의 구원의 길을 따르도록 하신다. 그러므로 하나님
의 은혜를 활용하지 않는 사람들은, 힘이 낳는 데까지, 자기들에게 주어진 빛을 끄는
것이다.
더 많은 공포를 그들에게 안겨주기 위하여,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빛이 없이 그 일생
전체를 그릇된 방향으로 비뚤어지게 행하고 있는 사람들의 처지가 얼마나 비참한 것인
가를 경고하고 있다. 그들은 미끄러지거나 넘어질 위험을 언제나 지니고 걸을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님께서 우리 위에 비추시지 않는다면 우리가 어두움 안에 거
하고 있다고 그리스도께서는 선언하고 있다. 여기서 여러분은 인간의 마음이 그리스도
를 떠나 스스로 지도자와 선생노릇을 하려고 할 때 그 가치가 얼마나 보잘 것 없는 것
인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12:36
빛을 믿으라 - 주님은 그들에게 믿음으로 그 빛을 소유하라고 권고하고 계신다.
주님께서는 그들을 끝까지 빛의 상속자로서 빛을 즐길 빛의 자녀들이라고 부르고 있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 주님께서 자기를 환영하는 사람들로부터 물러 갔다는
것은 이상하게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다른 복음서의 저자들로 부터 이것이
그의 원수들을 두고 말씀하신 것임을 쉽게 알 수 있다. 그들은 이 선하고 진지한 사람
들의 경건한 열심으로 인하여 분노에 차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를 만나기 위해서
나갔던 외국인들은 주님께서 서기관들과 성내 군중과 어울렸던 성전까지 주님을 따라
갔기 때문이다.
12:37
이렇게 많은 표적을 저희 앞에서 행하셨으나 - 복음서 저자는 그리스도께서 유대
인들에게 멸시를 받았다 해서 사람들의 마음이 흔들리는 일이 없도록 주님께서 분명하
고 확실한 증거를, 즉 자신과 자신의 가르침에 권위를 부여하는 증거를 부여받았음을
보여줌으로써 그 거침돌을 제거했다. 그러나 주님의 기적 가운데 밝게 빛났던 하나님
의 영광과 능력은 눈먼 자들에게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이 믿지 않았
던 것은 그리스도의 잘못 때문이 아니었다는 것을 우리는 먼저 깨달아야 한다. 주님께
서는 많은 기적을 행하여 자기가 누구인가를 충분히 증거하셨다. 그러므로 믿지 않는
불신앙의 이유를 그리스도에게서 찾으려고 하는 것은 부당할 뿐만 아니라 도저히 이치
에 맞지 않는 태도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능력이 눈에 보이
게 나타났는데도 어리석게 그를 신뢰하지 않은 이유가 무엇일까에 대하여 걱정하고 염
려할 것을 우려하여, 요한은 믿음이라는 것이 일반적인 인간의 기능에 속하는 것이 아
니라 하나님께로서 나는 특별한 선물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복음을 믿는 사람이
거의 없을 것이라고 그리스도에 대하여는 이미 전에 예언되어 있었다.
12;38
이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씀을 - 요한은 이 예언이 유대인들에게 어떤 필연적 결과
를 요구하고 있는 것이 아님을 뜻하고 있다. 이사야는 주님께서 그의 비밀한 뜻의 보
고로부터 그에게 계시할 것만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선지자가 침묵을 지켰다 하더
라도, 이 일이 일어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선지자의 입을 통하여
증거하지 않았을 경우, 무슨 일이 일어날지를 아무도 몰랐을 것이기 때문에, 예언을
통하여 복음서 저자는 사람들에게 모호하고 의아스럽게 보였을 것을 거울로 보여주듯
이 그들의 눈앞에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주여 우리에게 들은 바를 누가 믿었으며 - 이 문장은 두개의 귀절로 되어 있다. 이
사야는 이미 그리스도에 대하여 말씀하셨다. 그리고 그가 그리스도에 대하여 선포하는
것과 그후에 사도들이 전파하는 내용이 사방에서 유대인의 반대에 직면할 것을 알고
이사야는 어떤 무서운 짐승에게 놀란 것처럼 먼저, "주여 우리에게 들은 바를 누가 믿
었으며"라고 묻고 있는 것이다. 둘째 귀절에서 이사야는 왜 사람 수가 적은지를 즉 사
람들이 자신의 노력에 의하여 여기에 이를 수 없기 때문임을 인정하고 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분별없이 모든 사람을 다 깨닫게 하시고 마음에 빛을 비춰주는 분이 아
니다. 다만 적은 수의 사람들에게 성령의 은혜를 베풀어 주신다. 그리고 유대인 중의
소수가 완강하게 믿지 않은 것이, 믿는 자들에게 장애가 되지 않았다면, 오늘날도 복
음을 따르는 제자 수가 적다 해서 복음을 부꾸러워 할 이유는 없다. 그러나 우리는 먼
저 이에 첨가된 이유, 즉 믿는 자들을 만들어낸 것은 그들 자신의 식견이 아닌 하나님
의 계시였다는 사실을 유의해야겠다. 팔(arm)이라는 말은-이미 잘 알려져 있는 대로-
능력을 의미한다. 선지자는 복음의 가르침 속에 포함되어 있는 하나님의 팔이 계시될
때까지 감취어 있다고 선언하고 있으며, 동시에 그는 모든 사람이 이 계시에 다 참여
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들이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기
때문에 많은 사람이 내적인 빛이 없이 어두움 가운데 남아있음을 알 수 있다.
12:39
저희가 능히 믿지 못한 것은 이 까닭이니 - 이것은 약간 가혹하게 들린다. 왜냐하
면 선지자의 말에 의하면 유대인들이 어떠한 선택도 하기 전에 눈이 먼 운명에 처해
있었기 때문에 유대인들에겐 길이 막히고 믿을 만한 능력도 빼앗기게 되었던 것이다.
나는 하나님께서 예견하신 것과 달리 아무것도 일어날 수 없다고 한다면 거기엔 아무
런 모순도 없는 것이라고 대답한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께서 미리 예지하셨다는 것
이 사태의 원인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주의해야겠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의
예지(豫知)보다도 하나님의 심판과 진노에 더 관심이 있다. 하나님께서는 하늘에서 인
간이 무엇을 행할 것인지를 보신다고 말하지 않고 자기가 친히 어떻게 하시겠다고, 즉
경건치 아니한 자들을 어리석음과 혼미함으로 치심으로 그들의 악의에 진노하실 것을
선언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이 말씀에서 하나님께서는 왜 그의 말씀으로 하여금 유대
인들에게 치명적이고 파괴적인 영향을 미치도록 의도하시는지를 지적하고 있다. 그들
의 악의적인 행동으로 볼 때 그들은 그러한 대우를 받아 마땅했다.
그들이 이러한 처벌을 피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상실된
마음 가운데 넘겨 주고 하나님의 말씀의 빛을 그들의 어두움으로 변화시킬 것을 일찌기 작정하셨기 때문이다. 이 예언은 전자와 다르다.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그의 풍성한 은혜 가운데 자기의 선하신 뜻대로 깨우쳐 주시는 자만이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원인은 아직 밝혀지지 않고 있다. 모든 사람들이 한결같이 멸망을 받은 상태에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단순히 자신의 선하심 가운데 몇몇 사람을 자기의 선을 따라 구분하셨다. 그러나 이 말씀에서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감사하지 아니하는 백성의 악을 어떻게 심판하시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차이점을 유의하지 못하는 사람은 성경의 여러가지 복합적 의미를 혼돈하게 된다.
12:40
저희 눈을 멀게 하시고 - 이 말씀은 주님께서 선지자 이사야에게 그의 가르침의
노고가 백성을 더 악하게 하는 결과 밖에 가져오지 못하리라고 미리 경고하셨던 이사
야 6장 9절부터 10절에서 인용된 것이다. 첫째 주님께서는 "이 백성에게 가서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한다고 말하라"고 말씀하고 계신다. 주님은 마치 "내가 너를 귀머거
리에게 보내노니 그들에게 가서 말하라"고 명하신 것과 같다. 그는 나중에 "이 백성의
마음으로 둔하게 하고 그귀로 막히고 눈이 감기게 하라"고 덧붙이고 계신다. 이러한
말씀에서 주님은 자기의 말씀으로 버리운 자들에게 심판(처벌)이 되게 하심으로 그들
의 눈먼 상태가 악화되어 더 깊은 어두움에 빠지게 하셨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의 마음을 가르침의 빛으로 압도함으로 모든 깨달음을 그들로부터 빼
앗아간다는 것은 참으로 무서운 심판이 아닐 수 없다. 하나님께서는 그들 자신의 빛으
로부터 그들 위에 어두움을 가져다 주시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을 눈멀게 만드는 일이 우연적인 것임을 유의하
여야겠다(accidentale esse Verbo Dei). 진리가 거짓과 차이가 없고 생명의 떡이 죽음
을 가져다 주는 독이 되고 약이 병을 악화시킨다는 것보다 이치에 맞지 않는 것은 없
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생명을 죽음으로 바꾸어 놓는 장본인은 인간의 사악한 마
음이다.
그리고 또한 우리는 하나님께서 사단이나 거짓 선지자들을 통하여 사람들의 분별력
과 명철을 빼앗아가도록 만들어, 사람의 마음 눈을 멀게 하실 때가 있음을 유의해야
한다. 이럴 때 주님께서는 그들의 사기 협잡을 통하여 그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만드신
다. 그러나 선지자들이 충실하게 가르치는 일에 헌신하고 자신의 일의 열매를 주님께
맡기는 한, 비록 그 결과가 바라는 것만 못하다 하더라도 포기하거나 흔들려서는 안될
것이다. 오히려 하나님의 종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노고를 인정하심을 아는 것으로
만족해야 할 것이다. 그 가르침이 인간에게 무익하고 믿지 않는 자들은 그 도를 자신
에게 치명적인 것으로 간주할지라도, 그것이 바울이 증거하고 있는 것처럼(고후2:15)
하나님께는 선하고 아름다운 향기가 되는 것이다.
성경에는 마음(heart)이 때때로 감정의 처소로 간주되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는 다
른 데서와 마찬가지로 이것은 혼(soul)의 지성적인 부분을 뜻한다. 모세도 같은 뜻으
로 말하고 있다. "그러나 깨닫는 마음과 보는 눈과 듣는 귀는 오늘날까지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지 아니하셨느니라(ad intelligendum)" (신29:4).
이는 저희로 하여금 눈으로 보고 - 우리는 선지자가 여기서 이미 하나님의 은혜를
배척한 믿지 않는 자들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주님께서 택한 자들로
하여금 자기에게 복종케 하지 않았다면 모든 사람들은 타고난 성품을 따라서 계속 주
님의 은혜를 배척했을 것이다. 우선 인간의 상태는 한결같이 동일한 것이다. 그러나
잃어진 자들이 스스로 저들의 죄악으로 인하여 하나님께 반항할 때 그들은 스스로를
잃어진 마음에 넘기우고 점점 더 멸망으로 치달음으로써 이와 같은 진노의 대상이 될
수 있는 여지를 만드는 것이다. 만일 하나님께서 그들을 구원하려고 하지 않는다면 그
것은 그들 자신의 잘못이다. 그들 자신이 자신의 절망을 초래한 장본인들이기 때문이
다. 이 선지자의 말씀에서 우리가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변화의 시작이 어떠한 것인지
를 간단히 배울 수 있다. 그것은 사단의 어두움에 잡혀 있는 동안 주님을 떠나 있던
우리 마음에 하나님께서 빛을 비쳐주실 때이다. 하나님의 밝은 빛의 능력은 위대한 것
이니 만큼 그 빛은 우리를 인도하여 하나님의 능력으로 변화시킨다.
선지자는 고침을 받는 것이 변화의 결과라고 부언하고 있다. 이 말에서 선지자는 하
나님의 진노에서 초래되는 모든 재앙으로 부터의 구원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축복과
번창하는 상태를 뜻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것이 하나님의 말씀의 성격과 반대로 잃
어진 자들에게 떨어진다고 하면, 우리는 그 반대의 경우에 유의해야 하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전파되는 목적은 우리를 하나님의 참된 지식 안에서 깨우치
고 우리를 하나님께로 돌이켜 우리가 복을 받아 행복하도록 우리를 그에게 화목시키는
것이다.
12:41
이사야가 이렇게 말한 것은 주의 영광을 보고 주를 가리켜 말한 것이라 - 읽는 자
들이 이사야의 예언이 잘못 인용되었다고 생각하지 않도록, 요한은 선지자가 한 시대
의 교사로 보냄을 받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리스도의 영광이 그에게 나타나 주의 통
치 하에서 일어날 일들을 증거하게 하셨다고 직접 말하고 있다. 선지자들이 하나님께
서 받은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해주자는 것 외에 선지자의 예언적 계시에 다른 무슨
목적이 있겠는가? 복음서 저자는 이사야가 그리스도의 영광을 보았다는 것을 당연시하
고 있다. 그리고 여기서 요한은 이사야가 그의 가르침을 앞으로 올 그리스도의 나라에
적용시키고 있음을 유추하고 있다.
12:42
그러나 관원 중에도 저를 믿는 자가 많되 - 유대인들이 광란한 광포의 와중에서
그리스도를 무자비하게 배척했을 때 그들이 마지막 한 사람까지 모두 그리스도를 죽이
려고 모의한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복음서 저자는 백성이 온통 미쳐 있는 가
운데서도 많은 사람들이 온전한 정신을 유지하고 있었다고 말하고 있다. 이는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의 훌륭한 본보기가 아닐 수 없다. 믿지 않는 자들의 불경건이 일단 득
세하게 되면 그것이 온몸에 전염되는 것이 세계적인 전염병처럼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와 같이 부패한 백성 중에서 때묻지 않은 채로 깨끗함을 유지한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놀라운 은사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오늘날도 똑같은
하나님의 은혜를 목격하고 있다. 비록 하나님께 대한 경멸과 불신앙이 도처에 퍼져있
고 많은 사람들이 복음의 교훈을 뿌리 채 뽑아버리려고 발악하고 있지만, 믿음이 세상
에서 완전히 추방되는 일이 없도록 믿음이 피할 수 있는 안식처가 있게 마련이다.
"관원 중에도"에서 '도'라는 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관원들 사이에는 공격적으로
위험스럽게 복음을 증오하는 대세가 결정적이었는데, 그러한 와중에서 단 한 사람이라
도 믿는 자가 있었다는 것은 믿기 어려운 사실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문이 열려 있지
않은 곳을 침투해 들어간 하나님의 성령의 능력이다. 관원들이 그리스도에게 완악하게
불순종하는 것은 그 시대만의 특징은 아니었다. 명예와 재산과 계급에는 대개 교만이
따르게 마련이다. 그 결과 교만으로 들떠 있어 스스로 인간이라는 것을 인정하려 하지
않는 자들은 여간해서 자발적인 겸손에 의해서 낮아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참으로 높임을 받은 사람은, 계급이 그에게 장애물이 되지 않도록, 자신
의 계급을 신뢰하지 않을 것이다. 요한이 관원 중에 저를 믿는 자가 많다고 말할 때
에, 믿는 자들이 다수를 차지했거나 무리의 반 정도 되었던 것처럼 이해해서는 안되겠
다. 믿지 않는 나머지 무리에 비하면 믿는자의 수는 소수에 불과했다. 그러나 그들만
따로 헤아릴 때 믿는 자는 많은 것처럼 간주되었던 것이다.
바리새인들을 인하여 - 믿음과 고백을 분리시킬 때 요한은 틀리게 말하고 있는 것처
럼 보인다.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기"(롬
10:10)때문이다. 마음에 불붙은 믿음이 불꽃을 자아내지 않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나는 요한이 여기서 저 미지근하고 냉담한 사람들의 믿음이 얼마나 약한 것인
가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라고 대답한다. 간단히 말해서, 요한은 그들이 그리스도의 가
르침이 하나님께로 난 것임을 알았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교훈을 받아들였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믿음은 생동력이 있거나 강한 믿음이 아니었다. 그리스도
께서는 자기의 소유된 백성에게 두려움의 영을 주지 않고 담대한 영을 주심으로 그들
로 하여금 그리스도로 부터 배운 것을 담대하게 고백할 수 있도록 하시기 때문이다.
나는 그들이 완전히 침묵을 지켰다고 믿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의 고백이 솔직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복음서 저자는 내가 생각하기에 그들이 신앙을 고백하지 않은 것으
로 기록하고 있는 것 같다. 그들이 드러내 놓고 참된 신앙고백하지 않은 것으로 기록
하고 있는 것 같다. 그들이 드러내 놓고 참된 신앙고백을 했다면 그들은 공개적으로
그리스도와 짝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람의 미움을 사는 것이 두려워 스스
로의 믿음을 감추거나 가장하는 자는 누구도 스스로 자랑할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이 아무리 증오스럽다 하더라도 우리로 하여금 조금이라도 그리스도를 고백하는
데서 주저하도록 만드는 겁장이는 스스로 핑계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또한 지
도자들이나 관원들에게 용기와 담력이 결핍되어 있음을 유의해야겠다. 그것은 항상 그
들 속에 야망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며 그보다 더 비굴한 일이 없기 때문이다. 한마
디로 간단히 말한다면 세상의 명예란 사람으로 자유롭게 그의 본분을 행사하지 못하도
록 사람을 얽어매는 금사슬이라 불러서 좋을 것이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세상에 이
름이 나 있지 않은 가난한 사람들은 더 큰 인내심을 가지고 그들의 처지를 감수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들은 적어도 많은 세상의 올무에서 자유롭기 때문이다. 그러나 위대
하며 고명한 자들은 그들의 운명을 개척하기 위하여 투쟁하지 않으면 안된다. 따라서
그들은 스스로를 그리스도께 복종시킬 수가 없도록 자신을 방해하는 것이다.
요한은 그들이 바리새인들을 두려워 하였다고 말하고 있다. 다른 서기관이나 제사장
들이 어떤 사람에게 스스로를 그리스도의 제자로 부를 수 있도록 허락했기 때문이 아
니다. 그들 속에-열심이라는 탈을 쓰고-잔인한 성품이 더 큰 난폭성을 지니고 불타고
있었기 때문이다. 신앙을 변호하는 열심은 물론 훌륭한 미덕이다. 그러나 위선이 거기
에 부가될 때 그보다 더 위험한 전염병은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의 영의 확실한
척도에 따라 우리를 인도해 주실 것을 주님께 간구해야 할 것이다.
이는 출회를 당할까 두려워함이라 - 그들의 자유로운 행동을 제어했던 것은 부끄러
움을 당할 것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그들은 성전에서 출회를 당하지 않으면 안되었던
것이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최상의 예식을 부패케 하고 더럽게 만들 뿐만 아니라 이를
파괴적인 횡포로 전락시키는 인간의 타락상이 나타나게 된다. 누구든지 교회를 멸시하
면 즉각적인 처벌이 따른다는 의미에서 출교는 거룩한 법칙으로 활용되어야 했을 것이
다. 그러나 이것은 누구든지 그리스도에게 속한다고 자신의 신분을 고백하는 자를 성
도의 교제로부터 추방하는 절차로 쓰이고 있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로 교황은 같은
종류의 횡포를 행사하기 위하여 거짓되이 출교권(파분권)을 주장하고 있으며 모든 경
건한 자들에게 맹목적인 분노를 발산할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를 그의 보좌로부터 끌어
내리려고 발악하고 있는 것이다. 교황은 그리스도께서 교회에 부여했던 거룩한 치리권
을 뻔뻔스럽게 주장하는 일을 주저하지 않는다.
12:43
저희는 사람의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보다 더 사랑하였더라 - 복음서 저자는 이 사
람들이 어떤 미신에 의하여 감동을 받은 것이 아니라 다만 사람들 중에서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으려고 회피책을 쓰고 있었다고 직설적으로 말하고 있다. 만일 하나님께 대
한 경외심보다 야망이 그들의 마음에 더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면, 그들은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고 행동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이제 독자들은 사람의 인
기를 얻지 못할 것을 두려워하여 사람들 중에서 그들의 믿음을 가장하는 자들의 비겁
한 행동이 하나님의 목전에서 얼마나 불명예스러운 것인가를 유념해야 할 것이다. 하
나님의 판단보다 인간의 하찮은 인정을 받는 것이 얼마나 더 어리석고 야만적인 것인
가? 그러나 요한은 사람의 인정을 받지 못할 것을 두려워하여 순진한 믿음을 고백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이러한 광기로 가득차 있다고 선언하고 있다. 따라서 사도는 모세의
담대한 믿음을 칭찬할 때에, "보이지 아니하는 자를 보는 것같이 하여 참았으며"(히
11:27)라고 말하고 있다. 이 말씀에서 그는 누구든지 그 눈을 하나님께 고정시키고 있
을 때 그의 결의가 꺽일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배신에 찬 가면과 허위에 굴복하는 유연함은 우리의 지각이 세상을 보고 마비되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참으로 뵙게되면 즉시 부와 영예가 안개처럼 사라지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를 간접적으로 부인하는 것을 사소한 것으로 생각하는 자들을 멀리 하라! 성
령께서는 오히려 이러한 해괴한 행동이 천지가 혼돈된 것보다도 더 무서운 것이라고
선언하고 있다.
사람의 영광을 더 사랑했다는 말은 사람들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으려고 했다는 뜻이
다. 따라서 복음서 저자는 그들의 마음이 세상에 팔려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보다도 사
람을 기쁘게 하려고 했음을 지적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그가 그리스도를 부인한 사람
들의 죄악을 송사할 때에 그는 동시에 제사장들이 남용했던 출교권이 하나님과 인간의
법에 저촉되는 것으로서 헛되고 무가치한 것임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므로 교황이 우
리를 향하여 내뱉고 있는 모든 저주의 발언은 우리를 그리스도로부터 멀리 유인하려고
하는 공허한 협박에 불과하다는 것을 유의하자.
12;44
예수께서 외쳐 가라사대 나를 믿는 자는 나를 믿는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며 - 그리스도의 이와 같은 선언은 그의 백성을 올바르고 흔들리지 않는 믿
음으로 격려하자는 데 목표가 있다. 그러나 여기에는 그들의 비뚤어진 두려움을 바로
잡기 원해서 주님께서 그들을 책망하는 내용이 담겨있다. 외침은 열렬한 결의를 나타
낸다. 그것은 단순한 교훈이 아니라 그들을 더 예리하게 자극하기 위한 격려의 말씀이
었기 때문이다. 이를 요약하자면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은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을 의
지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신뢰한다는 것이다. 믿음은 그리스도에게서 하나님께 속
한 것 외에 다른 것을 발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아니 믿음은 하나님의 얼굴을 정면으
로 바라보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의심에 차서 믿음이 흔들리는 것은 어리석
고 가치없는 일이라고 결론을 내리고 있다. 하나님의 진리에 불만을 품는 것보다 하나
님께 더 모욕적인 것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람을 믿지 않고 하나님을 믿는 확
신 위에 의지하고 있는 사람은, 그리고 굳건히 사단의 갖가지 술책에 대항하여 조용히
버티는 사람은 복음의 혜택을 보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마땅한 영광을 돌
려드리기 위해서는, 세상이 흔들리고 사단이 하늘아래 만물을 흔들어 놓고 전복시킨다
해도 믿음 위에 굳게 설 줄을 알아야 한다.
믿는 자들은 그리스도의 인간적인 외모에 멈추어서서 그 이상을 보지 않을 때 그리
스도를 믿는다고 말할 수 없다. 주님은 자신을 아버지와 비교하면서 우리에게 아버지
의 능력을 바라보라고 말씀하고 있으며 육신이 연약함에는 아무런 힘이 없기 때문이
다. 그리스도께서 나중에 제자들에게 자기를 믿으라고 권고하실 때는, 그 의미가 다른
것이다. 그 말씀에는 그리스도께서 인간과 대조를 이루고 있지 않다. 오히려 그리스도
께서 그의 모든 은사와 함께 제시되어 있다. 이것은 우리의 믿음을 뒷받침하기에 충분
한 것이다.
12:45
나를 보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보는 것이니라 - 여기서 '보는 것'(behold)은
'아는 것'(knowledge)을 의미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각종 혼란에 계속 빠져들
수 밖에 없는 우리의 양심을 참으로 진정시키기 위하여 주님은 우리를 불러 아버지께
로 인도하고 있다. 믿음은 세상을 초월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 기반이 확실하고 안전한
것이다. 이제 그리스도께서 참으로 알려질 때 하나님의 영광은 그리스도 안에서 빛난
다.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의 믿음이 사람 위에 서 있지 않고 영원한 하
나님께 기초를 두고 있다는 것을 확실히 알게 된다. 그 때에 믿음은 그리스도의 육신
을 넘어 그의 신성을 바라보기 때문이다. 이것이 이러하기 때문에, 이 사실은 우리 마
음에 영원히 심겨져 필요할 때는 우리의 혀를 통해 담대히 표현되어야 할 것이다.
12:46
나는 빛으로 세상에 왔나니 - 주님은 그의 제자들의 담력을 더하여 줄 목적으로
한 걸음 더 나아가 믿음의 확실성을 선포하고 있다. 첫째로 주님은 사람들을 어두움과
방황으로부터 건져낼 수 있도록 빛으로서 세상에 왔다고 증거하고 있다. 동시에 주님
은 "누구든지 나를 믿는 자는"이라고 말씀하실 때 우리가 어떻게 그와같이 큰 축복을
받을 수 있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뿐만 아니라 주님은 복음의 가르침을 받은 후에도
불신자들로 부터 스스로를 분리시키지 않는 자들의 배은망덕을 책망하고 있다. 어두움
에서 빛으로 부름을 받는 축복이 두드러지게 나타날수록 한때 자기 안에 붙었던 불
(빛)을 게으름과 나태함으로 꺼버린 사람들은 더욱 핑계할 구실을 잃게 된다.
"나는 빛으로 세상에 왔나니"라는 말씀 속에는 굉장한 비중이 있다. 비록 그리스도
께서는 처음(태초)부터 빛으로 계셨지만, 그에게는 자신이 빛의 일을 하기 위하여 세
상에 왔다고 주장하심으로 자신을 나타낼 만한 이유가 충분히 있었다. 그리고 여러 단
계를 명확히 우리가 구분할 수 있도록, 주님은 먼저 자기가 스스로를 위한 빛이기보다
는 다른 이들을 위한 빛이며 둘째로 천사들을 위할 뿐만 아니라 사람들을 위한 빛이
되신다는 것과 세째로 충만한 빛 가운데 비칠 수 있도록 육신으로 나타나신 바 되었다
고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다.
"무릇"(누구든지)이라는 말은 모든 믿는 자들이 예외없이 공통적으로 이 혜택을 누
릴 수 있도록 하고 또 믿지 않는 자들은 스스로의 뜻에 의하여 빛으로부터 도피하기
때문에 어두움 가운데서 멸망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하여 일부러 쓴 표현인 것 같다.
세상의 모든 지혜를 한 군데 끌어 모은다고 해도 참된 빛은 한 줄기도 그 무더기 속
에서 찾아볼 수 없을 것이다. 오히려 그것은 아무런 형태가 없는 혼란에 불과할 것이
다. 우리를 어두움에서 구하는 일은 오직 그리스도의 권한에 속한 것이기 때문이다.
12:47
사람이 내 말을 듣고 지키지 아니할지라도 - 주님께서 지금까지 그의 은혜에 대하
여 말씀하시고 제자들에게 믿음 안에 굳건히 서있을 것을 권면하셨던 것에 비추어, 이
제 주님은 반항하는 자들을 찌르기 시작하신다. 그러나 여기서도 주님은 하나님을 배
척하기를, 마음을 먹고 있던 자들의 경건치 아니한 상태에 어울리는 준엄한 말씀을 하
지 않고 그 강도를 부드럽게 약화시키고 있다.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심판을 선언하는
일을 뒤로 미루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자기는 오히려 모든 사람을 구원하기 위하
여 세상에 왔다고 밝히고 있다. 우리는 여기서 주님께서 믿지 않는 자들에 대하여 일
반적으로 말씀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제시된 복음의 도를 알며서도 고의적으
로 배척하는 자들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러면 왜 그리스도께서 그
들을 심판하기를 원하지 않으신 것일까? 그것은 주님께서 재판관(판사)의 직분을 잠시
제쳐놓고 모든 사람이 회개할 수 있도록 격려를 받을 수 있게 하기 위하여 차별 없이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제시하면서 그의 팔을 만민에게 뻗치고 있다. 그러나 주님은 그
와 같이 은혜로운 초청을 거절하는 죄를 중요한 항목으로 취급하고 있다. 주님은 마치
"보라, 나는 모든 사람을 부르러 왔다. 재판관의 직분을 잊은 채 내가 목적하는 한 가
지는 이미 이중으로 멸망을 당한 것처럼 보이는 자들을 이끌어 멸망에서 구해내는 것
이다"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구원의 아름다운 소식을 비웃고 고의적으
로 자신에게 멸망을 자초하는 사람을 제외한다면 아무도 복음을 멸시함으로 심판을 방
을 사람은 없는 것이다.
"심판"(judge)이라는 말은, 그 대전제가 되는 '구원한다'(save)라는 말에 비추어 분
명히 나타나는 것처럼, '정죄한다'(condemn)는 뜻으로 쓰이고 있다. 이제 이것은 순수
하고 정당한 그리스도의 직분을 가리키는 말이다. 왜냐하면 앞에서도 우리가 이미 말
한 것처럼, 믿지 않는 자들이 더 큰 심판을 받는 것은 그들의 잘못 때문이지 복음 자
체의 성격에 기인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12;48
나를 저버리고 - 경건치 아니한 자들이 뻔뻔스럽게 그리스도를 힐난할 수 있다고
자만하지 못하도록, 주님께서는 자기가 조용히 침묵을 지킬지라도 그의 가르침 자체가
그들을 심판하기에 족하다는 무서운 위협을 가하고 있다. 이것은 그들이 자랑하던 모
세 이외에 달리 심판할 자가 필요없다(요5:45)고 말씀하신 것과 같은 말씀이다. 그러
므로 이 말씀이 의미하는 바는 "내 마음은 너희를 구원하고 싶은 열망으로 불타고 있
기 때문에, 너희를 심판할 수 있는 나의 권한을 삼가고, 잃어진 자를 구원하는 데만
전적으로 마음을 쏟고 있다. 그러나 너희는 하나님의 손길에서 빠져 나갔다고 상상하
지 말라. 내가 전적으로 침묵을 지킨다 하더라도 너희가 멸시한 말씀 그 자체가 너희
의 적절한 재판관이 되기 때문이다"는 것이다.
내 말을 받지 아니하는 자를 - 이 말씀은 앞 귀절에 대한 설명이다. 위선이란 사람
의 마음 속에 내재해 있는 것이니 만큼, 그들에겐 그리스도를 영접할 준비가 되어 있
다고 자랑하는 말을 아주 쉽게 할 수가 있다. 그리고 우리는 극히 악한 자들 중에서도
이러한 자랑이 만연하고 있음을 본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복음의 순수한 가르침
을 받아 들이지 않을 때 그리스도를 배척하는 것이라는 정의를 고수하여야 할 것이다.
가톨릭 교도들은 그리스도의 이름을 큰 소리로 외친다. 그러나 그의 순결한 진리가 전
파되는 순간 이들에겐 그보다 더 증오스런 것이 없다. 이런 자들은 유다처럼 그리스도
에게 입을 맞춘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말씀 안에 그를 포함시키도록 하고 주
님 한 분만이 주장하는 그 순종의 예배를 주님께 드리도록 하자.
곧 나의 한 그 말이 마지막 날에 저를 심판하리라 - 복음에 심판의 권세를 부여하는
것보다 더 나은 찬사로 복음의 권위를 칭송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 말씀에 의하
면, 마지막 심판은 복음의 가르침을 단순히 시인하는 것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리스도께서 친히 심판대 위에 앉으실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지금 전파되고
있는 말씀으로부터 심판을 선언하실 것이라고 선언하고 계신다. 이 위협은 경건치 아
니한 자들에게 무서운 경고가 될 것이다. 그들은 지금 그들이 거만하게 멸시하고 있는
그의 교훈의 심판을 피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마지막 심판을 언급하실 때, 주님은 그들이 지금은 깨닫지 못
하고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주님께서는 그들이 지금 농담으로 받아들이는 심판이 그
때에는 공개적으로 될 것임을 상기시키고 있다. 반면에 이것은 경건한 자들에게 말할
수 없는 위로가 된다. 그들이 지금은 아무리 세상에서 판단을 받는 대상이 되어 있다
하더라도, 그들은 천국에서 무죄로 이미 선언되어 있다는 사실을 의심하지 않기 때문
이다. 복음의 신앙이 자리를 잡고 있는 곳에서는 어디서나 하나님의 심판대가 구원을
목적으로 세워져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가톨릭 교인들이나 그들의 어처구니 없는 판
단에 신경을 쓸 필요가 없는 것이다. 우리의 신앙은 천사들보다도 더 높이 올라가기
때문이다.
12;49
내가 내 자의로 말한 것이 아니요 - 인간의 외모가 하나님의 위엄을 앗아가는 일
이 없도록 그리스도께서는 종종 우리를 아버지께로 보내주신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때
때로 아버지를 언급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을 다른 인간에게 전가시키는 것이 잘
못인만큼, 심판의 권세를 부여받고 있는 말씀이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것은 틀림없는
일이다. 이제 그리스도께서는 여기서 자신의 신격을 따라서라기 보다 자신의 육신을
따라서 자신을 하나님과 구분하고 있다. 이는 그리스도의 말씀이 인간적으로 판단을
받아 그만큼 무게를 잃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그리스도의 논리는 여기서 적
용되지 않을 것이다. 주님은 말씀하신다 : "내 말은 사람으로부터 나온것이 아니기 때문에 심판할 것이다." 말씀에 의하면 "입법자는 오직 한분이기 때문이다"(약4:12). 여기에서 우리는 교황이 스스로의 발상에 의하여 인간의 영혼을 감히 구속하려고 하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신성모독인가를 또한 유추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러한 방법으로 교황은 오직 아버지께서 명령하신 것만을 말한다고 선언하신 하나님의 아들보다 더 많은 것을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12:50
그의 명령이 영생인줄 아노라 - 주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복음에 더 빨리 순복하도
록 하기 위하여 그의 교훈의 열매를 다시 찬양하고 있다. 하나님을 생명의 원천으로 영접하기를 거부하는 경건치 않은 자들이 하나님의 진노를 느껴야 하는 것은 너무 당연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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